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과 마음씀2021. 2. 8. 12:48

[우리들교회 202127일 주일 예배 말씀 요약(사도행전 15: 36~ 41/ 성령의 견고함)]

 

<사도행전 15:36~41>

 

(35.바울바나바안디옥에서 유하며 수다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주의 말씀을 가르치며 전파하니라(But Paul and Barnabas remained in Antioch, where they and many others taught and preached the word of the Lord)

36며칠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고 (Some time later Paul said to Barnabas, "Let us go back and visit the brothers in all the towns where we preached the word of the Lord and see how they are doing)

37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Barnabas wanted to take John, also called Mark, with them)

38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but Paul did not think it wise to take him, because he had deserted them in Pamphylia and had not continued with them in the work)

39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They had such a sharp disagreement that they parted company. Barnabas took Mark and sailed for Cyprus)

40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but Paul chose Silas and left, commended by the brothers to the grace of the Lord)

41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니며 교회들을 견고하게 하니라 (He went through Syria and Cilicia, strengthening the churches)

 

<Prologue>

주님 우리가 참 견고 하기를 원하는 데 견고 하기가 어렵습니다믿음도 견고하고 모든 삶이 견고 하기를 원합니다성령의 견고 함에 듣고자 하니 말씀하여 주시옵소서.

유대인 교회와 이방인 교회로 쪼개질 뻔했지만 위기를 넘겼습니다이제 결정을 했으니 룰루랄라했으면 좋겠으나 그렇지 않네요. 가장 큰 갈등 상황이 기다리고 있습니다갈등 충만은 성령 충만입니다깊은 바다로 들어갈수록 어떤 상황 속에서도 요동함이 없게 됩니다성령의 견고 함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말씀 요약>

 

1.   끊임없는 형제의식의 돌봄이다(35~36)

 

35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유하며 수다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주의 말씀을 가르치며 전파하니라.

*견고-흔들리는 것을 움직이기 않게 고정시키고 튼튼한 지대에 딱 붙임(딱 풀)

말씀이 들리면 마구 흔들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요동치 않고 중심을 잡을 수 있다.

 

36 며칠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고

며칠 후에-두세 달 밖에 안 되는 기간이지만 개인적인 일이 아닌 하나님의 일에 매진하였음을 보여주는 의미다

말씀이 들리면 요동치 않고 중심을 잡을 수 있다.

말씀을 제대로 들릴 때 나타나는 현상은 형제의식이다.

자신이 전도한 형제들을 다시 돌아 보자는 소박한 생각으로 떠난 것이 2차 전도여행이다.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는 것은 어려운 것이며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가장 요동한다.

성령의 결정을 하면 주시는 축복이 성령의 견고 함이다.

성령의 결정으로 관계가 편안해지는 것이고 성령의 결정을 하면 주시는 가장 큰 축복은 형제의식이다.

바울에게 있는 형제 의식은 유대인, 이방인, 전도한 자도 모두 형제이며 진정한 형제의식이다

성도를 직접 방문하고 싶은 것을 편지에서 표현했다. (로마서, 데살로니가전서 등)

공격이 시작된 안디옥(Antioch), 루스드라(Lystra), 이고니온(Iconium) 교회에 빨리 편지를 전달하고 싶었다.

사도 바울은 완전히 안정된 인정받는 위치가 되었지만 다 내려놓고 떠나고자 했는데 이것이 견고 함이다.

15:14에서의 영혼을 돌보기 위한 심방을 한다고 하는 것과 같은 단어이다.

부정과거는 단 번에 결심을 한 것이라는 뜻이며 파카드, 결정에 따르기를 결정하고 단번에 돌이킴을 강조한다.

바울의 관심은 항상 구원에 맞춰져 있는데 형제 의식이 없으면 돌봐도 무섭고 자기 의가 된다.

목장이 축복의 근원이므로 하나님은 여러분의 섬김을 손톱만한 것도 다 기억하신다. 생색은 금물이다.

 

(적용#1)

-거친 파도가 와도 나를 견고케 하는 것이 형제의식이란 것이 얼마나 인정이 되나?

-목장에서 어떤 목자이고 어떤 목원인지?

-나는 끊임없이 돌보고 있나? 돌봄을 받고 있나?

 

나눔에 공감이 안 된다는 것은 애통함이 없는 것이다

 

칭찬을 안 하면 내가 불편 하구나생각하는 목자는 불안한 것인데 아무 얘기도 편하게 할 수 있어야 성령의 견고 함이다.

 

2.   사람을 의지하지 못하게 하신다(37)

 

37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마가 요한은 예루살렘 출신이고 영적 육적으로 다이아몬드 수저이다.

바나바의 생질(사촌동생)로 헬라어를 잘하고 어머니 마리아도 집을 기도 처소로 내놓기도 했다.

1차 여행 때도 같이 갔지만 돌아갔다. 바나바는 마가의 수치를 씻어줄 기회라고 생각했으나 바울이 반대하였다

38 바울은 밤빌리아(Pamphylia)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마가의 중도 포기는 자신들을 버리고 이방 선교를 포기한 것으로 간주하여 바울의 가차 없는 거절과 바나바의 맹목적인 애정이 충돌한 것이다

바울에게 지속적으로 요청하면서 바나바는 마가를 데려가자고 생각했는데 전도여행을 끝까지 할 사람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사촌동생에게 기회한 번 더 주자는 것에 관심이 있었다.

바나바는 과거, 바울은 현재 부정법으로 묘사하였는데 한 번 데리고 떠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같이 다니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 것이다.

바나바는 마가를 단지 한 번 데리고 가는 정도의 별스럽지 않은 문제로 생각했고 마가보다는 자기의 체면이 더 중요했다.

바울에게는 마가를 데리고 가는 것은 끝까지 가는 것이었기 때문에 신뢰감이 없는 사람과 지속적, 반복적으로 부딪힐 것을 염려하여 절대로 안 된다고 확고하게 생각한 것이다

바나바의 원함과 바울의 판단의 충돌은 바나바는 감성으로 바울은 이성으로 판단한 것인데 각각 정과 구원의 다른 시선으로 마가와는 같이 동행 할 수 없었다.

 

39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Mark)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Cyprus0로 가고

두 사람 사이의 갈등은 이미 (2: 11, 13, 20)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갈등에서부터 시작됐다.

바울이 베드로를 공개적으로 책망하였는데 그것은 믿음과 주님의 사랑이 있어서 베드로를 책망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바울은 베드로나 바나바를 인본적으로 책망한 것이 아니다.

두 사람의 결별이 기복적인 가치관으로는 도저히 해석이 안 된다.

구속사적 가치관으로 보면 바울에게 반드시 있어야 할 사건이다.

바울이 사람을 의지하지 않도록 하는데 유대민족에 대한 자부심과 유대교에 대한 열심이 있었던 사람이 바울이다.

유대인이 바울을 돌로 죽이려고 했고 바나바가 있었기에 1차 선교 전도 여행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앞으로의 구원 사역을 통해서 가치관의 차이가 드러났다.

외식 사건이 일어났고 마가 사건에서 인본적인 태도를 보이는 실수를 바나바가 자꾸 하니(성품 적 한계) 돌이키는 계기가 되었고 갈라섰다.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게 하셨다.

사람을 의지하지 않게 하는 것이 성령의 견고 함이다.

10: 24’처럼 사랑과 선행을 강하게 일으키는 것으로 다툼이 사랑과 선행의 자극제가 되었다는 뜻이다.

의도치 않은 갈등으로 바나바는 바울보다는 마가를 선택하고 바나바의 고향 구브로(Cyprus)로 떠나고 사도행전의 무대에서 퇴장하였는데 혈육과 고향을(지역감정)을 택한 것이다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를 견고케 하는 일에도 쓰임을 받았지만 마지막에 고향과 혈육이 있는 성품의 한계를 보인 것이다

 

(적용#2)

-바나바처럼, 바울처럼 절대적으로 의지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

-여러분의 기준은 감정인가? 이성인가? 구원인가? 정인가?

 

3.   주의 은혜에 맡기는 것이다(40)

 

40 바울은 실라(Silas)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41 수리아(Syria)와 길리기아(Cilicia)로 다니며 교회들을 견고하게 하니라 " 

견고란 단어가 신약에서 4 32, 41절 두 번씩 나온다.

비 온 뒤에 땅이 굳는 것인데 이 다툼이 세계적인 견고함이 되어서 세계적인 선교로 나아가게 되었다.

바나바와 갈라서자 마자 실라를 데리고 떠났다. 실라(Silas)도 로마시민인데 34-실라는 그들과 함께 거하기를 작정하고. 일정을 변경해서 육로로 가는 여정으로 여러 교회들을 심방 했다.

바나바가 계속 감정적으로 움직인 것이 보인다. 바울이 오지 못하도록 한 것인데 바울을 돕는 은사가 여기까지 쓰였다.

 

(적용#3)

-의지했던 사람과의 심한 다툼이 우리를 견고하게 한 일이 있나?

-바울과 바나바도 다투는데 내 다툼을 합리화하고 있지는 않은가?

 

구원의 일과 인본적인 일이 늘 대립한다.

바나바(Barnabas)가 일당 천이었는데 드디어 바나바도 떠난다.

복음을 전하는 일이 참 외로운 일이다.

이렇게 (바나바가) 떠났기 때문에 2차 전도 여행의 열매가 생겼다.

 

 

<Epilogue>

 

1)  갈등 충만=성령 충만이며 성도를 견고하게 한다

2)  성령의 견고함은 끊임없는 형제 의식의 돌봄이 있어야 한다

3)  성령의 견고 함은 사람을 의지하지 못하게 하고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으며 그래서 주의 은혜에 맡기는 것이다

4)  말씀이 들리면 마구 흔들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요동치 않고 중심을 잡을 수 있다.

5)  말씀을 제대로 들릴 때 나타나는 현상은 형제의식이다.

6)  자신이 전도한 형제들을 다시 돌아 보자는 소박한 생각으로 떠난 것이 2차 전도여행이다.

7)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는 것은 어려운 것이며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8)  사람과의 관계에서 가장 요동한다.

9)  성령의 결정을 하면 주시는 축복이 성령의 견고 함이다.

10) 성령의 결정으로 관계가 편안해지는 것이고 성령의 결정을 하면 주시는 가장 큰 축복은 형제의식이다.

11) 바울에게 있는 형제 의식은 유대인, 이방인, 전도한 자도 모두 형제이며 진정한 형제의식이다

12) 사도 바울은 완전히 안정된 인정받는 위치가 되었지만 다 내려놓고 떠나고자 했는데 이것이 견고 함이다.

13) 바울의 관심은 항상 구원에 맞춰져 있는데 형제 의식이 없으면 돌봐도 무섭고 자기 의가 된다.

14) 목장이 축복의 근원이므로 하나님은 여러분의 섬김을 손톱만한 것도 다 기억하신다. 생색은 금물이다.

15) 나눔에 공감이 안 된다는 것은 애통함이 없는 것이다

16) 칭찬을 안 하면 내가 불편 하구나생각하는 목자는 불안한 것인데 아무 얘기도 편하게 할 수 있어야 성령의 견고 함이다.

17) 바나바(Barnabas)의 원함과 바울(Paul)의 판단의 충돌은 바나바는 감성으로 바울은 이성으로 판단한 것인데 각각 정과 구원의 다른 시선으로 마가(Mark)와는 같이 동행 할 수 없었다.

18) 바울이 베드로를 공개적으로 책망하였는데 그것은 믿음과 주님의 사랑이 있어서 베드로를 책망할 수 있었던 것이다.

19) 사람을 의지하지 않게 하는 것이 성령의 견고 함이다.

20) 바나바는 안디옥(Antioch) 교회를 견고케 하는 일에도 쓰임을 받았지만 마지막에 고향과 혈육이 있는 성품의 한계를 보인 것이다  

21) 비 온 뒤에 땅이 굳는 것인데 이 다툼이 세계적인 견고함이 되어서 세계적인 선교로 나아가게 되었다.

22) 구원의 일과 인본적인 일이 늘 대립한다.

 

 

Posted by 윤강로
말씀과 마음씀2021. 2. 2. 21:07

[우리들교회 2021131일 주일예배 말씀 요약(사도행전 15: 22~ 35/ 성령의 결정)]

 

<사도행전 15:22~35>

 

22 이에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가 그 중에서 사람들을 택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보내기를 결정하니 곧 형제 중에 인도자인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라(Judas (called Barsabbas) and Silas)더라

23 그 편에 편지를 부쳐 이르되 사도와 장로 된 형제들은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인 형제들에게 문안하노라(To the Gentile believers in Antioch, Syria and Cilicia: Greetings)

24 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지시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혼란하게 한다 하기로

25 사람을 택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인 우리가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너희에게 보내기를 만장일치로 결정하였노라

26 (절에 포함됨)

27 그리하여 유다와 실라를 보내니 그들도 이 일을 말로 전하리라

28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는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노니 (It seemed good to the Holy Spirit and to us not to burden you with anything beyond the following requirements)

29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 (You are to abstain from food sacrificed to idols, from blood, from the meat of strangled animals and from sexual immorality. You will do well to avoid these things. Farewell)

30 그들이 작별하고 안디옥에 내려가 무리를 모은 후에 편지를 전하니

31 읽고 그 위로한 말을 기뻐하더라

32 유다와 실라도 선지자라 여러 말로 형제를 권면하여 굳게 하고

33 얼마 있다가 평안히 가라는 전송을 형제들에게 받고 자기를 보내던 사람들에게로 돌아가되

34 (없음)

35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유하며 수다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주의 말씀을 가르치며 전파하니라

 

<Prologue>

왜 교회가 한마음이 안돼서 자꾸 이렇게 탄압이라고 하나 코로나인데..... 그래서 요즘에 이렇게 사도행전 하면서 같은 예수를 믿는데 유대인과 바울과 하나가 안되잖아요남의 이야기 같지 않습니다이럴 때일수록 그래도 우리가 우리의 길을 잘 가야지 않겠습니까? 법을 지켜야 하고 이럴 때일수록 흘러 떠내려가지 않고 목장 예배 잘 드리고 영적 육적 의무를 잘하시고 우리가 사회법을 잘 지키고 믿음을 지키는 것이 중요한 것임을 보여야 합니다소수일지라도 본을 보여주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다시 한번 성령의 결정에 대해 주님의 말씀 듣고자 합니다말씀하여 주시옵소서 듣겠습니다아멘.

 

아까 다 말씀드렸지만 성도 중에 베이비시터(baby-sitter)를 하기 위해서 열 군데도 지원을 했다는 거예요. 한 군데도 채용이 안돼서 연락을 해 보았데요요즘 사람 구하기 어려운데 왜 그런가 했더니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합니다.

 

이런 이야기는 처음 들었습니다. 우리의 잘못도 있겠지만 말할 수 없는 위기인 것 같습니다문제가 일어난 곳들이 본인들이 옳다고 결정했을 텐데 결정을 가지고 왔어요. 우리는 많은 결정을 내리고 살고 있습니다한 연구팀 논문에 따르면 하루 동안 내리는 결정이 226.7개라고 합니다얼마나 많겠습니까? 다 중요한 건 아니겠죠. 어떤 결정은 인생을 바꿀 만큼 인류 역사를 바꿀 만큼 중요한 결정합니다바로 한 영혼을 위한 결정입니다모두가 승자가 되는 성령의 결정이었습니다.

오늘은 성령의 결정에 대해 같이 알아보겠습니다.

 

<말씀 요약>

 

1.   마무리를 잘해야 합니다.

15장에서 여러 가정을 거치며 판정승으로 야고보(James)가 이겼지만 심판이 손을 들어야 승자가 되죠. 그러려면 마무리가 중요합니다마무리를 위해서 결론적으로 보면 온 교회가 심판관이 되어 결정을 하더라고요야고보가 아니고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인 유다와 실라(Silas)를 지도자를 파송합니다마무리를 못하면 모든 것은 수포로 들어갑니다이런 것을 하려면 형제 의식을 가지고 공감 배려 사과를 해야 합니다그래서 마무리를 잘하도록 하기 위해서 세 가지 소 대지로 말씀드립니다.

 

 1) 형제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22절 이에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가 그 중에서 사람들을 택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보내기를 결정하니 곧 형제 중에 인도자인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라더라

23절 그 편에 편지를 부쳐 이르되 사도와 장로 된 형제들은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인 형제들에게 문안하노라

 

이 두 절에 형제가 3번 나옵니다보내는 사람은 사도 달과 장로된 형제 보내는 증인들도 형제라고 합니다우리는 베드로와 형제들과의 야고보의 형제들이 생각 나야 합니다편지를 쓰는 모교회의 지도자들과 이방인 신자들이 주안에서 형제라는 것입니다나와 네가 똑같은 것을 분명히 하며 이 결정을 선포하겠다는 것입니다그들의 마음이 녹지 않았을까 싶습니다호칭 하나가 이렇게 중요할 수 있습니다. 1800년대 일본에서 영국의 여왕을 여황 폐하라고 했다고 외교적인 문제가 되었어요영국에서는 여왕 폐하라고 하는데 여황이라고 퀸 이 아니고 황제라고 그래서 거기 호칭 하나가 국격을 오르락내리락 하듯이 형제라는 호칭이 이렇게 중요합니다수리아(Syria)는 안디옥(Aantioch)에 있는 로마의 속주 길리기아(Cilicia)는 서편에 있는 속지입니다바울의 고향 다소가 길리기아 주에 있죠에 편지는 단지 안디옥교회만 있는 것이 아닌 모든 교회를 위한 결정입니다안디옥교회가 질문을 해서 했기 때문에 안디옥교회의 자존감도 높여주었습니다.

 

2) 배려를 잘해야 합니다.

신뢰받도록 총력을 기울이고 증인을 세워야 하는데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가 편지를 써서 안디옥에 보내기로 합니다증인을 보내는 것은 그 편지가 예루살렘 교회 결정이라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바울과 바나바 같은 자에게도 증인이 필요합니다증인들을 왜 1000Km나 갔다 오게 하겠습니까? 갈등을 미리 차단하려는 배려인거죠사도들과 장로들의 대답을 기다렸을 성도들의 마음을 헤아려서 27절에 그리하여 유다와 실라를 보내니 그들도 이 일을 말로 전하리라 바울과 바나바와 같이 이제 예루살렘 증인들을 통해서 교회의 결정사항을 한 장의 편지만 보내기보다 교회가 사랑하는 사람을 뽑아서 이방인 지도자들에게 말로 설명하게 했습니다지도자들이 성령의 결정을 하기까지 어떤 결정을 거쳤나 의견을 개진을 한 이야기를 생생히 전달하게 했습니다 안심할 수 있도록 그들 입장에서 공감하고 배려하도록 했습니다마무리 3번째는

 

3) 사과를 잘해야 합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안디옥교회의 어려움으로 인해 사과합니다.

24
절입니다.

24
절 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지시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혼란하게 한다 하기로

 

안디옥교회 질문에 대해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은 유대주의자들이 이방인을 곤란하게 한 것에 대해 사과했습니다그들의 정체도 알려주었습니다예루살렘 교회에서 보낸 사람이 아니었다할례 주의자들과 관계를 끊고 비판하는 내용이기도 했어요노선을 따라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다는 것을 선포하기도 했어요 이런 마무리가 중요합니다. 그냥 그게 맞아 믿음으로 구원받는 거야 이런 식으로 하면 안 되고 마음을 배려하고 공감하고 같은 형제 다 사과할 것은 사과하는 이것이 결정을 내릴 때 중요합니다.

 

제 설교는 누워서 커피 마시면서 듣는 설교가 아닙니다제 설교는 그러더라고요 아무것도 모른다고 녹취를 하면서 들으면 너무 은혜가 되는데 아니면 방언 같다고 다들 옷 입고 책상에 앉아서 녹취하세요교회가 인정하지 않는 성경공부는 위험합니다할례만 받는다고 구원받는다고 하니까 꼭 육적인 구원 같아서 다들 혹해요. 괜히 따라다니는 것 아니에요그래서 이번에 이런 학교 사태도 일어난 것이잖아요 여러분들은 교회가 인정하지 않는 곳은 가면 안 됩니다내가 보기에 괜찮아 그것은 교만입니다바울 사도도 공격할 만큼 무섭게 공격하는 것이 유대주의자 할례주의자 이단들 이러잖아요 여러분은 어떻게 분별합니까? 공회 협의회에서 이단이라고 하면 믿어야 하는데 괜찮아 이러고 바울도 당했습니다이렇게 옳다고 해도 우리가 지금 정말 진영논리도 무섭고 교회 가운데 갈등도 무섭고 이럴 때일수록 복음을 전해야 하는데 인권이 왕 노릇을 해서 사회가 문란하고 기도를 해야 합니다지금 우리가 왜 교회에서 이렇게 그러는지 말씀이 전혀 안 들리시는 거예요우리 교회에서도 이러는데 얼마나 공격을 받겠는가 하게 됩니다바울도 이렇게 그들에게 공격을 당했잖아요 유대주의자들이 이렇게 괴롭히는 일을 왜 바울 사도가 당하나 싶지만 바울과 바나바가 택자가 되어서 당해야 유익한 일이 있습니다결과적으로 선을 이루었습니다그랬기에 예루살렘 공회가 소집되었고 역사적인 사건이 되었습니다어떤 진영논리가 종교가 되니까 네 편 내 편가르고 있습니다그러니 바울이 이렇게 힘들어서 공의회가 열렸기 때문에 이것조차 협력해서 선을 이루었습니다결정을 할 때는 형제 의식을 가지고 유리그릇 다루듯이 배려를 하고 사과를 하면 최고의 마무리가 되잖을까 싶습니다.

 

우리의 마무리는 어떨까요먼저 자녀의 상황을 배려하고 사과할 것은 사과해야 목장 직장사업장에서 하는 결정이 성령의 결정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 싶은가요한 사람의 결정이 집과 회사 나라의 구원을 가지고 올 수 있습니다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자녀 남편 앞에 무릎 꿇고 사과할지 모릅니다당신이 내 믿음을 위해 수고하네요, 미안해요! 하는 한 사람의 사과(결정)으로 수많은 가정이 살아났습니다.

 

(적용#1)

-여러분은 세상에서 문자적으로 마무리를 잘합니까? 시작만 잘합니까?
-
말이 안 되는 상황에서 형의 신을 가지고 배려하고 공감하며 진정한 사과를 하면 어디까지 했나요?

 

다들 그러죠 사과도 진정성이 없다고 하죠그러니까 모두 진정성 있는 한 단계에 어디까지 했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요즘 우리들 교회는 정인이 엄마 때문에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2.   한마음으로 내리는 결정입니다.

25-26절 사람을 택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인 우리가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너희에게 보내기를 만장일치로 결정하였노라

 

그래서 다 이제 결정을 하고 서신을 보내기로 했다는 이야기입니다만장일치로 번역된 마음을 하나로 모아 이 의미입니다이 단어는 헬라어는 사도행전에서 열 번 쓰였습니다. ‘마음을 같이하여가 같은 단어입니다여기서도 사도들과 장로들과 성도들이 마음을 같이하여 결정했다고 합니다얼마나 치열한 결정을 했을지 보입니다모든 성도가 한마음이 되었습니다여기에는 생명을 아끼지 않는 바울과 바나바와 같은 자가 있었습니다안디옥교회에서는 계속 생각하며 기다렸을 것입니다의논의 결과 예루살렘 교회와 한마음이 되어 바울과 바나바를 지지한 거예요. 안심하고 결정대로 하면 된다는 거예요. 사도들은 율법과 할례를 가지고 바나바와 바울을 인정합니다우리가 사랑하는 자라고 부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해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라고 합니다온 한 마음으로 바나바와 바울을 칭찬했어요. 교회 혼란을 초래한 어떤 사람들은 복음에 대한 이해조차 없는 사람이었어요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 생명을 아끼지 않는데 그들은 자기 생명을 아끼는 이기주의자였습니다.

 

김영석 교수가 백 년을 살아보니 알겠다고 합니다절대로 행복할 수 없는 부류가 있는데 하나는 정신적 가치가 없는 사람들인데 물질적인 가치에 두는 사람 두 번째는 이기주의자인데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사는 사람인데 인격을 가지지 못하고 이 두 개가 없는 사람은 행복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그러니까 정신적 가치 이기주의자 절대 행복할 수 없다고 합니다. 바로 교회로 와서 괴롭힌 부류가 그런 부류입니다이런 사람은 선교 화합에 관심 없어요. 예루살렘 교회에서 성도에요 무지한 열심히 교회에서 보내지 않았는데 안디옥교회 가서 분탕질을 했잖아요. 바로 예루살렘 교회에서 잘못했다고 사과했잖아요 이래서 위대합니다그러나 결국 어떤 이상한 사람 때문에 공회도 열렸고 사도들에게 인정 못 받았는데 바울과 바나바가 인정을 받았잖아요 잘 간 거죠 여기를 예루살렘 공회를 그 동안의 설움이 씻겼을 것 같아요자는 말씀대로 적용을 하면 어디로 가든 책임 지실 줄 믿습니다얼마나 한마음이 됐다는 것을 강조했는지 만장일치라고 했잖아요이렇게 한마음이 되어서 결정할 수 있었던 힘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일치하는 말씀을 기준으로 삼으니 다른 기준을 가졌던 성도들이 한마음으로 결정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 베드로의 경험이 대단해도 야고보의 권위가 대단해도 한 마음이 될 수 없어요.

 

하나님의 말씀만이 서로 다른 마음을 한마음으로 모을 수 있는 거예요그래서 온 교회가 같은 본문으로 묵상하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몰라요 그래서 우리가 살아남고 있는 거예요 우리 같은 말씀을 보고 같이 나누고 하는 거 공동체가 함께 기준으로 할 말씀이 있다는 것이 대단한 거예요우리는 전자동으로 이기적이고 인본적입니다그런 죄인이 공동체를 이루고 있으니 무슨 결정을 할 수 있겠어요끊임없이 자기 의견이 나올 것입니다우리가 오직 말씀에 의거해서 성령의 결정을 따라갈 수 있는 것을 믿습니다구원 때문입니다그래서 한마음이 가능합니다오직 한마음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구원 때문입니다십자가는 지혜고 타이밍입니다성령의 결정을 했기 때문에 호적도 지키고 구원도 이루어지고 믿음의 조상으로 자리매김을 할 수 있었습니다가문의 영광이 되었습니다.

 

(적용#2)

-공동체에서 아직 한마음이 되지 못한 일은 영육 간에 무엇입니까?

 

3.   여전한 방식으로 옳게 살게 하는 결정입니다.

 

28절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는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노니

29절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

여기서 옳은 줄 알았노니라고 하는 것은 앞에서 결정이라는 말하고 똑같아요. 원어가 정확히 번역하면 성령과 우리는 다음과 같이 결정한다고 합니다예루살렘 회의 결정문에서 마지막을 적으면서 혼자서 내린 결정이 아니라 성령의 결정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성령의 구원을 목적으로 의논을 걸쳐 돌보심을 통해 이룬 결정이라고 합니다말씀대로 이루어진 결정이라고 밝히셨습니다.

모든 교회가 듣고 순종해야 할 부분이라고 말해줍니다야고보가 말한 4가지 결정인데 우상의 재물과 피와 목메어 죽인 것, 행음 등 요긴한 것들이라고 했는데 그것 외에 짐을 지우지 않겠다 과합니다 그것만 지키면 된다마태복음에 수고하고 짐 진 자들에 내게 오라고 했는데 짐을 지우면 되겠습니까 먼저 자유 해야 해요 자유 하면 책임을 느낍니다먼저 책임부터 지워지면 무너집니다세상과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4가지가 중요하니 반복해서 말합니다당장은 불편하고 수고로 보여도 결국에는 잘 되리라 하고 예언 비슷하게 약속을 하게 하셨어요.

잘 된 것은 무엇일까요자기가 한일에 만족할만한 대가를 받는 것일까요 그런 복도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넘치게 부어주실 대도 있습니다 성도에게 좋은 것은 그런 좋은 상급과 대가가 아닙니다성도는 이미 받았잖아요. 하나님이 상급으로 삼은 사람에게 삶 자체를 잘 사는 거예요 잘 되리라를 번역한 것이 만사형통이 아닌 옳게 행할 것이라 그러니까 잘 되리라는 너희가 바르게 살 것이라고 합니다바르게 살아야 하는데 답답합니다.

각자 맡겨주신 상황에서 말씀으로 분별하여 옳게 행하는 것이 잘 사는 거예요 큐티를 하고 인도함 받는 것이 최고로 잘 사는 거예요 그것이 성도의 삶이고 거룩을 목적으로 두는 삶이라고 하는 거예요그러니까 모든 사람들이 잘 살게 하려면 교회가 먼저 본을 보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먼저 믿는 자가 본을 보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30절 그들이 작별하고 안디옥에 내려가 무리를 모은 후에 편지를 전하니

31절 읽고 그 위로한 말을 기뻐하더라

32절 유다와 실라도 선지자라 여러 말로 형제를 권면하여 굳게 하고

33절 얼마 있다가 평안히 가라는 전송을 형제들에게 받고 자기를 보내던 사람들에게로 돌아가되

편지를 전해주었습니다위로 한 말을 기뻐하였데요 위로 한 말은 그들의 마음이 상했었다는 뜻이죠 그래서 마음이 상해 있었는데 반대편에서 주장하는 유대인은 기득권을 가졌고 반대편 사람은 위축이 되어있고 바울 복음에 의하면 혈기로 싸우면 안 되고 참고 있으니 모든 것이 증명이 되었으니 마음고생이 심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형제들을 위로하는 방법에는 앞 절에 형제 의식과 배려 공감 사과도 있었잖아요. 더 실제적으로는 직접 방문해서 구체적으로 편지를 전하고 자존 감을 높여주면서 지금으로 적용해 보면 문자로 카톡으로 메일로 방문으로 식사로 기도로 전화로 다양한 방법으로 기도할 수 있는 방법 있었겠죠. 권면으로 굳게 하고 평안히 되어가는 과정이 필요한 거죠.

오늘 성령의 결정은 마무리가 중요한 거예요마무리가 좋지 않으면 속의 것들이 맞추어 지지 않아요 그릇이 완고한 게 아니에요아까도 말했지만 형제 의식부터 증인을 필요로 하고 상대방 입장에서 배려하고 공감하고 사과하고 말로 전하고 방문을 하고 이런 일들이 마지막에 여러분이 한 사람을 전도하려면 이런 손이 가고 발이 가고 생각하고 필요한 거예요. 이것은 사실은 십자가 지는 고통이라고 할 수 있지만 성령의 도와주시면 할 수 있습니다간증한 것들이 영원히 남아있을 것입니다성령의 결정을 하게 하는 중요한 것입니다여러분의 끊임없는 심방과 편지와 식사는 우리를 바르게 살게 하는 결정입니다그렇게 하는 하나가 유다와 실라가 예루살렘으로 가며 들은 인사는 평안이었습니다그들은 평안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교회에 평안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유대인들이 죽이려고 할 대 그 고난 가운데에서 나왔던 것입니다. ‘평안하여는 문제가 없는 게 아니라 문제가 있는 가운데 도출하는 것입니다예루살렘 회의의 결정이 적지 않는 다툼과 변론이 있던 교회에 평안을 가져왔습니다이 일을 위해서 3절에 전송 받고 갔잖아요

34(없음)

35절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유하며 수다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주의 말씀을 가르치며 전파하니라

이제 갈등이 그치고 기쁨과 평안을 얻은 안디옥은 말씀에 주목하여 양육하는 여전한 일상을 잘 살아야 하는 것이 성령의 결정의 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디아트리보 기억나시나요사명의 자리를 반짝반짝 비비고 문지르며 수고하는 의미입니다이런 삶이 제자의 삶인데 여전한 방식으로 제자의 삶을 사는 것 내 사명의 자리를 윤이 닳도록 닦는 것 그렇게 수고를 하는 제자의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것이 최고의 성령의 결정입니다날마다 기도하지만 제자의 삶의 여전한 방식으로 이타적으로 살고 성경 보면서 사는 것이 최고의 결정입니다잘 살게 하는 것이 최고의 결정인 것입니다언제나 마찬가지입니다이 세상은 짧기 때문입니다김영석 교수의 이야기가 맞습니다정신적인 가치가 없고 이기적은 사람들은 행복할 수 없습니다물질적인 가치관이니 정신적인 가치관이 없습니다절대 행복할 수 없다고 합니다금해야 할 것은 확실히 선을 그어주시기 바랍니다우리들교회도 예외가 없습니다.

(적용#3)

-여전한 방식으로 자기 삶의 자리에서 맡겨진 자리에서 비비고 문지르며 충실하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말씀을 맺겠습니다.

 

<Epilogue>

1)  마무리를 잘해야 합니다.

