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외교2019. 11. 11. 20:57

[대한민국스포츠외교실록-역대올림픽 수난사와 최고대회서울1988올림픽평가(35)]

 

 

1896년 쿠베르탱 남작에 의해 부활한 근대올림픽은 고대올림픽 발상 국인 그리스, 아테네에서 제1회 대회를 개최하였다.

 

남자선수들만 241명이 달랑 참가하여(1900년 제2회 파리대회부터 여자선수 참가허용) 육상, 사이클, 펜싱, 체조, 사격, 수영, 테니스, 역도 그리고 레슬링 등 모두 통틀어 9개 종목에 출전, 경합을 벌인 것이 근대올림픽의 출발점이었다.

 

1회 동계올림픽은 1924년 프랑스의 샤모니(Chamonix)에서 16개국 258명의 남·여 선수들이 참가한 것이 그 효시이다.

 

그 이후, 올림픽은 1916년 제1차 세계대전과 1940, 1944년 제2차 세계대전으로 세 차례 중단된 바 있다.

 

70년대 들어서 올림픽은 위기를 맞이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 사건은 1972년 뮌헨올림픽에서 일어났다.

 

검은 9월 단(Black September)이라 불리는 팔레스타인 혁명주의자들의 테러로 이스라엘 선수 11명이 올림픽 선수촌에서 희생된 것이다.

 

세계의 화합에 목표를 둔 올림픽에 검은 구름이 그렇게 드리우기 시작했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는 뉴질랜드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인종차별 정권과 지속적인 외교관계를 맺고 있다는 불만이 표출되어 아프리카 17개국이 집단 불참을 선언하였다.

 

설상가상으로 재원이 빈약했음에도 무리하게 올림픽스타디움을 새로 건축하고 개최비용을 과다 지출해서 10억 불의 채무를 떠안게 되었다.

 

몬트리올 시 정부는 2006년까지 이자를 포함하여 20억 불 규모의 부채청산작업을 해야 했다.

 

몬트리올올림픽은 아쉽게도 “실패한 올림픽”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1980년 모스크바올림픽은 당시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인해 미국의 Jimmy Carter 미국대통령이 자국 선수단 불참을 선언해 버렸고 한국을 포함한 서방진영 65개국이 동반하여 불참대열에 합류하였다.

 

결국, 81개국만 참가한 반쪽 짜리 대회가 되어버렸다.

 

4년 뒤인 1984년의 LA올림픽 역시 마찬가지였다.

 

구 소련과 그 추종세력들은 보복성 집단불참을 선언하여 이념분쟁에 따른 또 한 번의 반쪽 짜리 대회를 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중국과 루마니아 등은 독자노선을 선언하고 과감히 올림픽에 참가를 선언해서 총 참가국은 140개국이 되었다. 

 

이렇게 이념문제의 도돌이표를 오가면서 하향세로 가는 것은 아닌가 우려를 보였던 올림픽은 1981 930일 당시 서독의 바덴바덴에서 개최된 제84 IOC 총회에서 81명의 IOC 위원이 참석한 가운데 대한민국의 서울이 경쟁도시인 일본 나고야를 52:27로 여유 있게 제치고 1988년 제24회 올림픽대회 개최지로 확정되면서 분위기 반전을 노릴 수 있게 되었다.

 

(1981년 서독 바덴바덴 IOC총회에서 1988년 올림픽개최도시로"쎄울"을 발표하고 하고 있는 Samarach 당시 IOC위원장)

 

그러나 그 어느 대회보다도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당시 한국은 개발도상국이었고 북한과 휴전상황에 놓여 있었고 지구상에서 가장 위험한 지역인 휴전선(DMZ)은 서울에서 불과 자동차로 1시간 거리에 있었다.

 

미국 ABC TV의 명 스포츠 해설가인 하워드 코셀(Howard Cosell) “전쟁 중이나 다름없는 국가에서의 올림픽 개최는 어불성설이다. 또한, 160여 개국의 IOC 회원국 중 불과 60개국과만 외교관계가 수립되어 있다니 말이나 될 법한가?”라고 비난의 포문을 열기도 하였다.

 

 

(Howard Cosell 과 미국 Alabama소재 미국 스포츠아카데미 시상식 일정 중 조우)

 

 

한국은 1980 1212일 전두환 장군이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당시 정치적으로 매우 불안한 상황이었다.

 

1980 7월 제22 IOC 총회에서 8년 임기의 IOC 위원장으로 선출된 故 사마란치(종신 명예위원장역임)로서는 이 모두가 고난과 혼란의 연속이었다.

 

소련을 위시한 동구권 블록 국가들은 1988년 서울올림픽을 다른 곳으로 옮겨 개최해야 한다고 연일 비판을 해댔다.

 

1984년 멕시코시티에서 개최된 제4 ANOC 총회에서 당시 소련 체육 성 장관 겸 NOC 위원장인 그라모프(Gramov)는 강한 어조로 서울올림픽 개최지 변경을 공론화하여 총회의 주요쟁점으로 몰고 가고 있었으며, 열띤 공방이 계속되었다.

