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교회 2019년 7월14일 주일말씀 요약 및 말씀 어록65가지(열왕기상 20: 22~ 43/그대로 당해야 하리라)]
가. Prologue
인생의 목적을 모르면 뛰쳐나온다.
가치관이 바뀌면 어떤 남편, 어떤 아내와도 살 수 있다.
우리네 인생이 힘들어 보여도 성경은 그것이 삶의 결론이라고 해석해 준다.
아합이 40절에 남의 일을 판단 요청 받으면서 어떻게 할까? 스스로 결정했으니 그대로 당해야 한다.
어떤 유명 앵커가 미투(me, too) 여성인권의 소리를 드높이던 분이었는데 지하철에서 여성 다리를 몰카로 찍다가 현행범으로 잡혔다.
본인이 남을 심판하다가 몰카를 스스로 결정해서 찍었기에 그대로 당하게 된 것이다.
우리 또한 다 마찬가지다.
내로남불 –무조건 사단을 사로잡지 않으면 사로잡히게 되어있다.
나. 말씀 요약
내가 말한 대로, 행한 대로 당해야 할 일이 많다. 왜 그대로 당할 일이 많을까?
1.치열한 훈련이 몸에 익지 않았기 때문이다(22절)
벤하닷과의 1차 전쟁에서 지난주에 대승을 거둔 것은 진짜 실력이 있어서 이긴 싸움이 아니다.
그러기에 선지자는 왕에게 자기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는데 명령형 동사로 ‘너는 가라, 힘을 기르라, 깨달으라, 살피라’고 강력하게 전했다.
성도는 사단이 언제 어떤 방법으로 공격을 하든지 막아낼 수 있는 준비를 갖춰야한다.
주님은 자기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빠진 성도를 때에 따라서 보호하시고 도우신다. 그러나 항상 그런 방법으로 성도를 도우시는 것은 아니다.
자식을 망치려면 돈과 시간을 많이 주라고 한다.
처음에는 그게 좋아 보이니 ‘여기가 좋사오니’라고만 하면서 이제 갈 곳도 모르고 힘도 기르지 않고 깨닫지도 못하면 무엇을 살펴야 하는지도 모르는데 시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결국에는 하는 일 족족 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일당백의 훈련을 쌓기 위해서 가고 싶지 않지만 가야할 내 자리인 학교, 가정, 회사, 군대 등이 있다.
그리고 이 세상을 알고 힘을 기르기 위해서 기초체력부터 다져야하고, 그럴 때 힘드니까 어디가 부족한지 깨닫게 되고, 그것이 호시탐탐 치고 들어오는 대적을 살피는 훈련이 된다.
그런데 일생의 전쟁은 끝없이 반복된다.
내가 입시전쟁 한 번 이겨서 스카이대학 갔다고 방심했다가는 큰 코 다친다.
그런데 전쟁의 방법을 묻기만 하면 주님이 일일이 알려주신다.
1차 전쟁 때도 아합의 실 날만한 그 믿음을 보시고 구체적으로 청년들을 먼저 보내고 선봉은 아합왕이 서라고 하셨다.
그런데 아합은 선봉에 서지도 않았지만 하나님은 긍휼히 여기셔서 대승을 하게 하셨다.
저도 제가 전하는 예수님 때문에 제가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아껴보아 멸하지 않으신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이스라엘 나라 때문에 아합을 멸하지 않은 것들이 정말 많다.
그러니 여러분도 그 하나님 나라 때문에 그 예수의 이름을 전해야 한다.
여러분들이 잘나서가 아니라 우리는 사명이다.
이 모든 것에 은혜가 아니면 정말 저도 설 수가 없다.
결국 아람과 북이스라엘의 전쟁에서 북이스라엘의 총지휘관은 아합이 아닌 하나님인 것을 알 수가 있다.
성경은 그것을 계속 알려주신다.
그러니 참된 예배드리는 구조 속에 있는 것이 얼마나 영육간의 실력을 쌓고 지켜주시는 비결인지 모른다.
주님을 모르면 “왜 이렇게 고리타분하게 살아? 아니 큐티는 뭐야? 수요예배는 뭐야?” 한 번 사는 인생 먹고 마시고 마음껏 즐기고 가야지라고 생각하지만 후에 죄의 싹이 너무나 크게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먹고 마시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목적이 무엇인가라는 것이다.
참으로 인생이 죄인이라서 겉으로 보기에 모범생이고 열심히 살았어도 죄 많은 곳에 은혜가 넘친다고 하셨는데 죄를 모르는 사람은 그것이 가장 큰 죄이기에 죄의 기록부는 다 거기서 거기 똑같다.
다만 죄에 대한 체감온도가 좀 다르다.
그것을 믿음의 분량이라고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이 비록 험하고 주변의 대적의 공격이 극심해도 우리 인생의 총지휘관 되시는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치열하게 훈련을 해야 몸이 기억을 한다.
