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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1.05.06 윤강로 스포츠외교관 에피소드 2편(外大동시통역대학원입학과 전방 군복무 그리고 대한체육회 특채입사)
  2. 2021.05.05 세계태권도(WT)총재 포함 임원선출임기과 연령제한 및 양성균형 등 지배구조개혁단행(2021년 4월20일)
  3. 2021.05.04 국제스키연맹(FIS)신임 회장 선거 2021년 6월5일 FI총회에서 누가 될까?
  4. 2021.05.03 윤강로 스포츠외교관 에피소드 1편(로키 윤 Rocky Yoon과 몽골 명예박사학위 취득 이야기)
  5. 2021.04.27 2032년 올림픽 호주 Brisbane2032개최 굳히기 행보 가속화 보증서 완비
  6. 2021.04.26 윤강로가 IOC위원장에게 공식발언 후 IOC에 기부한 진화된 새로운 올림픽 표어(More V.I.P.)제안 실화 및 IOC올림픽기존표어(Olympic Motto)함께(Communis=Together)추가 후 5개국어 표현(4월21일)
  7. 2021.04.22 Cherishing the Memory of a Close Mongolian Olympic Friend of Mine Dr. D. Zagdsuren, NOC President /몽골올림픽위원회 전임위원장 별세를 추모하며)
  8. 2021.04.22 윤강로가 본 근대올림픽 세계최고스포츠외교관 겸 최고경영자 Samaranch IOC위원장회고(Reminiscences of World Top Notch Sport Diplomat and IOC President CEO in Modern Olympic History Juan Antonio Samaranch)
  9. 2021.04.20 Bach IOC위원장 Tokyo2020 Hiroshima지역올림픽성화봉송참관 및 Suga일본총리면담 일본방문(5월17일~)
  10. 2021.04.18 (특집)외국어 잘하기 위한 비법 시리즈 (토종 영어 불어 정복기 체험담)
스포츠 외교2021. 5. 6. 10:28

[윤강로 스포츠외교관 에피소드 2편(外大동시통역대학원입학과 전방 군복무 그리고 대한체육회 특채입사)]

 

 

필자가 1979년 말 한국외국어대학교 영어과 졸업반 시절, 故 박정희 대통령의 한국의 세계화 및 국제화를 위해 외국어 능통자에 대한 우대 정책을 도입하고자 외대에 동시통역대학원(지금은 외대 통·번역 대학원) 설립을 추진하였다.

 

(외대 영어과 졸업식에서 USO CEO가 보내온 공로 표창장 및 외대 영어수필대회 가작상장 등)

 

당시 통역대학원 입학생들 중 병역 미필한 남학생들에게는 당시 KAIST(Korea Advanced Institute of Technology; 과학기술연구원)의 경우와 같이 군 복무 대신 해당 전공분야 관련기관 근무로 병역을 대신해주는 병역특례법과 비슷한 법안을 국회에 상정해 놓은 상태였다.

 

그래서 外大 영어과(현 영어대학) 졸업반이던 필자는 대학원 진학, 병역문제 해결 및 미래 구상을 위한 교두보 마련 등 3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을 수 있다는 판단 하에, 필사적으로 공부하여, 영·불 동시통역과 입학시험에 합격할 수 있었다.

 

영어는 전공 과목이었지만 불어는 2학년 때부터 시작한 부 전공이라서 아무래도 부실하였지만 그야말로 미친 듯이 광야에서 설파하듯 모든 일상 대화를 동아리들과 불어로만 지껄여 대기도 했다.

 

「지성이면 감천 = Heaven helps those who help themselves/Sincerity moves the heaven」이라 했다. 필기시험(Written Exam)을 마치고, 구술시험(Oral Test)을 보았다.

 

먼저 영어 구술시험장에는 학부시절 평소 어머니처럼 모셨던 박순함 교수님과 다른 외국인 교수님 2명 등 모두 세 분이 시험관이었는데, 필자가 평소 「USO(United Services Organization; 서울 남영동에 소재한 미군 및 미국인 봉사단체)」에서 유급 자원봉사자(Paid Volunteer) 3년간 활동해온 터라, 영어로 대화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자신만만하게 구술시험에 임했다.

 

(외재 재학시절 및 군대 휴가기간 중 USO Volunteer활동 시 미군관련 행사인 Six-Star Salute행사장에서)

 

외국인 교수와의 질의응답(Questions and Answers)은 순조롭게 끝냈는데, 그다음 순간 박순함 교수께서 한국어 조간신문(조선일보)을 꺼내더니 여러 장을 넘기시다가, 문화 면에 소개한 「미국 인디언 문화(American Indian Culture)」 기사내용을 우리말로 읽고 나서 필자에게 지금 동시 통역장에서 통역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들은 바를 영어로 옮겨 보라고 주문했다.

 

아찔하면서도(dizzy) 짜릿한(tingly) 순간이었다. 왜냐하면, 그날 아침 조반을 먹고 시간 여유가 있어서 조선일보를 뒤적이다가 평소 관심이 많던 미국 인디언 기사가 눈에 띄기에 일독(Reading through once)한 기사였기 때문이었다.

 

이미 기사내용(Article contents)을 알고 있었으므로, 느긋하고(pleased) 자신 있게(self-assuredly) 영어로 통역을 했다. 감독 교수님들의 평(comments)이 내 귓전을 울렸다. 「영어가 생활화되어 있구먼!

 

이렇게 영어 구술시험을 무사히 끝냈지만, 불어 구술시험이 걱정되었다.

다시 옆에서 같이 시험에 응시하던 「윤정은」(이후 Freelancer로 영·불 통역사 활동 중)과 불어로 떠들면서 준비운동(warming up)에 돌입하였고, 필자 차례가 되어 불어 구술 시험장에 들어갔다.

 

프랑스 카톨릭 신부 출신인 여동찬(Roger Leverrier) 교수와 다른 2명의 프랑스인 교수가 앉아 있었다.

 

몇 마디 불어로 질의응답(Questions and Answers)이 끝나자, 평소 한국말을 한국인보다 더 정확하게 구사하던 여동찬 교수께서 필자에게 「너 참 딱 걸렸어! 지금부터 내가 읊조리는 내용을 우리말로 뜻풀이 해봐!」하는 것이었다.

 

(외대 부전공과목으로 시작한 불어가 동시통역대학원을 거쳐 대한체육회 국제통으로 IOC평가위원 활동 시 Jacque Chirac프랑스 대통령에게 칭찬 받을 만큼 일취월장한 불어를 구사하게 되었다)

 

자못 긴장이 되고, 귓구멍이 크게 열리는 순간이었다. 빠른 속도의 불어로 읽어 내리는 내용은 조선시대 영·정조 시대의 역사 내용과 더불어 정조의 수원으로의 한양 천도에 관련된 내용이었다.

 

필자는 감았던 눈을 뜨고, 들은 내용의 일부를 우리말로 해석하면서 정조의 한양 천도 계획을 요약해서 답변하였다. 여동찬 교수는 「아쭈, 감 잡았는데!」라고 하면서 긍정적인 평가를 내려 주었다.

 

이렇게 외대 동시통역대학원 영·불과 2기로 합격하고 입학하였다. 1, 2기가 동시에 시험을 본 관계로 필자는 수업도 1980년에 시작되어야 할 2기생이었지만 1기와 함께 1979년도 가을학기 수업에 같이 임하였다.

 

그러나 뒤이어 10·26사태가 발생하여 박정희 대통령께서 최측근이라고 할 수 있는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비명횡사하신 후 12·12사태가 뒤를 잇고, 대한민국은 무정부상태가 되었다.

 

필자를 포함한 영·불과 2기생은 모두 10명이었는데 8명이 여학생들이었고, 필자와 류구현(외대 영어과 동기생; 삼부토건회장 비서실장 역임)만 남학생인 관계로 학기 중에 병역특례법 국회상정이 물거품이 되었으므로 프랑스 또는 벨기에에서의 위탁교육 2년을 마치기 위해선 우선 병역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그 당시 1980년도 초반 모든 대학이 휴강상태여서 수업이 제대로 진행되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도 우리 동시통역대학원은 스터디 그룹(Study Group)을 결성하는 등 열심히 공부에 임했지만, 필자는 대한민국 남아인 관계로 부득불 학기 중간에 휴학 계를 제출하고 곧바로 군 복무에 들어갔다.

