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과 마음씀2021. 1. 13. 17:16

[우리들교회 2021110일 주일예배 말씀 요약(사도행전 15: 5~ 11/ 성령의 의논)]



 

<사도행전 15:5~11>

 

5바리새파 중에 어떤 믿는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Then some of the believers who belonged to the party of the Pharisees stood up and said, "The Gentiles must be circumcised and required to obey the law of Moses.")

6 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 (The apostles and elders met to consider this question)

7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After much discussion, Peter got up and addressed them: "Brothers, you know that some time ago God made a choice among you that the Gentiles might hear from my lips the message of the gospel and believe)

8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언하시고 (God, who knows the heart, showed that he accepted them by giving the Holy Spirit to them, just as he did to us)

9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 (He made no distinction between us and them, for he purified their hearts by faith)

10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Now then, why do you try to test God by putting on the necks of the disciples a yoke that neither we nor our fathers have been able to bear?)

11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9 No! We believe it is through the grace of our Lord Jesus that we are saved, just as they are.")

 

 

 

<Prologue>

 

화성연쇄살인 사건의 진범이 잡혀서 억울하게 20여년 동안 옥살이 한 윤성여씨가 무죄가 됐다. 그때는 우리 나라에 범인이 필요해서 범인으로 몰아넣은 경찰이 대제사장 바리새인 같다. 예수님도 다들 의논했지만 빌라도 법정에서 일방적으로 죄없이 사형 당했다. 세상에는 수많은 의논이 지금도 행해지고 있다. 수준이 높을수록 이렇게 억울한 의논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이 걸려서 그렇지 진실은 반드시 드러난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상에서 억울함을 풀어달라는 이 옳고 그름 보다는 천하보다 귀한 성령의 의논을 해야한다.

 

<말씀 요약>

 

성령의 의논은,

 

1. 사람을 살리는 구원의 의논입니다. (5)

지난주에 본대로 바울과 바나바는 예루살렘 교회 회중 앞에서 선교 보고를 했다. 차별 받았던 베니게(Phoenicia)와 사마리아(Samaria)의 교회들은 크게 기뻐했지만 바리새인들(Pharisees)은 크게 비난하고 싫어한다. 바리새파 중에 믿는 어떤 사람들이 원어에 보면 벌떡 일어나서 이방인도 할례를 받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며 들어볼 것도 없다며 바울의 선교 보고에 찬물을 끼얹었다. 바울은 안디옥(Antioch) 교회에 내려온 유대인은 예루살렘 교회의 지시도 없이 내려 왔다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서 지금 예루살렘 교회에 지도를 받고자 올라왔는데 모교회의 회의에서는 할례(circumcision)뿐만 아니라 모세의 법도 지켜야 한다고 혹 떼려 다가 혹을 하나 더 붙인, 강경기류가 내뿜어져 나왔다. ‘일어나가 원어로는 첫 단어로 나와서 긴장감을 조성한다. 이 유대인도 바리새파 중에서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해서 믿는 사람들이다. 다 믿는 사람이다. 그러니 선교사들이 보고하는 놀라운 사역과 바리새파 신자들의 그럴듯한 주장이 충돌이 되고 있다. 바울의 마음이 날이 갈수록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 6) 의논에도 죽이는 의논이 있고 살리는 의논이 있다. 대제사장과 바리새인처럼 예수님과 바울을 죽이려고 의논할 수도 있고 예루살렘 교회 사도들과 장로들처럼 성도를 살리는 의논을 할 수도 있다. 교회를 살리고 가정을 살리고 사람을 살리는 의논이 성령의 의논(debate)이다. 이혼 28년만에 재결합해서 혼인신고하고 10일만에 천국 보냈다는 구원의 간증을 들으면 인내는 인간이 감당할 부분이 아닌 것 같고 하늘의 언어인 것 같다고 나눔 한 목자님이 계시다. 이 땅에서 하늘의 언어를 쓰려니 하늘 가족 식구인 구원의 공동체에서 의논을 하지 않으면 인내를 못 해서 또 다른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늘 의논을 해야한다. 안디옥과 마찬가지로 예루살렘 교회에서도 그들은 이 문제를 자신들의 교회를 대표하는 영적 지도자인 사도와 장로들에게 맡긴다. 이건 예루살렘 교회도 좋은 것 같다. 그들에게 물었다. 왜냐하면 자기들이 도저히 결정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물었다. 그래서 7절에 많은 변론을 했다고 한다. 우리가 앞서 2절에서 안디옥 교회에서도 적지 아니한 다툼(dispute)과 변론(debate)을 했다고 했다. 이제 같은 변론이 예루살렘에서도 바울 파와 바리새인 파 사이에 찬성하는 사람들 사이에 변론이 일어나고 있다. 이들의 주장이 얼마나 다른가? 할례 주의자들의 생각이 얼마나 잘못되었는가? 그것은 그들의 어리석음, 편협함, 복음에 대한 몰이해 등을 드러낸다. 그들의 주장은 복음을 변질시키는 아주 위험한 것이다. 그러나 예루살렘 회의에서 이들에 대해서 비난하는 분위기는 없었다. 말을 제지하는 것도 없었다. 인격적인 모욕을 주는 이도 없었다. 그들은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충분히 말할 수 있었다. 변론은 자기 말로 이기려는 말싸움이 아니다. 가짜를 버리고 진짜를 찾기 위해 상대와 진지하고 치열하게 의논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말싸움과 달리 승리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진리가 목적이다. 승리를 목적으로 싸우면 사람을 살릴 수 없다. 그러나 성령의 의논은 진리가 목적이므로 그 진리가 사람을 살린다. 목적이 진리에 있으니 서로 잘 묻고 듣는다. 사도들과 장로들이 서로 잘 드리려 했으니 많은 변론이 있었다

