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교회 2020년 12월13일 주일예배
말씀 요약(사도행전 13: 50~ 14: 7/성령의 제자)]
<사도행전 13: 50 ~ 14: 7>
50절 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시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게 하여 그 지역에서 쫓아내니 (But
the Jews incited the God-fearing women of high standing and the leading men of
the city. They stirred up persecution against Paul and Barnabas, and expelled
them from their region.)
51절 두 사람이
그들을 향하여 발의 티끌을 떨어 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가거늘(So they
shook the dust
from their feet in protest against them and went to Iconium.)
52절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And the disciples were filled with joy and with the Holy
Spirit)
1절 이에 이고니온에서 두 사도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말하니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 (At
Iconium Paul and Barnabas went as usual into the Jewish synagogue. There they
spoke so effectively that a great number of Jews and Gentiles believed)
2절 그러나 순종하지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거늘(But
the Jews who refused to believe stirred up the Gentiles and poisoned their
minds against the brothers)
3절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시니(So
Paul and Barnabas spent considerable time there, speaking boldly for the Lord,
who confirmed the message of his grace by enabling them to
do miraculous signs and wonders)
4절 그 시내의 무리가 나뉘어 유대인을 따르는
자도 있고 두 사도를 따르는 자도 있는지라(The people of the city
were divided; some sided with the Jews, others with the apostles)
5절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리들이 두 사도를
모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There was a plot afoot
among the Gentiles and Jews, together with their leaders, to mistreat them and
stone them)
6절 그들이 알고 도망하여 루가오니아의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와 그 근방으로 가서(But they found out
about it and fled to the Lycaonian cities of Lystra and Derbe and to the
surrounding country,)
7절 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where they continued to preach the
good news)
<Prologue>
오래 있었다고 오픈을 잘하고 처음 왔다고 오픈을 못하고는 아닙니다. 우리는
다 이렇게 택자가 되어서 말씀대로 갔으면 좋겠습니다. 성령의 반응을 통해 제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제자가 어떻게 되는지 말씀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성령의 제자는 훈련을 해서 제자가 아니라 성경을 읽어가다 보니까 말씀을 좇아가서 저절로 제자가 되는 겁니다. 성령의 살리심과 일으키심에 반응을 하니까 긍정-부정-무반응의 옳고 그름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시각으로 반응하게 되니 저절로 주님의 제자가 되어 성령의
제자가 되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 ‘카일 아이들몬’은
제자로 부르실 때 가장 행복한 부르심은 ‘나를 따르라’이고
가장 고통스러운 부르심은 ‘자기를 부인하라’이고 가장 충격적인
부르심은 ‘와서 죽으라’고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성령의 제자는 이이런 과정을 겪어가면서 되어 가는 것입니다.
오늘은 성령의 제자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말씀 요약>
1. 쫓겨나도 기쁨과 성령이 충만합니다.
50절 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시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게 하여 그 지역에서 쫓아내니
유대인들이 지난번에 시기-반박-비방해도
말씀을 전하니 퍼졌잖아요. 그러면 사단도 총궐기를 합니다. 유대인들도
지체가 있네요 누구죠? 경건한 귀부인 유럽 자치체가 있네요 유력자들은 유대인들과 관계를 끊을 수 없는
정치인들과 비슷한 사람이었습니다. 회당에 나오는 귀부인들은 기독교가 아닌 유대교로 개종한 여인들이었는데
예의와 교양이 있는 사람인데 선동에 넘어갔어요 유대인들의 계산으로 가장 적은 수고로 큰 효과를 볼 것 같은 작전을 했습니다.
