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외교현장이야기실록98편(秘史부산2002아시안게임유치
및 개최 스포츠외교협상통한 난관 극복 및 필자 부산명예시민위촉 OST)]
부산광역시의 2002년아시안게임유치성공과
개최성공의 뒤안길에는 파란만장한 스토리가 숨쉬고 있다. 스토리(story)가
스펙(spec)을 이기는 증거가 남아 있다.
![](https://t1.daumcdn.net/cfile/tistory/99CE68505F52FC8326)
(좌로부터 우병택 부산2002 AG유치위원장, 필자, Sheikh Ahmad OCA회장)
1960년대 한국이 아시안게임을 유치하고도 국내
여건이 여의치 않아 눈물을 머금고 대회를 반납하여 태국의 방콕이 한국 대신 아시안게임을 치러준 웃지 못할 한국스포츠외교사의 씁쓸한 秘史가 있다.
1988 서울올림픽대회를 유치한 「바덴바덴 대첩」에
이은 1986 서울아시안게임 유치는 서울올림픽 성공적 개최를 확고히 하기 위한 전초전이자 실전 워밍업(Warming-up) 겸 리허설 성격이 짙었다.
따라서 1986 서울아시안게임은 그때까지의 역대 대회
중 조직·운영 등 모든 면에서 최고·최상·최대의 대회로 평가되었다.
그 당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체육 등 우리나라 각 부분에 걸친 크고 작은 행사나 모임에서 심지어는 결혼식
주례사에서도 「′86,′88 양대회의 성공을 위하여」란 문구는 필수불가결한 약방의 감초처럼 회자하였었다.
1986 서울아시안게임에 이어 중국의 수도 Beijing이 2000년 올림픽 유치를 염두에 두고 1990년 제11회 아시안게임을 유치하였고, 1994년 제12회 대회는 일본의 히로시마가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원폭 이미지 개선을 위해 유치하였으며, 1998년의
제13회 대회는 태국의 방콕으로 개최지가 확정되었다. 그
무렵인 1993년 가을, 대한민국 제2의 도시인 항도 부산이 2002 아시안게임 유치에 출사표를 던졌다. 유치 경쟁도시는 국제대회유치를 통해 국가위상을 공고히 하기 위한 사전 포석으로 정부가 전폭적으로 지원하던 대만
제2의 도시 카오슝이었다.
각국의 서열 2위 도시끼리의 유치 전은 이렇게 막이 올랐다.
유치(bidding or bid)란 말은 일반적으로 대형프로젝트를
입찰경쟁을 통해 따온다는 의미로서 물·불 안 가리고 모든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하여 목표달성을 위해 전략적
행동지침에 의해 사방팔방 뛰는 현대판 국가간
「총성 없는 전쟁」이라고 볼 수 있다.
1981년 당시 서독의 Baden Baden에서의 1988 서울올림픽 유치도 이런 개념 아래서
현대 그룹의 총수였던 故 정주영 회장을 유치위원장으로 임명하여, 예산·회계
범주에서 아무런 제약 없이 유치전을 치를 수 있도록 하였으며, 2002 FIFA 월드컵 축구대회 유치전을
위하여 구평회 LG 그룹 총수와 정몽준 현대중공업 회장 겸 FIFA 부회장
등을 중심을 유치위원회 수뇌부를 구성한 바 있다.
![](https://t1.daumcdn.net/cfile/tistory/9978174E5F52FCD426)
(Zhenliang HE 중국
IOC부위원장과 환담 중인 정주영 대한체육회장 겸 KOC위원장, 가운데는 통역 중인 필자)
이와 같은 맥락에서 부산아시안게임 유치 위원회는 인맥이 두텁고 수완이 출중하며 성공한 사업가 출신의
우병택 부산광역시 의회 의장을 유치위원장으로 추대하였다. 그리고 도종이 국회의원, 이영 부산 상공회의소 상근 부회장, 박관용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 김기재 당시 부산시장 또 강병준 부산·경남지역 민간방송회장 등을
비롯한 부산시 상공인들과 부산 출신 국회의원들 그리고 부산언론단체장들과 체육인들이 동참한 삼위일체의 유치위원회를 구성하였다.
