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교회 2019년 9월8일 주일말씀요약과 Epilogue어록(사도행전 2:37~41/성령의 선물)]
<Prologue >
제가 암이 권세가 되어 그리스도의 신비를 보여 달라고 기도를 했었는데 3년 만에 지난 주 설교는 정확하게 그리스도에 대해서만 설교하게 하시는 본문이었다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보이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높아지셔서 모두에게 성령을 부어주신다고 하셨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신비가 맞다
성령충만 함을 받고 성령의 설교를 하니 성령의 선물을 주신다고 하신다
저도 다시 살고 높아져서 여러분 모두에게 성령의 선물을 모두 주고 싶다
선물은 공짜이니 받기만 하면 되는데 오늘은 성령의 선물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여러분 모두 받기를 바란다
<말씀요약>
1. 찔림을 받아야 한다.
37절,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When the people heard this, they were cut to the heart and said to Peter and the other apostles, "Brothers, what shall we do?")
36절에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찌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Therefore let all Israel be assured of this: God has made this Jesus, whom you crucified, both Lord and Christ.")’ 그들이 ‘이 말을 듣고 그 마음에 찔려’에서 무엇에 찔렸는가?
우리를 위해 잘 살고, 잘 죽으신 모델이 되셨고 성령의 설교를 잘 들리게 전했다.
그런데, 이 예수를 너희들이 십자가에 못 박았다라고 결론을 내린 것이다.
‘빌라도가 판결해서 로마병사들이 죽였지’ 라고 생각했다.
100%죄인인 우리는 그렇게 밖에 모른다.
소위 하나님을 믿는다는 너희 이스라엘 그런데 네가 죽였다.
나와 상관없는 일로 여기다가 내가 죽였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구속사이다.
구속사가 들려야 찔림을 받는다.
내 힘으로 안 되는 그러한 신비한 것이다.
무식하고 겁도 많은 베드로였지만 그의 성령의 설교는 베드로의 능력보다 성령의 선물이다.
백성들을 찔렀다는 것은 청중이 깊이 있게 반응하였다는 것이다.
성령의 말씀으로 찔림 받는 것은 가장 큰 성령의 선물이다.
*히브리서 4:12~13(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For the word of God is living and active. Sharper than any double-edged sword, it penetrates even to dividing soul and spirit, joints and marrow; it judges the thoughts and attitudes of the heart.)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Nothing in all creation is hidden from God's sight. Everything is uncovered and laid bare before the eyes of him to whom we must give account.)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 속에 인정하고 싶지 않은 죄가 찔렸다는 것이다.
교양 있게 변장을 해도 마음과 뜻을 감찰하신다고 해서, 벌거벗을 것 같이 드러내신다고 했다.
어두운 데서는 익숙한 시각장애인이 더 잘 걸어간다.
육적으로도 병든 사람이 더 잘 걸어간다.
영적으로도 어두운 세상에서 잘 걸어가는 것은 이 세상에 익숙해서 수단을 갖추고, 자기의 더러운 것을 볼 수가 없다.
그런데, 한 줄기 말씀의 빛이 나를 찔러 쪼개니 벌거벗어 부끄럽고 수치를 자발적으로 느낀 것이다.
아프고 힘들지만 구원을 갈망하며 죄 때문에 기꺼이 애통해 하고자 한다면, 하나님은 때마다 성령의 선물을 주신다.
말씀을 듣고 찔림 받는 것보다 좋은 것은 없다
(#연출자 로버트 요한슨, 자기에게 가장 큰 칭찬은 관객의 눈물이라고 했다. 감동의 반응을 말한다. 수많은 음악회 전시회를 가도 눈물을 흘린 적은 없는 것 같다. 우리들교회 때마다 한결 같이 눈물을 흘리게 하신다. 강단에만 서면 눈물을 흘릴 때가 많다. 나는 이성에 더 가까운 사람인데 강단에만 서면 눈물이 난다. 여자라서 과부라서 아니고, 그것보다는 예수님 앞에만 서면 왜 난 작아지는가 때문인 것 같다.)
