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과 마음씀2019. 9. 10. 15:24

[우리들교회 2019 98일 주일말씀요약과 Epilogue어록(사도행전 2:37~41/성령의 선물)]

 

 

<Prologue >

 

제가 암이 권세가 되어 그리스도의 신비를 보여 달라고 기도를 했었는데 3년 만에 지난 주 설교는 정확하게 그리스도에 대해서만 설교하게 하시는 본문이었다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보이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높아지셔서 모두에게 성령을 부어주신다고 하셨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신비가 맞다

성령충만 함을 받고 성령의 설교를 하니 성령의 선물을 주신다고 하신다

저도 다시 살고 높아져서 여러분 모두에게 성령의 선물을 모두 주고 싶다

선물은 공짜이니 받기만 하면 되는데 오늘은 성령의 선물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여러분 모두 받기를 바란다

 

<말씀요약>

 

1. 찔림을 받아야 한다.

 

37,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When the people heard this, they were cut to the heart and said to Peter and the other apostles, "Brothers, what shall we do?")

36절에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찌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Therefore let all Israel be assured of this: God has made this Jesus, whom you crucified, both Lord and Christ.")그들이 이 말을 듣고 그 마음에 찔려에서 무엇에 찔렸는가?

우리를 위해 잘 살고, 잘 죽으신 모델이 되셨고 성령의 설교를 잘 들리게 전했다.

그런데, 이 예수를 너희들이 십자가에 못 박았다라고 결론을 내린 것이다.

빌라도가 판결해서 로마병사들이 죽였지라고 생각했다.

100%죄인인 우리는 그렇게 밖에 모른다.

소위 하나님을 믿는다는 너희 이스라엘 그런데 네가 죽였다.

나와 상관없는 일로 여기다가 내가 죽였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구속사이다.

구속사가 들려야 찔림을 받는다.

내 힘으로 안 되는 그러한 신비한 것이다.

무식하고 겁도 많은 베드로였지만 그의 성령의 설교는 베드로의 능력보다 성령의 선물이다.

백성들을 찔렀다는 것은 청중이 깊이 있게 반응하였다는 것이다.

성령의 말씀으로 찔림 받는 것은 가장 큰 성령의 선물이다.

*히브리서 4:12~13(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과 및 관절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For the word of God is living and active. Sharper than any double-edged sword, it penetrates even to dividing soul and spirit, joints and marrow; it judges the thoughts and attitudes of the heart.)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Nothing in all creation is hidden from God's sight. Everything is uncovered and laid bare before the eyes of him to whom we must give account.)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 속에 인정하고 싶지 않은 죄가 찔렸다는 것이다.

교양 있게 변장을 해도 마음과 뜻을 감찰하신다고 해서, 벌거벗을 것 같이 드러내신다고 했다.

어두운 데서는 익숙한 시각장애인이 더 잘 걸어간다.

육적으로도 병든 사람이 더 잘 걸어간다.

영적으로도 어두운 세상에서 잘 걸어가는 것은 이 세상에 익숙해서 수단을 갖추고, 자기의 더러운 것을 볼 수가 없다.

그런데, 한 줄기 말씀의 빛이 나를 찔러 쪼개니 벌거벗어 부끄럽고 수치를 자발적으로 느낀 것이다.

아프고 힘들지만 구원을 갈망하며 죄 때문에 기꺼이 애통해 하고자 한다면, 하나님은 때마다 성령의 선물을 주신다.

말씀을 듣고 찔림 받는 것보다 좋은 것은 없다

(#연출자 로버트 요한슨, 자기에게 가장 큰 칭찬은 관객의 눈물이라고 했다. 감동의 반응을 말한다. 수많은 음악회 전시회를 가도 눈물을 흘린 적은 없는 것 같다. 우리들교회 때마다 한결 같이 눈물을 흘리게 하신다. 강단에만 서면 눈물을 흘릴 때가 많다. 나는 이성에 더 가까운 사람인데 강단에만 서면 눈물이 난다. 여자라서 과부라서 아니고, 그것보다는 예수님 앞에만 서면 왜 난 작아지는가 때문인 것 같다.)

 

(적용)

-성령의 말씀에 찔림을 받나? 아니면 사람의 지나가는 말에 찔림을 받고 괴로워 하나?

 

2. 어찌할꼬(What shall we do?) 하면서 묻는다.

37,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예를 들어 요한계시록에 초대 7교회 중 사단의 권좌가 있는 버가못 교회에, 날 선 검으로 죄악을 수술하시겠다는 것이다.

내 속에 사단이라는 피고름을 봐야 어찌할 줄을 알텐데, 자기들이 예수를 죽였다고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어찌할꼬하는 이 사람들은 성령의 선물을 받아 할 수 있게 되었다.

자기의 더러움을 보지 못하고 영광은 자기가 다 받고, 수치 조롱은 예수님께 돌리고 있지는 않나?

날마다 나를 위해 죽어주신 예수님이라고 입으로만 부르짖고 있지는 않나?

설교, 목장, 간증에서 들으면 나에게 하는 소리인 것이 들린다.

성령이 임하지 않으면 잘못수치를 모른다.

11살에 뇌성마비에 걸린 눈 깜빡이 시인 미즈노 겐조는 전신, 언어 능력이 다 사라졌다.

그런 그의 시집에 나사렛 예수여, 내가 주를 못 박았나이다 라는고백이 있다.

성령님이 임하시면 아무 죄 없어 보이는 겐조가 찔림을 받고 어찌할꼬? 내가 예수를 죽였다고 하는 그리스도의 신비가 임한다.

불신자와 신자 사이에는 신자가 무조건, 신자들 사이에는 믿음 좋은 사람이 무조건 잘못한 것이라는 것은 내 죄를 보는 만큼 영이 세워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직분으로 보면 목사인 제가 제일 잘못한 것이 맞다.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매사에 난 잘못이 없어 한다면, 성령님의 선물을 받지 못한 사람이다.

온 나라가 나는 잘못 없어라고 한다.

찔림을 받으면 무시하던 사람들에게 형제여!’라고 묻게 된다.

요일 1:1 주님을 듣고 먹고 만지는 사람은 공동체에서 사귐이 있다고 했다.

갑자기 목장에 묻게 된다.

사람들은 돈 건강 떨어져야 성령설교가 들리고 어찌할꼬?’ 한다.

그 동안 경건, 교양, 체면을 가장하고 교회 다녔는데 부도, 바람, 아프고, 들통나서 숨을 것도 없고, 그러니 형제여, 어찌할꼬?’라고 묻게 된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직면하고, 단지 돈이 없는 것이 아니라 나의 더러운 실체를 보게 되는 것이다.

이사야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화로다 나로 망하게 되었도다고 하였다.

천사가 핀 숯을 대며, ‘죄가 사라졌다고 하고 소명을 주었다.

그런데 우리는 찔림도 어찌할꼬?’도 없기에 형식적으로 나오고, 애통도 없다.

그래도 인간은 기복적인 마음이 있어서 믿음이 없어도 교회에 나오긴 한다.

당연히 찔림도 애통도 어찌할꼬?’도 없으니 도리어 성령 받은 사람들을 술 취했다고 조롱하는 것이다.

여러분들 사건에서 내가 주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하는 성령의 선물을 받기 바란다.

나에게 죽어지는 삶의 열매가 있다면, 모두 들을 것 같다.

반드시 생각나서 성령을 받으세요. 소원이고 유언이다.

 

(적용)

-돈이 없어서 어찌할꼬?’ 하나?  성령의 찔림을 받고 어찌할꼬?’ 하나?

 

3. 회개이다.

38

너희가 각각 회개하라.

어찌할꼬 하는 자들에게 회개하라 하였다.

각각 개인구원이니까, 죄 사함 받고 세례 받고 성령의 선물을 받으라고 한다.

순서가 죄 사함-세례-선물이라고 순서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죄 사함 받는 조건으로 성령주심이 아니다

물세례는 그리스도의 외적인 고백으로 성령의 역사도 분명히 있다.

모든 일은 순서적으로 올 수도 있고, 아닐 수도, 동시다발적으로 올 수도 있다.

회개- 세례- 죄 사함이라는 성령선물이 개인의 경험, 믿음의 분량이 각자 다 달라서 그렇다.

초신자가 물세례를 받았는데 회개 성령의 역사일 수 있다.

구원받고 돈 자녀 건강 주시니 그것이 구원인 줄 안다.

이미 이루어진 구원이 있고, Already, not yet!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에 이르는 것이지만 아직 이루어야 할 구원이 있다.

성숙과 성화를 향한 구원이다.

사명 감당해야 한다.

이루어지지 못한 구원이 있다.

그러면 해야 할 일이 세상이 감당 못하는 구원을 위해서 나를 부르셨다.’라고 생각하면 세상을 뛰어넘는 회개를 하라는 것이다.

세상에서 내가 구원을 받아서, 세상에 목맨 사람에게 설명해야 하는데, 내가 떠나지 못해서, 그래서 회개를 하면서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죽인 공동체가 유대인 공동체인데 그들의 조롱을 뛰어 넘는 알지 못하는 기쁨인 성령의 선물이 주님이다

오순절 성령강림은 사명 감당하라는 어마어마한 사건이다

그들은 이미 찔림 받고 어찌할꼬?’ 하는 회개의 상태에 있었다.

베드로의 설교는 너희가 회개하면 이 세상 복을 받는다는 설교가 아니고, 죄가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설교였다.

무엇 때문에 예수님이 죽으셨는가를 알라는 설교이다.

그들이 원하는 메시아가 이 세상의 왕이 아니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진정한 회개를 하라는 것이다.

그래야 복음을 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악한 이 세상에서 탈출하고 싶지 않은 본능이 죽기 전까지 계속 될 것이므로 날마다 세상을 뛰어 넘어야 한다.

이 세상에 내 방식, 내 생각, 내 고집을 내려놓고 회개와 세례는 죽으라는 것이다.

이 세상의 복이 아니라, 상관도 없어 보이는 십자가의 예수님을 내가 못박았다는 것을 날마다 인정하는 것이 회개이다.

성령의 선물로 주시는 회개는 본질적인 회개이다.

한 목자님술도 끊었다가 다시 마시고, 그런데 변한 것이 있다.

삶의 안식을 누리더라는 것이다.

경제적 풍요, 다른 사람 누리는 것을 부당하게 여겼는데, 부러움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내가 잘났는데 나도 잘 살아야 하는데 라고 생각했고 교회 다니기 전에도 세금은 잘 냈다.

그런 것을 따지는 것이 아니고 진짜 리더십을 가지려면 가치관이 문제다.

요즘은 평생 벌어도 안될 것 같은 부자가 불편하지 않아 평안을 누린다고 얘기 한다.

외모 불평도 졸업하지 않았나라는 것은 굉장한 나눔이다.

정말 졸업을 해 가는 이런 가치관의 변화가 성령의 선물이다.

세상을 출애굽 하는 것, 즉 세상가치관을 떠나야 한다.

가치관의 변화가 성령의 선물인 회개댜

내가 못 떠나니 날마다 부족을 보면서 같이 구원의 세계로 가자고, 세상을 끊고 무슨 술은 못 끊나.

그러니 되면서 안되고 맞다. 왜 안되나. 진정한 성령의 선물은 죽는 경험이다.

죽는 경험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안 되는 것이 너무 많다.

오늘 물세례 받았어도 회개 후에도 몸이 기억하는 죄들이 얼마나 많은가?

매일 떼어놔야 한다.

내 자신에 절망하고 안타깝다.

사랑하는 부모 아이 남편 아내 다 안 변하니까 계속되는 아픔이 있는 것이다

오래되면 자기를 부인하는 내 속의 죄를 보게 하신다.

어김없이 어떤 상황에도 자기 죄를 보게 하신다.

문자적 아픔보다 철저히 나에게 직면하여 내적인 죄를 보면서,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닌 공중권세 잡은 자와의 영적 싸움을 처절히 하면서 진정 죽는 경험을 할 때 죄 사함의 은혜를 경험할 때, 효과적으로 도와주시는 성령의 선물이다.

우리는 성령의 선물 받는 것을 주로 방언, 신유 등 신비한 은사를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깨끗함 거룩함 여기 선물은 은사가 아니라 성령 자체이다.

인생의 목적은 거룩인 것과 같다.

반드시 성령세례를 받아야 한다.

4:19 회개하고 돌이켜 죄 사함을 받으라, 성령은 새롭게 하는 것, 거룩으로 가는 것이다.

물세례 받고 밍밍하다면 성령세례를 받으라는 것이다.

이미 와 아직.

주님을 만나 기쁘지만, 목장 가서 기쁘다. 그런데 암, 육신 고통을 만난다.

기쁘기 보다는 하나님 사람을 원망한다.

믿었는데도, (15:15 내가 원하는 바 선을 행하지 않고 도리어 악을 행하는 도다 주님을 부인하고 원망하는 구나)

거듭난 후 사도 바울의 고백이다.

예수 믿고 나는 가는데, 가도가도 또 저기가 거긴가 하며, 또 가보면 고향 땅 우리 천국, 푸른 하늘이 닿은 것 같아 가보면 아직도 안됐다.

되었나 하면 화가 나고 슬프다.

밉고 아니고, 예수 십자가 고통이 나와 상관이 없어서 그렇다.

대 사도 바울도 오로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탄식이 저절로 나온다.

때마다 고백을 하고 살아날 때마다, 죄로 말미암아 죽을 몸인데, 이런 나를 다시 살리셨다는 고백을 하니까, 네가 이 예수를 죽였다 할 때, 맞습니다! 하는 것이다.

8:34 에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복종시키는 것이 가장 어렵다.

이 세상에서 보기에, 윤리적으로는 죄를 인정하지만 증명서가 나오기 전에는 인정하지 않는다.

드러난 것만 인정한다. 자기 속의 음란 시기 질투 본질은 인정 하지 않는다.

언제 인정하느냐, 긴 시간 고통, 나아지지 않는 환경을 통해서, 고통만큼 죄가 보이고, 죄가 보이는 만큼 회개하는 것이다.

나오미에게 3차 흉년을 허락하셔서 진정한 회개를 했다.

나오미는 찬송의 떡집, 본향으로 돌아가는 선택을 했다.

초대 교회도 힘들었다

이 고통 속에서 해석이 안 되는데, 예루살렘 교회에서 성경이 안 되고 있었는데, 성령의 설교가 꿰뚫고 들어오셨다. 고난이 축복이다.

목자가 되셨는데도, 성령 선물이 왔는가 물어보면, ‘잘 모르겠는데요한다면 강력한 성령의 선물을 받아야 한다.

성령 설교가 어렵다는 남자들성령이 임하지 않으면 들리지가 않는다.

저 또한 항암의 고통보다 힘든 것, 아픈 것이 내 자신이었다.

교회와 연관된 사명 때문이었다.

고후11:25부터 바울도 여러 위험을 겪었다.

수고하고 애쓰며 굶고 헐벗었다. 이루 말할 수 없다.

28절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날마다 눌리는 것은 모든 교회를 위한 염려이다.

아프면서 어떤 고난 보다 하루 종일 교회 생각을 했다.

큰 사명이 태산처럼 있는데, 자격 없는 내가 끌고 가야 하니까 모든 것이 회개가 되었다.

무형의 교회를 향한 마음이 불붙었다.

부족함과 사랑 없음이 매일 보였다.

항암도 구주와 함께 나 죽었으니, 최선을 다해 투병했다.

육체가 살아난 거듭난 기분이다. 이 세상의 소망은 조금 내려놓은 것 같다. 한꺼번에 못 내려놓는다.

이 세상을 탈출시키는 것이 조금씩이다. 회개하는 만큼 한 사람이 돌아왔다. 죽은 자가 살아나는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길 바란다. 

(적용)

-여러분의 회개는 입으로 하는 성령의 회개인가? 성령이 선물로 주시는 회개인가?

 

4. (통회 자복하며) 3000명 속 공동체에 들어가는 축복이다.

39,

이 약속은 너희와 자녀, 모든 사람. 시대 장소 초월해서 차별 없이 항상 유효하다.

회개로의 부르심, 구원으로 초청, 구원의 범주는 먼데 사람 국적 인종 차별 없이 예수님 안에서 하나 되게 하시며 이루어 진다.

이런 부르심 받은 공동체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되게 한다.

40

패역한 세대는 신약에서는 오직 여기서만 나타난다.

심판 아래 놓인 음란하고 악한 세대를 말한다.

베드로에게도 경험이 있기 때문에, 확증하여 전할 간증이 있다.

수제자 유다와 내가 다를 게 없다.

나는 예수님을 세 번 저주했으나 자살하지 않고 회개했다.

예수를 따라 다니면서 내 죄를 못 보니까 부활도 내 눈으로 보고 나는 다시 물고기 잡으러 나갔다.

그런데 약속하신 말씀대로 예수께서 나를 찾아와 사랑하느냐 물으시고 회복시켜주시고, 수치 치명적 죄를 오픈하고 유다대신 맛디야를 채워놓으니 약속대로 성령님이 임했다고 전했을 것이다.

패역한 세대가 좋아하는 바알 공동체가 또 있다.

새 공동체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패역한 가치관에서 돌이켜야 한다.

영원히 세상에서 탈출이 안 될 수가 있기 때문이다.

41: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으니 이 날의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Those who accepted his message were baptized, and about three thousand were added to their number that day)

말씀을 받은 사람이라고 했다.

성령은 말씀을 통하여 온다.

성령 말씀 능력은 한 단어로 보면 된다.

내 아내 남편이 죽겠다고 하면, 그게 나와 무슨 상관 있나? 내가 예수를 죽인 것이다.

삼천 명은, 설교 듣고 찔림받 아 마음을 찢어 통회하는 사람들이 모였다.

120명 성도로 시작한 초대교회가 3000명 새 신자 양육을 시작한 것으로 그 후에는 5000, 그 후 숫자는 의미가 없는 것이 전 세계에 퍼져나가고 2000년 동안 우리들교회까지 폭발적 부흥으로 이어졌다.

성경에는 남자기록으로 나와 있으니 여자와 아이까지 합하면 3,000명은 만 병으로 올라갈 수 있다

전무후무하게 예루살렘에 놀라운 일인 것이다

복음은 영원히 전해져야 할 것으로 성령의 설교가 이렇게 힘이 있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어주시니까, 내가 죽고자 하면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때가 차지 않으면 내가 아무리 죽어도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당시 십만 명 인구 중 오순절에 3%회심은 적은 수지만 놀라운 일인데 소위 믿는 사람들, 3000명만 반응한 것이다.

성령의 설교가 이렇게 powerful하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어지시니까 이런 일이 일어난다

이는 찔림 받고 마음 찢는 통회하는 사람의 수가 3,000명이라는 것이다

여기 온 사람 이 3000명은 자기의 억울함 풀러 온 것이 아니고 미워서 아파서 못 살겟다고 온 사람도 아니고 내가 성령 좀 받아야겠다고, 은사 좀 주시라고 온 사람도 아니다.

찔림 받고 어찌할꼬 하면서 온 사람들이다.

똑같은 말씀을 듣고 3000명 속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은 사람이 많아도, 회개하는 3000명을 주목해 보신다.

숨어 있어도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알아 보신다.

암 투병 도중에도 교회는 10%부흥하였고, 창립 6.3 6개월 밀렸던 사람 200명이 토요일에 합동 세례를 받았다

 

 

(적용)

-여러분은 통회 자복하는 3000명에 속하나?

-누구에게 확증 받고 구원받으라고 권면하겠나?

 

<Epilogue 어록>

 

내 가치관의 변화가 성령의 선물인 회개다

진정한 성령의 선물은 죽는 경험이다

세례와 회개 후에도 몸이 기억하는 죄가 남아 있다

안 변하니까 계속되는 아픔이 있는 것이다

육적 아픔보다 내적 찔림이 효과적으로 도와 주시는 성령의 선물이다

성령의 선물은 방언, 은사로 보는 경향도 있지만 깨끗해져 거룩한 삶을 살게 하는 것이다

성령의 선물은 인생의 목적이기도 한 거룩이다

1차 물 세례는 밍밍하지만 날마다 회개를 통해 거룩으로 가게 되는 성령의 선물을 2차적으로 받아야 한다

세례 받고 좋아진 줄 알았는데 걸려 넘어져 원망하게 되는 내 모습을 보며 저기가 거긴가 하며 푸른 하늘 끝 닿은 곳이 고향인 줄 안다

고난이 오면 해결되는 않고 화가 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이 나와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날마다 고백하는 것이 살아 나는 것이다

주께서 죽으셔서 나를 살리셨다

하나님은 바울 사도의 소명을 위해 연단 시키신다

자기부인과 자기 복종이 가장 어렵다

자기 안에 들키지 않은 음란 등의 죄 문제가 도사리고 있는데 죄가 보이는 것만큼 회개가 되는 것이다

회개하고 죄 사함 받는 것이 성령의 선물이 이루어진 것이다

물 세례 받고 강한 역사로 성령 선물을 받아야 한다

바울의 최고의 눌림은 모든 교회를 염려한 것이다

구주와 함께 나 죽었으니 구주와 함께 나 살았도다

찔림 받고 어찌 할꼬?’ 고백하며 세상 것을 내려 놓는 것이 성령의 선물이다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이 회개와 성령의 선물이다

끝없이 회개하고 자신의 부족을 보고 가는 성령의 선물을 받으면 여러 말로 권하고 임하시는 삶의 삶을 산다.

악하고 음란한 850명의 바알 공동체는 끼리끼리 공동체인데 그곳을 탈출하여 주님 공동체에 속하여 여러 말로 확증하며 고난으로 회개하라

성령은 말씀을 통해 역사하심의 증거로써 말씀-능력-전도로 이어지게 하신다

말씀으로 가장 아픈 곳이 찔린다

영적으로 네기 네 남편을 죽였다라는 성령의 음성을 듣고 자기 죄를 보니까 살아 나는 것이다

세례받은 3천 명이 이날 공동체에 더해졌다

숨어 있어도 회개하면 하나님이 알아 보신다

물 세례가 성령세례로 바뀌어서 끝없이 회개하여 성령의 선물이 주어지면 여러 사람을 구원으로 이끈다.   할렐루야~

 

 

Posted by 윤강로
말씀과 마음씀2019. 9. 9. 19:36

[우리들교회 2019 94일 수요예배 말씀요약(대전중문교회 장경동 목사님 마가복음 1장35절 및 39절)]

 

 



[
마가복음 1:35]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Very early in the morning, while it was still dark, Jesus got up, left the house and went off to a solitary place, where he prayed.)


-
예수님이 새벽기도 하셨다.

예수님은 새벽기도 하셔야 합니까? 안 하셔도 됩니까?

제가 볼 때는 안 하셔도 되는데 하셨다.

여러분은 새벽기도 하셔야 돼요? 안 하셔도 돼요?

보면 안 해도 될 사람은 하고 해야 할 사람은 자빠져 자더라.

임금도 하는 새벽기도를 평민인 우리는 안 한다.

사울 왕은 기도했다는 구절이 안 나온다.

사람은 둘 중에 하나이다.

기도하는 사람이냐,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냐.

기도가 너무나 중요한 것이 아브라함은 부인이 사라이고, 이삭은 부인이 리브가이고 야곱은 부인이 라헬인데. 사라, 리브가, 라헬이 너무나도 이쁘다.

임금님이 욕심 내서 뺏어갈 정도이다. 여러분도 너무 이쁘네요. 그런데 다행입니다. 임금님이 뺏어갈 정도는 아니네요^^

아브라함 175, 이삭은 180, 야곱은 147세까지 살았다. 아브라함은 아내가 3, 이삭은 1, 야곱은 4. 부인이 많으니 단명 한다^^

세 여자 중에서 리브가만 기도하는 여자였다.

진짜 중요한 것은 기도하는 여자가 중요하다.

아담 부인은 하와. 가인과 아벨을 낳았다.

이삭과 리브가 사이에서도 에서와 야곱 두 아들 낳았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고 에서도 야곱을 죽이려고 했지만 리브가가 기도해서 야곱은 죽지 않았다.

남자는 허당이다. 여자가 중요하다. 집안이 잘못되면 다 여자 책임이다. 어느 속담에도 남자가 잘 들어와야 하는 속담은 없다.

리브가는 왜 아들을 살렸는데 하와는 아들을 죽였는가. 기도이다.

뱃속에 쌍둥이가 있는데 뱃속에서 애들이 싸워요? 놀아요?

구분이 되세요? 노는 것과 싸우는 것을 구분할 정도가 되려면 굉장히 예민해야 한다. 여자는 예민해야 한다.

속담에서는 그것을 여수같다고 그런다. 곰 같으면 구분을 못한다.

여자는 그 표현을 세상은 안 좋게 써서 그렇지 여자는 여수같고 예민하고 섬세해야 한다.

하나님, 아이들이 뱃속에서 싸워요 하고 기도하니,

하나님은 두 국가가 네 뱃속에 있구나 하신다.

애는 국가이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은 애를 안 낳는다.

애를 안 낳는다는 말은 국가를 안 낳는다는 말이다.

기도하는 작은 것이 얼마나 중요하냐 하면, 리브가가 기도하는 중에 형이 동생을 죽이려고 하니 삼촌네 집으로 빼돌렸다.

하와는 선악과 따먹는 것에 정신 팔려 형이 동생 죽이는 것도 몰랐다.

여러분은 이삭이 좋으세요 야곱이 좋으세요?

남자들은 다 야곱을 좋아한다.

방송에서 증명이 되었다.

애를 잘 낳아서 애가 아팠다. 병원에서 조사하다 보니 애가 바뀌었다. 크다가 어떻게 해야 하나가 주제였는데, 다들 그냥 키워야 된다 하는데, 저 혼자만 돌려놔야 한다고 했다

몰랐을 때는 괜찮은데 이제는 알았기에 돌려놔야 한다. 그리고 한살이라도 어릴 때 돌려놔야 한다. 크면 상처가 더 많아진다.

그 옆에 홍림씨가 더 좋은 방법이 있다고 애를 바꿀 것이 아니라 엄마를 바꾸면 된다고 하더라. 이러면 겉으로는 다 애~~~하면서 속으로는 괜찮은데 한다. 그것이 남자와 여자의 생각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남자들은 참아서 그렇지 본능으로만 살면 열 여자와 살고 싶어한다.

여자는 열 남자와 살고 싶어하지 않는다. 좋은 남자 있으면 한 남자와만 살고 싶어한다.

그래서 여자는 남자를 여자처럼 생각하면 안되고 남자는 여자를 남자처럼 생각하면 안 된다.

저는 목사이고 집사람도 목사이다. 그런데도 안 맞는다. 하물며 집사님이신 여러분들이 도대체 어떻게 사시는지 모르겠다^^

제가 설교를 많이 하는 날은 6번을 하는데, 6번하고 집에 가면 집사람이 얘기 좀 하자고 한다. 내가 설교 6번을 했다고 하면 그래 쉬어야 해할 줄 알았는데, ‘아까는 얘기도 잘하더라고 한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이렇게 안 맞다.


리브가가 왜 위대하냐 면 사라가 애를 못 낳으니 자기가 제안을 한다.

나 애기 못 낳으니 내 여종을 줄 테니 씨받이 한번 해보자고 사라가 이렇게 제안을 한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인데, 쓸데없는 소리한다고 하나님이 아들 준다고 하시니 기다리자 해야 하는데, 아브라함이 '그럼 저녁에 들어오라고 해봐' 해서 낳은 것이 이스마엘이다.

저 이스마엘이 중동에 흰 옷 입고 다니는 모든 사람들의 조상이다. 애를 하나 낳았는데 수 십 개의 국가를 낳은 것이다. 그 분들이 잘 살아야 하는데 굉장히 세계를 어렵게, 어지럽게 만들고 있다. 사라의 인간적인 생각 하나가 4000년 후 세상을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리브가는 절대로 다른 여자를 남편에게 소개해주지 않는다.

남자만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절대 나 혼자 힘들지 않다. 내가 힘든 만큼 상대편도 반대편에서 힘들다. 내가 행복하면 반대편에서도 행복하다.

나도 행복하고 그니도 행복, 나는 행복하고 그니는 불행, 나는 불행하고 그니는 행복, 나도 불행하고 그니도 불행하고 이렇게 4박자이다.

제가 집사람을 이기는데, 첫째는 논리로 이기고 둘째는 힘으로 이긴다.

집사님이 저에게 당신이 늘 옳아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당신이 이기고 내가 불편한 것 보다 내가 지고 당신이 편한 것이 좋아서 당신이 이기는 것이에요 하더라. 그때 내가 계속 진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나님과 여러분이 싸우면 누가 이길까요?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맥도 못 추신다. 탕자가 돈을 달라고 하고 집을 나가겠다고 하니 아버지가 그렇게 해준다. 아들이 이겼다.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게 만들었다. 하와가 이겼다.

쫄딱 망하고 돌아왔을 때, 하나님은 오라고 하신다. 내가 만난 하나님은 하나님, 어떻게 해요?’ 하면 하나님은 답이 똑같다. '알아서 해라' 그분의 속성대로 나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다. 내 마음대로 할 수는 있겠지만 잘해야겠다. 자유의지를 잘 써야 한다. 제가 이렇게 설교하고 나가서 술을 마음대로 먹을 수 있다. 그러나 안 넘어가야 하죠. 내 자유의지를 내가 잘 써야 한다.

하나님이 문을 두드리시고 내가 열어야 들어오신다. 그런데 귀신은 문단속을 해도 들어온다.

시어머니가 아들을 애지중지 키웠다. 결혼해서 사는데 부탁 드리는데, 성령님 같은 시어머니는 아가, 몇 시에 내가 들려도 되겠니?’라고 묻고, 벨을 누르시는 시어머니는 성령님 속성 닮은 시어머니다

귀신 속성을 닮은 시어머니는 연락도 없이 띠릭 띠리릭 하고 무대포로 초인종 누르고 들어온다.

여러분의 결정이 중요하다. '내 결정이 중요하다.'

기도하는 여자 하나가 죽을 자녀를 살려내고 기도하는 여자 하나가 남편의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다.

남편이 잘못한 것 맞지만 내가 기도하지 못하고 섬세하지 못한 것도 있다.


예수님은 새벽기도를 하셨는데 뭐라고 기도하셨을까?

38
절에 마을에서 전도를 한다. 전도를 위해 기도하셨을 것 같다.

전도도 하기 전에 기도해야 한다.


39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저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어 쫓으시더라. (
So he traveled throughout Galilee, preaching in their synagogues and driving out demons.)

마을은 세상, 회당은 교회당이다. 세상에서 전도할 사람이 있고, 교회당에서 전도할 사람이 있다.

묵상을 하면 거기에 숨겨져 있는 영양가가 쪽쪽 빨려 나온다.

왜 회당에서도 전도할까.

이 세상에는 딱 두 사람만 있다. 이리와 잃은 양이다.

전도해서 그가 예수 믿고 구원 받으면 잃은 양이고 끝까지 안 믿으면 그는 이리이다.

교회에서는 양이냐 염소 냐로 구분된다.

최근에 놀라운 것을 깨달았다. 양을 알곡이라 표현하고 염소를 가라지라고 표현한다.

양을 5달란트와 2달란트 받은 사람이라고 하고 염소는 1달란트 받은 사람이다.

하나님의 종들은 낮에 알곡을 뿌리고 사탄은 밤에 가라지를 뿌린다.

마귀의 식구는 염소, 가라지. 알곡 옆에 심어놓으면 은혜 받으면 양, 알곡이 되는데 이런 위험을 감수하고 마귀가 심어놓았다. 양이 염소 되던지 염소가 양이 되던지 붙어보자 하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가 많이 욕을 얻어먹는다. 저는 교회와 세상을 넘나들고 있다. 교인도 상대하고 교인이 아닌 사람도 상대한다. 여기서는 설교하지만 저기서는 강의한다. 교인과 세상 사람을 보면서 내린 결론은 세상에 있는 좋은 사람이 교회 다니는 나쁜 사람을 볼 때 그래도 교회 다니는 나쁜 사람이 낫더라.

