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외교'에 해당되는 글 2257건

  1. 2020.09.10 스포츠외교현장이야기실록102편(서울대 Dream Together Master과정 특강 및 스포츠외교의 가치)
  2. 2020.09.09 스포츠외교현장이야기실록101편(대한민국 국제화 및 세계화의 요람搖籃 한국외국어대학교/HUFS 스포츠 외교 요람Cradle)
  3. 2020.09.07 스포츠외교현장이야기실록100편(북한 평양의 태릉선수촌 청춘 거리 태권도 전당 및 묘향산 방문 OST)
  4. 2020.09.06 스포츠외교현장이야기실록99편(스포츠외교수집품 Tiger호랑이 호돌이 호순이 수호랑 백두산 호랑이 올림픽호랑이 총집결)
  5. 2020.09.05 스포츠외교현장이야기실록98편(秘史부산2002아시안게임유치 및 개최 스포츠외교협상통한 난관 극복 및 필자 부산명예시민위촉 OST)
  6. 2020.09.04 스포츠외교현장이야기실록97편(올림픽 뱃지 수집은 취미이자 스포츠박물관 건립의 동기부여 OST)
  7. 2020.09.03 스포츠외교현장이야기실록96편(Baden-Baden 대첩 서울1988올림픽유치위원장 대한체육회장 故 정주영 회장과의 만남 (The late CHUNG Ju-Yung, Founder President/Chairman of Hyundai Group and Seoul1988 Bid Committee & KOC P..
  8. 2020.09.02 스포츠외교현장이야기실록95편(秘話II IOC배당 KOC마케팅수입금 2배이상 증액 외화획득 기여 OST(Our Story Telling)Update
  9. 2020.09.01 스포츠외교현장이야기실록94편(秘話 Salt Lake City 2002동계올림픽 한국 태극기를 북한 인공기로 오기한 올림픽선수촌 공식사과 서한의 교훈 OST(Our Story Telling)
  10. 2020.08.31 스포츠외교현장이야기실록93편(세계만방에 태극기휘날리다)
스포츠 외교2020. 9. 10. 11:03

[스포츠외교현장이야기실록102(서울대 Dream Together Master과정 특강 및 스포츠외교의 가치)]


 

2020821() 서울대 강준호 교수(서울대 기획실장 겸 체육과 교수)의 초빙으로 서울대를 플랫폼(Platform)으로 국책사업의 일환이기도 한 2013년부터 진행해 온 개발도상국 차세대 스포츠 인재 참가자를 대상으로 한 2020년도 첫 번째 Dream Together Master(DTM)과정 스포츠 명사 특강(Sport Celebrity Special Lecture)을 실시하였다.


특강에 앞서 강준호 교수의 초대로 서울대 교수회관에서 점심식사를 겸한 오찬 간담회를 가졌는데 강준호 교수의 DTM에 대한 남다른 열정과 미래 비전을 생동감 있게 느낄 수 있었다.


 

(서울대 강준호교수<서울대 기획실장>과 필자)

 

필자를 포함하여 대다수의 한국인들이 공통적으로 내재된 차별적 교만인 미국과 유럽 등 20여 개국을 제외한 180여개국 나머지 대다수 지구촌 국가들은 안중에 없었다는 성찰에 가까운 관찰에 찔림이 걸어 들어왔다.


대한민국은 원조수혜국(Beneficiary-Nation)에서 원조공여국(Benefactor-Nation)으로 탈바꿈한 유일한 나라(One and Only Recipient-Turned-Donor Country)임에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 드린다.


대한민국은 이제 인류 공동체(Human Community)에 선한 영향력을 발휘해야 할 책무를 가지고 서울대학교 Dream Together master(DTM)과정을 통해 스포츠 분야에서도 보다 많은 세계인들이 그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한다는 강준호 교수의 철학과 비전 제시에 가슴이 뭉클해 졌다.


DTM은 간단히 설명하자면 미래 스포츠인재들을 발굴(Recruitment)-교육(Education)-네트워킹(Networking)함으로 개발도상국 스포츠인재들이 글로벌 역량을 갖춘 리더군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국책사업이다.

 


 

DTM IOC가 전 세계 NOCs(국가올림픽위원회)를 대상으로 실시해온 Olympic Solidarity Program의 취지와 흡사하지만 보다 구체적이고 미래 지향적인 점에서 차별화되는 것 같다.

강교수의 DTM을 통한 대한민국 국격 향상을 염두에 둔 원대한 포부와 인류공동체를 향한 애정과 비전과 철학에 대하여 존경을 표한다.


필자가 2004년부터 운영하고 있는 국제스포츠외교연구원(ISDI: International Sport Diplomacy Institute)이 가까운 장래에 사단법인으로 등록하게 되면 본격적으로 한국뿐만 아니라 가까운 이웃나라들과의 Networking을 통하여 차세대 스포츠외교관 양성과 네트워킹을 통해 함께 나누며 성장’(Sharing, Caring and Growing Together Through Networking)하는 핵심가치 공유를 목표로 프로젝트를 진행하려고 한다.

 


 

올림픽의 가치는 탁월함(Excellence)-우정(Friendship)-존중(Respect)이다.

오찬 간담회에 이어 14시부터 난생처음 시도해 보는 화상 특강(Video Online Special Lecture)을 실시하였다. 2020년도 서울대 DTM 스포츠 명사 초빙 첫 특강(2020 DTM Sport Celebrity First Special Lecture)라고 DRM원장인 강준호 교수가 개발도상국 수강생들에게 언급하면서 필자(Rocky Yoon)를 소개해 주었다.

필자의 특강 제목은 서울1988올림픽 및 평창2018동계올림픽의 성공요인(Success Factors of Seoul1988 & PyeongChang2018 Games)’이었고 부제는 지속가능 한 올림픽 유산(Legacies in Action)이었다.

한 시간 가량 PPT를 통해 서울올림픽의 7가지 캠페인 및 유산(Seven-Ups and Legacies)에 대하여 집중 분석을 토해 올림픽이 글로벌 사회에 기여하여 온 특장점과 지속 가능한 유산에 대하여 강의 하였다.



 

온라인 강의는 비대면(Untact)이자 혼자 독백하는 것 같아 어색하기도 하고 쌍방향 소통이 부재하다 보니 감동 면에서 효과가 떨어지는 것 같았다.

질의 응답도 예상보다 활발하지 못했던 이유도 비대면 강의 라는 정황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DTM이 향후 글로벌 스포츠 분야 Davos포럼이상으로 거듭나기를 기대해 본다.

  


Posted by 윤강로 (Rocky YOON)
스포츠 외교2020. 9. 9. 10:25

[스포츠외교현장이야기실록101(대한민국 국제화 및 세계화의 요람搖籃 한국외국어대학교/HUFS 스포츠 외교 요람Cradle)]

 


오랜 만에 모교(Alma Mater)인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 소재 한국외국어대학교(HUFS: Hankuk University of Foreign Studies) 교정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7080세대 학번으로 재학 당시 낭만의 상징이자 성지처럼 즐거워했던 미네르바 동산이 자취를 감추었고 그 자리에 각종 건물이 들어선 것이 눈에 띄었다.

 

단과대학으로 출발한 모교가 이제 버젓이 종합대학교로 발 돋음 한 것이 자랑스럽기도 했지만 어쩐지 허전한 느낌을 떨쳐 낼 수가 없었다.

 


 

년 전에 2년 연속 대학입학사정관으로 면접 등 모교에 재능기부 활동에 동참한 바 있었고 영어대학 동문회 사무총장으로 몇 년 간 활동한 적이 있어서 가끔 이문동 모교를 방문한 바 있어 생뚱 맞지는 않았다.

 

(사진 위: 영어대학동문회 사무총장으로 연례총회 행사 사회를 영어과 출신답게 영어로 진행하였다/아래 사진: 영어대학동문회 총회 직후 좌로부터 필자<76학번>, 윤용로 전 기업은행 및 외환은행장<74학번>, 엄홍길 동문<세계의 고봉인 히말라야 14좌를 한국 최초로 완등했다. 이어 얄룽캉, 로체샤르까지 등반해 세계최초로 8,000m이상인 16좌 모두를 완등한 기록을 세웠다>, 박철 외대총장, 임경자 영어대학동문회장, 김인철 외대 부총장>현 외대총장>)

 


모교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휴대폰 카메라에 변모된 모교 건물들을 담아 보았다. 외대 정문 바로 옆 왼쪽에 자리잡은 사이버외대가 새롭게 느껴졌다. COIVD-19 Pandemic 시대(Post Corona Era)를 미리 내다 보고 설립한 것처럼 선견지명으로 느껴지기도 하였다.

 

외대 본관에 들어가 보니 필자 이름이 눈에 띄었다: “윤강로 세미나실” “10억 이상 기증자 명단에도 어김 없이 필자 이름이 들어 있어 뿌듯한(?) 느낌 마저 들었다. 물론 동명이인이자 같은 집안 인척 간인 동명이인(힌디과 77학분)이며압구정 미꾸라지란 별명으로 한국 증권가 선물 투자의 귀재로 명성이 자자한 동명이인인 또 다른 윤강로동문이 모교 발전을 위한 장학금으로 30억 이상 쾌척(快擲)한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시내 은행에 방문해서 계좌를 트다 보면 모교동문후배인 은행원들이 필자를 장학금기증동문인 윤강로로 오인하여 존경 어린 시선과 말을 걸어 올 때마다 민망하기도 하다. 일일이 설명해 주면서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좌측이 필자 윤강로, 우측은 외대 동문인 압구정 미꾸라지 윤강로)

 


필자가 외대에 입학해서 재학기간 동안 부지불식간에 많은 국제활동기회가 주어졌다.

