스포츠 외교2019. 11. 6. 22:08

[대한민국스포츠외교실록-올림픽표어(Motto) Upgrade제안이야기 및 오륜기(Olympic Flag)이야기실록(31)]

 

 

 

<올림픽 표어(Olympic Motto) Upgrade제안 이야기>

 

 

 

필자는 2006 4 27~29일 대명 홍천 비발디파크에서 개최된 KOC 주최 제18기 올림픽아카데미 정규과정이 있었다.

 

 

당시 홍양자 KOC 부위원장 겸 KOC 올림픽아카데미위원회 위원장의 초청을 받아 첫날 한승수 2014 평창동계올림픽 유치위원장(강연1연사: 동계올림픽과 지역사회발전) 및 장주호 한국올림픽아카데미 회장(강연2연사: 올림피즘 교육)에 이어 강연3연사/발표자로서 참여한 바 있었다

 

 

필자는 평창동계올림픽 유치전략과 국제스포츠외교에 대하여 국제스포츠외교연구원장 겸 2014 평창동계올림픽유치위원회 국제사무총장 자격으로 강연을 하고 돌아왔다.

 

 

당시 18년째를 맞이한 KOC 올림픽아카데미 정규과정은 당시 김정길 KOC위원장이 축사내용에 소개한 대로 올림픽이 그 동안 사회, 문화, 교육, 철학 등 전 분야에 걸쳐 얼마나 인류발전에 기여해 왔는가를 강의와 토론을 통해 재조명하는 뜻 깊은 올림픽운동이론 및 현장교육 그리고 고찰시간을 갖게 하는 유익한 행사이기도 했다.

 

 

필자는 1986년 그리스, 올림피아(고대 올림픽발상지: 올림픽성화가 점화되는 곳)에서 개최된 국제올림픽아카데미(IOA) 5명으로 구성된 한국대표단장 격으로 참가하여 전 세계에서 모인 젊은 올림픽 학도들과 2주간 걸친 올림픽운동의 지혜와 국제친선토론의 현장에 직접 참여하고 체험한 바 있다.

 

 

필자는 2014 평창동계올림픽 유치 당위성과 2010 유치 당시 비화 등 알려지지 않았던 따끈따끈한 현장이야기를 비롯하여 2007 7 4일 제119 IOC 총회에서 평창의 성공적 동계올림픽 유치를 달성키 위한 「과테말라 대첩」필승 전략에 대해서도 설명하였다.

 

 

근대올림픽역사에 대하여 간략한 요약형식으로 되짚고 총괄적으로 재조명하는 유익한 시간을, 전국에서 참가 등록한 130명의 수강생(체육전공 대학생, 대학원생, 체육교사, 가맹경기단체 실무직원 등)들과, 함께 나누기도 했다.

 

 

근대올림픽을 부활시킨 주역인 쿠베르탱 남작이 주창하여 Faster or Swifter, Higher, Stronger<보다 빠르게, 보다 높게, 보다 힘차게>)에 대한 필자의 생생한 스포츠외교현장 체험이야기도 함께 나누었다.

 

 

2002년 말레이시아 콸라룸푸르 개최 ANOC(국가올림픽위원회 총연합회) 총회에 KOC 공식 회의대표 자격으로 참가하여 총회 4일째 IOC 집행위원회와의 연석회의(Joint Meeting Between IOC EB and NOCs) , 2001년도에 새로 선출된 자크 로게 IOC 위원장으로부터 발언권을 부여 받은 필자가 올림픽표어에 대하여 질문 겸 건의발언을 하였다.

 

 

필자의 건의내용은 기존 "Citius, Altius, Fortius"는 쿠베르탱 남작이 근대올림픽(1896년 제1회 아테네올림픽대회 정식종목은 육상, 사이클, 펜싱, 체조, 사격, 수영, 테니스, 역도, 레슬링 등 9개였음) 6회 대회인 1924년 파리올림픽 당시 처음 도입하여 사용되어 왔으나, 스포츠의 진화(evolution)와 올림픽정식종목의 다양화 및 다변화에 따라 올림픽표어 내용도 상응하는 조율(Fine-Tuning)이 필요한 시기가 도래한 것 같다고 전제하였다.

 

 

이에 대한 예시 설명으로서 정교함, 정확성, 생동감이 부각되어 우승자를 가리는 사격이나 양궁, 피겨스케이팅 그리고 리듬체조 등에 “Citius, Altius, Fortius”를 그대로 적용할 경우 올림픽표어가 지향하는 메시지와 부합되지 않고 있음을 우선 적시하였다

 

 

따라서 기존의 표어는 살리되, 새로운 올림픽표어의 출현이 보완적으로 필요하다고 역설하자, 당시 Jacques Rogge IOC 위원장은 필자의 새로운 올림픽표어 내용을 제시하지 않겠느냐고 자못 궁금해했다.

 

 

필자는 평소 생각해 왔던 ‘V .I. P.’론을 꺼냈다: More Vividly, Impressively, Precisely(보다 명확하게, 보다 인상 깊게, 보다 정교하게)

 

 

이 새로운 올림픽표어()를 경청하고 난 뒤 Rogge IOC 위원장은 “귀하가 이 새로운 안에 대한 지적 재산권을 요구하지 않는다면 IOC는 검토할 용의가 있노라”(Unless you claim any intellectual property rights, the IOC will consider it)고 답변한 바 있다.