(적용)
-성령의 말씀에 찔림을 받나? 아니면 사람의 지나가는 말에 찔림을 받고 괴로워 하나?
2. 어찌할꼬(What shall we do?) 하면서 묻는다.
37절,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예를 들어 요한계시록에 초대 7교회 중 사단의 권좌가 있는 버가못 교회에, 날 선 검으로 죄악을 수술하시겠다는 것이다.
내 속에 사단이라는 피고름을 봐야 어찌할 줄을 알텐데, 자기들이 예수를 죽였다고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어찌할꼬”하는 이 사람들은 성령의 선물을 받아 할 수 있게 되었다.
자기의 더러움을 보지 못하고 영광은 자기가 다 받고, 수치 조롱은 예수님께 돌리고 있지는 않나?
날마다 나를 위해 죽어주신 예수님이라고 입으로만 부르짖고 있지는 않나?
설교, 목장, 간증에서 들으면 나에게 하는 소리인 것이 들린다.
성령이 임하지 않으면 잘못과 수치를 모른다.
11살에 뇌성마비에 걸린 눈 깜빡이 시인 미즈노 겐조는 전신, 언어 능력이 다 사라졌다.
그런 그의 시집에 ‘나사렛 예수여, 내가 주를 못 박았나이다 ‘라는고백이 있다.
성령님이 임하시면 아무 죄 없어 보이는 겐조가 찔림을 받고 ‘어찌할꼬? 내가 예수를 죽였다’고 하는 그리스도의 신비가 임한다.
불신자와 신자 사이에는 신자가 무조건, 신자들 사이에는 믿음 좋은 사람이 무조건 잘못한 것이라는 것은 내 죄를 보는 만큼 영이 세워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직분으로 보면 목사인 제가 제일 잘못한 것이 맞다.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매사에 난 잘못이 없어 한다면, 성령님의 선물을 받지 못한 사람이다.
온 나라가 ‘나는 잘못 없어’라고 한다.
찔림을 받으면 무시하던 사람들에게 ‘형제여!’라고 묻게 된다.
요일 1:1 주님을 듣고 먹고 만지는 사람은 공동체에서 사귐이 있다고 했다.
갑자기 목장에 묻게 된다.
사람들은 돈 건강 떨어져야 성령설교가 들리고 ‘어찌할꼬?’ 한다.
그 동안 경건, 교양, 체면을 가장하고 교회 다녔는데 부도, 바람, 아프고, 들통나서 숨을 것도 없고, 그러니 ‘형제여, 어찌할꼬?’라고 묻게 된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직면하고, 단지 돈이 없는 것이 아니라 나의 더러운 실체를 보게 되는 것이다.
이사야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화로다 나로 망하게 되었도다’고 하였다.
천사가 핀 숯을 대며, ‘죄가 사라졌다’고 하고 소명을 주었다.
그런데 우리는 찔림도 ‘어찌할꼬?’도 없기에 형식적으로 나오고, 애통도 없다.
그래도 인간은 기복적인 마음이 있어서 믿음이 없어도 교회에 나오긴 한다.
당연히 찔림도 애통도 ‘어찌할꼬?’도 없으니 도리어 성령 받은 사람들을 술 취했다고 조롱하는 것이다.
여러분들 사건에서 ‘내가 주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하는 성령의 선물을 받기 바란다.
나에게 죽어지는 삶의 열매가 있다면, 모두 들을 것 같다.
반드시 생각나서 성령을 받으세요. 소원이고 유언이다.
(적용)
-돈이 없어서 ‘어찌할꼬?’ 하나? 성령의 찔림을 받고 ‘어찌할꼬?’ 하나?
3. 회개이다.
38절
너희가 각각 회개하라.
어찌할꼬 하는 자들에게 회개하라 하였다.
각각 개인구원이니까, 죄 사함 받고 세례 받고 성령의 선물을 받으라고 한다.
