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교회 2021년 1월17일 주일예배 말씀 요약(사도행전 15: 12~ 18/ 성령의 돌보심)]
<사도행전 15:12~18>
12온 무리(the whole assembly)가 가만히 있어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께서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among the Gentiles through them) 행하신 표적과 기사(miraculous signs and wonders)에 관하여 말하는 것을 듣더니
13 말을 마치매 야고보(James)가 대답하여 이르되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
14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그들을 돌보신 것을 시므온(Simon)이 말하였으니
15 선지자들의 말씀(the words of the prophets)이 이와 일치하도다(are in agreement) with this) 기록된 바
16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rebuild David’s fallen tent) 또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restore it)
17 이는 그 남은 사람들(the remnant of men)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18 즉 예로부터(for ages0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
<Prologue>
새해 첫 목장 예배는 어떠셨나요? 이제 온라인 목장이 좀 익숙해 지셨죠? 그런데 아직도 이제 카톡으로 간소하게 목장 하는 곳이 있다고 하는데 모두 zoom으로 얼굴 보면서 목장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하는 것은 카톡과는 너무 다릅니다. 익숙해 지셨을 테니 zoom으로 목장을 하시고 얼굴을 본다는 것 자체가 여러분들에게 힐링이 되는 겁니다. 코로나가 끝나면 목장 간다는 생각 버리시고 도움을 받아 온라인으로 목장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구원의 확신이 있다면 핑계 되시면 안됩니다. 목장 보고서 빠지지 마시고 잘 올려주세요. 정말 이에요. 작년에 아주 이렇게 허접한 목장이 많이 있었어요…그건 하나님께 불충한 거라고 생각됩니다.
하나님 우리는 돌보심 말만 들어도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주님 오늘 올해 평생에 돌보심을 받기를 원하는 우리들에게 오늘 성령의 돌보심의 말씀을 듣기 원합니다. 말씀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삼위일체 하나님도 우리 구원을 위해서 의논을 하셨겠죠 무엇을 하셨을까요 역할 대로 돌보셨겠죠 돌봄 받는 사람을 느끼기를 원합니다. 돌보심의 뜻은 슬픔이나 어려움을 겪는 사람을 위로하고 방문하는 것을 말합니다. 돌봄을 말하고 하는 사람은 정말 다른 사람들을 잘 돌보게 됩니다. 목자들이 잘 돌보면 다음에 목자가 되었을 때 롤 모델이 됩니다. 오늘은 성령의 돌보심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말씀 요약>
성령의 돌보심은,
1. 눈높이를 맞추는 것입니다.
12절 온 무리가 가만히 있어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께서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에 관하여 말하는 것을 듣더니
우리 지난주 베드로의 그런 형제 의식에 관한 장렬한 변론은 온 무리를 침묵에 빠드릴 정도로 확신 있을 정도였기 때문에 모두가 입을 다물었어요 사도들은 바나바와 바울에게 발언할 기회를 주었어요. 처음 보고했을 때는 바리새인이 일어나서 분노 했잖아요 두번째 보고에서는 이방인에게 행하신 표적과 기사(miraculous signs and wonders)에 대해 말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왜 콕 집어서 말 했을까요? 믿음이 연약한 유대인들은 표적과 기사를 좋아하기 때문에 눈높이에 맞춘 것이죠. 예수께서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않으면 믿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본다고 해서 잘 믿는 것도 아니에요 표적과 기사가 있으니 그 정도로 믿는 거죠.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는다고 했습니다. 유대인은 이처럼 눈에 보이는 표적과 기사를 좋아했어요. 남의 이야기가 아니죠 우리도 짠하고 나타나는 기적이 좋습니다. 유대인은 앉은뱅이가 일어나도 표적과 기사에 열광하겠지만 진짜 표적은 십자가 이지요. 그러니까 비시디아 안디옥(Pisidian Andioch)에서 유대인의 박해로 쫓겨났고 루스드라(Lystra)에서는 앉은뱅이를 일으켜도 복음이 전해진 것 아니겠습니까? 곳곳에 죽이려는 유대인이 있었지만 루스드라 이고니아 안디옥을 돌아온 선교 보고 그것 자체가 표적과 기사가 아니었겠습니까? 이것이 표적인 것이죠. 그런데 지금 이제 유대인들에게는 기복적 관점으로 보고를 했지만 사도들에게는 팔복의 관점으로 균형 있게 보고를 하게 됩니다.