보이는 외모가 중요한 사람이기 때문에 돈으로 선동된 사람들은 공권력을 선동해 볼품없어 보이는 바울과 바나바를 쫓아냈습니다. 허튼소리에
귀가 솔깃한 사람을 사단이 좋아합니다. 순수함도, 착한 것도 아닙니다. 귀부인들이 두 사도를 쫓아냈어요. 경건한 귀부인은 어떤
것인가요? 경건의 모양은 있으냐 능력은 부인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경건의 능력이 없으면 어려울 때 이길 수가 없어요. 껍데기만 가지고는 능력이 안 나타나요. 그들은 회당에
나오면서 바울의 구속사가 들리지 않고 그런데 복은 받아야 하잖아요? 그들의 사회적인 위치는 회당에 오면
주인처럼 해 주잖아요. 그래서 넘치도록 복을 빌어주는데 바울은 놀라고 망하라고 하니까 이를 갈지 않았을까
싶어요. 공동체에서
나의 불만을 선동하는 사람을 조심해야 합니다.
51절 두 사람이 그들을 향하여 발의 티끌을
떨어 버리고 이고니온(Iconium)으로 가거늘
안디옥교회 바울 그 사람들이 보기에는 살인자인데 이 사람들은 다 유력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쫓아내니까 두 사람이 그들을 향하여 발에 티끌을 떨어버리고(shook
the dust from their feet
against them)가거늘 이
행위는 누가복음 9장 10장에 복음을 영접하지
않을 때 티끌을 떨어버리는 것을 적용하는 행위입니다. 이 행동은 그 지방은 관계가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인데 믿는 자들이 제자들이 생긴 도시에 심판을 내려달라고 하지 않았겠죠. 그들이 아무리 유력자라도
티끌에 불과하다는 상징이 있습니다. 그들은 낙심 하지도 않고 두려워하지 않고 쫓겨나서 남동쪽으로 145km떨어진 이고니온으로 향했습니다.
그곳은 글라디우스(Claudius) 황제로부터 영예로운 칭호를 받기도
했던 교통의 중심지로서 중요성에서 비시디아 안디옥(Pisidian Antioch)을 능가했어요. 거부하면 얼마든지 딴 데로 갈 수 있어요 그만 거부하세요. 여기서 성에서 나가서 발에 티끌을 떨어버리라는
것을 가족을 떠나야 할 때도 있고 지역을 떠나야 할 때도 있습니다. 나에게 주신 말씀을 듣는다면
안 믿는 가족에게 떠난 적용을 할 수 있습니다. 안락함에서 떠나라는 것입니다. 당신이 하나님 믿지 않으면 아무리 사랑해도 기쁘지 않다고
선포하는 거예요 말로만 해서는 안 됩니다. 집착을 떨어버리는 모습을 보여줘야 합니다. 지혜롭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적용#1)
-떨어버려야
할 세상 가치관의 안락함과 친절함은 무엇입니까?
52절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바울의 전도를 듣고 믿게 된 이방인들이 성도가 되었다는 사실이
제자들이라는 단어로 표시했습니다. 이익에 사로잡혀 시기에 찬 유대인들과 달리 예수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이방인들은 기쁨과 성령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말씀을 받고 회개한 새사람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그들을 어떻게 괴롭혔을지 상상이 안 갑니다. 지난번에 은혜 가운데 머물러있으라고 했잖아요. 돌아가면서 이 믿음에 거하라고 시련을 겪어야 한다고 돌아가는 길에 도전했는데 구속사를 이해했기 때문에 핍박과 박해 속에서 일어나 제자의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말씀을 듣고 기뻐하고 성령의 충만함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시기와 반박 비방을 당하고 선동해도 주님의 일이면 박해가 와도 기쁨이 충만하고 나의 일이면 낙심이 밀려오는 것입니다. 새로운 세계에 눈이 떠집니다. 이건 복음의 실패담이 아니라 성공담이라는 것이죠
(적용#2)
-여러분은
어디에서 기쁨과 성령이 충만합니까? 아이가 수능을 잘 봤을 때입니까? 주식이 올랐을 때입니까? 연봉이 올랐을 때입니까? 말씀을 들을 때입니까?
2. 여전한 방식으로 전도하고 배척을 당합니다.
