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교회 2019년 5월26일 주일말씀 요약 및 말씀 어록33選 (열왕기상 18장 16절로 29절 갈멜산의 대결/ Showdown on Mount Carmel)]
가.말씀요약
<Prologue>
소명 받고 가는 이 땅에서 아무도 네 말을 안 들을 것이라고 지난 주 이사야 6장에서 말씀해주셨다
아합 시대도 마찬가지라서 엘리야가 가장 힘든 전쟁을 선포한다.
바로 오늘 갈멜산 대결이다.
결국 이 땅에 공중 권세 잡은 자들과의 전면전을 선포한 것이다.
갈멜산 대결은 바알(Baal)선지자와 엘리야의 정면 대결이다.
이 사역을 위해 지금까지 엘리야를 훈련시키셨다.
오늘은 엘리야와 바알의 갈멜산 대결을 알아보겠다.
1) 대결을 하려면 ‘괴롭게 하는 자’라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 (16-18)
항상 기독교 신앙은 이 세상 원수 마귀와의 전투를 비유하는 것인데, 그 시대가 어떤 시대였나?
바알숭배가 국교화 되어 있던 상황이었다.
여호와 신앙이 거의 사라질 위기 되었기에 전쟁도 치열해야 하는 시대였다. 엘리야는 이런 시대에 전국에 지명 수배되어 있는 상태라 목숨 걸고 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기 위해서 이미 목숨 걸고 아합에 간 것처럼 3년 6개월 동안 가뭄을 같이 겪고 사르밧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려낸 사역을 한 것처럼 우리도 가뭄을 겪으면서 현장에서 사람을 살려내는 사명을 감당할 때, 더욱 큰 사명을 주시는 것이다
그것이 갈멜산(Carmel) 대결이며 큰 사명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16절~17절
오바댜(Obadiah)가 ‘어찌하여 엘리야가 있는 곳을 말하여서 내가 죽임을 당하게 하시렵니까?’ 했다.
엘리야(Elijah)가 '이에 내가 아합(Ahab)에게 보이겠다, 걱정 말라'는 한 마디를 듣고 아합에게 말하러 간 것은 오바댜의 놀라운 변화였다.
그런데 오바댜의 신앙이라기보다는 그 동안의 헌신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시고 순종하게 하셨다는 생각이 든다.
오바댜가 걱정하는 것처럼 엘리야가 아합에게 나타났을 때, 아합은 대뜸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라며 엘리야를 지칭한다.
아합은 3년 반 동안의 기근을 엘리야 탓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엘리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을 뿐인데 아합의 수준에서는 엘리야 때문에 당한 고난으로 믿고 있는 것이다.
‘고난이 축복이다.’ 라는 것은 성경 말씀인데, 마치 김양재 표 말씀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 같다.
고난이 생기면 제 이름을 떠올리는데 축복이 오건, 고난이 오건 떠올리는데 그 마음은 각자 다른 것 같다.
어쨌든 미워해도 제 이름을 떠올리는 건 소망이 있는 것 같다.
아합과 기근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는 겸손함이 없다면, 축복이 와도 하나님의 긍휼을 맛볼 수가 없다.
고난을 해석하지 못하는 사람은 축복도 해석할 수가 없다.
아합에게 깨닫고 회개하라고 주신 3년 반의 가뭄은 그 동안 마음을 완고하게 한 그에게는 고통 외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한 사람의 회개하지 않는 마음으로 인하여 수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다.
(예화 1)
오늘 갈멜의 대결이 나와 무슨 상관이야. 이게 핵전쟁이야? 하는데 우리 집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갈멜산의 대결(showdown on the Mount of Carmel)이다. 그래서 한 가족의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이 남편은 아들 고통이 10년이나 계속되는데도 회개가 안 된다는 것이다. 아들 문제만 아니면 문제가 없다고 하는 것이다. 예목도 받고 부 목자까지도 했는데도 마음이 힘든 상태라 교회와 목장에 대하여 냉담한 상태라고 나눔을 하셨다. 이분에게 아들고통 외에는 의미가 없는 것이다. 없어지기만 바라는 고통 그 외에는 의미가 없는 것이다.
18절
엘리야(Elijah)를 지칭하며 ‘괴롭게 하는 자’(Is that you, you troubler of Israel?)라고 하니 엘리야는 이에 반박해서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자는 내가 아니라 아합(Ahab)과 아합 아버지의 집이며 이는 그들이 여호와의 명령을 여기고 바알(Baal)을 쫓았기 때문이라고 정확히 밝힌다.
아합에게 있어서 기근의 문제는 지도자로서 대를 이어 세상과 돈과 번영을 쫓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라고 정확하게 해석해주었다.
내 문제는 다른 누구 때문이 아니라 내가 세상을 사랑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합 삶의 결론이라는 것이다.
‘’모든 것이 네 삶의 결론’이라고 이야기 해주면 기분이 참 나쁘다.
이것을 아멘으로 받아들이기가 참 어렵다.
불신결혼을 막고자 해도 자녀 둔 엄마가 '무슨 말을 할 수 있냐'고 하고 이혼을 막고자 해도 ‘다 형편이 있는 거라고, 왜 다들 나를 괴롭게 하냐’고 한다.
불신결혼이나 이혼 후에 힘들어지면, ‘당신이 결혼을 축복하지 않아서 이렇게 됐다’며 원수가 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미운 마음이 들면 답이 없는 것이다.
아합이 엘리야를 이렇게 미워하는 것을 보면서 올바른 복음을 전하면 원수가 되는 일이 많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을 인간적으로는 못한다. 무릅쓰고 해야 하는 것이다
함석헌의 책 <너 자신을 혁명하라> 中에서 ‘나는, 하나님! 제발 미운 마음으로 하지 않게 해주시옵소서 라고 기도하고 기도한다. 부끄러운 고백이다.’ 라는 구절이 있다
미워하지 않으려는 마음은 사랑보다 더 실천하기 어려운 것이다.
미워해도 가책을 느끼지 않고 미워해도 정당화되는 감정이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마음의 적인 것이다.
