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외교2020. 7. 27. 09:23

[스포츠외교현장이야기실록75(7Samaranch IOC위원장과의 필연적 만남과 OST<Our Story Telling>)]


 

필자가 국제스포츠 계에 입문하여 활동을 시작한 1982년도 보다 2년 앞선 Moscow1980 올림픽대회 개회식에 앞서 열린 IOC총회에서 스페인외교관출신 Juan Antonio Samaranch가 제7IOC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제8IOC위원장인 Jacques Rogge(2001~2013) 및 제9대 현 IOC위원장인 Thomas Bach(2013~2025)과 이어진 인연과 만남도 필자의 스포츠외교인생을 필연적으로 함께 장식해 주고 있다. 먼저 Samaranch IOC위원장과의 세월로 가본다

Samaranch IOC위원장 선출 1년 뒤인 1981930일 서독 Baden-Baden개최 IOC총회에서 일본의 Nagoya1988년 올림픽유치경쟁에서 서울이 52:27로 승리하였을 때 불어로 쎄울을 연호하면서 전세계 스포츠 계에 대한민국 서울을 각인시켜 주었다.

 

(Baden-Baden IOC총회에서 1988년 올림픽개최도시로 쎼울을 발표하고 있는 Samaranch IOC위원장)

 

(1983년 첫 방한 이래 1990Barcelona개최 ANOC총회 리셉션 장에서 다시 만나 첫 번째 사진을 장식했다)

 

그는 1920년 출생으로 필자와 띠 동갑이었다.

그는 Munich1972-Montreal1976-Moscow1980올림픽의 침체기를 21년 재임기간 동안(1980~2001)기회로 바꾸어 위기의 올림픽을 황금알 낳는 올림픽으로 연속해서 탈바꿈 시킨 불세출의 지도자였다.

그는 또한 당시 소련을 위시한 공산권에서 서울1988올림픽개최지 변경 등을 획책하며 대한민국을 왕따 시키려고 획책하며 글로벌위기를 조장한 서울1988올림픽을 20세기 최고의 올림픽이 되도록 적극 지원하고 보호하였다.

그가 1983년 고 김택수 IOC위원에게 올림픽훈장 추서 차 처음 방한 하였을 때 서울 중구 무교동 체육회관 9KOC위원장 실에서 당시 정주영KOC위원장과의 통역과 올림픽훈장추서식 불어 사회를 보면서 그와의 인연이 시작된 셈이다.

 

 

(故 김택수 IOC위원 올림픽훈장 추서식에서 불어로 사회를 보고 있는 필자)

 

(좌로부터 이영호 체육부차관<옆 모습 이후 체육부장관>, 노태우 SLOOC위원장, Samaranch IOC위원장, 통역 중인 필자, 정주영 KOC위원장)

 

(1983Samaranch IOC위원장의 KOC방문 시 당시 OCA초대회장인 Sheikh Fahad를 포함하여 국내 스포츠 기관장들이 총 운집하였다/가운데 좌로부터Samaranch IOC위원장, 필자, 정주영KOC위원장<뒷모습>, 이원경체육부장관, 조상호 SLOOC사무총장, 김세원 KOC부위원장, 김집 대한체육회부회장, Sharah Chandra Shah 네팔 NOC위원장, Sheikh Fahad OCA초대회장 겸 쿠웨이트 IOC위원, Alain Coupat IOC위원장 비서실장, 이상찬 유도대 학장, 이영호 체육부차관<이후 체육부장관>, 노태우 SLOOC위원장<초대 체육부장관과 내무부장관 및 대통령 역임>)

 

이를 시작으로 그는 서울에만 40여 차례 방문할 정도로 서울1988올림픽성공개최를 위한 열정과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가 방한한 주요대목에서 필자가 그를 그림자처럼 수행하며 통역으로 섬겼다.


(방한 후 당시 김포 국제공항 귀빈실에서 이한 기자회견 중인 Samaranch IOC위원장과 통역 중인 필자)

 

그는 아직 재임 중인 Thomas Bach 9대 현 IOC위원장(2013~2025)을 제외하고 아직까지 IOC사상 최고의 전설적인 IOC위원장으로 평가 받고 있다.

 

Samaranch IOC위원장과의 끈끈하고 의미심장한 인연과 만남은 김운용 IOC부위원장이 전수해 준 평범한 것 같지만 비범한 스포츠외교기법과 함께 필자스포츠외교내공을 일취월장 시켜준 계기가 되었다.


(김운용 IOC부위원장 겸 KOC위원장과 함께)

 

Samaranch IOC위원장 현역 은퇴와 함께 필자는 개인집무실이 위치한 스페인 Barcelona Caixa은행 건물 사무실을 내방하여 그의 내공 역시 전수 받았다.

 

내공 전수 만남에서 함께 촬영한 사진을 필자 최초 영문 스포츠외교이야기 책(When Sport meets the World Over Five Rings) 커버 사진으로 사용하겠다고 약조하였고 그대로 실천하여 IOC위원 전체와 국제연맹회장단 및 전세계 주요 NOC위원장사무총장들에게 배포하였다.

 


 

Samaranch IOC위원장 영전에 필자와 함께 했던 장면 장면이 스며 있는 사진들을 헌정한다.

 


(Samaranch IOC명예위원장 시절 필자와 함께)



(필자의 2008년올림픽 IOC평가위원 시절 Samaranch IOC위원장이 수여하는 감사패를 받고 악수 중인 필자와 가운데는 Tomas Ganda Sithole 짐바브웨 IOC위원)

 


(1987Lausanne Palace호텔 로비에서 거행된서울1988올림픽참가 공식초청장 발송식/좌로부터 박세직 SLOOC위원장, Samaranch IOC위원장, 개최국 NOC위원장 자격으로 제1호 초청장을 전수 받은 김종하 KOC위원장, 김운용 IOC위원)


(1998년 서울1988올림픽 10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Samaranch IOC위원장<가운데>와 김운용 IOC부위원장 겸 KOC위원장<-1> 및 필자<-1>)


(1989년 제1Seoul Peace Prize수상자로 선정된 Samaranch IOC위원장과 초대 서울평화상 이사장 김용식 전 외무부장관 겸 초대 SLOOC위원장)


(박세직 SLOOC위원장, Berthold Beitz IOC부위원장, Samaranch IOC위원장/SLOOC박위원장이 올림픽박물관건립기금 금일봉을 기증했다)

 


(1998년 서울1988올림픽 10주년 기념식 차 방한 한 Samaranch IOC위원장)


(Juan Antonio Samaranch Juan Antonio Samaranch, Jr. IOC부위원장 父子)


(Juan Antonio Samaranch, Jr. IOC부위원장과 함께)

 


Posted by 윤강로 (Rocky YOON)
스포츠 외교2020. 7. 25. 12:57

[스포츠외교현장이야기실록74(남북한 통틀어 역사상 최초의 NOC간 공식체육교류협정 체결성사공로와 반전 드라마 명예퇴직 뒤안길 인생 2막 새옹지마)]

 

필자가 대한체육회/대한올림픽위원회(KOC)근무하면서 국내에서 가장 많이 했던 스포츠외교활동 중 하나가 세계각국올림픽위원회(NOCs)들간의 스포츠교류협정 체결 관련 업무 처리였다.


미국올림픽위원회(USOC)와의 협정체결을 필두로 40여개국 NOCs들과 끈끈한 교류였다. 특히 서울1988올림픽개최국 NOC로서의 위상 덕분에 선진국들과의 스포츠교류 협정 제의가 문전성시를 이루었던 시절이 필자가 KOC국제과장-국제부장-국제사무차장으로 활동했던 시기다.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을 앞두고 금강산에서 남북한 선수단의 대회 개회식 공동입장관련 남북한 NOC 체육 회담에 필자는 KOC를 대표하여 남측 회의 대표로 참석하였는데 당시 ANOC총회 등 국제회의 등지에서 형과 아우로 친목을 다졌던 북한 NOC서기장인 조상남이 북측 수석대표로 참가하였다.


공식 회의 후 개별 면담을 통해 남북한 NOC간 스포츠교류협정체결 화두를 꺼냈다. 화들짝 놀라며 손사래 치는 조서기장에게 '양국정부간이 아니라 NOC간 협정 체결이고 이미 40여 개국 NOCs 체결한 바 있는 우호협력 MOU성격이니 부담이 없는 요식행위라고 설득하였다.