그래서 그 당시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7000명을 남겨두셨다고 하셨는데 엘리야 외에 이렇게 선지자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치열하게 훈련하신 무명의 할머니,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 목사님, 선교사님, 사장님, 회사원 등 지금도 진짜 천국의 실력자들은 숨어있을 수 있다.
(적용)
-너는 가라, 힘을 기르라, 깨달아라, 살피라 중에 어디에 있는가? 무엇을 잘하고 무엇을 못하는가?
-그러기 위한 여러분의 예배는 치열하게 훈련이 돼서 몸이 막 기억을 합니까?
-수요일 날 저절로 막 버스를 타러 나옵니까? 직장에서도 막 기억을 해서 몇 번 버스를 막 타고 그러게 오십니까?
<지난 주 나눔>
공장 옆 부지를 다른 사람이 샀는데 그 땅을 조금 침범한 것으로 측량결과가 나왔다. 처음에는 우리가 오랫동안 그냥 계속 써오던 것이니까 앞으로도 그냥 쓰라고 했던 사람이 갑자기 내용증명으로 경계 침범에 대한 터무니없는 배상을 요구해왔다. 적당하다고 생각되는 액수의 3배를 주겠다고 해도 원하는 액수가 아니면 무조건 철거하라고 할 것 같다는 것이다.
목자님처방: 아합한테 느닷없이 벤하닷이 나타나서 제일 좋은 것을 가져가겠다고 하는데 왜 갑자기 이런 요구가 들어왔는지 자기 자신을 한 번 보세요. 내 안에 항상 100% 옳지 않은 내가 있는데 화친했던 사람이 갑자기 태도를 돌변해서 나한테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일수도 있으니까 공동체에서 하나님이 나한테 왜 이런 일을 주셨을까 하는 자꾸 묻고 가는 것이 필요한 것 같다. 우리 모두 지난 주 말씀처럼 장로가 되서 듣지도 허락하지도 말아야 할 것을 같이 묵상하고 가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이런 말씀을 나누는 것이 평범해 보이지만 치열하게 몸이 기억을 하는 훈련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오늘 사건에서 오늘 설교 말씀을 사건에 대입하라.
2.사단은 더욱 치밀하게 준비하기 때문에(23~27절)
벤하닷 진영에서는 패인을 분석하는데 아람왕과 그 신복들을 전쟁의 패인을 분석하고 2차 침략의 전략을 짠다.
하나님을 산의 신으로 단정. 시내 산에서 언약을 맺었고 산당에서 제사 드렸고 특히 850명의 바알선지자를 죽였으므로 안 믿는 그들은 미신적이고 기복적이라 산의 신이라고 생각한다.
일본에는 인구가 1억2천인데 신이 더 많다. 고양이 신도 있단다. 모든 것에 신의 이름을 붙인다.
32명의 왕들의 지휘권을 빼앗아 실제적으로 전쟁에 익숙한 군대장관들에게 넘겨주고 잃어버린 군대와 병기들을 보충하고 병거와 말에서 절대 우위를 보이고 있는 아람군의 특성상 산의 신을 피해서 평야에서 싸우면 이긴다고 보고를 했다.
이 모든 분석들은 참으로 인간적 판단에 근거할 때 대단한 전략이다.
벤하닷은 이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2차 침공을 수행한다.
여기에 비해 이스라엘은 초라하기 짝이 없는 두 무리의 적은 염소 떼 같았다고 묘사한다.
아람이 이 모든 전략을 가지고 전쟁에 임하는 것은 믿는 우리도 해야 할 일이고 배워야 할 일이다.
그러나 마지막 결론이 중요한 것이다.
그들에게 한 가지 없는 것은 하나님이다.
하나님 없는 자의 말, 하나님을 제한하는 이 말의 전략을 가지고 임한다.
그러니 내가 이기고자하나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삶은 첫 단추부터 헛된 노력의 연속일 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어야 한다.
이들의 확신은 산들의 신이 아닌 무소부지하시며 전지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섭리와 능력을 모르기 때문이다.
28절 아람이 이겼다고 생각할 그 때에 여호와의 말씀으로 큰 군대롤 네 손에 다 붙이리니 하고 약속을 주신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계획과 말과 숨소리까지 다 들으신다.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또 다시 하나님의 능력을 보이심으로 북이스라엘이 회개하고 당신께 돌아올 수 있는 기회를 다시 베푸시겠다는 것이다.
하나님 능력을 보이시는 것은 항상 내가 회개하기 위해서이다.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능력을 보이면 다 세상으로 간다. 하나님을 떠난다.
회개하라고 은혜를 베푸시는데 회개는 은혜 말고는 답이 없다.
옳고 그름으로 해석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아합의 공로는 아무것도 없다.
오직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아합을 지켜주신다.
