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과 마음씀2019.10.16 22:56

[우리들교회 2019 1013일 주일말씀 요약(신명기 4:44~ 5:10/우리와 세우신 언약 //성승환목사)]

 

 

 

 

<신명기/Deuteronomy 4:44~5:10>

44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선포한 율법은 이러하니라
45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나온 후에 모세가 증언과 규례와 법도(the stipulations, decrees and laws)를 선포하였으니

46
요단 동쪽 벳브올 맞은편 골짜기에서 그리하였더라 이 땅은 헤스본(Heshbon)에 사는 아모리 족속의 왕 시혼에게 속하였더니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나온 후에 그를 쳐서 멸하고

47
그 땅을 기업으로 얻었고 또 바산 왕 옥의 땅을 얻었으니 그 두 사람은 아모리 족속의 왕으로서 요단 이쪽 해 돋는 쪽에 살았으며

48
그 얻은 땅은 아르논 골짜기 가장자리의 아로엘에서부터 시온 산 곧 헤르몬 산까지요

49
요단 이쪽 곧 그 동쪽 온 아라바니 비스가 기슭 아래 아라바의 바다까지(as far as the Sea of the Arabah, below the slopes of Pisgah.)이니라

 
1
모세가 온 이스라엘을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아 오늘 내가 너희의 귀에 말하는 규례와 법도를 듣고 그것을 배우며 지켜 행하라
2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호렙 산에서 우리와 언약을 세우셨나니
3
이 언약은 여호와께서 우리 조상들과 세우신 것이 아니요 오늘 여기 살아 있는 우리 곧 우리와 세우신 것이라
4
여호와께서 산 위 불 가운데에서 너희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매
5
그 때에 너희가 불을 두려워하여 산에 오르지 못하므로 내가 여호와와 너희 중간에 서서 여호와의 말씀을 너희에게 전하였노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6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라
7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지니라
8
너는 자기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밑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9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10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Prologue>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인데 이 자리에서 말씀듣기 원합니다.

우리들교회 사역자 면접을 볼 때 설교가 가장 쉽다고 했고 큐티가 가장 쉽다고 하여 성도들에게 많은 웃음을 주었다.

은혜는 큐티 잘하는 우리들교회 성도들이 알아서 받으시기 바란다.

오늘 본문은 십계명이다.

십계명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다.

 

 

<말씀 요약>


4
장은 십계명의 받은 장소와 때에 대한 이야기로 우리에게 세우신 언약은,

1. 광야의 때를 잘 견뎌야 한다.

오늘의 계명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온 때로 시작하지만 아직 약속의 땅에는 가지 못하고 도중에 받은 것이다.

44~46절은 '애굽에서 나온 후에'라고 두 번 반복한다.

그리고 아직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않은 상태다.

우리가 말씀을 받는 때와 장소는 아직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 힘든 광야 시간을 살다가 받게 되는 십계명이 바로 그때 받은 것이다.

여전히 힘들고 어려운 그때 받은 것이다.

우리들교회의 수많은 성도들과 평원 및 초원님들이 간증하는 하는 것을 보면 너무 힘든 광야의 시간 속에 살다가 우리들교회에 입성하게 되어서 아직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않은 것 같은 그 때에 말씀을 받고 또 살아나신 간증들을 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살고 있는 이곳은 요단 동편 시온의 땅(벳브올 맞은편 땅)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온 후 아모리족속 왕 시혼(
Sihon king of the Amorites)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곳이다.

그리고 아직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였기에 승리의 장소에서 계명을 받은 것은 앞으로 약속의 땅으로 가는 여정에 승리의 열쇠가 바로 여기 오늘 주시는 언약에있다고 생각한다.

이곳에 때론 순종하고, 불순종하기에 오랜 시간에 걸쳐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래서 곤고한 오늘을 말씀을 붙잡고 또 힘든 오늘을 살아 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직 약한 우리는 이 계명을 혼자 받을 힘이 없고 지킬 힘도 없다.

그래서 이미 이곳에서 승리를 경험한 사람들과 함께하는 목장공동체와 교회공동체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주일예배, 수요예배, 목장예배에서 우리는 계명을 받을 수 있다.

이것을 약속의 땅이 아니라 광야에서 받는다고 한다.

말씀을 받아도 여전히 광야에 있다.

그리고 역시 수많은 시간이 지나야 한다.

3911개월도 안되고 40년이 지나야 한다고 했다.

서두에 말씀 드렸던 것처럼 많이 잘난 척을 하였고 몸둘 바를 몰랐다.

계시록 설교를 하면서 룻기 말씀의 배려를 적용하며 큐티 신동이지 않느냐?’며 이야기 하였는데 성도님들이 참 많이 웃어 주었다.

이렇게 잘난 척 하다 선물로 치리를 받았다.

목자님과 초원님들을 보면서 너무 잘난 척을 한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인정중독이 있었는데 주눅이 드니 목자모임 들어가는 것이 너무 싫었다.

그러던 중 담임목사님이 미국으로 안식 월에 들어 갔다,

그때부터 목자모임에 안 들어 갔다.