(1)국제핸드볼연맹(IHF)주관 국제심판 강습회 통역-

(2)INTERPOL사무총장방한 시 당시 유흥수 경찰청 치안감 통역-

(3)42UIT세계사격선수권대회 통역단장 겸 미국선수단 통역-

(4)1UIT세계공기총사격선수권대회 통역단장 겸 미국팀통역-

(5)박스컵 국제축구대회 미국 팀 통역-

(6)8FIBA세계여자농구선수권대회 통역단장 겸 미국팀 통역-

(7)Yongsan American High School 교장 면담을 통해 3학년 여학생들과 외대 영어과 3년생들과의 미팅 주선-

(8)외대학도호국단 주최 전국영어수필대회 가작 입상-

(9) 용산 남영동 소재 USO(United Services Organization)에서 Volunteer3년 간 봉사하며 영어 실력 배양-

(10) 회현동 소재 Alliance Francaise프랑스대사관 부설 불어 학원에 겨울방학 3개월간 불어 집중 학습으로 불어 실력 일취월장-

(11)4학년 재학생 시절 외대 부설 동시통역대학원(-불 동시통역과)입학시험 합격 등

 


 


이 같이 외대에서 갈고 닦은 실력과 과외 활동(Extracurricular Activities)등은 하나님이 예비하시어 필자를 단련하시어 스포츠외교활동을 위해 정금 같이 나아 가게 위한 훈련의 여정이라고 생각한다.




동시통역대학원 재학 시 유럽위탁교육 결격사유로 도중에 군필을 위해 군 입대하여 KATUSA 는 아니었지만 최전방부대에서 미군병사들과 합동훈련을 통한 교류를 위해 군사 영어 습득의 기회 또한 예사롭지 않은 하나님의 예비하심으로 느껴진다.


군 제대 1년 전인 1980930일 서독 Baden-Baden에서 서울1988올림픽유치성공이 이루어졌고 제대 3개월 후 대한체육회/대한올림픽위원회 국제과 특채 입사로 시작된 필자의 스포츠 외교 초년병부터 30여년 간 이어진 모든 여정은 마치 필자가 스포츠외교를 위해 태어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였다.  


필자의 지난 40년 간 스포츠외교활동을 가능케 했던 것은 모교인 외대의 힘이기도 하다. 그래서 외대는 필자에겐 스포츠외교의 요람(搖籃/Cradle)인 것이다. 다시 한번 외대에 감사하고 이 모든 것을 예비하시고 이끌어 주시며 길을 열어 주신 하나님께 감사 찬양 올려 드린다.

 




Posted by 윤강로 (Rocky YOON)
스포츠 외교2020. 9. 7. 10:09

[스포츠외교현장이야기실록100(북한 평양의 태릉선수촌 청춘 거리 태권도 전당 및 묘향산 방문 OST)]

 

필자는 1995년 제2회 동아시안게임 개최지로 예정되었던 평양에서 2년 전인 199310월 개최된 동아시아 대회 이사회 회의 참석차 첫 방문하였고. 6년 뒤인 2001년에는 김운용 당시 IOC부위원장겸 WTF총재 겸 KOC위원장과 함께 두 번째 평양을 방문한 바 있다.

 

(1993년 평양에서 개최된 제7차 동아시아대회협의회(EAGA)이사자격으로 참석한 이사회 각국 대표들과 함께(당시 박명철 북한 NOC위원장 겸 북한체육지도위원회 위원장<체육상/첫째 줄 6번째>>필자는 두 번째 줄 4번째)

 

2001년 김운용 IOC부위원장을 필두로 최재승 당시 국회 문광위원장과 이금홍 WTF사무총장 및 필자(KOC국제사무차장) 4명의 대표단이 방북 사절단의 구성원이었다

우리 대표단 일행은 인천국제공항에서 베이징 행 비행기를 타고 베이징에 도착 한 후 중국올림픽위원회(COC)관계자들의 영접을 받고 당시 하진량(Zhenliang HE) IOC부위원장에 베푼 만찬에 참석하였다.

베이징호텔에서 1박한 다음날 베이징 주재 북한대사관에서 미리 평양 측으로부터 사전 통보된 수순대로 북한 입국비자를 발급받았다.

또 다시 중국올림픽위원회 위원장 증 중국 측과 만찬을 갖고 베이징 도착 2일 후 베이징국제공항에서 베이징 발 평양 행 북한 비행기 편(고려항공)으로 평양 땅을 밟았다.

 

 

(2001년 북한 방문에 따른 통일부 방북허가증, 고려항공 티켓, 북한방문 사증, 고려항공 비행기 시간표 등)

 

평양 순안 공항에 도착하여 모란봉 초대 소에 머물다가 다음날 장웅 북한 IOC위원 및 북한올림픽위원회 간부들과 남북체육관련 협의 회의를 가졌다. 점심에는 옥류관에서 평양냉면을 시식하였다.

 

 

(2001년 평양 체류 시 숙소로 제공된 모란봉 초대소 뒷산에 위치한 을밀대에서(윗 사진) 아래사진은 남북한 양측 협의 회의장면)

 

 

그날 오후에는 한국의 태릉 국가대표훈련원을 방불케 하는 평양 소재 청춘 거리국가대표 체육 센터를 방문하였는데 태권도전당을 비롯한 각종 체육시설이 한 군데 운집하여 있었다.

태권도 전당에서 보았던 북한 태권도시범은 고구려의 후손다운 막강 실전 격투기 식의 면모가 투영된 태권도의 기상이 엿보였다.

 

(북한태권도는 국제태권도연맹(ITF)소속으로 실전태권도에 가깝다.)

 

그 다음날에는 평안북도 구상 출신 김소월 시인의 영변의 약산(藥山) 진달래꽃이란 말로만 듣던 령변’(영변)을 거쳐 지나 가자니 고교시절 암송했던 김소월의 시(진달래 꽃)가 떠올라 읊조려 보았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오리다

영변에 약산(藥山)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령변을 지나 묘향산 초대소로 향했다. 묘향산 입구에 다다르자 말그대로 산세가 기묘하고 묘한 향내가 진동하였다. 그래서 묘향산일 것이라고 나름 해석해 보았다. 묘향산 초대소에서 1박 후 묘향산에 위치한 보현사 절과 국제친선전람관도 시찰하였다.

 

 

한국 5대 사찰 중 하나인 보현사(普賢寺)는 조선시대 휴정(休靜)서산대사(西山大師)가 머문 호국불교의 성지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

그곳에서 조선미인도를 구입하였다. 조선 미인도 족자에는 임 향한 일편 단심 변할 줄 있으랴라는 구절을 통해 조선미인들의 절개를 느끼기도 하였다.

 

(북한 명품 그림 중 조선 미인도 족자에 쓰인 "임 향한 일편 단심 변할 주 있으랴"라는 문구가 조선시대여인의 절개와 기상을 보여 주는 것 같다)

 

Posted by 윤강로 (Rocky YOON)
스포츠 외교2020. 9. 6. 11:00

[스포츠외교현장이야기실록99(스포츠외교수집품 Tiger호랑이 호돌이 호순이 수호랑 백두산 호랑이 올림픽호랑이 총집결)]


 

필자가 스포츠외교현장에서 수집한 호랑이 그림을 여러 장 소장하고 있다.

주로 북한(평양)과 중국 등지에서 수집한 자수(embroidery)와 페인팅작품이다.

 

 

서울1988올림픽 마스코트로 전세계 올림픽가족으로부터 사랑을 받았던 호돌이-호순이30년 만에 수호랑이란 평창2018동계올림픽 마스코트 후손을 생산하여 지난 2020513일 자 소식에 따르면 IOC가 직영하는 올림픽채널이 5월 트위터 공식계정을 이용해 올림픽 마스코트 11 투표를 벌이는 토노먼트를 실시하였다고 한다.

 


 

그 결과 수호랑-반다비 평창2018 동계올림픽 및 패럴림픽 마스코트는 파죽지세로 결승에 올라 경합상대인 Tokyo2020 마스코트인미라이토와 소메이티83% : 17%라는 압도적인 차이로 따돌렸다.

이에 올림픽채널은 트위터에 수호랑-반다비 사진과 함께 “These are the winners”(이들이 우승자임)이라는 글도 올렸다.

또 역대 외고의 올림픽 성화봉을 선발하는 토너먼트에서도 평창2018 동계올림픽 성화봉이 1위를 차지 한 바 있다.


 

 

 

 

 


 

 


Posted by 윤강로 (Rocky YOON)
스포츠 외교2020. 9. 5. 12:05

[스포츠외교현장이야기실록98(秘史부산2002아시안게임유치 및 개최 스포츠외교협상통한 난관 극복 및 필자 부산명예시민위촉 OST)]

 

부산광역시의 2002년아시안게임유치성공과 개최성공의 뒤안길에는 파란만장한 스토리가 숨쉬고 있다. 스토리(story)가 스펙(spec)을 이기는 증거가 남아 있다. 

 

(좌로부터 우병택 부산2002 AG유치위원장, 필자, Sheikh Ahmad OCA회장)


 

1960년대 한국이 아시안게임을 유치하고도 국내 여건이 여의치 않아 눈물을 머금고 대회를 반납하여 태국의 방콕이 한국 대신 아시안게임을 치러준 웃지 못할 한국스포츠외교사의 씁쓸한 秘史가 있다.

 

1988 서울올림픽대회를 유치한 「바덴바덴 대첩」에 이은 1986 서울아시안게임 유치는 서울올림픽 성공적 개최를 확고히 하기 위한 전초전이자 실전 워밍업(Warming-up) 겸 리허설 성격이 짙었다.

 

따라서 1986 서울아시안게임은 그때까지의 역대 대회 중 조직·운영 등 모든 면에서 최고·최상·최대의 대회로 평가되었다.

 

그 당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체육 등 우리나라 각 부분에 걸친 크고 작은 행사나 모임에서 심지어는 결혼식 주례사에서도 「′86,′88 양대회의 성공을 위하여」란 문구는 필수불가결한 약방의 감초처럼 회자하였었다.

 

1986 서울아시안게임에 이어 중국의 수도 Beijing 2000년 올림픽 유치를 염두에 두고 1990년 제11회 아시안게임을 유치하였고, 1994년 제12회 대회는 일본의 히로시마가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원폭 이미지 개선을 위해 유치하였으며, 1998년의 제13회 대회는 태국의 방콕으로 개최지가 확정되었다. 그 무렵인 1993년 가을, 대한민국 제2의 도시인 항도 부산이 2002 아시안게임 유치에 출사표를 던졌다. 유치 경쟁도시는 국제대회유치를 통해 국가위상을 공고히 하기 위한 사전 포석으로 정부가 전폭적으로 지원하던 대만 제2의 도시 카오슝이었다.     

