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절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Paul entered the synagogue and spoke boldly there for three months, arguing persuasively about the kingdom of God)
9절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니라
(But some of them became obstinate; they refused to believe and publicly maligned the Way. So Paul left them. He took the disciples with him and had discussions daily in the lecture hall of Tyrannus)
10절 두 해 동안 이같이 하니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This went on for two years, so that all the Jews and Greeks who lived in the province of Asia heard the word of the Lord)
11절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시니(God did extraordinary miracles through Paul)
12절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so that even handkerchiefs and aprons that had touched him were taken to the sick, and their illnesses were cured and the evil spirits left them)
13절 이에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삼아 악귀 들린 자들에게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의지하여 너희에게 명하노라 하더라(Some Jews who went around driving out evil spirits tried to invoke the name of the Lord Jesus over those who were demon-possessed. They would say, “In the name of Jesus, whom Paul preaches, I command you to come out”)
14절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행하더니(Seven sons of Sceva, a Jewish chief priest, were doing this)
15절 악귀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One day) the evil spirit answered them, “Jesus I know, and I know about Paul, but who are you?”)
16절 악귀 들린 사람이 그들에게 뛰어올라 눌러 이기니 그들이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Then the man who had the evil spirit jumped on them and overpowered them all. He gave them such a beating that they ran out of the house naked and bleeding)
17절 에베소에 사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다 이 일을 알고 두려워하며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When this became known to the Jews and Greeks living in Ephesus, they were all seized with fear, and the name of the Lord Jesus was held in high honor)
18절 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알리며(Many of those who believed now came and openly confessed their evil deeds)
19절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 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A number who had practiced sorcery brought their scrolls together and burned them publicly. When they calculated the value of the scrolls, the total came to fifty thousand drachmas)
20절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In this way the word of the Lord spread widely and grew in power)
<Prologue>
요즘 땅값이 비싸기 때문에 하늘이 섬길 세력이 아니라고 합니다. 세력 다툼을 하면 다 전쟁터가 됩니다. 아프간 사태도 보면 서로 다른 세력 간의 다툼입니다. 땅을 차지하고 돈을 차지하려고 싸우니 백성들이 죽어 나갑니다. 세상 세력과 다른 값을 환산할 수 없는 성령의 세력이 나옵니다. 거침없이 자라나 확장합니다. 어떻게 세력을 확장해야 할까요? 성령의 세력은,
<말씀 요약>
1.날마다 큐티하는 것입니다.
8절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
9절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니라
바울이 강론하고 권면하기 위해서 회당에 들어갑니다. 회당은 언제나 힘든 곳 이었습니다 배척과 무시와 비방을 당했습니다. 12 공동체로 세우셨기 이 공동체의 양육이 필요합니다. 양육이 중요하기 때문에 에베소와 고린도에서 5년 동안 있게 되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 알려 주려니 담대함 없이는 권면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야말로 하나님 나라 자체이며 믿음이 복음이라는 하나님 나라는 바울의 간증과 더불어 강론했을 것입니다. 회당의 분위기 자체가 눈치 보고 위축되었는데 담대히 강론했다는 것입니다. 용기나 배짱이나 성품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례를 받은 자는 죽는 거라고 했잖아요. 마지막처럼 사명으로 권면을 하는 것입니다. 담대히 말씀을 전하게 하는 것이 성령의 세력입니다. 석 달 반복해서 전했는데 데살로니가는 3주 동안 못 들었는데 에베소는 석 달을 들었네요.
당한 고난으로 양육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을 찾기 위해 조심스럽게 전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석 달 이상을 참지 못했어요. 한마디로 ‘내가 정답이다. 내가 의인’이기 때문에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겠습니까? 석 달은 참고 듣는 시늉을 했지만 한계가 옵니다. 마음이 굳어 순종치 않는 자가 비난하는 것은 자기 스스로 복음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답이잖아요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모욕합니다. 떳떳하게 비방합니다. 그러면 자신이 옳다는 인정을 받는다고 합니다. 구속사적 큐티가 안되고 그러면 하기 싫고 적극적으로 비난합니다. 바울은 떠났다고 합니다. 담대히 전한 까닭은 이 사람들 때문 아닙니까?
그들은 복음을 들을 기회를 놓쳤어요 내가 정답이라고 하는 사람들의 결말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세웁니다. 싸울 시간이 없는 것입니다. 진영논리로 싸울 시간에 새로운 전력을 짜보세요. 회당과 구별되는 말씀 공동체가 세워졌습니다. 내가 정답 임을 회당이 아니라 내가 죄인이고 예수님이 정답이라고 외쳐지는 두란노 서원(the lecture hall of Tyrannus)이 세워졌습니다. 서원에서 유명한 강사들이 주로 아침에 강의를 했고 두란노는 아마 서원 건물의 주인이거나 강사였을 것입니다. 그 제자들이 회당 대신 두란노(the lecture hall of Tyrannus)서원을 임대했어요 날마다 강론을 했는데 최초의 신학교라고 할 수 있는데 오전 11시부터 4시까지 그러니까 당시 에베소 사람들이 낮잠의 자며 한낮 쉬는 시간에 ‘시에스타(Siesta/낮잠)라고 바울과 제자들은 쉬지 않고 들었습니다. 에베소에 머무는 동안 텐트 메이킹(Tent-making)를 해서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아침에 일하고 자도 시원치 않을 판에 일하는 거예요 복음을 전하는 것을 숨쉬기처럼 했다는 것입니다. 자기 이익을 생각했으면 이렇게 못합니다. 성령의 임하심을 받았으니, 세력을 받았으니 사명의 길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2년이나 날마다 걸었네요. 낮잠 시간, 찌는 더위, 이런 거 필요 없습니다.
사모하면 어디라도 가게 됩니다. 교회에서 큐티 모임을 하게 되었을 때 제가 수요예배 후에 졸린 오후 2시로 배정을 부탁했어요. 의아했죠. 하라고 해서 하는 건데 그렇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날마다 큐티를 강조하기 위해서 그런 거 없이 오고 싶은 오고 가고 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지나고 나니 주여 해서 그 시간은 사모하지 않으면 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모하는 사람이 오니 별로 소문이 나쁘게 나지 않았습니다. 롱런(long-run)할 수 있었습니다. 사모하는 사람이 오니 저를 지켜주신 겁니다. 언제든지 그만두려고 하는데 모여들었습니다. 정말 예배를 사모하십니까? 사모하세요? 그러면 현장 예배 오셔야죠
10절 두 해 동안 이같이 하니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이게 성령님의 응답 아닙니까? 아시아 에베소를 중심으로 헬라인 유대인이 말씀을 듣는 역사가 일어나서 성령의 세력이 되어서 바울 사역의 절정이 되었어요 그 유명한 요한계시록에 소아시아 일곱 교회가 탄생되었을 뿐 아니라 이제 리쿠스 계곡까지 퍼져서 골로새 히에라볼리 라오디게아 교회가 생겼고 수세기를 이끌어가는 중요한 교회들이 이때에 양육으로 생긴 거예요.
그동안 바울의 행적을 보면 십자가만을 보니 때가 차매 놀라운 부흥을 허락했어요 40년 후에 기록을 보면 아주 미신 같은 것이 곳곳에 영향을 일으킨다고 합니다. 실제로 아시아 사람 전체가 듣지는 못했지만 인정해 주셨다는 하나님의 격려입니다.그래서 날마다 큐티하고 날마다 모이고 오고 싶은 사람 오고 가고 싶으면 가고 날마다 교회에서 구속사의 큐티를 강론했더니 제자리로 세워졌어요. ‘날마다’가 중요합니다. 날마다 강론이고 큐티입니다. 큐티한 것을 가지고 매 주일 만나서 나누고 쉬지 않고 했어요. 그리고 지금 큐티 선교회 우리들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제가 늘 하다가 ‘신학교에 가서 제자를 세워야겠다’. 이렇게 나눔을 했었죠 이러고 가면 그야말로 제자 훈련 안하면 남는게 없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큐티 선교회가 세워진 게 최고의 응답입니다 정말 성령의 세력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날마다 큐티-기도-목장은 여러분에게 최고의 세력이 될 것입니다. 두란노서원도 날마다 사람들이 나누며 기도하며 성경을 알아가며 똑같지 않습니까? ‘내가 죄인인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날마다 습관이 되면 큰 세력이 됩니다.무슨 일을 당해도 ‘날마다’가 중요합니다. 힘든 일을 당해도, 좋은 일을 당해도 날마다 강론을 하고 큐티하고 바울도 일을 당했고 저도 당했는데 날마다 강론하고 여러분도 큐티하고 나누고 이거 굉장한 것이고 세력입니다. 여러분들은 지금은 최고의 세력을 쌓고 있습니다.
(적용#1)
-여러분은 날마다 큐티, 날마다 기도, 날마다 예배, 날마다 목장 중에서 무엇이 안되십니까? 내 삶에 가장 덥고 힘든 시간에 나는 예배를 드리러 가고 있습니까? 피곤하다가 쉽니까?
2.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십니다.
11절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시니
12절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믿음이 하나도 없는 이방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이제 에베소 회당에서 두란노서원으로 옮겼잖아요. 그러니까 이 두란노서원 교회가 진짜임을 보여주셔야 했잖아요 그래서 바울의 손으로 기적이 일어나게 하셨어요. 특히 에베소는 헬라 문화, 아시아 문화가 만나는 대도시였기 때문에 학문과 철학도 융성했지만미신(superstition)과 마술(sorcery) 인기가 많아 가지고 유대인 마술사(sorcerer)들도 있었는데요. 이 마술사들이 바울의 손으로 행하는 놀라운 능력을 이렇게 보고는 막 그 놀라운 능력에 매료가 됩니다 그러니까 저도 이제 큐티 모임도 진짜임을 좀 보여주셔야 했기 때문에 정말 수많은 가정이 그냥 이혼을 철회하고 오늘 손이 가고 발로 가는 섬김을 통해서 가정이 회복되는 기적이 일어났어요.
지난주 설교 때 매일 새벽 기도하고 성경 필사하고 예배만 드렸던 요한의 세례만 알던 어떤 제자 집사님 말씀을 설교 했었는데 그 집사님이 지난주 설교를 듣고 ‘내가 문제였구나. 아내도 자녀도 아닌 내가 죄인이었구나’를 깨닫고 설교 끝나자마자 스스로 정신과에 전화를 걸었다고 거예요. 이혼 소송의 1차 조정 기간에도 정신과 상담을 받았지만 ‘내가 왜 정신과 가냐고?’ 3시간 동안 아내에게 설교했던 분이잖아요 그런데 이 설교를 듣고 손으로 그 능력을 행한 것이죠. 손으로 전화를 눌러서 우리가 강론을 마음으로 받았다면 이게 손으로 실천을 해야 돼요. 능력을 행해야 합니다. 그때 성령께서 세력을 얻어 내 가정이 합쳐지고 중독이 끊어지고 생명이 이어지는 것이죠.
우리들교회는 이런 가정이 너무 많습니다 바울의 손처럼 우리도 고장 난 내 손과 발을 또 담배-도박-음란에 익숙한 내 손과 발을 말씀에 길들여 이 손으로 능력을 행해야 합니다. 끝까지 십자가를 져야 하는 것이 그러니까 술 먹고 들어와 행패하는 남편의 밥 차려주는 손이 되며 게임만 하며 방에 에서 나오지 않는 아들의 방을 치워주는 손이 돼야 하며 또 경찰서에 불려간 아들에게 뒤통수를 치는 게 아니라 그 아들의 손을 꼭 잡아주는 손이 되야 하며 술 취해 길거리에서 쓰러져 있는 부모들 또 자녀들 다 부둥켜 앉는 손이 되야 하며 내 자녀에게 또 부모에게 무릎을 꿇고 미안하다 고백하는 이 손들은 옳고 그름의 손이 아니라 능력의 손입니다. 바로 이게 놀라운 능력의 손입니다 여기서 바울의 몸에 있는 손수건이나 그렇지만은 특별한 영적인 손수건이 아니라 이 말씀이 바울의 삶의 현장까지 적용되었다는 것이에요 이 앞치마와 손수건은 뭔가 하면요 아침에 텐트 메이킹 할 때 노동의 현장에서 썼던 그 물건이에요. 이 손수건과 앞치마 예요. 그러니까 이 얘기는 주일 뿐만 아니라 월화수목금토 내 삶의 현장에도 이 말씀이 적용될 때 손이 가고 발이 가는 병이 떠나고 악귀도 이제 나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적용#2)
-설교 듣고 큐티하며 권세가 느껴지는 말씀을 손으로 보내 보신 적이 있나요?
옮고 그름의 손이 아니라 능력의 손을 행한 적이 얼마나 있었는지요?
3.짝퉁 세력이 아닙니다.
진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가지 단어를 생각해봤지만 짝퉁이라는 단어가 맞는 것 같습니다.
13절 이에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삼아 악귀 들린 자들에게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의지하여 너희에게 명하노라 하더라
14절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행하더니
15절 악귀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16절 악귀 들린 사람이 그들에게 뛰어올라 눌러 이기니 그들이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
13절에 보니까 어떤 마술하는 사람. 그리고 14절에 스게와(Sceva)의 일곱 아들이에요 이들도 다 이제 바울 흉내를 내는 거예요 자세히 보면 우리가 이방 선교할 때 흔히 보던 귀신 들린 여자, 점치는 여자 종류가 달라요. 뭐가 다른가요? 이 마술하는 자와 스게와의 일곱 아들은 다 유대인이 이라는 거예요 유대인이라는 말은 말씀을 알고, 하나님을 알고, 율법을 아는 자들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렇게 늘 바른 진리가 선포되면. 유사한 모조품들이 생겨납니다. 참 모조품들이 많이 생겨나요 우리 이거 분별해야 하는데 지난번에도 성령의 임하심은 분별이라고 그랬는데 그러니까 진짠 지 가짠 지를 분별을 못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수많은 이단이 판을 치는 거잖아요 그 이단들도 다 예수 믿어 천국 간대요 전부 다 똑같이 얘기해요 그러니까 내가 장로교회에 다니다가 신천지 갔는데 다른 게 하나도 없더라 이래요. 그러니까 이제 겉모습만 보는데 진짜 이렇게 속으로 들어가 보면 양의 탈을 쓴 이제 그 이리에 그런 이제 짝퉁이라고 할 수 있죠.
말씀에 끝까지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은 어린 양과 비슷한 모습을 가진 용의 세력이에요. 예 7과 가장 비슷한 666이라고 그랬잖아요. 게다가 말씀도 가지고 있고 게다가 능력도 있고.
예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너무 비슷해 보이는 거예요 그리고 더 양의 탈을 썼어요 진짜보다 우리가 늘 위로만 하면 너무 좋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은 막 ‘화 있을 진저’ 이러잖아요 이 독사의 자식들 하면 주님도 그러고 이제 야단칠 때만 하는 게 아니라. 진짜 사람이 죽게 생겼으니까 가지 말라고. ‘너 낭떠러지에 떨어지면 죽는다’ 그래야지 ‘낭떠러지에 가도 괜찮아.’ 그게 사랑이에요? 근데 다들 그렇게 착각을 합니다 자세히 보면 너무 다릅니다.
오늘 마술사는 13절에 악귀의 세력을 향해 뭐라고 말하냐 하면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의지하여 ‘너희에게 명하노라!”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의지하여 너희에게 명하노라!; 그래서 여기 이제 ‘명하노라’는요 바울처럼 단호하게 명령하여서 귀신을 그냥 끊는 게 아니라 ‘예수를 의지하여 애원하다 부탁하다’라고 번역할 수 있는 단어예요 그 귀신을 쫓아내기 위해서는 단호하게 명령을 해야 되는데 귀신과 타협하면서 애원을 하는 거예요 귀신은 단호하게 명령하며 쫓아내야 되요. 애원하면 안돼요. 음란 이런 거 애원하면 안 돼요. 쫓아내야 되는 거예요. 이 세상은 하나님 아니면 다 귀신이에요. 중간 지대가 없어요.진짜 예를 들면 불륜인 줄 알면서도 단호히 끊지 않고 저 사람을 전도하기 위해 불륜을 행한다는 거예요.
유부남과 사귀는데 그 사람이 한 번만 자신과 만나주면 교회를 나가겠다고 또 한 번만 잠자리를 하면 교회를 나가겠다고 그러니까 이제 애원을 하는 거죠 서로가. 상대가 이쪽 저쪽이 다 지금 애원하는 거예요. 끊지를 못하니까 그리고 이제 그 유부남을 정리하려고 하는데 자신 때문에 교회를 왔기 때문에 구원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하냐? 실족해서 이런 얘기를 들으면 물론 구원을 향한 진심은 진짜 같을지 모르지만 바로 이것이 짝퉁이라는 거예요 귀신에게 애원하며 타협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유대인이지만 복음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거예요. 우리는 구원 예수 이름만 들어가면 그냥 분별을 다 이제 못해요.
교회 다니면서도 복음을 너무 모르는 사람이 많아요. 그리고 ‘한 사람의 성도가 중요한데 그런 게 문제가 안돼!’ 또 교회에서는 어떻게든지 다 와야 되니까. 그래서 귀신을 이렇게 쫓아내는 것이 말처럼 쉽지가 않아요 쉬우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러니까 이 와중에서 핍박을 받고 그냥 그럴 때 이 말을 들어주면 좋겠죠 근데 ‘끊어라’ 그러면 그 사람하고 원수 되는 거죠. 바로 이런 거예요. 이런 거 처방 나가면 목자하고 원수되고 이러는 거예요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마찬가지예요 그런데 이럴 때 악귀가 말을 하는 거예요. 성령이 말을 해야 되는데. 감히 악귀가 말을 합니다. 기도 응답이 아니라 악귀의 응답인 거죠. 악귀가 뭐라고 말을 합니까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이게 무엇입니까? 구원을 위한다고 하지만 예수 이름이라고 하지만 이 일이 구원과 상관없다는 것을 또 예수와 상관없다는 것을 마술사가 알고 그 일을 행하는 스게와의 일곱 아들이 알고 악귀도 알고 내 속의 악귀도 다 알고 있어요. 이미 답을 다 알고 있어요.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걸 다 알아요. 다 아니까 반대할 것이 뻔하니까 우리가 묻지 않아요. 물어도 목장에서 추상적으로 물으며 구원을 위해 한다고 합니다. 구원을 위해서 내가 이 일을 해야 되고 랄랄랄라 그러니까 믿음이 연약한 지체들을 배려하는 것이 아니라면 묻기 꺼려지는 것들은 내 정욕을 위한 일입니다 틀린 줄 알면서도 죄인 줄 알면서도 내 욕심이 채워지니까 오픈할 수도 없고 멈출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멈춰야 합니다. 오픈해야 합니다 이 짝퉁으로 복음을 흉내내며 다니던 그들의 결국이 어떠했습니까?
16절 악귀 들린 사람이 그들에게 뛰어올라 눌러 이기니 그들이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
여기서 눌러는 주인이라는 단어와의 합성으로 주인이 되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귀신과 타협해서 애원하다 보면 그 귀신이 나를 도와주는 게 아니라 나의 주인이 되어서 나를 지배합니다. 결국 내 삶을 비참하게 만든다는 거예요. 유부남과의 사랑이 영원할 것 같지만 결국은 이제 그 귀신의 지배를 이 원칙이 아니니까 이 악귀에 조정을 받은 거니까, 사단의 주인을 모신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내 삶을 비참하게 만들어요 즉 구원을 빙자해서 음란을 행하면 그 음란이 내 삶을 지배해서 파멸로 이끌고 구원을 빙자해서 돈을 벌려고 했는데 이제 그 다음에는 돈의 지배를 받게 되고 구원을 빙자에 봉사를 했는데 그 봉사에 내 심신이 지치고 생색이 나고 그리고 오히려 좌지우지되니까 내 욕심을 채우려고 했던 그것에 오히려 다 지배당하고 말아요. 하나님 뜻이 아닌 건 결국 다 종 노릇하게 되어 있어요.
성령의 세력은 날마다 큐티하며 이제 마음에서부터 시작해서 손으로 이어져야 하는데 그 중심에서부터 자신의 죄인 됨을 모른 채 이 마술사처럼 손으로 행위만 따라하니까 결국 너도 죽고 나도 죽이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처음에 비슷한 것 같지만 그 결과는. 너무 다릅니다 바울의 복음은 악귀를 쫓아내고 삶이 변화되고 주변이 함께 살아나는데 유사한 이 짝퉁 마술사의 복음은 처음에 비슷한 것 같지만 상하게 되고 벗은 몸으로 수치를 당하며 주변 사람들도 함께 죽고 도망가게 됩니다. 비슷한 것 같지만 생명은 세력을 얻고 비슷한 짝퉁은 썩어 버려지는 거죠. 여기 뭐 딴 길이 있을 거라고 생각 마세요 지금은 모르나. 후에는 알리라 그리고 그 죄에 대한 값을 결코 끝까지 받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그 정욕을 지금 끊지 못했어 나가라 해야 되든 해야 되는데, ‘나가 주실래요?’ 그러면 귀신이 잘도 나가겠네요. 그러니까 그게 다 삶으로 연결되는 거예요.
계속 타협하면서 ‘나가 주실래요?’대신에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나가라’ 이래야 되는데 그러면 그냥 태도도 단호해야 되잖아요. 근데 다 여지를 주니까 그렇게 다 불륜이 행해지는 거예요. ‘나는 그럴 마음이 없었는데’라는 소리 좀 하지 말아요 그건 귀신에게 애원하는 거다.
성령의 세력은 날마다 큐티하는 거죠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는 거예요. 그리고 절대로 이 짝퉁 세력을 분별해야 되는 거예요.근데 여러분들은 ‘내가 가보니까 틀린 게 없더라’ 이딴 소리 마라 공 교회 협의에서 이단이라 그러면 이단인 줄 알아야 되는데 내가 보니까 여러분들이 뭘 아는데, 평신도들이 뭘 아는데? 수많은 학자들이 연구해서 이단으로 정해 놨으면 그걸 이제 믿어야죠 근데 내가 보니까 이단도 ‘예수 믿고 천국 간다’ 그러더라. 처음에는 몰라요. 그런데 이 삶에서 귀신을 쫓아가는 역사가 일어나요. ‘불륜을 행해도 구원받았으면 된다. 한 번 회개했으면 된다 왜 자꾸 그렇게 정죄감 가지고 회개하냐?’ 이러니까 내가 불륜을 행하기에 도박을 행하기 편하잖아요. 그렇죠 귀신 편을 들어주니까 결국 그거예요 이단도 돈도 많다고 하니까 그냥 불륜 남녀가 돈도 많아 뭐든지 다 갖췄다고 하니까 진짜 같잖아요 그렇죠?
(적용#3)
-귀신을 쫒지 못하고 나가 달라고 애원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구원을 빙자해서 내 정욕을 치우고자 함은 무엇이 있습니까?
-반대할 것을 알고 목장에 묻지 않았던 일은 무엇입니까?
4.자복하며 불태우는 것입니다.
17절 에베소에 사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다 이 일을 알고 두려워하며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
18절 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알리며
19절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 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
20절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우리가 대부분 내가 행하고 구하는 것들이내 욕심인지 구원인지를 알 때도 있고 모를 때도 있어요. 그런데 지금 이제 그렇게 마술을 행하던 사람들이 막 도망가니까 내가 그거 좋아했다가 얼마나 두렵겠어요 그래서 흉내 내고 따라하는 것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를 본 에베소에 사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이 일을 두려워할 때 믿은 사람들이 할 일이 있어요 18절에 보니까 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알렸다고 해요. 여기서 믿은 사람들은 두란노 서원에서 바울의 강론을 이미 듣고 믿은 사람들이죠믿는 사람들의 특징이 죄를 더 이상 짓지 않는 것이 아니라 또 실수하고 넘어지고 죄를 짓더라도 십자가 앞에 나와 이 교회 공동체에 나와 믿는 사람들의 모임, 내가 죄인인 공동체에 나와서 계속 자복하며 알리는 자들 이 바로 그 두려워하고 있는 사람들 앞에 믿은 사람들이 자복하며 이걸 알려야 되는 거예요자복이라는 단어는 이게 공개적으로 밖으로 드러내어 자신의 죄를 사람들과 하나님 앞에서 조금도 숨기지 않고 낱낱이 고함을 말하는 단어예요. 그러니까 자기 죄를 보지 않으면 할 수 없는 행동이죠. 그러니까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두려워할 때 믿는 사람은 자복하여 회개하여 오픈하여 알리며 이제 불태우는 것까지 가야 한다는 것이죠.
사람들이 두려워할 때 믿는 우리들이 지금 이제 뭐가 사건이 나고 이러고 저러고 하면 이 두려워하잖아요. 아이가 힘들어지고 그럴 때 믿는 우리들이 간증하며 수치를 나눌 때 세력을 얻게 된다 그러니까 혼자서는 적용 못해요 내가 할 수 없으니 공동체에 말하고 또 그 공동체의 힘을 얻어 다시 내 속에 마술책들을 불태우고 그 불태운 것들을 또 공동체 앞에서 간증하고 이렇게 하나씩, 하나씩 불태워가니까 이 악하고 음란한 에베소 땅에 성령이 흥왕하여 세력을 얻게 되는 것이죠.바울이 하나님의 나라의 말씀을 증거하니까. 연수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잖아요. 그런데 어느새 알리고 자복하고 함께 불태울 공동체가 이 악하고 음란한 에배소(Ephesus) 땅에 생긴 거예요
날마다 강론이 이렇게 놀라운 거예요 내가 분별을 잘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맹인이에요 내가 분별할 수 없기에 알리고 묻고 기도하고 또 공동체에 알리고 그럴 때 성령께서 우리에게 분별하게 해주시는 것이죠.
이처럼 자복하며 알릴 때 내가 이제 공동체에서 알리면 이것이 기복인지 귀신을 섬기는 것이었는지 마술을 행하던 일인지 깨닫게 되는 거예요.
‘내가 구원을 위해 자녀를 사랑한다고 행했던 일들이 자녀를 죽이는 일이었구나 내가 정말 귀신에게 애원했구나. 내가 자르라고 했던 일들이 모두 다 구원을 가로막는 일이었구나’하는 것들을 공동체에 와서 자복을 해야지 깨닫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날마다 이제 목장 예배 속에서 내 삶 속에 수많은 마술책을 불사르게 되는 거예요. 회개하며 오픈할 때 나는 내가 잘나서가 아니고 내가 그냥 오픈을 하면 그 오픈 자체가 내 애초의 얘기인데도 다른 사람들을 살리고 세력을 얻게 된다는 거예요 그 목장이 세력을 얻고, 그런 교회가 세력을 얻고 이런 교회가 많아지면 나라가 또 세력을 얻잖아요. 그렇죠 여기서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들이 이것이 구원이 아니라 마술인지 깨달아 그 책을 불사르게 되는데 그 책값이 은5만이라고 그래요.
은 5만 은 지금 노동자 1당을 10만 원이라고 하고 하면 50억 5만 원이라고 하면 25억 50억쯤 되겠네요. 이거 어떻게 불태웁니까? 내가 보기엔 너무 아까운데 보기만 해도 너무 좋은데 그 유부남 유부녀를 어떻게 내가 불태웁니까? 돈도 많은데 외모도 있는데 내 보내? 그 연락처를 어떻게 불태웁니까? 수많은 드러나지 않은 이 죄악들을 핸드폰 하나 쫙 없애면 될 텐데. 나는 할 수 없죠. 나는 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자복하고 공동체에 알리고 이 일이 신기루다 마술이다 귀신이다. 그걸 깨달으니까 불태우게 되는 거죠. 근데 자세히 보면 이 불태우는 일도 모든 사람 앞에서 불태웠다 그러잖아요 모든 사람 앞에서. 그래서 목장에서 적용하고 그 다음 주일에는 꼭 확인하셔야 돼요. 그 19금 지웠어요? 어디 핸드폰 검사합시다 모든 사람 앞에서 불태웠다고 해요. 어떤 목자님이 이런 나눔을 했더라구요 의사인데 병원을 하루 쉬는 날이 있었는데 주식을 했대요. 막 스릴이 넘치고 재미있었는데 2008년도에 주식으로 말아먹고 그때부터 손을 안 댔는데 지난주는 그냥 주식에 빠졌대요 너무 재미있다 보니까 그냥 사람이 피폐해져가지고 그 와중에 목장에서 목원들이 이것저것 물어보는데. 정신이 주식에 쏠려서 난감해서 어떻게 대답해 줘야 될지도 모르겠다고 내가 믿음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쉽게 무너지는 것을 보며 ‘진짜 교만하지 않고 믿음 생활 잘해야 되겠다. 이 목자 직분이 나를 지켜주는 울타리로구나. 목자 직분은 절대로 내려놓으면 안 되겠다’라고 생각했대요 그러니까 우리가 잘나서가 아니라 매주 이런 나눔을 하는 거죠 이게 바로 자복하며 알리며 불태우는 이런 적용인 거예요. 참 신기한 게 두란노서원 바로 옆에 즉 길 하나만 건너면 바로 옆에 창녀촌이 있었대요. 또 두란노서원 뒤에는 ‘아고라’(Agora)라는 큰 시장이 있었고 두란노 서원의 멀리 동쪽과 저쪽 서쪽에는 큰 감옥이 있었대요. 그러니까 우리가 늘 사단과의 싸움 속에서 사는데 아무리 말씀을 묵상해도 길을 나가면 유혹이 기다리고 있고. ‘감옥이냐? 전도하는 광장이냐?’는 내가 날마다 이렇게 결정을 해야 되는 거예요 네 이게 성령의 세력이 있어야 가능한 거죠 주의 말씀이 힘이 있기 때문에 이 힘은 군사적인 힘을 말해요.
한 사람의 영웅적 힘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목사가 설교 하나 잘했다고 세력을 얻는 게 절대로 아니에요. 자복하고 알리고 불태우고 또 내일 자복하고 알리고 불태우고 또 다음 주일에 자복하고 알리고 불태우고 여러분 목장을 이렇게 우습게 여기는 사람은 귀신에게 그냥 딱 그냥 끌려갑니다 이게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도, 지금 우리들교회가 되어가는 거 보세요. 이거 성령의 세력 아닙니까? 교회가 그렇게 가면 여러분들도 따라가야 세력이 쌓여지죠. 그런데 맨날 이거 바쁘고 저거 바쁘다고 (차일피일 미루게 되면) 귀신의 밥 되기가 딱 시간 문제인 거죠. 그래야지. 이렇게 사단의 나라가 힘을 잃고 하나님 나라가 힘을 얻어 뻗어나가죠 그 죄를 지어서 일보 후퇴해도 또 2보 전진하고 한 걸음 한 걸음 나가는 거지. 갑자기 우리가 성자가 돼서 뭘 어떻게 하는 게 아니에요 결코 임할 수 없었던 에베소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며 이제 흥왕하여 세력이 뻗어나가는데 이거는 미완료형으로 지금도 계속 하나님의 나라는 확장되는 거를 말해주고 있어요 그 출발이 어디 예요?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바울로부터 그 바울이 두란노서원에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면서부터 그리고 말씀에서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오늘 아침에 이제 바울이 또 매맞고 천부장 앞에서 이렇게 이제 간증하는데 다 자기를 때려 죽이려고 하는데 자기가 때려 죽이려고 (다메섹 도상에서) 가다가 주님 만났잖아요 오늘 목사님도 설교했지만 그러니까 자기의 죄를 생각하면 지금 그 유대인들을 바울은 용서를 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닌 거예요. 자기가 똑같이 그 죄를 믿는 사람들을 다 잔멸하고 때려주기를 그러니까 이게 자기의 죄를 늘 생각하기 때문에 바울로부터 이 사람은 숨 쉬기를, 복음 전하는 게 숨 쉬기예요. 그래서 이제 모두 말씀에서부터 출발을 하는 것이고 ‘여기 힘이 있어 주의 말씀에 힘이 있어’는 부사적으로 사용돼서 ‘흥왕하여’와 ‘세력을 얻으니라’ 라는 두 동사를 수식하는 전치사으로 봐야 되는데요 그러니까 주의 말씀이 힘 있게 행하며 주의 말씀이 힘 있게 세력을 얻고 그러니까 지금 성령의 세력은 바울의 이 신유의 능력 이게 아니고 말씀에 힘이 있다는 거예요 주의 말씀에 힘이 있어서 세력을 얻어가는 거예요 병 하나 고쳐서 되는 게 아니라는 거죠 에베소 도시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공동체가 큰 세력을 형성하여 힘 있게 자라나고 있음을 묘사하는데 이후에 이 에베소는 수세기 동안 디모데 같은 훌륭한 지도자들의 사역지로서 아주 그냥 전통적인 소아시아 기독교의 부흥을 이끄는 아주 중심지가 되었어요. 놀랍지 않습니까? 에베소를 왜 그렇게 오고자 했는지 이해가 되시죠? 우리들교회를 보면 정말 말씀이 힘이 있는 것 증명이 돼요 아파도 실직해도 가정이 힘들고 아이들이 힘들어도 다들 세력이 있어요. 왜냐하면 다들 주의 말씀을 붙잡고 붙들고 살기 때문이죠 정말 일주일 동안 수많은 사건이 일어나는 교회가 우리들교회예요 이걸 이 세상 어느 공동체에서 이렇게 끌고 가는가? 근데 다 세력이 있어요 교회전체가 세력이 있고 목장에 세력이 있습니다.
(적용#4)
-성령의 세력을 위해 자복하고 불태워야 할 알리고 태워 버려야 할 세상 권세와 능력 지식은 무엇입니까?
<Epilogue>
1)성령의 세력은 그래서 날마다 큐티하는 것이다
2)성령의 세력은 우리가 날마다 큐티하면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신다
3)하지만 우리는 짝퉁 세력을 분별해야 하며 그러려면 공동체에 자복하면서 늘 알리면서 불태우고 그래서 일보 전진, 일보 후퇴 2보 전진 하면서 한 발자국씩 성령의 세력을 늘려가야 될 줄 믿는다
4)날마다가 습관이 되면 큰 세력이 된다
5)하나님을 알고 말씀을 알고 율법을 아는 사람이 유대인이다
6)묻기가 꺼려지는 것은 내 안에 정욕이 있기 때문이다
7)성령의 아닌 것에 전심전력하면 결국 그것에 종 노릇하게 된다
8)말씀에 힘이 있어 세력을 얻어가는 것이다
9)이 세상 세력은 각각 힘의 대결인 것이다
10)믿음은 세상이 할 수 있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다
11)성령의 세력은 이 세상을 복음화 시키는 것이다
12)십자가에 처형된 예수야말로 하나님 나라 자체이며 믿음이 복음이다
13)담대히 말씀을 전하게 하는 것이 성령의 세력이다.
14)마음이 굳어 순종치 않는 자가 비난하는 것은 자기 스스로 복음을 거절하는 것이다.
15)성령의 임하심을 받았으니, 세력을 받았으니 사명의 길을 갈 수 있는 것이다.
16)사모하면 어디라도 가게 된다.
17)날마다 큐티-기도-목장은 여러분에게 최고의 세력이 될 것이다.
18)날마다 습관이 되면 큰 세력이 된다.
19)무슨 일을 당해도 ‘날마다’가 중요한 것인데 힘든 일을 당해도, 좋은 일을 당해도, 날마다 강론을 하고 큐티하고 바울도 일을 당했고 저도 당했는데 날마다 강론하고 여러분도 큐티하고 나누는 것이 굉장한 것이고 세력인 것이므로 여러분들은 지금은 최고의 세력을 쌓고 있는 것이다.
20)우리가 강론을 마음으로 받았다면 이게 손으로 실천을 해야 되고 능력을 행해야 한다
21)그때 성령으로부터 세력을 얻어 내 가정이 합쳐지고 중독이 끊어지고 생명이 이어지는 것이다.
22)내 삶의 현장에도 이 말씀이 적용될 때 손이 가고 발이 가는 병이 떠나고 악귀도 이제 나가게 된다는 것이다.
23)유대인이라는 말은 말씀을 알고, 하나님을 알고, 율법을 아는 자들이라는 것인데 늘 바른 진리가 선포되면 유사한 모조품(짝퉁)들이 생겨난다
24)성령의 임하심은 분별이라고 그랬는데 진짠 지 가짠 지를 분별을 못하니까 수많은 이단이 판을 치는 것이고 그 이단들도 다 예수 믿어 천국 간다면서 전부 다 똑같이 얘기한다
25)내가 장로교회에 다니다가 신천지 갔는데 다른 게 하나도 없더라고 하니까 이제 겉모습만 보는데 진짜 이렇게 속으로 들어가 보면 양의 탈을 쓴 이리에 그런 짝퉁이라고 할 수 있다.
26)말씀에 끝까지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은 어린 양과 비슷한 모습을 가진 용의 세력으로 7과 가장 비슷한 666이라고 했는데 게다가 말씀도 가지고 있고 게다가 능력도 있으니까 너무 비슷해 보이는 것이다
27)게다가 양의 탈을 썼으니 진짜보다 우리가 늘 위로만 하면 너무 좋게 느껴지는 것이다
28)그런데 예수님은‘화 있을 진저’, ‘이 독사의 자식들’ 하면서 야단칠 때만 하는 게 아니라 진짜 사람이 죽게 생겼으니까 가지 말라고 ‘너 낭떠러지에 떨어지면 죽는다’ 그래야지 ‘낭떠러지에 가도 괜찮아.’ 그게 사랑일까?
29)근데 다들 그렇게 착각을 하는데 자세히 보면 너무 다른 것이다.
30)귀신을 쫓아내기 위해서는 단호하게 명령을 해야 되는데 귀신과 타협하면서 애원을 하는 것이다
31)귀신은 단호하게 명령하며 쫓아 내야지 애원하면 안된다
32)음란 이런 것도 애원하면 안 되고 쫓아내야 되는 것이다.
33)이 세상은 하나님 아니면 다 귀신으로 중간 지대가 없다.
34)불륜인 줄 알면서도 단호히 끊지 않고 저 사람을 전도하기 위해 불륜을 행한다는 것이다
35)실족해서 이런 얘기를 들으면 물론 구원을 향한 진심은 진짜 같을지 모르지만 바로 이것이 짝퉁이라는 것이다
36)그런 것이 귀신에게 애원하며 타협하는 것이다
37)그러니까 유대인이지만 복음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이며 우리는 구원 예수 이름만 들어가면 그냥 분별을 못한다
38)성령이 말을 해야 되는데 감히 악귀가 말을 하는 형상인데 이것은 기도 응답이 아니라 악귀의 응답인 것이다
39)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걸 다 아니까 반대할 것이 뻔하니까 우리가 묻지 않는 것이고 물어도 목장에서 추상적으로 물으며 구원을 위해 한다고 말한다.
40)구원을 위해서 내가 이 일을 해야 된다고 그러니까 믿음이 연약한 지체들을 배려하는 것이 아니라면 묻기 꺼려지는 것들은 곧 내 정욕을 위한 일인 것이다
41)틀린 줄 알면서도, 죄인 줄 알면서도 내 욕심이 채워지니까 오픈할 수도 없고 멈출 수도 없지만 멈춰야 하고 오픈해야 한다
42)이 짝퉁으로 복음을 흉내 내며 다니던 그들의 결국이 어떠했나?
43)우리가 귀신과 타협해서 애원하다 보면 그 귀신이 나를 도와주는 게 아니라 나의 주인이 되어서 나를 지배한다.
44)결국 내 삶을 비참하게 만든다는 것인데유부남과의 사랑이 영원할 것 같지만 결국은 원칙이 아니니까 그 귀신의 지배를, 이 악귀에 조정을 받은 것이므로 사단의 주인을 모신 것이기 때문에 내 삶을 비참하게 만드는 것이다
45)즉 구원을 빙자해서 음란을 행하면 그 음란이 내 삶을 지배해서 파멸로 이끌고 구원을 빙자해서 돈을 벌려고 했는데 이제 그 다음에는 돈의 지배를 받게 되고 구원을 빙자에 봉사를 했는데 그 봉사에 내 심신이 지치고 생색이 나고 그리고 오히려 좌지우지되니까 내 욕심을 채우려고 했던 그것에 오히려 다 지배당하고 마는 것이다
46)하나님 뜻이 아닌 건 결국 다 종 노릇하게 되어 있다.
47)성령의 세력은 날마다 큐티하며 마음에서부터 시작해서 손으로 이어져야 하는데 그 중심에서부터 자신의 죄인 됨을 모른 채 이 마술사처럼 손으로 행위만 따라하니까 결국 너도 죽고 나도 죽이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48)처음에 비슷한 것 같지만 그 결과는너무 다른 것이다
49)바울의 복음은 악귀를 쫓아내고 삶이 변화되고 주변이 함께 살아나는데 유사한 이 짝퉁 마술사의 복음은 처음에 비슷한 것 같지만 상하게 되고 벗은 몸으로 수치를 당하며 주변 사람들도 함께 죽고 도망가게 된다.
50)비슷한 것 같지만 생명은 세력을 얻고 비슷한 짝퉁은 썩어 버려지는 것이다
51)여기 뭐 딴 길이 있을 거라고 생각 마시라. 지금은 모르나 후에는 알리라
52)그리고 그 죄에 대한 값을 결코 끝까지 받게 되어 있다
53)계속 타협하면서 ‘나가 주실래요?’ 대신에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나가라’ 이래야 되고 태도도 단호 해야 되는데 다 여지를 주니까 다 불륜이 행해지는 것이다.
54)‘나는 그럴 마음이 없었는데’라는 소리는 귀신에게 애원하는 것과 다름 없다
55)성령의 세력은 날마다 큐티하는 것이고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는 것으로 절대로 이 짝퉁 세력을 분별해야 되는 것이다
56)‘내가 보니까 이단도 예수 믿고 천국 간다’ 그러니까 처음에는 모른다
57)그런데 이 삶에서 귀신을 쫒아가는 역사가 일어난다, 즉 ‘불륜을 행해도 구원받았으면 된다. 한 번 회개했으면 되는데 왜 자꾸 그렇게 정죄감 가지고 회개하냐?’고 하니까 내가 불륜을 행하기에 도박을 행하기도 편한 것이다.
58)귀신 편을 들어주니까 결국 이단도 돈도 많다고 그러니까 그냥 불륜 남녀가 돈도 많아 뭐든지 다 갖췄다고 하니까 진짜 같은 것이다
59)우리가 대부분 내가 행하고 구하는 것들이내 욕심인지 구원인지를 알 때도 있고 모를 때도 있는 것이다.
60)믿는 사람들의 특징이 죄를 더 이상 짓지 않는 것이 아니라 또 실수하고 넘어지고 죄를 짓더라도 십자가 앞에 나와 이 교회 공동체에 나와 믿는 사람들의 모임, 내가 죄인인 공동체에 나와서 계속 자복하며 알리는 자들 이 바로 그 두려워하고 있는 사람들 앞에 믿은 사람들이 자복하며 이걸 알려야 되는 것이다
61)자복이라는 단어는 공개적으로 밖으로 드러내어 자신의 죄를 사람들과 하나님 앞에서 조금도 숨기지 않고 낱낱이 고함을 말하는 단어다.
62)그러니까 자복은 자기 죄를 보지 않으면 할 수 없는 행동이다
63)그러니까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두려워할 때 믿는 사람은 자복하여 회개하여 오픈하여 알리며 이제 불태우는 것까지 가야 한다는 것이다
64)아이가 힘들어지고 그럴 때 믿는 우리들이 간증하며 수치를 나눌 때 세력을 얻게 된다
65)그러니까 혼자서는 적용 못하는 것이고 내가 할 수 없으니 공동체에 말하고 또 그 공동체의 힘을 얻어 다시 내 속에 마술책들을 불태우고 그 불태운 것들을 또 공동체 앞에서 간증하고 이렇게 하나씩, 하나씩 불태워가니까 이 악하고 음란한 에베소 땅에 성령이 흥왕하여 세력을 얻게 되는 것이다.
66)바울이 하나님의 나라의 말씀을 증거하는데 연수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것인데 어느새 알리고 자복하고 함께 불태울 공동체가 이 악하고 음란한 에배소(Ephesus) 땅에 생긴 것이다
67)날마다의 강론이 이렇게 놀라운 것이며 내가 분별을 잘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맹인이라고 할 수 있다
68)내가 분별할 수 없기에 알리고 묻고 기도하고 또 공동체에 알리고 그럴 때 성령께서 우리에게 분별하게 해주시는 것이다.
69)이처럼 자복하며 알릴 때 내가 공동체에서 알리면 이것이 기복인지 귀신을 섬기는 것이었는지 마술을 행하던 일인지 깨닫게 되는 것이다
70)‘내가 구원을 위해 자녀를 사랑한다고 행했던 일들이 자녀를 죽이는 일이었구나. 내가 정말 귀신에게 애원했구나. 내가 자르라고 했던 일들이 모두 다 구원을 가로막는 일이었구나’ 라는 것들을 공동체에 와서 자복을 해야 깨닫게 되는 것이다.
71)그러면 우리는 날마다 목장 예배 속에서 내 삶 속에 수많은 마술책을 불사르게 되는 것이다.
72)회개하며 오픈할 때 나는 내가 잘나서가 아니고 내가 그냥 오픈을 하면 그 오픈 자체가 내 애초의 얘기인데도 다른 사람들을 살리고 세력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73)그 목장이 세력을 얻고, 그런 교회가 세력을 얻고, 이런 교회가 많아지면 나라가 또 세력을 얻게 되는 것이다
74)나는 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자복하고 공동체에 알리고 이 일이 신기루이고 마술이고 귀신인 것을 깨달으니까 불태우게 되는 것이다
75)자세히 보면 이 불태우는 일도 모든 사람 앞에서 불태웠다고 그러는데 그래서 모든 사람 앞에서, 목장에서 적용하고 그 다음 주일에는 꼭 확인해야 한다
76)우리가 잘나서가 아니라 매주 이런 나눔을 하는 것이 바로 자복하며 알리며 불태우는 이런 적용인 것이다
77)자복하고 알리고 (마술책을)불태우고 또 내일 자복하고 알리고 불태우고 또 다음 주일에 자복하고 알리고 불태우는 것이다
78)목장을 우습게 여기는 사람은 귀신에게 그냥 끌려가게 된다
79)맨날 이거 바쁘고 저거 바쁘고 차일피일 미루게 되면 귀신의 밥 되기가 딱 시간 문제인 것이다
80)그래야 사단의 나라가 힘을 잃고 하나님 나라가 힘을 얻어 뻗어나가게 되는 것이다
81)죄를 지어서 일보 후퇴해도 또 2보 전진하고 한 걸음 한 걸음 나가는 것이지 갑자기 우리가 성자가 돼서 뭘 어떻게 하는 게 아닌 것이다
82)결코 임할 수 없었던 에베소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며 이제 흥왕하여 세력이 뻗어나가는데 이거는 미완료형으로 지금도 계속 하나님의 나라는 확장되는 거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83)그 출발은 바로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바울로부터 그 바울이 두란노서원에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면서부터 그리고 말씀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84)자기의 죄를 늘 생각하기 때문에 바울처럼 복음 전하는 게 숨 쉬기다
85)성령의 세력은 바울의 신유의 능력이 아니고 말씀에 힘이 있다는 것으로 주의 말씀에 힘이 있어서 세력을 얻어가는 것이다
1절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While Apollos was at Corinth, Paul took the road through the interior and arrived at Ephesus. There he found some disciples)
2절 이르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르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and asked them, "Did you receive the Holy Spirit when you believed?" They answered, "No, we have not even heard that there is a Holy Spirit.")
3절 바울이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니라(So Paul asked, "Then what baptism did you receive?" "John's baptism," they replied)
4절 바울이 이르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Paul said, "John's baptism was a baptism of repentance. He told the people to believe in the one coming after him, that is, in Jesus.")
5절 그들이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On hearing this, they were baptized into the name of the Lord Jesus)
6절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When Paul placed his hands on them, the Holy Spirit came on them, and they spoke in tongues and prophesied)
7절 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There were about twelve men in all)
<Prologue>
우리가 땅의 씨앗을 뿌리면 생명을 맺습니다. 과학자들이 씨앗의 색깔과 수분 단백질 등의 성분을 백 프로 똑같이 만들어서 심었습니다. 그 씨앗이 (발아하여) 맺어졌었을까요? 아무리 양육을 해도 조건을 똑같이 해도 생명이 자라지 않습니다. 신기하지 않습니까? 생명은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삼위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과 은혜는 가르친다고 되지 않습니다. 제자 양육은 성령이 선행되어야 하는데 시간적 순서로 말할 수 없습니다. 성령의 제자 양육은 성령에서 시작됩니다. 성령을 받지 못하면 개미처럼 수고해도 썩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 있었는데 예루살렘에 임하신 성령이었고 에베소에서 성령 강림이 임하시게 됩니다. 제자 양육과 이어지는 본문이기에 제자 양육은 성령의 임하심이 절대적입니다. 성령이 가르쳐서 되는 것이 아니지만 이렇게 가르치기도 해야 합니다. 오늘은 성령의 임하심에 생각해 보겠습니다.
<말씀 요약>
1.구원에 분별에 절대적입니다.