 

당시 논산훈련소에서 신병훈련 4주간을 마치고 배치된 곳은 103(1군사령부 소재 강원도에 위치)였고 양구를 통해 인제·원통에 위치한 육군 제 OO사단 보충대에 최종 배속이 되었다.

 

내 전공과는 전혀 생소한 군대 생활의 시작이었다.

 

                (군복무 기간 중 유격훈련 장면)

 

운 좋게도 당시 사단장이셨던 김신배 소장과 연결이 되어, 영어와 관련된 업무도 수행하고, 남들과 같이 힘든 유격훈련, 사격훈련, 천리행군 등을 소화해내면서 27개월 군 복무를 마치고, 육군병장으로 만기 제대하였다. 제대 후 동시통역대학원 신학기 복학까지는 9개월간의 공백이 있었으므로 대학시절, 아르바이트 겸 자원봉사를 하던 USO(United Services Organization)로 임시복귀(?)하여 부산에 정박한 미 항공모함 선실까지 들어가서 미 해군장병 부산체재에 따른 관광 브리핑도 하고, 진짜 오리지널 미국 음식 뷔페도 시식하고, 아르바이트로 관광 가이드를 맡은 부산 외대 여학생들에게 임무 분담시키고, 각종 프로그램도 편성하는 등 바쁘고, 부담 없는 세월을 보냈다.

 

(12사단 군 복무 기간 중 사진과 Glysteen당시 주한 미국대사 및 미8군사령관 워컴 대장과 함께)

 

그러던 중, 1980 930일 당시 서독 바덴바덴(Baden-Baden)에서는 대한민국의 서울이 일본의 나고야를 예상 밖으로 52:27로 누르고 1988년 제24회 올림픽대회(The Games of the 24th Olympiad 1988) 개최도시로 선정되는 쾌거 이후, 한국에서는 서울올림픽대회 조직위원회(SLOOC)와 함께 이를 지원할 정부조직으로 체육부(Ministry of Sports) 1982년 초 창설되었다.

 

서울올림픽 유치 창구 역할을 한 KOC(대한올림픽위원회; Korean Olympic Committee)도 국제업무 강화를 위해, 국제 과장을 맡고 있다가 체육부 해외협력과장으로 자리를 옮긴 오지철 前 문화관광부 차관(현 종합유선 TV방송협회 회장 및 TV조선 사장 역임/현 단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장) 후임으로 국제업무를 전담할 사람을 찾고 있던 중 USO 활동 시 알게 되었고 당시 KOC 명예 총무를 맡고 있던 최만립 부위원장(IANOC APOSA 회장 역임)의 추천으로 필자는 KOC 국제부에 5(참사보)으로 특채되었다.

 

(대한체육회 국제통으로 활동한 사진 일부<좌로부터 이원경 제2대 체육뷰장관에게 방한한 모로코 IOC위원 Mohammed Benjelloun을 불어로 통역하고 있는 필자-사마란치 IOC위원장의 KOC정부영위원장 면담 시 통역장면 등>)

 

 

결과적으로 최만립 회장의 발탁에 힘입어 오늘날의 필자가 국제 스포츠계에서 한국을 대표하고, 아시아도 대표하는 스포츠 외교관으로서 이름을 낼 수 있었다고 생각하며, 이번에 지면을 빌어 최회장께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최만립<좌측> 당시 KOC부위원장 겸 명예총무와 평창동계올림픽유치 활동 차 아이슬란드 레이캬비크개최 EOC총회 참석 중 함께)

Posted by 윤강로 (Rocky YOON)
스포츠 외교2021. 5. 5. 10:48

[세계태권도(WT)총재 포함 임원선출임기과 연령제한 및 양성균형 등 지배구조개혁단행(2021420)]

 

420일 열린 세계태권도(WT)이사회가 임원임기 및 연령제한을 포함한 지배구조 개혁안을 승인하였다고 한다

 

연령제한(age limits)과 양성균형(gender balance)내용을 포함하고 있고 이날 승인된 개혁안에 따르면 선출 직 WT임원의 경우 어떤 직위라도 3연속 임기 동안만 재직할 수 있다(set to only be able to serve three consecutive terms in any role)라는 것이다

 

 

물론 새로운 규칙들은 전자투표로(via an electronic vote) 실시될 WT총회인준이 아직 필요하긴 하지만 예상대로 승인되면 오는 10월 실시되는 WT총재 및 이사회 임원선거부터 효력을 발생할 것이다.

 

하지만 개혁안이 생성되기 전에 재직했던 임기는 후보자 제한규정에 가산되지 않을 것(Terms served before the reforms were made will not count towards a candidate's limit)이어서 조정원총재의 경우 재선이 가능할 것이라는 해석이다  

 

조정원총재는 현재 4번째 임기 중에 있다

개정된 규정에 의하면 3회 임기에 재직한 임원들의 경우 4년 인터벌 후(after a break of hour year)선거에 출마가 가능하지만 역시 다시 3번 연속 재임만 가능하다.

 

새로운 후보자들은 선거일 기준 70세이하(younger than 70 on the day of an election)여야 하며, 재선에 출마하는 후보자들의 경우에는 80세 이상은 출마할 수 없다(those standing for re-election cannot be 80 or older)

 

WT이사회는 아직 37명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4명이 추가로 선출될 것이라고 한다

5대륙 별 각 1명씩의 여성이사 선출이 의무적이며 부회장 중 한명은 반드시 여성부회장이어야 한다는 의무조항이 생겼다.

 

 Chungwon Choue is presently serving a fourth term as World Taekwondo President ©World Taekwondo

 

 

동 개혁안은 WT법사위원회(Juridical Committee) 및 청렴윤리위원회(Integrity Committee)ASOIF(Association of Summer Olympic International Federations)로부터 권고 받은 최우선 모범사례(recommended best practices)를 근거로 작성되고 개발된 것이다.

 

개정된 개혁안 하에서 대륙 별 관장 기구들은 해당 대륙 별 기구 이사회 구성 시 최소 2/3에 해당하는 이사들은 총회에서 선출되어야 하며, WT는 모델 법규(model statutes)를 대륙 별 기구들에게 제공할 것이라고 한다

 

WT대륙 별 기구는 금년 1011WT선거총회에 앞서 79일까지 현 대륙 별 법규를 개정하도록 독려하고 있다  

WT선거총회에서 투표를 관리 감독할(to oversee the voting) 특별 선거위원회(an ad-hoc Elections Committee)위원장으로 WT 부총재인 Aicha Garad Ali가 지명되었다.

 

2021년도 WT총회는 중국 Wuxi개최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 개시 전에 열릴 예정이다.

 

*분석 및 향후 전망:

 

WT총재(74세)공백을 살리기 위해 신임후보자들의 연령한도는 70세 이하로 규정하면서 재선 후보들의 경우 80세로 연령을 10년 연장한 것은 필요한 조치라고 사료된다.

 

또한 개혁안 제정 전 다선(multiple terms elections)경력을 산정하지 않은 것도 과도기에 필요한 조치라고 판단된다

 

4연속 연임한 조정원WT총재(74)의 경우 다시 새롭게 4년씩 3(12) 연임(2021~2033)이 가능하다는 산술적 해석이 나오지만 개정된 규정에 따르면 80세가 넘을 경우 재출마가 어려워질 공산이 크다.

 

조총재(1947.12.10)가 현재 74세이므로 재임(2021~2025/78) 및 또 다시 연임(2025~2029)까지는 재선 출마 할 시기의 나이가 78세로 가능할 수 있지만 또 다시 3선출마(82/실제로 7)은 규정 상 불가할 전망이다.

 

이제 한국은 태권도 종주국으로 조정원 총재 후임WT총재 발굴에 지금부터 나설 때다.

 

*References:

-insidethegames

Posted by 윤강로 (Rocky YOON)
스포츠 외교2021. 5. 4. 12:14

국제스키연맹(FIS)신임 회장 선거 202165FI총회에서 누가 될까?

 

1924년 창설되어 97년 역사를 자랑하는 국제스키연맹(FIS: Federation Internationale de Ski)회장은 다 합쳐서 달랑 4명에 불과하고 모두 남성 회장이었다.