세상 사람은 짐승으로 치면 이리 아니면 잃은 양이다. 술을 먹고 전봇대를 붙들고 오바이트를 하고 있다. 지나가면서 뭔 술을 저렇게 먹었어?’ 하고 간다. 우리들교회 다니는 사람이 속상해서 한잔 먹었다. 그런데 너는 교회 다닌다면서 술을 먹냐? 나는 안 다니니 먹고 길바닥에 누워도 괜찮지만 너는 먹으니 한잔도 먹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세상은 우리가 100점 맞기를 원한다. 기대치가 높다. 그분들은 입만 열면 거짓말을 한다. 그래도 그냥 지나간다. 우리들교회 다니는 집사님이 너무 곤란해서 거짓말 한번 했다면, ‘너는 교회 다니는 놈이 거짓말 하냐? 그런다. 나는 안 다니니 거짓말해도 되지만 너는 교회 다니니 거짓말 안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무결점 할 수는 없지만 그것을 향해서 가야 한다.

마귀란 놈이 교회 당에 왜 지 새끼를 왜 심어놨다 봤더니 마귀 짓을 해서 세상이 못 믿게 하려고 작전을 짰더라.

가롯 유다가 지금으로 치면 목사이다.

목사가 예수를 팔았다는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세상은 얼마나 욕하겠는가.

마귀가 얼마나 지혜로운지...

강도는 이리 같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 양쪽에 강도를 매달았다.

예수님을 나쁘게 해서 죽이려고 양쪽에 강도를 함께 매달았다.

예수님에게 강도의 이미지를 심었다.

그때 강도 이리 두 마리가 있는 줄 알았는데, 한 쪽 강도가 이분은 죄가 없다고 한다.

강도 중에도 잃은 양이 있다.

강도라고 해서 다 이리가 아니다.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리와 염소는 배후에 마귀가 역사하고 잃은 양과 양은 배후에 하나님이 역사하신다.

첫 번째 특징이 기도한다. 기도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의 사람 양인지 안다. 염소는 기도가 안 된다.

대한민국 사람은 대한민국 정부의 지시를 따라야 한다. 대한민국에 살면서 북한의 지시를 따르는 사람이 있다. 간첩이다.

원리가 같다.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살면 여러분은 양인데 신앙생활을 하는데 마귀의 지시를 받고 살면 그것이 염소이다.

하기 전에 기도해라.

전도하기 전에 기도하고 귀신 쫓기 전에 기도하고.

뭐든지 하기 전에 기도해라.

해놓고 기도하지 말고.

제가 진짜 잘하는 것이 주례이다. 주례는 짧게 하면 좋다고 하는데 저보고는 충분히 하라고 하는 것을 보면 제가 주례는 잘한다. 그리고 신부 도우미가 주례사를 많이 듣는데, 그 분이 자기는 오늘 처음 주례사를 들었다고 한다. 그전에 하는 주례사는 다 똑같았기에. 주례 때 꼭 해주는 기도가 있다. 오늘 새롭게 시작되는 가정 선물을 주실 때 처음에 딸을 주시고 그 다음 아들을 주시되 순서가 바뀌지 않게 해주시고 한쪽으로만 낳게 하지 말아주세요 기도한다.


양이 쓰는 언어는 항상 기뻐하라. 이리가 쓰는 언어는 미쳤다.

미친 사람이 항상 웃는데, 똑같은 언어인데 이렇게 다르다.

우리는 참 믿음이 살아있다고 말한다. 대한민국 욕하지 마세요. 대한민국 살아있다.

적어도 이 시간에 여기에 앉아있으면 그 사람은 신실한 사람이다.

엘리야가 다 썩고 나만 남았다고 하니 하나님은 너말고 7000명이 남아있다고 하셨다. 지금으로 보면 70만이 넘는다. 그렇게 안 썩은 사람이 집단으로 있는 곳이 우리들교회와 중문교회이다^^

정녕 우리가 썩었다면 나라가 이렇게 가겠는가. 썩은 사람이 수요 낮 집회에 이렇게 오겠는가.

여러분이 이렇게 오는 것은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나라를 지키고 교회를 지키는 것이다. 오늘 오고 다음주에 안 오면 그것은 썩은 것인지 모른다^^


인생은 추억이고 추억은 고통스러울수록 아름답다.

오늘이 힘들면 현재로 보지 마시고 미래로 보세요. 추억이 아름다워지네~~~


뭐든지 하기 전에 기도하자.


제가 수 십 가지 프로에 참석하다가, 1100 퀴즈가 있는데 맞추어서 600만원 탔고 한 문제 더 맞추면 1000만원 타는데 김용만 씨가 목사님 계속 하시겠습니까?’ 하길래 그 짧은 순간에 하나님 더 할까요 했더니 주님이 그만해라. 하셔서 그만했다. 600만원 타고 너무 좋았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장목사 첫 열매이네 하셨다. 첫 열매는 주님 것이다. 그때 아멘 하면 양이다. 기질 상 양은 감동에 순종한다. 너 낮 집회 가거라. 아멘 하면 양이다. 이리 가라 저리 가라는 중요한 것이 아닐 수도 있는데 자세가 중요하다. 염소는 큐티하지 않는다. 졸려서 못한다. 아무 재미가 없다.

그렇게 기도로 복을 받은 사람이 야베스이다.

야베스가 복에 복을 더하사 지경을 넓히시고...


가족들과의 연극.


탕자의 잘못을 따지지 않은 것은 온전히 아버지가 탕자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옳고 그름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 안에 주님의 사랑이 있는지가 중요하다.


예수님이 새벽에 기도하시고 다니시며 전도하고 귀신을 쫓으셨다.

아브라함 조카 롯이 소돔과 고모라에 사는데 멸망하려고 하니 아브라함이 기도하니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신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천사가 나타났다. 그 천사들이 안보여서 그렇지 지금 똑같이 역사하신다.

하나님이 도울 수 있는 사람이 있고, 하나님이 도울 수 없는 사람이 있다. 집 나간 탕자는 하나님이 도울 수가 없다. 돌아온 탕자는 하나님이 도울 수 있다.

베드로가 부인했을 때, 니 고통이 내 고통이다. 니가 나를 사랑한다면 괴로워하지 말아라. 이것이 기독교이다.

자꾸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린다고 한다. 주님은 기쁠 것도 없으시고 속 썩을 것도 없으신데, 내가 기뻐하면 주님이 기뻐하시고 내가 속 썩으면 주님이 속 썩으시는 것은 주님이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우리 연약함을 담당하시고 우리의 죄악, 허물, 모든 고통을 다 짊어지셨다.

오늘 여러분이 속상한 일은 하나도 속상할 일이 아니다.

오늘 여러분이 괴로울 때 주님이 괴롭고 오늘 여러분이 아플 때 주님이 아프고 목사님이 힘드실 때 주님이 얼마나 힘들어 하신지 아세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내 새끼 잘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우울한 자녀들을 제가 즐겁게 하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다.

성경에 나 좀 기뻐하게 하라하는 말씀은 없다. 하나님은 항상 기뻐하라고 하신다.

주님이 물으신다: ‘니가 나를 사랑하냐?’


주님,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입으로는 사랑한다고 했는데 마음은 어떻습니까?

사랑의 고백을 기도로 표현하세요. 무거운 짐도 내려놓고 3분동안 기도하세요. 마음에 우러나오는 대로 기도하세요.


주님은 우리 신음소리에도 응답하신다고 하셨다.

괴롭게 보면 괴로운 것이지만 즐겁게 보면 즐겁다. 팩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떤 눈으로 보느냐이다.

아픔이 끝이 아니고 과정이기에 아픔을 통해 주실 축복을 생각하며 전화위복의 기회로 여기게 해달라고 기도하겠습니다.

 

 

Posted by 윤강로
말씀과 마음씀2019. 9. 4. 13:09

[우리들교회 2019 91일 주일말씀 요약(사도행전 2: 22~36/ 성령의 설교)]

 

 

 

<Prologue>

사도행전 1장을 보면, ‘교회 사명을 위해서 성령을 받으리라하시고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하셨다.

그리고 120문도의 기도가 있었고 거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살한 유다 대신 한 사람 맛디아(마티아: Matthias)를 채워놓는 일이었다.

사람이 중요하기 때문에 이 사도행전을 성령행전이라 하지 않고 사도행전이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했다.

2장은 오순절 성령강림을 통해서 방언이 임했다.

샬롸샬롸도 방언이지만 그 보다 지금까지 듣지 못한, 막힌 관계가 뚫어지는 언어라 천하 각국에서 모인 사람들이 이것을 다 알아들었다.

제가 거의 3년 전 암을 말씀 드렸을 때가 바로 사도행전 2성령충만제목으로 베드로가 설교할 때였다.

그 동안 계시록과 열왕기상을 전했고 이제 사도행전 설교를 이어가려고 한다.

여러분의 영육의 지경이 넓어지기 위해서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도행전 설교가 되길 소원한다.

성령이 임하니까 무식한 베드로가 본격적으로 성령의 설교를 한다.

오늘은 성령의 설교에 대해서 5가지로 살펴보겠다.

그런데 성령의 설교라면 성령이 임하지 않으면 안 들리겠죠?

이것이 걱정이다. 부디 사도행전 전하는 동안 여러분에게 성령이 임하길 축원한다.

 

<말씀요약>

 

성령의 설교는

1.   잘 들리게 한다. (22)

그러니깐 삼천 명이 들어왔겠죠?
(22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는 그의 첫 공식적인 설교인데 하나님의 약속과 성취,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승천을 다루고 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양육 받은 구속사로 구약성경을 해석하면서 어떻게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의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는지 이 말을 들으라고 한다.

그러므로 성령의 설교는 무엇일까?

그것은 오직 예수님에 대한 것이다.

성령 충만을 받으면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는 것이 있다.

그래서 14절에 들으라 하시면서 모든 사람들아, 형제들아 부르시면서 자꾸 들으라고 한다.

오늘 22절에는 이스라엘 사람들아 하면서 들으라고 한다.

하나님의 백성이고 성경에 박식한 이스라엘이 성령의 역사에는 무지하다는 것이다.

그러면은 그들에게 어떻게 하면 들리게 할까?

 

우리들 교회 목장 예배처럼 잘 듣는 훈련을 하면 신뢰를 받아서 잘 들리게 할 거 같다.

신뢰를 받아야 하지 않나?

상대방의 얘기를 안 듣고 성령이 임하지 않으니 공격을 하면 우리는 늘 분이 난다.

우리는 목장에서 이런 공격을 많이 받아왔기 때문에 그런 것이 훈련이 되어서 자기 죄를 보면서 회사에서나 집에서나 비교적 잘 듣고 잘 들리게 전한다고 생각을 한다.  

계시록 마지막 말씀처럼 성령에 힘입은 말을 교회에게 들으라 했다.

저 또한 성령 충만 설교할 때 암이 걸린 것은 이제 잘 들으라고 한 것 같다.

성령의 말씀하심만 따라서 말 좀 하라고 한 것이다.

제 말과 제 힘으로 설교하지 말고 온전히 예수님의 대한 약속과 성취의 설교만 하라고 항암으로 다루셨다는 생각이다.

13절을 보면 성령충만은 조롱을 받는 것이다
(13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이르되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하더라)
조롱을 받아도 베드로처럼 모든 부류의 사람에게 성령의 설교를 하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여러분도 성령의 설교만을 전하길 기도합니다.

 

(적용)

-여러분은 성령의 설교가 잘 들리십니까? 안 들린다면 제가 성령의 설교를 하지 못해서인가? 여러분이 성령을 받지 못해서인가?

너무나 답이 뻔해도 그래도 한 번 나눠보세요.

-목장에서 아픈 얘기도 잘하고 싫은 얘기도 잘 듣나?

그러면 성령 받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성령의 설교가 잘 들리면

 

2.   잘 살게 한다. (20-22)

 

베드로는 이 주제를 예수님의 삶을 통해서 설명한다.

예수님 삶처럼 사는 것보다 더 잘 사는 삶은 없기 때문이다.

다시 22.
(22 …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언하셨느니라)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라고 시작을 했다.

성령의 설교는 상대방이 아는 것으로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 참 필요하다.

이렇게 성령의 설교는 무턱대고 결론을 내리며 내 소리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접촉 점을 찾아서 거기서부터 한 단계씩 설득해 가는 것이다.

베드로에게는 주님을 세 번 부인하고 회복된 후에 그런 지혜가 생겼다.

어떤 지혜를 주셨냐 하면, 베드로는 더할 것도 없고 뺄 것도 없는 사랑하는 예수님 (같이 살았었잖아요? 훈련 받고)을 증언하면서 그의 입에서 처음 나온 말이나사렛 예수.

예수님은 멸시 받는 나사렛 동네에서 목수의 아들로 자라셨지만 하나님께서 예수님으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베풀게 하셨다고 증언을 하셨다.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이라는 이 세단어로 결합된 표현은 예수님의 사역에만 쓰였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사역은 하나님에 대한 예수님의 증언이었고 또한 예수님에 대한 하나님의 증언이었다.

이것을 효과적으로 베드로가 성령으로 증언을 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삼위일체의 설교라고 생각한다.

권능의 본질은 하나님의 능력을 보이는 것이다.

기사의 효력/효과는 그 놀라움을 계속 만들어내는 것이다.

표적의 목적은 보이는 것보다 영적 진리에 있다.

예수님의 사역에만 쓰였던 이 단어는 주님께서 승천하시고 성령님의 운행하심으로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역사한다.

 

(# 1: 저도 성도 여러분에게 들으라 하는 예수님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저 또한 나사렛 예수와 같이 무시 받을 조건을 가졌지만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베풀어주셨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그 당시에 암 얘기를 하겠습니다. 심판처럼 온 암 사건은 그때 내 현재의 이유를 알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큰 권능이라고 생각합니다. 암이 발견된 후에 전체적으로 상인데 일부분은 내 열심과 내 힘으로 참는 인내로 인해 책임을 물으셨다고 했어요. 내 힘으로 하는 것은 항상 벌입니다. 항암을 하면서, 할수록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어요. 이건 이제 놀라운 기사인데요, 암이 나아서 기적이라기 보다 암을 잘 해석하여 영적 진리인 말씀의 표적을 보여주셨습니다.)

 

20절에
(20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라고 했는데 암이 누구에게는 달이 변하여 피가 되는 진노의 심판인데,


바로 21절에는
(21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라고 했다.

그래서 암이 구원의 권세가 되어 그리스도의 신비를 보이게 해달라는 기도 요청을 했었다.

여러분의 기도가 응답이 되어서 과연 암이 구원의 권세가 되어 전했더니 이렇게 부활을 했다. (감사합니다.)

 

그 하나님의 능력은 외적으로 모든 상황이 형통한 것만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내적인 깨달음이 더욱 중요하다.

어떤 것보다 이런 깨달음이 암이지만 잘 살게 하는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보여주셨다는 생각이 든다.

 

(# 2: 암으로 계속 내 암을 설명할 수가 있는 것. 이것이 바로 권능과 기사와 표적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이렇게 해석을 잘하고 또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항암 메시지도 보내고 여전한 방식으로 사니깐 기사와 표적을 보여주신 게 항암 끝나고 룻기 4장 찬송 제목으로 설교하는 날, 임신이 거의 불가능 40 중반의 늙은 아들 내외에게 자연임신이라는 소식을 그날 듣게 하셨습니다. 정말 이것은 문자적으로 표적 같고 기사 같고 권능 같잖아요? 그때가 삼월이라서 태명을 찬송이와 삼월이로 지었는데 룻기 오벳은 남자인데 삼월이라고 이름을 지을 때 살짝 여자 같더니 진짜 딸을 주셨네요. 찬송이와 그 본문 속에 구속사의 주인공 유다를 줄인 말유송이라고 지었어요. 이게 다 말씀 따라 그리고 임신 때 기형아 고위험군 검사에서 수치가 많이 높게 나왔죠. 또 후에 양수과다증이라고. 계속 위험하다고 얘기를 하고 거기다가 노산 이었잖아요. 그러나 나을 것이기에 그런 검사 하나도 안 했어요. 그러니까 간절하게 기도가 되는 것이죠. 목사님네는 정말 되는 일이 없어 할까 봐 굉장히 기도가 간절히 나오더라구요. 그런데 건강한 아이를 나아서가 아니라 그때마다 말씀을 잘 듣고 기도를 했기에 우리모두 요동치 않아서 기사와 표적, 권능을 보이셨다고 생각합니다. 산부인과를 가면은 그런 검사가 나와도 이렇게 건강한 아이를 낳을 수 있으니깐 여러분들 놀라지 마시길 바래요.)

 

(적용)

-여러분의 삶을 통해 모두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권능과 기사와 표적은 무엇인가?

-, 베드로처럼 예수님만 전하며 능력과 놀라움과 말씀의 표적을 보인 일이 있나?

 

성령의 설교를 잘 들리게 하는 것은 잘 살게 하기 때문인데 그러면 잘 살게 하는 것은

 

3.   잘 죽게 한다. (23)

잘 사는 것은 잘 죽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죽음을 보겠다.
(23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예수님처럼 권능과 기사와 표적으로 잘 산다고 하나님의 능력을 세상이 인정해주는 것이 아니다.

근본 하나님과 본체이신 성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에 철저하게 성부하나님의 의지에 복종하셨다.

아버지가 뜻이 있어 정하시고 미리 아시고 아들을 죽는 데 내어주셨다.

이것을 다 알아서 자기는 죽는 것이다.

그렇지만 얼마나 무서운 고독을 경험하셨겠나?

이 고독을 겪는 것은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지만 이 일을 바로 성령님이 도와주신다고 성령의 설교를 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 아무도 도와줄 사람이 없을 것 같아도 성령님이 도와주실 것을 믿는다.

 

그런데 그들은 권능을 행하는 예수님을 왜 그렇게 죽이고자 했을까?

그는 예수님은 실제 삶으로 설교를 하고 그리고 백성이 따르니까 따라갈 수 없는 지도층들은 예수님을 죽이는 것 밖에는 길이 없다고 생각을 한다.

요즘 구약성경 열왕기상에 아합과 이세벨하고 똑같지 않나?

나봇도 죽이고 엘리야도 죽이려고 한 것처럼 우리도 혼자 정직하고 싶다.

공동체를 통한 정직은 싫은 것이다.

삶이 연결되니 딱 듣기가 싫고 편치가 않은 것이다.

목사님 말씀은 좋지만 목장은 싫다거나 또 목장은 좋지만 목사님 설교는 딱 싫다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아시고도 하나님의 정하신 뜻대로 죽으셨다.

우리가 알면서도 죽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우리들의 수많은 간증은 잘 죽어지는 얘기다.

잘 사는 것은 잘 죽는다는 것이다.

세상적으로 스펙 좋고 이런 것이 아니고 정말 잘 사는 것은 내가 삶에서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못 박혀 사는 것이 가장 잘 사는 것이다.

죽은 자도 살리시는 능력을 가진 예수님이 세상을 위해 하신 일이 십자가를 지신 일이라는 것이다.

*진정한 능력이란 자기의 똑똑함과 능력을 보이는 게 아니라 사랑하고 인내하고 희생하며 죽어지는 것이며 얼마나 사랑했고, 얼마나 인내했고, 얼마나 희생했고 내가 얼마나 죽어졌는가가 가장 잘 사는 것이다.

여자가 똑똑하다고, 돈 잘 번다고, 예쁘다고 여자의 머리가 남자인데 능력으로 자기보다 못 미친다고 무시하고, 바람 피웠다고 버리고 이러면 그 여자는 바보인 것이다.

똑똑한 부인이 그렇지 못한 남편을 섬기는 것은 죽는 일 같지만 이 땅에서 가장 잘 사는 비결이고 여자의 가장 큰 면류관이인 것은 그것이 성경의 원리이기 때문이다.

여자의 머리가 남자고 남자의 머리가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또 남자는 일이 우상이니까, 마찬가지로 상사를 능력으로 무시하면 거기도 바보인 것이다.

무능한 부모, 완악한 남편, 권위적인 상사에게 잘 죽으면 그 죽는 것을 보고 그것을 통해 다른 사람들이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보니까 권능(權能)은 거기에서 능력을 보는 것이고 기사(奇事) 계속 놀라는 것이고, 거기에서 말씀의 표적(表迹)을 보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보고 놀라는 것이다.

김대리는 어떻게 저렇게 잘 참지? 어떻게 날마다 웃지? 이러니까 여기에서 질서라는 것은 죽는 것이다.

이 땅에서 질서를 통해서 훈련시키지 않나?

그렇게 결국은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보여주는 사람에게 리더십이 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너 틀렸다고 하는 사람에게 마지막에는 안가는 것이다.

잘 살아 보여도 나중에는 다 드러나는 것이다.

천국 가기까지 안 들키는 사람은 정말 문제인 것이다.

천국 갈 때까지 안 들키면 그건 완전 지옥 가야 되는 것이니까 천국 가기 전까지 들키는 것이 아주 축복이다

그런데 성령이 임하지 않으면 못 죽는다.

성령이 임하지 않으면 이런 것들을 못 드러내는 것이다.

뭐라고? 내 남편하고 살아봤어?’ 이게 주제잖아요.

목사님이 우리 사장을 알아요?’ 알아요.

사람은 다 똑같기 때문이고 별 인생이 없기 때문에 다 죄인이지 않나?

성령이 임하지 않으면 이 얘기를 드러내기도 어렵고 듣기도 싫고 그래서 목장이 싫은 것이다.

맨날 나가서 참으라고. 인간적으로 참으라 들리니까 못 죽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죽어주신 이 성령의 설교가 날마다 필요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교회보다 가정을 먼저 창조하셨다.

그리고 이제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했기 때문에 어떤 모멸을 받는다고 해도 가정을 지켜낸 것이 가장 남는 장사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잘나고 아무리 어쩌고 저쩌고 해도 가정을 버리면 앞으로 남고 결국 뒤로는 밑지는 법이다.

자손 대대로 밑지는 장사고 적어도 3-4대 밑지는 장사가 되니 남는 장사하시길 바란다.

 

(# 3: 저 또한 항암을 하면서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는 투병의 시간에 잘 죽어져야 했었는데요, 저는 이제 초기 같은데 암이 흩뿌려져 있어가지고 아주 남이 할 건 다했는데. 그래서 항암제 말고는 안 돼서 항암만 해야 되는데 흩뿌려져 있어서 아주 항암제도 독하게 2개씩 8번을 하는 게 아니고 3개를 다 써서 6번을 했기 때문에 한 번에 아주 독한 항암제를. 저는 할 건 다했어요. 그래서 무지무지하게 그런 힘든 투병의 시간을 통해서 제가 잘 죽어졌어야 했는데요. 제가 무서운 남편에게 잘 죽는 것과 우리 남편하고 잘 때 잠 못 잔 적도 많은데 실제로 무서운 항암 고통에서 24시간 잠 못 자고. 그렇게 막 이런 고통을 계속 겪는 것은 거기에서 잘 죽어지는 것은 또 다른 저의 모습을 직면하게 하신 것이에요. 제가 암이 구원의 권세라는 것을 알아도 아프면서 갇혀있으니깐 정말 힘들고 외롭더라구요. 그러니깐 그렇게 힘들고 외로우니깐 암 걸린 사람들을 생각하게 되었어요. 암도 항암을 한 것과 안 한 것과 큰 차이더라구요. 아무리 암 걸려도 항암을 안 하게 해달라는 것이 우리 기도제목이잖아요. 어떤 사람은 쉽게 지나가는 사람도 있는데.)

 

그런데 이것을 당하면서 이 모든 것은 내가 이전에 알던 것과는 달랐다.

그러면서 이 항암을 하면서 제가 항암보다 높이 솟은 산 있었다고 했는데 그 높이 솟은 산은 바로 제 자신이었다.

제가 겪어보니까 얼마나 사랑이 없고 힘든 분에 대한 공감이 부족한지를 알게 되었다.

저는 사랑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라고 하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제 사랑의 깊이가 너무 얄팍하더라.

겉으로는 온유해 보이는데 제가 구원 때문에 참는지, 사람이 무서워서 참는 것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제가 그래서 할 말을 못하는 것이 사랑이기도 하지만은 제가 그렇게 화내지 않는 것을 사랑이라고 굳게 믿고 있고 내가 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렇게 설교를 많이 하는 사람들은 그 설교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하는데 정말 끝이 없다라는 말씀을 전하니까 그만큼 살지를 못하니까 바빠서 댕기다 보니까 제가 참 형편

이렇게 영적으로 힘들고 육적으로도 힘드니까 또 다른 하늘이 열려서 주님께서 만나주시고 한 것 같다.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꽹과리라고 하였는데 내가 너무 꽹과리를 울리고 있지는 않았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너무나도 생각지 못한 회개의 깨달음을 주셨다.

 

그래서 너에게는 이미 민수기처럼 각을 뜨고 화제를 드리면서 번제를 드리는 시간이 너무 필요하다고 하셨고 너는 할 말이 없다고 하셨다.

이렇게 자신을 깨닫는 것이 가장 죽는 길인 것 같다.

 

자신을 직면하는 게 너무 힘들더라구요.

그런데 이런 깨달음을 마귀는 주지 못한다.

그러나 성령님은 이 일을 하시는 것을 저는 지났다.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주님을 찾았다.

한 쪽에서는 내가 그렇게 열심히 살았는데 그런 나를 상으로 아프게 하시는 건가?’ 라는 생각이 들게 되더라.

그런 것을 겪어야 말씀의 거울 앞에 내가 직면하게 되는 것 같다.

다윗이 압살롬이 반역할 때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었겠나?

자기를 정말 직면하게 되었을 것 같다.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라는 말 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는 것이다.

저는 이것이 최고의 기도라는 것을 체험했다.

아프기만 하면 그냥 힘들기만 했겠는데 항암보다 높이 솟은 제 산을 보니까 도리어 항암을 이기기가 쉬었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잘 죽어지는 것이 무엇인지를 계속 생각하는 것이 저한테는 꼭 필요했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제가 항암하면서 많이 울었다.

그때로 돌아가는 것 같아서 여러분들은 기억하실 것이다.

항암메시지를 기억하실 것이다.

 

예레미야 애가’(Lamentations)를 보면 그러나 참 기가 막힌 일도 있는데 2 12절에 활을 당겨 나를 화살의 과녁으로 삼으시며 13절에 화살통에 화살들로 내 허리를 맞추셨다고 한다.

아우슈비츠 학살 때 유대인들이 이 시를 읽으면서 자신들의 고난을 생각했다고 하는데 이 사람들이 그 고난 가운데서도 그들은 자신을 보기는커녕 아직도 예수를 안 믿는 것이다.

죽음을 문자적으로 당했음에도 죽어지지 못한 유대인들을 보면서 그들이 예수님의 고향 식구들 아닌가?

그들이 지금도 너무 잘나고 잘 살아서 성령의 설교가 들리지를 않는 것이다.

그래서 나사렛 예수의 권능이 무시가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오 천년 동안 못살다가 처음으로 잘 살게 된 것은 고종대왕 때문도 아니고 세종대왕 때문도 아니고 이름 없는 선교사들이 들어와서 흘린 피들로 인해서 우리가 몇 십 년 만에 오천 만 명이 자유민주주의를 누리고 잘 살게 됐는데 우리가 예수 때문에 잘 살게 되었다는 것을 왜 인정하지 않을까?

맞지 않지 않나?

어렵게 이룬 자유민주주의가 정말 다시 예배 못 드리게 될까 봐 뭘 회개해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잘 듣고 잘 살고 잘 죽는 이유는 '오직 예수님' 때문이다.

그런데 이게 안 들리는 것이다.

성령의 설교가 여기도 저기도 예수/성령의 설교가 안 들리면 누구와도 안 통하는 것이다.

이쪽 저쪽 성령이 운행하지 않으면 안 들리게 되어 있다.

(적용)

-내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을 알고도 죽어지지 못하고 고집을 부리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유대인들이 지금까지도 안 돌아오는 것을 보니깐 말로 해서는 안 되는 것이어서 가슴이 찢어지는 것이다.

제가 회개할 일이 많아서 저를 다루셨는데 내가 무엇 때문에 죽어야 되나 생각이 많이 하게 됩니다.

 

성경의 설교를 잘 듣고 잘 살고 잘 죽으면,

4.   다시 살아나게 한다. (24-32)

부활의 주님이 이것을 또 설명하신다.
(24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고통은 죽이기 위한 사냥꾼의 덫이라는 뜻이 있다.

이 땅에서 가장 큰 고통은 사망인데 거대한 공동묘지가 입을 쩍 벌리고 있으니까 노력할 필요 없이 모두 가는 그 넓은 길, 사망의 덫에서 풀릴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이다.

풀어 살리실 분은 오직 하나님밖에 없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사망에 대한 승리다.

베드로는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을 다윗의 부활신앙으로 연결시킨다.

 

25절에,
(25
다윗이 그를 가리켜 이르되 내가 항상 내 옆에 계신 주를 뵈었음이여 나로 요동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이것은 시편 16 8절에 다윗이 항상 내 옆에 계신 주를 뵈었도다의 인용이다.

다윗은 10대 때 사울의 명령을 따라서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골리앗을 물리쳤다.

그러나 사울 왕의 시기로 미움을 사서 16광야를 거치면서 서른 살까지 통일 왕국에 왕이 되는 중에 도피생활도 하고 침을 그적그적 흘리면서 미친 사람처럼 행세해서 겨우 목숨을 부지했던 적도 있다.

그런데 왕이 되고서도 유혹에 넘어져서 간음도 하고 거짓말도 하고 살인도 했다.

그래서 분수령적인 회개도 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사랑하는 아들이 반역하며 반역해서 울면서 맨발로 성을 버리고 피신까지 가는 이런 정말 수치와 조롱도 겪었다.

그런데 그야말로 아들과의 전쟁은 이길 수도 질 수도 없는 전쟁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항상 자기 앞에 계시는 하나님을 보았다는 다윗의 이 고백은 무슨 말인가?

다윗의 인생 속에 항상 하나님이 도와주신 것은 맞지만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압살롬의 반역 때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보는 것은 정말 힘들었을 것 같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 자체가 상급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다윗은 구속사 정점의 믿음이 되기까지는 마지막에 가장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이 가장 수고를 했다고 본다.

 

(# 4: 죽일 수도 죽을 수도 없는 식구들이 있습니까? 어제도 평원님이 시편129 3절에밭 가는 자들이 내 등을 갈아 내 등 고랑을 깊게 지었도다.’처럼 너무나 힘든 인생을 살았지만 괴로우나 이미 이긴 싸움이라고 했는데. 평원님 자체가 너무 똑똑하니까. 정말 이것이 있어야 할 고랑이라고 생각이 들더라구요. 제가 남의 일은 잘 봅니다. 부모, 형제, 자녀 때문에 계속 고생을 했지만 그 조현병 40년 된 막내 동생을 20년 동안 돌보면서 너무나 힘들었다고 했는데. 그 좋은 환경에서 이렇게 주께서 29절처럼 생명의 길을 보이시고 다른 사람들을 주께 인도하는 사명을 감당하게 하시려고 모든 식구들이 수고를 했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언젠가의 이러한 깨달음을 주셔서 좋은 공동체에 붙어만 있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항상 말씀과 공동체의 간증을 보고 듣고 있으면 어느 날 이 육신의 둑이 터지는 경험을 하게 될 줄 믿습니다.)

 

베드로 역시 부족해도 때마다 주를 바라보았다.

예수님의 삶을 목격하고도 세 번이나 부인했지만 갈릴리 바닷가에서 주님을 사랑한다고 세 번 고백하게 하시고 그리고 회복했다.

이후로 성령의 설교를 하며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히는 등 수많은 시련을 겪었다.

예수님이 예언한 것처럼 황제 때 전승에 의하면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순교했다고 한다.