그런데 담임목사님이 목보를 다 읽으시고 목자모임에 안 들어 간 것을 아셔서 치리를 받았다.

내가 광야 40년을 잘 견디고 있는지 힘든 싸움이지만 종의 자식에서 나와 사람을 살라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광야에서 말씀 받고 살아난 평원, 초원, 목자님들이 그런 분들이다.

그런 분들과 함께 하는 것이 힘들었다.

광야에서 받은 말씀이 있는 사람이 사람 살리는 사명자이다

(적용)  

-내가 약속의 말씀을 받을 곳은 어디인가?

-목장에서 받는 처방에 언약 말씀으로 믿어지는지? 아니면 이 사람도 나와 다를 것이 없다고 느껴져 무시가 되지는 않는지?


2. 여기 살아있는 우리와 세우신 언약이다.

모세는 율법을 선포하면서 듣고, 배우며, 지켜, 행하라고 한다.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내가 죄 가운데 있는 것과 죄를 깨닫게 해 주는 거울과 같은 필수적인 것이다.

우리가 얼마나 죄인인가를 알게 해 주시는 것이다.

그러기에 어느 날 저절로 죄를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들려야 내가 얼마나 죄인인가를 알게 해 주는 것이다.

내가 죄인임을 깨닫는 것이 어렵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도 어렵다

그러기에 죄는 저절로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들려야 내가 얼마나 죄인인지를 알게 되고 그러기에 율법이 필요하다.

내가 율법을 잘 지켰기에 나는 죄인이 아니다가 아니고 내가 얼마나 죄인가운데 있는 죄인임을 깨닫게 해 주는 거울과 같은 것이 바로 율법이다.

이 율법에서 자유로울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우리는 듣기도 싫고 배우기도 싫고, 행하는 것은 더더욱 싫어한다.

그러기에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날마다 힘이 든다.

지금 죄인인 나를 위해 세우신 것인데 하나님의 시선이 나에게 머물러 계신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언약은 과거가 아닌 지금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나의 고난의 광야에 관심이 있으시며 그래서 지금 우리와 세우신 언약이다.

그래서 4.5절에 우리가 대면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어렵기(믿음의 분량이 안되기 때문)에 모세가 그 중간에 서서 여호와의 말씀을 전한다고 한다.

우리는 모세와 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 하지만 그렇게 되지 못하는 것이 나의 모습이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모세와 하나님 사이에서 말씀을 해주는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담임목사님과 평원, 초원, 목자님들이 그러한 분들이다.

죄가 없어서가 아니라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 사이에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애통해 하시며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제가 알고 있는 이 땅의 사람 중에 가장 죄인이 아닐 것 같은 한 분이 있는데 그 분은 담임목사님이다.

그런데 담임 목사님이 매주 설교를 하실 때 마다 누구보다 많은 눈물을 흘리신다.

회개할 부분이 전혀 없으신 분 같으신데 그렇게 회개를 하시면서 눈물을 흘리신다.

누구보다도 죄인인 것을 아시기에 나와 하나님 사이에서 말씀을 주신다고 생각한다.

또 목자님들이 그러한 분들이라고 생각한다.

죄가 하나도 없는 완벽한 의인이라서가 아니라 누구보다도 내가 죄인인 것을 인정하고 말씀하기에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여전히 무너지지만 말씀을 듣고 지키고 배우면서 지켜 행하기를 반복해야 한다.

이 말씀이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오늘 여기 우리, 곧 우리와 세우신 것이라고 한다.

우리가 답답할 정도로 이스라엘백성들이 얼마나 죄를 짓는지를 성경을 보면서 알수 있다.

오늘 이 계명을, 죄를 짓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세운다고 한다.

그런데 이것이 과거의 일, 조상에게 주시는 말씀이 아니라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 여전히 광야에 있고 죄를 짓고 있는 우리에게 주신다고 한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말씀을 듣고 배우고 지켜 행해야 한다.

 

(적용)

-오늘 이 계명이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 인정이 되는지? 아니면 말씀을 전하는 그 사람이 무시가 되는지?

2012년 우리들교회에 입성했는데 저는 꽤 유명한 양육강사로 생활한 사람이다.

양육교사출신인데 우리들교회에 와서 지금은 양육을 40주 분량의 시간으로 받지만 저는 그 당시 44주의 양육을 받았다.

토요일에 양육을 받던 중, 양육 모임에 10분 늦었는데 목사님 그냥 들어오지 말고 그냥 나가세요!’라고 하였는데, 저를 포함한 동기들은 다 놀랐을 것이다.

그 초원님은 기억 못하지만 저는 토씨 하나 빼지 않고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저는 시간 강박이 있고 원래 늦지 않는 사람이라서 그날 이후 늦지 않았다.

저는 목사로 사역하면서 양육 받은 적이 없었다.

저는 양육을 하는 사역자였는데 누구한테 배워 한 것이 아니라 책 한 권을 읽고 가르쳤기에 누구한테 듣고 배우고 지켜 행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다.