아합처럼 나를 왜 괴롭히냐고 우상숭배해서 기근이 올 것이다. 왜? 그 말을 전해준 엘리야보고 ‘왜 나를 괴롭히냐고 적반하장 격으로 힐난한다.
얼마나 아합이 주관적인 생각으로 엘리야를 미워하는지 모른다.
잘난 남편도 아들이 속을 썩히니깐, ‘아들도 밉고, 아내도 밉고, 김양재 목사님도 밉다’고 나눔을 했다고 한다. “아들이 속을 썩히는데 왜 제가 미워요?” 우리가 그러는 것이다.
말씀이 안 들어가면 다 미운 것이다.
[적용]
-여러분은 장차 받을 환란인 복음을 전함으로 기근이 왔을 때 전한 자를 괴롭히는 자인가? 엘리야처럼 전하고 괴롭힘을 당하는 사람인가?
내 속에 속은 욕심을 인정하기 싫어서 탓하고 있는 그 사람이 나를 위해 가장 많이 기도하고 있는 사람이 아닐까?
-기근이 올 때 아합처럼 남 탓 하나?
-괴롭힘을 주는 사람인가? 당하는 사람인가?
2) 850대 1의 대결입니다. (19절)
바알(Baal)도 여성을 무시하는지 아세라(Asherah)는 한 번만 언급되고 언급이 안 된다.
바알 속에 아세라가 포함이 된다는 것이다.
바알이 남성이라면 아세라는 여성인데 동성애도 남자가 월등 많더니 요즘 여자도 만만치 않다.
기다리고 있다가 이제는 대결을 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가정에서 분연히 이야기 할 때가 있다.
무조건 순종이 우상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예화 2)
제가 장로 집에 시집갔는데 ‘교회 못 나가게 하면 나도 이혼이다.’ 남편에게 거듭나서 선포를 했더니 이 남편이 처음으로 세게 나가니까 성경책에다가 ‘교회를 나가겠음. 10월 며칠. (싸인)’을 했다. 5년 동안 맹종만 하다가 거듭나고 보니깐 구원 때문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목적을 분명히 해야겠다고 단호하게 나가니 도리어 주춤해서 교회를 나가게 해주었다. 물론 영육간의 전쟁은 계속 되었지만 가끔 순종자체가 우상이 되어서는 안 될 때가 있기 때문에 목적을 분명히 할 때가 있다. 유교에서는 이런 것을 모르기 때문에 무조건 참다가 화병이 나고 바람나고 그런 것이다.
인간에게는 선한 것이 하나 없다.
중요할 때마다 내 전쟁의 목표가 하나님인 것을 선포하고 치고 빠지고 해야 한다.
선포하고 딱 죽어지고를 해야 한다.
엘리야(Elijah)는 아합을 만나 온 이스라엘과 이세벨 상(Jezebel’s table)에서 빌붙어먹는 바알의 선지자 450명, 아세라 선지자 400명을 갈멜산에 모으기(Summon the people from all over Israel to meet me on Mount Carmel. And bring the four hundred and fifty prophets of Baal and the four hundred prophets of Asherah)를 요청했다.
그런데 백성들만 힘들지 아합과 이세벨의 후원을 받는 선지자 850명은 고난을 모르고 물질적 풍요함을 누렸을 것이다.
온 백성이 고난을 받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코에 걸어놓고 ‘역시 돈이 좋아, 명예가 좋아’하면서 행복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잠시 뒤에 이들이 망한다. 그러니까 망하기 전에 여호와만 참 하나님이시고 우상은 가짜라고 이것을 엘리야에게 증거하기를 원하셨다.
우리의 인생의 소명이 여호와만 진짜고 세상은 가짜라고 그 얘기를 해야 하는 것이다.
아직 망하지도 않은 세상에서 망한다고 하니 욕 먹을 일이다.
부부 간에도 망하지 않았는데 망한 것이라며 이 땅은 영원히 망할 것이니 잠시 뒤의 일을 얘기해야 하는데 그것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제가 괜히 눈물을 흘리는 것이 아니다. 너무 말을 안 듣기 때문인데 갈멜산의 그 싸움은 850대 1의 매우 외로운 싸움이다.
세상에 우상이 850가지나 되는 것이다.
우상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그래서 인생이 죄인이고 모두 아비 마귀에서 난자라는 말이 맞다.
믿음의 분량은 거짓을 말하지 않는데 있다.
이 세상은 거짓의 세상이니 살려면 다 거짓으로 상황을 피해간다.
‘거짓을 얼마나 거짓 같지 않게 하는가’가 성공의 포인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거짓을 거짓 같지 않게’를 염두에 두고 우리 모든 지식은 다 이것을 향해 나가는 것 같다.
믿고 나서도 믿음을 위해서 선의의 거짓이라며 여전히 거짓을 행한다.
분별이 참 안 되는 것이다.
선의의 거짓보다는 하나님 앞에 섰는가가 중요한데 믿음의 분량대로 하나님의 뜻을 아는 만큼 거짓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 성령이라서 택자들의 거짓말은 연약함으로 느껴지는 게 있다.
우리는 택자라도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늘 잘 못했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진리의 성령님이 도와주셔서 건강한 교회라면 말씀이 공동체에 점점 자리를 잡는 것이다.
진리가 자리 잡는 만큼만 거짓이 없어진다.
그러면 날마다 안 변하는 것 같아도 날마다 거짓의 사람과 공동체를 보면 딱 알게 되어 있다. 알게 되니깐 우리가 괴로운 것이다.
불신결혼이 왜 힘든가 하면 처음에는 믿음의 분량만큼 힘들지 않다.
겉으로 보기에는 똑같다.
결혼하고 지나고 보면 시작점이 다르니깐 점점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공존하지 못하니깐 힘이 들기 시작하는 것이다.
* 벨리알(히브리어: בְּלִיַּ֫עַל, 라틴어: Belial)은 유대교 외경에 나오는 단어로 부도덕이나 가치 없음과 같은 악에 성격을 부여하여 사용하는 말이다.
