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외교현장이야기실록66편(북한 스포츠 계 인사들과의 교류)]
“Blood is thicker than water"(피는 물보다 진하다).
이 말은 2001년 6월 당시 IOC 위원장후보였던 김운용 KOC 위원장 겸 IOC 부위원장, 최재승 전 국회 문광위원장, 이금홍 세계태권도연맹 사무총장 그리고 필자가 북한 평양 방문 시 장웅 북한
IOC 위원이 IOC 위원장선거에서 김운용 후보가 피선되도록 적극 돕겠다는 뜻을 함축해서
표현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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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hens2004올림픽 당시 북한 장웅 IOC위원과 함께)
장웅 위원의 의지는 IOC 위원장선거뿐만 아니라 2010-2014-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유치운동과정에서도 또 확인되었다.
장웅 IOC 위원은 1950년대부터 10여 년간 북한 농구(북한식 발음은 “롱구”)대표선수생활을 하였고, 평양체육대학을 거쳐 평양시 체육구락부 코치를
하다 체육지도위원으로 발탁이 된 후, 북한 올림픽위원회 서기장(사무총장)을 역임하다가 당시 김유순 북한IOC 위원의 사망 후 1996년 미국 애틀랜타올림픽대회 시 개최된 제105차 IOC 총회에서 한국의 이건희 삼성그룹회장과 함께 개인자격 IOC 위원으로
피선되어 활동 후 2018년 말 80세 정년으로 현역 IOC위원에서 은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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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로부터 리용선
현 ITF총재, 장웅 북한 IOC위원 겸 당시 ITF총재, 필자)
후임으로는 북한 체육상을 지낸 김일국이 거론되다가 경질되면서 지금은 리용선 국제태권도연맹(ITF)총재로
주가를 높이고 있는 리용선이 회자되고 있는 상황이지만 2018년 말 이래 2020년까지 북한 IOC위원은 공석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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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hnes2004올림픽 당시 아테네 시내 한국식당에서 한판 승의 사나이 이원희 선수<가운데>와 리용선 당시 ITF사무차장<우측/현재 ITF총재>와
함께)
장웅 IOC 위원에 의하면, “스포츠가 다른 건
앞서가는데 사람관계만은 보수적이고 폐쇄적이어서 진정으로 서로 아는데 10년이 넘게 걸린다” 고 하면서
“남쪽이나 북쪽이나 국제 스포츠 계의 오랜 세월 동안 인맥에 정통한 사람들을 앞장세워 외교를 지속적으로 추진하는 길만이 국제 스포츠계에서 손해
보지 않고 자기 밥을 찾아 먹는 길” 이라고 힘주어 강조한다.
아테네 올림픽대회 기간 중 필자와 친분이 두터운 장웅 IOC 위원과 단독 면담을 요청하는 한국
취재기자 및 방송사가 많았다. IOC 본부 호텔인 아테네 힐튼호텔은 그곳 투숙객만이 출입이 허용된다. 비록 VIP급 올림픽 ID 카드소지자라고
해도 출입 코드(Access code)가 부여되지 않았다면 호텔입구부터 에스코트(escort)를 받은 후 보안검색을 거쳐 신분증 대조 및 서명날인 후 임시 출입카드를 발급받은 후에야 비로소
호텔로비에 진입할 수 있었다. 특히 호텔 11층에 위치한 IOC Family라운지에는 IOC 위원, 가족 및 IOC 특별 게스트(distinguish
guest)만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출입이 엄격히 제한되므로, 대회기간 중 이곳 11층 라운지를 출입한 사람들은 일종의 특권층(?)이라고 할 정도였다. 마침 11층 IOC 위원
라운지 관계자들과 친분을 두텁게 한 덕에 필자는 필자 자신(IOC 특별 게스트)은 물론이고 기자들까지도 동반하여 무료 음료 및 간식도 항시 마시고 먹을 수 있었다. 중앙일보 스포츠 부 성백유 차장(평창2018조직위원회 대변인 역임)과 조선일보 강호철 기자(현 스포츠부장)도 필자의 안내로 이곳 라운지에서 장웅 IOC위원과 각각 단독 취재를 하였고, YTN TV도 장웅 IOC 위원과 단독 인터뷰를 하여 YTN 인터뷰기자가 특종 상을 받았다고
한다.