(적용#1)

-여러분은 사람을 살리는 의논을 합니까? 죽이는 의논을 합니까? 잘 듣습니까? 지시하고 명령합니까?

 

2. 형제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7)

많은 변론이 끝난 후에 베드로가 비로소 일어나 자기 말을 한다. 6세기에 기록된 사본에는 베드로가 성령으로 일어나 말하되라고 했는데 성령으로 일어나서 한 말이 무엇인가? 베드로는 먼저형제들아~”라고 부른다. 이렇게 싸우는 자들이 어떻게 형제일까? 그런데 베드로는 바리새인도 바울도 모두 주님이 피 값을 치루시고 죽어 주신 형제들이라는 것이다. 서로에 대해 나쁜 감정도 들 수 있고 갈등도 생길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모두 함께 예수그리스도의 형제라는 것이다. 그럼 우리가 생각해 볼 때 베드로가 워낙 믿음이 훌륭한 가요? 수석 사도라서형제들아~”하는 건가요? 이럴 때 생각해 보아야 한다. 어떻게 베드로가 형제들아 할 수 있는가. 베드로가 사도행전 12장에서 옥에 갇혔다. 간절히 기도했던 성도들이 베드로가 막상 나왔다고 하니 미쳤다고 했다. 감옥 문은 열렸는데 교회 문은 안 열렸다. 촛대를 옮기실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13장에 안디옥 교회가 나오고 바울의 체험 + 구속사의 믿음 시대로 촛대를 옮기신다. 한번 촛대가 옮겨지면 그 은혜를 회복하기 어렵다. 그 시대가 지난 것이다. 그 후로 베드로가 사라졌다. 그런데 갈라디아서에서 보면 2장에 안디옥에 잠깐 나타났다. 시기는 확실하지 않지만 1차 끝나고 2차 전도 여행 끝나기 전, 예루살렘 총회 전후로 본다. 갈라디아서 (2:11~14) 즉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한 식탁에서 먹다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오자 이들은 야고보(James)에게서 온 유대인들이라고 했다. 정식 감사가 온 것이다. 그들의 비난을 두려워해서 그 자리를 피했다고 한다. 미완료 시제다. 그래서 그로 인하여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유대인, 특히 바나바(Barnabas)까지도 외식적인 행동을 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베드로가 복음의 진리에 근거하여 일관되게 행동하지 아니하고 상황에 따라 이중적으로 행동한데 대하여 책망했다. 고넬료(Cornelius) 사건을 겪은 베드로가 여전히 율법과 할례에 자유롭지 못하고 두려워 외식을 했던 것이다. 유대인들의 선민 사상은 생각보다 너무 깊었다. 갈라디아(Galatian) 교회는 바울이 개척한 교회다. 그런데 바울이 떠나자마자 이단에 빠졌다. 갈라디아 3:1,3) 이후 통렬하게 갈라이다서를 썼다. 외식 사건이 총회 이전이든 이후이든, 이후면 베드로가 더 초라해 진다. 베드로가 외식한 것은 바울에게로 촛불을 옮길 만한 일이었다. 사람들은 다 바울 보고 베드로에게 가르침을 받았다고 하지만 이 사건을 보고 그 이야기가 쏙 들어갔다. 그러나 베드로가 대단한 것은 이때인 것이다. 이 사건을 권위도전으로 받지 않고 책망을 잘 들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역시 수제자 맞다. 그리고 베드로 최후의 변론을 하는 것이다. 이후로 베드로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래서 변론 후에 베드로가 꺼낸 첫 마디가형제들아 내가 너희들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다.”이다. 그야말로 별 인생이 없다는 것이다. 나에게도 고정관념이 너희처럼 뼛속 깊이 박혀있고 고넬료가 이방인으로 성령 받는 것을 보았는데도 여전히 유대인 앞에서 이방인과 밥 먹다가 두려워 나도 도망갔다. 떠나 물러 갔다는 게 미완료 시제인 것은 계속 반복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 유대인들에게 이 이야기를 하면서 그들과 지체 의식을 가지기 쉽다. “나도 그랬다.” 어쨌든 베드로는 이 장렬한 최후의 변론을 했었어도 다시 등장하지 않는다. 실수도 잦으면 이렇게 촛불을 옮기실 수 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어지는 베드로의 말은 형제들아 다음에 너희들도 알거니내가 알거니와가 아니다. 너희도 알거니와. 