단어의 어원은 명확하지 않지만, 히브리어로 ‘가치 없는 자’, ‘건달’, ‘야비한 자’, ‘사악한 자’라는 뜻이 있다. 벨리알 이라는 이 말은 보통명사였지만 이윽고 악마 그 자체로 여겨지게 되었다. 사도 바울로는 사탄과 같은 뜻으로 이 말을 사용하였다. 희년서에는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을 “벨리알의 아들”이라고 기술하였다.
고에티아에서는 벨리알이 매우 정중한 악마라고 말하고 있다. 벨리알은 또한 거짓말과 범죄의 악마이다. 지옥의 제후 가운데 하나로서 그는 악마 군단 80개를 통솔하고 있으며 그의 통치는 지옥의 북쪽 지역까지 뻗쳐 있다. 그는 지구의 원소를 통제하며 지상에 거주하는 악마들 위에 군림하고 있다. 지옥의 다른 제후들로는 올리아스, 아스모데오, 바싸고 등이 있다. (출처: 위키백과)
하나님의 말씀을 빙자해서 이단들이 하는 일은 온통 거짓말이다.
신자를 빼가야 하니깐 끊임없이 속이고 속여서 빼간다.
한 교회 10년쯤 잠복하여 거짓을 행하고 있는데 다들 그 거짓말에 넘어가는 것이다.
사단이 666이라 비슷해 보이는 거짓말을 연구하는 것이 그들이다.
교회는 진리의 성령이신 말씀을 봐야 하고 말씀대로 살아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교회는 도덕과 윤리를 넘어서는 것이다.
도덕과 윤리를 따라갈 정도가 아니라 넘어서는 것이다.
그래서 도덕과 윤리는 기본인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 도덕과 윤리도 잘 안 되고 있다.
우리는 말씀 봐야 하고 말씀대로 살아내야 되고 그래야 이단이 한 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을 간다. 할렐루야.
[적용]
-여러분의 우상은 몇 명인가?
-850명의 우상이 달려드는데 이 대결을 선포할 마음이 있나?
3) 갈멜산 대결에는 머뭇거려서는 안 된다. (20절~24절)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언제까지 (하나님과 바알)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갈팡질팡)하려느냐? (How long will you waver between two opinions?)
원어는 두 바이트, 두 나뭇가지 사이에서 절뚝거리고 있느냐고 한다.
‘절뚝거리다’는 뒤에 26절에도 나오는데 바알 선지자들이 단 위에서 ‘춤추며 뛰놀다’ (they danced around the altar they had made)로 번역되어 있다.
‘머뭇거리다’는 ‘뛰놀다’와 같은 의미로 썼고 원어는 ‘절뚝거리다’ 이다.
두 나뭇가지 사이에서 바알과 하나님 사이에서 가만히 머뭇거리는 것 같아 보아도 우리는 머뭇거리던지, 뛰놀던지 모두 쩔뚝거린다는 뜻으로 다 위태하다는 것이다.
즉,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 선지자를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있으며 이스라엘의 왕인 아합이 전국적인 기근의 고난을 당하면서도 지금 구원자가 바로 앞에 서있는데 구원자 엘리야를 따라야 할 때지 대결할 때인가?
말씀을 보면 누가 적인지. 누가 아군인지를 모르는 것이다.
사업이 망하고 아이가 병들어 난리가 났는데 참된 주의 선지자와 대결할 때인가? 라는 말이다.
이 기근의 때에 아합은 850명의 바알 선지자를 먹이고 있다.
백성들은 다 죽어가고 있는데 할 일을 모르는 것이다.
아무리 임금이라고 할지라도 진리의 성령님이 임하지 않으면 무슨 일을 해야 될지 모르는 것이다.
반대로 엘리야는 사르밧 과부의 신음에 귀를 기울였던 사람이다.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야는 거짓된 신앙을 버리고 하나님을 따르라 하는데 최고 층인 아합이 무슨 말인지 못 알아 듣는 것이다.
어디나 리더가 중요한데, 백성들은 둘 사이에서 바알 편 850명이 모이고 엘리야는 한 명밖에 없으니 머뭇머뭇 거릴 수밖에 더 있겠나?
사람들이 많이 모이면 진짜 같고 한 사람만 모이면 가짜 같은 것이다.
큰 교회는 가짜일 수도 있고 진짜일 수 있다.
그런데 사람들의 마음은 많이 모이면 진짜 같은 것이다.
우리들 교회도 많이 모이니까 오신 분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아직도 ‘머뭇머뭇’ 거리면서 판단이 안되어 머뭇머뭇하며 등록하지 않으신 분들이 많다.
분별이 끝나지 않아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하고 계시는데 계속해서 분별하시길 바란다.
진짜인지 가짜인지, 따르라 하니깐 백성들이 한마디 대답하지 않았다(But the people said nothing).
(예화 3)
선생님 한 분이 신우회에서 큐티를 전하려고 하시는데 너무 거룩해 보이는 목사님 사모님이 방해를 한다고 한다. 전하는 선생님은 다른 분들에게 큐티 책도 사다 드리고 나눔도 뽑아다 드리는데 그것을 무시하고 멸시하면서 ‘나도 큐티 다 해봤다. 그런데 그게 쓸 데가 없어서 큐티한 것 다 버렸다. 큐티 한다고 뭐가 되는 것이 아니다. 아무개 선생님은 큐티 한다고 하면서 무엇을 그렇게 울고 다니냐?’ 이러면서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죽어 주셨으니 우리는 기쁜 것 밖에 없지 않냐? 우리가 잘 못 믿으니깐 자꾸 우는 거다.’ 라고 했단다. 그러니 다른 선생님들이 그 사이에서 헷갈리는 것이다. 한 쪽에서는 큐티를 전한다고 하면서 울고 가정에 문제 많고, 다른 편에는 목사님 사모라면서 말도 그럴 듯하게 하고 하니까 어느 쪽인지 정말 머뭇머뭇하는 것이다. 분별이 되겠나?
예수 믿으면서 우리는 왜 눈물을 흘려야 하나?