필자는 제7차 EAGA(동아시아대회 협의회) 총회 한국 회의대표자격으로 박상하 대구 U대회 집행위원장 및 이강평
전 KOC 사무총장과 함께 1993년10월20일 첫 번째 평양을 방문하였고, 2001년 6월 2차
방문을 포함하여, 2002년 부산 아시아경기대회 남북한선수단 개·폐회식 공동 입장에 따른 실무회의대표자격으로
금강산에서 3차례 북한 올림픽 위원회의 故 조상남 서기장 등과 회동을 갖은 바 있고, 1982년 뉴델리 아시아 경기대회때부터 24년간 각종국제대회, 올림픽대회, 국제회의시마다 많은 북한 스포츠 관계자들과 만나 지속적이고
끈끈한 인간관계를 형성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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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북한 평양 방문 시 인민 궁전 정문 앞에서/좌로부터 이금홍 QTF사무총장,, 김운용 IOC부위원장
겸 WTF총재 겸 KOC위원장, 장웅 북한 IOC위원, 북한
여성 2명, 최재승 국회 문광위원장, 필자)
지금은 고인이 된 김유순 북한 올림픽위원회 위원장 겸 국가체육위원회 위원장(체육장관 겸 북한 IOC 위원)은 IOC 측과의
연석 회담 시 북 측을 대표한 인물로서 과묵한 편이었다. 뒤를 이어 박명철 북한 NOC 위원장(체육장관겸임) 겸 IOC 위원은 다소 활달한 편으로 고 역도산의 사위이고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는 김일성 대학 동기동창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 역사적 평양 방문 시 평양 순안 비행장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마중 나와 김 전대통령과 포옹할
때 바로 뒤에 서 있기도 했다. TV등 방송매체에서는 박명철 IOC 위원의
얼굴을 모르던 터라, 엉뚱한 사람으로 오인하여 설명하기도 했다.
장웅 IOC 위원이 북한 NOC 서기장직에서 제1부위원장으로 승격된 후, 그 바통을 이어받은 사람은 류성일 서기장이다. 류 서기장은 본래 축구인으로서 축구 관계 일을 보다가 발탁된 케이스다. 영어도
잘하고, 농담도 좋아해서 필자와는 1998년 5월 30일부터 6월 7일까지 스페인 Sevilla에서 개최된 제11차 국가올림픽위원회 총 연합회(ANOC: Association of
National Olympic Committees)총회에서 각각 남북한 NOC 회의 대표로
만나, 세비야 인근 중국식당에서 고량주를 통음하면서 친해졌다. 유머와
농담을 즐겨했고, 배짱과 소신도 투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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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dney2000올림픽에서 남북한선수단 공동입장을 위해 다시 만난 류성일 북한 NOC서기장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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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방콕 아시안게임 양궁경기장에서 함께 한 류성일 북한 NOC서기장<사무총장/우측>과
함께)
필자는 북한 스포츠관계자들과의 만남에서 결코, 사상이나 이념,
정치 등 민감한 내용은 입에 올리지도 않았고 서로 부담이 없는, 스포츠관계일이나 신변잡기
등을 주제로 교분을 다져 온 관계로, 북한 스포츠계에서 필자는 여러 개 외국어가 능통하고 국제 흐름에
정통한 국제 스포츠 계 마당발로 평이 좋은 편이라고 한다.
류 서기장은 정몽준 대한 축구협회장이 아시아 축구연맹(AFC: Asian Football
Confederation) 총회에서 쿠웨이트의 Sheikh Ahmad Al-Fahad
Al-Sabah: 현 OCA 회장)와 격돌한
국제축구연맹(FIFA) 부회장 최종결정투표 시에도 “피는 물보다 진하다” 라는 원칙을 지킨 것으로 알려졌다.
류 서기장의 뒤를 이은 인물은 故 조상남 서기장으로 1959년(돼지띠) 평안북도 철산리 태생으로 필자보다는 3년 연하이며 2003년 5월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Rio de Janeiro)개최 제12차 ANOC 총회 시부터 교분을 맺어왔다.