2)  한마음으로 내리는 결정입니다.

3)  여전한 방식으로 옳게 살게 하는 방식입니다 

4)  일희일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5)  모압의 교훈(4가지 멀리할 것들)

(1)우상의 제물과 (2)피와 (3)목매어 죽인 것과 (4)음행을 멀리할 지니라 이 에 스스로 삼가면 잘 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 (You are to abstain from (1)food sacrificed to idols, from (2)blood, from (3)the meat of strangled animals and from (4)sexual immorality. You will do well to avoid these things

6)  십자가의 죄 사함과 부활이 율법의 완성이다

7)  이기적인 것에는 인격이 없으며 행복은 이기적인 것에서 올 수가 없다

8)  목장에서 이타적인 것을 배우는 것이다

9)  삶 자체를 잘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상급이다

10) 복음 위에 어떤 것을 두게 되면 그것이 치는 것이 된다

11) 디아트리보는 사명의 자리에서 반짝반짝 닦고 문지르고 수고 하는 삶이며 이것이 성령의 결정의 결론이다

12) 사명의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것이 최고의 결정이다

13) 말씀 없이 잘 먹고 잘 사게 해주는 것이 망하게 하는 결정이다

14) 마음을 배려하고 공감하고 같은 형제 다 사과할 것은 사과하는 이것이 결정을 내릴 때 중요하다.

15) 결정을 할 때는 형제 의식을 가지고 유리그릇 다루듯이 배려를 하고 사과를 하면 최고의 마무리가 된다

16) 절대로 행복할 수 없는 부류가 있는데 하나는 정신적 가치가 없는 사람들인데 즉, 물질적인 가치에 두는 사람이고 두 번째는 이기주의자인데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사는 사람으로 인격을 가지지 못하여 이 두 가지가 없는 사람은 행복할 수가 없다고 한다

17) 정신적 가치가 없고 이기주의자는 절대 행복할 수 없다고 한다

18) 일치하는 말씀을 기준으로 삼으니 다른 기준을 가졌던 성도들이 한마음으로 결정했다

19) 하나님의 말씀만이 서로 다른 마음을 한마음으로 모을 수 있는 것이다

20) 그래서 온 교회가 같은 본문으로 묵상하는 것이 대단한 것이다

21) 우리 같이 말씀을 보고 같이 나누고 하는 것, 공동체가 함께 기준으로 할 말씀이 있다는 것이 대단한 것이다

22) 우리는 전자동으로 이기적이고 인본 적이다

23) 그런 죄인이 공동체를 이루고 있으니 무슨 결정을 할 수 있겠나? 그래서 끊임없이 자기 의견이 나오는 것이다 

24) 우리가 오직 말씀에 의거해서 성령의 결정을 따라갈 수 있는 것을 믿는 것은 구원 때문이고 그래서 한마음이 가능하다

25) 오직 한마음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구원 때문이다

26) 십자가는 지혜이고 타이밍인데 성령의 결정을 했기 때문에 호적도 지키고 구원도 이루어지고 믿음의 조상으로 자리매김을 할 수 있었으며 가문의 영광이 되었다.

27) 하나님을 상급으로 삼은 사람은 삶 자체를 잘 사는 것이다 잘 되리라를 번역한 것이 만사형통이 아닌 옳게 행할 것이다라는 것이다

28) 잘 되리라는 너희가 바르게 살 것이라고 하는 것이고 바르게 살아야 하는데 답답한 것이다.

29) 각자 맡겨주신 상황에서 말씀으로 분별하여 옳게 행하는 것이 잘 사는 것이다

30) 큐티를 하고 인도함 받는 것이 최고로 잘 사는 것이다

31) 그것이 성도의 삶이고 거룩을 목적으로 두는 삶이라고 하는 것이다 

32) 이제 갈등이 그치고 기쁨과 평안을 얻은 안디옥은 말씀에 주목하여 양육하는 여전한 일상을 잘 살아야 하는 것이 성령의 결정의 묘미라고 할 수 있다

33) 디아트리보는 사명의 자리를 반짝반짝 비비고 문지르며 수고하는 의미다

34) 이런 삶이 제자의 삶인데 여전한 방식으로 제자의 삶을 사는 것, 내 사명의 자리를 윤이 닳도록 닦는 것, 그렇게 수고를 하는 제자의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것이 최고의 성령의 결정이다

35) 날마다 기도하지만 제자의 삶이란 여전한 방식으로 이타적으로 살고 성경 보면서 사는 것으로 최고의 결정이다 

36) 잘 살게 하는 것이 최고의 결정인 것이다언제나 마찬가지인데 이 세상은 짧기 때문이다

37) 정신적인 가치가 없고 이기적은 사람들은 행복할 수 없다

38) 물질적인 가치관이니까 정신적인 가치관이 없으면 절대 행복할 수 없다고 한다

39) 금해야 할 것은 확실히 선을 그어 주어야 한다 

 

Posted by 윤강로
말씀과 마음씀2021. 1. 26. 22:38

[우리들교회 2021124일 주일예배 말씀 요약(사도행전 15: 19~ 21/ 성령의 의견)]



 

<사도행전 15:19~21>

 

19절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It is my judgment, therefore, that we should not make it difficult for the Gentiles who are turning to God)

20절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으니 (Instead we should write to them, telling them to abstain from (1)food polluted by idols, from (2)sexual immorality, from (3)the meat of strangled animals and from(4) blood)

21절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라 하더라 (For Moses has been preached in every city from the earliest times and is read in the synagogues on every Sabbath.")

 

<Prologue>


주님 우리는 참 의견이 많습니다끊임없는 의견을 나타나지 맨 성령의 의견이 승리를 하는데 우리들 교회 성도들은 성령의 의견을 낼 수 있도록 주님 오늘도 말씀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구원이 중요하니까 의논을 하고 찾아가는 돌보심을 통해서 심방하고 심방 받을 때 얼마나 각자의 믿음대로 의견이 많겠습니까 모두 진리를 말할 수 없다는 이유로 하지 않고 살 수 없죠그 많은 의견들 중에 성령의 의견을 도출해내는 가정과 목장 회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성령의 의견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말씀 요약>

 

 

1.   그러므로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19절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그러므로’(therefore)는 무슨 내용이죠지난주에 들은 것처럼 바나바(Barnabas)의 보고를 듣고 야고보(James)가 정리를 했죠하나님의 말씀이 일치한다는 것이죠그러므로 내 의견을 하면서 나오는 거죠안디옥교회 문제는 교리 문제였잖아요죄 사함 받고 의롭게 된단다 는 것은 사실인 거죠 교리라는 것이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나의 견해이자 확신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러나 내가 선택한 것인 이 있으니 사람마다 다르죠. 주장하는 것이 다르잖아요.


초신자와 성숙자가 받아들이는 것이 차이가 있을 수 있는 것이고 사도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계속 들어보고자 했잖아요같은 성령을 받았다면 같은 결론에 도달할 것이라고 하나님을 믿으니 나를 믿으라 하시니 확신하면서 들었습니다


성령의 사람은 확실히 듣는 은사가 있어요의장이 처음부터 내세우고 주장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들을 수 있는 말을 듣는 것도 성령의 의논을 하신 것이죠마지막까지 들었다고 성령의 의견을 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판단의 기준이 내 의견이 되면 그 교리가 진리에 가까울 수가 없습니다놀라운 선교 보고도 베드로의 진심 어른 간증도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요 역할도 야고보의 의견을 성령의 의견이 되지 못하게 합니다그 순간 기억한 아모스(Amos) 9장이라는 구체적이란 말씀에 의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원어는 자신이 의장으로 나는 이렇게 판단한다는 뜻이 있습니다모두의 입장을 들어보고 야고보는 최종 의견을 개진하겠다는 뜻입니다그러므로 말씀과 인내가 필요합니다목장하면서 그러므로’(therefore)의 인생을 사시기 바랍니다그러므로 말씀으로 의견을 내고 들으세요.


(적용#1)

-여러분이 믿을만하다고 여기는 지식이나 정보가 각자의 취향에 따른 유튜브입니까? 말씀에 의거하는 것입니까?

 

여러분 마인드 컨트롤을 해가면서 그러므로 해야합니다.

 

야고보는 양쪽의 의견을 다 듣고 양쪽을 아우르는 메시지를 줍니다그것은 한마디로 유대인에게는 행함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구원해야 한다이방인인에게는 그리스도인으로 잘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 들어야 합니다.


2.   율법이 제일이라는 고정관념을 버려야합니다.

19절 다시 봅니다.

19절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예루살렘에서 안디옥까지 달려간 유대인들이 일관되게 주장한 것은 이방인들도 구원을 얻으려면 유대인이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유대인처럼 할례도 받고 모든 율법을 지켜야만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받는다는 고정관념이 뿌리 깊게 있었습니다이방인 입장에서는 할례 같은 요구가 괴로웠어요. ‘괴롭게곁에서 성가시게 하다 대행하여 괴롭히다는 의미를 지니는 파리에노클레오의 의미입니다지속적 반복적 습관적인 의미입니다. 할례를 받지 않았던 이방인들을 지속적으로 괴롭히자 그만하라고 합니다.


베드로는 할례와 율법 준수를 멍에를 지우는 일이라고 했는데 바울은 괴롭게라고 표현했습니다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이라고 자신들과 똑같이 회개하고 딱 인정을 해주잖아요얼마나 괴롭혔으면 반복적으로 지속적으로 괴롭혔다고 야고보가 언급하겠습니까 이때를 위해서 야고보의 역할이 빛이 났다고 생각이 납니다고정관념을 깨 줄 자가 없기 때문에저를 위해 변호해 준 분들이 시기마다 있었습니다야고보가 이렇게 선포를 하는 데 있잖아요 제가 이렇게 눈물 날 지경이라고요그분들에게 하나님이 상 주실 줄 믿습니다각자 처한 죄와 고난의 상황 가운데 한 줄기 빛처럼 빚 추는 복음이 좋아 나왔는데 율법을 지키라고 요구를 하니 이방인들이 숨이 턱턱 막혔을 거예요그 중에서도 모세 율법과 할례가 부담스러웠는데 유대인들은 태어나자마자 얼마 안 돼서 받았으니 공감을 못해요.


그 당시 큰 어른에게 마취가 안 되는 상황에서 할례를 행 하라는데 얼마나 무섭겠어요. 지속적으로 괴롭혔다는 거에요. 이방인 성도들이 교회에서 유대인들을 보면 가까이 가고 싶지 않고 하나님의 집에서 갈등이 일어났습니다의로운 사람일수록 구원 자격 관계에 대해 자신이 세운 옳고 그름에 기준이 있지요그 기준에 맞지 않으면 계속 지속적으로 반복적으로 습관적으로 괴롭히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하나 되라고 불러 주셨는데 내가 옳아 돈은 이렇게 해야 되고 의복으로 이렇게 해야 되고 시간을 이렇게 써야 되고 성공한 사람을 말릴 자가 없는 거예요어떤 기준이라도 하나님보다 높이 올라가면 남을 죽이는 무기가 되는 거예요 모세의 율법은 하나님이 주신 율법 아닙니까아무리 좋아도 하나님보다 위에 있으면 지체들을 막는 장벽이 되는 거예요여러분의 가치기준을 정말 복음 위에 놓으면 그게 괴롭히는 거예요.


예수님에 대해 가르쳐 주지 않으면서 방언해라 봉사해라강요하면 복음이 아닌 것을 가지고 속박하고 앞세우면 예수의 이름을 빙자하면서 지속적으로 습관적으로 괴롭히는 거예요어려서는 복음 설교를 거의 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지금 지나서 보면 그런 것 같아요윤리적 도덕적 설교가 거의 다였던 갓 같아요 그것이 우리가 유교국가였기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아니면 그래야지만 복을 받고 아니면 그래서 네가 예배를 빼먹어서 천벌 받은 거야라고 이렇게 들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복음 설교를 듣지 못했기 때문에 인과응보의 예수님처럼 생각했던 것 같아요. 잘 살아 보세가 그때 당시 기도 제목이었어요 우리를 품에 안으시고 응답해 주셔서 지금 이렇게 잘 살게 되었어요시간이 지나면서 율법적으로 얽매여 있다 보니 지금 하나님을 떠난 자가 많아졌어요이 시대는 율법으로 괴롭히는 것이 통하지 않았습니다 한국교회에 빨간 불이 들어온 것입니다윤리적 설교를 듣고 나갔는데 윤리를 안 지킨 일이 많아졌어요이게 중2병이 생긴 거예요한국교회에 중2병이 생긴 거예요그래서 복음이 정확해야 건강해지는 거 맞습니다그런데 이걸 안 듣다 들으려면 힘이 듭니다유대인 같습니다.


전통이 대단하잖아요교회는 예수를 믿어서 죄 사함 받고 의롭게 되었다는 것을 정확하게 가르쳐야 합니다구속사적으로 자기 죄를 보면서 말씀 보라고 하면서 반복적으로 습관적으로 괴롭히죠그런데 저의 삶에 안 따라주기 때문에 괴롭힌다고 느끼는 것 같아요감동이 안되고 입으로만 이야기를 하니까 저보다 더 성숙하신 분들은 삶을 안 보고 말만 듣고 은혜 받아서 적용을 하시는 것 같아요 기다려야 하는 것이 맞는데 제 마음이 급해서 괴롭히는 것 같아요그러면 여러분은 예수님은 왜 식구들 눈높이로 못 내려 가셨나?’라고 생각한 분들도 계세요예수님이 흠이 없는데도 식구들이 구원이 안 됐잖아요우리는 흠이 많기 때문에 그런 수준은 안 가니 걱정 마세요내 수준이 그 정도 안 됩니다. 살아생전에 돌아오실 거예요우리가 주님처럼 식구들이 안 들어와도 열매를 맺는 것처럼 지나간 것은 지나간 데로 기다리시면서 대부분은 다 살아서 모두를 심방해 주실 줄 믿습니다.


제 설교가 어려운 것이 많아 목장에서 해석해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처음부터 들리는 분도 많아요여러분 세례 받는 사람이 많은 거 보면 아시죠그런데 오자마자 우리들 교회는 목장 보고서 써야 해요 녹취를 해야해요 밥을 해야 해요 자기 집도 밥을 안 해 먹는데 아주 벽이 느껴지잖아요안 좋은 표정을 하면 그러므로 들으시길 바래요본질을 알지 못한 체 괴롭히면 안 돼요.


우리가 모든 고정관념을 뛰어넘어야 하는데 지속적으로 반복적으로 괴롭히는 사람은 건강해도 치명적일 수 있는데 100세 건강 비결에서 김영석 교수님은 최선의 건강은 최고의 수양의 인격의 산물이라고 하세요김영석 교수님 원장님은 비결은 심호흡을 하라고 합니다. ‘그러므로가 복식호흡이에요 누가 뭐라고 하면 그러므로이렇게 심호흡하세요우리는 종류가 다양한 사람이 모였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그 이외에는 긍정적인 사고 올바른 식사 등이라고 합니다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것은 참 사랑이라고 합니다기도하면서 선한 의지를 바탕으로 희망을 품게 되고 뇌의 기능을 활성화할 수 있다는 거죠치매 가능성도 낮아지는데 작은 도움이라도 줄 수 있을 때가지 살자고 하는 의지가 난다고 합니다우리들교회는 다른 사람의 아픔을 만져주고 듣기 때문에 우리 교인들이 100세 넘어서 살 것 같아요목장에 가서 다른 사람을 품고 들어야 한다는 게 성령의 사람입니다여러분이 잘 듣는 것이 장수의 비결입니다가서 듣기만 해도 장수의 비결입니다듣는 게 큰 비결이에요


(적용#2)

-유대인처럼 원칙주의자로 하나님의 은혜만큼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그 기준으로 내가 지속적으로 반복적으로 습관적으로 괴롭히는 인간은 누구입니까?

 

여러분은 하나님보다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 옳음으로 계속 괴롭히는 사람이 있습니까?

 

3.   자유가 제일이라는 고정관념을 버려야합니다.


성화가 필요합니다.


20절 다만 (1)우상의 더러운 것과 (2)음행과 (3)목매어 죽인 것과 (4)피를 멀리하라고 편지 하는 것이 옳으니


다만 이 4가지 사항만을 이방인 신자들이 최소의 무저항으로 지키도록 제안했다는 거예요율법 조항 중에서 4가지만 지키라고 하는 겁니다최소 의무 조항만 주고 최대의 자유를 지키게 하셔야 해요초심자들은 시키는 것을 싫어해요굉장한 자유를 느끼는 것 이거든요. 4가지 것들은 유대주의자들이 절대적으로 금하는 거예요예수 믿기 전에는 죄책감 없이 행하는 것이잖아요그 문화를 멀리하라는 거죠이거는 물론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이방인과 유대인의 교제를 돕기 위한 조건입니다자유는 무한대로 의무는 최소한으로 부과합니다그러나 사실은 이 사람들이 몰라서 그렇지 맨 처음에는 4가지잖아요가장 본질적인 것을 유보한 거예요그때는 모르나 이후에는 알리라본문의 음행은 각종 음행을 포함합니다우상의 더러운 것은 음행으로 이어지고 먹지 말라는 생명 경시로 이어집니다우상이 더러운 것은 고기와 같은 재물을 뜻하는데 사람들이 우상에게 바쳤던 재물인지 얼마나 짜증이 나겠어요유대인들은 귀신같이 골라내는데 이방인들은 못 골라네요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는 것은 우상과 접촉함으로 숭배하게 되고 그런 재물을 먹음으로 마음이 우상에게 기울어질 수 있기 때문에 음행으로 연결이 되는 거라고 합니다.


순교자의 믿음의 가문이라도 작은 일에서 시작해서 믿음을 버릴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거예요영혼만 귀하고 육체만 악하기 때문에 교회를 다녀도 육체는 악한 것이 돼서 행음을 행하는 거예요이 시대가 그럽니다. 발람은 히브리인이 아니면서 선지자에요저주해 달라는 임무를 받았지만 자기도 모르게 축복을 했어요이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겠습니까발람은 아주 그냥 손 하나 안 데고 코를 풀었습니다지도자의 타락이 국민을 망하게 합니다. 교묘히 유혹하는데 백성들은 모릅니다올무를 놓는 것도, 따라가는 것도 악입니다 발람을 보면 기가 막힙니다 하나님 말씀으로 예언을 잘해 그때그때 포기도 잘하는 것 같아 어떤 말을 하면 좋아할지 등 어떤 회개를 하면 은혜 스러울지 등 오죽하면 모압 왕이 초청을 다하겠습니까? 다 잘해요오직 발람이 돈을 좋아합니다앞으로 남고 뒤로 밑져서 구원의 상을 받지 못하죠한 번의 유혹을 거절하면 믿음이 좋다고 속고 속이는데 계속 유혹하면 결국 넘어가게 됩니다집요하게 우리에게 옵니다음행으로 이어졌는데 음행은 한 장에 지나가게 됩니다음행은 돈 가지고 죄를 짓습니다.


너무 훌륭한 사람이 교묘하게 넘어지게 하는 것이 무섭지요유대인들도 이방인들에게 조심하라고 하는 겁니다이방인은 그 뜻을 몰라요그래도 가르쳐주면 되는 거예요.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습니다짐승을 잡을 때마다 대속을 생각하게 된 것은 그만큼 악에 물들어 있고 하나님의 은혜를 이기적으로 하는 피조물이 인간이라는 거죠필요한 게 너무 많아요자기만족을 위해 몸부림칩니다늙어지면 못 노나니 놀다가 일찍 가는 거죠우리 인생을 가치 있게 하는 것이 예수님의 피라는 거죠십자가의 피를 통과하지 않으면 아무도 가치관이 변하지 않습니다예를 들어 나를 위해 누가 죽었다고 해요내가 절박하지 않으면 고맙지 않아요나를 위해서 죽어줬다고 해도 왜 나를 위해 죽었지 이런 관계로 사회생활도 하고 신앙생활도 해요예수님의 희생이 마음속으로 들어오는 거죠예수 안에서 산다는 것이 먹고 마시고 뛰는 것이 아니라 의지할 대상이 바뀌는 거예요우리는 웃어도 울어도 주님 앞에서 하는 거죠그런데 그게 쉽겠습니까자유가 최고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서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하는 것을 보고 있어요우리처럼 잘 웃는 교인이 없죠그냥 그리고 또 울립니다누가 우리를 울리고 웃겠습니까이게 자유입니다예수의 피 덕분입니다진정한 자유입니다. 이렇게 웃고 울다가 코로나 상황이 돼서 만나지 못하지만 전쟁터가 되면 말씀도 못 듣는데 온라인이 있어 얼마나 감사합니까천국에서 만나면 얼마나 감사하겠습니까천국에서 만날 때 우리가 동창생으로 만나겠습니까? 천국 갈 확률이 많지 않을까요


(적용#3)

-우상의 더러운 것 음행은, 사슴 피도 벌컥벌컥 마시는데, ‘이쯤 이야하고 먹는 우상의 죄는 무엇입니까최소한의 의무는 무엇이고 최대한의 자유는 무엇입니까?

 

4.   성경을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들어야합니다.

 

21절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라 하더라


그래서 유대인들은 음행을 안 해야 하는 것이 중요하잖아요안식일마다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서 여기 구절을 낭독하는 거예요 깊으신 뜻은 본질이기 때문에 낭독하게 하는 거예요 이방인들은 행함으로 멀리하라는 거죠유대인들이 입으로 읊어 대니 한계가 있습니다그들의 낭독 등 중요하다고 인정하는 거예요아직 성령 받지 못했지만 낭독하는 게 어디냐?’라고 하는 거죠중요한 점은 유대인 성도나 이방인성도나 자기에게 주신 말씀으로 들어야 하는 것이 중요한 거예요유대인 이방인 다 자기를 우상숭배를 하는 죄인입니다끊기를 결단하고 힘써야 하죠생명을 함부로 여기는 욕심에 대해 말씀이 그렇다고 하면 들으시면 돼요회당에서 매주 율법이 전파되는 것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거예요그들의 율법에 우리는 사랑으로 완성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없이 율법만 고수하면 구원을 얻을 수 없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이 되었으면 율법대로 살아야 하는 겁니다그러니까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 성도가 증가해서 우리의 순수성을 해치는 거 아닐까? 걱정하지만 율법이 낭독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 유대인의 눈높이에 맞추어서 의견에 동참하도록 돌보는 거예요 이것이 성령의 의논입니다이런 식으로 돌보라 이러는 거죠. ‘그러므로하고 들으라는 거죠우리들 교회에서도 음행을 봉쇄하기 위해 같이 자동차를 타도 안되고 돈 거래를 해도 안되고 치리를 한다고 날마다 낭독을 하죠율법적인 것 같지만 이 낭독으로 거룩이 지켜졌어요직분 자건 아니건 다 미혹될 수 있어요음행에서 해결되려면 날마다 목장 가고 예배 드리고 큐티하면 공동체에서 해결이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를 떠나거나 하지 않습니다야고보는 의장으로 양쪽의 모든 메시지를 날렸습니다존경받는 지도자가 된 야고보는 잘 듣고 양쪽에 맞는 메시지를 전파합니다믿음에는 분량이 있습니다조심조심 두드려야 가면서 해야 합니다결국 죄의 문제가 보이지 않고 해결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 있어요최선을 다해서 서로의 의견을 들으면 인내가 구단입니다야고보는 이 상황을 정리하잖아요여러분은 야고보 같은 목자가 되었으면 합니다어떤 상황도 정리하는 목자가 되었으면 합니다.


(적용#4)

-성경은 나에게 어떤 책입니까? 역사책? 도덕책? 경전?

-성경이 내게 주시는 하나님 말씀처럼 들리시나요?

 

 

<Epilogue>

 

1)  성령의 의견은 그러므로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2)  유대인 베드로(Peter)-바울(Paul)-야고보(James) 모두가 들었던 것처럼 항상 잘 듣자가 중요하다

3)  율법이 제일이라는 고정관념을 버려야 하고 자유가 제일이라는 고정관념을 버려야 하고 성경을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들어야 한다.

4)  죄 사함 받고 의롭게 된단다는 것은 사실인 것이다

5)  교리라는 것이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나의 견해 이자 확신이라고 할 수 있다

6)  성령의 사람은 확실히 듣는 은사가 있다

7)  의로운 사람일수록 구원 자격 관계에 대해 자신이 세운 옳고 그름에 기준이 있는데 그 기준에 맞지 않으면 계속 지속적으로 반복적으로 습관적으로 괴롭히는 것이다

8)  어떤 기준이라도 하나님보다 높이 올라가면 남을 죽이는 무기가 되는 것이다

9)  모세의 율법은 하나님이 주신 율법이지만 아무리 좋아도 하나님보다 위에 있으면 지체들을 막는 장벽이 되는 것이다 

10) 여러분의 가치기준을 정말 복음 위에 놓으면 그게 괴롭히는 것이다.

11) 예수님에 대해 가르쳐 주지 않으면서방언해라 봉사해라강요하고 복음이 아닌 것을 가지고 속박하고 앞세우면 예수의 이름을 빙자하면서 지속적으로 습관적으로 괴롭히는 것이다

12) 복음 설교를 듣지 못했기 때문에 인과응보의 예수님처럼 생각했던 것 같다

13) 복음이 정확해야 건강해지는 것이 맞다

14) 교회는 예수를 믿어서 죄 사함 받고 의롭게 되었다는 것을 정확하게 가르쳐야 한다 

15) 구속사적으로 자기 죄를 보면서 말씀 보라고 하면서 반복적으로 습관적으로 괴롭히는데 저의 삶에 안 따라주기 때문에 괴롭힌다고 느끼는 것 같다

16) 여러분은예수님은 왜 식구들 눈높이로 못 내려 가셨나?’라고 생각한 분들도 있는데 예수님이 흠이 없는데도 식구들이 구원이 안 되었다

17) 우리가 주님처럼 식구들이 안 들어와도 열매를 맺는 것처럼 지나간 것은 지나간 데로 기다리시면서 대부분은 다 살아서 모두를 심방해 주실 줄 믿는다.

18) 우리가 모든 고정관념을 뛰어넘어야 하는데 지속적으로 반복적으로 괴롭히는 사람은 건강해도 치명적일 수 있는데 100세 건강 비결에서 김영석 교수님은 최선의 건강은 최고의 수양의 인격의 산물이라고 한다

19) 김영석 교수님 원장님은 비결은 심호흡을 하라고 하는데 ‘그러므로’(therefore)가 복식호흡이므로 누가 뭐라고 하면 그러므로’ 이렇게 심호흡하시라 

20) 그 이외에는 긍정적인 사고 올바른 식사 등이라고 하며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것은 참 사랑이라고 한다

21) 기도하면서 선한 의지를 바탕으로 희망을 품게 되고 뇌의 기능을 활성화할 수 있다는 것이고 치매 가능성도 낮아지는데 작은 도움이라도 줄 수 있을 때가지 살자고 하는 의지가 난다고 한다 

22) 우리들교회는 다른 사람의 아픔을 만져주고 듣기 때문에 우리 교인들이 100세 넘어서 살 것 같다 

23) 목장에 가서 다른 사람을 품고 들어야 한다는 게 성령의 사람이다

24) 여러분이 잘 듣는 것이 장수의 비결이므로 가서 듣기만 해도 장수의 비결이니까 듣는 게 큰 비결이다

25) 20절에 다만 (1)우상의 더러운 것과 (2)음행과 (3)목매어 죽인 것과 (4)피를 멀리하라고 편지 하는 것이 옳으니

26) 다만 이 4가지 사항만을 이방인 신자들이 최소의 무저항으로 지키도록 제안했다는 것으로 율법 조항 중에서 4가지만 지키라고 하는 것이다 

27) 최소 의무 조항만 주고 최대의 자유를 지키게 하셔야 한다

28) 우상의 더러운 것은 음행으로 이어지고 먹지 말라는 생명 경시로 이어진다 

29)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는 것은 우상과 접촉함으로 숭배하게 되고 그런 재물을 먹음으로 마음이 우상에게 기울어질 수 있기 때문에 음행으로 연결이 되는 것이라고 한다.

30) 순교자의 믿음의 가문이라도 작은 일에서 시작해서 믿음을 버릴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31) 영혼만 귀하고 육체만 악하기 때문에 교회를 다녀도 육체는 악한 것이 돼서 행음을 행하는 것인데 이 시대가 그렇다. 

32) 올무를 놓는 것도, 걸려 넘어지는 것도 악이다

33) 발람처럼 앞으로 남고 뒤로 밑져서 구원의 상을 받지 못하는 것이다 

34) 한 번의 유혹을 거절하면 믿음이 좋다고 속고 속이는데 계속 유혹하면 결국 넘어가게 되는 것으로 집요하게 우리에게 다가온다

35) 음행은 돈 가지고 죄를 짓는 것이다.

36)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다

37) 짐승을 잡을 때마다 대속을 생각하게 된 것은 그만큼 악에 물들어 있고 하나님의 은혜를 이기적으로 하는 피조물이 인간이라는 것이다

38) 인간은 필요한 게 너무 많고 자기만족을 위해 몸부림치는데 늙어지면 못 노나니 놀다가 일찍 가는 것이다 

39) 우리 인생을 가치 있게 하는 것이 예수님의 피라는 것이다

40) 십자가의 피를 통과하지 않으면 아무도 가치관이 변하지 않는다

41) 중요한 점은 유대인 성도나 이방인성도나 자기에게 주신 말씀으로 들어야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42) 유대인, 이방인 다 자기를 우상숭배를 하는 죄인이므로 끊기를 결단하고 힘써야 하는 것이다 

43) 생명을 함부로 여기는 욕심에 대해 말씀이 그렇다고 하면 들으시면 되는 것으로 회당에서 매주 율법이 전파되는 것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다 

44) 그들의 율법에 우리는 사랑으로 완성해야 한다.

45) 그리스도 없이 율법만 고수하면 구원을 얻을 수 없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이 되었으면 율법대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46) 그러니까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 성도가 증가해서 우리의 순수성을 해치는 거 아닐까?’ 하고 걱정하지만 율법이 낭독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 유대인의 눈높이에 맞추어서 의견에 동참하도록 돌보는 것으로 이것이 성령의 의논이다

47) 이런 식으로 돌보라 이러는 것이고 ‘그러므로하고 들으라는 것이다 

48) 우리들 교회에서도 음행을 봉쇄하기 위해 같이 자동차를 타도 안되고 돈 거래를 해도 안되고 치리를 한다고 날마다 낭독을 한다 

49) 율법적인 것 같지만 이 낭독으로 거룩이 지켜졌다

50) 직분 자건 아니건 다 미혹될 수 있기에 음행에서 해결되려면 날마다 목장 가고 예배 드리고 큐티하면 공동체에서 해결이 된다.

51) 믿음에는 분량이 있으므로 조심조심 두드려야 가면서 해야 한다

52) 결국 죄의 문제가 보이지 않고 해결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 있는데 최선을 다해서 서로의 의견을 들으면 인내가 9단이 된다

53) 믿음으로 구원 얻고 잘 살아야 한다

54) 율법도 복음 위에 놓으면 장벽이 된다

55) 복음이 아닌 것으로 속박하면 지속적, 반복적, 습관적 괴롭힘이 되는 것이다

56) 내 삶이 안 따라주면 지속적, 반복적, 습관적으로 괴롭히는 것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57) 그때는 모르나 지금은 알리라-지금은 모르나 나중엔 알리라

58) 발람(히브리인이 아니면서 선지자)의 교훈을 따르는 것이 니골라 당인데 이는 영혼만 귀하고 육체는 악하니 마음껏 행음하라는 것이다

59) 발람은 모압 왕 발락을 능수능란하게 현혹하며 돈을 사랑한 선지자다

60) 올무를 놓는 것도 올무에 걸려 넘어지는 것도 죄다

61) 앞으로 남고 뒤로 밑지니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이다

62) 음행은 돈 가지고 짓는 죄다

63) 4가지 죄란 (1)우상숭배-(2)음행-(3)목매어 죽인 것(먹지 말라/제사)-(4)<멀리하라>인데 이것이 모압의 교훈이다

64)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에 속하니라

65) 예수가 없으면 필요한 것이 그렇게 많은 것이다

66) 인생을 가치 있게 하는 것이 예수님 보혈의 십자가다

67)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으면 평강이 없는 것이다

68) 내가 십자가의 고난에 처해 있을 때 도와준 것은 평생 간다

69) 감사와 찬양을 하면 의지할 대상이 바뀌는 것이다

70) 세속적 고정관념 속에서 굴레와 억지 속에서 고통 받는다

71) 십자가 죄사함과 부활이 율법의 완성이다

72) 말씀 낭독으로라도 거룩이 지켜지는 것이다

73) 듣다 보면 지혜가 생긴다

74) 정좌와 미움과 살기도 낙태살인처럼 살인이다

 


Posted by 윤강로
말씀과 마음씀2021. 1. 18. 17:04

[우리들교회 2021117일 주일예배 말씀 요약(사도행전 15: 12~ 18/ 성령의 돌보심)]


 

<사도행전 15:12~18>

 

12온 무리(the whole assembly)가 가만히 있어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께서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among the Gentiles through them) 행하신 표적과 기사(miraculous signs and wonders)에 관하여 말하는 것을 듣더니

13 말을 마치매 야고보(James)가 대답하여 이르되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

14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그들을 돌보신 것을 시므온(Simon)이 말하였으니

15 선지자들의 말씀(the words of the prophets)이 이와 일치하도다(are in agreement) with this) 기록된 바

16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rebuild David’s fallen tent) 또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restore it)

17 이는 그 남은 사람들(the remnant of men)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18 즉 예로부터(for ages0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

 


 

<Prologue>


새해 첫 목장 예배는 어떠셨나요이제 온라인 목장이 좀 익숙해 지셨죠그런데 아직도 이제 카톡으로 간소하게 목장 하는 곳이 있다고 하는데 모두 zoom으로 얼굴 보면서 목장 하시기 바랍니다우리가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하는 것은 카톡과는 너무 다릅니다익숙해 지셨을 테니 zoom으로 목장을 하시고 얼굴을 본다는 것 자체가 여러분들에게 힐링이 되는 겁니다코로나가 끝나면 목장 간다는 생각 버리시고 도움을 받아 온라인으로 목장 참여하시기 바랍니다구원의 확신이 있다면 핑계 되시면 안됩니다목장 보고서 빠지지 마시고 잘 올려주세요정말 이에요작년에 아주 이렇게 허접한 목장이 많이 있었어요그건 하나님께 불충한 거라고 생각됩니다.