![](https://t1.daumcdn.net/cfile/tistory/995804455F52FD0A24)
(좌로부터: 이란 NOC사무총장, 필자, 우병택 유치위원장, 도종이
유치위 부위원장, Afsharzade이란 NOC 사무총장)
우병택 유치위원장은 리더십, 판단력 그리고 순발력이 탁월했고
민간 기업들은 프로젝트 입찰경쟁 및 수주과정에서 예산, 회계상의 절묘한 실전적 유연성을 발휘하고 상대방을
제압할 줄 아는 노하우 등을 보여줬으며 부산광역시는 행정적 협조를 전폭적으로 제공하여 유치기금모금과정부터 유치 전문가 발탁, 유치활동, 유치 성공에 이르기까지 순탄하고 단합된 기상을 보여줬다.
필자는 당시 KOC(대한체육회) 국제부장 자격으로 아시안게임 유치 공식 채널인 KOC의 김운용 위원장
겸 IOC 부위원장과 함께 부산아시안게임 유치위원회 발족 시부터 유치활동지원 실무 총괄책임자로서 부산유치와
인연을 맺었다.
부산아시안게임 유치를 위한 한국 스포츠외교의 한마당은 이렇게 펼쳐졌다.
1982년 9월초 KOC에 특채되어 1985년 입사
3년 만에 최연소·최단기간 과장으로 발탁된 관계로 당시 대한체육회 직원들로부터 관심과 질시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입사하고 2개월 후 제9회 뉴델리 아시안게임
참가 한국 선수단 선발대, 섭외임원 겸 창립 OCA(아시아
올림픽 평의회: Olympic Council of Asia) 총회 회의 실무 대표로서 1993년 당시 10여 년간 각종
OCA 회의 조직 및 참가 등을 통해 회원국 NOC 대표들과의 뜨끈뜨끈한 친목도모, OCA 수뇌부 및 인맥들의 성향과 동향, OCA 헌장규정, 아시안게임 유치 전에 입각한 OCA 취향 등을 분석하고 있던 터라 OCA 실무전문가가 되어 있었다. 소위 「물 만난 고기」격이었다.
IOC가 미국
Salt Lake City2002동계올림픽 유치 과정에서 불거져 나온 부패 스캔들로 인해 시작된
IOC 개혁과정을 통해 1999년부터 적용하기 시작한
IOC 윤리규정(Ethical Code)에 명시된 올림픽대회유치 행동지침(Code of Conduct)과 같은 종류의 제약은 OCA가 주관하는
아시안게임의 유치과정에는 아직 적용되지 않고 있으며 더구나 부산유치 당시인 1990년대에는 더욱 무풍지대였다.
따라서 유치과정에서 구사할 수 있는 작전이 무궁무진하였다. 정부의
막강한 지원을 받고 있던 경쟁도시 카오슝의 경우도 별의별 방법과 수단을 모두 동원하여 득표작전을 벌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필자는 김운용 KOC 위원장에게 건의해 쿠웨이트 소재 OCA 본부를 방문하여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고자 애썼다.
세 치 혀로써 상대방을 제압하여 한민족 최초의 외교달인이신 「서희 장군」의 후손(필자의 아내가 달성 서씨임)으로 드디어 호랑이 굴로 뛰어들었다.
방콕을 거쳐 지루한 여정 끝에 OCA 본부가 있는 쿠웨이트에
도착하였다. OCA 창립 때부터 서로 잘 알고 스포츠외교적 우정 관계가 돈독했던 Abdul Muttaleb Ahmad OCA 사무국장이 공항으로 마중 나왔으며,
공항 귀빈실을 통해 제반 수속을 마친 후 준비된 대형 미국산 리무진을 타고 OCA 본부로
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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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ttaleb Ahmad OCA사무국장, Anselmo Lopez 초대
IOC Olympic Solidarity 위원장, 필자)
당시 OCA로서는
′86, ′88 양 대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하였으며, OECD 국가 반열 대상국가인 대한민국의
경제력과 탄탄한 조직력 등을 감안해 볼 때 OCA의 재정 마련의 토대가 될 아시안게임 마케팅 등을 순조롭게
이끌어 낼 수 있는 대한민국의 후보도시인 부산광역시가 개최도시로 선정되는데 반대가 있을 수 없지만, 경쟁도시인
대만의 가오슝 대표단이 상당규모의 OCA 발전자금기탁, OCA 본부
전산화, OCA 회원국 선수단에 대한 왕복 항공료 및 체재비 완전부담 등의 파격적인 유치 공약을 공공연히
흘리고 있던 터라 OCA 측의 부산광역시 유치 협조를 약속 받는 정면승부는 같은 수준의 조건을 제시하지
않고는 좀처럼 실마리를 풀 수 없었다.