 

1)  1FIS회장 Ivan Holmquist(스웨덴): 1924~1934(10년간)

2)  2FIS회장 Nikolai Ramm Ostgaard(노르웨이): 1934~1951(27년간)

3)  3FIS회장 Marc Hodler (스위스): 1951~1998(47년간)

4)  4FIS회장 Gian-Franco Kasper(77/스위스): 1998~2021(23년간)

 

 

(Marc Hodler 3FIS회장 겸 IOC위원과 함께)

 

5FIS회장이 드디어 다음달 202165일 열리는 FIS 총회에서 선출될 예정이다.

 

4FIS현 회장인 Gian-Franco Kasper23년 간 FIS사무총장을 역임하다가 다시 23년 간 FIS회장 직을 수행해 왔다. 고무적(inspirational)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의 성정이 무뚝뚝하다고(grim and gruff)묘사되긴 하지만 임기 중 FIS는 발전을 거듭해 온 것이 주지의 사실이기도 한다.

 

 

            (4FIS회장 겸 IOC집행위원화 함께)

 

필자가 지켜본 Kasper FIS회장은 끽연가(chain smoker)로서 과묵한 편이지만 개인적으로는 다정다감하고 원칙주의자면서 합리적인 스포츠행정가로서 특히 평창의 동계올림픽 삼세번 유치과정과 평창2018조직운영 측면에서 많은 도움을 준 바 있다.

 

차기 제5FIS회장 후보로 출사표를 던진 인물은 모두 4명이 이른다

 

1)  Johan Eliasch(스웨덴): 글로벌 스포츠용품 및 의류 브랜드 Head회장(chief executive of the equipment and sportswear brand Head)

2)  Urs Lehmann(스위스): 전 세계 스키(활강종목) 우승자 겸 Similasa회장)Former World Downhill champ and Similasan chief executive)

3)   Mats Arjes(스웨덴): FIS이사회 부회장(2010~현재)(a FIS Council Vice President from 2010-present)

4)  Sarah Lewis(영국):  Calgary1988동계올림픽 회전 및 대 회전 출전 스키선추출신-1995FIS입문-이후 20년 간 FIS사무총장 직 수행-202010FIS집행위원회로부터 내부 알력(internal rift)으로 축출 후 FIS회장 출마

 

 

          (Sarah Lewis FIS사무총장 시절 GAISF총회에서 함께)

 

Posted by 윤강로 (Rocky YOON)
스포츠 외교2021. 5. 3. 15:28

[윤강로 스포츠외교관 에피소드 1편(로키 윤 Rocky Yoon과 몽골 명예박사학위 취득 이야기)]

 

 

필자는 국제 스포츠에서 「로키 윤(Rocky Yoon)」으로 불린다. 자크 로게(Jacques Rogge) IOC 위원장은 필자에게 국제회의에서 발언권을 줄 때 “Rocky, please”라고 하였고 현 Thomas Bach IOC위원장도 필자를 로키’(Rocky)라고 지칭한다.

 

로키(Rocky)라는 이름은 필자가 한국 외국어대학교(HUFS) 재학시절인 1970년대 후반 대통령 컵 국제축구대회(일명 박스컵; Park's Cup) 대학생 통역으로 활동할 당시 미국 올림픽 대표 축구팀에서 붙여준 이름이다.

 

장충동 신라호텔이 생기기 전에는 앰배서더(Ambassador)호텔이 제일 좋은 특급호텔이었고, 미국 올림픽 대표팀과 숙식을 같이하다시피 하면서 통역에 임했는데, 여러 날 같이 지내다 보니까 선수들이 주로 미국 대학생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필자와는 친구가 되었다.

 

어느 날 아침 뷔페를 함께 먹고 나서 자연스럽게 장기자랑(Talent Contest)으로 이어졌고, 필자는 당시 흥행에 성공한(good box office) 미국 영화 중 실베스타 스텔론(Sylvester Stallone)이 주연한 「Rocky」라는 영화가 있었는데, 그 영화에서 보면 주인공이 몸을 단련하는 모습 중에 한 손으로 번갈아 가며 팔 굽혀 펴기(one-hand push-up)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한 손 팔 굽혀 펴기」 시범을 보여 주었다. 당연히 많은 연습이 필요했기 때문에 아무도 필자 흉내를 내지 못했다.

 

그 다음부터 그 친구들은 필자를 「Rocky」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외국인과 교분을 맺다 보면, 우리말 이름은 그네 들에게는 발음조차 어렵고 기억도 잘 못하기 때문에 편리하고 친숙해지기 위해서는 외국 이름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필자는 대한민국(Republic of Korea; Rok)과 윤(Yoon), Rok+Yoon=Roky=Rocky라는 등식도 성립되는지라 「로키 윤」을 필자 영어 이름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국제 스포츠계의 인맥을 형성하면서 소개할 때, 또 명함에도 그대로 사용했기 때문에 필자 본명을 전 세계 스포츠인들은 로키 윤”(Rocky Yoon)으로 알고 있다.

 

그런 까닭에, 한동안 외국으로부터 부재중인 필자를 찾는 국제전화가 걸려왔을 때, 「그런 사람 없다(There is no such person)」라고 KOC 직원들이 끊어버려 필자에게 중요한 연락을 해 왔을 때 곤란한 경우를 맞이한 적이 여러 번 있기도 했지만, 약간의 설명이 있은 후, KOC 내에서도 로키 윤이 드디어 유명(?)하게 되었다.

 

필자는 1982년 인도 뉴델리 아시아 경기대회 참가시절부터 유독 몽골 스포츠인들과 친하게 되었다.

 

징기스칸의 후예들이면서 우리 민족들과 얼굴모습이 너무 똑같은 그들, 우리가 어려서 몽골 반점이라고 하는 푸른 반점이 우리 모두의 엉덩이에 나타났다 사라졌기 때문인지 몰라도, 항상 그들을 돕는 마음으로 만남과 모임을 갖곤 했다.

 

그 당시 20여 년간 KOC 대표로서 올림픽대회를 포함한 각종 국제대회, 올림픽선수단장 회의, 아시아 올림픽 평의회(Olympic Council of Asia) 총회 등 필자는 필사적으로 국제 스포츠계에서 한국과 아시아의 권익옹호를 위해 투쟁했고, 그 결과 여러 가지 면에서 명성도 날리고 본의 아니게 때로는 이익 상충(conflict of interest)면에서 약간의 악명(?)도 떨치게 되었지만, 어쨌거나 국제 스포츠계에 깊은 인상을 남긴 것만은 자타가 공인하는 바이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사항은 약간의 언쟁이 있었다 하더라도, 즉시 오해를 풀고 나면 더 끈끈한 친구가 되는 것이 국제 스포츠계 관행 중 하나의 장점이다. 그래서 필자는 스포츠를 사랑한다.

 

한국인들은 「배가 고픈 것은 참을 수 있어도 배가 아픈 것은 못 참는다」라는 우스갯소리 아닌 우스갯소리가 회자된다.

 

한국은 동방예의지국임은 틀림없지만 그렇다고 국제 스포츠계에서, IOC 위원 등 지위 높은 인사들을 만날 때 항상 읊조리고 고개 숙이고 점잔을 빼고 겸손하게 처신하는 것이 그네들이 받아들이는 적절한 문화적 예의는 아닐 성싶다.

 

필자는 상대가 IOC 위원장이라 하더라도 기본적 예의 또는 매너만 지키면서 허물없이 친근하게 인사하고 전달할 메시지(Message)는 당당하고, 옹골차고, 차분하고, 확실하게 의사전달을 하면서, 유머도 함께 구사하는 편인데, 이러한 모습을 필자에 대해 못마땅해하고 시기심이 있는 한국인이 보게 되면, 건방지고, 나서기를 좋아하고, 가볍고, 진중하지 못하고 설치는 인간으로 둔갑해서 험담과 모함과 중상모략이 생성되곤 하여, 이제 필자는 한국인이 운집한 자리에선 되도록 외국 스포츠 인사들과 허심탄회하게 본연의 모습을 가능한 자제하게 되었다. 답답하고 서글픈 현실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몽골 스포츠계 인사들은 이러한 필자의 국제 스포츠계에서 발휘하는 실력과 거침없는 추진력, 성취도에 대해 상당한 공감과 찬사를 보냈었다.