(조상남 북한 NOC서기장 및 박명철 북한 NOC위원장 겸 체육지도위원회 위원장<체육상>)


조 서기장은 잠시 생각하더니 일단 평양으로 돌아가 박명철 북한 NOC위원장 겸 체육지도위원회위원장(체육상)에게 보고 후 상부와 논의하고 나서 부산 아시안게임 기간 중 체결하자는 필자의 제안에 대한 조서기장의 반 승낙을 받고 돌아와 당시 이연택 KOC위원장에게 보고하였다.

남북한 체육교류 역사상 최초의 협정 체결이라는 남북화해 및 교류협력 상징성으로 부각되는 사안이었다. 문체부-통일부-안기부(국정원)도 쌍수를 들어 환영하였다.

부산 아시안게임 현장에서 조서기장과 남북 NOC간 스포츠교류협정 체결 최종 확인 후 드디어 남측 이연택 KOC위원장과 북측 박명철 북한 NOC위원장 간에 역사적인 남북한 체육교류 공식조인식을 가졌다.


 

국내외 언론의 초미의 관심사였음은 불문가지였다. 시쳇말로 큰 거 한 건했는데 2003년에는 평창2010동계올림픽유치위원회 대외공동사무총장으로 파견근무 한 후 혁혁한(?) 유치활동에도 불구하고 대한체육회 사무총장 경유 회장에게 파견근무 복귀 신고와 더불어 말 못할 우여곡절이 난무한 끝에 필자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2004년 초 22년 근무했던 대한체육회를 국제사무차장보직(1) 5년 만에 스포츠외교이 잔뼈가 굵어졌던 터전인 대한체육회에서 쓸쓸히 명예퇴직 할 수 밖에 없었다.

(2001년 평양 방문 시 인민문화궁전 시찰 후 정문 앞에서/좌로부터 이금홍 WTF사무총장, 김운용 IOC부위원장 겸 KOC위원장, 장웅 북한 IOC위원, 여성안내원 2, 최재승 국회 문광위원장, 필자)


인생에서의 첫 쓴 맛이면서 시련이었다. 고진감래(苦盡甘來)를 기대하면서


예기치 못하였고 원치도 않았지만 22년 스포츠외교의 터전이었던 대한체육회/대한올림픽위원회를 떠난 후 필자는 평창2014동계올림픽 및 패럴림픽 유치위원회 국제사무총장, 평창2018유치위원회 국제자문역, 평창2018동계올림픽 조직위원회 위원-기획상임위원-위원장보좌역의 직책으로 평창동계올림픽유치 준비기간까지 포함하여 대회 종료 시까지 근 20년을 강원도 평창, 정선, 강릉을 축으로 전세계를 아우르는 동계올림픽 전도사가 되었다.



(2007년 평창2014동계올림픽유치위원회 국제사무총장 시절 스포츠 관련 한 시상식 장에서 함께 한 김연아 선수와 성공기원 김연아 선수 자필 메모)


(필자가 IOV평가위원으로 Toronto2008 및 Paris2008올림픽유치후보도시 방문 시  Jean Cfetien캐나다 총리 및 프랑스 대통령 궁<Palais d’Elysee에서 Jacques Chirac대통령 예방 장면)


(ANOC총회, IOC-IOC집행위 연석회의, OCA총회, 동 하계 올림픽 단장회의 등 필자는 단골 발언 회의 대표로 명성을 쌓았다)


(노무현 대통령<우측> 2007년 과테말라 IOC총회에서 평창2014동계올림픽 및 패럴림픽 유치지원 차 IOC위원들을 상대로 지지호소하는 장면/우측 사진 좌로부터 프랑스 IOC 명예 위원이며 히말라야 Annapurna정상을 최초로 정복한 Alpinist이기도 한 Maurice Herzog<우측사진 좌측>와 담소를 필자<가운데>가 통역하고 있다.)


물론 이 바탕 뒤에는 십 수 번씩에 달하는 동 하계올림픽대회 한국선수단 섭외 임원 겸 단장대행자격으로 세계각국 선수단장회의에서의 꾸준한 제안 등 발언을 통한 활동과 2008년 올림픽 IOC평가위원(대한민국 최초)으로서의 국제무대에서의 활약과 내공이 뒷받침 되어 빛을 발한 것임은 틀림 없는 사실이다.

 

(IOC평가위원시절 Toronto2008 올림픽후보도시 현지실사 기간 중 발행한 Newsletter에 IOC평가위원장인 Hein Verbruggen과 필자가 앞열에 서있다)

 

또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평창2018동계올림픽 및 패럴림픽 IOC제출용 공식보고서 영어-불어 판 최종 감수 요청에 따른 임무까지 완수하며 유종의 미를 거두었다. 아울러 스포츠외교관련 책도 5(영문 책 포함)이나 출간하였다.


(필자가 2007년 최초로 쓴 영문 스포츠외교현장이야기 책으로 Samaranch IOC위원장 Barcelona집무실에서 함께한 사진을 약속대로 표지 사진으로 사용하였다. 전 세계 IOC위원들과 국제연맹회장단 주요 NOC회장단 모두에게 배포하여 좋은 반응과 감사서한을 받았다.)

 

2004년 대한체육회를 떠나면서 설립한 국제스포츠외교연구원(ISDI))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2004년 경기도 양평에 건립한 평상스포츠박물관을 12년 간 운영하다가 강릉시장의 요청으로 박물관 소장 올림픽수집픔 3만점 전체를 무상으로 기증하였다. 강릉시는 현재 강릉올림픽박물관 건립 중이다.


(2004년 평산 스포츠박물관 개관과 함께 월간 신 동아를 비롯한 유수의 언론매체들이 앞 다투어 보도해 주었다)


 

대한체육회를 떠나자 몽골 NOC위원장 및 사무총장을 비롯하여 Magvan몽골 IOC위원 등은 몽골국립올림픽아카데미를 경유하여 필자에게 명예박사학위를 수여하여 주었다.


(몽골 NOC위원장 Zagdsuren<-2> Magvan 몽골 IOC위원<1>Ulanbataar소재 NOC위원장 접견실에서 필자<-1>와 함께/아래는 몽골국립올림픽 아카데미 제1호 명예박사학위 증)

 

중국에서는 Beijing2008올림픽 유치 당시 IOC평가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중국 국익에 기여한 필자에게 중국 3대 명문 대학 중 인민대학교 객좌교수직(2005~2008)을 위촉하여 주었다.

 

 

(2008년 올림픽 IOC평가위원으로 Beijing2008유치후보도시 현지실사 방문 시 장쩌민<강택민>중국국가주석예방과 중국인민대학교 객좌교수 위촉장)

 

Jacques Rogge IOC위원장은 Athens2004 IOC총회 및 Singapore2005 IOC총회에 IOC위원장 Special Guest자격으로 초청하여 AD카드, 본부호텔숙박 및 차량 등 편의를 제공하여 주었다.


 

Mario Vazquez Rana ANOC창설회장 겸 IOC집행위원은 2008년 필자에게 ANOC총회 개회식에서 ANOC공로훈장을 수여하여 주었다.


(Mario Vazquez Rana ANOC회장이 2008Beijing개최 ANOC총회 개회식에서 필자에게 수여한 ANOC공로훈장과 공로패)


2006년 김정길 KOC위원장은 필자를 KOC총무로 임명하려고 삼고초려 하였다가 평창2014유치위원회 국제총장으로 발령이 나자 KOC위원 및 KOC위원장 특보로 임명하여 주었다.


(2008 ANOC총회 개회식에서 ANOC공로훈장 수상 후 김정길 KOC위원장과 함께)

 

고 안상영 부산시장은 2002년부산아시안게임유치성공 및 개최 중 난제를 해결해 준 보답으로 부산명예시민증(78)를 수여하여 주었다.

 

(부산명예시민증78호를 필자에게 수여한 안상영 부산시장과 함께)

 

2004년 당시 유병진 관동대학교 총장은 필자에게 강릉관동대학교 겸임교수 직을, 2009년 김설향 서울시립대학교 체육교수는 필자를 서울시립대학 겸임교수로 위촉하여 주었다.


2020429일 서울특별시는 필자를 2032년 서울-평양 올림픽 서울시 국제특보로 위촉하여 故 박원순시장으로부터 위촉장을 받았다. 모두모두 필자에겐 고마운 분들이다. 이것이 필자에겐 스포츠 인생 제2막 새옹지마(塞翁之馬) 사례들이다.