1절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바울(Paul)에게 아볼로(Apollos)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게 하는 큰 하나의 역할을 했다고 보여지는데 원래 바울은 아시아의 에베소(Ephesus)로 가고 싶었지만 베드로의 구역 임을 의식해서 마게도니아(Macedonia) 유럽으로 갔습니다.
2차 여행 마지막에 들러서 강론했더니 유대인들이 오래 머물라고 청했지만 하나님의 뜻이면 다시 오겠다고 했었고 돌고 돌아 다시 왔습니다. 어떻게 분별 했을까요?
고린도 후서(2 Corinthians) 7장 10절 보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게 하는 것이오.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Godly sorrow brings repentance that leads to salvation and leaves no regret, but worldly sorrow brings death)
바울은 아볼로에 대해 살짝 근심을 한 것 같아요 아볼로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입니다. 지금으로 따지면 하버드입니다 너무 탁월합니다. 그런데 이 신약 성경에 히브리서가 저자 미상이지만 아볼로 저자 설이 유력하다고 합니다. 히브리서를 쓸 정도이면 대단한 사람입니다. 히브리서의 문체가 다릅니다. 대단한 말씀입니다. 출애굽기(Exodus)-레위기(Leviticus)-신명기(Deuteronomy)의 주석을 달았는데 레위기에 단 주석은 아주 특별한 주석이라고 합니다. 구약을 좔좔 꿰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아볼로의 이름을 안 남겨주셨습니다. 디모데전후서도 바울이 썼는데 디모데 이름을 붙여 주셨습니다. 아볼로가 그곳의 후임으로 갔는데 말을 엄청 잘합니다. 바울과 비교하면서 아볼로에게 뻑이 갔습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고린도교회에 파당을 가져왔습니다. 고린도 전서 2장에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고 하나님만이 자라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아볼로를 유리그릇처럼 다루었다고 합니다.
편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동역을 했음에도 아볼로 이름이 바울의 마지막 로마서 16장에 안 나옵니다. 구속사를 잘 아는데도 한 마음이 안되었습니다. 아볼로의 언어와 명칭과 법이 그를 사로잡고 넘어가지 못하는 본인의 지식 때문에 여기까지 되었습니다. 그랬을 것 같습니다. 히브리서를 보면 ‘내가 바울보다 잘났다’라는 생각이 들 것 같습니다. 이 모든 것은 물론 아볼로에 대한 결론이지만 왜 이때가 에베소에 올 때일까요? 에베소가 아주 황금어장이지만 항상 십자가의 지혜와 타이밍을 분별하는 바울입니다. 고린도에서 가르치다 보니 두 도시가 비슷하고 돈 많고 음란한 점이 많았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많다고 했고 양육의 시간을 내니 열매가 많았어요. 의로운 아덴(Athens)에서는 열매가 없어서 떠났잖아요. 그러니 이제 고린도(Corinth)는 1년6개월 있었는데 에베소(Ephesus)에 복음이 들어가야 하잖아요. 그가 떠난 에베소는 아볼로가 요한의 세례만 안다고 했잖아요.
에베소가 근심이 되어서 갈라디아(Galatia) 지방 다니는 중에 자기의 고향 길리기아(Cilicia) 다소(Tarsus)도 못 가고 급히 온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도 분별했습니다. 바울은 가고 싶은 에베소가 그때 베드로 사도 구역이라고 안 갔잖아요. 너무 가고 싶었는데 성령이 막았다고 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도 에베소가 생각보다 전도가 안 되었어요 또 분별했습니다. 최고의 아볼로가 전할 때도 대단하게 여기니 그렇기도 했겠고 남의 터에 가는 것 같아서 안 갔습니다. 둘은 만난 적이 거의 없습니다. 아볼로가 인도받아 추천을 받고 고린도를 떠났고 바울은 에베소가 요한의 세례만 아는 것 같아 걱정되어 모두의 마음을 다 읽었잖아요.
복음을 전한다고 마구 가고 이러면 안 됩니다. 사람의 마음을 읽어야 합니다. 전할 때라고 성령이 올 때는 급히 갔습니다. 에베소가 거점지라는 것을 알고도 때마다 분별을 합니다. 모두 성령의 작별로 윈윈(win-win)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분별하고 분별해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아볼로의 말을 듣고 좋다고 하니까 걱정되는 마음이 이해되십니까? 바울은 죽이려고 하고 아볼로는 좋다고 하는데 바울은 박해 받았다는 언급은 없습니다. 이런 사람이 교회를 담당했다는 말이 없습니다. 탁월함은 있지만 2% 부족한 부분이 있습니다. 이것은 구원에 연관되기 때문에 분별해야 합니다. 성경은 인간론이기 때문에 성령이 임하신 바울에 정확한 분별이라고 생각합니다. 임하신 분별이 역사를 가지고 옵니다. 내 생각으로 한 판단이 한 영혼을 좌우합니다.
(적용#1)
-성령의 임하심으로 항상 분별하나? 내 생각으로 판단하나?
-나는 주변 사람들이 편하다고 하나? 어려워하나? 나는 뒤끝이 있나? 없나?
2.어떤 제자가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어떤 제자를 만났는데 예수님의 제자를 의미하지만 아볼로의 제자인지 아시아를 관장하는 베드로 제자인지 모르는 제자를 말합니다. 만났다는 말은 찾았다는 뜻입니다. 적극적으로 찾아가 만났습니다. 반기는 여러 사람 가운데 어떤 사람이 있었다는 것인데 가장 최근에 떠난 사람이 아볼로잖아요? 그러니까 근심이 되어서 이 제자들부터 찾아가 만났습니다.
2절 이르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르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
바울이 이제 진단을 해야 되죠. 질문으로 양육이 시작됩니다. 질문을 잘하는 사람이 성령이 임하신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도시를 방문했을 때도 없던 기록이 나옵니다. 늘 강론을 했잖아요 이곳에서는 성령을 받았는지 먼저 묻고 사역을 시작합니다. 아볼로 제자들이 교만했거든요. ‘너희가 도대체 누구 제자냐? 성령을 받았느냐?’ ‘성령의 계심을 듣지 못했다’ 바울의 근심이 맞았습니다. 바울이 만난 사람들은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한 제자였습니다. 유심히 보니 성령을 받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과 성령의 받는 것은 다르지 않습니다. 성령을 받지 못하면 예수님의 제자가 아닙니다. 성령을 받지 못하면 결코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갈 수 없고 에베소가 힘든 곳이기 때문에 바울이 오자마자 확인을 하는 것입니다. ‘에베소 같은 곳은 음란하고 그냥 세상 세력에 찌든 사단의 세력이 강하다’라고 보는 곳이기 때문에 성령의 임하심이 없이는 에베소 같은 내 남편 자식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사단의 나라가 너무 강하면 우리는 성령 없이는 그 사람들을 주님께 인도할 수 없습니다.
에베소 같은 저 인간의 마음에 교회가 세워지기 위해서는 어떤 제자가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야 하는데 그럼 성령을 어떻게 받을 수 있을까요? 원한다고 받아 지나요? 성령을 돈의 사려고 했다고 책망 받은 사례도 있습니다. 구제하고 헌금하면 성령 받나요? 돈으로 살 수도 간절히 원한다고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합니다. 믿을 때에 성령을 받습니다.믿을 때라는 말은 조건이 아닙니다. 믿음이 조건이 되면 행위가 됩니다. 믿을 때라는 말은 동시적 동작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동시에 일어납니다. ‘믿었다면 성령을 받았을 텐데 왜 나타나지 않느냐?’ 내가 예수를 믿었다면 동시에 성령의 열매와 모습이 나타나야 한다 아무리 탁월한 교회와 양육을 받아도 성령이 임하시지 않으면 예수의 제자가 아니고 사람의 제자로 살아갈 뿐입니다. 어떤 제자들이 성령이 있는 것을 듣지 못한 것처럼 믿기 때문에 어떤 수치도 당할 수도 있는 것이고 죽기보다 싫은 적용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죽어서 아내가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다고 합니다. 이분은 기도와 성경 필사에 전념하시는 제자 반열에 있는 분입니다. 실제로 아내가 마지막 왔을 때 정신과를 가자고 했는데 내가 왜 거기를 가냐고 3시간을 따지고 3시간을 반박하고 당신이 예수를 믿으면 나를 용서해야 한다고. 아내를 향해 용서와 사랑을 외치니까. 아내가 그 이후로 모든 연락을 끊고 이혼 서류를 보내왔다고 합니다
용서는 가해자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을 때 성령을 받았느냐? 도대체 누구 제자냐? 믿음이 무엇입니까? 나의 수치를 인정하고 죽어지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분은 그렇게 열심히 성경 필사를 하고 보고 경건하게 지내는데 아내가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다고 이렇게 요새 간수 같은 사람이 많습니다. 이분이 고백했는데 죽기보다 싫은 것이 인정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죽기보다 싫은 것이 정신과를 가는 것이고 나 자신을 직면하는 것, 자녀에게 아내에게 사과하는 것, 공동체에 고백하는 것은 믿음이 있을 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집사님도 아내와의 문제에 있어서 자신이 죄인임을 생각해 본 적도 듣지 못했습니다. 무엇을 믿습니까? 오늘 내게 말해주는 말씀을 믿으시면 됩니다. 발버둥 치는 것도 말씀을 믿는 자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효과적으로도 우시는 것입니다. 에베소보다 악한 시대입니다.
바울이 이것을 간파했습니다. 어떻게 간파 했나요? 험한 전도여행을 하고 핍박을 당하면서 아볼로를 분별했어요 그러니까 어떤 제자도 분별을 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임하신 분별이라고 생각합니다. 성도로서 제자로서 무서운 열심 뒤에 감추어진 빈자리 그것을 보았습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라고 한 이 질문은 실전적인 질문이고 그들의 수준을 드러내는 질문입니다. 목사에게 ‘구원의 받으셨어요?’라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적용#2)
-내 실체를 드러내 주었던 질문은 어떤 질문이었나?
-지금 나에게 죽기보다 싫은 적용은 무엇인가?
-아내도 남편도 자녀도 맞다고 말하는데 나 혼자서 인정하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성령을 받았나?
-여러분은 누구의 제자인가? 내가 제일 기억나는 스승은?
3.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3절 바울이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니라
4절 바울이 이르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5절 그들이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분별을 제대로 한 거예요 삶의 능력도 적용도 자신의 수치를 드러냄도 없는 어떤 제자들을 향해 바울이 묻습니다 너희가 무슨 세례 받았느냐? 브리스길라(Priscilla)와 아굴라(Aquilla)가 아볼로(Apollos)를 양육한 것처럼 바울은 이 어떤 제자들을 양육해 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양육은 답을 제시하는 게 아니라 질문을 계속해야 돼요. 질문을 통해 자신을 생각하고 묵상하고 말씀에 비추어 자신을 살핌으로 양육이 되어지는 거죠.바울은 다시 질문합니다. ‘너희가 무슨 세례 받았냐?’그러니까 제자들이 아주 자신 있게. 요한의 세례요. 이거는 ‘우리는 아볼로 제자입니다’ 이거하고 똑같아요 이 대단한 아볼로가 세례 요한의 세례를 받았다고 하니까 그 대답을 듣고. 바울은 그 요한이 세례를 베풀며 어떤 말을 했는지 그들이 믿는 요한의 입을 빌려서 이야기를 해줍니다. 그 요한이 뭐라고 말했습니까? 바울이 인용한 마태복음 3장 11절을 보면.
(마태복음/Mattew 3:11)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I baptize you with water for repentance. But after me will come one who is more powerful than I, whose sandals I am not fit to carry. He will baptize you with the Holy Spirit and with fire.)
여기 성령 세례 나오죠. 요한의 세례는 물로 세례를 베풀어요 우리는 요한이 어떤 인물인지 요한의 세례가 어떠한지 지난번 설교에서 ‘회개하라 독서의 자식들아’를 묵상했어요 그런데 이 요한의 메시지가 아직 오지 않은 소리, 예배하는 자의 소리라면 예수님은 하나님나라 자체가 이제 이미 왔잖아요. 그렇죠 그게 예배하는 자고 이미 임한 메시지에요 그 능력의 차이는 비교할 수가 없죠.
세례 요한의 설교가 듣기에 의롭고 멋있어서 그에게 그렇게 열광하는 사람이 많아도 이 속 사람의 죄를 못 보기 때문에 아까 이혼 앞둔 분도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예수님의 설교를 들으면지금 하나님 나라가 내게 임했기 때문에 이 더러운 내 속을 찔러주는 임박한 설교이기 때문에 변화가 일어나는 거예요. 요동이 되는 거예요. ‘뭐 할 거다’라고 하는 것 때문에 요동되진 않아요. 지금 내 속을 찔러주니까즉 예수님의 세례는 물 세례가 아니고 성령과 불의 세례예요. 불은 심판이죠. 즉 예수님의 세례는 구원과 심판이 함께 임하는 세례예요. 무슨 말이죠? ‘내가 예수 믿으면 잘 된다’가 아니라 내가 예수를 믿어 심판을 이제 받을 수 있는 거예요.
‘회개합니다. 제가 독사의 자식입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내가 어떤 불의 심판을 받아도 마땅한 죄인 임이 깨달아 지고 죄인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세례인 거예요 용서하고 깨끗하게 씻겨주는 세례와 동시에 태우고 심판하는 불의 세례입니다. 용서받아서 이혼을 당하지 않게 되는 게 아니라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제가 독사의 자식입니다. 내가 이혼을 당해도 할 말이 없어요. 이 심판 가운데에서도 이 심판이 내 죄보다 가벼운 것을 깨닫게 해주세요’라고 하는 세례예요 우리는 심판 싫어해요 날마다 용서 물 깨끗함만 좋아해요. 하지만 내 속의 쭉정이가 뼈 속까지 죄인인 내 속에 끝없는 죄악으로 이 땅에서 불의 심판을 받는 것이 영원한 심판을 면하는 은혜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세례를 받은 사람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 저는 어떤 불의 심판을 받아도 마땅한 죄인입니다
이런 고백을 하는 사람에게는 이혼이 막아져도 은혜이고 이혼을 당해도 은혜입니다 환경이 아니라 이렇게 불의 심판을 통해 하나님의 상급으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환경에 영향을 받지 않는 거죠 그러니까 예수의 세례 성령 세례 불 세례를 아는 자들은 그러므로 내 죄 때문에 깨어진 과정을 보며 끝없이 애통하며 눈물을 흘리게 돼요 왜냐하면 나로 인해 저 영혼까지 함께 불의 심판을 받기에 이 심판 속에 능히 나를 살릴 예수를 전하는 마음이 불붙듯 일어나며 갈급하게 되기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이혼을 하고 나서도 이렇게 적용을 해야 되는데 이혼하기 전에 그렇게 이혼을 해야 되겠다. 그래야 되겠어요. 하지만 요한의 세례만 아는 하는 자는 불의 심판을 받아 마땅한 자임이 자신임을 들어본 적도 없고 깨닫지도 못하기 때문이에요 이 땅에서 불의 세례로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림을 경험하는 것은 축복이에요 그 불 세례 속에 내 죄가 깨달아져 회개한 자는 영원한 심판과 형벌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여러분 아프간 (Afghanistan) 보세요. 심판이 그렇게 갑자기 와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전부 총살당하고 기가 막힙니다 우리가 지금 천국 문 앞에서 이렇게 되겠구나 그러기에 우리는 요한의 세례가 아닌 그 세례 요한이 외쳤던 예수의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거죠.
다시 말하면성령 세례란 정확한 복음인 예수님을 확실하게 아는 거예요 바울은 그 예수님을 정확하게 다시 설명하고 복음을 설명한 거예요 이는 바울이 수없이 강론했던 ‘예수께서 내 죄를 대신해서 죽음과 부활하심 다시 사심과 승천하시며 다시 오시는 것’을 믿는 것이죠. 그분의 말씀을 믿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나의 죄를 위해 죽어 주신 예수님의 이야기를 정확하게 읽어가기에 성경이 나를 읽고 가는 것이 성령 세례입니다. 이것보다 정확한 성령 세례가 없습니다 구속사로 성경이 읽혀지는 거. 이게 성령 세례예요 세례란 죽는 것이기 때문에 성령 세례란 십자가 지는 거예요. 이들이 어떤 제자인 이유는 아볼로의 가르침 이라기보다 아볼로도 어떤 제자도 지는 십자가가 없었기 때문이에요. 십자가를 지는 것은 사람들이 열광하며 환호하는 것이 아니라 다 손가락질하고 욕하고 던져버리고 싶은 길이기 때문입니다예수님의 제자들은 각자의 자기 십자가를 져요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이 사도행전 19장 이 본문은 교파마다 해석을 달리하는 아주 어려운 본문입니다. 요한의 세례 받았는데 다 또 세례를 받는다고 하니까 ‘재세례파’가 등장을 하고 저 뒤에 가서 보면 성령 받으려면 방언을 해야 된다고 그래서 ‘오순절 교파’가 나옵니다. 성령은 오순절에 처음 오신 것이 아니고 창세 전부터 계시며 지금도 계시고 장차도 계실 것입니다. 성령 세례의 표적은 사람을 보는 눈이 달라지는 거예요
좋아하는 사람의 부류가 달라지는 것, 여러분들이 지금 어떤 사람을 좋아하고 있는가 한번 생각해 보세요. 서울에서 초 중 고등학교 대학교를 다 나왔지만 일류를 좋아하는 제가 함께하는 분은 여러분이에요 전혀 알지 못했던 우리가 좋아서 이렇게 지금 가는 거예요 여러분은 누가 그렇게 좋으세요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이 물세례 성령 세례는 동시에 올 수도 있고 순서가 뒤바뀔 수도 있지만 성령 세례를 알려주기 위해서 바울이 가르친 것은 정확한 예수 그리스도 복음입니다.
(적용#3)
-내가 예수 믿으면 잘 된다가 아니라 내가 당한 불의 심판은 무엇인가?
-내가 왜 이런 일을 당하나? 지금 던져버리고 싶은 십자가는 무엇인가?
-사건 앞에 나는 어떤 심판을 받아도 마땅한 죄인 임이 인정되나?
4.방언과 예언을 합니다.
6절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7절 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
안수 직후 방언도 하고 예언도 했는데 여기에 쓰인 두 개의 동사의 시제는 모두 계속됨을 나타내는 미완료 과거형이에요 성경에서 방언이라는 말이 두 가지 의미로 쓰였는데 이제 성경을 목적으로 이제 바벨탑 사건의 저주를 풀어 주신 그 외국어 방언이 있고 개인의 신앙에 확신을 주기 위하여 주어진 은사로 주신 방언이 있어서 고린도전서 13장 1절에서는 이것을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로 표현을 했어요. 천사의 말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의 방언이고 사람의 방언은 외국어이지만 우리는 성령 받음을 생각할 때 그냥 방언이나 예언 또는 여러 기적 이걸 기적 같은 은사에만 관심을 가지기 쉬워요. 그래서 그런 가시적인 능력이 있어야 성령을 받았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이제 오순절도 그렇고. 그래서 저도 이거 가서 한번 경험을 했는데. 그래서 이렇게 방언을 받으라고 막 연습을 시키더라고요 ‘랄랄랄라’ 따라 시작을 하라고. ‘랄랄랄라’ 그러면서 방언이 또 터지더라고요. ‘랄랄랄라’ 시키는 데가 있고 ‘코카콜라’를 또 시키는 데도 있어요. 그걸 빨리 연습해보라고 이런 생각은 성령을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에너지로 여기는 것입니다 기준이 우리가 행하는 은사에 있으면 성령은 한낮 에너지나 자원이 되는 것이죠.
잘못된 이해입니다.
내 생각, 내 가치관, 외모만 취하던 세상 가치관에서 이제 내 삶이 말씀으로 해석이 되니 성령이 임하시고 방언과 예언을 말하게 됩니다 방언은 제가 2장에서도 설명을 했었지만 이건 소통의 능력이에요 공감력 소통이 왜 중요하죠? 우리 영원히 타락하여 사단에 속한 사람들이라서 주님과 소통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우리는 매사 하나님의 마음 뜻을 알 수가 없어요.그래서 성령께서 오셔서 하나님 마음을 알려주신 거예요.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고 내 모든 고난과 고통이 이 죄인이 나를 구원하시려고 허락한 아버지의 찢어지는 마음이니까 소통이 안 되는 나를 주님과 소통하게 만드는 것이 방언이에요. 그러면 그 주님의 마음을 어떻게 공감하죠? 말씀을 통해서 그래서 말씀으로 말하고 말씀으로 기도하는 것이 방언이에요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공감하는 것 이게 방언이니까 사단에 속한 세상 사람들은 알아들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말씀으로 기도하는 것이 어렵다고 해요 불신 결혼, 동성애가 말씀에 다 나와 있는데 인권이 우상이 되니까 절대로 못 알아들어요 고난이 축복이다. 문제 아이는 없고 문제 부모만 있다 옳고 그름에 화신인 이 세상 사람들은 선악과 먹고 매일마다 나는 옳고 너는 틀렸기 때문에 모든 것이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으로 들립니다 그래서 이 구속사는 방언 중에 방언이에요. 그래서 우리들 교회 와서 말씀이 안 들린다고 하는 거예요. 제가 도덕 설교 윤리 설교를 안 하기 때문에 하지만 그렇게 성경을 읽었는데 이혼이 되고 잃으니까
이제 오셨잖아요 해결이 안 되니까 이게 축복이죠 하지만 성령이 임하면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공감하고 내가 또 말씀으로 전해드리는 기도를 하게 돼요 왜냐하면세례를 통해 성령 세례를 통해 내 생각은 예수와 함께 죽고 이제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마음이 나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예언은 무엇인가요? 어디 가서 점 보는 예언이 아니에요 우리 사주 팔자 관상 너무 좋아합니다. 믿을 사주 팔자도 봐준대요. 사야 할 주식 팔아야 할 자리 봐주는 거래요. 문전성시를 이룬답니다. 오늘 뭘 살까요? 오늘 뭘 팔까요? 여기서예언의 첫 자인 ‘예’는 미리 ‘예(豫)’자가 아니고요. 맡길 ‘예(預)’ 말씀 ‘언(言)’이에요. 하나님을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어요. 즉 예언은 뭐냐 하면은 감화력인데요 하나님이 주신 말씀의 소통이 일어나서 이 말씀을 맡아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내게 맡겨주신 말씀으로 내 삶을 해석하여 이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것. 이것이 예언입니다. 바울을 통해 브리스길라(Priscilla)와 아굴라(Auilla)가 변화되고 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통해 아볼로(Apollos)가 변화되는 것 이것이 예언입니다.
이 십자가 앞에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지금 내 삶의 이유를 말씀으로 해석하여 나와 같은 고난에 있는 자에게 권능으로 나아가 그 사람이 내가 깨달은 이 말씀으로 변화되는 것이것이 예언이에요 그러니까 방언도 예언도 영혼 구원을 위함이며 성령이 임하시면 영혼 구원을 길로 놓고 가게 됩니다 결론은 날마다 말씀 묵상, 가정 중수다. 7절에 모두 12 사람쯤 되니라 열두 사람이 아니고 쯤 되니라 이거는 산수가 아니고 10이란 숫자가 중요하죠. 12는 회복의 숫자예요. 구약의 열두 지파 신약의 열두 사도를 예표합니다 구약의 열두 지파가 다 무너지고 신약에 또 열두 사도가 세워졌잖아요. 우리가 죄를 지으면 무너졌지만. 하나님이 회복시키셔요. 즉 12는 말씀을 맡은 공동체를 의미해요. 말씀을 맡은 공동체 무엇입니까? 목장이죠 12는 마지막 우리가 천국에 갈 때도 천국을 표현하는 숫자입니다. 천국 문이 열 둘이에요. 그 문에 열두 보석 열두 천사가 있죠. 생명나무 강가에 열두 열매가 맺혀요 요한계시록에 모이는 것은. 다 열 둘이에요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나쁜 습관과 같이 하지 말라고 그러잖아요. 그래서 이 성령의 임하심은 그 열두 공동체 온전한 회복이에요. ‘목장의 마스코트로 7살 아이의 나눔을 시작으로 한 명도 빠지지 않고 늘 우리가 여기 있어요’ 하는 목원들의 얼굴을 보면 한 달 동안 월급을 못 받고 불치병이 하루하루 힘들고 이혼을 하고 싶고 의인인 남편을 향해 예수와 사는 것 같다는 이런 목장 모임이 열두 공동체예요.
청년부 큐페 온라인 조별 나눔에 7명이 들어왔는데. 6명이 우울증 약을 먹고 있다가 약을 안 먹고 힘들어하는 그 한 명에게 모두가 약 잘 먹고 잘 넘어가야 한다고 처방을 내줬는데 그게 진짜 ‘다 우리가 여기 있다’(We are all here)의 열두 공동체 아닌가요? ‘우리가 다 여기 있다’는 잘나서가 아니라 구원받은 공동체인 거예요. 구원받았는데 아픈 사람 안 아픈 사람 다 포함되는 구원받은 우리 건강한 사람이 우리인가요? 이 어떤 제자들이 열두 사람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오늘 마지막 9절 열두 사람의 예수의 제자 온전한 회복 공동체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 소통과 감화를 시키는 방언과 예언에 이 열두 공동체의 나눔을 들려드릴게요
저는 우리들교회 청년부에 다니고 있는 청년이에요. 이번 청년부 큐페 때 너무 많은 은혜를 받았고. 특히 성령의 죄수 목사님 설교를 듣고 너무 많이 울었어요 조 모임도 좋았고. 마지막 날은 무려 일곱 시간 동안 조 모임을 했어요. 저도 제가 신기해요. 너무 감사한 마음이 들어 목사님께 매를 씁니다 몇 년 전에 저는 친했던 학교 선배에게 성폭행을 당했어요. 애써 잊으려고 해봐도. 그 트라우마가 저를 계속 괴롭히고 저 스스로 더럽다고 생각하며 살았어요 그때마다 자살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실제로 세 번이나 이 간수처럼 자해를 하고 자살 시도를 했습니다. 우리들교회 와서도 이 이야기를 하는 것 힘들더라고요. 코로나 때문이었다고 생각이 되긴 합니다. 우리가 대면으로 이렇게 좀 해야 되는데. 그때가 계속 생각이 나고 괴로운 마음이 많이 들었어요 그런데 이번 큐페 때 설교를 들으면서 그것을 말하지도 못하고 괴로워만 하고 있는 제 모습이정말 귀신 들린 그 여종 같았어요.
그런데 첫날 내 존재 자체가 귀하다고 말씀해 주시는 설교 말씀을 듣고 참 많이 울었어요 둘째 날 저녁에는 내가 갇혀 있는 깊은 감옥에서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말씀이 참 위로가 되었고 내가 그동안 성폭행의 상처와 괴로움 속에서 힘들게 살아왔던 것도. 고난 때문이 아니라 참 하나님이 없었고 말씀이 없었기 때문에 이 소통과 이제 감화를 못 받은 거죠 그죠. 이 사실이 깨달아졌어요 3년 만에 목장에서도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를 큐페의 조모임 때 나누면서 처음 이야기를 했어요. 마침 그때 목사님이 줌으로 탐방을 오셔서 제 야기를 들으시고 물어봐 주시고 같이 울어 주셨어요. 같이 나눔을 하고 있던 언니 오빠들도 저를 위로해주고 같이 울어 주셔서 저도 펑펑 울면서 나눔을 했는데 ‘이게 죄수 공동체구나’ 간수처럼 자살을 하려고 했던 저에게 ‘우리가 다 여기 있다’고 하는 사람들을 실제로 만나고 나니까 진짜 주 예수를 믿어 구원받게 된 간수의 기쁨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 같았습니다. 선택 강의를 들으면서도 강사님이 해주시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스스로 버거워 했던 제 삶을 강사님도 겪었다고 하시는 거예요. 그러면서 괜찮다고 공동체에서 피투성이가 되어도. 살아만 있으면 된다고 하시는 말씀이 너무 위로가 되었어요 간증 패스티벌 때도 하나같이 말도 안 되게 살았던 청년 들이 저렇게 이야기를 하고 공동체에서 위로를 받으며 살아내고 있는 모습을 보는데 참 많이 울었어요.
‘이게 죄수 공동체의 위력이구나’를 새삼 깨닫고 제가 우리들 교회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몰랐습니다 저는 제가 성폭행을 당했기 때문에 이제 평생 남자는 못 만날 거라고 생각을 했는데 조 모임을 마치고 나서 같이 조 모임을 했던 형제가 저에게 개인적으로 연락을 해서 호감을 보여줬어요 위로는 받았지만 아직 상처가 완전히 다 아물지 않아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지만 그래도 이런 이야기를 이렇게 다 했는데도 저에게 관심을 보여주는 형제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저에게는 정말 큰 위로와 감격인 것 같아요 목사님 이런 공동체를 만들어주셔서 감사하고 제가 청년 때 이런 교회를 만난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말로 다 할 수가 없어요 평생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We are all here’이 말씀은 절대로 까먹지 않을 것 같아요. 너무 감격스럽고 감사합니다. 이 말씀을 꼭 목사님께 드리고 싶었어요 생명의 은인 같으세요. 우리들교회 청년부 너무 사랑하고 또 목사님 너무 사랑합니다. 우리들교회를 젊은 날에 와서 도무지 해결될 것 같은 아는 이런 문제가 요한의 세례만 알았다면 내가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하고 평생 굴속에 있다가 간수처럼 맨날 칼 빼들고 자결을 흘렸다 말렸다 했는데. 예수의 세례를 이렇게 받게 되니까 이렇게 소통이 됐습니다.
(적용#4)
-소통하는 방언과 감화를 시키는 예언을 하나? 회복의 지름길이 온전한 12공동체 목장에 가는 것임을 아나? 나는 무엇이 회복되고 싶나?
<Epilogue>
1)성령의 임하심은 구원을 위한 분별에 성령의 임하심은 절대적인 이유는 우리는 어떤 제자가 아니고 예수님의 제자가 돼야 하기 때문이다
2)우리는 믿을 때 성령을 받는다.
3)성령 세례는 정확히 예수 그리스도 복음이다.
4)성령의 임하심은 그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 받는 것이며 십자가 지는 것이다
5)성령의 임하심은 소통과 감화의 방언과 예언을 말한다
6)성령의 임하심은 열두 공동체의 온전한 회복을 말한다
7)나는 죽고 예수님은 살아나는 십자가를 기쁘게 지는 것이 성령의 임하심 성령 세례의 결론이다
8)제자 양육은 성령이 선행되어야 하는데 시간적 순서로 말할 수 없다.
9)성령의 제자 양육은 성령에서 시작된다.
10)성령을 받지 못하면 개미처럼 수고해도 헛수고다.
11)고린도 후서(2 Corinthians) 7: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계를 이루게 하는 것이오.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Godly sorrow brings repentance that leads to salvation and leaves no regret, but worldly sorrow brings death)
12)질문으로 양육이 시작되며 질문을 잘하는 사람이 성령이 임하신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13)‘에베소 같은 곳은 음란하고 그냥 세상 세력에 찌든 사단의 세력이 강하다’라고 보는 곳이기 때문에 성령의 임하심이 없이는 에베소 같은 내 남편 자식을 감당할 수 없다
14)사단의 나라가 너무 강하면 우리는 성령 없이는 그 사람들을 주님께 인도할 수 없다
15)구제하고 헌금한다고 성령 받을 수 없고 돈으로 살 수도 간절히 원한다고 임하는 것이 아니다
16)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하는데 믿을 때에 성령을 받는다.
17)믿을 때라는 말은 조건이 아닌 것인데 믿음이 조건이 되면 행위가 된다.
18)믿을 때라는 말은 동시적 동작을 가리키는 것이며 동시에 일어난다.
19)내가 예수를 믿었다면 동시에 성령의 열매와 모습이 나타나야 한다
20)아무리 탁월한 교회와 양육을 받아도 성령이 임하시지 않으면 예수의 제자가 아니고 사람의 제자로 살아갈 뿐이다
21)용서는 가해자가 하는 것이 아니다
22)나의 수치를 인정하고 죽어지는 것이 믿음이다
23)죽기보다 싫은 것이 인정이고 정신과를 가는 것으로 나 자신을 직면하는 것, 자녀에게 아내에게 사과하는 것, 공동체에 고백하는 것은 믿음이 있을 때 할 수 있는 것이다
24)양육은 답을 제시하는 게 아니라 질문을 계속해야 하는 것으로 질문을 통해 자신을 생각하고 묵상하고 말씀에 비추어 자신을 살핌으로 양육이 되어지는 것이다
25)(마태복음/Mattew 3:11)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I baptize you with water for repentance. But after me will come one who is more powerful than I, whose sandals I am not fit to carry. He will baptize you with the Holy Spirit and with fire.)
26)예수님의 설교를 들으면지금 하나님 나라가 내게 임했기 때문에, 이 더러운 내 속을 찔러주는 임박한 설교이기 때문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고 요동이 되는 것이다
27)예수님의 세례는 물 세례가 아니고 성령과 불의 세례인데 불은 심판이다
28)예수님의 세례는 구원과 심판이 함께 임하는 세례다
29)‘내가 예수 믿으면 잘 된다’가 아니라 내가 예수를 믿어 심판을 이제 받을 수 있는 것이다
30)예수님 세례는 ‘회개합니다. 제가 독사의 자식입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내가 어떤 불의 심판을 받아도 마땅한 죄인 임이 깨달아 지고 죄인임을 깨닫게 되는 것을 말한다
31)예수님 세례는 용서하고 깨끗하게 씻겨주는 세례와 동시에 태우고 심판하는 불의 세례인 것으로 용서받아서 이혼을 당하지 않게 되는 게 아니라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제가 독사의 자식입니다. 내가 이혼을 당해도 할 말이 없어요 이 심판 가운데에서도 이 심판이 내 죄보다 가벼운 것을 깨닫게 해주세요’라고 하는 것이다
32)내 속의 쭉정이가 뼈 속까지 죄인인 내 속에 끝없는 죄악으로 이 땅에서 불의 심판을 받는 것이 영원한 심판을 면하는 은혜다
33)그래서 예수의 세례를 받은 사람은 이렇게 고백한다 “주님 저는 어떤 불의 심판을 받아도 마땅한 죄인입니다”
34)이런 고백을 하는 사람에게는 이혼이 막아져도 은혜이고 이혼을 당해도 은혜인 것이다
35)환경이 아니라 이렇게 불의 심판을 통해 하나님의 상급으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환경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이다
36)그러니까 예수의 세례 성령 세례, 불 세례를 아는 자들은 그러므로 내 죄 때문에 깨어진 과정을 보며 끝없이 애통하며 눈물을 흘리게 된다
37)왜냐하면 나로 인해 저 영혼까지 함께 불의 심판을 받기에 이 심판 속에 능히 나를 살릴 예수를 전하는 마음이 불붙듯 일어나며 갈급하게 되기 때문이다
38)이 땅에서 불의 세례로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림을 경험하는 것은 축복인 까닭은 그 불 세례 속에 내 죄가 깨달아져서 회개한 자는 영원한 심판과 형벌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39)성령 세례는 정확한 복음인 예수님을 확실하게 아는 것이다
40)성령세례는 ‘예수께서 내 죄를 대신해서 죽음과 부활하심 다시 사심과 승천하시며 다시 오시는 것’을 믿는 것이다
41)성령세례는 우리가 성경을 나의 죄를 위해 죽어 주신 예수님의 이야기를 정확하게 읽어가기에 성경이 나를 읽고 가는 것이다.
42)이것보다 정확한 성령 세례가 없다
43)성령세례는 구속사로 성경이 읽혀지는 것이다
44)세례는 죽는 것이기 때문에 성령 세례는 십자가 지는 것이다
45)십자가를 지는 것은 사람들이 열광하며 환호하는 것이 아니라 다 손가락질하고 욕하고 던져버리고 싶은 길이기 때문이다
46)‘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47)사도행전 19장 이 본문은 교파마다 해석을 달리하는 아주 어려운 본문인데 요한의 세례 받았는데 다 또 세례를 받는다고 하니까 ‘재세례파’가 등장을 하고 저 뒤에 가서 보면 성령 받으려면 방언을 해야 된다고 그래서 ‘오순절 교파’가 나온다.
48)성령은 오순절에 처음 오신 것이 아니고 창세 전부터 계시며 지금도 계시고 장차도 계실 것이다.
49)성령 세례의 표적은 사람을 보는 눈이 달라지는 것이다
50)물세례, 성령 세례는 동시에 올 수도 있고 순서가 뒤바뀔 수도 있지만 성령 세례를 알려주기 위해서 바울이 가르친 것은 정확한 예수 그리스도 복음이다.
51)성경에서 방언이라는 말이 두 가지 의미로 쓰였는데 성경을 목적으로 바벨탑 사건의 저주를 풀어 주신 그 외국어 방언이 있고 개인의 신앙에 확신을 주기 위하여 주어진 은사로 주신 방언이 있다
52)고린도전서 13장 1절에서는 이것을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로 표현을 했다
53)천사의 말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의 방언이고 사람의 방언은 외국어이지만 우리는 성령 받음을 생각할 때 그냥 방언이나 예언 또는 여러 기적 이걸 기적 같은 은사에만 관심을 가지기 쉽다
54)그래서 그런 가시적인 능력이 있어야 성령을 받았다고 생각을 한다
55)‘랄랄랄라’ 따라 시작을 ‘랄랄랄라’ 그러면서 방언이 또 터지더라
56)‘랄랄랄라’ 시키는 데가 있고 ‘코카콜라’를 또 시키는 데도 있는데 그걸 빨리 연습해보라고 이런 생각은 성령을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에너지로 여기는 것이다
57)기준이 우리가 행하는 은사에 있으면 성령은 한낮 에너지나 자원이 되는 것으로 잘못된 이해다.
58)내 생각, 내 가치관, 외모만 취하던 세상 가치관에서 이제 내 삶이 말씀으로 해석이 되니 성령이 임하시고 방언과 예언을 말하게 된다
59)방언은 소통의 능력이다
60)공감력과 소통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영원히 타락하여 사단에 속한 사람들이라서 주님과 소통할 수가 없기에 우리는 매사 하나님의 마음 뜻을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61)그래서 성령께서 오셔서 하나님 마음을 알려주신 것이다
62)나를 얼마나 사랑하시고 내 모든 고난과 고통이 이 죄인인 나를 구원하시려고 허락한 아버지의 찢어지는 마음이라고 그러니까 소통이 안 되는 나를 주님과 소통하게 만드는 것이 방언이다
63)주님의 마음을 공감하는 방법으로 말씀을 통해서 말씀으로 말하고 말씀으로 기도하는 것이 방언이다
64)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공감하는 것이 방언이니까 사단에 속한 세상 사람들은 알아들을 수가 없다
65)그래서 말씀으로 기도하는 것이 어렵다고 한다
66)불신 결혼, 동성애가 말씀에 다 나와 있는데 인권이 우상이 되니까 절대로 못 알아 듣는다
67)‘고난이 축복이다. 문제 아이는 없고 문제 부모만 있다’
68)옳고 그름에 화신인 이 세상 사람들은 선악과 먹고 매일마다 나는 옳고 너는 틀렸기 때문에 모든 것이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으로 들린다
69)그래서 구속사는 방언 중에 방언이므로 우리들 교회에 와서 말씀이 안 들린다고 하는 것이다
70)성령이 임하면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공감하고 내가 또 말씀으로 전해드리는 기도를 하게 된다
71)왜냐하면세례를 통해 성령 세례를 통해 내 생각은 예수와 함께 죽고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마음이 나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72)예언의 첫 자인 ‘예’는 미리 ‘예(豫)’자가 아니고 맡길 ‘예(預)’ 말씀 ‘언(言)’으로 하나님을,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는 것이다
73)즉 예언은 감화력인데 하나님이 주신 말씀의 소통이 일어나서 이 말씀을 맡아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74)내게 맡겨주신 말씀으로 내 삶을 해석하여 이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것이 예언이다.
75)바울을 통해 브리스길라(Priscilla)와 아굴라(Auilla)가 변화되고 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통해 아볼로(Apollos)가 변화되는 것이 예언이다
76)이 십자가 앞에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지금 내 삶의 이유를 말씀으로 해석하여 나와 같은 고난에 있는 자에게 권능으로 나아가 그 사람이 내가 깨달은 이 말씀으로 변화되는 것이 예언이다
77)그러니까 방언도 예언도 영혼 구원을 위함이며 성령이 임하시면 영혼 구원을 길로 놓고 가게 된다 결
78)론은 날마다 말씀 묵상, 가정 중수다.
79)12는 회복의 숫자로써 구약의 열두 지파, 신약의 열두 사도를 예표한다
80)구약의 열두 지파가 다 무너지고 신약에 또 열두 사도가 세워졌다
81)우리가 죄를 지으면 무너졌지만 하나님이 회복시키신다
82)즉 12는 말씀을 맡은 공동체를 의미하는데 말씀을 맡은 공동체가 목장이다
83)12는 마지막 우리가 천국에 갈 때도 천국을 표현하는 숫자다.
84)천국 문이 열 둘인데 그 문에 열두 보석과 열두 천사가 있더.
85)생명나무 강가에 열두 열매가 맺히며 요한계시록에 모이는 것은 다 열 둘이다
86)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나쁜 습관과 같이 하지 말라고 한다.
87)그래서 이 성령의 임하심은 그 열두 공동체 온전한 회복이다.
88)‘우리가 다 여기 있다’는 잘나서가 아니라 구원받은 공동체인 것이다
89)구원받았는데 아픈 사람, 안 아픈 사람 다 포함되는 구원받은 우리 건강한 사람이 우리인가? 이 어떤 제자들이 열두 사람으로 변하는 것이다
26절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27절 간수가 자다가 깨어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 줄 생각하고 칼을 빼어 자결하려 하거늘
28절 바울이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하니
29절 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리고
30절 그들을 데리고 나가 이르되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하거늘
31절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32절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33절 그 밤 그 시각에 간수가 그들을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어 주고 자기와 그 온 가족이 다 세례를 받은 후
34절 그들을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 주고 그와 온 집안이 하나님을 믿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
<Prologue>
아버지 안에 우리가 100% 죄인인데 참 그것을 모르고 또 죄인이라고 해도 성령의 죄수가 돼야지 될 터인데 주님 오늘 성령의 죄수에 대해서 말씀하여 주시옵소서. 듣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나라부터 개인에 이르기까지 닫힌 환경들이 참 많습니다 오늘은 광복 76주년이에요.
일제 강점기 당시 국민 전체가 감옥에서 죄수로 살았다고 할 수 있죠. 수많은 수탈 말고도 가장 큰 고통은 언어를 잃고 글자를 잃었다는 것이에요 저희 부모님은 일제 시대를 겪었기에 나라 없는 설움도 겪고 양과 부모님 모두 북한뿐 이라서 남한에 내려와서 고향 없는 설움도 겪어보았습니다 이것을 당해보지 않은 다음 세대는 도무지 모릅니다. 요즘 간첩이 버젓이 활동을 한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어제 아프간의 수도 카불의 함락이 임박했다고 돼서 특별히 된 기사를 보았는데 30만의 군대가 7만의 탈레반에게 최신 장비를가지고도 지금 자멸을 당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도 20여 년에 걸쳐서 1조를 지원했다고 해요.
그러니 월남전이 생생하게 기억이 됩니다. 1975년 4월 30일 이 지구상에서 월남공화국이라는 나라가 사라졌습니다. 100만 이상의 세계 4위의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단, 10만 명의 월맹군 앞에 허무하게 무너졌지요. 간첩들과 월맹 사람들이 그때 월남의 각계 각층을 장악했어요. 천주교 불교 사이공대학 등 전부 군부대 지식인 언론계 교육계 대학가 등 불과 0.25%의 좌익 공산 세력이 자유 월남의 패망을 유도했어요 정말 그 아무것도 아닌 정말 독버섯 하나가 전체를 망가뜨렸다고 하는데, 독버섯인 줄은 모르죠. 그렇죠 그러면서 그때 다들 ‘내가 대통령이 되면 남북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겠다’가 다 구호였어요.
그리고 ‘미군 철수’가 다 구호이고 그래서 결국은 한국군과 미군이 철수를 하고 월남과 월맹 평화 협정을 맺었어요 그리고 잠시 후에 쳐들어와서 나라가 없어졌는데 지금 아프간에서도 미군 철수를 계속 부르짖어서 그렇게 공개 처형을 하는 그 탈레반 인데도 불구하고 미군 철수를 얻어내서 한 2주일 미군 철수 앞두고 지금 이제 수도와 다른 데는 다 함락이 되고 카불 함락이 지금 코앞에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기가 막힌 기사가 별로 언론에 나오지를 않고 있어요 그래서 미안마 사건도 별로 언론에 나오지를 않고 있어서저는 너무나 위기라는 생각이 들어요 개척 때부터 하나도 빠지지 않고 송구영신 예배 때 애국가를 4절까지 꼭 부르고 있습니다.
제가 광복절 설교를 특별히 안 해도 될 것은 우리 교회는 매주일 가정주일을 알아서 지키기는 그것이 진배였기 때문인데요
성경은 구원의 책이기 때문에 개인 구원이 사회 구원으로 가게 하고 성경이 나를 읽고 가게 하기 때문에 구원받았다면, 구원받은 자는 나라 걱정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라가 없어지면 예배를 못 드리잖아요. 그래서 청년부 수련의 주제인 ‘We are all here’ (우리가 모두 여기 있습니다)입니다. 이제 성령의 죄수가 되어서 ‘우리가 모두 여기 있습니다. We are all here’에 대해서 오늘 이제 다시 한 번 이 본문을 다뤄보고자 합니다 그러려면 내가 죄인 됨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성령의 죄수에 대해서 생각해 봅니다.
<말씀 요약>
1.잘 듣습니다.
25절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26절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굳게 닫힌 감옥 문 위 바울(Paul)과 실라(Silas)를 막고 있는 한밤중이라도 기도하고 찬송하는 것을 죄수들이 들었다고 합니다. 들은 것이 중요한데 죄수들이 들었다고 합니다. 귀신들린 여종 고쳐주고 살점이 뜯겨 나가도 죄수들이 듣는 데서 기도하고 찬송하는 것인데 성령이 도와주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죄수들이 아니면 본능적으로 들리지 않습니다 저는 종교부장까지 하면서 대표 기도까지 했습니다. 본질적으로 들리지 않았어요 제가 죄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빌립보 감옥에는 육적인 죄인들이 많으니 듣는 것이 쉽습니다. 말을 할 수 없는 오픈이 있습니다. 유대인 같은 의인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픈 못하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바울도 식구들 이야기는 못하더라고요. 아덴 같은 식구는 더 어렵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죄수들이 바울의 말을 들어주었을 것 같으니 그 환경은 하나님이 세팅하신 환경입니다. 청년들 때문에 결혼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들어야 합니다. 신 결혼하라고 말하는 것은 죄인들의 공동체를 꾸리는 것입니다. 죄인들의 만남이 최고의 만남입니다. 죄인과 의인의 만남은 소망을 이룰 확률이 반이 되지만 의인들끼리 만나면 기분 좋게 들어갔다가 죽어가는 것처럼 행복을 부르짖다가 구원을 놓치니 최악의 만남입니다. 세 만남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한 목사님 부모님 부부가 이혼을 하고 재혼을 했습니다. 이 세상의 일이지만 불신자 남편을 만나서 재혼했습니다 잘 먹고 잘 사면 행복해야 하면 감사해야 하는데 떠내려가서 이제 교회에서 떠내려갔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목사인 전 남편을 원망하고 입만 열면 비난한다고 합니다.
아버지 목사도 집사와 재혼을 했습니다. 아버지가 힘들게 했으니 떠났습니다. 힘이 들어요 그런데 문제는 아들 목사가 신불 신간 양쪽과 모두 안 통하는 것입니다. 세월이 많이 지나서 한계점의 고난이 오니까 이 가정을 떠나지 않고 드디어 구속사 말씀이 들려서 예배를 드리게 됐다는 것입니다. 목사님 아버지는 같이 예배를 안 드리신다는 거죠. 네 분 부모님 중에서 새어머니와 통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미안하지만 목사라고 해도 죄인이라는 것을 모르면 가정을 파괴하게 됩니다. 율법이나 은혜나 강박이나 두려움이라고 해도 법 하나 때문에 가정을 파괴하면 정말 율법으로 망하는 것입니다. 친엄마는 같잖아요. 요새 엄마는 지키고 있잖아요 가정을 지켜야 합니다.
기가 막혀도 우리들교회 출석하는 것으로 은혜가 좀 더 크고 죄인임을 인정하기에 가정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파이팅입니다. 내가 조금 이상하다고 떠나는 것이 이상한 것입니다. 최우선 명령을 지켜야 합니다. 결혼은 감옥생활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너도 죄인 나도 죄인 하면서 감당을 합니다. 서로 선한 것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과거 가지고 싸워도 죄인 된 태도로 일관된 것입니다. 죄인 공동체이기 때문에 우리들 청년이 이혼이 없습니다. 잘난 것이 없습니다. 목사가 아무리 힘들게 해도 속 많이 썩였겠죠. 그렇다고 그렇게 사모가 그렇게 떠나면 됩니까? 어쩌면 그렇게 잘 삽니까? 그게 부럽죠 그렇죠? 용서 못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또 다른 한쪽은 죄인이고 한쪽은 의인이면 죄인 쪽에서 너무 많이 기다려야 합니다. 감옥에 와서도 내가 죄지은 것이 없다고 억울하다고 하는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교회 다녀서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 기도하지만 결혼하면 ‘나 죄 없어’가 대부분입니다. 다 속았다고 합니다. 가치관이 한쪽 죄인의 일이면 다르기 때문에 영적 전쟁이 치열합니다. 그런데 빌립보 감옥에서 바울과 실라가 찬송하니까 문자적으로 낮아진 죄인인 죄수들이 들었습니다. 왜 듣나요?