 

 

 

 

 

동 회의가 모두 끝난 후 故 Mario Vazquez Rana ANOC 회장은 필자에게  Courbertin in the 21st Century(21세기 쿠베르탱)”이 탄생했다고 개인적으로 평가한 바 있다는 요지의 현장이야기를 포함한, 제한된 시간에 여러 가지 스포츠외교 현장이야기 겸 강의를 끝내고 질의응답 시간을 갖게 되었다.

 

 

수강생들의 수준 높은 질문이 서너 차례 있었고, 시간이 이미 초과한 필자의 강연을 마무리할 시점에서 수강생 자격으로 강연을 청취하던 모 대학의 저명한 교수 한 분이 끝으로 질문을 추가하였는데, 그분은 자신이 교육자로서 그릇된 지식을 학생들에게 주입하는 것은 도저히 교육적 양심상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문제라서 그 진실을 밝히겠노라고 열변을 토하셨다.

 

 

그 내용인즉 “Citius, Altius, Fortius”가 단순히 「보다 빠르게, 보다 높게, 보다 강하게」라는 경기 중 경쟁적 특성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운동을 통해서 「두뇌의 보다 빠른 회전으로 인한 지적 능력 향상, 보다 높은 이상을 갖게 되는 덕성함양, 그리고 보다 강건한 체력 달성」이므로 이는 전인교육의 표상인 「지·덕·체」의 완성지향 표어라는 요지의 항변이 있었다.

 

 

강연자로서 강단에 섰던 필자로서는 지난 24년간 수많은 각종 스포츠관련 IOC등 국제회의, 세미나를 비롯하여 10개 동·하계올림픽대회 참가 및 현장경험과 지식축적과정 등을 통해 각인하고 인식하고 체험하고 습득했던 정통 올림픽 이론을 그분이 「지·덕·체」란 교육표어에 접목시켜 기발한 발상으로 새로운(?) 학설을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바람에 정말 난감했다.

그렇다고 그 자리에서 논쟁을 벌일 상황은 아니어서, 그 학설도 일리가 있으나, IOC 위원장을 포함한 전 세계 스포츠지도자, 행정가, 교수들이 운집한 가운데 이루어졌던 필자의 V. I. P.론 관련 발언임을 고려할 때, “다소 다른 이론이지만 그 취지는 100% 이해하겠고, 또 다른 쿠베르탱이 계시는군요.”라고 하면서 역시 논어 수리 편에 나오는 「三人行必有師」라, 스승 역할 하시는 분이 반드시 계시기 마련입니다."라고 사태를 수습하고 강연을 마무리했다.

 

 

<올림픽신조(Olympic Creed) 이야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올림픽대회의 참가의의는 승리하는데 있지 않고 참가하는데 있다”라는 올림픽 신조(Olympic Creed)를 곧잘 인용하여, 대회 참가성적 결과에 관계없이 참가 그 자체를 미덕으로 삼는 예가 많았다.

그러나 최근에는 올림픽헌장내용에 올림픽 신조(Olympic Creed)조항이 삭제되어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올림픽 신조가 어떻게 도입되었었는지는 다음내용을 보면 근원과 취지를 알게 될 것이다.

Pierre de Coubertin got the idea for this phrase from a speech given by Bishop Ethelbert Talbot at a service for Olympic Champions during the 1908 London Olympic Games. The Olympic Creed reads: "The most important thing in the Olympic Games in not to win but to take part, just as the most important thing in life is not the triumph but the struggle. The essential in not to have conquered but to have fought well.

(쿠베르탱 남작은 1908년 런던올림픽대회 시 올림픽 챔피언들을 위한 미사에서 Ethelbert Talbot 주교가 사용한 어구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내용이다. 올림픽 신조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승리가 아니고 각고의 노력이듯이 올림픽대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승리하는 것이 아니고 참가하는 것이다. 필수불가결한 사항은 정복하는 것보다는 잘 싸우는 것이다.)

The creed and motto are meant to spur the athletes to embrace the Olympic Spirit and perform to the best of their abilities. (신조와 표어는 선수들이 올림픽정신을 포용해서 자신들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토록 박차를 가하는데 그 취지가 있는 것이다.)

 

 

 

올림픽모토인 “Citius, Altius, Fortius/Faster, Higher, Stronger/ 보다 빠르게, 보다 높게, 보다 강하게”와 필자가 자크 로게 IOC 위원장에게 2002년 콸라룸푸르 개최 ANOC 총회 시 새롭게 공식적으로 현 올림픽모토를 조율하는 차원에서 제안한 바 있는 “More Vividly, Impressively, Precisely(보다 생동감 있게, 인상적으로, 정확/정교하게) V. I. P.」도 가까운 장래에 올림픽운동의 또 다른 표어로 활용되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오륜기(Olympic Flag) 이야기>

 

 

평화 시 인류 최대 제전(The Greatest Festival of Mankind in Peacetime)인 올림픽을 상징하는 오륜기(Olympic Flag)는 이제 「지구촌 통합 깃발 / Unified Global Flag」이나 다름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오륜기는 존재 가치가 상종가를 치고 있다.

 

만일 IOC를 세계 주식시장에 상장시킬 수 있다면 항시 최고 우량주식으로 증권계를 평정할 수 있을 만큼 최고 부가가치를 창출해 낼 수 있는 존재(Entity)임에는 틀림없다.