그 이야기에 수치스럽기도 했고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던 중 양육을 다 마치고 성도와 성도 한 분과 THINK를 하였는데 그때 깨달은 것들은 목사라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양육자이고, 또 삶으로 살아내는 것이 양육자이고, 그것 때문에 안타까워하고 나에게 양육해야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얼마나 안타까운지를 아는 사람이 가르칠 수 있는 자리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집으로, 사업장으로 찾아갔으며 숙제를 하지 못하였을 때 안타까웠다.

그리고 양육을 하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가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어떻게 살아왔고 어떻게 불렸든 간에 어떤 삶을 지금 살아가고 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깨닫기 위해 양육이 필요한 것이다.

듣고, 배우고 지켜 행하기 위해서 혼자 안간힘을 쓰는 그 시간이 필요하다.

아직 양육 받지 않으신 분은 꼭 받으시기 바란다.

양육을 받는 것도, 하는 것도 우리 살아있는 언약을 지켜 행하는 것이다.

 

(적용)

-‘나는 이미 잘 알아라고 생각하며 양육을 피하고 있지는 않는지?

-또 양육자로서 부름 받고도 나는 아직 안 돼요라고 하는지?

-‘양육은 지켜 행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3.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언약을 세우신다. (6)

1계명은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하는 것은 주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우리가 십계명을 이해하고 지키기 위해서는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내 안에서 꿈틀거리는 우상을 십자가 앞에서 내려 놓아야 하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것이며 그 기초 위에 다른 계명들이 세워지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전제아래 십계명이 세워진다.

나의 신앙의 간증과 고백 위에 하나님께서 시작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것이다.

날마다 신앙 고백을 하는 것은 내가 얼마나 욕심이 많고 배우고 싶고 되고 싶은 것이 많은 우상이 가득한 사람이라는 것을 보고 회개하면 가야 하는 것이다.

 

(적용)

-하나님만을 사랑하기에 할 수 있는 한 가지는 무엇인가?

-이번 주에 목장에 가겠나?

 

<Epilogue>

 

거실에 십계명을 걸어 놓는 것보다 더 적용해야 할 것은 나의 출애굽을 간증하고 큐티하는 것이 십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우상이란 하나님이 아닌 주()와 나의 유익과 필요와 욕심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십계명은 집에 걸어 놓는 액자가 아니다

십계명은 교회직분이 아니다

십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내 자신인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어렵다

십계명을 가장 잘 지키는 것이란 목장에 가는 것이며 목장은 출애굽 간증이 있는 곳이다

목장의 질서에 순종하는 것이 큰 양육이다

 


 

Posted by 윤강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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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외교2019.10.15 23:53

[대한민국 스포츠외교실록-한국의 역대 IOC위원계보 집중탐구 Update(24)]

 

 

 

 

 

1947620일 제41차 스톡홀름 IOC 총회에서 대한올림픽 위원회 (Korea Olympic Committee/KOC)IOC 회원국 NOC로서 승인을 받은 지 8년 만에 한국은 첫 IOC위원을 배출하였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 밑에서 권세를 누리던 이기붕 부통령이 낙점을 받아 19556월 제51차 파리 IOC 총회에서 1대 한국 IOC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52년부터 제17대 대한체육회장 겸 제6KOC위원장을 지내면서 1955년부터는 초대 IOC위원(4년 간)으로서도 활동했고 195511월에는 스포츠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미국 헬름스 재단이 수여하는 공로상까지 받기도 하였다.

 

 

 

(대한민국 IOC위원 족보/사진출처: 연합뉴스)

 

 

 

그가 4.19혁명의 와중에서 아들인 이강석으로부터 총탄을 맞고 쓰러진 뒤 이상백 박사가 위원 직을 승계하게 되었다.

 

 

이상백 제2 IOC위원은 농구선수출신으로 일제 시대부터 체육협회 이사를 지냈고 1937년 국제 빙상연맹(ISU) 일본대표로 국제회의에 참가하는 등 많은 국제 스포츠 경험을 토대로 국제 스포츠 인맥이 두터운 편이었다.

 

 

특히 1947KOCIOC회원국 NOC 승인 과정에서 당시 IOC 부위원장이었던 미국의 Avery Brundage (6IOC 위원장 역임/1952-1972)와 오랜 친구로서 결정적인 막후 지원을 했던 공로자이기도 했다.

 

 

196410월 제63차 도쿄 IOC총회에서 한국의 2IOC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2년간 (1964-1966) 10KOC 위원장을 역임하기도 한 그는 2년간 IOC 위원으로서 코리아의 이미지를 국제 스포츠 계에 많이 전파하였다.

 

 

 

3대 한국 IOC위원은 [불도저/Bulldozer]라는 별명으로 잘 알려진 장기영씨였다.

 

 

언론인이며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그는 19676월 제66차 테헤란 IOC 총회에서 IOC 위원으로 선출되어 19774월까지 IOC 위원으로서, 1966-1968 2년간 제11KOC 위원장으로서 한국 스포츠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19776월 제 79차 프라하 IOC 총회에서 4대 한국 IOC위원으로 선출된 김택수씨19776월부터 19834월까지 5 10개월 간 IOC 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7419762년간은 대한체육회장 겸 제14KOC위원장을 역임하였고, 국제 신사로서 파이프 담배를 즐겨 피웠던 [멋쟁이 고급신사]로 국제 스포츠 계에 인상을 심어주기도 하였다.