우리는 다 죄인이기 때문에 눈물을 흘려야 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5장4절에 보면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위로를 받을 것’(Blessed are those who mourn, for they will be comforted.)이며, 요한계시록 7장 17절 말씀에도 ‘네 눈에 눈물을 씻어주실 것이다’(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For the Lamb at the center of the throne will be their shepherd; he will lead them to springs of living water. And God will wipe away every tear from their eyes.” )고 했다.
흘릴 눈물이 있어야 천국에 가면 하나님께서 씻겨주시지 않을까?
우리는 성경을 토씨 하나 안 빠지고 봤기 때문에 해석이 되는데 사모님처럼 훼방하는 분이 있다고 해도 감정적으로 흥분할 것도 아니고 ‘목사님 사모인데 어떻게 저러나’ 하는 생각부터가 미성숙한 생각이다.
먼저 내가 말씀으로 성숙한 사람이 되면 그런 갈등이 있어도 지혜롭게 대처하고 해결해 갈 수 있는 것이다.
그게 아직 안되니 그 선생님도 사모님을 통해 훈련 받아야 할 것 있는 것이다.
이 십자가 지신 예수님처럼 복음이 쉽게 전해지면 얼마나 좋겠나?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으나 아무도 영접하지 아니했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850대 1의 대결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복음을 전하려고 하면, 힘들 때 진리의 성령님이 오셔서 효과적으로 도와주시는 것(Effective Power of God)이 바로 진리의 성령님이니까 말씀 큐티를 해야 하는 것이다.
아무리 훼방을 놔도 큐티는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나중에 시작은 아주 미세했지만 다른 곳에 가게 된다.
미사일이 다른 곳에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22절
엘리야도 힘이 든다.
엘리야가 '홀로 남았으나'라고 말하는 것은 19장 18절을 보면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7천명이 아직 남아있으니, 한 명도 없다는 뜻은 아니고 현재 싸우는 사람은 자기 밖에 없다라는 것이다
(왕상 19:18)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Yet I reserve seven thousand in Israel--all whose knees have not bowed down to Baal and all whose mouths have not kissed him.")
더 나아가서 갈멜 산에 모인 북 이스라엘 백성마저도 엘리야의 편이 하나도 없다는 얘기를 하는 것이다.
실제로 하나님과 바알 중에 택하라고 하니까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았다고 했으니 엘리야 편이 없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얼마나 배반감을 느꼈겠나?
백성들은 무엇이 진리인줄 알면서도 자기 삶이 걸린 고백이기 때문에 대답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전하는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는다고 하면서도 자식이나 남편, 유익이 걸린 문제가 생기면 언제든지 대답을 하나도 못 하는 것처럼 이렇게 말씀을 외면할 수 있다.
23절~24절
이 얘기를 해석하면, 엘리야는 바알의 선지자들에게 이 두 송아지 가운데 좋은 것을 네가 선택하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차후에 공평치 않은 제물이었다는 결과가 나와 뒤집을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좋은 송아지를 고르라고 한 것이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를 때, 불로 응답하신 그가 하나님이라고 하였는데 백성들이 다 ‘옳도다.’ (What you say is good)고 했다.
그런데 백성들은 옳다고는 했지만 여호와와 바알 사이에서 (떼거리로 몰려 서 있는 선지자들로 인해) 바알로 마음이 다 기울어졌기 때문에 이것은 엘리야하고 겨루자는 것이었다.
반대쪽에서 그 얘기를 듣는 것이 ‘옳도다’가 아니고 지금 바알 편에 이미 선 것이다.
‘말은 그 말이 옳도다’라고 했다.
잘 생각해 보면, 두 송아지가 ‘좋고 나쁘고’는 백성들의 삶에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
예를 들어서 말씀 전하는 두 사람을 놓고, 김양재 목사가 옳으냐, 아무개 목사가 옳으냐고 물으면 우리들 교회 성도라면 쉽게 (‘김양재 목사님’) 외칠 것이다.
당연히 ‘은혜 받는 것은 김양재 목사가 옳아’라고 하지만 그런데 개인을 붙잡고 ‘김양재냐 자식이냐’, ‘말씀이냐 자식이냐’를 물으면...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불신결혼, 이혼 등 개인의 문제로 도전하면 갑자기 꿀 먹은 벙어리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따르라고 했더니 한마디도 안하고 있다가 불로 응답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고 했더니 다 ‘옳도다’고 응답하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 얘기인 것이다
여러분에게도 묻겠다. ‘말씀인가, 자식인가?
(목사님 고백/ 예화 4)
저에게도 이것을 적용해보면, 저도 머뭇거리기를 잘한다. 신중한 것도 있지만, 제 욕심인 것 같다. 학교 다닐 때 살아남아야 되니까. 늘 공부를 잘해야 했다. 그것이 목회까지 이어져 맨날 설교도 잘해야 되고, 이런 부분들이 저에게는 물론 가지 쳐야 될 것이 있는 것 같다. 심히 머뭇거리기를 잘한다. 물건 살 때, 무언가를 정할 때도 머뭇거리기를 잘한다. 제가 목회를 하는 것은 기적이다. 하나님께서 저의 한 부분을 쓰시는 것이다. 부족한 부분이 너무 많다.
[적용]
-자녀의 입시를 놔두고 어느 학원 어느 선생님께 공부를 시키면 붙는다는 말과 먼저 말씀으로 양육시키며 큐티시키고 기도하라는 말 사이에서 여러분은 머뭇거리나?
아닌가? 당연히 말씀보고 큐티 하는 게 먼저다!
-여러분은 머뭇거리고 있지 않나?
-아니면 주일날 ‘어느 입시학원 가면 딱 들어 간다’고하면 머뭇거리지 않나?
-‘말씀이냐, 자식이냐?’에서 여러분은 머뭇거리나? 말씀인가? 자식인가?
-나와 아이들의 목장 참석과 양육의 부르심에 한마디도 대답하지 못하고 있지는 않나?
4) 불러도 대답할 수 없는 바알과의 대결이다. (25절~29절)
(“불러도 대답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 지쳐 부를 그 이름, 바알! 바알 바알 떨더라)
이기는 싸움이다.
엘리야의 이 제안은 그들이 보기에는 절대적으로 좋은 송아지를 골라서 이길 것 같지만 바알 선지자들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한 것이었다.