 

각국의 서열 2위 도시끼리의 유치 전은 이렇게 막이 올랐다.


유치(bidding or bid)란 말은 일반적으로 대형프로젝트를 입찰경쟁을 통해 따온다는 의미로서 물·불 안 가리고 모든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하여 목표달성을 위해 전략적 행동지침에 의해 사방팔방 뛰는 현대판 국가간  「총성 없는 전쟁」이라고 볼 수 있다.

 

1981년 당시 서독의 Baden Baden에서의 1988 서울올림픽 유치도 이런 개념 아래서 현대 그룹의 총수였던 故 정주영 회장을 유치위원장으로 임명하여, 예산·회계 범주에서 아무런 제약 없이 유치전을 치를 수 있도록 하였으며, 2002 FIFA 월드컵 축구대회 유치전을 위하여 구평회 LG 그룹 총수와 정몽준 현대중공업 회장 겸 FIFA 부회장 등을 중심을 유치위원회 수뇌부를 구성한 바 있다.  

 

 

(Zhenliang HE 중국 IOC부위원장과 환담 중인 정주영 대한체육회장 겸 KOC위원장, 가운데는 통역 중인 필자)

 

 

이와 같은 맥락에서 부산아시안게임 유치 위원회는 인맥이 두텁고 수완이 출중하며 성공한 사업가 출신의 우병택 부산광역시 의회 의장을 유치위원장으로 추대하였다. 그리고 도종이 국회의원, 이영 부산 상공회의소 상근 부회장, 박관용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 김기재 당시 부산시장 또 강병준 부산·경남지역 민간방송회장 등을 비롯한 부산시 상공인들과 부산 출신 국회의원들 그리고 부산언론단체장들과 체육인들이 동참한 삼위일체의 유치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좌로부터: 이란 NOC사무총장, 필자, 우병택 유치위원장, 도종이 유치위 부위원장, Afsharzade이란 NOC 사무총장)

 

 

우병택 유치위원장은 리더십, 판단력 그리고 순발력이 탁월했고 민간 기업들은 프로젝트 입찰경쟁 및 수주과정에서 예산, 회계상의 절묘한 실전적 유연성을 발휘하고 상대방을 제압할 줄 아는 노하우 등을 보여줬으며 부산광역시는 행정적 협조를 전폭적으로 제공하여 유치기금모금과정부터 유치 전문가 발탁, 유치활동, 유치 성공에 이르기까지 순탄하고 단합된 기상을 보여줬다.

 

필자는 당시 KOC(대한체육회) 국제부장 자격으로 아시안게임 유치 공식 채널인 KOC의 김운용 위원장 겸 IOC 부위원장과 함께 부산아시안게임 유치위원회 발족 시부터 유치활동지원 실무 총괄책임자로서 부산유치와 인연을 맺었다.

부산아시안게임 유치를 위한 한국 스포츠외교의 한마당은 이렇게 펼쳐졌다.

 

1982 9월초 KOC에 특채되어 1985년 입사 3년 만에 최연소·최단기간 과장으로 발탁된 관계로 당시 대한체육회 직원들로부터 관심과 질시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입사하고 2개월 후 제9회 뉴델리 아시안게임 참가 한국 선수단 선발대, 섭외임원 겸 창립 OCA(아시아 올림픽 평의회: Olympic Council of Asia) 총회 회의 실무 대표로서 1993년 당시 10여 년간 각종 OCA 회의 조직 및 참가 등을 통해 회원국 NOC 대표들과의 뜨끈뜨끈한 친목도모, OCA 수뇌부 및 인맥들의 성향과 동향, OCA 헌장규정, 아시안게임 유치 전에 입각한 OCA 취향 등을 분석하고 있던 터라 OCA 실무전문가가 되어 있었다. 소위 「물 만난 고기」격이었다. 

 

IOC가 미국 Salt Lake City2002동계올림픽 유치 과정에서 불거져 나온 부패 스캔들로 인해 시작된 IOC 개혁과정을 통해 1999년부터 적용하기 시작한 IOC 윤리규정(Ethical Code)에 명시된 올림픽대회유치 행동지침(Code of Conduct)과 같은 종류의 제약은 OCA가 주관하는 아시안게임의 유치과정에는 아직 적용되지 않고 있으며 더구나 부산유치 당시인 1990년대에는 더욱 무풍지대였다.

 

따라서 유치과정에서 구사할 수 있는 작전이 무궁무진하였다. 정부의 막강한 지원을 받고 있던 경쟁도시 카오슝의 경우도 별의별 방법과 수단을 모두 동원하여 득표작전을 벌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필자는 김운용 KOC 위원장에게 건의해 쿠웨이트 소재 OCA 본부를 방문하여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고자 애썼다.

 

세 치 혀로써 상대방을 제압하여 한민족 최초의 외교달인이신 「서희 장군」의 후손(필자의 아내가 달성 서씨임)으로 드디어 호랑이 굴로 뛰어들었다.

 

방콕을 거쳐 지루한 여정 끝에 OCA 본부가 있는 쿠웨이트에 도착하였다. OCA 창립 때부터 서로 잘 알고 스포츠외교적 우정 관계가 돈독했던 Abdul Muttaleb Ahmad OCA 사무국장이 공항으로 마중 나왔으며, 공항 귀빈실을 통해 제반 수속을 마친 후 준비된 대형 미국산 리무진을 타고 OCA 본부로 행했다.

 

 

(Muttaleb Ahmad OCA사무국장, Anselmo Lopez 초대 IOC Olympic Solidarity 위원장, 필자)

 

 

당시 OCA로서는 ′86, ′88 양 대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하였으며, OECD 국가 반열 대상국가인 대한민국의 경제력과 탄탄한 조직력 등을 감안해 볼 때 OCA의 재정 마련의 토대가 될 아시안게임 마케팅 등을 순조롭게 이끌어 낼 수 있는 대한민국의 후보도시인 부산광역시가 개최도시로 선정되는데 반대가 있을 수 없지만, 경쟁도시인 대만의 가오슝 대표단이 상당규모의 OCA 발전자금기탁, OCA 본부 전산화, OCA 회원국 선수단에 대한 왕복 항공료 및 체재비 완전부담 등의 파격적인 유치 공약을 공공연히 흘리고 있던 터라 OCA 측의 부산광역시 유치 협조를 약속 받는 정면승부는 같은 수준의 조건을 제시하지 않고는 좀처럼 실마리를 풀 수 없었다.

 

다시 전열을 정비하여 제2차 담판에 들어갔다. 다음날 필자는 작전을 바꿔 우선 개최도시 결정 OCA 총회를 홈 그라운드인 대한민국으로 유치하기 위한 협상에 들어갔다. 대한민국의 국제적 위상과 김운용 KOC 위원장 겸 IOC 부위원장의 국제적 스포츠 계의 파워, Samaranch IOC 위원장의 한국 및 김운용 박사에 대한 신뢰 등이 모두 동원되었다.

 


(좌로부터 필자, 카자흐스탄 NOC위원장, 비서, 부산유치위원, 이영제3대 부산시의회의장)

 

유치도시가 있는 국가에서 OCA 총회를 개최할 수 없다는 반론에 대하여 필자는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 개최권이 국가가 아닌 도시에 주어진다는 명분을 내세워, 유치도시인 부산광역시가 아닌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서 개최한다면 OCA 헌장규정에도 위배되지 않는다고 설득하였다. 천신만고 끝에 2002년 아시안게임 개최도시가 결정되는 1995 5 OCA 총회가 서울에서 개최되도록 합의되었다.

 

이 같은 불공평한(?) 합의에 대한 대만 NOC 측의 강력한 항의를 무마하기 위해 OCA 42개 전 회원국 NOC 사무총장이 참석하는 아시아 NOC 사무총장 세미나 개최권을 총회 2개월 전인 1995 3월경 대만 카오슝(高興)에 전격 부여하였다. 피장파장, 엎치락뒤치락 이었다.


각 회원국 NOC 사무총장은 NOC 위원장과 함께 개최도시 결정투표권을 행사하는 주체세력이기 때문에 OCA 서울총회 개최 2개월 전 대만 정부 그리고 NOC 및 카오슝 유치후보도시로서는 투표권자들에 대한 물량공세 등 득표작전을 아무런 제약 없이 무제한 효과적으로 펼 수 있는 절호의 찬스로 최대한 활용하리라는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었다.

 

김운용 KOC 위원장의 지침에 의거, 필자는 KOC 사무총장대행 자격으로 카오슝 개최 OCA 회원국 NOC 사무총장 세미나에 참석하여 한국대표역할을 하였다.

필자를 제외한 모든 참석대표들에 대한 각종 작업이 실시되었다. 세미나 마지막 날 새벽 2시경 필자와 절친한 NOC 대표가 필자객실로 찾아와서 작업의 내막을 귀띔해 주었다. 카오슝에서 귀국하여 김운용 위원장에게 관련 내용을 보고한 후 이에 대비한 뒤집기 작전에 돌입하였다.

 

 

(김운용 KOC위원장에게 전략 구상 보고 중인 필자)

 

 

김운용 위원장은 OCA 서울총회에 Samaranch IOC 위원장을 특별 초청하였고 Samaranch IOC 위원장은 총회 회의석상에서 ′86, ′88 양 대회를 역대 최고의 대회로 개최한 대한민국과 KOC의 저력에 대하여 강조하면서 간접적으로 부산유치지원사격을 아끼지 않았다.