순서가 ‘죄 사함-세례-선물’이라고 순서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죄 사함 받는 조건으로 성령주심이 아니다
물세례는 그리스도의 외적인 고백으로 성령의 역사도 분명히 있다.
모든 일은 순서적으로 올 수도 있고, 아닐 수도, 동시다발적으로 올 수도 있다.
회개- 세례- 죄 사함이라는 성령선물이 개인의 경험, 믿음의 분량이 각자 다 달라서 그렇다.
초신자가 물세례를 받았는데 회개 성령의 역사일 수 있다.
구원받고 돈 자녀 건강 주시니 그것이 구원인 줄 안다.
이미 이루어진 구원이 있고, Already, not yet!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에 이르는 것이지만 아직 이루어야 할 구원이 있다.
성숙과 성화를 향한 구원이다.
사명 감당해야 한다.
이루어지지 못한 구원이 있다.
그러면 해야 할 일이 ‘세상이 감당 못하는 구원을 위해서 나를 부르셨다.’라고 생각하면 세상을 뛰어넘는 회개를 하라는 것이다.
세상에서 내가 구원을 받아서, 세상에 목맨 사람에게 설명해야 하는데, 내가 떠나지 못해서, 그래서 회개를 하면서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죽인 공동체가 유대인 공동체인데 그들의 조롱을 뛰어 넘는 알지 못하는 기쁨인 성령의 선물이 주님이다
오순절 성령강림은 사명 감당하라는 어마어마한 사건이다
그들은 이미 찔림 받고 ‘어찌할꼬?’ 하는 회개의 상태에 있었다.
베드로의 설교는 너희가 회개하면 이 세상 복을 받는다는 설교가 아니고, 죄가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설교였다.
‘무엇 때문에 예수님이 죽으셨는가를 알라’는 설교이다.
그들이 원하는 메시아가 이 세상의 왕이 아니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진정한 회개를 하라는 것이다.
그래야 복음을 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악한 이 세상에서 탈출하고 싶지 않은 본능이 죽기 전까지 계속 될 것이므로 날마다 세상을 뛰어 넘어야 한다.
이 세상에 내 방식, 내 생각, 내 고집을 내려놓고 회개와 세례는 죽으라는 것이다.
이 세상의 복이 아니라, 상관도 없어 보이는 십자가의 예수님을 내가 못박았다는 것을 날마다 인정하는 것이 회개이다.
성령의 선물로 주시는 회개는 본질적인 회개이다.
한 목자님이 술도 끊었다가 다시 마시고, 그런데 변한 것이 있다.
삶의 안식을 누리더라는 것이다.
경제적 풍요를, 다른 사람 누리는 것을 부당하게 여겼는데, 부러움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내가 잘났는데 나도 잘 살아야 하는데 라고 생각했고 교회 다니기 전에도 세금은 잘 냈다.
그런 것을 따지는 것이 아니고 진짜 리더십을 가지려면 가치관이 문제다.
요즘은 평생 벌어도 안될 것 같은 부자가 불편하지 않아 평안을 누린다고 얘기 한다.
‘외모 불평도 졸업하지 않았나’라는 것은 굉장한 나눔이다.
정말 졸업을 해 가는 이런 가치관의 변화가 성령의 선물이다.
세상을 출애굽 하는 것, 즉 세상가치관을 떠나야 한다.
가치관의 변화가 성령의 선물인 회개댜
내가 못 떠나니 날마다 부족을 보면서 같이 구원의 세계로 가자고, 세상을 끊고 무슨 술은 못 끊나.
그러니 되면서 안되고 맞다. 왜 안되나. 진정한 성령의 선물은 죽는 경험이다.
죽는 경험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안 되는 것이 너무 많다.
오늘 물세례 받았어도 회개 후에도 몸이 기억하는 죄들이 얼마나 많은가?
매일 떼어놔야 한다.
내 자신에 절망하고 안타깝다.
사랑하는 부모 아이 남편 아내 다 안 변하니까 계속되는 아픔이 있는 것이다
오래되면 자기를 부인하는 내 속의 죄를 보게 하신다.