하나님 우리는 돌보심 말만 들어도 마음이 따뜻해집니다주님 오늘 올해 평생에 돌보심을 받기를 원하는 우리들에게 오늘 성령의 돌보심의 말씀을 듣기 원합니다말씀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삼위일체 하나님도 우리 구원을 위해서 의논을 하셨겠죠 무엇을 하셨을까요 역할 대로 돌보셨겠죠 돌봄 받는 사람을 느끼기를 원합니다돌보심의 뜻은 슬픔이나 어려움을 겪는 사람을 위로하고 방문하는 것을 말합니다돌봄을 말하고 하는 사람은 정말 다른 사람들을 잘 돌보게 됩니다목자들이 잘 돌보면 다음에 목자가 되었을 때 롤 모델이 됩니다오늘은 성령의 돌보심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말씀 요약>


성령의 돌보심은,


1.   눈높이를 맞추는 것입니다.


12절 온 무리가 가만히 있어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께서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에 관하여 말하는 것을 듣더니


우리 지난주 베드로의 그런 형제 의식에 관한 장렬한 변론은 온 무리를 침묵에 빠드릴 정도로 확신 있을 정도였기 때문에 모두가 입을 다물었어요 사도들은 바나바와 바울에게 발언할 기회를 주었어요처음 보고했을 때는 바리새인이 일어나서 분노 했잖아요 두번째 보고에서는 이방인에게 행하신 표적과 기사(miraculous signs and wonders)에 대해 말했다고 합니다그런데 이렇게 왜 콕 집어서 말 했을까요? 믿음이 연약한 유대인들은 표적과 기사를 좋아하기 때문에 눈높이에 맞춘 것이죠예수께서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않으면 믿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본다고 해서 잘 믿는 것도 아니에요 표적과 기사가 있으니 그 정도로 믿는 거죠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는다고 했습니다유대인은 이처럼 눈에 보이는 표적과 기사를 좋아했어요. 남의 이야기가 아니죠 우리도 짠하고 나타나는 기적이 좋습니다유대인은 앉은뱅이가 일어나도 표적과 기사에 열광하겠지만 진짜 표적은 십자가 이지요.  그러니까 비시디아 안디옥(Pisidian Andioch)에서 유대인의 박해로 쫓겨났고 루스드라(Lystra)에서는 앉은뱅이를 일으켜도 복음이 전해진 것 아니겠습니까? 곳곳에 죽이려는 유대인이 있었지만 루스드라 이고니아 안디옥을 돌아온 선교 보고 그것 자체가 표적과 기사가 아니었겠습니까? 이것이 표적인 것이죠. 그런데 지금 이제 유대인들에게는 기복적 관점으로 보고를 했지만 사도들에게는 팔복의 관점으로 균형 있게 보고를 하게 됩니다.


대단한 보고도 타이밍이 중요합니다예루살렘의 공회(Synagogue)는 성령의 조직이 맞습니다의롭게 된다는 정통 교리에 가장 강력한 주창자의 주인공은 바울입니다바울은 공회에서 조용한 거예요 증인의 역할만 했어요그것은 공회를 예루살렘 지도자들의 몫이라고 생각했어요주된 증인의 역할을 바나바에게 양보했어요바나바와 바울이 표기된 것이 보입니다예루살렘 교회에서는 바울이 기피 대상이었고 바나바는 밭을 팔아 주었던 인기 스타입니다이걸 이제 간과하면 안 되죠. 그래서 바나바와 사울이라고 칭하며 그때는 바나바가 리더였어요 선교여행을 시작하니 바울의 탁월한 복음 실력이 그냥 저절로 13장의 안디옥교회가 파송했는데 13절에 바울이 리더가 되었어요그러다 루스드라(Lystra)에서는 제우스(Zeus)라고 칭함 받았죠 그래서 거기 이제 바나바가 나왔는데 예루살렘 공회에서는 앞서 나오는 거예요성경에는 한 구절 한 구절이다 숨결이 있는 거예요이거는 하나님의 연애편지가 맞습니다.


여러분 바울이 스스로를 절제하고 있는 모습이 보이십니까? 구원을 위해서 이렇게 자랑질을 하면 안 되는 겁니다우리 자신이 중요하잖아요. 직분이 중요합니다상황 속에서 역할이 바뀔 수 있고 순종해야 합니다주님도 십자가에서 순종하는 역할을 맡으셨어요우리가 항상 가장 많이 하는 이야기 돈 이야기입니다목장 초원 등에서 돈 거래하지 말라고 합니다이것도 눈높이에 맞추어서 해야 합니다그래서 바울은 얼마든지 예수 믿어야 의롭게 됩니다라고 말할 수 있지만 조심조심하고 있습니다회사나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성령이 바울을 돌보셔야 다른 사람을 돌보게 됩니다눈높이 절제를 할 수 있는 것은 구원이 목적이기 때문입니다그걸 모르면 팩트라고 할 말 다 하고 앞으로는 남고 뒤로는 밑지죠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눈높이에 맞추는 것은 십자가 짐이기 때문에 앞에서는 밑지지만 뒤로는 남는 장사고 구원입니다목장이나 여러 곳에서 각자의 눈높이에서 돌보심을 받으시면 좋겠습니다.


(적용 #1)

-가정이나 회사에서 목장에서 눈치를 보십니까무시를 하십니까? 눈높이를 맞추십니까?

-눈높이를 맞춘다면 구원 때문입니까열등감 때문입니까?

 

2.   하나님의 심방입니다.

 

1 )야고보(James)를 심방하십니다.


13절 말을 마치매 야고보가 대답하여 이르되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


바나바와 바울이 보고한 다음에 예기치 못한 하나님이 야고보를 만납니다야고보는 내 말을 들으라’(Listen to me)고 합니다자신이 있는 것 같아요. 베드로는 자신의 외식에 대해 애통하며 유대주의자들을 형제라고 불렀는데 야고보는 무슨 수치와 죄가 있어 형제들 이라고 했을까요항상 우리의 구속사는 예수님 없는 개인은 전적으로 부패하고 무능하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사람은 대충 알 수 있어요 사람은 전적으로 악하고 음란하기 때문입니다정신 의학자 프로이트는 사람은 실수하지 않는다고 합니다그 사람의 말이 행동 하나하나는 그 사람을 나타내는 바로미터라고 합니다국내의 혐오 차별 문제를 깊게 연구하는 김지혜 교수가 쓴 책에서는 내가 차별하지 않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합니다이것은 간과하고 사람을 칭찬하고 욕하고 하는 거예요그러니까 사람들은 기막힌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죠. 유대인들 이 상상을 불허하는 고정관념을 가진 거예요지독한 선민의식으로는 복음이 퍼질 수 없는 거예요이때 예수님의 식구 같은 야고보가 필요합니다기둥이라고 했습니다예수님 식구들이 왜 모두 안 믿었을까 생각하게 됩니다여러분 그러니까 인간이 백프로 죄인인 것은 큐티의 기본입니다우선 성령이 임하지 않았다면 사생아로 볼 것이 아닙니까? 그러면 돌로 쳐죽여야 하는 엄마와 형을 보면서 살 때 저 형 때문에 예수님을 비난하고 무시했겠죠예수 형이 자기를 메시아라고 했으니 사람들이 미쳤다고 했죠.


그러니 형제들이 미친 형을 붙들러 다녔다고 했어요. 33절에는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이냐고완전히 미친 사람 아닙니까? 생각을 해보세요그러니까 예수님은 성령 받지 않고는 알아볼 수 없는 거예요말씀을 못 알아들으면 똑같습니다. 이 식구들은 예수님하고 사는 것이 힘들었기 때문에 어떻게 할 수 없는 거예요지나고 보니까 하나님의 경륜이었고 좀처럼 식구들에게도 인정받지 못했던 성자 예수님인데 성령님이 효과적으로 돌보신 거죠동생들이 뭐라고 했겠습니까 조용히 살라고 하는 거죠형이란 인간 때문에 상차 받고 산다고 하는 거죠이왕 그렇게 하려면 숨어서 하라 라고 자기 형이 짠하고 나타내주는 것을 바라는 거죠별소리 다 들었을 것 같아요 악순환 이었을 것입니다저는 예수님을 미쳤다고 한 한마디로 식구들이 괴롭혔을 것을 생각해 보았어요하나님의 경륜은 이렇게 모르는 거예요식구들끼리 너무 잘 살았다면 이렇게 인류가 구원받도록 지경이 넓어지기 힘들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예수님도 고난을 받아서 순종을 배웠다고 하세요 이것이 바로 삼위의 하나님의 사역이세요.


이것을 성령님이 효과적으로 돌보신 거예요이런 예수님의 역할을 보면서 미쳤다고 해도 슬퍼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예수님도 미쳤다고 했는데 맘대로 못하는 거예요예수님도 아닌데 저 설교를 듣고도 이해가 안 되는 사람은 그렇게 제 욕을 하는 거예요베드로가 대단한 변론을 해도 왜 여기서 야고보가 등장하나 생각을 해보아야 합니다이때를 위해서 부활하시고 주님이 딱 꼭 집어서 개인적으로 야고보를 찾아가십니다주님이 찾아가시니까 단번에 변했어요이것이 하나님의 심방입니다심방도 때가 있는 거예요 예수님이 메시아로 밝혀지고 나서 메시아의 식구가 되었잖아요 로열패밀리로 할 일이 있기 때문에 야고보를 심방하신 것이 하나님의 찬스인 거죠야고보에게 이 역할을 맡기셨어요.


야고보가 주님을 만나고 나니 예수님과 어린 시절을 같이 보낸 것은 특권이었어요유대인이 보이는 표적과 기사를 좋아하기 때문에 이것이 효력을 발휘했어요이제는 야고보가 이렇게 쓰임을 받았어요 야고보가 똑똑해 야고보서도 썼잖아요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를 말합니다이후에 세대는 여전히 베드로를 수제자로 칭하고 있습니다그때 그때 맡겨진 역할에 순종하면 눈높이를 맞추는 것입니다지난날을 생각할 때 형제가 될 수 없었는데 나도 너희들과 똑같이 비난했고 미쳤다고 이야기한 겁니다주님이 만나 주셔서 심방 한 번 하시면 가능합니다. 야고보의 역할은 구성원 모두에게 공증된 지도자가 필요합니다야고보가 이런 마음으로 나도 너희와 같았다 형제들아라고 하니 이해가 되는 거죠다들이 세상에서 죄인 있을 뿐이라고 인식했기 때문에 형제들이라고 공감하는 거예요다들 우리가 믿기 전에는 개차반 인생 아니겠습니까우리들교회는 옳고 그름으로 안 하면 좋겠는데 옳고 그름이 많은 것이 안타깝습니다.


보이는 것으로 옳고 그름으로 논하는 것이 예수님을 미쳤다고 하는 것과 같죠그런데 이해가 안 되니 보이는 것으로 이렇게 미쳤다고 하는 거죠예수님을 끊고자 해서 낙태할 뻔했잖아요배 속에 정인이처럼 예쁜 아이가 수도 없이 많이 죽어가고 앞으로도 죽을 예정이에요낳으면 하나님이 책임지십니다우리들 교회에도 생후 2개월 때 버려진 집사님이 고아원에서 돌고 돌아 우리들교회에 왔어요. 이분은 표적과 기사로 서울대 법대를 들어갔고 졸업했는데 많이 아파요이거 많이 아플 수밖에 없어요사회에 대한 적개심이 많을 수밖에 없는데 그분이 주님을 만나면 변할 수 있다고 생각이 들었는데 변했습니다생명은 하나님께 속했습니다하나님이 심방 한번 해주시면 구원으로 연결 되돌 봄이 자연스럽게 됩니다나에게 느껴지면 나도 남을 돌봅니다.

 

2) 이방인을 심방하십니다.


14절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그들을 돌보신 것을 시므온이 말하였으니


베드로도 그렇고 야고보도 그렇지만 절대로 믿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이방인들이 나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심방했더니 구원받았다는 뜻입니다한마디로 야고보로 정리합니다돌보셨다는 단어의 원형 헬라어 에피스토케마이는 너무 중요한 단어입니다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돌아보시고 방문하셔서 구원을 나타내는 전문 용어입니다저의 간증 룻기 1 1절에도 같은 단어를 썼어요출애굽에도 애굽에서 탄식했던 백성을 찾아가셨어요다 같은 단어예요절망에서 심방 한번 해주시면 구원 해주시는 표적과 기사잖아요너무 따뜻한 주님의 돌보심과 심방으로 구원으로 이루어지는 거죠에피스토케마이는 출석 체크가 기본 뜻입니다관심의 표현입니다가장 확실한 관심의 표현은 직접 찾아가서 함께 있는 뜻으로 교회의 심방이 이런 의미입니다우리의 목장은 기본이 출석 체크입니다그리고 방문해야 합니다. Zoom으로 하셔야 합니다얼굴과 얼굴을 대면해야 합니다그래서 여러분들이 목장에 출석체크 출석하시면 이게 목장의 큰 의미입니다늘 출석만 해도 심방하십니다구속사적인 구원으로 인도해 주십니다최고의 돌봄은 하나님의 심방으로 찾아가 주시고 그것이 구원을 위한 것입니다그러니까 내 자녀가 지금은 안 믿어도 하나님이 방문해 주신다는 것을 믿고 요셉이 유언을 했어요. 그리고 올라갔는데 400년이 걸렸어요 돌보신다는 것은 시공을 초월해서 약속의 심방이고 방문하신다는 거예요 이렇게 우리를 심방하십니다그래서 돌봄은 심방이에요. 야고보도 이방인도 하나님이 심방 한 번 하시면 기둥 같은 사람이 될 줄 믿습니다올해에는 그러니까 심방 계획을 많이 잡으시기를 바랍니다.


SG목자님이 그냥 평균이 80세이니 이렇게 심방하라고 했는데 심방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니 80세가 되시고 몸이 불편하셔도 목사님 모시고 갔다는 거에요 원주에 사시는 집사님과 같이 가서 대면을 하니 마음을 열었다고 합니다사람이 나이가 많으나 적으나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가면 구원으로 연결이 됩니다전부 80이 넘으셨는데 하나님의 심방 아닙니까사역자도 아닌 목자님이 원주로 청주로 간다고 하니 같이 동승하게 됩니다.


(적용 #2)

-여러분은 하나님의 심방이 따뜻하게 느껴집니까귀찮습니까

-목자의 심방이 즐거우세요부담되세요? 

-마음에 안 든다고 톡 방에서 나간 적은 없나요?


올해는 그런 유치한 일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하나님의 심방으로 생각하고 톡방이 하나님의 심방입니다.

 

3.   말씀과 일치해야 합니다.

 

15절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일치하도다 기록된 바


하지만 주님은 다른 무엇보다 말씀으로 심방하는 것이 일치해야 합니다선지자의 말씀이 일치한다는 거예요우리가 아무리 돌본다고 해도 찾아간다고 해도 최종은 말씀과 일치해야 합니다돌보심의 결론은 말씀과 일치해야 합니다아무리 욕을 해도 말씀과 일치하면 오케이에요말씀이 잣대가 되어야 합니다삶에서는 말씀의 인도를 받지 않는다면 일치하지 않는 거예요.


16절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다시 지을 사람은 다윗의 후손 예수님인 거죠예수님만이 무너진 성을 지을 수 있는데 다윗의 장막을 왜 세우겠다고 했을까요?


17절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다윗의 후손 예수님을 통해서 선택된 남은 자와 모든 이방인을 구원하시기 위해서라고 했죠에돔은 최고로 약속의 민족에서 벗어난 사람이죠 불구대천 원수까지 내 이름으로 기업을 얻게 한다고 했어요그런데 야고보는 그 본문을 영적으로 해석해서 이방인들 가운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확대된다고 했어요인류의 남은 자들이 주를 찾게 된다고 하는데 이 이야기는 더 많은 민족이 일컬음을 받고 있는 것이 퇴락한 장막을 다시 세우겠다는 계획이고 이것이 이방인 선교라는 거예요.


18절 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


야고보는 주의 말씀이라고 썼어요주의 말씀이라는 현재 직설적 동사로 하나님이 현재적으로 말씀하고 계시다는 의미에요야고보는 이방인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 것은 어제나 오늘이나 진리라는 거예요전의 이야기잖아요다 똑같아요현재에도 어제도 오늘도 동일하다는 거죠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허다한 잡종이 섞여 나왔다고 했는데 이방인도 구원의 대상이라고 표현하는 거죠좀 어렵죠쉽게 설명드리겠습니다북 이스라엘(B.C.722)과 남유다(B.C. 586)과 이 망했어요.


그리하여 흩어진 디아스포라(dispora) 유대인들이 지중해 연안으로 흩어졌어요 시간이 갈수록 모국어를 잊었어요 각자 자기 지방의 모국어로 쓰고 있는데 히브리어 성경을 모르는 거예요 로마가 제패하고 나서 헬라어가 공용어가 생겼습니다그런데 이방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성경인 거죠유대인들에게도 구약 성경에 아모스(Amos)를 인용했기 때문에 예언이 이루어졌다고 이야기하는 거죠여러 차례 좀 들어보시기 바랍니다중요한 것은 성경 대로입니다성경대로 일치하지 않으면 돈을 줘도 꽝이고 돌봄을 해도 꽝입니다그러니까 성경대로 하지 않은 나의 열심은 이단입니다베드로 야고보와 바울이 이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적용 #3)


-말씀과 일치하기 위해 온라인으로 드리는 모든 예배를 잘 드리고 있나요?
-
온라인 예배 때 모니터에 열려있는 화면은 몇 개인가요?

 

예배에 집중하기를 바랍니다.


모든 것의 결론은 말씀입니다성경의 돌보심의 결론은 인내입니다.


<Epilogue>

 

1)  성령의 돌보심은 눈높이를 맞추는 것 이고 하나님의 심방이며 말씀과 일치해야 한다

2)  우리는 눈에 보이는 표적과 기사(miraculous signs and wonders)이 너무 좋은 것이다

3)  진짜 표적은 십자가다

4)  주님은 요나의 표적 밖에 보여줄 것이 없다고 하신다

5)  구원은 자랑 질 하지 않아야 한다

6)  조심 또 조심하는 것이 눈 높이를 맞추는 것이며 성령의 돌보심이고 구원의 목적이다

7)  성령의 돌보심은 앞으로 밑지고 뒤로 남는 장사가 되는 것이다

8)  예수님 없는 구속사는 늘 무능하고 부패한 것이다

9)  사람은 전적으로 무능하고 부패하고 음란하기 때문이다

10) 하나님의 경륜으로 성자 하나님은 고난을 받으며 순종하는데 성령 하나님의 효과적인 돌보심이 있기 때문이다

11) 하나님의 심방으로 찾아가신 그것이 구원의 위로 심방이다

12) 구원, 약속의 심방이 돌봄과 구원으로 이어진다

13)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심방하니까 돌봄과 구원이 되는 것이다

14) 돌보심의 결론은 말씀과 일치해야 하는 것이다

15) 말씀의 인도를 받지 않는다면 말씀과 일치하지않는 것이다

16) 곳곳에 죽이려는 유대인이 있었지만 루스드라 이고니온 안디옥을 돌아온 선교 보고 그것 자체가 표적과 기사였다

17) 유대인들에게는 기복적 관점으로 보고를 했지만 사도들에게는 팔복의 관점으로 균형 있게 보고를 하게 된다.

18) 대단한 보고도 타이밍이 중요하다

19) 성경에는 한 구절 한 구절이다 숨결이 있는 것이며 하나님의 연애편지가 맞다.

20) 구원을 위해서 이렇게 자랑 질을 하면 안 되는 것이다

21) 상황 속에서 역할이 바뀔 수 있고 순종해야 한다

22) 주님도 십자가에서 순종하는 역할을 맡으셨다

23) 우리가 항상 가장 많이 하는 이야기 돈 이야기다

24) 성령이 바울을 돌보셔야 다른 사람을 돌보게 된다

25) 눈높이 절제를 할 수 있는 것은 구원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26) 그것을 모르면 팩트(fact)라고 할 말 다 하고 앞으로는 남고 뒤로는 밑지게 되니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27) 눈높이에 맞추는 것은 십자가 짐이기 때문에 앞에서는 밑지지만 뒤로는 남는 장사고 구원이다

28) 목장이나 여러 곳에서 각자의 눈높이에서 돌보심을 받으시면 좋겠다.

29) 항상 우리의 구속사는 예수님 없는 개인은 전적으로 부패하고 무능하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30) 사람은 대충 알 수 있는데 사람은 전적으로 악하고 음란하기 때문이다

31) 정신 의학자 프로이트는 사람은 실수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 사람의 말이 행동 하나하나는 그 사람을 나타내는 바로미터라고 한다

32) 지독한 선민의식으로는 복음이 퍼질 수 없는 것이다

33) 인간이 100% 죄인인 것은 큐티의 기본이다

34) 예수님은 성령 받지 않고는 알아볼 수 없는 것이다 

35) 말씀을 못 알아들으면 똑 같은 것인데 이 식구들은 예수님하고 사는 것이 힘들었기 때문에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다

36) 지나고 보니까 하나님의 경륜이었고 좀처럼 식구들에게도 인정받지 못했던 성자 예수님인데 성령님이 효과적으로 돌보신 것이다 

37) 하나님의 경륜은 이렇게 모르는 것인데 식구들끼리 너무 잘 살았다면 이렇게 인류가 구원받도록 지경이 넓어지기 힘들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38) 예수님도 고난을 받아서 순종을 배웠다고 하시는데 이것이 바로 삼위의 하나님의 사역인 것이다

39) 주님이 찾아가시니까 단번에 변했는데 이것이 하나님의 심방이며 심방도 때가 있는 것이다

40) 그때 그때 맡겨진 역할에 순종하면 눈높이를 맞추는 것이다

41) 지난날을 생각할 때 형제가 될 수 없었는데 나도 너희들과 똑같이 비난했고 미쳤다고 이야기한 것이다

42) 주님이 만나 주셔서 심방 한 번 하시면 가능합니다

43) 보이는 것으로 옳고 그름으로 논하는 것이 예수님을 미쳤다고 하는 것과 같다

44) 그런데 이해가 안 되니 보이는 것으로 이렇게 미쳤다고 하는 것이다  

45) 생명은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하나님이 심방 한번 해주시면 구원으로 연결 되돌 봄이 자연스럽게 되는데 나에게 느껴지면 나도 남을 돌보게 된다.

46) 절망에서 심방 한번 해주시면 구원 해주시는 표적과 기사인 것이다

47) 너무 따뜻한 주님의 돌보심과 심방으로 구원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48) 가장 확실한 관심의 표현은 직접 찾아가서 함께 있는 뜻으로 교회의 심방이 이런 의미다

49) 여러분들이 목장에 출석체크 출석하시면 이게 목장의 큰 의미이다

50) 늘 출석만 해도 심방하시는데 구속사적인 구원으로 인도해 주신다

51) 최고의 돌봄은 하나님의 심방으로 찾아가 주시고 그것이 구원을 위한 것이다

52) 돌보신다는 것은 시공을 초월해서 약속의 심방이고 방문하신다는 것으로 이렇게 우리를 심방하시는 것이므로 돌봄은 심방이다

53) 사람이 나이가 많으나 적으나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가면 구원으로 연결이 된다

54) 하나님의 심방으로 생각하고 톡방이 하나님의 심방입니다.

55) 주님은 다른 무엇보다 말씀으로 심방하는 것이 일치해야 한다

56) 선지자의 말씀이 일치한다는 것으로 우리가 아무리 돌본다고 해도 또 찾아간다고 해도 최종은 말씀과 일치해야 한다

57) 돌보심의 결론은 말씀과 일치해야 하는 것이다

58) 아무리 욕을 해도 말씀과 일치하면 오케이인 것으로 말씀이 잣대가 되어야 한다

59) 삶에서는 말씀의 인도를 받지 않는다면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60) 야고보는 이방인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 것은 어제나 오늘이나 진리라는 것이다 

61) 성경대로 일치하지 않으면 돈을 줘도 꽝이고 돌봄을 해도 꽝이다

62) 그러니까 성경대로 하지 않은 나의 열심은 이단이다

63) 말씀의 결론은 인내이다

   64) 모든 것의 결론은 말씀이다

   65) 성경의 돌보심의 결론은 인내다.


 


Posted by 윤강로
말씀과 마음씀2021. 1. 13. 17:16

[우리들교회 2021110일 주일예배 말씀 요약(사도행전 15: 5~ 11/ 성령의 의논)]



 

<사도행전 15:5~11>

 

5바리새파 중에 어떤 믿는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Then some of the believers who belonged to the party of the Pharisees stood up and said, "The Gentiles must be circumcised and required to obey the law of Moses.")

6 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 (The apostles and elders met to consider this question)

7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After much discussion, Peter got up and addressed them: "Brothers, you know that some time ago God made a choice among you that the Gentiles might hear from my lips the message of the gospel and believe)

8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언하시고 (God, who knows the heart, showed that he accepted them by giving the Holy Spirit to them, just as he did to us)

9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 (He made no distinction between us and them, for he purified their hearts by faith)

10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Now then, why do you try to test God by putting on the necks of the disciples a yoke that neither we nor our fathers have been able to bear?)

11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9 No! We believe it is through the grace of our Lord Jesus that we are saved, just as they are.")

 

 

 

<Prologue>

 

화성연쇄살인 사건의 진범이 잡혀서 억울하게 20여년 동안 옥살이 한 윤성여씨가 무죄가 됐다. 그때는 우리 나라에 범인이 필요해서 범인으로 몰아넣은 경찰이 대제사장 바리새인 같다. 예수님도 다들 의논했지만 빌라도 법정에서 일방적으로 죄없이 사형 당했다. 세상에는 수많은 의논이 지금도 행해지고 있다. 수준이 높을수록 이렇게 억울한 의논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이 걸려서 그렇지 진실은 반드시 드러난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상에서 억울함을 풀어달라는 이 옳고 그름 보다는 천하보다 귀한 성령의 의논을 해야한다.

 

<말씀 요약>

 

성령의 의논은,

 

1. 사람을 살리는 구원의 의논입니다. (5)

지난주에 본대로 바울과 바나바는 예루살렘 교회 회중 앞에서 선교 보고를 했다. 차별 받았던 베니게(Phoenicia)와 사마리아(Samaria)의 교회들은 크게 기뻐했지만 바리새인들(Pharisees)은 크게 비난하고 싫어한다. 바리새파 중에 믿는 어떤 사람들이 원어에 보면 벌떡 일어나서 이방인도 할례를 받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며 들어볼 것도 없다며 바울의 선교 보고에 찬물을 끼얹었다. 바울은 안디옥(Antioch) 교회에 내려온 유대인은 예루살렘 교회의 지시도 없이 내려 왔다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서 지금 예루살렘 교회에 지도를 받고자 올라왔는데 모교회의 회의에서는 할례(circumcision)뿐만 아니라 모세의 법도 지켜야 한다고 혹 떼려 다가 혹을 하나 더 붙인, 강경기류가 내뿜어져 나왔다. ‘일어나가 원어로는 첫 단어로 나와서 긴장감을 조성한다. 이 유대인도 바리새파 중에서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해서 믿는 사람들이다. 다 믿는 사람이다. 그러니 선교사들이 보고하는 놀라운 사역과 바리새파 신자들의 그럴듯한 주장이 충돌이 되고 있다. 바울의 마음이 날이 갈수록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 6) 의논에도 죽이는 의논이 있고 살리는 의논이 있다. 대제사장과 바리새인처럼 예수님과 바울을 죽이려고 의논할 수도 있고 예루살렘 교회 사도들과 장로들처럼 성도를 살리는 의논을 할 수도 있다. 교회를 살리고 가정을 살리고 사람을 살리는 의논이 성령의 의논(debate)이다. 이혼 28년만에 재결합해서 혼인신고하고 10일만에 천국 보냈다는 구원의 간증을 들으면 인내는 인간이 감당할 부분이 아닌 것 같고 하늘의 언어인 것 같다고 나눔 한 목자님이 계시다. 이 땅에서 하늘의 언어를 쓰려니 하늘 가족 식구인 구원의 공동체에서 의논을 하지 않으면 인내를 못 해서 또 다른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늘 의논을 해야한다. 안디옥과 마찬가지로 예루살렘 교회에서도 그들은 이 문제를 자신들의 교회를 대표하는 영적 지도자인 사도와 장로들에게 맡긴다. 이건 예루살렘 교회도 좋은 것 같다. 그들에게 물었다. 왜냐하면 자기들이 도저히 결정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물었다. 그래서 7절에 많은 변론을 했다고 한다. 우리가 앞서 2절에서 안디옥 교회에서도 적지 아니한 다툼(dispute)과 변론(debate)을 했다고 했다. 이제 같은 변론이 예루살렘에서도 바울 파와 바리새인 파 사이에 찬성하는 사람들 사이에 변론이 일어나고 있다. 이들의 주장이 얼마나 다른가? 할례 주의자들의 생각이 얼마나 잘못되었는가? 그것은 그들의 어리석음, 편협함, 복음에 대한 몰이해 등을 드러낸다. 그들의 주장은 복음을 변질시키는 아주 위험한 것이다. 그러나 예루살렘 회의에서 이들에 대해서 비난하는 분위기는 없었다. 말을 제지하는 것도 없었다. 인격적인 모욕을 주는 이도 없었다. 그들은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충분히 말할 수 있었다. 변론은 자기 말로 이기려는 말싸움이 아니다. 가짜를 버리고 진짜를 찾기 위해 상대와 진지하고 치열하게 의논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말싸움과 달리 승리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진리가 목적이다. 승리를 목적으로 싸우면 사람을 살릴 수 없다. 그러나 성령의 의논은 진리가 목적이므로 그 진리가 사람을 살린다. 목적이 진리에 있으니 서로 잘 묻고 듣는다. 사도들과 장로들이 서로 잘 드리려 했으니 많은 변론이 있었다

(적용#1)

-여러분은 사람을 살리는 의논을 합니까? 죽이는 의논을 합니까? 잘 듣습니까? 지시하고 명령합니까?