 

그 결과로 필자가 여러 가지 이유로 해서 2010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위원회 공동사무총장으로 파견 근무 후 KOC로의 복귀가 어렵게 되었다는 소식을 2003 9월 서울에서 개최된 OCA세미나에 참석 중이던 작드 수렌(Zagdsuren) 몽골 NOC 위원장과 오토간싸간(Otogansagan) 몽골 NOC 사무총장이 알고 나서 귀국 후 필자에게 명예박사학위 수여를 몽골 NOC 집행위원회에서 논의 후 결정하였노라고 국제전화가 걸려왔으나 필자는 처음에는 반신반의(halfly doubt) 하였다.

 

(좌로부터 Magvan 몽골 IOC위원, 필자, Otogansagaan 몽골 NOC사무총장/우측 사진은 필자 첫 출판기념회<Press Center>에 참석한 Otogansagaan)

 

11월 초에 명예박사학위 수여식 일정과 필자 몸 치수와 머리 둘레를 문의하는 공식 문서를 팩스(Fax)로 받고 나서야 실제상황(Real Situation)임을 직감하게 되었고 2003 1128일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에서 바가반디 몽골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된 몽골 올림픽위원회 연례총회 개회식 직후 거행된 몽골 올림픽 아카데미 명의의 명예박사학위 제1호를 수여 받는 영광을 누렸다.

 

 

(사진 상단 좌측: 바가반디 몽골대통령 및 후임 남바린 엥흐바야르(Nambaryn Enkhbayar)몽골 대통령과 함께 2007/울란바토르/하단 좌측: Magvan 몽골 IOC위원, 필자, Zagdsuren 몽골 NOC위원장, 문동욱 현 계명대 교수)

 


작드 수렌(Zagdsuren) 몽골 NOC 위원장은 필자에 대한 명예박사학위 수여 배경에 대하여 그 당시까지 지난 21년간 10차례 올림픽대회 및 각종 국제회의 시 KOC 대표로서 스포츠외교실무를 전담해 활동해 왔으며, IOC는 물론 국제 스포츠계에서 조국인 한국뿐만 아니라 아시아권 국가 NOC들의 권익을 옹호하고 아시아대륙 발언권 강화 및 위상을 드높인 공적을 높이 평가받아 왔으며 많은 아시아지역 국가 NOC 관계자, 특히 몽골 NOC 위원장을 포함한 마그반(Magvan) 몽골 IOC 위원 등의 강력한 추천을 받아 몽골 NOC 집행위원회 및 총회에서 만장일치로(Unanimously) 필자에 대한 명예박사학위 수여 건이 승인되었노라고 인사말에서 수여 경위를 설명해 주었다. 「가문의 영광」(Glory and Honor to my Family)이 아닐 수 없다.

 

이후, 2004 222-27일 그리스, 아테네에서 개최되는 세계 각국 올림픽위원회 총 연합회(ANOC) 총회에 각국 당 2명만 허용되는 몽골 NOC 대표자격으로 참가해 달라는 부탁과 함께, 사상 유례 없는(Unprecedented) 일로서 외국인 자격으로 몽골 자국 NOC위원으로 위촉한다는 공식통보를 받게 되었다.

 

이 사실은 뉴스임이 틀림없다. 동아일보와 Korea Times지 등에서 인터뷰 요청이 왔다. 신문에 크게 보도되고, 언론에 알려지자 IOC 위원들을 포함한 많은 국제 스포츠계 인사들의 축하와 격려의 메시지(Message)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국경 없는 올림픽 운동의 전파자」(Borderless Olympic Movements Partner)라는 칭호까지 받게 되었다.

 

영어방송인 아리랑 TV에서 30분짜리 대담프로 출연요청도 왔다.

 

2010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 활동 당시, 체코 프라하 개최 IOC 총회에서 IOC 위원 전체를 매료시킨 훌륭한 영어 설명회(Presentation)를 주도했던 안정현 아리랑 TV 앵커(Anchor) 30분간 막힘 없는 프로그램을 함께 공유하기도 했다. 몽골은 필자에겐 잊을 수 없는 은혜의 나라다.

 

2021421일 몽골 NOC사무총장으로부터 Zagdsuren 전임 몽골 NOC위원장의 소천 소식을 알려왔다. 몽골 NOC와 그의 가족에게 애도의 메시지를 보냈다.

 

이 글을 작고한 몽골 올림픽 친구인 Zagdsuren 영전에 올린다. Rest in peace!

 

*칭기즈칸의 편지[김종래 님의 「밀레니엄맨」(해냄, 1998년간) 인용]

 

한국의 젊은이들아! 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고향에서 쫓겨났다.

가난하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들쥐를 잡아먹으며 연명했고,

내가 살던 땅에서는 시든 나무마다 비린내만 났다.

작은 나라에서 태어났다고 탓하지 말라. 내가 세계를 정복하는 데

동원한 몽골 병사는 적들의 100분의 1, 200분의 1에 불과했다.

나는 배운 게 없어 내 이름도 쓸 줄 몰랐지만, 남의 말에 항상 귀를 기울였다.

그런 내 귀는 나를 현명하게 가르쳤다.

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안에 있다.

나 자신을 극복하자 나는 칭기즈칸이 됐다.

 

 

 

 

Posted by 윤강로 (Rocky YOON)
스포츠 외교2021. 4. 27. 15:34

[2032년 올림픽 호주 Brisbane2032개최 굳히기 행보 가속화 보증서 완비

 

426일자 한 외신은 호주 연방 총리가 Brisbane2032올림픽이 제안한 전체예산의 50%를 호주 연방정부가 보증하고 나섰다고 한다.

 

외신은 Scott Morison호주총리가 Brisbane2032이 제안한 올림픽 소요예산 절반에 대한 정부보증을 확약함으로써 호주는 Melbourne1956-Sydney2000에 이어 3번 째 올림픽을 오세아니아 대륙-호주 땅에 불러올 것이 거의 사실상 확실하게 굳어져 가고 있는듯한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Redeveloped century old cricket ground Gabba set to be centerpiece for proposed Brisbane 2032 Olympic and Paralympic Games (Brisbane 2032 depiction)

 

호주연방총리가 Brisbane도시가 속한 Queensland주총리인 Annastacia Palaszczuk에게 보낸 426일 자() 서한에는 IOC가 올림픽유치승인을 위한 요구 항목 중 하나인 대회개최자금에 대한 연방정부 공약(the federal commitment of funds that the IOC requires to approve the bid)에대한 소식이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호주 연방정부는 또한 대회개최에 따른 안전(security)-입국사증(visas)-출입국관리(immigration)-과세(taxation) 등에 대한 보증확약문서(assurances) 427() IOC가 요구하는 마감일에 앞서 제공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Queensland주 정부와 복수의 올림픽개최도시 정부들은 이미 IOC요구 공약서 제출에 대한 조치를 일찌감치 마치고 전진 속도를 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제 IOC가 요구하고 있는 각종 보증서 서류들이 속속 답지하고 나면 IOCTokyo2020올림픽개회식 전에 개최될 예정인 제138IOC총회에서 Brisbane2032올림픽 개최지 선출을 승인할 수 있는 여건을 모두 갖추게 될 것으로 보인다.

 

IOC총회에 앞서 열리는 IOC집행위원회가 동의할 경우, 이어 열리게 되는 제138IOC총회는 Brisbane2032후보도시의 2032년 올림픽개최지 선출에 통과의례식으로 이를 공식 승인(to rubberstamp the election of Brisbane 2032 at an IOC Session 하게 될 것이 자명해 보인다.

 

50%연방정부 기금(federal funding)은 대회 개최 자본금 소요 프로젝트 전 국면에 걸쳐 우발적 자금 부족현상을 대비하는 분담지배구조 모델 실행을 보완해 주는 조건부 분담액(contingent on the implementation of a shared governance model with oversight on all phases of the capital projects)에 해당하게 되며 이러한 정부 기금은 Brisbane2032가 올림픽을 개최지로 선정될 경우에만 효력을 나타낼 것(will only come into effect if Brisbane is awarded the Games) 이라고 한다

 

공동운영되는 올림픽인프라에이전시가 주정부 및 연방정부 파트너십을 규제하고 조율할 것(A jointly run Olympic Infrastructure Agency will regulate the state and federal partnership)으로 알려지고 있다

 

지난 주 Palaszczuk Queensland주총리는 Brisbane100년된 크리켓 구장(Brisbane’s century-old cricket ground)‘The Gabba’2032년올림픽 개 폐회식 장 용도로 US$78천만불(9,360억원)의 비용을 투자하여 재개발할 것이라고 발표한 바 있다.