우리가 성령 충만하다가도 육신의 근심에 충만할 수 있다.

소망이 가득 차다가도 절망이 넘칠 수도 있다.

다윗의 인생을 보면 그렇지 않나?

그때마다 믿음의 주여!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면 항상 다시 살아날 줄 믿는다.

 

(# 5: 말기 암으로 천국에 간 이관희 집사가 목장 나눔에서
죽음에 자유로우면 모든 것에 자유로워야 하는데 내가 죽음의 자유에서 자유로운 것이 아니더군요. 죽음은 나에게 주어진 사명이고, 하나님 앞에 서는 거에요. 그것에는 자유함이 있는데 실제 생활에서는 아버님 뵈러 병원 가는 데 내가 아버님 보다는 더 살아야 한다. 내가 먼저 하늘나라 가면 아버님 가시는 길은 누가 지킬까? 이런 사소한 생활 속에서 염려하는 것들이 실질적인 두려움이라서 그걸 하나님께 토해내고 있어요.’ 저는 이런 것이 자기 앞에 계신 주를 보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25절에,
(25…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었음이여 나로 요동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여기서 나는 누구를 가리키나?

27절에도
(27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에서 거룩한 자는 또 누구인가?

다윗의 시이니깐 다윗인가?

오늘 29절에 보니깐. 다윗은 죽었다고 한다.

다윗의 묘가 오늘까지 베드로는우리에게 있다고 한다.

 

30-32절에,
(30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31 미리 본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되 그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그의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32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

이 얘기는 다윗 자신의 얘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다윗은 예수 그리스도가 장사 된 후에 무덤에서 부활을 천 년 전에 미리 본 거에요.

다윗은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미리 말한 것이다.

시편에도 미리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이 예언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 예언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의해서 성취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을 다윗이 천년 전에 미리 봤다는 것이다.

베드로가 미리 목격한 부활의 주님은 다윗이 미리 본 예수님과 똑같았다.

미리 본 죽음과 약속과 부활을 위해 즉, 미리 깨달은 성경으로 이 모든 것을 깨닫고 설교하고 전하는 것은 얼마나 성령의 설교인지 모른다.

다윗이 알았고 베드로가 알았고 내가 알아서 내 속에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시고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신 것이다.

이 부활의 증인이신 것이다.

증인으로 살려면 인생이 짧다.

제자들과 베드로는 지금까지 부활의 주님을 육신적으로 보았지만 그의 능력을 몰랐다.

그런데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그 능력이 나타나신 것이다.

그 능력은 오직 교회를 위해서 주신 것이다.

나의 모든 사건도 성령에 있었고 지금도 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해 아래에 새것이 없다.

이것을 미리 봐야 하는 것이 성령의 설교 핵심이다.

오순절 성령 강림사건은 결국 다시 사는 부활이라는 것이다.

성령의 설교는 예수님의 삶과 십자가의 죽음과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설교다.

예수님, 오직 예수님 삶을 빼놓고 할 수 있는 설교가 아니다.

그러나 보이는 시늉이나 능력만 강조한다면 기복적 성령 운동 밖에 될 수가 없다.

우리가 성령 운동을 해야 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을 받아야 되는 것이다.

우리가 그렇다면 다시 살아나서 증인이 되어 나를 위하여 예수님이 죽으시고 사흘 만에 살아나셔서 구원자가 되었다고 외쳐야 하는 것이다.

성령이 임하면 우리는 그냥 저절로 외치게 되는 것이다.

어디 가서 예수님을 전하라고 하는데 한마디도 못 한다면 아직 성령이 임하지 않았고 부활의 주님을 만나지 못한 것이다.

형제가 아무리 미워하고 핍박해도 한 사람만이 아니고 서로에게 복음이 전파되어야 그것이 끝이 나는 것이다.

복음이 전파되지 않으면 우리나라도 끝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도 저기도 필요한 것은 복음이다.

일본에게 필요한 건 복음이다.

아마도 우리는 이 지구가 끝날 때까지 싸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쉬지 않고 부활의 증인이 되어서 성령의 말씀으로 성령의 설교로 주님을 전해야 하는 것이다.

 

(# 6: 엊그제 일흔 두 살 되신 목자였던 성도님이 저에게 편지를 주셨어요.
목사님 제가 우리들 교회에 등록한지 만 14년이 되어가는 즈음에 좋은 소식을 드릴 수 있어 좋습니다. 94세 치매 어머니를 돌봐야 했기 때문에 남편과 반절의 합가를 했습니다. 15년의 이혼 생활에 남편은 완전 노숙자 자체였고 몸은 할아버지였어요. 너무 불쌍했고 미안해서 죽이고 싶도록 미운 마음은 온데 간데 없고 눈물이 왈칵 쏟아지더라구요. 그간 배운 대로 사랑의 언어를 쓰며 살얼음판 걷듯 조심조심 걸어갑니다. 우리들 교회 공동체가 없었다면 저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제 새로 태어난 듯 꿈을 꾼 듯 남편의 옷을 빨고 청소를 하고 된장찌개를 바글바글 끓여 정성스럽게 상을 차려 어느 때도 느껴보지 못한 시간을 보내며 감사 제사를 지냅니다..’)

 

이분이 이혼하고 너무 힘들어서 성령이 임하니까 잘 듣고 잘 살고 얼마나 반찬을 잘하시는데 잘 죽으시더니 다시 사신 것이다.

이렇게 이혼을 해도 나중에 합치시길 바란다.

노숙자가 되었더라도 집안에 물려줘야 할 것은 더럽혀지지 않은 호적 등본인 것이다.

호적등본을 지키자.

다같이 호적등본을 지키자.

우리들의 국시인 것이다.

아무쪼록 각자 아픈 상황에서 앞에 계신 주를 보게 해주시길 기도한다.

 

주는 어떤 곳이든 내 앞에 내 옆에 계신다.

 

(적용)

-나는 어떤 좌절과 절망 가운데서도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님을 보며 요동치 않고 살아나고 있나?

-주님만이 상급인가? 세상이 상급인가?

 

그래서 성령의 설교는

 

5.   높아지게 한다. (33-36)

 

(33 하나님이 오른 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여기에서 베드로는 시편 110 1절을 인용해서 부활하신 주님을 하나님께서 구세주로 통치자로 오른 손으로 높이셨다고 한다.

여기 33절에 성부/성자/성령 삼위 하나님이 다 나온다.

성령 강림에 가장 큰 핵심이고 성령 설교의 핵심이기도 하다.

내가 이렇게 잘 살면 성부/성자/성령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보좌 위에서 높이신다는 말씀이다.

110편은 다윗 얘기는 아니다.

 

34-36절에
(34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이르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35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다윗의 무덤은 여전히 있고 다윗의 몸은 썩은 지 오래 되었는데, 그럼 누구를 주라고 불렀을까?

첫 번째 주는 하나님이고 두 번째 주는 예수님이다.

다윗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주를 내 주라고 불렀다.

자기 원수를 자기 발 아래 완전 굴복 시킬 때까지 예수님을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게 하실 거라는 것이다.

다윗은, 권능을 행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부활하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다시 오셔서 사탄을 완전 정복하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를 시편 110편에서도 하고 있는 것이다.

다윗이 시편 110편을 인생 후반부에 썼으니까 다윗도 갖은 고난을 다 겪고 나서야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알아본 것이다.

죽어지고 십자가를 겪지 않으면 나에게 예수님이 그리스도/메시아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메시아를 알아보고 내 삶에 생명의 역사가 시작되어 보고 듣는 자마다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면 하나님은 저절로 높이실 줄을 믿는다.

우리의 인생도 무너진 후에 거룩하게 살고자 할 때 육이 무너지고 영이 세워지는 것은 인생 최고의 축복이고 높아짐이다.

너무 아름답게 하시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한다.

 

무식했던 베드로는 이 시편과 요엘서를 자유자재로 (인용).

지난 번 제가 성령충만 설교할 때 요엘서를 인용했고 오늘(성령의 설교)은 시편을 인용하면서 가장 중요한 신약 이슈인 예수그리스도 삶과 죽음과 부활을 성경으로 잘 꿰면서 너무도 조직적이고 말씀의 근거한 신학적 교리의 체계를 성령을 설교하고 있다.

이 본문의 설교를 보면서 누가 무식한 베드로라 할 수 있을까?

성경을 잘 알면 우리가 무식할 수 없다.

우리들교회도 입만 열면 성경이 줄줄 꿰어지는 성도들이 늘어나고 있다.

신학을 해서 꿰는 게 아니라 평신도부터 사역자에 이르기까지 성경으로 꿰어 상담하며 기도하며 이런 성령을 말씀을 전하는 증인들이 날로 날로 많아지고 있다.

우리 모두 성령 받아서 성령의 설교와 말씀만 전하게 될 때 내 삶과 내 말의 군더더기 없어지고 집이고 교회고 나라고 성령의 역사가 이루어질 것을 믿는다.

 

<Epilogue>

 

성령의 설교는 잘 들리게 한다.

그리고 권능과 기사와 표적의 삶으로 말씀의 표적으로 잘 살게 한다.

잘 사는 것은 잘 죽게 한다.

잘 죽어지는 설교를 해야 한다.

그러려면 다시 살아나게 한다.

늘 간증의 순서가 이것이 들어가 간증을 해야 되는 것이다.

전부다 와서 말씀이 안 들렸다가 들렸다고 하지 않나?

말씀이 들리는 게 성령이 임해서 깨달아지는 거 아니겠는가?

그럼 여러분들을 높아지게 한다.

자신에 대해서 잘 죽어지고 밑바닥으로 보며 절망할 때 부활을 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 가장 핵심은 예수님의 부활이다.

이 기쁜 소식을 온 세상 전하시는 여러분이 되길 축원한다.

 

 

 

Posted by 윤강로
말씀과 마음씀2019. 8. 29. 17:53

[우리들교회 2019 825일 주일예배 말씀 요약(왕상 22: 41~ 53/ 여호와 앞에서 선한 왕 악한 왕)]

 

 

<Prologue>

 

아합(Ahab)이 왕으로서의 권세를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이 너무 많은데 사사건건 하지 말라고 하니 얼마나 힘들었겠나?

그러니 자기는 할 수 있는 일이 건축 밖에 없으니까 건축으로 위용을 자랑하겠다고 곳곳에 성읍을 건축하고 상아 궁까지 지었지만 그 건축한 치적은 그 죄악이 기록된 6장에 비해서 딱 1절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는 치적도 없는데 자랑 할 그 한 절도 없지 않을까?

환경이 겸손 할 뿐이라는 것이 다시금 깨달아지면서 내가 아합의 환경이라면 늘 아무도 생각하지 않으니까 실감이 나지 않겠지만 우리가 다 죄인인데 아합을 너무나 경멸하는 사람들 조차도 사실은 세속적으로 아합의 부귀가 부러운 똑같은 사람들이지 않은가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러니 마찬가지로 부부가 똑같기에 이세벨(Jezebel)누가 내 남편을 힘들게 하느냐? 내가 엘리야(Elijah), 나봇(Naboth)도 다 죽여주겠다.’ 라고 한다

물론 아합을 이해한다고 아합에게 면죄부가 되지는 않는다.

아합은 미워할 대상이 아니고 불쌍한 대상이다.

이런 것은 세상은 당최 모르는 일이고, 하나님의 시선으로만 볼 수 있는 일이다.

오늘은 열왕기상을 맺으며, 남 유다의 4대 왕 여호사밧을 주로 다루면서 열왕기상의 열왕기는 반성문으로 쓴 글이기 때문에 죄 많은 북 이스라엘의 아합은 여섯 장을 다뤘는데 여호사밧은 열 절만 다루고 있다.

역대기는 하나님의 족보를 다루었기 때문에 역대기에는 여호사밧의 이야기가 17장부터 4 장에 걸쳐 나오고 있다.

그래서 반성문인 이 열왕기를 보면서 북 이스라엘의 아합의 아들인 8대 왕 아하시야는 다룬다고 할 것까지는 없는 것이다.

오늘 여호와 앞에서 선한 왕과 악한 왕’, ‘선한 리더십과 악한 리더십

은 어떻게 다른지 보겠다.

 

<말씀 요약>

 

1.   여호와 앞에서 선한 왕 여호사밧(Jehoshaphat)을 다섯 가지로 보겠다. (41-50)

 

선한 왕이 되려면,

1)   믿음의 부모가 중요하다.(41-42)

왕이라고 했지만 리더쉽이라 보면 되겠다.

(41 이스라엘의 아합 왕 제 사년에 아사의 아들 여호사밧이 유다의 왕이 되니 42 여호사밧이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삼십오 세라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년 동안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아수바라 실히의 딸이더라)

여호와가 심판하신다'라는 뜻의 재판관처럼 여호사밧은 공적과 과오가 정확하게 기록되었다.

여호사밧은 히스기야, 요시야 왕과 더불어 3대 성군 가운데 한 사람이다.

이 사람이 왜 성군일까?

역대하에도 병행 본문이 나온다.

역대하 20 29-30절에

(29 이방 모든 나라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적군을 치셨다 함을 듣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므로 30 여호사밧의 나라가 태평하였으니 이는 그의 하나님이 사방에서 그들에게 평강을 주셨음이더라)

이런 평강을 누리게 된 것은 여호사밧의 정치, 군사력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서 사방의 나라를 두렵게 함으로 두렵게 하신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호사밧이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라는 것을 한시도 잊지 말라는 것이고, 잊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떻게 잊지 않을 수가 있을까?

남 유다 왕이 새로 등극 할 때는 마치 공식처럼 어머니/모친의 이름이 나오며 가족 관계가 소개가 된다

반면에 하나님의 약속이 없이 폭력과 살인을 통해 왕위가 계승이 되는 북 이스라엘은 공식처럼 어머니의 이름이 나오지 않고 있다.

믿음은 가족 특히 부모 또 어머니가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보여 준다.

이 얘기는 여호사밧이 아합과 똑같이 왕의 자녀로, 왕이 되었고 환경이 똑같은데 왜 여호사밧은 믿음이 좋을까?

오늘 말씀을 보니까 외가 쪽이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한 것 같다.

그의 아버지실히’(Shilhi)는 왜 이름이 나왔을까? (앗수바/Azubah) 아버지실히창 던지는 자라는 뜻이다.

여호사밧의 외할아버지는 당시에 이름이 난 무인가문의 출신이었던 것으로 추측이 된다.

그런데 그의 딸아수바는 이름의 뜻이 이상한데 그 뜻이버려짐, 파멸이라는 것이다.

이런 이름은 짓기도 어려운 이름인데, 성경에서 이름의 뜻이 참 중요하다고 했다.

이름을 가지고 생각을 해보면, 아버지의 나라사랑 때문에 딸이 버려진 것 같은 마음으로 파멸 당한 것 같은 일이 있지 않았을까?

수요예배 본문이 고린도후서 1 8-9절이다.

(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수요예배 때 이번 주 강사님은 이 본문으로정신질환을 다루면서 문자적으로조현 병을 앓고 있거나 식구들일 수 있다고 했다.

혹시아수바가 이렇게 "살 소망까지 끊어져서 하나님만 의지하게 되지 않았을까" 생각하면서, 믿으면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을 깨닫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런 단어 하나를 생각하면서 저는 항상 실낱 같은 가능성을 보면서 사람들을 이해하려고 한다.

아합과 다른 점이 바로 이 절망을 맛본 어머니의 기도가 있지 않을까 싶다.

‘Sky Castle’ 엄마와 같은 이세벨(Jezebel)이 결국 집안을 멸망으로 이끈다.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알게 되는 것이지만 아수바(Azubah)처럼 버려진 것 같으나 여호와 앞에 오게 되어 성경에 이름이 나오는 여호사밧의 어머니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아수바가 훌륭해서가 아니라 살 소망이 끊어져서 자신에 대해 절망했기 때문에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여호와 앞에 서게 된 것이다.

외할아버지까지 성경에 언급이 되는 것으로 봐서 구속사적으로 믿음으로 해석을 잘한 이 명가를 이룬 가문이 되었다.

그러니까 해석이 중요한 것인데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버려지고 파멸 당한 것 같은 아수바가 3대 성군 여호사밧의 어머니가 되었다

 

(적용)

-여호와 앞에 서기 위해 나는 어떤 부모인가? 또 어떤 자녀인가?  ‘Sky Castle'이세벨'인가?

-버려지고 파멸 당한 것 같은 절망을 경험하고 여호와 앞에 서게 된아수바' 인가?

 

여러분들이 어떤 죽을 일이 있다고 할지라도 오늘 이 가운데, 죽음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한다면 여러분도 아수바가 되어서 여호사밧의 어머니가 될 줄 믿는다.

 

선한 왕 두 번째는,

2)   여호와 앞에서 정직히 행하였다. (43)

(43 여호사밧이 그의 아버지 아사의 모든 길로 행하며 돌이키지 아니하고 여호와 앞에서 정직히 행하였으나...)

여호와 앞에서 행하는 것과 정직을 행하는 것이 같다고 하신다.

정직히는 구체적인 대상을 지시하는 정관사가 붙어서 '하나님이 지시하신 구체적인 규례를 따라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인생길을 똑바로 걸어가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성경이 말하는 바 정직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 곁에 항상 머물러서 구체적인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야 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앞에서가 아니면 인생과 이 세상은 정직이라는 것을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지시를 받기 위해서라면 천국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공동체에 속해야 한다.

'여호와 앞에서'가 구체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면, 내가 속한 예배공동체 앞에서, 예수 믿는 식구들 앞에서 '내가 어떻게 살고 있나를 생각해 보라.

분쟁이 없는 공동체, 집이라고 해서 꼭 좋은 공동체는 아닌 것이다.

 

(# 부목사님 부부가 한 해 동안 열심히 싸웠는데, 초등학생 아들이 중재자가 되어서 쫓아다니며그런 식으로 살면 안 되지, 참아!, 그러면 안 되지 둘 다 목자인데, 목자가 어떻게 말하는지 내가 다 들어보겠어.”라고 하는데 아이가 그런 얘기를 어디서 들었겠나? '교회 공동체'에서, 예배에서 들었을 것이다. ‘교회 공동체'도 있고, ‘식구 공동체'도 있겠다. 같은 '예수 공동체' 안에서 사는 것 자체가 정직히 행할 수 있는 비결이라는 것이다. 싸워도 이렇게 싸워야 하는 것이다._

 

혼자서 정직하다는 것은 정말 위험한 것은 의로움이 되어서 남을 찌르게 되기 때문이다

결국 정직하다는 것은 '내가 정직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나님의 정직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절대적으로 공동체가 필요하다.

공동체에 들어가지 않고 여러분이 정직하다고 하는 것은 이 세상은 알아듣지 못한다.

여러분 목장에 들어가셔야 한다.

혼자서 정직하다고 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신다.

이런 정직함으로 '아사(Asa)의 모든 길로 행하며 돌이키지 아니했다고 했다.

아사의 조부 르호보암과 부친 아비암은 산당(the high places)을 세우고 남색 하는 자들(the male shrine prostitutes)을 허용했다.

그들은 아합 못지않은 악을 행했는데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의 왕들의 Quality가 좋고, 나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얼마나 의지하느냐인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 아사는 이것을 다 헐어버리고 우상 숭배자인 모친의 위를 폐했다.

대단한 것이다. 아사의 길은 조상 다윗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했으며 이 개혁의 길을 갔다는 것이다.

역대하 17 6
(6
그가 전심으로 여호와의 길을 걸어 산당들과 아세라 목상들도 유다에서 제거하였더라 7 그가 왕위에 있은 지 삼 년에 그의 방백들 벤하일과 오바댜와 스가랴와 느다넬과 미가야를 보내어 유다 여러 성읍에 가서 가르치게 하고)

여호사밧과 싸우지 못하게 하셨다고 한다.

크게 용맹한 군사를 백 만 대군을 두게 되었는데 왕권을 대리하여 일 하는 용사가 백 만이나 되도록 여호사밧이 얼마나 종교개혁을 간절하고 철저하게 했는지 모른다.

사방에 두려움을 주셔서 그 동안 아무도 공격하지 못하게 되었었는데, 실력이 쌓였는지 공격을 받는다.

어머니의 역량으로 아합과는 다른 부자들도 있는 것을 본다.

부자들도 이렇게 경건하게 살 수 있다는 모델을 보여주었다.

 

(적용)

-여러분은 공동체에서, 집에서정직하다는 평가를 받나? 아니면 공동체를 무시하며 혼자 정직한가?

그러나 여호사밧은 이렇게 여호와 앞에서 정직히 행하였는데, 성경은 여호사밧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도 함께 기록을 했다.

 

그래서 선한 왕 세 번째는,

3)   폐하지 못하는 산당이 있다. (43)

(43 ... 산당은 폐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아직도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 continued to offer sacrifices and burn incense there)

열왕기상 3장을 보면 솔로몬 시대 기브온 산당에서 (성전 짓기 전에) 일천 번 제를 드렸다.

그런데 성전을 지은 후에는 이 성전에서만 예배 드리라고 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일천 번제를 드려본 후에 너무 이스라엘 나라가 부귀영화를 누린 것을 보았으니 이 산당을 포기를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예배를 포기를 못하는 것이며. 그러다 보니까 고질적인 우상범죄의 온상이 되었다.

아사를 비롯하여 아사랴, 요담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한 왕들도 이 산당을 다 폐하지 못했다.

공동체의 폐단의 산물인 산당을 폐하지 못하며 사는 것은 인본적이고 기복적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아무리 우리는 믿어도 다윗보다 솔로몬을 너무 좋아서 솔로몬제과’, ‘솔로몬 은행’. 등 그냥 솔로몬 이름만 써도 돈이 들어올 것 같은 것이다

제가 4대째 모태신앙인데 우리 아들을 낳으면서 솔로몬 왕 같은 아들이 되게 해달라고. 몇 천 년이 지나도 이렇게 맹위를 떨치는 것이다.

유다보다는 우리는 요셉을 너무나 좋아하는 것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이를 폐할 자가 없는 것인데 백성들에게 침투해 있는 인본적이고 기복적인 지금으로 말하면 막 급할 때는 하나님만 부르짖다가 조금만 먹고 살만해지면 우리는 필요한 게 많아서 다양성을 추구한다고 하면서 조금 편해지면 이렇게 포스트모더니즘 시대가 되는 것이다.

예외가 없어서 우리도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상이 노도(怒濤)와 같이 몰려오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산당을 제거하는 것이 본질적인 종교개혁이 아닌 것이다.

끊임없이 현실 속에서 끊임없이 안주하고자 하는 것이다.

솔로몬과 요셉 같이 총리도 되고 지도자도 되고 여자도 많이 얻는 것이 너무 부러운 것이다.

이런 것이 이방 풍속을 따르는 것인데 여호사밧이 그 산당을 종교개혁 하다가 절반의 성공으로 개혁이 철저하다고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아버지 아사의 길로 개혁하는 것으로 돌이키지 아니했다고 했다.

그것도 맞고 또 산당을 폐하지 않아서 돌이키지 않았다는 것과 폐하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 원어가 같은 동사다.

같은 동사를 사용해가지고 이제 여호사밧이 여호와를 떠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상숭배의 원상인 산당을 폐하지 않았음이 같은 비중이라는 것이다.

그만큼 내가 여호와께로부터 떠나지 않고 아사 아버지가 한 개혁을 돌이키지 아니하려고 애를 써도 돌이키지 않는 것만큼 산당 예배를 폐하기가 너무 어렵다는 것이다.

이렇게 기복을 좋아하는 것은 이것이 본능이기에 또 본능이 가르치는,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산당 예배를 드린다는 것인데 뭘 개혁한다는 것은 너무너무 힘든 것이다.

(# 글을 읽었다. 차별금지법을 찬성하는 자들이 그들의 언어로 그대로 쓰면,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이 개독 중에 대형교회 목사들 신상을 털어야 한다. 지금 어떤 후보를 터는 것처럼 털면 먼지 안 날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이슈화시켜야 차별금지법을 통과시킬 수 있다는 전략을 읽었다. 읽는 순간 저는 먼지가 많이 날 것이라서 걱정이 너무 되는 것이다. 먼지 날 때 너무 놀라지 마시고 먼지가 많이 나면 물을 뿌려주기를. 그러니깐 작은 것이라도 개혁을 한다는 것은 너무 어려운 것이다. 그러니까 뜨신 밥 먹고 이런 얘기를 하겠나? 그러니까 정말 산당을 폐한다는 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의 모든 것을 폐한다는 것으로 왕들이 잘못한다. 특별한 왕들만 하는 것이다. 미리미리 그런 얘기를 했는데 요새 갑자기 그러는지 모르겠다. 여자라고 무시하다가 쳐다도 안보다가 이러는 것인가?)

오랜 관행이 너무 많이 있을 것이다. 회사에서 직급별로 하청업체에서 받는 것이 관행이라면 나 혼자 안 받아서 되는 것이 아니고 받아서 상납을 해야 하고 나도 아랫사람에게 받아야 되는 구조라면 나 혼자서 안 받는다고 해결되는 일이 아니잖나? 이게 악어의 사슬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하나님을 믿고 돌이키려고 하는 것과 이런 악어의 사슬을 폐하는 것이 너무 똑같이 어렵다는 것이다. 구속사가 바로 이것이다. 말씀으로 나를 개혁하고자 하지만, 내가 폐하지 못하는 것이 너무나 많은 것이다. 그래서 날마다 회사를 가도 내가 선한 게 하나도 없는 것이다. 이것을 절감하는 것이 바로 여호와 앞에서 바로 선한 것이다. 맨날 나는 뭐든지 할 수 있다가 아니라 여호사밧도 돌이키고 폐하는 게 너무 어렵다는 데 너무 절감이 되는 것이다. 여러분에게 좋은 얘기만 하고 편안하게 천국 갈 건데. 성경은 항상 내 얘긴 것이다.

여러분 회사 생활도 얼마나 힘든지 안다. 마음은 원이로되 회사만 가면 어떻게 계약할지 감이 안 잡히니까 쉰 소리 했다가 쫓겨나고 쫓겨나면 분하고 내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서 이렇게 폐하는 게 너무 어려운 것이다. 그러니 교회만 오면 눈물이 나오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 뜻대로 못 살아가지고, 나는 선한 게 하나도 없다. 이런 생각 안 하겠나? 이게 어떻게 말로 되겠나?. 개혁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다. 그렇게 정직히 행했는데 폐하지 못하는 산당이 있는 것이다.

 

(적용)

-내가 나를 개혁하고 돌이키고자 하지만, 나를 폐하지 못하는 그만큼의 산당은 무엇인가?

-관행이라고 포기하는 것은 무엇인가?

목사님은 강단에서 설교만 하지 뭘 알겠는가? 뭘 알겠나? 그래도 제가 몰라도 얘기하는 것이다.

 

선한 왕 네 번째는 산당을 폐하지 못하니

4)   치명적인 실수를 했다. (44-45)

(44여호사밧이 이스라엘의 왕과 더불어 화평하니라)

화평이 항상 좋은 것은 아니다.

남북은 그 동안 르호보암과 여로보암, 아비얌과 여로보암, 아사와 바아사의 일평생, 일생 계속 전쟁이 계속 됐었었다.

그런데 여호사밧과 아합에 의해서 그 평화적 일시적 관계가 수립되었으니 이것이 정치를 얼마나 잘한 것인가?

지금으로 말하자면 노벨평화상을 양쪽에 줘야 될 일이 아닌가?

그때가 여호사밧이 종교개혁을 하면서 율법으로 백만 대군을 길러내니까 여기까지 좋았는데 이때가 남북이 모두 부귀영화가 극에 달한 시기였다

그런데 여호사밧도 그 환경에 가니까 예외가 없는 것이다

바로 그 이 후의 일이다.

역대하 18 1절에
(1
여호사밧이 부귀와 영광을 크게 떨쳤고 아합 가문과 혼인함으로 인척 관계를 맺었더라)

이렇게 나오지 않나?

군사적 경제적 이유로 결혼동맹을 맺은 것이다.

이 정략 결혼으로 말미암아 아람과의 불필요한 전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전적인 은혜로 여호사밧 길르앗 라못 전투에서 아합은 죽었다.

그런데 자신은 남쪽 방언 소리를 질러서주여잉~’해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그래가지고 역대하 10 2절을 보면,
(2
하나니의 아들 선견자 예후가 나가서 여호사밧 왕을 맞아 이르되 왕이 악한 자를 돕고 여호와를 미워하는 ...)


아주 여호사밧이 시치미를 떼며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는데 선지자 예후가 나가서왕이 악한 자를 돕는 것과 여호와를 미워하는 자를 돕는 것이 가하나이까! 진노가 임할 것.’이라고 하면서왕이 그래도 아세라 목상을 없이하고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았기에 그것은 선한 일로 보겠다.’고 두 가지 얘기를 다 했다.

아람보다 더 무서운 것이 이 혼인동맹을 맺은 거라는 것이다.

여호사밧의 인생에서 가장 치명적인 실수를 한 것이다.

이 결혼으로 인해 남 유다의 북 이스라엘 우상숭배를 비롯한 모든 불법들이 흘러 들어왔다.

 

역대기 21장을 보면. 한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시는가?

한 사람 때문에 예배를 드릴 수도 있고 안 드릴 수도 있는 것이다.

한 사람의 지도자, 오늘 선한 왕, 악한 왕, 우리는 선한 왕을 위해서 기도를 해야 되는데 아달랴 하나가 시집을 가서 불법이 흘러 들어왔다.

더 나아가서 아합의 딸인 아달랴는 유다의 아들과 손자까지 남자는 다 죽여 버리고 자신이 여왕이 되는 엄청난 살육으로 남 유다의 다윗 왕조가 끊어져서 예수님이 못 올 뻔한 가장 큰 위기를 초래한 그 짓을 여호사밧이 한 것이나 다름 없다.

그래서 이러한 연유로 여호사밧의 죄보다 더 큰 죄는 이 세상에 없다.

 

일평생 전쟁을 해도 전쟁이 있었던 때가 더 나았다.

누구와 평안 하는가는 아주 중요하다.

백성이 산당에서 분향하는 것도 여호사밧을 보면, 폐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속지 않으시는 주님께서는 결국 여호사밧이 아합보다도 훨씬 더한 만고의 죄인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비교할 수 없는 죄인이 여호사밧이이라는 것이다.

여러분들이 옳고 그름으로 그 부부를 보고 나라를 보시면 안 된다는 것이다.

 

45절이에요.
(45
여호사밧의 남은 사적과 그가 부린 권세와 그가 어떻게 전쟁하였는지는 다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는냐)


여호사밧의 치적에 대해서는 하나님 나라의 족보에 올라갔다는 평가를 내렸기 때문에 이 열왕기에는 반성문 쓰는 것이니 언급을 안 한다.

역대하에는 써있다.

여호사밧은 신앙부흥 운동을 일으켰고 말씀 운동을 일으켰고 백만 대군 만들었고 전국에 재판제도와 지방제도를 정비한 성군이다.

그런데 여기 특히그가 부린 권세얘기가 나온다.

이 권세로 전쟁을 했다.

구약성경에서 총63회 나오는 이 단어는 하나님의 권세를 얘기할 때 사용되는 단어이기도 하다.

여호사밧이 그만큼 강력한 권세를 행사했다는 것이다.

이제 절대권력에서 보면 절대권력은 왕으로 하여금 여호와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백성들을 탄압하는 부정적인 뜻을 다분히 지니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을 대리하는 여기 왕에게도 절대 권력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전쟁한 것을 부각시킨 이유는 이 절대 권력으로 미가야 선지자의 경고를 무시하고 아합과 동맹해서 아람과 전쟁을 하다가 죽을 뻔 했지 않나?

이 절대 권력으로 선지자를 무시하다가, 다시 회개하고 나서 또 절대 권력으로 오직 여호와를 의지함으로 모압과 암몬을 정벌했다.

똑같은 전쟁 같지만 이 절대 권력을 가지고 가장 선하게 쓰면 최고가 된다는 것이다.