다시 전열을 정비하여 제2차 담판에 들어갔다. 다음날 필자는 작전을 바꿔 우선 개최도시 결정 OCA 총회를 홈
그라운드인 대한민국으로 유치하기 위한 협상에 들어갔다. 대한민국의 국제적 위상과 김운용 KOC 위원장 겸 IOC 부위원장의 국제적 스포츠 계의 파워, Samaranch IOC 위원장의 한국 및 김운용 박사에 대한 신뢰 등이 모두 동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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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로부터 필자, 카자흐스탄 NOC위원장, 비서, 부산유치위원, 이영제3대 부산시의회의장)
유치도시가 있는 국가에서 OCA 총회를 개최할 수 없다는
반론에 대하여 필자는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 개최권이 국가가 아닌 도시에 주어진다는 명분을 내세워, 유치도시인
부산광역시가 아닌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서 개최한다면 OCA 헌장규정에도 위배되지 않는다고 설득하였다. 천신만고 끝에 2002년 아시안게임 개최도시가 결정되는 1995년 5월 OCA 총회가
서울에서 개최되도록 합의되었다.
이 같은 불공평한(?) 합의에 대한 대만 NOC 측의 강력한 항의를 무마하기 위해 OCA는 42개 전 회원국 NOC 사무총장이 참석하는 아시아 NOC 사무총장 세미나 개최권을 총회 2개월 전인 1995년 3월경 대만 카오슝(高興)에 전격 부여하였다. 피장파장, 엎치락뒤치락
이었다.
각 회원국 NOC 사무총장은 NOC 위원장과 함께 개최도시 결정투표권을 행사하는 주체세력이기 때문에 OCA
서울총회 개최 2개월 전 대만 정부 그리고 NOC 및
카오슝 유치후보도시로서는 투표권자들에 대한 물량공세 등 득표작전을 아무런 제약 없이 무제한 효과적으로 펼 수 있는 절호의 찬스로 최대한 활용하리라는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었다.
김운용 KOC 위원장의 지침에 의거, 필자는 KOC 사무총장대행 자격으로 카오슝 개최 OCA 회원국 NOC 사무총장 세미나에 참석하여 한국대표역할을 하였다.
필자를 제외한 모든 참석대표들에 대한 각종 작업이 실시되었다. 세미나
마지막 날 새벽 2시경 필자와 절친한 NOC 대표가 필자객실로
찾아와서 작업의 내막을 귀띔해 주었다. 카오슝에서 귀국하여 김운용 위원장에게 관련 내용을 보고한 후
이에 대비한 뒤집기 작전에 돌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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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운용 KOC위원장에게 전략 구상 보고 중인 필자)
김운용 위원장은 OCA 서울총회에 Samaranch IOC 위원장을 특별 초청하였고 Samaranch IOC 위원장은
총회 회의석상에서 ′86, ′88 양 대회를 역대 최고의 대회로 개최한 대한민국과 KOC의 저력에 대하여 강조하면서 간접적으로 부산유치지원사격을 아끼지 않았다.
OCA 총회 참석 및 카오슝 유치를 진두 지휘하는
리더 격인 Feng-shu CHANG 대만 NOC 위원장은
총회 전날 김포국제공항 도착기자회견을 통하여 2002 아시안게임 개최도시 선정과 관련, OCA 서울총회가 비밀투표로 개최도시를 선출한다면 카오슝이 당선될 것이라고 호언장담하였다는 이야기를 들은 필자는
총회 전날 KOC 직원들과 함께 투표 대비 총회장 꾸미기 철야작업에 들어갔다. 이미 각 회원국에 대한 테이블 배치(Setting)가 완료된 상태에서, 각 회원국 NOC 대표들에게 「편안한(?) 투표 분위기」조성을 위한 테이블 재배치 작업을 시작한 것이다.