故 조 서기장도 영어 잘하고 활달하고, 소신과 철학이 뚜렷하고, 논리 정연하여 토론에도 능했지만 의리 파이며 다정다감하기도 했다. 필자(1956년 원숭이 띠)와는 나이 연배를 따져 형님, 동생 사이로 지내기로 약속하기도 했다. 2002년 부산 아시아 경기대회
참가 남북한 선수단이 개·폐회식 공동 행진(Joint parade)과 관련 금강산에서 3차에 걸친 실무대표 회의 때 필자는 낮에는 남측 3인 실무대표의
일원에 불과했지만, 저녁 만찬 테이블에선 수석대표(?)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회의석상에서는 양측 주장으로 열띤 대화가 됐지만 막상 만찬석상에서는 서로
서먹서먹한 사이라서 필자가 총대를 메고 분위기 메이커 겸 이런저런 화제를 꺼내고 허심탄회한 만남의 장을 연출해 보기도 했다. 故 조 서기장 고향이 평북 철산리 바닷가라서, 필자가 “부산 아시안게임기간
중에 다시 만나면 형님으로서 뭘 사주고 싶은데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날래 말하라우” 라고 이북 사투리로 묻자, 故
조 서기장은 “기라면 이왕이면 털게가 먹고 싶긴 한데, 귀하단 말씀이야, 가능 하갔소?”라고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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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남 북한
NOC서기장<사무총장>과
박명철 북한 NOC위원장 겸 북한체육지도위원회 위원장<체육상>과 함께/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당시)
부산2002 아시안게임 기간 중, 부산 롯데호텔에서
오찬을 겸한 남북한 NOC협의회의 시작 전에 필자는 평소에 친분이 두터웠던 박명철 북측 NOC위원장에게 지난날 금강산 회담 시 이야기를 상기시키면서, 털게를
대접해도 되겠냐고 예의를 차렸고, 박 위원장도 “거저 조 서기장 먹고 싶은 거라면 먹어야 되지 않갔어?”라고 장단을 맞추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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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의 물밑
남북스포츠외교 교섭으로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기간 중 역사상 최초로 성사시킨 남북한 NOC간 스포츠교류협정 체결로 언론에선 ‘스포츠 통일’초안 만들었다고 대서특필하기도 하였다)
그 후에도 국제회의 시 여러 번 만났고 필자가 2004년초 대한체육회/대한올림픽위원회를 명예퇴직(국제담당사무차장1급)한 후 필자 걱정도 많이 해주고 인간적이고 훈훈하고 자상하게 대해주었던
조상남 북한 NOC서기장은 그 후 후배에게 서기장 자리를 물려주고 부위원장직을 맡을 참이었다.
2004년 2월 그리스 아테네 개최 제14차 ANOC 총회가 끝나가는 무렵, “공석이 될 서기장 후보를 이제야
찾았다”고 말하면서 환하게 웃던 모습이 엊그제 같은데, 2004년 말 연합뉴스를 통해 심장마비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필자는 친동생이상의 가족 중 한 명이 죽은 것 같은 아찔함과 인생의 무상함을 함께 느꼈다. 그렇게
졸지에 세상을 하직한 故 조상남 서기장 영전에 생전에 좋아했던 「털게」를 바치고 싶다.
故 조상남 서기장 뒤를 이은「서기장 직무대리」는 북한 NOC 사무처에서 영어를 제일 잘하는
문시성 군이었다. 필자에게 깍듯이 형님 호칭을 빼먹지 않는 문 신임 서기장 직무대리는 연배는 어린 편(2004년 당시 40대 초반으로
2020년 50대 중 후반으로 추정)이지만, 각종 국제스포츠회의나, 올림픽대회 등에서 통역도 잘하고, 예의 바르지만, 할 말은 매섭게 해대는 북한 스포츠 계 차세대 국제
통으로 알려진 바 있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대회 기간 중 박명철 위원장의 뒤를 이은 문재덕 신임 북한 NOC 위원장과 IOC 본부호텔에서 만나 위원장 및 서기장 취임 축하 인사도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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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hens2004올림픽 IOC 본부호텔 Hilton호텔로비에서 좌로부터
문재덕 북한 NOC위원장, 필자, 문시성 북한 NOC서기장)
필자가 서울올림픽대회 직후인 1988년 11월 소련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IOC올림픽 솔리다리티(Olympic
Solidarity)국제 세미나에 당시 하춘웅 운영부장과 심용택국제팀장(현재 명예퇴직 후
미국 애틀랜타 거주)과 함께 한국대표로 당시 공산세력의 심장부인 소련,
모스크바에서 개최되는 회의에 참석하였다. 북한 측 회의대표들은 마치 자기 집 앞마당(Home Ground Front Yard)인양, 기세 등등한 분위기였다.