갇혀 있으니 듣습니다. 식구들도 망하고 갇혀있을 때는 기도와 찬송을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사람한테 점수 주지 마세요. 영적 죄인들이 성도들이잖아요 영적 죄인들인 우리가 죄인이에요. 감옥에 갇혀서 죄를 모르는 진짜 죄인들에게 긴 기도와 찬송을 들려주어야 하는 사명이 있어요. 들릴 때가 오지만 조금이라도 돈이 있고 권세가 있으면 뛰쳐나갑니다. 가정은 최고로 지켜야 할 가치라고 어려서부터 알려주는 성경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지킬 수 없습니다. 한국은 이혼율이 최고잖아요. 죄인들에게 주신 은혜는 가정을 지키는 것입니다. 아무리 은혜로 살아도 이제 사단의 나라에서 하나님 나라로 옮겨가는 과정이 있기 때문에 100% 사단의 나라 거기에서 영점 일 프로가 하나님 나라로 시작하니까 점점 줄어들고 하나님 나라는 점점 커지는 것 여기에서 성도는 늘 힘듭니다. 내가 한번 구원받으면 내가 형통하다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점점 올라가서 커지려고 하니까 점점 축소되니까 내 하나님 어찌하여 버리시니까? 찬송하며 하나님 나라에 속하면서 아버지를 부르짖으면 그것이 은혜입니다.
돈도 없고 갈 데도 없으면 기도와 찬송을 듣게 됩니다. 망할 때가 말씀이 들릴 때라고 믿게 됩니다. 감옥에서 잘 살면 얼마나 잘 삽니까? 감옥에서 잘 사는 것은 기도와 찬송하는 것인데 거기서 힘들다고 탈옥하면 기도와 찬송을 들을 기회를 놓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아내와 남편을 버리고 탈출하면 감옥에서 천상의 찬송을 들을 기회를 놓치는 것입니다.
두고두고 될 일이 없어요 끝까지 참아도 이혼당하는 사람은 큰 계획이 있습니다. 이때가 구원의 때이므로 옥중 찬송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남편과 통했던 적이 없습니다. 교회 다니니 자칭 죄인인데 무늬만 죄인이고 의인의 만남으로 시작했어요 남편은 모범생이잖아요. 그런데 저도 모범생이며 의인으로 둘 다 의인으로 지옥 갈 뻔했는데 감사하게도 남편의 전공이 음주였어요 그래서 다른 재미가 없어요 여자를 좋아하면 한 눈 팔면서 자유를 주었을 텐데 가두고 살았어요 놀 줄도 모르고 힘든 거예요 차라리 놀아서 자기한테 죄가 있다고 생각하면 쉬웠을 텐데 술도 집에서 혼자 마셨어요
병원 가서도 원장님 하니까 거기다가 강박도 있었고 그런데 지금 거룩하게 음주라고 했지만 술을 그냥 마시는 게 아니라 술 주사가 있었어요. 큰 고난이었어요. 문자적으로 의인입니다. 저도 의인입니다. 참 두려움이라는 약점이 있었습니다. 이혼하지 않은 것은 영육의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전쟁이 치열했어요. ‘술 주사’라는 것은 아주 종합적인 박해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다 해당되고 그것은 말로 설명이 안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아니므니다.’
제가 괜히 목회를 하는 것이 아니고 죽고 싶은 그 가정을 이해합니다. 그러나 좀 참아내세요 이렇게 성령의 죄수가 되어서 정말 의인으로 지옥 갈 뻔했는데 좋은 기회를 주시는 거라 말씀드리는 게 전달이 되는 것 같습니다. 기적은 일방적인 주사를 들어낼 수 있는 기적인데 들으면서 기도하고 찬송했지요 그런데 기가 막힌 깨달음이 오는 거예요 아니 별일이 없었겠어요? 사단이 일제히 달려들면 효과적으로 도우시니까 죽을 것 같은데 살아나고 살아나게 하셨어요. 기가 막힌 죽을 것 같은 고통 속에서 이 세상 기쁨을 위해 성공하려고 살았던 제가 하나님 나라 쪽으로 가니까 조금씩 내려놓게 하셨어요 전혀 알지 못했던 기쁨입니다. 신기하게도 남편이 주사를 부릴수록 내 죄가 보였어요 사단에 속해있던 저였습니다. 거짓 포장 야망 차별 생색 생각지 못한 죄악이 드러나니까 눈물로 회개가 되면서 남편의 술 주사와 비교가 안 되는 죄와 비교가 안 되었습니다.
그러니 결혼의 감옥에 갇혔다고 불평과 인권을 부르짖은 것이 아니라 가정을 지킨 것이 감사합니다 겉으로 착한 얼굴을 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가증스럽고 그것을 누가 가르쳐 줍니까? 얼마나 감사한지 생명을 내놓고 기도한 것이 설명이 안됩니다. 성령의 죄수가 맞습니다. 나의 죄를 성령이 알려주셔야 합니다. 그날이 갑자기 옵니다. 늘 기다리는 것 같지만 갑자기 옥토가 흔들리고 문이 열립니다. 수동태 동사입니다. 옥에서 잘 기다리면서 자기 죄를 더 보며 내가 옥에 있는 것은 스데반이 죽은 나의 결론이라고 실라와 나누었습니다. 영적 시각이 생기게 됩니다. 새로운 가치관이 생기게 됩니다.
어느 날 갑자기 자유함이 생기니 감옥이 옥이 아니니 갑자기 우리 남편의 죽음이 지진 같은 사건이었지만 죽음을 깨뜨리신 하나님 임재의 현장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둘 다 의인이면 최악의 만남이고 앞이 안 보여요 기도와 찬송이 들리지 않아요 질그릇이 아니고 금 그릇이기 때문에 깨지지 않습니다. 남녀 둘 다 의인인 금 그릇이기 때문에 영혼이 안 보이고 영원한 심판으로 가게 됩니다.
또한 주님을 만나지 못하는 의인들인 유대인들처럼 지옥이라고 생각합니다. 지옥이라고 생각하고 늘 원망속에 있든지, 불평 속에 있던지 죄수들의 감옥이지만 특별 대우 받으면서 특별하게 있었다고 해도 잠시간의 행복 아니겠습니까? 얼마나 이 땅에서 잘 삽니까? 감옥에는 정치범부터 잡범까지 지진에서 죽으면 이상과 이하도 아닙니다. 부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죄수가 아닌 공동체는 사건이 터지면 뛰쳐나갑니다. 죽음 앞에서 별 인생 없습니다.
(적용#1)
-내 인생의 한밤중에 기도하고 찬송 했나? 뛰쳐나갔나?
-여러분의 결혼생활은 죄인들의 만남인가? 죄인과 의인의 만남인가? 의인들의 만남인가?
2.잘 묻습니다.
27절 간수가 자다가 깨어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 줄 생각하고 칼을 빼어 자결하려 하거늘
28절 바울이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하니
29절 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리고
멸망의 사건이 아닌데 의인들은 다 조그만 사건이 오면 멸망의 사건이라고 하잖아요 죽는 사람 많습니다. 드러난 수치 이런 가난 때문에 자신을 직면하기가 어렵습니다. 간수에게는 죽을 일이 생겼어요 성도들이 간증하지만 식구들 중에서는 가문의 수치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감옥에 있어도 죄수는 기도와 찬송을 듣고 풀리지만 거기서 조금 높은 사람은 자기가 조금 높다고 감시는 했지만 듣지 않고 잤습니다. 집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벽 하나 사이로 평생 안 듣는 부모 자녀가 있습니다. 옥문이 열려도 살 소망이 끊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죄인과 의인의 만남은 함께 가기 힘듭니다. 죄인과 죄인의 결혼이 너무 중요합니다. 자결이 100% 죄인이기에 하는 것이 아니라 억울 하기에 하는 것입니다. 길은 예수 밖에 없다고 합니다.
죄인과 의인의 만남은 ‘같이 기뻐하고 슬퍼하고’가 안 됩니다 그래서 이 믿음의 결혼, 죄인의 결혼이 너무 중요합니다 당장 눈앞에 지진과 열린 문만 보고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생각을 해요. 이후에 이루어질 구원이 전혀 안 보입니다 자결은 100% 죄인이기에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의인인데 억울해서 하는 게 자결이에요. 길은 예수 밖에 없는데 자꾸 다른 길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을 죽는 길이라고 합니다 지진의 사건은 바울의 결박을 풀어줄 뿐 아니라 자고 있던 간수도 깨우는 사건이에요. 바울의 목적은 자유케 되어서 이 옥을 나가는 것이 아니고 그 자유로 스스로 갇힌 자가 되고 종이 되어 이 사건을 해석하지 못하고 절망 가운데 자결하려는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 스스로 선택하여 복음의 종이 되는 것이죠. 자유를 부르짖다가 자유를 반납했어요 누구를 위해서요? 바울을 가두고 지킨 간수의 구원을 위해서요 이게 놀라운 기적 아니에요? 세상에서는 죽었다가 깨어나도 못하는 적용을 길로 놓아야 성령의 죄수인 것입니다 자신의 죄를 보고 마음이 열리니 옥문이 열렸는데 진짜 옆에 있던 그 죄수들 이 은혜를 받고 아무도 안 나갔다는 거예요. 한 명이라도 나갔으면 간수가 죽었죠
자기를 창고에 가두고 든든히 지켰던 그 간수를 위해서 안 나왔다고 자기가 양육한 모든 제자 동무 제자들이 죄수들이 다 안 나왔어 죄수들이 옥에서 나가기를 얼마나 소원했겠습니까?
그런데 옥문이 열렸는데 아무도 안 움직인 것은 매를 맞고 성령의 찬송을 한 바울 사도의 결론인 거예요.
하나님이 인정하심이죠. 근데 저야말로 얼마나 자유를 원했고 나가기를 소원했습니까? 그런데 제가 자발적으로 갇혀 있게 되니 이야말로 기적 아닙니까?
남편이 죽어서 제가 달라졌습니까? 그전부터 제가 죄인인 걸 알았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것은 간수는 이런 고통을 물을 수 있는 공동체가 없다는 거예요 어떻게 하냐고요?
지금 간수는 혼자가 아니잖아요. 부하들이 있잖아요. 그럼 죄수들이 달아난 사건에 대해서 의논하고 좋게 하는 게 정상적인 절차 아니겠어요? 그래서 의논도 하지 않고 혼자 다 뒤집어 쓰고 자결하려고 왜 그럴까요? 그게 더 편한 거예요. 다른 사람에게 묻지도 말하지도 않고 혼자 속으로 삭히고 혼자 해결하는 것이 아주 의롭고그리고 습관이 되어버렸어요. 그 외로운 사람의 전형이에요. 그러니 삶의 무게를 홀로 지려 했고 결국 의인의 그 끝은 자살 뿐이었습니다. 근래 최고위층 고위 관료들은 자살을 그렇게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그리고 2021년 OECD 국가 중에 지금 자살률이 1위라고 해요. 이 조그마한 땅덩어리 대한민국에서… 그런데 내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의 자살이 이어지니 이게 얼마나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너무 안타깝습니다 그런데 자기들의 동지들이 의인 공동체가 되다 보니까 아이러니칼하게도 말할 곳이 없는 거예요. 혼자 해결해라 하는 마음에 해결하겠다고 자살을 선택했어요. 그렇게 그냥 피로 나눈 뭐 동지 그냥 이르면서 뭐 랄랄랄라 했는데 그무슨 비자금이 터지고 그러면 내가 너무 부끄러워서 내가 죽어야 되는 건 바울은 스데반(Stephen)을 죽였어도 실라(Silas)와 둘이 있었어도 죄인 공동체에 있기에 세계적인 대안이 되어 함께 기도하고 찬송하니 옥문이 열리고 또 수많은 사람을 구원까지 했잖아요. 제가 갇혀 있었어도 죄인이 되고부터는 저에게 나가지 못해도 물을 공동체가 있었어요 그런데 의인들은 이 세상 권력을 다 거머쥐고도 만나는 사람들이 이해 타산적이기 때문에 삶의 낭떠러지에서 한 사람도 물을 사람이 없고. 답해줄 사람이 없고 구원해 줄 사람이 없어요 우리는 그것을 이 시대에 너무나 안타깝게 지금 보고 있어요
누가 책임집니까? 우리가 책임져야지. 믿는 우리가 적용해 보세요. 여러분은 간수 공동체인가요? 바울 공동체인가요? 부부라도 간수 공동체라 자살을 생각하는 부부나 공동체가 허다 합니다. 주일 예배 후에 가족들이 적용 질문으로 예배 끝나자마자 목장을 좀 부부라 같이 해보시기를 바래요. 그렇게 한번 해보시면 자신의 목장 할 때 도움이 많이 될 것입니다. 나눔을 봤는데 이제 이분이 이제 정리해고를 당한 거예요 그때 소장님도 같이 그만두셨는데 그 부품을 납품하시던 그 사장님이 만나자고 그래서 만났더니 그때 그 소장님이 너무 금전적인 어려움을 얘기 하셔서 자기가 도울 수는 없지만 용기는 드리겠다고 만날 약속을 했는데 그 주일에 그 소장님이 자살을 하셨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장님이 너무 이제 정죄감에 시달리는 거예요 내가 그거 안 도와줘서 죽었나? 그래, 이제 3년이 지나고 나서 이 분을 막 만나자고 그래서 그 얘기를 이렇게 들으면서 저는 공동체가 정리해고를 당해도 공동체가 있었고 아내와도 나누고 그랬는데 그 소장님도 사장님도 말할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거야. 그래서 결국 나눌 수 있는 지체가 있고 없고의 차이가 죽고 사는 것을 결정하는구나. 한 사람 나눌 사람이 없어서 죽음을 선택하는구나 이걸 깨달았다고 이렇게 나누셨어요.
그래서 자기가 만나서 그냥 편하게 생각하시라고 그 얘기를 했더니 부담을 이분이 그냥 얘기를 했는데 부담을 내려놓으신 것 같다고 한 사람이 너무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죽음의 그늘에 덮여 자살하려던 간수가 살고 죽는 거는 진짜 정말 이게 공동체 아니겠어요?
(적용#2)
-여러분은 간수 공동체인가요? 바울 공동체인가요?
3.저절로 우리가 됩니다. “We are all here”
28절 바울이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하니
29절 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리고
옥문이 열렸듯이 마음이 움직인 간수는 몸을 움직여 바울이 있는 깊은 옥으로 뛰어들어갔어요. 무슨 소리를 들었죠. ‘우리가 다 여기 있다.’ ‘We are all here.’ 이게 너무 기가 막히지 않아요? 자기가 그렇게 무시했던 죄수들인데, 그냥 ‘우리가 다 여기에 있다’ 정말. 여기서 가장 중요한 역할은 죄수예요. 죄수들이 한 명도 움직이지 않았어요 여러분이 목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데 이렇게 반도 아니고 다 목장 식구들이 ‘우리가 다 여기 있어요.’ ‘우리가 다 여기 있어’ 우리가 집사님 편에 성령의 죄수들이 되어 구원 때문에 움직이질 않았어. 이 소리를 들으니 그냥 알 수 없는 무서움에 떨린 거예요 마치 지금까지 짊어졌던 삶의 모든 무게를 내려놓는 것처럼 바울(Paul)과 실라(Silas) 앞에 엎드려서 바울 공동체의 위력입니다. 목장에 한 번 와서 다 꿇어 엎드리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그리고 어떻게 합니까?
30절 그들을 데리고 나가 이르되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하거늘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하거늘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내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상관의 명령대로 깊은 옥의 차꼬까지 굳게 지키던 죄수 바울과 신라를 이제 극 존칭으로 주님이라고 묻습니다.
31절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또 한 명의 성령의 죄수인 간수에게 내 인생의 구원에 관해 물어볼 수 있는 지체를 주십니다 말씀으로 나눌 수 있는 우리 공동체를 주시는 것이에요.
여러분들 지금 인생이 꽉 막힌 것 같아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라는 인생 최대의 질문을 거침없이 물을 수 있는 목장이 있으면 여러분의 인생은 구원을 향해 활짝 열려 있는 것입니다 이런 목장이 우리에게 있잖아요. ‘We are all here’가 있잖아요. 그 목장을 향해 뛰어들어가야 돼요 그것이 성령의 열림을 경험하는 비결이에요 바울의 대답은 질문만큼이나 간단했어요. 여러 많은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심지어 회개하라는 얘기도 하지 않았어요. 아주 간단하게 나를 위해 죽어 주신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내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할렐루야!
성령의 죄수는 서로서로 인생 최고의 질문과 답을 얻어냅니다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의 외침이, ‘나 좀 살려주세요’ 간수는 인생의 절망에 빠져서 구원을 열망했죠 ‘I am here. God is here’가 이제 ‘We are here’의 공동체 속으로 들어가는 거죠. 그러니까 내가 주님을 만난 사람이 ‘We are all here’ 이게 안 되는 사람은 그 사람은 아직 주님 죄수인 거를 모르는 사람이에요. 평소에 무시하면서 듣지도 않았던 바울 공동체이지만 각종 죄수들이 듣는 모습은 보았어요 든든히 그들을 지키라 했으니 이 사람이 상급 공무원인지 낮에 듣기는 했을 거예요. ‘뭐 이상한 말을 하나?’ 하니까 연구를 해야지. 중국에 가면 공안들이다 그 설교하는 거 적어서 바치는 거예요. 들어두는 것이, 믿음은 들음에서 나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목장에서 듣기 싫은 사람 듣기 싫은 다른 사람들에 매맞고 옥에 갇혀서 찬송 부르는 얘기 듣기도 싫다가 사건이 생기니까 그 무시했던 그들이 모두가 ‘우리가 다 여기 있다’ 이러는 거에요. 내가 그렇게 무시했던 그들이 ‘우리가 다 여기 있다’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이럴 땐 소리 질러도 돼요 그러니까 이 간수에게도 물을 수 있는 공동체인 우리가 생긴 순간인 거예요. 우리가 생겼어 ‘우리가 다 여기 있다’라고 외치는 공동체는 소도 잡고 말도 잡습니다
32절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33절 그 밤 그 시각에 간수가 그들을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어 주고 자기와 그 온 가족이 다 세례를 받은 후
34절 그들을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 주고 그와 온 집안이 하나님을 믿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
사도행전에 한 번 나오는 큰 기쁨이 빌립보 간수의 집 안에 허락이 되었어요. 진짜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 한 공동체인 우리가 저절로 되어서 관계가 열리고 집이 열려 성령의 교재가 있는 교회가 됩니다 공동체에서 다른 지체를 섬길 때 특별히 주시는 큰 기쁨은 다른 지체들을 섬길 때마다 이 땅에 가장 큰 섬김을 위해 오신 자기 생명을 주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시는 것이고 그러기 때문에 섬김을 받는 자 섬기는 자가 다 함께 예수님 때문에 함께 기뻐하는 거예요 창조주 예수님이 나의 섬김 가운데 나타나는 거예요.
죄수들의 인생에는 그게 나타나요. 따라서 우리가 여기 있다고 외치는 죄수 공동체는 우리가 되어서 모든 것이 열리고 벗어지고 움직이게 되는 성령의 열림이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We are all here-우리가 다 여기 있습니다’ 할렐루야!
그러니까 우리 평원님 새벽 기도를 듣고 어떤 분이 설교 리플을 달았어요. 평온한 환란이 제게는 어둠 바다에 등대 같습니다. 다 커서 사회생활 잘하던 두 아이가 30대 중반의 나이에 정신적으로 아파서 한 아이는 집에 있고 또 한 아이는 약 먹으며 겨우겨우 살아가고 있습니다 망해서 지금의 공동체에 왔는데 가난이 익숙해져서 견딜 만하니 자녀들의 아픔으로 힘듭니다 그러나 이제는 함께할 목장이 있어 견딜 수 있습니다 이 고난 끝에 행복이 아니라 천국이 있음이 믿어지니 감사합니다 먼저 겪고 말씀이 해주시는 이 평원님 계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여러분 이분이 얼마나 힘들겠어요 서른이 넘은 딸들이 지금 다 아프고 다 망해서 왔는데 그러니까 이런 것들이 여러분들이 ‘We are all here’가 되겠습니까? 이런 고난 듣고 ‘우리가 다 여기 있다’ 그 말이 나오겠어요? 그런데여러분 우리가 개미에요 아무리 열심히 해도 누군가 와서 한 번 밟으면 끝이에요.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그 어마어마한 죄인 속에 역사하시는 그 보배를 가진 죄인들이 되셔야지, 성령의 죄수가 되셔야지, 열리고 더 앞으로 직행하는 거예요. 할렐루야!
진실과 구원은 너무 다른 거예요 진실과 구원은 다릅니다.
(적용#3)
-여러분의 목장은 우리가 여기 있다고 외치는 목장입니까?
-여러분은 공동체에서 바울이 로마 시민권자인데 어떻게 옥에서 매를 맞냐고
이것은 팩트야, 진실이야, 하면서 그들을 고발하기 위해 묻습니까?
-인생 최고의 질문과 답인 구원을 위해 묻습니까?
-여러분은 섬김이 큰 기쁨입니까? 성공이 큰 기쁨입니까?
<Epilogue>
1)성령의 죄수는잘 듣는다 그리고 잘 묻는다
2)저절로 우리가 된다 그러면 모든 것이 열리게 된다
3)어떻게 찬송하나? ‘그 두려움이 변하여 내 기도가 되었고 전날에 한숨이 변하여 내 노래 되었네.’ 이것이 죄수들의 찬양이다
4)그 나라에 가기까지는 늘 우리를 지켜 보신다
5)자기가 의인이기에 남들은 무시하고 억울해서 절망 가운데 자포자기하고 열려있는 공동체를 우회하기에 감행하는 행위가 자살(자결)이다
6)죄인공동체가 되어야 말이 통한다
7)죄인들의 만남이 감옥인데 결혼도 감옥이다
8)망할 때가 말씀이 들리는 때이므로 기뻐한다는 것이다
9)가정이라는 감옥에서 말씀을 들어야지 세상으로 탈옥하면 망한다
10)무늬만 죄인이고 속은 의인9모범생)이 우리다
11)의인과의 만남이 최악의 만남이다
12)외롭고 의로운 사람의 결론은 간수와 같이 자살이다
13)성령의 죄수가 되어야 감옥 문이 열려도 안 움직이고 뛰쳐나가지 않는다
14)성령의 열림을 경험하는 기회가 잇는 곳이 열려있는 목장 공동체이며 ‘We are all here’의 공동체다
15)성령의 죄수로서 차별 없이 가는 곳이 천국이다
16)신 결혼하라고 말하는 것은 죄인들의 공동체를 꾸리는 것이다.
17)(영적)죄인들의 만남이 최고의 만남이다.
18)(영적)죄인과 (육적)의인의 만남은 소망을 이룰 확률이 반이 되지만 의인들끼리 만나면 기분 좋게 들어갔다가 죽어가는 것처럼 행복을 부르짖다가 구원을 놓치니 최악의 만남이다.
19)율법이나 은혜나 강박이나 두려움이라고 해도 법 하나 때문에 가정을 파괴하면 정말 율법으로 망하는 것이다.
20)결혼은 감옥생활에서 시작하는 것이어서 너도 죄인, 나도 죄인 하면서 감당을 하는 것인데 서로 선한 것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21)과거 가지고 싸워도 죄인 된 태도로 일관된 것이며 죄인 공동체이기 때문에 우리들 청년이 이혼이 없는 것인데 잘난 것이 없기 때문이다.
22)가치관이 한쪽 죄인의 일이면 다르기 때문에 영적 전쟁이 치열하다.
23)빌립보 감옥에서 바울과 실라가 찬송하니까 문자적으로 낮아진 죄인인 죄수들이 들었는데 그 이유는 갇혀 있으니 듣는 것이다.
24)식구들도 망하고 갇혀있을 때는 기도와 찬송을 들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25)사람한테 점수 주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영적 죄인들이 성도들이기 때문인데 영적 죄인들인 우리가 죄인인 것이다
26)감옥에 갇혀서 죄를 모르는 진짜 죄인들에게 긴 기도와 찬송을 들려주어야 하는 사명이 있는 것이다.
27)들릴 때가 오지만 조금이라도 돈이 있고 권세가 있으면 뛰쳐나가게 된다.
28)가정은 최고로 지켜야 할 가치라고 어려서부터 알려주는 성경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지킬 수 없다.
29)죄인들에게 주신 은혜는 가정을 지키는 것이다.
30)찬송하고 하나님 나라에 속하며 아버지를 부르짖으면 그것이 은혜다.
31)돈도 없고 갈 데도 없으면 기도와 찬송을 듣게 되며 망할 때가 말씀이 들릴 때라고 믿게 된다.
32)감옥에서 잘 살면 얼마나 잘 사나? 감옥에서 잘 사는 것은 기도와 찬송하는 것인데 거기서 힘들다고 탈옥하면 기도와 찬송을 들을 기회를 놓치는 것이다.
33)예수 믿는 아내와 남편을 버리고 탈출하면 감옥에서 천상의 찬송을 들을 기회를 놓치는 것이다.
34)이혼하지 않은 것은 영육의 두려움 때문이었다.
35)성령의 죄수가 되어서 정말 의인으로 지옥 갈 뻔했는데 좋은 기회를 주시는 거라 말씀드리는 게 전달이 되는 것 같다.
36)결혼의 감옥에 갇혔다고 불평과 인권을 부르짖은 것이 아니라 가정을 지킨 것이 감사한 것이다
37)나의 죄를 성령이 알려주셔야 하는데 그날이 갑자기 온다.
38)늘 기다리는 것 같지만 갑자기 옥토가 흔들리고 문이 열리게 되는데 옥에서 잘 기다리면서 자기 죄를 더 보며 내가 옥에 있는 것은 스데반이 죽은 나의 결론이라고 실라와 나누었다.
39)영적 시각이 생기게 되고 새로운 가치관이 생기게 된다.
40)둘 다 의인이면 최악의 만남이고 앞이 안 보이고 기도와 찬송이 들리지 않는다
41)질그릇이 아니고 금 그릇이기 때문에 깨지지 않는다.
42)남녀 둘 다 의인인 금 그릇이기 때문에 영혼이 안 보이고 영원한 심판으로 가게 된다.
43)지옥이라고 생각하고 늘 원망속에 있든지 불평 속에 있던지 죄수들의 감옥이지만 특별 대우 받으면서 특별하게 있었다고 해도 잠시간의 행복 아니겠나? 얼마나 이 땅에서 잘 살겠나?
[우리들교회 2021년 8월8일 주일예배 말씀 요약(사도행전 15:1~ 11/ 주 예수의 은혜로 /심한섭 목사)]
<사도행전 15: 1 ~ 11절>
1절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2절 바울 및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의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
3절 그들이 교회의 전송을 받고 베니게와 사마리아로 다니며 이방인들이 주께 돌아온 일을 말하여 형제들을 다 크게 기쁘게 하더라
4절 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하매
5절 바리새파 중에 어떤 믿는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6절 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
7절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8절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언하시고
9절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
10절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11절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Prologue>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은혜로 쓸모 없는 저를 잊지 않으시고 은혜로 이 자리에 세우셔서 저 같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부족한 저를 세우셨으니 주님께서 말씀하여 주시옵소서 듣겠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죄송합니다. 바울이 너무나도 사랑했던 에베소의 편지에 보내신 것을 아실 것입니다. 그 편지에 인사말을 인용해서 제가 너무나 사랑했던 여러분께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우리들교회 성도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정말 바울이 에베소를 생각하는 그런 마음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여러분 얼굴을 떠올리면서 설교를 적었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보이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보이시죠. 예.. 너무 보고 싶었습니다. 심한섭 목사입니다. 오늘 본문은 목사님께서 구원의 확신과 구원의 의논이라는 두 번의 설교로 나누어서 말씀을 전해 주셨는데 저는 오늘 목사님께 그동안 평생 양육을 받아온 제자 입장에서 우리들 교회에 공동체였던 사람으로서 오늘 본문을 조금 자세한 설명은 목사님이 해 주셨기에 어떤 율법과 행위에 대한 은혜에 대한 이야기로 재구성해서 전하겠습니다. 미국에서 공부한 것을 설명 드리겠습니다. 잘난 척을 하겠습니다. 구원은 이미 받은 구원과 우리가 받아야 할 구원 이렇게 두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이미 값없이 우리에게 준 구원을 ‘칭의’라고 합니다. 우리를 의롭게 칭하였다고 합니다.
이루어가야 할 구원의 여정 이것을 ‘聖化’라고 부릅니다. 풀어서 설명하면 예수를 믿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자임과 동시에 여전히 되었다 함이 없는 그런 인생 속에서 거룩이 됨을 소망하면서 계속해서 걸어가야 하는 과정 속에 있습니다. 이것을 聖化라고 합니다. 거룩하게 되는 의미입니다. 이미 구원을 받은 성도 모두가 저와 여러분 모두가 여전히 계속 가야 할 길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들 교회가 역사를 가졌다고 말할 만큼 긴 시간의 교회가 되었습니다. 휘문고 강당에서 예배를 드리던 2006년 부활주일, 오랜 방황에 마침표를 찍으며 이승민 목사님으로부터 목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중 고등부 청년부 스텝으로 목자로 부목자로 그리고 분당 채플의 간사로 유년부 전도사로 지금은 사라진 주얼리 스쿨의 사역자로 섬겼습니다. 제1회 큐티 페스티벌을 했었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열정적이고 젊었던 날들을 형제와 같은 지체들과 함께 보냈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수백 명 수천 명의 교회성도 분들이 마치 하나의 몸인 것처럼 우리들 교회는 하나 되어서 움직였습니다.
제가 느끼기에 어떤 분도 교회의 일을 노동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한 번의 예배를 위해서 자기 일처럼 헌신했습니다. 휘문고등학교에서 예배드릴 때 더운 강당에서 예배를 세팅해서 김승조 집사님을 포함해서 여러 집사님들이 헌신해 주셨습니다. 누구보다 수고했던 실장님이 되신 전선규 간사님과 스태프 분들 더운 강당에서 무거운 스피커와 악기들을 옮기면서 섬기던 우리 박종률 집사님과 찬양 팀 수련회를 위해서 자신의 시간과 삶을 헌신했던 유병철 집사님과 형제자매들 손과 발이 가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던 고난의 투성이였지만 모든 부서에 아이들의 구원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들 헌신하셨던 부장 집사님들과 선생님들 스태프 분들 어린아이들의 구원을 위해서 교회에서 밤을 새워서 큐티 페스티벌과 행사들을 주관했던 사실 엄청난 인재들이었지만 밤낮으로 수고해 주셨던 관계자분들 교회 사무실에서 온갖 행정 일들을 처리하던 간사님들 지금까지 이름도 빛도 없이 섬겨주신 집사님들 무엇보다 저와 함께했던 너무나도 사랑했던 목원들 여러분 모두와 함께했던 시간을 교회에 떠나있던 7년 동안 단 한순간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그 당시에 우리들 한 명 한 명이 각자의 자리에서 우리들교회 였습니다. 우리들이 이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살고자 찾아왔던 교회에서 생명을 경험했고 소망을 맛보았습니다. 나의 인생을, 사람 살리는 인생이 되도록 변화시킨 하나님의 은혜를 예수의 은혜를 구원을 우리는 모두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서 살아남의 흔적 열매와 간증이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을 목적으로 구속사의 가치관으로 양육해 주시는 담임목사님의 설교를 반복적으로 들었습니다. 출근할 대 퇴근할 때 밥을 먹을 때 화장실에서 그리고 잠을 잘 때도 우리는 말씀을 듣고 사모하며 변화되기를 소망하며 양 떼와 같았습니다.
복음의 능력이 우리를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경험하게 한 공동체가 되게 해주었습니다. 우리는 수치와 제패를 알고 있었고 서로를 정죄하지 않았습니다. 서로에 대한 조언과 필요한 처방을 했지만 우리는 그 누구에게도 공격적 폭력적이지 않았습니다 서로가 더욱 힘든 일을 자처해 왔습니다. 교회의 일이라면 언제나 기꺼이 한 걸음에 어디서든 교회로 달려오고 했습니다. 자기의 죄를 생각하며 회개했고 독사의 자식이라고 정죄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주님의 몸 된 교회 안에서 각자의 지체가 되어 서로를 형제라고 부르며 다음 목사님과 여러 전도사님과 같은 분들에게 양육을 받으며 예수님의 제자들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믿음을 가지고 아름다운 섬김을 나눈 우리들에게 여전히 양육이 필요함을 이야기합니다. 이미 구원의 은혜를 경험했지만 가야 할 성화의 길, 아직도 되어야 할 길이 있는 것입니다.우리가 계속해서 성장하고 자라나야 할 이유들을 말씀해 주십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누구보다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맛보았고 목격했으며 경험했습니다.
어느 교회보다 많은 간증을 경험했고 살아났습니다. 엄청난 자부심과 자산이 마음속에 있습니다. 우리와 같은 사람이 본문에 등장합니다. 사도와 장로들입니다. 이들을 예수님과 함께 살았습니다. 누구보다 영적인 자부심 있는 사람들, 공의회 멤버들이었습니다. 본문에서는 아직도 되었다함이 없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을 묵상하며 여러분과 저와 우리들 교회가 생각났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어느 부류의 속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성화의 길을 끝까지 걸어가기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 같습니다. 구원의 은혜를 경험하고 어느 정도 원리와 신앙의 그런 것들을 깨달아서 이 집사님은 이렇구나, 저렇구나, 이렇게 알 수 있는 것 같은데 이분은 믿음이 있구나 이분은 믿음이 없구나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목자-권찰-초원-평원으로 섬기시면서 내가 이 정도면 믿음도 있고 된 것 같고 말씀 들으면 그런 것 같은데 왜 우리는 양육을 받아야 합니까?
오늘 본문을 통해서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는 우리들에게 그 이유를 설명해 주십니다.
<말씀 요약>
1.여전히 율법과 행위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1절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2절 바울 및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의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
지금 읽은 구절을 보면 안디옥교회 안에 다툼과 변론이 있습니다. 구원에 관한 문제였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어떤 사람들과 논쟁을 벌였습니다. 이들의 요지는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이것이 요지입니다.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 행위의 증표 없이는 인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할례를 받으면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본래 선한 것입니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구별된 살도록 요구하신 하나님의 완전하고 거룩하신 법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고 알게 하고 무엇이 올바른 지 보여줍니다. 존 칼빈은 율법은 우리들의 삶을 인도하는 안내하는 규범과 같은 역할을 강조했습니다. 예수께서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것이지 패하러 오신 것입니다. 삶의 방향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선하고 좋은 율법이 행위로서 우리의 구원까지 이어질 수 없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죄인인 우리 인간은 율법을 완성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죗값을 대신 치름으로써 율법을 완성시켜 주셨습니다. 행위를 성취하는 방식으로 얻어지지 않습니다. 율법은 인간이 행해야 하는 일을 말해주고 은혜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행하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율법에 얽매여 있는 사람은 육의 것, 인간의 행위를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행위 한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행위를 통한 행위 구원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사실 지금 말씀드린 이야기가 모두에게 익숙한 이야기처럼 들려서 지루해 할 수도 있습니다. 행위와 은혜는 참 뻔한 것 같은 이유는 2천 년 역사에 정말 오랫동안 많은 논쟁거리가 되어 왔고 다툼이 있는 주제입니다. 행위와 은혜는 미묘한 관계에 놓여있어서 우리 자신도 모르게 행위와 율법에 얽매이는 것이 많습니다. 두 가지 정도로 설명 드리겠습니다. 순서가 중요합니다.
첫 번째는 행위와 은혜를 이해할 때 그 순서가 너무나도 중요합니다아 제가 17년 만에 이 자리에 여러분 앞에 서서 여러분 참 뭐 저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궁금하신 것도 많으실 텐데. 제 얘기를 다 하자면 이제 오늘 밤을 새야 되니까 제 아내가 이제 그 교회를 나가서 이제 그 사이에 제가 결혼도 하고 목사 안수도 받고 미국도 가고 또 이제 여러 가지 일이 있지 않았습니까? 제 아내에 대해서는 여러분이 아는 바가 없으시겠죠. 예 그래서 제 아내는 이제 제가 결혼할 때 정말 너무나도 매력적이었던 것은 물론 이제 하얀 피부 이런 것도 참 매력적이었죠. 하얀 사람을 참 좋아합니다 죄송합니다. 하얀 것이 참 이게 이 행위를 뛰어넘지를 못해가지고요. 아직 그. 하여튼 하얗고 참 예쁘고 정말 이렇게 자세히 볼수록 더 예쁘고 막 그런 사람인데 근데 정말. 제가 이제 아내를 좋아했던 이유는 무엇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이 저에게 정말 매력적이었고 정말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결혼을 하고 바로 미국에 갔거든요. 미국에 가서 살다 보니까 미국에서 한국이었으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가족이나 친지 분들께 도움을 청할 수도 있고 또 뭐 친구들이나 또 뭐 이렇게 여러 가지 주변에 사람들이 있지만 미국에 가서 보니까 이제 언어도. 한국 말처럼 그렇게 편하게 되지 않는 상황이기도 한 데다가 주변에 뭐 가족도 없고 친지 가까운 곳에 어떤 도움을 요청할 사람들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결혼을 해서 그래서 이제 미국에서 둘이 살다 보니까 하나님만 두려워하는 줄 알았던 아내가 세상 두려운 게 이제 너무 많은 사람인 겁니다. 두려움과 불안과 염려로 늘 걱정하고 마음을 조리고 뭘 하나 살 때도 막 수십 가지 사이트를 뒤져보고 부작용을 다 따져보고 염려하고 사람들이 올려놓은 후기를 읽어보고 그리고 나서 또 구매할까 말까 막 고민을 하고다른 사람에게 어떤 말을 한마디 할 때도 이것저것 생각하는 게 너무 많아서 말 한마디도 쉽게 잘 못합니다. 막 이렇게 말을 하려다가 타이밍을 놓치고 물론 이제 그런 모습이 참 귀여워 보이기도 했고 좋게 보면 아 참 신중한 사람인가 봐. 뭐 이렇게 봤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제게 참 답답하게 느껴질 때가 있었어요. 저는 담임 목사님께 예전부터 두려움은 곧 욕심이다 이렇게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기 때문에 와이프 아내의 그런 행동들이. 두려움과 염려로 이렇게 차 있는 그런 행동들이 야, 저 사람 저거 욕심이 많구나. 이제 이렇게 생각을 하고 그 그러한 행동들이 고쳐 지기를 바랐습니다
한편, 제 아내는 불안과 두려움이 많은 반면에 저는 또 뭔가 제가 이렇게 저랑 예전에 이제 함께 사역해 보신 분들은 좀 아시겠지만 제가 뭔가 정해놓은 룰이나 어떤 기준이 딱 있으면 그게 어긋나는 일이 생기는 꼴을 잘 못 봅니다. 이제 강박적으로 그것에 이렇게 몰두해서 집착하고 막 그런 저만의 어떤 율법이 있습니다 그 율법으로 상대방을 옥죄고 이렇게 해야 된다라는 어떤 저만의 그런 아주 고약한 율법이 있습니다 ‘물건은 늘 제 자리에’. 이게 이제 제 인생의 주제가입니다 야 그런데 이제 하루는 이제 그런 저와 두려움쟁이인 제 아내와 이제 강박쟁이인 제가 미국에서 함께 사는데, 제 아내는 이제 부엌에서 요리를 할 때 이제 참 재미있는 습관이. 하나 있는데요. 이 부엌 찬장에 보면은 이제 왜 양념통 같은 거 집어넣는 이게 찬장이 있잖아요. 그러면은 이제 이런 거를 요리할 때 이제 그런 양념 같은 게 필요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제 와이프는. 찬장을 다 열고 요리를 해요. 찬장이 이렇게 쭉 있고 뭐 여기는 뭐 미림이 있고 뭐. 뭐 간장이 있고 설탕이 있고 이제 막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은 그 찬장 문을 다 열어놓고 온갖 양념을 다 꺼낸 다음에 요리를 해요 근데 이제 저는 어떻게 하냐 하면 간장을 꺼냈다가 바로 제 자리에 넣고 다시 닫고 또 필요하면 또 꺼냈다가 다시 넣고 또 닦고. 설탕이 필요하면 꺼냈다가 또 쓰고 다시 넣고 닫고 이렇게 해요 그럼 이제 제 아내는 다시 그 찬장을 다 열고 양념을 다 꺼내고 또 이제 요리를 하고 그러면 제가 이제 졸졸 따라다니면서 그걸 또 다 제자리에 놓고 또 찬장을 닫고 이렇게 합니다 그니까 저의 강박이 발동하면 이제 혈기가 올라오고 그러다가 한 번씩 터지면 그 혈기는 저의 터진 혈기가 아내의 두려움을 마주합니다 강박쟁이와 두려움쟁이가 마주치면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이제 강박쟁이는 바로 혈기쟁이로 둔갑을 하고요. 그리고 두려움 쟁이는 울보가 됩니다 강박쟁이는 끝까지 그 문제의 원인을 캐고 물어서 너는 왜 그렇게 하냐고. 너는 왜 그렇게 해야 되냐고 따지고 싶어 하고 두려움 쟁이는 그런 강박쟁이가 질려서 눈물을 흘리면서 자리를 회피하고 싶어 합니다. 저와 제 아내가 서로의 어떤 각자의 두려움과 강박이 해결되기를 바라고 있었지만 그렇지만 저희들의 그러한 행위로 드러나는 문제가 결국 은혜로 밖에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였음을 저희는 간과하고 있을 때가 있었습니다 저는 아내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를 경험하게 해줬어야 되는데 오히려 두려움이 많은 제 아내에게 강박과 혈기로, 제 아내를 율법으로 대할 때가 많아서 아내의 구원과 은혜를 더 멀어지게 만들곤 했습니다 눈으로 보여지는 것이 전부인 우리에게 우리 인간에게 율법과 행위라는 문제는 우리 삶에 아주 깊숙이 이런 식으로 아주 구체적인 곳에 들어와 있습니다. 매일매일 우리가 걸려서 넘어지는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우리가 머리로는 아 나는 율법적이지 않아. 그렇지 구원은 율법으로 행위로 얻어지는 게 아니지. 모두들 알고 계시겠지만 실상 여러분의 구체적인 삶을 들여다보시면 우리는 우리 자신도 모르게 매일매일 율법적이고 행위 구원적인 삶을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할례를 받으면 구원을 얻는다. 강박이 고쳐지면예수를 잘 믿는 사람이다 두려움이 사라지면 믿음이 좋은 사람이다 중독이 끊어지면… 저희 아내가 찬장 문을 다 닫으면 큐티를 매일 하면 부지런해지면 열심히 살면 무언가 내 행위가 변화되면 다시 말해서 할례를 받으면 구원을 얻는다 라는 식의 율법과 행위의 굴레를 우리가 사실은 잘 벗어나지 못합니다 자녀를 양육하는 데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엄마 말을 잘 들으면 착한 아이죠 그죠.
숙제를 알아서 잘하면 훌륭한 아이입니다 노래도 있죠 산타 할아버지가 알고 계신데 누가 착한 앤지, 누가 나쁜 앤지, 그리고 오늘 그 오늘 밤에 그 심판이 이제 이루어집니다.
할아버지가 다녀가시면 ‘모든 세상이 하도 나쁘고’라는 율법과 행위의 굴레 안에서 돌아갑니다 그런데 여러분 제가 서두에 말씀드렸다시피 이 율법과 은혜에 서 그 미묘한 관계 속에 순서가 잘못되어 있는 것입니다 물론 행위를 올바르게 하는 건 너무 중요합니다 우리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 그런 문제들은 사실 거의 눈으로 보여지는 문제들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더 중요한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는 행위는 은혜의 뒤에 따라 옵니다.
우리 잠시 다 함께. 요한복음 15장 5절을 좀 읽어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5장 5절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라.
아멘
행위는 열매입니다. 사람이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가장 은혜로운 방식은. 포도나무인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은혜. 그 임재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은혜가 먼저고 행위는 나중입니다 이 순서를 자꾸만 우리가 거꾸로 하려고 합니다. 죄를 고백할 때 우리는 우선적으로 행위로 지은 죄를 생각합니다그러면. 그리고 이제 막 그런 행위로 지은 죄에 대한 나눔들 또한 많이 합니다. 행위의 죄만을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어떠한 행위. 고치면 죄가 해결된다고 착각하기도 쉽습니다 음란을 행한 사람 또 도박을 한 사람 외도를 행한 사람. 중독에 빠진 사람. 또 혈기와 강박이 충천한 사람들 그리고 이런 모두가 우리가 이 행위를 고치는 것에 집중을 자꾸 합니다 행위가 끊어지면 믿음이 있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잘못된 것인 것처럼 말입니다 쉽게 말해서 알코올 중독이라는 행위를 끊었다고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되는 건 아닙니다 다른 방식으로 말씀드리면 술 중독 여자 중독. 도박 중독을 끊어내면 내 배우자가 밖에 나가서 착실하게 돈을 잘 벌어오면 내 배우자가 고분고분 내 말을 잘 들으면 다시 말해서 그 사람의 행위가 변화되면 그러면 그 사람이 예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사람이 할례를 받았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의 은혜를 경험하지 않고 행위만 바르고 의로운 사람이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정말 무서운 것입니다 순서가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행위의 변화가 우선이 되면 다른 구원이 됩니다. 다른 복음이 됩니다. 구원은 기본적으로부터 죄로부터의 구원입니다 따라서 행위의 구원을 생각하는 사람은 행위의 죄만을 생각합니다 하지만 은혜의 구원을 생각하는 사람만이 은혜를 떠난 모든 것이 되었음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제 와이프에게, 저희 아내에게 90세가 넘으신 할아버지가 계신데요. 이제 일평생 법조인으로 살아오셨기 때문에. 바르고 의로운 삶을 사셨다고 스스로 생각을 하십니다. 한국에 와서 기회가 될 때마다 와이프와 함께 할아버님을 만나서 함께 예배를 드리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하루는 사도행전 3전에 3장에 성전 미문 앞에 앉아 있는 앉은뱅이 본문을 가지고 죄인에 대한 설명을 해드린 적이 있습니다. 보청기를 끼시고 구십 대가 좀 넘으신 할아버님께서 굉장히 해맑은 표정으로 그 죄인에 대한 설명 부분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죄인이라고 하시면서 이제 웃으셨습니다 어떻게 평생 법조인으로 바르게 살아오신 법을 지키면서 살아온 내가 죄인일 수 있는지 의아해 하셨습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 많은 분들이 지금 이 이야기를 들으시고 그래 안 믿는 분들이 그렇지 뭐. 이렇게 생각하실 겁니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우리의 이야기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종종 적용이라는 이름으로 행위 구원을 부추길 만한 말들을 또 꽤나 많이 합니다 요즘은 게임 안 하십니까. 요즘은 도박 안 하십니까 이제 술 끊으셨습니까. 이제 남편에게 잔소리 안 하십니까? 할례 받으셨습니까? 예수 없이 은혜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의 행위가 변화된다면 그것보다 또 무서운 것이 없습니다 만약에 여러분의 남편 분께서 예수의 은혜를 전혀 경험하지 못하셨는데. 술이 끊어지고 모든 행위가 올바르게 변하셨다면 그것이야말로 정말 병원에 가볼 일입니다.