국가별 영문 알파벳순으로 이미 배치한 각 테이블의 위치 중 대만
NOC가 회의장 중간 뒤쪽에 위치한 관계로 혹시 카오슝 측 작업에 관련된 NOC 대표들이
대만 NOC 대표들의 감시를 의식하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기존 국가별 영문 알파벳을 바꿀 순 없어서 테이블을 세로 방향으로 길게 횡으로 늘려 기술적으로 대만 NOC 테이블이 맨 우측 앞 열에 오게 하는 데 성공했다.
총회 당일, 2002 아시안게임 개최도시 선정 투표에
앞서 양 후보도시의 프레젠테이션이 있었다. 먼저 카오슝 대표단이 이미 예견되었던 공약(OCA 발전기금기탁, 회원국 NOC
참가선수단 왕복항공료와 체재비 제공 및 카오슝 무료 전지훈련 제공 등)을 발표하자, 부산광역시 김기재 시장과 우병택 유치위원장이 필자를 급히 찾았다.
이들은 총회장 바깥 대기장소에서 필자에게 카오슝 유치 공약에 맞불을 놓을 수 있도록 영문 연설문을
수정해 달라는 요청을 했다. 필자는 공통 해당 부분만 영어로 수정해 주었고 곧이어 부산 유치도시대표단
프레젠테이션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장내 정리정돈을 위한 10분간의
휴식시간이 주어졌다.
곧이어 벌어질 투표방식에 대하여 OCA 측이 비밀투표로
진행할 것이라는 급박한 정보를 입수한 필자는 단상으로 달려가 김운용 KOC 위원장에게 OCA 헌장의 규정에 의하면 참석대표 1/3 이상이 찬성할 경우 투표방식을
거수방법(Showing hands)으로 하도록 되어 있다고 보고하자,
즉시 조치를 취했고 OCA 회장은 A. de
O'Sales OCA 규정위원장(홍콩)과 규정관련
협의 후, 각국 회의대표들의 의견을 묻자 1/3이 훨씬 넘는
대표들이 거수투표방식에 찬성했다. 이것이 막판 판세를 결정한 분수령이었다.
투표권이 없는 게스트나 옵저버, 유치 대표단들이 모두
총회장 밖에서 결과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고, 필자는 OCA 총회
조직위 실무총괄책임자로서 투표권자들이면서 필자와 허물없이 막역한 친분 관계인 아시아대륙NOC 대표들의
테이블을 종횡무진 헤집고 다니면서 거수투표방식결정에 대해 무언의 지지호소를 하고 다닌 것이 주효했다.
Sheikh Ahmad OCA 회장이 먼저 "부산을 개최도시로 선호하는 대표들은 손을 들라."("Anybody
in favor of Busan, please raise your hands!")고 하자 당시 42개국 NOC 대표들 중 38개국이 손을 들었으나, 맨 우측 앞 열에 앉아 있던 대만 NOC 대표 석 눈치를 보아가며
들쑥날쑥 손을 드는 바람에 두 번, 세 번씩 표를 세어야 했다.
대만 NOC 대표 석 재배치 효과도 일조한 순간이었다.
나머지 4개국 NOC 대표들은
용감하게 카오슝 지지를 표명하였다.
이미 부산광역시로 개최도시가 확정되었기 때문에 우정 카오슝 지지 표명을 했다는 모 NOC 사무총장의 후일담도 있었다.
이로서, 대한민국은 일본(동경, 히로시마)에 이어
수도가 아닌 도시 부산에서 아시안게임을 개최한 도시가 되었고 중국이 1990년 북경에 이어 2010년 수도가 아닌 광저우에서 아시안게임을 개최하는 세 번째 나라가 되었다.
OCA는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마케팅 사업의 성공적 수행으로 상당한 재정적 수익을 보게 되어 아시안게임도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진화를
시작했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을 2개월 정도 앞두고 OCA는 부산시가 앞서 카오슝과 같은 내용의 유치공약
이행에 불성실하다는 생트집을 잡고 개최도시 이전 운운하며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슈켄트에서 개최된 OCA 집행위원회에서
부산아시안게임 조직위원회(BAGOC) 우병택 집행위원장 등 대회 준비상황 보고 차 참석한 대표단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BAGOC(위원장: 김운용 KOC 위원장 겸직)은 긴급 위원총회를 열고 이에 대한 수습에 나섰다.
