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교회 2020년 12월27일 주일예배 말씀 요약(사도행전 14: 19~ 28절/ 성령의 완수)]
<사도행전 14:19~28>
19절: 유대인들이 안디옥(Antioch)과 이고니온(Iconium)에서 와서 무리를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
20절: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그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Derbe)로 가서
21절: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Lystra)와 이고니온(Iconium)과 안디옥(Antioch)으로 돌아가서
22절: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strengthening the disciples and encouraging them to remain true to the faith. "We must go through many hardships to enter the kingdom of God,") 하고
23절: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 하며(with prayer and fasting) 그들이 믿는 주께 그들을 위탁하고
24절: 비시디아(Pisidia) 가운데로 지나서 밤빌리아(Pamphylia)에 이르러
25절: 말씀을 버가(Perga)에서 전하고 앗달리아(Attalia)로 내려가서
26절: 거기서 배 타고 안디옥(Antioch)에 이르니 이 곳은 두 사도가 이룬 그 일을 위하여 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던 곳이라
27절: 그들이 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opened the door of faith to the Gentiles)을 보고하고
28절: 제자들과 함께 오래 있으니라
<Prologue>
이 세상의 업적이나 성취는 영원히 목마르기에 목표를 정해도 늘 목이 마르다. 그러나
오늘 1차 전도여행을 마치는데 오늘 본문 26절에 이 일을 두 사도가 이룬 일이라고 한다(완수했다). 성령의 제자는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완수했다고 한다.
여전히 이루어가야 할 성령의 완수를 생각해보자
<말씀 요약>
1. 기막힌 시기와 배신을 감당하는
것이다.(19절)
19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
(유대인들이) 루스드라(Lystra) 백성을
충동하기 위해 왔다고 한다. 충동은 설득이라는 뜻이다. 폭도로
돌변하게 했다. 유대인의 기막힌 시기이고 루스드라의 기막힌 배신이다.
루스드라에 유대인의 회당이 없었고 바울과 바나바는 자신들을 섬기겠다는 것을 헛된 일이라고 하고 창조주 주관자이신 하나님만 섬기라고
했다. 그래서 바울을 유대인의 법대로 죽이기도 어려웠다. 그들은
우상숭배자들이었기에 바울과 바나바를 우상처럼 섬기려고 했다. 그 기저에는 기복이 꽉 차있는 것이다. 그런데 바울복음을 듣고 하나님을 섬긴다면 그 당시 구브로(Cyprus) 섬에서
봤지만 서기오(Sergio) 총독을 섬기던 엘루마 점쟁이처럼, 돈으로
성령의 능력을 사려고 했던 시몬처럼 점을 쳐주고 우상숭배로 벌어들이는 헌금이나 제물 판매 등으로 살아가는 그들에게는 너희들 이제 망한다고 했을
것이다. 항상 설득하는 끝에는 돈이 있다. 이 세상은 악하고 음란하기 때문에 이런 나의 이권과 정욕에 눈이 멀면 살려 두지를 않는다. 그래서 이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달콤한 말을 해도 사람은
전적으로 부패했기 때문에 이해타산이 걸리면 폭도로 변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세상 정치가 다 마찬가지다. 당장 목구멍이 포도청이어도 배반을 하고 다른 여자가 눈에 들어와도 다 폭도가 된다.
사단의 이런 못된 열심으로 끊임없이 밀 까부르듯 하면서 우리를 주의 제자가 되지 못하게 흔든다. 시기와
박해가 이렇게 모습을 달리해서 끝없이 온다는 것이 믿어지나? 우리가 비시디안 안디옥(Pisidian Antioch) 들어와서만 해도 시기와 반박과 비방과 악감과 돌로 침에서 이제 배신과 돌로 죽임까지의
끊임없는 모습이 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일을 주님은 당하지 않게 하실 수 있다. 또 돌에 맞지 않게 하실 수도 있다. 그러나 다윗이 열다섯 광야를
지나게 하신 것처럼 바울에게도 한 광야, 한 광야를 건너게 하시는 것이다. 아주 정말 지독한 시기를 당하게 하시는 것이다. 그것도 같은 부류, 같은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 가운데서 늘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우리기 미리 예방주사를 맞고 가면 그것이 성령의
완수이다. 정말 신앙은 버티는 것이 실력이다.
말이 안 되는 사람이 집집마다, 회사마다 또 교회마다 있다. 그러니까 시기와 배신이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면 바로 오늘을
잘 살게 된다. 그것이 성령의 완수이다. 그래서 ‘하루하루 살아요’는 언제나 정답이다.
