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외교2019. 11. 19. 11:26

[대한민국스포츠외교실록-(4-5-6)스포츠외교관외길인생38년 실록(42)]

 

 

(4) 아시아의 철인 삼국지와 인도대첩실록

 

 

Sydney2000올림픽 대회 때부터 우리의 국기인 태권도와 함께 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어 올림픽 메달 종목이 된 철인 3종 경기, 영어로는 트라이애슬론(Triathlon)이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철인 3종 경기는 올림픽 종목이 아니고 트라이애슬론이 올림픽 정식종목이다.

 

 

 

그러나 트라이애슬론이라고 말하면 일반대중(General Public)은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철인경기(Iron man Competition)라고 편의상 혼용해서 말하기도하지만, 사실상 철인 3종 경기 코스가 트라이애슬론의 그것보다 길고 더 힘이 든다.

 

 

오죽하면 철인(Iron man)이라고 부를까?

 

 

올림픽 트라이애슬론은 1.5km 수영 후 바꿈 터에 세워져 있는 각자의 자전거로 사이클 40km를 돌고 나서 마지막 코스인 20km 달리기를 연이어 한 후 소요 시간을 종합 집계하여 순위를 매긴다.

 

 

철인 3종은 수영 3.8km(2회 왕복), 사이클 180.2km 및 마라톤 42.2km를 달리도록 되어 있다.

 

 

필자는 2003 8월의 어느 날 당시 유경선 대한 트라이애슬론 연맹 회장이 필자를 만나고 싶어한다는 전갈을 유문규 대한연맹 전무이사(이후 부회장)로부터 받고 종로구청 근처 옛날 수송초등학교 자리에 위치한 유진그룹 회장 사무실에서 유 회장을 만났다.

 

 

 

유 회장과는 대한체육회 국제담당 사무차장 재직 시부터 가끔 공식행사 등지에서 만났었기 때

문에 피차 안면이 있는 사이였고, 특히 당시 Les Mcdonald 국제 트라이애슬론(Internation Triathlon Union: ITU) 회장 방한 시, 대한연맹 부회장들과의 만찬에 동석하기도 했었고, 또 필자와 돈독한 관계인 Chiharu Igaya 일본 IOC 부위원장 겸 일본 트라이애슬론 연맹 회장이 한일 친선 철인 3종 경기 대회 참석차 제주도에 왔을 때에도 함께 자리를 한 적이 있기 때문에 비교적 편안한 분위기에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유 회장은 필자에게 자신이 2개월 후인 2003 1031일 인도 체나이(Chennai)에서 개최되는 아시아 트라이애슬론 연맹(Asian Triathlon Confederation: ASTC) 총회에서 선출하는 ASTC 회장 출마를 갑자기 하게 생겼는데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당초 ITU 부회장을 맡고 있는 Igaya 일본연맹 겸 IOC 위원이 ASTC 회장으로 출마키로 되어 있었고 유 회장은 ASTC 부회장 후보로서 Igaya회장 후보의 러닝메이트(running-mate)격이었는데 경쟁자인 Ramachandra 인도 트라이애슬론 연맹 회장 겸 ASTC 부회장이 기존 세력을 규합하고는 Igaya 일본 회장에게 전화를 걸어 14표 중 10표 이상을 이미 확보했으니 포기하라는 엄포를 놓자 Igaya 회장은 IOC 위원으로서 국제 스포츠 계 및 아시아 스포츠 계의 투표 성향과 생리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터이고 경쟁 후보가 10년 넘게 ASTC 부회장 직을 맡고 있으며, 투표 장소가 Ramachandran의 근거지인 인도라는 정황을 분석해 보니, 실제로 이기기도 힘들겠지만 지게 되면 IOC 위원 겸, ITU 부회장, 또 일본 연맹 회장으로서의 체면이 완전히 구겨지게 되어 ASTC 회장 입후보 자체가 그야말로 큰 부담이 되고 말았다.