객관적으로 모두가 아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이쯤 되면 내가 그래도 수석 사도 베드로 아니겠니? ‘내가 결론을 내리겠어하면서 내가 알거니와라고 할 수 있지만 너희도 알거니와~ 가르치려는 태도가 아니라 호소하려는 태도이다. 그들이 알고 있는 사실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베드로를 선택해서 제일 먼저 이방인에게 전해 복음을 전하게 하신 일이다. 그것은 바로 로마의 백부장 고넬료 일을 말한다. 그 때 베드로 보고 먹어라! 베드로는 못 먹어요! 그러면서 베드로를 고넬료 집에 보내신 일은 예루살렘 교회에 아주 큰 사건이었다. 그 때도 할례자들, 즉 유대주의를 버리지못한 성도들이 단체로 들고 일어나서 어떻게 사도가 이방인의 집에 가서 밥을 먹냐?’ 고 비난을 했다. 그 때 베드로가 있었던 일을 차례로 성령의 설득으로 자세히 설명해서 이해 시켜야만 했다. 그래서 겨우 이방인에게 주어진 은혜를 인정할 수 있었는데 고넬료 집 한 가정의 성도가 거기서 밥 먹은 것 만으로도 이렇게 거부반응을 보였던 사람들인데 자기들보다 훨씬 많은 이방인들이 예수 믿고 교회로 돌아왔다고 하니까 얼마나 격렬하게 율법을 주장했을 지 이해가 된다. 이들이 사도와 장로들인데도 여전히 이렇게 율법과 할례를 앞세웠다는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믿음이 약한 그들을 정죄하지 않고 과거 고넬료 사건 때 이미 받아들인 이방인의 구원을 상기시킨다. 여기서 베드로가 나도 그랬다라고 하지 않고서는 설득이 안된다. 의논할 때도 마찬가지다. 나는 맞고 당신은 틀렸다는 이 높은 마음으로는 아무리 의논을 해도 사람을 살릴 수 없다. 하지만 나도 당신과 같았다라고 간증을 하면서 그 사람이 당한 일을 나도 당했다고 할 때 주안에서 한 형제 의식을 가질 때 의논이 시작된다. 중등부의 한 학생은 조두순을 비난하면서 어떻게 해야한다고 하는게 옳은 것 같지는 않다고 했다. 구원이 전적으로 주님의 몫이라면 주 안에서 한 형제가 될 수 있고 어떤 범죄자도 형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베드로도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바울도 스데반 죽인 죄인이고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형제 의식을 가질 때 의논이 되는 것이다. 여러분들은 고난이 왜 축복인지 모르기 때문에 여기 와서도 물과 기름처럼 따로 노는 것이다. 정인이는 너무 예뻤다. 그래서 너무 기가 막힌다. 입양 되어서 16개월 때 죽어서 국민적인 공분을 사고 있다. 여러분들이 너무 슬퍼하니까 더 이상 이야기는 안하겠지만 뱃속에서 단번에 죽은 아이들은 요? 우리는 모두 죄인이다. 올해 사자성어가아시타비(我是他非)’. 전 여기서 정인이 엄마가 너무 많이 아프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너무 많이 아프면 부모도 건드릴 수 없는게 있다. 정상적으로 대학도 졸업했으니까 딸을 믿고 싶은 마음도 들었을 거고 입양도 본인이 한다고 하니까 그거 말릴 수 없었을 것 같다. 자식 가진 사람은 남의 말을 할 수가 없다. 그 부모님들도 너무 힘들었을 것 같다. 그런데 양가가 다 목회자 가정이라는 것은... 교회에서도 아픈 것을 말하지 못하는 실상을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이런 집이 많을 것이다. 우리들 교회가 다른 것은 아픈 가정의 부모들이 아이들과 함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 들으면서 부모나 자녀나 먼저 믿은 사람이 자신의 죄를 깨달아 가면서 하루하루 산다. 사는 이야기들을 목장에서 마음껏 하면서 격려의 받기 때문에 아픈 부모 자격자가 많지만, 문제가 많아도 문제가 없이 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다 형제이고 별 인생이 없다는 것이다. 공동체에서 의논을 하기 때문에 이것이 살리는 의논이다. 무엇을 회개해야 하는지 모르고 있는 것 같다. 다들 교회에서 말을 할 수 있으면 좋을 것 같다. 회사고 직장에서 다 자유롭게 말을 할 수 있어야 하는데 아시타비(我是他非)’, 나는 옳고 너를 틀렸다는 이야기만 하니까 안되는 것이다. 그럼 집이고 나라고 살리는 의논이 되지 않는다. 이게 원죄의 형벌이다. 나는 옳고 너는 틀리고. 선악과 먹고 죄가 들어와서 그렇다.

(적용#2) –

-조두순은 불신자이고 정인이 부모는 신자다. 그런데 여러분은 신자이든 불신자이든 구원받아야 할 형제 의식이 얼마나 있나요?