바알은 참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믿음 있는 사람들은 놀라지 않는데 왜냐하면 하나님 자체가 상급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엘리야가 구체적인 방법으로 제안을 했고 너희가 먼저 택하라고 자신 있게 제안을 하니까 수적으로도 월등하여 거절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뛰놀다’는 ‘머뭇거리다’와 같은 ‘절뚝거리다’라는 단어라고 하였는데 아무리 이름을 불러도 바알이 응답이 없자 이 선지자들이 뛰놀았다.
광란의 춤(frantic dancing)을 추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을 본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알 선지자들이 지도자니까 따라가는 것이다.
백성들도 바알선지자가 하는 대로 광란의 춤을 춰가면서 같이 절뚝거리는 것을 효과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예화 5)
북한 사람들은 아침부터 밤까지 위대한 동지자 이름을 부르면서 신혼여행도 김성일 업적이 서린 금수산으로 망경대로 간다. 우상을 인격적으로 사랑해서 간구하는 것이 아니고 불을 달라고 내가 원하는 것을 달라고 애원하고 있다. 눈물로 애원해도 세상을 향해 간구하는 것은 응답 받을 수 없다. 위대하신 수령이 영원히 함께 있다 해도 그렇게 위대하신 동지자 이름을 부르는데 정말 열렬히 박수치고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그런데 어쩌자고 못 먹고 못 살 수 있을까? 평양에 가장 중심이라고 보여지는 고려호텔에서 본 야경은 암흑 그 자체였다. 식사할 때도 넉넉히 시키고 남기면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이 먹을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일부러 식사도 남길 정도로 주문을 했다. 그렇게 바알을 부르면 잘 살게 해줘야 하는데...
[적용]
-아침부터 낮까지 어떤 이름을 부르고 있나?
말이 씨가 된다는 것이 여러분의 주제가다.
-기복적인 언어를 주문처럼 입에 담으며 돈, 돈, 돈 하면 돈이 응답한다고 하면서 돈을 부르짖고. 합격, 합격, 합격하면 합격이 온다면서 고대하고 눈물 흘리며 소리 지르며 뛰놀면서 결국 절뚝거리는 길을 가고 있지는 않나?
27절.
‘신인 즉’(Surely he is god!)은 신이 아니라는 뜻이다.
엘리야가 이 바알을 조롱하고 있다.
왜 응답을 안하고 계시나 묵상하고 계신가?(Perhaps he is deep in thought.) 잠깐 나가셨나? 용변 보러? (busy?)
지금 길거리를 행하고(travelling) 계시는가? 늦잠 주무시면 깨워야 하나? (Maybe he is sleeping and must be awakened) 하면서 굉장히 조롱을 한다.
이 성경을 구원받지 않은 시각으로 보면 너무나도 엘리야가 무식해 보인다.
어떻게 저렇게 푸쉬(push)를 하면서 전도를 할 수 있는가라고 생각하면 안 되는 것이 사단은 조롱의 대상이지 결코 타협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모두를 사단으로 보면서 부모, 형제, 배우자를 조롱하라는 것은 아니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보니 남편보고 사단아 물러가라고 하는 것이다.
절대로 믿지 않으면 결혼도 안 시킨다
사단은 조롱의 대상이지 타협의 대상이 아니다
죄를 조롱하라는 것이지 죄인을 조롱하라는 것이 아니다.
죄는 결코 타협의 대상이 아니다.
이것을 잘 모르니까 사랑한다고 그 말 다 들어주고 하다가 결국 망하는 것이다.
큐티를 하니까 10년 뒤 20년 뒤를 내다보게 된다.
말일에 우뚝 선 십자가, 예수그리스도를 보았기 때문에, 그렇게 해서 적용을 길러 놓았기 때문에 우리들 교회가 계속 사건이 와도 살아남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못 살아도 (믿음의) 가능성을 보고 결혼해야 나중에 실망할 것이 없어서 굉장히 칭찬 받는 결혼이 되는 것이다.
지금 다 되어있는 사람과 하면 망할 일 밖에 없는 퍼센티지(percentage)가 많다.
그래서 믿음을 보고 결혼하라는 것이다.
형편없는 여러 조건 가운데서도 우리들교회 청년들이 믿음을 보고 결혼을 했기 때문에, 또 워낙 없고 병 걸렸고 망했음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했기 때문에, 애초 기대 없이 결혼을 했기 때문에, 이혼을 아무도 안 하는 것으로 이것이 잠시 뒤의 것을 내다보는 것이다.
28절(이에 그들이 큰 소리로 부르고 그들의 규례를 따라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들의 몸을 상하게 하더라/So they shouted louder and slashed themselves with swords and spears, as was their custom, until their blood flowed)
구약 성경에 ‘상하게 하더라’가 11번 사용되었는데, 자해 행위가 바알 예배의 정규 의식으로 차지했다는 것이다.
신명기 14장 1절에는 ‘너희는 자기 몸을 배지 말며’(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자녀니 죽은 자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베지 말며 눈썹 사이 이마 위의 털을 밀지 말라/ You are the children of the LORD your God. Do not cut yourselves or shave the front of your heads for the dead,)라고 한다
따라서 피가 흐르기 까지 자기 열심으로 무섭게 굶어 가며 기도 응답을 외치지 말라는 얘기다.
29절(이같이 하여 정오가 지났고 그들이 미친 듯이 떠들어 저녁 소제 드릴 때까지 이르렀으나 아무 소리도 없고 응답하는 자나 돌아보는 자가 아무도 없더라/ Midday passed, and they continued their frantic prophesying until the time for the evening sacrifice. But there was no response, no one answered, no one paid attention.)
돈과 권세와 성공을 위해 빌고 피 흘리고 외치는 것이 우상 섬기는 자의 특징이다.
돈과 명예, 권세의 우상을 섬기면 큰 소리로 부르고 빌다가 스스로를 망치고 피 흘리고 절망하고 낙망하게 된다.
자식이 우상이기 때문에 자식을 어떻게든 내 뜻대로 해보려고 자식과도 피 터지게 싸운다.