우리는 항상 이 행위의 한계를 여전히 넘어서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는 율법의 테두리 안에서 이제 행위로 지켜야 할 것들을 지키지 못한 정말 대표적인 죄인입니다. 제가 행위로 지은 죄들은 정말 수도 없이 많습니다 악하고 이기적인 것은 말할 것도 없고저는 선교사였고 신학생이었으며 또 목회자인 순간에도 여전히 제 말과 행동으로 거짓과 음란을 끊임없이 일삼는 야곱 같은 죄인입니다 아마 지금 이 순간에도 저를 아시는 많은 분들 중에는 야, 심한섭이 설교를 한다’. ‘저 죄인이!’ 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많이 있을 겁니다 저는 우리들 교회에 정말 대표 죄인이었습니다
그렇게 제 삶의 행위를 생각하면 두 말 할 것도 없이 저는 이 자리에 서 있을 자격이 전혀 없습니다 지금도 가끔씩 제가 하나님께 지었던 죄를 생각하면. 자다가 잠을 깰 때가 있습니다 내 자신이. 너무나도 형편없는 죄인이었음에 몸서리가 쳐질 때가 있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은혜 때문에 제가 이 자리에 지금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제가 이 설교의 자리에 있기 때문에 은혜 받은 자라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제가 은혜 받은 자이기 때문에 이 설교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순서가 바뀌면 다른 복음이 됩니다. 저는 제가 받았던 죄인인 제가 받았던 그 은혜를 잃으면 바로 육체의 율법과 예전의 행위만을 강조하던 삶으로 돌아갑니다 제 안에 선한 것이 하나도 없어서. 은혜를 잊으면 아무리 노력을 해도 죄를 짓는 공장일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앞에 설교를 하며 이렇게 서 있지만. 저는 그저 끊임없이 죄를 짓는 강박쟁이일 뿐입니다 박사를 하고 공부를 하고 이제 어딘가에 설교하라고 저를 부르는 교회들도 생겼습니다 설교를 하러 가면 뒤에 강사 양력을 소개하면서 칼빈 박사 이렇게 써 놓습니다. 저를 소개할 때 하지만 저의 어떠한 학력과 보여지는 것으로 거룩한 척을 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속일 순 있어도 하나님 앞에서. 박사가 아니라 박사 할아버지를 하더라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이에 살 수 없는 사람인 것을 숨길 수가 없습니다 그 예수의 은혜가 아직 제가 죄인 되었을 때. 저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확정하신 그 예수의 은혜가 제 안에 있어서 오늘도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서 강박적인 제 모습을 고쳐달라고 기도합니다 은혜를 경험한 사람은 배우자의 구원을 위해 못할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담임 목사님과 어머님에게 삶으로 배워온 것입니다 상대방의 구원을 위해 목숨을 내어 놓는 것 내 모든 것을 다 해서 내 사랑하는 사람이 구원 받을 수 있다면. 그런 마음이 생기는 순간 상대방의 율법과 행위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이 순간에 또 헷갈리시면 안 됩니다. 상대방의 구원을 위해서 목숨을 내어놓기 때문에 은혜를 경험한 것이 아닙니다. 은혜를 경험했기 때문에 목숨을 내어 놓을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제 아내를 사랑한다고 주를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악한 행동을 다 끊어낸다고 주를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없이도 그렇게 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무서운 것입니다 순서가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예수를 사랑하는 것. 은혜를 사모하는 것. 그것이 우리 행위의 모든 행위의 이유가 되어야 합니다.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얻으면 할례 받은 자의 삶을 소망하게 됩니다
둘째로 율법은 인과 응보를 이야기합니다할례를 받으면 구원받는다. 다시 말하면 무엇을 하면 복을 받고 안 하면 저주받는다 우리는 이것을 기복 신앙이라고 부르지만 세상은 이것을 합리적이라고 말합니다 세상은 이렇게 어떤 Give and Take의 원리로 작동됩니다. 내가 준 만큼 돌려받는 것 이것이 가장 합리적이고 또 이성적입니다 이러한 논리로 세상은 돌아갑니다 다시 말해서 할례를 받으면 구원을 받는 것이 논리적인 인과 관계입니다 율법은 인과관계이고 합리적인 논리로 설명이 되지만 그러한 인간의 논리성과 합리성은 은혜를 설명하기엔 너무나도 부족합니다 오랜 시간 목자로 섬기고 전도사도 전도사로도 섬기고 이제는 목사까지 되었지만 여전히 제 안에 이렇게 율법의 행위를 뛰어넘지 못하는 기복 신앙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제 아내가 이제 저에게 무언가를 부탁하거나 그럴 때 저도 모르게 마음속에서 자기는 뭘 해 줬나?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내가 아내에게 제가 아내를 위해서 이제 뭘 했을 때 뭔가 이렇게 제가 아내를 위해서 뭔가 수고를 했을 때 나는 이렇게까지 해주는데 쟤는 나를 위해서 뭘 해주지 이런 생색이 올라올 때가 있습니다. 내가 줬으면 받아야 되는 게 언뜻 보기에 합리적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기복신앙이고 율법입니다 우리가 예수로부터 받은 은혜는 전혀 합리적이지 않습니다
내가 예수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복을 받는 거라면 이 예배에 참석한 어느 누구도 복을 누릴 자격이 없습니다. 내가 준 만큼만 받는 것이라면 이 자리에 구원을 얻는 만큼. 하나님께 무언가를 드릴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은혜를 경험했으면서도 우리는 계속해서 부부 관계 속에서 또 자녀를 대할 때 율법으로 대하고 기복으로 대하고 그것을 논리와 합리라고 표현하며 드리댑니다 그리고 그렇게 율법과 인과관계를 들이대는 사람이 관계에서 승리합니다. 상대방으로 하여금 할 말이 없게 만듭니다 그렇게 우리는 이깁니다 이기고 또 이겨서. 내가 이만큼 했는데 너는 나에게 뭘 해줬지. 니가 해준 게 없으니 나도 해줄 게 없어. 이것이 세상이 승리하는 방식 율법의 행위의 방식입니다 나는 배우자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내 자녀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율법은 논리를 가지고 이기려고 하지만 은혜와 복음은 절대로 이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죽음으로 승리합니다
(적용#1)
-타인의 겉으로 보여지는 문제가 해결되기만을 바라고 있나요? 남편과 아내, 자녀들의 행위의 문제가 고쳐지기만을 바라고 있나요? 아니면 그들이 말씀을 듣고 예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기를 바라고 있나요?
2.우리가 기쁨 중에 참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3절 그들이 교회의 전송을 받고 베니게와 사마리아로 다니며 이방인들이 주께 돌아온 일을 말하여 형제들을 다 크게 기쁘게 하더라
4절 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하매
5절 바리새파 중에 어떤 믿는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믿지 않는 자들이 믿게 된 간증을 들려줍니다. 그곳에 있는 형제들이 모두 기뻐합니다 예루살렘에 도착해서도 마찬가지로 사도와 장로들의 영접을 받고.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 다시 말해서 인간이 행한 율법에 관한 일이 아닌 은혜에 관한 일을 말합니다. 모두가 기쁨으로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의 행하신 일을 은혜의 일을 나누고 있는 이 순간에도 이 기쁨에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리새 파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바리세파 사람들도 저희와 같은 믿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믿는 저와 여러분 중에도 이런 바리세파의 모습이 있다는 말입니다. 일절에 등장한 유대로부터 내려온 어떤 사람들의 주제가가 ‘할례를 받지 않으면’ 이었다면 지금 이 바리세파 사람들의 주제가는 ‘마땅하니라’ 입니다. 이렇게 하는 게 마땅하다이게 맞다. 저건 틀리다 이게 옳고 이게 그르다 율법과 행위를 넘어서지 못하는 사람은 결국 옳고 그름의 문제를 뛰어넘지를 못합니다. 항상 그것을 따지느라고, 이게 맞는지 저게 맞는지를 따지느라고, 공동체 안에서의 구원의 기쁨을 함께 누리지를 못합니다.
이것은 저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참 가깝게 지내던 한 목사님께 제가 여쭤봤습니다. ‘목사님 저는 어떤 점이 목사님 보실 때 율법적인 것 같습니까?’ 그랬더니 그 목사님이 전혀 망설임이 없이 저에게 네 신 목사님은 늘 목사님이 옳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목사님 하고 싶은 말을 앞뒤 안 가리고 하시는 게 율법적이십니다. 이렇게 말해 주셨습니다 정말부인할 수 없는 맞는 말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바리새파 사람들을 보면 이들이 ‘율법을 행하라고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외치는 이 타이밍은지금 예루살렘 공동체가 바울과 바나바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에 함께 들으며 함께 구원을 기뻐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온 공동체가 늘 구원 때문에 함께 즐거워하고 있는 이 순간에 바리새파 사람들은 자신이 옳다는 생각 때문에 공동체의 기쁨은 아랑곳 없이 ‘마땅하니라. 이게 옳다. 이게 틀리다 너희가 율법을 지키라고 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지금 이 기쁨의 순간에 이 말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저의 모습 같았습니다 저는 예전부터 아 어떤 말을 하고 싶어지면 그걸 잘 참지 못하던 모습이 있습니다. 그렇게 항상 제 말을 나오는 대로 하던 근본적인 이유는 제가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우리들교회에서 사역을 할 때 담임 목사님께 이제 정말 많은 여러 가지 혼이 나기도 하고. 여러 가지 양육을 이제 정말 많이 받았는데요. 그 중에서 목사님께서 어느 날 저에게 한 서방 잠시 실례지만, 잠시 제가 목사님 성대모사를 잠깐 하겠습니다. 제가 여러분께 더 생생하게 들려 드리기 위해서, ‘어머 한섭아! 너는 왜 이렇게 애가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게 있니?’
이렇게 말씀을 하셨어요.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게 있다. 내가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게 있다. 생각을 해 봤습니다. 정말 그런 거 같았습니다 정말 그런 거 같았습니다. 어쩔 때는 너무 좋다가도 갑자기 또 화가 날 때도 있구요. 근데 이유를 잘 몰랐습니다 그런데 이제서야 그 이유를 좀 알 것 같습니다. 제가 너무 제 안에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게 있어서 무언가가 제 율법과 제제 규범을 기준으로 그것이 틀려 보이면 무언가가 잘못돼 보이면 제 마음이 요동치고 울그락 불그락 하고 오르락 내리락 해지는 것이 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게 마땅하니라’라고 앞뒤 안 가리고 말하고 싶은 것이 제안에 늘 있습니다. 그렇게 목사님께 양육을 받고도 여전히 바리세 파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저도 속고 남도 속고 그래서 우리들 교회에서 양육 받고 계신 여러분이 정말 부럽습니다 세상에 누가 이렇게 양복을 말끔하게 차려 입고 설교를 하는 사람에게 ‘네가 오르락 내리락 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해 줄 수가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지금 모르시겠지만 여러분을 얼마나 사랑해야 여러분에게 속지 않고 그것을 말해줄 수 있는지 그것이 얼마나 축복이고 감사한 일인지. 지금 여러분은 아마 모르실 겁니다. 살다가 결혼 생활을 하고 살다가 제 자신이 너무 괴로워서 제 자신에 대해서 너무나도 알고 싶을 때가 있었습니다 나는 왜 이럴까?
나는 왜 이렇게 안 될까? 나는 왜 또 넘어질까? 나는 왜 그렇게 훈련을 받았는데도 여전히 이 모양이 모습일까? 나는 왜 율법이 극복되지 않을까? 나는 왜 행위를 건너 뛰질 못할까 그런데 여러분 ‘나는 왜 이럴까?’라고 생각하는 그 순간에 여러분이 왜 그런지 여러분이 왜 그럴 수 밖에 없는지 말해주고 들어주고 함께 할 수 있는 공동체와 목사님이 계신 것이 그것이 여러분이 참 부럽습니다 잊지 않고 누리시길 바랍니다 여기서 우리 공동체 안에 저와 비슷한 분들이 좀 이런 질문을 하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옳고 그른 것이 있어야 되는 거 아니냐 세상이 옳고 그런 기준이 없이. 그게 어떻게 인생이 살아지냐? 그러면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막 살아도 된다는 얘기냐. 옳고 그름이 없이 어떻게 살아야 되냐? 맞습니다 옳은 것은 있어야 합니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명확히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윤리가 성립되고 사회가 지속됩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애타게 찾고 따지시는 그 옳음이 있어야 옳고 그름은 있어야 한다. 그 옳음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옳고 그름의 기준이 내 안에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나 같은 죄인을 갑 없이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옳은 것입니다 스데반을 죽인 바울의 행동도 옳지 않았습니다. 예수를 세 번 부인했던 베드로의 행동도 옳지 않았습니다.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도록 거짓을 일삼은 야곱의 행동도 옳지 않았습니다 며느리와 동침한 유다의 행동은 정말 상식적으로 납득이 안 되는 행동입니다 우리아의 아내인 밧세바를 탐한 다윗의 행동은 사람이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옳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구원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만이 오른 것입니다. 마땅하지 않은 자들을 통해서 저 같은 죄인을 통해서 하나님 자신의 일을 하시는 분은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이제 옳고 그름은 우리 안에 있지 않고 예수의 복음 안에 있음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무엇이 옳으냐?’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제가 드리겠습니다 예수가 옳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공동체가 구원의 기쁨으로 즐거워할 때 함께 즐거워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를 판단하고 계십니까? 적용 질문 두 번째를 드리겠습니다.
-나는 공동체의 기쁨에 기꺼이 참여합니까? 그렇지 못한다면 왜 그렇습니까?
-지금도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마땅한 지 아닌지를 내 기준과 내 생각 내 지식으로 판단하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예수의 은혜로 얻은 구원만이 옳은 것임을 인정하십니까?
큰일 났습니다. 이제 시간이 다 됐는데. 저는 아직 3번 대지가 남았습니다. 빨리 하겠습니다
(적용#2)
-믿음이 있지만 여전히 생색과 기복으로 내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는 스스로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자랑합니까? 그것이 율법을 넘어서지 못하는 것임을 인정하십니까?
-나는 공동체의 기쁨에 기꺼이 참여합니까? 그렇지 못하다면 왜 그렇습니까?
-지금도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마땅한 지 아닌 지를 내 기준과 생각과 지식으로 판단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3.우리가 끊임없이 차별하기 때문입니다.
6절 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
7절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8절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언하시고
9절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
10절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11절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장로들이 구원의 문제를 의논하러 모였습니다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바로 옆, 앞에서 목격하고. 제자가 되었던 이들이 여전히 이 문제의 구원의 문제에 확신이 없는 모습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여전히 ‘되었다함’이 없이 계속해서 거룩을 향해 구원과 양육의 길을 걸어가야 할 이유입니다 여기 6절에서 11절 사이에 베드로가 가장 눈에 띕니다. 갈라디아서 2장에서 베드로는 바울에게 꾸중을 듣습니다. 자기처럼 예수님을 직접 목격 하지도 않았고 예수님의 愛제자도 아니었던 사람이 구원을 잘못 이해했다고 자신에게 처방질을 하고 책망을 합니다. 베드로가 어쩌면 인간적으로 자존심이 상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베드로가 오늘 바울을 변호합니다 자기에게 싫은 소리를 쓴 소리를 하던 그 바울의 편에 섰습니다. 베드로는 지금 진정한 구원의 진리를 드러내기 위해서 자신을 객관적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구원에는 차별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차별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 디아크리노라는 단어는 철저하게 분리하다. 혹은 의심하고 판단하다 이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철저하게 어딘가로부터 분리해내서 또 한 번 의심해보고 판단한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즉 차별한다는 것은 누군가를 나와는 다른 사람으로 분리시키고 판단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여전히 남들과 나를 구분하고 분리합니다.나는 목자니까 나는 부목자니까. 목원들과 나는 다르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나는 초원이고 평원이니까 나는 일반 목자들과 다르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픈 목원들과 나를 분리시키고. 그들을 판단합니다. ‘저 집사님. 너무 아파’ 이런 말을 정말 자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7절에서 9절의 내용을 한번 자세히 보시기 바랍니다. 7절에서 9절의 내용을 자세히 보시면 여기서 베드로가 구원의 핵심을 설명하는데요 7절에서 9절의 내용 중에 우리가 한 일이 무엇이 있는지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한 일이 무엇이 있는지 함께 7절부터 9절을 읽어보겠습니다
7절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8절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언하시고
9절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
사람을 통해 된 일이 있습니까? 율법을 통해 된 일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오래전부터 우리를 택하시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주어 증언하셨고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셨고.
하나님이 우리를 차별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하신 일로 다시 말해서 오직 주 예수의 은혜로. 그 하나님의 한량 없는 주의 은혜로. 우리는 목자가 되었고 부목자가 되었고 직분을 맡았습니다 그런데 왜 자꾸 차별을 하십니까 저 집사님이 너무 아퍼. 우리 남편은 정말 이상하다. 우리 아내는 진짜 교만해 그래서요 나는 아프지 않습니까? 나는 이제 괜찮아진 것 같습니까 내가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 순간이 가장 위험한 순간입니다 제가 살면서 가장 은혜를 받았던 순간은 제가 가장 아픈 사람이었음을 인정하던 순간이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마찬가지 아닙니까? 여러분 이 자리에 계신 모든 이 예배를 드리고 계신 모든 분들이 정말 아프고 상처투성이 모습이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제는 여러분이 꽤 괜찮고 이제 나는 온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한 번 돌아보아야 합니다 이와 같이 내가 누군가보다 나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내가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고 이런 사람들에게 구원의 차별이 없다는 말은 절대로 이해될 수 없습니다 구원의 차별이 없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나와 같이 다른 이들의 마음도 깨끗하게 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차별이 없음은 관계의 회복으로만 나타납니다. 인간이 하나님이 되고자 했을 때, 에덴 동산에서 인간이 하나님이 되고자 했을 때, 내가 하나님처럼 안 될 게 뭐 있어? 하는 의구심을 품으면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단절되었습니다 ‘내가 저 사람보다 못 난 게 뭐 있어? 내가 이런 얘기를 듣고 살아야 돼? 내가 저 사람한테 이런 취급을 당해야 돼?’ 이런 생각들로부터 모든 관계의 단절이 시작됩니다. 하지만 차별이 없는 구원을 경험한 사람은 결국 관계 회복으로 그것이 나타납니다. 내가 저 사람보다 나아서가 아니라 내가 내 남편보다 내 아내보다 내 자녀보다 내 동료보다 내 목원보다 내가 아프다고 손가락질 하는 그 사람보다 내가 더 나아서가 아니라 그저 하나님께서 내 마음을 그들보다 먼저 깨끗게 하셨기 때문에 단지 그 이유 하나 때문에. 내가 믿음이 있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자매들은 자들에게 형제들아라고 부르며 차별하지 않으며 끊어졌던 관계들을 회복해 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4번이나. 형제들아 라고 언급합니다. 베드로가 형제들아라고 부르는 이 순간에 제가 생각할 때 그 형제들을 향한 베드로의 차별 없는 사랑과 하나님의 차별 없는 구원에 대한 확신이 베드로의 마음 속에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던 베드로의 그 마음에 스데반을 돌로 쳐 죽였던 바울의 그 마음에 어떻게 남을 나와 차별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아무 자격 없이, 아무 조건 없이 구원을 받았는데 나 같은 죄인이 구원이 되었는데 어떻게 내 옆에 있는 남편과 아내를 저 사람은 아프고 이상하다며 차별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저도 차별 없는 구원을 이해하지 못해서 여전히 단절되어 있는 관계들이 있습니다. 가슴이 아프고 마음 한 구석의 응어리가 남아 있습니다 저의 율법적인 모습과 옳고 그름을 따지는 모습 때문에 상처받은 형제들이 교회 안에 있습니다 아마 그분들은 제가 자신에게 지금 이 말을 하고 계시는 줄 알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 자리를 빌어서 이 예배를 드리고 계시다면 정말 옳고 그름으로만 따지는 죄인 죄인이 저였음을 고백합니다. 제가 정말 교만했습니다 저를 용서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너무나 불편하고 싫은 사람이 있으십니까? 상처받고 상처 주고. 이제 안 보는 사람이 있습니까? 여러분이 보실 때 사람 되기는 글러 보이는 사람이 있습니까? 내가 어떻게 해 줬는데 나한테 이 따위로 밖에 안 해. 이런 생각을 하시는 사람이 있습니까? 이제는 죽는 날까지 안 보기로 작정한 사람이 계십니까? 목장 모임 할 때 이 집사님만 안 오면 좋겠다 그런 생각이 드는 분이 계십니까? 이제 그런 분들을 한 명쯤 머릿속에 조용히 떠올려 보시길 바랍니다 제가 3초만 셀게요. 한 번쯤 머릿속에한 분을 떠올려 보시길 바랍니다.
(적용#3)
-내가 차별하고 이방인처럼 여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관계가 단절되었는데도 불구하고 회복하고 싶지 않고 손 내밀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까?
-내가 그 사람보다는 나은 것 같습니까? 내가 그 사람을 차별하고 있다고 인정하십니까?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은 정말 열정적으로 교회를, 우리 우리들은 정말 열정적으로 교회를 섬겨온 사람들입니다. 주 안에서 생명을 경험했던 사람들이지만 어쩌면 정말 어쩌면 저와 여러분이 이전의 사랑과 회개의 감동을 잊어 버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여전히 믿음은 있지만 사도와 장로들처럼 이제는 이것이 정말 맞는 건지 확신이 없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양육되어 나아가야 합니다.
이 설교는 여러분이 아니라 사실 저에게 하는 설교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율법과 행위를 넘어서지 못합니다 보이는 것으로만 판단하고. 내 남편과 아내의 삶과 행위가 변하기 만을 바랄 뿐 정말 예수를 만나게 되기를 소망하는 마음은 포기해 버린 분들도 있을 겁니다 또 예전에 경험했던 은혜를 다 잊고 이제는 옳고 그름 만을 따지며 공동체의 기쁨에 참여하지 못하고 계신 분들도 계실 겁니다. 옆에 사람들을 차별하고 아픈 사람이라고. 무시하고 단절된 관계를 회복할 생각 없이 지내고 계신 분도 계실 겁니다. 여러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우리들교회입니다 주 예수의 은혜로 생명을 경험하고 죽음에서 살아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교회입니다 이제는 율법과 행위를 넘어서서 육이 아니라 성령의 일을 주목하고 옳고 그름이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 안에 있음을 믿으며 내가 더 아픈 사람이었다고. 내가 차별했다고. 용서를 구하며 먼저 관계 회복을 위해 손을 내미는 주 예수의 은혜로 앞으로도 변함없이 든든히 세워져 가는 우리들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는 여전히 양육되어져야 하고 거룩한 여정을 걸어가야 합니다.
감히 제가. 마지막으로 감히 제가 여러분께 이런 도전을 드리고 싶습니다. 주 예수의 은혜로 주. 예수의 은혜로 우리가 함께 경험했던 그 구원의 시간을 기억하시고. 더 힘차고 더 기쁘게 공동체의 기쁨에 참여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바랍니다. 함께 찬양하시겠습니다.
<Epilogue>
1)구원은 이미 받은 구원과 우리가 받아야 할 구원 이렇게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2)이미 값없이 우리에게 준 구원을 ‘칭의’라고 하며 우리를 의롭게 칭하였다고 한다.
3)이루어가야 할 구원의 여정, 이것을 ‘聖化’라고 부른다.
4)풀어서 설명하면 예수를 믿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자임과 동시에 여전히 되었다함이 없는 그런 인생 속에서 거룩이 됨을 소망하면서 계속해서 걸어가야 하는 과정 속에 있는데 이것을 聖化라고 하며 거룩하게 되는 의미다.
5)이미 구원을 받은 성도 모두가 여전히 계속 가야 할 길이 있다
6)나의 인생을, 사람 살리는 인생이 되도록 변화시킨 하나님의 은혜를 예수의 은혜를 구원을 우리는 모두 경험했기 때문이며 우리 안에서 살아남의 흔적 열매와 간증이 있기 때문이다.
7)복음의 능력이 우리를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경험하게 한 공동체가 되게 해주었다.
8)우리는 수치와 제패를 알고 있었고 서로를 정죄하지 않았다.
9)서로에 대한 조언과 필요한 처방을 했지만 우리는 그 누구에게도 공격적 폭력적이지 않았으며 서로가 더욱 힘든 일을 자처해 왔다.
10)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믿음을 가지고 아름다운 섬김을 나눈 우리들에게 여전히 양육이 필요함을 이야기한다.
11)이미 구원의 은혜를 경험했지만 가야 할 성화의 길, 아직도 되어야 할 길이 있는 것이다.
12)우리가 계속해서 성장하고 자라나야 할 이유들을 말씀해 주신다.
13)어쩌면 우리 모두는 누구보다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맛보았고 목격했으며 경험했다.
14)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
15)행위의 증표 없이는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인데 할례를 받으면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것이다.
16)율법은 본래 선한 것으로 율법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구별된 살도록 요구하신 하나님의 완전하고 거룩하신 법이다.
17)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고 알게 하고 무엇이 올바른 지 보여준다.
18)존 칼빈은 율법은 우리들의 삶을 인도하는 안내하는 규범과 같은 역할을 강조했다.
19)예수께서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것이지 패하러 오신 것이다.
20)율법은 삶의 방향 같은 것인데 문제는 이렇게 선하고 좋은 율법이 행위로서 우리의 구원까지 이어질 수 없다는 사실에 있다
21)죄인인 우리 인간은 율법을 완성할 수 없다.
22)예수님이 죗값을 대신 치름으로써 율법을 완성시켜 주셨다.
23)율법의 완성은 행위를 성취하는 방식으로 얻어지지 않는다.
24)율법은 인간이 행해야 하는 일을 말해주고 은혜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행하는 것을 말해준다.
25)그래서 율법에 얽매여 있는 사람은 육의 것, 인간의 행위를 생각할 수밖에 없다.
26)인간의 행위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며 행위를 통한 행위 구원으로 이해하게 된다.
27)행위와 은혜는 참 뻔한 것 같은 이유는 2천 년 역사에 정말 오랫동안 많은 논쟁거리가 되어 왔고 다툼이 있는 주제다.
28)행위와 은혜는 미묘한 관계에 놓여있어서 우리 자신도 모르게 행위와 율법에 얽매이는 것이 많다.
31)강박쟁이는 끝까지 그 문제의 원인을 캐고 물어서 너는 왜 그렇게 하냐고, 너는 왜 그렇게 해야 되냐고 따지고 싶어 하고 두려움쟁이는 그런 강박쟁이가 질려서 눈물을 흘리면서 자리를 회피하고 싶어한다.
32)눈으로 보여지는 것이 전부인 우리에게 우리 인간에게 율법과 행위라는 문제는 우리 삶에 아주 깊숙이 이런 식으로 아주 구체적인 곳에 들어와 있다.
33)율법과 행위는 매일매일 우리가 걸려서 넘어지는 쉽지 않은 문제다.
34)구원은 율법으로 행위로 얻어지는 게 아니라고 모두들 알고 있지만 실상 우리의 구체적인 삶을 들여다보면 우리는 우리 자신도 모르게 매일매일 율법적이고 행위 구원적인 삶을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35)할례를 받으면 구원을 얻는다 라는 식의 율법과 행위의 굴레를 우리가 사실은 잘 벗어나지 못한다
36)자녀를 양육하는 데 있어서도 마찬가지인 것은 엄마 말을 잘 들으면 착한 아이인 것이다
37)더 중요한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는 행위는 은혜의 뒤에 따라 온다.
38)행위는 열매인데 사람이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가장 은혜로운 방식은 포도나무인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이다
39)예수님의 은혜 그 임재 안에 거하는 것으로 은혜가 먼저고 행위는 나중인데 다 이 순서를 자꾸만 우리가 거꾸로 하려고 한다.
40)죄를 고백할 때 우리는 우선적으로 행위로 지은 죄를 생각하게 되고 그러면 그런 행위로 지은 죄에 대한 나눔들 또한 많이 하게 되며 행위의 죄만을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어떠한 행위도 고치면 죄가 해결된다고 착각하기도 쉽다
41)음란을 행한 사람, 또 도박을 한 사람, 외도를 행한 사람, 중독에 빠진 사람, 또 혈기와 강박이 충천한 사람들 그리고 이런 모두가 우리가 이 행위를 고치는 것에 집중을 자꾸 한다
42)행위가 끊어지면 믿음이 있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잘못된 것인 것처럼 인데 쉽게 말해서 알코올 중독이라는 행위를 끊었다고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되는 건 아니다
43)그 사람의 행위가 변화되면 그러면 그 사람이 예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44)그 사람이 할례를 받았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45)오히려 예수의 은혜를 경험하지 않고 행위만 바르고 의로운 사람이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정말 무서운 것이어서 순서가 너무나도 중요하다
46)행위의 변화가 우선이 되면 다른 구원이 되고 다른 복음이 된다.
47)구원은 기본적으로부터 죄로부터의 구원이므로 행위의 구원을 생각하는 사람은 행위의 죄만을 생각하지만 은혜의 구원을 생각하는 사람만이 은혜를 떠난 모든 것이 되었음을 고백할 수 있다
48)우리는 종종 적용이라는 이름으로 행위 구원을 부추길 만한 말들을 또 꽤나 많이 한다 요즘은 게임 안 하십니까. 요즘은 도박 안 하십니까 이제 술 끊으셨습니까. 이제 남편에게 잔소리 안 하십니까? 할례 받으셨습니까?
49)예수 없이 은혜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의 행위가 변화된다면 그것보다 또 무서운 것이 없는 것인데 만약에 여러분의 남편 분께서 예수의 은혜를 전혀 경험하지 못하셨는데, 술이 끊어지고 모든 행위가 올바르게 변하셨다면 그것이야말로 정말 병원에 가볼 일이다.
50)우리는 항상 이 행위의 한계를 여전히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51)저는 율법의 테두리 안에서 이제 행위로 지켜야 할 것들을 지키지 못한 정말 대표적인 죄인이다.
52)제가 이 설교의 자리에 있기 때문에 은혜 받은 자라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제가 은혜 받은 자이기 때문에 이 설교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순서가 바뀌면 다른 복음이 됩니다. 저는 제가 받았던 죄인인 제가 받았던 그 은혜를 잃으면 바로 육체의 율법과 예전의 행위만을 강조하던 삶으로 돌아갑니다 제 안에 선한 것이 하나도 없어서. 은혜를 잊으면 아무리 노력을 해도 죄를 짓는 공장일 수밖에 없습니다
53)그 예수의 은혜가 아직 제가 죄인 되었을 때, 저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확정하신 그 예수의 은혜가 제 안에 있어서 오늘도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서 강박적인 제 모습을 고쳐달라고 기도한다
54)은혜를 경험한 사람은 배우자의 구원을 위해 못할 것이 없습니다
55)상대방의 구원을 위해 목숨을 내어 놓는 것 내 모든 것을 다 해서 내 사랑하는 사람이 구원 받을 수 있다면 그런 마음이 생기는 순간 상대방의 율법과 행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56)상대방의 구원을 위해서 목숨을 내어놓기 때문에 은혜를 경험한 것이 아니라 은혜를 경험했기 때문에 목숨을 내어 놓을 수 있는 것이다.
57)제가 제 아내를 사랑한다고 주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제가 악한 행동을 다 끊어낸다고 주를 사랑하는 것이 아닌데 예수 없이도 그렇게 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는 그것이야말로 무서운 것이다
58)순서가 너무나도 중요한 것으로 예수를 사랑하는 것, 은혜를 사모하는 것, 그것이 우리 행위의 모든 행위의 이유가 되어야 한다.
59)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얻으면 할례 받은 자의 삶을 소망하게 된다
60)법은 인과 응보를 이야기하는데 할례를 받으면 구원받는다, 다시 말하면 무엇을 하면 복을 받고 안 하면 저주받는다 우리는 이것을 기복 신앙이라고 부르지만 세상은 이것을 합리적이라고 말한다
61)세상은 이렇게 어떤 Give and Take의 원리로 작동되므로 내가 준 만큼 돌려받는 것 이것이 가장 합리적이고 또 이성적인 것이다
62)이러한 논리로 세상은 돌아가게 되어 있는데 다시 말해서 할례를 받으면 구원을 받는 것이 논리적인 인과 관계다
63)율법은 인과관계이고 합리적인 논리로 설명이 되지만 그러한 인간의 논리성과 합리성은 은혜를 설명하기엔 너무나도 부족하다
64)내가 줬으면 받아야 되는 게 언뜻 보기에 합리적인 것 같지만 이것이 기복신앙이고 율법인 것이다
65)우리가 예수로부터 받은 은혜는 전혀 합리적이지 않다
66)내가 예수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복을 받는 거라면 이 예배에 참석한 어느 누구도 복을 누릴 자격이 없다.
67)내가 준 만큼만 받는 것이라면 이 자리에 구원을 얻는 만큼 하나님께 무언가를 드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68)그런 은혜를 경험했으면서도 우리는 계속해서 부부 관계 속에서 또 자녀를 대할 때 율법으로 대하고 기복으로 대하고 그것을 논리와 합리라고 표현하며 드리댄다
69)그렇게 율법과 인과관계를 들이대는 사람이 관계에서 승리하고 상대방으로 하여금 할 말이 없게 만들어 그렇게 우리는 이기고 또 이겨서 ‘내가 이만큼 했는데 너는 나에게 뭘 해줬지? 네가 해준 게 없으니 나도 해줄 게 없어’ 이것이 세상이 승리하는 방식 율법의 행위의 방식이다
70)율법은 논리를 가지고 이기려고 하지만 은혜와 복음은 절대로 이기지 않으며 오히려 죽음으로 승리한다
71)사도와 장로들의 영접을 받고.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 다시 말해서 인간이 행한 율법에 관한 일이 아닌 은혜에 관한 일을 말하는데 모두가 기쁨으로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의 행하신 일을 은혜의 일을 나누고 있는 이 순간에도 이 기쁨에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바리새 파 사람들이다.
72)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바리세파 사람들도 저희와 같은 믿는 사람들이라는 것으로 믿는 저와 여러분 중에도 이런 바리세 파의 모습이 있다는 말이다.
73)율법과 행위를 넘어서지 못하는 사람은 결국 옳고 그름의 문제를 뛰어넘지를 못한다.
74)항상 그것을 따지느라고, 이게 맞는지 저게 맞는지를 따지느라고 공동체 안에서의 구원의 기쁨을 함께 누리지를 못한다.
75)온 공동체가 늘 구원 때문에 함께 즐거워하고 있는 이 순간에 바리새파 사람들은 자신이 옳다는 생각 때문에 공동체의 기쁨은 아랑곳 없이 ‘마땅하니라. 이게 옳다. 이게 틀리다 너희가 율법을 지키라고 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지금 이 기쁨의 순간에 이 말을 하고 있다
76)항상 제 말을 나오는 대로 하던 근본적인 이유는 제가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77)너무 제 안에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게 있어서 무언가가 제 율법과 제제 규범을 기준으로 그것이 틀려 보이면 무언가가 잘못돼 보이면 제 마음이 요동치고 울그락 불그락 하고 오르락 내리락 해지는 것이 있은데 ‘이렇게 하는 게 마땅하니라’라고 앞뒤 안 가리고 말하고 싶은 것이 제안에 늘 있다.
78)옳고 그른 것이 있어야 되는 거 아니냐 세상이 옳고 그런 기준이 없이. 그게 어떻게 인생이 살아지냐? 그러면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막 살아도 된다는 얘기냐? 옳고 그름이 없이 어떻게 살아야 되냐? 맞다 옳은 것은 있어야 한다.
79)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명확히 있어야 윤리가 성립되고 사회가 지속된다. 그리고 여러분이 애타게 찾고 따지시는 그 옳음이 있어야 옳고 그름은 있어야 한다. 그 옳음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옳고 그름의 기준이 내 안에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나 같은 죄인을 갑 없이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옳은 것입니다
80)스데반을 죽인 바울의 행동도, 예수를 세 번 부인했던 베드로의 행동도 옳지 않았다.
81)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도록 거짓을 일삼은 야곱의 행동도 옳지 않았고 며느리와 동침한 유다의 행동은 정말 상식적으로 납득이 안 되는 행동이다
82)우리아의 아내인 밧세바를 탐한 다윗의 행동은 사람이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지만 그들의 옳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구원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만이 오른 것이다.
83)마땅하지 않은 자들을 통해서 저 같은 죄인을 통해서 하나님 자신의 일을 하시는 분은 오직 예수님뿐이다.
84)이제 옳고 그름은 우리 안에 있지 않고 예수의 복음 안에 있음을 생각하시기 바란다
85)‘무엇이 옳으냐?’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예수가 옳다’이다.
86)베드로는 지금 진정한 구원의 진리를 드러내기 위해서 자신을 객관적으로 인정하고 있는데 베드로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구원에는 차별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87)‘차별한다’는 것은 누군가를 나와는 다른 사람으로 분리시키고 판단한다는 뜻이다.
88)우리는 이렇게 여전히 남들과 나를 구분하고 분리한다.
89)사람을 통해 된 일이 있나? 율법을 통해 된 일이 있ㄴ나? 하나님이 오래전부터 우리를 택하시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주어 증언하셨고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셨고 하나님이 우리를 차별하지 않으셨다.
90)우리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하신 일로 다시 말해서 오직 주 예수의 은혜로, 그 하나님의 한량 없는 주의 은혜로, 우리는 목자가 되었고 부목자가 되었고 직분을 맡았는데 왜 자꾸 차별을 하나?
91)‘저 집사님이 너무 아파, 우리 남편은 정말 이상해, 우리 아내는 진짜 교만해’ 나는 아프지 않나? 나는 이제 괜찮아진 것 같나?
92)내가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 순간이 가장 위험한 순간이다
93)제가 살면서 가장 은혜를 받았던 순간은 제가 가장 아픈 사람이었음을 인정하던 순간이었다.
94)이제는 여러분이 꽤 괜찮고 이제 나는 온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는 건지 한 번 돌아보아야 한다
95)이와 같이 내가 누군가보다 나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내가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고 이런 사람들에게 구원의 차별이 없다는 말은 절대로 이해될 수 없다
96)구원의 차별이 없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나와 같이 다른 이들의 마음도 깨끗하게 하심을 믿는 것이다.
97)그래서 차별이 없음은 관계의 회복으로만 나타난다.
98)인간이 하나님이 되고자 했을 때, 에덴 동산에서 인간이 하나님이 되고자 했을 때, 내가 하나님처럼 안 될 게 뭐 있어? 하는 의구심을 품으면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단절되었다
99)‘내가 저 사람보다 못 난 게 뭐 있어? 내가 이런 얘기를 듣고 살아야 돼? 내가 저 사람한테 이런 취급을 당해야 돼?’ 이런 생각들로부터 모든 관계의 단절이 시작된다.
100)하지만 차별이 없는 구원을 경험한 사람은 결국 관계 회복으로 그것이 나타난다. 내가 저 사람보다 나아서가 아니라 내가 내 남편보다 내 아내보다 내 자녀보다 내 동료보다 내 목원보다 내가 아프다고 손가락질 하는 그 사람보다 내가 더 나아서가 아니라 그저 하나님께서 내 마음을 그들보다 먼저 깨끗게 하셨기 때문에 단지 그 이유 하나 때문에. 내가 믿음이 있는 자가 되었다
101)그래서 모든 자매들은 자들에게 형제들아라고 부르며 차별하지 않으며 끊어졌던 관계들을 회복해 나갈 수가 있는 것이다.
102)아무 자격 없이, 아무 조건 없이 구원을 받았는데 나 같은 죄인이 구원이 되었는데 어떻게 내 옆에 있는 남편과 아내를 저 사람은 아프고 이상하다며 차별할 수가 있겠나?
103)우리는 여전히 율법과 행위를 넘어서지 못한다
104)보이는 것으로만 판단하고, 내 남편과 아내의 삶과 행위가 변하기 만을 바랄 뿐, 정말 예수를 만나게 되기를 소망하는 마음은 포기해 버린 분들도 있을 것이다
105)또 예전에 경험했던 은혜를 다 잊고 이제는 옳고 그름 만을 따지며 공동체의 기쁨에 참여하지 못하고 계신 분들도 계실 것이다.
106)옆에 사람들을 차별하고 아픈 사람이라고 무시하고 단절된 관계를 회복할 생각 없이 지내고 계신 분도 계실 것이다.
107)여러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우리들교회이며 주 예수의 은혜로 생명을 경험하고 죽음에서 살아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교회다
108)이제는 율법과 행위를 넘어서서 육이 아니라 성령의 일을 주목하고 옳고 그름이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 안에 있음을 믿으며 내가 더 아픈 사람이었다고, 내가 차별했다고, 용서를 구하며 먼저 관계 회복을 위해 손을 내미는 주 예수의 은혜로 앞으로도 변함없이 든든히 세워져 가는 우리들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23절 얼마 있다가 떠나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땅을 차례로 다니며 모든 제자를 굳건하게 하니라(After spending some time in Antioch, Paul set out from there and traveled from place to place throughout the region of Galatia and Phrygia, strengthening all the disciples)
24절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언변이 좋고 성경에 능통한 자라(Meanwhile a Jew named Apollos, a native of Alexandria, came to Ephesus. He was a learned man, with a thorough knowledge of the Scriptures)
25절 그가 일찍이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He had been instructed in the way of the Lord, and he spoke with great fervor and taught about Jesus accurately, though he knew only the baptism of John)
26절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 시작하거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풀어 이르더라(He began to speak boldly in the synagogue. When Priscilla and Aquila heard him, they invited him to their home and explained to him the way of God more adequately)
27절 아볼로가 아가야로 건너가고자 함으로 형제들이 그를 격려하며 제자들에게 편지를 써 영접하라 하였더니 그가 가매 은혜로 말미암아 믿은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니(When Apollos wanted to go to Achaia, the brothers encouraged him and wrote to the disciples there to welcome him. On arriving, he was a great help to those who by grace had believed)
28절 이는 성경으로써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언하여 공중 앞에서 힘있게 유대인의 말을 이김이러라(For he vigorously refuted the Jews in public debate, proving from the Scriptures that Jesus was the Christ)
<Prologue>
주님 우리는 대단한 사람의 제자가 되기를 원해서 공부하고 각종 노력을 하지만 주님의 제자가 돼야겠습니다. 주님의 제자가 어떻게 되는지 말씀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아까 우리 찬양한 은실이 이야기를 못했는데 미취학 영상에 나오는 새싹 언니가 찬양했습니다. 잘했죠 결혼 못 했어요. 결혼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한 목장 나눔을 보니까 낚시하러 가고 싶다 해외여행 가고 싶다고 이렇다고 합니다. 한 집사님이 이렇게 말했는데 코로나 때문에 유치부 교사를 못하고 있는데 그 아이를 만나고 싶다고 꼭 바울처럼 유치부 제자들을 위해서 자발적인 서원을 하시는 것처럼 들립니다. 목자님들도 분발하시기를 바랍니다. 코로나가 끝나 지체들 교육부 학생 선생님 만나서 양육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엊그제부터 어제까지 이어진 청소년 쿠페도 은혜스러웠습니다. 지난주 성령의 작별이 제자를 굳건하게 위함인데 제자를 위한 것입니다. 내 안의 악과 작별할수록 성령의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믿음은 자라는 것입니다. 어린아이 믿음에서 그리스도의 장성함으로 자라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성장의 의미보다 양육이 맞는 표현입니다.
<말씀 요약>
성령의 제자양육은
1.영적 양육자가 중요합니다.
23절 얼마 있다가 떠나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땅을 차례로 다니며 모든 제자를 굳건하게 하니라
바울이 선교여행을 위해 안디옥(Antioch)을 떠납니다. 3번째 출발입니다. 같은 경로를 따라 출발합니다. 갈라디아(Galatia)와 부르기아(Phrygia)에 세운 교회들을 심방하기 위함인데 교회들을 세우고 2차 때 돌보았던 교회를 다시 찾아갑니다. 누가(Luke)는 제자라고 부릅니다. 학생은 배우는 반면 제자는 선생님의 삶이 닮고 싶어 따르는 사람입니다. 제자가 많기란 어렵습니다. 저도 피아노 학생은 많은데 제자는 희귀합니다. 사도행전이 사람이 중요하기 때문에 사도행전이라고 명명한 것이고 이것이 바로 ‘제자행전’입니다. 제자의 길이 쉽지 않습니다. 좁은 길입니다. 그러나 제자를 양육하고 키워내야 그 제자가 또 양육하고 키워내기 때문에 제자 한 사람은 아주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제 바울은 자기가 전도 해놓고 ‘내가 너희를 복음으로 낳았다’고 합니다.특별히 매 맞고 옥에 갇히고 사형당할 뻔해서 낳은 자녀들입니다. 자녀들도 같은 영이 아니면 보고 싶지 않아요 요즘은 욕하고 때리는 자녀들이 있습니다. 욕하는 자녀 나눔을 들려드리니 동병상련을 나누었습니다. 부모는 본능적인 내리사랑이 있습니다.
우리의 모습입니다. 이런 사랑을 감당하기 위해 영적 자녀를 낳아야 합니다. 바울도 본토 친척 가족을 떠나서 영적 자녀를 낳았기에 외로움 중에도 사랑하는 자로 있게 하셔서 목숨까지도 주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믿는다고 성숙한 것이 아닙니다. 성품이 안 좋은 사람, 귀찮게 하는 사람, 배신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사람이 변해서 새사람이 되면 그 기쁨은 말할 수 없습니다. 사랑할 수 없었는데 사랑하게 되니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교회를 다니면서 ‘모든 제자를 굳건하게 하니라’에 해당하는 시제가 현재 분사입니다. 붙들어 세워준다는 것이죠 힘썼다는 의미입니다. 네 번 쓰였는데 사도행전에 나옵니다. 바울에 1~2~3차에서 한 번씩 쓰였습니다. 전도여행에서 얼마나 제자들을 굳건하게 견고하게 하고자 했는지 아시겠죠? 한번 굳건하게 했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숨쉬기가 되는 일상이 됩니다. 반복해서 찾아가고 굳건하게 했어요
ZOOM으로 목장을 하니 방학을 안 해도 되잖아요 주일 날 예배 보니까 그런데 이제 바울의 계속된 1차 2차 박해 경험은 성도들을 찾아가서 만나서 양육하는 데 도움이 되는 거예요
‘나도 이렇게 당했다’ 바울이 있을 때는 신앙생활을 잘하지만 바울이 없으면 금새 오는 핍박을 이겨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출애굽 당시에 구원을 받은 듯 하지만 모세가 십계명 받으러 시내 산에 가니 백성들이 아론과 우상을 만들어서 섬겼어요신(God)과 금(gold)은 멀리서 보면 비슷합니다. 지도자가 없으면 똑같습니다. 금송아지를 하나님으로 봅니다. 믿음을 빙자까지 하고 팔복의 믿음은 간 데 없이 맘몬(Mammon)을 섬깁니다. 우리는 시간 날 때마다 굳게 해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양육자입니다. 목회자에게 의심이 들면 검은 구름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제자의 삶을 살아야 성도들이 제자의 삶을 삽니다. 목자가 제자의 살아야 목원들이 제자의 삶을 삽니다. 모세와 다윗을 대적한 초대 왕 사울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모였지만 그들이 이끄는 양육은 실패했습니다. 양육에는 아론(Aaron)이 아니고 사울(Saul)이 아니고 모세(Moses)와 다윗(David)이 중요합니다. 한 사람의 제자 양육자 지도자는 중요합니다. 우리나라 초대 기독교 선교사는 그의 생활은 그 자체가 설교였다고 합니다. 그의 곁에 있으면 구세주를 알게 된다고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쉼 없이 전도하다가 숨지셨는데 그로 인해 지금 우리가 이렇게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사역자가 되었으니 양육이 필요 없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공동체 안에서 끊임없이 양육을 받아야 합니다. 목장은 끊임없는 최고로 양육의 반복의 장입니다. 구원의 확신이 없으면 지겹죠 여전한 방식의 복덕방입니다.지난번에 노래방 도우미 사건의 담당자의 일대일 양육에 대한 피드백입니다. 부목 자도 처음으로 일대일 양육으로 부름을 받았는데 우울증에 부부문제 자녀 문제 직장문제 힘든 동반자를 양육을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진행하였습니다. 성급함을 참으면서 집중했다고 합니다. 자기 치부를 드러내고 아내와 지금까지 사과를 못했는데 사과를 하겠다고 결단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양육자가 자기도 은혜를 받았다고 합니다. 동반자 아내에게 전화해서 변했다고 알려주고 했답니다. 동시에 또 굉장하잖아요.
평원님에게 전화해서 물었더니 더 기다려야 하고 해당 목장을 통해서 권면해야 한다는 교훈을 받았다고 합니다. 7주 이후에 사건이 달려 들으면서 급기야 식칼을 들고 경찰이 왔다고 합니다. 바울이 떠났으면 되었다 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계속 찾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반복해서 양육이 필요합니다. 아내도 양육을 받고 있었기에 정말 가정의 질서에 순종하지 못한 것을 남편에게 사과했어요 동반자가 감동받아서 잘해보겠다고 했습니다. 그걸 보면서 자신의 받은 은혜를 성령의 문제로 보지 못한 것에 큰 죄를 지을 뻔 했단 것을 회개했다고 합니다.
세계적인 대안인 목장에서 받은 훈련이 있어서 일제히 공격하는 사단의 역사를 막았다고 고백했습니다. 양육자의 고백입니다. 부족하고 연약한 자기를 세워 주셔서 감사하고 목장에 물어보고 이쪽저쪽 공동체에 물어봐서 감사했다고 합니다. 지도자인 양육자가 중요하고 언제 칭찬 침묵을 해야 하는지 중요합니다. 반복하는 성령의 양육입니다. 너무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제 성령이 임하지 않으면 참으로 지겹게 생각할 수 있는 일이고 양육이기 때문에 양육 나눔도 길지만 읽어드렸습니다. 이렇게 길고 지겹지만 중요합니다.
(적용#1)
-예수님의 제자인가요, 학생인가요? 양육을 어디까지 받으셨나?
-서로 주고받는 양육이 숨쉬기 인가? 지겨운 일인가?
2.주의 도를 배우는 것입니다.