-정인이 엄마 목장에 온다면 어떻게 의논하겠는가?

 

3. 하나님이 답이십니다. (8~9)

서로 다른 의견이 충돌하는 변론이나 논쟁의 답은 증인이나 증거로 결정된다. 그래서 법정에서 증인이 얼마나 중요한가? 화성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이 아니었던 윤여성씨가 자기가 진범이 아닌데 증거도 증인도 없어서 20년동안 옥살이를 했는데 증인이나 증거가 너무 중요하다. 그래서 베드로도 여기서 증인을 제시하는데 그게 바로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증언하셨다는 것이다. 이것도 부정 과거를 써서 기정 사실이 된 확실한 일임을 표현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확실히 증언 하셨다는 것이다. 무엇을 증언 하셨나? 이방인도 복음을 듣고 믿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도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을 하나님이 증언하셨다. 그러니까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에서부터 올라와 보고한 내용에 대해서 우리가 왈가왈부하고 있지만 사실은 이미 하나님이 확실히 증언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어떤 방법으로 증언 하셨나요? 성령을 주어 증언하셨다. 고넬료 집에 모인 이방인들에게 성령을 부어 주셔서 그들이 방언으로 하나님을 찬양했다. 오순절 성령 강림과 똑같은 일이 이방인의 집에서도 똑같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할례 파든 바리새 파든 율법주의자이든 그들의 이론으로 절대 반박할 수 없는 가장 확실한 성령의 증거로 하나님이 증언하신 일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증언하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베드로는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라고 밝힌다. 이것이 이방인과 율법의 문제에서 하나님과 사람의 관점이 근본적으로 다른 부분이다. 사람은 외모를 보나 하나님은 마음을 아신다고 했다. 사람의 속마음을 보시기에 겉으로 율법을 지키는 척 하는 것이 통하지 않는다. 10) 율법 준수를 요구하는 바리새 파 형제들은 겉으로는 의롭게 보인다. 전통과 민족을 사랑하는 애국자처럼 보인다. 그런데 하나님에 대한 불신은 인간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 연결되어 있다. 바리새인은 인간을 스스로 의롭게 될 수 있는 존재로 여겼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율법 준수가 인간이 능히 질 수 있는 멍에였다. 그들에게 율법의 멍에는 수치와 고난이 아니라 특권이자 자랑이었다. 나는 할 수 있다는 자기 확신이 충만했다. 인생의 답을 자기가 가지고 있으니 굳이 답을 하나님을 믿을 이유가 없다. 하나님을 믿을 이유가 없다. 믿지 않는다. 그들은 여기서 태안까지 걸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바울이나 베드로는 인간이 절대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존재임을 안다. 그들은 율법을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질 수 없는 멍에로 본다. 나는 할 수 없다는 인식이 분명하다. 자기 안에 답이 있을 수 없음을 보는 것이다. 주제 파악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답을 구해야 하고 하나님이 답 이심을 고백하게 된다. 그러니 나는 할 수 있다가 얼마나 불신앙의 말임을 알겠나 요? 물론 주님 안에서는 주님이 하시니까 할 수 있다. 율법은 지키라고 주신 것이 아니고 죄를 알게 하려고 주신 것이다. 죄를 죄 되게 하시려고 주신 것이다. 율법과 그것을 지키기 위한 율법이 613가지나 된다. 인간은 그것을 모두 지키지 못한다. 유대인들을 보면 율법 지키다가 다 형식주의, 율법주의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지금도 이스라엘에 가면. 지킬 수 없는 율법을 지켜야만 구원받는다고 너희도 못 지키는 것을 지키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라고 한다. 성경구절을 한절, 한절 보면 나와있다. 예레미아 9:25) 아무리 할례는 받아도, 겉으로 할례를 받아도 마음의 할례를 받지 않으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마음이 깨끗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살점을 깎아내도(mutilation) 마음과 몸에 전부 할례를 받아도 전부 심판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마음을 깨끗이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나도 못 하면서 남들에게는 그것만 지키면 구원 받는다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것을 적용해보면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잘못했어요, 살인을 했어요, 남의 가정을 망쳤어요, 그런데 사과도 용서도 받기 싫어요, 사랑하기 싫어요. 