흰 바탕에 청----녹색의 5개 고리가 그려진 엠블럼(Emblem/휘장)이 아로새겨진 오륜기는 근대 올림픽의 부활, 창시자(Renovator)인 쿠베르탱 남작의 작품이다.

 

1914년 디자인되어 같은 해 파리에서 개최된 올림픽 콩그레스(Olympic Congress)에서 처음 제안되어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경기장(Stadium)에 게양된 것은 1920Antwerp 올림픽 대회 때부터다.

공식 규격은 가로 3m×세로 2m이며 고리지름은 60cm이나 필요에 따라 축소 또는 확대되어 사용된다.

오륜기의 5색 고리가 무엇을 상징하는가에 대해서 많은 논란이 지속하였다.

당연히 청색은 유럽대륙(Europe), 황색은 아시아 대륙(Asia), 흑색은 아프리카 대륙(Africa0, 홍색은 미주 대륙(America), 녹색은 대양 주(Oceania)라는 해석이 지배적이었지만 IOC는 이를 인정치 아니하였다.

 

IOC가 최근 발간한 「올림픽대회에 관한 상식」책자에 의하면 5개 고리는 5대륙을 대표하고, 흰색을 포함한 6가지 색은 전 세계 국가 국기 색깔 중 1가지 이상의 색이 모두 공통으로 사용되는 이유라고 설명한다.

 

이같이 모든 국기에 가장 많이 포함된 5색은 「참여하는 올림픽」의 이상을 잘 대변해 준다고 볼 수 있다.

 

쿠베르탱 남작의 선견지명이었을까?

이 다섯 고리는 1970년 이후 전 세계 유명 기업들이 올림픽 마크를 부착하기 위해 천정부지의 후원금을 지불해가면서까지 IOC의 문을 노크할 만큼 지상 최고의 현대판 「도깨비 방망이」 노릇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Posted by 윤강로
말씀과 마음씀2019. 11. 6. 16:05

[우리들교회 2019 113일 주일말씀요약(사도행전4:32~ 37/성령의 은혜)]

 

 

 

 

 

<사도행전 4:32~37>

 

32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33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34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35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36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 (Joseph, a Levite from Cyprus, whom the apostles called Barnabas (which means Son of Encouragement)

37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Prologue>

 

성령의 기도는 성령의 은혜를 맛보게 하신다.

은혜는 자격이 없는 자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다.

성령의 설교를 듣고 여러 단계를 거쳐 이제 마지막 단계가 은혜라고 한다.

기독교인은 늘 은혜 받았다고 한다.

그렇게 은혜가 늘 가장 흔히 쓰이는 단어인데 이렇게 가장 결론이고 가장 쉬운 것이고 또 가장 어려운 것이 은혜라는 것이다.

 

<말씀 요약>

 

오늘은 특별히 성령의 은혜, 은혜의 공동체에 대해 나눠보겠다

 

1.   재물의 가치관이 바뀐다.

 

32

우리가 가장 마지막에 돈이 있다고 한다

어떻게 재물을 내려놓을 수 있을까?

돈은 치사스러운 것이고 사람의 인심도 광에서 난다고 한다

큐티엠 때부터 우리들교회까지 힘든 사람이 많이 모여서 서로 자기 죄를 보면서 묵상 하다 보니까 그래도 재물 때문에 치사스러웠던 적은 비교적 없었던 것 같다.  

우리가 딱히 믿음이 좋아서 그랬던 것이 아니라 부자가 별로 없어서 그랬던 것 같다

서로 통용한다 하며 같은 교회 다녀도 타워 팰리스에 사는 이가 있고 또 달동네에 사는 사람이 있으면 통용하기(to share everything)가 참 어렵다.

도곡동쓰레기와 달동네는 쓰레기는 차원이 다르다고 한다

도곡동 쓰레기는 우리 집에서 다 갖다 써도 될 것들이라고 한다

그래서 거기 쓰레기는 서로 앞 다투어 가져오려고 한다

통용의 의미가 무엇일까?

통용은 점검을 거쳐야 하는데, 이런 구절 보고 통용이라고 무조건 내놓으라는 것이 아니다.

초대교회처럼 핍박이 오고 성령이 충만할 때에는 재물에 대한 소유권을 하나님께 드리기가 쉬운 것이다

다 가난하니까 훨씬 더 쉬웠다

또 그 때에 진짜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이 실제로 오셔서 죽으셨기에 인류 최대의 위기였기 때문에 또 인류 최고의 아름다운 공동체를 허락하셨다

우리가 여명이 밝아 오면 새벽이 오는 것이다

그러면 어찌하면 재물에 대한 가치관이 바뀔까?

돈은 똥이라고 누가 그러던데, 지난 주에 동류가 되어 성령의 기도를 할 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기도를 했다.

위협에서도 피하게 해 달라는 기도가 아니고 담대히 복음을 전하게 해 달라는 기도를 했다

동류가 기도를 하니 성령이 충만해서 오늘 첫 구절인 믿는 무리가 되었다

이 믿는 무리가 참 중요하다

믿는 무리의 특징이 한 마음 한 뜻(one in heart and mind)이 되었다고 한다.

광화문과 서초동 집회가 있는데 그곳에서도 다들 한 마음 한 뜻으로 모이기를 힘쓰고 있다.

예수님 당시도 이스라엘 사람들이 한마음이 되어 바라바를 버리고 예수를 죽이라고 했다.

누가 맞을까?