이 대단한 보고도 타이밍이 중요합니다. 예루살렘의 공회(Synagogue)는 성령의 조직이 맞습니다. 의롭게 된다는 정통 교리에 가장 강력한 주창자의 주인공은 바울입니다. 바울은 공회에서 조용한 거예요 증인의 역할만 했어요. 그것은 공회를 예루살렘 지도자들의 몫이라고 생각했어요. 주된 증인의 역할을 바나바에게 양보했어요. 바나바와 바울이 표기된 것이 보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바울이 기피 대상이었고 바나바는 밭을 팔아 주었던 인기 스타입니다. 이걸 이제 간과하면 안 되죠. 그래서 바나바와 사울이라고 칭하며 그때는 바나바가 리더였어요 선교여행을 시작하니 바울의 탁월한 복음 실력이 그냥 저절로 13장의 안디옥교회가 파송했는데 13절에 바울이 리더가 되었어요. 그러다 루스드라(Lystra)에서는 제우스(Zeus)라고 칭함 받았죠 그래서 거기 이제 바나바가 나왔는데 예루살렘 공회에서는 앞서 나오는 거예요. 성경에는 한 구절 한 구절이다 숨결이 있는 거예요. 이거는 하나님의 연애편지가 맞습니다.
여러분 바울이 스스로를 절제하고 있는 모습이 보이십니까? 구원을 위해서 이렇게 자랑질을 하면 안 되는 겁니다. 우리 자신이 중요하잖아요. 직분이 중요합니다. 상황 속에서 역할이 바뀔 수 있고 순종해야 합니다. 주님도 십자가에서 순종하는 역할을 맡으셨어요. 우리가 항상 가장 많이 하는 이야기 돈 이야기입니다. 목장 초원 등에서 돈 거래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것도 눈높이에 맞추어서 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얼마든지 예수 믿어야 의롭게 됩니다. 라고 말할 수 있지만 조심조심하고 있습니다. 회사나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이 바울을 돌보셔야 다른 사람을 돌보게 됩니다. 눈높이 절제를 할 수 있는 것은 구원이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그걸 모르면 팩트라고 할 말 다 하고 앞으로는 남고 뒤로는 밑지죠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눈높이에 맞추는 것은 십자가 짐이기 때문에 앞에서는 밑지지만 뒤로는 남는 장사고 구원입니다. 목장이나 여러 곳에서 각자의 눈높이에서 돌보심을 받으시면 좋겠습니다.
(적용 #1)
-가정이나 회사에서 목장에서 눈치를 보십니까? 무시를 하십니까? 눈높이를 맞추십니까?
-눈높이를 맞춘다면 구원 때문입니까? 열등감 때문입니까?
2. 하나님의 심방입니다.
1 )야고보(James)를 심방하십니다.
13절 말을 마치매 야고보가 대답하여 이르되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
바나바와 바울이 보고한 다음에 예기치 못한 하나님이 야고보를 만납니다. 야고보는 ‘내 말을 들으라’(Listen to me)고 합니다. 자신이 있는 것 같아요. 베드로는 자신의 외식에 대해 애통하며 유대주의자들을 형제라고 불렀는데 야고보는 무슨 수치와 죄가 있어 형제들 이라고 했을까요? 항상 우리의 구속사는 예수님 없는 개인은 전적으로 부패하고 무능하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사람은 대충 알 수 있어요 사람은 전적으로 악하고 음란하기 때문입니다. 정신 의학자 프로이트는 사람은 실수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 사람의 말이 행동 하나하나는 그 사람을 나타내는 바로미터라고 합니다. 국내의 혐오 차별 문제를 깊게 연구하는 김지혜 교수가 쓴 책에서는 내가 차별하지 않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합니다. 이것은 간과하고 사람을 칭찬하고 욕하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기막힌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죠. 유대인들 이 상상을 불허하는 고정관념을 가진 거예요. 지독한 선민의식으로는 복음이 퍼질 수 없는 거예요. 이때 예수님의 식구 같은 야고보가 필요합니다. 기둥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 식구들이 왜 모두 안 믿었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여러분 그러니까 인간이 백프로 죄인인 것은 큐티의 기본입니다. 우선 성령이 임하지 않았다면 사생아로 볼 것이 아닙니까? 그러면 돌로 쳐죽여야 하는 엄마와 형을 보면서 살 때 저 형 때문에 예수님을 비난하고 무시했겠죠. 예수 형이 자기를 메시아라고 했으니 사람들이 미쳤다고 했죠.