(적용#1)
-은혜를 입고도 하루아침에 배신한 적이 있나? 은혜를
끼치고도 하루아침에 배신당한 적이 있나?
2. (지독한 시기와 배신에) 회개하며 털고 일어나는 것이다.(19~20절)
20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그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Barnabas)와 함께 더베(Derbe)로 가서
루스드라(Lystra)에도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인이 된 제자들이 이미 생겼다. 아마
디모데(Timothy)도 이 제자들 중에 있었을 것인데 이들이 바울이 돌에 맞고 성 밖으로 끌려갔다는
소식을 듣고 황급히 모인 듯하다. 그런데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바울을 둘러 서 있었을 텐데 이것처럼 우리가
너무 사랑하는 바울을 보고도 우리는 이 땅에서 어찌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 많다. 제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 그냥 둘러 서 있는 것이다. 여러분이라면
이러한 상황에서 다시 그 성으로 들어갈 마음이 생기겠는가? 일어나서 그 길을 계속 가겠는가? 바울의 생각과 느낌과 허탈과 허무가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것이다. 바로
그 상황에서 하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 하시는가 이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우리는 다 자기의 느낌만 있다. 다 자기의 아픔만 있는 것이다. 그러니 조금만 좌절을 겪어도 그냥 사명의 길을 다 포기한다. 일어서기를 거부한다. 그런데 왕상 19:7 너무 기진한 엘리야에게 일어나서
먹으라 네가 길을 이기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 이 사랑의 음성을 사도바울은 들은 것이다. 말씀의 능력을
힘입은 것이다. 그러므로 일어났다. 자기의 길을 갔다. 이렇게 우리는 일곱 번 넘어지면 여덟 번 일어서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제 죽은 것 같은 바울이 (그들은 바울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버렸다.
즉 죽을 때까지 때렸다) 바울을 열광하던 루스드라 무리들이 바울이 죽었다고 생각할 때까지
때린 것이다. 그 바울이 기적적으로 다시 일어난다. 그리고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더베(Derbe)를 향해 루스드라(Lystra)를
나갔다. 돌로 쳐도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나가면 된다. 티끌을
털어버리고 나를 욕하고 때려죽인 그 루스드라(Lystra) 성으로 다시 들어가서 하룻밤을 보내고 이튿날
다음 목적지 더베(Derbe)를 향해 떠나는 것이다. 더베(Derbe)에 도착했다는 것이 아니라 더베(Derbe)를 향해 루스드라(Lystra)로 나아갔다는 것이다. 이렇게 돌로 쳐도 우리는 아무
일 없던 듯이 툴툴 털고 나아가면 되는 것이다. 티끌을 떨어버리고 떠나면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 성에 다시 한 번 들어갔다는 것, 이것이 너무 중요하다. 더베(Derbe)는 루스드라(Lystra)에서
동쪽으로 약 100km 떨어진 도시인데 글라우디오(Claudius) 황제
때 이 지역을 완전히 로마화하면서 글라우디오 더베(Claudius Derbe)라고 불리우는 1차 전도여행에 마지막 방문지가 된다. 그럼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바울은 늘 위대해서 툴툴 털고 일어나나?” 구속사가 뭐냐고 날마다 물어보시는데 구속사는 항상 툴툴 털고 일어났을 때 그게 내가 잘나서 일어나는 게 아니라 항상 하나님께서 하셨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하셨냐? 이것을 찾는 것이 구속사이다. 내가 한 게 아무것도 없는데 자꾸 자기가 했다고 착각한다.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 얘기도
다 공허하고 추상적이다. 구체적으로 왜 하나님께서 하셨나? 이것을
찾는 것이다. 그들이 기절한 바울을 성 밖으로 끌어 내치는데 이 단어는 바울이 성도들을
끌어낸 장면에서 쓴 단어와 같기도 한 것이다. 바울이 스테반(Stephen)이
성 밖으로 쫓겨난 일을 생각했을 것이고 이고니온(Iconium)에서 돌에 맞은 일은 스테반이 돌에 맞은
일을 생각했을 것이고 또 기절하여 성 밖으로 질질 내쳐진 일은 성도들이 바울에 의해서 각자의 집에서 질질 끌려 체포된 일을 생각했다는 것을 상기시켜주었을
것이다. 실제로 바울은 스테반을 돌로 치는 일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스테반이 그 때에 죽어가면서 성령의 얼굴로 순교한 것을 바울은 생생하게 기억했다. 돌로