 

 

그는 19819월 독일 바덴바덴(Baden-Baden) 84IOC 총회에서 1988년 올림픽 유치 당시 서울 유치 활동에 회의적이고 미온적인 태도로 일관했다는 지적도 있었던 그는 19831983년 지병이었던 폐암으로 타계하였다.

 

 

1980년 선출된 제7Samaranch IOC위원장이 방한하여 KOC를 방문 당시 정주영KOC위원장과 면담 후 무교동 체육회관 10층 강당에서 올림픽 훈장을 추서(posthumous awarding of Olympic Order)하기도 하였다.

 

 

(Samaranch IOC위원장 방한에 따라 무교동 체육회관 9 KOC위원장 집무실에 모인 당시 한국 체육 계 거물 들/ 좌로부터: 이영호 체육부장관<옆모습>, 노태우 SLOOC위원장, Samaranch IOC위원장, 통역 중인 필자, 정주영 KOC위원장 겸 대한체육회장)

 

 

 

 

당시 필자는 KOC 국제부 직원으로서 IOC위원장과 정주영KOC위원장 면담 및 올림픽훈장 추서 식 사회 겸 통역을 IOC 1공식언어인 불어로 진행한 바 있었다.

 

 

 

 

(1983년 故 김택수 IOC위원 올림픽훈장 추서 식 필자의 사회장면)

 

 

 

5대 한국 IOC위원은 19847월 제88LA IOC 총회 시 선출된 박종규씨198512월까지 15개월간의 최 단기 IOC위원으로서 활동한 바 있다.

 

 

그는 1988서울올림픽대회 준비에 따른 대 IOC 교섭 창구 및 외교채널 역할뿐만 아니라 대한사격연맹 회장과 대한체육회장 겸 재15KOC 위원장(1977-1980)으로 재임 시 한국 스포츠 사상 최초로 1978년 제42 UIT세계 사격선수권대회를 국내에 유치하는 등 한국스포츠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국제스포츠 계, 특히 국제 사격 계에서는 [Pistol Park/피스톨 박]으로 유명하였으며, ANOC 회장 겸 IOC 집행위원으로서 세계 스포츠 계 세력 판도의 한 축을 뒤흔들었고 당시 라틴계 대부로서 활동한 바 있는 멕시코의 Mario Vazquez Rana회장과는 절친한 사이였다.

 

 

Vazquez Rana회장은 1980930일 독일의 Baden-Baden에서의 1988 서울올림픽 유치작전 時 라틴계 IOC 위원들의 표를 몰아주는 데 박종규 IOC 위원의 부탁으로 막후에서 도와줬던 숨은 공로자의 한 사람인 친한 파이며, 2006ANOC 총회 서울 유치에도 적극 지원하여 준 바 있다.

 

 

그는 필자의 국제스포츠외교활동을 높이 샀던 분으로 2008 Beijing개최 ANOC총회 개회식에서 206 NOC대표들이 운집한 가운데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국제스포츠 외교훈장 격인 ANOC공로훈장(ANOC Merit Award)를 수여하는데 총대를 매셨던 고마운 분이었다.

 

 

 

(Mario Vazquez Rana ANOC회장 겸 IOC집행위원이 필자에게 ANOC공로훈장을 수여하고 있다/2008 Beijing개최 ANOC총회 개회식장에서)

 

 

 

(Mario Vazquez Rana ANOC회장 훈장수여에 이어 Jacques Rogge 당시 IOC위원장이 이어 ANOC공로 패를 수여하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과 끈끈한 인간관계를 맺었던 김택수씨와 박종규씨는 제5공화국 출범 초기 신 군부로부터 부정축재 자로 몰리는 등 고초를 겪었던 바 있었다

 

 

하지만 박종규씨는 의리 파로서 신임이 두터워 그 와중에도 (1984.7-1985.12) IOC 위원으로 낙점 받아 지병인 간암으로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타계하기 전까지 IOC 위원으로서 한국 스포츠 국제화와 스포츠외교중흥에 기여한 [큰 별]이다.

 

 

필자는 동독 베를린에서 개최된 1985년 제90IOC 총회 시 당시 노태우 서울올림픽 조직위원장, 이영호 체육부장관 겸 조직위원회(SLOOC)집행위원장, 박종규 IOC 위원, 김운용 WIF 총재, 최만립 KOC 부위원장 겸 명예총무, 한기복 체육부 국제국장, 오지철 체육부 해외협력 과장 등과의 현지 체류 시, 박종규 IOC 위원과 사진도 함께 촬영하였고, 그 분의 개인사진도 찍어주기도 했는데, 동 베를린 IOC 총회가 그 분의 마지막 해외 출장이 되어 버렸다.