그러니 형제들이 미친 형을 붙들러 다녔다고 했어요. 33절에는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이냐고. 완전히 미친 사람 아닙니까? 생각을 해보세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성령 받지 않고는 알아볼 수 없는 거예요. 말씀을 못 알아들으면 똑같습니다. 이 식구들은 예수님하고 사는 것이 힘들었기 때문에 어떻게 할 수 없는 거예요. 지나고 보니까 하나님의 경륜이었고 좀처럼 식구들에게도 인정받지 못했던 성자 예수님인데 성령님이 효과적으로 돌보신 거죠. 동생들이 뭐라고 했겠습니까 조용히 살라고 하는 거죠. 형이란 인간 때문에 상차 받고 산다고 하는 거죠. 이왕 그렇게 하려면 숨어서 하라 라고 자기 형이 짠하고 나타내주는 것을 바라는 거죠. 별소리 다 들었을 것 같아요 악순환 이었을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을 미쳤다고 한 한마디로 식구들이 괴롭혔을 것을 생각해 보았어요. 하나님의 경륜은 이렇게 모르는 거예요. 식구들끼리 너무 잘 살았다면 이렇게 인류가 구원받도록 지경이 넓어지기 힘들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도 고난을 받아서 순종을 배웠다고 하세요 이것이 바로 삼위의 하나님의 사역이세요.
이것을 성령님이 효과적으로 돌보신 거예요. 이런 예수님의 역할을 보면서 미쳤다고 해도 슬퍼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도 미쳤다고 했는데 맘대로 못하는 거예요. 예수님도 아닌데 저 설교를 듣고도 이해가 안 되는 사람은 그렇게 제 욕을 하는 거예요. 베드로가 대단한 변론을 해도 왜 여기서 야고보가 등장하나 생각을 해보아야 합니다. 이때를 위해서 부활하시고 주님이 딱 꼭 집어서 개인적으로 야고보를 찾아가십니다. 주님이 찾아가시니까 단번에 변했어요. 이것이 하나님의 심방입니다. 심방도 때가 있는 거예요 예수님이 메시아로 밝혀지고 나서 메시아의 식구가 되었잖아요 로열패밀리로 할 일이 있기 때문에 야고보를 심방하신 것이 하나님의 찬스인 거죠. 야고보에게 이 역할을 맡기셨어요.
야고보가 주님을 만나고 나니 예수님과 어린 시절을 같이 보낸 것은 특권이었어요. 유대인이 보이는 표적과 기사를 좋아하기 때문에 이것이 효력을 발휘했어요. 이제는 야고보가 이렇게 쓰임을 받았어요 야고보가 똑똑해 야고보서도 썼잖아요.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를 말합니다. 이후에 세대는 여전히 베드로를 수제자로 칭하고 있습니다. 그때 그때 맡겨진 역할에 순종하면 눈높이를 맞추는 것입니다. 지난날을 생각할 때 형제가 될 수 없었는데 나도 너희들과 똑같이 비난했고 미쳤다고 이야기한 겁니다. 주님이 만나 주셔서 심방 한 번 하시면 가능합니다. 야고보의 역할은 구성원 모두에게 공증된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야고보가 이런 마음으로 나도 너희와 같았다 형제들아라고 하니 이해가 되는 거죠. 다들이 세상에서 죄인 있을 뿐이라고 인식했기 때문에 형제들이라고 공감하는 거예요. 다들 우리가 믿기 전에는 개차반 인생 아니겠습니까? 우리들교회는 옳고 그름으로 안 하면 좋겠는데 옳고 그름이 많은 것이 안타깝습니다.
보이는 것으로 옳고 그름으로 논하는 것이 예수님을 미쳤다고 하는 것과 같죠. 그런데 이해가 안 되니 보이는 것으로 이렇게 미쳤다고 하는 거죠. 예수님을 끊고자 해서 낙태할 뻔했잖아요. 배 속에 정인이처럼 예쁜 아이가 수도 없이 많이 죽어가고 앞으로도 죽을 예정이에요. 낳으면 하나님이 책임지십니다. 우리들 교회에도 생후 2개월 때 버려진 집사님이 고아원에서 돌고 돌아 우리들교회에 왔어요. 이분은 표적과 기사로 서울대 법대를 들어갔고 졸업했는데 많이 아파요. 이거 많이 아플 수밖에 없어요. 사회에 대한 적개심이 많을 수밖에 없는데 그분이 주님을 만나면 변할 수 있다고 생각이 들었는데 변했습니다. 생명은 하나님께 속했습니다. 하나님이 심방 한번 해주시면 구원으로 연결 되돌 봄이 자연스럽게 됩니다. 나에게 느껴지면 나도 남을 돌봅니다.