이 세상 최고의 리더쉽은 이타적인 독재자라고 하지 않나?

두바이의 왕(통치자) 10년 안에 최고의 빌딩들을 다져놓은 것은 왕이 지으라고 하면 뚝!!!! 지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 지으려면 3년 몇 날 회의를 해가지고 여기저기 허가 받고 해야 하니 민주주의가 꼭 옳은 것만은 아니다.

똑같은 전쟁 같지만 하나님 나라의 절대 권력을 주시는 것은 백성을 위해 쓰라고 절대 권력을 주는 것이데 그게 조금 잘못되면 하나님 사랑하시는데 자기가 죽을 뻔하기도 한다.

 

그런데 여기서 이겼다.

어떤 전쟁도 하나님이 그렇게 권력을 주실 땐 전쟁의 주인공은 오직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전쟁의 주인이 내가 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아합도 자기가 주인이 되어 죽었다.

정말 치우침 없이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진다는 게 너무 힘든 것 같다.

 

(적용]

-일시적인 평화를 위해서 치명적으로 실수한 것은 무엇인가? 혼인인가? 동업인가? 안 가야 할 모임인가?

 

선한 왕 다섯 번째는,

5)   마지막 징계로 U턴하는 사람이다. (46-50)

45절에서 최종 평가가 끝났다.

여호사밧은 역대 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끝나야 되지 않나?

여기에 추신이 달렸다.

몇 가지 더 추가하고 있는데 여호사밧이 선한 왕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이유를 썼다.
(46
그가 그의 아버지 아사의 시대에 남아 있던 남색하는 자들을 그 땅에서 쫓아내었더라)


이게 또 영광에 달할 때 남색(sodomy)하는 자들을 절대로 건드릴 수 없다.

그런데 인생이 끝날 때 마지막에 이것을 여호사밧이 개혁했다는 것이다.

남색하는 자(sodomite), 카드셋이라는 이 말은 거룩하다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는데 남색하는 자들이 우상숭배하는 자들의 입장에서 거룩한 제사를 주관하기 때문이었다.

음란, 성행위가 우상숭배자들에게 거룩한 종교의식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성경을 문자적으로 보고 동성애 큐어 축제에서 검은 사제 옷을 입고 음란한 옷차림을 하면서 행진을 하는 사진이 보인다.

아사가 남색하는 자들을 그때까지 못 쫓아냈던 것 같다.

이 일이 너무 힘든 일인데 결국 해냈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호사밧이 성군인 것이다.

진짜 개혁하기 힘든 남색이 있는 것인데 이 일을 하려면 정말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것이었나?

 

47절서부터 50절까지 보면
(47
그 때에 에돔에는 왕이 없고 섭정 왕이 있었더라 48 여호사밧이 다시스의 선박을 제조하고 오빌로 금을 구하러 보내려 하였더니 그 배가 에시온게벨에서 파선하였으므로 가지 못하게 되매 49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가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내 종으로 당신의 종과 함께 배에 가게 하라 하나 여호사밧이 허락하지 아니하였더라 50 여호사밧이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매 그의 조상 다윗 성에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장사되고 그의 아들 여호람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에돔은 이삭의 두 아들 중에 하나인 야곱의 형, 에서의 별명이었다

알다시피 약속의 자녀와 상관없는 그곳에서 여호사밧은 솔로몬 시대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서 (솔로몬이 산당 예배의 Hero이지 않나?) 배를 만들었는데 무역이 성행했기에 그렇다

금을 구하려고 배를 만들었는데 에돔 수도 에시온게벨에서 파선을 했다(wrecked at Ezion Geber).

에돔도 약속의 자녀가 아닌데 우리가 그렇게 실수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배를 누구와 함께 만들었냐 하면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Ahaziah son of Ahab)와 함께 만들었다고 한다.

아합이 죽었는데 계속 교제를 하고 있는 것이다

 

역대하 19 2절에 예후에게 아합과의 교제를 엄청나게 질책을 받고 2차 개혁을 했다.

20 37절에는 엘리에셀이 이것을 또 경고했다.

심히 악을 행하는 아하시야가 교제를 했기 때문에 네 배를 파선시킬 것이다라고 분명이 그렇게 나와있다.

그렇게 경고를 받았는데도 사람은 파선하기 전에는 돌이키지 않는 것이다.

망하기 전에는 안 돌이키기가 십상이다.

한 번 맺은 관계를 얼마나 끊어내기 힘든지 모른다.

아하시야가 아합의 아들이고, 아합의 딸은 여호사밧의 며느리이니 서로 피가 섞이지 않았을까?

그가 개혁을 하면서도 이것을 끊을 수가 있었겠나?

다 삼촌이고 고모고, 이것을 보니깐 여호사밧이 끊을 수 없는 게 이해가 가는 것이다. 이게 너무나 또 슬펐다.

우리는 주님의 은혜가 없으면 하루도 살 수 없다.

성군도 안 되는 게 있구나.

하나님께서는 여호사밧을 너무 사랑하셔서 그렇게 두 나라가 만든 배를 파선시키는 것이다.

엄청난 국가적 손실을 주시면서 말이다.

이때 경고를 들었었다.

들었던 경고의 말씀을 여호사밧은 생각해낸 것이다.

사람들은 손해를 보지 않으면 깨닫지를 못한다.

그러니까 이때 깨닫고 아하시야가 다시 배를 만들어서 가자고 했을 때 이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마지막에 남색하는 자를 쫓고 부를 축적할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하고 악한 아하시야의 구제를 중단한 것이다.

이것을 이렇게 생각해보니깐 중단한 것이 얼마나 큰 일인지 알게 된다.

아합의 딸 며느리가 있는데 거기 다 손주들이 있는데 그것을 어떻게 끊겠나?

왕인데. 바로 이점이 마지막에 선한 왕으로 남게 된 최고의 비결인 것이다.

여호사밧의 이 땅에서의 마지막 기록이 49절이다.

허락하지 아니하였더라.’ 아까 45절 전까지는 이 땅에서 평화 하였더라로 끝날 뻔했는데 이 평화를 끊었다는 것이다.

 

인생은 마지막이 중요하다.

여호사밧이 돌이켰다는 것이 중요하다.

여호사밧이 다윗 성에 장사된 건 축복이었다.

생각할수록 남편의 마지막이 축복이었다는 생각이 드는데 저도 그렇게 갈 수 있기를 간절히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

우리는 돌이키기가 너무 어려운 것이다.

사과 한 번 하기, 미안하다고 한 번 하기가 너무 어려운 것이다.

잘못했으면 돌이켜야 하는데 이 돌이키는 것이 죽은 자 살리는 것보다 어려운 것이며 돌이키는 것은 위대한 일이다.

누구는 평생 잘못했다는 얘기를 열 번을 안 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택자가 아니면 돌이키기 어렵다.

여호사밧은 택자이고 선한 왕으로 결론을 맺었다.

여호사밧이 나라를 말아먹는 큰 실수를 했음에도 선한 왕으로 불리는 이유는 바로 이 마지막이라도 돌이키고 회개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큰 범죄를 지고 얼굴을 들 수 없는 죄를 졌다고해도 회개만 하면 천국 백성이 될 수 있다.

다른 조건이 없다. 여러분들의 죄가 아무리 크다 한들 여호사밧보다 더 큰 죄는 없다.

의도 했던 안 했던 그의 죄는 하나님 나라를 끊어지게 할 그런 죄였다.

실제적으로 아하시아의 어머니인 아달랴가 와서 자기 아들들과 손자들을 다 죽였다.

그런데 내가 죄인이라고 남색을 끊고 우상을 섬기는 아무리 내 친척, 할아버지라도 아하시야를 끊어야 되는 것이다.

거기에 쾌락이 있었겠고 제물이 어른거렸을 것이다 그 어마어마한 배가 그때 그 당시에는 굉장한 손해였다.

 

(적용)

-이제는 허락하지 않아야 할 교제, 사건은 무엇인가?

-그로 인해 하나님이 애써 막아주신 일은 무엇인가?

저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것이 제가 13년 동안 문밖출입을 못했는데, 여러분의 간증을 듣고 그러면 제가 빽도 없고 뭐도 없는데 제가 직장이라도 나가고 학교라도 나갔으면 1,000프로 이혼을 했고 다 망가졌을 것 같다. 제가 뭐 특별한 것이 있겠나? 여자들이 가는 길이 뻔하지 않을까? 어떻게 나를 문밖출입을 못하게 했을까? 그건 하나님의 흠 없는 완벽하신 성실하신 셋팅이었다고. 생각이 되는 것이다. 나도 여러분 환경이었으면 똑같이 당했을 것이다. 어머 나도. 똑같이 당했어야 했는데 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아합이래도 그랬을 거 같다. 여호사밧이래도그런 마음이 드는 것이 구속사적인 것 아니겠나? 생각해보니깐 정말 하나님께서 나를 막아주신 것이다. 애써 막아주신 것이다. 그렇게 강력한 게것이 아니었으면 나갔었을 것이다.

 

다섯 개로 왜 선한 왕인가를 보았다.

두 번째는 여호와 앞에서 악한 왕 아하시야(51-53)
(51
유다의 여호사밧 왕 제십칠년에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가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이 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리니라 52 그가 여호와 앞에서 악을 행하여 그의 아버지의 길과 그의 어머니의 길과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며 53 바알을 섬겨 그에게 예배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기를 그의 아버지의 온갖 행위 같이 하였더라 )

아하시야가 아버지의 길, 어머니의 길, 여로보암의 길대로 악을 행했다고 한다.

그 길은 바알을 숭배하고 하나님을 노하게 하시기를 아버지의 온갖 행위처럼 하였다고 한다.

아하시야의 전체 코멘트다.

여호사밧은 치적도 많고 실수도 많고 실패도 많지만 선한 왕이라고 칭함 받는데 아하시야는 조상의 말도 잘 듣고 아버지 엄마 말 잘 듣고 조상신을 너무 잘 섬기는 착한 어린이와 같은데 사건이 하나도 없다.

아하시야가 자발적으로 바알에게 엎드림으로 바알의 맨 끝은 돈이라고 소유하다라는 뜻이 있다고 했는데 종이나 다름없이 바알을 떠받쳤다는 것을 의미한다.

죄책감도 없이 고의적이고 자기가 죄인임을 모르기에 여호와의 진노를 산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그것이 여호와 앞에서 정직히 행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결국 이렇게 살다가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다.

 

그도 공동체가 있다.

교회를 안 다니는 게 아닌데 예수 공동체가 아니면 바알 공동체인 것이다.

싸워도 예수 공동체여야 정직한 것을 알려줄 텐데 조상은 금송아지를 섬기는 여로보암이고 아버지는 아합이고 어머니는 이세벨이고 누이는 아달랴와 같이 최고의 로얄패밀리지만 정직을 가르쳐줄 공동체는 아닌 것이다.

천국이 가시적으로 보여지는 공동체는 예수 공동체인데 교회를 나간다고 다 예수 공동체는 아니라는 것이다.

결론은 바알 공동체도 너무 많다는 것이다.

바로 3-4대의 저주가 바로 이런 걸 의미한다.

이렇게 해서 아달랴의 모든 3-4대의 이름들이 마태복음 계보에서 빠졌다.

로얄 패밀리일수록 고질적인 우상숭배에서 끊어지기가 너무나 힘든 것인데 이 말은 내가 엄마 아버지 말 잘 듣다가 내가 지옥에 갔다.

여로보암의 길은 금송아지 숭배하는 돈 신, 맘몬 신, 이 세상 모두가 하나님 위에 돈을 놓고 섬기는 것이다.

53절에 그 아버지의 온갖 행위같이 했다고 한다.

아합은 억울하지 않겠나?

모두 이세벨이 충동질 한 것인데 그런데 책임은 아합에게 묻는 것이다.

여자의 머리가 남자고, 남자의 머리가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그렇다

우리는 속인 자보다 속은 자가 더 나쁘다는 것이다.

아담과 하와 때도 책임을 아담에게 물으셨다.

남자는 얼마나 책임을 지는 가장으로서 믿음의 책임을 지는 역할을 해야 되는지 모른다.

우리 아내가 그랬다고 하지만 이 땅에서 역할을 주셨다.

이처럼 성도는 누구의 말을 듣고 따라 가냐에 따라 삶의 마지막 날 여호와 앞에서 그 평가가 달라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어떻게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가 왕위를 계승할 수가 있겠나?

왜냐하면 북 이스라엘은 모반과 살인이 계속되어 왕조가 없어졌다.

그런데 이 오므리 왕조가 계속 내려가고 있지 않나?.

그것은 왜 그랬겠니?

아합이 한 번 겸비한 태도를 보인 적이 있는 것이다.

네 죄를 다음 시대로 유보하겠다고 하셨다.

하나님은 조금이라도 회개하는 것을 그렇게 기뻐하시고 아합이 잘나서가 아니라 이스라엘을 위하여서 그리 하셨다

아합 가문이 견고한 것이 아니라 용서할 수 없는 악행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약속하심 바를 이루는 하나님의 열심으로 아하시야가 왕이 되었지만 딱 2년 밖에 안 되는 것이다.

조상, 아버지, 엄마 말 잘 듣다가 엄마 앞에서 짝짝꿍하다가 지옥 갔다는 것이다.

정말 말 잘 듣다가 지옥 간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한 절씩 읽어가다 보면 가치관이 달라지는 것이다.

성경을 순서대로 읽으면 하나님이 설득시키는 것이 있다.

그래서 해석이 많이 되는 것이다.

북 이스라엘은 말씀이 없다.

그래서 우리가 이세벨처럼 임금과 딸을 좋아하고 부잣집 딸을 그렇게 좋아하고 하나님을 믿는 것을 허투루 여기고 그러는 것이다.

 

(# 그래서 정말 여호와 앞에서 악한 아하시야 집 같은 집안 얘기 하나를 들려 드리겠다. 나눔에서 본 것이다. 회사 창업주가 집안이 풍비박살 났다는 소식을 들었대요. 암으로 작년에 작고하셨는데 처음에는 그 분의 삼촌이 목사님이라서 예배를 드렸대요. 그런데 몇 달 안 돼서 더 이상 교회를 안 나가겠다고 한 것은 목사이신 삼촌이 날마다 헌금을 강요한다고. 교회는 돈이다라고 해서 교회를 안 나갔다는 거에요. 그래서 이분은 조강지처를 버리고 회사 여직원과 재혼을 했는데 회사 상장 이후에 직원들에게 주기로 한 주식까지 다 챙겨서 이제 상장 할 때 25억에 회사를 팔고 갔다는 거에요. 그런데 자기는 그것으로 자식들이 잘 살까? 궁금했다는 거에요. 결국 들려온 소식에 따르면 그분의 딸은 재산을 보고 미국으로 시집을 갔는데 집안이 풍비박살이 나니 이혼을 했다 네요. 아들은 아버지 재산을 지키려고 미국에 있던 애인과도 헤어지고 돌아왔는데 그 재혼 녀인 여직원은 회사명의를 돌려주시는 대신 대출을 하고 도망가서 회사가 빚더미에 놓이게 된 것이에요. 그러니깐 홀 시어머니 집 사드린다고 하면서 자기 명의로 그 돈까지 다 빼서 살아졌기 때문에 결국 아들은 빚더미에 나앉고 그 어머니는 거리에 내쫓게 되고. 그래서 이제 그분이 나눔 하기를 이것이 다 하나님의 공의라 생각하면서도 그분이 아프실 때 제가 한번이라도 찾아가지 못했는데 그 때 큐티책을 들고 복음을 전하지 못한 것이 너무나 안타까움이라기 보다는 쌤통이다라고 아내와 나눔했다는 거에요. 저는 그분의 재산 240억이 어떻게 되었나?’가 더 궁금했다는 거에요.

 

초원님이 이런 처방을 하네요. ‘240억도 간단히 날아가 버릴 것 같은데요. 세금으로 나가고 도둑에게 감사헌금하고 강도에게 건축헌금하고 다 사라져버릴 거 같다고.’ 이 창업주의 길이 아하시야 길과 같지 않습니까?

 

<Epilogue>

 

우리가 정말 믿음도 없는데 다 아비 마귀에게서 나온 부모 말 잘 듣다가 예수 없이 지옥으로 가는 평탄한 아하시야 같은 사람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죄를 지었어도 마지막에 회개하는 여호사밧과 같은 사람이 되어야겠다.

 

여호와 앞에서 선한 왕/리더쉽은 믿음의 부모가 중요하다.

여호와 앞에서 정직히 행했음에도 불구하고 폐하지 못하는 산당이 있다.

그래서 치명적인 실수를 했다.

그러나 마지막 징계로 유턴(U Turn)하는 사람이 가장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이다.

여호와 앞에서 악한 리더도 부모책임이다.

할아버지, 아버지, 엄마 말 잘 들으면서, 돈 신 섬기면서 그 지옥을 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의 시선으로 바라봐야 한다.

악한 아합도, 선한 여호사밧도, 악한 아하시야도 우리 모두 예수님이 필요한 존재들인 것이다.

어떤 환경에서도 주님의 시선으로 나를 볼 수 있어야지 되겠다.

 


 

Posted by 윤강로
말씀과 마음씀2019. 8. 20. 15:00

[우리들교회 2019 818일 주일말씀(왕상 22 29절로 40절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

 

 

<Prologue>

 

오늘 말씀은 흉한 말씀도 길한 말씀도 여호와의 말씀이면 믿어도 안 믿어도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5:18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 점 일 획도 결코 없어지기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우리가 날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적용하려고 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잘 하는 일이며 대박 맞는 인생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는 것은 천하를 얻은 것과 같은 일이다

그러나 교회를 다니면서도 천하를 가지 못한 사람이 너무도 많은 데 그 또한 너무 안타깝다

안 듣고 안 들으니 참을 만큼 참으신 하나님께서는 이미 예고하신 아합을 심판하신다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에 그래서 심판에 대하여 오늘 생각해 보겠다

 

1.   변장을 해도 말씀과 같이 되었다.

 

29절 길르앗 라못(Gilead Ramoth)으로 올라갔다.

지난 주 20 21절 말씀처럼 아합은 거짓의 영에 꾀임을 받고 자기 욕심으로 스스로 팔려가는 영적 장애자였다

그런 사람 옆에는 최고라고 해주는 이세벨(Jezebel)이나 거짓 선지자들이 연호를 한다

세력과 돈이 있으면서 자기 중심 성이 강한 사람은 한 마디라도 반대를 하는 사람과는 놀지를 않는다

자기 생각에 이미 두 차례나 아람과의 전쟁에서 이긴 경험이 있고 이번에는 백 만 대군의 막강한 군사력을 갖춘 형제나라 여호사밧의 지원까지 얻었다

남북이 연합했으니 명분까지 있어 보인다

그러니 아무리 생각해도 미가야를 통해 하나님의 경고가 귀에 들어 올 리가 없는 것이다

바꿔 생각하면 정말 그럴 것 같다

명분이 있어도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한 싸움은 하지 말아야 할 때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다들 모르지만 아합의 욕심으로 길르앗 라못(Gilead Ramoth)으로 올라 간 것이다

세상은 욕심이 전공이니까 이런 것을 분별하지 못한다

아합이 마지막이 다가오는 것만큼 29절에 북 이스라엘의 왕인 아합의 이름은 언급이 되지 않고 남 유다의 왕이 여호사밧의 이름만이 언급이 된다

31절에는 아람 왕, 이스라엘 왕처럼 이름 없이 불리는 것처럼 믿는 아합이 이방인의 왕같이 똑같이 여겨진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는 마지막까지 아합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시고 네가 이방의 왕과 똑같이 하면 안 된다라는 메시지를 계속 날리시고 계신 것이다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말씀대로 결정을 해야 하는 나라이고 제사장 나라다

모든 조건을 갖춘 것 같아도 마지막 하나님의 사인(sign)이 없으면 안 해야 된다는 것을 가르치셔야 된다는 것이다

아합의 본문으로 우리에게도 가르쳐야 된다

그래서 이 전쟁을 치르게 하시는 것이다

여호와께 묻는 것을 22장에서 길게 다루는 것을 읽었다

그래서 400명에게 묻고 미가야에게 물었어도 아합은 들을 마음이 전혀 없었다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된다.

목장에서 처방할 때 들으면 하나님은 기쁨을 이기지 못하셔서 믿음도 주시고 재물도 주시는 것을 많이 보게 된다

듣는 것이 어렵다.

묻고 그대로 행하려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묻고 가면 말씀대로 된다.

아합은 물었지만 듣지 않고 자기 고집대로 간다.

30절 변장해서 전쟁터로 간다.

여호사밧(Jehoshaphat)에게 총 지휘를 맡기는 체 하면서도 미가야의 예언이 마음에 걸려서 여호사밧에게 왕복을 입힌다.

모든 것을 다 가져도 회개하지 않으면 등골이 서늘한 것이다

하나님이 활을 당기시고 계시기 때문에 아합은 거짓의 영이 욕심으로 들어와서 지금 꾀임을 받는다.

아합은 여호사밧도 변장시키고 자기도 변장하고 엄청난 계략을 짰다고 생각하였다.

이 전쟁은 이겨도 져도 괜찮은 것으로 이기면 길르앗 라못을 얻을 것이고 변장을 해서 보낸 여호사밧이 죽으면 유다도 접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아합이 만든 완벽한 계획인데 자기가 죽는 생각은 안 한다.

자기는 병사로 변장하였기 때문이다.

여호사밧에게 명령형으로 입으라 하였다.

여호사밧이 이 꾀를 못 읽어서 아합의 왕복을 입었을까?

미가야의 예언을 같이 들었는데 그릇된 긍휼로 들어줬을까?

아합이 죽는다고 했지 여호사밧 자신이 죽는다고 안 했기 때문에 여호사밧이 또 사람이 좋아서 여호와의 선지자를 찾을 만큼 영적인 그가 아합에게 끌려가다 보니 이제 와서 전쟁 못하겠다 할 수도 없고 한번 꾀면 자꾸 물려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믿음이 좋아도 참 선지자 미가야의 예언을 듣지 않고 아합과 같이 나갈 수 있게 됨을 보게 된다.

믿음 좋은 여호사밧도 이렇게 나갈 수가 있구나 를 보며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아님을 알게 된다.

아합과는 사돈간이기 때문에 믿고 싶었고 그 당시 그 대단한 아람을 두 번이나 물리친 것이 팩트이기 때문에 믿고 싶은 것이 있다.

분별은 못하였지만 묻고자 하는 여호사밧의 연약함을 감싸 안으신 것 같다.

그래도 미가야가 자기가 홀로 고생의 떡과 물을 먹을 감옥에 갔고 마지막 보류가 여호사밧 한 사람인데 아합과 같이 가는 것을 보고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어떻게 여호사밧이 미가야의 말을 안 듣고 아합과 같이 나갈 수 있을까 ?

여호사밧이 말씀의 위력을 몰랐을까?

여호사밧이 그때는 개혁을 해도 거기까지였나 보다

아합과 여호사밧은 믿음의 분량이 달라서 똑같이 나가도 하나님은 둘을 다르게 대해 주신다.

아합은 이렇게 변장을 해도 심판의 예언의 말씀과 같이 죽게 된다.

말도 감정도 옷도 자리도 다 변장을 하고 아비마귀에서 난 자가 무엇이든 변장을 못하겠나?

여호사밧도 아합에게 넘어간 변장이 오직 말씀으로 정공법으로 나가야 한다

우리가 살길은 항상 정공법이며 변장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여호와 선지자에게 물었던 그가 전쟁에 가지 않겠다고 말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나는 당신의 백성과 같고 등 운명 공동체라고 아합이 약속했기 때문에 끌려갔을 것이다.

다 듣고도 아합과 한 편을 먹는다.

아합과 사돈이기도 하고 32개 연합 왕을 이긴 아합이기도 해서 믿음이 좋아도 분별이 어려울 수 있다.

묻고자 한 여호사밧을 마음을 좋게 보셔서 살려주셨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미가야가 고생의 떡과 물을 먹고 마시면서 고독했을 것이다.

미가야와 여호사밧의 믿음의 분량이 다르기 때문에 다르게 사용하신다.

다 변장을 한다.

외모를 변장하고, 인격을 변장하고, 이기기 위해서 아비 마귀에서 난 사람이 무엇이든지 변장할 수 있다.

 

(적용)

-여러분이 이기기 위해서 변장하는 것은 무엇인가?

-사랑하는 척, 배운 척, 예쁜 척, 아는 척 중에서 어디에서 변장을 하고 있나?

 

2. 병거를 의지해도 말씀과 같이 되었다.

 

31절 병거의 지휘관들이 오직 이스라엘 왕과 싸우라 한지라.

아합은 나가지 말라고 했지만 고집을 부리며 변장까지 하여 나갔다.

그런데 아합은 뭐가 그렇게 자신이 있어서 나갈까?

성경보라고 눈이 있는 것이다.

아합이 죽기 직전인데 눈에 띄는 단어가 있다. 바로 "병거".

그 당시 병거(chariot)는 지금의 미사일이나 탱크 같은 최고의 무기로 아람왕은 그런 대단한 무기를 다룰 줄 아는 지휘관 32명에게 특별명령을 내리며 이스라엘 왕만 죽이라고 한다.

이 사람들은 정예부대의 특공대로써 2번의 전쟁에서 지고 특수훈련을 시킨 것이다.

아합이 끝까지 병거를 하나님보다 위에 두고 미가야의 예언을 무시하였지만 입이 벌어질 정도로 그 병거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지휘관들이 32명이 있는 것을 보았고 그 지휘관들이 이스라엘 왕만 노리며 달려들었다.

그런데 이 병거를 마지막까지 하나님자리에 두었던 아합은 병거 타령만 하다가 그 병거 사이에서 죽었다.

돈돈돈 하다가 돈에 파 묻혀 죽는다

그런데 그 노련한 병거의 지휘관에게서 죽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 많은 죄에도 회개만 하면 받아줄 태세를 갖추고 계셨는데 마지막까지 아합이 병거를 하나님자리에 두었다고 하신다

아합의 가장 큰 죄는 이것이다.

그 동안의 실수는 아합의 겸비함으로 용서해주셨다.

전쟁 없는 동안 회개하고 돌아온 것이 아니라 그가 끝까지 믿은 것이 병거라는 것이다.

(Job)은 사탄과의 전쟁에서 이겼는데 아합은 사탄이 이긴 것 같다.

그를 병거가 최고라는 거짓말의 영으로 꾀었는데 아합이 아무리 하나님께서 막고자 하셔도 넘어가서 심판을 받게 되었다.

죽기직전까지 병거 얘기만 나오고 있다.

아합은 그릇된 긍휼로 벤나닷을 놓아주었기 때문에 그 벤나닷의 의해서 죽게 되었다.

사탄을 우습게 보면 사탄의 밥이 된다.

아합은 벤나닷이 얼마나 자기에게 목숨을 구걸했는지 그것만 기억하였다.

벤하닷이 살아 남기 위해 형제여!’하면서 구걸 한 것을 믿는다

이런 것에 속으면 안 되는 것이다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다.

여러분이 나에게 잘해 준다고 무서워한다면 설교를 하겠나?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고 구원의 대상이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적용)

-여러분이 의지하여 자다가도 부르는 병거는 무엇인가?

-죽기 직전까지도 못 내려놓는 병거는 무엇일까?

 

이제 대단한 정예부대의 훈련을 받은 32명의 장수들이 아합의 왕복을 입은 여호사밧 한 사람을 향해 달려들 때 살아날 자가 누가 있겠나?  100%죽는 것이다.

그런데 여호사밧이 일촉즉발의 순간에 소리를 질렀다. 무슨 소리를 질렀을까?

여호사밧이 아합은 일반 병사 군복으로 변장 했다라고 했을까?

여호사밧은 그랬을 것 같지 않다.

소리 지르다는 절박한 상황에서 도움을 요청하는 간절한 외침을 의미 한다.

병행구절이 역대하에 있는데 여호와께서 그를 도우시며 하나님이 그들을 감동시키사 그를 떠나가게 하셨다는 것이다.

여호사밧은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에서 하나님께 기도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러니까 표적이 되면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는 것이다.

내가 이들보다 전략이 더 있겠나? 뭐가 더 있겠나?

홀로 서있는데 여호사밧은 그냥 아합이 입혀주는 대로 입고 나갔다가 죽을 일만 남았는데 여호와께서 그 정예부대를 감동시켜 그들을 꾀어 내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여호사밧이 자기들의 표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일촉즉발에 어떻게 깨달았을까?

여호사밧이 주여!’ 한마디를 하였는데 그 소리가 남쪽나라 말인 것이다.

평안도 사람이 제주도 말로 주여!’를 무엇이라고 할까?

주여!’라고 한마디를 해도 알아차릴 수 있다.

그래서 그 한마디를 해도 감동시켜서 눈치챌 수 있고 두 번 전쟁을 통해 아합을 알아 보았을 수 있고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다.

이런 감동 시키심도 있다.

내가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주님을 불러야 한다.

예수 믿는 사람은 주여! 내가 연약합니다가 찬송이 되어야 한다.

내가 할 수 있다는 말이 안 되는 것이고 내가 할 수 없다라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을 불러야 된다.

여호사밧이 경솔히 아합과 전쟁을 나가는 실수를 저질렀지만 마지막에 주여!’ 를 외쳐서 하나님께서는 그를 사랑하셔서 돕고 지켜주신 것이다.

남편이 갈 때 나만 안타깝지 아무도 안타까워하지 않아서 마지막에 소리를 지른 여호사밧처럼 병상에서 주여!’ 나를 도와주옵소서하는 외침을 들으셨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아합은 주여!’를 안 한다. 잘났기 때문이다.

자기가 너무 우상단지를 섬기고 있기 때문에 우상단지를 섬기고 있다는 것조차 인식을 못할 정도로 부유해졌다.

하나님 없이도 척하면 병거가 있고 정원이 나오고 하니 마음이 너무 부유해져서 하나님을 부르는 것을 잊어버렸다.

어쨌든 여호사밧은 아합처럼 사악한 자와 짝하여 전쟁에 동행하여 위기를 겪어 죽다 살아났으나 아합같이 사악한 자와 짝한 것이 성경에 반면교사로 언급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신앙생활은 우리도 성도들과 함께 하지만 일상생활은 세상사람과 함께 하는 것이 너무나 즐거워 세상과 짝하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한다.

사업이나 결혼 등 우리는 복음의 증거를 위해서 세상과 잘 지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의 죄악에는 단호한 자세로 심판이 임할 때는 그들과 같은 모습으로 심판 받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불신결혼, 이혼 등을 막는 곳에는 단호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다 죽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적용)

-여러분은 급할 때 무슨 소리를 지르겠나? "주여~"

 

여호사밧의 부르짖음 이후에 아합의 계획이 될 것 같다가 마지막에 심판의 화살이 아합을 향하게 된다.

 

3.   무심코 당한 일도 말씀과 같이 되었다.

 

무심코(at random)란 한글개혁에서는 우연히로 되어있는데 원어에는 흠이 없는, 완벽한 상태라는 뜻이다.

무심코 한 것이 하나님의 완벽한 세팅이라는 것이다.

한 병사가 아합을 죽이려는 특별한 목적이 없이 활을 우연히 다 쏘았는데 맞췄다.

그 화살을 막기 위한 보호장치가 있는 병거를 타고 아합이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데 아합의 갑옷과 갑옷을 이어주는 솔기(between the joints of armor)의 틈새를 맞추는 것은 제로의 가까운 확률인데 이 무심코 쏜 화살이 하나님의 흠이 없는 완벽한 세팅인 것이다.

이 세상의 우연은 없다는 것이다.

우연히 누군가를 만난 것 같아도 심판도 구원도 하나님의 흠 없는 온전하심의 결과라는 것이다

우연히 이 직장에 간 것 같아도 우연과 같은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완벽한 세팅이라는 것이다.