어김없이 어떤 상황에도 자기 죄를 보게 하신다.
문자적 아픔보다 철저히 나에게 직면하여 내적인 죄를 보면서,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닌 공중권세 잡은 자와의 영적 싸움을 처절히 하면서 진정 죽는 경험을 할 때 죄 사함의 은혜를 경험할 때, 효과적으로 도와주시는 성령의 선물이다.
우리는 성령의 선물 받는 것을 주로 방언, 신유 등 신비한 은사를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깨끗함 거룩함 여기 선물은 은사가 아니라 성령 자체이다.
인생의 목적은 거룩인 것과 같다.
반드시 성령세례를 받아야 한다.
행4:19 회개하고 돌이켜 죄 사함을 받으라, 성령은 새롭게 하는 것, 거룩으로 가는 것이다.
물세례 받고 밍밍하다면 성령세례를 받으라는 것이다.
이미 와 아직.
주님을 만나 기쁘지만, 목장 가서 기쁘다. 그런데 암, 육신 고통을 만난다.
기쁘기 보다는 하나님 사람을 원망한다.
믿었는데도, (롬15:15 내가 원하는 바 선을 행하지 않고 도리어 악을 행하는 도다 주님을 부인하고 원망하는 구나)
거듭난 후 사도 바울의 고백이다.
예수 믿고 나는 가는데, 가도가도 또 저기가 거긴가 하며, 또 가보면 고향 땅 우리 천국, 푸른 하늘이 닿은 것 같아 가보면 아직도 안됐다.
되었나 하면 화가 나고 슬프다.
밉고 아니고, 예수 십자가 고통이 나와 상관이 없어서 그렇다.
대 사도 바울도 ‘오로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탄식이 저절로 나온다.
때마다 고백을 하고 살아날 때마다, 죄로 말미암아 죽을 몸인데, 이런 나를 다시 살리셨다는 고백을 하니까, 네가 이 예수를 죽였다 할 때, 맞습니다! 하는 것이다.
막8:34 에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복종시키는 것이 가장 어렵다.
이 세상에서 보기에, 윤리적으로는 죄를 인정하지만 증명서가 나오기 전에는 인정하지 않는다.
드러난 것만 인정한다. 자기 속의 음란 시기 질투 본질은 인정 하지 않는다.
언제 인정하느냐, 긴 시간 고통, 나아지지 않는 환경을 통해서, 고통만큼 죄가 보이고, 죄가 보이는 만큼 회개하는 것이다.
나오미에게 3차 흉년을 허락하셔서 진정한 회개를 했다.
나오미는 찬송의 떡집, 본향으로 돌아가는 선택을 했다.
초대 교회도 힘들었다
이 고통 속에서 해석이 안 되는데, 예루살렘 교회에서 성경이 안 되고 있었는데, 성령의 설교가 꿰뚫고 들어오셨다. 고난이 축복이다.
목자가 되셨는데도, 성령 선물이 왔는가 물어보면, ‘잘 모르겠는데요’ 한다면 강력한 성령의 선물을 받아야 한다.
성령 설교가 어렵다는 남자들은 성령이 임하지 않으면 들리지가 않는다.
저 또한 항암의 고통보다 힘든 것, 아픈 것이 내 자신이었다.
교회와 연관된 사명 때문이었다.
고후11:25부터 바울도 여러 위험을 겪었다.
수고하고 애쓰며 굶고 헐벗었다. 이루 말할 수 없다.
28절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날마다 눌리는 것은 모든 교회를 위한 염려이다.
아프면서 어떤 고난 보다 하루 종일 교회 생각을 했다.
큰 사명이 태산처럼 있는데, 자격 없는 내가 끌고 가야 하니까 모든 것이 회개가 되었다.
무형의 교회를 향한 마음이 불붙었다.
부족함과 사랑 없음이 매일 보였다.
항암도 구주와 함께 나 죽었으니, 최선을 다해 투병했다.