칠 때, 죽어가면서 성령의 얼굴로 ‘저들에게 죄를 돌리지
말고…’ 사람은 보여주는 게 참 중요하다. 요즘에는 이 세상
드라마도 계속 정신과적인 재료를 다루어서 ‘사이코지만 괜찮아’라는
드라마가 있었다. 자기가 아픔이 있으니까 아픔이 있는 사람을 돕는 것이다. 실제 삶에서 사이코 같은 식구들을 대하며 때마다 툴툴 털며 일어나는 것은 너무 어렵다. 거의 80%의 질환자가 있다는 얘기도 들었는데 이럴 때마다 어떻게
툴툴 털겠는가? 우리가 보이는 것 때문에 열광하면 안 보이면
통곡을 한다. 병이 안 나도 통곡을 하고. 나으면 열광을
하고. 예수님을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라고 열광을 했던 무리들이 바로 1주일 후에 십자가에 못 박으라 외쳤기 때문에 아무리 교회를 다녀도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다. 그래서 쓸데없는 열광과 비난에 초월해야 된다. 이것이 성령의 완수이다. 우리의 주기도문은 눈물과 통곡으로 기도해야 하는 내용이지 박수 치며, 소리
지르며 하는 기도 내용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소경처럼 무시하고 낮은 환경이라고 모두가
꾸짖을 때는 이때는 모두가 듣게 소리소리 지르면서 “불쌍히 여기소서!” 하며 이럴 때는 주께서 들으시는
기도인 것이다. 내가 기뻐하면서 소리 지를 내용은 전도이고
제자 양육이고 삶의 변화인 것이다. 내가 슬퍼해야 할 기도 내용도 전도가 안 돼서, 제자 양육이 안 돼서, 삶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아서 슬퍼해야 되는 것이다. 그런데 늘 기복적인 것으로 열광하며
소리 지르면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이렇게 그냥 단 시간에 배신을 한다. 바울은 쓸데없는
열광에 옷을 찢으며 패스했기 때문에 돌로 치는 배반에도 훌훌 털고 떠날 수 있다. 이게 바로 구속사인
것이다. 날마다 예수 믿고 되는 게 구속사가 아니고 전도를
하고 정착을 하고 성화를 위해서 이것이 필요한 것이다. 이것이 성령의 완수이다.
(적용#2)
-여러분은 배반당해서 지금 죽어 있는가? 자기 죄를
보고 훌훌 털고 일어났는가?
3. 제자를 키우는 것이다.(21절)
21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더베(Derbe)에서의 사역이 자세히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거기에서도 예수님의 제자가 세워졌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제자를 키워야 하는 이유는 (지도를 보고) 바울이 루스드라(Lystra)에서 더베(Derbe)까지 왔다. 그런데 더베는 그 사역이 자세하지는 않았지만
제자가 키워졌다고 했다. 그런데 더베에서 바로 옆에 다소(바울의
고향), 조금 오른쪽으로 가면 출발지였던 수리아 안디옥이 있다. 오른테스
강 옆에 실루기아 옆에 안디옥이 있다. 그러니까 조금만 가면 안디옥인데 그 편한 길, 고향의 쉴 수 있는 길을 다 마다하고 다시 더베에서 루스드라로 이고니온(Iconium)으로
안디옥(Antioch)으로 내려와서 버가(Perga)에서
아딸리아(Attalia)로 구브로(Cyprus)는 안 지나서
다시 안디옥으로 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렇게 왔던 길을 따라 돌아간다. 돌에 맞아 죽을 뻔했던 루스드라 또 자신을 죽이려고 계획을 세웠던 이고니온,
자신을 추방했던 안디옥으로 지금 다시 돌아가는 것이다. 왜? 그 곳에 방금 믿기 시작한 제자들이 있기 때문인 것이다. 성도의
인생의 목적은 편한 것이 아니다. 자기가 당한 사건에 갇혀 있다면 가지 못할 곳을 바울은 주께로 돌아온
한 영혼이 너무 귀하기에 갈 수가 있었던 것이다. 항상 성령의 완수를 생각할 수 있었기에 때려도, 죽여도, 악감을 가지고 있어도 제자가 생겼기에 둘려보려고 그 위험한
곳을 가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못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태도를 세상은 용인하지 않는다. 반드시
박해한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경건에서 벗어나도록 유혹으로 낙심으로 계속 공작을 한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예수 믿기로 작정을 했다가도 루스드라 무리들처럼 하루 만에 포기하고 며칠 만에 포기하고
세상으로 돌아선다. 사단의 농간이 있다. 그러므로 초신자의
정착은 교회의 작은 일이 아니다. 교회의 몫이라고
아무도 관심없이 방치하면 안 된다. 어떤 초신자도 해산과 양육 의 수고 없이는 절대로 교회에 정착하지
못한다. 부흥하는 교회는 새신자가 정착하는 비율이 높은 교회이다. 늘
돌봐야 되는 것이다. 그게 우리 교회의 부흥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부흥을 위해서이다.