응답 하지도 할 수도 없는 것이 자해이며 이 시대우상이다
어떤 아이가 자해를 해서 온 몸에 핏자국이 있다고 했는데...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의 피로 살렸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이 피다.
자살기도를 했던 아이가 중학교 아이에게도 그런 일이 있었는데 가서 흔적들을 보이며 나도 그랬다고 하니 제압이 한 번에 딱 되었다고 한다.
우리는 그렇게 다 쓰임을 받고 있다.
(예화 6)
아까 말했던 가족의 아내집사님은 아들이 그렇게 돈 사고를 쳐도 눈물을 흘리고 용서를 구하면 아들을 용서해야 된다며 엄마가 끝까지 믿어주면 아들은 돌아온다는 믿음으로 꽉 차 있어서 10년 동안 어떤 말도 안 들었다는 것이다. 목장, 초원, 평원지기의 그 어떤 말도. 그때마다 마음속으로 당신들의 아들이면 범죄에 노출되도록 하겠냐, 용돈을 넉넉히 주면 사체는 안 쓸 거라면서 아들이 중독으로 깊이 들어가는 것을 믿지 않고 아들이 ‘다신 안 그럴 거야.’ 아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만 믿고 싶었다는 것이다. 남편과 공동체에 나를 속였다는 것이다. 오직 아들의 회복에만 주님께 울고 부르짖었다고 한다. 그래서 주님의 권면을 애써 듣고 싶어 하지 않는 불순종의 죄를 지었는데 이분만 그런 것이 아니라 돈이 있는 부모들은 예외 없이 다 자식이 중독에 걸려 도박을 하고 경마를 하고 다 갚아 주더라. 없어질 때까지 갚아주고 다 같이 망하더라. 응답하지도 않고 할 수도 없는 것이 이 시대의 우상이다. 얼마나 열심히 새벽기도에 철야기도에 잠도 안자고 금식까지 하면서 땀 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자식의 입시와 성공을 위해서 빌고 울고 부르짖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아들 돈 갚아주느라고 그렇게 갚아주면 안 되는데, 갚아주지 말라고 그렇게 처방을 하는데도, 돈 갚아주느라 남편이 돈을 잘 버는데도 알바를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살려달라, 구원해달라’고 기도하면서 맨날 기도하면서 내 돈 내놓으라고 기도하는 것이 특징이다. “살려달라, 구원해달라, 내 돈 달라.”
복은 믿음의 길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수단일 뿐이지 절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바알 선지자처럼 복 자체가 목적이 되기 때문에 피 흘리기까지 몸을 상하게 하면서 자신을 망치고 자식을 망치고 가정을 망치는 것이다.
당연히 참 신이 아니니까 내가 돈 신, 자녀 신을 섬기고 울부짖었는데 어떻게 응답할 수 있겠나?
신이 아닌 것에, 우상에게 절하는데 자녀 우상, 돈 우상, 이 세상에 모든 모이는 우상을 섬기는 것인 것이다
[적용]
-내 시간과 물질과 정열을 다 바쳐서라도 반드시 얻기를 원하는 복은 무엇인가?
-물질의 복인가? 자녀의 복인가?
-그 복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한 내 인생 최대의 목적인가? 수단인가?
-내가 이렇게 열심히 예배 나오는 것이 하나님 자체가 상급인가? 수단인가?
-하나님께 빌어서 자녀 잘 되고 돈 벌고, 이게 여러분들의 목적인가?
그러면 하나님이 수단이 되는 것이다
(예화 7)
오늘 등장한 이 부부는 오신지 10년이나 됐다. 좋은 대학에 제일 좋은 직장에 다니고 있는 집사님 부부다. 이 부부는 남북전쟁까지 갈 게 뭐가 있겠나? 내 집에서 일어난 전쟁이 제일 무서운 갈멜산 대결 아니겠나? 10년을 전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부부는 대학 때 운동권에 있었다고 한다. 한 의로움으로 날마다 비판을 했는데 아들이 정반대의 길을 가니까 아이러니다. 아들이 돈 사고를 쳐서 학교만 졸업시키자고, 그럴 때마다 갚아주자고 해서 남편이 결국 갚아줄 수밖에 없었고. 아들한테 매번 돈 주면서 예배 나오라고 했는데 목장에서 그게 비인격적인 것이라고 했지만 집사님이 전혀 듣지 않았다고 한다. 아들이 축구 동호회에게 대관료를 받고 그 돈으로 도박을 해서 모두 잃었다. 그 사람들이 경찰에 고소했다. 그런 사건이 오면 너무 놀라는 것이다. 드디어 교회를 비판하고 목사를 욕하고 들어갔다 나갔다 하다가 올해 초부터 부부목장, 주일예배를 나오고 있다.