잘못 만났다고 아무리 외쳐대도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다는 것이 여호와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냐 순종하지 않냐는 자유의지지만 그에 따른 구원도 심판도 하나님의 흠 없는 온전하심 이라는 것이다.

심각한 부상을 입은 아합은 심장을 맞았으면 즉사하지만 팔다리를 맞으면 상처가 별로 없어서 죽지도 않는데 피가 계속 흘러나와서 하루 동안 살 수 있는 상처의 화살을 쏜 것이다.

그때 생각을 많이 하였을 것 같다.

전쟁이 맹렬하여 나올 수 없던 것이 우연이 아니다.

그 피가 병거 바닥에 고인 것은 아합의 죽음을 비참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화살을 맞아도 피를 흘려가면서도 강퍅한 마음이기에 회개가 안 되는데 같다.

여호사밧의 주여! 가 아합에게는 안 되는 것이다.

전쟁에 나가기 전에는 되는 일만 있다가 안 나가야 하는 전쟁터에 나가서는 되는 일이 없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성실하심이다.

아합은 죽어가면서 나봇을 생각하였을까?

일반병사 옷을 입은 아합이 죽었는데도 백성들의 전의가 딱 없어진다.

아합의 전쟁독려가 백성들에게는 고통을 준 것으로 전쟁의 목적이 아합의 죽임인 것 같다.

목적이 달성되자 전쟁이 끝났다고 하는 것 같다.

라못을 탈환하고 안하고는 상관이 없이 백성들이 평안히 돌아가는 것이 미가야의 말씀대로 되었다.

이렇게 말씀을 이루는 인생이 되어야 하는데 아합이 죽으니 전부 다 본향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한 사람이 죽어서 본향이 되는데 한 사람이 죽어서 많은 사람이 한 사람의 순종으로 의로 이끌고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멸망으로 이끈다고 하였는데 여기서는 죽어서 다른 사람이 편안하게 되는 인생은 되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

나 한 사람이 죽어서 열매 맺는 것과는 다른 것으로 아합이 죽어서 백성들이 편안하게 되었다.

똑같이 죽어도 영육간의 죽음이 다른 것 같다.

(적용)

- 우연히 무심코 재수가 없어서 만났다고 아직도 원망하나? 아니면 이것은 완벽한 하나님의 성실하심이라고 생각하나?

-우연히 만났다고 아직도 원망하나?

 

4.   개들이 피를 핥아도 말씀과 같이 된 것이다.

 

아합은 심판하셨고 아합의 시신이 돌아왔다.

전쟁에서 최고의 전리품은 상대국의 왕이나 장군이기 때문에 아합이 왕복을 입고 있었으면 시신이 못 돌아왔을 뻔했으나 일반병사로 위장한 것은 아합이 살기 위해 꾀를 낸 것이지만 이 꾀도 하나님께서 시신을 가져올 수 있는 것으로 바꾸셨다.

아합만 심판하시고 이스라엘은 지키셨다.

말씀대로 된 것이 얼마나 대박 맞은 인생인지 모른다.

내가 믿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해주시는 것이 있다.

창기들이 목욕하는 곳은 일종의 공공장소였다고 하는데 아합이 돌아왔지만 이세벨과 400명의 선지자 백성들이 사마리아 못에서 개들이 피를 핥아먹는 것을 보게 되어서 이 말씀을 전율하면서 들었을 것이다.

그 들이 지켜보는 그 모습 속에 ‘(1)아합이 벤하닷의 목숨을 대신하리라 (2)이스라엘이 목자 없는 양같이 흩어지리라 (3)아합의 피를 개들이 핥으리라 3가지 예언이 동시에 이루어져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예언한 선지자들이 옳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다.

그렇게도 왕을 세워달라고 하더니 세운 것이 얼마나 불행인지를 알게 된다.

이스라엘에서 오무리 왕조 아합의 아버지부터 아합왕 시대는 최고의 번영의 시대를 보냈는데 최고의 정치를 잘한 왕이지만 아합의 숱한 죄악이 16장부터 쭉 나오는데 19장 빼고 6장에 걸쳐 나오고 그 많은 아합의 죄악 중에 치적은 딱 한 줄 나온다. ‘ 정치는 잘하였다.

그런데 하나님의 평가는 인간들의 평가와 얼마나 다른지를 보여준다.

그가 행한 일은 상아 궁 건축 등 밖에 없다.

아합이 말씀대로 심판을 받았음에도 조상들이 함께 잤다’(He rested with his fathers)에서 함께 잤다는 이 말이 천국에 갔다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생각해보면 우리가 성경을 처음부터 읽는 것이 중요하다.

이스라엘 왕들 중에 나답, 엘라, 시므리 같은 왕은 조상들과 함께 잤다는 말이 없다.

북 이스라엘에는 선한 왕이 하나도 없다.

반역의 왕조로 시작을 하였기 때문인데 그 왕들 중에도 조상들과 자는 왕들이 몇 명 있다

그것이 무엇을 뜻할까?

그나마 아합은 이방의 왕들과는 가치관이 근본이 다르기 때문이 아닐까?

이방 왕들은 왕으로써 가책이 하나도 없다.

권세 있으면 가지고 싶은 것 다 가지고 죽이면 되기 때문이다.

아합은 미가야를 미워하지만 늘 흉한 일을 듣고 물어보고 열렬히 미워한다.

나봇의 포도원 때문에, 말씀 때문에, 일국의 대왕이 근심하고 식음을 전폐한다.

다른 나라 왕 같으면 이거 근심하겠나? 그래서 이렇게 독재를 하는 것이다.

엘리아의 말대로 바알선지자 850명을 데려오라니깐 데려와서 엘리아가 다 죽여버렸고 벤 하닷과 싸울 때 이름없는 선지자가 와서 야단을 치고 그 하나님의 선지자를 통해서 도움을 받았다.

엘리아에게 가뭄이 있으리라는 흉한 일로 예언을 받았다.

마음고생이 심해 엘리아가 보기만 하면 자기를 욕을 해 가뭄이 있으리라’ ‘네가 죽으리라등만 이야기 하니 죽여버리고 싶지 않을까?

살면서 엘리아를 가장 괴롭혔다는 것은 엘리아를 가장 불세출의 선지자로 자리매김하는 데에 가장 수고한 공로자 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나라로, 제사장의 나라로 이 땅에서 잘살게 하셔야 하는 것이다.

못살 때도 있지만 예수가 들어가면 그 나라 전체가 잘살게 된다

개인보다 이스라엘나라를 잘살게 해야 하는데 그러면 아합도 잘살게 되는 것이다

아합의 악은 막아야 하고 하나님 나라의 정체성이 생기는 데에는 시간이 걸리고 사람은 부할수록 거짓아비마귀에게 속하기 때문에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는 것보다 믿음 가지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나라는 잘 살아야 되는데 아합이 점점 부자가 되니까 말씀을 안 듣는 것이다

계속 선지자를 보내시고 끝없이 말씀을 하시지만 안 되는 아합을 보면서 이 하나님나라의 가치관으로 사는 것이 너무 힘든 것을 알 수 있다

그 역할모델을 아합이 한 것이니 아합이 너무 수고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아합도 불쌍하고 하나님도 불쌍하고 아합도 너무 수고를 하고 하나님 나라는 구별된 나라인데 구별되게 살기가 어려운 것이다

이 세상에서는 왕족과 결혼하는 것에 대하여 너무 성공했다고 하는데 아합에게는 불신결혼 해서 망했다고 하고 이 세상에서 누가 이것을 가지고 흉한소리를 듣겠나?

쓸데없는 포도밭은 왜 가져서 심판 받냐고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아합이 너무 부럽기 때문에 악한 역할을 해주는 아합이 있어야 반면교사 삼아서 이 길을 안가는 것이다.

아합이 너무 이해되지 않나?

우리가 다 아합인 것이다.

6장에나 아합이 등장한 것은 아합은 나쁜 놈이다가 아니다.

여호와께서 계속 아합을 보고 계시다라고 하였다.

이세벨에게는 그런 말 안 하셨다.

벤 하닷왕과는 완전히 종류가 다른 왕이다.

벤 하닷은 못 알아먹는다

하나님은 아합을 계속 호호 불어가시면서 마지막까지 보셨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심판을 비참하게 당하게 하셔서 이렇게 살면 이렇게 된다는 모델을 보여주시고 말씀의 성취를 보여주셨기 때문에 마지막에 피도 알맞게 흘리게 하셔서 하루 종일 나라를 위해 싸울 수 있는 역할을 주시고 마지막에 회개하지 않았을까?

이 땅에서 이렇게 심판을 받았기 때문에 내가 아합의 입장이라면 말씀이 들렸을까?

전쟁 없이 3년이 있어도 아합이 심판의 길로 가는데 조금 편하다고 우리는 다 과거를 잊어버린다.

 

(적용)

-그래도 예수 믿는 사람이 최고인가? 아니면 안 믿어도 착하면 돼, 공부 잘하면 돼 라며 행함이 최고인가?

 

<Epilgue>

 

850명 데리고 오라고 하면 데리고 오고 그들을 죽인 엘리아를 가만두고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데도 너무 안 되는 것이다.

돈이 있고 권세가 있으니 너무 안 되는 것이어서 성경을 구속사적으로 읽고 인간의 대한 이해가 있어야 되는 것이다.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는 변장을 하여도 말씀과 같이 되고 병거를 의지해도 말씀과 같이 되고 무심코 당한 일도 말씀과 같이 되고 개가 피를 핥아도 말씀과 같이 되었다고 한다

말씀과 같이 되었다는 아합이 죽었다는 것으로 우리는 말씀과 같이 구원받을 수가 있는데 마지막에 실낱과 같은 소망을 얻어야 되지 않을까?

나는 아합보다 나은 것이 하나도 없으며 아합이니까 그래도 이 정도로 살았던 것이고, 아합이니까 이렇게 하나님께 여쭸다가 이해가 되고 회개가 된다.

구속사로 성경을 보지 않으면 옳고 그름으로 성경을 보는 것이다.

우리는 너무 연약하다.

 

 

 

 

Posted by 윤강로
말씀과 마음씀2019. 8. 19. 12:15

[우리들교회 말씀어록(누가복음 19 1절로 10절/세리 장(Chief Tax Collector) 삭개오(Zacchaeus) )]

 

 

몇 년 전 정리해둔 우리들교회 김양재 담임목사님의 주일 설교 말씀 중에 누가복음(Luke) 19 1~10절 말씀을 공유합니다

 

예수님은 돈은 많지만 천한 부자(wealthy)인 세리 장(chief tax collector) 삭개오(Zacchaeus)의 이름을 부르시면서 키가 작아 예수님을 보기 위해 돌 무화과나무(a sycamore-fig tree) 위에 올라간 삭개오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율법적으로 보면 죄인(sinner)인 삭개오에게 그 집에 머무시겠다(I must stay at your house today)고 선포하십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여리고(Jericho)로 들어가 지나가시던 길에서 일어난 장면입니다.

 

여러 사람이 이 광경을 보고 수근거리기 시작하며(began to mutter) 예수님이 하필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 가는 지 모르겠다고 의아해 합니다.

 

너무 황공한 삭개오는 즉시 말씀에 순종하여 급히 나무에서 내려와 영접하면서 너무 감격한 나머지 회개가 담긴 즉석 약조로 자기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지금 줄 것이며’(now I give half of my possessions to the poor)만일 남의 것을 속여 착취한 것이 있으면 따따불(네 갑절)로 갚겠다’(and if I have cheated anybody out of anything, I will pay back four times the amount)고 예수님 앞에서 선포합니다.

 

이미 믿음의 싹이 마음에 심겨진 것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Today salvation has come to this house, because this man, too, is a son of Abraham )라고 축복해 주십니다.

 

그와 함께 예수님께서는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For the Son of Man came to seek and to save what was lost)고 구속사의 여정을 예표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365 12달 매주 매일 24간 동안 내 안에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원을 베푸시려고 이 땅에 오신 것이며 지금 이 세상 말씀에 순종하는 모든 삭개오와 같은 부류에게도 그 가정에 구원을 선포하시는 것인데 이것이 최고의 축복이라고 하십니다.

 

 

<설교말씀 어록 정리>

 

 

(1) ‘삭개오야 내려오라.

(2)주님이 여러분의 이름을 부르신다

(3)우주의 별 1,000억 개 모두를 control하시고 별 하나 하나를 부르시고 기억하시며 수 십억 인구들을 섬세히 살펴 보시고 내 삶을 보고 계시다

(4)주님은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며 24시간 오차나 실수도 없으시다

(5)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며 성령 하나님의 뜻대로 행 하신다

(6)주님은 24시간 내 안에 계시다

(7)구원의 은혜를 베푸신다

(8)삭개오 가정에 구원을 선포하시는 데 이것이 최고의 축복이다

(9)죄 사함의 축복이 그리스도인에게는 최고의 축복이다

(10)율법적 두려움의 power 10이면 하나님 깨달음의 power 100~1,000배 이상 이다

(11)구원의 확신, 사랑의 확신, 나의 갈급함을 아신다는 확신은 주님의 엄청남 은혜의 power이다

(12)교회에서 구원의 메시지를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니 이단이 활발하게 날뛰는 것이다

(13)영생이 있음을 확신하는 것이 구원의 확신인데 가장 중요하지만 시작에 불과하다

(14)하나님 말씀에 심장이 멎을 정도이다

(15)스타트는 구원 확신의 은혜이다

(16)구원파의 특징은 더 이상 회개를 안 해도 된다고 목회를 한다

(17)목욕한 사람이 또 목욕하는 것이다

(18)하나님의 자녀는 일생에 한 번

(19)씻음은 지속적으로 해야 하는 것이다

(20)복음 전도자의 삶은 전국을 유람하고 마태복음과 시편을 통째로 다 외우고 산 넘고 물 건너 전파 시키는 것이다

(21)사도행전 전체를 암송하며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통해 치유하고 삶을 통째로 바꿔준다

(22)전도자의 삶은 구원의 하나님 때문에 감사 할 수 있다

(23)낙원의 실제 함을 예수님께서 보여 주셨지만 영혼구원 사명 때문에 소천하고 싶었지만 남아 있었다

(24)주님은 각 사람의 눈 높이, 취향, 기질에 맞게 다가 오신다

(25)한 영혼을 섬길 때도 각 사람에 맞춰 마음 약한 사람에겐 위로로, 힘이 없는 자에겐 다가 가서 붙들어 주신다

(26)삭개오는 돈은 많지만 천한 부자로서 진정한 안식을 찾았다

(27)삭개오는 주님 안에서 자유함과 안식과 즐거움과 기대함을 찾았다

(28)하필이면 피 빨아 먹는 삭개오 죄인의 집에 들어 가시냐고 따진다

(29)돌아온 탕자 아들에게 살찐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준비하는 아버지에게 첫 째 아들()과 마찬가지로 힐난한다

(30)하지만 이 모든 결정은 하나님의 주권이시다

(31)스테반과 아나니아를 박해한 바울(사울)이지만 택하심 받은 자로서 이방인의 사도가 된다

(32)강퍅한 남편도 순종의 통로로 쓰임 받으면 된다

(33)은혜를 받으면 비방 받아도 열등감이 생기지 않고 자유함이 있는 것이다

(34)상처는 여전히 피가 나고 또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지만 상처가 아물어 피가 멈춘 흔적은 남에게 약 재료와 간증이 된다

(35)삭개오는 자발적인 적용으로 전 재산의 절반과 토색질 한 것에 대해 4배를 보상하는 것은 수전노가 베풀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36)하나님을 갈망하면 은혜를 부어주신다

(37)영원한 것 3가지는 하나님과 말씀과 영혼이다

(38)지혜로운 자는 사람을 얻는다

(39)새 언약의 핵심이 예수님이다

(40)구원을 받아야 구속사적으로 읽는다

(41)계속 읽다 보면 성령님이 찾아 오셔서 문자적으로 읽더라라고 이렇게 깨달음을 주신다

(42)약한 자를 택하시는 것이 하나님이시다

(43)고난 가운데 있는 사람이 성경을 읽는다

(44)가족을 붙여주셔서 어쩔 수 없이 이타적일 수 밖에 없고 속상할 수 밖에 없다

(45)남편 죽으니 난 이제 어떻게 살죠?’라고 하는 것이 자기 사랑에서 나오는 이기적인 말이다

(46)남편이 속 썩혀 주는 것이 좋은 것이다

(47)남 사랑은 없고 자기 사랑만 있다

(48)사랑 타령에 평생 사로잡혀 사는 것은 자기 사랑일 뿐이고 자기 사랑 때문에 괴로워한다

(49)영적 내공이 있어야 영적 사랑이 있는데 연민에 겨워, 지 사랑만이 대장인 것으로 인간은 자기밖에 모른다

(50)인간이 그냥은 안 되는데 박살이 나야 인간의 ego가 무너진다

(51)지 사랑 때문에 슬프고 나 때문에 인생이 힘들다

(52)남편과 자식 때문이 아니고 자기 때문에 힘들다

(53)세상적으로 다 귀한 자, 부자만 바라본다

(54)하나님은 약한 자를 택하시며 전도하면 상급이 크다

(55)천국에 입성하는 자가 진짜다

(56)믿는 사람이 범죄함으로 인하여 큰 일이 난다

(57)자기 살인(자살)을 하면 구원받을 수 없어 더 나쁘다

(58)죄를 지었는데도 계속 번영을 누리는 것이 저주다

(59)사람을 통해 새 생명을 잉태해야 한다

(60)예수 믿는 것은 하나님이 하셔야 한다

(61)내 죄를 바라보면 못 할 것이 없다

(62)가라지는 늘 같이 간다

(63)유명해지면 사단이 따른다(S교회 J목사 성추행으로 파멸)

(64)사단과 싸움에서 이기려면 초점이 성전이며 하나님의 간섭하심을 증거한다

(65)내 속의 사울 세력이 죽어야 다윗 세력은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한다

(66)살아 운동력이 있는 말씀이 관절과 골수와 영을 찔러 쪼갠다

 

 

내 죄에 겨워 분노하고 성내오니 내 죄 사함을 소망합니다.

내 죄를 고백합니다.

지 사랑에 겨워 슬퍼하고 남은 원망하는 제 자신의 가증함을 회개합니다.

교만과 자랑은 자기 죄를 덮으려고 교활함이 있습니다.

내 죄를 보고 회개하고 겸손해지기를 소망합니다.

내 죄만큼 성내고 분노함을 믿습니다

 

Posted by 윤강로
말씀과 마음씀2019. 8. 14. 12:24

[우리들교회 2019 811일 주일말씀 요약(왕상 22 13절로 28절/참선지자)]

 

 

<Prologue>

금주는 광복절이 있는 주이다.

일제의 폭압에서 벗어난 지 74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 당시 수 많은 수탈 말고도 나라를 잃은 가장 큰 고통은 언어, 글자를 잃은 것이었다.

광복은 빛을 되찾다는 뜻으로 민족의 생존과 자주 주권이 함께 회복되어 미래의 빛이 밝혀진 날이었다.

그래서 3년 뒤 8.15에는 대한민국에 자유민주주의정부가 수립되었다

그 후 3년 후 1950 625일 발발한 북한의 침략으로 지금까지 세계유일의 분단의 아픔을 겪고 있는 나라이다.

부모님이 이북 분들이라 나라 없는 설움, 고향 없는 설움을 안다.

나라가 없으면 예배도 못 드리는 것을 피부로 알고 있다

광복절 예배를 따로 드리지 않는 이유는 우리들교회가 매주일 가정, 나라 주일을 지키는 것이나 진배 없기 때문이다.

개인 구원이 사회 구원이다.

성경은 구원의 책이기에 성경이 나를 읽고 가게 해야 한다.

열왕기서도 아합(Ahab)과 이세벨(Jezebel)의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왕들과 나라의 이야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항상 오늘 주시는 말씀에 나와 나라에게 주시는 말씀이 있음을 늘 보기 때문이다

믿음의 분량만큼 성경이 보인다.

지난 주 전쟁 없이 3년 간 있다가 사탄의 전략에 휘말려 안 해도 될 전쟁을 일으키려는 아합을 보았다.

그래도 북 이스라엘 백성은 무늬는 하나님을 모두 믿지만 아합의 드러나지 않은 야망과 악을 보지 못하고, 400명의 선지자들도 전쟁을 하라고 한다.

빼앗긴 땅을 찾아 오는 것이기에 명분도 있어 보인다.

속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은 아합의 악을 아시기에 막으신다.

그런데 누가 이 대단하고 무서운 아합을 위해서 전쟁을 막을까?

오늘은 참선지자에 대해서 알아 보겠다.

 

<말씀요약>

 

1. 여호와의 말씀만 전한다.

아합이 보낸 사신(messenger)이 미가야에게 이르되, 다른 선지자들이 하나같이 왕에게 길하게 하니, 길하게 하소서. 지지하라고 한다.

이세상이 아무리 좋아도, 내일 일을 모른다.

계시록에, 공중권세 잡은 사단이 끊임없이 있다.

용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이다.

사람들은 길한 것을 너무 사모한다.

끝없이 돈 신을 사랑한다.

자체에 힘이 있다.

돈은 거칠 것이 없어서, 있으면 하나님을 믿기 힘들다.

얼마나 좋으면 믿는 아합이 바알(Baal)을 계속 끼고 있다.

천억 위엔 1, 그 위엔 10조가 있다.

목표지향적인 것만 듣고 싶어 하다가, 사건이 오면 누구 때문이라고 원망하다가 가는 것이다.

미가야가 이르되, 여호와가 살아계심을 맹세하여 내게 말씀하시는 것 그것을 말하리라 하였다.

훌륭하고 길한 일도 아닌 여호와의 말씀만 전하겠다 한다.

내가 듣고 전해야 할 여호와 말씀은 무엇인가?

자기 생각을 말씀에 종속시켜야 하는데 말씀이 자기 생각에 따라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기 생각에 꽂히면 말씀이 도장 찍어주길 바란다.

순서가 아주 중요하다.

왕에게 길한 예언을 해달라고 부탁했지만, 길하다고 생각했던 예언이 조금 뒤를 보면 흉한 예언이 되어 왕을 죽이는 일이 된다.

여전히 가장 어려운 것이 말씀 묵상이다.

구속사의 말씀을 묵상하지 않고 구원의 관점으로 보지 않으면 선악의 관점을 벗어나지 못한다.

가정 회사 나라를 해석하는 것이 적어도 우리들교회의 묵상이다.

수요일에 한 집사님이 아내가 내 구원을 위해 수고 했다는 말 한마디에 교회에 왔다.

모든 것이 성경 따로가 아닌 것이다.

일원론이라 그때그때 물으면 말씀해주신다.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다.

아합에게는 850, 400명 등 선지자들도 많았지만 엘리야, 이름 없는무명의 선지자, 미가야의 선지자가 있었고 이들이 목숨 걸고 증언 했어도 어떻게 아합은 회개를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미가야를 보내 또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게 되었다.

15절에, 왕이 그에게 이르되, ‘미가야야 우리가 싸우랴,말랴. 미가야가 이르되, 올라가서 승리를 얻으소서하였다.

부르기도 정답게 미가야를 부른다.

400선지자들에게 물을 때는 강하게, 미가야를 보니 위축이 되어서, “내가아니라 우리가했고, “~에 갈거야에서 “~으로 갈거야라고 하며 방향만 정했다.

미가야가 올라가라 한 말이, 비아냥으로 들렸다.

아합이 듣기 좋은 말을 듣고도, 하나님의 진실한 말을 거듭 청한 것은 미가야가 진실을 말하지 않는 것을 아합이 알고 있다.

아합이 어용선지자 예언을 따른 것이 미련함이 아니라 자기애적 범죄의 성향에서 자발적으로 들은 악함이다.

네가 아무리 진심이라 말해도 나의 전쟁 능력은 하나님보다 높으니 염려 말고 말하라고 하는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하나님 존재가 없는 것을 확신한다면 사람들은 못할 게 없다고 생각한다. 나아가 자기가 신이라고 생각하면 못할 일이 없다. 로마 황제가 그렇고 지금 아합이 그렇다. 백성들은 지도자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고 추종하고 있다.

 

아합은 아람(Aram)1,2차 전쟁에서 승리한 것이 자기 능력인줄 착각하다가 그것이 사실인 것으로스스로 믿게 되었다.

사람들은 하나님 때문에 되었다라는 생각을 안 한다.

나봇(Naboth)을 죽이고도, 심판 받고 그것을 잊고 살면서도 무고한 자 미가야에게 또 나쁜 짓을 하려고 한 것은 정말 악의 대명사 맞다.

아무리 악한 의도라도 죽음의 길을 피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보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게 된다.

하나님은 끝까지 이스라엘의 왕에게 또 듣게 하시는 사랑이다.

 

(적용)

-여호와 말씀이라면 길한 일, 흉한일 상관이 없나?

-아직도 길한 일만 좋나?

-돈으로 할 수 있는 것이 많아서 내가 끼고 있는 바알 신은 몇 개인가?

 

자식-학벌-쇼핑-주식- 경마- 골프- 여자 등 850개에 이르는데 이런 것 좋아하는 사람은 바알 신을 못 버린 사람이다

우리는 모두 돈 신을 섬기고 있다

 

2. 끝까지 사랑의 흉한 예언을 해야 한다.

 

17-18, 그가 이르되 내가 보니, 이스라엘이 목자 없는 양같이 산에 흩어졌는데, 여호와께서 이들이 주인이 없으니 이스라엘 백성이 평안히 돌아온다 하였다.

아합이 전사하여 죽는다는 얘기이다.

그 죽음으로 도리어 백성들은 평안을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시드기야(Zadekiah)의 철뿔(iron horns) 예언을 무색하게 하는 이 예언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아합이 전쟁을 위해 400명의 박수부대를 이끌고, 당대 영성 있는 여호사밧(Jehoshaphat)을 교묘히 꼬드겨 전쟁에 참여해서 모두가 박수치는 전쟁 같은데 어떻게 백성들이 분별할까?

이럴 때, 미가야가 목숨이 두 개도 아니고 하나인데, 어떻게 아합 앞에서 당신이 죽는다고 예언 할 수 있는가?

이방인과의 전쟁에서 아합이 예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위상을 보여주셔야 되기 때문에 계속 이기게 해주셨는데 아합은 자기 것인 줄 알았다.

이제는 나라는 지켜주시되 아합을 폐할 수밖에 없는 때가 왔다.

무슨 의미인가?  아합은 아무리 성취해도 기쁨이 없다.

전쟁마다 이기고 원하는 것(나봇의 포도원과 정원 등)을 다 가졌고 더구나 딸은 백만 군대와 영성의 여호사밧 아들에게 시집 보냈는데도 아합은 평강, 기쁨이 없다.

아합은 늘 누군가와 늘 논쟁하고 화내고 격분하는 것 밖에 없다.

그러니까, 주인이 죽으니 백성이 평안히 돌아온다고 했는데, 아합을 보면 하나님의 선지자를 죽이고, 벤하닷은 살려주고, 나봇은 죽이는 이런 가치관을 가진 지도자 밑에서 어떻게 평안할 수 있나?

그런데도 북한을 아직 건재하게 하시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주인이 없어서 평안하게 된 적이 있나?

예를 들어 회사에 사장이 없으면 그렇나?

 

**나를 보고 힘들게 하는 남편이 갔으니, 평안해서 잘 살고 시집도 갈 수 있겠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말씀 묵상하다 보니 근본적으로 별로 달라진 게 아니었다. 인간적인 평안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인도를 받지 않은 주인이 있으니, 그것이 괴로움이다.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말씀 인도를 받지 않는 주인이 죽으니, 군사들이 고통스런 전쟁을 끝내고 평안히 돌아갔다는 것이다. 왕과 백성은 운명 공동체였지만, 분리되게 하신 것처럼, 나도 남편과 운명공동체였지만 이렇게 쓰시려고 분리하게 하셨다. 그러나 남편에게 복음을 제시하므로 사람에게 흉한 일이 가장 길한 일이 되게 하셨다. 그 긴박한 순간에  반드시 나을 거예요 살 거예요, 할렐루야 , 아멘했다면 구원받지 못하고 갔을 것이다. 그 긴박한 순간에 당신 가망이 없다 회개 하지 않으면 나와 아이들이 살 소망이 없다.”가 얼마나 흉한 예언인가? 뺨은 안 쳤어도 살 소망을 끊는다고 경솔하다고 했다. 그것이 비극이 안 된 것은 흉한 예언을 듣고 회개 할 수 있었다. 영적 공동체가 된 것이다. 마지막이라도 들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하나님도 안 되는 아합이란 사람이 있는 것이다. 아합이 내 앞에 너무 많으니까 인생이 슬프다. 미가야는 아합에게 선물인데 못 받았다. 하나님이 보내신 수 많은 선지자 들을 무시하는데 하나님께 유기된 자가 아니라면 어찌 이런가?

(적용)

-오늘 밤 죽으면, 천국 갈 자신이 있는가? 라는 흉한 예언을 아합과 같은 사람에게 할 수 있나?

아합에 종 노릇하다가 죄에 매여서 종 노릇 하는 것이다.

-사망을 삯으로 받겠나? 은혜로 놓임 받아 평안함을 맛보겠나?

성경은 일원론이다.

내 삶, 나라, 교인 따로가 아니다

내가 복음이 있으면 그 사람을 위해 최고라고 전하지만 사람들이 보면 흉한 예언이다.

 

3. 거짓말 하는 영을 분별합니다.

 

19절부터, 미가야가 이르되, 그런즉 왕은 여호와 말씀을 들으소서, 여호와께서 누가 아합을 죽게 할꼬? 하니, 한 영이 내가 그를 꾀겠다. 거짓말 하는 영이 돼서 선지자 입에 있겠다. 여호와께서, 너는 꾀겠고 너는 이루리라 하셨다.

문자적으로 들으면 하나님이 아합을 죽게 할 의도를 가지고 계략을 꾸미는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다.

하나님께서는 거짓에 넘어갈 아합의 마음을 아시고 결과론적으로 말씀 하시는 것이다.

자유의지를 주셨기 때문에 끝까지 기다리신다.

무 자르듯이 선악이 조절이 된다면 우리가 가슴 아파할 일이 무엇이 있겠나?

사단과 졸개에 대해서 요한복음8:44에서 살인자라고 말씀하셨다.

인간은 모두 거짓 아비 마귀에게서 났다.

선한 게 없다.

모든 거짓말의 배후에는 사단이 있다.

선의의 거짓말도 마찬가지다.

욥기에서 천상에 사탄이 있는 것을 보았다.

사탄이 하나님의 허락을 받고 욥(Job)을 꾀러 나갔다.

똑같은 천상의 어전회의에서 악한 사단이 아합을 꾀겠다고 하나님께 허락 받고 나갔다.

악한 영도 하나님의 허락 아래에 있다

거짓의 영이 악인을 멸망시키는 최고의 방법이다.

인간은 거짓말로 시작해서 거짓말로 끝내는 것이 인생이다

미가야가 한명인 것처럼 믿는 사람을 보기 힘들다.

끊임없이 미혹하고, 당하고 산다.

예수님의 삶도 16장에 걸쳐 기록되었는데 아합이 6장에 할애 되어 기록이 되었다.

인생들이 악하다고 하면서도 아합을 너무도 부러워하기 때문이다.

말로만 악하다고 하면서 모두 아합 편에 섰다.

빨리 아합을 치시면 좋겠는데, 하나님이 오시기 전까지 우리 모든 인류가 예수님이 죽어주신 하나님의 자녀이니 아무나 치실 수가 없다.

권선징악으로 보면 서로의 입장에서 일본과 한국이 서로 없어지기를 바란다.

하나님은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려고 기다리시는 것이다.

사단이 우리를 다 잡고 있는 것을 아시지만 자유의지를 주셔서 사단은 이 약점을 알고 하나님이 어딨냐?고 우리를 치는 것이고, 하나님은 훈련의 기간에 돌이키기를 기다리시는 것이다.