육체가 살아난 거듭난 기분이다. 이 세상의 소망은 조금 내려놓은 것 같다. 한꺼번에 못 내려놓는다.
이 세상을 탈출시키는 것이 조금씩이다. 회개하는 만큼 한 사람이 돌아왔다. 죽은 자가 살아나는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길 바란다.
(적용)
-여러분의 회개는 입으로 하는 성령의 회개인가? 성령이 선물로 주시는 회개인가?
4. (통회 자복하며) 3000명 속 공동체에 들어가는 축복이다.
39절,
이 약속은 너희와 자녀, 모든 사람. 시대 장소 초월해서 차별 없이 항상 유효하다.
회개로의 부르심, 구원으로 초청, 구원의 범주는 먼데 사람 국적 인종 차별 없이 예수님 안에서 하나 되게 하시며 이루어 진다.
이런 부르심 받은 공동체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되게 한다.
40절
패역한 세대는 신약에서는 오직 여기서만 나타난다.
심판 아래 놓인 음란하고 악한 세대를 말한다.
베드로에게도 경험이 있기 때문에, 확증하여 전할 간증이 있다.
수제자 유다와 내가 다를 게 없다.
나는 예수님을 세 번 저주했으나 자살하지 않고 회개했다.
예수를 따라 다니면서 내 죄를 못 보니까 부활도 내 눈으로 보고 나는 다시 물고기 잡으러 나갔다.
그런데 약속하신 말씀대로 예수께서 나를 찾아와 사랑하느냐 물으시고 회복시켜주시고, 수치 치명적 죄를 오픈하고 유다대신 맛디야를 채워놓으니 약속대로 성령님이 임했다고 전했을 것이다.
패역한 세대가 좋아하는 바알 공동체가 또 있다.
새 공동체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패역한 가치관에서 돌이켜야 한다.
영원히 세상에서 탈출이 안 될 수가 있기 때문이다.
41절: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으니 이 날의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Those who accepted his message were baptized, and about three thousand were added to their number that day)
말씀을 받은 사람이라고 했다.
성령은 말씀을 통하여 온다.
성령 말씀 능력은 한 단어로 보면 된다.
내 아내 남편이 죽겠다고 하면, 그게 나와 무슨 상관 있나? 내가 예수를 죽인 것이다.
삼천 명은, 설교 듣고 찔림받 아 마음을 찢어 통회하는 사람들이 모였다.
120명 성도로 시작한 초대교회가 3000명 새 신자 양육을 시작한 것으로 그 후에는 5000명, 그 후 숫자는 의미가 없는 것이 전 세계에 퍼져나가고 2000년 동안 우리들교회까지 폭발적 부흥으로 이어졌다.
성경에는 남자기록으로 나와 있으니 여자와 아이까지 합하면 3,000명은 만 병으로 올라갈 수 있다
전무후무하게 예루살렘에 놀라운 일인 것이다
복음은 영원히 전해져야 할 것으로 성령의 설교가 이렇게 힘이 있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어주시니까, 내가 죽고자 하면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때가 차지 않으면 내가 아무리 죽어도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당시 십만 명 인구 중 오순절에 3%의 회심은 적은 수지만 놀라운 일인데 소위 믿는 사람들, 3000명만 반응한 것이다.
성령의 설교가 이렇게 powerful하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어지시니까 이런 일이 일어난다
이는 찔림 받고 마음 찢는 통회하는 사람의 수가 3,000명이라는 것이다
여기 온 사람 이 3000명은 자기의 억울함 풀러 온 것이 아니고 미워서 아파서 못 살겟다고 온 사람도 아니고 내가 성령 좀 받아야겠다고, 은사 좀 주시라고 온 사람도 아니다.
찔림 받고 어찌할꼬 하면서 온 사람들이다.
똑같은 말씀을 듣고 3000명 속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은 사람이 많아도, 회개하는 3000명을 주목해 보신다.
숨어 있어도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알아 보신다.