 

2. 형제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7)

많은 변론이 끝난 후에 베드로가 비로소 일어나 자기 말을 한다. 6세기에 기록된 사본에는 베드로가 성령으로 일어나 말하되라고 했는데 성령으로 일어나서 한 말이 무엇인가? 베드로는 먼저형제들아~”라고 부른다. 이렇게 싸우는 자들이 어떻게 형제일까? 그런데 베드로는 바리새인도 바울도 모두 주님이 피 값을 치루시고 죽어 주신 형제들이라는 것이다. 서로에 대해 나쁜 감정도 들 수 있고 갈등도 생길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모두 함께 예수그리스도의 형제라는 것이다. 그럼 우리가 생각해 볼 때 베드로가 워낙 믿음이 훌륭한 가요? 수석 사도라서형제들아~”하는 건가요? 이럴 때 생각해 보아야 한다. 어떻게 베드로가 형제들아 할 수 있는가. 베드로가 사도행전 12장에서 옥에 갇혔다. 간절히 기도했던 성도들이 베드로가 막상 나왔다고 하니 미쳤다고 했다. 감옥 문은 열렸는데 교회 문은 안 열렸다. 촛대를 옮기실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13장에 안디옥 교회가 나오고 바울의 체험 + 구속사의 믿음 시대로 촛대를 옮기신다. 한번 촛대가 옮겨지면 그 은혜를 회복하기 어렵다. 그 시대가 지난 것이다. 그 후로 베드로가 사라졌다. 그런데 갈라디아서에서 보면 2장에 안디옥에 잠깐 나타났다. 시기는 확실하지 않지만 1차 끝나고 2차 전도 여행 끝나기 전, 예루살렘 총회 전후로 본다. 갈라디아서 (2:11~14) 즉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한 식탁에서 먹다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오자 이들은 야고보(James)에게서 온 유대인들이라고 했다. 정식 감사가 온 것이다. 그들의 비난을 두려워해서 그 자리를 피했다고 한다. 미완료 시제다. 그래서 그로 인하여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유대인, 특히 바나바(Barnabas)까지도 외식적인 행동을 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베드로가 복음의 진리에 근거하여 일관되게 행동하지 아니하고 상황에 따라 이중적으로 행동한데 대하여 책망했다. 고넬료(Cornelius) 사건을 겪은 베드로가 여전히 율법과 할례에 자유롭지 못하고 두려워 외식을 했던 것이다. 유대인들의 선민 사상은 생각보다 너무 깊었다. 갈라디아(Galatian) 교회는 바울이 개척한 교회다. 그런데 바울이 떠나자마자 이단에 빠졌다. 갈라디아 3:1,3) 이후 통렬하게 갈라이다서를 썼다. 외식 사건이 총회 이전이든 이후이든, 이후면 베드로가 더 초라해 진다. 베드로가 외식한 것은 바울에게로 촛불을 옮길 만한 일이었다. 사람들은 다 바울 보고 베드로에게 가르침을 받았다고 하지만 이 사건을 보고 그 이야기가 쏙 들어갔다. 그러나 베드로가 대단한 것은 이때인 것이다. 이 사건을 권위도전으로 받지 않고 책망을 잘 들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역시 수제자 맞다. 그리고 베드로 최후의 변론을 하는 것이다. 이후로 베드로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래서 변론 후에 베드로가 꺼낸 첫 마디가형제들아 내가 너희들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다.”이다. 그야말로 별 인생이 없다는 것이다. 나에게도 고정관념이 너희처럼 뼛속 깊이 박혀있고 고넬료가 이방인으로 성령 받는 것을 보았는데도 여전히 유대인 앞에서 이방인과 밥 먹다가 두려워 나도 도망갔다. 떠나 물러 갔다는 게 미완료 시제인 것은 계속 반복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 유대인들에게 이 이야기를 하면서 그들과 지체 의식을 가지기 쉽다. “나도 그랬다.” 어쨌든 베드로는 이 장렬한 최후의 변론을 했었어도 다시 등장하지 않는다. 실수도 잦으면 이렇게 촛불을 옮기실 수 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어지는 베드로의 말은 형제들아 다음에 너희들도 알거니내가 알거니와가 아니다. 너희도 알거니와. 객관적으로 모두가 아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이쯤 되면 내가 그래도 수석 사도 베드로 아니겠니? ‘내가 결론을 내리겠어하면서 내가 알거니와라고 할 수 있지만 너희도 알거니와~ 가르치려는 태도가 아니라 호소하려는 태도이다. 그들이 알고 있는 사실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베드로를 선택해서 제일 먼저 이방인에게 전해 복음을 전하게 하신 일이다. 그것은 바로 로마의 백부장 고넬료 일을 말한다. 그 때 베드로 보고 먹어라! 베드로는 못 먹어요! 그러면서 베드로를 고넬료 집에 보내신 일은 예루살렘 교회에 아주 큰 사건이었다. 그 때도 할례자들, 즉 유대주의를 버리지못한 성도들이 단체로 들고 일어나서 어떻게 사도가 이방인의 집에 가서 밥을 먹냐?’ 고 비난을 했다. 그 때 베드로가 있었던 일을 차례로 성령의 설득으로 자세히 설명해서 이해 시켜야만 했다. 그래서 겨우 이방인에게 주어진 은혜를 인정할 수 있었는데 고넬료 집 한 가정의 성도가 거기서 밥 먹은 것 만으로도 이렇게 거부반응을 보였던 사람들인데 자기들보다 훨씬 많은 이방인들이 예수 믿고 교회로 돌아왔다고 하니까 얼마나 격렬하게 율법을 주장했을 지 이해가 된다. 이들이 사도와 장로들인데도 여전히 이렇게 율법과 할례를 앞세웠다는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믿음이 약한 그들을 정죄하지 않고 과거 고넬료 사건 때 이미 받아들인 이방인의 구원을 상기시킨다. 여기서 베드로가 나도 그랬다라고 하지 않고서는 설득이 안된다. 의논할 때도 마찬가지다. 나는 맞고 당신은 틀렸다는 이 높은 마음으로는 아무리 의논을 해도 사람을 살릴 수 없다. 하지만 나도 당신과 같았다라고 간증을 하면서 그 사람이 당한 일을 나도 당했다고 할 때 주안에서 한 형제 의식을 가질 때 의논이 시작된다. 중등부의 한 학생은 조두순을 비난하면서 어떻게 해야한다고 하는게 옳은 것 같지는 않다고 했다. 구원이 전적으로 주님의 몫이라면 주 안에서 한 형제가 될 수 있고 어떤 범죄자도 형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베드로도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바울도 스데반 죽인 죄인이고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형제 의식을 가질 때 의논이 되는 것이다. 여러분들은 고난이 왜 축복인지 모르기 때문에 여기 와서도 물과 기름처럼 따로 노는 것이다. 정인이는 너무 예뻤다. 그래서 너무 기가 막힌다. 입양 되어서 16개월 때 죽어서 국민적인 공분을 사고 있다. 여러분들이 너무 슬퍼하니까 더 이상 이야기는 안하겠지만 뱃속에서 단번에 죽은 아이들은 요? 우리는 모두 죄인이다. 올해 사자성어가아시타비(我是他非)’. 전 여기서 정인이 엄마가 너무 많이 아프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너무 많이 아프면 부모도 건드릴 수 없는게 있다. 정상적으로 대학도 졸업했으니까 딸을 믿고 싶은 마음도 들었을 거고 입양도 본인이 한다고 하니까 그거 말릴 수 없었을 것 같다. 자식 가진 사람은 남의 말을 할 수가 없다. 그 부모님들도 너무 힘들었을 것 같다. 그런데 양가가 다 목회자 가정이라는 것은... 교회에서도 아픈 것을 말하지 못하는 실상을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이런 집이 많을 것이다. 우리들 교회가 다른 것은 아픈 가정의 부모들이 아이들과 함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 들으면서 부모나 자녀나 먼저 믿은 사람이 자신의 죄를 깨달아 가면서 하루하루 산다. 사는 이야기들을 목장에서 마음껏 하면서 격려의 받기 때문에 아픈 부모 자격자가 많지만, 문제가 많아도 문제가 없이 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다 형제이고 별 인생이 없다는 것이다. 공동체에서 의논을 하기 때문에 이것이 살리는 의논이다. 무엇을 회개해야 하는지 모르고 있는 것 같다. 다들 교회에서 말을 할 수 있으면 좋을 것 같다. 회사고 직장에서 다 자유롭게 말을 할 수 있어야 하는데 아시타비(我是他非)’, 나는 옳고 너를 틀렸다는 이야기만 하니까 안되는 것이다. 그럼 집이고 나라고 살리는 의논이 되지 않는다. 이게 원죄의 형벌이다. 나는 옳고 너는 틀리고. 선악과 먹고 죄가 들어와서 그렇다.

(적용#2) –

-조두순은 불신자이고 정인이 부모는 신자다. 그런데 여러분은 신자이든 불신자이든 구원받아야 할 형제 의식이 얼마나 있나요?

-정인이 엄마 목장에 온다면 어떻게 의논하겠는가?

 

3. 하나님이 답이십니다. (8~9)

서로 다른 의견이 충돌하는 변론이나 논쟁의 답은 증인이나 증거로 결정된다. 그래서 법정에서 증인이 얼마나 중요한가? 화성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이 아니었던 윤여성씨가 자기가 진범이 아닌데 증거도 증인도 없어서 20년동안 옥살이를 했는데 증인이나 증거가 너무 중요하다. 그래서 베드로도 여기서 증인을 제시하는데 그게 바로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증언하셨다는 것이다. 이것도 부정 과거를 써서 기정 사실이 된 확실한 일임을 표현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확실히 증언 하셨다는 것이다. 무엇을 증언 하셨나? 이방인도 복음을 듣고 믿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도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을 하나님이 증언하셨다. 그러니까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에서부터 올라와 보고한 내용에 대해서 우리가 왈가왈부하고 있지만 사실은 이미 하나님이 확실히 증언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어떤 방법으로 증언 하셨나요? 성령을 주어 증언하셨다. 고넬료 집에 모인 이방인들에게 성령을 부어 주셔서 그들이 방언으로 하나님을 찬양했다. 오순절 성령 강림과 똑같은 일이 이방인의 집에서도 똑같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할례 파든 바리새 파든 율법주의자이든 그들의 이론으로 절대 반박할 수 없는 가장 확실한 성령의 증거로 하나님이 증언하신 일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증언하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베드로는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라고 밝힌다. 이것이 이방인과 율법의 문제에서 하나님과 사람의 관점이 근본적으로 다른 부분이다. 사람은 외모를 보나 하나님은 마음을 아신다고 했다. 사람의 속마음을 보시기에 겉으로 율법을 지키는 척 하는 것이 통하지 않는다. 10) 율법 준수를 요구하는 바리새 파 형제들은 겉으로는 의롭게 보인다. 전통과 민족을 사랑하는 애국자처럼 보인다. 그런데 하나님에 대한 불신은 인간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 연결되어 있다. 바리새인은 인간을 스스로 의롭게 될 수 있는 존재로 여겼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율법 준수가 인간이 능히 질 수 있는 멍에였다. 그들에게 율법의 멍에는 수치와 고난이 아니라 특권이자 자랑이었다. 나는 할 수 있다는 자기 확신이 충만했다. 인생의 답을 자기가 가지고 있으니 굳이 답을 하나님을 믿을 이유가 없다. 하나님을 믿을 이유가 없다. 믿지 않는다. 그들은 여기서 태안까지 걸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바울이나 베드로는 인간이 절대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존재임을 안다. 그들은 율법을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질 수 없는 멍에로 본다. 나는 할 수 없다는 인식이 분명하다. 자기 안에 답이 있을 수 없음을 보는 것이다. 주제 파악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답을 구해야 하고 하나님이 답 이심을 고백하게 된다. 그러니 나는 할 수 있다가 얼마나 불신앙의 말임을 알겠나 요? 물론 주님 안에서는 주님이 하시니까 할 수 있다. 율법은 지키라고 주신 것이 아니고 죄를 알게 하려고 주신 것이다. 죄를 죄 되게 하시려고 주신 것이다. 율법과 그것을 지키기 위한 율법이 613가지나 된다. 인간은 그것을 모두 지키지 못한다. 유대인들을 보면 율법 지키다가 다 형식주의, 율법주의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지금도 이스라엘에 가면. 지킬 수 없는 율법을 지켜야만 구원받는다고 너희도 못 지키는 것을 지키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라고 한다. 성경구절을 한절, 한절 보면 나와있다. 예레미아 9:25) 아무리 할례는 받아도, 겉으로 할례를 받아도 마음의 할례를 받지 않으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마음이 깨끗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살점을 깎아내도(mutilation) 마음과 몸에 전부 할례를 받아도 전부 심판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마음을 깨끗이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나도 못 하면서 남들에게는 그것만 지키면 구원 받는다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것을 적용해보면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잘못했어요, 살인을 했어요, 남의 가정을 망쳤어요, 그런데 사과도 용서도 받기 싫어요, 사랑하기 싫어요. 그런데 금식만 한다면, 할례만 한다면 내 죄와 상관없이 나 혼자 구원받는 다는 것이다. 이단에 이런 사람들이 몰려간다. 그러면 내 속의 귀신들이 다 물러간다는 것이다. 내 속에 나만, 나만, 이런 열심히 이단들의 열심히 무섭다. 종교적인 열심히 다른 사람들을 삼킨다. 나부터 회개해야 하는데 회개하지 않는 열심이 다른 사람들을 무섭게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원칙을 안 지킨다. 자기만 구원받으면 되니까. 병만 낫는다면 물불을 안 가린다. 하지만 놀라지 마세요. 실은 정반대 현상이 나타난다. 이런 종교일수록 사람들이 열광하면서 몰려든다. 그런데 막상 가보면 이단일수록 사람에게 무거운 멍에를 지게끔 한다. 아무리 교주가 성범죄자여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 무거운 멍에를 당연하다는 듯이 짊어진다. 자살 테러도 마다하지 않는다. 신천지가 온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도 눈도 깜짝하지 않는다. 사람은 무언가 특별한 멍에를 질 때, 부적처럼 종교적 효험이 나타난다고 믿는다. 몸에 이 무서운 할례를 행하면 그러면 거기에 부적 효과가 나타날 것만 같다. 이건 불교에서 3천배를 하면 모든 게 잘 된다는 것과 같다. 그만큼 인간의 종교 심리는 부패해 있다. 그러니까 기능을 잘 못하는 것이다. 인간은 악하고 음란하다. 그것을 믿음이라고 착각한다. 막 금식하고, 할례를 행하고 성경을 막 외우고.. 성경을 외우는데 우리가 볼 때 평강이 없고 무서운 사람이 많다. 그래서 이런걸 기막히게 이용하는게 바로 거짓이다. 유대교가 지금 그런 것이다. 중세에 타락한 로마 카톨릭이 똑같은 일을 행했고 오늘날 이단들이 그러하고 교회에도 거짓이 들어와 있는 것이다. 멍에만 지우려는 거짓 종교에 속으면 안된다. 그런데 우리는 병만 낫는다면 할례를 행해서 애가 붙기만 한다면 못할 일이 없는 것이다. 참 복음은 참 자유를 준다. 하나님 나라는 의와 평강과 희락을 준다. 그러면 이 땅에서 뭐든 잘 먹고 잘사는 것이 아니라 좁은 길을 가는데 남들이 볼 때는 고난이다. 그런데 그 고난보다 한가지 더 좋은 게 있어서 고난을 갈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하면 여기서 잘 먹고 잘 살고 애들은 속 안 썩이고 이런 것만 하나님 나라라고 착각한다. 그래서 할례를 행해서 이런 기복적인 복을 위해서 그렇게 열심을 내는 것을 믿음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우리들교회에 인도에서 선교를 하다가 오신 목사님이 계신데, 할례를 강조하면서 500km 달려온 유대인의 이야기를 하실 때 본인한테 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말씀에 해석이 없는 열심히 얼마나 무서운지를 본다. 동일한 모습으로 행위와 경건주의에 열심을 다했던 죄를 회개했는데 평신도는 하루 1시간, 리더는 2시간, 목회자는 3시간, 선교사는 5시간 배웠는데 하루 기도 5시간을 채웠기 때문에 할례를 강조했던 유대인과 같은 마음이 들어왔다고 한다. 그러니까 내가 5시간 하니까 못하는 사람을 정죄하고 판단하는 마음이, 나는 5시간 했는데 저 사람은 안 한다고. 그래서 할례를 강조한 유대인의 모습이 하루의 기도시간을 강조한 저의 모습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또한 구원을 함께 기도하는 공동체가 중요하다고 했는데 그렇게 5시간을기도해도 진실됨으로 나누는 공동체는 하나도 없었다고 이야기한다. 이게 선교사님의 현주소였다. 11) 바로 이것이 교회의 신앙고백이다. 누구나 주 예수를 믿기만 하면 은혜로 구원받는 줄 믿습니다! 말로는 신앙고백이 너무 쉬운 것 같은데 주 예수를 믿기만 하면 은혜로 구원받는 줄 믿습니다. 그런데 진정으로 고백하는 일이 잘 되지 않는다. 전적으로 무능하고 전적으로 부패한 자기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절대 보이지 않는다. 여러분들이 지난주에 구원의 확신이 있는지 나눠보라고 했는데 다들 썩 그렇게 잘 나오지 않는 것 같다. 인생에 여러 고난을 통과하여서 저절로 회개로 돌이키지 않으면 하나님이 답이 아니고 여전히 내가 답인 것이다. 하나님만이 답이여야 성령의 의논을 할 수 있는데 하나님만이 답이 되려면 베드로처럼 이런 기가 막힌 과정을 다 거쳐야 되니까. 갈라디아서의 베드로를 보고 너무 슬프고 위로가 되었다. 베드로도 마지막 까지도 그랬구나. 다윗도 마지막까지 인구조사를 했는데. 그런데 이단들은 그렇지 않는다. 할례만 받으면 끝이고 한번 죄사함을 받았으면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이야기하니까 보통 사람들은 내가 뭔가 용서하고 그러지 않아도 되니까 열광하면서 가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만이 답이시기 위해서 우리의 사건과 고난이 걸어가고 걸어오게 되는 것이다.

(적용#3)

-가정에서내 말이 답이다.“ 라고 주장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여러분들은 인생에서 항상 하나님이 답이시라는 게 얼마나 인정이 됩니까? 몇 프로나 인정이 됩니까?

-집에서 내 말이 답이다 하는 건 누구인가요?

 

성령의 의논은 하나님이 답이시라는 고백으로 이어진다. 서로 자기 말이 답이라는 의논은 교회와 사회를 세울 수 없다. 생명을 살리는 성령의 의논은 하나님에게서 답을 구하게 진리의 성령님이 사람을 살리는 진리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줄로 믿는다. 우리는 날마다 우리는 이렇게 날마다 남들에게 무시를 당해도 오뚜기처럼 일어나서 성령의 의논을 해야한다.

 

성령의 의논은 사람을 살리는 구원의 의논이 되어야한다. 그러니까 돈 뺏어 갔다고 내놓으라고 난리치고, 바람 피웠다고 저 남편, 저 아내 죽여야 한다는 것 말고 다 거기서 구원을 도출해 낼 수 있는 구원의 의논이 되어야하고 나도 너와 똑같은 죄인이라는 형제 의식이 있어야하고 사람이 아무리 어떤 말을 해도 나는 답이 아니고 하나님만 답이기 때문에 우리는 말씀을 보는 공동체 속에 있어야한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의 변론은 자유가 없다.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키고.. 주의 영이 계신 곳에 참된 자유가 있다.

 


<Epilogue>


1)  교회를 살리고 가정을 살리고 사람을 살리는 의논이 성령의 의논(debate)이다.

2)  이 땅에서 하늘의 언어를 쓰려니 하늘 가족 식구인 구원의 공동체에서 의논을 하지 않으면 인내를 못 해서 또 다른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늘 의논을 해야한다

3)  변론은 자기 말로 이기려는 말싸움이 아니다.

4)  가짜를 버리고 진짜를 찾기 위해 상대와 진지하고 치열하게 의논하는 것을 말한다.

5)  그래서 말싸움과 달리 승리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진리가 목적이다.

6)  승리를 목적으로 싸우면 사람을 살릴 수 없다.

7)  성령의 의논은 진리가 목적이므로 그 진리가 사람을 살린다.

8)  목적이 진리에 있으니 서로 잘 묻고 듣는다.

9)  한번 촛대가 옮겨지면 그 은혜를 회복하기 어렵다.

10) 나는 맞고 당신은 틀렸다는 이 높은 마음으로는 아무리 의논을 해도 사람을 살릴 수 없다.

11) 하지만 나도 당신과 같았다라고 간증을 하면서 그 사람이 당한 일을 나도 당했다고 할 때 주안에서 한 형제 의식을 가질 때 의논이 시작된다.

12)  구원이 전적으로 주님의 몫이라면 주 안에서 한 형제가 될 수 있고 어떤 범죄자도 형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13) 베드로도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바울도 스데반(Stephen) 죽인 죄인이고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형제 의식을 가질 때 의논이 되는 것이다.

14) 여러분들은 고난이 왜 축복인지 모르기 때문에 여기 와서도 물과 기름처럼 따로 노는 것이다.

15) 사는 이야기들을 목장에서 마음껏 하면서 격려의 받기 때문에 아픈 부모 자격자가 많지만, 문제가 많아도 문제가 없이 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다 형제이고 별 인생이 없다는 것이다.

16) 공동체에서 의논을 하기 때문에 이것이 살리는 의논이다.

17) 아시타비(我是他非)’, 나는 옳고 너를 틀렸다는 이야기만 하니까 안되는 것이다.

18) 그러면 집이고 나라고 살리는 의논이 되지 않는다. 이게 원죄의 형벌이다.

19) 나는 옳고 너는 틀리고. 선악과 먹고 죄가 들어와서 그렇다.

20) 서로 다른 의견이 충돌하는 변론이나 논쟁의 답은 증인이나 증거로 결정된다.

21)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도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을 하나님이 증언하셨다.

22) 하나님은 어떤 방법으로 증언 하셨나요? 성령을 주어 증언하셨다. 고넬료 집에 모인 이방인들에게 성령을 부어 주셔서 그들이 방언으로 하나님을 찬양했다.

23) 오순절 성령 강림과 똑같은 일이 이방인의 집에서도 똑같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24) 할례 파든 바리새 파든 율법주의자이든 그들의 이론으로 절대 반박할 수 없는 가장 확실한 성령의 증거로 하나님이 증언하신 일이라는 것이다.

25) 이렇게 증언하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베드로는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라고 밝힌다.

26) 이것이 이방인과 율법의 문제에서 하나님과 사람의 관점이 근본적으로 다른 부분이다.

27) 사람은 외모를 보나 하나님은 마음을 아신다고 했다. 사람의 속마음을 보시기에 겉으로 율법을 지키는 척 하는 것이 통하지 않는다.

28) 하나님에 대한 불신은 인간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 연결되어 있다.

29) 바리새인은 인간을 스스로 의롭게 될 수 있는 존재로 여겼기에 그들에게는 율법 준수가 인간이 능히 질 수 있는 멍에였다.

30) 그들에게 율법의 멍에는 수치와 고난이 아니라 특권이자 자랑이었으므로 나는 할 수 있다는 자기 확신이 충만했다.

31) 인생의 답을 자기가 가지고 있으니 굳이 답을 하나님을 믿을 이유가 없다. 하나님을 믿을 이유가 없다. 믿지 않는다.

32) 바울이나 베드로는 인간이 절대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존재임을 안다.

33) 그들은 율법을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질 수 없는 멍에로 본다.

34) 나는 할 수 없다는 인식이 분명하다.

35) 자기 안에 답이 있을 수 없음을 보는 것으로 주제 파악이 되는 것이다.

36) 그러니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답을 구해야 하고 하나님이 답 이심을 고백하게 된다.

37) 따라서 나는 할 수 있다가 얼마나 불신앙의 말임을 알겠나?

38) 주님 안에서는 주님이 하시니까 할 수 있다.

39) 율법은 지키라고 주신 것이 아니고 죄를 알게 하려고 주신 것으로 죄를 죄 되게 하시려고 주신 것이다.

40) 율법과 그것을 지키기 위한 율법이 613가지나 되는데 인간은 그것을 모두 지키지 못한다.

41) 유대인들을 보면 율법 지키다가 다 형식주의, 율법주의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42) 지금도 이스라엘에 가면, 지킬 수 없는 율법을 지켜야만 구원받는다고 너희도 못 지키는 것을 지키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라고 한다.

43) 성경구절을 한절, 한절 보면 나와있다.

44) 예레미아 9:25) 아무리 할례는 받아도, 겉으로 할례를 받아도 마음의 할례를 받지 않으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마음이 깨끗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45) 그러니까 살점을 깎아내도(mutilation) 마음과 몸에 전부 할례를 받아도 전부 심판의 대상이라는 것으로 마음을 깨끗이 해야한다는 것이다.

46) 그런데 유대인들은 나도 못 하면서 남들에게는 그것만 지키면 구원 받는다고 하는 것이다.

47) 우리가 이것을 적용해보면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잘못했어요, 살인을 했어요, 남의 가정을 망쳤어요, 그런데 사과도 용서도 받기 싫어요, 사랑하기 싫어요. 그런데 금식만 한다면, 할례만 한다면 내 죄와 상관없이 나 혼자 구원받는 다는 것이다.

48) 이단에 이런 사람들이 몰려간다.

49) 그러면 내 속의 귀신들이 다 물러간다는 것이다.

50) 내 속에 나만, 나만, 이런 열심히 이단들의 열심히 무섭다.

51) 종교적인 열심히 다른 사람들을 삼킨다.

52) 나부터 회개해야 하는데 회개하지 않는 열심이 다른 사람들을 무섭게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원칙을 안 지킨다.

53) 자기만 구원받으면 되니까. 병만 낫는다면 물불을 안 가린다.

54) 하지만 놀라지 마세요. 실은 정반대 현상이 나타난다.

55) 이런 종교일수록 사람들이 열광하면서 몰려든다.

56) 그런데 막상 가보면 이단일수록 사람에게 무거운 멍에를 지게끔 한다.

57) 아무리 교주가 성범죄자여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 무거운 멍에를 당연하다는 듯이 짊어진다. 자살 테러도 마다하지 않는다.

58) 신천지가 온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도 눈도 깜짝하지 않는다.

59) 사람은 무언가 특별한 멍에를 질 때, 부적처럼 종교적 효험이 나타난다고 믿는다.

60) 몸에 이 무서운 할례를 행하면 그러면 거기에 부적 효과가 나타날 것만 같다.

61) 이건 불교에서 3천배를 하면 모든 게 잘 된다는 것과 같다.

62) 그만큼 인간의 종교 심리는 부패해 있다.

63) 그러니까 기능을 잘 못하는 것이다.

64) 인간은 악하고 음란한 것인데 그것을 믿음이라고 착각한다.

65) 막 금식하고, 할례를 행하고 성경을 막 외우고.. 성경을 외우는데 우리가 볼 때 평강이 없고 무서운 사람이 많다.

66) 그래서 이런걸 기막히게 이용하는게 바로 거짓이다.

67) 유대교가 지금 그런 것이다. 중세에 타락한 로마 카톨릭이 똑같은 일을 행했고 오늘날 이단들이 그러하고 교회에도 거짓이 들어와 있는 것이다.

68) 멍에만 지우려는 거짓 종교에 속으면 안된다.

69) 그런데 우리는 병만 낫는다면 할례를 행해서 애가 붙기만 한다면 못할 일이 없는 것이다.

70) 참 복음은 참 자유를 준다. 하나님 나라는 의와 평강과 희락을 준다.

71) 그러면 이 땅에서 뭐든 잘 먹고 잘사는 것이 아니라 좁은 길을 가는데 남들이 볼 때는 고난이다.

72) 그런데 그 고난보다 한가지 더 좋은 게 있어서 고난을 갈 수가 있는 것이다.

73) 그런데 여러분들은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하면 여기서 잘 먹고 잘 살고 애들은 속 안 썩이고 이런 것만 하나님 나라라고 착각한다.

74) 그래서 할례를 행해서 이런 기복적인 복을 위해서 그렇게 열심을 내는 것을 믿음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75) 말씀에 해석이 없는 열심히 얼마나 무서운지를 본다. 동일한 모습으로 행위와 경건주의에 열심을 다했던 죄를 회개했는데 평신도는 하루 1시간, 리더는 2시간, 목회자는 3시간, 선교사는 5시간 배웠는데 하루 기도 5시간을 채웠기 때문에 할례를 강조했던 유대인과 같은 마음이 들어왔다고 한다.

76) 그러니까 내가 5시간 하니까 못하는 사람을 정죄하고 판단하는 마음이, 나는 5시간 했는데 저 사람은 안 한다고. 그래서 할례를 강조한 유대인의 모습이 하루의 기도시간을 강조한 저의 모습이라고 했다.

77) 그러니까 또한 구원을 함께 기도하는 공동체가 중요하다고 했는데 그렇게 5시간을 기도해도 진실됨으로 나누는 공동체는 하나도 없었다고 이야기한다. 이게 선교사님의 현주소였다.

78)  바로 이것이 교회의 신앙고백이다.

79) 누구나 주 예수를 믿기만 하면 은혜로 구원받는 줄 믿습니다!’라고 말로는 신앙고백이 너무 쉬운 것 같은데 주 예수를 믿기만 하면 은혜로 구원받는 줄 믿습니다. 그런데 진정으로 고백하는 일이 잘 되지 않는다.

80) 전적으로 무능하고 전적으로 부패한 자기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절대 보이지 않는다.

81) 인생에 여러 고난을 통과하여서 저절로 회개로 돌이키지 않으면 하나님이 답이 아니고 여전히 내가 답인 것이다.

82) 하나님만이 답이여야 성령의 의논을 할 수 있는데 하나님만이 답이 되려면 베드로처럼 이런 기가 막힌 과정을 다 거쳐야 되니까 그렇다

83) 갈라디아서의 베드로를 보고 너무 슬프고 위로가 되었다.

84) 할례만 받으면 끝이고 한번 죄사함을 받았으면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이야기하니까 보통 사람들은 내가 뭔가 용서하고 그러지 않아도 되니까 열광하면서 가게 되는 것이다.

85) 하나님만이 답이시기 위해서 우리의 사건과 고난이 걸어가고 걸어오게 되는 것이다.

86) 성령의 의논은 하나님이 답이시라는 고백으로 이어진다.

87) 서로 자기 말이 답이라는 의논은 교회와 사회를 세울 수 없다.

88) 생명을 살리는 성령의 의논은 하나님에게서 답을 구하도록 진리의 성령님이 사람을 살리는 진리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줄로 믿는다.

89) 우리는 날마다 우리는 이렇게 날마다 남들에게 무시를 당해도 오뚜기처럼 일어나서 성령의 의논을 해야한다.

90) 성령의 의논은 사람을 살리는 구원의 의논이 되어야한다.

91) 그러니까 돈 뺏어 갔다고 내놓으라고 난리치고, 바람 피웠다고 저 남편, 저 아내 죽여야 한다는 것 말고 다 거기서 구원을 도출해 낼 수 있는 구원의 의논이 되어야한다

92) 나도 너와 똑같은 죄인이라는 형제 의식이 있어야하고 사람이 아무리 어떤 말을 해도 나는 답이 아니고 하나님만 답이기 때문에 우리는 말씀을 보는 공동체 속에 있어야한다.

93) 그러니까 유대인들의 변론은 자유가 없다.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키고….

94) 주의 영이 계신 곳에 참된 자유가 있다.

   95)믿음의 반대는 무서운 열심이다

96)  (blood)로 회복(헌혈)을 해야 피로회복(疲勞回復)이 된다

97)  성령의 의논은 승리가 아니라 진리가 목적이다

98)  높은 마음으로는 사람을 살릴 수 없다

99)  주 안에서 한 형제 의식을 가질 때 성령의 의논이 가능한 것이다

100)  사람은 외모로, 하나님은 마음의 중심을 보신다

101)  바리새인처럼 인생의 답을 자신이 가지고 있으니 하나님을 믿을 수 없는 것이다

102)  자기 안에 답이 없다는 자기 주제를 파악하니 하나님께 답을 구하는 것이다

103)  율법은 지키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죄를 죄로 알라고 주신 것이다

104) 마음의 할례, 혀의 할례를 해야 하는데 육체의 할례를 할지라도 하나님 보시기에 마음이 깨끗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일 뿐이다

105) 금식만 하면, 할례만 하면 내 속에 귀신이 물러간다라고 하는 것이 이단이다

106) 성경을 외우고 금식도 하지만 평강이 오질 않는 것이다

107) 이단은 멍에만 지우려는 거짓 복음이며 참 복음이 참 진리이다

108) 하나님 나라는 의와 평강과 희락을 준다

109) 말씀 해석이 없는 열심이 무서운 것이다

110) 고난을 통과하여 돌이키지 않으면 하나님이 답이 되지 않는 것이다

 

 


Posted by 윤강로
말씀과 마음씀2021. 1. 7. 11:20

[우리들교회 2021 13일 주일예배 말씀 요약(사도행전 15: 1~ 5/성령의 구원)]


 

<사도행전 15:1~5>


1    어떤 사람들이 유대(Judea)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2    바울 및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sharp dispute and debate)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의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

3    그들이 교회의 전송을 받고 베니게(Phoenicia)와 사마리아(Samaria)로 다니며 이방인들(Gentiles)이 주께 돌아온 일을 말하여 형제들을 다 크게 기쁘게 하더라

4    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하매

5    바리새파(the party of Pharisees) 중에 어떤 믿는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Gentiles)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1. Some men came down from Judea to Antioch and were teaching the brothers: "Unless you are circumcised, according to the custom taught by Moses, you cannot be saved."
  2. This brought Paul and Barnabas into sharp dispute and debate with them. So Paul and Barnabas were appointed, along with some other believers, to go up to Jerusalem to see the apostles and elders about this question.
  3. The church sent them on their way, and as they traveled through Phoenicia and Samaria, they told how the Gentiles had been converted. This news made all the brothers very glad.
  4. When they came to Jerusalem, they were welcomed by the church and the apostles and elders, to whom they reported everything God had done through them.