내 집안 전쟁이 제일 무서운 갈멜산 대결이다
(예화 8/목장보고서 내용)
목장보고서를 보니까 ‘너무 허무해서 내가 원하는 대로 살고 싶다. 라인 댄스를 해보려고 알아보고 있는데 아내가 목장에 나가면 댄스배우는 것을 허락해준다고 해서 빅딜을 하고 목장에 나왔다.’고 나눔을 했다. 아내가 남편이 목사님을 싫어하는 큰 이유는 제가 말씀대로 살지 못해서 그래요. 2월 15일 부부목장 보고서는 아내가 ‘제가 기본적으로 잘난 것, 돈, 멋진 것을 좋아해요. 그런데 우리 아들을 그렇게 키우고 싶었는데 그렇게 되지 않았어요.’ 남편도 ‘난 욕심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나도 예쁜 가정 만들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는데 안 됐어요.’ 2월 22일 목장보고서는 ‘담임 목사님의 문제아는 없고 문제 부모만 있다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나빠요. 저는 그냥 제가 재수가 없다고 생각해요.’ 3월 12일 목장 보고서는 ‘아들에게 큰 욕심 없이 키웠는데 지금 크게 바닥을 치게 만들어서 속상하다.’고 이렇게 힘들어도 날마다 목장에 나와서 말씀을 나눈 것입니다. 아내가 ‘남편이 저의 신앙이 기복적인 것을 알기 때문에 너무 저를 무시합니다.’ 우리가 믿음이 없어도 다들 무당이 전해지는 말은 좋아해도 무당을 싫어하는 거 다 아시죠? 아내가 무당 같아서 싫은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 없어도 얼마나 한 사람이 중심을 잘 잡아야 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남편은 ‘목사님 말씀 중에서 제일 좋아하는 말씀은 있으면 먹고 없으면 금식하고 천국 간다 인데 우리 아내는 돈을 너무 많이 써요.’ 아내가 요새 회개를 하니 ‘맞다.’고 이런 얘기들을 계속 하면서 아내가 ‘아들이 이렇게 속을 썩이니깐 내가 얼마나 공동체에서 함부로 말을 했나. 내가 얼마나 말실수를 했나. 내가 얼마나 상처를 주는지 몰랐는데 이제 아들의 사건이 오면서 교회를 통해서 너무 많이 가지치기를 하고. 내 세상 욕심 가치관을 다루시고 있는 것 같다.’는 것이다. ‘이제는 돈을 안 갚아주겠다’고 하는 것이 이 분에게 인생 최대의 고난이다. 갚아주고 싶어 죽겠다고 한다. 그런데 목자가 ‘안 갚아줘서 빨간 줄 가도 되겠냐?’고 했더니 ‘너무 많이 도와줬기 때문에 원망할 것 같진 않다’고. 그래서 지금 아들을 살리는 것 같지 않다고 처음 적용을 했다. 육이 무너짐으로 영이 세워지는 은혜를 믿지 못함을 회개하고 우리 아들을 죽이지 말고 살려주도록 기도해달라고. 그렇게 적용을 했는데 지난 주 기도제목이 경찰이 아들을 찾아왔다는 것이다. 이번에는 보험사기를 쳤다는 것이다. 돈 안주는 적용을 하기가 너무 힘든 아내 집사인데 이 집이 정말 갈멜산 전투를 하고 있는데. 부모와 아들이 지금 다 뛰놀며 절뚝거리고 있는 것이다. 머뭇거리고 뛰놀면서. 남편도 10년 동안 구원에 관심 없고 아내는 자기 열심히 뛰노니깐 이것이 있어야 할 일이 아닌가 싶다. 믿음이 없는 남편이지만 10년이 됐으니깐 오늘 설교함으로 이 가정이 회복되라고 설교하는 것이다. 남편이 듣고 상처 받으면 아니 되옵니다. 아내 회개가 시작되기 시작하였는데 유지되기 바라고. 그 동안 아들에게 준 돈 주님께 드렸으면 아들도 남편도 다 구원되었을 거 같은데 그 돈 갚아주느라 알바 뛰면서 자기는 입지도 못하고. 그러시면 아니 되옵니다.
우리들 교회는 이렇게 힘든 청소년과 교사들을 위해서 8월 큐티 페스티발을 공개하는데 힘든 친구들이 많은데 우리들 교회 친구들이 같이 조를 짜서 섬기게 하려고 한다. 교회 청소년들이 큐티를 하는데 우리 목세도 공동체를 보고 너무 은혜를 받았잖아요? 청소년들도 이 공동체를 보고 은혜를 받는데 우리들 힘든 자녀들이 조를 짜면 그 동안 믿음이 없었는데 갑자기 자다가 일어나서 내가 왕년에 이랬거든 하면서 리더쉽이 생길 것 같다. 잘 하는 것으로 섬겼으면 좋겠다. 모두가 강에서 바다로 나가는 역할을 하길 바란다. 힘든 아이들이 왔는데 목장에 들어가면 살아날 수 있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바로 이것이 갈멜산 전투에서 이렇게 승리하는 비결이 될 줄 믿는다.
나.말씀 어록33選
(1) 아합과 기근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는 겸손함이 없다면, 축복이 와도 하나님의 긍휼을 맛볼 수가 없다.
(2) 고난을 해석하지 못하는 사람은 축복도 해석할 수가 없다.
(3) 내 문제는 다른 누구 때문이 아니라 내가 세상을 사랑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4) 미워하지 않으려는 마음은 사랑보다 더 실천하기 어려운 것이다.
(5) 미워해도 가책을 느끼지 않고 미워해도 정당화되는 감정이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마음의 적인 것이다.
(6) 말씀이 안 들어가면 다 미운 것이다.
(7) 믿음의 분량은 거짓을 말하지 않는데 있다.
(8) 이 세상은 거짓의 세상이니 살려면 다 거짓으로 상황을 피해간다.
(9) ‘거짓을 얼마나 거짓 같지 않게 하는가’가 성공의 포인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0) ‘거짓을 거짓 같지 않게’를 염두에 두고 우리 모든 지식은 다 이것을 향해 나가는 것 같다.
(11) 선의의 거짓보다는 하나님 앞에 섰는가가 중요한데 믿음의 분량대로 하나님의 뜻을 아는 만큼 거짓을 말하는 것이다.
(12) 교회는 진리의 성령이신 말씀을 봐야 하고 말씀대로 살아내야 하는 것이다.
(13) 교회는 도덕과 윤리를 넘어서는 것이다.
(14) 우리는 다 죄인이기 때문에 눈물을 흘려야 하는 것이다.
(15) 흘릴 눈물이 있어야 천국에 가면 하나님께서 씻겨주시지 않을까?
(16) 믿음 있는 사람들은 놀라지 않는데 왜냐하면 하나님 자체가 상급이기 때문이다.
(17) 사단은 조롱의 대상이지 타협의 대상이 아니다
(18) 죄를 조롱하라는 것이지 죄인을 조롱하라는 것이 아니다.
(19) 죄는 결코 타협의 대상이 아니다.
(20) 말일에 우뚝 선 십자가, 예수그리스도를 보았기 때문에, 그렇게 해서 적용을 길러 놓았기 때문에 우리들 교회가 계속 사건이 와도 살아남고 있는 것이다.
(21) 지금은 못 살아도 (믿음의) 가능성을 보고 결혼해야 나중에 실망할 것이 없어서 굉장히 칭찬 받는 결혼이 되는 것이다.