29절 7일을 기다리는데 숨 막히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끝까지 기다리고 참게 하시고 하루 만에 승리하게 하시는 여리고의 전쟁과 비슷하다.
아벡 성벽이 무너진다.
아람군대는 최선을 다해서 완벽한 전략대로 신중하게 행동을 했지만 이스라엘군이 승리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역사 때문이라는 것을 또 보여주신다.
성경은 이 하나님만이 하셨다는 (기록의) 연속이다.
30절 벤하닷이 성벽이 무너지는 와중에도 또 살아남았다.
무조건 사로잡아야 할 사단의 괴수가 얼마나 끈질긴가를 보여준다.
전투할 때 한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것이 너무 중요하다.
벤하닷은 아합의 상대가 안 되는 괴수이다.
(적용)
-지금 당하는 사건에서 여러분의 전략은 하나님의 지혜인가? 인간적인 책략인가?
3.공의와 그릇된 긍휼을 분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31~32절 재를 뒤 집어 쓰고 사무엘 앞에 위장하여 나타난 기브온이 생각난다.
동정을 유발하면서 살려달라고 갔는데 아합이 살려주었다.
“인자”는 히브리어 “헤세드”(자비, 언약에 대한 신실함)인데 속이는 게 분명한 것이 과거 북이스라엘과의 동맹을 파기한 아람이 그런 말을 쓰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런데 목숨을 구걸하면서 아합을 인자한 왕이라고 하며 속이니 아합은 이 말에 속아 넘어가서 언약적인 자비를 베풀었다.
그러나 아합의 이런 자비는 승리하게 해주신 하나님의 자비의 헤세드를 짓밟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비로운 행하심의 헤세드를 인정한다면 하나님과의 언약을 신실하게 지켜서 벤하닷, 사단을 완전히, 마땅히 죽여야 했다.
인간적이니 어떻게 죽여?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욕심 많은 아합은 치밀한 사단에게 틈만 나면 넘어간다.
헤세드 한마디에 언약을 아는 것 같아서 넘어갔다.
이렇게 한 마디에 속아 넘어갈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전적으로 하나님 때문에 이기고, 이겨야만 하는 싸움이고 하나님이 벤하닷을 아합의 손에 붙였는데 욕심으로 이 기회를 놓쳐 버렸다.
하나님을 모르니 인간을 몰라서 사람 분별이 안 된다.
아합은 죄인 됨을 모르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냉철하게 볼 수가 없다.
자기 자신이 이렇게 죄인인데 “인정이 많으시다”고 하니 우쭐해서 “나의 형제여!”라고 한다. 벤하닷의 신하들이 그 말을 철회하지 못하도록 얼른 받아서 바로 확증하려고 “벤하닷이 왕의 형제”라고 한다.
급히 이것을 확증했다는 뜻이 있다.
사탄은 이것을 틈으로 본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 사단은 파고든다.
문제는 항상 내가 틈을 보였기 때문이다.
잘못된 긍휼로 불신 세상을 형제처럼 사랑하는 것이다.
아합의 가치관이 아직 거기 밖에 안 된다.
긍휼과 자비는 성도의 도리이고 미덕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공의를 거스르는 잘못된 긍휼은 나쁜 긍휼이고 범죄요 긍휼이 아니다.
그러니까 정말 세상 사람에게, 또 외인에게, 또 믿는 사람들에게도 회개를 촉구하고 공의로운 심판을 선포하는 것이, 죄인을 향한 긍휼이고 자비임을 알아야 한다.
동성애는 죄라고 말해주는 것이 동성애자들을 향한 최고의 사랑인 것을 알겠는가?
누가 비난을 무릅쓰고 동성애가 죄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창세기의 소돔과 고모라에서 얼마나 수많은 죄 때문에 망했는가?
그런 죄인 집단이 있겠지만 오직 동성애자들만 합세해서 난동을 부린다. 그들이 똑똑하다.
드러난 것만 60만 명이고 육체관계를 하지 않는 동성애자는 그 수에 들지도 않기 때문에 훨씬 많은 수의 동성애자들이 있다.
그런데 동성애로 비롯되는 에이즈 환자의 약값은 1달에 600만원, 간병인은 20만원. 나라를 위해서 싸우다가 다친 사람에게는 그런 혜택이 하나도 없는데 다는 아니더라도 문란한 성생활로 인한 에이즈의 치료비용은 모두가 나라가 무상으로 지급해서 세금으로 8조가 들어간다.
그런데 그 약도 좋아져서 요즘은 에이즈가 걸려도 30년도 더 사는 사람이 있어 점점 세금이 기하급수적으로 들어갈 예정이라고 한다.
보건소에서 검사를 해도 인권유린이라고 얼굴을 보면서는 안 알려주고 전화로만 결과를 알려준다고 한다.
그래서 아무도 그 사람이 에이즈 걸렸다는 것을 몰라서 계속 전염을 시킨다.