  

(2020429 2032년 서울-평양 올림픽유치 서울시 유치특보 위촉장을 수여한 고 박원순시장과 필자)

 

 


Posted by 윤강로 (Rocky YOON)
스포츠 외교2020. 7. 24. 11:15

[스포츠외교현장이야기실록73(세계VVIP국가원수들과의 만남)]

 

40년 스포츠외교현장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만남은 몽골명예박사학위증 수여식에서 축사해 주었던 Bagabandi대통령과 후임 대통령 Nambar Enkabayar대통령과의 만남을 포함하여 IOC평가위원자격으로 2008년 올림픽유치결선진출 5개후보도시(Beijing-Osaka-Toronto-Istanbul-Paris)현지실사방문 시 만났던 중국국가주석 장쩌민(강택민)--일본 Yoshiro Mori총리/수상--Jean Cretien캐나다 총리/수상--Jacques Chirac프랑스 대통령 등 국가원수들과의 만남이었다.

 

(2003년 말 당시 Bagabandi 몽골 대통령과 후임 Nambar Enkabayer몽골 대통령과 함께)


(2001년 필자가 2008년 올림픽 후보도시 IOC평가위원시절 만난 장쩌민 중국국가주석/Beijing2008<> Yoshiro Mori 일본 총리/Osaka2008<Tokyo2020올림픽조직위원장/>)

 

(2001년 필자가 2008년 올림픽 후보도시 IOC평가위원시절 만난 Jean Cretien캐나다 총리<> Jacques Chirac 프랑스대통령<>)

 

또한 2009 Copenhagen개최 IOC 총회에서는 스페인국왕 HRH Juan Carlos, 네덜란드 현 국왕 이며 당시 황태자였던 HRH Prince Orange IOC위원, 룩셈부르그 왕 격이며 IOC위원인 Grand Duke of Luxemboug대공, 브라질출신 축구황제 Pele, 당시 UN사무총장이었던 반기문 현 IOC윤리위원장 등과의 이어지는 만남이었다.


 (2009Copenhagen IOC총회에서 만난 Juan Carlos스페인국왕<>H.R.H Prince Orange당시 네덜란드 황태자 겸 IOC위원/현 국왕<.)


(룩셈부르크 IOC위원 겸 대공 Grand Duke of Luxembourg<> 및 브라질 축구황제 Pele<>)


(2009Copenhagen IOC총회에서 재회한 반기문 당시 UN사무총장과 함께)


그 밖에 헝가리대통령을 역임한 Pal Schmitt 헝가리 IOC위원-아시아정구연맹회장을 맡고 있는 가이후 도시키 전 일본총리--튀니지아 수상출신 Mohamed Mzali IOC 종신위원(작고), 브르네이 왕제이며 NOC위원장인 Sufri Haji Bolkia 등과의 만남이었는데 필자가 스포츠외교관이 아니었으면 평생 얼굴보기도 힘들었을 VVIP 국가 원수급들이다.


(Pal Schmitt 헝가리 IOC위원<헝가리 대통령 역임/> 및 가이후 도시키 일본총리<>)


(튀니지 총리 역임한 Mohamed Mzal IOC종신위원<> Sufur Haji Bolkiah 브루나이 왕제 겸 NOC위원장<>)


 

이 모든 귀한 만남을 만세 전부터 택하시어 내 평생에 허락하신 전지전능 하시며 신묘막측 하시고 무소불위하신 창조주 하나님께 다시 한번 감사 찬양 드리며 모든 영광을 올려 드린다. 할렐루야~

 


Posted by 윤강로 (Rocky YOON)
스포츠 외교2020. 7. 23. 10:29

[스포츠외교현장이야기실록72(서울1988올림픽 유산과 성공사례 서울대 및 아시아체육기자연맹(ASPU/AIPS, Asia)총회Malaysia Selangor 특강이야기)]

 

지난 2020 76 서울대(SNU)강준호 교수로부터 한 통의 전화가 결려왔다.

서울대가 심혈을 기울여 정성껏 진행해 오고 있는 개발도상국 참가자 대상 '대한민국 성공사례 Benchmarking 및 배우기' 프로젝트인 ODA 프로그램과는 다른 DTM(Dream Together Master)석사학위과정의 일환인데 8월 중 특강 제의를 받았다.

코로나 상황 상 온라인 특강으로 진행할 예정이라고 한다 "서울1988 올림픽 유산과 성공사례 및 스포츠 외교관련 내용이다.

(20198월 말 Malaysia Selangor개최 아시아체육기자연맹(ASPU/AIPS, Asia)총회 시 개설된 서울1988올림픽 및 PyeongChang2018동계올림픽 유산 관련 특강 장면)


2019 8월 말 정희돈 한국체육기자연맹(KSPU)회장(차기 ASPU회장 내정자)의 소개로 다녀온 아시아체육기자연맹(ASPU/AIPS Asia)총회가 열린 "Marvelous" Malaysia Selangor에서 서울1988 및 평창2018 유산과 성공사례 관련 별도의 특강초청강연 주제와도 맥이 연결되는 것 같다.


(Malaysia Selangor 특강 장면)


500여명이 참석한 Selangor특강자리에서 서울1988올림픽의 특징과 유산을 "7 Ups"로 요약하여 설명하고 질의 응답을 받기도 하였다.

 


"Seven Ups"는 청량음료인 미국산 사이다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서울1988올림픽이 전세계에 남긴 Cool한 올림픽 유산(Olympic legacy)의 요약본이기도 하다. (1)Clean Up (2) Cheer Up (3) Clear Up (4)Speak Up ( in English) (5) Show Up (6) Boom Up(Olympic Marketing) (7) Open Up (New Horizons)가 필자가 요약해본 7-Ups의 정체다.



 


Posted by 윤강로 (Rocky YOON)
스포츠 외교2020. 7. 21. 09:57

[스포츠외교현장이야기실록71(Sydney2000올림픽 최초의 남북단일팀 Uniform 어떻게 조달했을까?)]


 

최근 Facebook Post했던 여러가지 스포츠외교현장이야기 중 최초로 시도하여 성공한 Sydney2000 올림픽 개회식에서의 남북한 단일팀 유니폼 조달 방법에 대하여 5대륙 올림픽가족이 모두 궁금해 한다면서 필자에게 영어로 알려달라고 다음과 같이 요청이 왔다.  

“Next time, please tell us how did you manage to supply same marching uniforms for North Korea for Unified Team ? I heard something about it from Sung Il Baek It is very interesting for others ! ”

그래서 영어로 답변하기로 약속하였다.

[About how to manage the supply of marching uniforms at the Sydney 2000 Olympic Opening Ceremonies]

 


It was a very complicated logistical task to be done for Korea to provide the North Korean delegation with the same marching uniforms from the local market without knowing the clothes size of the North Korean athletes and officials.

 

 

(Hae-Kyung LEE, 2nd from right<Director of North Korean Sport Guidance Committee>, myself 1st from right, Ki-Moon SHIN<1st from left/Chief Physiotherapist of South Korean Delegation> and his colleague Physiotherapist<2nd from left>)

 

What was even worse was the fact that the timing of procuring the uniforms fell on the biggest National Full-Moon Festival (Korean version of Thanks-Giving Day). All possible Korean local manufacturers were completely out of work and beyond reach for at least 4-5 consecutive days. Therefore, it was neither feasible nor applicable for anyone to find the suitable uniforms-providers during that period of time. Time pressing, the only solution was to try to collect all remaining suits and dress shirts of all sizes from every possible local department store. Fortunate part was that the mutually agreed color of marching jackets was navy-blue with white dress shirts. The orange-color uniform ties and plastic Korea Peninsula badges were manufactured and secured well in advance with enough quantity. It was also agreed to wear white or grey color pants of each individual for both delegations.

 

(from left to right: Kyung-Ja CHO<Chief of South Korean Delegation in charge of women athletes>, Myself, Seong-Beom YOON/North Korea Delegation Chef-de-Mission, the late Sang-Cheol LEE/South Korean Delegation Chef-de-Mission. Sydney 2000 Olympics)


(From Left to right: Seong-Il RYU, Sec. Gen. of North Korean NOC and Myself)

 

When distributing jackets and dress shirts, we finally decided to provide all sizes of jackets and dress shirts in stock instead of calculating the number of North Korean marching delegation members, as it was not realistic to try to measure the size in order to hand them over the exact number of clothes. That was how the necessary uniform-distribution process went smoothly.

 


Posted by 윤강로 (Rocky YOON)
스포츠 외교2020. 7. 20. 09:32

[스포츠외교현장이야기실록70(대한민국 올림픽마라톤 계보)]

 

Berlin1936 올림픽에서 일제 강점기 시절 한민족의 우수성을 세계만방에 떨친 손기정 옹의 올림픽마라톤제패로 점화된 한국올림픽마라톤이 56년 만인 Barcelona1992올림픽 마지막 날 몬주익의 영웅 황영조 선수가 그 올림픽 마라톤의 계보를 이어 2번째 올림픽마라톤 금메달리스트가 되었다.