그런데 금식만 한다면, 할례만 한다면 내 죄와 상관없이 나 혼자 구원받는 다는 것이다. 이단에 이런 사람들이 몰려간다. 그러면 내 속의 귀신들이 다 물러간다는 것이다. 내 속에 나만, 나만, 이런 열심히 이단들의 열심히 무섭다. 종교적인 열심히 다른 사람들을 삼킨다. 나부터 회개해야 하는데 회개하지 않는 열심이 다른 사람들을 무섭게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원칙을 안 지킨다. 자기만 구원받으면 되니까. 병만 낫는다면 물불을 안 가린다. 하지만 놀라지 마세요. 실은 정반대 현상이 나타난다. 이런 종교일수록 사람들이 열광하면서 몰려든다. 그런데 막상 가보면 이단일수록 사람에게 무거운 멍에를 지게끔 한다. 아무리 교주가 성범죄자여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 무거운 멍에를 당연하다는 듯이 짊어진다. 자살 테러도 마다하지 않는다. 신천지가 온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도 눈도 깜짝하지 않는다. 사람은 무언가 특별한 멍에를 질 때, 부적처럼 종교적 효험이 나타난다고 믿는다. 몸에 이 무서운 할례를 행하면 그러면 거기에 부적 효과가 나타날 것만 같다. 이건 불교에서 3천배를 하면 모든 게 잘 된다는 것과 같다. 그만큼 인간의 종교 심리는 부패해 있다. 그러니까 기능을 잘 못하는 것이다. 인간은 악하고 음란하다. 그것을 믿음이라고 착각한다. 막 금식하고, 할례를 행하고 성경을 막 외우고.. 성경을 외우는데 우리가 볼 때 평강이 없고 무서운 사람이 많다. 그래서 이런걸 기막히게 이용하는게 바로 거짓이다. 유대교가 지금 그런 것이다. 중세에 타락한 로마 카톨릭이 똑같은 일을 행했고 오늘날 이단들이 그러하고 교회에도 거짓이 들어와 있는 것이다. 멍에만 지우려는 거짓 종교에 속으면 안된다. 그런데 우리는 병만 낫는다면 할례를 행해서 애가 붙기만 한다면 못할 일이 없는 것이다. 참 복음은 참 자유를 준다. 하나님 나라는 의와 평강과 희락을 준다. 그러면 이 땅에서 뭐든 잘 먹고 잘사는 것이 아니라 좁은 길을 가는데 남들이 볼 때는 고난이다. 그런데 그 고난보다 한가지 더 좋은 게 있어서 고난을 갈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하면 여기서 잘 먹고 잘 살고 애들은 속 안 썩이고 이런 것만 하나님 나라라고 착각한다. 그래서 할례를 행해서 이런 기복적인 복을 위해서 그렇게 열심을 내는 것을 믿음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우리들교회에 인도에서 선교를 하다가 오신 목사님이 계신데, 할례를 강조하면서 500km 달려온 유대인의 이야기를 하실 때 본인한테 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말씀에 해석이 없는 열심히 얼마나 무서운지를 본다. 동일한 모습으로 행위와 경건주의에 열심을 다했던 죄를 회개했는데 평신도는 하루 1시간, 리더는 2시간, 목회자는 3시간, 선교사는 5시간 배웠는데 하루 기도 5시간을 채웠기 때문에 할례를 강조했던 유대인과 같은 마음이 들어왔다고 한다. 그러니까 내가 5시간 하니까 못하는 사람을 정죄하고 판단하는 마음이, 나는 5시간 했는데 저 사람은 안 한다고. 그래서 할례를 강조한 유대인의 모습이 하루의 기도시간을 강조한 저의 모습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또한 구원을 함께 기도하는 공동체가 중요하다고 했는데 그렇게 5시간을기도해도 진실됨으로 나누는 공동체는 하나도 없었다고 이야기한다. 이게 선교사님의 현주소였다. 11) 바로 이것이 교회의 신앙고백이다. 누구나 주 예수를 믿기만 하면 은혜로 구원받는 줄 믿습니다! 말로는 신앙고백이 너무 쉬운 것 같은데 주 예수를 믿기만 하면 은혜로 구원받는 줄 믿습니다. 그런데 진정으로 고백하는 일이 잘 되지 않는다. 전적으로 무능하고 전적으로 부패한 자기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절대 보이지 않는다. 여러분들이 지난주에 구원의 확신이 있는지 나눠보라고 했는데 다들 썩 그렇게 잘 나오지 않는 것 같다. 인생에 여러 고난을 통과하여서 저절로 회개로 돌이키지 않으면 하나님이 답이 아니고 여전히 내가 답인 것이다. 하나님만이 답이여야 성령의 의논을 할 수 있는데 하나님만이 답이 되려면 베드로처럼 이런 기가 막힌 과정을 다 거쳐야 되니까. 갈라디아서의 베드로를 보고 너무 슬프고 위로가 되었다. 베드로도 마지막 까지도 그랬구나. 다윗도 마지막까지 인구조사를 했는데. 그런데 이단들은 그렇지 않는다. 할례만 받으면 끝이고 한번 죄사함을 받았으면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이야기하니까 보통 사람들은 내가 뭔가 용서하고 그러지 않아도 되니까 열광하면서 가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만이 답이시기 위해서 우리의 사건과 고난이 걸어가고 걸어오게 되는 것이다.