 

OCA 총회 참석 및 카오슝 유치를 진두 지휘하는 리더 격인 Feng-shu CHANG 대만 NOC 위원장은 총회 전날 김포국제공항 도착기자회견을 통하여 2002 아시안게임 개최도시 선정과 관련, OCA 서울총회가 비밀투표로 개최도시를 선출한다면 카오슝이 당선될 것이라고 호언장담하였다는 이야기를 들은 필자는 총회 전날 KOC 직원들과 함께 투표 대비 총회장 꾸미기 철야작업에 들어갔다. 이미 각 회원국에 대한 테이블 배치(Setting)가 완료된 상태에서, 각 회원국 NOC 대표들에게 「편안한(?) 투표 분위기」조성을 위한 테이블 재배치 작업을 시작한 것이다.

 

국가별 영문 알파벳순으로 이미 배치한 각 테이블의 위치 중 대만 NOC가 회의장 중간 뒤쪽에 위치한 관계로 혹시 카오슝 측 작업에 관련된 NOC 대표들이 대만 NOC 대표들의 감시를 의식하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기존 국가별 영문 알파벳을 바꿀 순 없어서 테이블을 세로 방향으로 길게 횡으로 늘려 기술적으로 대만 NOC 테이블이 맨 우측 앞 열에 오게 하는 데 성공했다.

총회 당일, 2002 아시안게임 개최도시 선정 투표에 앞서 양 후보도시의 프레젠테이션이 있었다. 먼저 카오슝 대표단이 이미 예견되었던 공약(OCA 발전기금기탁, 회원국 NOC 참가선수단 왕복항공료와 체재비 제공 및 카오슝 무료 전지훈련 제공 등)을 발표하자, 부산광역시 김기재 시장과 우병택 유치위원장이 필자를 급히 찾았다.

 

이들은 총회장 바깥 대기장소에서 필자에게 카오슝 유치 공약에 맞불을 놓을 수 있도록 영문 연설문을 수정해 달라는 요청을 했다. 필자는 공통 해당 부분만 영어로 수정해 주었고 곧이어 부산 유치도시대표단 프레젠테이션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장내 정리정돈을 위한 10분간의 휴식시간이 주어졌다.

 

곧이어 벌어질 투표방식에 대하여 OCA 측이 비밀투표로 진행할 것이라는 급박한 정보를 입수한 필자는 단상으로 달려가 김운용 KOC 위원장에게 OCA 헌장의 규정에 의하면 참석대표 1/3 이상이 찬성할 경우 투표방식을 거수방법(Showing hands)으로 하도록 되어 있다고 보고하자, 즉시 조치를 취했고 OCA 회장은 A. de O'Sales OCA 규정위원장(홍콩)과 규정관련 협의 후, 각국 회의대표들의 의견을 묻자 1/3이 훨씬 넘는 대표들이 거수투표방식에 찬성했다. 이것이 막판 판세를 결정한 분수령이었다.

 

투표권이 없는 게스트나 옵저버, 유치 대표단들이 모두 총회장 밖에서 결과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고, 필자는 OCA 총회 조직위 실무총괄책임자로서 투표권자들이면서 필자와 허물없이 막역한 친분 관계인 아시아대륙NOC 대표들의 테이블을 종횡무진 헤집고 다니면서 거수투표방식결정에 대해 무언의 지지호소를 하고 다닌 것이 주효했다.

 

Sheikh Ahmad OCA 회장이 먼저 "부산을 개최도시로 선호하는 대표들은 손을 들라."("Anybody in favor of Busan, please raise your hands!")고 하자 당시 42개국 NOC 대표들 중 38개국이 손을 들었으나, 맨 우측 앞 열에 앉아 있던 대만 NOC 대표 석 눈치를 보아가며 들쑥날쑥 손을 드는 바람에 두 번, 세 번씩 표를 세어야 했다.

대만 NOC 대표 석 재배치 효과도 일조한 순간이었다.

나머지 4개국 NOC 대표들은 용감하게 카오슝 지지를 표명하였다.

이미 부산광역시로 개최도시가 확정되었기 때문에 우정 카오슝 지지 표명을 했다는 모 NOC 사무총장의 후일담도 있었다.

 

이로서, 대한민국은 일본(동경, 히로시마)에 이어 수도가 아닌 도시 부산에서 아시안게임을 개최한 도시가 되었고 중국이 1990년 북경에 이어 2010년 수도가 아닌 광저우에서 아시안게임을 개최하는 세 번째 나라가 되었다.

 

OCA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마케팅 사업의 성공적 수행으로 상당한 재정적 수익을 보게 되어 아시안게임도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진화를 시작했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을 2개월 정도 앞두고 OCA는 부산시가 앞서 카오슝과 같은 내용의 유치공약 이행에 불성실하다는 생트집을 잡고 개최도시 이전 운운하며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슈켄트에서 개최된 OCA 집행위원회에서 부산아시안게임 조직위원회(BAGOC) 우병택 집행위원장 등 대회 준비상황 보고 차 참석한 대표단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BAGOC(위원장: 김운용 KOC 위원장 겸직)은 긴급 위원총회를 열고 이에 대한 수습에 나섰다.

 

총회에서는 한기복 BAGOC 사무총장과 BAGOC 국제자문역을 맡고 있는 필자를 수습대표로 결정하였다.

 

당시 Sydney 2000 올림픽 한국선수단 단장대행 겸 선발대장으로 Sydney2000올림픽 현지에서 한국선수단 본단 현지 도착에 따른 통관 및 수송문제, 올림픽선수촌 입촌 절차, 올림픽대회 각 종목별 참가 선수 엔트리 확인 및 ID 카드 발급문제 등에 대해 시드니 조직위 부서별 책임자들과 최종 마무리 협상을 하고 있었던 필자는 본국에서 김봉섭 대한체육회 사무총장으로부터 이 내용을 전달받고 OCA와 이미 약속된 회의 장소인 싱가포르로 날아가 부산에서 합류한 한기복 BAGOC 사무총장과 사전 전략을 논의하였다.

 

 

(협상종결 담판을 짓기 위해 쿠웨이트로 날아가 OCA회장인 Sheikh Ahmad<-2> Muttaleb Ahmad OCA사무총장<-2>과 만났다. 필자<-1> 및 故 한기복 BAGOG 사무총장<-1>)

 

 

OCA와 합의된 내용의 핵심 골자는 BAGOC 측이 앞으로 남은 2년 기간 동안 OCA 부산아시안게임 마케팅사업에 적극 협조하기로 하고 합의내용 불이행 시 불이익 감수 협약서를 작성하고 서명하여 이를 양자가 법적 구속력을 갖도록 제도적 장치 안에 두고 성공적 개최를 위하여 상호 간 협조체제를 강화하자는 내용이었다.

 

양자 간 협약서는 Sydney2000올림픽 기간 중 OCA를 대표하여 OCA 회장과 사무총장 그리고 부산시 및 BAGOC을 대표하여 故 안상영 부산시장, KOC를 대표하여 김영환 명예총무가 각각 서명하였다. (그 당시 홍콩 HSBS은행에 예치했던 계약 불이행 시 보증용 금전 채무 금(Non-Performance Bond)US$2,000만불이 대회개최 후 환율급등으로 부산광역시에 막대한 환차익 보너스도 안겨주었다.)

 

이로써 부산아시안게임 개최지 변경 논의는 없었던 일로 일단락되었다.

우병택 BAGOC 집행위원장과 도종이 국회의원, 이영 부산시의회 의장 등은 부산아시안게임 유치 현장실무 주역이면서, 부산아시안게임 개최지 변경 위기 등 제반 문제 등을 스포츠외교차원에서 해결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한 필자를 「부산명예시민」으로 강력 추천하여 필자는 2000 10 28일 졸지에 한국인으로서 같은 나라인 한국의 부산명예시민(일반적으로 외국인을 명예시민으로 위촉한다-편집자 주)으로 위촉되는 진귀하고 영광스런 기록 보유자가 되었다.






(좌로부터 이광태 부산시 양궁협회장, 권경상 BAGOC마케팅본부장<2014년 인천아시안게임조직위원회 사무총장 역임>, 필자, 안상영 부산시장, 부산시 관계자들)

 


필자의 명예시민증 수여에 견인차 역할을 다 해준 이영 부산시의회 3대의장에게 깊이 감사 드리고 함께 막후에서 화룡점정 역할을 해주었던 故 우병택 부산시의회 초대의장 겸 유치위원장 겸 BAGOC집행위원장과 이를 흔쾌히 받아 들여 내국인인 필자에게 부산명예시민증을 수여한 故 안상영 부산시장에게 다시 한번 감사 드리며 명복을 빈다. R. I. P!

 


Posted by 윤강로 (Rocky YOON)
스포츠 외교2020. 9. 4. 10:05

[스포츠외교현장이야기실록97(올림픽 뱃지 수집은 취미이자 스포츠박물관 건립의 동기부여 OST)]


 

19829월 대한체육회 특채로 입하여 처음 해외 나간 계기는 그해 11월 인도 뉴델리 개최 제9회 아시안게임 이었으며 생애 최초의 올림픽은 LA1984올림픽이었다.

 


 

LA1984IOC의 간섭(?)이나 관리감독이 거의 배제된 유일무이한 대회로써 당시 세계공황으로 이전 대회 보다 두 배 많은 IOC지원금도 받아 냈다. 그 덕분에 대회 흑자(US$25천 만불)규모를 공식적으로 기록하고 반쪽 대회였지만 성공한 대회였다. 상업적이란 비판이 있었지만 향후 올림픽이 황금 알 낳는 거위란 칭호를 받게 한 효시대회라고 할 수 있겠다.

서울올림픽은 휘장 사업 수익금으로 보면 당시 최고 흑자대회였던 1984 LA올림픽 때 그것을 훨씬 상회하는 1,390억 원을 벌어들였다.

 

올림픽 기념 금 은 주화판매로써 SLOOC 1,416억 원을 벌어들였는데 그 중 454억 원은 국내 판매액 이었다고 한다.

 

SLOOC의 전체 사업수익금액은 약 6,695억 원이었는데 TV방영권료를 제외하면 주된 수입원은 휘장사업, 기념주화판매, 복권사업, 광고 기념우표 등이었다.