 

 

 

 

(좌로부터 최만립 KOC부위원장 겸 명예총무, 박종규 IOC위원, 필자)

 

 

 

(1985 531일 동 베를린 개최 IOC참석 중 독일분단의 상징 Brandenburg gate를 배경으로 기념촬영/좌로부터 2번째가 필자, 이어 이영호 체육부장관부부, 박종규 IOC위원 부부, 김운용 WTF총재, 최만립 KOC부위원장, 한기복 체육부국제체육국장, 관계기관 국장)

 

 

 

 

타계한 박종규 위원의 뒤를 이어 6IOC위원으로 선출된 사람은 서계태권도연맹(WIF)총재를 역임하고 박종규 IOC위원이 청와대 경호 실장 시절 보좌관을 지냈던 김운용 박사, 1986년 제91차 로잔 IOC총회 시 한국의 제6IOC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한국 스포츠의 국제화 및 세계화를 통한 한국 스포츠외교의 [르네상스]시대를 활짝 열었다.

 

 

 

(Dr. Un Yong KIM)

 

 

 

1993-20029년간 대한체육회장 겸 제21KOC위원장을 역임한 그는 1994년 제103차 파리 IOC총회에서 태권도를 올림픽정식종목으로 채택되도록 결정적이고 독보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필자와 김운용 KOC위원장 겸 前 IOC부위원장)

 

 

 

그는 한국어가 올림픽 대회사용 경기언어가 되고 한국선수단의 올림픽금메달 터전이 되도록 주춧돌을 놓았으며 반만년 역사에 빛나는 대한민국의 국기인 태권도를 통하여 한국의 얼과 한민족의 문화를 전 세계에 심었다

 

 

그는 IOC TV 분과위원장, GAISF(국제경기연맹 총 연합회: General Association of International Sports Federations) 회장, ARISF(국제 승인종목연맹 총 연합회: Association of IOC Recognized International Sports Federations) 회장, World Games 창시자, IWGA(국제월드게임연합회: International World Games Association) 창설회장, FINO(국제 올림파프리카 재단: International Olympafrica Foundation) 창설회장, 동 재단 IOC 집행위원장, IOC부위원장, IOC 위원장후보 등 한국 스포츠 인사로서는 국제 스포츠 계에서 전대미문, 전무후무할 경이적이 도약을 이룩하였다.

 

 

 

(Vitaly Smirnov 러시아올림픽위원장 겸 IOC위원(좌측>과 김운용 IOC부위위원 겸 KOC위원장<우측>이 양국 NOC간 스포츠교류협정 체결 후 악수하고 있습니다. 뒷 줄 필자와 당시 장주호 KOC부위원장)

 

 

 

그는 1988년 서울올림픽 대회의 성공적 개최에 큰 몫을 하였고, 한국이 각종 국제종합 경기대회 및 총회 등을 유치하게 함으로써 [동방불패]란 명성도 얻게 되었다.

 

 

 

(Atlanta1996올림픽 참석차 Atlanta국제공항에 한국선수단과 도착한 김운용 당시 KOC위원장 겸 IOC부위원장)

 

 

 

그는 국제 스포츠 계에 한국의 위상을 우뚝 세운 거인임에는 틀림없다.

 

 

 

북한에도 김유순 IOC 위원의 뒤를 이어 장웅 ITF(국제태권도연맹: International Taekwondo Federation) 총재가 1996년 제105Atlanta 올림픽개최 IOC총회 時 한국의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과 한날 한시에 IOC위원으로 선출되어 활동 한 바 있다.  그는 1938년 생으로 2018년 말 80세 정년으로 은퇴하였으며 2019년부터 IOC명예위원으로 선출되었다.  

 

 

Thomas Bach IOC위원장과 개인적 친분관계가 두터운 그가 올림픽운동에 남아 2032년 한반도올림픽유치 및 개최까지 역할을 수행하도록 기여해 주길 바라는 마음이다.

 

 

 

(장웅 북한 IOC위원<우측>과 함께)

 

 

 

만약에 남북통일이 될 경우, 동서독의 통일 독일이 되었을 때(당시 서독 IOC 위원2: Will DaumeWalter Troeger, 동독1: Gunther Heinz) 3명이 되어 동독출신의 Gunther Heinz IOC 위원이 명예위원이 되어 총3명에서 2명으로 축소된 전례가 있었다.

 

 

 

 

북한의 장웅 IOC 위원(193875일생)이 만 80세가 되었던 2018년에 남북통일이 되지 않았으므로 우리는 통일 독일의 판례(Precedent)를 따르게 될 수도 있었겠지만 2019년부터 IOC명예위원으로 선출됨으로 독일과 같은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

 

 

 

 

김운용 위원(1931319일생)과 이건희 의원(194219일생)의 경우, 2명 모두 1999년 이전에 선출되었으므로 정년은 80세이나 2000111차에 시드니 IOC 총회에서 제비 뽑기 결과에 의하면 2007년에 1/3, 2008년에 1/3, 2009년에 1/3에 해당하는 80세 정년 해당 IOC 위원들이 잔여 정년 임기에 한해 재신임 일괄투표를 거쳐 IOC 위원 직을 연장할 수 있도록 되어있었다.