5.   Then some of the believers who belonged to the party of the Pharisees stood up and said, "The Gentiles must be circumcised and required to obey the law of Moses."

 

 


 

 

<Prologue>


성령을 받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누리는 것이지요. 그러려면 구원의 확신이 있어야 하지요. 구원의 확신은 세상에서 누리는 그런 평강과는 다르죠. 하나님 나라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했는데, 구원의 확신은 이런 의와 평강과 희락의 나라를 이 땅에서 누리는 것입니다. 그것을 성령이 효과적으로 도와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누릴 자가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성령의 구원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말씀 요약>

 

성령의 구원은?

1.   구원의 확신이 필요합니다.

 

1)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안디옥교회는 바울과 바나바(Paul and Barnabas) 1년간 성경을 가르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던 교회이다. 아가보 선지자가 흉년의 예언을 해도 잘 받아들이고, 예루살렘 교회에 구제까지 한 건강한 교회이다. 근데 그들은 비록, 개종을 해서 복음을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여전히 유대의 전통에 대하여 큰 자부심을 가짐으로 또 이방인 개종자들도 할례를 받고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을 계속 유포를 하니까, 초신자가 많은 안디옥 교인들은, 율법을 좔좔 꿰고있는 그들이 맞아 보였어요. 이 사람들은 이 안디옥 이후에도 갈라디아 지방 그리스인들도 혼란에 빠지게 했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은 사도회에서, 또 시키지도 가결 되지도 않은 내용이었어요. 그들은 안디옥 교회가 이방인에게 전도하여 엄청나게 부흥했다는 소문을 듣고 5백 킬로미터나 되는 길을 달려왔다. 여행 기간이 1달은 걸리는 기간이다. 굉장한 열심이다. 무슨 열심인가? 자기들의 자랑인 율법을 가르치고자 하는 열심이다.

믿음의 반대는 무서운 열심이다. 그래서 열심인 사람들이 믿기 어렵다. 그들이 음성적으로 활동하고 폐해가 큰다는 것은 그들이 거짓 형제이고, 예수 안에서 종으로 삼고자 했다고 비판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들이 열성적으로 가르쳤다. 여기에 구원이 흔들린 사람들이 생긴다.

신약 시대는 이미 시작이 됐다. 하지만 신약의 신학은 정립되지 못한 과도기였다. 그래서 유대인 출신으로만 구성된 초기 예루살렘 성도들도 구약의 율법에 얽매여 있었다.

이방인의 유입이 교회의 순수성과 윤리적 기준을 저해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있었다. 동시에 이면에는 자신들은 율법을 지키며 수고하며 교회의 일원이 되는데, 이방인은 쉽게 교회의 일원이 된다는 생색도 있었을 것이다.

실컷 죄짓고 살다가 나중에 회개하고 천국 가겠다는 사람들이 많다. 누구는 경건하게 살아도 구원을 못 받고, 누구는 죄짓다가 구원 받으면 말이 안된다는 것이다.

할례가 너무 몸에 익은 전통이기에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거 맞다. 갑자기 할례를 안하려고 하니까 이상하기도 했다. 유대인들에게 할례를 안받은 것은 아픔을 모르는 것이고, 일원이 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초신자들은 할례를 안하니 그들의 아픔을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다.

바울과 바나바에게 가르침을 받을 때는 확실한 것 같았는데, 배움이 짧은 것이다. 그리고 이방인들이 많았다. 특별히 가르치는 사람이 없어 흔들린 것이다.

 

                                                     (바나바/Barnabas)


우리들교회도 구원의 확신을 점검해 봐야 한다. 비로서 그리스도인이라 칭함을 받은 자들이 많았다고 생각한다. 흔들리는 사람은 없는가? 가르쳐야 하는데, 가르침 받는 이단같은 사람은 없는가? 사람은 기복이 본능이기에 자꾸 변질이 되는 것이다.


1차 전도한 갈라디아 교회들도 바울이 떠나자마자 이단에 빠졌다는 것이다. 요란케 하는 다른 복음에 왜 빠지냐 하면, 이런 사람들이 ‘할례를 받아야 된다, 율법을 지켜야 된다’ 이 구원을 조건으로 내세워서 결국에는 성공 복음, 합격 복음이 경건해 보이지만. 신천지, 이단에 빠지는 것은 기복이기에 그런 것이다. 내가 회개하지 않고도 구원을 받을 길이 있기 때문이다.


성령으로 시작했는데, 사업이 안되고 상처를 받고 그러면 떠나가게 된다. 다른 복음 들어오는 것이다.


(적용#1)

-새해 벽두에 여러분은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까?

 

2.   말이 아닌 삶의 변론을 해야 합니다.

 

2) 바울 및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의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


안디옥 교회에서 제자들과 머물던 바울과 바나바는 이 인본적인 가르침을 듣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다툼/투쟁은 맞서 일어나는 걸 말하고 변론은 치열하게 논쟁하는 걸 말한다. 이 문제는 넘어갈 수 없었던 것이다. 위험한 주장이기에 안디옥 교회에 찬성과 반대로 분쟁이 일어난다.


그래서 여기 적지 아니한 다툼이 일어났다고 했는데 수적으로도 굉장히 다툼이 많았고 기간적으로도 상당히 오래 지속되었으며, 정도에 있어서도 매우 격렬하고 아주 심각했다는 것이다.


바울과 바나바가 1차 전도여행에서 돌아온 후 예루살렘 공회가 열리기 까지 대략 1년정도 시간이 있었다. 이 기간 동안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기록했다고 하는데, 이 설에 따르면 이방인들이 할례를 받아야 하고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말에 바울이 1차 전도를 한 교회들이 현혹 됬다는 것이다. 그래서 갈라디아서에 구원은 우리 힘으로 받는 것이 아니다고 쓴 것이다.


자신들을 양육한 사도와 장로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 그 예루살렘 교회에서 사람들을 가르칠 때 그 권위를 거스를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바울은 히브리인중에 히브리 인이고, 바리새인 인 것이다. 그래서 사도행전 22 3절에도 유대자들을 향해서 인본적인 율법준수에서 그야말로 원탑이었다고 하는 것이다.


율법주의자들의 말을 누구보다 잘 이해했다. 예전에 딱 이와 같은 생각으로 교회를 핍박한 장본인이다. 누가(Luke)는 무슨 말로 논쟁했는지 기록하지 않는다. 하지만 바울의 편화된 태도가 중요한 내용이다. 말로 하는 논쟁은 대부분 온전한 결론을 낼 수 없다. 그래서 인류가 수천년 넘게 붙들고 논쟁하는 여러 주제들이 있다. 사람의 말에서 답을 구하니 결론이 나오지 않는다. 늘 방황한다. 이를 멈추게 할 것은 변화된 삶이다. 말로는 안된다.


내가 믿었고, 광야를 거칠 때, 말씀이 없으면 흔들리는 것이다. 진정한 회개가 없으면 광야를 건너가도 깨달을 수 없다. 깨닫지 못하니, 자기가 인본적인 가치관인지 모르고, 변론에 맞설 수 없는 것이다. 자기 죄를 깨닫고 돌이켜야 각자가 사로잡힌 바리새인적인 가치관에 맞설 수 있다.


사건이 올 때 사건에 절망하지 말고 말씀을 묵상하며 회개를 해야 한다. 내 안의 인본적인 생각과 감정을 드러내 직면하며 대적하는게, 바로 믿음의 선한 싸움이다.


이 변론을 듣던 안디옥의 제자들은 바울과 바나바가 자신들의 영적 지도자였기에,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인 손님들을 거부할 수 있는데, 안디옥 교회들은 윗 질서의 사도와 장로들에게 묻기로 결정한다. 교만해 지지 않고, 겸손히 자신을 낮추고, 예루살렘 지도자들에게 맡기는 것이다.


바울과 바나바가 잘 들은 것처럼 안디옥 성도들은 잘 묻는다. 흥왕하는 성령에게 양육 받은 결과인 것이다. 바울과 바나바는 또 이 안디옥 교회에 순종 한다. 이것이 변화된 삶으로 변론 하는 것이다. 구원의 확신은 삶의 변론으로 나타난다.


목사님도 큐티가 잘못되었다고 많이 듣는다. 알고 보니 변론할 문제가 아니었다. 우리들교회 성도들의 삶으로 변론이 되고 있다. 앞으로도 그래야 한다.


성령의 구원은 구원의 확신으로 삶의 변론을 하게 되면 말이다

 

3. 구원을 함께 기뻐하는 공동체를 허락하십니다.

 

구원을 함께 기뻐하는 공동체를 허락하세요. 구원의 기쁨을 주시는 거죠. 구원은 나쁜 것만 (주시는 것)이 아닌 거예요.

 

3) 그들이 교회의 전송을 받고 베니게(Phoenicia)와 사마리아(Samaria)로 다니며 이방인들이 주께 돌아온 일을 말하여 형제들을 다 크게 기쁘게 하더라


베니게는 해변가에 있었고, 사마리아는 예루살렘 위쪽의 내륙에 있었고, 가는 길에 있었다.


근데 사마리아는 북이스라엘의 수도를 중심으로 했으니 내륙지역이고, 해변 지역이 있는데, 유대인들에게 베니게는 옛적부터 세속적인 이방 문화를 대표하는 중심지인 거예요, 이 베니게가. 두로와 시돈하면 딱 기억나는 게 있다. 사마리아는 앗수르에 의해서 북이스라엘이 멸망했잖아요. 거기에 살던 사람들이 같이 혼혈족이 되어서 유대인들은 이방보다 더 무시하는 게 혼혈족이며 혼혈족. 그래서 인종적으로 타락했다고, 막 잡족이라고 여기는 거예요. 아주 무시 받던 지역이다


그런데 여기에 스데반(Stephen) 순교 이후에 핍박을 받아 흩어진 예루살렘 성도들이 이 지역에 교회를 세우는데, 바울은 이곳을 들려 1차 전도 여행을 보고하는 것입니다. 이 보고를 들은 베니게와 사마리아 성도들의 반응이 모두 크게 기뻐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원어를 보면 영어 메가의 어원이 나옵니다. 매우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은 못 갔지만 바울이 가서 너무 고맙고 이방인들이 영접한 게 너무 기쁜 것입니다. 함께 크게 기뻐한 이 성도들이 바울과 바나바의 구원 공동체가 된 것입니다. 성령의 선물입니다.


이 공동체가 거룩을 위해 좁은 길을 가고, 무시와 배신을 당해서 흔들리지 않는 비결이 됩니다.


별 인생이 없고 별 기쁨도 없다. 이제 새해가 되어 목장이 새롭게 시작되는데, 이 코로나의 슬픈 상황에서도 목장에서 가장 큰 기쁨을 얻으시기 바란다. 여러분들이 기쁨 못 얻는 거는 구원의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나한테 책임이 있는 거예요. 목장마다 성령의 구원의 확신이 생기기를 기도합니다.


(적용#2)

-여러분은 이렇게 구원의 증언을 들을 때 크게 기쁩니까, 여전히 옳고 그름으로 판단합니까아 이러니까 믿지, 저러니까 믿지, 이러면서 판단을 합니까?

 

4. 구원의 결론은 인내입니다.


구원의 결론은 인내인 거예요.


4) 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하매


헤롯 아그립바 1세의 박해로 예루살렘을 떠났던 베드로도 아그립바가 죽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공회에 참석할 수 있었다. 바울은 지금 벌써 몇 차례 선교 보고를 했고 연습이 충분했다. 안디옥에서, 베니게에서, 사마리아에서. 그래서 쟁점을 풀어야 하는 중요한 자리에 선교 업적을 자랑한 게 아니고, 14 27절처럼,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하신 모든 일, 이걸 말했는데, 그것은 아까도 말했듯이 신인 협력적 이라기 보다 바울의 허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함께 행하셨다고 진심으로 보고를 했다.


5) 바리새파 중에 어떤 믿는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구원의 일에 같이 기뻐하지 않고 슬퍼하지 않습니다. 바울 사도가 얼마나 마음이 녹았겠어요?


예루살렘 교회는 모 교회지만, 구원 받고 나서는 계속 적대적이고 발을 붙일 수가 없는 거예요. 17년이 지나고 이방 선교의 공을 혁혁하게 세우고 갔지만, 여전히 살얼음판인 모 교회였다. 그때 유대교가 점점 세력이 약화되어 가니까, 본능적으로 그랬을 수도 있다.


그러니까 구원의 열매가 바울에게 있으니까 예루살렘 교회가 이렇게 바울을 공격합니다. 구원의 길이 구원받아 좋지만 힘든 것이다. 구원의 여정은 끝이 없다. 말로는 안되고, 삶으로 보여줘야 한다. 예루살렘 교회에서도 드러내야 한다. 바울은 복음을 듣고 기뻐하는 공동체 힘으로 복음을 부정하는 자들의 공격을 계속 받아내고 참아야 한다.

(적용#3)


-구원의 결론은 인내라고 하는데, 인내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정말 이렇게 노래, CCM도 들어가 보면, 백만 이렇게. 설교 하면 몇 만인데.


그게 한이 서린 어떤. 정말, 우리가 눈물을 흘린다는 게 굉장히 우리를 건강하게 해준다고 생각이 된다. 그런데 타인을 위한 눈물을 사실 어찌 악하고 음란한 인간이 흘릴 수가 있겠습니까? 이 눈물은 구원 때문에만 가능하다. 더 많은 사람의 구원을 위해 눈물을 흘린 사람은 자신의 어떤 상황에도 감사할 줄 알 것입니다. 근데 그것은 바로 함께하는 삶이다. 이런 구원의 눈물을 흘리는 2021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적용#4)

-여러분은 구원 때문에 우십니까, 자기 연민 때문에 우십니까?


 

<Epilogue>

1)  성령을 받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누리는 것이다.

2)  그러려면 구원의 확신이 있어야 한다

3)  구원의 확신은 세상에서 누리는 그런 평강과는 다르다

4)  하나님 나라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했는데, 구원의 확신은 이런 의와 평강과 희락의 나라를 이 땅에서 누리는 것이다.

5)  그것을 성령이 효과적으로 도와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누릴 자가 없다

6)  성령의 구원은 구원의 확신이 필요하다.

7)  믿음의 반대는 무서운 열심이다. 그래서 열심인 사람들이 믿기 어렵다.

8)  사람은 기복이 본능이기에 자꾸 변질이 되는 것이다.

9)  성령으로 시작했는데, 사업이 안되고 상처를 받고 그러면 떠나가게 된다. 다른 복음 들어오는 것이다.

10) 다툼/투쟁(dispute)은 맞서 일어나는 걸 말하고 변론(debate)은 치열하게 논쟁하는 걸 말한다.  

11) 말로 하는 논쟁은 대부분 온전한 결론을 낼 수 없다.

12) 그래서 인류가 수천년 넘게 붙들고 논쟁하는 여러 주제들이 있으며 사람의 말에서 답을 구하니 결론이 나오지 않고 늘 방황하는 데 이를 멈추게 할 것은 변화된 삶이고 말로는 안된다.

13) 내가 믿었고, 광야를 거칠 때, 말씀이 없으면 흔들리는 것이다.

14) 진정한 회개가 없으면 광야를 건너가도 깨달을 수 없다.

15) 깨닫지 못하니, 자기가 인본적인 가치관인지 모르고, 변론에 맞설 수 없는 것이다.

16) 자기 죄를 깨닫고 돌이켜야 각자가 사로잡힌 바리새인적인 가치관에 맞설 수 있다.

17) 사건이 올 때 사건에 절망하지 말고 말씀을 묵상하며 회개를 해야 한다.

18) 내 안의 인본적인 생각과 감정을 드러내 직면하며 대적하는게, 바로 믿음의 선한 싸움이다.

19) 구원의 확신은 삶의 변론으로 나타난다.

20) 성령의 구원은 구원의 확신으로 삶의 변론을 하게 되면 이룬다

21) 구원을 함께 기뻐하는 공동체를 허락하시고 구원의 기쁨을 주시는 것인데 구원은 나쁜 것만 (주시는 것)이 아닌 것이다

22) 함께 크게 기뻐한 이 성도들이 바울과 바나바(Paul and Barnabas)의 구원 공동체가 된 것으로 이것이 성령의 선물이다.

23) 이 공동체가 거룩을 위해 좁은 길을 가고, 무시와 배신을 당해서 흔들리지 않는 비결이 된다.

24) 별 인생이 없고 별 기쁨도 없다.

25) 여러분들이 기쁨 못 얻는 것은 구원의 확신이 없기 때문이고 나한테 책임이 있는 것이다.

26) 구원의 결론은 인내인 것이다

27) 구원의 길이 구원받아 좋지만 힘든 것이며 구원의 여정은 끝이 없다.

28) 구원의 길은 말로는 안되고, 삶으로 보여줘야 한다.

29) 바울처럼 복음을 듣고 기뻐하는 공동체 힘으로 복음을 부정하는 자들의 공격을 계속 받아내고 참아야 한다.

30) 더 많은 사람의 구원을 위해 눈물을 흘린 사람은 자신의 어떤 상황에도 감사할 줄 알 것이다

31) 목장이란 구원공동체가 없으면 신앙생활을 안하는 것과 같다

32) 피의 논리와 땀의 논리가 아니라 뜨거운 눈물 한 방울의 논리가 구원을 말해 준다

33) 구원을 위해서만 구원의 눈물 흘림이 가능하다

34) 영적 진실성의 결과는 인내이다


Posted by 윤강로
말씀과 마음씀2020. 12. 30. 15:25

[우리들교회 20201227일 주일예배 말씀 요약(사도행전 14: 19~ 28/ 성령의 완수)]




 


<사도행전 14:19~28>

19: 유대인들이 안디옥(Antioch)과 이고니온(Iconium)에서 와서 무리를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

20: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그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Derbe)로 가서

21: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Lystra)와 이고니온(Iconium)과 안디옥(Antioch)으로 돌아가서

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strengthening the disciples and encouraging them to remain true to the faith. "We must go through many hardships to enter the kingdom of God,") 하고

23: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 하며(with prayer and fasting) 그들이 믿는 주께 그들을 위탁하고

24:  비시디아(Pisidia) 가운데로 지나서 밤빌리아(Pamphylia)에 이르러

25: 말씀을 버가(Perga)에서 전하고 앗달리아(Attalia)로 내려가서

26: 거기서 배 타고 안디옥(Antioch)에 이르니 이 곳은 두 사도가 이룬 그 일을 위하여 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던 곳이라

27: 그들이 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opened the door of faith to the Gentiles)을 보고하고

28: 제자들과 함께 오래 있으니라

 

<Prologue>



이 세상의 업적이나 성취는 영원히 목마르기에 목표를 정해도 늘 목이 마르다. 그러나 오늘 1차 전도여행을 마치는데 오늘 본문 26절에 이 일을 두 사도가 이룬 일이라고 한다(완수했다). 성령의 제자는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완수했다고 한다.


여전히 이루어가야 할 성령의 완수를 생각해보자


 

<말씀 요약>



1.
기막힌 시기와 배신을 감당하는 것이다.(19)


19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


(유대인들이) 루스드라(Lystra) 백성을 충동하기 위해 왔다고 한다. 충동은 설득이라는 뜻이다. 폭도로 돌변하게 했다. 유대인의 기막힌 시기이고 루스드라의 기막힌 배신이다. 루스드라에 유대인의 회당이 없었고 바울과 바나바는 자신들을 섬기겠다는 것을 헛된 일이라고 하고 창조주 주관자이신 하나님만 섬기라고 했다. 그래서 바울을 유대인의 법대로 죽이기도 어려웠다. 그들은 우상숭배자들이었기에 바울과 바나바를 우상처럼 섬기려고 했다. 그 기저에는 기복이 꽉 차있는 것이다. 그런데 바울복음을 듣고 하나님을 섬긴다면 그 당시 구브로(Cyprus) 섬에서 봤지만 서기오(Sergio) 총독을 섬기던 엘루마 점쟁이처럼, 돈으로 성령의 능력을 사려고 했던 시몬처럼 점을 쳐주고 우상숭배로 벌어들이는 헌금이나 제물 판매 등으로 살아가는 그들에게는 너희들 이제 망한다고 했을 것이다. 항상 설득하는 끝에는 돈이 있다. 이 세상은 악하고 음란하기 때문에 이런 나의 이권과 정욕에 눈이 멀면 살려 두지를 않는다. 그래서 이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달콤한 말을 해도 사람은 전적으로 부패했기 때문에 이해타산이 걸리면 폭도로 변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세상 정치가 다 마찬가지다. 당장 목구멍이 포도청이어도 배반을 하고 다른 여자가 눈에 들어와도 다 폭도가 된다.


사단의 이런 못된 열심으로 끊임없이 밀 까부르듯 하면서 우리를 주의 제자가 되지 못하게 흔든다. 시기와 박해가 이렇게 모습을 달리해서 끝없이 온다는 것이 믿어지나우리가 비시디안 안디옥(Pisidian Antioch) 들어와서만 해도 시기와 반박과 비방과 악감과 돌로 침에서 이제 배신과 돌로 죽임까지의 끊임없는 모습이 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일을 주님은 당하지 않게 하실 수 있다. 또 돌에 맞지 않게 하실 수도 있다. 그러나 다윗이 열다섯 광야를 지나게 하신 것처럼 바울에게도 한 광야, 한 광야를 건너게 하시는 것이다. 아주 정말 지독한 시기를 당하게 하시는 것이다. 그것도 같은 부류, 같은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 가운데서 늘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우리기 미리 예방주사를 맞고 가면 그것이 성령의 완수이다. 정말 신앙은 버티는 것이 실력이다.
말이 안 되는 사람이 집집마다, 회사마다 또 교회마다 있다. 그러니까 시기와 배신이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면 바로 오늘을 잘 살게 된다. 그것이 성령의 완수이다. 그래서 하루하루 살아요는 언제나 정답이다.


(적용#1)

-은혜를 입고도 하루아침에 배신한 적이 있나? 은혜를 끼치고도 하루아침에 배신당한 적이 있나?



2. (지독한 시기와 배신에) 회개하며 털고 일어나는 것이다.(19~20)


20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그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Barnabas)와 함께 더베(Derbe)로 가서


루스드라(Lystra)에도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인이 된 제자들이 이미 생겼다. 아마 디모데(Timothy)도 이 제자들 중에 있었을 것인데 이들이 바울이 돌에 맞고 성 밖으로 끌려갔다는 소식을 듣고 황급히 모인 듯하다. 그런데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바울을 둘러 서 있었을 텐데 이것처럼 우리가 너무 사랑하는 바울을 보고도 우리는 이 땅에서 어찌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 많다. 제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 그냥 둘러 서 있는 것이다. 여러분이라면 이러한 상황에서 다시 그 성으로 들어갈 마음이 생기겠는가? 일어나서 그 길을 계속 가겠는가? 바울의 생각과 느낌과 허탈과 허무가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것이다. 바로 그 상황에서 하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 하시는가 이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우리는 다 자기의 느낌만 있다. 다 자기의 아픔만 있는 것이다. 그러니 조금만 좌절을 겪어도 그냥 사명의 길을 다 포기한다. 일어서기를 거부한다. 그런데 왕상 19:7 너무 기진한 엘리야에게 일어나서 먹으라 네가 길을 이기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 이 사랑의 음성을 사도바울은 들은 것이다. 말씀의 능력을 힘입은 것이다. 그러므로 일어났다. 자기의 길을 갔다. 이렇게 우리는 일곱 번 넘어지면 여덟 번 일어서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제 죽은 것 같은 바울이 (그들은 바울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버렸다. 즉 죽을 때까지 때렸다) 바울을 열광하던 루스드라 무리들이 바울이 죽었다고 생각할 때까지 때린 것이다. 그 바울이 기적적으로 다시 일어난다. 그리고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더베(Derbe)를 향해 루스드라(Lystra)를 나갔다. 돌로 쳐도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나가면 된다. 티끌을 털어버리고 나를 욕하고 때려죽인 그 루스드라(Lystra) 성으로 다시 들어가서 하룻밤을 보내고 이튿날 다음 목적지 더베(Derbe)를 향해 떠나는 것이다. 더베(Derbe)에 도착했다는 것이 아니라 더베(Derbe)를 향해 루스드라(Lystra)로 나아갔다는 것이다. 이렇게 돌로 쳐도 우리는 아무 일 없던 듯이 툴툴 털고 나아가면 되는 것이다. 티끌을 떨어버리고 떠나면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 성에 다시 한 번 들어갔다는 것, 이것이 너무 중요하다. 더베(Derbe)는 루스드라(Lystra)에서 동쪽으로 약 100km 떨어진 도시인데 글라우디오(Claudius) 황제 때 이 지역을 완전히 로마화하면서 글라우디오 더베(Claudius Derbe)라고 불리우는 1차 전도여행에 마지막 방문지가 된다. 그럼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바울은 늘 위대해서 툴툴 털고 일어나나?” 구속사가 뭐냐고 날마다 물어보시는데 구속사는 항상 툴툴 털고 일어났을 때 그게 내가 잘나서 일어나는 게 아니라 항상 하나님께서 하셨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하셨냐? 이것을 찾는 것이 구속사이다. 내가 한 게 아무것도 없는데 자꾸 자기가 했다고 착각한다.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 얘기도 다 공허하고 추상적이다. 구체적으로 왜 하나님께서 하셨나? 이것을 찾는 것이다. 그들이 기절한 바울을 성 밖으로 끌어 내치는데 이 단어는 바울이 성도들을 끌어낸 장면에서 쓴 단어와 같기도 한 것이다. 바울이 스테반(Stephen)이 성 밖으로 쫓겨난 일을 생각했을 것이고 이고니온(Iconium)에서 돌에 맞은 일은 스테반이 돌에 맞은 일을 생각했을 것이고 또 기절하여 성 밖으로 질질 내쳐진 일은 성도들이 바울에 의해서 각자의 집에서 질질 끌려 체포된 일을 생각했다는 것을 상기시켜주었을 것이다. 실제로 바울은 스테반을 돌로 치는 일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스테반이 그 때에 죽어가면서 성령의 얼굴로 순교한 것을 바울은 생생하게 기억했다. 돌로 칠 때, 죽어가면서 성령의 얼굴로 저들에게 죄를 돌리지 말고…’ 사람은 보여주는 게 참 중요하다. 요즘에는 이 세상 드라마도 계속 정신과적인 재료를 다루어서 사이코지만 괜찮아라는 드라마가 있었다. 자기가 아픔이 있으니까 아픔이 있는 사람을 돕는 것이다. 실제 삶에서 사이코 같은 식구들을 대하며 때마다 툴툴 털며 일어나는 것은 너무 어렵다. 거의 80%의 질환자가 있다는 얘기도 들었는데 이럴 때마다 어떻게 툴툴 털겠는가? 우리가 보이는 것 때문에 열광하면 안 보이면 통곡을 한다. 병이 안 나도 통곡을 하고. 나으면 열광을 하고. 예수님을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라고 열광을 했던 무리들이 바로 1주일 후에 십자가에 못 박으라 외쳤기 때문에 아무리 교회를 다녀도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다. 그래서 쓸데없는 열광과 비난에 초월해야 된다. 이것이 성령의 완수이다. 우리의 주기도문은 눈물과 통곡으로 기도해야 하는 내용이지 박수 치며, 소리 지르며 하는 기도 내용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소경처럼 무시하고 낮은 환경이라고 모두가 꾸짖을 때는 이때는 모두가 듣게 소리소리 지르면서 “불쌍히 여기소서!” 하며 이럴 때는 주께서 들으시는 기도인 것이다. 내가 기뻐하면서 소리 지를 내용은 전도이고 제자 양육이고 삶의 변화인 것이다. 내가 슬퍼해야 할 기도 내용도 전도가 안 돼서, 제자 양육이 안 돼서, 삶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아서 슬퍼해야 되는 것이다. 그런데 늘 기복적인 것으로 열광하며 소리 지르면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이렇게 그냥 단 시간에 배신을 한다. 바울은 쓸데없는 열광에 옷을 찢으며 패스했기 때문에 돌로 치는 배반에도 훌훌 털고 떠날 수 있다. 이게 바로 구속사인 것이다. 날마다 예수 믿고 되는 게 구속사가 아니고 전도를 하고 정착을 하고 성화를 위해서 이것이 필요한 것이다. 이것이 성령의 완수이다.



(적용#2)

-여러분은 배반당해서 지금 죽어 있는가? 자기 죄를 보고 훌훌 털고 일어났는가?



3.
제자를 키우는 것이다.(21)

21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더베(Derbe)에서의 사역이 자세히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거기에서도 예수님의 제자가 세워졌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제자를 키워야 하는 이유는 (지도를 보고) 바울이 루스드라(Lystra)에서 더베(Derbe)까지 왔다. 그런데 더베는 그 사역이 자세하지는 않았지만 제자가 키워졌다고 했다. 그런데 더베에서 바로 옆에 다소(바울의 고향), 조금 오른쪽으로 가면 출발지였던 수리아 안디옥이 있다. 오른테스 강 옆에 실루기아 옆에 안디옥이 있다. 그러니까 조금만 가면 안디옥인데 그 편한 길, 고향의 쉴 수 있는 길을 다 마다하고 다시 더베에서 루스드라로 이고니온(Iconium)으로 안디옥(Antioch)으로 내려와서 버가(Perga)에서 아딸리아(Attalia)로 구브로(Cyprus)는 안 지나서 다시 안디옥으로 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렇게 왔던 길을 따라 돌아간다. 돌에 맞아 죽을 뻔했던 루스드라 또 자신을 죽이려고 계획을 세웠던 이고니온, 자신을 추방했던 안디옥으로 지금 다시 돌아가는 것이다. ? 그 곳에 방금 믿기 시작한 제자들이 있기 때문인 것이다. 성도의 인생의 목적은 편한 것이 아니다. 자기가 당한 사건에 갇혀 있다면 가지 못할 곳을 바울은 주께로 돌아온 한 영혼이 너무 귀하기에 갈 수가 있었던 것이다. 항상 성령의 완수를 생각할 수 있었기에 때려도, 죽여도, 악감을 가지고 있어도 제자가 생겼기에 둘려보려고 그 위험한 곳을 가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못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태도를 세상은 용인하지 않는다. 반드시 박해한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경건에서 벗어나도록 유혹으로 낙심으로 계속 공작을 한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예수 믿기로 작정을 했다가도 루스드라 무리들처럼 하루 만에 포기하고 며칠 만에 포기하고 세상으로 돌아선다. 사단의 농간이 있다. 그러므로 초신자의 정착은 교회의 작은 일이 아니다. 교회의 몫이라고 아무도 관심없이 방치하면 안 된다. 어떤 초신자도 해산과 양육 의 수고 없이는 절대로 교회에 정착하지 못한다. 부흥하는 교회는 새신자가 정착하는 비율이 높은 교회이다. 늘 돌봐야 되는 것이다. 그게 우리 교회의 부흥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부흥을 위해서이다.


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말씀으로 그들을 무장시키는 바울이다. 제자들에게 다가올 미래는 단기적으로는 성공보다는 환란이기 때문이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지만 악하고 음란한 이 땅에서 구원의 여정을 가고 있는 우리에게는 당연히 많은 환란이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복음은 장차 받을 환란이다.


환란은 짓눌림을 당하는 듯한 압박이나 옥죄는 듯한 고통을 말한다. 환란을 비교해도 안 되고 각자의 환란가운데 우리가 할 일은 환란을 통과하여 목적지인 하나님나라에 가는 것이다. 환란을 잘 통과하려면 믿음에 머물러 있을 수 있도록 제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제자를 키워내야 이 땅에서 성령의 완수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적용#3)

-여러분의 환란으로 한 사람이라도 전도를 했나? 제자가 키워졌나? 아직도 환란만 바라보고 있나?