 

이 사업 수익금에서 올림픽 운영비 등 직접경비를 제외한 약 957억 원이 서울올림픽 사업분야에서 거둬드린 순 수익금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재일동포들이 피땀 흘려 십시일반으로 거두어 준 578억 원의 서울올림픽 성금과 올림픽선수촌 아파트 분양 수입금 등을 합하여 약 3,300억 원(LA1984: 2,500억원)의 흑자를 기록하였는데 이 금액은 역대 올림픽 사상 최대규모로 알려져 있다.

 

사실상 올림픽을 개최하는 국가는 정치적, 외교적 측면에서는 큰 성과거양이 보장되지만 경제적으로는 큰 손실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 과거의 통념이었으나 1984 LA올림픽을 전환점으로 올림픽 개최가 경제적으로도 흑자를 가져올 수 있다는 가능성의 씨앗을 심어 주었다.

 

올림픽개최의 흑자 여부는 올림픽관련 사업의 성격에 준하여 올림픽조직위원회예산(OCOG Budget)과 비 올림픽조직위원회예산(Non-OCOG Budget)의 편성여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어쨌든 필자는 약관 28세로 당시 한국선수단 섭외 임원(본부 임원) 겸 선발대 일원으로 미국 땅을 처음 밟게 되었다. 또한 한국선수단 막내 겸 국제선수단장대행(?)으로 대회조직위원회(LAOOC)와의 연락이나 각국선수단장회의에 대표로 참석하면서 올림픽선수촌으로 배정 받은 남가주대학교(USC)캠퍼스와 종목 별 경기장 구석구석 날마다 돌아 다니며 종횡무진 활보하였다.

 

각 가지 재미 있는 풍경이 펼쳐지고 이었다 그 중에 올림픽선수촌 안팎과 경기장별 이곳 저곳에 좌판을 벌이고 삼삼오오로 모여 뭔가를 흥정하며 왁자지껄한 소그룹 모임이 진행되었는데 다가가 보니 그것이 바로 생애 처음 접해 보는 올림픽 뱃지 교환장소(Olympic Pin Trading Sites)였다.

늘 가지고 다니던 한국선수단 뱃지와 KOC뱃지 등을 들고 다니며 한국선수단 임원으로는 뱃지 교환 원조 멤버가 되었다. 미국인들의 올림픽 뱃지 사랑은 남 달라서 자원봉사로 일하는 미국인들에게는 뱃지가 가장 선호하는 선물 중 우상이었다. 심지어 사설 주차장에서도 뱃지 한 개면 주차가 공짜일 정도였다.

 


 

올림픽 기간 중 뱃지가 최고 인기 품목일 정도로 올림픽의 주가 높았다고 할 수 있겠다. 그 후로 30여년 간 동 하계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 등에 한국대표선수단 단골 섭외임원으로 전세계를 다니며 사전에 다량의 교환용 뱃지를 구매하여 현지에서 올림픽 뱃지 교환에도 열성을 보이면서 수집한 것이 올림픽 관련 뱃지 수집품이다.

 

2004년 양편 전원주택과 함께 건립한 평산스포츠박물관에 여러 가지 올림픽 기념품 등과 함께 진열하여 전시하다가 201510월 강릉시의 요청을 수락하여 아끼던 각양각색의 보배 올림픽 뱃지 전체를 포함한 스포츠박물관 수집품 모두를 전량 무상 기증한 바 있다.




 

그 일부는 평창2018기간 중 사용하던 강릉 녹색도시 부지에 위치한 평창2018 홍보관에 전시하였다. 현재 강릉시는 강릉올림픽박물관을 건립하려고 하는데 언제 완공되어 또 다시 필자가 기증한 뱃지와 각종 올림픽 기념품 수집품들이 일반에 전면 공개될 지는 아직 미지수다.


 



 

 


Posted by 윤강로 (Rocky YOON)
스포츠 외교2020. 9. 3. 09:40

[스포츠외교현장이야기실록96(Baden-Baden 대첩 서울1988올림픽유치위원장 대한체육회장 故 정주영 회장과의 만남 (The late CHUNG Ju-Yung, Founder President/Chairman of Hyundai Group and Seoul1988 Bid Committee & KOC President)]


1915 1125일생(토끼띠)

주소: 종로구 청운동()

     종로구 계동(사무실)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의 주인공 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1981 930일 바덴바덴의 기적인 「번갯불에 콩 구워 먹기 작전/Thunderbolt Operation」의 선봉장 격으로 6·25 한국동란 이후, 전 세계에 MASH(Mobile Army Surgical Hospital/야전이동육군병원)라는 전쟁드라마를 통해 비참한 전쟁 폐허국으로만 알려졌었던 우리 조국 대한민국을 자랑스러운 「1988 서울올림픽 개최국」으로 탈바꿈할 수 있도록 서울올림픽 유치위원장직을 맡았다가, 1982년부터 대한체육회장 및 KOC 위원장을 맡아 1984 LA 올림픽에서 해방 후 한국선수단이 최고의 성적을 올리는 데 혁혁한 이바지를 해 주셨다.

 

사마란치 IOC 명예위원장을 포함한 전 세계 올림픽 가족 모두는 아직도 1988년 서울올림픽대회야말로 20세기 가장 훌륭한 대회(The Best Games Ever)라고 평가하는 데 주저하지 않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필자가 대한체육회/대한올림픽위원회(KOC)에 입사한 것은 1981 9월 바덴바덴에서의 성공적인 올림픽유치가 있고 난 다음해인 1982년이었다. 당시, 정부에서는 성공적인 올림픽을 치르기 위해 체육부를 신설하고 서울올림픽조직위를 발족시켰다. 대한체육회 및 KOC는 태릉 선수촌을 근거지(Base Camp)로 하여 꿈나무 선수 발굴 및 육성에 박차를 가함으로써 성공적인 대회운영과 사상 최고의 성적이라는 「두 마리 올림픽 토끼」를 잡는 데 성공하였다.


(위 사진1983년 9월 당시 KOC를 첫 내방한 Samaranch IOC위원장과 정주영 KOC위원장/아래 사진: 1983년  말 연 이어 방한한 Mme. Monique Berlioux IOC사무총장 역시 KOC를 방문하여 정주영 KOC위원장과 담소하고 있다)


이를 계기로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세계만방에 떨치고, 우리 국민 모두에게 자긍심을 심어주는 데 견인차 역할을 다하였다. 정치·외교·경제·사회·문화 등 전반적인 분야에서 대한민국 역사적 부흥기(Renaissance)로 기록되고, 그 이후 대한민국은 「조용한 아침의 나라(Land of Morning Calm)」에서 「올림픽운동의 나라(Land of Olympic Movement)」로서 전 세계인의 마음속에 깊이 각인되기 시작하였다. 이는 2004 72일 체코 프라하에서 이룬 작은 기적(2010 평창 동계올림픽 개최지 선정과 다름없는 경천동지의 큰 성과)으로 까지 뻗치게 되었다.


(사진 좌 상: Brusatti 국제펜싱연맹회장, 좌 하: Sven Thofelt 국제근대오종 바이애슬론연맹<UIPMB>회장, 우 상: Sharad Chandra Shah 네팔 NOC위원장, 우 하: Tamas Ajan 국제역도연맹회장 방한에 따른 정주영 KOC위원장 예방에 따른 필자의 통역 장면 모음)


필자는 故 정주영 회장께서 대한체육회장 겸 KOC 위원장 재직 시 각종 국제회의의 통역을 비롯, 1988 서울올림픽 유치 이후 방한하는 수많은 IOC 위원, 각국 올림픽 위원회(National Olympic Committees) 위원장, 각 종목 국제경기연맹(International Federation) 회장단, 각국 체육장관(Sports Ministers) 등 전 세계 스포츠 관련 고위 인사들과 故 정주영 KOC위원장과의 공식 면담, 오찬, 만찬 통역을 도맡아 하였다. 필자는 영어/불어 통역을 하면서 故 정주영 회장께서 외국어를 직접 구사하지는 못하지만 통역의 의사전달 내용과 맥락을 기가 막히게 잘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983년 당시 미수교국이었던 중국이 최초로 자국 여자 농구팀을 한국에서 개최하는 아시아 여자 농구 선수권 대회에 참가시켰을 때, KOC위원장 주최 만찬 시 중국선수단장 통역 중 일어났던 한 예를 회상해 본다.


 - KOC 위원장 : 대한민국은 3,500만 인구를 가진 나라입니다.

 - 필자(통역) : Korea has a population of 40 million.

(※ 당시 우리나라 인구는 4천만에 이르렀기 때문에 필자는 통계에 근접하게 수정 통역하였음)

 - KOC 위원장 : 내가 언제 4천만이라고 그랬어? 이 사람 큰 일 낼 사람이구만!

 - 필자(통역) : 회장님, 우리나라 인구는 현재 4천만입니다.

 - KOC 위원장 : 이 사람아, 통역이 내 말을 그대로 전달해야지, 왜 함부로 고치고 난리야!

-  중략  -

 - KOC 위원장 : 소련군이 평양에 진군해서 북한을 점령했다구.

 - 필자(통역) : Soviet troops came into PyeongYang, and they began to rule North Korea when Korean War broke out in 1950.

- KOC 위원장 : 이봐, 내가 언제 한국전쟁 이야기했어?

 - 필자(통역) : 회장님, 제가 추가 설명을 곁들였을 뿐입니다.

 - KOC 위원장 : 이 사람, 안되겠구만.

 

(1983년 9월 Sheikh Fahad<좌측> OCA초대회장 겸 쿠웨이트 IOC위원이 방한하여 정주영 KOC위원장<우측>과 한-쿠웨이트 NOC간 스포츠 교류협정을 체결하고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필자는 통역 중)

 

다음날 故 정주영 회장은 정례 회장단 회의석상에서 전날 통역 문제로 필자에 대해서 좋지 않은 평을 했다고 전해 들었다. 이후 필자는 故 정주영 회장 통역 시에는 아무리 틀린 이야기를 하여도 판박이 통역만 하였고, 나중에 알게 된 이야기지만 그동안 필자에 대하여 많은 칭찬을 하여 주셨고 그랬기 때문에, 혹시 기고만장할까 봐 자만하지 말도록, 가끔 일침을 가하셨던 것이라고 전언하는 것을 들었다. 심지어 현대그룹 사장단 전체 회의에서도 윤군(필자)에 대하여 공개적으로 칭찬을 하였고, 당시 현대건설 회장이었던 이명박 前 서울시장(대통령역임)께서도 현대그룹 회장비서실에서 필자와 만났을 때 “자네가 그 유명한 윤군인가?”라고 호기심 어린 인사를 건넨 적도 있었다.