 

 

하지만 김운용 위원의 경우 2005IOC 위원 직을 사임한 바 있으며 그리고 그는 이제 고인이 되었다.

 

 

 

현행 올림픽헌장 상 원칙적으로 한 나라에 한 명 이상의 개인자격 IOC 위원을 선출할 수 없도록 규정되어 있다.

 

 

그러나 1999년 이전에 발행된 올림픽 헌장 (Olympic Charter) 2(Chapter2) IOC 관련 제201.4항을 보면 “한 나라 당 한 명 이상의 IOC 위원은 허용되지 아니한다. IOC는 그렇지만 하계 또는 동계올림픽 대회를 개최한 나라에 대하여 제2 IOC위원을 선출할 수도 있다(There cannot be more than one member elected in a country, The IOC may, however, elect a second member in countries in which either the Game of the Olympiad or the Olympic winter Games have been held)." 라는 구절이 있었다.

 

 

 

이러한 예외 조항에 의거 1996년 제105차 애틀랜타 IOC 총회 시 한국의 제 2 IOC 위원으로 선출된 사람이 바로 삼성그룹의 이건희 회장이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치르고 난 후 만 8년만의 한국스포츠외교의 결실이었다.

 

 

이제 올림픽 헌장에는 이러한 규정도 삭제되어 개인자격 IOC위원은 전 세계에 걸쳐 70명이 정원이며, 어떠한 경우의 IOC 위원 후보라 할지라도 그 후보는 IOC가 승인한 NOC가 있는 국가 출신이었어야 하고 1명 이상은 선출될 수 없다고 되어 있다.

 

 

반면, 2014 128~9일 모나코 개최 제127 IOC 임시총회에서 IOC위원들 만장일치로 통과시켜 승인된 40(20+20)개혁권고조항으로써향후 올림픽운동의 전략적 로드 맵”(Strategic Roadmap of the Future Olympic Movement) 38 3항에 의하면 개인자격의 IOC위원의 경우, 예외적으로 국적에 관계 없이 최대 5명까지 추가 선임할 수 있는 길을 터 놓기도 하였다.

 

 

“3: IOC총회에서는 국적 기준과 연계해 개인 위원들에 관한 한 최대 5건의 특별 예외(a maximum of five special case exceptions)적용 허용 (최대 5명까지 정년 최대4년 연장 가능)”

 

 

<이건희 IOC위원, Sydney2000올림픽 미국여자육상대표 Marion Jones에게 금메달수여>

 

 

 

 

 

 

 

올림픽 헌장에서 명시한 올림픽종목 국제연맹회장자격 IOC 위원 수는 국가별 인원수 제한과 무관한 관계로 한국인으로 유일무이한 올림픽종목 국제연맹회장인 조정원 WTF(세계태권도연맹: World Taekwondo Federation)총재가 20054월 마드리드에서 재선(2005-2009)에 이어 2009-2013 2013-2017 그리고 2019-2023 5선에 성공하였다.

 

 

또 조 총재의 국제 스포츠 계에서의 활동 역량과 신뢰도 및 인맥 구축에 충실하고 태권도가 2008년 이후 London2012, Rio2016, Tokyo2020올림픽에 이르기까지 6연속 올림픽정식종목으로 계속 그 지위가 보장되었으므로, 15(Quota) 내에서 결원이 생길 경우, 선별적으로 임기에 준하는 IOC위원으로 선출될 가능성이 한층 높아졌다.

 

 

하지만 1999년이후 선출되는 IOC위원의 경우, 정년이 70세로 못박혀 1947년 생인 조 총재는 2019년 현재 만 72세로 연령제한에 막혀 더 이상 국제연맹자격 IOC위원선출 자격 가시권에서 벗어났다

 

 

 

[Any other candidature proposal must concern a personality who is a national of a country in which he has domicile or his main center of interests and in which there is a an NOC recognized by the IOC. No more than one member per country may be elected on the basis of such candidatures. The total number of members thus elected within the IOC at any one time may not exceed 70.] 이러한 문구를 읽어보면 우리나라의 경우 2005년 당시 김운용 IOC 부위원장이 IOC 위원 직을 사임하였으나 이건희 IOC위원이 개인자격 IOC 위원자격을 고수하고 있었으므로 어떠한 경우라도 한국으로부터 개인자격 IOC 위원이 더 이상 선출될 수 없는 현실에 봉착하였었다.

 

 

그러나 2017 8월 자진 사임한 이건희 IOC위원의 개인자격 IOC위원 자리가 생겨 1년 뒤인 2018 10 Buenos Aires개최 제133 IOC총회에서 이건희 IOC 위원 후임 IOC위원이 한국에서 나올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었다.

 

 

 

 

 

국제상공회의소 회장으로 선출되었고, 대한성공회의소 회장을 역임한 박용성 IOC위원의 경우 개인자격이 아닌 국제유도연맹(IJF) 회장 자격(국제올림픽종목연맹회장자격 IOC 정원은 15)으로 국적과 관계없이 국제연맹 회장 임기 동안 한해서 선출된 국제연맹 IOC위원이었다.