필자가 세미나에서 한국대표자격으로 많은 질문 공세와 의견개진을 많이 하였다.
회의 제2일째인 11월 13일 오후 회의 중간 coffee break시간에 북한 측 수석대표자격인
리혜경 북한체육위원회 국제 국장과 마주쳤다. 필자를 보자마자 “윤강로 맞디? 회의에서 보니끼니 국제적으로 쓸모가 많갔어! 내래 통일되면 한자리
주갔어!”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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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에서 해후한
리혜경 북한 NOC국제국장과 함께)
그 당시만 해도 동서 진영이 첨예하게 대립되어 있고, 남북한간의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는 국제정세에서, “통일되면 한자리 주갔어!”라는
말을 듣자 필자는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길 가능성이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내심 걱정이 앞섰다. 그러나
명색이 대한민국 회의대표인데 주눅만 들고 있을 수 없어서, 필자는 이렇게 맞받아쳤다. “거져, 남남북녀라고들 하는데, 예쁜
북쪽 처녀 아가씨래 있으면 소개해 주시라요”하고 너스레를 떨었다.
필자는 사실 그때까지 임자(?)없는 노총각 신세였기 때문에,
반은 진심이었다. 그러자 다짜고짜 리혜경 북한대표는 이렇게 쏘아붙이는 것이 아닌가? “거저 보니끼니, 벌써 아새끼래 여럿 깠깠구먼 와그러네?” 그때까지 순진무구(?)(native and pure in heart)했던
필자는 당황했지만 솔직하게 다시 항변했다. “진짜로 총각이니끼니 기딴소리하지 마시라요!” 회의가 끝나가는 마지막 날 리혜경 대표는 헤어지면서 필자 보고 “거저, 너무
게리지 말고 참한 샥시 골라서 날래 장가 들라우.” 라고 말했는데 진심 어린 말 같았다.
그 후, 국제회의나 올림픽대회. 아시안게임 등 국제
스포츠행사 때마다 당시 북한 김유순 IOC 위원을 수행하여 통역도 하고 회의 참석도 할 때마다 마주치게
되었고 필자보다 연배가 많은 관계로 깍듯이 「누님」호칭을 붙이게 되고, 서로 안부도 묻고, 연인 사이가 아닌 「남남북녀」가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남남북녀」란 용어는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대회 시 우리 역사에 길이 남는 최초의
남북한 선수단 공동행진에서 「남녀북남」으로 용어가 바뀌어 한반도기를 함께 맞잡아 든 남측 선수단 기수는 여자 선수(정은순; 농구선수), 북측
선수단 기수는 남자 감독(박정철; 유술/유도)이 맡아 전세계로부터 격려와 찬사를 받으면서 시드니올림픽대회
최고의 하이라이트(Highlight)로 조명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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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dney2000올림픽 개회식에서 남북한 선수단 공동입장 직전에 리혜경 국장<우-2>와 신기문 한국선수단 물리치료사<좌-1>, 동료 물리치료사<좌-2>와 필자<우-1>)
1982년 11월2일부터
12월6일까지 인도, 뉴델리에서 개최된 제9회 아시아 경기대회는 필자가 KOC(Korean Olympic
Committee) 국제 과에 특채되어 참가한 처녀 국제 경험이었다. 필자는 당시 김집
부회장(체육부장관역임), 오진학 훈련과장등과 함께 한국선수단
선발대로서 대한항공(KAL)을 타고 난생처음 공중부양(Soaring
up to the sky)을 경험하게 되었다. 대회 조직위 관계자들과의 업무 회의를 무사히
마치고, 한국선수단 본단이 선수촌에 입촌하게 되어, 아시아 43개국 선수단과 함께 본격적인 선수촌 동거 생활이 시작되었다. 잠은
각각 배정된 숙소에서 자지만, 하루 세 끼 음식은 선수촌 식당에서 같이 하게 되어 있었다. 난생처음 보는 아시아각국의 인종들, 음식도 다양 하였지만, 한국음식은 전무한 상태, 인도 특유의 독특하고 매콤한 카레 향이