(적용#3)

-가정에서내 말이 답이다.“ 라고 주장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여러분들은 인생에서 항상 하나님이 답이시라는 게 얼마나 인정이 됩니까? 몇 프로나 인정이 됩니까?

-집에서 내 말이 답이다 하는 건 누구인가요?

 

성령의 의논은 하나님이 답이시라는 고백으로 이어진다. 서로 자기 말이 답이라는 의논은 교회와 사회를 세울 수 없다. 생명을 살리는 성령의 의논은 하나님에게서 답을 구하게 진리의 성령님이 사람을 살리는 진리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줄로 믿는다. 우리는 날마다 우리는 이렇게 날마다 남들에게 무시를 당해도 오뚜기처럼 일어나서 성령의 의논을 해야한다.

 

성령의 의논은 사람을 살리는 구원의 의논이 되어야한다. 그러니까 돈 뺏어 갔다고 내놓으라고 난리치고, 바람 피웠다고 저 남편, 저 아내 죽여야 한다는 것 말고 다 거기서 구원을 도출해 낼 수 있는 구원의 의논이 되어야하고 나도 너와 똑같은 죄인이라는 형제 의식이 있어야하고 사람이 아무리 어떤 말을 해도 나는 답이 아니고 하나님만 답이기 때문에 우리는 말씀을 보는 공동체 속에 있어야한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의 변론은 자유가 없다.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키고.. 주의 영이 계신 곳에 참된 자유가 있다.

 


<Epilogue>


1)  교회를 살리고 가정을 살리고 사람을 살리는 의논이 성령의 의논(debate)이다.

2)  이 땅에서 하늘의 언어를 쓰려니 하늘 가족 식구인 구원의 공동체에서 의논을 하지 않으면 인내를 못 해서 또 다른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늘 의논을 해야한다

3)  변론은 자기 말로 이기려는 말싸움이 아니다.

4)  가짜를 버리고 진짜를 찾기 위해 상대와 진지하고 치열하게 의논하는 것을 말한다.

5)  그래서 말싸움과 달리 승리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진리가 목적이다.

6)  승리를 목적으로 싸우면 사람을 살릴 수 없다.

7)  성령의 의논은 진리가 목적이므로 그 진리가 사람을 살린다.

8)  목적이 진리에 있으니 서로 잘 묻고 듣는다.

9)  한번 촛대가 옮겨지면 그 은혜를 회복하기 어렵다.

10) 나는 맞고 당신은 틀렸다는 이 높은 마음으로는 아무리 의논을 해도 사람을 살릴 수 없다.

11) 하지만 나도 당신과 같았다라고 간증을 하면서 그 사람이 당한 일을 나도 당했다고 할 때 주안에서 한 형제 의식을 가질 때 의논이 시작된다.

12)  구원이 전적으로 주님의 몫이라면 주 안에서 한 형제가 될 수 있고 어떤 범죄자도 형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13) 베드로도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바울도 스데반(Stephen) 죽인 죄인이고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형제 의식을 가질 때 의논이 되는 것이다.

14) 여러분들은 고난이 왜 축복인지 모르기 때문에 여기 와서도 물과 기름처럼 따로 노는 것이다.

15) 사는 이야기들을 목장에서 마음껏 하면서 격려의 받기 때문에 아픈 부모 자격자가 많지만, 문제가 많아도 문제가 없이 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다 형제이고 별 인생이 없다는 것이다.

16) 공동체에서 의논을 하기 때문에 이것이 살리는 의논이다.

17) 아시타비(我是他非)’, 나는 옳고 너를 틀렸다는 이야기만 하니까 안되는 것이다.

18) 그러면 집이고 나라고 살리는 의논이 되지 않는다. 이게 원죄의 형벌이다.

19) 나는 옳고 너는 틀리고. 선악과 먹고 죄가 들어와서 그렇다.

20) 서로 다른 의견이 충돌하는 변론이나 논쟁의 답은 증인이나 증거로 결정된다.

21)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도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을 하나님이 증언하셨다.

22) 하나님은 어떤 방법으로 증언 하셨나요? 성령을 주어 증언하셨다. 고넬료 집에 모인 이방인들에게 성령을 부어 주셔서 그들이 방언으로 하나님을 찬양했다.

23) 오순절 성령 강림과 똑같은 일이 이방인의 집에서도 똑같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24) 할례 파든 바리새 파든 율법주의자이든 그들의 이론으로 절대 반박할 수 없는 가장 확실한 성령의 증거로 하나님이 증언하신 일이라는 것이다.

25) 이렇게 증언하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베드로는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라고 밝힌다.

26) 이것이 이방인과 율법의 문제에서 하나님과 사람의 관점이 근본적으로 다른 부분이다.

27) 사람은 외모를 보나 하나님은 마음을 아신다고 했다. 사람의 속마음을 보시기에 겉으로 율법을 지키는 척 하는 것이 통하지 않는다.

28) 하나님에 대한 불신은 인간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 연결되어 있다.

29) 바리새인은 인간을 스스로 의롭게 될 수 있는 존재로 여겼기에 그들에게는 율법 준수가 인간이 능히 질 수 있는 멍에였다.

30) 그들에게 율법의 멍에는 수치와 고난이 아니라 특권이자 자랑이었으므로 나는 할 수 있다는 자기 확신이 충만했다.