 

 

 

 

(Cortina d’Ampezzo1956동계올림픽 비 유럽 최초의 스키 은메달리스트 겸 일본 IOC집행위원을 역임하고 평창2014동계올림픽유치 당시 IOC평가위원장으로 평창을 실사 방문한 Chiharu Igaya < IOC명예위원>과 당시 유치위원회 국제사무총장인 필자와 함께 평창에서)

 

 

 

 

 

그래서 그냥 후보를 철회하자니 상대방이 무혈 입성케 하는 결과가 나올 것이 명약관화하다는 결론을 내린 Igaya 후보는 패기 있고 열정적인 유경선 한국 트라이애슬론 회장에게 연락하여 자초지종을 설명한 후, 시간이 촉박하여 상대방을 이겨내는 것은 다소 무리가 따르겠지만, Igaya 회장과 일본 연맹이 적극 지원사격을 해줄 테니, 자기 대신 ASTC 회장에 출마하여 달라는 부탁을 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었다.

 

 

 

유 회장도 그 시점에서 선거운동을 해서 이긴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겠지만 상대방 후보 국인 인도가 트라이애슬론의 잠재력이 전무한 상황이고 감투 욕심 때문에 출마한 Ramachandran ASTC 회장이 될 경우 아시아 트라이애슬론의 발전은 물 건너가는 격이 될 것이란 판단 하에 질 때 지더라도 아시아 트라이애슬론의 미래를 위하여 또 차기 회장 포석을 놓기 위해서라도 경쟁 구도에 뛰어들겠다는 시간 상 무모하지만 당찬 출사표를 던지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돌아가는 상황을 다 듣고 난 필자는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지금까지 김운용 회장을 보필하면서 각종 국제 스포츠 기구 임원선거, 국제 대회 및 국제회의 유치 투표 전을 수없이 많이 치러 산전수전 다 겪은 경험과 노하우(know-how), 특히 기존 국제 스포츠 계 인맥을 잘 활용한다면 전 회원국이 14개국밖에 안 되는 ASTC 회장 투표 전에서 이길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과 오기가 발동되었다.

 

 

 

우선 유경선 회장에게 아시아 트라이애슬론 발전을 위한 출마 공약 사항을 구체적이고 실현 및 적용 가능하고 가슴에 와 닿는 내용으로 작성하여 14개 회원국 중 12개국에 우편 발송과 동시에 10개국 정도는 여행가방 챙겨서 일일이 찾아 다니는 방문 캠페인을 벌일 것을 제의하고, 2개월 정도밖에 안 남았지만 12개국 정도만 설득하면 충분한 승산이 있겠다고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아시아 각국 방문캠페인에 앞서 대한 트라이애슬론 연맹 부회장들과 여러 차례 대책회의를 하고, 국가별 방문 업무분장도 하였다.

 

 

당시 주경혜 부회장, 삼성출판사 사장인 김진용 부회장, 영원한 트라이애슬론 선수인 이석우 부회장, 최윤석 부회장, 오창희 부회장, 유문규 전무이사 등이 주축이 되었다.

 

 

필자도 목적 수행을 위해 국제 부회장이 되었다.

 

 

 

주경혜(Julia) 부회장은 여성 사업가로서 수완이 좋고 대인관계의 폭도 넓고 해서 베트남 등지의 원격 인맥 연결이 가능하여 많은 도움을 주었다.

 

 

 

최윤석(Dmitri) 부회장은 미국계 유명 금융회사 중역을 역임한 영어에 능통한 국제통으로서 사교에도 뛰어난 실력가이고, 세방여행사 사장이며 작고하신 김운용 회장의 사위이기도 한 오창희(Henry) 부회장도 영어가 뛰어나고 매너가 좋아서 선거 해외 캠페인에서 많은 활약을 하였다.

 

 

 

유문규 전무이사는 오지인 네팔까지 다녀오고 평소의 트라이애슬론 인맥을 활용하여 많은 기여를 하였다.

 

 

필자는 아시아 각국 NOC와 아시아 지역 IOC 위원들을 교두보로 활용하여 경쟁 후보인 Ramachandran의 기존 지지세력을 허물어뜨려가면서 우리 편으로 전환시키는 전략을 수립하고 실행에 옮겼다.

 

 

분기점이 된 곳은 싱가포르였다.

 

 

싱가포르 연맹 회장 및 사무총장에게 유경선 회장 후보의 선거 공약 및 발전을 위한 비전(Vision)을 모두 함께 사명감을 가지고 설득력 있게 설명하여 우리 편으로 동화시키는 데 드디어 성공했다.