공의와 그릇된 긍휼을 분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레인보우 리턴즈’(Rainbow returns)를 구독하고 강의를 들어보라.
똑똑한 그들이 귀족집단이라는 것이 맞다.
날로 퀴어 축제(Queer Festival)가 사람을 많이 참여시키고 자꾸 보다보니까 혐오감이 점점 없어지고 무뎌진다.
그러면서 세력화되고 있다.
그러나 유황불로 심판받은 소돔과 고모라에 구체적인 죄인 집단은 동성애자 그룹 하나뿐인 것을 생각하면 이것이 우연이 아닌 것 같다.
내가 지옥을 경험하면 가지 말라고 외칠 텐데 경험하지 못했으니 지옥이 대수냐고 한다.
죽으면 끝이라고 한다.
우리 교회는 동성애자들이 와서 주님을 만나고 고백을 하고 분리해서 목자를 하면서 승리하신 분도 여럿이 있고 청년부에서 동성애를 오픈한 자매와 결혼한 현직사역자도 있다.
죄인 줄 알면서도 아직 매듭이 지어지지 않아서 안타까워하는 지체도 여럿이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사람들이 죄가 아니라고 항변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이다.
우리가 수많은 죄를 오픈하지만 동성애가 가장 끊기 힘들다는 것도 경험을 한다.
그래서 안타까운 것이다.
지금같이 죄 인줄 알면서 안타까워하면서 가는 것이 정상인데 세력화되는 것이 창세기의 소돔에서 이익집단이 되어 행패를 부리는 것처럼 정말 상상 못할 일이 일어나서 이 동성애를 수면위로 드러내서 마음대로 하도록 합법화하려고 한다.
그런데 그 소돔과 고모라에 유황불이 떨어지는 멸망이 온다고 할 때 농담으로 여겼다고 했는데 우리도 아무리 망한다는 얘기를 들어도 지금 농담으로 여기고 있다.
요즘 이 문제가 너무 큰 문제이기 때문에 또 부르짖는다.
통과가 코 앞에 다가왔기에 저라도 아합과 벤하닷의 싸움같이 승산 없는 싸움이라고 해도 외쳐야겠다.
34절 이전에 벤하닷 1세가 사마리아에 자기를 위하여 거리를 만든 것처럼 벤하닷도 아람의 다메섹 거리에 아합 거리를 만들어주겠다고 한다.
무역에 대한 협정을 말하고 있다.
32개국 연합의 총 두목이 이렇게 말하니 어리석은 아합이 속기 쉽다.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 제일 어려운 것인데 겸손해야 자기 자신을 안다.
그릇된 긍휼은 하나님께 묻지 않을 때 나온다.
조금이라도 전쟁에서 지는 것 같으면 묻다가 이기기만 하면 아합은 자기 생각이 나온다.
잘 사는 게 꼭 축복이 아니다.
힘들 때는 공동체에 나오다가 조금 되면 안 나온다.
이긴 것 같으니까 자기 마음대로 생각해서 교만하게 조약을 맺고 놓아주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으신 언약을 기억하사 불쌍히 여기시고 당신의 선지자를 보내사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시고 말씀 그대로 승리하게 하셨다.
그런데 바로 아합은 하나님 나라의 전쟁규칙에 따라 마땅히 죽여야 할 사단의 왕 벤하닷과 오히려 언약을 맺고 그를 살려 보내줌으로써 하나님과의 언약을 정면으로 깨뜨렸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막대한 경제적인 이권과 관련되어 주의 언약을 세상 재물과 바꾸었다.
13절, 22절, 28절에 선지자가 아합에게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주신 것은 모두가 다 아는 것인데 아합이 벤하닷과 약조한 것은 결국 어리석은 아합이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고 묻지 않고 행했기 때문에 이것은 선한 마음이 아니라 그냥 허영에서 나온 자기 욕심으로 벤하닷을 놓아준 악함인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두가 이해하도록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또 이해못한다고 지키지 말라는 것도 아니다.
아합 역시 벤하닷에 대한 자신의 계산과 외교적 이해득실과 관계없이 아람의 군대를 자신의 손에 붙이신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를 마땅히 죽였어야 하는 것이다.
사실 세상에서 보면 아합의 모습은 실날 같지만 하나님께 묻기도 하고 융통성을 발휘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패배한 적에게는 자비를 베푸는 관대한 왕으로 보이지만 구속사로 안 깨달아지면 아합같은 지도자가 얼마나 우리를 힘 빠지게 하는지 모른다.
그러니 아합이 벤하닷에게 속아서 그는 내 형제라고 하면서 언약의 헤세드를 남발하면서 조약을 맺은 것은 마치 차별금지법에 싸인을 한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에스더가 아하수에로 왕(120개의 유대도를 다스렸다)에게 당신이 정치를 잘하지만 내가 원하는 것은 오직 유대인 학살 법에만 싸인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한다.