식당 분위기를 압도하였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더니 음식도 입에 안 맞고, 시차적응도 그리 순조롭지도 못하고 물 상태는 최악이었다. 매일 목욕을
하고 나면 욕조 표면에 머리카락이 둥실둥실 많이도 떠다녔다. 이러다가 혹시 대머리가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염려를 하면서 매번 목욕을 마쳤다. 난생 처음 보는 북한선수임원들, 이들을 처음 보는 순간 필자는 자칫 이들에게 우리말이 아닌 영어로 대화를 걸 뻔했다. 다행히도 그러지는 않았다. 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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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1984올림픽 한국선수단 시절 좌로부터 김집 부단장<추후 태릉훈련원장 및 체육부장관 역임>, 필자, 김성집 태릉선수촌장 겸 한국선수단장>
북한의 나이 어리고 자그마한 체조선수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선수촌 식당 식대에 줄을 서게 되어 말을 걸었으나, 그때만 해도 남북한 이념 갈등이 아주 심각하여 한민족이지만 「가까이할 수 없는 당신들」인 상황이어서 그런지, 그냥 얼굴만 쳐다보니까 도망치듯 다른 곳으로 빠져나갔다. 그래도
나이가 지긋한 북한선수단의 보장성원(임원)들은 다소 여유를
보이면서 오히려 필자에게 말을 걸어왔다. “선수 같지는 않고, 남조선
감시 공작원 같구만”.
필자도 본능적으로 대꾸했다. “같은 입장 같구만요. 앞으로
잘 해보시자구요”. 한마디 더 물었다. “여기 음식은 입에
맞습니까?”.
퉁명스러운 대답이 기다린 듯 튀어나왔다. “조선사람 입이야 다 똑같갔디!”
선수촌에 있는 아시아 각국 선수단 본부를 방문하여 故 김종열 단장(대한체육회장역임)이 한국 선수단의 선물을 전달하였다. 몽골 선수단 본부에 들어선 필자는
정말로 깜짝 놀랐다. 그곳에 앉아있던 사람들의 모습은 한국 사람들보다도 더 한국 사람들 같은 원조 한국인들의
인상이었다. 영어가 나오려다 멈칫한 순간이었다. 그들도 김치를
잘 먹는단다.
북한의 체육계 인사들 중 라복만 선생은 농구선수출신으로서 장웅 IOC 위원처럼 키도 훤칠하게
크고, 술도 두주불사(drink like a fish)형으로
북한스포츠계의 대표급 주당(drinking Champion)으로 명성(?)을
두루두루 떨친 분이며 도량이 크고, 낙천적이고, 적이 없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가끔 술을 너무 많이 마시다 보면 실수 아닌 실수도 하기 마련, 대한민국 농구 계의 원로이시며 대모(God mother)인 故 윤덕주
고문께서는 라복만 선생과의 일화를 이렇게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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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에서 라복만
북한 농구 임원 겸 태권도 전당 임원과 함께)
“라복만이가 국제 대회 때 만나서 술을 먹고는 나보고 누님, 누님 하면서 예의 없이 굴길래
크게 꾸짖어 주었더니 그 다음부터는 정신을 차리고 예의 바르게 행동하더구만. 그 친구 그래도 농구 인이고
많이 도와주고 싶고 정이 가는 사람이야”
그 후, 국제행사에서 라복만 선생 만나면 故 윤덕주 회장께 안부 전해 드리고 고맙다고 정중하게
인사 꼭 전해달라고 부탁하곤 해서 필자는 연인이 아닌「남여북남」농구인 사이의 메신저 역할도 하곤 했다.
지난 2001년 6월 평양 방문 시 남측의 태릉선수촌에
해당하는 평양시 청춘거리에 있는 북한 국가대표 선수훈련센터를 방문하여 체육시설과 북한 선수들의 훈련모습을 지켜보았다. 마지막 순서로 북한이 자랑하는 태권도의 전당을 방문하여 같은 뿌리의 태권도 시범 모습을 지켜보았다. 실전에 입각한 공격과 무차별한 격파 시범이 주를 이루었다.