 

 

이들의 마음을 결정적으로 움직이게 한 것은 필자와 가장 절친한 IOC 위원들 중의 한 명인 Ser Miang NG(쎄르미앙 능) 싱가포르 IOC 위원( IOC 집행위원) 겸 싱가포르 체육회장의 막후지원이었다.

 

 

 

 

(Ser Miang NG 싱가포르 IOC집행위원과 함께)

 

 

 

NG 위원은 선거유세 막판인 시점에서 싱가포르 연맹 회장 및 사무총장으로 하여금 한국을 지원토록 많은 힘을 아끼지 않았고, 더구나 싱가포르 연맹 대표들은 NG 위원과 더불어 인접국 대표들에게도 유경선 회장을 지지토록 간접지원을 해 주었다.

 

 

뭐니뭐니해도 유경선 ASTC 회장 후보가 가장 많은 신경을 썼고 처음에는 다소 서툴렀던 영어 실력도 선거유세 방문출장 과정에서 일취월장하여 당선된 후 ASTC 회장으로서 회의도 영어로 주재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사전에 많은 준비를 하기 때문에 가능하기도 하지만 유 회장 개인의 노력과 열정의 결실이 아닌가 싶다.

 

 

 

싱가포르 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우리 팀은 아시아의 허리 부분을 교두보로 확보한 뒤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베트남, 태국, 대만, 중국, 네팔, 일본, 마카오차이나, 홍콩차이나 등을 차례로 방문하는 등 방문 유세활동이 효력을 발휘하였고 점차 유경선 후보에게 서광이 비치기 시작했으나, 워낙 경쟁 후보의 뿌리 깊은 밀착 방해공작으로 적지 않은 시행착오를 경험하기도 했다.

 

 

 

 

(유경선 전 ASTU회장<-2> 및 필자<-3>)

 

 

 

 

 

인도의 Chennai 현지에서 막판 굳히기 작업은 인도 연맹 측의 교란작전으로 순탄치는 않았지만, 불굴의 한국인 저력으로 끝까지 밀어붙인 결과 적지인 인도에서 당초의 예상을 깨고 유경선 후보는 경쟁 후보이며 주최국 연맹 회장인 Ramachandran후보를 9:5란 파격적인 표 차이로 누르고 Lu Dapeng ASTC 회장(중국)에 이어 4년 임기(2003-2007)의 신임 ASTC 회장으로 당선되어 한국 스포츠 외교의 한 획을 그었다.

 

 

트라이애슬론 인도대첩의 역사는 그렇게 씌어졌다.

 

 

그 이후, 유경선 ASTC 회장의 열정적이고 탁월한 지도력 하에 아시아 트라이애슬론은 활력 넘치게 전진한 바 있었으며, 각 대륙 별 연맹 중 가장 활발하고 짜임새 있는 순항을 계속해 온 바 있었다.

 

 

유 회장은 20053 KOC부위원장으로도 선임되었었으며 2008년에는 국제 트라이애슬론 연맹(ITU)부회장으로 선출되었고 2012 10월 뉴질랜드 Oakland 개최 ITU총회에서 ITU회장 직에 출사표를 던졌으나 스페인 출신 여성 ITU회장 겸 IOC위원에게 석패하였다.

 

 

한편 2015 6월 대만 Taipei개최 ASTU총회에서는 박석원 두산엔진 부사장 겸 대한 트라이애슬론 연맹부회장이 제3 ASTU회장 직에 올랐다.

 

 

 

(5) 대한민국체육언론과 OCA태동역사 및 ASPU(AIPS Asia)실록

 

 

올림픽대회나 각종 국내외 스포츠 행사에 언론매체의 역할이 없다면 올림픽이 50~100억 달러 규모의 범 지구촌 최대 인류축제(The Greatest Pan Global Festival of mankind)로 승화되지 못했을 것이고, 올림픽을 포함한 모든 스포츠 행사나 대회는 동네잔치 수준에 머물고 지금과 같이 장족의 발전은 꿈도 꾸지 못했으리라.

 

 

스포츠 취재는 스포츠와 일반 대중간의 촉매제(Catalyst) 기능을 톡톡히 해내고 있으며 보다 나은 사회(a better society), 보다 나은 삶의 질(a better quality of life)을 선도해주고 있다.