24절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언변이 좋고 성경에 능통한 자라
성령의 작별로 에베소(Ephesus)를 떠나자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에서 난 아볼로(Apollos) 그는 유대인이었습니다. 알렉산드리아는 에굽(Egypt)의 대표적인 학문 도시이지 유대인의 도시였습니다. 세계 최대의 규모의 도서관으로 도서관장을 모시고 수학-기하학-천문학 등 이슬람과 유대의 서적을 소장하고 있었으며 전 세계 학자들을 초빙하는 등 아테네를 능가하는 도시가 알렉산드리아였습니다. 최초의 헬라의 번역도 이 알렉산드리아에서 번역했다고 합니다. 알렉산드리아 출신은 대단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구약에 능통했습니다. 입을 열면 청산유수이고 능통했지만 성경이 지니고 있는 감동을 청중에게 잘 전달할 수 있었습니다. 알렉산드리아 출신은 바울의 다소(Tarsus) 시 출신 하고는 비교 안되는 지금으로 말하는 하버드 출신이고 다소는 비교했을 때 떨어지는 것입니다. 대단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25절 그가 일찍이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
그러면 이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아볼로는 주의 도를 어떻게 배웠나요? 알렉산드리아에서 온 사람도 있었다고 합니다. 성령의 회심을 하고 제자가 된 사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고향에 돌아가 전도했을 것이 보아 성령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성경의 중심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는 것입니다. 주의 도를 배우는 데까지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고 연습하고 나아갔습니다. 주의 도를 따르는 적용으로의 에베소까지 와서 전도했습니다. 예수에 관한 것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스데반(Stephen)이 있을 때 알렉산드리아에서 온 사람 양육이 되었어야 했잖아요. 한번 듣고 주의 도를 알았기 때문에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가르쳤다고 합니다. 무엇을 가르칩니까 열심히 믿으려고 하고 가르치는 데에 아볼로(Apollos)가 말하는 설교의 내용이 다릅니다. 어떻게 2% 부족한데 100% 다른 내용입니다. 마지막이 이상합니다.
주의 道는 아는데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
아볼로(Apollos)에게도 하버드 박사에게도 성령의 중요한 양육자가 필요했어요 요한의 세례 기억나시죠?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니 나는 그의 신발 끈을 풀기도 어렵다고 요한이 말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땅끝까지 교회로 불러 모으시기 위해서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온다고 합니다. 아볼라가 아직 몰랐던 것이 복음의 확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요한을 생각해 보면 출신도 좋고 청렴결백하고 눈빛이 살고 있고 회개하라 너무 멋있습니다. 존경스러웁니다. 그러면서 메시지가 뭔가 하면 ‘부가된 것 외에는 세금 걷지 말고 받는 급료에 만족해라’라고 합니다. 인간적이고 멋있습니다. 아볼로도 딱 여기까지입니다. 아볼로는 어디든지 가면 인기가 있습니다. 바울보다 더 좋아했습니다.
너무 의롭고 학벌도 좋으니까 요한의 세례만 알았다는 것, 예수님의 생애에 귀신 쫓고 풍랑을 잠잠케 하시고 압도적으로 말씀으로 제압하고 ‘오병이어’로 수많은 사람을 먹였다는 것을 알지 십자가에 대해서는 몰랐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다는 사실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 빼버리고 행적만 살아서 행하신 행적만 전하는 것이 주요 포인트입니다. 세례요한의 설교에 열광하고 십자가의 가르침은 싫어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다들 열광합니다. 요한의 세례는 그러니까 한마디로 회개하라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를 향한 외침입니다. 내가 아니라 너희를 향한 외침입니다.
26절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 시작하거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풀어 이르더라
28절 이는 성경으로써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언하여
이 가르침을 바울에게 받은 두 사람이 브리스길라(Priscilla)와 아굴라(Aquilla)입니다. 에베소(Ephesus)에 두 부부를 남겨두었습니다 수많은 언변 지식으로 ‘회개하라 이 독사의 자식들아!’ 요한의 세례처럼 아볼로를 보고 딱 분별했지요 아볼로를 초청했어요 하나님의 道를 더 정확하게 가르쳤어요. 학문적 배경이 없었습니다. 로마에서 글라우디오(Claudius) 황제가 유대인을 추방령을 내려 쫓겨났지요 온 힘을 다해 살아내는 텐트 메이커(천막 장수)였습니다. 그들은 바울에게 날마다들은 말씀이 있잖아요 그렇게 전했어요. 어떻게요? 바울이 자신의 죄를 고백하니 이런 내가 예수님을 핍박하고 못 박은 죄인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설명하고 나의 수치와 죄패를 스데반이 했던 구속사의 설교를 기억하면서 거짓말과 여자 좋아하는 야곱 며느리 다말과 동침한 유다 기생 라합, 이방 여인과 룻 등 구약을 꿰어서 구속사를 가르쳤겠죠. 1년 6개월동안 텐트를 만들면서 반복해서 양육을 받았던 하나님의 도를 아볼로에게 전했습니다. 성령의 작별을 한 것 같은데 남아서 그 입을 통해 바울의 가르침을 통해 성령의 제자양육으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제자로 세워지는 사람은 명맥을 이어서 1,000명 10,000명이 되는 것입니다.
(적용#2)
-나는 세례 요한이 좋나?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이 좋나?
-나의 수치와 연약함을 고백하나? 아직도 목장과 공동체에 고백하지 못한 수치와 죄패는 무엇인가?
3.사명의 길을 똑바로 가도록 격려하는 것입니다.
27절 아볼로가 아가야로 건너가고자 함으로
아볼로(Apollos)가 처음 한 적용이 아가야(Achaia)로 건너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27절 형제들이 그를 격려하며 제자들에게 편지를 써 영접하라 하였더니 그가 가매 은혜로 말미암아 믿은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니
28절 이는 성경으로써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언하여 공중 앞에서 힘있게 유대인의 말을 이김이러라
성령의 양육을 받은 아볼로가 한 적용은 아가야로 건너가는 것입니다. 유대인이 많이 사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살다가 역시 유대인이 살고 있는 에베소에 와서 복음을 전하고 있는 자기의 한계, 즉 세례요한의 고정관념을 깨달았어요. 땅끝까지 이방 땅으로 가야겠다고 결단했어요. 에게해(Aegean Sea)를 건너 아시아에서 아가야(Achaia)로 건너갔습니다. 에베소 교회의 형제들의 격려합니다. 격려 중에서도 앞을 향해 전진하도록 방향을 잡아주는 우리 목장과 같습니다. 실제적인 격려로 에베소 성도들은 추천서를 써줍니다. 우리가 이제 잘 이렇게 목장에서 진실되게 살았다면 감옥을 가도 탄원서를 써줍니다. 고린도(Corinth)에 도착한 아볼로가 본 사람들은 다름 아닌 은혜로 말미암아 믿은 자들이었습니다. 은혜가 왜 강조 되었을까요? 유대인 아볼로가 가질 수 없었던 은혜 때문입니다.
목수가 구세주라는 증언은 자신이 경험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것 입니다.
아볼로가 아무리 알렉산드리아 출신이라도 그 양육을 받게 되잖아요. 브리스길라(Priscilla)에게 양육 받기 전에는 할 수 없는 증언이에요.그러니까 이게 얼마나 많은 교회의 유익이 된 일이었습니까? 살인자 바울이 아닌 모든 것을 갖춘 아볼로가 그렇게 바울을 괴롭히던 유대인들의 신뢰를 받았네요 생각해 보니까. 그냥 아볼로가 이 알렉산드리아 출신이라는 게 딱 유대인들을 제압했나 봐요. 세례 요한도 제압하고 그러니까 세례요한 시대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잖아요. 유대인들이 그런데 이 아볼로 때에도 바울은 그렇게 다 때려 죽이려고 그러더니. 아볼로가 가니까. 그러니까 이제 바울은 서울대학 출신이고 아볼로는 하버드 출신인가? 뭐 이렇게. 그럼 약간 이해가 쉽죠. 그죠
서울대. 근데 그러면 서울대학이 또 기분이 나쁘겠나? 우리는 우리나라의 하버드는 서울대학 하여튼 그렇게 알렉산드리아 출신이 그때 대단했어요. 그래서 이럴 때를 대비해서 학벌도 필요하기는 한 것 같아요.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사도행전 3차 여행까지 오는데 유대인들이 하도 바울을 괴롭히니까 유대인들의 말을 힘 있게 이겼다고 하니까 막 통쾌한 거 있죠. 와 드디어 이겼네. 아볼로가 그러면 어떻게 힘 있게 유대인의 말을 이겼을까요? 나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이다. 그러면 잘 들었을까요 우리가. 그건 생각해보는 거지. 오늘 예수는 그리스도라 그랬잖아요. 그러니까 요한처럼 ‘회개하라 독사의 자식들아’가 아니라. ‘예수는 그리스도’요. 뭔가 하면 ‘회개합니다. 제가 독사의 자식입니다’ 이렇게 메시지가 바뀐 것이죠. ‘회개하라. 독사의 자식들아’가 아니고 뭐라고요. ‘회개합니다 제가 독사의 자식입니다’ 너를 향해 외치던 외침이 나를 향해 외치는 회개합니다로 변화가 되었어요. 그러니까 어떻게 예수님이 나무 위에서 못 박혀서 죽을 수가 있어? 너무 수치스럽고, 부끄러워. 쏙 빼놓았던 십자가를 이제 고백하기 시작합니다.
예수에 관한 것을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내 죄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 자체를 전합니다 이제 나의 부끄러움과 수치는 아무것도 아니게 됐어요. 유다가 며느리 다말과 동침한 것, 스데반의 설교, 마태복음에 이런 모든 구속사의 계보가 완전히 수치의 족보가 다 써 있잖아요. 그렇죠. 이것이 성령의 제자의 제자 양육을 받은 성령의 사람인 거예요. 아볼로가, 이 대단한 사람이 내가 독사의 자식입니다 회개하라 그러더니 이 굉장히 중요한 얘기야 남편에게 자녀에게 내 가족에게 내 옆에 사람에게 날마다 ‘회개하라.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외칩니까? 볼 때마다. 내가 회개합니다. 내 어디를 가든 반복해서 양육을 했던 바울이 자신이 고린도에서 양육한 브리스킬라와 아굴라를 에베소에 남겨둔 것이 다 이유가 있었어요. 하나님의 세팅이었어요브리스킬라와 아굴라는 자신들이 양육 받은 대로 아볼로의 말을 경청하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의도를 더 자세히 해석해 주었어요. 최고의 양육이었습니다 이 양육으로 사명을 받은 아볼로가 그 길을 전진할 수 있도록 에베소 교회가 함께 격려해 주었어요.
그 길을 갈 수 있도록 그러니까 이게 성령의 공동체 성령의 양육이에요. 우리들교회도 이런 놀라운 양육의 열매로 사명을 찾은 분들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정말 묵상할 때마다 너무 놀랍고 감사한 일입니다. 사도행전의 이야기가 어떻게 이렇게 모두 우리 이야기인지 이것이 성령의 양육의 결론입니다. 말씀으로 양육을 잘 받은 한 사람이 100명 천 명 만 명 전 세계를 복음으로 제압하는 것입니다 너무 놀랍지 않습니까 매주 행해지는 이런 간증들이 18년 동안 한 주일도 빠지지 않고 이렇게 회개합니다. 제가 독사의 자식이었어요 고백하는 회계의 간증이 이어지고 있어요
(적용#3)
-고정관념을 넘어 건너가야 할 사명의 자리는 어디인가?
-거기로 똑바로 가도록 격려해주는 목장 지체의 응원이 무시가 되나? 감사가 되나?
-가족과 지체들은 여러분에게 어떤 추천서를 줄 것 같은가?
예를 들어서 이 탄원서를 써달라고 하는데 목장에서 안 써주면 여러분들 삶의 결론이에요 그거는 목장에서 아주 잘하는 거예요 날마다 인간적으로 써주고 돈 꿔주고 이게 잘하는 게 아니에요. 똑바로 가도록 격려를 해 줘야죠. ‘똑바로’가 중요하죠. ‘절대로 이혼을 하지 말라, 이혼하세요’ 이게 좋은 게 아닌 거지. 그러니까 이 말씀이 너무 중요하고 그러니까 항상 남들에게 보이는 행적이 아니고 구원이잖아요 구원에다가 초점을 맞추고 가야지. ‘똑바로 걷고 싶어요’가 되는 거죠. 이걸 위해서 우리 목장이 존재를 합니다.
근데 정말 양육도 종류가 정말 여러가지 인데요 이번 주에는 어떤 나눔을 제가 봤냐 하면요 한 부목자님의 딸이 이제 그동안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었는데 휴학을 한 후에 집에 있으면서 분노를 표출하던 중에 붓 글씨로 ‘문제아는 없고 좃나 문제 투성이 인데도 자기가 문제라고 생각조차 못하는 부모만 있다’ 그걸 써붙였대요 저 xx는. 아버지를 말해요. 평생 노총각으로 살았어야 했는데거기다가 이제 뭐 좀 약간 욕을 썼겠죠. 그리고 이제 집 안 벽에 딱 붙였대요. 그리고 자기가 요구하는 7가지 요구 사항을 제시하면서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그대로 복사해서 목자님께 처방 받은 후 답장할 것 이라고 톡을 보내왔대요. 그 일곱 가지 조건. 다 얘기는 못하겠는데. 예 그러니까 이제 엄마 아빠 다 약물과 상담 치료 받을 것. 왜냐하면 엄마 아빠 둘 다 ‘개 아파’ ‘진짜 개 아파’ 이거 청년들이 말 알아들을 소리죠. 청년부 아이니까 진짜 아프다는아빠는 일단 논외로 하고 말할게. 엄마는 다른 사람 말 못 듣고 감정 못 느끼고 표현 제대로 못 하는 걸로는 원탑이야. 혹시, 나는 아빠랑 다르다 이 생각하고 있는 거라면. 그 생각 그 생각 당장 갖다 버려. 엄마도 아빠랑 개 똑같아. 목장에서 내가 화내고 난리 쳤던 내용 나눌 때 앞뒤 다 잘라내고 얘가 나한테 반항했다 이딴 식으로만 나누지 말 것’ 엄마가 이렇게만 나눔으로써 내 눈물과 아픔이 꾹꾹 담긴 표현들이 단순한 지랄로 치부되고 나만 이상한 애가 돼버리기 때문에 목장에서 나의 행동 자체를 정죄하지 말고 제발. 내가 왜 이런 행동을 하게 됐는지 생각하는 연습을 좀 해. 제발 참고로 아주 오랜 시간 쌓아온 게 이제 터지는 거여서. 엄마가 스스로 봐야 할 게 많을 것임. 그리고 나는 아프지 않다고 하는 게 아닌 나도, 나 아픈 거 알고 있음 그치만 난 엄마 아빠랑 달리 나 아픈 거 인정하고 치료를 받고 있음’ 괄호 닫고 ‘청년부 수련회 기간 동안 마음 편히 참여하도록 밤새서 조별 나눔도 해야 하니 숙박시설 알아볼 건데 비용 다 지불할 것. 그리고 지금 나한테 내 죄 불라는 있단 말 절대 하지 말 것. 엄마 아빠는 문제 부모 맞고. 내 잘못이 아니니까 내가 엄마 아빠한테 받은 상처들을 직면하고지랄 발광을 해서라도 토해내야 다음 단계로 갈 수 있으니까. 내가 상담 요청했던 목사님들과 목자 언니들의 결론은 말씀 보고 내 죄 보는 걸로 나야겠지만 아직 소화가 안 되는데 이 결론을 성급하게 낼 필요 없다. 하심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난 앞으로도 엄마 아빠에게 고난이 될 것임 그게. 내 적용이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거 읽고 나한테 바로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그대로. 복부(복사+붙임)에서 목자님께 처방 받은 후 답장할 것. 답장 후 처방은 엑스(x) 처방 후 답장은 오(o)’ 알아들었어요. 예 이 기막힌 딸의 제안에 처음에는 납득이 안 가고 힘들어하신 부 목자님은 이걸 목장에다 나눴어요 그러니까 목자님들과 목원들이 너무 위로를 해주고 격려를 해줬어요. 그리고 처방에 순종해서 그 요구사항을 천천히 검토하고 들어주는 방법들을 모색하기로 했답니다. 엄마의 답장 그러게 엄마가 다른 사람 말을 못 듣지.
‘사람들의 말이 상처받을 필요 없어서 귀담아 듣지 않는 습관이 어려서부터 있었던 것 같아 상처 안 받아서 좋긴 하지만 가까운 사람과 정작 소통이 안 되는 일이 생겨버렸고. 이제 조금씩 듣는 연습을 하도록 할게. 잘 듣지 못하고 마음을 알아주지 못해서 미안하고 그리고 숙박시설은 안전하고 쾌적하고 알맞은 가격으로 알아봐. 가격과 위치 얘기해 주고. 청년부에 엘더님(Elder님)이 있는지 몰랐는데. 그 이제 심방을 받으라’고 그랬어요 그 청년부 목사님 엘더님 뭐 이제 다 이렇게 심방 받아달라고 그래서 8월 첫 주 중 하루 시간 내 볼게 다행이네 이 답변을 받은 후에 그 이 딸의 목소리가 조금 부드러워졌다고 합니다. 서로 서로의 기가 막힌 양육 아닙니까? 근데 이 얘기를 누가 누구한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 목장, 정말 세계적인 대안 맞죠 엄마도 딸도, 우리가 이걸 듣는 모든 전 세계에 사람들이 기도를 해 줄 것이고 이렇게 얘기를 한 번 하게 되면 죄가 힘을 잃게 되고 그리고 제가 지금까지 이렇게 늘 읽어드린 나눔들 또 간증하신 분들 정말 하나님이 다 기억하시고 축복을 하셨다고 생각이 들어요 진짜 축복을 하셨습니다 사생활 같이 나왔던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은 사생활이라 그럴 거 아니에요. 예수님 보고 처녀가 낳았으니까. 그러니까 그런 얘기들을 이렇게 솔직하게 다 하니까. 이렇게 어마어마한 축복이 우리들교회에 쏟아지고 여러분들이 이렇게 다 이렇게 달라지셨어요. 저는 기가 막힌 양육이라고 생각을 하고 또 우리 딸도 예 엄마도 이걸 다 허락하셔서. 오늘 제가 이렇게 읽어드렸습니다.
<Epilogue>
1)성령의 제자양육은 영적 양육자가 너무 중요하다.
2)성령의 제자양육은 죽을 때가 반복하면서 양육해야 한다.
3)성령의 제자양육은 인내하면서 반복해서 양육해야 한다.
4)성령의 제자양육은 주의 도를 배우는 것이다.
5)성령의 제자양육은 예수가 그리스도 라는 것, 사명의 길을 똑바로 가도록 격려하는 것이다.
6)내 안의 악과 작별할수록 성령의 만남이 이루어진다.
7)우리의 믿음은 자라는 것인데 어린아이 믿음에서 그리스도의 장성함으로 자라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다.
8)성장의 의미보다 양육이 맞는 표현이다.
9)학생은 배우는 반면 제자는 선생님의 삶이 닮고 싶어 따르는 사람이다.
10)제자가 많기는 어려운 것인데 학생은 많지만 제자는 희귀한 것이다.
11)사도행전은 사람이 중요하기 때문에 사도행전이라고 명명한 것이고 이것이 바로 ‘제자행전’이다.
12)제자의 길이 쉽지 않으며 예수님 말씀대로 좁은 길이다.
13)그러나 제자를 양육하고 키워내야 그 제자가 또 양육하고 키워내기 때문에 제자 한 사람은 아주 중요하다.
14)바울은 자기가 전도 해놓고 ‘내가 너희를 복음으로 낳았다’고 한다.
15)이런 사랑을 감당하기 위해 영적 자녀를 낳아야 한다.
16)바울도 본토 친척 가족을 떠나서 영적 자녀를 낳았기에 외로움 중에도 사랑하는 자로 있게 하셔서 목숨까지도 주고자 했다는 것이다.
17)믿는다고 성숙한 것이 아니다.
18)성품이 안 좋은 사람, 귀찮게 하는 사람, 배신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 사람이 변해서 새사람이 되면 그 기쁨은 말할 수 없는 것이다.
19)사랑할 수 없었는데 사랑하게 되니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20)‘나도 이렇게 당했다’는 생생한 증언을 하는 바울이 있을 때는 신앙생활을 잘하지만 그런 바울이 없으면 금새 오는 핍박을 이겨내지 못하는 것이다.
21)출애굽 당시에 구원을 받은 듯 하지만 모세가 십계명 받으러 시내 산에 가니 백성들이 아론과 우상을 만들어서 섬기는 것이다
22)신(God)과 금(gold)은 멀리서 보면 비슷한 것인데 지도자가 없으면 똑같게 되어 금송아지를 하나님으로 보게 된다.
23)믿음을 빙자까지 하고 팔복의 믿음은 간 데 없이 맘몬(Mammon)을 섬기게 되는 것이다
24)우리는 시간 날 때마다 굳게 해야 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양육자다.
25)목회자에게 의심이 들면 검은 구름이 보이기 시작한다.
26)목회자가 제자의 삶을 살아야 성도들이 제자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27)목자가 제자의 살아야 목원들이 제자의 삶을 사는 것이다.
28)모세와 다윗을 대적한 초대 왕 사울 같은 사람도 있는 것이다
29)사울에게도 사람들이 모였지만 그들이 이끄는 양육은 실패했다.
30)양육에는 아론(Aaron)이 아니고 사울(Saul)이 아니고 모세(Moses)와 다윗(David)이 중요하다.
31)한 사람의 제자 양육자와 지도자는 중요하다.
32)우리나라 초대 기독교 선교사는 그의 생활 그 자체가 설교였다고 한다.
33)그의 곁에 있으면 구세주를 알게 된다고 기록이 되어있다.
34)쉼 없이 전도하다가 숨지셨는데 그로 인해 지금 우리가 이렇게 믿음이 있는 것이다.
35)사역자가 되었으니 양육이 필요 없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것이다
36)공동체 안에서 끊임없이 양육을 받아야 한다
37)목장은 끊임없는 최고의 양육을 위한 반복의 장이다.
38)목장공동체는 구원의 확신이 없으면 지겹게 느껴지겠지만 여전한 방식의 복덕방이다.
39)자신이 받은 은혜를 성령의 문제로 보지 못한 것에 큰 죄를 지을 뻔했다는 것을 회개했다고 한다.
40)세계적인 대안인 우리들교회 목장공동체에서 받은 훈련이 있어서 일제히 공격하는 사단의 역사를 막았다고 고백했다고 한다.
41)양육자의 고백으로 부족하고 연약한 자기를 세워 주셔서 감사하고 목장에 물어보고 이쪽저쪽 공동체에 물어봐서 감사했다고 한다.
42)지도자인 양육자가 중요하고 언제 칭찬 침묵을 해야 하는지 중요한 것인데 이것이 반복하는 성령의 양육이다.
43)‘회개하라. 독사의 자식들아’가 아니고 ‘회개합니다 제가 독사의 자식입니다’ 너를 향해 외치던 외침이 나를 향해 외치는 ‘회개합니다’’로 변화가 된 것이 제자 양육의 결실이다
44)예수에 관한 것을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내 죄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 자체를 전하니까 이제 나의 부끄러움과 수치는 아무것도 아니게 되는 것이다.
45)사도행전의 이야기가 어떻게 이렇게 모두 우리 이야기인지 이것이 성령의 양육의 결론이다.
46)말씀으로 양육을 잘 받은 한 사람이 100명 천 명 만 명 전 세계를 복음으로 제압하는 것이다
47)항상 남들에게 보이는 행적이 아니고 구원에 초점을 맞추고 가야 ‘똑바로 걷고 싶어요’가 되는 것으로 이걸 위해서 우리 목장이 존재하는 것이다.
18. 바울은 더 여러 날 머물다가 형제들과 작별하고 배 타고 수리아로 떠나갈새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함께 하더라 바울이 일찍이 서원이 있었으므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더라(Paul stayed on in Corinth for some time. Then he left the brothers and sailed for Syria, accompanied by Priscilla and Aquila. Before he sailed, he had his hair cut off at Cenchrea because of a vow he had taken)
19. 에베소에 와서 그들을 거기 머물게 하고 자기는 회당에 들어가서 유대인들과 변론하니(They arrived at Ephesus, where Paul left Priscilla and Aquila. He himself went into the synagogue and reasoned with the Jews)
20. 여러 사람이 더 오래 있기를 청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When they asked him to spend more time with them, he declined)
21. 작별하여 이르되 만일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 하고 배를 타고 에베소를 떠나(But as he left, he promised, "I will come back if it is God's will." Then he set sail from Ephesus)
22. 가이사랴에 상륙하여 올라가 교회의 안부를 물은 후에 안디옥으로 내려가서(When he landed at Caesarea, he went up and greeted the church and then went down to Antioch)
23. 얼마 있다가 떠나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땅을 차례로 다니며 모든 제자를 굳건하게 하니라(After spending some time in Antioch, Paul set out from there and traveled from place to place throughout the region of Galatia and Phrygia, strengthening all the disciples)
<Prologue>
우리가 살면서 노력하지 않아도 느는 것이 있는데 나이, 뱃살, 주름, 흰머리 등이다. 또 작별도 점점 많이 하게 된다. 언젠가는 우리와 만난 모두와 작별을 하게 될 것이다. 여러분 기억에 가장 깊게 남은 작별의 순간은 언제인가? 바울도 교회를 세우며 여러 도시를 다닐 때마다 작별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사도행전에서 바울이 작별했다는 표현은 오늘 본문에만 두 번 나오는데 그만큼 특별한 의미를 가진 작별이라는 뜻일 것이다. 인간적인 작별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함을 받은 성령의 작별을 했다는 것일 텐데 오늘은 성령의 작별에 대해서 생각을 해본다.
<말씀 요약>
1.더 인내하며 머문 후에 하는 것입니다.(18절a)
18. 바울은 더 여러 날 머물다가 형제들과 작별하고 배 타고 수리아로 떠나갈새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함께 하더라
성령의 문제로 주신 법정 사건을 통과한 바울은 고린도(Corinth)에서 이 일 후에 더 여러 날 머물다가 형제들과 작별했다고 한다.
“머물다”로 번역한 헬라어는 쉽지 않은 상황에 의지를 가지고 버티며 자기 역할을 감당한다는 뜻이다.
모든 것을 갖추고 음란하기까지 한 고린도에서 전도하는 일이 바울에게 쉽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유대인들이 일제히 일어나 바울을 대적하고 비방했다.
유대인들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었는데 한 가지 할 수 없는 것이 사형언도를 못하는 것이었다.
로마 총독만 사형언도를 내릴 수 있고 집행을 할 수 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바울을 고발한 것은 그를 죽이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이제 무죄가 되었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하게도 바울은 이고니온(Iconion)과 루스드라(Lustra), 빌립보(Philippi), 데살로니가(Thessalonica)에서도, 아덴(Athens)에서도 늘 쫓겨났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모두를 모아놓은 듯 한 가장 악하고 가장 음란한 마게도냐(Macedonia)와 아가야(Achaia)지역에서, 가장 영적으로 어둡던 이 곳에서 법정 사건이 해결된 뒤에도 바로 고린도를 떠나버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더 여러 날, 충분한 기간을 머물렀다는 뜻이다. 무엇을 위해 충분한 시간인가? 갓 태어난 고린도 교회의 성장을 위해 필요한 충분한 시간이 찰 때까지, 최소한 법정 앞에서 모두에게 얻어맞는 수모를 당한 회당장 소스데네(Sosthenes the synagogue ruler)가 교회로 들어와 구원받고 바울의 동역자로 양육될 수 있는 만큼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바울이 소스데네(Sosthenes)를 양육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전도하고 가르치고 양육하는 사명의 자리에 딱 붙어서 ‘디아트리보’(비비고, 닦고 문지르고) 해야 한다. 화내고 싶을 때 참고, 화내기 싫을 때도 참고, 말하고 싶을 때도 참고, 말하기 싫을 때도 참고, 날마다 인내하며 전도하고 양육했다.
따라서 여러 날 머무는 일은 인내가 필요한 일이었다. 정말 고개가 절레절레 흔들어지는 그 사람 옆에 오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할 때 하나님은 성령의 작별을 하게 하실 때가 많다.
그래서 성령의 작별의 결론은 영혼 구원이다.
(고전15: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I die every day--I mean that, brothers--just as surely as I glory over you in Christ Jesus our Lord)
바울이 고린도에서 머물 때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죽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나중에 편지를 통해서도 자랑을 하고 단언할 수 있었다. 바울이 날마다 인내해야만 했다. 자기를 죽여야만 했다. 충분한 시간을 머문 후에야 바울은 고린도의 형제들과 작별하고 수리아(Syria) 귀향길에 오르게 된다. 믿음의 자녀를, 복음으로 낳은 아들, 딸 같은 성도들이 1년 6개월 동안 많이 생겼을 것이다. 그런데 떠난다. 떠나면 만남이 있다. 바나바(Barnabas)와 작별하고 혼자였던 바울 옆에 누가(Luke)와 실라(Silas), 디모데Timothy)를 만나게 하셨다. 빌립보(Philippi)에서는 루디아(Lydia)를, 데살로니가(Thessalonica)에서는 야손을, 고린도(Corinth)에서는 브리스길라(Priscilla)와 아굴라(Aquila)를 만나게 하셨다. 떠나면 만나는 곳곳의 그 한 사람 때문에 (그 한 사람이 정말 중요하다) 그 힘든 사역을 감당하게 하셨다. 고린도에서 1년 6개월을 함께 한 아굴라 부부가 고린도에서 터전을 잡았는데 내려놓고 같이 떠나겠다고 한다. 우리가 주님의 신부가 되면 신부로서 같이 동행하는 것처럼 아굴라(Aquila) 부부가 그렇게 신부가 되어 동행을 해주었다. 대부분 이렇게 떠날 때 아내가 반대해서 못 떠나는데 여기는 아내가 믿음이 더 좋아졌다. 그래서 브리스길라(Priscilla)와 아굴라(Aquila)로 칭호가 바뀌어졌다. 이 부부 때문에 참 많은 위로와 힘을 받았으리라 생각한다. 힘든 남편, 아내, 자녀와 부모가 감당이 안 되는가? 이 십자가를 잘 지고 인내하면 영적 진실성이 드러난다. 이 진실성을 증명하기 위한 충분한 시간이 되었을 때 성령의 작별을 하게 해주신다.
(적용#1)
-지금 당장이라도 작별하고 싶은 고린도 같은 사람은 누구이고 여러 날 머물러야 할 인내의 상황은 무엇인가?
성령의 작별의 원동력은,
2.(조건부 서원이 아닌 감사로 드리는) 자발적인 서원입니다.(18절b)
바울이 일찍이 서원이 있었으므로 겐그레아(Cenchrea)에서 머리를 깎았더라
바울이 겐그레아(Cenchrea)에서 머리를 깎는다. 고린도(Corinth)항 밑에 겐그레아(Cenchrea)항이 있다. 겐그레아(Cenchrea)는 아시아와 로마를 잇는 고린도의 두 항구 중 하나였기에 무역과 상업이 엄청나게 발달한 곳이었다.
서원을 미완료로 계속해서 종료되는 시점까지 (서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서원 때문에 머리를 깎았는데 바울의 바램, 바울의 원함 이 서원이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민6:18 “자기의 몸을 구별한 나실인은 회막 문에서 자기의 머리털을 밀고 그것을 화목제물 밑에 있는 불에 둘지며” ('Then at the entrance to the Tent of Meeting, the Nazirite must shave off the hair that he dedicated. He is to take the hair and put it in the fire that is under the sacrifice of thefellowship offering.)
머리를 깎은 바울은 나실인(Nazirite)의 서원을 한 것을 알 수 있는데 나실인들은 자신을 구별되게 하나님 앞에 바치고 서원이 종료될 때에 머리를 민다. 그리고 화목제물(the sacrifice of the fellowship offering) 밑에 두게 된다. 이 서원이 종료되기 전까지 포도주를 입에 대지 않고 시체를 만지지 않고 머리를 깎지 않는다. 시체는 죽음이고 또 죄의 결과이자 하나님과의 단절을 뜻하기 때문에 서원이 끝날 때 머리를 깎고 그것을 불태운다는 것이다.
서원은 ‘성별하다. 구별하다’의 뜻이 있다. 더 자세히 레위기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하신 제사의 종류가 (1)번제(burnt offering), (2)소제(grain offering), (3)속죄제(sin offering), (4)속건제(ordination offering), (5)화목제(fellowship offering) 5개이다.
예수 1)그리스도의 죽으심의 번제, 2)부활의 소제, 3)대속의 속죄제, 4)속량의 속건제, 5)승천의 화목제를 상징한다.
(레위기7:11~18) 마지막 승천에 해당하는 화목제는 죄인들의 속죄가 완료되어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 간의 화목이 성취되는 천국잔치에서 감사와 찬송을 드리는 것이다.
레위기 7:15~16 감사함으로 드리는 화목제물의 고기는 드리는 그 날에 먹을 것이요 조금이라도 이튿날 아침까지 두지 말 것이니라. 그러나 그의 예물의 제물이 서원이나 자원하는 것이면 그 제물을 드린 날에 먹을 것이요 그 남은 것은 이튿날에도 먹되
화목제는 지금까지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마음속에서 자원하여 감사와 찬송이 터져 나오는 예물이다. 그러니까 이 화목제 안에 감사제, 자원제, 서원제가 있는 것이다. 화목제의 하나인 서원이라는 것은 죽어야할 나를 위해 흠 없는 제물이신 그리스도를 보내주심으로 우리에게 완성된 구원을 허락해주신 그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드리는 것이다. 야곱처럼 무사히 돌아오게만 하시면 십일조를 하겠다. 입다 사사처럼 이기게만 해주시면 처음 영접하러 나온 자를 번제로 드리겠다고 해서 딸을 제물로 드렸는데 이런 조건부 서원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떤 완성된 사건(구원)이 감사해서 자원해서 나를 드리는 것이 성경의 서원이다. 어떤 사람을 찬송한다는 것은 내가 그 앞에서 부인 되어지는 것이다. 나는 없다. 그래서 나를 드릴 수가 있는 것이다. 그 일이 바울에게도 그대로 일어났다. 고린도 사역을 잘하게 해주시면 이런 조건부라기보다는 그 사역을 잘하기 위해서 자신이 구별되고 성별되기 위해서 자기를 부인하는, 구원을 위한 서원을 드린 것이다. 바울이 자신을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감사로, 자발적으로 서원을 드린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다”고 말씀하시며 바울을 응원하셨다.(행18:10)
또 고린도 성중에 내 백성이 많다고 하셨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이 무엇인지 경험했기 때문에 바울은 약속의 말씀을 주신 하나님께 너무 감사했을 것이다. 그래서 바울이 “알았어요, 주님, 그 말씀을 이루기까지 제가 포도주를 가까이 하지 않고 더럽고 음란한 것들을 만지지도 않고 머리를 깎지 않겠습니다. 거룩하게 살겠어요.”라고 은혜에 감사해서 자신을 드리니까 결과적으로 하나님은 법정의 문제를 성령의 문제로 바꾸어 주셨다. 그런데 바울이 구원에 뜻을 두지 않고 문제해결만 바랐다면 유대인들의 고소가 기각되는 순간 고린도를 즉시 떠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여러분들이 그렇게 다 열심히 하는 것 같아도 그냥 문제만 해결되면 더는 못해먹겠다 하면서 떠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런데 바울이 서원했다. 구별, 감사, 찬송, 구원을 생각했다. 서원은 감사의 예물로 나를 드린 것이고 구별된 인생이다. 여러분들은 전부다 조건부 서원을 생각한다. 그것은 안 믿는 사람의 비나이다 비나이다와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다.
생각해보니 제가 입시나 건강, 이런 것 때문에 서원을 해본 적은 없는 것 같다.
저는 남편 가기 전에도 주의 일을 하게 해달라고 금식을 했는데 그것이 서원이라면 서원인데 남편이 가고 저의 사역이 너무 커지니까 너무 두려워서 이 사명 잘 감당하게 해달라고 금식이 저절로 되었다.
하나님을 찬송한다는 것은 내가 그 앞에서 부인되어지는 것이다. 자원해서 내 자신을 부인하게 해달라고, 십자가 잘 지게 해달라고 그렇게 서원을 했던 것 같다. 이런 마음으로 늘 서원을 하니까 작별을 해야 될 것을 때에 맞춰서 잘 할 수 있었던 것도 같다.
우리는 각자의 언어와 명칭과 법이 있다. 그런데 그것이 성령의 법이 되지 않으면 기뻐서 서원도 안 되고 슬퍼서 작별도 힘들다. 우리 엄마도 아들 낳으면 주님께 드린다고 했기 때문에 기복적인 서원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어머니의 서원을 이루게 하기 위해서 이 땅에서 가장 무서운 작별을 많이 경험하게 하셨다.젊은 나이에 네 분의 부모님과 남편과 작별을 했다. 이것이 어머니 서원 때문에 누구와도 갑자기 작별할 수 있다는 연습을 미리 하게 하셨다는 생각을 한다.
늘 자신을 부인하게 해달라고. 자발적인 영적 서원을 하며 가기 때문에 그런 무슨 일을 당해도 내가 예수를 잘 믿기 때문에 나만 특별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게 하신 것 같다. 남들 당하는 일, 나도 겪었다고 생각을 하게 하신 것이 서원의 응답이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지내온 것이 주의 은혜이지만 때마다 원칙을 생각하게 한 것은 말씀 적용 때문이었는데 그럼에도 수없이 타협하고 싶었다. 그래도 큐티를 하는 것이 연습과 습관이 되어서 사소한 원칙 하나를 지키려고 너무 고민을 한다. 말씀으로 “THINK”을 열심히 한 것만 가지고도 주님은 훗날에 너무나 엄청나게 다 크게 갚아서 돌려주신다고 생각을 한다. 그래서 내가 한 것이 아무 것도 없는데 거룩하게 살겠다고 서원을 하니까 받은 선물이 너무 크다는 것이다. 원칙은 바로 구별이고 거룩이다. 팔복의 원리이다. 구원 때문에 오늘 손해 보아야 할 말씀의 원칙을 말하는 것이다. 사소한 큐티 적용 하나 때문에 하나님은 쌓을 곳이 없는 축복을 주고 계신다고 생각한다. 기뻐서 자원해서 나를 드리겠다고 하는 것이 서원이다. 구원의 확신이 없는 사람은 서원의 자격이 없는 것이다.
(적용#2)
-입시나 입사를 앞두고 여러분은 조건부 서원을 하나? 그럴 때일수록 주의 크신 은혜에 감사해서 나를 써달라고, 그래서 인내하기 위해서 서원을 하나?
3.사람의 청이 아닌 하나님의 뜻대로 작별하는 것입니다(19~21절)
19. 에베소에 와서 그들을 거기 머물게 하고 자기는 회당에 들어가서 유대인들과 변론하니
20. 여러 사람이 더 오래 있기를 청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21. 작별하여 이르되 만일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 하고 배를 타고 에베소를 떠나
겐그레아(Cenchrea)에서 배를 타고 떠난 바울 일행은 아시아의 관문이자 주도인 에베소(Ephesus)에 도착한다. 바울의 2차 전도여행의 원래 목적지가 에베소였는데 성령이 막으셨다. 마게도냐(Macedonia) 땅의 수도 데살로니가(Thessalonica), 아가야(Achaia) 지방의 수도 고린도(Corinth)보다 더 '넘사벽'(Unsurmountable Four Dimensional Wall)이 에베소(Ephesus)이다. 에베소는 성령께서 어린 디모데(TimothY를 배려해서 막을 정도로 힘든 곳이었다. 에베소 사람들이 섬기는 아데미 여신과 그 신전이 있는데 지금으로 말하면 아르테미스(Artemis) 신전인데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이다. 그토록 우상의 세력이 강한 도시가 에베소이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갈 길과 절기도 지켜야 되어서 시간이 바쁜데 굳이 안 들러도 되는 에베소에 도착한 후 쉬지 않고 회당을 찾아 복음을 전한다. 여기서 변론하다는 말은 강론과 같은 의미인데 성경을 펴서 구속사로 자신의 이야기를 한 것이다. 바울은 욕을 먹고 매를 맞고 (사람들이) 사형언도를 할 만큼 그렇게 지겨워 하는데도 유대인의 회당에 꼭 들른다. 이것이 자발적인 서원이 아니면 되겠는가? 그래서 바울에게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 일이 아니라 숨쉬기 이다. 말씀 전하는 것이 일인가? 숨 쉬는 것인가?
고린도에서 불법이 아니라고 바울이 비난 받지 않게 되었는데 도리어 서원하고 율법을 지키는 모습을 보여주는 바울은 율법의 완성이 사랑이듯이 그 당시의 유대와 이방을 다 생각하면서 자기로서 할 수 있는 것을 다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구원 때문에 못할 것이 없다. 나실인(Nazirite))의 서원을 하고 머리를 깎고 왔기 때문에 당장 에베소의 회당에서 변론을 할 때 거부감이 없었을 것 같다. 즉 머리를 깎은 것이 내 헌신의 끝이라고 종결하면서 내 서원이 끝이 아니라 에베소와 와서 강론하면서도 에베소를 하나님이 책임져 주시라고 하고는 본인은 예루살렘으로 떠나지만 전략적으로 중요한 인물인 브리스길라(Priscilla)와 아굴라(Aquilla)를 남겨놓는다.
그런데 강론하며 구속사(history of redemption)로 전하니까 이전과 달리 여러 사람들이 더 오래 있기를 간청했다. (아마도) 화려하고 음란한 에베소와 비슷한 고린도에서 1년 6개월 동안 연습을 많이 해서 그런지 에베소 사람들의 마음을 설득한 것 같다. 하지만 바울이 오래 있으라고 하는데 거절한다. 전에는 성령께서 허락치 않으셨는데 이 때는 바울이 허락하지 않는다. 만약 하나님 뜻이면 다시 돌아올 것이다. 이 때 시제가 능동태 미래형이다. 막연한 것이 아니라 바울의 각오와 의지가 담겨진, 앞으로 이루어질 것에 대한 각오와 의지가 담겨진 아주 강력한 표현이다.
옛날 같으면 성령께서 계속 막았지만 사람들이 많아지니까 성령이 막아도, 또 막아도 계속 아시아로 가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성령의 서원을 한 바울의 태도는 어떻게 변화 되었나? 그동안 자신의 실패와 두려움 속에 연약함과 두려움의 한계 가운데에서도 빌립보(Philippi), 데살로니가(Thessalonica), 고린도(Corinth) 교회가 세워 짐을 보니 자신의 의지보다 하나님의 의지가 조금씩 앞에 가기 시작한다. 그래서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보다 더 앞에, 각오와 서원과 의지 앞에 하나님 뜻이 있는 것이다. 브리스길라(Priscilla)와 아굴라(Aquila)를 남겨놓을 만큼 에베소에서 복음 전하기를 원했지만 자신의 바람과 소원보다는 먼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다. 빨리 작별하고 싶었던 고린도에서는 더 여러 날 머물렀지만 처음부터 오고 싶었던 에베소에서는 더 오래 있기를 청하는 여러 사람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호하게 바로 작별을 한다. 인본적인 사람의 특징이 때를 모른다는 것인데 갈 때와 올 때, 있을 때와 떠날 때를 알려면 십자가는 지혜이고 지혜는 타이밍이다. 그래서 타이밍을 모른다는 것을 결국 십자가를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 생각대로 하니까 경고할 때는 칭찬을 하고 칭찬할 때는 경고를 한다. 그러니까 굉장히 스마트해 보여도 대형사고가 터지는 것이다. 구원보다 이익이 목적이면 분별이 안 된다. 내가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잘못 판단할 때는 하나님이 책임져 주신다. 그러나 나의 유익이 목적이면 절대로 분별이 안 된다.
힘든 배우자는 작별해야 될 사람인가요? 더 오래 머물러야 할 사람인가요? 말씀의 원칙대로 구원을 위해서 정한다.
반면 중독은 당장이라도 작별을 해야 될 대상이다. 한 시간이라도 더 머물러서는 안 된다. 역시 구원을 위해서이다. 이혼이든 중독이든 구원과 정반대로 가는 것이다. 그런데 내 이익이나 쾌락이 기준이 되면 힘든 배우자는 당장 작별해야 될 사람이고 중독은 조금 더 머물러도 좋은 대상이다. 중독도 물질 중독, 행위 중독이 있다(아치볼드 D.하트) 물질 중독은 약물, 알코올 중독인데 그 물질 중독보다 더 무서운 것이 행위 중독인데 게임, 성행위, 쇼핑 같이 숨겨져 있고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드러나지 않지만 훨씬 무섭다는 것이다. 쇼핑할 때 황홀한 그 쾌락을 버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또 이생의 자랑인 학벌, 외모, 집안 등 이 자랑의 열병을 끊어낼 자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것들을 행위 중독이라고 한다. 인간이 전적으로 부패한 죄인이기 때문에 그렇다. 죄인의 영역에 나를 포함시키는 것이 구속사인데 예를 들어서 중독인 집안 식구들이 중독자는 저 사람이고 나는 드러난 잘못이 없는데 나는 왜 죄인이야 라고 따지면 정말 구원의 답이 나올 수가 없다. 내가 죄인이 아니니까 죄인을 구속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을 찾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한다. 그 방법은 말씀 묵상하고 적용하여 알게 된다. 따로 혼자 묵상하라고 성경 주시지 않으셨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서 지체들과 함께 묵상하라고 공동체적으로 읽고 생각하고 해석하고 적용하라고 말씀을 주셨다. 그래서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의 공동체를 함께 세워가는 것이다. 중독을 내 힘으로 못 끊는다. 작별 못한다. 그런데 중독자 센터에서도 나는 중독자라고 인정하고 공포하라고 한다. 공동체에서 입으로 시인하는 것이 중독 작별의 지름길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인데 결국 중독은 공동체가 없으면 끊어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목장에 오는 것이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아도 이 중독을 끊어내려면 본인도 가족도 서로가 인내를 해야 되는데 무슨 힘으로 인내를 하겠는가? 말씀을 통해서 죄를 보는 공동체에서 서로가 자기는 중독자라고 고백할 때 끊을 수 있다.
(적용#3)
-내 뜻과 하나님이 뜻이 반대로 작용한 때는 언제인가?
-이기적인 자기 사랑이 성령의 작별이 되어 지켜야할 가정이나 끊어 내야할 중독은 무엇인가? 게임, 성행위, 쇼핑인가?
-이 좋은 일은 하나님도 좋아하실 거야 하며 사람들이 요청한다고 행하는 것은 무엇이 있나?
자기 생각대로 구제하는 것은 좋은 것이다. 말씀을 모르면 우선순위를 모른다.
4.제자를 굳건하게 하기 위함입니다(22절~23절)
22. 가이사랴에 상륙하여 올라가 교회의 안부를 물은 후에 안디옥으로 내려가서
23. 얼마 있다가 떠나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땅을 차례로 다니며 모든 제자를 굳건하게 하니라
이제 에베소에서 배를 타고 떠난 바울은 지중해를 가로질러 가이사랴(Caesarea)에 도착한다.
예루살렘 교회에 갈 때 늘 올라갔다고 한다. 우리가 늘 서울은 올라갔다고 한다. 그것처럼 예루살렘 교회를 방문했다는 뜻이다.
예루살렘 공회가 사도행전 15장에서 성령의 의논으로 결정한 내용을 지역 교회에 알리고자 했고 4500Km 3년이상 걸린 긴 여행이고 여정이었다. 안디옥(Antioch)에서 오래 머물지 않고 또 떠났다고 한다.
갈라디아(Galatia)와 브루기아(Phrygia)로 3차 전도여행을 시작한다. 교회들을 심방하여 제자들을 굳건(견고)하게 하기 위해
날마다 숨쉬기처럼 전도여행을 한다.
여전한 방식의 복음 전함이 되어야 한다.
제자들을 향한 형제 의식, 흔들림을 멈추게 하는 것은 말씀이므로 또 다시 작별을 하고 양육의 3차 여행을 떠나는데 양육하고 떠난다.
믿음이 흔들리는 지체를 굳건하게 하고자 하는 성령의 작별이다. 새로운 사명의 시작과 처음이다. 다른 지체들을 굳건하게 하기 위해 이기적 관심의 한계에서 떠나는 것이다. 자기 사랑에 사로잡힌 이 세대를 떠나는 것이다. 이기심만 가득한 인간의 작별과는 다르다. 인간의 작별을 멈추고 성령의 작별을 해야한다.
교회 공동체에 들어와야 인권이 아닌 신권의 왕 노릇을 한다. 주님의 몸인 교회와 작은 교회인 목장이 정말 대안이고 내가 어디가 잘못되고
(적용#4)
-나를 굳건하게 세워준 지체들이 있나?
-지체들을 굳건하게 하기 위한 수고를 기뻐하나? 멈추지 말고 시작해야할 구원의 사명은 무엇인가?
(김양재 목사님 기도)
복음의 전함이 숨쉬기가 되어야 하는데 성령의 서원은 자발적으로 나를 드리고 써달라고 하는 것이 되지 못해서 성령의 떠남이 되지 못한다. 결혼, 식구들 모든 인간의 작별을 원하는 힘든 가정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머물러 있으라고 하신다. 예수님 밖에는 답이 없는데 내가 중독자라고 알코올 중독자, 성, 쇼핑, 날마다 목장에서 나누면서 서로가 가족들과 본인이 인내를 해야 한다. 주님이 상급이 되지 않으면 서원을 할 수가 없다.
하나님의 시간에 맡기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갈 수 있도록
<Epilogue>
1)성령의 작별의 결론은 영혼 구원이다.