4.
교회를 세워야 한다.(23)


23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 하며 그들이 믿는 주께 그들을 위탁하고


교회를 이끌고 갈 지도자들을 세우기 위해서 바울이 다시 한 번 순회를 했다. 장로들을 택했다. 장차 있을 환란 가운데 질서 있게 교회가 유지되려면 지도자가 있어야 된다. 장로의 기본적인 역할은 분별과 결정이다. 성품이나 스펙이 아닌 믿음(자체)을 보고 그들을 위탁했다. 믿음을 볼 수 있는 지도자가 최고의 지도자이다. 내 생각을 버리고 말씀대로 순종하고 결정하는 태도이다. 지도자의 독단은 스스로를 소외시키는 지혜 없는 행동이다.


24 비시디아 가운데로 지나서 밤빌리아에 이르러 25 말씀을 버가에서 전하고 앗달리아로 내려가서 26 거기서 배 타고 안디옥에 이르니 이 곳은 두 사도가 이룬 그 일을 위하여 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던 곳이라


자기 의와 열심으로 한다면 처음과 끝이 같을 수 없다. 주께서 맡기신 사명대로, 말씀대로 감당했기 때문이다. 나는 할 수 없다는 고백이 날마다 있어야 성취가 아닌 순종을 할 수 있다. 그 순종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길이다.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가 맡긴 선교를 완수했지만 이 완수는 그들이 스스로 이룬 성취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말씀을 채운 순종이다. 갈 때도 올 때도 대사도 바울을 계속 지나치게 하는 앗달리아 같은 사람도 이 땅에 있다.


27 그들이 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보고하고 


비록 이방 세계의 전도의 문은 열렸지만 얼마나 많은 환란을 겪었다. 그런데 핍박의 보고만을 말하는 게 아니고 믿음의 문을 여셨다고 보고했는데 왜냐하면 지나고 나서 보니 이방 선교의 많은 환란은 하나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나님이 활짝 여셨기 때문에 한 번 열린 이방인의 문은 누구도 닫을 수가 없다. 믿음의 보고, 선교의 보고는 말씀과 믿음에 근거해서 보고를 해야 한다. 모든 공을 하나님이 함께 하셨다고 하나님께 돌리고 입으로만 영광을 돌리면 안 되기 때문에 보고를 할 때 끝없는 자기 자랑과 동정의 보고는 경계를 해야 한다. 바울과 바나바는 그 수많은 공로와 수고 앞에서 자신들의 초심을 잃지 않았다. 그들과 함께 행하신 모든 일은 신인협력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우리의 생각과 의지와 감정과 성품과 재능과 환경 등 모든 것을 받아 주셨지만 그러나 허물과 약점에도 불구하고 우리와 함께 일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바울의 허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함께 행하셨다고 진심으로 고백한 것이다. 구원의 사명은 한 마디로 100% 하나님의 일인 동시에 100% 우리의 일이다. 성령님은 우리를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동역하시기 때문에 이것이 성령의 동역이고 그래서 성령의 행전이 사도행전이 된 것이다. 그래서 나타난 열매는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신 것이다



28
제자들과 함께 오래 있으니라

이방의 땅끝 선교나 모 교회에서나 제자의 삶은 차이가 없음을 보여준다.
사도행전 14:3 “오래 있어(디아트리보): 내 몸으로 사명의 자리를 반짝반짝 윤이 나도록 비비고 닳도록 문지르듯이 수고하는 삶이 제자의 삶이다. 그런데 똑같은 단어 “오래 있어”의 시제가 이고니온 14:3에서는 부정 과거이고 여기 수리아 안디옥에서는 미완료이다. 오래 있어도 이고니온은 떠나야할 사역지 교회이고 수리아 안디옥 교회는 영원한 본향 모교회라는 것이다. 성도는 보이지 않는 영원한 교회에 영원히 속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불러주신 가시적 교회에 잘 붙어있어야 각자의 사명지에서 잘 머물 수 있다. 고난 없이 잘 지내는 삶이 아니라 주시는 말씀을 듣고 공동체 안에 잘 붙어있으면 각자의 사명지에서도 잘 머물 수 있다. 사명지는 때마다 바뀔 수 있다. 그럴 때 영원한 이방인 같은 내게 맡기신 땅 끝 같은 가족과 이웃에게 믿음의 문이 열리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교회를 세우는 일이고 성령의 완수가 되는 것이다.

 

<Epilogue>

 

1)  이 세상의 업적이나 성취는 영원히 목마르기에 목표를 정해도 늘 목이 마르다.

2)  항상 설득하는 끝에는 돈이 있다.

3)  이 세상은 악하고 음란하기 때문에 이런 나의 이권과 정욕에 눈이 멀면 살려 두지를 않는다.

4)  이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달콤한 말을 해도 사람은 전적으로 부패했기 때문에 이해타산이 걸리면 폭도로 변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5)  이 세상 정치도 다 마찬가지다. 당장 목구멍이 포도청이어도 배반을 하고 다른 여자가 눈에 들어와도 다 폭도가 된다.

6)  사단의 이런 못된 열심으로 끊임없이 밀 까부르듯 하면서 우리를 주의 제자가 되지 못하게 흔든다.

7)  시기와 박해가 이렇게 모습을 달리해서 끝없이 온다는 것이 믿어지나

8)  다윗이 열다섯 광야를 지나게 하신 것처럼 바울에게도 한 광야, 한 광야를 건너게 하시는 것이다.

9)  아주 정말 지독한 시기를 당하게 하시는 것이다.

10) 그것도 같은 부류, 같은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 가운데서 늘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우리기 미리 예방주사를 맞고 가면 그것이 성령의 완수이다.

11) 정말 신앙은 버티는 것이 실력이다.

12) 시기와 배신이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면 바로 오늘을 잘 살게 되는데 그것이 성령의 완수이며 그래서 하루하루 살아요는 언제나 정답이다.

13) 조금만 좌절을 겪어도 그냥 사명의 길을 다 포기하고 일어서기를 거부한다

14) 구속사는 항상 툴툴 털고 일어났을 때 그게 내가 잘나서 일어나는 게 아니라 항상 하나님께서 하셨다는 것인데 왜 하나님께서 하셨냐? 이것을 찾는 것이 구속사이다.

15) 내가 한 게 아무것도 없는데 자꾸 자기가 했다고 착각하게 되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 것인데 그 얘기도 다 공허하고 추상적이다.

16) 구체적으로 왜 하나님께서 하셨나? 이것을 찾는 것이다.

17) 우리가 보이는 것 때문에 열광하면 안 보이면 통곡을 한다.

18) 병이 안 나도 통곡을 하게 되고 나으면 열광을 하게 된다

19) 아무리 교회를 다녀도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다.

20) 그래서 쓸데없는 열광과 비난에 초월해야 되는데 이것이 성령의 완수이다.

21) 우리의 주기도문은 눈물과 통곡으로 기도해야 하는 내용이지 박수 치며, 소리 지르며 하는 기도 내용은 아니라는 것이다.

22) 내가 기뻐하면서 소리 지를 내용은 전도이고 제자 양육이고 삶의 변화인 것이다.

23) 내가 슬퍼해야 할 기도 내용도 전도가 안 돼서, 제자 양육이 안 돼서, 삶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아서 슬퍼해야 되는 것이다. 그런데 늘 기복적인 것으로 열광하며 소리 지르면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이렇게 그냥 단 시간에 배신을 한다.

24) 바울은 쓸데없는 열광에 옷을 찢으며 패스했기 때문에 돌로 치는 배반에도 훌훌 털고 떠날 수 있는 것인데 이게 바로 구속사인 것이다.

25) 날마다 예수 믿고 되는 게 구속사가 아니고 전도를 하고 정착을 하고 성화를 위해서 필요한 것인데 이것이 성령의 완수이다.

26)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태도를 세상은 용인하지 않고 반드시 박해하는데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경건에서 벗어나도록 유혹으로 낙심하도록 계속 공작을 한다.

27) 그래서 많은 이들이 예수 믿기로 작정을 했다가도 루스드라(Lystra) 무리들처럼 하루 만에 포기하고 며칠 만에 포기하고 세상으로 돌아선다.

28) 사단의 농간이 있음으로 초신자의 정착은 교회의 작은 일이 아니다.

29) 교회의 몫이라고 아무도 관심없이 방치하면 안 되는 것이며 어떤 초신자도 해산과 양육의 수고 없이는 절대로 교회에 정착하지 못한다.

30) 부흥하는 교회는 새신자가 정착하는 비율이 높은 교회이다.

31) 초신자는 늘 돌봐야 되는 것이며 그것은 우리 교회의 부흥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부흥을 위해서이다.

32)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지만 악하고 음란한 이 땅에서 구원의 여정을 가고 있는 우리에게는 당연히 많은 환란이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복음은 장차 받을 환란이다.

33) 환란은 짓눌림을 당하는 듯한 압박이나 옥죄는 듯한 고통을 말하는데 환란은 비교해도 안 되고 각자의 환란 가운데 우리가 할 일은 환란을 통과하여 목적지인 하나님나라에 가는 것이다.

34) 환란을 잘 통과하려면 믿음에 머물러 있을 수 있도록 제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며 제자를 키워내야 이 땅에서 성령의 완수를 할 수 있는 것이다.

35) 장차 있을 환란 가운데 질서 있게 교회가 유지되려면 지도자가 있어야 된다.

36) 지도자인 장로의 기본적인 역할은 분별과 결정이다.

37) 성품이나 스펙이 아닌 믿음(자체)을 보고 장로들을 위탁했다.

38) 믿음을 볼 수 있는 지도자가 최고의 지도자이다.

39) 내 생각을 버리고 말씀대로 순종하고 결정하는 태도를 말하는데 지도자의 독단은 스스로를 소외시키는 지혜 없는 행동이다.

40) 자기 의와 열심으로 한다면 처음과 끝이 같을 수 없다.

41) 주께서 맡기신 사명대로, 말씀대로 감당했기 때문에 나는 할 수 없다는 고백이 날마다 있어야 성취가 아닌 순종을 할 수 있다.

42) 그 순종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길이며 하나님이 활짝 여셨기 때문에 한 번 열린 이방인의 문은 누구도 닫을 수가 없다.

43) 믿음의 보고, 선교의 보고는 말씀과 믿음에 근거해서 보고를 해야 한다.

44) 모든 공을 하나님이 함께 하셨다고 하나님께 돌리고 입으로만 영광을 돌리면 안 되기 때문에 보고를 할 때 끝없는 자기 자랑과 동정의 보고는 경계를 해야 한다.

45) 구원의 사명은 한 마디로 100% 하나님의 일인 동시에 100% 우리의 일이다.

46) 성령님은 우리를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동역하시기 때문에 이것이 성령의 동역이고 그래서 성령의 행전이 사도행전이 된 것으로 나타난 열매는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신 것이다.

47) 내 몸으로 사명의 자리를 반짝반짝 윤이 나도록 비비고 닳도록 문지르듯이 수고하는 삶이 제자의 삶이다.

48) 성도는 보이지 않는 영원한 교회에 영원히 속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불러주신 가시적 교회에 잘 붙어있어야 각자의 사명지에서 잘 머물 수 있다.

49) 고난 없이 잘 지내는 삶이 아니라 주시는 말씀을 듣고 공동체 안에 잘 붙어있으면 각자의 사명지에서도 잘 머물 수 있다.

50) 사명지는 때마다 바뀔 수 있는 것인데 그럴 때 영원한 이방인 같은 내게 맡기신 땅 끝 같은 가족과 이웃에게 믿음의 문이 열리는 것이다.

51) 바로 이것이 교회를 세우는 일이고 성령의 완수가 되는 것이다.

 


Posted by 윤강로
말씀과 마음씀2020. 12. 20. 22:12

[우리들교회 20201220일 주일예배 말씀 요약(사도행전14: 8~ 18/ 성령의 주목)]


 



<사도행전 14:8~18>

 

8 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앉아 있는데 나면서 걷지 못하게 되어 걸어 본 적이 없는 자라 (In Lystra there sat a man crippled in his feet, who was lame from birth and had never walked)

9 바울이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He listened to Paul as he was speaking. Paul looked directly at him, saw that he had faith to be healed)

10 큰 소리로 이르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일어나 걷는지라 (and called out, "Stand up on your feet!" At that, the man jumped up and began to walk)

11 무리가 바울이 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 질러 이르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 하여 (When the crowd saw what Paul had done, they shouted in the Lycaonian language, "The gods have come down to us in human form!")

12 바나바는 제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헤르메스라 하더라 (Barnabas they called Zeus, and Paul they called Hermes because he was the chief speaker)

13 시외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환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니(The priest of Zeus, whose temple was just outside the city, brought bulls and wreaths to the city gates because he and the crowd wanted to offer sacrifices to them)

14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 질러 (But when the apostles Barnabas and Paul heard of this, they tore their clothes and rushed out into the crowd, shouting:)

 

15 이르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 ("Men, why are you doing this? We too are only men, human like you. We are bringing you good news, telling you to turn from these worthless things to the living God, who made heaven and earth and sea and everything in them)

16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민족으로 자기들의 길들을 가게 방임하셨으나 (In the past, he let all nations go their own way)

17 그러나 자기를 증언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여러분에게 하늘로부터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만족하게 하셨느니라 하고 (Yet he has not left himself without testimony: He has shown kindness by giving you rain from heaven and crops in their seasons; he provides you with plenty of food and fills your hearts with joy.")

18 이렇게 말하여 겨우 무리를 말려 자기들에게 제사를 못하게 하니라(Even with these words, they had difficulty keeping the crowd from sacrificing to them)

 

<Prologue>


주목이란 단어를 사전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주목의 뜻

①관심을 가지고 주의 깊게 살핌

②조심하고 경계하는 눈빛으로 살핌

③감탄사로 군사 구령자에게 시선을 모으라는 구령

 

성령의 제자는 볼 것을 관심을 가지고 주의 깊게 봐야한다. 또 보지 않아야 할 것은 경계의 눈으로 살펴야 한다. 그리고 군사 구령자인 하나님만 감탄하며 주목해야 한다.

오늘 성령의 주목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다

 

<말씀 요약>

 

1.   한계상황적인 (치료 불가의) 한 영혼을 주목해야 한다(8~9)

 

8: 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앉아 있는데 나면서 걷지 못하게 되어 걸어 본 적이 없는 자라

9; 바울이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이 두 사도인 바울과 바나바를 돌로 치려고 하니 도망가는 루스드라는 당시에 퇴역한 로마 군인들이 집단 거주하는 조성지가 되었다. 그들이 곳곳에 원근각지로 정복전쟁에 나갔다가 베어오고 가져온 우상 때문에 미신적인 경향이 많았다. 루스드라는 비시디아 안디옥이나 이고니온에서와 달리 유대인의 회당이 없어서 광장과 같은 곳에서 전도하였으리라 본다. 이 때 바울이 한 사람에게로 시선을 돌려 그의 눈을 주목한다. 마치 성전 미문에 앉아있던 앉은뱅이에게 베드로와 요한이 그러했던 것처럼 바울도 루스드라의 앉은뱅이에게 그렇게 눈길을 주었다. 발을 쓰지 못하는, 나면서 걷지 못하게 되어, 걸어본 적이 없는 이런 중복적인 표현은 본래 직업이 의사였던 누가가 전혀 걸을 가능성이 없는 상태를 강조해서 표현을 한 것이다.


3장에 성전 미문에 앉았던 앉은뱅이는 동전한 푼 구걸할 수 있을까하여 베드로와 요한을 쳐다보았지만 이 루스드라의 앉은뱅이는 바울의 전하는 말씀에 이끌려 그를 주목하고 있었다.


“듣는다”는 말은 다른 사람은 아무도 안 듣는데 지금 좋아서 혼자 경청했다는 말이고 십자가의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사함을 받고 의롭다하심을 얻을 수 있다는 바울의 복음이 믿어진 것이다. 물론 그는 뱃속부터 장애우이다. 불치 상황에 있었고 전적 무능을 실감하는 환경이다. 그런데 날 때부터 장애를 입고 태어났어도 말씀을 듣고 자신이 전적으로 부패한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자기와 같은 죄인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겨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부자건 건강하건 믿지 않으면 인생은 죄인이기 때문에 평강이 없다. 그런데 불치 상황의 앉은뱅이가 주님을 만나기가 여기서 보니 훨씬 쉽다.


바울은 바로 그런 생각을 가진 앉은뱅이에게서 자기 안에 있는 것과 같은 성령의 기운을 느끼고 그러한 그를 주목했다. 4:26 셋의 아들 에노스의 뜻이 한계 상황의 불치병이라는 뜻인데 아들을 에노스라고 불렀다고 했다. 아담의 장자인 가인의 후예는 강성하고 강하고 쓸어버리고 모두 이름을 그렇게 붙였는데 셋이 아담과 아벨과 셋, 3대를 내려오면서 인생이 참 연약하다는 것을 깨닫고 그런 뜻의 이름인 에노스로 이름을 지었다. 그러니까 자기 아들에게 에녹성의 이름을 붙인 가인과 달리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죄인 됨과 전적부패, 전적무능인 연약함을 그대로 고백하는 이름을 자기 자식에게 붙여준 것이다. 여러분이 이름을 겸손하게 지어야 한다는 것은 이렇게 성경적인 것이다.


날마다 에노스를 부르며 죄인 됨과 부패함과 연약함을 외치니 옆의 사람들이 비로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했다. 이것이 최초의 공 예배라고 할 수 있는데 우리도 마찬가지로 내 자신의 연약함을 외치며 내 옆의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라구요.


원어로 자궁에서부터 앉은뱅이인 불치병의 이 사람에게 말씀이 들리니 여호와를 부르고 또 루스드라 사람들에게 비로소 예배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10: 큰 소리로 이르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일어나 걷는지라

     보이는 이적       곧게, straightly                   미완료. 계속 걸었다.

 

믿음을 보고 바울은 바로 일어서라고 큰소리로 외쳤다. 바울은 태어나면서부터 앉은뱅이이니 발에 무슨 힘이 있겠어요? 젓가락 같지 않았겠는가? 그런 사람을 보고 두 발 펴고 쭉 일어나라 고 했다. 부정과거로 힘겹게 일어난 것이 아니라 펄쩍 뛰어오르며 일어났고 걸었다는 것은 미완료로 계속 걸었다는 뜻이다. 큰 소리로 외친 이유는 이 이적을 주위 사람들도 보라고 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곳이 구약의 배경이 없기 때문에 구속사적인 설교를 이곳에서는 성경으로 할 수가 없기 때문에 보이는 삶으로 할 수밖에 없었다. 루스드라 전도를 위해서는 보이는 이적을 준비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때마다 비시디아 안디옥식, 루스드라식의 전도방법이 다른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한 영혼을 주목하는 나눔들을 이번 주간에 읽었다.

 

(적용#1)

-치료 불가의 한 영혼을 주목한 적이 있나?

 

2.   자기 주제를 (전적 부패로) 주목할 수 있어야 한다. (11)

 

11: 무리가 바울이 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 질러 이르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 하여

12: 바나바는 제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헤르메스라 하더라

 

그 당시에 로마의 속주이니 모두 헬라어나 라틴어를 써야했다. 그런데 바울의 헬라어 설교를 듣고 있는 루스드라 주민들은 이렇게 갑작스럽게 일어난 기적을 보고 너무 놀란 나머지 자신들의 모국어인 루스드라 방언이 튀어나왔다. 그러면서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고 한 목소리로 소리 높였다. 자기도 모르게 방언이 나왔다. 계시된 말씀이 없으니까 눈앞에서 경험한 하나님의 구원이 정확히 무엇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그 기적을 통해 그러나 자신들이 알지도 못하는 성육신의 그림자, 즉 자연세계 안에 새겨진 하나님의 자취를 부분적으로나마 고백한 것처럼 되기는 했다. 루스드라 지역에는 헬라의 주신인 제우스와 그의 전령신, 비서신 헤르메스신이 있었는데 과거에 사람의 모양으로 그곳에 방문을 했는데 한 사람 빼고 아무도 영접하지 않아서 홍수로 그곳을 멸망시켰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전설이 자기들의 시대에 다시 삶의 현장에서 실현되는 것으로 생각한 이 루스드라 사람들은 흥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인물 좋은 바나바를 제우스라고 하고 비서같이 말 잘하는 바울을 헤르메스라고 불렀다.

 

13: 시외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환들을 가지고 대문(성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니                     굉장히 좋은 최고의 제물

 

제우스와 헤르메스를 대접하지 않았다가 큰 홍수로 멸망을 당했다고 하니까 그 화를 면하고자 바나바와 바울을 신으로 모시고 일치단결해서 일사천리로 제사를 드리고자 한 것이다. 인간본성에서 비롯되는 종교성은 근본적으로 자동적으로 기복적이다. 복을 구하고 화를 피하기 위해서 우리는 예배를 한다. 루스드라 시민들의 반응은 숨 쉴 틈 없이 우상숭배를 향해 돌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우리가 보기에 얼마나 열심히 예배를 드리는 모습인가? 이것은 각자 자신의 제우스와 헤르메스를 찾아 끊임없이 방황하는 우리 자신의 모습과 마찬가지다. 예배 중독자나 과학 만능주의에 젖어 있거나 반대로 미신과 우상숭배에 빠져서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하나님을 우상 중 하나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다 똑같다. 일치단결해서 돌진을 한다. 오늘날에도 힌두교가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네팔과 같은 나라에서는 4~5세 소녀를 정선해서 신으로 격상시킨 다음 마을 밖 산당에 모셔놓고 제사를 드리고 제물을 가져다 놓고 있다. 바로 루스드라 성 사람들이 이런 우매한 행동을 한 것이다. 그런데 바나바와 바울을 쉽게 신으로 단정한 것은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이 모두 사람의 모습이거나 동물의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인데 그들이 생각하는 신들은 뭔가 시공을 초월하지 못하는 제한된 공간 속에 인간과 동일한 생활 방식으로 살아가는 유한한 신들을 신의 자리에 모셔놓고 숭배하는 것이다.

 

14: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 질러


루스드라 사람들에게는 바나바와 사울의 순서가 바뀌어 있다. 멋있는 바나바가 그들 생각에 제우스가 되야 되고 대머리에 매부리코인 바울은 뒤로 밀려서 비서격인 헤르메스가 되었다. 그러니까 루가오니아 언어로 말할 때는 그 의미가 무엇인지 몰랐던 바울과 바나바도 자기들에게 제사 드리러 오는 행동을 취하자 드디어 자기들을 신으로 떠받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지금까지 전도하며 시기, 비방만 받고 돌로 치려하는 경우를 당하던지 또 기쁨과 성령이 충만해서 말씀을 듣고자 하는 경우는 보았어도 이렇게신 이로다!” 하는 경우가 처음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럴 때 전자동으로 옷을 찢기가 힘들다. 왜냐하면 인간의 죄는 높아지고자 하는 것이다. 여러분들이 교회, 공부, 직장, 결혼을 해도 늘 누군가보다 높아지고자 하는데 결국은 그것은 하나님 자리에 가고자 하는 것인데 그 자리에 딱 갔다. 저절로 하나님 자리에 갔다. 그런데 그 때 어떻게 영광을 거절하겠는가? &바는 그것이 얼마나 신성모독적인 죄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뛰어나가서 옷을 찢으면서 그렇게 하지 말라고 소리를 질렀다. 옷을 찢는다는 것은 근심과 슬픔을 표시하는 유대적 관습이고 또 하나님 앞에 크나큰 죄가 되는 일을 목도했을 때 취하는 행동이다. ‘듣고와 옷을 찢고는 부정 과거 분사이기 때문에 듣자마자 옷을 찢었다는 말이고 또 소리를 지르면서 무리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는 것이다. 즉시. 즉시 다 옷을 찢고 그러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헤롯이 백성에게 연설한 뒤에 그들로부터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는 칭송을 받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챘다. 그런데 또 예수님의내가 그로다. 내가 창조주 하나님이다.” 그 말씀을 신성 모독이라고 여기면서 또 자기 옷을 찢었던 대제사장의 모습과도 대조된다. 대제사장이나 헤롯이나 스스로 왕으로 여기니 받지 말아야 될 칭송을 받거나 찢지 말아야 될 옷을 찢는 어리석음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신성 모독이라고 옷을 찢는 것과 바울이 옷을 찢는 것은 완전 다른 것이다.


이것을 잘 분별해야 된다. 바울은 거듭되는 고난 가운데 자신이 스테반을 죽인 지난날을 기억하면서 영혼 구원의 사명을 위해 순종을 하니까 옷을 찢으며 애통해야 될 때와 안해야 될 때를 분별하게 해주시는 것이다. 13:25 세례요한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치 못한다고 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자기를 비우시고 낮아지시고 죽어지는 예수님처럼 창조주가 우리를 위하여 그렇게 낮아지셨는데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시고 창조주가 창조물인 사람의 모습으로 낮아지셨다. 사람은 벌레 하나도 만들지 못한다. 그러니까 벌레처럼 낮아졌다는 말도 주님의 낮아짐과는 비교가 안 된다. 우리가 벌레보다 무생물처럼 낮아진 것이 더 낮아진 것인데 따라가지 못할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을 사람이 받는다는 것은 옷을 찢어야 할 일인 것이다. 앉으나 서나 사람은 인정받기 위해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금 인정받으면 교만해지는 것이 자기 주제를 모르는 것이다. 그런데 전자동으로 하나님께 갈 영광을 가로채고도 인식하지도 못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목자 직분을 처음에는 너무 기쁘게 감당하다가 사업이나 아이들이 잘 되면 다 내려놓고 싶어 한다. 주님의 낮아지심을 모르고 기복으로 믿기 때문에 잘되면 내려놓고 떠나고 싶다고 하는 것이다. 섬기는 게 힘들다는 것이다. 그것이 자기 주제를 모르는 것이다. 인생은 사명에서 왔다가 사명 때문에 가야 하는 것이다. 사람과 짐승의 다른 점이다. 그래서 사람을 택해주셨다. 그래서 한 결 같이 여전한 방식으로 전도와 개척을 위해서 큐티하고 예배드리고 공동체 예배를 드리는 것이 갑갑하고 지겨우신 분은 아직 성령의 제자가 되지 못했기 때문에 계속 세상을 주목하는 것이다. 우리 인생의 여행도 동반자가 중요하다. 여전한 방식대로 사는 것이 지루해 보여도 그것이 최고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적용#2)

-예배는 왜 드리나? 자기 주제를 주목하려고? 화를 피하기 위해서인가? 하나님 자체를 사랑하시기 때문인가?

 

3.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하나님을 주목하는 것이다(15)

 

15: 이르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

 

설교를 시작한다. &바는 자기들은 신이 아니다. 연약한 육체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하나님 외에 그 어떤 대상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섬기는 일은 모두 우상숭배이고 헛된 일이라고 그것은 속이는, 쓸데없는 무가치하고 망령된 일이라는 것이다. 남편이나 아내, 자식을 우상 삼고 돈을 우상 삼는 것은 이게 얼마나 하나님을 속이고 쓸데없는 일이고 무가치하고 망령된 헛된 일을 하는 것인지 모른다. 하나님 외에 것을 숭배하면 남들도 속이는 일이다. 남편(아내)을 우상 삼으면 남편도 속이는 행위이다. 복음은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계신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것이다. 우리가 전도하는 사람이 무당 찾는 사람이라면 루스드라 식 전도를 하고 성경을 아는 사람이라면 비시디아식 전도를 해야 되는 것이다. 그런 방식으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창조주 하나님을 소개했다.

 

16: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민족으로 자기들의 길들을 가게 방임하셨으나


인류 전체를 죄 가운데 내버려 두신 것 자체가 하나님의 심판이다. 그들이 죄 가운데 있기를 원하는 대로 그들을 죄에 넘기셨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의 범죄를 방임하셨다는 것은 그들의 죄를 허용하시고 용서하셨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들에 대한 즉각적인 심판을 유보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유대교 배경이 전혀 없는 이방인 청중의 눈 높이에 맞춰서 같은 내용을 그들이 소화할 만한 표현으로 부드럽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방임하셨지만 17절에 자기를 증언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라고 하신다. 이중 부정이니까 증언 했다란 뜻인 것이다. 범죄한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가 없다. 인생이 복음을 듣고 구원을 얻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인 것이다.

 

17: 그러나 자기를 증언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여러분에게 하늘로부터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만족하게 하셨느니라 하고

 

비록 특별 계시인 성경을 접하지 못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이 방임하신 허망한 삶을 산다고 하여도 그들 자신에게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자연을 통해 계시되는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외면하고 모른 체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1: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 지니라.


우리는 사시사철만 봐도 그냥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다 보인다. 우주만물을 다 보면서 우리가 예수가 들어오기 전에 우리나라도 믿는 사람이 있었다. 허준 같은 사람을 보면 그런 자연계시와 일반은총을 통하여서 믿은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내일 모레 1222일에는 1623년 이후 약 400년 만에 목성과 토성이 가장 근접한 형태로 관찰될 예정이라고 한다. 그리고 지난 12~14일 사흘 동안 70개의 유성이 찾아온 것을 보았다. 이러한 별똥별 우주 쇼를 보면서 어떻게 하나님이 안 계시다고 할 수 있겠나?

 

18: 이렇게 말하여 겨우 무리를 말려 자기들에게 제사를 못하게 하니라


바울의 설교는 성공적. 물론 이 설교가 듣는 그들에게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불러 일으켰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적어도 바&바를 신으로 여겨 제사 드리지 못하게 하는 데는 성공했다. 우리가 자기 주제를 주목한다면 자기들을 숭배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인생의 주제가 되어야 할 것이다. 무슨 일을 해도 자기 일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는 그것이 성령의 최고의 주목이 되는 것이다. 우리 인생의 목적은 자기가 아니라 자기 주제를 주목하게 하는 것인데 그럴 때마다 나는 신이 아니라고 그렇게 주목을 제대로 해야 된다는 것이다. 자기 주제를 주목하는 것이 최고의 성령의 주목이 될 것이다.


인간은 전적으로 무능하며 자기가 한 것이 한 개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박수를 받으면 자꾸 착각한다.


(적용#3)

-자연 계시와 일반 은총으로 경험한 하나님을 나눠보라

)별을 보고 하나님을 만났다. 좋은 의사를 만나서 병을 고쳐서 하나님을 만났다

 

성경을 모르는 사람에게 어떻게 전해야 되는가? 성경 없이 전해야 한다. 그래서 각종 방법이 달라야 한다.

이혼과 낙태의 죄를 경험했기 때문에 낙태 반대를 호소함.  영화 “unplanned”

보여야 죄고 안 보이면 죄라는 것을 모른다.

이 세상에서 가장 힘든 것은 자기 죄의 얘기이다.

낙태를 하고도 성령이 임하지 않으면 죄를 모른다.

 

올바른 예배를 통하여 낙태법 개정 동의 취지는 자녀들 임신 하더라도 아이는 낳아야 한다는 것이다.

 

<Epilogue>

 

1)  성령의 제자는 볼 것을 관심을 가지고 주의 깊게 봐야한다.

2)  또 보지 않아야 할 것은 경계의 눈으로 살펴야 한다.

3)  군사 구령자인 하나님만 감탄하며 주목해야 한다.

4)  어떤 상황에서도 부자건 건강하건 믿지 않으면 인생은 죄인이기 때문에 평강이 없다.

5)  인간본성에서 비롯되는 종교성은 근본적으로 자동적으로 기복적이다.

6)  복을 구하고 화를 피하기 위해서 우리는 예배를 한다.

7)  예배 중독자나 과학 만능주의에 젖어 있거나 반대로 미신과 우상숭배에 빠져서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하나님을 우상 중 하나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다 똑같아서 일치단결해서 돌진을 한다.

8)  교회, 공부, 직장, 결혼을 해도 늘 누군가보다 높아지고자 하는데 결국은 그것은 하나님 자리에 가고자 하는 것인데 그 자리에 딱 갔다. 저절로 하나님 자리에 갔다. 그런데 그 때 어떻게 영광을 거절하겠는가?

9)  자기를 비우시고 낮아지시고 죽어지는 예수님처럼 창조주가 우리를 위하여 그렇게 낮아지셨는데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시고 창조주가 창조물인 사람의 모습으로 낮아지셨다.

10) 사람은 벌레 하나도 만들지 못한다. 그러니까 벌레처럼 낮아졌다는 말도 주님의 낮아짐과는 비교가 안 된다.

11) 우리가 벌레보다 무생물처럼 낮아진 것이 더 낮아진 것인데 따라가지 못할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을 사람이 받는다는 것은 옷을 찢어야 할 일인 것이다.

12) 앉으나 서나 사람은 인정받기 위해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3) 조금 인정받으면 교만해지는 것이 자기 주제를 모르는 것이다.

14) 그런데 전자동으로 하나님께 갈 영광을 가로채고도 인식하지도 못하는 것이다.

15) 예를 들면 목자 직분을 처음에는 너무 기쁘게 감당하다가 사업이나 아이들이 잘 되면 다 내려놓고 싶어 한다.