 

(일제 강점기인 1936년 Berlin올림픽에서 한민족의 우수성을 세게만방에 과시한 손기정 올림픽 우승자)

 

황영조 선수 뒤에는 한국 마라톤 중흥의 대부 격인 정봉수 감독(작고)과 코오롱지원팀 식구들(김순덕 Chef포함)의 피땀 어린 지도와 헌신이 있었다.

 

황영조 선수는 타고난 폐활량의 탁월함과 지구력이 남달랐는데, 언젠가 필자와 함께 한 유럽 출장 시 대한항공기내 옆자리에서 호텔숙박비를 절감해 주기 위해 코만 골지 않으면 한 방 Twin Beds에서 같이 투숙하자고 물었더니 그는 언제 어디서라도 머리만 베개에 갖다 되면 자동으로 즉시 잠이 든다고 했다.

 

(좌로부터 대한민국마라톤 원조 영웅 손기정 옹, 몬주익 영웅 황영조 Barcelona올림픽 남자 마라톤 우승자, 필자)

 

그날 밤 진짜 황선수는 시차도 아랑곳 하지 않고 아기처럼 깊은 잠을 자는 것을 목격하였다. 이것이 바로 평소 '황영조 표' 마라톤 우승 비법 이었던 것이다.

한편 황영조 선수를 발굴, 발탁하여 훈련에 정성을 쏟았던 정봉수 감독은 해외전지훈련시에도 빠짐 없이 마라톤지원팀 식구들로 현지제과점을 수소문하여 스테미나 유지를 위해 생크림을 구해서 먹게 한다고 필자에게 귀 뜸하여 알려준 것이 기억난다.

Barcelona1992올림픽 마라톤 우승 후 외신기자회견에서 황영조 선수와 정봉수 감독을 통역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28년 전이다.

 

(Barcelona1992 올림픽 마라톤금메달리스 황영조<-3>, 정봉수 감독<-2> 외신기자회견 통역 중인 필자<-1>, 김순덕 코오롱 마라톤 팀 Chef<-2>))

 

Atlanta1996 올림픽 마라톤에서 은메달로 준우승을 차지한 이봉주 선수가 황영조 선수의 뒤를 이었다. 한국마라톤의 대부인 정봉수 감독의 뛰어난 지도 하에 이봉주 선수는 1996년 동아마라톤 준우승-도쿄국제마라톤우승, 1998 방콕 아시안게임 마라톤우승, 2001년 보스톤마라톤 우승 등 대한민국마라톤 지존의 계보를 이었다.


(Atlanta1996올림픽 남자 마라톤 준우승자 이봉주 선수<가운데>, 정봉수 감독<-1> 및 필자<-1>)

 

작고한 손기정 옹 영전에는 1987년 그리스에서 서울1988올림픽 성화채화식에 함께 했던 추억의 사진과 또 정봉수 감독 영전에는 정 감독 및 이봉주 선수와 함께 한 Atlanta1996올림픽 당시 사진을 올려 드린다. Rest in Peace!

 

 

(서울1988올림픽 개회식 1년 전인 1987917일 올림픽성화채화식 사절단으로 그리스 올림피아-아테네를 방문하였을 당시 손기정옹과 함께)


대한민국 마라톤 세계제패의 맥이 지속적으로 이어지기를 소망한다.

 

(Berlin 1936올림픽 마라톤 우승자인 손기정 옹<-2>에게 증정된 바 있는 고대그리스 청동 투구<아래사진>와 당시 투구 기증 그리스 신문사 원로 기자<-2>, 필자<-1>, 서울1988올림픽 성화채화식 재 그리스 한국교민 여성통역안내원<-1>)



Posted by 윤강로 (Rocky YOON)
스포츠 외교2020. 7. 15. 17:59

[스포츠외교현장이야기실록69(세계각국 문화풍물탐방 터키 Istanbul)]

 

 

40년 간 국내외 스포츠외교활동을 하면서 전 세계 각지를 두루 탐방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각양각색의 문화와 음식과 인종과 언어와 풍습을 접하였다. 한 평생 이 모든 기회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가장 인상 깊었던 나라는 동서양이 만나는 땅(where the east and the west meet)터키였다.


(아시아와 유럽을 가르는 터키의 Bosporus 해협)

 

터키 최대도시인 Istanbul에서는 페르시아에서 전파되어 아직도 성업 중인 전통시장 Bazaar였는데 휘황찬란한 금은보화가 지천이었다.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각종 보석과 금은보화가 진열된 Bazaar시장의 보물을 통째로 사진에 담아 왔다.

그 어떤 보물도 살아있는 동안에만 유효하지만 사진에는 공소시효가 없음을 증거한다.

터키 내에 산재되어 있는 7대초대교회 순례도 가슴 벅찬 일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터키의 전통육류요리 음식인 케밥(kebab)의 감미로운 식감이 아직 혀 끝에 남아 맴돈다.

Turkey Istanbul Bazaar market의 화려한 문화 풍물 전시의 세계로 초대한다.




Posted by 윤강로 (Rocky YOON)
스포츠 외교2020. 7. 14. 14:32

[스포츠외교현장이야기실록68(서독Baden-Baden과 서울1988올림픽유치성공 쾌거)]


 

1981 930일은 1988년 올림픽유치경쟁과정에서 기념비 적인 날로써 당시 서독 Baden-Baden개최 IOC총회 투표에서 대한민국 서울이 일본의 나고야를 52:27로 누르고 단군이래 전 세계160개국이 한반도에 총 출동하는 역사를 창출하였다.


(바덴바덴 IOC총회 투표결과 쎄울/Seoul의 승리를 발표하는 Samaranch IOC위원장)

 

당시 Samaranch IOC위원장은 1년 전인 1980 Moscow올릳픽에 즈음하여 개최된 IOC총회에서 Lord Killanin 전임 IOC위원장의 뒤를 이어 IOC위원장에 선출된지 1년 후, 첫 임무로써 1988년 올림픽개최도시 선출결과 발표를 하였는데 IOC 1공식언어인 불어로 서울을 '쎄울'이라고 발음하자 한국유치대표단은 처음엔 잠시 못 알아들을 정도였다.

 

1981 930일 서독 바덴바덴에서의 기적은 박종규 대한사격연맹회장 겸 KOC위원장의 야망으로 시작되어 노태우장관이 총괄지휘하고 정주영 현대그룹회장을 비롯한 유치 단 멤버들의 불철주야 주도면밀하고도 역사적인 천둥번개작전’(Thunderbolt Operation)에 의해 화룡점정 된 것이다.

 


(Baden-Baden IOC총회 투표결과 발표 후 서울1988올림픽 개최도시 협약서<HCC>에 서울1988올림픽유치위원장 자격으로 서명하고 있는 정주영 회장<-2>와 최만립 KOC명예총무<-1>, 전상진 대사<-2/KOC부위원장> 및 Mme. Monique Berlioux IOC사무총장)

 

 


 

(서울1988올림픽 개최도시협약서<HCC>위로부터 IOC를 대표하여 Samaranch IOC위원장-Monique Berlioux IOC사무총장, 서울1988올림픽개최국 NOC를 대표하여 조상호 KOC위원장-최만립 KOC명예총무, 서울1988올림픽 개최도시 서울시 및 서울1988올림픽유치위원회를 대표하여 박영수서울시장- 정주영유치위원장 서명)

 

 

박종규회장의 꿈, 박정희대통령의 결심, 전두환대통령의 유치신청결단, 노태우 정무2장관의 확신 찬 진두지휘에서 보듯이 우리나라 정부의 지도층은 서울올림픽의 꿈의 불씨를 살려 찬란히 지피도록 견인차 역할을 다하였다. ‘바덴바덴 대첩의 기적은 그 후 개최되기까지 7년 간 숱한 우여곡절과 고비를 슬기롭게 극복하면서 1988 917일 동서양이 한반도에 모두 모여 손에 손잡고’(Hand in Hand) 벽을 넘어서 올림픽을 통한 세계 대 단합과 인류화합의 합창을 부르게 된 것이다.

 


(1985년 동 베를린 개최 IOC총회에서 자로부터 최만립 KOC명예총무, 박종규 IOC위원, 필자)

 

 

세계는 서울로, 서울은 세계로”(The World to Seoul, Seoul to the World) 그 과정에서 북한의 개최지 변경 공작, 아웅산 테러, 북한의 서울올림픽 공동개최 주장, 김포공항 테러, 국내 정치 정세의 급변, 6.29 민주화 선언, 대통령 선거, KAL 858 폭파 사건 등 수 많은 위기와 질곡의 세월을 넘어 ‘88서울올림픽은 20세기 최고의 올림픽으로 승화되고 회자되고 있는 것이다.