2)십자가를 잘 지고 인내하면 영적 진실성이 드러난다.
3)이 진실성을 증명하기 위한 충분한 시간이 되었을 때 성령의 작별을 하게 해주신다.
4)시체는 죽음이고 또 죄의 결과이자 하나님과의 단절을 뜻하기 때문에 서원이 끝날 때 머리를 깎고 그것을 불태운다는 것이다.
5)서원은 ‘성별하다. 구별하다’의 뜻이 있다.
6)더 자세히 레위기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하신 제사의 종류가 (1)번제(burnt offering), (2)소제(grain offering), (3)속죄제(sin offering), (4)속건제(ordination offering), (5)화목제(fellowship offering) 5개이다.
12절 갈리오가 아가야 총독 되었을 때에 유대인이 일제히 일어나 바울을 대적하여 법정으로 데리고 가서(While Gallio was proconsul of Achaia, the Jews made a united attack on Paul and brought him into court)
13절 말하되 이 사람이 율법을 어기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사람들을 권한다 하거늘(“This man," they charged, "is persuading the people to worship God in ways contrary to the law”)
14절 바울이 입을 열고자 할 때에 갈리오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너희 유대인들아 만일 이것이 무슨 부정한 일이나 불량한 행동이었으면 내가 너희 말을 들어 주는 것이 옳거니와(Just as Paul was about to speak, Gallio said to the Jews, "If you Jews were making a complaint about some misdemeanor or serious crime, it would be reasonable for me to listen to you)
15절 만일 문제가 언어와 명칭과 너희 법에 관한 것이면 너희가 스스로 처리하라 나는 이러한 일에 재판장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고(But since it involves questions about words and names and your own law--settle the matter yourselves. I will not be a judge of such things)
16절 그들을 법정에서 쫓아내니(So he had them ejected from the court)
17절 모든 사람이 회당장 소스데네를 잡아 법정 앞에서 때리되 갈리오가 이 일을 상관하지 아니하니라)(Then they all turned on Sosthenes the synagogue ruler and beat him in front of the court. But Gallio showed no concern whatever)
<Prologue>
성령의 권면으로 성령의 백성이 되었지만 문제는 끝없이 일어난다.
“정의는 무엇인가?”의 저자 하버드 교수인 마이켈 샌델이 “공정하다는 착각”이라는 책을 새로 썼다.
책의 내용을 쉽게 요약하자면 학력으로 사람을 바라보는 똑똑한데 재수 없는 놈이 되지 말고 돈과 상관없이 서로의 직업에 대해 너는 사회에 기여하고 있다고 인정해주는 태도를 가지자는 것이다.
당연한 말로 들리지만 이러한 태도의 문제는 이미 정치권력을 바꿀 정도로 생각보다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는 것이다. 공정이 요즘은 화두이지만 그는 공동체 주의적 공화주의라는 새로운 정치 이론을 표방하는 정치 철학자인데 중요한 이런 공정의 문제를 우리는 성령의 문제로 풀어야 한다고생각한다.
<말씀 요약>
성령의 문제가 되는 문제는 어떤 문제인가?
1.일제히 일어나는 문제입니다(12절)
12. 갈리오가 아가야 총독 되었을 때에 유대인이 일제히 일어나 바울을 대적하여 법정으로 데리고 가서
공정에는 지도자가 참 중요한 것 같다. 갈리오(Gallio)는 로마 정부에 잘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의 부친도 유명한 연설가였고 동생은 네로의 개인교사로 유명한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였다. 로마의 여러 속국 중에서는 아가야(Achaia)는 총독들이 가고 싶어 했던 지역으로 손꼽혔는데 문화적으로 정치적으로, 또 경제적으로 아주 발달되고 안정적인 곳이었기 때문이다.
세상적으로 갈리오는 남부러울 것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전 세계를 지배했던 로마의 정치가와 장군들은 어떤 직책을 맡든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거기서 다음 지위를 위한 준비기간으로 여겼다. 계속 높아져야 한다는 세속적 가치관을 가졌다. 우리 모두 그렇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재벌 부부가 얼마 전 이혼을 했는데 그 이혼 사유는 그들의 결혼에서 더 이상 성장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결혼의 목적이 행복이니까 결혼을 포함한 모든 것을 자신이 더 높아지고 나아지고 좋아지기 위한 수단으로 여긴다.
아가야 총독으로 부임한 갈리오도 마찬가지였는데 이 1년의 임기 동안 아가야를 아무 문제없이 잘 관리하여 그 다음 도약을 위한 발판으로 삼고 싶었을 것이다.
A.D. 49년에 글라우디오(Claudius) 황제가 로마에서 유대인 추방령을 내렸는데 그 때 아굴라(Aquila)와 브리스길라(Priscilla)도 로마를 떠날 수밖에 없었는데 유대인들이 지금도 그렇지만 돈을 잘 번다. 똑똑하다. 그래서 로마 정가에서는 늘 경계심이 있었는데 유대인들이 늘 자기들끼리 싸워서 문제를 일으키니까 총독의 성공 가도에 골치가 아팠다. 그런데 이번에도 유대인들이 로마 총독의 힘을 입어서 또 일제히 들고 일어나 동족인 바울을 고소하면서 싸우자고 법정으로 데려왔다.
“갈리오가 유대 총독 되었을 때에”-총독이 될 때까지 기다린 것이 유대인이 아니고 하나님이 기다리신 것이다.
바울은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도다 하신 주님의 말씀으로 격려 받고 사역을 했지만 죄 많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시기 위한 일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것이 성령의 문제이다.
그동안 부분적으로 비방하고 대적했던 유대인들이 한마음, 한 뜻이 되어 일제히 한 일이 사도행전에 단 2번 나온다.
(1)예루살렘에서 스데반 죽일 때이고 (2)고린도에서 바울을 대적해서 법정으로 데리고 가는 것이다.
스데반(Stephen)과 바울(Paul)은 하나님 나라가 당장 이루어질 것 같은 최고의 제자와 사도이니까 사단이 일제히 달려든 것이다. 은혜가 있는 곳에 사단의 역사가 강한 것이 맞다.
“일제히”로 번역된 헬라어 뜻은 하나가 될 수 없는 장소와 시간과 마음과 뜻과 모든 요소들이 하나가 되어서 동일한 열정과 분노로 바울을 대적했다는 뜻이다.
고린도에 거주하던 유대인 무리들도 결코 하나가 될 수가 없는데 그런 그들이 그들의 사회적 지위와 능력과 재능과 로마의 법까지 이용해서 모두 일심동체가 되어서 바울을 대적한다. 이 세상은 모두가 한 쪽은 총독이고 한 쪽은 유대인 부류에 속했다. 약육강식이라고 한다. 그런데 또 유대인끼리도 엘리트와 저학력자로 나뉘어서 서로를 비난하면서 정말 징하게 싸운다(능력주의) 여기에는 공정은 존재할 수 없다.
집에서도 회사에서도 어디나 능력이 왕 노릇하면 집이나 가정에서도 이혼을 하고 다 망한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들이 공정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니 안 믿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뭘 기대하겠는가? 성도의 길은 정말 좁은 길이다. 바울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참 신기한 게 예수님을 죽이고자 할 때 하나 될 수 없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일제히 하나가 된 것과 같이 지금 바울에게도 일제히 달려드는 것이다. 너무 신기하지 않나? 이것은 바울이 답이라는 얘기다. 넘사벽. 인간이 악하고 음란한 죄인이기 때문에 그 음란을 못하게 하는 가장 강력한 바로미터가 예수님이고 바울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것을 못하게 하는 예수님을 세상 사람도 안 죽였는데 유대인들이 예수님도 죽였고 스테반도 죽였고 바울도 죽이고자 하는 것이다. 그럼 성경의 이런 일들이 이 세상에서는 어떻게 적용되어서 나타날까?
마이클 샌델은 능력주의 가치관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을 한다. 엘리트들에게 (네가 성공한 것은) 네 능력 때문이 아니라고 하는데 그들이 그런 말에 너무 극심한 반발을 한다. 또 저학력자나 중산층들에게 ‘네가 성공 못한 것은 네가 능력이 없어서야’라고 하면 그들도 역시 극심한 반발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능력주의 세상에서 패배한 사람은 실패를 오로지 내가 못난 탓으로 돌리는 모욕까지 떠안는다는 것인데 이러한 좌절과 분노가 승자의 오만과 충돌하면 민주주의 근간인 사회적 연대가 깨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도덕 감정은 엘리트들에 대한 포퓰리스트적 반항의 주된 핵심이 된다. 한마디로 부러워하고 무시하고가 똑같은 죄인이라는 것이다. 가난은 선이고 부자는 악인 것이다. 여기에는 옳고 그름밖에 없다. 공정이라는 것은 없다.
그는 이상적인 민주주의는 자유주의가 환호하는 능력주의에서 말하는 기회의 평등, 균등도 아니고 모든 사람이 동일한 임금과 부를 가져야 된다는 사회주의가 맹신하는 결과의 평등도 아닌 조건의 평등을 추구해야 한다고 한다. 그것은 부자와 빈자, 여러 계층이 만날 수 있는 공론의 장소를 확보하는 데서 시작된다고 한다. 공론의 장을 확보하고 시민들이 거기서 토론하고 타협하는 것을 배우라는 것이다. 그것이 공동선을 기르는 방법이고 계층과 상관없이 부딪힐 수 있는 그런 공간인 대중교통, 광장, 공립학교 같은 곳이 많이 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이와 반대되는 사립학교나 전용 VIP룸같이 부자들만 갈 수 있는 공간에서 살다 보면 빈자에 대한 문제의식 자체를 느끼지 못하게 된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공동체 주의적 공화주의를 부르짖는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악하고 음란한 죄인들이 차별 없이 모여서 토론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안하는 것보다 낫지만 그런 토론을 대중교통, 광장, 공립학교, 직업훈련소, 노조에서 잘할 수 있다고 하면서 세계적인 정치 철학을 보여주고 있지만 역시 마이클 샌델은 아덴 사람이 맞는 것 같고 이 분은 유대인이다. 성경을 잘 알 텐데 이분은 종교 란에 무 종교라고 썼다. 이 분은 666처럼 희대의 근사한 연구 때문에 너무 놀라지만 자기 죄를 모르면 차별 없는 나눔이 안 된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다고 본다. 능력주의의 차별과 폭정에 상처 입은 사람들이 원한 것은 모두에게 돈을 나누어주는 분배적 정의가 아니라 스스로가 사회적 기여를 하고 있다는 존중이 필요한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내가 쓰임 받고 있다는 자존감이 있나? 샌델은 정의와 공정의 화두로 세계적인 정치 철학자가 되었지만 저는 그가 공동체를 언급한 것만으로도 너무 반갑다. 자전거를 이론으로 많이 공부했지만 자전거를 한 번이라도 타 본 사람이 안다. 이론으로 공부해도 (안 타보면) 딱 넘어진다. (샌델이) 이론으로 말했다면 저는 이 문제를 성령의 문제로 가지고 와서 나누는 우리 교회의 목장이 진짜 실행하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가난한 자, 부자, 배운 자, 못 배운 자에게 끝없는 문제가 일어난다. 그렇지만 같이 모여서 서로를 체휼하는 것은 죄인의 입장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죄인의 입장이니까 차별이 없는 것이다. 그런 공동체가 정말 이 땅에 얼마나 있을까? 저는 우리 교회에서 이런 것을 나누는 것이 기적이라고 생각이 된다. 예를 들어 매를 맞고 쫓겨나도, 사랑받고 사랑하며, 그냥 집에서나 직장에서나 얼마나 당신이 기여하는 줄 아느냐고 그 곳에 당신이 얼마나 필요한 사람인 줄을 아느냐고 끊임없이 주지시켜주는 공동체야 말로 샌델의 공동체 주의적 공화주의가 아니라 공동체 주의적 복음주의라고 명명하고 싶다. 더 나아가서 모든 진영 논리와 지역감정에 반하는 주 안에서 차별 없이 자기 죄를 보는 공동체가 대안이다. 공부해서 되는 게 아니다. 즉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문제, 내 주변의 모든 것들이 지금 일제히 일어나 나를 대적한다. 그냥 정신적, 육적 문제로 육해공군 모두가 산전수전 다 일어나서 일제히 나를 대적하는 문제는 나에게 있어서 성령의 문제라는 것이다. 어설픈 문제로서는 내 자신의 죄성을 결코 알 수 없기에 모든 문제가 일제히 일어나야만 완악한 내 죄가 깨달아지고 내가 예수께 항복하여 예수의 말씀이 어떻게 내 삶에 적용되어져 생명을 낳게 하는지가 경험되어지기에 이것을 성령의 문제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라의 문제가 심각하고 진영문제, 지역감정도 심각해도 이것은 날마다 일어나는 부부문제, 자식문제에서 내 죄부터 보는 것을 시작하지 않으면 결단코 해결이 되지 않는다. 뼈 속까지 죄인인 우리가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풍요로워질수록, 망할수록, 또 자유가 클수록, 잘 살수록, 못 살수록 다 문제가 많아지는 것이다. 문제가 많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문제가 없는 것이 문제이다.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은 똑같은 심판이라도 회개하면 구원이고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의 사건이 되듯이 똑같은 문제 속에 말씀이 들리면 그 문제는 성령의 문제가 된다. 결코 못 살고 잘 살고의 환경이 아니다. 그런데 진영, 지역, 나라 모두 환경을 가지고 난리를 친다. 돈이 있다, 없다. 우리한테 잘했다, 못했다. 문제가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문제이다. 이것을 그 누가 계속 가르쳐주겠는가? 그것을 가르쳐주는 것은 말씀으로 죄를 보는 공동체밖에 없다. (죄의 크고 작음이 아니라 문제를 통해 ‘예수님을 만났느냐 안 만났느냐’가 중요하다)
13. 말하되 이 사람이 율법을 어기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사람들을 권한다 하거늘
유대인들이 고발한 내용이 굉장히 허술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그들이 고발한 내용이 바울이 율법을 어기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권한다고 했다. 사람을 죽이듯 일제히 덤비는 문제를 자세히 살펴보면 이렇게 허술한 것들이 많다. 이처럼 나를 죽이려고 일제히 덤벼드는 수많은 문제들은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도 별 거 아닌 문제들이다.
Ex)
(1)2억을 빚을 져서 나는 죽고 싶은데 목장에 가보니 20억, 70억 빚진 사람들이 웃으면서 목자를 하고 있다.
(2)남편의 이상한 문자 하나를 보고 죽고 싶은데 목장을 가보니 23번 바람 피운 목자님이 또 웃으면서 목자를 하고 있다.
이 얘기는 죄의 크고 작음이 아니라 이 사건을 통해 ‘예수를 만났느냐, 안 만났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이 모든 사건을 통해서 내가 죄인임을 깨닫는다면 이것은 성령의 문제가 되고 문제 자체를 들여다보면 유대인들의 고발이 얼마나 유치하고 허술하고 아이러니한지, 그리고 그게 무슨 공정인가? 고발한 내용 자체가 불공정한 것이다. 예수가 없으면 죄를 모르고 그러면 매일 불공정 사회에서 우리는 사는 것이다. 정치 사회에서도 날마다 고발, 고소가 난무하는데 정말 도덕의 유치원시대에 다 살고 있는 것을 본다. 얼마나 허술하고 아이러니한 지를 날마다 가슴을 통탄하면서 보고 있다.
(적용# 1)
-온 세상이 일제히 달려들어 나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문제가 있었나?
-나는 거기서 어떻게 대응하고 있나?
-자기 죄를 보는 목장이 세계적인 대안이며 기가 막힌 답이라는 것을 얼마나 인정하나?
내 문제를 다 성령의 문제로 가지고 가면
2.의외의 도움으로 풀리게 하십니다(14절)
14. 바울이 입을 열고자 할 때에 갈리오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너희 유대인들아 만일 이것이 무슨 부정한 일이나 불량한 행동이었으면 내가 너희 말을 들어 주는 것이 옳거니와
기습적으로 잡혀온 바울이 법정에 섰다. 이 때 바울은 자신이 아니라 자신이 전도한 사람들, 고린도에서 이제 막 믿게 된 사람들, 그리고 아가야와 마게도냐의에 세웠던 교회들을 위해서 입을 열 때인가 보다 하면서 입을 열려고 했는데 갈리오가 바울을 대신해서 대답을 한다. 이처럼 나의 옳음을 증명하려고 입을 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 내 가족, 내 자녀가 아니라 정말 구원을 위해 입을 열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 대신 말할 사람을 준비해주시기도 한다. 오늘 갈리오가 도와준다. 아가야 지방의 총독이다. 아가야는 고린도를 품고 있는 더 큰 행정구역이다. 이 갈리오는 친아버지도 로마의 원로원이 되어 있고 자기가 실제적으로 성장한 양아버지는 당대 최고의 석학이고 철학자이고 수사학자이다. 그 형제인 세네카는 로마 황제의 철학 스승이다. 갈리오가 모든 것을 다 갖추었다. 갈리오가 총독이 되었을 때에 유대인들이 고발을 한 것이다. 갈리오 총독이 재판권을 접수했는데 가만히 들어가 보니까 자기 로마 정부에서 시행하는 종교법에 위배되는 것이 없다. 그래서 두 가지를 지적한다.
(1)바울이라는 사람이 사회를 어지럽혔나?
(2)그가 전한 내용이 비윤리적이냐? 하면서 재판을 기각 시켜버렸다.
바울과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 대해서 무죄를 선언했다. 판례가 남게 된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매 맞게 하시고 옥에 갇히게 하시고 이번에는 무죄로 판결이 나게 하셨다.
그러면 매 맞는 것은 나쁘고 저주인 것이고 무죄는 축복인가?
지나고 보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세팅 속에 있는 하나님의 순서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형편에 처해도 하나님의 순서에 토 달지 않고 순종할 사람으로 바울을 택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100% 옳으시기 때문에 나에게 주시는 어떤 환경도 하나님의 세팅 속에 있는 하나님의 순서에 있는데 좋은 것은 축복이고 나쁜 것은 저주라고 생각하니 성령의 문제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모든 재판관들이 어떤 시비를 놓고 판결을 할 때 법전다음으로 판례집을 본다.
심지어 외국의 경우에는 어떻게 판례를 했는지 참조한다. 그만큼 갈리오의 기각 사건과 무죄 선언은 사도 바울에 대한 내용과 인물 자체에 대해서 중요한 결과를 가져왔다. 갈리오라는 사람의 이 땅에서의 역할은 원로원이고 총독이고 다 떠나서 바울의 재판을 기각한 것이었다. 모든 법원과 사람들, 모든 일들 중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판결한 그거 하나 천국에 가서 남을 것이다. 갈리오의 판결이 그 이후에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아가야에서의 무죄 판결로 말씀을 전할 때 로마가 중립을 지키기가 너무 쉬워졌고 그게 약효가 오래가지는 않았지만 바울이 전할 때는 그래도 위력적이었고 이후에 이 판례 때문에 로마 황제에게 까지 갈 수 있는 기초가 된 것이다. 의외의 도움이 너무 큰 역할을 했다. 우리 교회도 악하고 음란한 이 시대에 정말 말씀 묵상, 가정 중수 그 사명을 감당하고자 18년째 달려오고 있는데 얼마나 많은 사건이 있었겠는가? 모함 받는 일도 있었다. 그런데 그 때마다 생각 못한 의외의 손길들을 허락하셔서 말씀 묵상을 도우시고 가정들을 도와주셨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너무 억울해서 말하고 싶은데 그 때마다 내 입을 닫는 것은 내 생각이 죽어질 때 가능하고 내 생각이 죽어지는 것은 이 시대의 순교이고 내 자아가 죽어지려면 성령 충만을 구해야 한다. 이 때 나의 모든 문제가 성령의 문제로 바뀌는 것이다.오늘 이 문제가 변하지 않는 내 남편, 완악한 내 아내, 내 자녀에게 그리고 가장 결코 변하지 않는 나에게 복음이 전해지는 그리고 고린도보다 몇 배 더 힘든 로마에 복음이 전해지는 성령의 문제임을 인식하고 내 입을 닫을 때 하나님께서는 의외의 도움을 다 예비해 놓으신다.
(적용# 2)
-나는 무조건 입을 열어 내 생각을 쏟아내야 시원한가?
-입을 열고자 할 때 구원을 위해 닫은 적이 있나? 닫았을 때 의외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나?
3. 너희 언어와 명칭과 법에 대한 문제가 아니다.(15~17절)
15. 만일 문제가 언어와 명칭과 너희 법에 관한 것이면 너희가 스스로 처리하라 나는 이러한 일에 재판장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고
여기서 갈리오가 판결문에 적은 언어(words)와 명칭(names)과 법(law)에 관한 문제는 법적 용어는 아니다. 헬라어 원문에 언어는 로고스(Logos)이고 명칭은 오노마(Orma)이고 법은 노모스(Nomos)라는 단어를 썼는데 이 단어들이 함축하는 개념은 일개 행정관이 재판 석상에서 표현하거나 말하는 단어가 아니다. 어느 재판자리에서도 어느 재판관도, 어느 행정관도 이 단어나 이 개념을 말할 수가 없는 이런 내용과 개념을 말한 것이다. Why? 갈리오가 그렇게 철학과 수사학에 능했기 때문이다.
오늘 나에게 닥친 문제가 너희 언어와 명칭과 법에 대한 문제라면 너희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바울을 죽이고자 하지만 그게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구원의 언어와 명칭과 법에 대한 문제라면 성령께서 처리해 주신다는 것이다. 이것을 아는 것으로 성령의 문제인지 나의 문제인지가 결정된다. 그런데 우리는 언어와 명칭과 법에 집착한다. 단어 하나에 이혼하고 명칭 하나에 분을 품고 불합리하다고 생각하는 법 하나에 분노한다. 하지만 반대로 단어 하나에 결합하고 명칭 하나에 분이 풀리고 법 하나에 분노를 삼키게 되는 것이다. 이 언어와 명칭과 법이 너희 생각인지 아니면 말씀인지가 성령의 문제임을 판가름한다. 성령의 문제라면 성령께서 개입하셔서 해결해주신다. 이것이 너희의 문제라면 갈리오처럼 손을 씻게 되는 것이다.
(예화)
똑같은 죄인임을 보게 하시는 조건의 평등이 우리를 성령 충만으로 가져가게 한다. 그래서 관계를 풀어 주셨다. 아내 집사님이 너희의 언어가 아닌 말씀에서 듣고 배운 언어, 구원의 언어를 쓰니(아내의 머리인 남편의 질서와 가정의 질서에 순종하지 못하고 내가 잔소리해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다)
너희의 언어와 명칭과 법, 너희의 문제에서 성령의 언어와 명칭과 법으로 말하니 성령의 문제로 성령께서 개입하셔서 책을 단숨에 읽고 양육숙제를 하고 예배를 녹취하고 이것이 성령의 문제가 된 것이다.
16. 그들을 법정에서 쫓아내니
17. 모든 사람이 회당장 소스데네를 잡아 법정 앞에서 때리되 갈리오가 이 일을 상관하지 아니하니라
자기 죄를 못 보는 사람은 나를 절대로 끝까지 도울 수가 없다. 부모님이나 부부나 남편이나 자기 죄를 못 보는 사람은 그냥 기도할 대상이지 나를 도울 대상이 못된다. 갈리오는 바울을 도우려는 착한 사람이 아니고 정치적으로 성공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다. 모든 사람들이 소스데네(Sosthenes)를 때려도 상관하지 않는 냉혹하고 아주 세상적인 사람이었다. 그래도 이 문제가 너희의 문제인지 우리의 문제인지를 분별할 줄을 아는 상식적인 사람이었다. 이 문제가 자기의 로마의 문제였다면 온 힘을 다해 도왔을 것이다. 요즘엔 지도자들 중에서도 상식도 안 통하는 사람들이 많다. 일본 사람은 일본 문제를 돕고 우리나라 사람은 우리나라를 돕는다. 그런데 일본이 왜 우리나라를 돕고 미국이 왜 우리나라를 돕겠는가? 그런 상식을 생각하라. 우리는 그냥 구원 때문에 기도를 해야 한다. 세상은 다 이기적이다. 여기서 소스데네는 바울의 아픔에 함께 동참했다기보다 그리스보 이후에 회당장이 되어 헬라 유대인 동족들과 바울을 고소했다가 바울이 무죄가 되니까 동족 유대인들에게 법정에서 두들겨 맞았다. 그래서 구원이 되었다. 그러니까 두들겨 맞아서 성령의 문제가 되게 하셨다. 맞았다고 나쁜 게 아니다. 맞아서 고전 1:1에 보면 바울의 최고 동역자가 되며 고린도 교회의 4번째 감독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매 맞았다고, 무죄가 되었다고 좋고 나쁜 것을 여러분들이 결정하면 안 된다. 하루하루 말씀 읽고 묵상하고 적용하면 그게 하나님의 세팅의 구원의 순서에 들어있는 한 역할인 것뿐이다. 갈리오처럼 세상 법과 문제를 분별하며 이 문제가 로마의 문제인지 유대인들의 문제인지 분별하는데 우리는 어느 나라의 문제인지 모르고 맨날 욕만 하면 되냐구요.. 우리는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품위를 지키면서 사랑하고 기도를 해야 한다. 우리에게 닥친 문제가 구원의 문제임을 깨닫는 것이 지혜이고 성령의 문제가 되는 비결이다. 우리의 언어가 성령의 언어가 되어 이 문제가 성령의 문제가 될 때 성령께서 온 힘을 다해 우리의 문제를 효과적으로 도우실 것이다.
(적용 3)
-나는 집에서나 어디서나 어떤 언어와 명칭과 법에 뒤집어지나?
-혹은 교회에서 이해가 안 되는 언어와 명칭과 법은 무엇인가? 그것이 구속사인가? 아니면 성령의 언어를 써서 문제가 해결된 한마디는 무엇인가?
<Epilogue>
도덕의 유치원시대에 이세상은 절대로 공정하지 않다고 하십니다. 사건을 통해 예수님을 만나 내가 죄인임을 깨달으면 그 사건이 성령의 문제가 된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마음이 있기에 누구를 용서하지 못하는 것인데 성령의 문제가 되면 하나님은 의외의 도움으로 그 어떤 문제도 풀리게 하신다는 계시를 주시니 할렐루야 입니다.
1)은혜가 있는 곳에 사단의 역사가 있다
2)문제가 많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문제인 것이다
3)내가 문제인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 문제다
4)사건을 통해 예수님을 만나 내가 죄인임을 깨달으면 그 사건의 문제가 성령의 문제가 된다
5)도덕의 유치원 시대에 이 세상은 절대로 공정하지 않다
6)내 생각이 죽어지는 것이 이 시대 순교다
7)이세상은 절대로 공정하지 않으므로 성령의 문제가 될 때 하나님은 의외의 도움으로 문제가 풀리게 하신다
8)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마음이 있기에 누구도 용서하지 못하는 것이다
9)공정의 문제를 우리는 성령의 문제로 풀어야 한다
10)은혜가 있는 곳에 사단의 역사가 강한 것이 맞다.
11)좌절과 분노가 승자의 오만과 충돌하면 민주주의 근간인 사회적 연대가 깨진다는 것이다.
12)이러한 도덕 감정은 엘리트들에 대한 포퓰리스트적 반항의 주된 핵심이 된다.
13)한마디로 ‘부러워하고 무시하고’가 똑같은 죄인이라는 것이다.
14)가난은 선이고 부자는 악인 것이라는 논리에는 옳고 그름 밖에 없고 공정이라는 것은 없다.
15)능력주의의 차별과 폭정에 상처 입은 사람들이 원한 것은 모두에게 돈을 나누어주는 분배적 정의가 아니라 스스로가 사회적 기여를 하고 있다는 존중이 필요한 것이다.
16)죄인의 입장이니까 차별이 없는 것이다.
17)어설픈 문제로서는 내 자신의 죄성을 결코 알 수 없기에 모든 문제가 일제히 일어나야만 완악한 내 죄가 깨달아 지고 내가 예수께 항복하여 예수의 말씀이 어떻게 내 삶에 적용 되어져서 생명을 낳게 하는지가 경험되어지기에 이것을 성령의 문제라고 하는 것이다
18)뼈 속까지 죄인인 우리가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풍요로워질수록, 망할수록, 또 자유가 클수록, 잘 살수록, 못 살수록 다 문제가 많아지는 것이다.
19)문제가 많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문제가 없는 것이 문제이다.
20)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은 똑같은 심판이라도 회개하면 구원이고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의 사건이 되듯이 똑같은 문제 속에 말씀이 들리면 그 문제는 성령의 문제가 된다.
21)문제가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문제이다.
22)죄의 크고 작음이 아니라 이 사건을 통해 ‘예수를 만났느냐, 안 만났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23)이 모든 사건을 통해서 내가 죄인임을 깨닫는다면 이것은 성령의 문제가 되고 문제 자체를 들여다보면 유대인들의 고발이 얼마나 유치하고 허술하고 아이러니한지, 그리고 그게 무슨 공정인가? 고발한 내용 자체가 불공정한 것이다.
24)예수가 없으면 죄를 모르고 그러면 매일 불공정 사회에서 우리는 사는 것이다.
25)정치 사회에서도 날마다 고발, 고소가 난무하는데 정말 도덕의 유치원시대에 다 살고 있는 것을 본다.
26)나의 옳음을 증명하려고 입을 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 내 가족, 내 자녀가 아니라 정말 구원을 위해 입을 열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 대신 말할 사람을 준비해주시기도 한다.
27)지나고 보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세팅 속에 있는 하나님의 순서에 있는 것이다.
28)하나님은 100% 옳으시기 때문에 나에게 주시는 어떤 환경도 하나님의 세팅 속에 있는 하나님의 순서에 있는데 좋은 것은 축복이고 나쁜 것은 저주라고 생각하니 성령의 문제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29)너무 억울해서 말하고 싶은데 그 때마다 내 입을 닫는 것은 내 생각이 죽어질 때 가능하고 내 생각이 죽어지는 것은 이 시대의 순교이고 내 자아가 죽어지려면 성령 충만을 구해야 하는 것인데 이 때 나의 모든 문제가 성령의 문제로 바뀌는 것이다.
30)오늘 나에게 닥친 문제가 너희 언어와 명칭과 법에 대한 문제라면 너희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31)구원의 언어와 명칭과 법에 대한 문제라면 성령께서 처리해 주신다는 것이다.
32)이것을 아는 것으로 ‘성령의 문제인지 나의 문제인지’가 결정되는데 우리는 언어와 명칭과 법에 집착한다.
33)단어 하나에 이혼하고 명칭 하나에 분을 품고 불합리하다고 생각하는 법 하나에 분노하지만 반대로 단어 하나에 결합하고 명칭 하나에 분이 풀리고 법 하나에 분노를 삼키게 되는 것이다.
34)이 언어와 명칭과 법이 너희 생각인지 아니면 말씀 인지가 성령의 문제임을 판가름한다.
35)성령의 문제라면 성령께서 개입하셔서 해결해주시는 것이며 이것이 너희의 문제라면 갈리오처럼 손을 씻게 되는 것이다.
36)자기 죄를 못 보는 사람은 나를 절대로 끝까지 도울 수가 없다.
37)우리는 그냥 구원 때문에 기도를 해야 한다.
38)세상은 다 이기적이다.
39)무죄가 되었다고 좋고 나쁜 것을 여러분들이 결정하면 안 된다.
40)하루하루 말씀 읽고 묵상하고 적용하면 그게 하나님의 세팅의 구원의 순서에 들어있는 한 역할인 것뿐이다.
41)우리에게 닥친 문제가 구원의 문제임을 깨닫는 것이 지혜이고 성령의 문제가 되는 비결이다.
42)우리의 언어가 성령의 언어가 되어 이 문제가 성령의 문제가 될 때 성령께서 온 힘을 다해 우리의 문제를 효과적으로 도우실 것이다.
23절 사도들이 놓이매 그 동료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알리니(On their release, Peter and John went back to their own people and reported all that the chief priests and elders had said to them)
24절 그들이 듣고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이르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은 이시요(When they heard this, they raised their voices together in prayer to God. "Sovereign Lord," they said, "you made the heaven and the earth and the sea, and everything in them)
25절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통하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You spoke by the Holy Spirit through the mouth of your servant, our father David: " 'Why do the nations rage and the peoples plot in vain?)
26절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리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의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The kings of the earth take their stand and the rulers gather together against the Lord and against his Anointed One)
27절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세하여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러(Indeed Herod and Pontius Pilate met together with the Gentiles and the people of Israel in this city to conspire against your holy servant Jesus, whom you anointed)
28절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They did what your power and will had decided beforehand should happen)
29절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Now, Lord, consider their threats and enable your servants to speak your word with great boldness)
30절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Stretch out your hand to heal and perform miraculous signs and wonders through the name of your holy servant Jesus”)
31절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After they prayed, the place where they were meeting was shaken. And they were all filled with the Holy Spirit and spoke the word of God boldly)
<Prologue>
원래 기독교 교회라고 치면 사월이 고난 주간이죠. 예 그런데 저는 이 여름철이 고난 주간입니다. 이번 주일이 사순절 마지막 날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하루나 아내가 제 얼굴을 보면서 이렇게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점점 썩어져 가고 있구나” 틀린 말이 아니죠. 다음 주일에는 제 개인적으로 부활절이 되길 바라고 있습니다. 오늘 함께 보실 이 본문은 담임 목사님께서 2년 전에 ‘성령의 기도’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해 주신 내용입니다. 그때 말씀을 들으면서 내가 성령의 기도를 하기보다는 내 생각으로 ‘떼 부리는 기도’를 하고 있었구나 이렇게 깨닫고 회개를 했었습니다 이번에 이 동일한 본문으로 설교를 준비하면서 여전히 잘 변화되지 않고 성령의 기도를 드리지 못하고 있는 제 자신을 보면서 기도하는 시간이었습니다. 한 몇 년 전에 인터넷에 이런 기사가 뜬 적이 있었습니다. ‘비닐봉지 메시(Messi)에게 찾아온 기적’ 아마 이 기사를 보신 분이 계실 텐데요 당시 SNS 상에는 몇 장의 사진이 돌았습니다. 다름 아닌 한 아이가 비닐봉지로 만든 유니폼을 입고 축구 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축구스타인 메시의 유니폼을 비닐봉지로 만들어서 입고 있었던 것이죠. 아마. 지금 사진이 나오고 있나요? 비닐봉지로 이렇게 만들어진 저 옷이 지금 비닐봉지 거든요. 그 아이의 형이 비닐봉지로 저 메시의 옷을 동생에게 만들어줬다고 합니다. 얼마나 메시를 좋아하면 이런 옷을 입었겠습니까?
사실 우리가 하나님을 이렇게 좀 좋아해야 되는데 말이죠 이 어린 축구팬의 모습에 전 세계 많은 사람들이 열광을 했습니다. 이 아이가 어디 사는 아이인지 꼭 찾으면 좋겠다. 이런 바램이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일주일 뒤에 이 아이를 찾았습니다 다름 아니라. 아프가니스탄에 사는 다섯 살 된 ‘아흐마디’라는 소년이었습니다 축구를 너무 좋아하는데 형편이 이렇게 따라주지 않다 보니까 이 아이 형이 직접 이 비닐봉지로 만들어준 거죠. 나라가 내전으로 불안한 상황에서도 꿈을 간직한 이 어린 소년의 사연에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았었습니다 물론 메시(Messi) 또한 이 사연을 들어서 알게 됐죠 그리고 이 아이를 직접 메시가 만나줬습니다 이 아프가니스탄에 사는 이 아이가 이제 메시가 축구 하는 경기장으로 가게 됐죠. 메시가 자기의 유니폼을 친히 선물해 주고 축구 경기가 열리는 경기장에서도 이 아이를 만나서 함께 사진을 찍어 주었습니다 사진 한 번 보여주시죠. 네 지금 아르헨티나에서 옷을 선물해 주고. 직접 경기장에서 저 아이가 메시를 만나서 축구 경기를 관람을 했습니다. 아마 저 꼬마아이에게는 잊을 수 없는 평생 뭐 간직할 추억이 됐겠죠.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이 말처럼 이 아이의 사모함이 메시에게 전해졌고 상상도 할 수 없는 선물을 받게 된 겁니다. 아마 어쩌면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도 그렇지 않을까요? 내가 간절함과 절박한 심정으로 드렸던 기도에 하나님은 언제나 신실하게 응답하십니다 때로는 내가 전혀 예상치 않았던 때 상상하지 못했던 모습으로 응답해 주시기도 하시죠. 나의 기도에 응답해 주신 이 하나님 때문에 내가 감격하면서.이 다섯 살 꼬마처럼 평생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간직합니다. 그럼 이 시간 하나님께 응답 받는 기도는 어떤 기도인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말씀 요약>
1.응답 받는 기도는 동료와 한마음으로 소리 높여 이릅니다.
23절 사도들이 놓이매 그 동료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알리니
사도행전 4장을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복음을 전하다가 잡혀 예루살렘에 서게 됩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풀려난 뒤에 동료들에게 달려갑니다. 사도와 성도들이 동료입니다. 동료라는 단어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고 나옵니다.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교회죠 그간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합니다. 만나고 싶었던 얼굴이 그들이었죠 성도에게 힘든 일이 있었을 때 찾아가는 것은 믿음의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두려움의 포로가 되어버립니다. 예수님이 안 계신 상황에 이 문제가 당혹스러웠을 겁니다. 두려움의 포로가 되지 않았습니다. 기도할 공동체와 동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곳을 기웃거리지 않았습니다. 가장 먼저 공동체를 향했습니다. 나는 어떠합니까? 내 발걸음과 시선은 어디로 향하고 있습니까 공동체와 동료를 찾기보다는 해결해 주는 사람만 찾지 않습니까?
내 옆에 사람이 없다 보니 인터넷에 들어가 썰과 이야기를 듣느라 소진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 문제를 해결해 주고 도와줄 것 같은 사람을 찾습니다. 눈에 보이는 힘 있는 유력자를, 권세자를 찾고 의지합니다 그 대상이 나에게 우상이 되어버립니다. 그 대상을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놓고 숭배하는 것입니다. 그 우상의 큰 특징은 언젠가는 반드시 나를 배신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찾고 의지하는 것은 반드시 나를 배신합니다. 사람도 명예도 그렇습니다. 작년에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웹 서핑을 하다 보니까 시간이 금방 갑니다. 그런데 막상 이런 정보가 쌓이다 보니 쓸데없는 걱정만 됩니다. 그냥 모르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고가 난 날 저에게 주신 말씀 북 이스라엘 왕 예후의 떠나지 않는 죄였습니다. 북 이스라엘이 세운 여로보함의 죄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그게 저였습니다. 사건이 생기면 공동체로 달려가 삶을 나누기보다는 유튜브에서 답을 찾으려고 했습니다. 마음의 위안을 얻으려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찾아갈 동료와 기도 제목을 나누기보다 혼자 고민하고 있지 않습니까? 찾아갈 동료가 없다면 내가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평소에 공동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인 위로에서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예수의 피를 나눈 믿음의 공동체에서만 한마음으로 기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공동체를 떠난 신앙은 절대 자립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연약 하기에 넘어지는 존재입니다. 나를 일으켜줄 지체가 있어야 합니다.목장에는 안 가고 주일예배 만 드리는 분이 있지 않습니까? 목장에는 나오는데 마음은 다른 곳에 있지 않습니까? 그곳에서 나오길 바랍니다.
타 교회를 출석하고 계신데 홈페이지를 통해서 담임 목사님의 설교와 또 새벽 설교를 7년 동안 들어오셨다고 하시더라고요. 최근에 이 아들의 자살 징후가 너무 높아서, 도대체 이걸 누구와 상의해야 될지 모르겠다면서 제가 청년부를 담당하는 줄 아시고 저에게 전화를 주셨습니다 제가 사연을 다 들어보니까 이 아들은 우울증이 참 심하고 또 한 쪽 귀가 잘 들리지 않아서 자존감이 많이 낮아서 계속 죽고 싶다고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합니다 약을 먹고 자살 시도를 하기도 하고 또 하루 전날 밤에도 이 집사님이 주무시고 있는 방으로 찾아 들어와서 죽겠다고 그렇게 소동을 벌였답니다. 이 집사님은 날마다 새벽 기도도 하시고 또 출석하는 이 교회가 가족 같은 분위기라서 정말 이 문제를 나눌 사람이 없다고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너무 불안하고 어찌 해야 될지 모르겠다고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그런데 그 순간에 이 가족 같은 분위기의 교회라는 이 말을 듣고 나니 제 맘이 벙벙해지더라고요. 아니 가족 같은 교회인데 왜 이런 고난조차 나눌 수가 없을까? 그런데 집사님이 이러시는 겁니다 가족같이 지내다 보니까 이런 자녀 문제가 오히려 수치가 되고 사람들 사이에 소문이 날까 봐 얘기를 못하겠다고요. 그렇게 저와 상담을 한 뒤에 여자 목장을 연결해 드렸습니다 다행히도 비슷한 고난을 겪고 계신 또 이 목자님과 동료들이 계신 목장으로 이렇게 연결이 되셔서 그날 온라인으로 목장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집사님으로부터 다시 저에게 문자가 왔습니다 ‘목장에서 예배 잘 드렸습니다 목장에서 많은 위로를 받고 구원의 사건임을 몸소 깨닫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인내하면서 가겠습니다’ 그 문자를 보면서 제 가슴을 쓸어 내렸습니다
‘아, 이 집사님이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이 고난을 처음으로 동료에게 말씀하게 되었구나’ 이렇게 힘들고 고통스러운 삶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나눌 수가 있고 들을 수 있는 공동체가 있다는 이게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것인가? 때로는 우리가 공동체에서 상처받을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나는 공동체 안 가겠다는 바로 그것이 자기 중심적인 합리화입니다 오히려 공동체 안에서 오해하고 상처받고 내가 회복되는 시간을 통해서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게 되죠. 바로 그게 내가 거룩해져가는 성화의 과정이기도 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으로부터 자초지종을 듣게 된 이 초대 교회 동료들은 이제 무엇을 할까요? 큰일 났다. 이제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제 정말 우리 망했다 이렇게 걱정하고 염려했겠습니까? 아니면 앞으로 우리는 무엇을 할까? 어떻게 이 시간을 극복해 나가지? 그러면서 대책 회의를 했을까요?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이들이 걱정했다는 내용도 무슨 회의를 했다는 내용도 없습니다. 이들은 두 사도의 이야기를 듣고 곧장 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기도했습니다
24절 그들이 듣고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이르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은 이시요
대주재여(Sovereign Lord),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은 이시오.
삶의 결론인 것 같다. 이렇게 판단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무슨 나눔이 저렇게 이상하지? 뭐 저렇게 장황하고 두서가 없냐 병원에 가서 상담 받고 약이나 먹으라고 할까? 이렇게 공감도 애정도 없는 그런 반응으로 듣고 계시진 않습니까? 그런데 오늘 초대 교회 동료들은 이 두 사도의 나눔을 듣자마자 한 마음으로 소리를 높여 기도합니다.
따라서 지금 내가 속해 있는 이 공동체에 있는 동료들의 나눔은 무엇입니까? 내가 한마음으로. 함께 소리 높여 기도해야 할 기도 제목입니다 그가 지금 겪고 있는 큰 문제는 내가 함께 소리 높여서 중보해야 할 기도 제목이죠. 사실 저도 목장을 탐방하거나 이렇게 모임들을 인도하다 보면 자동 반사적으로 나눔 하시는 분들의 나눔을 이렇게 제가 해석하게 되지만 또 한편으로는 판단도 하게 되더라고요 그러면서 또 정죄도 하고 처방질를 할 때도 있더라고요. 하지만 우리가 어떤 이야기를 듣더라도 그것은 바로 그 지체의 기도 제목입니다. 자 그럼 이제 사도와 성도들은 누구에게 기도를 할까요?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은 이시오 그렇게 기도합니다
모든 만물을 창조하고 다스리시는 대주재(Sovereign Lord)이신 주님께 기도합니다. 우리의 기도 대상은 바로 절대 통치자 하나님이십니다. 그분께 나의 모든 사정을 아뢰고 기도하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린 시절에 배가 고프면 어떻게 합니까? 엄마에게 배가 고프다고 말을 하죠. 밥 좀 달라고 합니다. 아프면 나 어디 아프다고 말도 합니다. 그러면 엄마가 밥도 차려주고 또 병원도 데리고 가시죠. 그런데 정작 애가 배가 고픈데 말을 안 합니다 어디가 찢어져서 피가 흐르고 있는데도 아프다고 말을 안 합니다.
그럼 이게 정상적인 관계입니까? 문제가 있는 것이죠. 우리 집의 아들이 내가 아들이 자기가 배가 고픈데 얘가 나를 외면하면서 옆집 엄마한테 가서 아줌마 저 좀 밥 좀 주세요.
그러면 얘가 정상입니까? 아주 이상한 거죠. 관계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겁니다. 이처럼 내가 하나님을 외면한 채 나를 도와줄 것 같은 사람만 찾아다니고 의지하고 다른 것만 바라본다면, 이게 옆집 아줌마한테 가서 밥 달라고 하는 애랑 뭐가 다르겠습니까?
(적용#1)
-나는 문제가 생겼을 때 가장 먼저 무엇을 찾고 어디를 향합니까?
-누구와 그 문제를 이야기합니까?
-나는 기도를 부탁하고 한마음으로 소리 높여 기도할 동료가 있습니까?
2.응답 받는 기도는 말씀으로 하는 기도입니다.
25절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통하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plot in vain)
26절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리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의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
사도와 성도들은 이제 시편(Psalms) 2편의 말씀을 인용하여 기도합니다 시편 2편은 메시아에 대한 예언 시입니다 다윗의 입을 통하여 성령으로 하신 말씀이죠. 여기서의 열방은 이방 나라들이고 족속은 유대민족입니다. 세상의 군왕들은 로마 통치자들이고 관리는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이들 모두가 한 편이 되어서 예수님을 못 박아 죽이는 일에 관여를 했습니다 공통점이 있다면 세상의 권력자들이죠 그러다 보니 분노로 떠들어내고 허사를 경영(rage and plot in vain)합니다. 사도와 성도들은 이렇게 말씀으로 기도하다 보니 지금 자신들에게 당면한 이 문제를 말씀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겪고 있는 이 사건이 이미 성경에 기록되어 있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있습니다. 말씀이 없는 기도는 언제나 기복으로 흐르기 마련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그분의 뜻을 말씀으로 다 계시해 주셨는데 기복적인 기도는 내가 말씀을 듣고도 계속 내가 뭘 다 하려고만 부르짖습니다
그런데 이 기도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말씀에 대한 반응이죠. 그런데 이 말씀과는 상관없이 나의 생각만 주구장창 부르짖는다면 이건 소통이 아니라 불통인 겁니다. 정욕으로 구하는 떼 부리는 기도에 불과합니다 제가 우리들 교회 부임하고 얼마 안 돼서 한 모임에서 기도회를 인도하던 때였습니다 나름대로 제가 이 기도회를 뜨겁게 잘 인도했다고 생각하고 마치고 자리에 앉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한 사역자님이 저에게 오시더니 목사님 수고하셨어요 이렇게 말씀하시길래 나름 뿌듯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역자님이 이 말을 덧붙이셨습니다. 수고하셨는데. 목사님 앞으로는 말씀을 좀 넣어서 기도해 주세요.
담임 목사님의 저서에도 보면 ‘매 챕터가 끝나기 전엔 말씀으로 기도하기’ 그렇게 적혀져 있습니다. 우리가 듣게 된 말씀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알아가죠 그래서 진정한 기도 응답은 상황과 환경이 바뀌기보다 이 사건을 통한 하나님의 의도를 말씀으로 깨닫게 되는 겁니다 내가 영적인 것을 깨닫게 되면 육적인 것도 내가 필요한 만큼 채워주신다는 것을 알게 되죠. 이렇게 사도와 성도들이 기도하면서 인용한 이 시편 2편의 말씀은 이제 본문 27절에서 그대로 실현됩니다 27절입니다.
27절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세하여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러
해롯(Herod)과 본디오 빌라도(Pontius Pilates)는 이방인(Gentiles)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세하여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러 헤롯 안디바는 로마 황제에 의해 임명되어서 갈릴리를 다스렸던 분봉 왕이었습니다. 본디오 빌라도는 유다와 사마리아를 다스린 로마 총독입니다 이들은 이방인과 유대인과 합세하여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르고 대적했습니다 사실 이들은 유대 지역을 다스리면서도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개와 원숭이 같은 견원지간(犬猿之間)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에는 딱 친구가 되었습니다. 이들은 한패가 되어서 공모한 것이죠. 우리가 선한 일을 위해서도 함께 동역하지만 이렇게 악한 일을 위해서도 함께 동역을 합니다. 심지어 평소 사이가 이게 나빴던 원수끼리도 이해 관계가 맞아 떨어지면 의기 투합을 하죠. 저도 한 10여년 정도 직장생활을 했는데요 제 상사로 인해서 참 많이 힘든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비단 저만 그런 게 아니라 다른 부하 직원들도 그래 했습니다 평소에 사이가 좋지 않았던 직원들이 유일하게 한 패가 되고 하나가 되는 때가 있으니 언제일까요? 바로 그 상사를 뒷담화 할 때죠. 함께 모여서 글을 도마 위에 올려놓아 놓고 난도질을 합니다.