2) 이방인을 심방하십니다.
14절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그들을 돌보신 것을 시므온이 말하였으니
베드로도 그렇고 야고보도 그렇지만 절대로 믿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이방인들이 나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심방했더니 구원받았다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야고보로 정리합니다. 돌보셨다는 단어의 원형 헬라어 에피스토케마이는 너무 중요한 단어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돌아보시고 방문하셔서 구원을 나타내는 전문 용어입니다. 저의 간증 룻기 1장 1절에도 같은 단어를 썼어요. 출애굽에도 애굽에서 탄식했던 백성을 찾아가셨어요. 다 같은 단어예요. 절망에서 심방 한번 해주시면 구원 해주시는 표적과 기사잖아요. 너무 따뜻한 주님의 돌보심과 심방으로 구원으로 이루어지는 거죠. 에피스토케마이는 출석 체크가 기본 뜻입니다. 관심의 표현입니다. 가장 확실한 관심의 표현은 직접 찾아가서 함께 있는 뜻으로 교회의 심방이 이런 의미입니다. 우리의 목장은 기본이 출석 체크입니다. 그리고 방문해야 합니다. Zoom으로 하셔야 합니다. 얼굴과 얼굴을 대면해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목장에 출석체크 출석하시면 이게 목장의 큰 의미입니다. 늘 출석만 해도 심방하십니다. 구속사적인 구원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최고의 돌봄은 하나님의 심방으로 찾아가 주시고 그것이 구원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 자녀가 지금은 안 믿어도 하나님이 방문해 주신다는 것을 믿고 요셉이 유언을 했어요. 그리고 올라갔는데 400년이 걸렸어요 돌보신다는 것은 시공을 초월해서 약속의 심방이고 방문하신다는 거예요 이렇게 우리를 심방하십니다. 그래서 돌봄은 심방이에요. 야고보도 이방인도 하나님이 심방 한 번 하시면 기둥 같은 사람이 될 줄 믿습니다. 올해에는 그러니까 심방 계획을 많이 잡으시기를 바랍니다.
SG목자님이 그냥 평균이 80세이니 이렇게 심방하라고 했는데 심방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니 80세가 되시고 몸이 불편하셔도 목사님 모시고 갔다는 거에요 원주에 사시는 집사님과 같이 가서 대면을 하니 마음을 열었다고 합니다. 사람이 나이가 많으나 적으나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가면 구원으로 연결이 됩니다. 전부 80이 넘으셨는데 하나님의 심방 아닙니까? 사역자도 아닌 목자님이 원주로 청주로 간다고 하니 같이 동승하게 됩니다.
(적용 #2)
-여러분은 하나님의 심방이 따뜻하게 느껴집니까? 귀찮습니까?
-목자의 심방이 즐거우세요? 부담되세요?
-마음에 안 든다고 톡 방에서 나간 적은 없나요?
올해는 그런 유치한 일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심방으로 생각하고 톡방이 하나님의 심방입니다.
3. 말씀과 일치해야 합니다.
15절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일치하도다 기록된 바
하지만 주님은 다른 무엇보다 말씀으로 심방하는 것이 일치해야 합니다. 선지자의 말씀이 일치한다는 거예요. 우리가 아무리 돌본다고 해도 찾아간다고 해도 최종은 말씀과 일치해야 합니다. 돌보심의 결론은 말씀과 일치해야 합니다. 아무리 욕을 해도 말씀과 일치하면 오케이에요. 말씀이 잣대가 되어야 합니다. 삶에서는 말씀의 인도를 받지 않는다면 일치하지 않는 거예요.
16절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다시 지을 사람은 다윗의 후손 예수님인 거죠. 예수님만이 무너진 성을 지을 수 있는데 다윗의 장막을 왜 세우겠다고 했을까요?
17절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다윗의 후손 예수님을 통해서 선택된 남은 자와 모든 이방인을 구원하시기 위해서라고 했죠. 에돔은 최고로 약속의 민족에서 벗어난 사람이죠 불구대천 원수까지 내 이름으로 기업을 얻게 한다고 했어요. 그런데 야고보는 그 본문을 영적으로 해석해서 이방인들 가운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확대된다고 했어요. 인류의 남은 자들이 주를 찾게 된다고 하는데 이 이야기는 더 많은 민족이 일컬음을 받고 있는 것이 퇴락한 장막을 다시 세우겠다는 계획이고 이것이 이방인 선교라는 거예요.