대한체육회장을 그만두시고, 작고하실 때까지 간간이 공식석상에서 만나게 되면, 따뜻하게 격려도 해주시고, 함께 사진도 찍고 다정다감한 면을 많이 보여주셨던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Don't let your ordeal get the better of your life deal)」의 주인공이신 정주영 회장께서는 지금은 소떼를 몰고 하늘나라로 가셨다.

필자는 1983년 故 정주영 회장, 최만립 KOC부위원장 겸 명예총무, 김세원 KOC부위원장(주스웨덴 대사 등 역임) 등과 함께 영국 런던을 경유, 쿠웨이트에서 개최된 OCA(Olympic Council of Asia 아시아 올림픽 평의회)총회에 참석차 해외출장을 갔었다. 경유지 런던에서는 Intercontinental 호텔에서 1박 체류했었는데, 당시 미얀마(현재: 미얀마) 아웅산 폭발사건 이후, 청와대에서 근무하다가 옥스퍼드대학에 유학 중인 노신영 전 국무총리의 아들인 노경호씨와 그와 결혼한 정세영 회장의 딸이 정주영 회장과의 식사에 함께 초대되어 자리를 같이하였다.

정 회장께서는 영국 런던의 일류호텔인 인터콘티넨탈호텔 스위트(Suite)룸에서 현대 런던지사에서 준비한 한국 식사를 우리와 함께하는 것이었다. 그분이야말로 막걸리를 즐겨 드시던 故 박정희 대통령처럼 철저한 신토불이형 한국적 세계인이었던 것 같다. 식사 후 간단히 주변 이야기를 나누다가 정회장께서는 시계를 보시더니만 “한국으로 전화 대라”하고 현대그룹 비서실장 등 관계 중역들과 국제전화를 이용해 업무를 챙기는 것이었다. 그 대화 내용을 보자.

정 회장 : , 나야. 별일 없나?

상대방 : (보고내용설명)

정 회장 : 조간신문 3페이지 펴봐. 뭐라고 나왔어? 그래? 별거 아니구만…. 알았어. 그 다음 장에는?

정 회장 : 이 사장 바꿔 봐. (잠시 후) 그래, 그 사업건 피져빌리티 써베이(Feasibility Survey:타당성 조사)는 해봤나? 그냥 괜찮은 거야? 좋은 거야?

정 회장 : 그러면, 즉시 협상(Negotiate)해서 처리하도록 해.

당시 사회 초년병이던 필자는 우선 ①영국 런던 일류 호텔방에서 차려 놓은 한국 음식에 대해 놀랐고, ②전화통화 내용 중 영어를 전혀 못할 줄 알았던 정회장이 「Feasibility Survey」란 단어를 우리말처럼 스스럼없이 사용하는 데 대해 재삼 놀랐으며, 세계 어디를 가든지 메모수첩 없이 즉각 사업 주요사안에 대해 핵심을 집어내어 그야말로 핵심만(essence)을 선별하는 선구안에 대해서 감탄했다.

그 후, OCA 총회가 열릴 쿠웨이트 현지에 도착하였다. 그야말로 「왕회장」이 도착하는 까닭에 공항은 「현대 맨」들로 인산인해를 이룰 것으로 예상하였으나, 정 회장의 철저한 「아부성 행위에 대한 혐오」와 효율성, 생산성 제고에 가장 큰 비중을 두는 비즈니스 생활철학에 철두철미한 근대 한국사의 최고의 거상인 정 회장에 대한 영접은 방문목적(OCA 총회 참석)에 따른 조촐함(Simplicity) 그 자체였다.

비행기 내에서 입고 계신 낡고 색 바랜 초록색 털로 짠 조끼와 낡고 헌 구두를 보고 필자가 정 회장께「영국에 오셨으니, 새로 장만하시지요」라고 건의 드렸더니 「이 조끼는 참 따뜻하고, 이 구두는 언제 신어도 편해」라고 일축하였다. 그러면서, 정 회장 왈 「난 주머니에 돈 한 푼 없어서 물건 살 엄두도 내지를 못하지!」라는 것이었다.

OCA 총회 참석 시 필자는 정 회장께 총회 전체 내용 흐름을 뒷자리에 앉아 귓속말로(whispering) 통역해주고 있었다. 주요 내용을 통역해 줄 때마다 양쪽 옆에 한국 측 회의 대표로 앉아 있던 최만립 당시 KOC 부위원장 겸 명예총무와 김세원 KOC 부위원장에게 「지금 저 친구(OCA 회장)가 이러이러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죠?」라고 통역 내용 진위 내지 충실도를 계속해서 점검하면서 회의내용을 파악하는 것이었다. 사업가로서의 철저함이여!

회의 휴식시간에 그다음 벌어질 OCA 임원선거에 대하여 후보별 KOC 지지 여부를 위한 품평회에서 정 회장은 KOC 대표들과 함께 숙의하면서 「우리 편」과 「X 표」그리고 「X 표」중에서 「우리 편」성향으로 재분석된 후보에 대해서는 「生이다. 이거지!」하면서 다시 수정 표기하곤 했다. 정 회장의 사람 다루는 일면을 보여주는 일화를 소개해 보자.

쿠웨이트 현대건설 지점장은 백모이사였다. 군기(?)를 잡기 위한 것으로 판명되었지만 사회 초년병인 필자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장면이었다.

- 정 회장 : (백 지점장을 보면서) 이봐, 자네 나가서 백 지점장 불러와!

- 백 지점장 : 제가 백 이사입니다. 회장님.

- 정 회장 : 이 사람, 백 지점장 불러오라는데 웬 말이 그리 많아. 어서 냉큼 나가서 그 친구 불러오라니까 그러네. 어서 나가봐!

- 백 지점장 : 회장님, 저라니까요.

- 정 회장 : 이 친구야, 내 말이 말 같지 않아? 어서 나가서 백 지점장 찾아오라니까!

- 백 지점장 : (할 수 없이 나가버린다. 밖에서 황당한 표정으로 어이없이 서서 대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음.)

- 정 회장 : 이봐, 윤군, 어서 나가서 그 친구 들어오라고 해!

- 필자 : (백 지점장에게) 회장님께서 이제 들어오라시는데요.

- 백 지점장 : 아이 참, 죽겠구만. 회장님께서 나보고 나말고 백 지점장을 찾아오라시는데 어떻게 들어가나요?

- 필자 : 지금 저보고 다시 들어오라고 하시니까, 들어가 보시죠.

- 백 지점장 : (할 수 없다는 듯 다시 정 회장 방으로 재입장) 회장님, 저 왔습니다.

- 정 회장 : ! 백 지점장! 이리와서 앉아봐. 자네 내 얘기 잘 들어. 지금 추진하고 있는 건설 계약건 말인데….

-  중략  -

- 백 지점장 : (극도로 긴장하고 숨죽이며 평소보다 2~3배 집중력을 보이며 충실하게 정 회장 지시사항을 경청하고 진지한 자세를 취했다.)

당시 체육회 김종규 상근부회장과 함께 다음 기착지인 바레인으로 향했다.

다음은 바레인 현대건설 지점장 군기 잡는 이야기.

- 정 회장 : 이거 봐, 식사준비 다 되었나? 나랑 같이 오신 손님들께 똑같은 음식 차려오게.

- 바레인 지점장 : , 알겠습니다. 회장님.

- 정 회장 : (잠시 후 차려온 음식을 훑어보고 나서 큰 소리로) 이 봐!, 자네, 왜 내 말 안 듣는 거야? 음식 똑같이 가져오라고 했잖아!

- 바레인 지점장 : 회장님, 똑같이 차려 왔는데요!

- 정 회장 : 이 사람아, 눈은 어디 두고 다니는 거야, 왜 나한테만 오징어 젓갈을 놓고 손님들한테는 없는 거야?

- 바레인 지점장 : (살펴보고 나서) 죄송합니다. 제가 직접 챙기질 못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회장님.

- 정 회장 : 거짓말만 살살하고, 아부나 떨고 말야. 좋아, 요새 노무자들 몇 시에 일어나나?

- 바레인 지점장 : 새벽 5시에 일어납니다.

- 정 회장 : 5시에 일어난다구? 바레인 땅덩어리가 얼마나 좁은데 그렇게 일찍 일어나서 뭘 한단 말이야?

- 바레인 지점장 : 6시까지는 세면 등 하고 아침식사를 하고나면 7시가 됩니다. 그때부터 일을 시작합니다.

- 정 회장 : “좋아, 그렇다고 쳐. 그러면 이렇게 더운 나라에서 그렇게 꼭두새벽부터 일어나서 설치게 되면 하루종일 능률이 오르겠어?

- 바레인 지점장 : 별 탈 없이 잘 소화하고 있습니다.

- 정 회장 : 알았어, 이따 현장 돌아보게 헬기 준비시켜.

이렇게 한차례 얼차려를 시키고 나면 지점장 이하 모든 식구들이 정신 바짝 차리고 업무에 임하게 되는 법이다. 모든 일정이 끝나고 바레인 현지에서 귀국하기 전 故 정주영 회장께서는 필자를 따로 불렀다. “다들 나가 있으라구!” “윤군, 수고 많았어.” 봉투를 주시면서, “어머니 선물이라도 사드려.”하시며 손을 꼭 잡아주시던 다정다감하신 얼굴이 떠오른다.

 

살아생전 정회장님과 함께했던 추억이 담긴 사진들을 그분의 영전에 올려 드리면서 다시 한번 명복을 빈다. 영면하소서!  Rest in Peace!