 

 

따라서 박용성 IOC위원의 경우 IJF 회장 자리를 계속 유지하였다면 만70(2010)년까지 IOC위원으로서 활동하게 되어있었으나, Beijing2008올림픽을 1년 앞둔 2007 97 IJF내 반발 무마 카드로 IJF의 발전을 위하여 IJF회장 직을 전격 사퇴함으로 IOC위원자격도 동시에 내려 놓은 바 있다.

 

 

 

        (박용성 前 IOC위원 겸 前 IJF회장 겸 前 KOC위원장)

 

 

 

반면 ANOC 및 대륙 별 NOC 연합회(ANOCA, EOC, OCA, PASO ONOC)비롯한 206개 각국 NOC위원장 또는 집행위원 급 이상의 후보자가 15명 정원의 NOC 자격 IOC 위원으로 추천되어 절차를 거쳐 선출되는 길 역시 열려 있었다.

 

 

하지만 이 경우, 특출한 재주와 국제 스포츠 계에서의 오랜 기간 공들인 뛰어난 인맥관리,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IOC 내부로부터의 전폭적인 협조 없이는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기]식으로 간주되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한국 또는 통일 한국에서 미래의 IOC 위원을 꿈꾸는 사람의 경우 첫째 올림픽 종목 국제연맹 회장으로 피선된 뒤 오랫동안 각고의 노력과 스포츠 외교력으로 꽃피워내야 IOC 위원이 될 수 있겠다.

 

 

Beijing2008올림픽대회에서 선수자격으로 IOC위원 직(2008-2016)에 선출되었던 Athens2004올림픽 태권도 금메달리스트인 문대성 前 동아대 교수가 대한민국 선수자격 IOC위원 제1호였다.

 

 

대한민국 제1호 선수자격 IOC위원(2008~2016)에 이어 제2호 선수자격 IOC위원(2016~2024)으로 Athens2004올림픽 탁구 금메달리스트인 유승민 현 대한탁구협회장(2019~현재) Rio2016올림픽 기간 중 세계각국 선수들이 참여한 투표에서 문대성위원에 이어 선수자격 IOC위원으로 연이어 선출되었다.

 

 

 

(유승민 선수자격 IOC위원/출처: IOC website)

 

 



4명의 선수 IOC위원을 뽑았던 Rio2016 선거전에서는 유승민 선수를 포함 총 23명이 입후보 했으며 이들 중 유승민 선수는 투표집계결과 Beijing2009올림픽 독일의 여자 펜싱 금메달리스트인 Britta Heidemann( 5815 표 중 1603표 획득)에 이어 2(1544표 획득)를 기록하며 선수자격 IOC위원으로 선출되어 맹활약 중이다.

 

 

또한 이기흥 대한체육회(KSOC)회장은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기 보다 어렵다는NOC자격 IOC위원으로 당당히 선출되는 기염을 토한 바 있다.

 

 

그는 2019 626일 열린 제134 IOC총회에서 총 10명의 후보에 대한 찬반투표 결과 전체 64표 중 기권2, 찬성57표를 획득하여 NOC자격 IOC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기흥 NOC자격 IOC위원/출처: IOC website )

 

 

 

이기흥 신임 IOC위원은 한국최초로 국가올림픽위원회(NOC)자격 IOC위원이자 대한민국 통산 11번 째 IOC위원으로 등극하는 영예를 안게 되었다.

 

 

이로써 대한민국은 개인자격 IOC위원, 국제연맹(IF)자격 IOC위원 및 선수자격 IOC위원이 이어 국가올림픽위원회(NOC)자격 IOC위원 카테고리 모두를 아우르는 IOC위원 보유국이 된 셈이다. 현재 대한민국 IOC위원은 이기흥 대한체육회장과 유승민 대한탁구협회장 등 2명이다.

 

 

*References:

-현장에서 본 스포츠외교론(윤강로 저)

-IOC website(사진)

-대한체육회(사진)

-연합뉴스(사진)

 

 

Posted by 윤강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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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외교2019.10.11 12:22

[대한민국스포츠외교실록-올림픽보이콧종지부완결판 동구권국가들의 서울1988올림픽참가결정배경(23)]

 

 

<올림픽보이콧종지부완결판-동구권국가들의 서울1988올림픽참가결정배경>

 

당시 소련을 위시한 동구권국가들의 서울올림픽참가결정은 1981 9 30일 바덴바덴 IOC총회 이후 한국정부의 줄기찬 대 동구권국가 올림픽문호개방정책과 KOC의 유연한 친선우호 스포츠외교의 결실로 평가 받고 있다.

 

대한민국정부는 바덴바덴 IOC총회에서 서울올림픽 유치신청서를 제출하면서 대통령의 서명이 포함된 문서로서 IOC회원국 및 올림픽가족 모두에 대한 한국방문 보장을 천명하였다.