18절 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
야고보는 주의 말씀이라고 썼어요. 주의 말씀이라는 현재 직설적 동사로 하나님이 현재적으로 말씀하고 계시다는 의미에요. 야고보는 이방인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 것은 어제나 오늘이나 진리라는 거예요. 전의 이야기잖아요. 다 똑같아요. 현재에도 어제도 오늘도 동일하다는 거죠.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허다한 잡종이 섞여 나왔다고 했는데 이방인도 구원의 대상이라고 표현하는 거죠. 좀 어렵죠? 쉽게 설명드리겠습니다. 북 이스라엘(B.C.722년)과 남유다(B.C. 586)과 이 망했어요.
그리하여 흩어진 디아스포라(dispora) 유대인들이 지중해 연안으로 흩어졌어요 시간이 갈수록 모국어를 잊었어요 각자 자기 지방의 모국어로 쓰고 있는데 히브리어 성경을 모르는 거예요 로마가 제패하고 나서 헬라어가 공용어가 생겼습니다. 그런데 이방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성경인 거죠. 유대인들에게도 구약 성경에 아모스(Amos)를 인용했기 때문에 예언이 이루어졌다고 이야기하는 거죠. 여러 차례 좀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중요한 것은 성경 대로입니다. 성경대로 일치하지 않으면 돈을 줘도 꽝이고 돌봄을 해도 꽝입니다. 그러니까 성경대로 하지 않은 나의 열심은 이단입니다. 베드로 야고보와 바울이 이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적용 #3)
-말씀과
일치하기 위해 온라인으로 드리는 모든 예배를 잘 드리고 있나요?
-온라인 예배 때 모니터에 열려있는 화면은 몇 개인가요?
예배에 집중하기를 바랍니다.
모든 것의 결론은 말씀입니다. 성경의 돌보심의 결론은 인내입니다.
<Epilogue>
1) 성령의 돌보심은 눈높이를 맞추는 것 이고 하나님의 심방이며 말씀과 일치해야 한다
2) 우리는 눈에 보이는 표적과 기사(miraculous signs and wonders)이 너무 좋은 것이다
3) 진짜 표적은 십자가다
4) 주님은 요나의 표적 밖에 보여줄 것이 없다고 하신다
5) 구원은 자랑 질 하지 않아야 한다
6) 조심 또 조심하는 것이 눈 높이를 맞추는 것이며 성령의 돌보심이고 구원의 목적이다
7) 성령의 돌보심은 앞으로 밑지고 뒤로 남는 장사가 되는 것이다
8) 예수님 없는 구속사는 늘 무능하고 부패한 것이다
9) 사람은 전적으로 무능하고 부패하고 음란하기 때문이다
10) 하나님의 경륜으로 성자 하나님은 고난을 받으며 순종하는데 성령 하나님의 효과적인 돌보심이 있기 때문이다
11) 하나님의 심방으로 찾아가신 그것이 구원의 위로 심방이다
12) 구원, 약속의 심방이 돌봄과 구원으로 이어진다
13)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심방하니까 돌봄과 구원이 되는 것이다
14) 돌보심의 결론은 말씀과 일치해야 하는 것이다
15) 말씀의 인도를 받지 않는다면 말씀과 일치하지않는 것이다
16) 곳곳에 죽이려는 유대인이 있었지만 루스드라 이고니온 안디옥을 돌아온 선교 보고 그것 자체가 표적과 기사였다
17) 유대인들에게는 기복적 관점으로 보고를 했지만 사도들에게는 팔복의 관점으로 균형 있게 보고를 하게 된다.
18) 대단한 보고도 타이밍이 중요하다.
19) 성경에는 한 구절 한 구절이다 숨결이 있는 것이며 하나님의 연애편지가 맞다.
20) 구원을 위해서 이렇게 자랑 질을 하면 안 되는 것이다.
21) 상황 속에서 역할이 바뀔 수 있고 순종해야 한다.
22) 주님도 십자가에서 순종하는 역할을 맡으셨다
23) 우리가 항상 가장 많이 하는 이야기 돈 이야기다.
24) 성령이 바울을 돌보셔야 다른 사람을 돌보게 된다.