그것처럼 지금 저도 오직 차별금지법, 낙태법이 통과되지 않기만을 간절히 기도하면서 이 정부에 청한다.
이것이 유대인(기독교인) 학살법이다.
에스더처럼 아하수에로를 감동시킬 수만 있다면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고 했는데 누가 이 정부를 감동 시킬 한 사람일까요?
우리 교회는 동성애에 대한 열매가 있고 차별이 없다.
동성애 지체들을 사랑한다. 다 같이 천국가자.
(적용)
-공의와 그릇된 긍휼을 구별하는가?
자기 죄가 안 보이는 사람은 이것을 구별하지 못한다.
4. 그대로 당하는 것은 스스로 결정한 것이다.
하나님은 아무리 이야기해도 안 들으니 행위예언으로 아합을 촉구한다.
35~37절 세상적으로 말하면 누가 더 좋은 친구인가?
인본적이면 이해가 안 된다.
말씀은 반드시 인간이 이해하도록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무조건 가부를 선택할 수 있도록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나는 이해가 안 되도 하나님이 100% 옳으시기 때문에 무조건 들어야 하는 것이 말씀의 명령이다.
그런데 우리가 못 듣는 이유는 세상과 죄악과의 타협 때문에 이해가 안 되는 것이다.
내가 인본적으로 세상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이 이해가 안 된다.
그러므로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가장 힘 있는 통로는 선지자가 자신을 치라고 한다. 자신을 치라는 자신의 고난이다.
고난이 가장 말씀을 잘 전하는 통로가 되는 것이다.
선지자는 아합이 사단을 사로잡아야 하는데 그릇된 긍휼로 자발적으로 놓아주었기 때문에 네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는 것을 경고하기 위해 이상한 예언까지 해가면서 대신 목숨 내놓고 상처를 입었다.
저도 작금의 이런 현실 때문에 입어야할 상처는 무엇인지 생각을 해본다.
나를 치라면서 벤하닷을 치지 않고 죽여야 될 벤하닷을 살려주었으니까 이제 네가 대신 죽으라고 행위예언으로 보여주신다.
39~40절 묻는 말에 대한 아합의 말이 맞고 공정한 것이다.
사단의 주된 업무는 자신의 영혼을 보살피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잘못된 내 행동을 하나라도 오래도록 회개 하여야 하나 영혼을 돌보지 않은 행동 하나는 영벌이기에 그 사람을 지키라고 했는데 이리저리 일을 봤으므로 네가 파멸되는 것이고, 스스로 결정했으니 그대로 당하여야 하리라고 한다.
문제는 이 판결이 자기도 모르게 자기 스스로 정죄하고 형벌을 자기에게 선고한 셈이 되었다.
하나님은 나와 이웃의 구원을 위하여 나의 재능이나 재물을 쓰도록 알맞은 기회를 주시는데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그 기회를 다 버리고 구원과 상관없는 일을 스스로 결정하기 때문에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딤후3:1~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19가지 죄악이 나온다.
결국 이 모든 것은 자기를 사랑하기에 당하는 고통이기 때문에 자기가 스스로 결정한 것이라는 것이다.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고통이 오는데 자기를 사랑하면 기쁨이 아니라 고통이 온다.
그 다음에 돈을 사랑하고 그 다음에는 이제 자랑이나 하고 돈을 사랑하는 것이 고통이고 그러면서 모든 스펙을 쌓아놓았는데 자랑이 고통이라고 한다.
교만도 고통이다. 그래서 비방한다.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않고 거룩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이게 다 고통으로 이어져 가는 거라는 것이다.
결국은 이리저리 일 볼 동안에 내가 지켜야 될 사람이 없어졌다고 했는데 인생이 짧기에 구원 때문에 세월을 아껴야 된다.
41절 벤하닷의 처리를 돌이킬 수 없는 것처럼 아합에 대한 심판도 돌이킬 수 없다는 의미가 있다. 아합도 죽어야 되는 것이다.
42절 아합은 이 같은 행위를 통해 잠깐은 이익을 봤을지 모르지만 벤하닷 대신에 자기가 심판의 자리로 가게 됨. 결국은 사망선고를 받은 것이다.
43절 근심하고 답답한 이 지경이 왔는데도 아합이 회개가 안 된다.
근심하고는 기분이 나쁘고, 노하고 답답하여는 화난, 격분한, 분노조절장애가 있다.
내 삶의 결론이라는 것을 인정해야하는데 선지자의 무서운 형벌의 경고를 듣고도 이렇게 근심하고 답답했다.
그래서 하나님께 나아가기보다 사마리아 궁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나를 위해 도와줄 이세벨을 찾아서 떠난다.
문제해결을 위해 가면 안 될 곳을 우리도 가는 곳은 없을까?