뒤늦게 시범 장에 나타난 인물은 바로 그 유명한 라복만 선생이었다. 한동안 활동을 하지 않고
국제무대에도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는데, 웬일일까 하고 물어보니, 농구관계는
그만두고 태권도 전당의 서기장(사무총장)직을 맡아보고 있다고
하면서, 필자의 두 손을 꼭 잡고 반가움을 표했다.
북한 국가 체육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아 오다가 2000년대 들어서 조선태권도련맹 위원장 직의
책임을 맡은 황봉용 위원장은 작년에 남북 태권도 시범단 교환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북측 시범 단을 인솔하고 서울에 와서 쉐라톤 워커힐 호텔에서 열린
공식 만찬 시 만난 바 있는데 소탈한 성격의 소유자이지만 논리정연하고 책임의식이 투철했다. 장선강 북한
국가체육위원회 부위원장, 렴윤희 북한 대학생 체육협회서기장, 정순원
전 북한 올림픽 위원회 서기, 리학무 서기, 리민호 서기, 고철호 서기 등이 북한의 국제 스포츠 관계를 함께 담당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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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태권도시범단장으로
서울 세라톤 워커힐을 찾았던 황봉용<좌1>, 문시성<우-2>과 함께)
필자는 국제 스포츠관련행사 관계로 해외 출장을 갈 때면 기존 선물이나 기념품 외에 언제나 준비해가는 우리 고유의 음식이 있다. 먼저 골뱅이 통조림, 죽방이라 불리는 마른 멸치, 마른 오징어 등을 동네 슈퍼 등에서 미리 구입하고, 공항상점에서
진공 포장된 김치 2종류, 팩 소주 10~20개 그리고 기내에서 제공받는 치약 용기 형태의 고추장 등이다.
이상하게도, 해외에 나와서 시차 적응과 컨디션(physical
condition)을 적절히 조절하려면 우리 음식만큼의 특효약(a wonder drug)은
어디고 없는 듯하다. 그러나 이 모든 준비된 우리 음식물을 필자가 먹으려고 구입한 것이 아님을 주목해
주시기 바란다.
일단 해외 현지에 도착해서, 며칠 지나면(그때까지는
호텔 객실 내 냉장고 공간에 기술적으로 보관하는 것이 필수) 북한 스포츠 계 인사들도 한민족인지라 슬슬
우리 음식이 땡기기 시작하게 되고 「불감청고소원/不敢請固所願」이라, 원하지만
감히 청하지 못하는 우리 고유의 체면치레(face-saving matter)라고나 할까?
바쁜 회의 일정, 오·만찬 행사일정 등에 쫓기다 보면 한식 구경은커녕 현지 음식에 질리기 십상이다
보니, 홀아비 사정은 과부가 더 잘 아는 법, 이때 북측인사
객실번호 알아내어 객실에 보관 중이던 「비장의 음식」을 슬쩍 벨 보이(Bell boy)를 통해 전달해
놓으면, 백발백중(Every shot told) 그 날 중에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잘 먹었시다.”라고 감사의 인사가 필자에게 건네진다. 어찌 보면, 인간의 3대
필수요소 중 의식주(영어로는 식의주; food, clothing,
and shelter)중 으뜸은 뭐니뭐니 해도 먹는 것이다. 오죽하면 '잘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곱다'라는 말이 나오랴.
故 정주영 회장이 대한체육회회장 시절 필자가 통역해 드릴 때 가끔 말씀하시던 말을 새겨들어서 그런지 몰라도 음식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법이다. "식보가 제일 일세, 윤군!". 이 말은 음식이 보약이란 뜻으로 음식을 제때 잘 가려 먹으면 보약이 따로 필요 없다는 故 정주영
회장의 지론이기도 했다.
음식을 함께 입으로 먹는 사람들이 식구(食口)아닌가? 필자는 국제회의 등에서 적시에 좋은 발언과 제안 등을 많이 해서 북쪽사람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지만, 음식으로 서로 배려해 주는 우리 민족 고유의 먹거리로 통하는 ‘정’(Friendly
Feeling of Congenial Spirits)도 남북한의 친목 도모에 크게 한 몫 했으리라 믿는다.