그러니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분별이다

가장 어렵고도 욕심을 버리면 쉬운 것이 분별이다

제자들이 예수님 당시에는 삼 년을 따라다녀도 분별을 못하였다

성령이 임하니까 갑자기 구약을 줄줄 꿰면서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설교를 하니까 천하에 구원 얻을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사도들이 설교를 하고 그 말을 듣는 백성 중에서도 구원을 얻는 자가 많아지게 된 것이다

완전히 새 사람이 되었다

목사님도 4대째 모태신앙이지만 구원을 받으니까 새사람이 되어서 설교를 하고 있는 것이다

믿는 무리는 구원 얻은 무리이고 한 마음 한 뜻이 되는 무리이고 바로 31절처럼 성령 충만한 무리가 믿는 무리인 것이다

이렇게 한 마음 한 뜻이 되는 것은 눈만 찡끗해도 서로 딱 통하는 것으로 익하면 칙하는것이다

 

(적용)

-여러분의 재물의 가치관은 돈이면 다 인가? 돈이 똥인가? 가치중립인가?

 

그러나 실제 초대교회에서 조차도 이런 믿음의 공동체가 계속 지속되지는 않았다. 왜 그럴까?

 

2.   큰 권능의 부활의 증언이 계속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도 행전 2장에 성령의 설교 이후에, 42절에서 47절까지 모든 물건을 통용했다고 하고, 또 오늘 본문에서는 성령의 기도 후에 통용했다고 한다.

즉 통용하려면 설교와 기도가 중요하다.

33

큰 은혜로 증언하니 큰 권능을 받았다

재물의 가치관이 바뀌려면 큰 권능으로 부활을 증언해야 하는데 지도자는 느헤미야 12 44절처럼 재물을 나누게 하려면 지도자, 대 제사장은 삶이 따르고 회개하며 즐겁게 해 주는 지도자가 십일조를 하게 한다고 했디

지도자한테 절대적인 책임이 있는 것이다

신약의 베드로도 회개하고 통곡하였다

회개해서 큰 권능의 새사람이 되었다

이런 사람의 큰 권능으로 예수의 부활을 증언을 해야 큰 은혜를 받아 재물을 나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33절을 빼고 보면 32절에서 37절까지는 구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32절에 들어가야 할 통용이란 구절이 왜 33절에 나오냐 하면, 통용하고 나누다가도 말씀을 들어야 또 나눌 수 있기 때문에 중간에 들어간 것이다.

그래서 33절이 참 중요한 것이다

물질을 나누다가도 큰 권능의 설교와 증언을 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의 의로 구제하고 안심하게 된다

나의 의로 구제하면 다른 종교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설교로 큐티로 공동체에서 끊임 없이 내가 죽인 예수가 부활하셨다고 듣고 나눠야 한다 

큰 권능으로 증언해야 큰 은혜를 받는다.

이런 부활의 설교가 선포될 때 은혜공동체가 되어 재물의 가치관이 바뀐다

베드로의 설교는 2 36절에 보면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라고 결론을 내렸더니 다를 찔려서 어찌할꼬?’ 했다 

쇠로 만든 말발굽이 내 가슴을 찔렀던 것이다

찔려서 어찌할꼬?’ 하는 설교가 어떻게 감동의 설교겠는가?

성령의 설교는 회개케 하는 설교이고 은혜의 설교다

그것이 큰 은혜다.

감동수준이 아니다.

나 같은 죄인을 살려주시고 용서해 주시고 값을 치르시어 속량해 주시고 나를 자녀 삼아 주신 은혜와 자격 없는 나를 구원해주신 게 너무 기적이고 감사함으로 큰 은혜다.

죄인을 사해준 정도가 아니라 어떻게 나를 자녀로까지 삼아주시냔 말이다.

내 것이 하나님 것인데 내 것 조금 드리는 것이 죄송할 따름이다

주님의 것이 내 것이란 엄청난 사실인데 하나님 것을 내 맘대로 쓸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재물이 자기 것이라고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며 그것이 즉 신앙고백이 다

내 것이 하나님 것이며 하나님 것이 내 것이니 이 같은 마음으로 믿는 무리는 이 같은 신앙고백으로 한 마음이 될 수 밖에 없다.

은혜는 구제가 아니다.

헌금도 시주하는 것처럼 자기 의로 옳음으로 남는 돈으로 생각하면 공동체에서도 한 마음 되기가 어렵다.

십일조헌금을 안 하면 목장공동체에서 인본적 얘기만 할 수 밖에 없다.

같은 마음으로 십자가 지는 적용이고 그것은 큰 은혜로만 가능하다.

받은 은혜는 측량할 수 없는 은혜이기에, 차별 없이 대할 수 있다.

한편, 부자는 바늘 귀로 낙타가 들어가는 수준이기에 성경에 그 이름이 없다.

성령의 은혜가 임해야 한다.

세상은 이런 부분을 전혀 모른다.

주일 마다 이 성령의 큰 권능을 선포해야 한다.

증언하는 일로 베드로는 갚고 있었다.

사도행전 저자인 누가는 복음전파는 고마운 일이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지혜 있는 자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복음에 빚진 자 라고 했다.

복음전파에 빚진 자는 예수님의 사망과 부활, 죽음과 사망으로부터의 구원을 믿기 때문이다.

즉 사랑의 빚을 진 사람이기 때문에 큰 권능으로 부활을 증거하게 한다.