 

 


 

 


Posted by 윤강로 (Rocky YOON)
스포츠 외교2020. 7. 13. 09:54

[스포츠외교현장이야기실록67(스포츠외교는 안면 장사)]


 

「스포츠외교는 안면장사」라는 진리 아닌 진리가 스포츠외교의 성격을 가장 효과적이고 단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물론, 안면이 잘 통하면서 영어 등 외국어 구사능력이 수준급이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인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역대 한국 IOC 위원을 역임한 분 가운데 故 장기영 박사는 영어가 결코 수준급은 아니었지만 동료 IOC 위원들 사이에서 가장 존경받고 인기있고, 신뢰감을 주는 국제 스포츠외교통으로 한국스포츠외교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만한 인물이었다.


그러한 예는 지금도 즐비하다. 각 경기단체 인사들 중 국제 스포츠 무대에서 힘깨나 쓰고 잘 통하는 분들의 면모를 살펴보면 이분들도 처음에는 영어 등 외국어 구사능력이 수준급이었던 사람들은 아주 드물며 오히려 국제 스포츠 무대에서 활약함으로서 실전용 외국어 실력이 갈고 닦여 자기고 모르게 늦깎이 외국어 구사자들로 변모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김운용 박사가 대한체육회장/KOC 위원장 재직시절(1993~2002) 필자는 국제부장, 국제사무차장으로서 모시는 입장으로 국제 스포츠 외교 무대에서 함께 활약했었다. 어느 날 김박사께서 필자에게 “본인은 미국에서 박사학위도 했고 영어 등 외국어에 관한 한 아무런 불편이 없을 정도인데도 국제 스포츠 회의에 참가하기 시작하여 10년 지나니까 겨우 귀가 뚫리고 입이 트이더라”라고 술회한 적이 있었다.

 

(김운용 IOC부위원장 겸 KOC위원장과함께)

 

20055월 김운용 IOC부위원장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IOC위원 직을 사임하고 나자 IOC에서 유일하게 활동 가능하였던 한국 IOC 위원 이건희 삼성그룹회장과 IOC 위원 선출 동기생인 북한의 장웅 IOC 위원 겸 국제태권도연맹(ITF) 총재는 2004년 아테네 올림픽 기간 중 필자가 주선한 조선일보 등 한국 일간신문 특파원들과의 인터뷰에서 「스포츠 외교 전문가 양성」과정을 일본의 「스시 전문가」의 그것에 비유하여 설명하였다.

“스시 전문가가 되려면 최소 10년간은 초밥을 손바닥 안에서 적절히 뭉치는데 전념해야 하고, 그 후 5년에서 10년간은 회를 적절한 두께로 뜨는 기술을 연마하며 그 후 15년 내지 20년의 초밥 위에 회를 얹는 기술을 연마하는 기간을 지내야만 비로소 스시 전문가로서 인정받게 되는 것처럼 스포츠 외교 전문가를 키우려면 국제 스포츠 무대에 15년 이상 꾸준히 내보내서 정성 들여 투자하고 관리해야만 가능하다.”고 힘주어 강조했다.


(북한 장웅 IOC위원과 함께)

 

한 국가의 산림녹화사업을 예로 들면 키 크고 우람하게 자란 나무 몇 그루를 옮겨 심어 당장 그늘 만들고 산을 덮을 수는 있지만 바람과 벼락을 맞으면 뿌리 채 뽑혀 죽어버려 산림녹화사업이 실패하게 되는 것이다


(1984년 Mexico City개최 ANOC총회 KOC회의 대표들/좌로부터 김세원대사<KOC부위원장>, 최만립 KOC부위원장 겸 명예총무, 필자)


반면에 될성부른 묘목을 선별해서 산 전체에 골고루 심고 정성스레 관리해 울창한 숲으로 가꿀 경우 산림 백년대계가 보장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국스포츠외교 미래 군단을 양성하려면 단발마적, 실적 위주의 비효율성, 사후활용도가 미미한 외국어 연수과정을 중심으로 제한된 스포츠외교원 양성 계획보다는 KOC 국제업무전담 실무직원들과 가맹경기단체 국제업무 담당 직원들, 그리고 국제대회 메달리스트를 포함한 선수 및 경기 인들 중 분야별 스포츠외교요원 꿈나무 자원으로 선별하여 이에 상응하는 체계적이고 집중적인 투자를 통한 중장기 인재양성 플랜을 수립해야 한다.


Posted by 윤강로 (Rocky YOON)
스포츠 외교2020. 7. 11. 12:53

[스포츠외교현장이야기실록66(북한 스포츠 계 인사들과의 교류)]


Blood is thicker than water"(피는 물보다 진하다).

이 말은 2001 6월 당시 IOC 위원장후보였던 김운용 KOC 위원장 겸 IOC 부위원장, 최재승 전 국회 문광위원장, 이금홍 세계태권도연맹 사무총장 그리고 필자가 북한 평양 방문 시 장웅 북한 IOC 위원이 IOC 위원장선거에서 김운용 후보가 피선되도록 적극 돕겠다는 뜻을 함축해서 표현한 말이다.

 

(Athens2004올림픽 당시 북한 장웅 IOC위원과 함께)

 

장웅 위원의 의지는 IOC 위원장선거뿐만 아니라 2010-2014-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유치운동과정에서도 또 확인되었다.

장웅 IOC 위원은 1950년대부터 10여 년간 북한 농구(북한식 발음은 “롱구”)대표선수생활을 하였고, 평양체육대학을 거쳐 평양시 체육구락부 코치를 하다 체육지도위원으로 발탁이 된 후, 북한 올림픽위원회 서기장(사무총장)을 역임하다가 당시 김유순 북한IOC 위원의 사망 후 1996년 미국 애틀랜타올림픽대회 시 개최된 제105 IOC 총회에서 한국의 이건희 삼성그룹회장과 함께 개인자격 IOC 위원으로 피선되어 활동 후 2018년 말 80세 정년으로 현역 IOC위원에서 은퇴하였다.

 

(좌로부터 리용선 현 ITF총재, 장웅 북한 IOC위원 겸 당시 ITF총재, 필자)

 

후임으로는 북한 체육상을 지낸 김일국이 거론되다가 경질되면서 지금은 리용선 국제태권도연맹(ITF)총재로 주가를 높이고 있는 리용선이 회자되고 있는 상황이지만 2018년 말 이래 2020년까지 북한 IOC위원은 공석 상태이다.

 


(Athnes2004올림픽 당시 아테네 시내 한국식당에서 한판 승의 사나이 이원희 선수<가운데>와 리용선 당시 ITF사무차장<우측/현재 ITF총재>와 함께)

 

장웅 IOC 위원에 의하면, “스포츠가 다른 건 앞서가는데 사람관계만은 보수적이고 폐쇄적이어서 진정으로 서로 아는데 10년이 넘게 걸린다” 고 하면서 “남쪽이나 북쪽이나 국제 스포츠 계의 오랜 세월 동안 인맥에 정통한 사람들을 앞장세워 외교를 지속적으로 추진하는 길만이 국제 스포츠계에서 손해 보지 않고 자기 밥을 찾아 먹는 길” 이라고 힘주어 강조한다.

아테네 올림픽대회 기간 중 필자와 친분이 두터운 장웅 IOC 위원과 단독 면담을 요청하는 한국 취재기자 및 방송사가 많았다. IOC 본부 호텔인 아테네 힐튼호텔은 그곳 투숙객만이 출입이 허용된다. 비록 VIP급 올림픽 ID 카드소지자라고 해도 출입 코드(Access code)가 부여되지 않았다면 호텔입구부터 에스코트(escort)를 받은 후 보안검색을 거쳐 신분증 대조 및 서명날인 후 임시 출입카드를 발급받은 후에야 비로소 호텔로비에 진입할 수 있었다. 특히 호텔 11층에 위치한 IOC Family라운지에는 IOC 위원, 가족 및 IOC 특별 게스트(distinguish guest)만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출입이 엄격히 제한되므로, 대회기간 중 이곳 11층 라운지를 출입한 사람들은 일종의 특권층(?)이라고 할 정도였다. 마침 11 IOC 위원 라운지 관계자들과 친분을 두텁게 한 덕에 필자는 필자 자신(IOC 특별 게스트)은 물론이고 기자들까지도 동반하여 무료 음료 및 간식도 항시 마시고 먹을 수 있었다. 중앙일보 스포츠 부 성백유 차장(평창2018조직위원회 대변인 역임)과 조선일보 강호철 기자(현 스포츠부장)도 필자의 안내로 이곳 라운지에서 장웅 IOC위원과 각각 단독 취재를 하였고, YTN TV도 장웅 IOC 위원과 단독 인터뷰를 하여 YTN 인터뷰기자가 특종 상을 받았다고 한다.