결국은 하나님이 하시려고 해도 자기의지로 사단에게 아합은 넘어가는 것이다.

낮고 천한 육신이 다 인줄 알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당하는 자 꼬이는 자를 어김없이 합당한 자들로 구성하셨다.

거짓 선지자들에게 스스로 인도받기를 자유의지로 원한 것이다.

속이는 자 속는 자 똑같으니 둘이 만난는 것이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이럴 수가 없다고?  하나님은 계시다. 내 삶의 결론이다.

아합이 속기를 원했다는 것이다.

누구 핑계를 댈 것이 없다는 것이다.

거짓의 영에 끌려 다니는 사람들이 많다.

하나님의 징계일 수 있다.

연단도 하고 채찍도 하여 돌아오게 하시는데, 연단보다 무서운 게 전쟁 없는 3년이다.

가장 불쌍한 자는 하나님께 잊혀진 자이다.

정욕대로 상실한대로 부끄럼 없이 살게 내버려둔 자가 전쟁이 없는 자이다.

이 땅이 편한 것이 좋은 게 아니다.

가치관이 안 변하는 나와 내 가족이 잊힌 자라면 얼마나 가장 불쌍하고 가슴 아파야 한다.

왜 저 사람은 망하지도 않고 잘될까?

하나님은 욕먹으시면서 돌아오라고 보냄을 주시는 것이다.

 

(적용)

-거짓의 영을 분별할 수 있다고 자신하나?

-여러분은 거짓말을 당하는 자인가? 꼬이는 자인가?

-당하고 꼬이는 것을 합당한 자로 구성해 주셨다는 게 인정이 되나?

한마디로 속았으면, 속인 자나 속은 자가 다 똑같으니까 만났다.

똑같아서 동업해서 실패했다라는 것이다.

거짓의 영에 이끌려서 진짜 중요한 것은 안 물어본다.

 

4. 말씀이 이루어 질 때까지 참선지자는 큰 고생의 떡과 물을 각오해야 한다.

24, 시드기야는 자신의 영과 다른 말을 하는 미가야에게 분노하며 뺨을 내려쳤다.

예수님도 일개 군병들의 모욕을 인류를 위한 구속사역을 위해 참으셨고, 하나님께서는 이를 높이셨다.

25, 미가야가 이르되, 네가 골방에 들어가서 숨는 그 날에 보리라.

머지않아 들어나겠지만, 하나님 말씀을 밝히 드러내는 일에만 전념한 참 선지자 미가야의 모습이 시드기야와 대조된다.

골방은 생명을 위해 찾는 피난처라는 의미이다.

골방에 숨는 날은 아합이 전쟁에서 죽었다는 소식이 들리면 거짓 예언을 한 시드기야가 골방에 들어가 살기 위하여 급급할 날이 올 것이라는 것이다

시드기야가 죽을 날이 올 것이라는 것이다.

26, 아합은 결론을 내린다.

이스라엘의 왕이 미가야를 끌고 가서, 고위각료를 시켜 끌고 가라고 한다.

뭔가 굉장히 걸리는 게 있다.

이놈을 옥에 가두고 내가 평안히 돌아올 때까지 고생의 떡과 물을 마시게 하라 하였다.

결국 참 선지자의 마지막 결론은 고생의 떡과 물이다.

아합은 미가야 선지자가 흉한 예언을 한다는 이유만으로 시드기야 앞에서 간접 사실을 예언한 미가야 선지자를 가두기로 결정했다.

미가야 아야기를 듣고 지금이라도 돌아오라고 보내신 하나님의 대언자 미가야를 가두라고 했다.

왜 인가? 흉한 일 예언에 격분했고, 그 불길한 예언을 약화시킬 생각으로 가두면 될 것 같아서 한 것이다.

결국 참선지자는 말씀이 이루어질 때까지 감옥에 갇혀서 고생의 떡과 물을 먹어야 하는 것이다.

내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기다리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볼 때는 고생의 떡과 물을 먹는 것이다.

누군가 이 보여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예수 믿으면서 몸에 익혀서 잘 갖춰서 기다리는 것이다.

절제는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것이고, 배려하려면 참아야 한다.

억지로가 아니라 주님 때문에 절제와 배려와 참음이 되게 하신다,

근데 이런 것이 사랑하면 자발적이 된다.

우리 모두 서로의 감옥에 갇혀 있는데 그럴 때 마다 절제와 배려와 참음을 보여 주는 것, 그래서 고생의 떡과 물을 마시는 감옥에 갇혀 있어야 하는 것이다

내 편함을 내려놓지 않으면서 돌아오길 바라니, 안 돌아오는 것이다.

(적용)

-여러분이 갇혀있는 옥은 말씀 때문인가? 욕심 때문인가?

똑같이 문밖을 못 나가도, 사명이 있으면 말씀 때문에 갇혀 있는 것인데, ‘내가 왜 여기 있나?’ 라고 하면 욕심 때문에 갇혀서 평강이 없다.

갇혀 있어도 말씀 때문이면 하나님이 일을 하신다.

믿는 사람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증거할 사명이 있다.

똑같은 환경이 똑같이 해석되는 것이 아니다.

말씀 때문이라면 기쁘게 고생을 먹어야 한다.

그런데 거룩이 없는 행복은 욕심이다.

돈 때문인데 돈을 안 줘서 끓는다.

미가야가 이르되, 백성들아 들으라 하는 것이다.

미가야는 떳떳히 말했다.

흉한 일을 예언하니 시드기야에게서 뺨을 맞고 아합 때문에 감옥 가고 경건한 여호사밧에게서도 도움을 못 받았다.

참 선지자를 죽어라 미워하는데 어떻게 사역을 했나?

내가 힘들다고 하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사역을 해낸 선지자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여기 있다.

이런 한 사람 때문에 기도교가 명맥을 이어 온 것이다

나의 설교도 들어주시고, 책도 보아 주시니 난 정말 수준 낮은 선지자가 아닌가 싶다.

결국 하나님의 뜻에 역행한 아합은 평안히 돌아오겠다는 자신의 소망과 상관없이 주검이 되어 돌아왔다.

이스라엘 백성은 예언대로 평안히 귀환을 했다.

 

***참 선지자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초등학교 아이들 큐티 페스티벌이 있었다. 아합과 같은 아빠와 살 고 있는 자매이다. 수련회비를 엄마 아빠가 서로에게 타라고 했다. 아빠가 4만원을 주셨지만, 마지막으로 엄마에게 물어보고 가져오라고. 엄마가 끝까지 주지 않아서, 아빠의 구원을 위해, 아빠에게 돈을 돌려주었다. 두 자매가 자기 용돈으로 수련회비를 냈다고 한다. 아합보다 훨씬 낫지 않나. 아빠는 이슬람성전에 데려가서, 종교의 공통점을 가르치신다. 엄마는 교회는 나갔는데, 아빠가 교회를 못나게 하고, 경찰을 부르고 엄마가 접근금지 되었다. 이혼소송 최종판결이 남았다. 두 자매가 역기능가정의 감옥에서 고생의 떡과 물을 마시고 있다. 적용이 너무 미가야 같지 않나?

 

<Epilogue>

 

보잘것없는 성도로서의 삶을 살아내는 것이 선지자이다.

어떤 것도 사소한 것이 없다. 목숨 걸고 예배 드리고, 목장 가는 것이다.

하루하루의 생활을 사는 것이 신앙이다.

종말을 준비하는 것은 오늘을 어떻게 사는 지로 나타난다.

구원에 관심이 있는가, 없는 가로 분별이 된다.

어려서부터 준비 되어진 사람은 이 세상이 감당 못할 것이다.

참 선지자로 이미 하나님이 보시고 기쁨을 이기지 못하실 것이다.

자매의 구원을 위해 아빠가 수고하고, 일본과 북한이 수고한다.

수고한다고 해서 기분이 나쁜가, 구원의 이야기를 사람들은 너무 미워한다.

종말준비는 오늘을 살아내는 삶의 방식이다

고생의 떡과 물을 안 먹으면서 말씀을 전하는 것은 힘든 것이다

 

 

 

 

Posted by 윤강로
말씀과 마음씀2019. 8. 10. 15:19

[우리들교회 2019 84 주일말씀 요약(왕상 221절로 12/ 전쟁 없이 년을 지냈더라)]

 

 

 

<Prologue>

우리가 입시 전쟁, 바람 전쟁이 끝나고 대학은 붙고 배우자는 집으로 돌아왔다면 그것으로 전쟁이 걸까?

전쟁의 가운데에서는 하나님만을 부르고 겸비함을 보이며 아이만 붙는다면 남편만 돌아온다면 이번 사업만 해결해준다면 주님 하라는 대로 모든지 하겠습니다.하면서 겸비한 태도를 보인다.

그러나 원하던 것이 이루어지면 겸비함은 사라지고 주님도 멀리멀리 가버리고 이제 다시 교만해진다.

주님이 가버리는 것이 아니고 내가 주님을 버리고 간다.

다른 과시를 위해 일을 꾸미게 된다.

22장은 아합의 마지막 장이다.

결론이 참담하게 나는데 여전히 계속 이겨야 하고 과시해야 하니 문제인 것이다.

오늘은 아합(Ahab)처럼 3년 간 전쟁이 없는 사람들의 특징을 보겠다.

 

 <말씀 요약>

1.  다른 세상전쟁을 꾸민다. (1-4)

(1 아람과 이스라엘 사이에 전쟁이 없이 년을 지냈더라)

아람과 이스라엘이 3 동안 전쟁 없이 살았다는 평화는 아합에게는 좋은 일이 아니라 쥐약이다.

아합의 겸비함이 오래 가지 못하는 비결이다.

그러나 동안은 가뭄도 오고 벤하닷이 쳐들어오고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아서 드디어 이제 겸비함까지 갔다.

겸비함을 보시고 하나님은 자신의 대가 아니라 자녀의 대로 재앙을 유보하신다고 했다.

자녀는 무슨 죄인가? 하겠지만 자녀에게도 아합과 같이 회개하면 유보될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그러나 부모인 아합은 자녀에게 재앙을 주신다면 재앙을 나에게 주세요, 우리 자녀는 건드리지 말아주세요.해야 되겠는데 그리고 3 동안 자녀들을 위해서 열심히 회개를 해야 (옷을 찢는 것이) 겸비함에 맞는 태도다.

사무엘하 24장에서 다윗이 재앙을 당해서 나와 아버지 집을 치소서.했더니. 기도를 들으시고 이스라엘에 재앙이 그쳤다고 했다.

다윗은 재앙이 오니깐 본인이 나와 아버지 집을 치시라 했고 아합이 겸비함을 보이니까 하나님은 죄를 자녀 대에 묻겠다고 유보하셨다.

아합의 수준이 낮으니 호호 불어가시는 하나님이시다.

다윗 때는 아비와 자녀 치소서하는 맞고 아합 때는 재앙이 자녀 대에 가지 않게 내가 재앙을 받겠습니다 맞는 같다.

그런데 다윗이라면 경우 맞게 같은데 아합은 수준이 낮아서 오늘 보니까 내가 재앙을 받겠다. 된다.

[적용]

- 죄를 나에게 묻는 것이 좋나? 자녀 시대에 묻는 것이 좋나?

- 다윗의 아버지 집을 치소서. 아합이라면 재앙을 나에게 물으세요. 자녀에게 묻지 마세요.. 여러분은 어느 기도를 하겠나? 듣기만 해도 어렵죠? 신앙이라는 이렇게 어렵다.

아합에게 3년이라는 시간을 편안하게 줘보니까 예전으로 도로 BACK, 돌아갔다.

저는 남편처럼 회개하자마자 천국에 가는 것이 얼마나 축복인지 아합을 보면서 알았다. 죄가 훨씬 많아서 이렇게 남았다.

우리는 아합이 어떻게 이겼나를 알지만, 시간이 가니까 아합은 승리에 속아서 자기가 대단한 책략가라는 생각이 것이다.

그래서 위기를 잊어버렸다.

나봇 따위도 잊은 듯하다.

아합의 악행은 이세벨의 율법을 빙자한 간교한 술책에 가리어져 있었다.

죄가 아무리 가리어져 있었어도 하나님을 속일 없어서 엘리야를 보기만 하면 대적자여.’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자여. 말한다.

아합처럼 우리도 이기면 실력/덕이고 지면 , 하나님 탓을 한다.

이것이 인간의 죄성이다.

욕심 잉태한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사망에 이른다고 한다.

드디어 아합에 대한 여러 차례 심판의 예언이 드디어 사망으로 이루어지게 되는 본문의 시작이다.

[적용]

-여러분은 지금 전쟁의 시대인가? 전쟁이 잠깐 없는 시대인가? 여러분은 어떤 때가 유익했나?

2. (2 셋째 해에 유다의 여호사밧 왕이 이스라엘의 왕에게 내려가매)

이제껏 나오던 유다의 여호사밧(Jehoshaphat) 갑자기 등장한다.

물론 나라 북이스라엘, 유다는 이제 하나의 국가였기 때문에 우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범죄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남북은 계속, 항상, 일생 동안 일평생 전쟁이 있었다는 것인데 동맹을 맺어 적이 없다.

같은 아브라함의 자손인데 쪽은 계속 여호와를 섬기고 쪽은 바알을 섬기니까 전쟁은 당연하고 싸움은 당연하게 있는 아니겠나?

우리가 믿는 친척들과 너무 지내는 것이 좋은 일만은 아니다. 더구나 아합의 딸이 이세벨의 딸이다 아합과 결혼 동맹을 맺은 것은 결국 위기를 가져왔다.

솔로몬의 노역으로 인해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갈라졌다.

그래서 오랫동안 유다의 이야기를 들었다.

사실은 세상 사람들이 보기엔 나라 선한 없다.

여호사밧의 아버지 아사는 어머니인 태후의 위도 물리치면서 개혁을 했다.

그런데 열왕기상 15 18절을 보면, 아사왕이 이스라엘 바아사 왕이 쳐들어오자 성전 왕궁 곳간의 은금을 모두 벗겨서 아람 왕에게 바치면서 형제나라인 이스라엘 간의 약조를 깨달라고 요청을 하면서, 문제가 생기면 아람에게 와서 붙었다 깨졌다 하는 것이다.

형제 나라도 형제가 아니다. 이스라엘과 다를 하나 없다. 남북은 불순종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가 되지 못하고 함께 없었다.

이렇게 함께 없는 상황 가운데서 너무나도 악한 왕이지만 객관적으로 보기에 정치, 경제, 군사력이 너무 막강한 것이다.

왜냐하면 벤하닷(Ben Hadad) 알다시피 서른 개국을 연합한 아람 왕인데 그런 벤하닷과의 전투에서 번이나 물리친 것이 팩트가 되다보니까 지금 생각하면 아합은 이순신 장군과 방불해 보이는 것이다.

이길 수가 없는 7 명을 가지고 10 명을 물리쳤으니까 그래서 아합에 대해서 7장이나 지면을 할애하는 것은 우연이 아닌 것이다.

시대가 아합의 시대이기 때문에 , 포스터 모던니즘(post moderism) 시대이기 때문에 사람이 노릇하는 인권의 시대가 맞다. 그리고 꽃을 핀다.

아합이 7장에나 걸쳐 등장하고. 역대하에는 이스라엘 왕이 등장하지 않는데 역대하에서도 장이나 아합에 대해서 할애를 했다.

그러니까 끊임없이 예수 믿는 사람들의 믿음을 끌어내리고 초토화시키고 있는 아합과 이세벨인 것이다.

그래서 여호사밧 왕이 이스라엘 왕에게 내려갔다.

믿음을 끌어내리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엘리야를 죽이고자 해도 나봇을 죽였어도 차례 엄청난 전쟁을 이겼기 때문에 아합은 국부(國父) 것이다.

이스라엘에서 국부인 것이다.

아합의 위상이 여호사밧보다도 당연히 높았을 것이다.

그래서 여호사밧이 아들도 주면서 혼인동맹도 맺고 아람과 전쟁을 하면 이기겠지 싶어서 여호사밧이 북으로 내려갔다고 하는데 북으로 올라갔다고 하지 않고 내려왔다고 한다.

영적으로 다운된 길이었다는 것이다.

아합과 이세벨은 (백만 대군의 유다도 대단한 강대국이 되었다.) 백만 대군의 여호사밧을 영육 간에 끌어내린 것이다.

이렇게 악의 영향력은 놀랍다.

여호사밧은 예루살렘에 있었어야 했다.

나라는 하나님나라의 예표이기 때문에 그렇게 악한 아합을 도우면 되는 것이다.

역대하 19 2절에 보면, 예후선지자가 여호사밧에게 그렇게 악한 자를 돕고 여호와를 미워하는 자를 돕는 것이 옳으니이까!하면서 책망을 했다.

이렇게 정치를 보이는 아합이지만, 아합은 성경에서 악의 대명사가 되었다.

우리도 아무리 땅에서 먹고 살아도 훗날의 평가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적용]

-누구의 영향으로 지금 너무 대단해보이지만 어디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내려가고 있나?

-누구의 영향으로 어디로 좋아 보이는 곳으로 내려가고 있나?

3(3 이스라엘의 왕이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길르앗 라못<Ramoth Gilead> 본래 우리의 것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우리가 어찌 아람의 왕의 손에서 도로 찾지 아니하고 잠잠히 있으리요 하고)

신하들 보고 그냥 길르앗 라못(Ramoth Gilead 능히 탈환할 능력이 있는데 잠잠하냐? 하면서 자기와 자신이 소유한 군대 힘을 과시하면서 교만하게 이곳을 탈환해야한다고 한다.

20 10절에 불신자 아람의 벤하닷이 보여준 교만함 모습과 똑같다.

아합하고 벤하닷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다.

자신을 과대평가하면서, 아람과 연합을 했지만 이제는 예전에 전쟁을 통해 빼앗긴 길르앗 라못을 찾아오고자 한다는 것이다.

물론 길르앗 라못은 아람이 빼앗은 땅이고 형제요~하면서 빼앗은 땅으로 20 14절에서 돌려주겠다고 약조하고 벤하닷이 목숨만 살려달라고 하면서 약조하고 벤하닷의 목숨대신에 받기로 했는데 예전에 이미 벤하닷 1 땅들을 뺏겼었다.

다시 돌려주기로 했는데 벤하닷이 약속을 지키니까 이제는 찾아와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참으로 명분도 있고 실리도 있는 계획이었다.

그런데 지금으로 말하자면 이곳을 미국이라 말해야 하나요? 러시아라고 해야 하나? 일본이라고 해야 되나.

벤하닷은 약조를 하고 지키지 않았을까? 돌려주지 않았을까? 이런 것들을 Think 해봐야 한다.

아무리 봐도 아합이 실력이 없어 보이고 무시가 되는데, 7천명이 어떻게 10 대군을 물리칠 있지? 가만 생각해보니까 결국 여호와라는 때문에 이겼다고 생각이 되는 것이다.

2 전쟁 때도 여호와가 산의 신이라서 우리보다 강하다고 했던 기억하시나?

그래서 형제 싸움에서 이길 것이다. 졌잖아요?

그래서 그들은 여호와가 무서워요. 그런데 너무 우습지 않나?

아람은 도리어 무서워하는데 아합은 내가 잘나서 이겼다고 하는 것이다.

동안 계속 하나님 나라 때문에 어쩔 없이 하나님께서 아합을 지켜주셨는데 이것을 다른 사람은 아는데 아합만 모르는 것이다.

네가 여호와를 버리면 다음은 그날로 지는 싸움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져본 적이 없으니 인정하고 싶지 않다.

그러니까 벤하닷은 길르앗 라못을 돌려주기가 너무 아까워서 기회가 있으면 빼앗을 있다고 생각하고, 안줘도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아합은 3 동안 회개하지 않고 3년을 보내니 둘은 똑같다.

그런데 사단은 3 동안 아합을 편하게 해서 아합을 여호와를 떠나게 하는 전략을 것이다.

3년을 편하게 하니까 아합이 완전히 멀리멀리 가더라.

사단 쪽으로. 아합이 아무리 깨어 있으려고 해도 아합은 벤하닷 전쟁 2, 가뭄 3, 엘리야하고 때는 믿는 흉내를 냈는데 이런 인간이 되는 밖에 없으면 깨어 있으려고 해도 깨어있을 수가 없다.

누구한테는 전쟁이 없는 것이 쥐약인 것이며 아주 그것은 축복이 아니다.

내가 전쟁이 없어도 깨어 있는 사람, 사람이 진짜 믿음 있는 것인데 대부분 그러기 어렵다.

교만이 올라오고 아람을 물리치겠다고 과대망상에 사로잡히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전쟁이 없는 것을 축복이라고 생각하시면 되는 것인데 결국 이것 때문에 아합은 죽게 되어 있다.

길르앗 라못은 요단강 동쪽 도피성 중에 하나였고 동편 지파의 르후벤, 므낫세, 지파에게 주어졌던 땅이다.

중에서 요단강 동편 도피성 중에 하나인 레위인의 성읍이었다. 이스라엘이 빼앗긴 땅도 많았지만 이곳(요단동쪽) Trans Jordan , 전략적 요충지였다.

산악지대인 지역은 농업에도 적합한 아주 비옥한 땅이었다.

무역의 중심지고.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종교, 농업, 상업적 이유에서 아람으로부터 반드시 빼앗아 와야 하며 본래 건데 가져와야하는 것이다.

우리가 고구려(광개토대왕) 우리 영토가 중국까지 영토가 넓혀졌지만 그것을 것이라고 찾으러 없다. 그런데 이거 내거다이러는 것이다.

***이것을 생각해보면 한국 또한 세계 강국에 요충지 아닙니까? 세계 강국은 모여 있다. 다들 눈독을 들이고 있다. 저는 이제 진보, 보수를 떠나서 한국이 위기이기 때문에 말씀 드리고자 한다. 왜냐하면 나라가 있어야 교회도 있고 예배를 드릴 있지 않나? 나라를 엄청 사랑한다. 한국은 끊임없는 침략을 받았지만, 이렇게 지켜지고 있다는 것은 동방의 예루살렘 맞다. 우리가 언제부터 살았나? 기독교가 들어오고 난부터 것을 누구도 부인할 없다. 우리는 최대 빈국이었지 않나? 그런데 기독교에서 무당 보이고 있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너무 번영신학, 기복의 신앙으로. 그래서 우리를 회개케 하시기 위해서 지금 이제 일본 무역 전쟁으로 쳐들어왔다는 생각이 든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공을 들이던 북한도 미사일을 마구 쏘아대고 미국은 자기 나라에 것이 아니라고 싸면서 이제 관심이 없다. 그런데 이참에 중국은 사드(SAAD) 철회하라고 한다. 정말 이것은 위기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여러분 아무리 반일 감정이 국민감정이라고 해도 명분이 없으면 밖에 없다. 평범한 우리는 과거 기억으로부터 벗어나기가 너무도 어렵다는 안다. 전라도, 경상도가 해결이 되지 않고 있다. 그런데 우리도 일본은 영원히 나쁜 놈인 것이다. 이건 제가 오늘 얘기한 것이 아니라 예전부터 얘기다. 그런 고정관념 너무 무서운 것이다. 무엇을 해도 일본은 무조건 나쁜 놈인 것이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알고 있지만 제가 팩트를 집어보려고 한다. 일본은 1965년에 한일협정을 맺을 무상으로 현금으로 3억불, 차관으로 2억불 해서 모든 청구소송을 종료했다. 그런데 5억불이 지금은 작아도 당시에는 일본도 전후였는데 일본 예산의 절반이었다고 한다. 그걸로 거기도 잘못을 했으니까 돈으로 우리는 박대통령 경제개발 5개년 (유명했잖아요.) 차례 걸쳐 했다. 그래서 만에 세계 최빈국에서 세계 10위권으로 진입을 것이다. 당시에도 한일협정 반대 데모하느라 난리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렇게 문제가 작년에 대법원에서 개인 청구권을 인정해가지고 일본의 미쓰비시 중공업에 강제징용을 배상하라고 판결했기 때문에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그럼 일본에서 이것이 문제인가 하면, 이것이 줄줄이 앞으로 개인들이 청구할 아니겠나? 그런데 똑같은 사건이 미국에서도 있었는데 미국 캘리포니아 연방 법원의 판결사례를 소개하면, 1941 태평양 전쟁 당시 포로였던 제임스 등이 강제 노역에 대해 일본을 상대로, 회사를 상대로 미국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그런데 캘리포니아 연방법원 판결문은 일본과의 평화협정이 원고들의 주장을 가로막고 있고 원고들이 충분히 받아야 보상은 평화와 교환하게 됐다. 하지만 후손들이 평화로운 세계에서 살아가는 무한한 포상은 빚을 갚을 만한 것이다. 원고들의 희생에 무한한 감사를 표하면서도 그들의 청구는 기각한다.라는 이런 판결을 것이다. 우리나라도 같은 시각을 가지면 얼마나 좋을까를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박정희 대통령, 김대중 대통령, 노무현 대통령이 문제에 대해서 같은 의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나라 국익과 연결이 되니까. 그러므로 아무리 억울해도 결정된 것에 대해서는 일사부재리(一事不再理) 원칙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때문에 30 만에 살게 인정해야 되는 아닌가. 미얀마는 1970년대에 제일 살다가 지도자 사람 때문에 최대 빈국이 되었고 우리는 지금 이렇게 살게 인정해야 되는 것이다.

문제에 있어서  외교적으로 처리를 했으면 좋겠고. 지금 개인 배상하라고 판결한 것과 화이트 백색국가리스트에서 빠지게 것은 비교도 만큼 손해가 크기 때문에... 원자재를 생산하도록 조금씩 실력을 키워야 시간을 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실력이 없으면 평등도 없다. 무법자 북한도 이제 핵을 가지고 있으니까 모두 떨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감정에 호소할 때가 아니다. 이혼도 회사생활도 마찬가지다.... 인정을 못해서 대사를 그르치게 되는 것이다. 팩트를 인정하는 것이 실력 중에 실력이라고 한다.

4 (4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당신은 나와 함께 길르앗 라못으로 가서 싸우시겠느냐 여호사밧이 이스라엘 왕에게 이르되 나는 당신과 같고 백성은 당신의 백성과 같고 말들도 당신의 말들과 같으니이다)

아합은 여호사밧을 꼬여서 전쟁에 참여하게 했다.

그리고 여호사밧이 스스로 전투에 참여하고자 결단을 했다.

나는 당신과 같고 백성은 당신의 백성과 같고 말들도 당신의 말들과 같으니이다~ 노래를 하면서.

여호사밧이 긍정적으로 전쟁에 참여했다.

왕은 어쨌든 간에 연대의식은 매우 강했지만 그러면 뭐하나?

남쪽 북쪽은 영원히 원수처럼 지냈는데...

둘이 완전히 망할 때까지 남북은 어떤 약속을 해도 결국은 다시 원수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그럴까? 어제의 친구가 오늘의 적이고 어제의 적이 오늘의 친구가 내일의 적이 된다는 것을 너무도 수없이 보게 된다.

그러니 아람과도 20장에서 형제여~하면서 것이 당신 이라 외쳤지만 북이스라엘도 유다도 아람도 모두 자기가 약속을 지키는 것이다.

약속은 지키라고 있는 것인데, 지금도 나라들이 약속을 지켜야 하는데, 마찬가지인 같다.

*** 신문의 칼럼에 이런 내용이 있다. 6.25 당시 한미방위조약 체결을 것을 읽었는데 마찬가지인 같다. 1953 6 17 이승만 대통령이 주한미국대사를 경무대(청와대) 불렀다. 한미 방위조약 체결을 아무리 역설해도 미국이 들은 하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닦달하면서 오늘 한국은 공산집단 위협 때문에 조약이 필요하지만 내일은 일본의 위협에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 조약이 필요하다고. 우리도 일본 식민지에서 벗어난 얼마 안됐던 때였다. 얘기를 여기에 넣은 것이다. 조약 전문에 어떤 구절이냐면 어떤 잠재적 침략자도 조약 당사국 어느 나라가 고립되어있다고 착각되지 않도록 조약을 해야 된다.이런 일들이 정말 일어났다. 70 전에 이런 조약을 이대통령이 맺어놓은 것이다.

지금 한국에 전쟁이 없다보니깐 다른 세상전쟁을 불러들인 것이 아닌가 싶다. 우리 모두 요셉처럼 일본의 피해자다. 그러면서도 자신도 가해자이라는 것을 알고 요셉이 화해했듯이 대한민국은 감사하게도 믿는 사람이 일본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것이다. 일본은 아무리 살아도 기대할 것이 없다. 그러면 믿는 우리가 훨씬 품위가 있어야 되는데 겉으로 보기에는 일본이 훨씬 품위가 있는 같고 살기 좋은 나라인 것은 여러분도 아신다. 36 식민지 생활을 했으면 우리가 선두를 지켜야 되지 않나? 그런데 똑같이 전후 거기도 히로시마 폭격으로 우리도 6.25 전쟁으로 폐허로 시작했는데 선두를 일본에게 뺏겼다 이거다. 우리의 실상을 인정했으면 좋겠다.

[적용]

-여러분이 편안하니 본래는 것이라고 탈환하고 싶은 길르앗 라못 전쟁은 무슨 전쟁인가?

-여러분 말이 이해되나? 우리가 경상도, 전라도도 ...맨날 애매한 소리들을 서로 한다. 무조건 도로 BACK 무슨 결정을 해도 도로 . 도로하고 백하고 똑같네. 이게 어려서부터 일본하면 나쁜 놈인 것이다. 거기서 우리가 치도 벗어나지 못하는데 우리가 이럴 때가 아니라 빨리 외교적으로 해결하고 시간을 벌어서 실력을 키워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전쟁이 없으면

2. 물을만한 선지자 미가야를 미워한다. (5-9)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막으니까.

(5 여호사밧이 이스라엘의 왕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먼저 여호와의 말씀이 어떠하신지 물어 보소서)

여호사밧이 이처럼 모든 일을 결정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물었다는 것은 이제 아합에게는 계속 기회를 주는 것이고 여호와께서 계속 보고 계시는 사건이다.

여호사밧이 전쟁엔 동참은 하겠는데 여호사밧이 하나님께 물으라고 것은 여호사밧이 하나님이 보내준 하나의 선지자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인간이 아합같아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데 혼자서 큐티하기 어렵지 않나?

곁에서 Movement 그래서 중요하다.

큐티 운동이 일어나야 하는 것이 중요하냐면 혼자서 하면 힘드니까 날마다 물어봐 주는 것으로 오늘 큐티했어? 오늘 깨달았어? 오늘 사건이 났는데 너는 어떻게 들었어?이것이 정말 일본을 물리치는 비결인 것이다.

때문에 큐티를 하고 한마디 때문에 걸려서 다시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물어보라는 말이 우리들의 공용어, 관용어지 않나?

이렇게 목장에서 물어봤어요. 가지고 있는 농토의 이축권을 사려면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데, 이곳에 5년만 지나면 신도시가 완성되기 때문에 무조건 개발돼야지 되겠는데 개발업자가 땅은 허가가 나지 않을 없는 곳이라고 하면서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데. 그런데 허가가 안날 수도 있지 않나? 그래서 이것을 목장에서 물어보고자 한다고 했더니, 목자부터 목원까지 같이 들고 일어나서 반대를 해주더만요. 그거 하나님 일을 위해 쓰일 돈이라는 마음가짐이 있으면 해도 좋은데 그런 마음 없다면 하지 마시고. 이게 토지 보상 받는 것이 마치 공돈처럼 느껴지지만 도박과 모험하는 기분이 들어 반대한다고. 당장 먹고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지금이 아니라도 자식 대에서 개발할 수도 있어서 하시면 좋겠다고. 수준들 대단하시다. 그래서 그날로 결정해야 한다는데 부목자님은 어떻게 적용하셨는지 매우 궁금하다. 알려주시기 바란다.