Posted by 윤강로 (Rocky YOON)
스포츠 외교2020. 9. 2. 12:06

[스포츠외교현장이야기실록95(秘話II IOC배당 KOC마케팅수입금 2배이상 증액 외화획득 기여 OST(Our Story Telling)Update]

 

대한민국 다국적기업 삼성이 IOC올림픽마케팅 글로벌 파트너인 TOP(The Olympic Partners)에 미국의 Motorola를 제치고 1997년 올림픽후원사로 합류하면서 올림픽 Partnership(올림픽 무선통신 기기/器機 공식 파트너) 계약 조인(調印)이 이루어 졌다.


그 후로 6년 뒤 삼성은 Motorola를 제치고 세계이동통신시장에서 핀란드의 Nokia에 이어 세계 2위로 급부상하는 쾌거를 이룩해 냈다. 1997 IOC TOP 파트너 계약 당시 삼성은 브랜드 컨설팅 그룹 조사결과 세계96위였던 것이 2004년에만 21위까지 뛰어올랐다. "


필자는 1997 5월 삼성이 IOC TOP파트너지위확보에 따른 IOC의 對 KOC수입금배당금 2배증액을 당시 올림픽마케팅 대행사 대표였던 Meridian社의 Laurent Sharapan 대표를 서울로 불러들여 당시 KOC와 기 체결한 TOP IV 프로그램(1997-2000) 참여에 따른 배당금액 추가증액을 강력히 요구하여 기술상 시기상 소급적용에는 다소 무리가 따랐지만 부분적이나마 관철(貫徹)시킨 바 있다.


(좌로부터 박인규 당시 국제부직원<현 대한체육회 국제본부장>, 이상길 공보실장, Laurent Sharapan IOC마케팅 대행사 Meridain사 대표,최만립 당시 KOC부위원장 겸 명예총무, 김성규 국제본부장, 필자<당시 국제부장>)

 

이후 KOC IOC배당금이 지속적으로 2배 정도 증액되는 혜택을 누려왔다. 필자가 KOC수입금증대창출과 외화획득(?)에 기여한 대목 임을 확신한다. 그 당시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덮어져 역사에 묻혀 버렸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보람되고 뿌듯하다. 

 

1997년만 해도 삼성은 세계 이동통신(移動通信) 시장에서 잘 알려지지 않았던 후발주자(後發走者)였다. 당초 오랫동안 올림픽 파트너로 참여했던 Motorola 1996 Atlanta 올림픽 이후 IOC와의 글로벌 TOP파트너 계약 후원금 삭감(削減)을 노리고 시간을 끌다가 결국 IOC측이 삼성 쪽으로 전격선회(電擊旋回)하였고 삼성 측은 최종 3일간의 말미(末尾)에서 극적인 TOP파트너쉽 참여를 결정하였다.

 

당시 Samaranch IOC위원장은 1997 5월경 삼성과의 계약체결 조인식을 위해 한국으로 날아왔고 서울 신라 호텔에서 IOC와 삼성의 역사적인 올림픽 Partnership(올림픽 무선통신 기기/器機 공식 파트너) 계약 조인(調印)이 이루어 졌다. 그 후로 6년 뒤 삼성은 Motorola를 제치고 세계이동통신시장에서 핀란드의 Nokia에 이어 세계 2위로 급부상하는 쾌거를 이룩해 냈다. 1997 IOC TOP 파트너 계약 당시 삼성은 브랜드 컨설팅 그룹 조사결과 세계96위였던 것이 2004년에는 21위까지 뛰어올랐다.(Michael Payne의 ‘Olympic Turnaround’에서)

 

IOC TOP 파트너는 ‘올림픽대회 글로벌 파트너(Worldwide Partners for the Olympic Games), IOC 파트너(Partners of the International Olympic Committee), ‘해당기간의 동 하계 올림픽 대회 파트너(Partners of the Olympic Winter Games and the Olympic Games), 205개 국가올림픽위원회 파트너(Partners of all National Olympic Committees)’ 및 ‘해당기간의 동 하계올림픽 참가 전체선수단 파트너(Partners of all Olympic teams competing in the Olympic Winter Games and the Olympic Games)’ 등의 지위를 동시에 부여 받게 됨으로 해서 유사경쟁업체가 개별NOC나 올림픽선수단과의 별도 매복마케팅(Ambush Marketing)을 못하도록 제도화 하고 있다.

 

IOC의 마케팅 프로그램은 크게 4개 범주로 나뉜다.

 

(1) 올림픽대회 방송 (Olympic Games Broadcast)

(2) TOP (The Olympic Partners)/ The Worldwide Olympic Sponsorship Programme

(3) IOC상품화권 프로그램(IOC Licencing Programmes)

(4) IOC 공급업체 프로그램(IOC Supplierships)

 

IOC는 현재 3개의 공식 공급업체와 마케팅 관계를 유지한 바 있다.

 

1) 자동차(DaimlerChrysler/Mercedes-Benz)/ 육상운송(Ground Transport)

2) 스포츠 의류(Mizuno)/ 올림픽 및 관련행사 時 IOC위원 및 사무처 직원 필요복장이나 의류제공/Clothing and Outfits for the IOC and administrative staff at the Olympic Games and other events)

3) Schenker/화물운송 및 세관통관서비스(Freight Forwarding and Customs Clearance Services)

 

올림픽 마케팅의 기본방침이란 수익극대화(收益極大化)는 도모하되 올림픽이미지를 손상(損傷)시키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인류의 건강을 해치는 제품(담배나 술 따위)이나 사행성을 조장(助長)하는 도박(賭博) 및 흥행관련업체(興行關聯業體) IOC마케팅과 사업관계를 맺을 수 없다.

 

삼성이 IOC TOP 파트너계약을 체결(1997 5월경)한 후인 1997년 말 경 ISL에 이어 올림픽 마케팅 대행사인 Meridian社의 Laurent Sharapan 대표를 서울로 불러 당시 KOC와 기 체결한 TOP IV 프로그램(1997-2000) 참여에 따른 배당금액 추가증액을 강력히 요구하여 기술상 시기상 소급적용에는 다소 무리가 따랐지만 부분적이나마 관철(貫徹)시킨 바 있다.

 

이 덕분에 KOC TOP V(2001-2004) 참여에 따른 배당금이 이전 대비 2배를 상회하는 금액으로 계약하게 되었다.

 

이후 삼성의 TOP파트너 지위유지에 따른 IOC KOC대상 배당분배금 증액은 당연한 귀결이 되었다.

 

이 또한 지속적으로 KOC의 수입금추가증액창출은 물론 대한민국 외화획득에도 기여한 셈이다.

 


 

(당시 Samaranch IOC위원장에게 보고하여 KOC베분금 증액의 발판이 된 IOC마케팅대행사 대표의 공식서한/필자에게도 사본발송)

 

 

주지한 바와 같이 미국이나 일본의 경우 TOP프로그램에 자국의 다국적 기업들이 참여함으로써 비 참여 NOC들보다 월등 많은 배당금을 받고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로 알려져 있는 상태였다.

 

따라서 대한민국지역에서 올림픽 휘장보호업무를 관장하고 있는 KOC의 경우 기 체결(1996년경으로 추정)하여 배정된 액수보다 상회(上廻)하는 배당금, 즉 삼성이 TOP IV 파트너(1997 5월경)로서 IOC에 지불키로 약정한 천문학적(天文學的) 액수에 비례하는 할당지분을 추가적으로 소급적용(遡及適用)(TOP IV: 1997-2000)하여 받아야 마땅했고 향후 TOP V(2001-2004), TOP VI(2005-2008), TOP VII(2009-2012)와 관련한 KOC와의 TOP 프로그램 참여에 따른 할당 지급금의 획기적(劃期的) 증액을 철저히 요구해야 했다.

 

더구나 OECD회원국으로서 경제선진국대열(經濟先進國隊列)에 진입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경우 TOP파트너업체 관련 국내시장 점유율(占有率), 소비증가율(消費增加率) 등 관련 경제지표(經濟指標)등을 시시각각 꼼꼼히 계상(計上)하여 차기 TOP 프로그램 참여 계약 時 증액 요구 분을 반영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동시에 삼성 측과 연계하여 증액에 따른 KOC 지분증액도 염두에 두고 결코 손해 보는 일이 없도록 對 IOC 마케팅 관련 수익사업에 임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물론 KOC 마케팅 관계자들이 열성적으로 수익사업에 매진하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고 믿고 있다. 이같이 스포츠 외교는 올림픽 마케팅과도 직접적인 상관관계(相關關係)가 따른다.

 

올림픽마케팅 활성화는 스포츠 외교에 활력(活力)을 불어 넣어주는 영양제(營養劑)이다. 차제에 올림픽 마케팅 외교도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제도적(制度的) 구조적(構造的) 기능적(機能的) 지원과 실행계획(實行計劃)이 뒷받침되어야 하겠다.

 

 

 


 

 


Posted by 윤강로 (Rocky YOON)
스포츠 외교2020. 9. 1. 10:10

[스포츠외교현장이야기실록94(秘話 Salt Lake City 2002동계올림픽 한국 태극기를 북한 인공기로 오기한 올림픽선수촌 공식사과 서한의 교훈 OST(Our Story Telling)]



2002Salt Lake City 동계올림픽은 한국선수단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사건 사고로 얼룩지기도 했던 대회였다. 시설과 조직 및 마케팅 측면에서는 탄탄했지만 미세조정 부분에 숨겨진 착오가 있기도 하였다. 한국팬들에게 반칙왕 Apolo Anton Ohno 선수가 개최국 프리미엄(?)을 이용하여 일명 Hollywood Action으로 쇼트트랙 남자 1,500m결승에서 우승한 김동성선수를 교묘히 실격시킴으로 국제적 공분을 산 오점이 생각난다.

 


필자는 LA1984올림픽이래 모든 동 하계올림픽대회에 한국선수단 사전조사단장 및 선발대장 겸 선수단장대행으로 대회 국제회의 등에 대한민국선수단의 대변인 겸 해결사 역할을 해 왔다.