필자는 제7 EAGA(동아시아대회 협의회) 총회 한국 회의대표자격으로 박상하 대구 U대회 집행위원장 및 이강평 전 KOC 사무총장과 함께 19931020일 첫 번째 평양을 방문하였고, 2001 6 2차 방문을 포함하여, 2002년 부산 아시아경기대회 남북한선수단 개·폐회식 공동 입장에 따른 실무회의대표자격으로 금강산에서 3차례 북한 올림픽 위원회의 故 조상남 서기장 등과 회동을 갖은 바 있고, 1982년 뉴델리 아시아 경기대회때부터 24년간 각종국제대회, 올림픽대회, 국제회의시마다 많은 북한 스포츠 관계자들과 만나 지속적이고 끈끈한 인간관계를 형성해왔다.


(2001년 북한 평양 방문 시 인민 궁전 정문 앞에서/좌로부터 이금홍 QTF사무총장,, 김운용 IOC부위원장 겸 WTF총재 겸 KOC위원장, 장웅 북한 IOC위원, 북한 여성 2, 최재승 국회 문광위원장, 필자)

 

지금은 고인이 된 김유순 북한 올림픽위원회 위원장 겸 국가체육위원회 위원장(체육장관 겸 북한 IOC 위원) IOC 측과의 연석 회담 시 북 측을 대표한 인물로서 과묵한 편이었다. 뒤를 이어 박명철 북한 NOC 위원장(체육장관겸임) IOC 위원은 다소 활달한 편으로 고 역도산의 사위이고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는 김일성 대학 동기동창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 역사적 평양 방문 시 평양 순안 비행장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마중 나와 김 전대통령과 포옹할 때 바로 뒤에 서 있기도 했다. TV등 방송매체에서는 박명철 IOC 위원의 얼굴을 모르던 터라, 엉뚱한 사람으로 오인하여 설명하기도 했다.

장웅 IOC 위원이 북한 NOC 서기장직에서 제1부위원장으로 승격된 후, 그 바통을 이어받은 사람은 류성일 서기장이다. 류 서기장은 본래 축구인으로서 축구 관계 일을 보다가 발탁된 케이스다. 영어도 잘하고, 농담도 좋아해서 필자와는 1998 5 30일부터 6 7일까지 스페인 Sevilla에서 개최된 제11차 국가올림픽위원회 총 연합회(ANOC: Association of National Olympic Committees)총회에서 각각 남북한 NOC 회의 대표로 만나, 세비야 인근 중국식당에서 고량주를 통음하면서 친해졌다. 유머와 농담을 즐겨했고, 배짱과 소신도 투철했다.


(Sydney2000올림픽에서 남북한선수단 공동입장을 위해 다시 만난 류성일 북한 NOC서기장과 함께)

 

(1998년 방콕 아시안게임 양궁경기장에서 함께 한 류성일 북한 NOC서기장<사무총장/우측>과 함께)

 

필자는 북한 스포츠관계자들과의 만남에서 결코, 사상이나 이념, 정치 등 민감한 내용은 입에 올리지도 않았고 서로 부담이 없는, 스포츠관계일이나 신변잡기 등을 주제로 교분을 다져 온 관계로, 북한 스포츠계에서 필자는 여러 개 외국어가 능통하고 국제 흐름에 정통한 국제 스포츠 계 마당발로 평이 좋은 편이라고 한다.

류 서기장은 정몽준 대한 축구협회장이 아시아 축구연맹(AFC: Asian Football Confederation) 총회에서 쿠웨이트의 Sheikh Ahmad Al-Fahad Al-Sabah: OCA 회장)와 격돌한 국제축구연맹(FIFA) 부회장 최종결정투표 시에도 “피는 물보다 진하다” 라는 원칙을 지킨 것으로 알려졌다.

류 서기장의 뒤를 이은 인물은 故 조상남 서기장으로 1959(돼지띠) 평안북도 철산리 태생으로 필자보다는 3년 연하이며 2003 5월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Rio de Janeiro)개최 제12 ANOC 총회 시부터 교분을 맺어왔다.

故 조 서기장도 영어 잘하고 활달하고, 소신과 철학이 뚜렷하고, 논리 정연하여 토론에도 능했지만 의리 파이며 다정다감하기도 했다. 필자(1956년 원숭이 띠)와는 나이 연배를 따져 형님, 동생 사이로 지내기로 약속하기도 했다. 2002년 부산 아시아 경기대회 참가 남북한 선수단이 개·폐회식 공동 행진(Joint parade)과 관련 금강산에서 3차에 걸친 실무대표 회의 때 필자는 낮에는 남측 3인 실무대표의 일원에 불과했지만, 저녁 만찬 테이블에선 수석대표(?)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회의석상에서는 양측 주장으로 열띤 대화가 됐지만 막상 만찬석상에서는 서로 서먹서먹한 사이라서 필자가 총대를 메고 분위기 메이커 겸 이런저런 화제를 꺼내고 허심탄회한 만남의 장을 연출해 보기도 했다. 故 조 서기장 고향이 평북 철산리 바닷가라서, 필자가 “부산 아시안게임기간 중에 다시 만나면 형님으로서 뭘 사주고 싶은데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날래 말하라우” 라고 이북 사투리로 묻자, 故 조 서기장은 “기라면 이왕이면 털게가 먹고 싶긴 한데, 귀하단 말씀이야, 가능 하갔소?”라고 받아들였다.


(조상남 북한 NOC서기장<사무총장>과 박명철 북한 NOC위원장 겸 북한체육지도위원회 위원장<체육상>과 함께/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당시)

 

부산2002 아시안게임 기간 중, 부산 롯데호텔에서 오찬을 겸한 남북한 NOC협의회의 시작 전에 필자는 평소에 친분이 두터웠던 박명철 북측 NOC위원장에게 지난날 금강산 회담 시 이야기를 상기시키면서, 털게를 대접해도 되겠냐고 예의를 차렸고, 박 위원장도 “거저 조 서기장 먹고 싶은 거라면 먹어야 되지 않갔어?”라고 장단을 맞추어 주었다.


(필자의 물밑 남북스포츠외교 교섭으로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기간 중 역사상 최초로 성사시킨 남북한 NOC간 스포츠교류협정 체결로 언론에선 스포츠 통일초안 만들었다고 대서특필하기도 하였다)

 

그 후에도 국제회의 시 여러 번 만났고 필자가 2004년초 대한체육회/대한올림픽위원회를 명예퇴직(국제담당사무차장1)한 후 필자 걱정도 많이 해주고 인간적이고 훈훈하고 자상하게 대해주었던 조상남 북한 NOC서기장은 그 후 후배에게 서기장 자리를 물려주고 부위원장직을 맡을 참이었다.

2004 2월 그리스 아테네 개최 제14 ANOC 총회가 끝나가는 무렵, “공석이 될 서기장 후보를 이제야 찾았다”고 말하면서 환하게 웃던 모습이 엊그제 같은데, 2004년 말 연합뉴스를 통해 심장마비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필자는 친동생이상의 가족 중 한 명이 죽은 것 같은 아찔함과 인생의 무상함을 함께 느꼈다. 그렇게 졸지에 세상을 하직한 故 조상남 서기장 영전에 생전에 좋아했던 「털게」를 바치고 싶다.

故 조상남 서기장 뒤를 이은「서기장 직무대리」는 북한 NOC 사무처에서 영어를 제일 잘하는 문시성 군이었다. 필자에게 깍듯이 형님 호칭을 빼먹지 않는 문 신임 서기장 직무대리는 연배는 어린 편(2004년 당시 40대 초반으로 202050대 중 후반으로 추정)이지만, 각종 국제스포츠회의나, 올림픽대회 등에서 통역도 잘하고, 예의 바르지만, 할 말은 매섭게 해대는 북한 스포츠 계 차세대 국제 통으로 알려진 바 있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대회 기간 중 박명철 위원장의 뒤를 이은 문재덕 신임 북한 NOC 위원장과 IOC 본부호텔에서 만나 위원장 및 서기장 취임 축하 인사도 건넸다.