 

호주 Brisbane2032올림픽이 열리면 해당지역에 필요한 수송교통망 개발에 촉매제가 될 것으로 간주되고(considered a catalyst to the development of needed transportation upgrades in the region) 있지만, IOC가 제정한 지속 가능성 규칙에 의거하여 대부분의 경기장은 이미 갖추어져 있으며 극소수의 새로운 시설 건설만 하면(with little new construction required) 되도록 되어 있는 상황이다.

 

 

*References:

-GamesBids.com

-insidethegames

Posted by 윤강로 (Rocky YOON)
스포츠 외교2021. 4. 26. 19:12

[윤강로가 IOC위원장에게 공식발언 후 IOC에 기부한 진화된 새로운 올림픽 표어(More V.I.P.)제안 실화 및 IOC올림픽기존표어(Olympic Motto)함께(Communis=Together)추가 후 5개국어 표현(421)] 

 

 

421IOC집행위원회는 화상회의를 통해 현재 기존의 올림픽 표어(Motto)로 지속되어 온 라틴어 ‘CITIUS, ALTIUS, FORTIUS’(Faster/더 빠르게, Higher/더 높게, Stronger/더 강하게) ‘COMMUNIS’(Together/함께)를 추가하는 제안을 승인한다고 발표하였다.

 

       (421일개최 IOC 집행위원회 화상회의/출처: IOC)

 

IOC 집행위원회는 화상회의를 통하여 많은 의제들 중 기존의 올림픽 표어(Motto) ‘CITIUS, ALTIUS, FORTIUS’(Faster/더 빠르게, Higher/더 높게, Stronger/더 강하게)에 하이픈(-)과 함께 ‘COMMUNIS’(Together/함께)를 추가하는 새로운 올림픽 표어(Motto)변경 제안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지지할 것임을 발표하였다.

 

*언어별 올림픽 표어(Motto/Devise/Lema) 변경 후 5개 언어 표현

1) 라틴어: “Citius, Altius, Fortius – Communis”
2)
영어: “Faster, Higher, Stronger – Together”
3)
프랑스어: “Plus Vite, Plus Haut, Plus Fort – Ensemble”

4) 스페인어: “Mas Rapido, Mas Alto, Mas Fuerte-Junto”
4)
독일어: “Schneller, Höher, Stärker – Gemeinsam”

 

올림픽표어(Motto) 변경 안은 지난3월 개최된 제137 IOC총회에서 제안된 바 있으며, 이와 관련 국제 피에르 드 쿠베르탱 위원회(CIPC: International Pierre de Coubertin Committee)를 포함하여 다수의 지지를 받아온 바 있다.

 

421일 열린 IOC집행위원회가 올림픽표어(Olympic Motto) 변경 안을 공식승인함에 따라, 이 변경 안은 오는 720Tokyo에서 개최될 재138 IOC총회에서 정식 의제(Agenda)로 상정되어 최종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윤강로가 2002년에 공식 제안한 새로운 올림픽 표어(Olympic Motto) “More V.I.P” 실화 및 현황

 

근대올림픽을 부활시킨 주역인 쿠베르탱 남작이 주창하여 Faster or Swifter, Higher, Stronger<보다 빠르게, 보다 높게, 보다 힘차게>)에 대하여 스포츠외교현장에서 공식적으로 수정 제안한 새로운 올림픽표어(Olympic Motto))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한다.

 

2002년 말레이시아 콸라룸푸르 개최 ANOC(세계국가올림픽위원회 총연합회) 총회에 KOC 공식 회의대표 자격으로 참가하여 총회 4일째 IOC 집행위와의 연석회의(Joint Meeting Between IOC EB and NOCs) , 2001년도에 새로 선출된 Jacques Rogge IOC 위원장으로부터 발언권을 부여 받은 필자가 올림픽표어(Olympic Motto)에 대하여 질문 겸 건의 발언을 하였다.

 

필자의 건의내용은 기존 "Citius, Altius, Fortius"는 쿠베르탱 남작이 근대올림픽(1896년 제1회 아테네올림픽대회 정식 종목은 육상, 사이클, 펜싱, 체조, 사격, 수영, 테니스, 역도, 레슬링 등 9개였음) 6회 대회인 1924년 파리올림픽 당시 처음 도입하여 사용되어 왔으나, 스포츠의 진화(evolution)와 올림픽정식종목의 다양화 및 다변화에 따라 올림픽표어(Olympic Motto) 내용도 상응하는 조율(Fine-Tuning)이 필요한 시기가 도래한 것 같다고 전제하였다.

 

“More V.I.P.”에 대한 예시 설명으로서 정교함, 정확성, 생동감이 부각되어 우승자를 가리는 사격이나 양궁, 피겨스케이팅 그리고 리듬체조 등에 “Citius, Altius, Fortius”를 그대로 적용할 경우 올림픽표어(Olympic Motto)가 지향하는 메시지와 부합되지 않고 있음으로 해서 기존의 것은 살리되, 새로운 올림픽표어(Motto)의 출현이 보완적으로 필요하다고 역설하자, 당시 Rogge IOC 위원장은 필자의 새로운 올림픽표어(Motto)제안내용을 제시하지 않겠느냐고 자못 궁금해했다.

 

 

필자는 평소 생각해 왔던 ‘More V .I. P.’론을 꺼냈다: More Vividly, Impressively, Precisely(보다 명확하게, 보다 인상 깊게, 보다 정교하게)

 

이 새로운 올림픽표어(Motto)를 경청하고 난 뒤 Rogge IOC 위원장은 “귀하가 이 새로운 안에 대한 지적 재산권을 요구하지 않는다면 IOC는 검토할 용의가 있노라”(Unless you claim any intellectual property rights, the IOC will consider it)고 답변한 바 있다.

 

하지만 19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IOC는 필자가 제안하여 공식적으로 재능 기부한 “More V.I.P.”라는 신 개념의 올림픽 표어(Motto) 채택하고 있지 않고 있으며 IOC의 채택(?) 時까지 필자가 2004년 개설한 국제스포츠외교연구원(ISDI: International Sport Diplomacy Institute)의 공식 표어(Official Motto)로 사용해 오고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Posted by 윤강로 (Rocky YOON)
스포츠 외교2021. 4. 22. 23:31

[Cherishing the Memory of a Close Mongolian Olympic Friend of Mine Dr. D. Zagdsuren, NOC President/몽골올림픽위원회 전임위원장 별세를 추모하며)]

 

I have just learned that one of my closest Mongolian Friends, Dr. D. Zagdsuren, Former NOC President passed away yesterday. He died of kidney cancer.

 

It is a great loss not only to the Mongolian Olympic Movement but also to the entire global Olympic family.

 

Together with the global Olympic Family members who have known him for a long time, I am saddened by his sudden death.

 

He was kind enough to arrange an Honorary Doctorate for me at the Mongolian National Olympic Academy in November 2003 when I was suffering from Korean NOC office politics.

 

(With Dr. D. Zagdsuren, Mongolian NOC President at Ulanbataar 2003)

 

(From left: Mr. Magvan/Mongolian IOC Member, Dr. Rocky YOON Kang-Ro, Ph.D., Dr. D. Zagdsuren/Mongolian NOC President, Professor MOON Dong-Wook)

 

 

I had the honor to be awarded the 1st Honorary Doctors Degree in the presence then-Mongolian President, H.E. Bagabandi.

 

(With Mongolian President , H.E. Bagabandi)

 

 

 

May I take this opportunity to express my sympathy and deep condolences to his bereaved family and the Mongolian Olympic Committee along with all my Mongolian brothers and friends.

 

With condolences,

 

Prof. Rocky YOON Kang-Ro, Ph.D.