 

당시 한국 측에서는 노태우 서울올림픽대회조직위원회(SLOOC)위원장, 최만립 KOC 부위원장 겸 명예총무, 김세원 KOC 부위원장, 이태근 KOC 사무국장, 전상진 SLOOC 국제사무차장, 필자 등이 참석하여 각국 NOC 대표단과 막후교섭을 벌이며 현장을 지켜보았다.

 

결국, 친 한파인 마리오 바즈케즈 라냐 ANOC 회장과 사마란치 IOC 위원장 등의 서울올림픽 사수 전략이 대다수 전 세계 NOC 대표단의 호응을 받아 “서울올림픽사수 멕시코선언문”이 채택되었다. 이것으로 서울올림픽 개최지변경 논란은 일단락되었다.

 

 

(당시 Mario Vazquez Rana ANOC창설회장 겸 최 장수 회장 겸 IOC집행위원 멕시코 집 무실에서 함께)

 

그 결과 서울1988올림픽은 동·서 진영이 모두 참가(159개국)하는 화합과 전진(Harmony & Progress)의 대회가 되었으며, 손에 손잡고(Hand in Hand) 이념과 정치 갈등의 벽을 넘어선 대회로 평가 받게 되었다.

 

Calgary1988동계올림픽 미국지역 TV중계권료가 3 9천만 불에 ABC TV로 낙찰되었고 1984 LA올림픽 이후 미국광고시장이 활황세를 타게 되자 하계올림픽인 1988 서울올림픽대회는 미국지역 올림픽 중계권료가 10억불에 이를 것이며 최소 6~7억불은 호가할 것이라는 장밋빛 전망이 언론에 보도된 바 있었다.

 

이것은 SLOOC 측이 컨설턴트로 고용한 IMG(International Marketing Group)의 배리 프랭크(Bary Frank)가 미국과 한국과의 시차로 인해 소위 미국의 TV 황금시간 대(Prime Time)에 주요 올림픽 방송을 할 수 없다는 내용을 간과해버린 상태에서 책정된 금액이어서 곧 문제가 되었었다.

 

또한 미국광고시장의 요구에도 부합하지 못해 올림픽 중계권료 협상사상 최초로 같은 해 개최되는 동계올림픽보다 액수가 적은 3억 불로 NBC TV에 낙찰되고 말았다.

 

겨우 체면유지용으로 SLOOC 측이 설정한 향후 추가발생 광고수익금 배분(Revenue-Sharing)제안만 NBC 측에 받아들여진 정도였다.

 

그러나 실제 광고수익이 애초 예상 액을 상회하지 못해 명분만 있는 제안이 되고 말았다.

 

1985 10월 초 SLOOC 집행위원장 국제 비서관으로 근무 중이던 필자는 당시 故 이영호 체육부장관 겸 SLOOC 집행위원장을 모시고 미국 뉴욕의 Westbury 호텔에서 1988 서울올림픽 미국 내 TV중계권료 협상계약서 서명 식을 목격하였다.

 

중계권료가 애초 예상보다 훨씬 적은 까닭에 금의환향은 아니었지만 故 이영호 체육부장관께서는 “내가 대한민국 수립 이래 물건 하나 건네지 않고 3억 불이란 거액을 한국 땅으로 가져오는 계약서에 역사적인 서명을 한 최초의 정부각료로 기록될 것이다.”라고 한 말씀이 기억난다.

 

 

(이영호 SLOOC집행위원장 겸 체육부장관과 Montblanc정상에서)

 

 

이보다 앞선 1985 9 IOC 본부가 있는 스위스 로잔 IOC 위원장 집무실에서 당시 주 제네바 대표부 박근 대사와 필자가 배석한 가운데, 故 이영호 장관과 사마란치 당시 IOC 위원장 간의 TV중계권 협상 주도권 논쟁 중 사마란치 위원장의 섬뜩한 말 한마디가 생각난다.

 

Technically speaking, Korea may be at war"(기술적인 이야기로 하자면, 한국은 전쟁상태에 있다고도 볼 수 있소.)

 

또 한 가지 에피소드가 있다.

 

1985 917일은 3년 후 서울올림픽대회 개회식을 거행할 날로서 이날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자 당시 NBC 부사장 자격으로 방한한 Alex Gilady 현 이스라엘 IOC 위원은 故 이영호 장관을 만난 자리에서 힐난하는 어조로 “3년 후 같은 날 비가 올 확률이 높은데 개회식 생중계에 많은 애로사항이 있을 것 같아 염려가 된다.”라고 꼬집었다.

 

이영호 SLOOC집행위원장 겸 체육부장관은 “금년은 홀수 연도(odd year)라서 비가 많이 오지만 1988년은 짝수 연도(even year)라서 비가 올 확률이 거의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라고 촌철살인의 재치 있는 답변을 해서 중계권료를 깎으려는 의도를 일축한 바 있다.