이렇게 큰 은혜를 받아야 나눔이 되는 것이다.

내가 십자가에 예수를 못 박았다라는 고백 없이는 재물의 나눔은 시주와 똑같다.

예수님이 죽으신 큰 은혜를 받아야 재물 나눔이 이루어진다가 핵심이다

 

(적용)

-나 같은 죄인 살려주심이 감사해서, 큰 권능의 간증을 날마다 합나? 한 번 하고 마나? 아직도 못하나?

 

3.   가난한 사람이 없게 하신다.

 

34-35

교회도 가난한 사람이 너무 많은데. 하나님은 어떻게 자신하실까?

가난을 저주로 여기고 계속 동정만하고 구제만 하면, 동정 하는 자, 받는 자 그 곳은 은혜공동체가 아니라 사회 단체와 같은 구제 공동체가 된다.

그것은 오래가지 못하게 되며 우린 영혼구원이 우선이다.

33

말씀을 또 들으니 땅을 파는 적용을 하게 된다.

말씀은 너무 중요한 것이다

죄인임의 고백이 점점 깊어지니 땅을 파는 적용을 한다.

오늘 본문 신명기 15:4~5를 보면,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지켜 행하면 복 받으리라,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와 같이 약속의 성취를 말씀하신다

은혜 공동체 안에서 왜 가난한 사람이 없겠나?

왜 아픈 자, 병든 자가 없겠나?

근데 없다고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

구속사로 해석해 봤을 때, 하나님은 가난으로 훈련 받기 원하시는 원대한 뜻을 깨닫게 되도록 하신다

그 가난을 축복으로 여기는, 훈련의 통로로 여기는 시각이 있어야 한다.

가난을 훈련의 통로로 여길 때, 가난한 자를 나보다 낫게 여길 때, 은혜 공동체에서 믿는 무리가 되어 한 마음 한 뜻이 된다.

부유한데 기도가 나오는 사람은 없지만 가난한 사람은 저절로 기도가 나온다.

가난한, 힘든 사람이기도 하지만 그 사람을 존경해야 한다.

가난하기에 저절로 눈물로 기도가 나오는데 그래서 그 교회를 지켜주시는 것이다

말씀의 시각에서 나오는 오늘 시사점은, 그 명령을 지키기만 하면 반드시 복 받는다고 약속하신다.

그 한 사람 때문에 교회를 지키신다.

복된 공동체가 되는 게 눈물 흘리는 공동체다.

가난한 사람은 동정의 대상이 아니다.

성령을 받지 못하면 가난한 사람이 무시가 된다

초대교회는 모두 성령의 은혜를 받은 특별한 공동체였고 가시적으로 보여야 하나님 나라도 증명되었기에 이처럼 하나님나라를 가시적으로 보여주신다

현재의 고난은 잠깐이고 장차 나타날 영광은 족히 비교할 수가 없는 것이다

구제받으면 열등감이 드러나고, 동정하는 사람은 무시한다.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는 것으로 통용은 구제차원이 아니다.

진정한 교제는 위로부터의 선물을 은혜로 받을 줄 아는 것이다.

하나님 명령과 규례와 말씀을 지키면 가난한 자가 없게 된다

가난해도 큐티 열심히 하고 목장 지키고, 듣고 가르쳐 지켜 행하는 것은 신명기에서처럼 가난하지만 가난한 자가 없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자존 감을 주시니, 도곡과 달동네 차이가 비교적 없었나 싶다.

크나큰 하나님의 은혜다.

있는 자 없는 자 모여도 믿음만 있으면 대접받는 원칙이 있었기에 여기까지 왔다.

가난하지만 가난하지 않고 병자지만 아프지 않게 하신다

우리들교회에서 십자가뿐만 아니라 부활의 증거가 계속 일어나길 바란다.

와서 다들 하나님의 시간 생각 방법에 순종하여 승리했다는 간증이 계속되었지만 마르지 않기를 기도한다.

가난하나 가난하지 않고 빚을 갚는 초대교회시절처럼 되기를 바란다

 

#사례간증;

 

일만 달란트 빚진 것처럼 인간적으로 평생 못 갚을 빚이 있었다.