President of International Sport Diplomacy Institute and

Former Special Advisor to Mongolian NOC

Posted by 윤강로 (Rocky YOON)
스포츠 외교2021. 4. 22. 12:06

[윤강로가 본 근대올림픽 세계최고스포츠외교관 겸 최고경영자 Samaranch IOC위원장회고(Reminiscences of World Top Notch Sport Diplomat and IOC President CEO in Modern Olympic History Juan Antonio Samaranch)]

 

 

지금부터 11년 전인 2010 420일 불세출의 전설 IOC위원장을 역임한 Juan Antonio Samaranch 당시 종신 명예 IOC위원장이 별세(3개월 모자란 향년 90)하였다.

 

필자가 17년 전인 2004년 세계 최초로 설립한 국제스포츠외교연구원(ISDI: International Sport Diplomacy Institute)창립하여 운영해 오고 있다.

 

북한의 장웅 IOC위원의 권면을 참고하여 ISDI 연관 프로젝트로 시작했던 아시아 최초 영문스포츠뉴스레터인 SOS(Spotlight On Sport Life)를 발행하고 글로벌 배포를 시작한 바 있다.

 

배포 대상은 전세계 IOC위원들과 국제스포츠주요인사들 이었으며 2010년 당시에는 별세한 Juan Antonio Samaranch 7IOC위원장(1980~2001)에 대하여 집중 조명하고 전세계 스포츠 계와 공유한 Samaranch IOC위원장에 대한 영문스포츠레터를 통해 그의 올림픽운동에 끼친 업적과 그의 일생에 대해 회고해 본다.

 

아울러 이래 영문뉴스레터내용과 사진들을 Samaranch IOC위원장의 영전에 봉헌한다.

  

[In memory of the Demise of the late Juan Antonio Samaranch- the 7th IOC President(1980~2001)]

 

"20 April 2010 was a gloomy day for the entire Olympic Movement.

 

Sadly enough President Samaranch passed away just less than 3 months shy of his 90th birthday.

 

I still vividly remember in those days what we worked together like I smell the fresh paint...

 

May I wish to dedicate this article and photos to the late Juan Antonio Samaranch"

 

Sincerely,

 

Rocky YOON Kang Ro

President of International Sport Diplomacy Institute and

IOC Evaluation Commission Member for 2008 Olympics

 

(Samaranch IOC위원장 전성기 필자와의 Photo Gallery)

 

<Samaranch, Legend & God Father of the Olympic Movement>

21 April 2010 was a gloomy day for the entire Olympic Movement.

It was an earthquake to the world sport.

Icelandic volcano heralded such a bitter sorrow to the whole world.

Even the sky mourned the loss of the Olympic God Father.

Who said “April is the cruelest month.”?

 

Sadly enough President Samaranch passed away just less than 3 months shy of his 90th birthday.

He was born in Barcelona on 17 July in 1920.

He was elected IOC member in 1966.

He was elected IOC President in 1980.

He was elected Honorary IOC President in 2001.

He was the second longest serving IOC President (for 21 years) in the history of the Olympic Movement.

He skillfully protected the Games from the boycott.

He wholeheartedly contributed to the success of each and every edition of the Games including the 1988 Seoul Olympics in the midst of epidemic boycott syndrome.

He became the first recipient of the Seoul Peace Prize created in 1989 after the Seoul Games.

He is the record holder in terms of the number of visits to the host city of the Games.

He paid visits over 35 times to Seoul alone during the period leading to the Games.

 

             (With Juan Antonio Samaranch, Jr., IOC member in Spain)

 

 

Throughout my 40-year long period (25 years services at the Korean NOC) in the Olympic Movement, I was deeply inspired by his initiatives toward the Olympic Revolution, even including his typical voice, accents and his own vocabularies.

 

              (IOC Evaluation Commission Members in Toronto2008)

 

During travels and visits of the bid cities as part of the IOC Evaluation Commission for the 2008 Olympics, I used to make verbal assessments on daily works of our whole team by imitating his voice and accents mostly on the evenings over cocktails.

That offered some amount of fun to most of our team members chaired by Mr. Hein Verbruggen.

 

(IOC Evaluation team 2008/ Sergey Bubka/ IOC Member in Ukraine, Hein Verbruggen/Chairman, Carlos Nuzman/IOC Member in Brazil and Rocky Yoon/Istanbul 2001)

 

President Samaranch was my role model and hero.

He was a man of practicality.

It was President Samaranch that demanded the IOC Evaluation Commission to practically draft the final report to specifically serve the purpose for the IOC members.

It was his thoughtfulness and insightfulness that 2-page (A4 size) long condensed report by the IOC Evaluation Commission would be good enough to provide the IOC members with essential details and judging elements for balloting.

 

                                (IOC Evaluation Team in Beijing)

 

(After completing a final evaluation report on 5 candidate-cities for 2008 Olympics/IOC HQs. Lausanne: Samaranch, Mr. Francisco Elizalde, IOC Member in Philippines, Tommy Sithole, IOC EB member-turned to IOC Director of International Cooperation and Rocky Yoon)

 

Based on my personal experiences, let me summarize his character as follows:

 

1)  He was meticulous.

2)  He was fine and delicate.

3)  He was elaborate.

4)  He was accurate.

5)  He was careful and cautious.

6)  He was exquisite.

7)  He was moderate.

8)  He was intelligent.

9)  He was clever.

10)  He was wise.

11)  He was smart.

12)  He was knowledgeable.

13)  He was well-informed.

14)  He was diplomatic.

15)  He was politically skillful and sensitive.

16)  He was punctual.

17)  He had a perfect sense of timing.

18)  He was under perfect control of health care, trying to be in good shape at all times.

19)  He was always thoroughly prepared.

20)  He was calculative and precise.

21)  He was cool-headed.

22)  He was calm and discreet.

23)  He was realistic.

24)  He was shrewd and prudent.

25)  He was charismatic.

26)  He was totally responsibility-minded.

27)  He was erudite.

28)  He was honor-oriented.

29)  He was faithful to duty and friendship.

30)  He was warm-hearted.

 

     (With IOC President Samaranch at the reception in Barcelona 1991)

 

Let me epitomize his deeds and achievements as IOC President which include but not limited to the following:

 

1)  He abolished the term of ‘Amateurism’ at the Olympic Games.

2)  He introduced ‘Commercialism’ and ‘Professionalism’ into the Olympic Games on a balanced level.

3)  He improved the financial health of the Olympic Movement (IOC, IFs and NOCs) by developing TV rights and sponsorship known as ‘Top Partnership” and revenue-sharing mechanism.

4)  He strengthened Olympic Solidarity, and created the organ named the “Olympic Solidarity” through which the IOC redistributes its revenue which enables the NOCs to train and participate their athletes in the Olympic Games. (100% participation by the 205 NOCs)

5)  He effectively and efficiently integrated the global sport-related organizations:

-GAISF/AGFIS (104 Olympic and Non-Olympic international sports federations) <now newly branded as SportAccord>

-ASOIF (28 summer Olympic sports international federations)

-AIOWF (7 winter Olympic sports international federations)

-ARISF (multi-number of non-Olympic international federations)

    6) He played a leading role in representing the women in the IOC in terms of entry of the first woman members on the 1980s.

    7) He increased the percentage (20%) of women participation in the decision-making body of the Olympic Movement.

    8) He increased the number of disciplines for women in the Olympic program sports.

    9) He was instrumental in setting up the Court of Arbitration for Sport (CAS).

    10) He was the founder of OlympAfrica Foundation.

    10) He paved the way for athletes to get involved in the decision-making of the IOC by creating the IOC Athletes’ Commission.

    11) He moved forward to include Chairman of the IOC Athletes’ Commission as a member of the IOC Executive Board.

    12) He was responsible for the new IOC headquarters building in Chateau de Vidy by renovating and restructuring its function and role as a supreme global sport-governing body.

    13) He pioneered the establishment of the Olympic Museum in Lausanne.

    14) He took the lead in fund-raising for the construction of the Olympic Museum.

 

(Seh-Jik Park, SLOOC President, delivering donation for Olympic Museum construction to Mr. Berthold Beitz  then-IOC Vice President, IOC President Samaranch/Lausanne 1986)

 

    15) He was entrusted as the first Chairman of the Olympic Museum, thus contributing to the advancement of the Olympic Movement.