 

미국과 한국의 시차로 인해 미국인들의 우상선수들이 세계적으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올림픽의 꽃 육상종목, 특히 100m, 400m 경기의 TV 생중계 문제가 대두된 바 있다.

 

12시간 시차를 극복하고 그네들의 황금시간 대(Prime Time)에 생중계를 하려면 한국시각으로 아무리 늦어도 오전 11시에서 12시 대에 육상경기 결승 시간을 맞추어야 했다.

 

반면, 라틴 마피아의 강력한 한 축을 맡고 있던 이태리 출신 故 프리모 네비올로(Primo Nebiolo) 국제육상경기연맹 회장은 선수 컨디션 조절 및 최고 기록 경신을 위해 하루 중 인체의 바이오리듬이 최고조에 달하는 시간, 즉 적어도 늦은 오후에 경기를 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반대의사를 공식적으로 천명하였다.

 

밀고 당기는 지루하고도 지루한 논의와 협의와 설득의 시간이 지나고 우여곡절과 천신만고 끝에 오전(Morning)에 결승경기를 치르되 「오전결승(Morning Final)」이란 용어 대신 「중일(Mid-day)」이라는 용어를 새로 만들어 「Mid-day Final」로 개칭하여 쓰기로 했다.

 

 

(Primo Nebiolo)

 

 

미국 전역 황금시간대인 미국시각 오후 7시부터 10시 사이에 육상경기 결승전을 생중계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IOC 금고에 가장 많은 수입금을 챙겨주는 것은 단연 TV 중계권료 수입이지만 스폰서(Sponsors), 공식공급업체(Official Suppliers) 및 공식상품화권(Official Licencees) 등 마케팅 수익이 차지하는 재정적 수입창출도 지대하다.

 

IOC는 서울올림픽을 시발점으로 본격적이고 체계적인 마케팅 사업을 시작하였다.

 

이름하여 TOP(The Olympic Puzzle The Olympic Program The Olympic Partner) 프로그램이다.

 

TOP 프로그램은 세계 각국 NOC 마케팅 권리까지 포함한 모든 올림픽 마케팅 권한을 4년 동안 한데 묶어 독점 마케팅 패키지화하는 개념이었다.

 

처음에는 호응도가 약했으나 서울올림픽을 통해 그 효과가 검증되었고, 4년 단위로 구성된 TOP 프로그램의 명성도 상승세를 타기 시작했다.

 

서울1988올림픽에서의 올림픽 마케팅 프로그램을 “TOP Ⅰ”이라 하고 4년 뒤인 Albertville1992동계올림픽과 Barcelona1992올림픽까지를 “TOP Ⅱ”, Lillehammer1994동계올림픽과 Atlanta1996올림픽까지는 “TOP Ⅲ”, Nagano1998동계올림픽과 Sydney2000올림픽까지는 “TOP Ⅳ”, Salt Lake City2002동계올림픽과 Athlens2004올림픽까지는 “TOPⅤ”, Torino2006동계올림픽과 Beijing2008올림픽까지는 “TOP ", Vancouver2010동계올림픽과 London2012올림픽까지는 “TOP Ⅶ”, Sochi2014동계올림픽과 Rio2016올림픽까지 묶어서 “TOP Ⅷ”, 평창2018동계올림픽과 Tokyo2020올림픽까지는 “TOP IX”, Beijing2022동계올림픽과 Paris2024올림픽까지눈 “TOP X”, Milano/Cortina d’Ampezzzo동계올림픽과 LA2028올림픽까지는 “TOP XI”, 그리고 2030년 동계올림픽과 2032년 올림픽까지는 “TOP XII” 프로그램 범주에 포함하게 되는 것이다.

서울올림픽은 20년 만에 동·서 양대 진영이 공히 함께 축복 속에서 참가한 평화와 화합과 전진의 올림픽이요, IOC의 마케팅 분야에 새 지평을 열어준 마케팅 TOP 프로그램의 발원지였다.

 

그뿐만 아니라 애초 우려했던 안전사고가 한 건도 발생하지 않은 완벽한 안전올림픽으로서 당시 사마란치 IOC 위원장은 서울올림픽 폐회식에서 이렇게 평가했다.

 

The Most Universal and The Best Games Ever"(가장 보편화한 역대 최고의 올림픽)

 

(Samaranch IOC위원장과 Barcelona소재 Caixa빌딩집무실 방문 시)

 

 

이런 대회는 서울올림픽을 제외하면 아직까지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고 있다.

 

서울올림픽은 동양의 태극(시작과 끝), 그리고 서양의 알파와 오메가(Alpha and Omega/시작과 끝)가 공존하는 극동의 타오르는 등불을 올림픽 성화에 점화하여 근대 올림픽의 진정한 제2의 부활을 가져다 준 축복과 영광의 대회로서 청사에 길이 보존되고 칭송 받아 마땅하다.

 

대한민국이여 영원하라!

 

 

Posted by 윤강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