 

이와 같은 한국정부의 미수교국에 대한 유연한 외교정책은 1984 LA올림픽까지 별다른 장애 없이 대한민국 스포츠외교의 주종을 이루어왔으나, 같은 해 5월 소련이 LA올림픽 불참을 선언하면서 어려움을 겪기 시작하였다.

 

한국의 줄기찬 외교와 IOC ANOC 등의 긍정적인 반응은 1985년 멕시코시티개최 ANOC총회(멕시코 선언문 채택) 1986 4월 서울에서 개최된 ANOC총회를 계기로 커다란 진전을 보여 동구권국가들 대부분이 서울올림픽 참가로 방향을 선회하기 시작했다.

 

ANOC서울총회와 더불어 IOC가 주관한 남북체육회담과 이 회담을 통한 북한 측의 무리한 요구내용 등이 동구권국가들의 서울올림픽참가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를 갖게 하였다.

 

서울 ANOC총회 이후 동구권국가의 서울올림픽참가에 대한 결정적 계기는 1985년 동 베를린 개최 IOC총회 후 동독의 호네커(Honecker) 당서기와 에발트(Ewald) 체육 장관 의 서울올림픽참가 공식시사로 나타났다.

 

특히 1987 5월 이스탄불에서 개최된 IOC총회에서 한국은 미수교국이 서울올림픽에 선수단을 보낼 경우 자국항공기의 서울국제공항 이착륙 허용을 보장함으로써 미수교국 특히 공산권국가 들의 긍정적인 반응을 얻는 데 성공했다.

 

동독이 서울올림픽참가를 천명하고, 1985년부터 소련 등 동구권국가들이 서울에서 개최된 각종 국제스포츠대회에 참가함으로써 이들 미수교국들의 서울올림픽에 대한 긍정적 자세가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1985년 동 베를린 개최 IOC총회 당시: 좌로부터 노태우 SLOOC1988조직위원장-사마란치 IOC위원장-박종규 IOC위원-이영호 체육부장관 겸 SLOOC집행위원장)

 

 

이 같은 한국 측에 유리한 분위기조성은 1987년 소련, 동독, 불가리아, 헝가리, 폴란드 등의 공식 NOC대표단이 서울을 방문하고 당시 루마니아의 Siperco IOC부위원장이 수 차례 한국을 방문하면서 서울올림픽 참가발표는 없었지만 사실상 서울올림픽참가를 전세계에 확인시켜주었다.

 

동구권 NOC대표단은 서울방문에서 나라별로 관심을 나타내면서 구체적인 협의사항을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와 상의하기 시작하였다.

 

소련은 선수단수송문제와 관련 자국선박 및 항공기에 의한 직접수송을 제의했고 한국 측은 이를 수락하였다.

 

또 동독은 서울올림픽참가 시 공산국이고 미수교국인 동독의 정식 국호, 국기, 국가사용을 타진하여 이에 대한 보장을 받고 참가를 결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동독은 특히 잠실주경기장의 5, 10, 20, 30m 상공의 풍속을 묻고 미사리 조정경기장의 바람세기와 파고 등 예기치 못한 세부사항을 질의 하는 등 이때 이미 확고한 참가의사를 간접적으로 확인시켜주었다.

 

소련, 동독과는 달리 불가리아는 1992년 소피아 동계올림픽 유치노력과 관련, 서울올림픽 참가를 이미 기정사실화하고 있었고, 헝가리는 서울올림픽의 체조, 펜싱경기장의 전광 스코어보드 설치권을 따내면서 이미 서울올림픽 참가를 기정사실화하기도 하였다.

 

폴란드와 루마니아는 이미 공식대표단 및 책임자 차원에서 수 차례 걸친 서울방문으로 긍정적인 시그널을 보여주었다.

 

Marian Renke 폴란드 체육부장관은 ANOC사무총장 자격으로 여러 차례 서울 방문을 통해 서울올림픽에 대한 호감을 갖기 시작했고, 루마니아의 Siperco IOC부위원장 역시 한국이 올림픽에 전혀 문제가 없음을 수 차례에 걸친 서울방문에서 확인했다.

 

1987 9월 소련 수쿠미에서 개최된 사회주의국가 체육장관회의에서는 수 차례 계속된 한국과의 접촉과 사전조사결과에 의거 서울올림픽참가를 내부방침으로 결정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수쿠미회의는 공식적으로는 북한의 입장을 지지했으나 1987 12월과 1988 1 17일 사이에 IOC의 서울올림픽참가초청장에 대하여 모두 공식참가통보하기로 결정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같은 사회주의국가들의 참가결정은 동독과 헝가리가 사회주의국가들 가운데 IOC통보 1위를 차지하기 위하여 물밑경쟁을 했었다는 이야기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동독은 1987 12 21일 국가체육위원회가 서울올림픽참가를 결정하고 사회주의국가들 가운데 가장 먼저 통보하기로 했으나 이를 알아차린 헝가리가 우편대신 팩스로 IOC에 통보함으로써 동독보다 3시간 앞서 등록 접수했다는 에피소드가 회자된 바 있다.

 

 

 

Posted by 윤강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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