    16) He ironed out 30 years of reforms in six months for which the IOC approved a 50-point reform action-plan drafted in the aftermath of the Salt Lake City scandal.

    17) He brought in diversity and dynamism within the organization by co-opting people from all global social strata as IOC members, running the gamut from athletes and women through sport administrators, coaches, judges to the film director, business people, ministers and many others in addition to royal family members, princes, princesses, dukes, etc.

    18) He institutionalized the Olympics by introducing cultural events and educational programs, thereby culminating the Olympic values of excellence, fair play, and respect.

    19) He terminated the boycott from the Olympic Movement.

    20) He reached around the world, embracing Messrs. Mario Vazquez Rana of Mexico/ ANOC President, Joao Havelange of Brazil/ FIFA President and Primo Nebiolo of Italy/IAAF & FISU President to establish a formidable and unbeatable power base in the world of sport.

    21) He began the fight against doping, thus paving the way to create the World Anti-Doping Agency (WADA).

    22) He accelerated the initiatives of the Olympic Truce.

    23) He achieved the separate participation of China and Chinese Taipei in the Olympic Games.

    24) He made South Africa return to the Olympics after apartheid was dismantled.

    25) He put the stepping stone to reunification of South and North Koreas by arranging the joint marching of two Korean delegations,  hand-in-hand, at the opening ceremonies of the 2000 Sydney Olympics.

   26) He saw the reunification of East Germany and West Germany partly because of the successful organization of the 1988 Seoul Olympic Games jointly by the IOC and the SLOOC.

   27) He witnessed the joint marching of 12-nation CIS (Commonwealth of Independent States: Russia, Azerbaijan, Armenia, Belarus, Georgia, Kazakhstan, Kyrgyzstan, Moldova, Tadzhikistan, Turkmenistan, Ukraine, Uzbekistan) under the 12 national flags in front at the opening ceremonies of the 1992 Barcelona Olympics.

       Croatia, Slovenia, Bosnia-Herzegovina, 3 independent nations from Yugoslavia, Estonia, South Africa in 32 years and North Korea in 12 years also took part in the Games held in hometown of President Samaranch.

   28) He reluctantly saw his tenure was unfortunately tarnished by Salt Lake City Bid scandal through which 10 IOC members either resigned or were expelled in the late 1990s.

   29) He suggested that summer and winter Olympics would have to be separately held at two-year intervals for marketing and TV rights -friendly reasons. 1994 Lillehammer/winter and 1996 Atlanta/summer was his first such Olympics package.

   30) He realized the idea of sending the official invitation to the NOCs for the Olympics not by the OCOG but by the IOC for the first time in history from the 1988 Seoul Olympics.

 

(Official Invitation-sending ceremony by the IOC for 1988 Seoul Olympics: She-Jik Park, SLOOC President, President Samaranch, Chong-Ha Kim, KOC President, Dr. Un-Yong Kim, IOC Member in Korea/1987 Lausanne)

 

 

31)  He was the first recipient of the Seoul Peace Prize created in 1989.

 

 

 

Considering all his achievements and contributions, he deserves a Nobel Peace Prize even now.

I sincerely hope that the entire Olympic Movement would confer posthumous honors of “Nobel Peace Prize” on him.

 

 

In summary, let me humbly define our respected President Samaranch as under:

 

1)  He was a great sport leader.

2)  He was an outstanding businessman.

3)  He was a formidable sport organizer and orchestrator.

4)  He was an unprecedented IOC President.

5)  He was a perfect presider of meetings and conferences.

6)  He was a bona-fide philatelist and collector.

 

(Annie Inchauspe, President Samaranch, Rocky Yoon/109th IOC Session Seoul1999)

 

7)  He was an operation architect with an eye for beauty.

8)  He was a renowned banker (at Caixa Bank Barcelona).

9)  He was a consummate fund-raiser. (Olympic Museum)

10)  He was an all-round planner and multi-player.

11)  He was an impeccable diplomat.

12)  He was a pacifist.

13)  He was a quiet negotiator with consummate skills.

14)  He was a master in consulting people before taking a decision.

15)  He was a creator of consensus by shrewd persuasion and debate.

16)  He was a trouble-shooter, problem-settler, and trouble-solving leader.

17)  He was an industrious person.

18)  He was a life-time sport practicer.

19)  He was a multi-lingual.

20)  He was a world traveler visiting a record-number of countries. (all 205 IOC member-NOCs/Nations?)

21)  He was a man (Jack) of all trades.

22)  He was a great human-being.

23)  He was a good husband, good father and good grandfather.

24)  He was a man of “Unity” and “Olympic Solidarity”.

25)  He was and will be remembered as an Olympic God Father.

26)  He was a man of foresight and courage.

27)  He was a founder of new paradigm of modern Olympics.

28)  He was the savior of the Olympic Movement.

29)  He was a visionary and thoughtful leader.

30)  He was a towering figure in the world of sport.

31)  He was an immortal Olympic man.

32)  He was the first recipient of the Seoul Peace Prize.

33)  He was my Olympic teacher, mentor, and guide post.

 

                           (The latest photo with President Samaranch)

 

I still vividly remember my questions to President Samaranch at the joint meeting with IOC Executive Board and NOCs during the ANOC General Assemblies of  1996 Cancun, 1998 Seville, 2000 Rio de Janeiro about a couple of issues. Now he is gone, but I seem to hear his typical resounding voice. His words are still ringing in my ears.

 

As a chief-organizer of the 109th IOC Session in Seoul 1999 under the chairmanship of Dr. Un-Yong Kim, then-KOC President and IOC Vice President, I worked with Mme. Francoise Zweifel, IOC Secretary General, for its successful organization under the outstanding leadership of S.E.M. Juan Antonio Samaranch, IOC President.

 

(Dr. Un-Yong Kim, KOC President and IOC VP, Samaranch, Rocky Yoon)

 

In 2000-2001, I had the honor and privileges of working after being nominated by President Samaranch as one of the members of his last IOC Evaluation Commission for the 2008 Olympics (under the chairmanship of Mr. Hein Verbruggen) during his last-period of tenure as IOC President (2001).

 

During spring time in 2007, I paid a visit to meet with President Samaranch at his office in Barcelona as Secretary General of the 2014 PyeongChang OWG Bid Committee to pay respect to him while also seeking for his valued advice in general. That became my last personal interview and meeting with him as my Olympic God Father and Respected Teacher in the Olympic Movement.

 

During the interview, I felt his inward power as master of sport diplomat.

I was inspired and impressed by his profound affection in sport and the Olympic Movement.

 

I still vividly remember his face full of grace and his way of talking full of affinity for sport.

It was my first time to feel that he was so warmheartedly sentimental.

I was greatly fascinated by his seriousness, thoughtfulness, and profundity as my respected senior in the Olympic movement.

 

Holding my hands so warmly to pose for a photo was his last teaching on how to properly shake hands for a nice protocol photo.

“Parting was such a sweet sorrow…” I left him behind until we met together in Guatemala for the IOC Session in July 2007.

 

“Ah, he now departed us forever, but we did not send him away …”

 

 

I would like to dedicate my book on sport diplomacy titled “When Sport meets the World over Five Rings” to his departed spirit.

 

 

Nearly for 30 years in the Olympic Movement, I served him, respected him, and used to translate his speeches and dialogue during his visits to Korea over 35 times all along.

 

(IOC President Samaranch’s Airport Press Interview at the VIP lounge/Seoul)

 

 

I express my deepest sympathy and condolences.

May he rest in peace in heaven!

And may God bless him forever!

 

Yours very sincerely,

Rocky Kang-Ro YOON

 

 

(Roh, Tae-Woo/SLOOC President & President of Republic of Korea, Jong-Kyu Park, IOC Member in Korea, Young-Ho Lee, Sports Minister &  SLOOC Executive President/ Seoul 1985)

 

 

(President Samaranch's first visit to KOC 1983: Anti-clockwise//Jip Kim, Se-Won Kim, Sang-Ho Cho, Ju-Yung Chung/KOC President <not seen in the photo>Rocky Yoon, Samaranch, Tae-Woo Roh, Young-Ho Lee, Sang-Chan Lee/Dean of Korea Judo College, Alan Coupat/Chief of Staff of IOC President, Sheikh Fahad, Sharad Chandra Shah)

 

                 (Incarnation of IOC President Samaranch: "Olympic Solidarity")

 

Posted by 윤강로 (Rocky YOON)
스포츠 외교2021. 4. 20. 20:49

[Bach IOC위원장 Tokyo2020 Hiroshima지역올림픽성화봉송참관 및 Suga일본총리면담 일본방문(517일~)]

 

2021417일자 한 외신은 Thomas Bach IOC위원장이 5Tokyo2020올림픽 성화봉송 참관 및 Yoshihide Suga일본 총리와의 면담 차 일본을 방문이 예상된다고 보도하였다.