총회에서는 한기복 BAGOC 사무총장과 BAGOC 국제자문역을 맡고 있는 필자를 수습대표로 결정하였다.
당시 Sydney 2000 올림픽 한국선수단 단장대행
겸 선발대장으로 Sydney2000올림픽 현지에서 한국선수단 본단 현지 도착에 따른 통관 및 수송문제, 올림픽선수촌 입촌 절차, 올림픽대회 각 종목별 참가 선수 엔트리
확인 및 ID 카드 발급문제 등에 대해 시드니 조직위 부서별 책임자들과 최종 마무리 협상을 하고 있었던
필자는 본국에서 김봉섭 대한체육회 사무총장으로부터 이 내용을 전달받고 OCA와 이미 약속된 회의 장소인
싱가포르로 날아가 부산에서 합류한 한기복 BAGOC 사무총장과 사전 전략을 논의하였다.
![](https://t1.daumcdn.net/cfile/tistory/99A021375F52FF112B)
(협상종결 담판을 짓기 위해 쿠웨이트로 날아가 OCA회장인 Sheikh Ahmad<좌-2>및 Muttaleb Ahmad OCA사무총장<우-2>과 만났다. 필자<좌-1> 및 故 한기복 BAGOG 사무총장<우-1>)
OCA와 합의된 내용의 핵심 골자는 BAGOC 측이 앞으로 남은 2년 기간 동안 OCA 부산아시안게임 마케팅사업에 적극 협조하기로 하고 합의내용 불이행 시 불이익 감수 협약서를 작성하고 서명하여
이를 양자가 법적 구속력을 갖도록 제도적 장치 안에 두고 성공적 개최를 위하여 상호 간 협조체제를 강화하자는 내용이었다.
양자
간 협약서는 Sydney2000올림픽 기간 중 OCA를 대표하여 OCA 회장과 사무총장 그리고 부산시 및 BAGOC을 대표하여 故
안상영 부산시장, KOC를 대표하여 김영환 명예총무가 각각 서명하였다.
(그 당시 홍콩 HSBS은행에 예치했던 계약 불이행 시 보증용 금전 채무 금(Non-Performance Bond)US$2,000만불이 대회개최 후 환율급등으로 부산광역시에 막대한 환차익
보너스도 안겨주었다.)
이로써 부산아시안게임 개최지 변경 논의는 없었던 일로 일단락되었다.
우병택 BAGOC 집행위원장과 도종이 국회의원, 이영 부산시의회 의장 등은 부산아시안게임 유치 현장실무 주역이면서, 부산아시안게임
개최지 변경 위기 등 제반 문제 등을 스포츠외교차원에서 해결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한 필자를 「부산명예시민」으로 강력 추천하여 필자는 2000년 10월 28일
졸지에 한국인으로서 같은 나라인 한국의 부산명예시민(일반적으로 외국인을 명예시민으로 위촉한다-편집자 주)으로 위촉되는 진귀하고 영광스런 기록 보유자가 되었다.
![](https://t1.daumcdn.net/cfile/tistory/99C227405F52FFFB26)
![](https://t1.daumcdn.net/cfile/tistory/99C4B3405F53003825)
![](https://t1.daumcdn.net/cfile/tistory/99B32D355F5300542A)
(좌로부터 이광태 부산시 양궁협회장, 권경상 BAGOC마케팅본부장<2014년 인천아시안게임조직위원회 사무총장
역임>, 필자, 안상영 부산시장, 부산시 관계자들)
필자의
명예시민증 수여에 견인차 역할을 다 해준 이영 부산시의회 3대의장에게 깊이 감사 드리고 함께 막후에서
화룡점정 역할을 해주었던 故 우병택 부산시의회 초대의장 겸 유치위원장 겸 BAGOC집행위원장과 이를
흔쾌히 받아 들여 내국인인 필자에게 부산명예시민증을 수여한 故 안상영 부산시장에게 다시 한번 감사 드리며 명복을 빈다. R. I. 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