1절 이에 이고니온에서 두 사도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말하니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
박해에도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 이고니온에서 계속된다는 거예요. 두
사도가 함께 들어갔다고 하는데 함께는 여전한 방식이라는 뜻이기 때문에 완악한 감정을 앞세웠으면 어떻게 그렇겠어요.
구원에 충성했기 때문에 평소 하던 대로 했어요 그랬더니 그냥 유대인과 헬라인의 무리가 믿게 되는 역사가 일어났어요 만일 유대인들이
박해를 하니까 나는 유대인을 버리고 당당하게 광장에서 전해야겠어요. 어차피 이방인들이 와서 믿잖아! 아마도 그랬다면 중심에 있는 미움과 자기 의를 보시는 하나님은 속지 않으셨을 겁니다. 영혼 구원의
열매는 말씀에 순종하며 원칙대로 십자가를 길로 놓을 때 주님 이 맺게 해주시는 거예요
바울은 여전히 유대인의 회당부터 들어가잖아요 주님께서 말씀하셨어요. 이것이 성령의 여전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전한 방식은 진리 중에 진리입니다. 유대인과
헬라인의 구분 없이 믿게 되었는데 헬라인은 민족적 구분이 아니라 문화적 구분으로 되어 이방인을 대표하는 표현이 되었어요 헬라인과 유대인이 관용어가
되었어요.
2절 그러나 순종하지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거늘
이제 또 유대인 지도자들이 등장합니다. 시기가 발전해서 형제들의
악감을 품게 하는 감정으로 나타납니다. 불순종으로 선동하는 거죠. 구속사의 결론은 예수 믿어야 죄 사함 받고 의로워지는 것인데
안 믿으면 놀라워하고 멸망한 것이라는 거예요 이방인들은 무섭게 들리는 것이나 유대인이 놀라는 거죠 악감을 품고 선동하는 거예요 뭐라고
했을까요 ‘예수는 처녀가 낳은 사생아야! 적법한
법대로 사형 받은 사람이야!’ 이렇게 세뇌를 시키니 한두 번 들을 때 그럴 리가 있을까 하지만 계속
들으니 그렇다고 합니다.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했어요. 자기들의 힘만으로 부족해서 이방인의 유력자들을 동원했어요 권력으로 의인을 죄인 되게 하는 것이 이 세상 사람들이 하는 일이에요. 그런데 바울과 바나 바는 말로는 ‘이방인에게 향하노라’ 라고 했습니다만 유대인에게 향했어요 전도가 무엇인지 배우게 됩니다.
전도란 믿지 않은 이들을 교회로 데려오는 것이
아니에요 죽었다가 깨어나 아도 생각지도 못한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 것이에요 원수를 용서하라까지는 되어요 사랑하라까지는 듣지도 알지도 못해요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전도에요. 이러한 정신이 복음인 거예요. 내가 사랑할 수 없죠. 내가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이 복음이에요. 우리 이제 손녀딸이 제가 이제 호랑이 옛날이야기를 해주면 계속해달라고 해요. 인내를 요구합니다. 몇 번이나 반복하겠습니까 교육은
반복이에요 반복은 잘해주는 사람이 최고예요 아이들이 깨닫지 못해도 한 구절이라도 큐티 일기를 쓰게 하세요. 무엇이든지
쓰게 하세요 일기를 쓰는 거죠. 자기 생각을 써보는 훈련은 아이들에게 최고의 교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주의 행성들이 하나라도 그들의 충실한 일상을 멈추면 지구도 멈추는 거죠. 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행위라는 것인지 모릅니다. 반복하는 일상이 복이 흐르게 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전도 배척