 

 

과거 올림픽 운동(Olympic Movement) 3대 지주(pillars)는 국제 올림픽 위원회(IOC), 국제 경기연맹(IF: International Federations)과 각국 올림픽 위원회(NOCs: National Olympic Committees)였다.

 

 

 

그러나 언론의 역할과 기여의 중요성이 특히 부각된 21세기에 들어서 전 세계 올림픽 및 스포츠 운동(Worldwide Olympic and Sport Movement)에 있어서 언론매체(Mass Media)가 중요하게 자리매김(positioning)함으로써 IOC, IFs, NOCs와 함께 Media 4대 중심축의 하나로서 인류의 향상 성 운동에 공헌하고 있다.

 

 

 

필자가 스포츠 취재기자들의 존재를 인식한 것은 1982 9월 대한체육회 당시 국제 국에 특채되어 무교동에 있는 체육회관에서 근무하면서 공보실 옆에 있는 기자실 출입기자들이 대한체육회에 대하여 무임소 감사 내지 감찰 기능 등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부터였다.

 

 

당시의 전설적인 선배 기자들의 에피소드는 일일이 다 적을 수는 없고, 다만 낭만 시대 같기도 하고, 또한 스포츠의 사회에 미치는 영향과 역할이 그만큼 지대하다고 볼 수 있으리라.

 

 

전 세계 올림픽과 스포츠를 관장하는 IOC와 대륙 별 국가 올림픽 위원회 연합회와 각국 올림픽 위원회가 있다면 전 세계 스포츠 취재 기자들의 이에 상응하는 조직도 공존하고 있다.

 

 

국제 체육기자연맹(AIPS: International Sports Press Association)과 아시아 체육기자 연맹(ASPU: Asian Sports Press Union/현재 AIPS Asia), 한국 체육기자 연맹(KSPU: Korea Sports Press Union)이 그것이다.

 

 

1982 125일 인도 New Delhi에서는 제9회 아시아 경기대회 개막을 앞두고 아시안게임을 주관하던 아시아 스포츠 통괄 관장 단체였던 아시아게임 연맹(AGF: Asian Games Federation)을 아시아 올림픽 평의회(OCA: Olympic Council of Asia)로 탈바꿈하는 OCA 창립총회가 조직되었다.

 

 

 

초대 OCA 회장에는 중동의 초 강세 오일 달러를 앞세워 아시아 스포츠 계를 좌지우지하기 위해 쿠웨이트 국왕의 서자 출신 왕족이며 당시 쿠웨이트뿐만 아니라 중동 전반에 걸쳐 무소불위의 파워를 자랑하였던 야심만만한 쿠웨이트 NOC 위원장 출신의 Sheikh Fahad Al-Ahmad Al-Sabah IOC 위원이 파죽지세로 무경쟁 선출되었다.

 

 

 

(1984년 서울개최 OCA총회 당시 좌로부터 故 Sheikh Fahd OCA초대회장, 통역 중인 필자故 정주영 KOC위원장)

 

 

 

 

Sheikh Fahad 초대 OCA 회장은 언론이 스포츠에 미치는 영향력을 인지하고 아시아 체육기자 연맹(ASPU)을 출범시킴과 동시에 쿠웨이트 언론인 출신인 알 후사이니(Al-Hussaini)를 초대 ASPU 회장으로 선출되도록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하여 당선시켰다.

 

 

아시아의 스포츠 강국(Sports Power House in Asia)은 정작 한국, 중국, 일본 및 북한 등 동아시아 지역 국가들이었는데, 오일달러와 조직적인 득표 작전으로 중동이 아시아 스포츠 계의 정책을 주도하는 스포츠 외교 강국으로 급부상하였다.

 

 

Sheikh Fahad 회장은 그 당시 평양에 초청받아 북한의 김일성 주석도 만나는 등 친북 성향의 스포츠 지도자였다.

 

 

4년 후인 1986 9월 서울에서는 제10회 아시안게임 개막을 앞두고 최종 점검에 여념이 없었고, 대회 개회식에 즈음하여 OCA 총회를 개최하게 되었다.

 

 

1982년 인도 New Delhi 이후 회장을 포함한 OCA 집행부 임원 선출이 있었다.