31) 인생의 답을 자기가 가지고 있으니 굳이 답을 하나님을 믿을 이유가 없다. 하나님을 믿을 이유가 없다. 믿지 않는다.

32) 바울이나 베드로는 인간이 절대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존재임을 안다.

33) 그들은 율법을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질 수 없는 멍에로 본다.

34) 나는 할 수 없다는 인식이 분명하다.

35) 자기 안에 답이 있을 수 없음을 보는 것으로 주제 파악이 되는 것이다.

36) 그러니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답을 구해야 하고 하나님이 답 이심을 고백하게 된다.

37) 따라서 나는 할 수 있다가 얼마나 불신앙의 말임을 알겠나?

38) 주님 안에서는 주님이 하시니까 할 수 있다.

39) 율법은 지키라고 주신 것이 아니고 죄를 알게 하려고 주신 것으로 죄를 죄 되게 하시려고 주신 것이다.

40) 율법과 그것을 지키기 위한 율법이 613가지나 되는데 인간은 그것을 모두 지키지 못한다.

41) 유대인들을 보면 율법 지키다가 다 형식주의, 율법주의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42) 지금도 이스라엘에 가면, 지킬 수 없는 율법을 지켜야만 구원받는다고 너희도 못 지키는 것을 지키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라고 한다.

43) 성경구절을 한절, 한절 보면 나와있다.

44) 예레미아 9:25) 아무리 할례는 받아도, 겉으로 할례를 받아도 마음의 할례를 받지 않으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마음이 깨끗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45) 그러니까 살점을 깎아내도(mutilation) 마음과 몸에 전부 할례를 받아도 전부 심판의 대상이라는 것으로 마음을 깨끗이 해야한다는 것이다.

46) 그런데 유대인들은 나도 못 하면서 남들에게는 그것만 지키면 구원 받는다고 하는 것이다.

47) 우리가 이것을 적용해보면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잘못했어요, 살인을 했어요, 남의 가정을 망쳤어요, 그런데 사과도 용서도 받기 싫어요, 사랑하기 싫어요. 그런데 금식만 한다면, 할례만 한다면 내 죄와 상관없이 나 혼자 구원받는 다는 것이다.

48) 이단에 이런 사람들이 몰려간다.

49) 그러면 내 속의 귀신들이 다 물러간다는 것이다.

50) 내 속에 나만, 나만, 이런 열심히 이단들의 열심히 무섭다.

51) 종교적인 열심히 다른 사람들을 삼킨다.

52) 나부터 회개해야 하는데 회개하지 않는 열심이 다른 사람들을 무섭게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원칙을 안 지킨다.

53) 자기만 구원받으면 되니까. 병만 낫는다면 물불을 안 가린다.

54) 하지만 놀라지 마세요. 실은 정반대 현상이 나타난다.

55) 이런 종교일수록 사람들이 열광하면서 몰려든다.

56) 그런데 막상 가보면 이단일수록 사람에게 무거운 멍에를 지게끔 한다.

57) 아무리 교주가 성범죄자여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 무거운 멍에를 당연하다는 듯이 짊어진다. 자살 테러도 마다하지 않는다.

58) 신천지가 온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도 눈도 깜짝하지 않는다.

59) 사람은 무언가 특별한 멍에를 질 때, 부적처럼 종교적 효험이 나타난다고 믿는다.

60) 몸에 이 무서운 할례를 행하면 그러면 거기에 부적 효과가 나타날 것만 같다.

61) 이건 불교에서 3천배를 하면 모든 게 잘 된다는 것과 같다.

62) 그만큼 인간의 종교 심리는 부패해 있다.

63) 그러니까 기능을 잘 못하는 것이다.

64) 인간은 악하고 음란한 것인데 그것을 믿음이라고 착각한다.

65) 막 금식하고, 할례를 행하고 성경을 막 외우고.. 성경을 외우는데 우리가 볼 때 평강이 없고 무서운 사람이 많다.

66) 그래서 이런걸 기막히게 이용하는게 바로 거짓이다.

67) 유대교가 지금 그런 것이다. 중세에 타락한 로마 카톨릭이 똑같은 일을 행했고 오늘날 이단들이 그러하고 교회에도 거짓이 들어와 있는 것이다.

68) 멍에만 지우려는 거짓 종교에 속으면 안된다.

69) 그런데 우리는 병만 낫는다면 할례를 행해서 애가 붙기만 한다면 못할 일이 없는 것이다.

70) 참 복음은 참 자유를 준다. 하나님 나라는 의와 평강과 희락을 준다.

71) 그러면 이 땅에서 뭐든 잘 먹고 잘사는 것이 아니라 좁은 길을 가는데 남들이 볼 때는 고난이다.

72) 그런데 그 고난보다 한가지 더 좋은 게 있어서 고난을 갈 수가 있는 것이다.

73) 그런데 여러분들은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하면 여기서 잘 먹고 잘 살고 애들은 속 안 썩이고 이런 것만 하나님 나라라고 착각한다.