예를 들어 남편과 싸웠다면 시댁으로 피난 가는 게 옳은 것이고 아내와 싸웠다면 장모님 댁으로 가는 게 옳은 것이다.
이럴 때 자기가 좋아하는 친정으로 가면 이세벨에게 가는 것이다.
항상 이세벨은 해결사였기 때문에 이 일도 다 해결해 줄 거야 하면서 그의 왕궁으로 간 것 같다.
과연 21장부터 이세벨은 해결사다.
나봇의 포도원을 다 해결해주고 있다.
육적 해결사가 내 옆에 있으면 하나님께로 가기가 어렵다.
해결사 부모 자녀, 형제, 부하가 있으면 영적 해결을 딱 막는다.
모두가 해결해주는데 내가 think 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
홀로서기 해야 되는데 가진 부모들은 그것이 어렵다.
오늘 간증한 우리 고 집사님은 부자 아버지가 안 돌봐주었기 때문에 주님을 만난 것이다.
아합은 마지만 사형 선고를 받았는데도
똑같이 슬퍼도 거룩한 회개는 하나님이 시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적용)
-지금 당하는 것이 스스로 결정한 나의 결론이라는 것이 인정이 되는가? 아니면 아직도 근심하고 답답한가? 그래서 누구를 찾아가고자 하는가?
<공동체 나눔>
치열한 나눔을 들려드리겠다.
목세(목욕탕 목회 세미나)에 오신 목사님 중에 한 쪽 눈은 실명을 하시고 암 투병까지 하면서 오신 분이 계시다.
이제 큐티 목회를 접목하면서 죄보기 큐티를 하면서 병들이 낫고 형편이 나아진 게 아니라 이제 공황장애까지 왔다. 그런데 적용을 너무 잘하신다. 6년 전에 바지를 백화점에서 샀는데 두벌이 왔다. 생각이 나서 한 벌 값을 가지고 가서 돌려드리려고 하는데 점원이 이전 교회의 청년이었다고 한다. 너무 망설여졌지만 가서 얘기하고 값을 놓고 왔는데 이런 적용을 교회에서 하니까 성도가 죄보라는 얘기 그만하라고 하면서 교회를 떠났다고 했다. 그런데 큐티 목회를 하시는 이유를 물으니 자기가 적용해서 하는 설교는 준비가 훨씬 힘들지만 이전에 설교했던 내용은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는데 자기가 큐티 설교 한 내용은 다 기억이 나더라는 것이다. 말씀이 기억이 나는 거 이것이 치열한 훈련이라고 생각한다. 사모도 첫날 목세 와서 듣다가 가려고 했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큐티가 다른 게 아니라 복음 그 자체이고 십자가의 도라는 것이 깨달아져서 남편과 같이 서로 설득하면서 왔다는 것이다. 저는 이런 교회가 전국에 세워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목세 오신 또 다른 목사님은 자기 딸이 결혼하고 나서 힘들었는데 그냥 우리 교회 부목사님들의 설교를 딸에게 들려주었다. 목사님들도 이렇게 사시는데 네가 힘든 건 당연하다. 이러면서 사돈에게 무릎 꿇고 1시간을 빌고 들어드리고 사위에게 회개를 하셨다는 것이다. 다들 치열한 훈련을 하시며 몸에 익히시는 것 같다. 이런 분들은 그대로 당하라고 해도 아멘 할 것 같다. 내 삶의 결론이니까. 이렇게 치열한 훈련이 몸에 익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가 사건이 오면 그대로 당하고 근심하고 답답해하는 것이다.
다. 말씀 어록
1) 인생의 목적을 모르면 뛰쳐나온다.
2) 가치관이 바뀌면 어떤 배우자와도 살 수 있다.
3) 우리네 인생이 힘들어 보여도 성경은 그것이 삶의 결론이라고 해석해 준다.
4) 남의 일을 판단 요청 받으면서 어떻게 할까? 스스로 결정했으니 그대로 당해야 한다.
5) 내로남불 –무조건 사단을 사로잡지 않으면 사로잡히게 되어있다.
6)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명령형 동사로 ‘너는 가라, 힘을 기르라, 깨달으라, 살피라’고 강력하게 전한다
7) 성도는 사단이 언제 어떤 방법으로 공격을 하든지 막아낼 수 있는 준비를 갖춰야한다.
8) 주님은 자기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빠진 성도를 때에 따라서 보호하시고 도우신다.
9) 자식을 망치려면 돈과 시간을 많이 주라고 한다.
10) 처음에는 그게 좋아 보이니 ‘여기가 좋사오니’라고만 하면서 이제 갈 곳도 모르고 힘도 기르지 않고 깨닫지도 못하면 무엇을 살펴야 하는지도 모르는데 시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결국에는 하는 일 족족 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11) 일당백의 훈련을 쌓기 위해서 가고 싶지 않지만 가야할 내 자리인 학교, 가정, 회사, 군대 등이 있다.