핍박도 수없이 반복해서 하고 받고 듣고 해야 해요 개인 예배 공 예배 수요예배 목장 예배도 반복해서 듣고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단을 사로잡을 수 없어요. 공동체가, 큐티가 얼마나 노아의 방 주인지
모릅니다. 수십 년을 여전한 방식의 전도와 배척을
받기 위해서 여전한 방식의 예배를 드리니 제자의 길을 가는 것 같습니다. 집에서
직장에서 교회에서 예배 드리고 너무나 지루하게 사는 것 같아도 여전한 방식으로 충성되게 사는 것이 찬양하는 태도이고 이것이 최고의 삶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인상적인 것은 하루에 족해요. 그거
아니면 먹고 마시고 음란하게 사는 것이 재미있을지 몰라도 황폐함이 반복되는 것입니다. 날마다 반복되는 것이 최고의 복인 거예요 그런데 그러니까 기쁜 일만 반복되면 좋겠지만 기쁜 일만 있으면
기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여전한 방식으로 감당하는 것이 전도하고 배척받는
것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에요 이렇게 기도 제목 올려놓고 기도하는 것이 성령의 제자에요. 굉장한 선교하려고
하지 말아요 때가 되면 이렇게 이고니온으로 가게 해주세요. 알파와 오메가 되신 하나님이 끝내지 않으면 끝낼 자가 없는 거예요 일상이 축복이에요. 기쁨만 있는 사람이 누가 기도회를 올라갑니까. 이런 분들
때문에 우리들 교회가 살아내고 우리나라가 살아나는 겁니다. 가치관에 발상이 필요합니다. 힘든 것 때문에 하나님이 붙어있을 수 있는 것이 감사한 것을 알아야 해요
(적용#3)
-끝이 안
보이는 반복에서 참아야 하는 것은 무엇이고 몇 번 참았습니까?
참지 못하는 것이 이 땅의 특징입니다. 우리가 70년도 참아야 하는데 3년을 못 참고 그래도 우리들 교회는 전도가 되었으니 감사합니다. 대단한
간증을 김상건 목자님이 하셨습니다.
3. 전도할 때 양육이 필요합니다.
3절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시니
두 사도가 이고니온에서는 오래 있었다고 합니다. ‘오래’라는 기간이 얼마일까요? 헬라어로 ‘히카노스(충분한)’이라는 의미입니다. 20년 머물러도 부족할 수가 있어요 카이로스(Kairos)의 시간 속에서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구원의 시간 복음을 전하는 자리를 지키며 사명을 감당했다는 것입니다. 1절에 보면 허다한 무리가 믿었어요 왜 오래
머물렀을까요? 양육을 위해서였죠? 1년 동안 가르치니까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고 했잖아요 사도바울의 중요한 것이 양육입니다. 교인 수가 많다고 그리스도인이
아닌 거죠. 말씀을 제대로 배워야 신앙으로 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디옥교회가
예루살렘 교회를 구제하고 선교사를 파생하고 적용하잖아요. 양육이 없는 전도는 미완성의 전도인거에요. 양육을 통해 완성이 되는 거에요 하나님이 주체입니다. 그러나 전도자와 하나님 사이에는 분명한 역할 분담이 있어요. 주를 담대하게 전했다고
했는데 머물러 있었다는 ‘디아트리보’인데 ‘트리보’는 ‘닳도록 문지르다-비비다-치다’인데 이는
방향과 크기를 강조하는 접두어에요.