25) 눈높이 절제를 할 수 있는 것은 구원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26) 그것을 모르면 팩트(fact)라고 할 말 다 하고 앞으로는 남고 뒤로는 밑지게 되니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27) 눈높이에 맞추는 것은 십자가 짐이기 때문에 앞에서는 밑지지만 뒤로는 남는 장사고 구원이다.
28) 목장이나 여러 곳에서 각자의 눈높이에서 돌보심을 받으시면 좋겠다.
29) 항상 우리의 구속사는 예수님 없는 개인은 전적으로 부패하고 무능하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30) 사람은 대충 알 수 있는데 사람은 전적으로 악하고 음란하기 때문이다.
31) 정신 의학자 프로이트는 사람은 실수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 사람의 말이 행동 하나하나는 그 사람을 나타내는 바로미터라고 한다.
32) 지독한 선민의식으로는 복음이 퍼질 수 없는 것이다.
33) 인간이 100% 죄인인 것은 큐티의 기본이다.
34) 예수님은 성령 받지 않고는 알아볼 수 없는 것이다
35) 말씀을 못 알아들으면 똑 같은 것인데 이 식구들은 예수님하고 사는 것이 힘들었기 때문에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다.
36) 지나고 보니까 하나님의 경륜이었고 좀처럼 식구들에게도 인정받지 못했던 성자 예수님인데 성령님이 효과적으로 돌보신 것이다
37) 하나님의 경륜은 이렇게 모르는 것인데 식구들끼리 너무 잘 살았다면 이렇게 인류가 구원받도록 지경이 넓어지기 힘들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38) 예수님도 고난을 받아서 순종을 배웠다고 하시는데 이것이 바로 삼위의 하나님의 사역인 것이다
39) 주님이 찾아가시니까 단번에 변했는데 이것이 하나님의 심방이며 심방도 때가 있는 것이다
40) 그때 그때 맡겨진 역할에 순종하면 눈높이를 맞추는 것이다.
41) 지난날을 생각할 때 형제가 될 수 없었는데 나도 너희들과 똑같이 비난했고 미쳤다고 이야기한 것이다.
42) 주님이 만나 주셔서 심방 한 번 하시면 가능합니다.
43) 보이는 것으로 옳고 그름으로 논하는 것이 예수님을 미쳤다고 하는 것과 같다.
44) 그런데 이해가 안 되니 보이는 것으로 이렇게 미쳤다고 하는 것이다
45) 생명은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하나님이 심방 한번 해주시면 구원으로 연결 되돌 봄이 자연스럽게 되는데 나에게 느껴지면 나도 남을 돌보게 된다.
46) 절망에서 심방 한번 해주시면 구원 해주시는 표적과 기사인 것이다.
47) 너무 따뜻한 주님의 돌보심과 심방으로 구원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48) 가장 확실한 관심의 표현은 직접 찾아가서 함께 있는 뜻으로 교회의 심방이 이런 의미다.
49) 여러분들이 목장에 출석체크 출석하시면 이게 목장의 큰 의미이다.
50) 늘 출석만 해도 심방하시는데 구속사적인 구원으로 인도해 주신다.
51) 최고의 돌봄은 하나님의 심방으로 찾아가 주시고 그것이 구원을 위한 것이다.
52) 돌보신다는 것은 시공을 초월해서 약속의 심방이고 방문하신다는 것으로 이렇게 우리를 심방하시는 것이므로 돌봄은 심방이다
53) 사람이 나이가 많으나 적으나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가면 구원으로 연결이 된다
54) 하나님의 심방으로 생각하고 톡방이 하나님의 심방입니다.
55) 주님은 다른 무엇보다 말씀으로 심방하는 것이 일치해야 한다.
56) 선지자의 말씀이 일치한다는 것으로 우리가 아무리 돌본다고 해도 또 찾아간다고 해도 최종은 말씀과 일치해야 한다.
57) 돌보심의 결론은 말씀과 일치해야 하는 것이다.
58) 아무리 욕을 해도 말씀과 일치하면 오케이인 것으로 말씀이 잣대가 되어야 한다.
59) 삶에서는 말씀의 인도를 받지 않는다면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60) 야고보는 이방인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 것은 어제나 오늘이나 진리라는 것이다
61) 성경대로 일치하지 않으면 돈을 줘도 꽝이고 돌봄을 해도 꽝이다.
62) 그러니까 성경대로 하지 않은 나의 열심은 이단이다.
63) 말씀의 결론은 인내이다
64) 모든 것의 결론은 말씀이다.
65) 성경의 돌보심의 결론은 인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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