그를 깎아내리고 험담하면서 심지어는 내가 어떻게 골탕 먹일까? 소극적인 반응이라도 하자면서 막 치열하게 아이디어를 냅니다. 정말 이런 일을 도모하는 데는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머리가 팽팽 돌아가죠. 이렇게 우리는 작은 일에도 분노하면서 허사를 경영합니다 허사를 경영한다는 말은 헛된 일을 꾸민다 그런 뜻입니다 그런데 뭐 비단 직장생활 뿐이겠습니까? 우리가 공동체에서 누군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난 더 이상 이 목장 안 나갈 거라고 그렇게 분노하면서 비난을 하십니까? 그 시간에 나는 집에서 TV나 보고 그냥 잠이나 자겠다면서 그렇게 말씀하십니까? 바로 이게 허사를 경영하는 겁니다 배우자가 나를 자꾸 뒤집어 놓는다고 분노하다가 공동체 만류에도 불구하고 난 더 이상 너랑은 못 살겠다면서 이혼을 생각하십니까? 허사를 경영하는 겁니다 집에 애들이 공동체도 잘 나가고 있는데도 얘들이 학교 성적이 오르지 않는다고 분노하다가 더 이상 이번 수련에는 내가 보내지 않겠다면서 그 시간에 학원으로 돌리십니까? 허사를 경영하는 것이죠. 또 청년들은 어떻습니까 나는 매일마다 큐티를 하고 공동체도 이렇게 열심히 섬겼는데. 신 결혼은 커녕 신 교제에 손바닥만한 구름도 안 보인다고 그렇게 분노하다가 불신 교제를 감행합니다. 허사를 경영하는 것이죠. 그런데 바로 이런 것들이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르고 대적하는 모습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자꾸 분노하고 허사를 경영하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있기 때문이죠 심판자의 자리에서 통치자 노릇을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군왕들과 관리들처럼 그 자리에 앉아서 내가 내 마음대로 내 뜻대로 하려고 하기 때문이죠. 삶의 주권자 대주재이신 이 통치자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옳고. 그릇만 따지면서 작은 일에도 그렇게 분노하고 허사를 경영합니다 사실 이렇게 말한 저야말로 옳고 그름의 화신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제가 참 인간적입니다. 담임 목사님께서 간혹 저에게 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아시죠. 우리들 교회에서 듣는 인간적이라는 말은 절대 칭찬이 아 아니라는 것을. 오히려 그 반대라는 걸 아시죠. 그러다 보니 저는 이렇게 구원 때문에 해야 될 말을 못하고 하지 말아야 할 말을 간혹 합니다 이게 내 속의 인본주의더라고요 이 인본주의는 내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서 심판자 노릇을 내가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옳고 그름의 가치관으로 분노하고 끊임없이 헛된 일을 꾸미고 허사를 경영하죠 제가 그동안 그런 방식으로 예수님을 거스르고 대적해 왔더라고요
(적용#2)
-나는 말씀으로 기도합니까? 내 생각과 정욕으로 기도합니까?
-내가 분노하면서 경영하고 있는 허사와 꾸미고 있는 헛된 일은 무엇입니까?
-내가 기름 부으신 자를 대적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그 일에 누구와 한패가 됩니까?
3.응답 받는 기도는 하나님의 권능과 뜻이 이루어집니다.
28절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것이 무엇일까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으심 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끝이 아닙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그를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이 로마의 정치 지도자들과 또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는 악을 자행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자유 의지까지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 겪고 있는 이 고난 내 몫의 이 십자가도 하나님의 권능과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려고 예정하신 거죠. 내가 이 십자가를 지고 가다 보면 내 현재의 이유를 깨닫는 권능을 얻습니다. 이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죠 나를 구원하시려고 이 고난을 사용하시는구나 나를 거룩하게 빚어 가시기 위해서 이 일을 쓰고 계시는구나 그렇게 깨닫습니다 어제도 제가 양육 교사를 인도하는데 감옥에 갇힌 이 바울(Paul)과 실라(Silas)처럼 옥에 갇힌 이 환경에도 찬송하고 기도하신 분들이 나눔이 계속 이어졌습니다.
이 고백을 계속 듣고 있는데 정말 제 마음도 숙연해지더라고요. 비록 지금 내가 옥에 갇혀 있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분의 권능과 뜻을 나의 삶 가운데 이루어 가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이 시간을 통해 나를 구원하시고 거룩하게 빚으실 것도 믿으시길 바랍니다. 여러분, 혹시 지금 내 곁에서 나를 힘들게 하는 해롯 같은 배우자나 식구가 있습니까? 빌라도 같은 직장 상사가 있습니까? 아니면 그 대상이 나를 지금 아프게 하는 질병일 수도 있을 겁니다. 직장이나 사업의 문제 경제적인 어려움이 될 수도 있겠죠.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모두 합세해서 한패가 되어서 나를 고통스럽게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고통의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분의 권능과 뜻대로 예정하신 것을 나에게 이루어가고 계신다는 것을요. 택자에게는 어떤 것도 지나고 보면 구속사의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게 깨달아 지면 더 이상 내 입에서 불평과 원망이 아니라 감사가 나오겠죠.
여러분, ‘내가 감사 해야지’ 하면서 내가 감사 감사를 외친다고 감사가 되겠습니까? 그게 아니죠. 나의 지금의 고난이 성경에 써 있고 내 현재의 이유를 아는 권능을 베풀어 주시기에 감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예정하신 대로 나와 우리 가정의 구원을 반드시 이루어 가심을 믿기 때문에 이것을 소망하기 때문에 감사하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이걸 모르니까 사건만 일어나면 나는 시험 들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 나 믿음 없는 거 아시면서 왜 이러십니까? 왜 나에게 자꾸만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네가 나에게 어떻게 이럴 수 있냐?’ 이런 종류의 말들을 쏟아 놓죠. 바로 이런 모습이 하나님의 권능과 뜻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지금 당장에 나의 만족만을 구하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러다 보니까 얼굴이 늘 어둡고 차갑고 춥습니다 이 말을 제가 들으니 참 저도 찔리는데 저도 공동체에서 얼굴이 추워 보인다는 말을 몇 번 들었습니다. 그래서 거울을 볼 때마다 깜짝 깜짝 놀랐습니다.
도대체 이 얼굴이 구원의 소망이 있는 얼굴인가? 기쁨이 있는 얼굴인가? 그러면서 혼자 입 꼬리를 들어올려 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썩은 미소만 지어지더라고요 사실 그게 그런다고 될 일이겠습니까? 내 얼굴에 기쁨이 없는 까닭은 내 생각이 자꾸만 이 현재의 고난과 이 십자가에만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나의 구원까지도 예정하심을 그걸 믿고 확신한다면 그 얼굴에 주름이 펴지게 되겠죠 현재 이 고난은 장차 올 영광과 좋게 비교할 수가 없는 겁니다.
내가 주님의 죽으심과 이 부활에 참여함으로 내가 구원을 얻고 영생을 누리고 천국을 소유한 이 자체가 너무 감사하고 기쁜 것이죠. 목사님께서 늘 하시는 말씀처럼. 영생 화장품을 얼굴에 바르고 지내게 됩니다. 아 그러면 내 얼굴에 광채가 나지 않겠습니까?
(적용#3)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예정하신 지금 나의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지금 내 얼굴은 어떻습니까? 어둡고 춥습니까?
밝고 환하게 빛나고 있습니까?
4.응답 받는 기도로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29절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어떻게 기도하고 있습니까? 주님께서 그들이 받고 있는 이 위협을 굽어 살펴 주시길 기도합니다. 이들은 위협을 없애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의 위협을 주목하사 자신들을 지켜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저희 집 애들이 게 아주 어릴 때 제가 놀이터에 데리고 와서 함께 놀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아이들이 미끄럼틀을 타고 막 놀다가 간간히 저 곁에 있는 저를 한 번씩 쳐다보더라고요 애들이 왜 자꾸 저를 쳐다볼까요? ‘아빠가 지금 여기에 우리와 함께 있구나’ ‘지금 나를 지켜보고 있구나’ ‘나를 보호해줄 거야’ 그런 믿음이 있기 때문에 보는 거죠. 그리고 이 아이들이 그 마음처럼 저 또한 이 아이들을 계속 주목했습니다 혹시나 넘어지지 않을까? 얘들이 어디 부딪혀서 다치지나 않을까? 그 마음으로 이 아이들을 주목하는 것이죠 바로 그것이 ‘굽어 보시고’ 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굽어보시는 것도 그렇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응시하고 주목하심으로 지켜보시는 겁니다. 우리가 그렇게 기도해야 되는 것이죠 강퍅한 종교 지도자들은 베드로와 요한에게 더 이상 너희들은 복음을 전하지 말라고 위협했습니다. 하지만 사도와 성도들은 오히려 담대하게 전하게 해 달라고 이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기도가 입에서 나오게 됐을까요. 이들은 자신이 예수로 죽고 예수로 살게 되었음을 믿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이 고난을 통해서 주님의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게 될 거라고 믿었습니다. 자신들 앞에 당면한 이 문제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신뢰했습니다.
그 믿음이 있으니까 이 기도가 나온 것이죠. 여러분,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고 영생을 소유하게 되었는데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어떤 해를 받는 게 싫겠습니까? 내가 예수로 죽고 내가 예수로 살게 되었는데 예수님 때문에 받게 되는 어떤 해도 나에게는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는 지금 당면한 이 고난을 피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기보다는 현재 이 고난에서도 나를 지켜달라고 지금 이 십자가를 잘 지고 가게 해주시기를 그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내 목에 매인 이 십자가를 통해서 주님은 나와 우리 가정의 구원을 이루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나의 죽어짐과 내가 썩어지고 밀알이 되는 자기 부인의 시간을 통해서 우리 가정에도 부활의 빛을 비춰 주실 것을 소망하기 때문이죠. 그러다 보니 이 초대 교인들의 기도는 환경의 변화가 아니라 자신들의 변화를 위한 기도였습니다.
회피하는 기도가 아니라 직면하는 기도였죠. 이들은 현실 회피 문제 회피 상황. 회피하지 않았습니다. 담대하게 문제를 직면하게 해 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상황을 돌파하게 해 주시기를 기도했던 것이죠 하나님 저들은 우리를 위협하고 있지만 주님께서 우리를 붙드시고. ‘주님, 우리를 담대하게 하심으로 이 생명의 복음을 누리고 이 생명의 복음을 전하게 해 주십시오’ 그렇게 기도했던 겁니다 여러분 요즘 나는 어떻게 기도하고 있습니까 지금 내가 시련 가운데 있다면 주님께서 나를 굽어 살펴주시기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이 고난 한복판에서도 주님 나를 보사, 이 문제를 통과하게 해달라고 기도 하시길 바랍니다. 오늘 내 삶의 형편이 어떠하든지 담대하게 말씀을 적용하고 내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 하시길 바랍니다.
이어서 사도들과 성도들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30절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miraculous signs and wonders)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담임 목사님께서는 이 본문을 설교하실 때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곤고한 환경에서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 표적이 되고 그 사건이 해석되는 것이 기사라고요내가 어떤 환경 속에서도 예수의 이름을 가지면 나의 모든 환경은 남을 죄에서 꺼내줄 환경으로 쓰인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은 내가 이미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거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의 모든 죄와 전적인 부패와 무능력을 시인하고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내가 기도할 때. 성령님은 나로 하여금 십자가로 남길 진리의 길을 선택하게 하십니다. 사망의 길이 아니라 생명의 길을 걷게 하십니다. 그래서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 자체가 이미 응답 받는 기도입니다. 사도와 성도들이 그렇게 기도했을 때 이제 기도 응답이 나타났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31절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기도하던 그들이 변화되었습니다. 헤롯이나 빌라도 종교 지도자들이 변화된 게 아니었습니다. 위협의 환경은 전혀 바뀌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기도했던 그들이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내 삶의 지축이 흔들리고 진동하는 사건에서 받게 되는 기도 응답은 내가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두려움 충만, 욕심 충만, 자기애 충만, 의심 충만, 불신 충만, 불안 충만에서 성령으로 충만해집니다 말씀으로 충만해집니다 기도했더니 내가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꼴보기 싫은 저 인간이 변화되는 게 아니라 그를 미워하던 내가 먼저 변화되는 것이죠. 기도하던 내가 성령 충만하게 되는 것 내가 죽고 내 안에 예수님이 사시는 것. 그게 최고의 기도 응답입니다. 여러분 성경 충만이 무엇입니까? 내가 말씀을 적용하고자 듣기 힘든 바를 드러내는 것이죠 내가 그렇게 변하면 성령의 열매는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이 나누어 먹습니다.
내가 말씀으로 성령으로 충만하면 가장 먼저 내 곁에 있는 사람들 식구들이 귀히 여기기 시작합니다. 어. 우리 엄마가 왜 저렇게 변했지? 우리 아빠가 뭐 때문에 저렇게 달라졌지? 바로 우리 가정의 구원 역사는 그때부터 시작되는 것이죠. 그런데 이 성령 충만은 단 하루만으로 그쳐서는 안 됩니다. 매일 이어지고 연습 되고 반복되어 져야 됩니다 그래서 날마다 성령 충만하기를 기도해야 되죠. 우리가 보통 어떤 계기로 이렇게 은혜를 이렇게 받게 되면 하루 이틀 정도 이렇게 적용합니다 하지만 다음 날이면 다시 이전으로 돌아가버리죠 그러니 우리 자녀들도 그걸 다 압니다. 어느 날 내가 갑자기 아들에게 사랑한다는 카톡이라도 보내면, 아빠 요즘 일대일 양육 숙제 적용하는 거 아니야? 엄마 혹시 목장 처방 때문에 억지로 그러는 거죠? 애들도 내가 진짜 성경 충만한지, 아닌지를 다 압니다 그래도 그렇게라도. 내가 들은 말씀이 있어서 적용한다면 그게 성경 충만하다는 증거겠죠 만일. 나는 하나도 변화된 게 없는데 내 기도 응답으로 남편과 자녀가 변화되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오히려 이 변화된 남편과 자녀 입장에서는 전혀 변하지 않는 이 엄마를 보면서 얼마나 이상하고 억울하겠습니까? 기도하는 나는 하나도 안 바뀌고 상대방이 바뀌기 만을 바란다면 그 기도는 바로 욕심 충만의 기도입니다.
(적용#4)
-나는 고난을 피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까?
고난에서 지켜달라고 기도합니까? 나는 나 자신의 변화를 위해 기도합니까?
내 곁에 사람과 환경이 변하기 만을 기도합니까?
사실 저는 돌아보면 이런 응답 받는 기도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제 신앙은 이 기복의 수준에서 더 나아가지를 못했습니다. 그저 이 고난을 피하게 해 주시기를 이 문제가 빨리 해결되게 해 주시기 만을 기도했던 것 같습니다. 과거에 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에 저희 식구들에게 많은 위로를 해 주셨던 분이 이모와 이모 부셨습니다. 지난주에 제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나눔을 했었는데요. 그런데 이모부는 언제나 교회와 크리스찬들을 늘 비판하던 분이셨습니다. 그리고 이모는 독실한 불교 신자인 보살이었습니다 그 이모부가 저와 함께 식사를 하던 자리였습니다. 저에게 이런 말을 하셨어요. 너네 집이 예수 믿어서 잘 된 게 뭐가 있냐? 그렇게 얘기하시면서 저에게 소주잔을 딱 내밀었습니다. 제가 그 잔을 어떻게 했을까요?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그 잔을 받아 마셨습니다. 그리고는 네 맞습니다. 그렇게 말해버렸습니다. 아버지 사건이 해석되지 않다 보니 예수를 믿어도 나와 우리 집은 잘 된 게 없다고만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불신자 앞에서 제 신앙을 완전히 부정해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5년 뒤에 그 이모부의 아내인 이모가 쓰러지셨습니다. 지병이 심해져서 중환자실에 입원하시고 아주 위독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제가 그 소식을 듣게 된 때가 주일이었습니다. 예배를 드리는데 과거에 있었던 그 이모부와의 대화가 제 머릿속에 이렇게 계속 떠오르더라고요 내가 도대체 불신자 앞에서 어떻게 그런 말을 했는지 너무나 괴로웠습니다 그리고 이 마지막에. 이 마지막 때의 이모가 구원받고천국에 가시기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아침이었습니다. 이종 사촌형에게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그런데 이 전화의 내용이 이랬습니다 이모가 잠시 의식이 돌아왔는데 말을 전혀 못 하시는데 종이 한 장을 달라고 하셨답니다. 그리고 그 받은종이에다가 말씀은 못하고 ‘은혜, 성경’이라는 이 두 단어를 쓰셨다는 겁니다. 이 불교 신자인 그 집 안의 식구들이 이게 뭔지 해석이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저에게 전화를 하신 거죠. 이모는 교회 문턱을 넘으신 적이 없었습니다 입원하기 전에는 절에도 다녀 오셨거든요 중환자실에서는 가족 이외에 누구도 만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모의 이런 행동에 가족들도 귀히 여기고 저도 놀라게 됐습니다 그날 곧바로 성경책을 사서 병원으로 붙여드렸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그 병원을 가려고. 제 이종 사촌 형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모가 지금 깨어나지 않고 있으니까 지금 너가 와도 대화를 할 수 없어서 소용이 없다.
나중에 오라고 만류를 하더라고요. 하지만 저는 이 때가 하나님께서 이모의 구원을 위해 주신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무작정 지방에 있는 병원에 찾아갔습니다. 중환자실 복도에는 5년 전 너네 집이 예수 믿어서 잘 된 게 뭐가 있냐? 그렇게 얘기하셨던 이모부가 초조한 모습으로 앉아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날. 저는 처음으로 이모부에게 복음을 전하게 됐습니다 일흔이 넘도록 말문을 굳게 닫고 계셨던 이모부는 이모가 만일 회복되어서 교회에 나간다면 나도 나가야지 뭐 이렇게 얘기하시는 겁니다. 그 말을 듣는데 정말 제 귀를 의심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면회 시간이 되어서 병실에 들어갔는데 순간 이모의 의식이 돌아와서 눈을 뜨고 계시는 겁니다. 저는 이모에게 하나님은 이모를 사랑하신다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산소 호흡기를 달고 계신 이 이모의 손을 꼭 잡고 그렇게 기도하는데 이모도 눈물을 흘리시면서 고개를 끄덕이시더라고요. 마치 제가 오기를 기다리신 것처럼. 그리고 그 말을 해주길 바라던 그런 눈빛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위독 하셨던 이모가 몇 달 뒤에 병에서 회복되어서. 병원에서 퇴원하셨습니다. 그리고 교회에 나오시게 되었습니다. 휠체어를 탄 이모를 뒤에서 밀면서 함께 교회에 오신 분은 다름 아닌 이모부 이셨습니다. 이모는 그렇게 예수님을 믿으시고 그 이듬해 천국에 가셨습니다
장례식 날 찬송이 울려 퍼지는 빈소에서 이모부는 제 손을 꼭 잡으시면서 이 말을 하셨습니다 정화나 고맙구나. 네가 그때 보내준 성경책이 이모 영정 사진 앞에 펼쳐져 있다. 정말 고맙구나. 그렇게 이모부가 얘기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모가 소천 하신 뒤에도 이모부는 혼자서 교회를 출석하시면서 예배를 드리셨습니다. 주님은 5년 전에 이모부의 조롱 앞에서 예수님을 거스르고 대적했던 저를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다시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회개의 자리로 저를 몰아가시고 다시 일으켜 세워 주셨습니다 과거에는 입조차 열지 못했던 저였는데 이제는 이 복음을 담대하게 전하기 위한 사역자의 길을 걷게 하셨습니다 저는 최근에 몇 차례 영접을 위한 심방을 다녀오게 됐습니다. 공교롭게도 제가 만나 뵈었던 모든 분들이 제 이모와 비슷한 연세 어르신들이었습니다 그 중에는 한 집사님으로부터 아버지 영접에 대한 요청을 받게 됐습니다 집사님이 아버지께서 췌장암 사기에 장기까지 전이된 상황이었습니다 복음을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던 어르신과 교회에 냉담하다던 이 아내 분을 만나게 됐습니다 그런데 그날 큐티 말씀은. 골로새서 4장에 전도할 문이 열렸으니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길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게다가 그날 수요 예배까지도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것이며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다고 하시더라고요 이 말씀을 의지하며 집사님의 부모님을 뵈었습니다 제가 또 두 분을 뵙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함께하신 동생 목자님과 따님 집사님도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난 사건. 자신이 낙태했던 사건을 눈물로 그 자리에서 간증하셨습니다 그러자 이 아버님은 입술을 열어 예수님을 영접하시고 병상 세례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교회에 냉담 하셨던 어머님도 그 옆에 있던 조카 청년도 예수님을 영접하겠냐는 그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고 함께 영접 기도를 따라 하셨습니다 기도를 드리는데 하나님이 참 오래 기다리셨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감사하다는 눈물의 기도가 나왔습니다. 무엇보다도 그 자리에 함께 계셨던 분들이 믿음의 동료가 되어서 한 마음으로 들리는 그 기도에 하나님은 구원으로 답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응답 받는 기도라는 걸 알게 해 주셨습니다. 교회로 돌아오는데 가슴이 벅차고 눈물이 나더라고요. 형형할 수 없는 감격이 올라왔습니다 한 영혼이 주님의 이름을 부름으로 구원을 얻은 기쁨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려웠습니다 주님은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회개할 것 없는 의인 99명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다고 하셨습니다. 정말 그 구원의 기쁨이 그분을 따르는 우리에게도 가장 크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구원을 위한 기도는 어떤 식으로든 하나님께서 100 프로 응답하신다는 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Epilogue>
1)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공동체와 소리를 높여 부른다.
2)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말씀으로 삶을 해석한다.
3)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말세에 성령을 부어 주신다.
4)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흑암 속에서 구원을 받는다.
5)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내면이 바뀌고 언어가 달라진다
6)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반대의 영으로 인내하고 객관적으로 설명한다
7)우상의 특징은 언젠가는 반드시 나를 배신한다는 것이다
8)찾아 갈 공동체나 동료가 없는 것은 평소에 공동체가 없기에 내가 교만하기 때문이다
9)찾아 갈 공동체나 동료가 없는 것은 자기 중심적인 합리화를 하기 때문이다
10)말씀이 없는 기도는 기복으로 흐르게 되어 있다
11)말씀이 없는 기도를 하면 내가 하나님 이라서 하나님 자리에 앉아 내 뜻대로 하려하기 때문에 작은 일에도 분노하면서 허사를 경영한다
12)나를 거룩하게 빚으시려고 고난을 사용하신다
13)물질의 십자가, 권리의 십자가, 질병의 십자가, 고통의 시간을 통하여 하나님의 권능과 뜻을 이루어 가신다
14)예수님으로 죽고 예수님을 살게 됨을 알고 영생을 받음을 신뢰하니 그러한 기도가 나온다
15)예수님 때문에 받는 어떠한 고난도 달게 받게 되는 것이다
16)내 몫의 십자가를 통하여 가정의 부활을 비춰 주신다
17)회피의 기도가 아니라 직면하는 기도를 해야 한다
18)내 안에 내가 죽고 내 안에 예수님이 사시는 것이 성령충만이다
19)내가 변하는 것이 구원의 역사의 시작이다
20)응답 받는 기도는 성령충만의 기도로 이어진다
21)내가 간절함과 절박한 심정으로 드렸던 기도에 하나님은 언제나 신실하게 응답하신다
22)때로는 내가 전혀 예상치 않았던 때 상상하지 못했던 모습으로 응답해 주시기도 하신다
23)나의 기도에 응답해 주신 이 하나님 때문에 내가 감격하게 된다
24)내가 찾고 의지하는 것은 반드시 나를 배신합니다. 사람도 명예도 그렇다.
25)평소에 공동체가 없기 때문에 인간적인 위로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26)예수의 피를 나눈 믿음의 공동체에서만 한마음으로 기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27)공동체를 떠난 신앙은 절대 자립할 수 없다.
28)우리가 연약 하기에 넘어지는 존재이기에 나를 일으켜줄 지체가 있어야 한다.
29)때로는 우리가 공동체에서 상처받을 수도 있지만 그것 때문에 나는 공동체 안 가겠다는 바로 그것이 자기 중심적인 합리화다
30)공동체 안에서 오해하고 상처받고 내가 회복되는 시간을 통해서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게 되는 것이 바로 내가 거룩해져가는 성화의 과정이기도 하다.
31)지금 겪고 있는 큰 문제는 내가 함께 소리 높여서 중보해야 할 기도 제목이다
32)우리가 어떤 이야기를 듣더라도 그것은 바로 그 지체의 기도 제목이다.
33)우리의 기도 대상은 바로 절대 통치자 하나님이시고 그분께 나의 모든 사정을 아뢰고 기도하는 것이다.
34)말씀이 없는 기도는 언제나 기복으로 흐르기 마련이다
35)하나님은 이미 그분의 뜻을 말씀으로 다 계시해 주셨는데 기복적인 기도는 내가 말씀을 듣고도 계속 내가 뭘 다 하려고만 부르짖는 것이다
36)기도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말씀에 대한 반응인데 이 말씀과는 상관없이 나의 생각만 주구장창 부르짖는다면 이건 소통이 아니라 불통인 것이다.
37)정욕으로 구하는 떼 부리는 기도에 불과하다
38)우리가 듣게 된 말씀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알아가게 된다
39)진정한 기도 응답은 상황과 환경이 바뀌기보다 이 사건을 통한 하나님의 의도를 말씀으로 깨닫게 되는 것이다
40)내가 영적인 것을 깨닫게 되면 육적인 것도 내가 필요한 만큼 채워주신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41)이처럼 우리가 자꾸 분노하고 허사를 경영하려는 이유는 내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있기 때문이다
42)우리가 자꾸 분노하고 허사를 경영하려는 이유는 심판자의 자리에서 통치자 노릇을 하려고 하기 때문이고 세상의 군왕들과 관리들처럼 그 자리에 앉아서 내가 내 마음대로 내 뜻대로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43)우리가 자꾸 분노하고 허사를 경영하려는 이유는 삶의 주권자 대주재(Sovereign Lord0이신 이 통치자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때문이다
44)그러다 보니까 옳고 그릇만 따지면서 작은 일에도 그렇게 분노하고 허사를 경영하게 되는 것이다
45)인본주의는 내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서 심판자 노릇을 내가 하려고 하는 것이다.
46)옳고 그름의 가치관으로 분노하고 끊임없이 헛된 일을 꾸미고 허사를 경영하게 되는 것이다
47)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으심 이다
48)그런데 거기서 끝이 아니며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그를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것이다.
49)지금 겪고 있는 이 고난과 내 몫의 십자가도 하나님의 권능과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려고 예정하신 것이다.
50)내가 이 십자가를 지고 가다 보면 내 현재의 이유를 깨닫는 권능을 얻게 된다.
51)이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게 되며 나를 구원하시려고 이 고난을 사용하시는 것이고 나를 거룩하게 빚어가시기 위해서 이 일을 쓰고 계시는 뜻을 깨닫는 것이다
52)비록 지금 내가 옥에 갇혀 있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분의 권능과 뜻을 나의 삶 가운데 이루어 가고 계심을 믿어야 한다
53)하나님께서 이 시간을 통해 나를 구원하시고 거룩하게 빚으실 것도 믿어야 한다
54)그런 고통의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분의 권능과 뜻대로 예정하신 것을 나에게 이루어가고 계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55)택자에게는 어떤 것도 지나고 보면 구속사의 과정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게 깨달아 지면 더 이상 내 입에서 불평과 원망이 아니라 감사가 나오게 되는 것이다
56)나의 지금의 고난이 성경에 써 있고 내 현재의 이유를 아는 권능을 베풀어 주시기에 감사하게 된다.
57)하나님께서 그분의 예정하신 대로 나와 우리 가정의 구원을 반드시 이루어 가심을 믿기 때문에, 이것을 소망하기 때문에 감사하게 되는 것이다
58)이걸 모르면 사건만 일어나면 나는 시험 들었다고 말한다.
59)‘하나님, 나 믿음 없는 거 아시면서 왜 이러십니까? 왜 나에게 자꾸만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네가 나에게 어떻게 이럴 수 있냐?’ 이런 종류의 말들을 쏟아 놓는 바로 이런 모습이 하나님의 권능과 뜻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지금 당장에 나의 만족만을 구하기 때문에 그런 것으로 그러다 보니까 얼굴이 늘 어둡고 차갑고 추운 것이다.
60)내 얼굴에 기쁨이 없는 까닭은 내 생각이 자꾸만 이 현재의 고난과 이 십자가에만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61)하나님께서 나의 구원까지도 예정하심을 그걸 믿고 확신한다면 그 얼굴에 주름이 펴지게 되는 것이다
62)현재 이 고난은 장차 올 영광과 좋게 비교할 수가 없는 것이다.
63)내가 주님의 죽으심과 이 부활에 참여함으로 내가 구원을 얻고 영생을 누리고 천국을 소유한 이 자체가 너무 감사하고 기쁜 것이다.
64)목사님께서 늘 하시는 말씀처럼 영생 화장품을 얼굴에 바르고 지내게 되는 거이고 그러면 내 얼굴에 광채가 나는 것이다
65)하나님께서 우리를 굽어보시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응시하고 주목하심으로 지켜보시는 것으로 우리가 그렇게 기도해야 되는 것이다
66)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이 고난을 통해서 주님의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게 될 거라고 믿어야 하며 자신들 앞에 당면한 이 문제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신뢰해야 하는 것이다.
67)그 믿음이 있으니까 이 기도가 나온 것이다.
68)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고 영생을 소유하게 되었는데 무엇이 두렵겠나? 어떤 해를 받는 게 싫겠나?
69)내가 예수로 죽고 내가 예수로 살게 되었는데 예수님 때문에 받게 되는 어떤 해도 나에게는 유익이 되는 것이다.
70)그래서 우리는 지금 당면한 이 고난을 피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기보다는 현재 이 고난에서도 나를 지켜달라고, 지금 이 십자가를 잘 지고 가게 해주시기를 그렇게 기도해야 한다
71)왜냐하면 내 목에 매인 이 십자가를 통해서 주님은 나와 우리 가정의 구원을 이루어 주시기 때문이다
72)나의 죽어짐과 내가 썩어지고 밀알이 되는 자기 부인의 시간을 통해서 우리 가정에도 부활의 빛을 비춰 주실 것을 소망하기 때문인 것이다.
73)그러다 보니 이 초대 교인들의 기도는 환경의 변화가 아니라 자신들의 변화를 위한 기도였던 것이다.
74)회피하는 기도가 아니라 직면하는 기도였는데 이들은 현실 회피 문제, 회피 상황에서 회피하지 않았다.
75)담대하게 문제를 직면하게 해 주시기를 기도했다.
76)상황을 돌파하게 해 주시기를 기도했던 것이다
77)하나님 저들은 우리를 위협하고 있지만 주님께서 우리를 붙드시고. ‘주님, 우리를 담대하게 하심으로 이 생명의 복음을 누리고 이 생명의 복음을 전하게 해 주십시오’ 그렇게 기도했던 것이다
78)지금 내가 시련 가운데 있다면 주님께서 나를 굽어 살펴주시기를 기도해야 한다
79)지금 이 고난 한복판에서도 주님 나를 보사, 이 문제를 통과하게 해달라고 기도 하시길 바란다.
80)오늘 내 삶의 형편이 어떠하든지 담대하게 말씀을 적용하고 내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 하시길 바란다.
81)곤고한 환경에서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 표적(miraculous sign)이 되고 그 사건이 해석되는 것이 기사(wonders)인 것이다
82)내가 어떤 환경 속에서도 예수의 이름을 가지면 나의 모든 환경은 남을 죄에서 꺼내줄 환경으로 쓰인다고 하셨다.
83)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은 내가 이미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거다
84)하나님 앞에서 나의 모든 죄와 전적인 부패와 무능력을 시인하고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이다
85)예수의 이름으로 내가 기도할 때 성령님은 나로 하여금 십자가로 남길 진리의 길을 선택하게 하신다.
86)예수의 이름으로 내가 기도할 때 사망의 길이 아니라 생명의 길을 걷게 하시므로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 자체가 이미 응답 받는 기도다.
87)내 삶의 지축이 흔들리고 진동하는 사건에서 받게 되는 기도 응답은 내가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것으로 나타난다
[우리들교회 2021년 7월4일 주일말씀요약(사도행전 2:14~21/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정정환목사)]
<사도행전 2:14~21>
14절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15절 때가 제 삼 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
16절 이는 곧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17절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18절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
19절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를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20절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21절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Prologue>
할렐루야로 인사하고 싶지만 인사가 잘 안 나옵니다. 이번 주에 그 주 중에 주일 설교 하라는 말씀을 듣고 칠월달 큐티 책을 딱 펼쳤는데. 아! 사도행전인 겁니다. 목사님께서 매주마다 하시는 이 사도행전을 도대체 어떻게 설교해야 되나 근심이 되더라고요. 그런데 오늘 주일 본문을 딱 펼쳤는데 아뿔싸! 4년 전에 목사님께서 항암을 시작하시기 전에 하신 이 성경 충만의 본문인 겁니다. 오늘 성도님들이 눈물로 기도하시면서 했던 말씀인데 이 말씀을 도대체 어떻게 내가 설교를 해야 되나. 말씀에 붙잡힌 게 아니라 근심과 염려에 붙잡힌 한 주였습니다. 그러던 제 얼굴을 보는 아내가 이러는 겁니다. 여보 사도행전 감당할 수 있겠어 안쓰럽다 이러면서 설교 원고는 줄 수 있지. ‘나 목장 인도해야 돼’ 이러는데. 정말 아무런 말이 안 나오더라고요 그래도 이제 금식하면서 기도해 주겠다는 그 말에 좀 위로가 되더라고요. 그런데 아침에 나오기 전에 물어보니까 '한 끼 금식했다'고 하더라고요. 근데 그것도 했는지 안 했는지 기억이 안 난다고. 그러다 보니. 수요 예배 기도한 시간에 눈물이 절로 나오더라고요. 하나님, 우리 공동체는 힘든 고난 당하는 분들이 정말 많은데 저 같은 사람이 어떻게 말씀을 전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저는 이게 지금 고난인데 저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그렇게 기도로 보낸 한 주였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 저의 한 가지 바램이 있다면 여러분도 저를 좀 불쌍히 여겨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에 보면 이런 시구가 나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여러분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준다는 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나의 마음을 그에게 준다는 그런 뜻이겠죠. 그 사람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전해주는 겁니다. 우리가 1 1 4에 전화를 걸었을 때 친절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사랑합니다 고객님’ 이 말에 사랑을 느끼시는 분 계신가요? 아마 계신다면 요즘 정말 힘드신 분일 겁니다. 하지만 별로 내가 친하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누군가 내 이름을 다정하게 ‘누구 누구야!’ 이렇게 불러주었을 땐 또 어땠습니까? 그 사람에 대한 친근함과 애정을 느낍니다 저도 과거에 제가 이 몸 담았던 공동체에서 아내가 저에게 처음으로 형제님 이런 말 대신에 ‘정환아!’ 이렇게 불러줬을 땐, 가슴이 뛰었습니다. 아! 이 누나가 나를 정말 친하게 생각하는구나! 그런데 이제 결혼하고 나서 한 10년 정도 넘게 살다 보니까 어느 날 갑자기 아내가 제 이름을 부르면 내가 혹시 뭘 잘못했나? 아내가 나 때문에 열 받았나? 싶어서 화들짝 놀라곤 합니다.
그런데 또 사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도 그렇죠. 제가 좋아하는 찬양 중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사랑한다 아들아 사랑한다 정환아 내게 축복 또한 하노라’ 제 고향 선배가 쓴 가사인데요 이 가사에 내 이름을 딱 넣어서 부르면 마치 지금 하나님께서 내 이름을 불러주신 것 같아서 더 위로가 되고 은혜가 되죠. 마찬가지로. 나 또한 어떻습니까? 주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그분을 향한 신뢰와 사랑의 표현일 겁니다 그렇다면 이 시간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말씀 요약>
1.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공동체와 소리를 높여 부릅니다.
14절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본문은 베드로가 첫 번째 설교의 도입 부분입니다. 열한 사도와 서서 소리를 높입니다. 내 말에 귀를 기울여달라고 소리를 높입니다. 50여 일 전까지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더 이상 그런 베드로가 아닙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열한 사도와 함께 소리를 높입니다. 나에게 성령님이 임하시면 혼자가 아니라 공동체와 함께합니다. 지체들이 다른 곳을 바라보면서 방언하기보다는 서로 붙잡아줍니다. 담대함으로 소리를 내고 자신의 삶의 간증합니다. 목장을 할 때 전도 봉사를 할 때도 함께 서서 맡겨진 사명을 감당합니다.담임목사님께 설교 때마다 공동체 고백을 통해서 삶과 간증을 나누어주고 있습니다. 심방과 결혼 예배를 인도하기 위해 곳곳을 다녔습니다. 여러 집사님들이 함께 소리를 높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소개해 주시고 자신의 수치와 죄를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렇게 함께 서서 연약한 지체들 Care하고 격려해 주시다 보니 든든하고 감사했습니다. 말씀에 붙잡힌 게 이런 거구나 어느 곳에 가든지 거기에는 성령의 백성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누군가와 함께 서있는 것을 잘하지 못했습니다. 외 딴 섬처럼 있으려고 했던 나 혼자 신앙이었습니다. 혼자 있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한번 여름 Outreach를 간 적 있었는데 며칠 동안 아들과 딸이 저를 찾지 않았다고 합니다. 심각하죠. 그 말을 듣고 나니 저의 실상이 너무 적나라하게 느꼈습니다. 제 행동의 이면에는 안일함의 우상이 있었습니다. 담임목사님은 혼자서 뭐 하려고 하지 말고 어울리면서 사역 하라고 합니다. 이런 제가 잘 바뀌어지지 않았습니다.
지난주에 사역을 하다 보니까 공동체와 함께 서서 말하는 것이 어떤 건지 깨닫게 되었고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지체들과 함께 서서 소리 내서 말하는 것이구나 함께하는 기쁨 이런 거구나’라는 것이 깨달아 졌고 목사님의 말이 이해되었습니다. 목장도 목원들과 함께 서서 말하는 곳입니다. 설명해 주고 붙들어주고 같이 서있게 됩니다. 성냥개비 하나는 금방 타지만 여러 개가 모여 있으면 활활 탑니다. 이럴 때 옆에서 조롱하고 비웃는 인간들이 있습니다. 제자들의 옆에 있던 유대인들이 술에 취했다고 조롱합니다.
15절 때가 제 삼 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
16절 이는 곧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이라
아침 9시에 불과한데 어찌 이 사람들이 술에 취할 수 있느냐 말합니다. 오전 10시까지 금식했기 때문에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조롱하는 사람들에 대해 감정적으로 대하지 않고 부드럽고 차분하게 설명했습니다. 이전 같으면 어땠을까요 앞에 예수님이 계셔도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칼로 사정 없이 내려쳤습니다. 성질 급한 아이콘이죠 오늘 베드로가 달라졌습니다. 우리 베드로 형님이, 오빠가, 달라졌습니다. 나의 내면과 언어가 바뀝니다. 미움과 분노의 말이라 아니라 사랑의 말로 하게 되고 내가 넘어가게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삶에 대해 말하게 됩니다. 조롱을 당하더라도 혈기로 맞서기보다 객관적으로 말해줍니다. 말씀 충만하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내 옆의 사람이 조롱했을 때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혈기로 반응하십니까? 아니면 드러내지 않지만 저 인간하고 상종하지 말아야지 정죄와 판단하고 살인하고 있지 않습니까? 어제 오후에 양육 교사를 인도하는데 부모 형제에 대한 고난을 겪고 있는 나눔을 들었습니다. 어떤 분은 남편이 쓰레기통을 비우는 데 쓰레기를 제대로 모으라고 남편이 아내에게 잔소리했답니다.
아내 집사님이 아들에게 계란 찜 해주다가 급해서 그렇게 됐다고 하니까 남편 분이 그래도 그게 뭐냐고 잔소리했다고 합니다. 치명적인 펀치 한 방을 날렸습니다. 당신이나 어머니나 다 똑같다고 그래서 소리 지르고 난타전을 치르다가 아내 집사님이 쓰레기통을 부쉈다고 합니다. 이 집사님의 적용은 순종의 언어로 하겠다고 합니다. 성령 충만은 신비적인 것이 아니라 말씀을 적용하기 위해 받아내는 것이 순교이고 죽어질 때 화평의 열매가 맺어지는 것입니다. 그 열매는 내 옆의 식구와 함께 먹는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을 믿어서 신앙을 전하는 것에 많이 불편했습니다. 늘 입을 다물곤 했습니다.
특히나 가까워 보이는 친척들과 관계에서는 크리스천을 조롱하는 어르신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목회자를 비판 하시다 보니까 이분 앞에서 도저히 신앙을 드러내는 것이 어렵습니다. 술자리에서는 술을 받으면서 한마디 말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세상적으로 남 부러울 것이 살고 화기애애하다 보니 예수가 들어갈 틈이 없었습니다. 제 형편은 너무 안 좋아서 많이 힘들었습니다. 어느 날 외할머니의 병실에 방문했습니다. 구원에 대해 주시는 부담감이 마음을 짓눌렀습니다. 모든 친척분들이 모여 있었는데 결국 한마디 말조차 하지 못한 채 나왔습니다. 마지막 기회를 제 스스로 걷어찼습니다. 그게 할머니와의 이 땅에서 마지막 때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후회가 되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데 있어서 입이 열리지 않고 소심한 저였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조롱 당하는 게 싫어서 신앙을 감추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공동체에 속해있지 않았고 예배만 드리고 저만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주 중에는 직장에서 일하고 공부하고 틈틈이 선교 구호단체를 섬겼는데 열심히 사는데 공동체가 중요하나? 라고 무시하면서 지냈습니다.
그 공동체를 무시하는 마음이 하나님을 우습게 여겼습니다. 그것을 나눌 사람도 없었습니다. 외할머니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기도 부탁을 할 수 없었습니다. 한국교회가 목회자에 대해 비난하는 객기만 있었지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 용기는 없었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가 저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저 같은 사람을 사역자로 불러주신 것을 생각하면 어떤 말도 없습니다. 목사가 될 자격이 1도 없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적용#1)
-나는 공동체 지체들과 함께 서 있습니까?
-혼자 서 있습니까? 누구와 함께 서서 소리 높여 말합니까?
-나를 조롱하는 사람들의 말과 행동에 어떻게 반응합니까?
2.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말씀으로 삶을 해석합니다.
16절 이는 곧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성령의 강림은 말씀이 성취된 사건이었습니다. 이건 우연한 현상이 아니라 말씀이 성취된 사건이었습니다. 지금 내 앞에 일어난 일은 말씀이 일어난 사건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인간적인 일로만 여깁니다 예수님이 찾아오신 사건을 세속사의 사건으로 치부합니다.몇몇 유대인은 술에 취해서 이런다고 조롱합니다. 말씀이 임한 사건이 예수를 모르는 사람은 ‘그건 재수가 좋아서 그런 거야 그건 운이 좋아서 그런 거야’라고 비웃습니다. 그 일은 말씀이 임한 사건입니다. 말씀이 성취된 사건입니다. 내가 원하고 바랬던 대로 되었던지, 반대로 되었던지, 그 일을 보면서 아 말씀대로 된 사건이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마음의 옷깃을 여며야 합니다. 성경으로 해석해야 하고 설명해야 합니다. 누군가 조롱하고 비아냥거릴지라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설교를 듣고 큐티를 하지만 부정적인 말과 조롱에 요동할까요? 말씀이 응한 사건으로 보지 않습니다. 이분법적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사건으로 받아들인다면 교만 하거나 우쭐해 할 수가 없습니다. 회개 사건으로 받아들이고 겸비해야 합니다. 내가 원한 것과 거꾸로 나왔다고 해서 낙심하거나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붙으면 회개하고 떨어지면 감사인 것이죠 베드로가 인용한 것을 보면 일어나기 전부터 그는 구약의 말씀을 묵상했던 것 같습니다. 내가 성경을 읽고 묵상하면 사건이 일어났을 때 설명해 줄 수 있습니다.우리들 공동체가 강에서 바다로 나가서 그렇습니다 말씀으로 내 삶을 해석하고 간증하다 보니까 사명의 지경이 넓어지게 된 것입니다. 좀 전에 제가 언급했던 친척들 가운데 이종사촌 형도 있었습니다. 사촌 형의 아내가 소천했는데 장례식장에 갔습니다. 양육도 받고 사역하면서 가치관이 달라지다 보니까 친척들 앞에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전도할 생각만 하면 눌렸는데 복음을 전하고 이모가 구원을 받게 된 간증을 했습니다. 이모는 독실한 불교신자 였습니다. 질병으로 중환자실에 가서 전도했을 때 예수님을 만나고 천국에 간 사건을 친척들 모두가 알고 있었습니다. 이모의 구원을 위한 응답이었고 말씀 이루어진 사건으로 해석했습니다. 간증하고 있는데 상주로 앉아있던 그분이 이러는 겁니다. 그거는 중환자들이 경험하는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의학적인 지식을 늘어놓으면서 설득하는 겁니다. 그런데 자기 아내도 의사였는데 세상을 떠났습니다. 고난 때문에라도 예수님을 만날 기회가 왔는데 교양이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른 형은 아무리 여기서 하려고 해도 안 될 거라고 외삼촌이 대학 교수님이라고 얼마나 박식하고 깊이가 있는데 목사 할아버지가 와도 안 된다고 하는 겁니다. 복음을 거부하면서 신비적으로 조롱하고 있는 겁니다. 이런 말들에 대한 불편함 서운함이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아프더라고요 그래서 그날 전해야 할 복음만은 끝까지 전해야 한다고 자리를 떴습니다. 목사님의 책과 큐티 간증을 집집마다 전했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우연과 나만 열심히 높입니다. 성령이 임한 사람에게는 말씀의 성취이기 때문에 하나님만을 높이고 찬양합니다.
(적용#2)
-지금 나에게 일어난 사건 가운데 말씀대로 이루어진 일은 무엇입니까?
-나는 지금의 사건을 말씀으로 해석하고 설명할 수 있습니까?
3.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말세에 성령을 부어 주십니다.
17절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18절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
하나님이 말씀에 ‘그분의 영을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신다’라고 합니다. 여러분 말세가 언제입니까? 종말의 때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때부터 다시 오실 때까지의 그 기간이죠. 그럼 나에게 그 말세는 언제일까요 담임 목사님께서는 이 본문을 설교하실 때 나의 한계를 인식할 때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우린 저마다 자신이 경험하는 절대치의 고난이 있습니다. 이 고난을 겪을 때 나의 한계를 보게 되죠. 그런데 자기의 이 인생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죽을 때까지 말세를 모르고 살아갑니다. 우리는 내 인생의 이 말세 때에 자아가 죽어지고 예수로 살게 됩니다. 바로 그때에. 하나님은 그분의 영을 우리의 육체에 부어 주십니다.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말씀으로 인도함을 받게 되죠. 자녀들은 예언을 하고 젊은 이들은 환상을 보고 늙은이들은 꿈을 꾼다고 하십니다. 세상 경험이 없고 철이 없는 자녀들이 말씀으로 자기 삶을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우리 공동체 아이들은 영아 때부터 엄마랑 함께 큐티하면서 말씀을 들으면서 양육을 받습니다 사실 이 저희 집의 아이들도 그 수혜자의 반열에 들어갑니다. 제 아들 딸이 둘이 같이 과거에 어린이 집을 다닐 때 였거든요 5살 된 동생이 7살 된 누나에게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어린이 집에 이렇게 친한 여자 친구가 있다고. 그랬더니 누나가 이렇게 대꾸를 했습니다. ‘야, 걔 교회 다녀?’ 그랬더니 동생이 안 다닌다고 하니까 누나가 이러더라고요 ‘야, 예수님 안 믿으면 불신 교제야 그거’ ‘불신 교제, 안 돼 헤어져’ 또 동생은 그 말을 듣고 끄덕거리더라고요 저는 제 아내가 집에서 아이들에게 뭐 ‘신 교재 불신교제’라는 말을 한 적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이 아이들이 교회에서 그 말을 듣고 배운 겁니다 사실 저도 과거엔 ‘신 교제, 불신교제’라는 말을 잘 몰랐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이 공동체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이 구속사의 말씀을 듣고 또 큐티를 하다 보니까 이런 예언을 하는 것이죠
한 번은 이 희귀질환으로 투병하던 이 한 아이가 천국을 가게 되어서 장례를 인도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예배 때 이 아이의 언니인 중학생 초등학생 자매들이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자기 동생을 보면서 내가 죄인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고 하나님께서 이 동생을 우리 가정에 선물로 보내주셔서 감사하다는 그런 나눔을 했습니다. 이 고백을 들으면서 함께 예배를 드리던 성도님들 모두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여러분 바로 이것이 자녀들이 예언하는 모습 아니겠습니까 우리 자녀들이 어릴 때부터 말씀을 듣다 보니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말하는 예언을 하는 것이죠. 또한 성령이 임하시면 젊은이들은 환상을 본다고 하십니다 다른 말로 비전을 보게 되는 것이죠 청년 시절의 특징이 뭡니까 눈에 보이는 것을 우상으로 삼고 자기 욕망과 쾌락을 추구하는 특징이 있죠. 그런데 이들에게 성령이 임하시면 눈에 보이는 것을 쫓아 살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환상 비전을 보게 됩니다.