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말씀으로 그들을 무장시키는
바울이다. 제자들에게 다가올 미래는 단기적으로는 성공보다는 환란이기 때문이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지만 악하고
음란한 이 땅에서 구원의 여정을 가고 있는 우리에게는 당연히 많은 환란이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복음은 장차 받을 환란이다.
환란은 짓눌림을
당하는 듯한 압박이나 옥죄는 듯한 고통을 말한다. 환란을 비교해도 안 되고 각자의 환란가운데 우리가
할 일은 환란을 통과하여 목적지인 하나님나라에 가는 것이다. 환란을 잘 통과하려면 믿음에 머물러 있을
수 있도록 제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제자를 키워내야 이 땅에서 성령의 완수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적용#3)
-여러분의 환란으로 한 사람이라도 전도를 했나? 제자가
키워졌나? 아직도 환란만 바라보고 있나?
4. 교회를 세워야 한다.(23절)
23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 하며 그들이 믿는 주께 그들을 위탁하고
교회를 이끌고 갈 지도자들을 세우기 위해서 바울이 다시 한 번 순회를 했다. 장로들을 택했다. 장차 있을 환란 가운데 질서 있게 교회가 유지되려면 지도자가 있어야
된다. 장로의 기본적인 역할은 분별과 결정이다. 성품이나
스펙이 아닌 믿음(자체)을 보고 그들을 위탁했다. 믿음을 볼 수 있는 지도자가 최고의 지도자이다. 내 생각을 버리고
말씀대로 순종하고 결정하는 태도이다. 지도자의 독단은 스스로를 소외시키는 지혜 없는 행동이다.
24 비시디아 가운데로 지나서 밤빌리아에 이르러 25 말씀을 버가에서 전하고 앗달리아로
내려가서 26 거기서 배 타고 안디옥에 이르니 이 곳은 두 사도가 이룬 그 일을 위하여 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던 곳이라
자기 의와 열심으로 한다면 처음과 끝이 같을 수 없다. 주께서
맡기신 사명대로, 말씀대로 감당했기 때문이다. 나는 할 수
없다는 고백이 날마다 있어야 성취가 아닌 순종을 할 수 있다. 그 순종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길이다.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가 맡긴 선교를 완수했지만 이 완수는 그들이 스스로 이룬 성취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말씀을 채운 순종이다. 갈 때도 올 때도 대사도
바울을 계속 지나치게 하는 앗달리아 같은 사람도 이 땅에 있다.
27 그들이 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보고하고
비록 이방 세계의 전도의 문은 열렸지만 얼마나 많은 환란을 겪었다. 그런데 핍박의 보고만을 말하는 게 아니고 믿음의 문을 여셨다고 보고했는데 왜냐하면 지나고 나서 보니 이방 선교의 많은 환란은 하나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나님이 활짝 여셨기 때문에 한 번 열린 이방인의 문은 누구도 닫을 수가 없다. 믿음의 보고, 선교의 보고는 말씀과 믿음에 근거해서 보고를 해야 한다. 모든 공을 하나님이 함께 하셨다고 하나님께 돌리고 입으로만 영광을 돌리면 안 되기 때문에 보고를 할 때 끝없는 자기 자랑과 동정의 보고는 경계를 해야 한다. 바울과 바나바는 그 수많은 공로와 수고 앞에서 자신들의 초심을 잃지 않았다. 그들과 함께 행하신 모든 일은 신인협력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우리의 생각과 의지와 감정과 성품과 재능과 환경 등 모든 것을 받아 주셨지만 그러나 허물과 약점에도 불구하고 우리와 함께 일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바울의 허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함께 행하셨다고 진심으로 고백한 것이다. 구원의 사명은 한 마디로 100% 하나님의 일인 동시에 100% 우리의 일이다. 성령님은 우리를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동역하시기 때문에 이것이 성령의 동역이고 그래서 성령의 행전이 사도행전이 된 것이다. 그래서 나타난 열매는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신 것이다.