북한에서 통용되는 우리말은 어찌 보면 말 표현이 행동 자체를 연상시키게끔 함축 시킨 듯한 느낌이 든다.
다음은 필자가 지난 아테네 올림픽 대회 기간 중 장웅 IOC 위원과 동행하면서 메모했던
몇 가지 북한 식 우리말표현이다.
「발길질해야 되갔어!」 = 혼 좀 내야 되겠어!
「똥내난다」 = (뭔가 수상쩍은)냄새나는구만!
「수표하라!」 = 서명하라!
「수표하고 리행 해야 되지 않갔어?」 = 서명했으면
이행해야지
「그렇게 말하면 동요된단 말이야」 = 그렇게 말하면 망설여진다
「생기는 대로 먹고 닥치는 대로 해치우는거다」 = 부딪치는대로 해결해야겠지
「배꼽이 뚝 튀져나와도록 먹자꾸나」 = 허리띠 풀고 실컷 먹자
「발킁내 나도록 돌아다녔어」 = 이리저리 한참 돌아다녔어
「절구통에 치마만 씌워나도....」 = 치마만 두르면....
「야들시」 = 여덟시
「(술잔 받으면서) 일 잘 하갔습네다!」 = 건배! 위하여!
「요란하구나」 = 대단하구나
「일없소!」 = 괜찮소!
「시집올때 웅성웅성 했다고 그래」 = 시집올때 말이 많았다지?
「꼬득이지 말라우」 = 꼬시지 말라구
「정 붙었구만」 = 친해졌군
「기러다 간판 맞는다」 = 그러다가 얼굴에 한방 맞는다
「구두식사 많이 했시다」 = 식사 제의만 여러 번 받고 실제로 식사한적은 없다
「입 꽉 다물라. 기리치 않으면 양쪽에서 총 맞는다」 = 말
옮기면 양쪽에서 비난받음
「북쪽에서 큰 물난리 났을 때...」 = 북쪽에서
홍수 났을 때...
「골짜기가 깊어야 물이 고인다」 = 그릇이 커야 사람이 모인다
「백 번 물으면 백 번 웃으며 대답하자.」 = 항상
변함없이 성의 있게 대하라
「백 번 주문하면 백 번 웃으며 봉사하자」 = 항상 변함없이 즐겁게 일하자
「믿음은 충신을 낳고 의심은 배신을 낳는다」 =(그네들 장군님 어록을 인용하면서)믿고 대해야 신뢰하게 된다.」
「相好 不如 身好, 身好不如心好」 = 얼굴 좋은
것은 신체 좋은 것만 같지않고, 신체 좋은 것은 심성 좋은 것만 같지않다」
「60이 넘으면 죽음이 눈썹 위에 있고, 내려오면
눈감는다」 = 60세가 넘으면 죽음이 가까워졌다는 것을 알고 대비하라는 뜻」
「늙으면 앉고 싶고 앉으면 일어나기 싫고 앉아 있으면 꾸벅꾸벅 졸고, 누우면 눈이 말똥해진다」 = 이북에서 나이 들면 생기는 현상을 표현한 말」
「남정네 아랫도리에 좋습네다」 = 정력에 좋다
「들박이」 = 들뱀
「탁배기」 = 탁주, 막걸리
「두꺼비 한 마리 있네?」 = (진로)소주 한 병 있소?
「연애 질하는 이야기」 = 스캔들
「구석차기」 = 코너 킥
「물 속 뛰어들기」 = 다이빙
「보장성원」 = 지원임원
「일꾼」 = 요원
「사업 수첩」 = 업무일지
「어름 뽀숭이」 = 아이스크림
「심장에 남는 사람」 = 인상 깊은 사람
「오네월 개 헤떼기다」 = 오뉴월 개 혓바닥처럼 축 처졌다
「악질적으로 다니누만」 = 끈질기게/독하게 다니는구먼
「대상하기 힘들다」 = 상대하기 어렵다
「간단티 않아」 = 쉽지 않아
「돼지 발족」 = 돼지 족발
「날래 조지라!」 = 빨리 달려라!
「연대성(solidarity)」 = 단결
「용서 없는 시간의 흐름」 = 사정없이 흐르는 시간
「곡절 많고 각이한」 = 사연 많고 여러 가지 각각 다른
「대인 예술」 = 대인관계 기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