2주 전쯤 제가 교회에서 결혼 예배를 인도했습니다. 신랑 신부였던 이 두 청년이 모두 초신자였습니다. 파혼과 이 낙태 사건을 겪으면서 자매가 먼저 우리들 교회에 오게 됐습니다 그리고 이 상대방 형제는 이 우리들 교회 이 홈페이지 상담 게시판에 너무 힘들고 괴롭다면서 글을 남겼습니다. 그로 인해서 제가 또 그것에 대해서 답을 해주고 저랑 연락을 주고받다가 공동체에 오게 됐습니다. 아무것도 보이는 게 없어서 허무함의 수를 의지하고 죽으려고 했던 형제 세상 문화와 쾌락에 빠져 살던 자매가 목장에 정착하게 되었고 기초 양육과 일대 일도 받게 됐습니다. 이 코로나 때예요. 초신자인데도 하루도 빠지지 않고 큐티 기도회에 들어와서 자기 연약함과 기도 제목을 올렸습니다. 그렇게 지난 날의 죄악을 회개하고. 다시금 결혼을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결혼 한 주를 앞두고 이 서로의 신뢰에 금이 가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러면서 다시 또 파혼의 위기가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이제 부부 목장과 여자 목장이 공동체 식구들의 기도와 권면을 통해서 다시 마음을 돌이키고 화해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2주 전에 결혼식을 치렀습니다 이 신랑 신부가 초신자였거든요. 근데 그날 하객의 대부분들이 불신자였습니다 근데 이 두 사람 덕분에 이 불신자분들이 교회에 오셔서 결혼 예배에 참석하게 된 것이죠. 그리고 지난 주일에는 이 두 분 모두 함께 세례까지 받게 됐습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이렇게 젊은 이들도 자신이 가지고 있던 욕망과 세상적인 환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비전으로 바뀌어 변화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또한 성령이 임하시면 늙은이들은 ‘꿈을 꾼다’라고 말씀합니다 과거만을 자꾸 회상하고 서운하고 아쉬운 것이 더해지는 그때 ‘꿈을 꾼다’라고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은 100세 이삭을 낳았죠 모세는 80세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광야를 다녔습니다 갈랩은 85세에 아낙 자손과 싸우겠다면서 이 산지를 내게 달라고 말했습니다 이 우리들 공동체에도 실버와 골드 목장엔 이렇게 하나님께서 주신 꿈을 꾸고 이 사명을 감당하시는 집사님들이 참 많으시죠나의 인간적인 꿈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그 꿈에 사로잡혀서 공동체와 이 공동체 안에서 믿음의 본이 되어 주십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그분의 영을 모든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십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계층과 세대를 뛰어넘어서 모든 종들이 예언하게 하십니다 날마다 한 말씀으로 모든 세대에게 역사하심으로 자기 삶을 성경으로 해석하고 복음을 전하는 증인이 되게 하시죠. 그래서 성령은 말씀의 영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해진다는 게 뭡니까. 말씀으로 충만해지는 것이고. 말씀을 좆아 살아가는 인생입니다. 그 말씀은 우리의 모든 편견과 고정관념과 내 마음의 장벽을 깨뜨립니다 나의 부족함과 나의 열등감과 결핍마저도 넘어서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성령을 부어 주시면 이 땅에 자녀 문제와 젊은이 문제와 노인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우리 가정 문제 또한 하나님께서 성령을 부어 주시면 해석이 되고 해결로 나아가게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공동체 또한 하나님께서 주시는 예언과 환상과 꿈이 가득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적용#3)
-나는 어떤 예언과 환상과 꿈을 꾸고 있습니까? 나의 인간적인 예언과 환상과 꿈 입니까?
-하나님이 주신 예언과 환상과 꿈 입니까? 내 안에 깨어져야 할 편견과 고정관념, 마음의 장벽은 무엇입니까?
4.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흑암 속에서 구원을 받습니다.
19절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를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20절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21절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 하늘에 서는 기사를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어 주십니다.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된다는 이 말은 심판으로 인해서 흑암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는 뜻입니다 내가 우상으로 삼고 그렇게 의지하던 해달 별이 떨어지는 이 사건이 찾아오면 칠흑같이 아무것도 눈에 보이는 것이 없게 되죠. 더 이상 손 쓸 수 없는 그 밤이 찾아옵니다 하지만 이런 심판의 때는 택자에게는 구원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바로 그때가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기 전에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이처럼 내 삶에도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는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습니다. 아무것도 보이는 게 없고 내가 붙잡을 수 있는 것조차 없을 그 나의 절대치의 권한에서 주의 이름을 부를 때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택자에겐 어떤 환난과 고통의 사건도 구원의 사건이 되는 것이죠 도무지 내 눈앞에. 아무것도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는 암담한 상황에서도 주의 이름을 부를 때 구원을 얻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지금 나에게. 해달별이 떨어지고 아무것도 보이는 게 없다고 낙심하거나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 곧 주의 크고 영예로운 날이 이르겠구나 이렇게 생각하면 되는 것이죠. 그리고 그 자리에서 내가 해야 될 일이 있다면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주님에 대한 전적인 믿음과 의탁을 뜻합니다. 나의 구원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신뢰하면서 살아가는 것이죠.
그렇게 내가 예배와 목장에 붙어가면서 이 말씀 듣는 이 구조 속에 거할 때. 그 말씀이 나를 붙잡아 주실 겁니다. 흑암 중에 있는 나에게 찾아오셔서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죠 내가 그 사람하고 있는 바로 이 성 중에도 성령의 백성이 많다는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나에게 허락한 이 구원이 나에게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내 곁에 있는 또 다른 누군가 에게도 하나님께서 이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그들도 구원에 이르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바로 이것이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에게 주시는 가장 큰 축복입니다. 바로 이게 복음의 능력이죠.
제가 첫 번째 대지에서 외할머니 이야기를 했는데요 그날 임종 전에 계신 외할머니를 제가 만나고 결국 복음을 전하지 못한 채 무거운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오던 길이었습니다 제가 이 버스에서 내리려던 순간에, 그때 제 옆에 있던 동생이 119 대원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아버지께서 갑자기 소천하셔서. 영안실에 계신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저와 어머니 동생이 외할머니가 계신 이 병원에 다 같이 있을 때. 그때 아버지께서 집 아파트에서 투신하셨던 것이었습니다 그날 동생과 제가 아버지랑 같이 점심 식사도 했는데 갑자기 이런 일이 일어나니 믿어지지가 않았습니다 장례식 첫날 빈소에서 나와서 밤 하늘을 바라보는데 깜깜한 하늘처럼 정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는 것 같았습니다. 수년간 질병으로 인해서 건강을 회복하고자 안간힘을 쓰셨던 아버지 그리고 그 아버지를 위해서 기도하던 우리 가정에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수년간 질병으로 인해서 건강을 회복하고자 안간힘을 쓰셨던 아버지 그리고 그 아버지를 위해서 기도하던 우리 가정에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머릿속에는 오로지 왜? 라는 이 한 단어의 질문 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질문을 안고 몇 년을 지냈습니다 제가 알고 있었던 그 어떤 지식으로도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이 재앙보다 더 큰 재앙은 이 말씀으로 내 삶의 이 현실이 해석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버지와 외할머니와의 이 땅에서의 이 마지막 만남이 이런 식으로 하루 만에 끝났다는 게 너무 허무했습니다. 그리고 5년의 시간이 흘러서 저는 우리들 공동체로 오게 됐습니다. 공동체에서 처음으로 이 아버지의 사건을 오픈하고 나누었는데 그냥 이 사건 자체만을 이야기할 뿐 해석이 안되니까. 더 이상 나눔이 이어지지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수요 예배 때 담임 목사님께서 열왕기로 유다 왕들의 계보를 말씀해 주셨던 날이었습니다. 좋은 부모 나쁜 부모 할 것 없이 예수 믿게 해 주신 부모가 최고의 부모라는 이 말씀이 나팔 소리처럼 들렸습니다. 순간 제 머리 속에서 지진이 일어나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 아버지가 나를 예수님 믿게 해주었지. 아버지 때문에 내가 예수님 이름을 부르게 됐지. 맞아. 아버지가 나의 구원의 공로자였어. 내가 아버지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가게 되었어 우리 가정이 아버지로 인해서 주님을 찾게 됐고. 구원을 받게 된 거구나. 아버지 고맙습니다. 하나님 정말 감사합니다 그렇게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가 나왔습니다. 수 년간 꼬여 있던 제 마음의 실타래를 하나님은 그날 그렇게 풀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외롭고 항변하던 저에게 주님은 그렇게 찾아와 주셨습니다 아버지 그 사건은 주님께서 나를 위해서 기사를 베풀어 주셨고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하심으로 구원을 주시는 사건이란 걸 알게 해 주신 거죠. 말씀이 없었다면. 정말 말씀이 없었다면 저는 아마 피와 불과 연기 속에서 원망하고 불평만 하면서 아마 주저앉아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런 죄를 말씀으로 붙잡아 주시고. 그분의 영을 부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그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기보다는 언제나 내 이름 석자를 부르면서 그 이름이 불리어지기만을 바랐던 저의 교만과 저의 죄악 된 실상을 보게 하셨습니다. 저는. 내 이름이 사람들에게 돋보이고 내 이름의 영광을 얻기 만을 바랬습니다.
정정환이라는 이 이름의 우상을 새기고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좋은 사람에게 보이고 싶어서 좋은 사람으로 보여주고 싶어서 가면을 쓰고 위선과 외식을 하면서 지내왔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게 아니라 인간적인 생각으로 충만하다 보니 가장 가까이 있던 할머니에게 조차,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하지 못했습니다 내 욕심과 자기 의로 충만하다 보니 아버지의 아픔도 공감하지 못한 채 집에서는 늘 나의 안위만을 추구했습니다 내 열심과 자기 의로 충만하다 보니 세상 성공을 부르짖고 스펙을 부르짖고. 힘과 권세와 명예만을 부르짖고. 그저 인생의 목적이 잘 먹고 잘 사는 행복에만 꽂혀 있었습니다 그런 저에게 주님은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는 사건으로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기사와 징조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바로 그것은 말씀이 있는 공동체를 만나게 하신 겁니다. 매주마다 목사님께서 전해 주시는 이 구속사의 복음을 듣게 하심으로 내 삶이 해석되게 하신 겁니다. 내 현재의 이유를 아는 것이 진정한 권능이라고 하셨죠 주님은 그 권능을 깨닫고 그 권능을 누리는 인생으로 견인해 가셨습니다. 그래서 매일 예배 시간 때마다 이 예언의 말씀을 들으면서 웃고 또 울면서 회개하게 됐습니다. 밑바닥이 보이지 않는 나. 이 죄성 때문에 절망하는 날도 참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내 죄를 사하시고 내 상처를 치유하시며 싸매어 주시는 성령님의 손길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 회개의 순간이 가장 행복한 순간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주님은 크고 영화로운 주님의 날을 내 삶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이것을 제가 깨닫게 되다 보니 아버지의 그 자살 사건은 더 이상 재앙이 아니라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건이 되었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름으로 나와 우리 가족이 구원받게 되는 사건으로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사랑하는 식구의 갑작스럽고 황망한 죽음과 이해하기 힘든 죽음 앞에서 장례를 치르는 유가족들과 함께 저의 이 약재료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서서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혹시 지금 이 자리에 이 영상을 보시는 분들 가운데 고난과 환난 중에 거하시는 분이 있습니까 오늘 내가 피와 불과 연기 속에 있을지라도. 바로 이 날이 나에게 구원에 임하는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될 거라고 약속하십니다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는 사건이 찾아왔을지라도. 오직 내가 할 일은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 이름을 불러야 구원을 받습니다 그 어떤 것도 그 무엇도 나를 죄와 사망과 중독과 고통에서 구원해 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그 이름을 부를 때 나를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게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에게 주시는 이 구원의 감격과 기쁨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천국의 기쁨임을 믿습니다 그래서 그 그리스도의 이름은 구원의 이름이며 생명의 이름이고 소망의 이름입니다. 여러분 세상에 알려진 명품인 굳지 프라다 루이비똥, 샤넬 같은 메이커는 그 이름 하나만을 가지고 장사를 하죠 그런 이름에 세상 사람들은 열광을 합니다 비싼 돈을 주고서라도 그걸 구입하고자 줄을 서서 기다립니다. 그런데 그 이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이름이 바로 여기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지금 내 안에 계십니다. 우리 가정 안에 계십니다 그럼에도 혹시 요즘 나는 어떤 이름에 열광하고 있습니까. 어떤 이름을 사모하고 부르고 계십니까? 우리가 평생에 사모하고 불러야 할 그 이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는 없습니다. 담임 목사님께서 이 본문을 설교하실 때 암이 발견되었다는 나눔을 하셨습니다 ‘암이라는 질병으로 인생의 한계와 말세를 겪게 하시지만 오히려 아픈 성도님들을 치유하게 해 주셔서 감사하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광된 하나님의 신비를 알게 하시고자 이 일을 겪게 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고백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 성도님들이 함께 눈물로 기도하셨습니다 바라기는 오늘 이 시간 또한 우리 각자가 내가 지금 어떤 상황과 형편에 있다 할지라도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회개로 나가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로 돌이킴으로 구원받는 역사가 나와 우리 가정 가운데 일어나길 바랍니다. 나뿐 아니라 내 곁에 있는 식구와 지체들에게도 그 예수님을 증거함으로 다 같이 주의 이름을 부르고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을 함께 경험하는 성령의 역사가 우리에게 임하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바라기는 주의 이름을 부르는 우리 모두에게 이 은혜가 임하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적용#4)
-나에게 찾아온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된 사건은 무엇입니까?
-나는 어떤 이름을 사모하고 열광합니까?
-나는 지금 누구의 이름을 부르고 있습니까?
<Epilogue>
1)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공동체와 소리를 높여 부른다.
2)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말씀으로 삶을 해석한다.
3)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말세에 성령을 부어 주신다.
4)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흑암 속에서 구원을 받는다.
5)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내면이 바뀌고 언어가 달라진다
6)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반대의 영으로 인내하고 객관적으로 설명한다
7)정죄와 판단을 넘어서 마음으로 살인하고 있진 않는지 돌아 보아야 한다
8)성령 충만은 일상의 생활에서 거슬리는 한 마디도 받아 주고 혈기를 내려 놓는 것이다
9)내의 죄와 연약함을 고백하고 죄 사함을 받아야 한다
10)혈기의 아이콘 베드로는 주님을 수시로 부르면서 변했다
11)지금 내게 일어난 사건은 말씀의 성취다
12)잘될 때 회개의 사건으로 보고 겸비해야 한다
13)힘든 고난의 사건은 예수의 사건으로 보고 감사해야 한다
14)신비적은 현상을 환시, 환상, 환청이라고 의학적으로 폄하하는 사람은 아덴 사람이다
15)성령이 임한 사람은 그 어떤 일도 말씀의 성취라고 여기며 하나님을 찬양한다
16)삶의 한계를 인정 할 때가 말세의 때이다
17)택자에게는 심판의 때가 구원의 때다
18)환난과 고난의 때에 믿음과 의탁과 신뢰로써 주의 이름을 부를 때 구원의 날이 임한다
19)피와 불과 연기 속에 있어도 생명과 소망의 이름은 주님이다
20)성령 충만 하면 나의 내면과 언어가 바뀌고 미움과 분노의 말이라 아니라 사랑의 말로 하게 되고 내가 넘어가게 하시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삶에 대해 말하게 되고 조롱을 당하더라도 혈기로 맞서기보다 객관적으로 말해준다.
21)성령 충만은 신비적인 것이 아니라 말씀을 적용하기 위해 받아내는 것이 순교이고 죽어질 때 화평의 열매가 맺어지는 것이다.
22)성령의 강림은 말씀이 성취된 사건이었으며 지금 내 앞에 일어난 일은 말씀이 일어난 사건인데 믿음이 없으면 인간적인 일로만 여긴다
23)믿음이 없으면 예수님이 찾아오신 사건을 세속사의 사건으로 치부하고 말씀이 임한 사건을 예수를 모르는 사람은 ‘그건 재수가 좋아서 그런 거야 그건 운이 좋아서 그런 거야’라고 비웃는다.
24)그 일은 말씀이 임한 사건이고 말씀이 성취된 사건이다.
25)말씀의 사건으로 받아들인다면 교만 하거나 우쭐해 할 수가 없다.
26)회개 사건으로 받아들이고 겸비해야 하며 내가 원한 것과 거꾸로 나왔다고 해서 낙심하거나 절망할 필요가 없다.
27)그래서 붙으면 회개하고 떨어지면 감사인 것이다
28)말씀으로 내 삶을 해석하고 간증하다 보니까 사명의 지경이 넓어지게 된 것이다.
29)믿음이 없는 사람은 우연과 나만 열심히 높인다.
30)성령이 임한 사람에게는 말씀의 성취이기 때문에 하나님만을 높이고 찬양한다.
31)말세는 종말의 때인데 예수님께서 오신 때부터 다시 오실 때까지의 그 기간인 것이다
32)나에게 그 말세는 나의 한계를 인식할 때다
33)우린 저마다 자신이 경험하는 절대치의 고난이 있으며 이 고난을 겪을 때 나의 한계를 보게 되는데 자기의 이 인생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죽을 때까지 말세를 모르고 살아가게 된다.
34)우리는 내 인생의 이 말세의 때에 자아가 죽어지고 예수로 살게 되는 것이며 바로 그때에 하나님은 그분의 영을 우리의 육체에 부어 주신다.
35)그러면 말씀으로 인도함을 받게 되는데 자녀들은 예언을 하고 젊은 이들은 환상을 보고 늙은이들은 꿈을 꾼다고 하신다.
36)세상 경험이 없고 철이 없는 자녀들이 말씀으로 자기 삶을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37)우리 자녀들이 어릴 때부터 말씀을 듣다 보니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말하는 예언을 하는 것이다
38)성령이 임하시면 젊은이들은 환상을 본다고 하시는데 다른 말로 비전을 보게 되는 것이다
39)청년 시절의 특징은 눈에 보이는 것을 우상으로 삼고 자기 욕망과 쾌락을 추구하는 것인데 이들에게 성령이 임하시면 눈에 보이는 것을 쫓아 살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환상 비전을 보게 된다.
40)성령이 임하시면 젊은 이들도 자신이 가지고 있던 욕망과 세상적인 환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비전으로 바뀌어 변화된 삶을 사는 것이다
41)성령이 임하시면 늙은이들은 ‘꿈을 꾼다’라고 말씀하는데 과거만을 자꾸 회상하고 서운하고 아쉬운 것이 더해지는 그때 ‘꿈을 꾼다’라고 말씀하신다.
42)아브라함은 100세 이삭을 낳았고 모세는 80세에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광야를 다녔으며 갈렙은 85세에 아낙 자손과 싸우겠다면서 이 산지를 내게 달라고 말했다
43)이 우리들 공동체에도 실버와 골드 목장엔 이렇게 하나님께서 주신 꿈을 꾸고 이 사명을 감당하시는 집사님들이 참 많은데 나의 인간적인 꿈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그 꿈에 사로잡혀서 공동체와 이 공동체 안에서 믿음의 본이 되어 주신다.
44)날마다 한 말씀으로 모든 세대에게 역사하심으로 자기 삶을 성경으로 해석하고 복음을 전하는 증인이 되게 하시는데 그래서 성령은 말씀의 영이다
45)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해진다는 것은 말씀으로 충만해지는 것이고 말씀을 좆아 살아가는 인생이 되어 가는 것이다.
46)그 말씀은 우리의 모든 편견과 고정관념과 내 마음의 장벽을 깨뜨린다
47)나의 부족함과 나의 열등감과 결핍마저도 넘어서신다.
48)그래서 하나님께서 성령을 부어 주시면 이 땅에 자녀 문제와 젊은이 문제와 노인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다.
49)우리 가정 문제 또한 하나님께서 성령을 부어 주시면 해석이 되고 해결로 나아가게 될 줄로 믿는다
50)우리의 공동체 또한 하나님께서 주시는 예언과 환상과 꿈이 가득하게 될 줄로 믿는다.
51)하나님께서 하늘에서는 기사를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어 주신다.
52)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된다는 이 말은 심판으로 인해서 흑암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는 뜻이다
53)내가 우상으로 삼고 그렇게 의지하던 해달 별이 떨어지는 이 사건이 찾아오면 칠흑같이 아무것도 눈에 보이는 것이 없게 되고 더 이상 손 쓸 수 없는 그 밤이 찾아오지만 이런 심판의 때는 택자에게는 구원의 시간이기도 하다.
54)바로 그때가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이라고 말씀하신다.
55)예수님께서 부활하시기 전에 십자가를 지셨는데 이처럼 내 삶에도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는 때가 있는데 바로 그때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
56)아무것도 보이는 게 없고 내가 붙잡을 수 있는 것조차 없을 그 나의 절대치의 권한에서 주의 이름을 부를 때 주님을 만나게 된다
57)그래서 택자에겐 어떤 환난과 고통의 사건도 구원의 사건이 되는 것이다
58)도무지 내 눈앞에 아무것도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는 암담한 상황에서도 주의 이름을 부를 때 구원을 얻게 하시기 때문이다
59)지금 나에게 ‘해달별’이 떨어지고 아무것도 보이는 게 없다고 낙심하거나 절망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60)이제 곧 주의 크고 영예로운 날이 이르겠구나 이렇게 생각하면 되는 것이고그 자리에서 내가 해야 될 일이 있다면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61)여러분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주님에 대한 전적인 믿음과 의탁을 뜻하며 나의 구원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신뢰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62)내가 예배와 목장에 붙어가면서 이 말씀 듣는 이 구조 속에 거할 때 그 말씀이 나를 붙잡아 주실 것이며 흑암 중에 있는 나에게 찾아오셔서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
63)좋은 부모 나쁜 부모 할 것 없이 예수 믿게 해 주신 부모가 최고의 부모라는 이 말씀이 나팔 소리처럼 들렸다
64)내 열심과 자기 의로 충만하다 보니 세상 성공을 부르짖고 스펙을 부르짖고 힘과 권세와 명예만을 부르짖고 그저 인생의 목적이 잘 먹고 잘 사는 행복에만 꽂혀 있었는데 그런 저에게 주님은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는 사건으로 찾아오셨다.
65)그 어둠 속에서 기사와 징조를 베풀어 주셨고 바로 그것은 말씀이 있는 공동체를 만나게 하신 것이다.
66)매주마다 목사님께서 전해 주시는 이 구속사의 복음을 듣게 하심으로 내 삶이 해석되게 하신 것이다.
67)내 현재의 이유를 아는 것이 진정한 권능이라고 하셨는데 주님은 그 권능을 깨닫고 그 권능을 누리는 인생으로 견인해 가셨다.
68)오늘 내가 피와 불과 연기 속에 있을지라도 바로 이 날이 나에게 구원에 임하는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될 거라고 약속하신다
69)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는 사건이 찾아왔을 지라도 오직 내가 할 일은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라고 하신다
70)그 이름을 불러야 구원을 받게 되는데 그 어떤 것도 그 무엇도 나를 죄와 사망과 중독과 고통에서 구원해 줄 수 있는 것은 없다
71)예수 그리스도의 그 이름을 부를 때 나를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게 하신다
72)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에게 주시는 이 구원의 감격과 기쁨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천국의 기쁨 임을 믿는다
73)그래서 그리스도의 이름은 구원의 이름이며 생명의 이름이고 소망의 이름인 것이다.
74)우리가 평생에 사모하고 불러야 할 그 이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는 없다.
75)우리 각자가 내가 지금 어떤 상황과 형편에 있다 할지라도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회개로 나가기를 바란다
76)하나님께로 돌이킴으로 구원받는 역사가 나와 우리 가정 가운데 일어나길 바란다.
77)나뿐 아니라 내 곁에 있는 식구와 지체들에게도 그 예수님을 증거함으로 다 같이 주의 이름을 부르고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을 함께 경험하는 성령의 역사가 우리에게 임하길 간절히 소원한다.
5절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하니(When Silas and Timothy came from Macedonia, Paul devoted himself exclusively to preaching, testifying to the Jews that Jesus was the Christ)
6절 그들이 대적하여 비방하거늘 바울이 옷을 털면서 이르되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 하고(But when the Jews opposed Paul and became abusive, he shook out his clothes in protest and said to them, "Your blood be on your own heads! I am clear of my responsibility. From now on I will go to the Gentiles)
7절 거기서 옮겨 하나님을 경외하는 디도 유스도라 하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그 집은 회당 옆이라(Then Paul left the synagogue and went next door to the house of Titius Justus, a worshiper of God)
8절 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안과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많은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세례를 받더라(Crispus, the synagogue ruler, and his entire household believed in the Lord; and many of the Corinthians who heard him believed and were baptized)
9절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One night the Lord spoke to Paul in a vision: "Do not be afraid; keep on speaking, do not be silent)
10절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For I am with you, and no one is going to attack and harm you, because I have many people in this city)
11절 일 년 육 개월을 머물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니라(So Paul stayed for a year and a half, teaching them the word of God)
<Prologue>
백성은 문자 그대로 수많은 백 가지 성입니다. 나라에서 근본을 이루는 말이 백성인데 백성은 일본에서 촌놈이나 욕설로 비하해서 사용합니다. 성령의 백성은 수많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믿는 사람으로서 최고의 존칭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근본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안 믿는 쪽에서는 비하합니다. 권면을 받은 사람은 성령의 백성이 됩니다. 성령의 백성은 특별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 나라에 입성한 택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높고 낮음이 없이 천국 백성이 되면 무조건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내 백성 이야기를 오늘 가장 타락한 고린도에서 하십니다. 이곳에서 2차 전도 여행의 절반에 해당하는 1년 6개월을 체류하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성령의 백성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말씀 요약>
성령의 백성은,
1.주 안에서 보고 싶은 지체입니다.
5절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내려오매
바울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쫓겨 나듯 아덴(Athens)에서 떠난 것 같다. 떠나다는 몸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는 고통과 아픔이라는 뜻인데 그렇게 떠나 외로움과 실패 속에 자신과 같이 쫓겨 나듯 떠났던 같은 고난을 겪은 아굴라(Aquila)와 브리스 길라(Priscilla)부부를 만났고 성령의 권면을 할 수 있었다. 아굴라 부부는 후에 바울의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 내어놓았다고 표현을 한다. 최고의 충성된 지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바울이 아덴에서부터 기다리던 실라(Silas)와 디모데(Timothy)가 드디어 고린도(Corinth)에 도착한다. 바울에게 아주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실라와 디모데를 눈이 빠지게 기다렸는데 바울이 아덴에서 실패하고 안 좋은 소문이 자자했을 만큼 바울이 너무 실패한 것은 맞는데 얼마나 돈이 없으면 동역자도 없이 홀로 고린도로 와서 그냥 아굴라에게로 들어갔다고 했다. 아굴라가 온 게 아니고 바울이 생업(직장) 구하러 그들에게 갔다. 먹고 살아야 되니 사명 따위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보고 싶은 실라와 디모데가 고린도에 도착했다. 실라는 같이 매 맞고 감옥에 갇혔던 옥중동창생이다. 옥 터가 열려서 나왔다. 디모데서에 보면 디모데는 너무나 청결한 양심을 가졌고 네 눈물을 생각하여 (바울이) 쉬지 않고 너를 생각했다고, 죽기 전에도 보고 싶어 한 디모데이다. 데전 3장에 보면 그렇게 보고 싶은 실라와 디모데가 이미 아덴에 왔는데 바울은 늘 자신의 상황보다 늘 떠나왔던 교회 지체들을 생각했다. 그래서 빌립보와 데살로니가 교회의 교인들이 혹시 복음에서 멀어졌을까? 3주 밖에 없었는데.. 하면서 너무 염려했다. 그런데 데전 3:4에 “우리가 너희가 함께 있을 때에 장차 받을 환란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는데 과연 그렇게 된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 이러므로 나도 참다못하여 너희 믿음을 알기 위하여 그를 보내었노니 이는 혹 시험하는 자가 너희를 시험하여 우리 수고를 헛되게 할까 함이니“ 데살로니가(Thesalonica)에 3주 동안 있을 때 장차 받을 환란을 얘기했더니 과연 환란이 왔다. 그러니까 너무 참다못하여 보고 싶은 디모데가 왔는데 지금 고린도가 문제가 아니라 고린도에 오기 전에 아덴에 보낸 것이다. 같이 가자고 하지 않고 빨리 보냈다. 왜냐하면 시험 들어 우리 수고를 헛되게 할까봐. 그래서 실라는 빌립보로 보내고 데살로니가에는 디모데를 다시 파송해서 소식을 알고자 했다. 그런데 그 소식을 가지고 고린도로 온 것이다. 가지고 온 소식은 6절 지금은 디모데가 너희에게로부터 왔으니 믿음과 사랑의 기쁜 소식을 우리에게 전하고 또 너희가 항상 우리를 잘 생각하여 우리가 너희를 간절히 보고자함같이 너희도 우리를 간절히 보고자 한다 하니” 바울이 이 소식을 듣고 얼마나 기뻤겠는가? 7절 이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모든 궁핍과 환란가운데서 너희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위로를 받았노라. 먹을 것이 없어도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믿음이 굳건히 섰다고 하니까 너무 위로를 받았다는 것이다. 8절 “그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 성도들의 기쁨은 이런 것이다(온 천하에서 믿음이 자라는 것) 이들을 만나 전도하고 온 교회소식을 듣자마자 그 소식이 너무 반가우니까 만나자마자 바울이 힘을 내어서 5절 후반부에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를 그리스도라 밝히 말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실라와 디모데는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교회의 선교후원금을 가지고 왔다. 이전에는 텐트 메이커로 주말에만 사역을 하다가 후원금으로 사역에만 오롯이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디모데에게 들은 소식-데살로니가 전서 4~5장 그리스도의 재림과 관련해서 약간의 혼란이 생겼다는 소식을 들었다. 맨 처음 교회에는 살기가 힘드니 이단들이 판을 친다. 그래서 고린도에서 1년 6개월 머무는 동안에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했지만 멀리는 데살로니가 교회에도 편지를 써서 그들의 믿음을 양육하는 일을 병행했다. 바울과 실라, 디모데 그리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데살로니가 성도들, 빌립보 성도들 등등 모두 성령의 백성인데 이들이 바라보고 있는 것은 단 한 가지 구원이다. 함께 구원을 바라볼 공동체가 있으면 성령의 백성이고 보고 싶은 지체가 되는 줄 믿는다. 여러분들이 교회를 다녀도 “다 꼴 보기 싫어, 다 이상해” 하면 여러분들이 구원의 확신이 있는가를 생각해 봐야한다. 절대로 믿음이 좋은 사람은 누구를 욕할 수 없다.
(적용#1)
-보고싶은 지체가 있나요? 구원 때문 인가요? 이제는 살리라 내가 들었던 가장 기쁜 소식은 무엇인가요?
2.말씀을 붙잡히게 해줍니다(5절).
5.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하니
실라와 디모데의 격려로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할 수 있었다. 아덴에서는 눈치를 봤다. 이 “붙잡혀”는 슈네코라는 단어의 미완료 과거 수동태이다. 둘러싸임을 당하고 거대한 상황에 사로잡힌다는 뜻도 있지만 어떤 사람의 병이 그 사람을 통제하거나 억누르는 것을 묘사할 때나 커다란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상황을 묘사할 때도 쓰이는 단어이다. 그러니까 말씀에 붙잡히는 것은 억누름을 당하고 두려움을 동반하는 것이다.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가라는 말이 맞다. 몇몇 사본에는 하나님의 말씀 자리에 성령이란 의미의 프뉴마티가 기록되어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원래는 이게 맞지만 그만큼 바울이 성령에 붙잡혀 있었다는 뜻도 된다. 성령에 붙잡히고 말씀에 붙잡힌 것은 내가 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집중했다, 헌신했다’는 표현대신 왜 붙잡혔다는 말을 썼을까요? 그것은 우리 힘으로 하나님 말씀에 온전히 집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직 붙잡히는 것만 할 수 있다. 물론 우리가 말씀을 묵상하고 듣고 적용하는 일에 헌신하고 집중해야 되겠지만 그러나 답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야 한다.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그렇다. 부부관계에서 남편과 아내로서 최선을 다해서 섬겨야 된다. 그러나 아무리 열심히 섬겨도 우리 힘으로 상대방을 만족시킬 수는 없다. 하나님이 붙잡아 주셔야만 우리는 상대방에게 헌신할 수 있는 것이다. 내 힘으로 하려고 하면 절대로 안 된다. 그러니까 아덴에서와는 달리 바울은 말씀에 붙잡힌 능력으로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증거하지 않고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밝히 증언을 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나사렛 예수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이 증거가 가장 사람의 운명을 뒤바꾸는 증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말로만 “예수는 그리스도다.” 라고 십자가를 전하고 삶이 없으면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나사렛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는데 그 사람이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얘기를 말로만 전하면 하나님이 속지 않으시니까 두려운 일인 것이다. 처음에 은혜 받아서 모임을 인도했는데 사람들이 저에게 몰려오고 했을 때 ‘내가 지금 대접받아서 이 길을 가나? 사명 때문에 이 길을 가나?’ 끊임없이 저를 의심하게 되더라. 사람이 칭찬에 장사가 없다. 내가 말씀을 전했는데 그게 내가 칭찬받을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말씀에 붙잡혔기 때문에 이런 생각도 끊임없이 한 것이다. 내가 말씀을 붙잡은 것 같지만 전적으로 붙잡힌 것이다. 말씀이 나를 붙잡았다. 내가 붙잡혔으니까 날마다 나를 의심하면서 날마다 두렵고 떨림으로, 인정할 때마다 두렵고 떨림으로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면 안 되는 것이다. 이것이 말씀에 붙잡혔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지 내가 뭘 좀 한다고 생각했으면 금새 흘러 떠내려갔을 것이다. 계속적으로 그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바울을 붙잡으셨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힐 수 있나-말씀의 구조 안에 있어야. 한결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그 말씀을 듣고 순종할 수밖에 없는 그런 구조로 움직이고 살아가는 이 공동체 안에 거해야 한다. 목장에 참석하여 하나님께서 어떻게 지체들을 말씀으로 붙잡고 계신 지를 보고 들으며 내가 지금 이 상황에서 무슨 말씀을 어떻게 듣고 순종해야 하는지 지체들을 통해 주시는 권면을 받아들이는 것이 말씀의 구조 안에 있는 것이고 그것이 곧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있는 것이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들어가서 그 구조 속에 있어서 계속 붙잡혀서 남들이 나를 붙잡아 주어야 한다. 내가 붙잡을 수가 없는 것이다.
(적용#2)
-지체의 격려로 말씀에 붙잡힌 경우가 있습니까? 그 말씀이 십자가지라는 예수는 그리스도 입니까? ‘잘 될꺼야 ‘라는 위로였습니까?
3.대적과 비방도 받아내야 합니다.
6절 그들이 대적하여 비방하거늘 바울이 옷을 털면서 이르되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 하고
그러니까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싫어하는 사람이 대적 사단이라고 했다. 곧 그 말을 비방하기 시작한다. 비방은 명예를 훼손하고 욕을 하는 것이다. 인신공격을 한다. 살인자가 복음을 전한다고 뭐라고 한다. 체계적으로 저항하는 의미까지 있다. 반복적으로 사용함으로 어느 지역보다 치밀하고 강하게 핍박하고 협박했음을 보여준다. 악의적인 루머를 조직적을 유포하면 없는 죄도 만들어낸다.그래서 정권을 가지려고 발악을 한다. 최고의 인본적인 그거 아니겠나?고린도의 이 말을 듣는 이가 하나님께 돌아오겠다고 위협을 느꼈기에 발악을 하고 대적을 하는 것이다. 한 집사님이 양육을 받기 위해 지하철을 탔고 핸드폰을 보면서 탔는데 부딪혀서 액정이 깨졌다고 한다. 양육 안 받는다고 한다. 폰과 양육이 무슨 상관이 있나?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는 곳에서는 비방과 대적이 비일비재 하다. 왜 이렇게 말씀이신 예수님을 반대할까? 그들은 말씀에 붙잡히지 않았기 때문에 수동태가 안되기 때문이다. 능력이 있는 사람이 붙잡는다고 한다. 말씀이 들리는 구조 안으로 들어오기를 거부한다.
말씀이 들리는 구조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 완악 함이고 목장에 안 들어오는 것이다. 부자이고 잘난 사람이 구조 속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성령의 백성이 되기를 거부한다. 기다리고 기다려도 유대인들을 향해 옷을 털면서 말한다. 그들의 불순종은 그들 책임이라고 안디옥(Antioch)에서는 복음을 유대인들을 향해 신발의 먼지를 털었ek. 옷을 터 는 것은 강력한 표현이다. 말씀에 붙잡히니까 심판을 보일 수도 있는 것이다. 언제나 ‘네 네 네’ 하는 것이 아니라 때가 되면 옷을 털 수도 있어야 하는 것이다. 예수 믿는 사람은 자존감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성령의 백성은 이렇게 비방과 대적을 받을 때 대항하지 않고 그 상황을 피해야 한다. 반박을 할 때 또 다른 올무에 빠진다. 그러니까 우리는 반박을 할 때 또 다른 올무에 빠지고 나를 향한 훈련이 있는데 옷에 먼지를 턴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강박함으로 이 복음이 이방인에게도 전해진다는 의미다. 성경을 흑과 백으로 읽으시면 안 된다. 이거 어떻게 적용해야 할까? 강박함으로 나 같이 복음을 받지 못하는 나에게 복음이 이르렀구나. 인정할 때 우리는 유대인에게 돌아가야 합니다. 실제로 7절에 복음이 지금은 아니래도 옆집으로 갑니다.
7절 거기서 옮겨 하나님을 경외하는 디도 유스도라 하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그 집은 회당 옆이라
회당 옆으로 이사 갔다. 디도 유스도(Titius Justus)의 집으로 옮긴다. 로마 명문가 사람이다. 물리적으로는 회당 바로 옆 건물이다. 유대인의 회당은 복음을 대적하고 디도(Titius)는 복음을 받는다. 보기 싫어도 봐야 했다. 남편이 괴롭혀도 복음이 왔는데 남편과 아내를 봐야 하는 것이다. 말씀에 붙잡혀 있어야 하니까 세상이 흔들려도 흔들리지 않는다. 이것이 성령의 백성의 징표다. 성령의 백성으로 서있으니까 어떤 일이 일어나나? 이방인에게 왔던 복음이 유대인에게 갑니다.
8절 또 회당장 그리스보(Crispus)가 온 집안과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많은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세례를 받더라
이 말씀을 거부하는 유대인의 최고 대장 회당의 중심 회당장 그리스보(Crispus)와 온 가족이 예수님을 영접했다. 회당장은 회당에서 교회로 이사합니다. 몸만 아니라 복음과 은혜로 이사한다. 말씀에 순종하는 성령의 백성으로 들어가 보니 온 가족이 믿고 더 나아가서 고린도 사람이 믿었다는 것이다. 놀랍지 않나? 대적하고 비방하는 남편 부모 자녀 때문에 복음을 믿었다면 다시 내 옆집 결코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사람에게 가야 한다. 왜냐하면 좋은 부모 나쁜 부모가 없고 예수 믿게 하는 부모가 최고이고 저 유대인 때문에 예수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순서를 잘 보면 너무나 그 사람들이 대적하고 비방하니까 갔는데 다시 유대인에게로 전체 구속사의 순서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비방하는 회당의 유대인 때문에 이방인 디도에게 갔는데 믿었다면 그리스보에게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비방을 하는데 믿는 것이 얼마나 격려가 되었겠나? 인생이 해석된 유스도(Justus)의 집에서 고린도교회가 시작 되었다. 이렇게 쓰임 받는 것이다. 이 세상 삶을 끝내고자 세상으로 이사해야 하지 않나?. 우리는 죽음을 피할 수 없다. 모두가 영생의 이사를 해야 하는데 예수님께로 이사해야 한다. 말씀이 들리는 구조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이 말씀을 듣는 모든 분들이 성령의 백성이 되셔서 이사 하시기를 바란다. 적용하기 전에 말을 그쳐서는 안된다. 큰 역사가 일어나기 때문에 사단이 훼방한다. 역사가 크게 일어나는 목장일수록 목자님이 크게 훼방을 받고 있다. 그 목장이 은혜가 충만한 것이다. 늘 진짜 역사가 일어나려고 사단이 발악 하는 것이다.남편 아내 자녀를 통해 오는 것이다. 인간이 너무 악하고 음란해서 깨어있을 수 없다. 그래서 유스도(Justus)와 그리스보(Crispus)는 바울이 만나고 싶어 하는 인물로 로마서와 고린도전서에 기록되었고 바울에게 세례 받았던 인물로 기록이 된다.
(적용#3)
-대적하고 비방 받아서 멈추고 싶은 일은 무엇입니까? 그 대적이 변화된 일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어디로 이사 가고 싶으세요?
4.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9절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10절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11절 일 년 육 개월을 머물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니라
이제 디모데(Timothy)와 실라(Silas)를 만나고 유스도(Justus)와 그리스보(Crispus)를 만나 고린도 사람들(Corinthians)이 세례를 받았다. 대단한 것인데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바울을 휘감고 있다. 바울이 말 한마디를 하면 핍박과 고난과 대적이 지속되어서 그런 것 이다. 얼마나 떨리겠나?. 여러분 믿는 자는 회사에서 사회에서 너무 소수다. 그래서 동성애가 맞는다고 대답하는 것이다. 다 맞는다고 하는 것이다. 정말 자기 신념으로 군대 안 가는 것도 맞는다고 판결이 났다. 말하는 게 얼마나 두렵겠나? 사회나 직장에서 말 한마디 하는 것이 두렵다. 동성애가 죄라고 하면 소수의 사람은 아니라고 우리들교회에서 말한다. 저는 소수라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우리들교회 같은 곳도 소수다. 마음이 아프다. 그러니까 굳이 말 하지 않고 평화를 유지하려고 한다. 왜 바울이 두려워했는지 이해되나?
바울을 위로해 주신다. 내가 너와 함께하기 때문이다 너에게 해를 가할 자가 없다고 한다.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 말해야 할 일이 많다고 한다.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최악의 음란한 도시가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있는데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다고 하신다. 하나님의 교회가 있다는 것이 말도 안 들어갈 것 같은 고린도 같은 내 남편 아내 포기해야 할 것 같은 사람이 이 성중에 내 아내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이다. 제가 우연히 남편과 결혼한 것이 아니라 이 성중에 하나님의 백성이 우리들교회에 이렇게 많았다는 것이다. 나의 죄악과 수치를 자녀의 우상, 물질 우상을 도피한 그들에게 말하라는 것이다. 이걸 말하려고 하니 얼마나 떨리겠나? 자기의 죄를 말해야 하니 얼마나 무섭겠나? 내가 너와 함께하겠다 이곳에서 바울은 어느 도시와도 다르게 1년 넘게 있었다.
이제 아시아로 가고 싶은데 갈 길을 모를 때 벼랑 끝에서 성령의 환상 설교로 이렇게 위로해 주시는 것이다. 이러면 끝난 것이다. 아무도 너를 대적하지 않고
훼방할 자가 없다. 말씀을 듣지 않으면 두려워서 못한다. 말씀에 붙잡힌 자는 정말 영육 간에 두려움이 있다. 두려움이 다른 사람에게 전하게 하는 비결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음란한 이 사람들을 깨우면 그 문제 많은 고린도에 고린도교회가 세워지게 되는 것이다.
(적용#4)
-나는 성령의 백성으로 그 고린도의 죄악을 지적하고 있습니까?
-나의 연약함을 말합니까 두려워서 침묵하고 있는 말은 무엇입니까?
고린도교회가 우리들교회다. 우리는 성경 나오는 본문이 나올 때마다 계시록 하면 계시록 교회가 우리들교회다.
<Epilogue>
1)성령의 백성은 주안에서 보고 싶은 지체다.
2)성령의 백성은 말씀을 붙잡히게 해준다.
3)성령의 백성은 대적과 비방도 받아내야 한다.
4)성령의 백성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
5)우리가 말씀을 묵상하고 듣고 적용하는 일에 집중해야 되지만 답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야 한다
6)목적을 이루면 허탈감이 오게 되어 있다
7)하나님이 붙잡아 주지 않으시면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어 있다
8)말씀 듣는 구조 속으로 들어오지 못하는 것은 말씀에 대한 완악 함과 고집이다
9)대적과 비방에 반박을 할 때 또 다른 올무에 빠지게 되므로 옷을 털어야 한다
10)흔들리지 않는 것이 하나님 백성의 징표다
11)대적하고 비장하는 가족 때문에 내가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것이다
12)대적과 비방을 받아도 성령이 말씀을 그쳐서는 안된다
13)말씀에 붙잡힌 자는 영육간에 두려움이 남는데 그것이 말씀을 전하게 하는 비결이다
14)두렵고 떨림으로 말씀에 붙잡혀 있으면 죄 짓는 것과 멀어지게 된다
15)말씀에 붙잡힐 수 잇는 구조가 공동체다
16)공동체에 안 오는 것이 죄로 향하는 징표다
17)내 힘으로 안 되는 것이 미완료 과거 수동태다
18)죄가 많을수록 은혜가 많다
19)아덴 같은 사람이 완악하고 세상에서 제일 무섭다
20)고린도처럼 죄 많은 곳에 은혜가 많다
21)함께 구원을 바라볼 공동체가 있으면 성령의 백성이고 보고 싶은 지체가 되는 것이다
22)여러분들이 교회를 다녀도 “다 꼴 보기 싫어, 다 이상해” 하면 여러분들이 구원의 확신이 있는가를 생각해 봐야한다.
23)절대로 믿음이 좋은 사람은 누구를 욕할 수 없다.
24)말씀에 붙잡히는 것은 억누름을 당하고 두려움을 동반하는 것이다.
25)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가라는 말이 맞다.
26)우리가 말씀을 묵상하고 듣고 적용하는 일에 헌신하고 집중해야 되겠지만 그러나 답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야 한다.
27)아무리 열심히 섬겨도 우리 힘으로 상대방을 만족시킬 수는 없다.
28)하나님이 붙잡아 주셔야만 우리는 상대방에게 헌신할 수 있는 것이다.
29)내 힘으로 하려고 하면 절대로 안 된다.
30)십자가에서 죽으신 나사렛 예수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이 증거가 가장 사람의 운명을 뒤바꾸는 증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31)사람이 칭찬에 장사가 없다.
32)내가 말씀을 붙잡은 것 같지만 전적으로 붙잡힌 것이다.
33)말씀이 나를 붙잡았다. 내가 붙잡혔으니까 날마다 나를 의심하면서 날마다 두렵고 떨림으로, 인정할 때마다 두렵고 떨림으로 말씀에 잡혀가는 것이다
34)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면 안 되는 것이다.
35)이것이 말씀에 붙잡혔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지 내가 뭘 좀 한다고 생각했으면 금새 흘러 떠내려갔을 것이다.
36)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히려면 말씀의 구조 안에 있어야 가능하다
37)한결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그 말씀을 듣고 순종할 수밖에 없는 그런 구조로 움직이고 살아가는 이 공동체 안에 거해야 한다.
38)목장에 참석하여 하나님께서 어떻게 지체들을 말씀으로 붙잡고 계신 지를 보고 들으며 내가 지금 이 상황에서 무슨 말씀을 어떻게 듣고 순종해야 하는지 지체들을 통해 주시는 권면을 받아들이는 것이 말씀의 구조 안에 있는 것이고 그것이 곧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있는 것이다.
39)내가 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들어가서 그 구조 속에 있어서 계속 붙잡혀서 남들이 나를 붙잡아 주어야 한다. 내가 붙잡을 수가 없는 것이다.
40)악의적인 루머를 조직적을 유포하면 없는 죄도 만들어낸다.
41)구원의 역사가 일어나는 곳에서는 비방과 대적이 비일비재 하다.
42)말씀이신 예수님을 반대하는 사람은 말씀에 붙잡히지 않았기 때문에 수동태가 안되기 때문이다.
43)말씀이 들리는 구조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 완악 함이고 목장에 안 들어오는 것이다.
44)성령의 백성은 이렇게 비방과 대적을 받을 때 대항하지 않고 그 상황을 피해야 한다.
45)말씀에 붙잡혀 있어야 하니까 세상이 흔들려도 흔들리지 않는 것인데 이것이 성령의 백성의 징표다.
46)모두가 영생의 이사를 해야 하는데 예수님께로 이사해야 한다.
47)말씀이 들리는 구조 안으로 들어가야 하며 적용하기 전에 말을 그쳐서는 안된다.
48)큰 역사가 일어나기 때문에 사단이 훼방한다.
49)역사가 크게 일어나는 목장일수록 목자님이 크게 훼방을 받고 있는 것인데 그 목장이 은혜가 충만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