28 제자들과 함께 오래 있으니라
이방의 땅끝 선교나 모 교회에서나
제자의 삶은 차이가 없음을 보여준다.
사도행전 14:3 “오래 있어(디아트리보)”: 내 몸으로 사명의
자리를 반짝반짝 윤이 나도록 비비고 닳도록 문지르듯이 수고하는 삶이 제자의 삶이다. 그런데
똑같은 단어 “오래 있어”의 시제가 이고니온 14:3에서는 부정 과거이고 여기 수리아 안디옥에서는 미완료이다. 오래 있어도 이고니온은 떠나야할 사역지 교회이고 수리아 안디옥 교회는 영원한 본향 모교회라는 것이다. 성도는 보이지 않는 영원한 교회에 영원히 속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불러주신 가시적 교회에 잘 붙어있어야 각자의 사명지에서 잘 머물 수 있다. 고난 없이 잘 지내는 삶이
아니라 주시는 말씀을 듣고 공동체 안에 잘 붙어있으면 각자의 사명지에서도 잘 머물 수 있다. 사명지는
때마다 바뀔 수 있다. 그럴 때 영원한 이방인 같은 내게 맡기신 땅 끝 같은 가족과 이웃에게 믿음의
문이 열리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교회를 세우는 일이고 성령의 완수가 되는 것이다.
<Epilogue>
1) 이 세상의 업적이나 성취는 영원히 목마르기에 목표를 정해도 늘 목이 마르다.
2) 항상 설득하는 끝에는 돈이 있다.
3) 이 세상은 악하고 음란하기 때문에 이런 나의 이권과 정욕에 눈이 멀면 살려 두지를 않는다.
4) 이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달콤한 말을 해도 사람은 전적으로 부패했기 때문에 이해타산이 걸리면 폭도로 변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5) 이 세상 정치도 다 마찬가지다. 당장 목구멍이 포도청이어도 배반을 하고 다른 여자가 눈에 들어와도 다 폭도가 된다.
6) 사단의 이런 못된 열심으로 끊임없이 밀 까부르듯 하면서 우리를 주의 제자가 되지 못하게 흔든다.
7) 시기와 박해가 이렇게 모습을 달리해서 끝없이 온다는 것이 믿어지나?
8) 다윗이 열다섯 광야를 지나게 하신 것처럼 바울에게도 한 광야, 한 광야를 건너게 하시는 것이다.
9) 아주 정말 지독한 시기를 당하게 하시는 것이다.
10) 그것도 같은 부류, 같은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 가운데서 늘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우리기 미리 예방주사를 맞고 가면 그것이 성령의 완수이다.
11) 정말 신앙은 버티는 것이 실력이다.
12) 시기와 배신이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면 바로 오늘을 잘 살게 되는데 그것이 성령의 완수이며 그래서 ‘하루하루 살아요’는 언제나 정답이다.
13) 조금만 좌절을 겪어도 그냥 사명의 길을 다 포기하고 일어서기를 거부한다
14) 구속사는 항상 툴툴 털고 일어났을 때 그게 내가 잘나서 일어나는 게 아니라 항상 하나님께서 하셨다는 것인데 왜 하나님께서 하셨냐? 이것을 찾는 것이 구속사이다.
15) 내가 한 게 아무것도 없는데 자꾸 자기가 했다고 착각하게 되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 것인데 그 얘기도 다 공허하고 추상적이다.
16) 구체적으로 왜 하나님께서 하셨나? 이것을 찾는 것이다.
17) 우리가 보이는 것 때문에 열광하면 안 보이면 통곡을 한다.
18) 병이 안 나도 통곡을 하게 되고 나으면 열광을 하게 된다
19) 아무리 교회를 다녀도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다.
20) 그래서 쓸데없는 열광과 비난에 초월해야 되는데 이것이 성령의 완수이다.
21) 우리의 주기도문은 눈물과 통곡으로 기도해야 하는 내용이지 박수 치며, 소리 지르며 하는 기도 내용은 아니라는 것이다.
22) 내가 기뻐하면서 소리 지를 내용은 전도이고 제자 양육이고 삶의 변화인 것이다.
23) 내가 슬퍼해야 할 기도 내용도 전도가 안 돼서, 제자 양육이 안 돼서, 삶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아서 슬퍼해야 되는 것이다. 그런데 늘 기복적인 것으로 열광하며 소리 지르면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이렇게 그냥 단 시간에 배신을 한다.