비비고 닳도록 수고하며 살아날 때 예수님이 친히
표적과 기사를 구원의 말씀을 증언한다는 거예요 내가 그렇게 살아야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을 담대히 전할 수 있는
거예요 살아야 담대히 할 수 있는 거예요. 오늘
내 환경이 하나님이 허락하신 하나님의 세팅인 거예요. 여전한 방식으로 말씀을 적용하는 것이 최고의 증언을 해주는 거예요 그래서 양육이 필요한 거예요. 이렇게 양육을
잘해 놓으면,
4절 그 시내의 무리가 나뉘어 유대인을 따르는
자도 있고 두 사도를 따르는 자도 있는지라
악하고 음란한 세상에 주님이 직접 증언하시는 능력의 말씀이 전해지는
겁니다. 사도들과
함께 주님 편에서는 사람이 있고 대적자와 서는 사람이 있어요. 사단이 자기 백성을 뺏겼는데
가만히 있겠어요? 자기 백성으로 확정된 사람을 동원해 박해를 합니다. 그렇지만
이제 내가 주님을 알았는데 박해 받았다고 굴복할 수 없잖아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선한 싸움을 싸웠다고
합니다. ‘좋은 게 좋은 거’라는
복음은 없어요. 구원을 위해, 말씀을 위해 거짓
화평이 깨지는 복음을 전하면 참된 화평을 주시는 겁니다. 지체들과 함께해야 하는 거예요. 양육 받은 지체들과 함께 자아가 깨지니 말씀이 들어오는 거예요 공동체에
붙어 있어야 하는 겁니다. 어떤 일이 와도 놀라지 않습니다. 장차
받을 환란을 믿고 들으니 우리들 교회 성도들이 놀라지 않는 생각이 듭니다.
(적용#4)
-양육을 어디까지 받으셨어요?
4. 돌로 치면 도망가야 할 때가 있습니다.
5절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리들이 두 사도를
모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
이제는 돌로 치려고 해요 이것은 비방을 넘어서 공개적으로 망신까지 주는 뜻인데 죽이려고 한 것이죠. 돌로 치는 것이 유대 사회의 관습인데 유대인이 주동인 것입니다. 관원들이라고
구체적으로 언급함으로 사도들에 대한 박해 시도가 조직적으로 진행되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단의
세력들이 위기감을 느꼈는지 보여줍니다. 정말 신물 나게 괴롭히죠. 여러분의 삶도 괴로운 일이 있다면 사도바울의 삶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6절 그들이 알고 도망하여 루가오니아의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the Lycaonian cities of
Lystra and Derbe)와 그 근방으로 가서
안디옥에서는 쫓겨나지만 이고니온에서는 자기들이 생명의 위협을 느껴 도망갔잖아요.
구원을 위해서 옥문이 열려도 도망은 안 갈 수도 있고 사명을 위해 도망가야 하는 경우도 있어요. 비겁하게
도망간다고 이런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요. 여전한 방식으로 전도하고 박해 받고 배척 받고 하는 것이 우리의 일상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제일 실제 생활에서 연습하고 있는 것이기도 제목에 올라온 분들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최고로 주신 그야말로 성령의 제자들 아닌가 싶습니다. 언제 도망가고 쫓겨나야 하는가 말씀이
없으면 분별할 수가 없습니다. 말씀을 그래서 봐야 합니다.
7절 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
바로 이것이 미완료 과거 동사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중단
없이 전개되었음을 보여줍니다. 바울은 조건반사적으로
복음을 전하는데 어디에 있든지 우리의 사명의 자리로 알고 우리의 직장이 전도지라는 것을 알고 사업장이 사명지, 가정이
전도지인 것을 알아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 선교의 전진기지입니다. 오늘도 가정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우리 이어령 교수가 간증하면서 우리 어렸을 때는 고아
수출국이잖아요. 완전히 아이는 다 죽이라고 하고 낳으면 다 수출하라고 하고 아이들이 비행기로 수출되어
가는데 그 아이들이 전부 다 비행기 문을 닫으니까 ‘더 엄마’라고
그래야 하는데 엄마 아빠를 본 일이 없어 ‘언니, 누나!’ 이랬다는 거예요.