암 투병 도중에도 교회는 10%부흥하였고, 창립 6.3에 6개월 밀렸던 사람 200명이 토요일에 합동 세례를 받았다
(적용)
-여러분은 통회 자복하는 3000명에 속하나?
-누구에게 확증 받고 구원받으라고 권면하겠나?
<Epilogue 어록>
내 가치관의 변화가 성령의 선물인 회개다
진정한 성령의 선물은 죽는 경험이다
세례와 회개 후에도 몸이 기억하는 죄가 남아 있다
안 변하니까 계속되는 아픔이 있는 것이다
육적 아픔보다 내적 찔림이 효과적으로 도와 주시는 성령의 선물이다
성령의 선물은 방언, 은사로 보는 경향도 있지만 깨끗해져 거룩한 삶을 살게 하는 것이다
성령의 선물은 인생의 목적이기도 한 거룩이다
1차 물 세례는 밍밍하지만 날마다 회개를 통해 거룩으로 가게 되는 성령의 선물을 2차적으로 받아야 한다
세례 받고 좋아진 줄 알았는데 걸려 넘어져 원망하게 되는 내 모습을 보며 저기가 거긴가 하며 푸른 하늘 끝 닿은 곳이 고향인 줄 안다
고난이 오면 해결되는 않고 화가 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이 나와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날마다 고백하는 것이 살아 나는 것이다
주께서 죽으셔서 나를 살리셨다
하나님은 바울 사도의 소명을 위해 연단 시키신다
자기부인과 자기 복종이 가장 어렵다
자기 안에 들키지 않은 음란 등의 죄 문제가 도사리고 있는데 죄가 보이는 것만큼 회개가 되는 것이다
회개하고 죄 사함 받는 것이 성령의 선물이 이루어진 것이다
물 세례 받고 강한 역사로 성령 선물을 받아야 한다
바울의 최고의 눌림은 모든 교회를 염려한 것이다
구주와 함께 나 죽었으니 구주와 함께 나 살았도다
찔림 받고 ‘어찌 할꼬?’ 고백하며 세상 것을 내려 놓는 것이 성령의 선물이다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이 회개와 성령의 선물이다
끝없이 회개하고 자신의 부족을 보고 가는 성령의 선물을 받으면 여러 말로 권하고 임하시는 삶의 삶을 산다.
악하고 음란한 850명의 바알 공동체는 끼리끼리 공동체인데 그곳을 탈출하여 주님 공동체에 속하여 여러 말로 확증하며 고난으로 회개하라
성령은 말씀을 통해 역사하심의 증거로써 말씀-능력-전도로 이어지게 하신다
말씀으로 가장 아픈 곳이 찔린다
영적으로 네기 네 남편을 죽였다라는 성령의 음성을 듣고 자기 죄를 보니까 살아 나는 것이다
세례받은 3천 명이 이날 공동체에 더해졌다
숨어 있어도 회개하면 하나님이 알아 보신다
물 세례가 성령세례로 바뀌어서 끝없이 회개하여 성령의 선물이 주어지면 여러 사람을 구원으로 이끈다. 할렐루야~
'말씀과 마음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들교회 2019년 9월22일 주일말씀요약(사도행전 2: 42~ 47/성령의 공동체) (1) | 2019.09.26 |
---|---|
우리들교회 2019년 9월15일 주일말씀요약(누가복음 15:20~ 24/ 아버지 마음/진재혁 목사님 케냐 선교사) (0) | 2019.09.19 |
우리들교회 2019년 9월4일 수요예배 말씀요약(대전중문교회 장경동 목사님 마가복음 1장 35절 및 39절) (0) | 2019.09.09 |
우리들교회 2019년 9월1일 주일말씀 요약(사도행전 2장:22~ 36/ 성령의 설교) (0) | 2019.09.04 |
우리들교회 2019년 8월25일 주일예배 말씀 요약(왕상 22: 41~ 53/ 여호와 앞에서 선한 왕 악한 왕) (0) | 2019.08.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