12) 이 세상을 알고 힘을 기르기 위해서 기초체력부터 다져야하고, 그럴 때 힘드니까 어디가 부족한지 깨닫게 되고, 그것이 호시탐탐 치고 들어오는 대적을 살피는 훈련이 된다.
13) 일생의 전쟁은 끝없이 반복되는 것 인데 전쟁의 방법을 묻기만 하면 주님이 일일이 알려주신다.
14)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에도 실 날만한 그 믿음을 보시고 구체적으로 이기도록 처방을 해 주신다
15) 그 하나님 나라 때문에 그 예수의 이름을 전해야 한다.
16) 이 모든 것에 은혜가 아니면 정말 아무도 제대로 설 수가 없다.
17) 우리 인생의 모든 전쟁에서 우리의 총지휘관은 언제나 하나님이심을 성경은 계속 알려준다.
18) 따라서 참된 예배드리는 구조 속에 있는 것이 얼마나 영육간의 실력을 쌓고 지켜주시는 비결인지 모른다.
14) 주님을 모르면 “왜 이렇게 고리타분하게 살아? 아니 큐티는 뭐야? 수요예배는 뭐야?” 한 번 사는 인생 먹고 마시고 마음껏 즐기고 가야지라고 생각하지만 후에 죄의 싹이 너무나 크게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15) 먹고 마시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목적이 무엇인가라는 것이다.
16) 참으로 인생이 죄인이라서 겉으로 보기에 모범생이고 열심히 살았어도 죄 많은 곳에 은혜가 넘친다고 하셨는데 죄를 모르는 사람은 그것이 가장 큰 죄이기에 죄의 기록부는 다 거기서 거기 똑같다.
17) 다만 죄에 대한 체감온도가 좀 다른 것인데 그것을 믿음의 분량이라고 한다.
18)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이 비록 험하고 주변의 대적의 공격이 극심해도 우리 인생의 총지휘관 되시는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치열하게 훈련을 해야 몸이 기억을 한다.
19) 내가 이기고자하나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삶은 첫 단추부터 헛된 노력의 연속일 뿐이다.
20) 하나님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계획과 말과 숨소리까지 다 들으신다.
21)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또 다시 하나님의 능력을 보이심으로 북이스라엘이 회개하고 당신께 돌아올 수 있는 기회를 다시 베푸시겠다는 것이다.
22) 하나님 능력을 보이시는 것은 항상 내가 회개하기 위해서이며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23) 그런데 사람들은 능력을 보이면 다 세상으로 가며 하나님을 떠난다.
24) 회개하라고 은혜를 베푸시는데 회개는 은혜 말고는 답이 없다.
25) 옳고 그름으로 해석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26) 성경은 하나님만이 하셨다는 (기록의) 연속이다
27)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 사단은 파고든다.
28) 문제는 항상 내가 틈을 보였기 때문이다.
29) 잘못된 긍휼로 불신 세상을 형제처럼 사랑하는 것이다.
30) 긍휼과 자비는 성도의 도리이고 미덕이다.
31) 반면 하나님의 공의를 거스르는 잘못된 긍휼은 나쁜 긍휼이고 범죄요 긍휼이 아니다.
32) 정말 세상 사람에게, 또 외인에게, 또 믿는 사람들에게도 회개를 촉구하고 공의로운 심판을 선포하는 것이 죄인을 향한 긍휼이고 자비임을 알아야 한다.
33) 동성애는 죄라고 말해주는 것이 동성애자들을 향한 최고의 사랑인 것을 알겠는가?
34) 누가 비난을 무릅쓰고 동성애가 죄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35) 창세기의 소돔과 고모라에서 얼마나 수많은 죄 때문에 망했는가?
36) 내가 지옥을 경험하면 가지 말라고 외칠 텐데 경험하지 못했으니 지옥이 대수냐고 하면서 죽으면 끝이라고 한다.
37) 지금같이 죄 인줄 알면서 안타까워하면서 가는 것이 정상인데 세력화되는 것이 창세기의 소돔에서 이익집단이 되어 행패를 부리는 것처럼 정말 상상 못할 일이 일어나서 이 동성애를 수면위로 드러내서 마음대로 하도록 합법화하려고 한다.
38) 소돔과 고모라에 유황불이 떨어지는 멸망이 온다고 할 때 농담으로 여겼다고 했는데 우리도 아무리 망한다는 얘기를 들어도 지금 농담으로 여기고 있다.
39)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 제일 어려운 것인데 겸손해야 자기 자신을 안다.
40) 그릇된 긍휼은 하나님께 묻지 않을 때 나온다.
41) 조금이라도 전쟁에서 지는 것 같으면 하나님께 묻다가 이기기만 하면 자기 생각이 나온다.
42) 잘 사는 게 꼭 축복이 아니다.