울어본 일이 없다는데 엄마 아빠를 본 일이 없어서 언니 누나를 불렀다는데 우리 예수님도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고 부르셨나이까 했잖아요. 나의
모든 것을 책임져주는 아버지가 없는 것이 이방인의 삶 아니겠어요? 우리 아들이 부를 일이 없다고
이혼하시면 안 됩니다. 정말 가정을 지키는 것이 애국애족의 첫 번째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들어야 올바로 설 수 있습니다. 바울은
노심초사하는 마음으로 제자를 양육합니다. 더 박해가 심해집니다. 발길이 닿는 곳에서 전도하고 또 박해가 시작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께서는 이런 삶을 귀하게 생각합니다. 결혼을 통해서 사명의 삶을 사는
거고 목장과 연결이 되는 겁니다. 쾌락을 좇아 살면
순간적인 즐거움은 있지만 영벌이 있습니다. 복음을 위해 살면 영생이 있는 거예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이방인이 복음을 받았다는 것이 얼마나 간절했겠어요. 복음을 위해서 사는 삶이 기쁜 것만 있는 것이 아니에요. 지금
얼마나 슬프셔요. 유대인들아 자기가 백성들이 핍박하잖아요. 거기
반응하는 사람이 바울 한 사람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외로운 일이에요 정말 주님의 위대함보다는 슬픔과 외로움이 느껴지는 거예요 이 길을 가야 하는 거예요. 내 집 식구가 수고를 해서 외로운 길을 가게 하는 거예요.
(적용#5)
-영벌의 쾌락의 삶을 사시겠습니까? 영생의 제자의 삶을 사시겠습니까?
<Epilogue>
1) 성령의 제자는
쫓겨나도 기쁨과 성령이 충만한 것이다
2) 그래서 언제나
여전한 방식으로 전도하고 배척 받아야 하는 것이다
3) 그것이 성도의
삶이다.
4) 이런 기가
막힌 제자들에게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다고 했는데 그러면 양육이 필요한 것이다.
5) 예수님과
사도바울의 삶을 한 구절 한 구절 읽으면서 전도하고 배척 받았던 것처럼 우린 날마다 힘들고 새롭다.
6) 한 절도
안 빼고 가는 것으로 똑같은 삶인데 성경이 주님의 말씀 이라서 역사하시는 것이 있는 것이다
7) 힘이 드니
다른 사람을 생각하게 되는 것으로 그러니 돌로 치면 도망갈 때가 있는 것이다
8) 별 인생이
없다는 것을 알고 가야 하는 것이다.
9) 성령의 제자는 훈련을 해서 제자가 아니라 성경을 읽어가다 보니까
말씀을 좇아가서 저절로 제자가 되는 것이다.
10) 성령의 살리심과 일으키심에 반응을 하니까 긍정-부정-무반응의 옳고 그름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시각으로
반응하게 되니 저절로 주님의 제자가 되어 성령의 제자가 되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
11) ‘카일 아이들몬’은 제자로 부르실 때 가장 행복한 부르심은 ‘나를 따르라’이고 가장 고통스러운 부르심은 ‘자기를 부인하라’이고 가장 충격적인 부르심은 ‘와서 죽으라’고 하는 것이라고 한다.
12) 성령의 제자는 이런 과정을 겪어가면서 되어 가는 것이다.
13) 허튼소리에
귀가 솔깃한 사람을 사단이 좋아합니다.
14) 경건의 모양은 있으냐 능력은 부인하는 자라고 했다.
15) 그러나 경건의 능력이 없으면 어려울 때 이길 수가 없다.
16) 껍데기만 가지고는 능력이 안 나타나는 것이다
17) 당신이 하나님
믿지 않으면 아무리 사랑해도 기쁘지 않다고 선포하는 것으로 말로만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18) 집착을 떨어버리는
모습을 보여줘야 하며 지혜롭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19) 구속사를
이해했기 때문에 핍박과 박해 속에서 일어나 제자의 삶을 살 수 있었다.
20) 말씀을 듣고
기뻐하고 성령의 충만함에 머무르는 것이다.
21) 시기와 반박
비방을 당하고 선동해도 주님의 일이면 박해가 와도 기쁨이 충만하고 나의 일이면 낙심이 밀려오는 것이다.