16) 주님의 낮아지심을 모르고 기복으로 믿기 때문에 잘되면 내려놓고 떠나고 싶다고 하는 것이다.

17) 섬기는 게 힘들다는 것인데 그것이 자기 주제를 모르는 것이다.

18) 인생은 사명에서 왔다가 사명 때문에 가야 하는 것이며 그것이 사람과 짐승의 다른 점이다.

19) 그래서 사람을 택해주셨다.

20) 그래서 한 결 같이 여전한 방식으로 전도와 개척을 위해서 큐티하고 예배드리고 공동체 예배를 드리는 것이 갑갑하고 지겨우신 분은 아직 성령의 제자가 되지 못했기 때문에 계속 세상을 주목하는 것이다.

21) 우리 인생의 여행도 동반자가 중요하다. 여전한 방식대로 사는 것이 지루해 보여도 그것이 최고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22) 하나님 외에 그 어떤 대상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섬기는 일은 모두 우상숭배이고 헛된 일이라고 그것은 속이는, 쓸데없는 무가치하고 망령된 일이라는 것이다.

23) 남편이나 아내, 자식을 우상 삼고 돈을 우상 삼는 것은 이게 얼마나 하나님을 속이고 쓸데없는 일이고 무가치하고 망령된 헛된 일을 하는 것인지 모른다.

24) 하나님 외에 것을 숭배하면 남들도 속이는 일이다.

25) 남편(아내)을 우상 삼으면 남편도 속이는 행위이다.

26) 복음은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계신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것이다.

27) 우리가 전도하는 사람이 무당 찾는 사람이라면 루스드라 식 전도를 하고 성경을 아는 사람이라면 비시디아식 전도를 해야 되는 것이다.

28) 그런 방식으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창조주 하나님을 소개했다.

29) 인류 전체를 죄 가운데 내버려 두신 것 자체가 하나님의 심판이다.

30) 그들이 죄 가운데 있기를 원하는 대로 그들을 죄에 넘기셨다.

31)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의 범죄를 방임하셨다는 것은 그들의 죄를 허용하시고 용서하셨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들에 대한 즉각적인 심판을 유보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32) 범죄한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가 없다.

33) 인생이 복음을 듣고 구원을 얻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인 것이다.

34) 비록 특별 계시인 성경을 접하지 못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이 방임하신 허망한 삶을 산다고 하여도 그들 자신에게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35) 자연을 통해 계시되는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외면하고 모른 체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36) 우리는 사시사철만 봐도 그냥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다 보인다.

37) 우주만물을 다 보면서 우리가 예수가 들어오기 전에 우리나라도 믿는 사람이 있었는데 허준 같은 사람을 보면 그런 자연 계시와 일반 은총을 통하여서 믿은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38) 별똥별 우주 쇼를 보면서 어떻게 하나님이 안 계시다고 할 수 있겠나?

39) 우리가 자기 주제를 주목한다면 자기들을 숭배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인생의 주제가 되어야 할 것이다.

40) 무슨 일을 해도 자기 일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는 그것이 성령의 최고의 주목이 되는 것이다.

41) 우리 인생의 목적은 자기가 아니라 자기 주제를 주목하게 하는 것인데 그럴 때마다 나는 신이 아니라고 그렇게 주목을 제대로 해야 된다는 것이다.

42) 자기 주제를 주목하는 것이 최고의 성령의 주목이 될 것이다.

43) 인간은 전적으로 무능하며 자기가 한 것이 한 개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박수를 받으면 자꾸 착각한다.

44) 성경을 모르는 사람에게 어떻게 전해야 되는가? 성경 없이 전해야 한다. 그래서 각종 방법이 달라야 한다.

45) 보여야 죄고 안 보이면 죄라는 것을 모른다.

46) 이 세상에서 가장 힘든 것은 자기 죄의 얘기이다.

47) 낙태를 하고도 성령이 임하지 않으면 죄를 모른다.

48) 올바른 예배를 통하여 낙태법 개정 동의 취지는 다름 아닌 자녀들이 임신 하더라도 아이는 낳아야 한다는 것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다.

49) 믿지 않으면 죄인이기에 평강이 없는 것이다

50) 인간의 존재는 늘 높아지고자 하는 것으로 하나님 자리에 가고 싶어하는 것이다

51) 인정 받으면 교만해 지는 것이 자기 주제를 모르는 것이다

52) 여전한 방식으로 예배 드리는 것이 지루해 보여도 최고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53) 무엇이든지 우상 삼으면 (1)쓸데 없고, (2)무가치 하고 (3)헛되고 (4)망령된 것이고 (5)속이는 것이다

54) 세상에서 가장 힘든 것이 자기 죄(수치)를 오픈 하는 것이다

55) 주님을 만나 깨닫지 못하면 모두 인권을 부르짖는다

56) 예수의 이름 밖에는 달리 일어설 수가 없는 것이다

57) 인간은 전적 부패, 전적 무능, 전적 죄인이다

58) 자연 계사와 일반 은총으로 전도 할 수 있어야 한다

59) 성령의 부목은 자기 주제를 주목하는 데서 시작된다

 

 


Posted by 윤강로
말씀과 마음씀2020. 12. 15. 15:09

[우리들교회 20201213일 주일예배 말씀 요약(사도행전 13: 50~ 14: 7/성령의 제자)]



 

<사도행전 13: 50 ~ 14: 7>

 


50절 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시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게 하여 그 지역에서 쫓아내니 (But the Jews incited the God-fearing women of high standing and the leading men of the city. They stirred up persecution against Paul and Barnabas, and expelled them from their region.)

51절 두 사람이 그들을 향하여 발의 티끌을 떨어 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가거늘(So they shook the dust from their feet in protest against them and went to Iconium.)

 

52절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And the disciples were filled with joy and with the Holy Spirit)

 

1절 이에 이고니온에서 두 사도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말하니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 (At Iconium Paul and Barnabas went as usual into the Jewish synagogue. There they spoke so effectively that a great number of Jews and Gentiles believed)

 

2절 그러나 순종하지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거늘(But the Jews who refused to believe stirred up the Gentiles and poisoned their minds against the brothers)

 

3절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시니(So Paul and Barnabas spent considerable time there, speaking boldly for the Lord, who confirmed the message of his grace by enabling them to do miraculous signs and wonders)

 

4절 그 시내의 무리가 나뉘어 유대인을 따르는 자도 있고 두 사도를 따르는 자도 있는지라(The people of the city were divided; some sided with the Jews, others with the apostles)

 

5절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리들이 두 사도를 모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There was a plot afoot among the Gentiles and Jews, together with their leaders, to mistreat them and stone them)

 

6절 그들이 알고 도망하여 루가오니아의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와 그 근방으로 가서(But they found out about it and fled to the Lycaonian cities of Lystra and Derbe and to the surrounding country,)

 

7절 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where they continued to preach the good news)

 

 

 

<Prologue>

 

 

오래 있었다고 오픈을 잘하고 처음 왔다고 오픈을 못하고는 아닙니다우리는 다 이렇게 택자가 되어서 말씀대로 갔으면 좋겠습니다성령의 반응을 통해 제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제자가 어떻게 되는지 말씀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성령의 제자는 훈련을 해서 제자가 아니라 성경을 읽어가다 보니까 말씀을 좇아가서 저절로 제자가 되는 겁니다성령의 살리심과 일으키심에 반응을 하니까 긍정-부정-무반응의 옳고 그름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시각으로 반응하게 되니 저절로 주님의 제자가 되어 성령의 제자가 되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 ‘카일 아이들몬은 제자로 부르실 때 가장 행복한 부르심은 나를 따르라이고 가장 고통스러운 부르심은 자기를 부인하라이고 가장 충격적인 부르심은 와서 죽으라고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성령의 제자는 이이런 과정을 겪어가면서 되어 가는 것입니다.


오늘은 성령의 제자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말씀 요약>

 

1.   쫓겨나도 기쁨과 성령이 충만합니다.

 

 

50절 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시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게 하여 그 지역에서 쫓아내니

 

 

유대인들이 지난번에 시기-반박-비방해도 말씀을 전하니 퍼졌잖아요. 그러면 사단도 총궐기를 합니다유대인들도 지체가 있네요 누구죠? 경건한 귀부인 유럽 자치체가 있네요 유력자들은 유대인들과 관계를 끊을 수 없는 정치인들과 비슷한 사람이었습니다회당에 나오는 귀부인들은 기독교가 아닌 유대교로 개종한 여인들이었는데 예의와 교양이 있는 사람인데 선동에 넘어갔어요 유대인들의 계산으로 가장 적은 수고로 큰 효과를 볼 것 같은 작전을 했습니다.

 

보이는 외모가 중요한 사람이기 때문에 돈으로 선동된 사람들은 공권력을 선동해 볼품없어 보이는 바울과 바나바를 쫓아냈습니다허튼소리에 귀가 솔깃한 사람을 사단이 좋아합니다. 순수함도, 착한 것도 아닙니다귀부인들이 두 사도를 쫓아냈어요. 경건한 귀부인은 어떤 것인가요경건의 모양은 있으냐 능력은 부인하는 자라고 했습니다그러나 경건의 능력이 없으면 어려울 때 이길 수가 없어요. 껍데기만 가지고는 능력이 안 나타나요. 그들은 회당에 나오면서 바울의 구속사가 들리지 않고 그런데 복은 받아야 하잖아요? 그들의 사회적인 위치는 회당에 오면 주인처럼 해 주잖아요. 그래서 넘치도록 복을 빌어주는데 바울은 놀라고 망하라고 하니까 이를 갈지 않았을까 싶어요공동체에서 나의 불만을 선동하는 사람을 조심해야 합니다.

 

 

51절 두 사람이 그들을 향하여 발의 티끌을 떨어 버리고 이고니온(Iconium)으로 가거늘

 

 

안디옥교회 바울 그 사람들이 보기에는 살인자인데 이 사람들은 다 유력자들이 아니었습니다쫓아내니까 두 사람이 그들을 향하여 발에 티끌을 떨어버리고(shook the dust from their feet against them)가거늘 이 행위는 누가복음 9 10장에 복음을 영접하지 않을 때 티끌을 떨어버리는 것을 적용하는 행위입니다이 행동은 그 지방은 관계가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인데 믿는 자들이 제자들이 생긴 도시에 심판을 내려달라고 하지 않았겠죠. 그들이 아무리 유력자라도 티끌에 불과하다는 상징이 있습니다그들은 낙심 하지도 않고 두려워하지 않고 쫓겨나서 남동쪽으로 145km떨어진 이고니온으로 향했습니다.

 

그곳은 글라디우스(Claudius) 황제로부터 영예로운 칭호를 받기도 했던 교통의 중심지로서 중요성에서 비시디아 안디옥(Pisidian Antioch)을 능가했어요. 거부하면 얼마든지 딴 데로 갈 수 있어요 그만 거부하세요여기서 성에서 나가서 발에 티끌을 떨어버리라는 것을 가족을 떠나야 할 때도 있고 지역을 떠나야 할 때도 있습니다나에게 주신 말씀을 듣는다면 안 믿는 가족에게 떠난 적용을 할 수 있습니다안락함에서 떠나라는 것입니다당신이 하나님 믿지 않으면 아무리 사랑해도 기쁘지 않다고 선포하는 거예요 말로만 해서는 안 됩니다집착을 떨어버리는 모습을 보여줘야 합니다지혜롭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적용#1)

 

-떨어버려야 할 세상 가치관의 안락함과 친절함은 무엇입니까?



 

52절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바울의 전도를 듣고 믿게 된 이방인들이 성도가 되었다는 사실이 제자들이라는 단어로 표시했습니다이익에 사로잡혀 시기에 찬 유대인들과 달리 예수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이방인들은 기쁨과 성령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말씀을 받고 회개한 새사람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그들을 어떻게 괴롭혔을지 상상이 안 갑니다지난번에 은혜 가운데 머물러있으라고 했잖아요돌아가면서 이 믿음에 거하라고 시련을 겪어야 한다고 돌아가는 길에 도전했는데 구속사를 이해했기 때문에 핍박과 박해 속에서 일어나 제자의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말씀을 듣고 기뻐하고 성령의 충만함에 머무르는 것입니다시기와 반박 비방을 당하고 선동해도 주님의 일이면 박해가 와도 기쁨이 충만하고 나의 일이면 낙심이 밀려오는 것입니다새로운 세계에 눈이 떠집니다이건 복음의 실패담이 아니라 성공담이라는 것이죠

 

 

(적용#2)

 

-여러분은 어디에서 기쁨과 성령이 충만합니까아이가 수능을 잘 봤을 때입니까? 주식이 올랐을 때입니까? 연봉이 올랐을 때입니까? 말씀을 들을 때입니까?

 

 

2.   여전한 방식으로 전도하고 배척을 당합니다.

 

 

1절 이에 이고니온에서 두 사도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말하니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



박해에도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 이고니온에서 계속된다는 거예요. 두 사도가 함께 들어갔다고 하는데 함께는 여전한 방식이라는 뜻이기 때문에 완악한 감정을 앞세웠으면 어떻게 그렇겠어요. 구원에 충성했기 때문에 평소 하던 대로 했어요 그랬더니 그냥 유대인과 헬라인의 무리가 믿게 되는 역사가 일어났어요 만일 유대인들이 박해를 하니까 나는 유대인을 버리고 당당하게 광장에서 전해야겠어요. 어차피 이방인들이 와서 믿잖아! 아마도 그랬다면 중심에 있는 미움과 자기 의를 보시는 하나님은 속지 않으셨을 겁니다영혼 구원의 열매는 말씀에 순종하며 원칙대로 십자가를 길로 놓을 때 주님 이 맺게 해주시는 거예요

 

바울은 여전히 유대인의 회당부터 들어가잖아요 주님께서 말씀하셨어요이것이 성령의 여전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여전한 방식은 진리 중에 진리입니다유대인과 헬라인의 구분 없이 믿게 되었는데 헬라인은 민족적 구분이 아니라 문화적 구분으로 되어 이방인을 대표하는 표현이 되었어요 헬라인과 유대인이 관용어가 되었어요.

 

 

2절 그러나 순종하지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거늘

 

 

이제 또 유대인 지도자들이 등장합니다시기가 발전해서 형제들의 악감을 품게 하는 감정으로 나타납니다불순종으로 선동하는 거죠구속사의 결론은 예수 믿어야 죄 사함 받고 의로워지는 것인데 안 믿으면 놀라워하고 멸망한 것이라는 거예요 이방인들은 무섭게 들리는 것이나 유대인이 놀라는 거죠 악감을 품고 선동하는 거예요 뭐라고 했을까요 예수는 처녀가 낳은 사생아야적법한 법대로 사형 받은 사람이야!’ 이렇게 세뇌를 시키니 한두 번 들을 때 그럴 리가 있을까 하지만 계속 들으니 그렇다고 합니다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했어요자기들의 힘만으로 부족해서 이방인의 유력자들을 동원했어요 권력으로 의인을 죄인 되게 하는 것이 이 세상 사람들이 하는 일이에요. 그런데 바울과 바나 바는 말로는 이방인에게 향하노라라고 했습니다만 유대인에게 향했어요 전도가 무엇인지 배우게 됩니다.

 

 

전도란 믿지 않은 이들을 교회로 데려오는 것이 아니에요 죽었다가 깨어나 아도 생각지도 못한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 것이에요 원수를 용서하라까지는 되어요 사랑하라까지는 듣지도 알지도 못해요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전도에요이러한 정신이 복음인 거예요내가 사랑할 수 없죠내가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이 복음이에요. 우리 이제 손녀딸이 제가 이제 호랑이 옛날이야기를 해주면 계속해달라고 해요인내를 요구합니다몇 번이나 반복하겠습니까 교육은 반복이에요 반복은 잘해주는 사람이 최고예요 아이들이 깨닫지 못해도 한 구절이라도 큐티 일기를 쓰게 하세요무엇이든지 쓰게 하세요 일기를 쓰는 거죠자기 생각을 써보는 훈련은 아이들에게 최고의 교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우주의 행성들이 하나라도 그들의 충실한 일상을 멈추면 지구도 멈추는 거죠. 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행위라는 것인지 모릅니다반복하는 일상이 복이 흐르게 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전도 배척 핍박도 수없이 반복해서 하고 받고 듣고 해야 해요 개인 예배 공 예배 수요예배 목장 예배도 반복해서 듣고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단을 사로잡을 수 없어요공동체가, 큐티가 얼마나 노아의 방 주인지 모릅니다수십 년을 여전한 방식의 전도와 배척을 받기 위해서 여전한 방식의 예배를 드리니 제자의 길을 가는 것 같습니다집에서 직장에서 교회에서 예배 드리고 너무나 지루하게 사는 것 같아도 여전한 방식으로 충성되게 사는 것이 찬양하는 태도이고 이것이 최고의 삶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인상적인 것은 하루에 족해요. 그거 아니면 먹고 마시고 음란하게 사는 것이 재미있을지 몰라도 황폐함이 반복되는 것입니다날마다 반복되는 것이 최고의 복인 거예요 그런데 그러니까 기쁜 일만 반복되면 좋겠지만 기쁜 일만 있으면 기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여전한 방식으로 감당하는 것이 전도하고 배척받는 것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에요 이렇게 기도 제목 올려놓고 기도하는 것이 성령의 제자에요. 굉장한 선교하려고 하지 말아요 때가 되면 이렇게 이고니온으로 가게 해주세요알파와 오메가 되신 하나님이 끝내지 않으면 끝낼 자가 없는 거예요 일상이 축복이에요. 기쁨만 있는 사람이 누가 기도회를 올라갑니까이런 분들 때문에 우리들 교회가 살아내고 우리나라가 살아나는 겁니다가치관에 발상이 필요합니다힘든 것 때문에 하나님이 붙어있을 수 있는 것이 감사한 것을 알아야 해요

 

 

(적용#3)

 

-끝이 안 보이는 반복에서 참아야 하는 것은 무엇이고 몇 번 참았습니까?



 

참지 못하는 것이 이 땅의 특징입니다우리가 70년도 참아야 하는데 3년을 못 참고 그래도 우리들 교회는 전도가 되었으니 감사합니다대단한 간증을 김상건 목자님이 하셨습니다.




3.   전도할 때 양육이 필요합니다.

 

 

3절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시니

 

두 사도가 이고니온에서는 오래 있었다고 합니다. ‘오래라는 기간이 얼마일까요헬라어로 히카노스(충분한)’이라는 의미입니다. 20년 머물러도 부족할 수가 있어요 카이로스(Kairos)의 시간 속에서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구원의 시간 복음을 전하는 자리를 지키며 사명을 감당했다는 것입니다. 1절에 보면 허다한 무리가 믿었어요 왜 오래 머물렀을까요양육을 위해서였죠? 1년 동안 가르치니까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고 했잖아요 사도바울의 중요한 것이 양육입니다교인 수가 많다고 그리스도인이 아닌 거죠말씀을 제대로 배워야 신앙으로 설 수 있는 것입니다그래서 안디옥교회가 예루살렘 교회를 구제하고 선교사를 파생하고 적용하잖아요양육이 없는 전도는 미완성의 전도인거에요양육을 통해 완성이 되는 거에요 하나님이 주체입니다그러나 전도자와 하나님 사이에는 분명한 역할 분담이 있어요주를 담대하게 전했다고 했는데 머물러 있었다는 디아트리보인데 트리보닳도록 문지르다-비비다-치다인데 이는 방향과 크기를 강조하는 접두어에요.

 

비비고 닳도록 수고하며 살아날 때 예수님이 친히 표적과 기사를 구원의 말씀을 증언한다는 거예요 내가 그렇게 살아야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을 담대히 전할 수 있는 거예요 살아야 담대히 할 수 있는 거예요오늘 내 환경이 하나님이 허락하신 하나님의 세팅인 거예요. 여전한 방식으로 말씀을 적용하는 것이 최고의 증언을 해주는 거예요 그래서 양육이 필요한 거예요. 이렇게 양육을 잘해 놓으면,

 

4절 그 시내의 무리가 나뉘어 유대인을 따르는 자도 있고 두 사도를 따르는 자도 있는지라

 

악하고 음란한 세상에 주님이 직접 증언하시는 능력의 말씀이 전해지는 겁니다. 사도들과 함께 주님 편에서는 사람이 있고 대적자와 서는 사람이 있어요사단이 자기 백성을 뺏겼는데 가만히 있겠어요? 자기 백성으로 확정된 사람을 동원해 박해를 합니다그렇지만 이제 내가 주님을 알았는데 박해 받았다고 굴복할 수 없잖아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선한 싸움을 싸웠다고 합니다좋은 게 좋은 거라는 복음은 없어요구원을 위해, 말씀을 위해 거짓 화평이 깨지는 복음을 전하면 참된 화평을 주시는 겁니다지체들과 함께해야 하는 거예요. 양육 받은 지체들과 함께 자아가 깨지니 말씀이 들어오는 거예요 공동체에 붙어 있어야 하는 겁니다어떤 일이 와도 놀라지 않습니다장차 받을 환란을 믿고 들으니 우리들 교회 성도들이 놀라지 않는 생각이 듭니다.

 

 

(적용#4)

 

-양육을 어디까지 받으셨어요?

 

 

 

4.   돌로 치면 도망가야 할 때가 있습니다.

 

 

5절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리들이 두 사도를 모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

 

이제는 돌로 치려고 해요 이것은 비방을 넘어서 공개적으로 망신까지 주는 뜻인데 죽이려고 한 것이죠돌로 치는 것이 유대 사회의 관습인데 유대인이 주동인 것입니다관원들이라고 구체적으로 언급함으로 사도들에 대한 박해 시도가 조직적으로 진행되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사단의 세력들이 위기감을 느꼈는지 보여줍니다정말 신물 나게 괴롭히죠. 여러분의 삶도 괴로운 일이 있다면 사도바울의 삶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6절 그들이 알고 도망하여 루가오니아의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the Lycaonian cities of Lystra and Derbe)와 그 근방으로 가서

 

 

안디옥에서는 쫓겨나지만 이고니온에서는 자기들이 생명의 위협을 느껴 도망갔잖아요. 구원을 위해서 옥문이 열려도 도망은 안 갈 수도 있고 사명을 위해 도망가야 하는 경우도 있어요비겁하게 도망간다고 이런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요여전한 방식으로 전도하고 박해 받고 배척 받고 하는 것이 우리의 일상입니다그런데 그것이 제일 실제 생활에서 연습하고 있는 것이기도 제목에 올라온 분들입니다하나님이 가장 최고로 주신 그야말로 성령의 제자들 아닌가 싶습니다언제 도망가고 쫓겨나야 하는가 말씀이 없으면 분별할 수가 없습니다말씀을 그래서 봐야 합니다.

 

 

7절 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

 

 

바로 이것이 미완료 과거 동사입니다어떤 상황에서도 중단 없이 전개되었음을 보여줍니다바울은 조건반사적으로 복음을 전하는데 어디에 있든지 우리의 사명의 자리로 알고 우리의 직장이 전도지라는 것을 알고 사업장이 사명지, 가정이 전도지인 것을 알아 합니다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 선교의 전진기지입니다오늘도 가정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우리 이어령 교수가 간증하면서 우리 어렸을 때는 고아 수출국이잖아요. 완전히 아이는 다 죽이라고 하고 낳으면 다 수출하라고 하고 아이들이 비행기로 수출되어 가는데 그 아이들이 전부 다 비행기 문을 닫으니까 더 엄마라고 그래야 하는데 엄마 아빠를 본 일이 없어 언니, 누나!’ 이랬다는 거예요.

 

울어본 일이 없다는데 엄마 아빠를 본 일이 없어서 언니 누나를 불렀다는데 우리 예수님도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고 부르셨나이까 했잖아요나의 모든 것을 책임져주는 아버지가 없는 것이 이방인의 삶 아니겠어요우리 아들이 부를 일이 없다고 이혼하시면 안 됩니다정말 가정을 지키는 것이 애국애족의 첫 번째입니다하나님의 복음을 들어야 올바로 설 수 있습니다바울은 노심초사하는 마음으로 제자를 양육합니다더 박해가 심해집니다발길이 닿는 곳에서 전도하고 또 박해가 시작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께서는 이런 삶을 귀하게 생각합니다결혼을 통해서 사명의 삶을 사는 거고 목장과 연결이 되는 겁니다쾌락을 좇아 살면 순간적인 즐거움은 있지만 영벌이 있습니다. 복음을 위해 살면 영생이 있는 거예요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이방인이 복음을 받았다는 것이 얼마나 간절했겠어요복음을 위해서 사는 삶이 기쁜 것만 있는 것이 아니에요지금 얼마나 슬프셔요유대인들아 자기가 백성들이 핍박하잖아요거기 반응하는 사람이 바울 한 사람입니다복음을 전하는 것은 외로운 일이에요 정말 주님의 위대함보다는 슬픔과 외로움이 느껴지는 거예요 이 길을 가야 하는 거예요내 집 식구가 수고를 해서 외로운 길을 가게 하는 거예요.

 

 

(적용#5)

 

-영벌의 쾌락의 삶을 사시겠습니까영생의 제자의 삶을 사시겠습니까?

 

 

<Epilogue>

 

1)  성령의 제자는 쫓겨나도 기쁨과 성령이 충만한 것이다

2)  그래서 언제나 여전한 방식으로 전도하고 배척 받아야 하는 것이다

3)  그것이 성도의 삶이다

4)  이런 기가 막힌 제자들에게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다고 했는데 그러면 양육이 필요한 것이다

5)  예수님과 사도바울의 삶을 한 구절 한 구절 읽으면서 전도하고 배척 받았던 것처럼 우린 날마다 힘들고 새롭다

6)  한 절도 안 빼고 가는 것으로 똑같은 삶인데 성경이 주님의 말씀 이라서 역사하시는 것이 있는 것이다

7)  힘이 드니 다른 사람을 생각하게 되는 것으로 그러니 돌로 치면 도망갈 때가 있는 것이다

8)  별 인생이 없다는 것을 알고 가야 하는 것이다.

9)  성령의 제자는 훈련을 해서 제자가 아니라 성경을 읽어가다 보니까 말씀을 좇아가서 저절로 제자가 되는 것이다

10) 성령의 살리심과 일으키심에 반응을 하니까 긍정-부정-무반응의 옳고 그름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시각으로 반응하게 되니 저절로 주님의 제자가 되어 성령의 제자가 되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

11) 카일 아이들몬은 제자로 부르실 때 가장 행복한 부르심은나를 따르라이고 가장 고통스러운 부르심은자기를 부인하라이고 가장 충격적인 부르심은 와서 죽으라고 하는 것이라고 한다

12) 성령의 제자는 이런 과정을 겪어가면서 되어 가는 것이다.

13) 허튼소리에 귀가 솔깃한 사람을 사단이 좋아합니다.

14) 경건의 모양은 있으냐 능력은 부인하는 자라고 했다

15) 그러나 경건의 능력이 없으면 어려울 때 이길 수가 없다.

16) 껍데기만 가지고는 능력이 안 나타나는 것이다

17) 당신이 하나님 믿지 않으면 아무리 사랑해도 기쁘지 않다고 선포하는 것으로 말로만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18) 집착을 떨어버리는 모습을 보여줘야 하며 지혜롭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19) 구속사를 이해했기 때문에 핍박과 박해 속에서 일어나 제자의 삶을 살 수 있었다

20) 말씀을 듣고 기뻐하고 성령의 충만함에 머무르는 것이다

21) 시기와 반박 비방을 당하고 선동해도 주님의 일이면 박해가 와도 기쁨이 충만하고 나의 일이면 낙심이 밀려오는 것이다

22) 새로운 세계에 눈이 떠지게 되는 데 이건 복음의 실패담이 아니라 성공담이라는 것이다

23) 영혼 구원의 열매는 말씀에 순종하며 원칙대로 십자가를 길로 놓을 때 주님 이 맺게 해주시는 것이다

24) 성령의 여전함을 보면여전한 방식은 진리 중에 진리다 

25) 구속사의 결론은 예수 믿어야 죄 사함 받고 의로워지는 것인데 안 믿으면 놀라워하고 멸망한 것이라는 것이다

26) 권력으로 의인을 죄인 되게 하는 것이 이 세상 사람들이 하는 일이다 

27) 전도란 믿지 않은 이들을 교회로 데려오는 것이 아니라 죽었다가 깨어나 도 생각지도 못한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 것이다

28) 원수를 용서하라까지는 되지만 원수를 사랑하라까지는 듣지도 알지도 못하는데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전도다

29) 이러한 정신이 복음인 것이고 내가 사랑할 수 없으며 내가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이 복음이다

30) 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행위라는 것인지 모르는 것이다 

31) 반복하는 일상이 복이 흐르게 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

32) 전도 배척 핍박도 수없이 반복해서 하고 받고 듣고 해야 하며 개인 예배 공 예배 수요예배 목장 예배도 반복해서 듣고 해야 한다.

33) 그렇지 않으면 사단을 사로잡을 수 없으니 공동체가, 큐티가 얼마나 노아의 방 주인지 모른다

34) 수십 년을 여전한 방식의 전도와 배척을 받기 위해서 여전한 방식의 예배를 드리니 제자의 길을 가는 것 같다

35) 집에서 직장에서 교회에서 예배 드리고 너무나 지루하게 사는 것 같아도 여전한 방식으로 충성되게 사는 것이 찬양하는 태도이고 이것이 최고의 삶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36) 인상적인 것은 하루면 족하다.

37) 그거 아니면 먹고 마시고 음란하게 사는 것이 재미있을지 몰라도 황폐함이 반복되는 것이다

38) 날마다 반복되는 것이 최고의 복인 것이다

39) 기쁜 일만 반복되면 좋겠지만 기쁜 일만 있으면 기도하는 사람은 없게 되는 것이다

40) 여전한 방식으로 감당하는 것이 전도하고 배척 받는 것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41) 이렇게 기도 제목 올려놓고 기도하는 것이 성령의 제자인 것이다

42) 알파와 오메가 되신 하나님이 끝내지 않으면 끝낼 자가 없는 것이다

43) 일상이 축복인 것이다. 

44) 기쁨만 있는 사람이 누가 기도회에 올라가나? 

45) 힘든 것 때문에 하나님이 붙어있을 수 있는 것이 감사한 것을 알아야 해요

46) 참지 못하는 것이 이 땅의 특징이다.

47) 양육이 없는 전도는 미완성의 전도인 것이다

48) 양육을 통해 완성이 되는 것이며 하나님이 주체인 것이다 

49) 비비고 닳도록 수고하며 살아날 때 예수님이 친히 표적과 기사를 구원의 말씀을 증언한다는 것이다

50) 내가 그렇게 살아야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을 담대히 전할 수 있는 것이며 살아야 담대히 할 수 있는 것이다

51) 오늘 내 환경이 하나님이 허락하신 하나님의 세팅인 것이다.

52) 여전한 방식으로 말씀을 적용하는 것이 최고의 증언을 해주는 것이어서 양육이 필요한 것이다

53) 좋은 게 좋은 거라는 복음은 없는 것이다

54) 구원을 위해, 말씀을 위해 거짓 화평이 깨지는 복음을 전하면 참된 화평을 주시는 것이며 지체들과 함께해야 하는 것이다

55) 양육 받은 지체들과 함께 자아가 깨지니 말씀이 들어오는 것이므로 공동체에 붙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56) 그리하면 어떤 일이 와도 놀라지 않고 장차 받을 환란을 믿고 들으니 우리들 교회 성도들이 놀라지 않는 생각이 든다.

57) 조건반사적으로 복음을 전하는데 어디에 있든지 우리의 사명의 자리로 알고 우리의 직장이 전도지라는 것을 알고 사업장이 사명지, 가정이 전도지인 것을 알아 한다

58)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 선교의 전진기지이다

59) 정말 가정을 지키는 것이 애국애족의 첫 번째이다

60) 하나님의 복음을 들어야 올바로 설 수 있다

61) 바울은 노심초사하는 마음으로 제자를 양육하지만 더 박해가 심해지고 발길이 닿는 곳에서 전도하고 또 박해가 시작한다.

62) 그러나 우리 하나님께서는 이런 삶을 귀하게 생각한다

63) 결혼을 통해서 사명의 삶을 사는 거고 목장과 연결이 되는 것이다

64) 쾌락을 좇아 살면 순간적인 즐거움은 있지만 영벌이 있다. 