74) 그래서 할례를 행해서 이런 기복적인 복을 위해서 그렇게 열심을 내는 것을 믿음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75) 말씀에 해석이 없는 열심히 얼마나 무서운지를 본다. 동일한 모습으로 행위와 경건주의에 열심을 다했던 죄를 회개했는데 평신도는 하루 1시간, 리더는 2시간, 목회자는 3시간, 선교사는 5시간 배웠는데 하루 기도 5시간을 채웠기 때문에 할례를 강조했던 유대인과 같은 마음이 들어왔다고 한다.

76) 그러니까 내가 5시간 하니까 못하는 사람을 정죄하고 판단하는 마음이, 나는 5시간 했는데 저 사람은 안 한다고. 그래서 할례를 강조한 유대인의 모습이 하루의 기도시간을 강조한 저의 모습이라고 했다.

77) 그러니까 또한 구원을 함께 기도하는 공동체가 중요하다고 했는데 그렇게 5시간을 기도해도 진실됨으로 나누는 공동체는 하나도 없었다고 이야기한다. 이게 선교사님의 현주소였다.

78)  바로 이것이 교회의 신앙고백이다.

79) 누구나 주 예수를 믿기만 하면 은혜로 구원받는 줄 믿습니다!’라고 말로는 신앙고백이 너무 쉬운 것 같은데 주 예수를 믿기만 하면 은혜로 구원받는 줄 믿습니다. 그런데 진정으로 고백하는 일이 잘 되지 않는다.

80) 전적으로 무능하고 전적으로 부패한 자기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절대 보이지 않는다.

81) 인생에 여러 고난을 통과하여서 저절로 회개로 돌이키지 않으면 하나님이 답이 아니고 여전히 내가 답인 것이다.

82) 하나님만이 답이여야 성령의 의논을 할 수 있는데 하나님만이 답이 되려면 베드로처럼 이런 기가 막힌 과정을 다 거쳐야 되니까 그렇다

83) 갈라디아서의 베드로를 보고 너무 슬프고 위로가 되었다.

84) 할례만 받으면 끝이고 한번 죄사함을 받았으면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이야기하니까 보통 사람들은 내가 뭔가 용서하고 그러지 않아도 되니까 열광하면서 가게 되는 것이다.

85) 하나님만이 답이시기 위해서 우리의 사건과 고난이 걸어가고 걸어오게 되는 것이다.

86) 성령의 의논은 하나님이 답이시라는 고백으로 이어진다.

87) 서로 자기 말이 답이라는 의논은 교회와 사회를 세울 수 없다.

88) 생명을 살리는 성령의 의논은 하나님에게서 답을 구하도록 진리의 성령님이 사람을 살리는 진리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줄로 믿는다.

89) 우리는 날마다 우리는 이렇게 날마다 남들에게 무시를 당해도 오뚜기처럼 일어나서 성령의 의논을 해야한다.

90) 성령의 의논은 사람을 살리는 구원의 의논이 되어야한다.

91) 그러니까 돈 뺏어 갔다고 내놓으라고 난리치고, 바람 피웠다고 저 남편, 저 아내 죽여야 한다는 것 말고 다 거기서 구원을 도출해 낼 수 있는 구원의 의논이 되어야한다

92) 나도 너와 똑같은 죄인이라는 형제 의식이 있어야하고 사람이 아무리 어떤 말을 해도 나는 답이 아니고 하나님만 답이기 때문에 우리는 말씀을 보는 공동체 속에 있어야한다.

93) 그러니까 유대인들의 변론은 자유가 없다.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키고….

94) 주의 영이 계신 곳에 참된 자유가 있다.

   95)믿음의 반대는 무서운 열심이다

96)  (blood)로 회복(헌혈)을 해야 피로회복(疲勞回復)이 된다

97)  성령의 의논은 승리가 아니라 진리가 목적이다

98)  높은 마음으로는 사람을 살릴 수 없다

99)  주 안에서 한 형제 의식을 가질 때 성령의 의논이 가능한 것이다

100)  사람은 외모로, 하나님은 마음의 중심을 보신다

101)  바리새인처럼 인생의 답을 자신이 가지고 있으니 하나님을 믿을 수 없는 것이다

102)  자기 안에 답이 없다는 자기 주제를 파악하니 하나님께 답을 구하는 것이다

103)  율법은 지키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죄를 죄로 알라고 주신 것이다

104) 마음의 할례, 혀의 할례를 해야 하는데 육체의 할례를 할지라도 하나님 보시기에 마음이 깨끗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일 뿐이다

105) 금식만 하면, 할례만 하면 내 속에 귀신이 물러간다라고 하는 것이 이단이다

106) 성경을 외우고 금식도 하지만 평강이 오질 않는 것이다

107) 이단은 멍에만 지우려는 거짓 복음이며 참 복음이 참 진리이다

108) 하나님 나라는 의와 평강과 희락을 준다

109) 말씀 해석이 없는 열심이 무서운 것이다

110) 고난을 통과하여 돌이키지 않으면 하나님이 답이 되지 않는 것이다

 

 


Posted by 윤강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