올림픽선수촌에 방문하는 한국인 방문객의 경우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선수단 정식 멤버가 아닐 경우 최소 48시간 전에 방문요청 양식에 명단을 기입하여 사전허가를 득해야 했다. 당시 이건희 삼성그룹회장은 IOC위원이기에 문제가 없었지만 상대적을 많은 수행원들에 대한 방문객 신청이 문제였다.


선수단 별 일일 쿼터가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전에 조직위원회 실무진들과 스포츠외교력과 친분을 발휘하여 일찌감치 문제를 해결하기도 하였다.



(Salt Lake City 2002동계올림픽 박성인 한국선수단장과 올림픽 선수촌에서 함께)

 


그러한 사전방문요청 허가를 위해 각 선수단에 배표한 공식신청약식 바인더를 받아 본 필자를 아연실색(啞然失色)케 하는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이 이야기는 지면에 처음 공개하는 비화(秘話)이기도 하다. 올림픽대회에서 대한민국의 영문 명칭은 South KoreaRepublic of Korea가 아니라 “Korea”이다. 그래서 올림픽 참가선수들의 등에 부착되는 국가명 표기도 ROK가 아니라 KOR인 것이다. 자세한 이야기는 생략한다.

그래서 조직위원회 올림픽선수촌에서는 한국선수단 명칭을 Korea/Coree(불어)<KOR>로 표기한 것 까지는 좋았는데 그만 태극기를 북한 인공기로 오기한 것이었다.

 


 

필자는 즉시 각국 선수단장회의에서 이를 즉각 엄중 항의 하는 발언을 하려고 하였지만 IOC관계자도 참석하였기에 조직위원회의 입장을 배려하여 조직위원회 측에 우선 구두로 항의하면서 즉각적인 시정을 요구하여 시간을 벌어 주는 한편 엄중한 사건이라 한국선수단장에게 보고하니 각국선수단장회의에서 정식 항의 하는 것이 추후 예방 차원에서도 의전절차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Kim Murley 올림픽선수촌 책임자는 필자에게 우선 구두로 사과한 후 정중하게 공식사과서한(Official Letter of Apolgy)을 보내와서 우선 너그러이 넘어가 주었다.


Salt Lake City 2002동계올림픽조직위원회측은 사과 서한 내용과 동일하게 올림픽선수촌 방문객 출입증 신청 각국 별 배당 양식 바인더 문서철 표지(Olympic Village Guest Pass Request Forms Binder Cover)를 제대로 수정 및 교체조치하여 한국선수단에 보내 주었음은 불문가지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는 매일 아침 올림픽선수촌으로 사용된 University of Utah대학 캠퍼스 내 각국참가선수단장(Chefs-de-Mission)회의 장소인 대학강당(Auditorium)에서 열린 단장회의에서 공식 항의 발언 한 후 취해졌던 것으로 기억된다.

공식사과서한 및 수정 교체된 문건 철을 접수하고 다음 날 각국선수단장 회의에서 즉각적인 사과와 Feedback에 대해 감사와 함께 신속한 조치에 대하여서도 칭찬해 주었다.

국제관계와 스포츠외교는 일방적이 아니고 쌍방 소통 적이며 잘못을 시인하면 곧바로 인정하고 보듬어 주는 것이 국제사회의 매너라고 생각한다.


Posted by 윤강로 (Rocky YOON)
스포츠 외교2020. 8. 31. 10:42

[스포츠외교현장이야기실록93(세계만방에 태극기휘날리다)]


태극기가 가장 많이 휘날리는 현장은 뭐니뭐니해도 스포츠와 관련된 행사(Events), 경기(Competitions), 시상식(Victory Ceremonies) 등이다.


우선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국가대표선수들의 유니폼(Uniform)에 부착된 태극마크를 떠올릴 수 있다. 가슴에 태극마크를 다는 것이 운동선수들의 숙원(long-cherished desire)이다. 국가대표로 선발되기까지 흘리는 피와 땀(blood and sweat)의 노력은 태극 마크로 보상된다.


동·하계 올림픽대회(Winter and Summer Olympic Games; Olympics), 동·하계 아시아 경기대회(Winter and Summer Asian Games), 동·하계 유니버시아드대회(Winter and Summer Universiade) 종목별 세계선수권대회(World Championships)등 대회 참가를 위해 선발된 국가대표선수단(Selected National Delegation/Team)은 출전을 앞두고 결단식(Inauguration meeting)에서 선수단장(Chef-de-Mission:Team Leader)이 해당 경기단체(National Governing Body)또는 대한 올림픽위원회 위원장(President of Korean Olympic Committee)으로부터 단기(Delegation Flag)로서 태극기를 인수받아 단상(platform)에서 그 태극기를 흔들면서 결전의 의지를 대내외에 천명한다.


한국 선수단의 기수(Flag Bearer)는 대회 개·폐회식(opening and closing Ceremonies)에서 태극기를 들고 선수단을 선도한다. 올림픽, 아시안게임, 유니버시아드개회와 같이 종합대회에서는 선수단의 선수촌(Athletes Village/Olympic Village)에 도착한 다음날에 입촌식(Flag Raising ceremony 또는 Team Welcome Ceremony)을 갖게 되며, 입촌 시 해당국 선수단의 입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국기게양식(National Flag Raising/Hoisting Ceremony)를 갖게 된다.

 

물론 국가연주(Playing of National Anthem)가 함께 수반된다. 개회식과 함께 대회가 시작되어 메달 수여식(Medal-Awarding Ceremony; Victory Ceremony)에서도 금, , 동메달리스트의 국기가 동시에 게양된다. 물론 국가연주는 금메달리스트 국가에 한한다. 이외에 태극기가 휘날리는 경우는, 선수가 금메달이 확정되고 나서 경기장을 돌면서 태극기를 휘날리기도 하고, 응원단에서도 응원(cheering)과 함께 태극기를 열렬히 흔드는 것이다.


필자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개최된 1992년 제25회 올림픽대회 한국선수단 섭외 임원(Official in charge of International Relations) 겸 선발대장(Chief of Advance Party of Korean Delegation)겸 선수단장대행(Acting chef-de-Mission)으로 선수단 본진(Main Body of Korean Delegation)이 도착하기 열흘 전 현지에 도착하여 대회 조직위원회(OCOG; Organizing Committee of Olympic Games) 각 부서 관계자들과 한국선수단 입촌 및 대회 참가에 따른 세부 확인 사항 최종 점검회의를 갖은 바 있다.


 

(Barcelona1992 올림픽 한국선수단 아타셰로 활약한 외대 후배 두정수 주 바르셀로나 한국총영사관 영사와 함께)

 

ID 카드 (Accreditation)발급, 선수단수송(Transportation), 선수촌 숙박(Accommodation), 의무관련사항(Medical Services), 통관(Customs Clearance Procedures), 의전(Protocol), 단장회의(Chef-de-Mission's meeting), 선수촌 식당메뉴(Menu of Olympic Village Restaurant), 차량배분(Allocation of Vehicles), 입촌식 절차(Procedures of Team welcome Ceremony)등에 대한 선수단 등록 종합 점검 회의(DRM; Delegation Registration Meeting)에서, 가장 염려했던 부분은 국기와 국가 호칭 문제였다.

 

왜냐하면, IOC 의전에서 대한민국은 KOREA(약어로 KOR)로 북한은 DPR KOREA(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약어로 PRK)로 되어 있는바, 비록 잘 훈련된 조직위 직원들이라 하더라도 현장에서의 혼돈으로 의전상 실수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국가 연주 시에도 중대한 착오가 생길 수 있었다.



(Barcelona1992올림픽선수촌 국기광장에서 마스코트 Cobi와 함께)

 

 

더욱이 양측 남·북한 양측 국기는 그네들로서는 혼동되기 십상인 것이 불 보듯 뻔한 일이었기 때문에, 한국 선수단 입촌식에 앞서 예행연습(rehearsal)을 갖자고 주장했고, 조직위 측의 배려로 다음날 한국 선수단 모의 입촌식(Mock Team Welcome Ceremony)를 하였는데, 그 당시 국기게양을 위해 태극기를 꺼내야만 했는데 엉뚱하게도 조직위 담당자가 인공기(북한국기)를 꺼내는 것이 아닌가!

 

(Barcelona1992올림픽 양궁경기장에서 남북한 출전선수들 응원 겸 경기관람 중인 북한 NOC 류성일 서기장과 함께)

 

그때까지만 해도 주적(Main Enemy) 국기와 태극기를 혼동한다는 것은 국내에서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중대한 과실(Grave Mistake)로 심각하게 취급되었기 때문에, 필자로서는 아찔하였던 것이다


다행히 모의 행사였고, 실제로 게양되기 직전에 발견되었기에 실제상황이 되지는 않았지만, 앞으로 있을 정식 입촌식, 개·폐회식 시상식 등 많은 국기관련 의전행사를 고려하여, 조직위 측에 서면으로 정식 항의하였고, 선수촌 내에서 개최되는 일일 각국단장회의에서도 엄중항의 하였으며 조직위 측의 정중한 사과와 재발방지서면 약속이 뒤따랐다.


물론, 그 덕분에 바르셀로나 올림픽대회 기간 중 국가와 국기와 관련된 혼동은 한 건도 발생치 아니하였고, 그 후 올림픽대회조직위원회(OCOG) 의전팀은, 이를 사과하고 대한민국국기를 길이 기리는 의미에서 대회 기간 중 규격에 맞추어 대형 태극기를 의전팀원들이 공동으로 손수 그려서 필자에게 선물하였다.

 



 

그 역사적인 태극기는 그후로 필자가 개장한 평산 스포츠 박물관(PyeongSan Sport Museum)2015년까지 전시돼 있다가 2015년 강릉시가 평창2018동계올림픽 및 패럴림픽 이후 건립하여 운영할 예정인 강릉올림픽박물관(GOM)에 전시될 것으로 보인다.


(Barcelona1992올림픽 후 귀국 행사로 각자 고향에서 금의환향 꽃 가마 Car Parade중 임신자 현 한국여성스포츠회장 및 인천 출신 참가선수들과 함께)


Posted by 윤강로 (Rocky Y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