법적으로 3억은 해결되었지만, 5억은 해결이 안 되는 상태였다. S대출신 남편, 중등교사였던 집사님. 그런데 남편은 첩만 여럿이었던 것. 남편이 망하고 간통으로 고소했으나 졌고, 헤어진 후 8억 빚이 넘어온 것. 배신감에 원통해서 괴로웠을 때 목사님을 만났다. 자살을 계속 하려고 했는데, 재수생 큐티모임에 오게 해서, 돌봤다. 초기 우리들교회 초기에는 이런 것을 다 봐줬다. 1-2년 넘게 빚이 계속 안 없어졌고 계속 왔다. 전도해서 다들 왔다. 그 빚이 안 없어지니 계속 왔다. 이 고마운 빚으로 우리들교회에 오게 되었다. 바로 해결되는 게 좋은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소송으로 1억은 건질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빚은커녕 밑바닥을 제대로 쳤다. 그때 중보기도 첫 사역으로 무지 기도했다. 변호사님은 패소할게 뻔하니, 채권자를 만나 탕감해달라는 방법 밖에 없다고. 그날 기적적으로 만나졌다. 얘기를 했다. 월급이 차압 되었고, 7천만원 밖에 없다고. 이걸로 탕감해주면 안되겠냐고 호소했다. 그랬는데, 그 이야기를 100번 천 번 해도 모임이 성사가 안되었는데, 이 채권자가 기적적으로 다 모여 탕감서류에 도장을 찍어줬다. 우리가 모두 동류/동료가 되어 아침저녁으로 기도했다. 우리들교회가 진짜냐 가짜냐 하는 단두대에 올라간 것처럼. 이 변호사께서 적법한지를 또 세시 반에 와서 검토해주고 제출에 성공했고 탕감됐다. 월급이 차압 되고 쥐꼬리로 살았으나 그때부턴 절대로 빚지지 않았다. 적용이 너무 중요하다. 하나님은 진정 성을 보시며 역사하신다.빚이 있을 때, 어떤 적용을 해야 하는 지 정말 알아야 한다. 우리 교회는 돈으로 돕지 않았고 말씀으로 도왔다. 목장에서 진정 성 있게 하니까 3억 탕감했었고, 이제 5억은 말씀으로, 동료로, 역사로 하니, 당장은 아니었으나 말씀을 지켜 행하니 복된 공동체가 되어 가난하지 않게 되었다. 신앙고백이 되니, 하나님께서 값을 치르시고 아무도 생색낼 수 없게 해주셨다. 지나고 보면 여선생님은 얼마나 의가 많고, 또 불신결혼이기에 인본주의가 얼마나 강한지 모른다. 돌이켜보면 너무 필요한 알맞은 고난으로 다루어주셨다. 편한 사람보다 비판이 강하고 센 사람이 선교사가 되었다. 하나님은 어떻게 저런 사람이 목사가 되었지? 하는 게 하나님 역사다. 성격이 못 되도 믿음이 있어야 살 수 있다. 진정한 복음이 증거 될 때 큰 권능이 따르듯, 그 선생님이 집 돈 있었으면 만족했겠나? 어떤 것도 도울 방법이 못 됐고, 복음을 주었기에 살아났고 복음이기에 시간이 걸렸다. 갚을 길 없는 은혜가 임해 부활을 증언할 수 있게 되었고. 다른 사람들이 이제 이 간증을 듣는 것이다.

너와 나는 죄인이라는 신앙고백이 말씀 공동체가 있었기에 1만 달란트 빚을 탕감 받는 것이다

하나님은 알맞은 고난으로 훈련시키신다

성격보다 믿음으로 고정관념에서 탈피하기를 바란다

복음을 주어서 감사한 것이다

갚은 길 없는 은혜를 증언해야 한다

 

(적용)

-가난하지만 가난하지 않은 간증이 있나?

-가난을 훈련을 주셔서 감사하는 간증이 있나?

 

그렇게 힘들게 왔는데, 큰 은혜를 받았는데 또 들로 산으로, 다른 여자를 쫓고 여자를 만나고 도피처를 찾지 말자.

 

4.   성령의 은혜는 자기를 나타내지 않는다.

 

36-37

교제는 서로 통용하는 것을 말한다.

*Coinonia가진 것을 아낌 없이 나눠주며 죽을 때까지 함께하는 관계를 뜻하는 헬라어(그리스어)로 결코 떨어질 수 없는 돈독한 사이를 의미한다

Coinonia와 같은 말로 하나님은 바나바(Barnabas=Son of Encouragement)를 기억하시고 높이셨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 레위족이라는 언급이 있다.

예수님을 죽인 대제사장 사두개인들은 레위족이다.

그들이 예수를 죽인 것을 생각할 때 바나바같은 레위인(a Levite)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부러 언급하지 않았을까?

또 이 레위인들 중에는 땅 가진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원칙적으로 레위족은 사유 땅이 없어야 하는데, 포로기에는 율법이 사문화되어 잘 지켜지지 않아 법적 제약을 받지 않아 많이 물러진 관행에 사유지를 가진 것 같다.

바나바가 원래부터 믿음이 출중하다기 보다 이런 저런 이유로 그 땅을 내 것이라고 끼고 있다가 성령의 설교를 듣고 특권을 내려 놓고 성령의 은혜를 받은 것인데 그것만으로 택자라고 생각한다.

그는 레위로서 밭을 가지는 것이 맘에 걸렸다.

때가 차서, 필요할 때 많은 사람이 모여 이때라~’ 할 때에 십자가=지혜=타이밍에 아낌없이 주련다하고 적용했다.

땅을 던진 것인데 그것을 팔아서 그 돈을 '사도들 발 앞에 두니라'(Joseph, a Levite from Cyprus, whom the apostles called Barnabas(which means Son of Encouragement, sold a field he owned and brought the money and put it at the apostles feet)인데 주저함 없는 신앙의 실천이었다.

그 값을 가지고, 땅 판 돈에서 일원도 안 갖고,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 눈 앞이 아니라 발 앞에 두었다고 한다.

그것으로, 19,000명 걸인을 부양했다고 한다.

그 당시 자발적 헌금자가 엄청 많았다.

환란 당하고 빚지고 원통한자가 모였을 때, 우리 모두가 자발적으로 한다.

그래서 항상 하나님은 부족하게 하지 않으셨다.

초대교회는 자기이름을 내 걸지 않고 믿고 발 아래에 두었다

위로자라는 별명을 바나바가 얻게 되는 영광을 얻게 되었다

사도행전(Acts/11:21에 바나바는 착하고 성령 충만하다라고 한다.