22) 새로운 세계에
눈이 떠지게 되는 데 이건 복음의 실패담이 아니라 성공담이라는 것이다
23) 영혼 구원의
열매는 말씀에 순종하며 원칙대로 십자가를 길로 놓을 때 주님 이 맺게 해주시는 것이다
24) 성령의 여전함을
보면, 여전한 방식은 진리 중에 진리다
25) 구속사의 결론은 예수 믿어야 죄 사함 받고 의로워지는 것인데 안
믿으면 놀라워하고 멸망한 것이라는 것이다
26) 권력으로
의인을 죄인 되게 하는 것이 이 세상 사람들이 하는 일이다
27) 전도란 믿지
않은 이들을 교회로 데려오는 것이 아니라 죽었다가 깨어나 도 생각지도 못한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 것이다
28) ‘원수를 용서하라’까지는 되지만 ‘원수를 사랑하라’까지는 듣지도 알지도 못하는데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전도다.
29) 이러한 정신이
복음인 것이고 내가 사랑할 수 없으며 내가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이 복음이다.
30) 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행위라는 것인지 모르는 것이다
31) 반복하는
일상이 복이 흐르게 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
32) 전도 배척
핍박도 수없이 반복해서 하고 받고 듣고 해야 하며 개인 예배 공 예배 수요예배 목장 예배도 반복해서 듣고 해야 한다.
33) 그렇지 않으면 사단을 사로잡을 수 없으니 공동체가, 큐티가 얼마나 노아의 방 주인지
모른다.
34) 수십 년을
여전한 방식의 전도와 배척을 받기 위해서 여전한 방식의 예배를 드리니 제자의 길을 가는 것 같다.
35) 집에서 직장에서
교회에서 예배 드리고 너무나 지루하게 사는 것 같아도 여전한 방식으로 충성되게 사는 것이 찬양하는 태도이고 이것이 최고의 삶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36) 인상적인
것은 하루면 족하다.
37) 그거 아니면
먹고 마시고 음란하게 사는 것이 재미있을지 몰라도 황폐함이 반복되는 것이다.
38) 날마다 반복되는
것이 최고의 복인 것이다
39) 기쁜 일만
반복되면 좋겠지만 기쁜 일만 있으면 기도하는 사람은 없게 되는 것이다.
40) 여전한 방식으로
감당하는 것이 전도하고 배척 받는 것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41) 이렇게 기도 제목 올려놓고 기도하는 것이 성령의 제자인 것이다.
42) 알파와 오메가
되신 하나님이 끝내지 않으면 끝낼 자가 없는 것이다
43) 일상이 축복인
것이다.
44) 기쁨만 있는 사람이 누가 기도회에 올라가나?
45) 힘든 것 때문에 하나님이 붙어있을 수 있는 것이 감사한 것을 알아야
해요
46) 참지 못하는
것이 이 땅의 특징이다.
47) 양육이 없는 전도는 미완성의 전도인 것이다.
48) 양육을 통해 완성이 되는 것이며 하나님이
주체인 것이다.
49) 비비고 닳도록
수고하며 살아날 때 예수님이 친히 표적과 기사를 구원의 말씀을 증언한다는 것이다
50) 내가 그렇게
살아야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을 담대히 전할 수 있는 것이며 살아야 담대히 할 수 있는 것이다.
51) 오늘 내
환경이 하나님이 허락하신 하나님의 세팅인 것이다.
52) 여전한 방식으로
말씀을 적용하는 것이 최고의 증언을 해주는 것이어서 양육이 필요한 것이다
53) ‘좋은 게
좋은 거’라는 복음은 없는 것이다.
54) 구원을 위해, 말씀을 위해 거짓 화평이 깨지는 복음을 전하면 참된 화평을 주시는 것이며 지체들과 함께해야 하는 것이다
55) 양육 받은
지체들과 함께 자아가 깨지니 말씀이 들어오는 것이므로 공동체에 붙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56) 그리하면
어떤 일이 와도 놀라지 않고 장차 받을 환란을 믿고 들으니 우리들 교회 성도들이 놀라지 않는
생각이 든다.