(Athens2004올림픽 IOC 본부호텔 Hilton호텔로비에서 좌로부터 문재덕 북한 NOC위원장, 필자, 문시성 북한 NOC서기장)

 

필자가 서울올림픽대회 직후인 1988 11월 소련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IOC올림픽 솔리다리티(Olympic Solidarity)국제 세미나에 당시 하춘웅 운영부장과 심용택국제팀장(현재 명예퇴직 후 미국 애틀랜타 거주)과 함께 한국대표로 당시 공산세력의 심장부인 소련, 모스크바에서 개최되는 회의에 참석하였다. 북한 측 회의대표들은 마치 자기 집 앞마당(Home Ground Front Yard)인양, 기세 등등한 분위기였다.

필자가 세미나에서 한국대표자격으로 많은 질문 공세와 의견개진을 많이 하였다.

회의 제2일째인 11 13일 오후 회의 중간 coffee break시간에 북한 측 수석대표자격인 리혜경 북한체육위원회 국제 국장과 마주쳤다. 필자를 보자마자 “윤강로 맞디? 회의에서 보니끼니 국제적으로 쓸모가 많갔어! 내래 통일되면 한자리 주갔어!”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평양에서 해후한 리혜경 북한 NOC국제국장과 함께)

 

그 당시만 해도 동서 진영이 첨예하게 대립되어 있고, 남북한간의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는 국제정세에서, “통일되면 한자리 주갔어!”라는 말을 듣자 필자는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길 가능성이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내심 걱정이 앞섰다. 그러나 명색이 대한민국 회의대표인데 주눅만 들고 있을 수 없어서, 필자는 이렇게 맞받아쳤다. “거져, 남남북녀라고들 하는데, 예쁜 북쪽 처녀 아가씨래 있으면 소개해 주시라요”하고 너스레를 떨었다.

필자는 사실 그때까지 임자(?)없는 노총각 신세였기 때문에, 반은 진심이었다. 그러자 다짜고짜 리혜경 북한대표는 이렇게 쏘아붙이는 것이 아닌가? “거저 보니끼니, 벌써 아새끼래 여럿 깠깠구먼 와그러네?” 그때까지 순진무구(?)(native and pure in heart)했던 필자는 당황했지만 솔직하게 다시 항변했다. “진짜로 총각이니끼니 기딴소리하지 마시라요!” 회의가 끝나가는 마지막 날 리혜경 대표는 헤어지면서 필자 보고 “거저, 너무 게리지 말고 참한 샥시 골라서 날래 장가 들라우.” 라고 말했는데 진심 어린 말 같았다.

그 후, 국제회의나 올림픽대회. 아시안게임 등 국제 스포츠행사 때마다 당시 북한 김유순 IOC 위원을 수행하여 통역도 하고 회의 참석도 할 때마다 마주치게 되었고 필자보다 연배가 많은 관계로 깍듯이 「누님」호칭을 붙이게 되고, 서로 안부도 묻고, 연인 사이가 아닌 「남남북녀」가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남남북녀」란 용어는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대회 시 우리 역사에 길이 남는 최초의 남북한 선수단 공동행진에서 「남녀북남」으로 용어가 바뀌어 한반도기를 함께 맞잡아 든 남측 선수단 기수는 여자 선수(정은순; 농구선수), 북측 선수단 기수는 남자 감독(박정철; 유술/유도)이 맡아 전세계로부터 격려와 찬사를 받으면서 시드니올림픽대회 최고의 하이라이트(Highlight)로 조명을 받기도 했다.


(Sydney2000올림픽 개회식에서 남북한 선수단 공동입장 직전에 리혜경 국장<-2>와 신기문 한국선수단 물리치료사<-1>, 동료 물리치료사<-2>와 필자<-1>)

 

1982 112일부터 126일까지 인도, 뉴델리에서 개최된 제9회 아시아 경기대회는 필자가 KOC(Korean Olympic Committee) 국제 과에 특채되어 참가한 처녀 국제 경험이었다. 필자는 당시 김집 부회장(체육부장관역임), 오진학 훈련과장등과 함께 한국선수단 선발대로서 대한항공(KAL)을 타고 난생처음 공중부양(Soaring up to the sky)을 경험하게 되었다. 대회 조직위 관계자들과의 업무 회의를 무사히 마치고, 한국선수단 본단이 선수촌에 입촌하게 되어, 아시아 43개국 선수단과 함께 본격적인 선수촌 동거 생활이 시작되었다. 잠은 각각 배정된 숙소에서 자지만, 하루 세 끼 음식은 선수촌 식당에서 같이 하게 되어 있었다. 난생처음 보는 아시아각국의 인종들, 음식도 다양 하였지만, 한국음식은 전무한 상태, 인도 특유의 독특하고 매콤한 카레 향이 식당 분위기를 압도하였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더니 음식도 입에 안 맞고, 시차적응도 그리 순조롭지도 못하고 물 상태는 최악이었다. 매일 목욕을 하고 나면 욕조 표면에 머리카락이 둥실둥실 많이도 떠다녔다. 이러다가 혹시 대머리가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염려를 하면서 매번 목욕을 마쳤다. 난생 처음 보는 북한선수임원들, 이들을 처음 보는 순간 필자는 자칫 이들에게 우리말이 아닌 영어로 대화를 걸 뻔했다. 다행히도 그러지는 않았다. ~


(LA1984올림픽 한국선수단 시절 좌로부터 김집 부단장<추후 태릉훈련원장 및 체육부장관 역임>, 필자, 김성집 태릉선수촌장 겸 한국선수단장>

 

북한의 나이 어리고 자그마한 체조선수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선수촌 식당 식대에 줄을 서게 되어 말을 걸었으나, 그때만 해도 남북한 이념 갈등이 아주 심각하여 한민족이지만 「가까이할 수 없는 당신들」인 상황이어서 그런지, 그냥 얼굴만 쳐다보니까 도망치듯 다른 곳으로 빠져나갔다. 그래도 나이가 지긋한 북한선수단의 보장성원(임원)들은 다소 여유를 보이면서 오히려 필자에게 말을 걸어왔다. “선수 같지는 않고, 남조선 감시 공작원 같구만”.

필자도 본능적으로 대꾸했다. “같은 입장 같구만요. 앞으로 잘 해보시자구요”. 한마디 더 물었다. “여기 음식은 입에 맞습니까?.

퉁명스러운 대답이 기다린 듯 튀어나왔다. “조선사람 입이야 다 똑같갔디!

선수촌에 있는 아시아 각국 선수단 본부를 방문하여 故 김종열 단장(대한체육회장역임)이 한국 선수단의 선물을 전달하였다. 몽골 선수단 본부에 들어선 필자는 정말로 깜짝 놀랐다. 그곳에 앉아있던 사람들의 모습은 한국 사람들보다도 더 한국 사람들 같은 원조 한국인들의 인상이었다. 영어가 나오려다 멈칫한 순간이었다. 그들도 김치를 잘 먹는단다.

북한의 체육계 인사들 중 라복만 선생은 농구선수출신으로서 장웅 IOC 위원처럼 키도 훤칠하게 크고, 술도 두주불사(drink like a fish)형으로 북한스포츠계의 대표급 주당(drinking Champion)으로 명성(?)을 두루두루 떨친 분이며 도량이 크고, 낙천적이고, 적이 없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가끔 술을 너무 많이 마시다 보면 실수 아닌 실수도 하기 마련, 대한민국 농구 계의 원로이시며 대모(God mother)인 故 윤덕주 고문께서는 라복만 선생과의 일화를 이렇게 이야기한다.


(평양에서 라복만 북한 농구 임원 겸 태권도 전당 임원과 함께)

 

“라복만이가 국제 대회 때 만나서 술을 먹고는 나보고 누님, 누님 하면서 예의 없이 굴길래 크게 꾸짖어 주었더니 그 다음부터는 정신을 차리고 예의 바르게 행동하더구만. 그 친구 그래도 농구 인이고 많이 도와주고 싶고 정이 가는 사람이야”

그 후, 국제행사에서 라복만 선생 만나면 故 윤덕주 회장께 안부 전해 드리고 고맙다고 정중하게 인사 꼭 전해달라고 부탁하곤 해서 필자는 연인이 아닌「남여북남」농구인 사이의 메신저 역할도 하곤 했다.

지난 2001 6월 평양 방문 시 남측의 태릉선수촌에 해당하는 평양시 청춘거리에 있는 북한 국가대표 선수훈련센터를 방문하여 체육시설과 북한 선수들의 훈련모습을 지켜보았다. 마지막 순서로 북한이 자랑하는 태권도의 전당을 방문하여 같은 뿌리의 태권도 시범 모습을 지켜보았다. 실전에 입각한 공격과 무차별한 격파 시범이 주를 이루었다.