바나바는 이렇게 착한 사람으로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데, 바울을 소개하고 모두가바울을 살인자라고 배격했는데 그 때 바울을 소개한 사람이 바나바다

자기가 훨씬 레위족으로서 출중한데 그는 사람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었고 자신은 빠지는 이런 자세를 보니 위로자가 맞다

그래서 사도들이 위로자라고 별명을 붙여 주었다.

사도들의 위로 자이니 대단한 사람이다

그는 (1)착하고 성령이 충만한 자 (2)위로자 (3) 나눠주는 자 (4) 권고하는 자이다

천국가면 다윗보다 훌륭한 여겨지는 요나단이 있다

여호수아보다 훌륭한 갈렙이 있다

그런데 바울보다 훌륭하다고 여기지는 바나바가 있다

자신을 나타내지 않기가 참 어려운데 시도들이 전해주는 복음을 신뢰하고 사도들을 신뢰하여 그 밭 판 값을 발 앞에 두었다

사도들의 눈 앞에 두지 않고 발 앞에 두었다. 즉 하나님 앞에 두었다.

32절에 성도들도 발 아래 뒀다.

바나바도 발 아래 두었다고 하는 것처럼 초대교회는 자기이름을 내 주지 않아도 모두 사도들을 믿고 사도들의 눈도 안 마주치고 발 아래 가져다 두었다

35

필요를 따라라는 것은 그들의 필요를 따라 필요한 만큼만 공급했다는 뜻과 같다.

헌금이 많다고 차등이 있는 게 아니라, 정확하게 어김 없이 그러나 필요한 만큼 반복적으로 구제가 이루어졌다라는 것이다

누구는 한꺼번에 헌금 딱하고 산으로 들어가면 믿음이 좋아 보이지만 이것을 때마다 나누기는 너무 어려운데 그게 가능한 것은 사도들이 잘 했다라는 것이다

맨 처음 예수를 믿으면 이것을 내 맘대로 나눠주다가 상처를 주고 받게 된다

나눠주는 것도 얼마나 성숙해야 하는 지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를 통해서 나눠주는 것이다

우리들교회 목자들이 말씀으로 훈련을 받아서 분별로 도울 자, 또 어떻게 도와주어야 할 지와 타이밍을 분별한다.

왼손이 하는 것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는 것인데 내가 직접 돕고 도움 받으면 100% 문제가 생긴다.

인간이 신앙고백이 없으면 생색을 내려고 한다

받는 자도 믿음이 없으면 받았다가 다 시험 들어 떠난다.

그래서 내 맘대로 돕는 것 경계해야 한다.

바나바가 바울의 (1)동역자, (2)나눠주는 자, (30위로하는 자, (4)권고하는 자와 같이 없는 것이 없을 정도로 초대교회에서 솔선 수범을 하였다

바나바는 솔선수범 그 자체다.

출 애굽 시에도 광야에서 가난했지만, 성막을 지을 때 자원하여 가져온 헌물이 넘쳤다고 했다.

다윗은 너무 비축하여 솔로몬에게 넘겨줬는데도 그때는 넘쳤다는 표현이 없다.

우리가 잘 살고 못살고는 돈이 있고 없는데 달린 것이 아니다

성령 충만 할 때 모든 것이 넘치는 인생이 된다

서로 가난한 사람이 없고 우리의 고난을 통용하고 내 놓을 때 이것이 억만 금을 내 놓는 것보다 위로와 안식과 치유가 된다.

다른 사람 고난을 날마다 오픈할 때 우리가 날마다 성경을 보니까 오픈을 다 소화해 내는 것이다.

그러면서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니까 저절로 아까운 것이 없어지는 것이 바로 초대교회의 역사다.

이렇게 되기까지 있으면 먹고 없으면 굶고 굶어서 천국 가자라는 모토로 살다가여기까지 왔다.

이렇게 나눠주려면 빚을 안 지려고 죽음에 이르는 각오를 해야 한다

내가 빚 안지는 것이 남을 도와주는 비결이다

그래서 나부터 잘 살아야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 구절을 문자적으로 이용해서 사도들에게 한 것처럼 땅 팔아 내 발 앞에 가져오라고 하면 그게 공산주의이고 이단이다.

문제는 항상 40-50평에 살아도 나눔을 생각하는 이가 있고, 바라는 것만 30평 바라는 사람이 있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회를 하는 것이다

부자는 상대적이다.

부자는 자기만 바라고 내 것만 바란다

집을 물질로만 보는 가치관이 유물론이다

고난 중에 있을 때 1평 반에서 해도 처음엔 너무 좋았는데, 다들 뭐 먹고 사나 얼마가 있어야 하나 하는 분들이 자꾸 많다. 어떤 이는 너무 좋아 집을 오픈을 못하고 어떤 이는 너무 초라해서 오픈을 못하고. 초대교회처럼 왕성하게 사람을 살려야 하는데, 아직도 세상가치관에 젖어서 어렵다. 내 것이 하나님소유이기에 함부로, 어떤 것 하나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집에서 큐티모임을 했었는데, 부자도 가난한자도 드나드니 냉장고를 사려해도 누군가 실족할까 봐 내 돈으로 뭘 어떻게 할지 몰랐다. 병원 하면서 가난한 산모를 참 많이 봤다. 입원비가 없어 아이를 낳자마자 퇴원하겠다 한다. 입원비 없어 그 귀한 아들을 두고 퇴원한다고 한다,그 사태를 8년쯤 보고는 극히 가난한 자들이 드나드는 곳은 계속 회전이 되었고, 목회에 그 경험이 많이 돌아봤다. 하나님의 소유라서 결정하기가 어렵다. 아낌 없이 모임을 통해 수많은 사람이 오고 살아났는데, 30년간 그랬다. 무엇을 살 수도 없고 안 살수도 없다. 아낌없이 집이 쓰임 받았다. 큐티를 시작하고 나서는 나같은 죄인 살리신 것 때문에 믿음의 분량만큼 생각해왔다. 교회 개척 이후에도 똑같이 적용하게 하신다.