그런데 이렇게 사소하고 아무 것도 아닌 같아 보이는데 물었다는 그것 때문에 가정이 살아나고 회사가 살아났다는 이야기가 번이 아니다. 아합이 잘나서 벤하닷과 이긴 것이 아니지 않나?

전적으로 하나님이 이기게 해주셨지 않나? 그런데 아합은 아무리 들려줘도 듣지를 않는다.

6 (6 이스라엘의 왕이 이에 선지자 사백 명쯤 모으고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길르앗 라못에 가서 싸우랴 말랴 그들이 이르되 올라가소서 주께서 성읍을 왕의 손에 넘기시리이다)

물을만한 선지자가 있냐?라고 했더니 400명을 모았다.

그런데 선지자 400명이 기도도 없이 말씀도 찾지 않고 즉시 올라가소서, 것입니다.이렇게 얘기를 해주는 ㅇㅣ.

아합은 850 죽었는데 어디서 이렇게 400명을 금방 뚝딱 만들어 냈을까?

그러니까 사람은 굉장히 조폭 두목 같지 않나?

맛있는 , 멋있는 , 의시되는 것을 좋아하니까 400명을 등장시키는 것이다.

자격도 없는 이런 선지자를 400명이나 모아서 자기 말에 Yes 하는 어용선지자를 모았다.

사람은 항상 최고를 좋아하니까 맛과 멋을 좋아하니 오죽하면 이세벨은 죽을 때도 화장하고 죽는 것이 잠시 후에 나온다.

그런데 바알 선지자들이 죽었고 시드기야는 여호와의 영이라는 표현(24) 하는 것으로 보아 명목상으로 여호와를 섬기는 자들임에도 분명한데, 그들이 여호와를 입으로만 섬기는 것이다.

아합은 마음먹으면 반드시 가져야 되는 것을 보았지 않나?

나봇의 포도원 가지려고 나봇을 죽이려는 것을 봤다.

말하지 않아도. 여기에 사람도 No 안하는 것이다. Yes 부대만 있는 것이다.

다수가 그래서 옳은 아니고 맨날 한다고 옳은 것은 아니다.

법이 있지 않나? 우리가 가서 행진도 해야 일도 있지만, 이처럼 분별이 어렵다.

나치가 독일 교회를 히틀러에 의해서 핍박을 했어도 한마디도 소리 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독일이 히틀러 정권에 맞서 회퍼목사 혼자서 투쟁하다가 순교를 했다.

아합의 대적은 다른 아니고 하나님의 사람인 것이다.

엘리야가 850대의 대결에서 이겼다.

그런데 무명의 하나님 선지자가 그렇고 미가야를 위해서 400명을 준비했다.

사람을 대적하기 위해서 400명의 어용 선지자를 고용한 것이다.

지는 데도 만들고 지는 데도 만들고 하는데 과연 사람을 능력의 국부라 해야 하나?

7 (7 여호사밧이 이르되 외에 우리가 물을 만한 여호와의 선지자가 여기 있지 아니하니이까)

6절에 선지자는 소문자 lord, 7절에 여호와의 선지자는 대문자 Lord. 영어 성경에는 그렇게 표현되어 있다.

그러니 주는 불교의 주도 있고 유교의 주도 있고 이슬람의 주도 있는데 여기서 주는 오직 여호와의 선지자 Lord 되어 있는 것이다.

역대하 17장을 보면 여호사밧은 산당을 제거하고 특별히 말씀을 순회하면서 가르치면서 개혁을 주도했다.

당연히 영적 분별력이 있다. 다윗의 후손 아닌가?

여호와 선지자를 찾았는데 역대하 17장에 개혁해놓고 역대하 18장에 아합과 사돈을 맺는 뭔가?

그러니까 보면 행위로 판단하시면 되는 것이다.

부족해도 여호와를 믿고 나가는 것에 마음을 둬야 하는데, 다윗의 등불처럼 꺼져가는 듯해도 예수 씨가 있는 것을 봐야 한다.

8절에 (8 이스라엘의 왕이 여호사밧 왕에게 이르되 아직도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 사람이 있으니 그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물을 있으나 그는 내게 대하여 길한 일은 예언하지 아니하고 흉한 일만 예언하기로 내가 그를 미워하나이다 여호사밧이 이르되 왕은 그런 말씀을 마소서)

미가야 사람이 있는데 사람은 나한테 흉한 일만 예언한다고 하니 여호사밧이 왕은 그딴 하지말아요하면서 질책을 것이다.

여호사밧이 여호와 선지자를 찾으니 미가야 사람이 있다고 한다.

미가야가 여호와께 묻는 다는 것을 아합이 알고 있다.

아는데 아합이 자기중심적이니까 하나님 말씀인가, 아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직 나한테 좋은 , 아닌가? 교회를 다녀도 이것만 중요한 것인 것이다.

그러니까 아합이 미가야를 미워하나이다라고 하며 그가 나한테 흉한 일만 예언하기 때문에 내가 미가야를 미워하는데 미워한다는 뜻은 누군가에 대해서 참을 없을 정도로 깊이 증오함을 나타내는 동사다.

아합은 이렇게 참을 없을 정도로 미워하는 사람이 미가야, 엘리야인데 그냥도 아니고 죽이고 싶은 것이다.

여기에서 유추해볼 있는 것은 내가 진짜 선지자라면 나를 참을 없이 죽이고 싶은 사람이 있어야 되는 구나이며 그럼 여러분은 진짜인 것이다.

어저께도 여인이 이단 관련 10권을 앞에 놓고 갔다.

제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 그렇게 나를 죽이고 싶은가 보다.

그런데 멀리 이단 없이 예수를 믿는데 그렇게 웬만큼 믿지 않으면 그렇게 참을 없이 죽이고 싶을 만큼 그렇게 미워하는 사람도 없다.

쪽에서는 좋아하고 쪽에서는 죽으리만큼 미워하는 있을 있다.

그런데 아합은 자기에게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을 용서 못한다.

그런데 여호사밧은 은근슬쩍 질책하면서 미가야 선지자를 불러오게 했다.

9절에 (9 이스라엘의 왕이 내시를 불러 이르되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를 속히 오게 하라 하니라)

전쟁을 앞두고 그렇게 듣기 싫은 흉한 말을 미가야로부터 들어야 하는 것을 예견하면서 사실은 지금 여호사밧이 미가야를 데리고 와서 흉한 일을 듣게 하는 것이 아합으로 오는 죽음의 길로부터 돌이킬 있는 기회가 아니겠나?

그러니까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여호와께서 계속 아합을 보고 계시는 것이다.

계속 여호사밧을 보내서 메신저를 주시는 것이다.

기회를 주시고 주시는데 끝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아합을 보고 계신데 아합은 돌이키지 않는 것이다.

전쟁 없이 3년을 지냈는데 사람이 하늘 끝까지 올라갔다. 국부로, 이순신장군 같이.

[적용]

-여러분은 어떤 사람과 가깝게 지내나?

-여러분은 물을 만한 선지자를 머리로 좋아하나? 가슴으로 좋아하나? 참을 없을 정도로 증오하나?

전쟁이 없으면,

3. 길한 말만 듣기를 원한다. (10-12)

(10이스라엘의 왕과 유다의 여호사밧 왕이 왕복을 입고 사마리아 성문 어귀 광장에서 각기 왕좌에 앉아 있고 모든 선지자가 그들의 앞에서 예언을 하고 있는데)

이제 아합과 여호사밧이 왕복을 입고 왕좌에 앉아 있고 400명이 앞에 앉아 있으니 이것은 개인적 의견이 아니고 공식적인 자리가 아닌가?

400명의 선지자 집단이 공개적으로 예언 활동하는 것으로 예수 무당이 전하는 말을 듣는 풍토가 아합에게는 조성이 되었다는 것인데 어용 선지자들이니까.

11.

(11 그나아나의 아들 시드기야는 자기를 위하여 철로 뿔들을 만들어 가지고 말하되 여호와의 말씀이 왕이 이것들로 아람 사람을 찔러 진멸하리라 하셨다 하고 12 모든 선지자도 그와 같이 예언하여 이르기를 길르앗 라못으로 올라가 승리를 얻으소서 여호와께서 성읍을 왕의 손에 넘기시리이다 하더라)

이제 시드기야가 뿔을 만들어 뿔로 아람왕을 죽이면 된다고 한다.

그렇게 실물 교육을 하면서 실감나게 예언을 했다.

교보재까지 써가면서 완벽한 브리핑을 했는데, 예언은 신명기 33 16-17절에 모세가 수송아지의 위엄과 들소의 뿔에 비유해서 요셉지파를 축복한 이야기다.

에브라임지파가 세상 열방과 싸워 승리할 것이라는 예언을 담고 있는데, 에브라임은 요셉지파의 후손인 것이다.

북이스라엘의 대표하는 아합이 시드기야가 요셉지파를 축복하는 예언을 말씀을 가지고 하면서 뿔을 만들어가지고 와서는 열방과 싸워 이렇게 하면 승리할 것이라고 하니 흥분한 아합은 맞구나! 이렇게 생각했다.

400명이 모두 같이 아합 왕의 승리를 예언했다.

길르앗 라못(Ramoth Gilead)으로 올라가기만 하면 승리합니다. 왕의 손에 넘깁니다. 왕이 최고입니다. 연신 외치는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11절에 처음 보니까 모든 것이 시드기야가 자기를 위하여 예언했다는 것이다.

시드기야 자신을 위해 예언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ᄁᆞ 우리가 모두 사역을 자기를 위하여 모이고, 자기를 위하여 사역하고, 교회에서도 성경 가지고 수많은 우리가 기획안을 만들지만 다들 자기를 위하여 기획안을 만든다.

보기에는 멋있는 뿔이지만 열매가 없는 것이다.

여호와를 위하여! 아시겠나?

[적용]

-여러분은 남에게는 듣기 좋은 소리를 해주고, 내가 하는 일에는 길한 말만 듣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눔>

지난 말씀을 듣기 전까지는 나는 아합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엘리야라고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공동체에 와서 계속 악을 행해도 여호와께서 계속 나를 지켜보고 계시는 눈길이 느껴진다고. 이게 말씀을 듣고 나눔을 했다. 아합이라고 인정하는 것은 간단하다고.

오늘 비가 와서 아침 일찍 가야 진흙탕 운동장 보다 아스팔트에 주차를 있을 거라 생각해서 권찰을 재촉해서 같이 1부예배에 왔는데 권찰이 옆에서 지적을 했다는 것이다. 집도 가까운데 멀리서 오는 사람에게 양보하려는 마음이 눈꼽 만큼도 보인다고. 자기만 좋은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 네가 그러고도 목자냐! (나눔에 이렇게 그대로 나와 있었다.) 이세벨은 근심하고 답답하여 누워있는 아합한테 일어나 식사하라고 북돋아 주는데 권찰은 나한테 오히려 대적자라 부르고 올바른 얘기를 해주니 내가 아합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흉한 들었잖아요? 권찰님이 뭐라고 했냐면, 그러면서도 운동장 진흙탕 지나 가는데 여기서만 회개하는 거다, 속지 마시라.했단다. 이렇게 흉한 말을 해주시네요.

나눔을 듣고 '목자님과 권찰님이 얘기하시는 것을 보니 하나님이 계속 보고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되니까 이제는 빚도 정리해가고 특별한 일도 없으니 앞으로 우리들 공동체 붙어가면서 천국 까지 교회 일을 열심히 있기를 바랍니다.'라고 하니까. 권찰님이 집사님, 훌륭한 고백을 하셨는데, 꼬투리 잡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리 재미난 일이 있어도 교회 사명으로 나아가는 것이니 여가 선용으로 재미난 일이 없어서 교회 일을 한다는 것은 아니지 않아요?계속 이렇게 흉한 말을 해주시네요.

다른 목장은 보니깐. 외도 사실을 고백하고 회개했지만은 목장을 새식구 때마다 죄를 오픈하라고 매일 아내에게 구박을 받으면서 얘기를 하는 것이 삶의 몫인 같다고. 여기도 흉한 일을 예언하라고 계속 얘기해주네요. 이렇게 길한 말이 아닌 것을 듣고 산다면 자다가도 떡이 생기지 않겠어요? 말이 맞지 않습니까? 남편이 열등감이 없으니 말을 듣는 것입니다. 열등감이 없으면 네가 뭔데.이러지 않겠어요? ... 열등감이 없으면 모든 것이 드러내요. 열등감이 많으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이 열등감 많은 것이잖아요. 그래서 싸우는 것입니다. 나는 훌륭하시다고 생각해요. 목자님께서. 아합이라고 생각하시니.

<Epilogue>

전쟁이 삼년간 없으면 다른 세상 전쟁을 꾸민다.

그런데 내가 워낙 꾸미는 것이 너무 갖고 싶은 것이고 가고 싶은 곳이라서 물어볼 만한 선지자를 싫어한다.

가지 말라고 할까봐.

그리고 나에게 길한 예언을 해주는 사람만 좋아하는 것이다.

정말 오늘 제가 하는 얘기도 이것을 꼬인 시선으로 바라보면 된다.

우리 주님 말씀하시면 내가 나아가고 주님 말씀하시면 잠시 멈춰서는찬양하고 기도하겠다.

 

<말씀 찬양: 주님 말씀하시면>

주님 말씀하시면 내가 나아가리다

주님 뜻이 아니면 내가 멈춰서리다

나의 가고 서는 주님 뜻에 있으니

주님 나를 이끄소서

 

뜻하신 그곳에 있기 원합니다

이끄시는 대로 순종하며 살리니

연약한 영혼 통하여 일하소서

주님 나라와 뜻을 위하여

 

주님 나를 이끄소서

 

 

 

Posted by 윤강로
말씀과 마음씀2019. 7. 29. 14:06

[우리들교회 2019 728일 주일말씀 요약(왕상 21: 17~ 29/여호와 앞에서 악을 행한 자)]

 

 

가.             Prologue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무조건 이긴다 (예배간증에 대한 결론)

세상의 권력이 끊임 없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면서 찬탈하는 역사를 수 없이 보게 된다

아합(Ahab)과 이세벨(Jezebel)은 세상의 권세를 가지고 싶은 850개의 신을 가지고 빌어 대면서 상아궁(houses adorned with ivory)까지 짓고 거기에 걸 맞는 채소밭 정원(a vegetable garden)을 못 가져서 나봇(Naboth)을 율법의 이름으로 죽이기까지 한다

세상은 이겼다고 축배를 들겠지만 이것은 여호와 앞에서 악을 행한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여호와 보시기에, 여호와 앞에서 악을 행한 자는 이세벨이 아니고 아합이라고 하신다

악을 행해도 그래도 아합을 보시고 계시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묵상하면서 보았다

세상은 여호와 앞에서’(coram Deo)를 모른다

그래도 제발 들으라고 끝까지 소망을 가지시고 우리의 아합에게 말씀으로 심판의 경고를 하신다

 

나.             대지 별 말씀 요약

 

그래서 여호와 앞에서 악을 행한 자는,


1.
여호와의 말씀으로 심판을 경고해야 한다.

선악의 절대기준이 사람이 아니고 여호와께 있다는 것이다

벤하닷을 그릇된 긍휼로 살려주고 나봇의 포도원을 사겠다며 여호와께서 금하신 악을 행했다.

세상은 그릇된 긍휼이라는 말을 못 알아 듣는다

여호와 앞에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했기 때문에 심판 받아야 한다고 한다

선악의 개념을 보면 선악과 먹고 들어와서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가 원죄다

그래서 나는 틀리지 않았다가 가장 큰 죄인 것이다

경상도-전라도 파당과 내가 옳고 나만 옳고 너만 틀렸다가 이혼으로 가고 회사가 분열되고 나라가 망하게 되는 것으로 이것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는 것이다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한다고 주님을 말씀 하셨다

그래서 이 세대의 특징은 악하고 음란한 것이다

악하게 수단 방법 안 가리고 살다 보면 음란으로 다 간다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이 세상의 원리다

그러니 인생은 왕이고 왕비이고 신하이건 간에 여호와 앞에서 악을 행하는 것이 그냥 하는 일이다

여호와께서는 스스로 계신 자’(I am who I am.)이시고 율법 그 자체 이시고 그러므로 노력해서 알아 지는 것이 아니고 그분이 찾아 오시고 말씀이 찾아 오셔야 되는 것은 그분이 진리의 성령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합과 에세벨은 하나님의 율법적 관습을 이용해서 권력으로 나봇을 죽이고 나봇의 땅을 차지 했다
율법이 합법적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도구가 됨을 본다

권세 자가 자기의 유익을 얻으려 한다면 법은 오히려 악을 돕는 도구가 될 수 있을 보게 된다

그래서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아니라 유권무죄, 무권유죄인 것이다

그런 율법 말고 성경이 나를 읽고 지나가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합과 이세벨이 행한 이 모든 악을 보고 계셨다.
악인의 형통은 나의 죄 때문이고,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바벨론을 형통케 하셨다.
그 한 사람 나봇의 적용 때문에 이스라엘을 바로잡을 엘리야를 보내주신다.
오늘 사소한 적용을 하는 나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세주를 보내시는 것이다.
악한 아합과 이세벨에게 엘리야가 심판의 말을 전할 수 있는 것은 여호와의 말씀이 임했기에 가능한 것이다.

나봇처럼 믿음은 자격과 공로로 되는 것이 아니다

큐티도 일생생활에 들어가면 적용을 안 하는 것이다

내가 아닌 말씀이 가는 것이기에 악을 심판할 수 있는 것이다.
불의를 행하고도 회개치 않는 절대권력의 아합을 대적하여 만나라고 하신다.
하나님은 이세벨이 죽였는데도 아합에게 경고하신다.
하와가 꼬셔서 아담이 선악과를 먹었어도 남자에게 책임을 묻는 것과 같다.
속은 자가 더 잘못이다.


[
적용]
-
지금 말씀으로 경고하며 대적의 영으로 만나야 할 윗선의 사람이 있나?
-
죽이고 빼앗고 싶을 정도로 가지고 싶은 것이 있나?
-
내가 그렇게 차지해서 지금 그대로 당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
믿는 내가 항상 가장 잘못했다는 것을 인정하나?

2.
선지자를 대적자로 생각해서 심판 받는다.

아합은 정말 말씀이 안 들리니 엘리야를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라고 여긴다.
아합이 “네가 날 찾았냐? 대적자야!” 라고 묻는 것을 보면 나봇을 죽이고 포도원을 차지하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아합은 엘리야를 통해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을 봤음에도 능동적으로 죄를 범해 죄인을 자처했기 때문에 그 죄가 무거운 것이며 결국 이스라엘을 범죄케 했기 때문에 아합에게 속한 자를 모두 쓸어버리는 심판을 하시겠다는 경고를 하시는 것이다.
이세벨이 쓰레기처럼 던져져 더럽게 버림을 받게 될 것이라는 이 표현은, 아합과 이세벨에 대한 하나님의 극도의 분노 표출과 더불어 그 죄의 심각성을 표현할 길이 없다는 것이다.

악을 행해도 붙어만 있으니 여호와께서 지켜보신다


[
적용]
-
여러분은 누구의 대적자인가?
-
아합의 대적자 엘리야 인가? 엘리야를 괴롭히는 아합인가?

3.
아내에게 충동 되어 심판하신다고 한다.

이세벨의 충동에 넘어간 아합의 죄가 더 크다고 하신다.
참혹한 심판이 아합에게 선포된 이유를 밝히면서 아합이 하나님의 율법을 거슬려 나봇의 기업을 팔라고 하고 나봇을 죽이고 그의 기업을 차지한 행위는 자신을 판 행위라고 하신다.
죄의 종이 된 이유가 아내 이세벨이 꼬드기고 유혹해서 충동했기 때문이라고 하신다.
아합은 자신을 스스로를 팔았고 이세벨이 충동하였다고 하신다.
두 사람 모두가 스스로의 행동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며 아합에게 네가 여호와 앞에서 악을 행한 자라고 하신다.
욕심이 있어서 충동되는 것이고 자기유익에 충동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합에게만 계속 경고하신다.
아합은 욕심만 부리고 이세벨이 대행하여 준다. 그러나 하나님은 안 속으신다.
하나님께서 지금 계속 보고 계신다고 한다.

코람 데오(coram+Deus=in the presence of God/하나님 앞에서) 이 말이 무섭다.
우리 인생도 만나서 안될 사람을 만나 충동 되었기에 이런 악을 행하게 되는 것이다.
어떤 만남은 서로를 악하게 충동하므로 기업, 교회, 가정이 무너지게 되는 만남이 있다.
진짜 괴로운 것은 엘리야인데 오히려 아합이 엘리야 보고 괴롭게 하는 대적자라고 한다.
아합이 불신결혼으로 여호와께 쫓겨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은 네가 이세벨을 골랐기 때문’(잘못된 만남)이라고 하는 것이다.

절대 선악의 판단은 오직 여호와 앞에서만 가능하다


[
적용]
-
나는 상대방 때문에 고통 당하나, 행복하나?
-
상대방은 나 때문에 불행할까, 행복할까?
-
여러분은 어떤 약한 자를 충동하나?

4.
회개하는 자에게 긍휼을 베푸신다.

드디어 아합이 “찢고 <굵은 베로>동이고 금식하고 <굵은 베에>누우며 <행보도 천천히>다니더라”하며 회개의 모습을 5개 동사(27: When Ahab heard these words, he tore his clothes, put on sackcloth and fasted. He lay in sackcloth and went around meekly)로 자세하게 표현한다.
근신의 표시로 왕이 풀이 죽어 다닌다고 한다.
아합이 왜 회개했을까? 여호와가 계속 보시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계속 관심을 가지고 본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저것이 인간인가”하는 사람이 너무 많은데 하나님은 그런 자를 보시는 것이다.
아합이 회개했다고 “아합이 내 앞에서의 겸비함을 보니” 하시며 지금 내릴 재앙을 아들시대에 내리시겠다며 너무 좋아하시는 하나님 이시다.
회개하자 마자 반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 눈물겹다.

우리가 너무 말을 안 들으니 오히려 하나님이 불쌍하시다는 생각이 든다.
하나님이 우리도 내 옆의 아합을 참으라고 이렇게 참고 가신다.
죄는 철저히 징계하시지만 죄인 자체는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시다.
이렇게 죄를 짓는 아합을 세상에서는 아무도 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데 여호와 앞에서 악이라는 것이다.
어느 나라나 점점 잘살아지면 똑똑한 사람이 입안을 하기 때문에 주님을 만난 사람들 위에 올라서 인권이 왕 노릇 한다.

이것 때문에 부르심 받은 사람들이 교회 성도들이다.

[
적용]

-주홍빛 같은 죄가 많아도 오늘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동이고 금식하고 굵은 베에 누우며 다니는 회개를 해보지 않겠나?



 

. 최종결론(Epilogue)

-절대 선악이 기준은 오직 여호와 앞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구원이니까 한 마음이 되는 것이다

-여호와 앞에서 관심을 가지고 기도하면 돌아온다

 

Posted by 윤강로
말씀과 마음씀2019. 7. 25. 18:40

[우리들교회 2019 721일 주일예배 말씀 요약(왕상 21:1~16/ 여호와께서 금하실지로다)]

 


. Prologue

경기도 의회가 동성애를 옹호하는 성 평등 조례 개정을 통과시켰다.

성 평등 위원회를 설치 운영하도록 하는 것으로 동성애자의 취업을 거절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악한 성 평등 조례를 교묘하게 위장하여 만들었다.
성 평등 사업에 도민 혈세가 27천억 사용이 예정이다.
내일부터 아침, 점심, 저녁으로 수원에 있는 경기도 의회 앞에서 일인시위나 전단지 붙이는 것을 한다고 한다. 할 수 있는 것이 그것밖에 없다.

여호와께서 금하신 것을 자행해도 되는 것일까?
그러나 아직 기회가 있다.

제가 3년전에 동성애 옹호자들이 세미나 하는 것을 들었는데, 너무 똑똑하고 헌법 개정하는 것은 지방자치제를 공략해야 한다고 하더라. 동성애 옹호자들이 이렇게 똑똑해서 몇 년 전부터 법을 통과시키기 위해 애를 쓰는데 우리는 그저 사탄아 물러가라 라는 말밖에 안하고 있다.


 

. 말씀 요약



아합은 모든 것을 가졌다.

어떤 사람보다도 모든 것을 허락 받은 환경이었다.

그러나 주제를 모르고 자신이 하나님의 대리자로 하나님인줄 알고 여호와께 금하신 것을 계속 넘보고 있다.

오늘 나봇의 포도원이 바로 금하신 곳인데, 하나님이 금하신 것에 반응하는 인간의 군상(群像)에 대해서 알아보겠다.

 

1.   탐내는 아합 (1-2)


1
절 처음에 그 후에’(some time later)는 지난 20장에 아합(Ahab)이 그릇된 긍휼로 괴수인 벤하닷(Ben-Hadad)을 살려주었고 그로 인해 너는 벤하닷의 목숨을 대신 할 것이라고 하나님의 심판의 경고를 받고 나서 근심하고 답답해서 사마리아로 돌아 온 후다.

그런데 왔지만 회개가 안 되니까 심판의 경고를 탐욕으로 풀어보고자 하는 아합을 또 보게 된다.

나봇’(Naboth)이라는 이름은 열매들이라는 의미로 싹트다는 동사에서 유래가 되었다.

이스르엘’(Jezreel)이라는 지명이 두 번이나 사용되고 있는데 한 번은 포도원(vineyard)의 소유자인 나봇의 출신지를 말하고, 또 하나의 이스르엘은하나님이 뿌리시다.’라는 뜻으로 부근에 풍부한 수량이 있는 샘이 있었다.

하나님이 뿌려주시는 싹트는 열매들이라는 이름이 암시하는 것처럼 그곳은 비옥한 약속의 땅이었다.

하나님의 축복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평안한 모습의 나봇의 포도원이 등장하는 이 목가적인 곳에서 이세벨(Jezebel )이 이 믿음의 나봇을 죽이고 다시 똑 같은 그곳에서 아합의 아들 70명이 죽으면서 평강이 산산조각 났다.

나봇의 포도원이 왜 이렇게 선택이 되었을까?

그것은 그곳이 아합의 궁에서 가깝다는 것이 문제였다.

권력자의 눈에 띄어도 안 띄어도 쉬운 게 없다.

지난주 유명한 3선 국회의원의 자살소식이 있었다. 아주 똑똑해서 행정고시까지 패스한 그 분도 공무원 하다가 권력자 눈에 띄어 개국공신이 되었다가 이런 결과를 가져왔다는 생각이다. 그분은 KBS에서 공모한 탤런트 시험에도 최종까지 갔는데 막혔다고 한다.’그대로 됐으면 얼마나 좋았을까?’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1절부터 아합을 북이스라엘 왕이라고 하지 않고 사마리아의 왕이라고 하였는데 이미 평범한 백성 나봇의 왕으로는 자격을 상실해서 그러지 않았을까?

우리가 대통령을 대한민국의 대통령이라고 하지, 서울 대통령, 전라도 대통령으로 불린다면 이미 이상한 거 아닌가?

다른 성경 번역에 아람(Aram)과의 2번의 전쟁 이후에 3년간 전쟁이 없었다는 내용이 들어가 있다.

그 내용을 인용한다면, 심판의 예언을 듣고 근심하고 답답하여 충격 받았지만, 시간이 지나니까 어리석은 자는 망각의 동물이 되는 것을 본다.

그러나 실제로 아합은 자기 힘이 아니었고 순전히 벤하닷이 술 취해서 이겼다. 그런데도 아람과의 전쟁에서 두 번이나 이긴 것이다. 십만 명의 군사를 이겼다.

이 사람은 불세출의 영웅 아닌가?

지금으로 말하자면 이순신장군 정도 되나?

아합의 거리(street)가 들어서고 승승장구 해 보이는 것이 아합의 팩트아닐까? 그야 말로 악인의 형통으로 치닫게 되니 이 사람은 자기 힘이 아니라는 것을 알므로 폭정을 일 삼고 사치로, 자기 과시로 모든 것을 잊고자 하는 것을 보게 된다.

이제 심판 예언이 3년을 경과하고 있으니까 아합은 하나님에게도 내가 이스라엘의 왕이니까 나를 심판하시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외부적으로 그릇된 긍휼로 벤하닷을 살려준 아합이 이제는 내부적으로 악을 행하게 된다.

사마리아왕 아합은 국내 이스르엘(Jezreel)에 사치의 끝판왕인 상아궁으로 불렸던 별궁을 지어 겨울이면 그곳에서 지냈다.

부자들이 마지막으로 꽂히는 곳이 정원이라고 한다.

그런 아합이 자신의 별궁과 가까운 곳에 있던 나봇의 포도원을 보고 '여기다~.'라고 하는 자리가 나타난 것이다.

정원자리라고. 가슴이 뛰면서 탐을 내면서 갖지 못하면 큰 일 날 것 같이 구는 것이다.

'달라는 거 다 줄게, 땅 달라면 땅 주고 돈 달라면 돈 줄게. 나한테 줘.'(Let me have your vineyard to use for a vegetable garden, since it is close to my palace. In exchange I will give you a better vineyard or, if you prefer, I will pay you whatever it is worth." )라고 심판이 코 앞에 있는데 지금 별장 타령, 정원 타령을 하고 있는 아합이다.

 

러시아 대 문호 톨스토이의 그 유명한 인생론’(Tolstoi’s On Life) 이야기를 기억할 것이다.

숲 속에서 길을 잃은 나그네가 늑대를 만나서 급히 도망을 가다가 우물에 빠졌다. 다행히 삐죽하게 나온 나뭇가지에 걸린 것이다. 그런데 그곳에 꿀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꿀을 따먹고 있는데 나무 한 쪽 끝에서는 생쥐 한 마리가 갉아먹고 있는데도 이 사람은 꿀 따먹기에 여념이 없다는 것이 인생론의 결론이다.

그러니깐 너의 포도원을 나에게 줘, 그것이 나의 푸른 정원이 되게 해.’라는 이 표현이 원문에 두 번 언급됨으로 벤하닷이 아합에게 무리한 요구를 했던 것처럼 그 요구할 때와 같은 표현을 썼다.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고 싶은 탐욕과 조급함은 아합도 벤하닷도 똑같다는 것이다. 신이나 불신이나 자기가 갖고 싶은 것을 이제 갖고자 하는 탐욕은 믿어도 안 믿어도 다를 바가 없는 것을 보게 된다.

자기가 죽을 시간, 심판 받을 시간이 재깍재깍 다가오고 있는데에도 지금 꿀을 빨아먹고 있는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

인생은 밑 둥지가 잘린 것과 같다.

시드는 것은 다 시간문제다.

그러니 누구의 책망이라도 잘 받아들이고 고치려고 하는 것이 심판을 예비하는 최고의 모습이기 때문에 여전히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는 말씀 묵상이 최고로 심판을 예비하는 비결 아닐까?

여러분이 시간 낭비 같아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장에도 안 들어가시고 교회도 가끔 가다 오면 바로 심판을 예비하는 비결이 될 수 없다.

우리가 이렇게 하고 있는 게 오늘 내일 죽어도 가장 심판을 예비하는 비결이다.

 

[적용]

-심판이 재깍재깍 다가오고 있는데 지금 눈 앞에 꿀 따먹으며 탐내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2.   거절하는 나봇 (3-4)


나봇은 아합왕이 2절에서 포도원이라는 표현을 두 번 사용하며 그의 땅을 탐내니까 내 조상의 유산이라는 표현을 두 번이나 하면서 거절의 뜻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나봇은 내 조상의 유산인데 여호와께서 금하신다’("The LORD forbid that I should give you the inheritance of my fathers.")고 대답하였다.

아주 심플한 얘기를 말씀에 의거해서 했다.

고대 근동사회에서 일개 평민이 왕의 요구를 거절한다는 것은 목숨을 내놓는 것이며 선택의 여지가 없다. 절대적인 명령과 다름 없는 것이다.

그러니 이 거래는 신전국가에서 공정한 거래라고 할 수 없다.