57) 조건반사적으로 복음을 전하는데 어디에 있든지 우리의 사명의 자리로
알고 우리의 직장이 전도지라는 것을 알고 사업장이 사명지, 가정이 전도지인 것을 알아 한다.
58)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 선교의 전진기지이다.
59) 정말 가정을
지키는 것이 애국애족의 첫 번째이다.
60) 하나님의 복음을 들어야 올바로 설 수 있다.
61) 바울은 노심초사하는 마음으로 제자를 양육하지만 더 박해가 심해지고 발길이 닿는 곳에서 전도하고
또 박해가 시작한다.
62) 그러나 우리 하나님께서는 이런 삶을 귀하게 생각한다.
63) 결혼을 통해서
사명의 삶을 사는 거고 목장과 연결이 되는 것이다.
64) 쾌락을 좇아
살면 순간적인 즐거움은 있지만 영벌이 있다.
65) 복음을 붙잡고 가면서 살면 끝에는 영생이 있는 것이다
66) 쾌락을 좇으니 영적 기쁨이 없는 것이다
67) 앉으나 서나 육적인 오병이어만 찾는다
68) 공동체에서 나의 불만을 지지하고 동조하는 사람을 조심해야 한다
69) 불순종의 영으로 이방인을 선동하는 것이다
70)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가려면 많은 환란을 겪어야 한다
71) 때마다 여전한 방식은 진리 중의 진리다
72) 고난 가운데 원칙대로 십자가를 길로 놓고 살아갈 때 열매를 맺는다
73) 예수 믿고 좌사함 받고 의로움을 받는 것인데 그렇지 못하면 놀라고
멸망하는 것이다
74) 영생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전도이다
75) 원수를 용서하기까지는 되어도 ‘원수를
사랑하라’는 안 되는 것을 보여 주어야 전도가 된다
76) 70번씩 7번이라도 용서해야 하는 것이다
77) 큐티하는 것이 개인 예배인데 반복하는 것이 최고의 교육이다 반복하는
일상에 하나님의 사랑이 흐른다
78) 큐티와 목장공동체가 노아의 방주인
것을 알아야 한다
79) 똑 같은 행위라도, 똑 같은 일상의 패턴이 지루해 보여도 그것이 가장 하나님을 찬양하는 태도인 것을 알아야 한다
80) 알파와 오메가
되신 하나님이 끝내지 않으시면 끝낼 자가 없는 것이다
81) 가치관에 발상의
전환이 일어나야 한다
82) 카이로스가 오기까지
주어진 자리 지키며 여전한 방식으로 말씀 듣는 것이 양육이다
83) 말씀을 재대로
배워야 신앙이 설 수가 있는 것이다
84) 양육이 없는
전도는 미완성의 전도다
85) 어떤 환경에서도
여전한 방식으로 비비고 닳도록 사는 것이 최고이 기사가 되어 증거하는 삶이 된다
86) 말씀을 길로
놓고 가면 주님이 참된 화평을 주신다
87) 시기-반박=비방을 넘어 돌로 치며 추방까지 당하는 사건은 사단의 세력이
위기감을 느꼈음을 보여준다
88) 여전한 방식의
말씀 묵상이 없으면 분별할 수가 없다
89) 부를 이름이
있는 것이 이 세상의 최고의 축복이다(엄마 대신 ‘언니, 누나’라 부르는 입양아들)
90) 하나님 복음을
들어야 가장 올바르게 설 수 있는 것이다
91) 인생이 괴로운
것은 앉으나 서나 행복 만 추구하니까 그렇다
92) 복음을 전하는 일은 슬프고 외로운 길이다
93) 우리는 날마다가 힘들고 날마다가 괴로우니 다른 사람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94) 성령의 제자는 쫓겨나도 기쁘고 성령이 충만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