65) 복음을 붙잡고 가면서 살면 끝에는 영생이 있는 것이다 

66) 쾌락을 좇으니 영적 기쁨이 없는 것이다

67) 앉으나 서나 육적인 오병이어만 찾는다

68) 공동체에서 나의 불만을 지지하고 동조하는 사람을 조심해야 한다

69) 불순종의 영으로 이방인을 선동하는 것이다

70)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가려면 많은 환란을 겪어야 한다

71) 때마다 여전한 방식은 진리 중의 진리다

72) 고난 가운데 원칙대로 십자가를 길로 놓고 살아갈 때 열매를 맺는다

73) 예수 믿고 좌사함 받고 의로움을 받는 것인데 그렇지 못하면 놀라고 멸망하는 것이다

74) 영생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전도이다

75) 원수를 용서하기까지는 되어도 원수를 사랑하라는 안 되는 것을 보여 주어야 전도가 된다

76) 70번씩 7번이라도 용서해야 하는 것이다

77) 큐티하는 것이 개인 예배인데 반복하는 것이 최고의 교육이다 반복하는 일상에 하나님의 사랑이 흐른다

78) 큐티와 목장공동체가 노아의 방주인 것을 알아야 한다

79) 똑 같은 행위라도, 똑 같은 일상의 패턴이 지루해 보여도 그것이 가장 하나님을 찬양하는 태도인 것을 알아야 한다

80) 알파와 오메가 되신 하나님이 끝내지 않으시면 끝낼 자가 없는 것이다

81) 가치관에 발상의 전환이 일어나야 한다

82) 카이로스가 오기까지 주어진 자리 지키며 여전한 방식으로 말씀 듣는 것이 양육이다

83) 말씀을 재대로 배워야 신앙이 설 수가 있는 것이다

84) 양육이 없는 전도는 미완성의 전도다

85) 어떤 환경에서도 여전한 방식으로 비비고 닳도록 사는 것이 최고이 기사가 되어 증거하는 삶이 된다

86) 말씀을 길로 놓고 가면 주님이 참된 화평을 주신다

87) 시기-반박=비방을 넘어 돌로 치며 추방까지 당하는 사건은 사단의 세력이 위기감을 느꼈음을 보여준다

88) 여전한 방식의 말씀 묵상이 없으면 분별할 수가 없다

89) 부를 이름이 있는 것이 이 세상의 최고의 축복이다(엄마 대신 언니, 누나라 부르는 입양아들)

90) 하나님 복음을 들어야 가장 올바르게 설 수 있는 것이다

91) 인생이 괴로운 것은 앉으나 서나 행복 만 추구하니까 그렇다

92) 복음을 전하는 일은 슬프고 외로운 길이다

93) 우리는 날마다가 힘들고 날마다가 괴로우니 다른 사람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94) 성령의 제자는 쫓겨나도 기쁘고 성령이 충만한 것이다

 


Posted by 윤강로
말씀과 마음씀2020. 12. 10. 23:47

[우리들교회 2020 126일 주일예배 말씀 요약(사도행전13: 41~ 49/ 성령의 반응)]



 

<사도행전 13:41~49>


41: 일렀으되 보라 멸시하는 사람들아 너희는 놀라고 멸망하라 내가 너희 때를 당하여 한 일을 행할 것이니 사람이 너희에게 일러줄지라도 도무지 믿지 못할 일이라 하였느니라 하니라(" 'Look, you scoffers, wonder and perish, for I am going to do something in your days that you would never believe, even if someone told you.')


42: 그들이 나갈새 사람들이 청하되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하라 하더라(As Paul and Barnabas were leaving the synagogue, the people invited them to speak further about these things on the next Sabbath.)


43: 회당의 모임이 끝난 후에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많이 바울과 바나바를 따르니 두 사도가 더불어 말하고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 권하니라(When the congregation was dismissed, many of the Jews and devout converts to Judaism followed Paul and Barnabas, who talked with them and urged them to continue in the grace of God.)


44: 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시민이 거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니 (On the next Sabbath almost the whole city gathered to hear the word of the Lord.)


45: 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이 말한 것을 반박하고 비방하거늘 (When the Jews saw the crowds, they were filled with jealousy and talked abusively against what Paul was saying.)


46: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Then Paul and Barnabas answered them boldly: "We had to speak the word of God to you first. Since you reject it and do not consider yourselves worthy of eternal life, we now turn to the Gentiles.)

 

47: 주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For this is what the Lord has commanded us: " 'I have made you a light for the Gentiles, that you may bring salvation to the ends of the earth.'")


48: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When the Gentiles heard this, they were glad and honored the word of the Lord; and all who were appointed for eternal life believed.)


49절 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지니라 (The word of the Lord spread through the whole region.)

 

<Prologue>


주님 성령의 살리심을 받고 일으키신다고 했는데 거기에 반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말씀 듣겠습니다아멘.


이 세대의 특징은 예수님이 누가복음 7장이나 마태복음 11장 등에서 말씀하셨듯이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곡하여도 너희가 울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에는 정말 반응이 없습니다그런데 성도는 보이는 나라에 살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줘야 하는 사명이 있습니다사명을 감당하는 나의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조금씩 반응을 하게 됩니다반응도 긍정- 부정-무반응 등 여러 부류가 있겠는데 성도는 어떤 경우에도 성령의 반응을 해야 합니다.

 

<말씀 요약>


41절에 설교를 다하고 나서 너희는 놀라고 멸망하라고 그랬습니다. 41절 한 절을 이야기 하려고 17절부터 4절까지 설교를 했습니다바울이 간증을 통해서 썩음을 당치 아니하시는 부활의 주님을 힘입어서 죄 사함과 의로움을 얻게 된다는 내용이었죠. 그런데 이 말씀이 안 들리면 조상들이 바벨론에게 멸망 당한 것처럼 우리도 똑같이 멸망할 것이라고 애통함으로 하박국 1 5절의 말씀으로 경고했습니다그러면 이 말씀을 듣고 어떻게 반응하는 것이 성령의 반응일까요?

 

1.   말씀을 듣고자 호의적으로 반응해야 합니다.


청중들은 구약성경의 일부 내용을 전승과 혼합하여서 인본적으로 해석하는 그 유대교 랍비들의 이 형식주의적인 강론을 듣다가 구속사적인 핵심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선포하는 바울의 설명에 큰 감동을 받았어요 하나님이 택한 사람은 말씀에 반응하게 되었습니다 듣고 모이고 싶습니다그래서 여기는 미완료 과거 형으로 밖으로 나가는 바울과 바나바를 따라가면서 말씀 전해주기를 부탁하고 있습니다원어는 그런 뜻입니다사람들은 오만 속의 죄에 살면서 상한 마음의 사람이 많았을 거예요천하 각국에서 온 사람이 흩어지면서 고향으로 돌아가 유대교에 입교한 사람이 늘어났어요 박해의 시대를 거치면서 곳곳에 예루살렘에 들을 귀가 많이 늘어났습니다


여기 유대인으로 기독교의 호감을 가진 사람과 개종을 한 사람들 개종하려고 온 즉 새 가족 새사람들이 모였습니다. 타지에서 온 사람이 무슨 말을 하나 평범한 예배처럼 지켜 봐야겠죠부정 과거 동사로 쓰여서 다 따랐다는 거예요우리가 한번 만들어보면 알 수 있을 때가 많아요 더불어 말하고는 그들과 여러 가지로 묻고 답하면서 다도들은 결론을 직역해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머물러있으라고 권했어요 원어로 거듭 권했어요신약에 7번 나오는 머물다는 바나바가 안디옥교회 심방 가서 머물러있으라고 할 때 바울이 고린도에서 마지막 핍박을 받는 상황에서 쓰인 머물다는 원어가 프로스메네오라는 단어인데 쉽지 않은 상황에 의지를 가지고 버티고 자기 자리를 고수하라는 지금 이렇게 권고한 거예요 우리들은 매주 새로운 교인들이 옵니다매주 온 오프라인으로 옵니다늘 이렇게 베풀고 있습니다놀랍지 않습니까제가 잘 된다고 복을 빌어 줍니까 불의한 세상에서 잘되면 어찌 죄를 보고 하나님 나라를 사모합니까 복음의 결론은 죄 사함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복음 안에서 살아야 하기 때문에 적용이 필요합니다잘 버티고 인내하라는 것이 은혜 가운데 있으라는 것입니다거듭 권했다는 것이 한동안 이어진 양육을 의미한 것인데 이렇게 권했다는 생각이 듭니다서로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썩어질 이 세상에서 썩지 않음을 당하는 예수님을 미리 보는 것은 내 죄 사함 받고 나의 모든 것 다 변했네가 되는 거예요 제자들이 예수님 곁에서 양육을 받았어도 마지막을 부인하고 떠난 것은 성령이 임하지 않아서 사도행전 할 때 성령 받으셔야 해요사도행전에 들어와서 십자가 붙잡고 다 실패하지 않고 그 길을 갔어요 우리에게 감정적인 성령 말고 진리의 성령이 임하느니 성도 여러분이 유명하지 않아도 성숙하게 반응하신다고 생각됩니다.


1주일의 시간이 있었던 것을 보아 말씀을 나누었는데 그냥 한 주 동안 얼마나 은혜 받고 놀라서 소문을 냈는지 그냥 온 심이다 왔다는 거예요비시디아 안디옥에 있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유대인의 회당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누가도 바울 사도도 온 시민이 거의 다 왔다는 표현이 쓸데 있다는 것을 보고 웃음이 나왔습니다우리 그러잖아요 그랬더니 다 뒤집어진다이런 이야기를 잘 들서요 목사님들이 그런데 이거를 바울과 누가도 썻더라고요 어떻게 다 왔을 가요실력 있는 연사나 철학자의 강의를 듣는 것은 공영과 더불이 매우 인기였기 때문에 불가능한 일도 아니라고 합니다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인기를 끌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근처의 광장에서 모였을 수 있죠. 이렇게 일주일이라는 시간에 그냥 온도 시가 올 수 있네요 사모하면서 저절로 와보라고 할 수 있네요설교의 결론으로 예수님의 힘을 입어 죄 사함 받았다고 했기 때문에 한 사람이 대단한 역학을 하잖아요 부활을 경험하면 이 세상에 좋은 도덕적인 윤리적인 이야기보다 영적인 하나님의 나라의 언어가 고파 집니다하나님의 언어를 듣고자 하는 것이죠주의 말씀이 5번이 나옵니다고넬료나 서기오 바울도 같은 태도의 기다림으로 듣고자 한 거예요이렇게 진정한 말씀을 사모하고 모인 곳이 진정한 공동체입니다로마의 속주로서 상한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씨만 뿌리면 복음이 복음이 되는 거예요. 제가 큐티 사역을 하게 뒤 넋도 겉으로는 화려해도 저도 로마의 식민지에 사는 신세나 다를 게 없잖아요상한 신령을 가지게 되었는데 저 같은 사람이 많았는지 여기까지 왔습니다한번 전 하면 저는 떠나도 말씀을 붙잡는 거예요 큐티 책도 우리들 교회에서 쓸려고 만들었는데 입소문이 나서 판매까지 하게 되었습니다왜냐하면 그렇게 책이 많아지지만 그렇게 제대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예요지나고 보면 모두 놀라운 반응이죠 저의 관점으로 보면 오 시민이 반응해 주시는 것 같았어요날마다 기록을 경신함으로 여기까지 왔는데 우리들 교회가 많다고 적다고 할 수 있는데 온 시민이 다 모인 것 같은 두려움이 있어요우리 집에도 모두 아파트 사람들은 다 모인 것 같고 우리 집이 터져 나가니까 그래서 이런 표현을 썼을 것 같습니다말씀을 듣고자 하는 것이 성령의 반응입니다.


(적용#1)

-여러분은 말씀이 얼마나 듣고 싶고 듣고자 합니까 말씀에 의거한 감정적인 은혜를 사모합니까? 십자가를 길로 놓는 은혜를 사모합니까?

-말씀을 사모한다고 하면서 감정적인 은혜 날마다 그런 은혜만 사모하는가 정말 십자가를 길로 놓는 은혜를 사모합니까?


2.   시기와 비방에도 담대히 전하는 것 입니다.


바울이 말한 것은 현재 수동태 분사로 지난번 안식일에 전한 것이 아니라 이번 안식일에 전한 바울의 설교를 가리킵니다구속사의 말씀은 설교하기는 어려운데 전하고 나면 똑같은 결론이에요결론이 안 나와요 오늘 아침까지도 결혼의 목적은 행복이 아니라 거룩이다 이걸 찾아내기가 어려운 거예요 결국은 찾아내는 거예요 이것이 다른 사람을 살리는 말씀이 되는 거예요이 땅에서 거룩하게 불의한 세상에서 거룩하게 산다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 불가능한 거예요 불의한 세상인데 무너지지 않고 잘 간다는 게 불의 한 거예요 깨어지고 무너진 만큼 영이 세워지고 이게 구속사인 거예요. 스데반의 메시지도 똑같고 사도바울의 메시지도 똑같아요똑같은 설교의 스데반 설교 때는 돌로 쳐 죽였는데 바울의 메시지는 열광하는 인파가 생긴 거예요 이것도 이상한 거죠 스데반인가 바울인가 해봤어요그러니까 이제 이 모임을 별생각 없이 주관하면서 우호적이었던 그들이 인파가 오니까 놀랐어요 비시디아 안디옥 회당에서 이런 일이 없으니까 어떤 반응이 올라오면 시기가 올라오는 거예요 사람이 문제인 거예요 이리로 저리로 몰려서 여기를 망하게 했다 흥하게 했다상관없는 사람 시기하지 않아요예쁜 여자 보고 남자들이 시기하지 않아요목사도 부목사도 담임목사를 시기하지 않아요 같은 부류해서 시기를 하죠 유대인들은 바울과 바나 바처럼 평소에 회당처럼 설교하는 자리에 있던 것입니다경건한 모습으로 설교하면서 왔는데 시기라는 감정에 직면하게 된 거예요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 없어요 그 자리에 가봐야 해요철 밥통 같은 기득권이 있는데 자리를 위협하는 자가 나타나는 거예요 겉으로 무시하면서 관심이 폭발했어요 들어 보아도 이해가 안 되는 구속사의 논리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반박하면서 비판하는 거예요믿음은 이해가 돼서 믿는 거에 나리 이해가 믿어야 이해가 되는 거예요믿어야 이해가 되는 거예요


그걸 육으로 무너뜨림으로 믿게 하는 하나님의 섭리입니다새 신자도 택지로 은혜를 받는데 율법과 교리로 반박을 한 거죠자기들의 안식일 십일조 성경 낭독 등을 내세우면서 말이죠. 바울을 보면서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던 사울 아니냐 주제를 알라고 하는 거죠. 이런 비방이 나오는 거죠예배 중독자인 사울이 다윗에 시기를 알아요사울과 카인이 얼마나 예배중독자인지 압니다. 열심히 제사 드렸잖아요경건의 지수만큼 시기가 높았다는 겁니다 대단한 사람이 거룩한 모습을 하고 있어도 사촌이 논을 사도 배가 아프지 않은 정신적인 귀족이 있데요그런 사람조차도 예수의 죄 사함이 없이 하나님 나라의 로열패밀리에 들어갈 수 없다는 거예요유대인 지도자들이 신성모독이라고 기록한 거예요아마도 예수그리스도의 부정과 조롱이 들어갔기 때문이었을 겁니다우리가 조금만 잘못해도 어떻게 네가 믿는 예수가 그렇게 가르쳤냐 라고 조롱합니다믿었지만 우리 행위가 거룩해지는 거 아니에요 예수 믿기 전에 행했던 것으로 정죄하는 거예요 할 게 있고 못할 게 있잖아요날마다 은혜 안에 머물러있지 않으면 정죄할 수밖에 없어요.

 

이들의 이런 도발로 주의 말씀의 자리가 말싸움의 자리가 된 거예요철학자 들이고 서로 논쟁하는 것도 인기 있는 공연이었는데 유대 지도자들의 시기심으로 인해 이방인을 초청한 자리에서 싸움의 자리를 만든 거예요. 지금 우리나라도 이렇게 양쪽에서 싸움으로 점입가경 이에요 모독과 비방을 하는 거예요바울이 외모가 뭐라고 그러고 하잖아요 가족사 개인적인 이야기를 다 들추었겠죠.


(적용#2)

-내가 시기하는 사람은 누구고 나를 시기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훈련을 거치면 겸손한 담대함이 나옵니다. 예수님도 승천하면서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라고 하시잖아요 복음은 유대인에게 전해져야 해요그런데 마땅히 먼저 믿은 저희에게 전해야 하지만 거부하니 이방인에게 전한다고 합니다우리는 영생에 합당치 않은 자라는 말을 하지 않더라도 영생의 복음을 전하는 자를 반대하는 자는 내가 합당하지 않는 자라고 드러내는 거입니다영생의 복음을 전하는 자를 그냥 이렇게 디스 하자고 리젝트하고 이러는 거죠사도인 우리가 떠나겠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에 이미 메시아가 이방의 빛으로 세워지고 생명으로 이끌 것이라는 사실을 예언하셨어요 다메섹에서 바울에게 주셨던 사명입니다지상에 있는 제자들에게 땅 끝까지 복음이 전해지기 원하셨어요그런데 유대인들은 아니 그 구절이 왜 너희의 말씀이냐고 반박했어요이 약속은 예수그리스도의 성취된 그분의 말씀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나로 적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사도바울이 깨달았겠죠 그렇게 시기하고 반박한 유대인과 다르게 같은 자리에서 이방인들은 말씀을 듣는 현상이 일어나는 거예요이래서 유대인에게 가라고 하셨구나 이런 특권이 있는데 못 깨달을까 이방인들은 모이고 반응하는데 충만한데 그러니 복음은 장차 받을 환란이구나라고 깨달은 거예요그러나 유대인들에게 깨달아서 가지만 바울도 유대인이잖아요로마서는 3차전도 여행 이후 바울 사도가 전도여행을 시작한 지 20년 후에 쓰잖아요 바울은 전도여행을 다이면서 유대인 회당 가서 전했는데 수많은 이방인이 예수님을 믿었지만 유대인은 믿지 않았어요 얼마나 자괴감이 들겠습니까 우리가 원해야 할 것이 구원입니다실제로 떠나도 상관없는 것이 아니라 한때 예수님을 대적하고 스데반을 죽인 자기도 구원해 줬는데 내 식구도 구원해 주지 않겠냐 라는 의미가 있는 겁니다그리스도를 배척하고 있는 동안 유럽이 기독교 국가가 되었어요서구 유럽이 변질되면서 미국이 기독교 국가가 되었습니다세계 역사를 통해서 복을 보게 됩니다결국 한국 땅까지 복음이 오게 되었습니다요즘 미국이 하나님의 복음이 저리 가고 있습니다복음이 들어가서 잘 살게 되면 딴 생각을 하게 됩니다동성애를 찬성하게 됩니다이방인의 사도로 바울이 사랑할수록 동족에 대한 사랑도 커졌어요 나를 핍박한다고 나를 받아주는 이방인에게만 간 것이 아니라 이방인의 구원이 이루어질수록 골육에 대한 구원이 간절히 생겼어요수능도 치렀지만 괜찮아 지금은 공부하고 나중에 교회가 이게 사랑이 아닙니다우리가 이방인에게 간 건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지탄받는 죄인에게 가야 하는 거예요바람 피운 자 감옥 간 자를 전도하러 가야 하는데 바울이 그걸 했다는 거예요 유대인 자기들끼리만 놀고 교회에서 부도나고 자살하고 그러면 교회를 떠나는 거예요


그게 말이 안 되는 거죠 교회에서 전도를 안하 너네 식구가 복음을 안 받아들이는 수고를 하게 되어 하나님을 찾게 되는 거예요저절로 이방에게로 나가게 되는 거죠우리들교회가 땅끝 선교인 가정을 통해서 수없이 전도를 하는 거예요우리들교회는 죄를 지어도 떠나지 않아요 이게 이제 죄를 지어서 떠나는 게 아니라 말씀이 안 들려서 떠나는 거예요죄 많은 곳에서는 은혜가 많아요이 일을 시작했기 때문에 우리 모두 이 길을 갔으면 좋겠습니다. 구원하게 하시겠다는 거예요아프리카만 이방인이 아니라 우리 집에도 이방인이 많아요알베르 카뮈가 이런 말을 했어요 엄마의 죽음 앞에서 무덤덤하게 있다가 밀크 커피를 마시고 해수욕 하고 여자와 사랑을 나누고 육적으로 나누고 이런 자라면 계획적인 살인 저지를 수 있다는 거예요사회에서 자기 엄마의 장례식에서 눈물을 안 흘려 면 사형 받을 위험성이 있다고 했습니다이 세상에서 이렇게 표현하면 노벨문학상을 받아요이런 이방인이 집집마다 있어요당장 자녀가 무서워 집에 못 들어가는 부모도 있다는 거예요 신음하고 있는 사람들을 건져내는 거예요.


(적용#3) 

-교회를 다녀도 구원받지 못한 가족을 보며 애통합니까? 무덤덤합니까

-주일 예배 대신 학원가는 자녀 때문에 안심합니까교회 일에 열심히 하는 남편(아내) 때문에 답답합니까?


3.   말씀이 두루 퍼지게 되는 것이 결론입니다.

 

주의 말씀을 전하는 자리가 남들이 보기에 지금 이제 자기 믿는 것들끼리 싸운다 이렇게 될 수 있는 일이었죠 떠나겠다고 한 그때에 그때 모든 싸움과 모든 것을 보고 있는 이방인들이 기뻐하면서 찬송했다는 거예요이방인들에게 다 전하지 못했는데 그렇게 높인 거예요유대인들은 주어진 말씀도 싫다고 밀어냈는데 미쳐 다 듣지도 못했는데 영광을 돌렸다는 거예요 누가는 믿음이 인간의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주권적으로 결정을 이루신 일이라는 거예요어떻게 설명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전도를 해야 해요. 70 평생 해도 안 믿는 사람이 있어요.


그러니까 이제 남들이 보기에 싸우는 것처럼 보이니 구원을 위해 양보를 했잖아요 듣고 보고 있던 사람이 반응한 거죠사건이 생겼을 때 말씀으로 적용하면 그것 때문에 나는 그냥 말씀으로 적용했는데 역사가 일어나는 거예요목원이 적용하던 그 목장이 부흥이 되는 거예요놀라서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한 자는 착해서 작정하는 것 아니에요인간의 공로는 들어올 틈이었어요하나님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을 하시는 겁니다작정되는 자는 다 믿기 때문에 싸우지 않고 떠나는 것이 성령의 반응입니다말씀이 두루 퍼져야 하기 때문입니다작정된 자가 있더라고요 교회 개척할 때 군대에서 전도한 전 실장이 있는데 전도했어요그런데 지금까지 한번도 의심하고 전도 안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그런데 룹기 설교에 나오는 집사님 언니 집에 장가를 갔어요 그 집에 여자가 많아요세 자매가 그래서 명절날 가면 자기 혼자 남자래요 생색 안내고 전 실장 전도 안 했으면 큰일 났을 뻔했다사위에게 공을 돌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고백하면서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어요 놀라서 여기까지 왔어요지역 전체에 퍼지는 놀라는 결과가 일어났잖아요 두루 퍼지니라는 미완료형입니다모두 죄를 고백하니 집집마다 말씀이 퍼져 여기까지 왔습니다말씀으로 살아난 간증을 올리니 결국 말씀이 전 세계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처한 사람 내 옆에 왔던 사람들 계속 반응을 하니까 나도 이방인 같은 존재였지만 영생을 주시기를 작정한 사람이라는 것이 깨달아지고 다른 사람에게 진심이 전해지니 내가 병 낫는 것보다 주의 말씀의 흥왕하게 되는 것이 최고의 반응입니다.


(적용#4)

-여러분은 병 낫는 것과 말씀이 흥왕하는 것 중에 어느 것에 격하게 반응합니까?

 

<Epilogue>


1)  말씀을 듣고 자 호의적으로 반응해야 한다

2)  어떤 시기와 반박과 비방에도 담대히 전할 수 있는 겸손한 담대함이 있어야 한다

3)  결국은 이 성령의 반응은 내가 감정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두루 퍼지게 되는 것이다

4)  사람 살리는 노래가 되어야 한다

5)  우리가 정말로 상한 영혼을 일으키는 복음 전파가 되었으면 좋겠다

6)  하나님이 택한 사람은 말씀에 반응하게 되어 있다.

7)  택자는 자꾸 말씀을 듣고 싶고 모이고 싶고 이 말씀을 듣는 구조 속에 있고 싶은 것이다.

8)  이 땅은 불의한 세상인데 이 세상에서 잘되면 어찌 죄를 보고 의로운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겠나?

9)  복음의 결론은 죄사함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다.

10) 그러니 이 세상에서 잘 되기보다 도리어 무너져야 영이 세워지는데 이때 복음 안에서 살아야 되니까 우리의 결단과 적용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11) 이때 힘들지만 잘 버티고 인내하라는 것이 은혜 가운데 머무는 것이다.

12) 서로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어야 서로의 관계도 유지된다.

13) 이 불의한 이 세상에서 은혜라는 것은 감상적인 것이 아니고 때마다 십자가를 길로 놓는 게 은혜이다.

14) 썩어질 이 세상에서 썩지 않음을 당하는 부활의 예수님을 미리 보는 것은 내 죄 사함 받고서 예수를 안 뒤 나의 모든 것 다 변했네가 되는 것이다.

15) 죄수들이 예수님 곁에서 양육 받았지만 또 마지막에 예수님을 부인하고 떠나기도 했다.

16) 진리의 성령이 임하니까 삶의 어떤 사건이 와도 성숙하게 반응하게 하시다

17) 진정한 말씀을 사모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진정한 공동체가 되는 것이다.

18) 로마의 속주에 살면서 겉은 화려해도 상한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여기다 씨만 뿌리면 복음이 되는 것이며 이런 밭이 옥토인 것이다.

19) 상한 심령이 많아야 반응이 오는 것이다

20) 말씀을 듣고자 하는 마음이 드는 것이 성령이 임하신 것이다

21) 말씀에 의거해서 적용하는 것이 십자가를 길로 놓는 것이다.

22) 이 세상의 특징은 불의한 것이니 이 세상에서 거룩하게 산다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것이다.

23) 불의한 세상에서 의롭게 사는 것이 이제 성도의 목표이다.

24) 불의한 세상에서 무너지지 도 넘어지지 도 않고 계속 잘 간다면 그것 자체가 불의한 것이다.

25) 깨어지고 무너지는 만큼만 영의 세계가 세워지는 것이고 이것이 구속사이고 결국은 날마다 똑같은 메시지이다.

26) 이 똑같은 설교를 한 스데반은 다들 돌로 쳐 죽였다.

27) 그런데 이 똑같은 바울의 메시지에는 인파가 물렸다.

28) 이 모임을 별 생각없이 주관했던 바울에 대해서 우호적이었던 그들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인파가 몰리니까 자기들도 직면하지 못했던 감정에 직면했는데 마로 시기가 막 올라온 것이다.

29) 시기는 자기하고 동등하거나 비견 된다고 여겨지는 사람에 대해서 느껴지며 일어나는 것이다.

30) 유대인들 중에서 바울과 바나바 같이 말씀을 전하는 랍비들인 이런 사람들에게 시기가 일어난 것이다.

31) 상관없는 사람한테는 시기하지 않는다.

32) 그래서 유대인 지도자들이 시기가 올라왔습니다.

33) 편안하게 경건을 부르짖으며 설교하며 누리며 왔는데 이 생각 못한 이 감정에 다 직면했다.

34) 우리도 그 자리에 가보아야 안다.

35) 철 밥통 같은 기득권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자리를 위협하는 자가 나타난 것이다.

36) 겉으로는 무시하면서 속으로는 그들에 대한 관심이 폭발하는 것이다.

37) 그런데 문제는 들어보아도 지도자들은 바울의 복음이 이해가 안 되는 것이다.

38) 믿음은 이해가 되어서 믿는 게 아니라 믿어야 이해가 되는 것이다.

39) 이 사람들이 이런 도발로 시기 반박 비방이 계속 들어오니까 주의 말씀을 듣는 자리가 갑자기 말싸움 자리가 된 것이다.

40) 영적인 얘기를 하니까 육적 얘기로 비판을 한다.

41) 교양이 있으면 시기를 넘어 설수 가 없는 것이다

42) 예수 그리스도의 죄사함 없이는 하나님나라 로얄패밀리에 들어 갓 우 없는 것이다

43) 이생의 삶을 살면서 영생의 삶을 논하니 영생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을 훼방 놓는 것으로 이는 영생의 삶에 합당하지 않음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44) 성경은 나로 적용해야 하는 것이다

45) 시기-반박-비방이라는 이름의 3총사

46) 복음은 장차 받을 환란이다

47) 잘 살아지면서 잘난 척이 나온다

48) 유럽을 거쳐 미국을 거쳐 한국으로 복음이 확장되어 왔는데 잘 살게 되니까 잘난 척을 하고 있다

49) 이 세상에서 제일 재미 있는 것이 싸움 구경하는 것이다

50) 그렇게 시기와 비방하며 반박하는 유대인들과는 다르게 이방인들은 그 같은 자리에서 너무 잘 듣는 이상한 일이 동시에 일어난 것이다.

51) 이 복음을 거절하는 유대인들 때문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을 중심으로 구속사가 펼쳐진다.

52)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로 이방인을 사랑할수록 동족에 대한 사랑도 커졌다.

53) 이 바울의 간절함에도 아무도 안 돌아오고 지금까지 안 돌아오고 있다.

54) 그러니까 이게 이 바울의 사랑이 진짜이다.

55) 우리 각자가 이방의 빛으로 삼아서 땅끝까지 구원하게 하시겠는데 아프리카만 이방인이 아니고 우리 집안에 이방인이 가장 무서운 이방인인 것이다.

56) 이 세상의 가치관이고 이런 이방인이 집집마다 사회마다 있는 것이다.

57) 형제와 연합하여 흥왕하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고!’ 가 아닌 것이다

58) 이 세상 누구나 다 죄인인데 고백한 사람과 고백하지 않는 부류만 있는 것이다

59) 땅끝 선교지는 가정이다

60) 복음에 반응해야 가는 것이다

61) 천국에 입성했으니까 장례식에서 웃을 수 있어야 한다

62) 바울이 말씀에 의거 해서 나는 이방을 향하여 돌아서겠다고 선언한 것은 사실 승부수를 던진 것이다.

63) 그런데 바로 그때 기대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나는데 싸움에서 심판을 보고 있던 성도들이 듣는 중에 기뻐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했다는 것이다.

64) 이방인들에게는 미처 다 전하지도 못한 주의 말씀인데 그 말씀이 옳다. 그 말씀이 진리다. 그 말씀이 능력이 있다고 한다.

65) 그런데 유대인들은 주어진 말씀도 싫다고 거절했는데 완전히 믿음이라는 것이 인간의 노력이나 필요, 성품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 정해진 일로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결정을 해서 이루신 일이라는 것이다.

66) 영생을 주기로 합당한 자는 다 영생을 받는 것이다.

67) 그래서 사건이 생겼을 때 말씀으로 적용하면 그것 때문에 다 믿게 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68) 영생에 대해서는 인간의 공로는 조금도 들어올 틈이 없다.

69) 그래서 이상한 부모 밑에서 자녀가 구원되고 착한 부모 밑에 자녀가 안 믿을 수 있는 것이다.

70) 하나님은 늘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이 보이셔야 하는 것이다.

71) 작정된 자는 다 믿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훼방 받지 않기 위해서는 그래서 내가 떠날 때가 있고 있어야 될 때가 있고 말해야 될 때가 있고 안해야 될 때가 있는데 이것이 성령의 반응이다.

72) 믿음이 1이라도 있는 사람이 양보하고 손해보는 것이 영생 가는 적용으로 성령의 반응이다

73) 유대인처럼 칠십 평생 전도해도 안 믿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가다가 툭 던졌는데도 믿는 것이다.

74) 이방인들에게 툭 한마디 했는데 믿는 것처럼 정말 작정된 자가 있다.

75) 나도 이방인과 같은 존재였지만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함을 받은 사람인 것이 깨달아 지고 이런 진심이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지니까 성령의 반응은 내가 병 낫는 것 보다 주의 말씀이 흥왕하여지게 되는 것이 최고의 반응인 것이다.

76) 나 때문에 주님의 말씀이 전해져야 되는 것이다.

77) 내가 학교 가고 병 낫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이 주님 안 믿는다. 일시적이기 때문이다

78) 나 때문에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말씀이 계속 전해져 흥왕하게 되는 것이 최고의 결론이다.

79) 내가 말씀대로 했더니 그게 그대로 되었다가 되어야 한다.

80) 내 삶을 죄로 보고 회개 적용을 통해 말씀이 두루 퍼지는 역사가 되는 것이 결론이다

81) 육으로 갖춰져 있을수록 70년이 되었어도 안 되는 것이다

82) 이 땅은 불의 한 세상이기에 육이 먼저 무너져야 하는 것이다

 

 

 

 


Posted by 윤강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