 

 

당연히 한국, 중국, 일본의 스포츠 지도자들은 타도 Sheikh Fahad를 외치며, 최만립 KOC 부위원장 겸 명예총무가 주축이 되어 동남아 NOC 수뇌 진들과 함께 하진량 중국 IOC 위원을 동아시아 대표 OCA 회장 후보로 옹립하였으나, 사전에 낌새를 차린 Sheikh Fahad 회장 측이 쿠웨이트 정부 채널을 통해 중국 정부에 대해 만약 하진량 IOC 위원이 OCA 회장 후보로 나와 당선될 경우 중동 국가 전체가 1990년 제11회 북경 아시안게임을 보이콧(Boycott)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었다.

 

 

 

(하진량/Zhenliang HE<작고> 중국 IOC부위원장과 함께)

 

 

 

당시 중국으로서는 개방화 정책을 통해 국가 발전과 중흥을 도모하려는 계획의 일환으로 대외에 내놓은 야심 찬 카드가 Beijing1990 아시아게임이었으니, 두말할 나위 없이 OCA 회장선거는 당장에 물 건너간 상황이 되었다.

 

 

이렇게 해서 「타도 아시아 스포츠 마피아 작전」은 일단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듬해인 1987년에는 아시아 체육기자 연맹(ASPU) 회장선거가 있었다.

 

 

쿠웨이트의 Al Hussaini 회장이 당연히 연임을 노렸다.

 

 

그러나 한국에는 막강한 ASPU 회장 후보가 버티고 있었다.

 

 

연세대학교 재학 시절부터 시작해서 국가대표 아이스하키 선수 및 주장을 맡아온 정통 스포츠 인으로서 불굴의 정신력과 추진력의 소유자인 당시 조선일보 체육부장 박갑철 한국 체육기자 연맹(KSPU) 회장은 말레이시아, 태국, 중국, 일본, 홍콩, 대만, 마카오, 필리핀, 싱가포르 등 전체 아시아 체육 기자들의 강력한 지지와 일사불란한 조직력과 ASPU 발전을 위한 구체적인 비전(Vision)을 내세워 막강했던 쿠웨이트 출신 알 후사이니 ASPU 초대 회장의 아성을 일거에 무너뜨렸다.

 

 

분명한 쾌거였다. 아시아 스포츠 언론 외교의 헤게모니(Hegemony)를 장악한 순간이었다. 아시아 스포츠 마피아 조직의 한쪽 벽이 이렇게 무너져 내렸다.

 

 

 

(좌로부터 문동욱 현 대구 계명대학교 체육과교수, 박세호 전 SBS국장, 박갑철 전 ASPU회장, 필자)

 

 

 

 

박갑철 ASPU 회장은 영어에 능통한 분은 아니지만 날카로운 예지력과 그때그때 닥친 상황을 잘 읽고 대처하는 순발력과 분별력이 남달랐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그런 박회장과 ASPU 회의 및 AIPS(국제 스포츠 기자 연맹) 총회에 여러 번 동참한 바 있다. 현장 증인인 셈이다.

 

 

박회장은 영어 등 외국어가 뛰어나지 않아도 국제 스포츠 외교를 장악할 수 있다는 실증을 몸소 실천해 보여준 스포츠 언론 외교의 대부인 셈이다.

 

 

박회장은 ASPU 회장으로 당선된 후 1987년 세계 체육기자 연맹(AIPS) 총회를 대한민국의 서울로 유치하여 성공적으로 조직하였다.

 

 

필자는 당시 하정조 KSPU 사무총장(연합통신 편집국장 역임), 이원웅 KOC 전문위원<작고>, 홍종서 관장 등과 서울 신라호텔에서 개최된 AIPS 총회를 함께 조직, 운영하였다.

 

 

그 당시 통역요원으로 선발되어 봉사했던 대학생 중에 박용성 국제 유도연맹(IJF) 회장 겸 IOC 위원 비서로 발탁되어 국제 스포츠 계에서 열심히 활동한 바 있는 문희종씨는 탁월한 불란서어를 구사하며 최 측근 비서실장으로 박회장을 보필하였다.

 

 

AIPS는 전세계 스포츠 취재기자들이 회원인 국제 스포츠 언론계의 공인된 최고 권위의 기구로서 당시 영국 기자 출신인 Frank Taylor가 회장을, 이태리 기자 출신인 Massimo De la Pergola가 사무총장을 맡고 있었다. 1993 5월초 터키 이스탄불에서는 제56 AIPS 총회가 개최되었다.