 

다들 집을 열어 나누는 연습을 목장을 통해 하는 것이 너무 감사하다.

다들 목장에서 자손대대로 가난한 자가 없도록 합시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님을 생각한다

 

(적용)

-헌금을 알아주기 원해서 하나? 신앙고백으로 하나?

 

<Epilogue>

 

성령이 임하니까 갑자기 구약을 줄줄 꿰면서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설교를 하니까 천하에 구원 얻을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사도들이 설교를 하고 그 말을 듣는 백성 중에서도 구원을 얻는 자가 많아지게 된 것이다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바뀌었다.

큰 권능으로 부활을 증언해야 한다

설교와 큐티와 말씀으로 듣고 나눠야 차이점이 생긴다

너와 나는 죄인이라는 신앙고백이 말씀 공동체가 있었기에 1만 달란트 빚을 탕감 받는 것이다

인간이 신앙고백이 없다면 헌금을 하면서 생색이 올라오는 것이다

바나바가 바울의 (1)동역자, (2)나눠주는 자, (30위로하는 자, (4)권고하는 자와 같이 없는 것이 없을 정도로 초대교회에서 솔선 수범을 하였다

은혜는 자격 없는 자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다

예수님이 죽으신 큰 은혜를 받아야 재물 나눔이 이루어진다가 핵심이다

 

 

 

Posted by 윤강로
스포츠 정보2019. 11. 6. 08:15

[2024년 동계청소년올림픽 평창대신 강원도(Gangwon) 유치신청 및 유치전망 스케치]

 

 

평창2018 동계올림픽에 이어 2024년 제4회 동계청소년올림픽(Winter Youth Olympic Games이 평창이란 이름대신 강원(Gangwon)이란 명칭으로 유치신청 대상 리스트에 등재되었습니다.

 

강원도는 1999년 제4회 동계아시안게임을 성공적으로 개최한 바 있습니다.

 

 

2010년 제1회 하계청소년올림픽(Youth Olympic Games)대회가 싱가포르에서 열린 이래 2012년에는 오스트리아 Innsbruck(1964년 및 1976년 동계올림픽개최도시)에서 제1회 동계청소년올림픽대회가 열렸습니다.

 

2016년 제2회 동계청소년올림픽은 1994년 동계올림픽개최도시인 노르웨이의 Lillehammer에서 개최된 바 있습니다.

 

이어서 2020년 제3회 동계청소년올림픽은 IOC본부 소재지이며 올림픽수도인 스위스 Lausanne에서 열릴 예정입니다.

 

2024년 제4회 동계청소년올림픽은 5개국 5개 도시가 유치신청 후보도시로 알려져 있습니다.

 

유치신청 및 후보도시는 모두 5개도시로써 알파벳 순서로 루마니아의 (1)Brasov, 스페인의 (2)Granada, 러시아의 (3)Sochi/2014년 동계올림픽개최도시, 불가리아의 (4)Sofia, 및 대한민국의 (5)강원(Gangwon) 등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2024년 동계청소년올림픽개최지 결정은 2020년 제3회 동계청소년올림픽개최도시인 스위스 Lausanne에서 1월에 예정된 제 135 IOC총회에서 선출될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비공식 정보에 따르면 직전 동계올림픽개최지인 평창2018이 위치한 강원도가 타 후보도시에 비해 유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Summer Youth Olympics bids

Games

Year

Candidate cities

Non-candidate
applicant cities
[note 1]

IOC Session

Host city

Others

I

2010
details

Singapore

 Moscow

Athens
Bangkok
Debrecen
Guatemala City
Kuala Lumpur
Poznań
Turin

postal vote
(2008-02-21)

II

2014
details

 Nanjing

 Poznań
 Guadalajara

 Jakarta

122nd
Vancouver
(2010-02-10)

III

2018
details

 Buenos Aires

 Glasgow
 Medellín

Guadalajara
Poznań
Rotterdam
Monterrey]

Extraordinary IOC Session
Lausanne
(2013-07-04)

IV

2022
details

 Dakar

 Abuja
 Gaborone
 Tunis

133rd
Buenos Aires
(2018-10-08)

 

Winter Youth Olympics bids

Games

Year

Candidate cities

Non-candidate
applicant cities
[note 1]

IOC Session

Host city

Others

I

2012
details

 Innsbruck

 Kuopio

 Harbin
 Lillehammer

postal vote
(2008-12-12)

II

2016
details

 Lillehammer

postal vote
(2011-12-07)

III

2020
details

 Lausanne

 Brasov

128th
Kuala Lumpur
(2015-07-31)

IV

2024

Brasov

Granada
Sochi
Sofia
Gangwon

135th
Lausanne
(2020-01)

(자료출처: Wikipedia)

Posted by 윤강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