24) 바울은 쓸데없는 열광에 옷을 찢으며 패스했기 때문에 돌로 치는 배반에도 훌훌 털고 떠날 수 있는 것인데 이게 바로 구속사인 것이다.
25) 날마다 예수 믿고 되는 게 구속사가 아니고 전도를 하고 정착을 하고 성화를 위해서 필요한 것인데 이것이 성령의 완수이다.
26)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태도를 세상은 용인하지 않고 반드시 박해하는데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경건에서 벗어나도록 유혹으로 낙심하도록 계속 공작을 한다.
27) 그래서 많은 이들이 예수 믿기로 작정을 했다가도 루스드라(Lystra) 무리들처럼 하루 만에 포기하고 며칠 만에 포기하고 세상으로 돌아선다.
28) 사단의 농간이 있음으로 초신자의 정착은 교회의 작은 일이 아니다.
29) 교회의 몫이라고 아무도 관심없이 방치하면 안 되는 것이며 어떤 초신자도 해산과 양육의 수고 없이는 절대로 교회에 정착하지 못한다.
30) 부흥하는 교회는 새신자가 정착하는 비율이 높은 교회이다.
31) 초신자는 늘 돌봐야 되는 것이며 그것은 우리 교회의 부흥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부흥을 위해서이다.
32)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지만 악하고 음란한 이 땅에서 구원의 여정을 가고 있는 우리에게는 당연히 많은 환란이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복음은 장차 받을 환란이다.
33) 환란은 짓눌림을 당하는 듯한 압박이나 옥죄는 듯한 고통을 말하는데 환란은 비교해도 안 되고 각자의 환란 가운데 우리가 할 일은 환란을 통과하여 목적지인 하나님나라에 가는 것이다.
34) 환란을 잘 통과하려면 믿음에 머물러 있을 수 있도록 제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며 제자를 키워내야 이 땅에서 성령의 완수를 할 수 있는 것이다.
35) 장차 있을 환란 가운데 질서 있게 교회가 유지되려면 지도자가 있어야 된다.
36) 지도자인 장로의 기본적인 역할은 분별과 결정이다.
37) 성품이나 스펙이 아닌 믿음(자체)을 보고 장로들을 위탁했다.
38) 믿음을 볼 수 있는 지도자가 최고의 지도자이다.
39) 내 생각을 버리고 말씀대로 순종하고 결정하는 태도를 말하는데 지도자의 독단은 스스로를 소외시키는 지혜 없는 행동이다.
40) 자기 의와 열심으로 한다면 처음과 끝이 같을 수 없다.
41) 주께서 맡기신 사명대로, 말씀대로 감당했기 때문에 나는 할 수 없다는 고백이 날마다 있어야 성취가 아닌 순종을 할 수 있다.
42) 그 순종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길이며 하나님이 활짝 여셨기 때문에 한 번 열린 이방인의 문은 누구도 닫을 수가 없다.
43) 믿음의 보고, 선교의 보고는 말씀과 믿음에 근거해서 보고를 해야 한다.
44) 모든 공을 하나님이 함께 하셨다고 하나님께 돌리고 입으로만 영광을 돌리면 안 되기 때문에 보고를 할 때 끝없는 자기 자랑과 동정의 보고는 경계를 해야 한다.
45) 구원의 사명은 한 마디로 100% 하나님의 일인 동시에 100% 우리의 일이다.
46) 성령님은 우리를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동역하시기 때문에 이것이 성령의 동역이고 그래서 성령의 행전이 사도행전이 된 것으로 나타난 열매는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신 것이다.
47) 내 몸으로 사명의 자리를 반짝반짝 윤이 나도록 비비고 닳도록 문지르듯이 수고하는 삶이 제자의 삶이다.
48) 성도는 보이지 않는 영원한 교회에 영원히 속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불러주신 가시적 교회에 잘 붙어있어야 각자의 사명지에서 잘 머물 수 있다.
49) 고난 없이 잘 지내는 삶이 아니라 주시는 말씀을 듣고 공동체 안에 잘 붙어있으면 각자의 사명지에서도 잘 머물 수 있다.
50) 사명지는 때마다 바뀔 수 있는 것인데 그럴 때 영원한 이방인 같은 내게 맡기신 땅 끝 같은 가족과 이웃에게 믿음의 문이 열리는 것이다.
51) 바로 이것이 교회를 세우는 일이고 성령의 완수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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