43) 힘들 때는 공동체에 나오다가 조금 되면 안 나온다.
44) 자기 죄가 안 보이는 사람은 공의와 그릇된 긍휼을 구별하지 못한다.
45) 말씀은 반드시 인간이 이해하도록 주어지는 것이 아니며 무조건 가부를 선택할 수 있도록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46) 나는 이해가 안 되도 하나님이 100% 옳으시기 때문에 무조건 들어야 하는 것이 말씀의 명령이다.
47) 우리가 못 듣는 이유는 세상과 죄악과의 타협 때문에 이해가 안 되는 것이다.
48) 내가 인본적으로 세상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이 이해가 안 된다.
49) 고난이 가장 말씀을 잘 전하는 통로가 되는 것이다.
50) 사단의 주된 업무는 자신의 영혼을 보살피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51) 잘못된 내 행동을 하나라도 오래도록 회개 하여야 하나 영혼을 돌보지 않은 행동 하나는 영벌이기에 그 사람을 지키라고 했는데 이리저리 일을 봤으므로 네가 파멸되는 것이고, 스스로 결정했으니 그대로 당하여야 하리라고 한다.
52) 하나님은 나와 이웃의 구원을 위하여 나의 재능이나 재물을 쓰도록 알맞은 기회를 주시는데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그 기회를 다 버리고 구원과 상관없는 일을 스스로 결정하기 때문에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53)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19가지 죄악이 나온다.(딤후 3:1)
54) 결국 이 모든 것은 자기를 사랑하기에 당하는 고통이기 때문에 자기가 스스로 결정한 것이라는 것이다.
55)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고통이 오는데 자기를 사랑하면 기쁨이 아니라 고통이 온다.
56) 그 다음에 돈을 사랑하고 그 다음에는 이제 자랑이나 하고 돈을 사랑하는 것이 고통이고 그러면서 모든 스펙을 쌓아놓았는데 자랑이 고통이라고 한다.
57) 교만도 고통이라서 비방한다.
58)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않고 거룩치 아니하며 무정하며 이게 다 고통으로 이어져 가는 거라는 것이다.
59) (결국은 이리저리 일 볼 동안에 내가 지켜야 될 사람이 없어졌다고 했는데) 인생이 짧기에 구원 때문에 세월을 아껴야 된다.
60) 근심하고는 기분이 나쁘고, 노하고 답답하여 화나고 격분하는 것이 분노조절장애이다.
61) 육적 해결사가 내 옆에 있으면 하나님께로 가기가 어렵다.
62) 해결사 부모 자녀, 형제, 부하가 있으면 영적 해결을 딱 막는다.
63) 모두가 해결해주는데 내가 think 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
64) 홀로서기 해야 되는데 가진 부모들은 그것이 어렵다.
65) 똑같이 슬퍼도 거룩한 회개는 하나님이 시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라. Epilogue
(1) 현재의 상황이 바로 내 삶의 결론이니까 이렇게 치열한 훈련이 몸에 익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사건이 오면 그대로 당하고 근심하고 답답해하는 것이다.
(2) 공의로운 심판의 선포는 죄인을 향한 긍휼이고 자비임을 알아야 한다.
(3) 따라서 동성애가 죄라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 긍휼이고 자비인 것이다
(4) 공의 와 그릇된 긍휼을 구별 못하기 때문에 혐오감이 들다가 무뎌지게 되는 것이다
(5) 내가 지옥을 경험하면 가지 말라고 하지만 지옥을 경험하지 못하면 지옥이 대수냐고 한다.
(6) 겸손해야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인데 그릇된 긍휼은 하나님께 묻지 않을 때 나온다.
(7) 교만하면 묻지 않게 되고 자신의 판단으로 조약을 맺고 사단을 놓아주게 된다.
(8) 아합은 하나님나라 전쟁규칙에 따라 사단세력을 진멸해야 하는데 살려줌으로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리며 세상이권과 바꾸어 물 건너 생명줄을 던지는 것이다.
(9)구속사적으로 보면 아합같은 지도자가 하나님과의 약속을 만홀히 여김으로 우리를 힘 빠지게 하는 것인데 마치 차별금지법에 서명한 것과 같은 것으로 유대인 학살법이나 기독교 말살법에 서명하는 것과 흡사하다
(10) 이웃 구원을 위한 알맞은 기회를 주시는데 스스로 판단하니 망하는 것이다
(11) 이세벨 같은 육적 해결사가 있으면 홀로서기가 힘들다.
(12) 지금 당하는 사건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분별해야 한다.
(13) 내 속의 아합이 회개를 안 하니 내 옆의 아합도 회개를 안 하는 것이다.
마. 최종결론
-말씀이 기억나는 것이 치열한 훈련의 결과이며 치열한 훈련이 몸에 익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사건이 오면 그대로 당하고 근심하고 답답해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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