 

 

 

(좌로부터 Togay Bayatli AIPS 후임 회장, Frank Taylor 당시 AIPS회장, 필자, 박갑철 AIPS부회장)

 

 

 

 

AIPS 회장 등 집행위원 선거가 있는 중요한 회의여서, 필자는 중국 상해에서 개최되는 제1회 동아시아 경기대회 한국선수단 섭외 임원으로 참가하기에 앞서 AIPS 부회장으로 입후보한 박갑철 ASPU 회장의 선거 지원을 하도록 당시 김운용 KOC 위원장의 지시를 받고 별도 항공 스케줄에 의해 터키 이스탄불 현지로 날아갔다.

 

 

대세 판단에 뛰어난 박갑철 AIPS 부회장 후보는 당시 Frank Taylor AIPS 회장과 경쟁 후보인 터키 체육기자 출신이며 당시 NOC 사무총장(이후 NOC위원장)Togay Bayatli 와 손을 잡고 공동 연합전선을 전개하였다.

 

 

필자는 Togay AIPS 회장 후보와 박갑철 부회장 후보와 함께 모인 전략회의 석상에서 가능한 무혈입성, 즉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고의 승리이므로 우선, 필자가 1987 AIPS 서울 총회 때부터 친분을 쌓았던 Pergola AIPS 사무총장과 Taylor 회장을 직접 면담해서 AIPS 회장 후보 사퇴를 종용하고 대신 명예회장으로 추대하여 예우하는 방향으로 설득하도록 하는 임무를 맡았다.

 

 

Pergola 사무총장은 별 이견이 없었으나 Taylor회장은 필자가 선거 판 향방과 대세가 이미 기울었으니 명예롭게 퇴진하도록 간곡히 설득하자 조용히 경청하고 나서 필자의 손을 꼭 잡더니 “배려해줘서 고맙지만 사양하겠다.

 

 

영국인의 전통은 비록 싸움터에서 쓰러지더라도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것이므로 미련 없이 결전을 치르겠다.”라고 결사항전의 뜻을 밝히며 끝내 후보 철회를 하지 않았다.

투표 결과는 홈 그라운드에서 조직적으로 표를 장악한 Togay가 신임 AIPS 회장에 우선 당선되었고, 이어서 치른 AIPS 부회장 선거에서는 한국의 박갑철 후보가 압도적 표차로 경쟁 후보를 제치고 AIPS 부회장으로 당선되었다.

 

 

필자가 AIPS 각국 회의 대표에게 박회장 대신 영어로 유세 연설을 했지만 그 내용은 거의 박회장의 아이디어였다. 1987 AIPS 서울 총회 시부터 쌓아온 친분과 인간적 신뢰의 바탕 아래서.

 

 

 

(6) 아시아올림픽평의회(OCA: Olympic Council of Asia)요약실록 및 OCA 규정위원장 및 사무총장 도전실록

 

 

1990 82일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하였다.

 

이 와중에서 Sheikh Fahad OCA 회장은 침공한 이라크 군과 교전하다가 사망하였다.

 

한 달 후인 1990 8월 중순 OCA 총회가 제10회 아시안게임 개최 도시인 중국의 Beijing에서 대회 직전에 열렸다.

 

Sheikh Fahad OCA 회장이 사망했으므로 선임 부회장인 스리랑카의 로이 데 실바(Roy de silva) OCA 회장 직무대행으로 OCA 총회를 주재하였다. 여러 명의 OCA 회장 후보 중에 사망한 Sheikh Fahad 회장의 친아들인 Sheikh Ahmad Al-Fahad Al-Sabah 쿠웨이트 NOC 위원장(이후 IOC 위원 직도 승계함)이 있었다.