뒤늦게 시범 장에 나타난 인물은 바로 그 유명한 라복만 선생이었다. 한동안 활동을 하지 않고 국제무대에도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는데, 웬일일까 하고 물어보니, 농구관계는 그만두고 태권도 전당의 서기장(사무총장)직을 맡아보고 있다고 하면서, 필자의 두 손을 꼭 잡고 반가움을 표했다.

북한 국가 체육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아 오다가 2000년대 들어서 조선태권도련맹 위원장 직의 책임을 맡은 황봉용 위원장은 작년에 남북 태권도 시범단 교환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북측 시범 단을 인솔하고 서울에 와서 쉐라톤 워커힐 호텔에서 열린 공식 만찬 시 만난 바 있는데 소탈한 성격의 소유자이지만 논리정연하고 책임의식이 투철했다. 장선강 북한 국가체육위원회 부위원장, 렴윤희 북한 대학생 체육협회서기장, 정순원 전 북한 올림픽 위원회 서기, 리학무 서기, 리민호 서기, 고철호 서기 등이 북한의 국제 스포츠 관계를 함께 담당해오고 있다.


(북한태권도시범단장으로 서울 세라톤 워커힐을 찾았던 황봉용<1>, 문시성<-2>과 함께)

 

필자는 국제 스포츠관련행사 관계로 해외 출장을 갈 때면 기존 선물이나 기념품 외에 언제나 준비해가는 우리 고유의 음식이 있다. 먼저 골뱅이 통조림, 죽방이라 불리는 마른 멸치, 마른 오징어 등을 동네 슈퍼 등에서 미리 구입하고, 공항상점에서 진공 포장된 김치 2종류, 팩 소주 10~20개 그리고 기내에서 제공받는 치약 용기 형태의 고추장 등이다.

이상하게도, 해외에 나와서 시차 적응과 컨디션(physical condition)을 적절히 조절하려면 우리 음식만큼의 특효약(a wonder drug)은 어디고 없는 듯하다. 그러나 이 모든 준비된 우리 음식물을 필자가 먹으려고 구입한 것이 아님을 주목해 주시기 바란다.

일단 해외 현지에 도착해서, 며칠 지나면(그때까지는 호텔 객실 내 냉장고 공간에 기술적으로 보관하는 것이 필수) 북한 스포츠 계 인사들도 한민족인지라 슬슬 우리 음식이 땡기기 시작하게 되고 「불감청고소원/不敢請固所願」이라, 원하지만 감히 청하지 못하는 우리 고유의 체면치레(face-saving matter)라고나 할까?

바쁜 회의 일정, 오·만찬 행사일정 등에 쫓기다 보면 한식 구경은커녕 현지 음식에 질리기 십상이다 보니, 홀아비 사정은 과부가 더 잘 아는 법, 이때 북측인사 객실번호 알아내어 객실에 보관 중이던 「비장의 음식」을 슬쩍 벨 보이(Bell boy)를 통해 전달해 놓으면, 백발백중(Every shot told) 그 날 중에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잘 먹었시다.”라고 감사의 인사가 필자에게 건네진다. 어찌 보면, 인간의 3대 필수요소 중 의식주(영어로는 식의주; food, clothing, and shelter)중 으뜸은 뭐니뭐니 해도 먹는 것이다. 오죽하면 '잘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곱다'라는 말이 나오랴.

故 정주영 회장이 대한체육회회장 시절 필자가 통역해 드릴 때 가끔 말씀하시던 말을 새겨들어서 그런지 몰라도 음식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법이다. "식보가 제일 일세, 윤군!". 이 말은 음식이 보약이란 뜻으로 음식을 제때 잘 가려 먹으면 보약이 따로 필요 없다는 故 정주영 회장의 지론이기도 했다.

음식을 함께 입으로 먹는 사람들이 식구(食口)아닌가? 필자는 국제회의 등에서 적시에 좋은 발언과 제안 등을 많이 해서 북쪽사람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지만, 음식으로 서로 배려해 주는 우리 민족 고유의 먹거리로 통하는 ‘정’(Friendly Feeling of Congenial Spirits)도 남북한의 친목 도모에 크게 한 몫 했으리라 믿는다.

북한에서 통용되는 우리말은 어찌 보면 말 표현이 행동 자체를 연상시키게끔 함축 시킨 듯한 느낌이 든다. 다음은 필자가 지난 아테네 올림픽 대회 기간 중 장웅 IOC 위원과 동행하면서 메모했던 몇 가지 북한 식 우리말표현이다.

「발길질해야 되갔어! = 혼 좀 내야 되겠어!

「똥내난다」 = (뭔가 수상쩍은)냄새나는구만!

「수표하라! = 서명하라!

「수표하고 리행 해야 되지 않갔어? = 서명했으면 이행해야지

「그렇게 말하면 동요된단 말이야」 = 그렇게 말하면 망설여진다

「생기는 대로 먹고 닥치는 대로 해치우는거다」 = 부딪치는대로 해결해야겠지

「배꼽이 뚝 튀져나와도록 먹자꾸나」 = 허리띠 풀고 실컷 먹자

「발킁내 나도록 돌아다녔어」 = 이리저리 한참 돌아다녔어

「절구통에 치마만 씌워나도.... = 치마만 두르면....

「야들시」 = 여덟시

(술잔 받으면서) 일 잘 하갔습네다! = 건배! 위하여!

「요란하구나」 = 대단하구나

「일없소! = 괜찮소!

「시집올때 웅성웅성 했다고 그래」 = 시집올때 말이 많았다지?

「꼬득이지 말라우」 = 꼬시지 말라구

「정 붙었구만」 = 친해졌군

「기러다 간판 맞는다」 = 그러다가 얼굴에 한방 맞는다

「구두식사 많이 했시다」 = 식사 제의만 여러 번 받고 실제로 식사한적은 없다

「입 꽉 다물라. 기리치 않으면 양쪽에서 총 맞는다」 = 말 옮기면 양쪽에서 비난받음

「북쪽에서 큰 물난리 났을 때... = 북쪽에서 홍수 났을 때...

「골짜기가 깊어야 물이 고인다」 = 그릇이 커야 사람이 모인다

「백 번 물으면 백 번 웃으며 대답하자. = 항상 변함없이 성의 있게 대하라

「백 번 주문하면 백 번 웃으며 봉사하자」 = 항상 변함없이 즐겁게 일하자

「믿음은 충신을 낳고 의심은 배신을 낳는다」 =(그네들 장군님 어록을 인용하면서)믿고 대해야 신뢰하게 된다.

「相好 不如 身好, 身好不如心好」 = 얼굴 좋은 것은 신체 좋은 것만 같지않고, 신체 좋은 것은 심성 좋은 것만 같지않다」

60이 넘으면 죽음이 눈썹 위에 있고, 내려오면 눈감는다」 = 60세가 넘으면 죽음이 가까워졌다는 것을 알고 대비하라는 뜻」

「늙으면 앉고 싶고 앉으면 일어나기 싫고 앉아 있으면 꾸벅꾸벅 졸고, 누우면 눈이 말똥해진다」 = 이북에서 나이 들면 생기는 현상을 표현한 말」

「남정네 아랫도리에 좋습네다」 = 정력에 좋다

「들박이」 = 들뱀

「탁배기」 = 탁주, 막걸리

「두꺼비 한 마리 있네? = (진로)소주 한 병 있소?

「연애 질하는 이야기」 = 스캔들

「구석차기」 = 코너 킥

「물 속 뛰어들기」 = 다이빙

「보장성원」 = 지원임원

「일꾼」 = 요원

「사업 수첩」 = 업무일지

「어름 뽀숭이」 = 아이스크림

「심장에 남는 사람」 = 인상 깊은 사람

「오네월 개 헤떼기다」 = 오뉴월 개 혓바닥처럼 축 처졌다

「악질적으로 다니누만」 = 끈질기게/독하게 다니는구먼

「대상하기 힘들다」 = 상대하기 어렵다

「간단티 않아」 = 쉽지 않아

「돼지 발족」 = 돼지 족발

「날래 조지라! = 빨리 달려라!

「연대성(solidarity) = 단결

「용서 없는 시간의 흐름」 = 사정없이 흐르는 시간

「곡절 많고 각이한」 = 사연 많고 여러 가지 각각 다른

「대인 예술」 = 대인관계 기술


Posted by 윤강로 (Rocky Y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