그런데 나봇이 거래를 받아들인다면 로또 맞는 것이다.

뭐든 다 주겠다고 하고 유명한 정원이 되면 내 가게도 자리하나 받지 않을까? 나봇으로는 그것 하나 줌으로 어마어마한 승산이 있는 로또 맞는 것인데도 거절했다.

한 나라를 다스리는 왕으로서 별궁 근처에 땅을 매입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는 게 하나도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는 성경을 구속사적으로 읽지 않으면 굉장히 불편, 부당해 보인다.

그러면 한 마디로 나봇은 왜 땅 파는 것을 거절했을까? 왜 거절했을까? 여호와께서 금하셨기 때문인데 왜 금하셨나?

땅은 기업(inheritance)이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정복 때 수십 년 광야생활, 이길 수 없는 전쟁을 하나님의 구원하심과 인도하심으로 얻게 된 땅이다.

이 땅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약속의 땅, 약속의 기업이라 불려졌고 궁극적으로 소유권은 그 땅을 차지하게 하신 하나님께만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양도, 매도, 착취가 다 금지되었는데 믿는 왕이 하나님의 규례를 어기고 죄악된 방법으로 이를 탐내는 왕이 말이 안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봇이 거절을 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이스라엘을 상징하기도 하는 이 포도원을 애굽의 산업을 상징하는 채소밭, 즉 정원으로 바꾸려는 아합의 행동은 하나님을 전혀 신뢰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한 국가의 왕인 아합이 자기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공사를 구분하지 못하고 밥도 안 먹고 지금 땡깡을 부리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불쌍하기까지 하다.

나봇은 이렇게 왕의 좋은 제안인 돈도 생기고 목숨도 부지할 수 있는 제안을 이렇게 쉽게 거절하는데 아합은 어찌하여 근심과 답답함(sullen and angry)이 계속되는가를 보고자 한다.

아합은 선지자의 책망을 오래 기억하지 못하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기 탐욕을 다스리지 못했다.

그러니 회개해야 하는 문제를 쾌락으로 풀어보고자 하니 되겠나?

자기 지위로 모든 것이 가하나 가하지 않는 것이 있다고 했다.

이것은 구원 때문이다.

아합은 그런 생각이 없다.

이 포도원을 원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할 것 같지만 이것은 분명히 땅을 매도할 수 없다고 했다.

빌려 쓰는 게 아니라 달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탐심이기 때문에 거절이 되지 않으면 더 큰 파멸인 것이다.

이것을 사고 팔고 했다면 하나님의 법을 어긴 것이기 때문에 영원히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짓을 했기에 여기에서 이쯤에서 아합 지파 하나 멸망하는 것으로 끝나야 되는 것이다. 여러분들이 작고 큰 것을 대봐야 한다.

또 한가지 이유는 아합이 자기 직분에 충실하지 못하다.

왕으로서 이스라엘 백성을 다스릴 때에는 이곳은 신전국가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대로 이끌어야 하는 것이 있다.

그런데 아합이 자신의 사명을 모르기 때문에 자기 직분에 충실할 수도 없고 직분에 충실하지 못한 이런 지도자는 권세를 가지고 죄의 유혹에 빠진다.

자기가 원하는 것은 다하는데 여자고 돈이고 다 말이다. 그래서 문제가 생긴다. 정말 열심인 것 같다.

상아궁을 짓고 정원을 짓는다.

이것은 허영과 과시를 위한 자기 열심인 것이다.

나봇의 포도원을 가지기 위해서 갖은 책략을 다 꾸미는 것을 보면, 그것이 증거다. 지금 아람과의 전쟁이 끝났다면, 전쟁을 거친 백성들을 추스르고 복구하는 일을 해야 할 때 아닌가?

지금 상아궁과 격이 맞는 별장 만드는 일이 그리 급한 것이 아니다.

미관을 생각하면서, 이길 수 없는 전쟁을 이기게 해주었는데도, 상아궁 짓는 것이 말이 되나?

왕이 백성의 이익을 위한 하나님의 법과 규례를 다 정해놓고 자기는 예외라고 하는 것이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기 전에는 모르는데 올라가고 보니 자기 밖에 없는 것이다. 자기에게 명령하는 사람이 없는 것이다.

그러면 아무도 모르겠거니 자기의 권세를 자기 마음대로 쓰는 것이다.

그래서 다 망하는 것이다.

권세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인데, 어렸을 때도 명령을 받아본 적 없는 사람, 딸이고 아들이고 요새는 핵가족이다 보니 하나만 끼고 있으니 항상 예외가 있다. 이렇게 예쁜 내 딸, 내 아들 누가 뭐라 그래? 예외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자기보다 높은 사람이 없는 사람이 참 문제인 것 같다.

사무엘상 8 13-14절에서 사무엘은 왕정을 요구하는 백성들에게왕이 백성들의 땅을 빼앗을 것이다. 백성들은 왕의 땅을 경작하는 소작인으로 전락될 거다.’라고 했는데 그래도 백성들을 왕을 달라고 한다.

그러므로 지금 땅을 뺏기는 상황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하나님 외에 요구하면 이렇게 당할 일이 있다는 것이다.

저 또한 설교한다는 명목으로 모든 것에 예외가 되어서 화장실 청소, 식당 봉사 등 예외라고 자타가 생각한다.

그러나 제가 설교준비 안하고 토요일에 매일 봉사하러 나온다면 저를 더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왜 제도 그런 생각을 하냐 하면, 평생 저희 엄마가 화장실 청소를 했으니까 저도 보고 배운 게 있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기도 한다.

아합은 탐욕을 채우지 못하면, 이렇게 근심하고 답답한 표현이 계속 나오는 것이다.

원어로 살펴보면, 화가 나고, 기분이 나쁘고, 격분하고(sullen and angry)이런 뜻이라고 했다.

자살을 한 정치인도 굉장히 똑똑한 분이고 용으로 나신 분인데, 인터넷 강의로 독학을 하면서 분노조절장애 상담사 자격증을 취득했다고 한다.

얼마나 분이 나셨으면 그렇게 바쁜 분이 자격증을 취득했겠나?

그렇지만 상담사 자격증을 가지면 뭐 하겠나?

그냥 가셨다.

복음이 나를 살리기 때문에 꼭 죽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내버려두지 마시고 죽을 거라는 발언을 하시면, ‘언제 죽을 거야? 어떻게 죽을 거냐.'라고 물어보시면 그게 그렇게 도움이 된다고 한다.

가만두지 말고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죽을 거냐고 구체적으로 물어보고 여기에 데려오라.

그 국회의원이 한 번 이곳에 와보셨다면 그렇게 안 가셨을 거라 생각한다.

너무 안타깝다.

이혼 직전, 자살 직전이 우리들의 전공이다.

그분도 3선 국회의원을 하려면 얼마나 곤욕을 치루었겠나?

자기가 순수한 사람인데 정치하다가 이렇게 됐다고 아들에게 그런 얘기를 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너무나 노래도 잘하시고 팝송을 어렸을 때 적어도 한 시간을 화장실 가서 불렀다고 한다. 탈렌트 시험도 붙지, 행정고시도 붙지, 서울 대학도 붙지, 도대체 안 붙는 게 없다. 그런데 왜 그렇게 유명한 사람 눈에 띄어서.. 탈랜트나 했었으면 얼마나 좋았겠나?

<아합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저는 그래서 아합에 대해서 좀 생각을 해보았다.

사실 아합이 가뭄 3 6개월이 왔는데 얼마나 힘들었겠나?

가뭄도 힘든데 아합이 힘든 것은 엘리야 탓으로 돌리면서 엘리야를 죽이려고 쫓아 다니지 않았겠나? 이게 더 힘든 것이다.

똑같이 가뭄이 왔는데 엘리야는 이타적이지 않나?

그런데 아합은 엘리야가 말했다고 죽일 듯이 쫓아다니니 그게 병이 된 것이다. 미워하느라 뇌가 소진된 것이다.

가뭄보다 미움이 더 힘든 것 같지 않나?

게다가 섬기던 바알 선지자 850명이 죽었는데 자기가 좋아하던 것 다 없어졌다. 우상단지 850개 없어진 것도 기가 막힌 데 벤하닷은 이길 수 없는 싸움인데도 거기도 이기고 구사일생 했는데 멘탈이 정상이었겠나?

정상 아닌 사람이 정치를 했으니 기가 막힌 것이다.

그 벤하닷의 생명을 대신할 것이다는 심판의 예언으로 아합이 마음이 상해 화를 냈던 것처럼 지금 나봇의 포도원 사건에서도 또 근심하고 답답해서 식음을 전폐(sulking and refused to eat )하고 있는 것이다.

나봇의 정당한 대답을 듣고도 자신의 탐욕을 부끄러워하기 보다는 이 사람은 정답만 얘기하면 화를 낸다.

분노조절 장애가 있어 격분한다.

영적인 일에 둔감하고 고집과 탐욕이 있는 자들은 분노와 근심에 휩싸이기가 쉬운 것이다. 누가 말하면 듣는 법이 없다.

사람들은 문제가 생기면 자기 속으로 숨고 위로 자를 찾고 내적인 충동으로 술로 도박으로 마약으로 다 피한다.

그리고 인제 밥도 안 먹고 땡깡을 부린다.

술 먹고 중독에 빠진 자들은 이유가 없는 사람이 없다.

지난 번 간증한 고집사도 외도로 끊임 없이 남친을 바꾸었지만 자기 속 우울감이 가장 큰 대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누구 때문이 아니고 내 탓도 아니고 이렇게 직면을 해야 되는데 직면이 안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예수님, 성경이 너무나 멋있는 것이다.

내 탓도 네 탓도 아니고 직면을 해서 원인을 찾아 내야 되는 것이다.

아합도 그랬지 않았을까? 늘 근심하고 답답해(sullen and angry) 한다.

이 사람이 이스라엘 왕인데도 말씀을 못 듣는다.

이것이 아버지 오므리의 우상숭배로 인한 결과가 아니었을까 싶다.

자기는 듣기 싫어서 안 들었겠나? 안 들려서 듣지 못한 것이다.

장로와 백성들(all the elders and all the people)이 벤하닷의 제안을 듣지도 말고 허락하지도 말라고 했지만, 이 말도 안 들었다.

엘리야 말도 안 듣는다.

안 듣는다는 것은 못 들어주겠다는 것이다.

그럼 가만히 있으면 좋겠는데 죽이려고 한다.

자기한테 한마디라도 충고나 올바른 얘기를 해주기만 하면 죽이려고 한다. 엘리야도 죽이려 했고 나봇은 결국 죽였다.

자기가 원하는 것, 탐욕을 채우지 못하면 화가 나고 기분이 나쁘고 분노하고 화가 나고 또 격분하게 된다는 것이다.

저는 아합이 이렇게 우상숭배 하는 아버지 밑에서 왕자로 살면서 게다가 왕이 돼서 자기애 성 인격장애, 우울이 온 것이 아닐까? 생각을 했다.

 

[뇌 질환 르포인 <<죽고 싶은데 살고 싶다>>]의 저자 김영철 목사님의 견해에 따르면 한국사회는 공감이 안 되고 감정이입 능력이 없는 자기애 성 인격 장애 (NPD) 환자들이 점점 늘고 있다는 것이다. 스티브 잡스(Steve Jobs)가 반면교사가 되긴 했지만 사실 narcissism(자기애/자기도취)환자들은 치료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특히 고학력, 공주병, 왕자 병 환자들이 많은데 완벽주의 사회적 지위도 있어서 객관적인 자기 인식이 너무 힘든 것이다. 머리가 좋아서 상대방의 수를 읽고 논리로 자기 방어를 일삼으니까 답도 없고 약도 없다. 자기 중심 성이 이미 박혀있기 때문에 타인의 마음 따위는 안 보이는 것입이다. 공감이 안되니 남의 처지는 무시를 한다.

예를 들어서 스티브 잡스(Steve Jobs)가 누군가 직원이 아이디어를 딱 내면 그것을 다 듣고 있다가 쓰레기 구만이라고 이렇게 코멘트를 한 단다. 일주일 후 그 직원 앞에 나타나 그 직원이 냈던 아이디어를 자기 것처럼 늘어놓는다는 것이다. 젊을 때 고2,3때 만난 그녀와 5년 동거하다가 딸을 낳고 헤어졌는데, 분명 아이를 안아주는 사진도 나왔는데 자기 딸이 아니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친자소송을 하니깐 어쩔 수 없이 인정을 했는데 이 스티브 잡스가 타인의 업적을 훔치고 자신의 결점을 극단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자신이 혼외 자를 낳은 적이 없다는 것이다. 누구의 의견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무조건 내 의견이고 내 아이디어인 것이다. 극단적인 자기애 성은 정말 치료가 안 되는 것이 아니겠나? 나중에 인정을 했는데도 엄마와 아이를 기초수급 자로 살게 하고 엄마가 청소와 식당 일을 하는데도 500불만 생활비로 보냈다는 것이다. 그 사람 정말 환자 아닌가? 자신의 약점을 극단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아무리 얘기해도 너 틀렸다고 왜? 이런 얘기 절대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아무것도 안 들린다. 극단적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그런 말을 듣거나 원하는 것을 가지지 못하면 분노하고 격분하고 근심하는 것이 자기애 성 인격장애인데, 이 스티브 잡스는 천재이지 않나? 시장조사 장사하기 위해 이런 것 하지 않는다. 자기 의견이 최고다. 그래서 스마트폰도 둥글게 했다. 출시 직전인데 어마어마한 손해가 나고 출시 일도 늦어지는데 그는 자기가 생각하면 끝인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손해를 봤는데도 대박을 쳤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그것을 도용했다고 소송했다. 그 사람이 얼마나 자기의 희생을 무릅쓰고 디자인 낸 것인데... 그분은 천재인데 그와 살면 어떻겠나? 돈이 많은데도 500불 밖에 주지 않았다.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 있다. 스티브 잡스는 모두가 안 통하는데 누구와 얘기를 했겠나? 그러면 '그러시면 안 돼요.' 하면서 싸워야 하겠나?

아합이 때마다 죽이려 하니 엘리야는 네 탓이야 해야 겠나?

이세벨처럼 무조건 들어줘야 하겠나?

엘리야가 아합을 사랑해서 평생을 쫓아 다녔지만 엘리야와 아합은 평생원수인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엘리야 보고 문제가 있겠다고 해야 할까?

정말 엘리야에게는 사랑이 없다고 해야 할까?

그러면 이럴 때 평생 원수가 좋은가?

평생 천생연분이 좋은가? 우리 정말 어렵습니다.

 

[적용]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을 거절했나? 원하다가 거절당했나?

두 개가 사실 좋은 것이다. 아예 거절을 못했는가? For example로 음란이냐, 불신결혼인가, 이혼인가. 생각을 해보라.

이런 것은 거절 당한 것이 축복인 것이다.

내가 불신결혼, 음란도, 이혼도 거절 당하는 것은 축복이다.

 

3.   탈취하는 이세벨(5-10)

해결사가 등장한다.

늘 영적이지 않으니 회피하고 늘어놓으면 이세벨이 짠하고 해결해주는 컨셉이다. 이세벨이 항상 마지막에 가서 해결해주니까 자기와 직면하지 않는 것이다. 이세벨은 항상 아합이 최고다라고 부르짖는다.

아합이 참 유약하다. 어떻게 보면 착할 수도 있다.  

아합으로서는 나봇에게도 거절을 당했어하면서 이길 때는 언제고 질 때는 피해의식이 많아서 이러니까 이세벨은 '’당신이 최고다. 나는 이 세상 사람이 뭐라고 해도 당신이 최고야.’'라고 하니까 이것이 아합에게 정신 건강상 좋은 건가? 나쁜 건가?

우리는 정신 건강 상 아무도 안 믿어줘도 부모는 믿어줘야 되고 배우자는 믿어줘야 된다고 한다. 그런데 이게 참 분량이 있는 것 같다.

이세벨은 사랑이 뭔지 모르는 스카이 캐슬형 엄마다.

아합이 유약하니까 이세벨의 말을 듣고 그런가 하면서 산 거 같다.

믿음도 없는데, 믿음도 없으니까 조선의 인조왕과 조귀인처럼. 그런 왕들이 많이 있다.

아합과 이세벨은 엘리야를 그리도 죽이려는 데에는 한 마음이 딱 되었다.

이세벨이 아합에게 맞추어 사는 게 이게 좋은 건가? 나쁜 건가?

이세벨은 아내로서 아합의 슬픔을 위로하고 위안을 주고자 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합은 마치 아이가 엄마에게 이르듯이내가 나봇에게 가서 포도원을 팔라고 했더니만...어쩌구 저쩌구.’ 하면서 이세벨에게 고자질을 하고 있다.

꼭 엄마에게 일러 바치듯이 하니깐, 얼마나 아합이 이세벨에게 의존적이었는가를 알 수 있다.

18장에서 북이스라엘 백성들은 갈멜산으로부터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니까 여호와가 참된 하나님이심을 알았다.

아합조차도 이제 엘리야를 인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바알에게 기울어져있던 북이스라엘이 하나님께로 어느 정도 돌아왔는데 이세벨 한마디에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이세벨이 엘리야를 죽인다고 하니까 나봇의 포도원 사건도 마찬가지인 것이 나봇의 거절로 인해 도리어 아합은 북이스라엘 왕이라 그런가 억지로 할 생각은 안 하고 식음을 전폐하고 들어 누우면서 도리어 이것이 안정이 되가는 추세로 기다려지면은 이 땅을 갖지 못한 것이 이스라엘로서는 너무나 최고의 해결책인데, 그런데 안정되어 가는 이 시점에 해결사 이세벨이 등장함으로써 최악의 상황으로 달려가게 되는 것이다.

이때는 거절의 축복이 최고인데, 거절을 허락으로 바꿀 수 있는 계략과 권세가 있어서 이게 비극인 것이다.

그러니까, 요새 핵가족이라서 내 가족, 내 아들, 내 딸 누가 감히 건드려?’라는 추세다

그러니까 싸우면 제발 좀 내버려둬야 하는데 그 아내에게 남편에게 거절을 받을 수도 있는데 그 거절을 허락으로 바꿀 수 있는 계략과 권세가 있으면 네가 어떻게 우리 며느리한테 그럴 수 있어? 사위한테 그럴 수 있어? 아들한테 그럴 수 있어? 하면서 데려오지 말고 내버려두어야 한다.

계략과 권세를 쓰지 말라.

이세벨도 아합이 너무 유약하니까 때마다 도와주다 보니 여기까지 온 게 아닐까? ‘나라도 좀 도와주자라고 하니 뭔가 거꾸로 된 것이다.

믿는 아합이 이세벨을 인도해 가는 것이 아니고 안 믿는 이세벨이 아합을 계속 코치하고 있다.

일러바치는 것까지 좋았는데 지금 나봇이 내 포도원이라고, 내 포도원을 너한테 주지 않겠다고 그렇게 얘기하는데 나봇은 그렇게 얘기하지 않았다.

조상의 유산이기 때문에 이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신다고 했지 내 포도원이니까 내가 주지 않겠다고 그렇게 얘기한 적은 없는 것이다.

고의적으로 사실을 말하지 않는 것은 거짓말과 다를 바가 없다.

하와가 선악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하나님께서 하셨는데 죽을까 하노라?’로 바꾼 것처럼 하나님의 계명을 가감해서 끙끙 앓고 있는데 이것이 인격 장애가 아닌가 싶다.

나봇은 이름없는 평민이었지만 말씀을 지키려고 한 의인인 반면에 아합은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한 아주 패역한 지도자임을 알 수 있다.

이제 해결사가 등장해서 이 말을 들었지 않나?

해결책이 또 등장한다.

7.

남편 아합을 비꼬는 표현으로당신 지금 이스라엘 나라를 다스리고 있는 것 맞아요?.’ 이 이세벨은 엣바알의 딸이잖아요? ‘아니 그까짓 것, 평민 땅 빼앗는 것, 죽이고 뺏으면 돼지.’ 하며 이해를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당신 왕이면 왕답게 처신하세요. 내가 포도원 찾아줄테니까, 뚝 그치고 식사해요!’ 너무 멋있다. 그래가지고 이것은 완전히 이스라엘 왕이다. 왕의 간절한 소원을 내가 선물로 줄 테니까’, 이거 현모양처 아닌가?

사탄은 병 주고 약주고 수를 쓴다. 정말 분별이 어렵다. 그러므로 신 결혼이 중요하다.

8절서부터 보면 계략이 나온다.
아합의 이름으로 악한 음모가 차질 없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공문을 작성하고 아합의 옥쇄로 인봉을 했다.

부부가 한 몸이라고 공권력을 낭비하면 안된다.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

9절에 보면,
(9
그 편지 사연에 이르기를 금식을 선포하고 나봇을 백성 가운데에 높이 앉힌 후에)

10절에 증인

이게 나봇의 죄목이다.

이스라엘 나라에 금식을 선포하는 것은 나라적인 재앙을 맞아서 공동체 속에 숨겨진 악행이나 죄에 대해서 집단적으로 회개하는 것인데, 이 금식을 함으로 나봇이 심각한 죄를 지었다는 것처럼 정당화하려는 것이다

율법대로 격식을 갖추기 위해 불량자 증인을 세우고 누구나 볼 수 있도록 높이 앉혔다.

정공법을 쓴다는 것이다.

돌로 쳐 죽이려면 동네 사람들이 모두 가담해야 한다. 그래야 뒤탈이 없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너무 어려워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도 못하는데 그 하나님을 저주했다고 하니까, 이것은 돌로 쳐죽여야 할 죄인 것이다.

이세벨이 율법에 얼마나 정통 한가?

이방여자가 율법을 잘 알고 있을 뿐 아니라 가증하게 자기 개인적 욕심을 채우는데 철저히 이용했다.

똑똑한 사람은 주님 못 만나도 성경으로 얼마든지 욕심을 채운다.

그러니까 이런 비서, 아내가 최고 아닌가? 해결사.

[적용]

-여러분은 이런 이세벨 같이 해결사 배우자가 좋나? 하나님의 뜻을 찾는 배우자가 좋나?

다시 말하면, 여러분은 말은 그러지, 예쁜 여자, 나쁜 남자 좋아하죠? 하나님의 뜻을 찾으면 고리타분하게 생각해서 싫죠?  마음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세요.

 

그런데,

4.   동조하는 장로와 귀족(elders and nobles)(11-16)


그의 성읍이라는 말을 강조하고 8절에도 그 성 사람이라고 하는데 이 나봇을 죽인 사람이 그 곳에 살던 지도층이었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지금 나봇을 죽인 것이다.

12, 이세벨의 지도대로 그대로 행했다.

그 사람들이 통보한 대상은 아합이 아니라 이세벨이다.

아무리 아합의 도장이 찍혔어도 이것은 이세벨이 한 것인 것을 다 안다. 이세벨에게 줄을 서고 있다.

이세벨 통치권에 아부하는 장로, 귀족들 한 사람도 반대하지 않았다.

누구보다도 막강한 왕의 권력을 거절했던 나봇이 얼마나 경건한 사람인지 얼마나 결백한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을 장로, 귀족들 같은 이웃 사람들 한 사람도 나봇을 위해서 변호해주지 아니하고 다 나봇을 죽게 했다.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다. 그러면 자살을 하는 것이다. 믿을 사람 없다.

15절에,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소서’("Get up and take possession of the vineyard of Naboth the Jezreelite that he refused to sell you.)는 영적인 땅 기업이라는 것인데 이것을 가나안 여인이 거꾸로 아합보고 차지하라고 하는 것이다.

이 사람은 영적인 용어도 잘 쓴다.

그리고 나봇이 죽었다(He is no longer alive, but dead.)고하는데 땅을 사고 팔고를 못하니까 자녀들까지 다 죽여야 상속자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온 일가족을 죽였다는 뜻이다. 엄청난 해결사다.

나봇의 집은 여호와가 금하신다고 포도원 안 팔았다고 순교자 집안이 되었다.

아합 집안이 후에 그곳에서 다 죽었지만 한 쪽은 순교자 집안이고 한 쪽은 처참한 심판을 당한 집안이다.

그래서 현재 고난은 잠깐이고 장차 이루어질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16절에

아합은 물어도 봐야 되는데 이세벨을 너무 믿어서, 그 것 생겼다고 하니깐응 알았어.’ 일어나 좋아서 간다.

그러나 성경은 여전히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포도원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적용]

-여러분. 알면서도 동조하는 악은 무엇인가?

-동조하는 그룹에 있나?

생각을 해보길 바란다.

 

<목사님 간증>

제가 30 몇 년 전 남편 가기 전에 이 본문을 묵상할 때 적용한 이야기다.
남편 병원에서 다 살다가 아이들 교육 때문에 이사를 왔다. 시집살이와 병원 살이 총 12년 만에 처음으로 살림집이 생겨서 자유가 처음으로 생긴 것 같아 기가 막힌 것이다. 남편이 출근을 하면서 초등학교 2학년 딸을 보면서이 핏덩이를 두고 어디 나갈 생각하지 말라고. 아이들에게 열쇠 줄 생각하지 말라고. 집에서 언제든지 문 열어 주라고.’ 그러고 으름장을 놓고 나갔다. 도대체 나는 언제까지 자유가 없어야 하나? 생각하면서 큐티책을 폈는데 이 본문이었다. 나봇이 오직 여호와께서 금하셨기에 땅 팔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에 순종하여 땅을 안 팔아 죽더라. 그런데 사소하게 보이지만 하나님의 명령을 쫓는 것은 순교구나. 내가 나가고 싶고 할 일이 많아 보였지만 남편의 구원이 땅이고 기업이기에 구원을 위해 남편의 명령을 듣는 것은 죽어지는 순교의 적용이라고 생각하면서 제가 적용하기로 했다. 남편은 시간마다 제가 있는가 체크를 했다. 병원에서는 남편과 같이 있으니까 안 나가는 게 당연하다. 그런데 감옥도 아니고 혼자서 있으면서 안 나가기는 정말 힘들었다. 돈도 있으면서 안 쓰는 게 힘들잖아요? 이런 훈련을 하나님께서 시키셨다. 이세벨 집은 로얄 패밀리고 모든 것이 훌륭하고 왕들을 만들었지만 내가 아이들 교육으로 치맛바람 날리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오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순교이고 구원을 이루는 일이라 생각하며 집에서 아이들 밥해주고 말자 적용하고 집에서 안 나갔기 때문에 제가 성경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정말 혼자 있으면서 안 나가는 것은 같이 있을 때보다 힘든 일이었다. 그래서 남편은 구원이 되었고 이 적용을 남들에게 나누었더니 그 당시 아시아 매거진에 이것이 영어로 번역되어 실렸었다. 이렇게 적용하시길 바란다. 나봇의 포도원이 나와 무슨 상관이야 하시지 마시고 적용하시면 된다.

 

. Epilogue

여호와께서 금하실지로다에 반응하는 인간 군상은 탐내는 아합이 있고 거절하는 나봇이 있고 탈취하는 이세벨이 있다.

그리고 동조하는 장로와 귀족이 있는데 여러분은 어디에 속하나?

죽임 당한 어린양처럼 나봇의 가정은 이 땅에서 설명할 길 없지만은 순교자의 집안이라고, 나봇의 포도원이라고 찬란하게 기록해주고 있다.

정말 현재 고난은 잠깐이다.

장차 이루어질 영광을 바라보고 여러분의 인생을 해석하시기 바란다.

 

[말씀 후 찬양]

<약한 나로 강하게>

약한 나로 강하게 가난한 날 부하게
눈먼 날 볼 수 있게 주 내게 행하셨네

호산나 호산나 죽임 당한 어린양
호산나 호산나 예수 다시 사셨네

호산나 호산나 죽임 당한 어린양

호산나 호산나 예수 다시 사셨네

내가 건너야 할 강 거기서 내 죄 씻겼네
이제 주의 사랑이 나를 향해 흐르네

호산나 호산나 죽임 당한 어린양
호산나 호산나 예수 다시 사셨네
호산나 호산나 죽임 당한 어린양
호산나 호산나 예수 다시 사셨네

 

<기도제목>

 
이렇게 인생은 여러 군상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스티브 잡스는 우리 인류에게 가장 이 길을 주고 갔지만, 가정에서 비교를 하지 말며 하나님은 아합도 있고 나봇도 있다.

우리는 정말 애통한 일 밖에 없는 것 같다. 그런데 그렇게 엘리야를 미워하면서 아합은 이세벨과 잘 산다. 우린 정말 해석을 할 수가 없다.

저를 너무 싫어하는 사람이 부부간에는 너무 잘 사는 것이다. 그런 일들을 겪으면서 우리가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아니하고 나에게 붙여주신 것은 다 이유가 있어서 우리 옆에 있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면서 저 사람은 이래서 좋은 거고 이 사람은 이래서 좋은 것이고. 구원 때문에 우리가 항상 오늘 나봇처럼 너무나 자기한테 유익이 많지만 하나님이 팔지 말라고 하니깐 심플하게 적용하는 것이 이렇게 순교를 해야 되는 일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인생이 짧기 때문에 나봇이 너무 당한 것 같지만 하나님은 너무나 귀하게 나봇의 포도원이라고 하신다.

그것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우리가 되게 해달라고, 심각한 상황 속에서 눈 앞에 꿀을 따먹으며 탐내고 있는 것 내려놓고, 금하시는 것 거절하고 해결사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찾게 해달라고.,내가 알면서도 동조하는 악이 없도록, 차별금지법이 통과되지 않도록 기도하자.

 

<기도하기 >


주님, 인생이 너무 힘드니까 눈 앞에는 꿀이래도 있었으면 좋겠고, 그리고 인생에는 해결사 같은 이세벨이 있었으면 너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참으로 그렇게 누구 말도 안 듣는 아합이 어떤 말도 안 들리는 아합을 이세벨은 다루고 가지 않습니까? 우리는 너무 이래도 저래도 열등감이 들며 나는 믿는데, 아무도 다루지도 못하고 되는 것이 없나, 이세벨에 대해서 너무 놀랍고. 어떻게 아합은 이세벨에게 의지를 하며 갈수 있을까? 생각을 하면서 나봇이 참 바보 같고. 여호와께서 팔지 말라고 해서 그냥 그 땅 안 판다고 심플하고 단순하게 가야 하는데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며 간다고 했는데 끝끝내 생색이 나고 내가 왜 이래야 되는가? 그리고 이제 힘든 것 쫌 그만하고 싶다고. 이 대단한 사람들이 계속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우리나라 현실을 보면서 이 복음은 어디까지 들어가야 되는 것인가? 이 교회에 이런 복음이 없어서 이렇게들 믿는다고 하는데도 자살을 쉽게 하는 것이 아닌가? 오늘 아합과 이세벨 이런 사람들을 보는 것보다 더 힘든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엘리야가 얼마나 이 부부를 보고 힘들었겠습니까? 우리 옆에 이렇게 힘든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내가 옳다고 얘기할 내놓을 것이 없어서 복음을 전하기가 어렵습니다. 주님, 참으로 여호와께서 금하실지로다 하면 그냥 금하면 되겠는데 왜 이렇게 쉬운 것을 온 나라가 전 세계가 일어나서 이것을 합법화하자고 하고, 주님 나봇처럼 죽어야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 벤하닷을 물리친 것처럼 주님께서 기적을 베풀어주실 것을 믿습니다. 아멘.

 

주님! 우리에게 집에서나 나라에서나 힘들게 많은데 우리는 힘이 없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주님 도와주시고. 내 남편, 내 아내, 내 자식부터 변하지 않아서 너무 잘 사는 사람도 많지만 비교하지 않게 도와주시고. 일생을 미움을 당하고 갈지라도 나봇처럼 순교자적인 마음으로 오늘 말씀에 순종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도록. 그래서 심판을 예비하는 비결이 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차별 금지법이 통과되지 않게 도와주시옵소서. 우리의 마음을 움직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Posted by 윤강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