 

 

(Sheikh Ahmad OCA회장과 함께)

 

 

Sheikh Ahmad 후보는 출마 당시인 1990년 만 29(1961년생)로서 당시 OCA 헌장 규정상 35세 이상이 되어야 하는 자격 조건에 문제가 있었지만 중동 국가 NOC 대표들과 친 쿠웨이트 인접국 NOC 대표들의 동조와 인도의 메타(Vice Air Chief Marshall Mehta) 사무총장 등의 교묘한 획책에 힘입어 1년 뒤인 91 9월 인도 New Delhi에서 OCA 특별 총회를 갖고 OCA 헌장 내용 중 회원국 대표들 1/3 이상이 찬성하면 자격 요건 1~2가지는 유예될 수 있다는 해당 규정을 적용시켜 Sheikh Ahmad를 적법한 후보로 만들어 놓고, 사전에 치밀하게 조직된 투표공작을 벌여 Sheikh Ahmad OCA 회장직마저 승계하였고 벌써 29년 째 거의 종신 OCA 회장으로 아시아올림픽운동의 최고 사령관으로 군림하고 오고 있다.

 

(Vice Air Chief Marshall Mehta 인도출신 OCA초대 사무총장과 함께)

 

 

필자는 4년간(1994-1998) OCA 규정위원을 역임하고, 불합리한 OCA 헌장 규정 개정 등을 통해 OCA를 개혁해 보려는 취지에서 1999 11, 쿠웨이트 개최 제18 OCA 총회에서 실시된 OCA 집행부 임원 선출 시 OCA 규정 위원장 후보로 출마하여 홍콩의 A. de O'Sales 전 홍콩 NOC 위원장 겸 OCA 규정 위원장과 경선을 앞두고 있었으나, 적지 쿠웨이트에서 갖가지 방해 책동으로 인해 결국 Sheikh Ahmad OCA 회장과 차기를 위한 작전상 타협으로 후보 직을 사퇴하였다.

 

물론, 그 대신 OCA 집행위원인 아시안게임 수석조정관(Asian Games Chief Coordinator) 자리를 받는 조건으로. 그 이후 필자는 수석조정관 자격으로 2006년 아시안게임 개최지인 카타르 도하를 방문, 조직위원회 관계자들과의 협의, 경기장 시설 등 현지 점검 등 임무 수행을 하고,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때까지 활동하였다.

 

이후, 2003 1월 역시 쿠웨이트에서 개최된 OCA 총회 시 OCA 창립 이후 최초로 OCA 사무총장으로 경선 출사표를 던졌으나, KOC 내부의 이해득실에 의한 사퇴종용과 평창2010동계올림픽 유치를 앞둔 한국으로서는 경쟁후보가 IOC 위원(인도의 Randhir Singh)이었던 한계상황으로 이 또한 후보 철회를 해야만 했다.

 

OCA 쪽으로는 오늘날까지도 주도권을 쿠웨이트로부터 쟁취하지 못하고 있지만 ASPU는 박갑철 회장 이후 다시 쿠웨이트가 2019년 현재 ASPU회장 직을 점유하였으나 2021년 예정된 ASPU차기회장 선거에서는 한국체육기자연맹(KSPU)현 회장인 정희돈 SBS기자가 유력하게 입도선매(?)한 상황으로 2019 8월 말 콸라룸푸르개최 ASPU총회 시 확인된 바 있다.

 

 

(20198월말 ASPU/AIPS Asia총회 시 열린 국제스포츠 서밋<Summit>에서 주제발표하고 있는 필자)

 

 

애초 규정에는 ASPU 회장을 4년씩 2차례(8)만 하도록 되어 있으나, 박갑철 ASPU 회장은 4차례나 연임한 바 있었다.

 

아시아 스포츠 언론 외교의 수장은 한국인이 주도해 왔다. 반면, 한국은 OCA 집행위원 급 임원이 전무하였다가 유경선 ASTU회장이 OCA환경과 스포츠분과위원장 자격으로 OCA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고 2019 3월 태국 방콕개최 제38 OCA총회에서는 유경선 분과위원장을 포함하여 유승민 선수자격 IOC위원(2016~2024) OCA선수관계분과위원장 자격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고, 문대성 前 선수자격 IOC위원(2008~2016)역시 OCA집행위원으로 선출되어 한국은 총 3명이 OCA집행위원 대열에 합류하였다.

 

4년 마다 OCA총회가 열리는데 향후 OCA 회장, 사무총장을 포함한 집행부 임원 선거 시 한중일 3각 연대체제를 전략적으로 가동하고 조직적으로 대비하여 한국이 OCA회장 또는 사무총장 국으로 아시아 스포츠외교의 실질적 중심축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자. 가능하면 OCA 본부도 한국으로 가져오자. 꿈은 꾸는 자의 것이니까.

 

Posted by 윤강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