(22) 지금 다 되어있는 사람과 하면 망할 일 밖에 없는 퍼센티지(percentage)가 많다.
(23) 그래서 믿음을 보고 결혼하라는 것이다.
(24) 피가 흐르기 까지 자기 열심으로 무섭게 굶어 가며 기도 응답을 외치지 말라는 얘기다.
(25) 돈과 권세와 성공을 위해 빌고 피 흘리고 외치는 것이 우상 섬기는 자의 특징이다.
(26) 돈과 명예, 권세의 우상을 섬기면 큰 소리로 부르고 빌다가 스스로를 망치고 피 흘리고 절망하고 낙망하게 된다.
(27) 자식이 우상이기 때문에 자식을 어떻게든 내 뜻대로 해보려고 자식과도 피 터지게 싸운다.
(28) 응답 하지도 할 수도 없는 것이 자해이며 이 시대우상이다
(29)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의 피로 살렸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이 피다.
(30) ‘살려달라, 구원해달라’고 맨날 기도하면서 내 돈 내놓으라고 기도하는 것이 세상우상과 기복기도의 특징이다.
(31) 복은 믿음의 길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수단일 뿐이지 절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32) 바알 선지자처럼 복 자체가 목적이 되기 때문에 피 흘리기까지 몸을 상하게 하면서 자신을 망치고 자식을 망치고 가정을 망치는 것이다.
(33) 내 집안 전쟁이 제일 무서운 갈멜산 대결이다
다.느낀 점
1) 아합과 기근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는 겸손함이 없다면, 축복이 와도 하나님의 긍휼을 맛볼 수가 없는 것이며 고난을 해석하지 못하는 사람은 축복도 해석할 수가 없고 내 문제는 다른 누구 때문이 아니라 내가 세상을 사랑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라고 하시니 내 믿음의 현주소가 숨은 부끄러움으로 다가옵니다.
2) 미워하지 않으려는 마음은 사랑보다 더 실천하기 어려운 것이며 미워해도 가책을 느끼지 않고 미워해도 정당화되는 감정이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마음의 적인 것이고 말씀이 안 들어가면 다 미운 것이라고 ‘미움론’에 대해 정의해 주십니다
3) 믿음의 분량은 거짓을 말하지 않는데 있는 것인데 이 세상은 거짓의 세상이니 살려면 다 거짓으로 상황을 피해가는 것이 실상인데 ‘거짓을 얼마나 거짓 같지 않게 하는가’가 성공의 포인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거짓을 거짓 같지 않게’를 염두에 두고 우리 모든 지식은 다 이것을 향해 나가는 것 같다고 하시는데 선의의 거짓보다는 하나님 앞에 섰는가가 중요한데 믿음의 분량대로 하나님의 뜻을 아는 만큼 거짓을 말하는 것이라고 거짓말에 대한 실체를 분석해 주시니 은혜롭습니다
4) 교회는 진리의 성령이신 말씀을 봐야 하고 말씀대로 살아내야 하는 것이며 교회는 도덕과 윤리를 넘어서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다 죄인이기 때문에 눈물을 흘려야 하는 것이며 흘릴 눈물이 있어야 천국에 가면 하나님께서 씻겨주시지 않을까라는 말씀에서 은혜를 받습니다. 믿음 있는 사람들은 무슨 일이 생겨도 놀라지 않는데 왜냐하면 하나님 자체가 상급이기 때문이라고 하시니 믿음이 최고의 보약인 것 같습니다.
5) 사단은 조롱의 대상이지 타협의 대상이 아니며 죄를 조롱하라는 것이지 죄인을 조롱하라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씀에서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씀이 떠오릅니다. 죄는 결코 타협의 대상이 아님을 알려 주시니 감사합니다.
6) 말일에 우뚝 선 십자가, 예수그리스도를 보았기 때문에, 그렇게 해서 적용을 길러 놓았기 때문에 우리들 교회가 계속 사건이 와도 살아남고 있는 것이라는 말씀이 우리들교회 정체성으로 느껴집니다. 지금은 못 살아도 (믿음의) 가능성을 보고 결혼해야 나중에 실망할 것이 없어서 굉장히 칭찬 받는 결혼이 되는 것이라는 것이 불신결혼이 왜 안 되는지에 대해 설득력 있는 해석인 것 같습니다. 지금 다 되어있는 사람과 하면 망할 일 밖에 없는 퍼센티지(percentage)가 많으니 믿음을 보고 결혼하라는 것이 금주 주일 말씀에 다 녹아 있는 것 같습니다
7) 피가 흐르기 까지 자기 열심으로 무섭게 굶어 가며 기도 응답을 외치지 말라고 하시는데 돈과 권세와 성공을 위해 빌고 피 흘리고 외치는 것이 우상 섬기는 자의 특징이며 돈과 명예, 권세의 우상을 섬기면 큰 소리로 부르고 빌다가 스스로를 망치고 피 흘리고 절망하고 낙망하게 된다는 해석에 실감이 나고 감동적입니다.
8) 자식이 우상이기 때문에 자식을 어떻게든 내 뜻대로 해보려고 자식과도 피 터지게 싸우는 것인데 응답 하지도 할 수도 없는 것이 자해이며 이 시대우상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의 피로 살렸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이 피라고 하시니 십자가 보혈의 파워가 실감납니다
9) ‘살려달라, 구원해달라’고 맨날 기도하면서 내 돈 내놓으라고 기도하는 것이 세상우상과 기복기도의 특징이며 복은 믿음의 길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수단일 뿐이지 절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인데 바알 선지자처럼 복 자체가 목적이 되기 때문에 피 흘리기까지 몸을 상하게 하면서 자신을 망치고 자식을 망치고 가정을 망치는 것으로 내 집안 전쟁이 제일 무서운 갈멜산 대결이라고 명쾌하게 정의해 주시니 할렐루야입니다.
“불러도 대답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 지쳐 부를 그 이름, 바알!” 결국 바알~ 바알~ 떨게 되는 것이 이 세상 기복신앙과 우상신앙의 결론 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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