 

 

일본 대표 뉴스 통신사인 Kyodo NewsRach IOC위원장이 517일 시작되는 Hiroshima구간 올림픽성화봉송 축하행사에 참석할 것임을 보도하였다.

 

Bach IOC위원장은 다음날인 518Suga일본총리와 면담할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Bach IOC위원장 및 Suga 일본 총리 양측 모두 일본과 다른 곳에서의 코로나 확진환자증가추세가 올림픽 취소로 이어질 것이라는 추측에도 불구하고(despite speculation rising numbers of coronavirus cases in Japan and elsewhere could lead to the Olympics being cancelled))Tokyo2020올림픽이 그대로 개최될 것임에 대하여 단호한 입장을 견지(remained adamant)하여 오고 있다.  

 

Bach IOC위원장의 일본방문 출장은 Bach IOC위원장이 지난 11월 방일 이래 금년 들어 처음이며 대회가 1년 연기된 이래 2번 째 방일이 될 것이다

 

Bach IOC위원장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원자 핵폭탄 피폭 도시였던 Hiroshima지역 개최 올림픽성화봉송 행사에 참석할 것이 예상되고 있다.

                                                            

히로시마 원자폭탄 돔(Hiroshima Atomic Bomb Dome)은 올림픽성화봉송 루트애 위치한 세계유산등재 사이트(one of the World Heritage sites) 중 하나다.

 

Bach IOC위원장은 과거 Hiroshima를 포함한 지역들(locations)을 경유하는 올림픽성화가 평화의 메시지’(message of peace)를 어떻게 전하게 될 지에 대하여 언급한 바 있다

 

 

The Olympic Torch Relay is well underway, with the Games now less than 100 days away ©Getty Images(출처: insidethegames)

 

 

Bach IOC위원장은 행사 참석 후 방일기간 동안 Tokyo2020조직위원장인 Seiko HashimotoTokyo도지사 Yuriko Koike와도 면담할 것이 예상된다.

 

Tokyo2020조직위원회 대변인은 Bach IOC위원장의 방일 의사에 대하여 알고 환영하는 바이지만 구체적인 일정은 확정되지 않았다고 언급하였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Tokyo2020올림픽은 COVID-19대책을 곳곳에 세워놓고 개최될 것이며 해외 관객들 대회 참관은 이미 금지된(foreign spectators banned from attending) 상태이다.

 

대회 시작 전 3개월 남짓 남은 시점에서 Tokyo역시 일본 내 준 비상사태 하에 놓여있는(under a semi-state of emergency)10개 현들 중 한 곳이다

Tokyo2020올림픽 개회식은 723일로 예정되어 있다.

 

하지만 일본집권당인 자민당 2인자(second-in-command)Toshihiro Nikai는 지난 주 일본 내 COVID-19 상황이 악화될 경우 대회 취소가 옵션으로 남아 있다”(cancellation remains an option if the COVID-19 situation in Japan worsens)라고 시인하였다가 나중에 발언이 문제가 되자 자신의 발언내용을 희석시켜 뒤로 물리려고 시도하기도(attempting to backtrack on those comments) 하였다

 

 

*References:

-insidethegames

Posted by 윤강로 (Rocky YOON)
스포츠 외교2021. 4. 18. 11:47

[(특집)외국어 잘하기 위한 비법 시리즈 (토종 영어 불어 정복기 체험담)]

 

아래 글은 필자가 집필하여 첫 출간한  윤강로의 발로 뛴 스포츠외교’ “총성 없는 전쟁책에 실린 글 중 일부다.

 

 

1.   영어의 달인이 되려면…

 

한국에서 태어나 외국 유학 한번 못해보고 ‘영어의 달인’이란 호칭까지 듣고 보니, 쑥스럽기도 하고 과분하기도 하다.

그러나 진정한 ‘달인의 경지’에 미치기 위해서는 영어를 날마다 부담 없는 생활의 일부로 호흡하고, 느끼고, 생각하고, 실천함으로써 평생 실전세계의 수많은 과정을 통해 단련하고, 수련하고, 무엇보다도 대기 중의 공기를 들여 마시듯, 의식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자연스럽게 주고받다 보면, 그 과정이 곧 영어 수련이요, 그 자체가 훈련 겸 숙달이 된다. 이렇게 하여 어느 정도의 기간이 지나가고 나면, 그 과정의 열매의 달콤함을 느낄 수 있고, 어느덧 주위에선 「영어 잘하는 부류」로 통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물론, 모든 외국어가 다 마찬가지겠지만, 우선 익숙한 기본 단어와 흥미로운 문형을 찾아서(search) 자연스럽게 외우고(memorize), 대화체 내용을 흉내 내고(mimic), 실전에 응용하다(apply)하다 보면, 그냥 걷는 습관처럼, 자전거타기처럼 저절로 몸에 배고(habituated) 입에서 흥얼거리게(murmur) 되고, 그러면 그 자체로서 평소에 외국인과의 막혔던 대화(dialogue)와 회화(conversation)가 이루어지기 시작하지 않을까?

 

“아픈 만큼 성숙하리니.(No pains, no gains.)....

“결코, 부담스러워하지 말지어다!(Never feel pressed!)

 

2.   외대 부전공 불어정복기

 

필자는 외국어 대학교 재학시절 영어를 전공하고 제2외국어는 「독일어」를 하다가 부전공으로 「불어」를 선택하였고, 각고의 노력 끝에 외국어 대학교 부설 동시통역대학원(영·불 동시통역과)에 입학하게 되었다.

사실 제2외국어는 과목 자체도 필자를 포함한 대개의 경우, 시간 보내고, 시험 점수 잘 받아 이수학점을 성공리(?)에 따는 것이 관건이었지, 2외국어 과목설치 취지대로 선택한 제2외국어를 능숙하게 독해하고 말하고 듣는다는 것은 거의 모든 이들의 관심사가 될 수는 없었다는 것이 실제상황이리라. 하물며, 머리에 털 나고 처음 접해보는 「불란서어」를 부전공으로 선택했다는 것 자체가 모험이요, 무모한 도전으로 실속 못 차린 객기로 느껴졌지만, 어쩌랴.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는데(Dice is cast).

 

대학 2학년 때 시작하는 부전공 불어과목을 불어교육과 1년생들과 합반 형식으로 이루어졌는데, 난생처음 보는 불어 단어, 발음, 문장을 접할 때마다 두통과 멀미까지 느껴졌다.

 

당시 외대 불어과 주임교수이셨던 서정철 선생님께서 불어 부정관사 「un」이 포함된 문장을 읽어보라고 해서 나름대로 예습까지 해 온 터라 조심스럽게 자신만만하게 「앵」하고 읽었더니 「어디서 파리가 날라 다니냐」라고 하였고, 모든 학생들이 박장대소하는 바람에 나는 그만 부끄러워서 몸 둘 바를 몰라했고, 그 후 아무리 발음 연습을 해도 「그놈의 파리」는 나의 혓바닥과 목과 코 사이를 계속 왔다 갔다 할 뿐이었다.

 

그럭저럭 이 눈치 저 눈치 보아가며 근근 적선으로 학점은 겨우 땄지만, 불어 부전공과목 강의 시마다 주눅이 들어서 「못살겠다. 꾀꼬리」를 하염없이 외쳐 대다가,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 수소문 끝에 회현동 신세계 백화점 뒤편에 있는 프랑스 문화원 부설 불어 학원인 「알리앙쓰 프랑세즈(Alliance Francaise」에 등록했다.

 

겨울 방학 3개월 동안 낮에는 기초교양불어과정인 「모제(Mauget)」라고 통칭하는 과목(Cours de Langue et de Civilisation Francaise)을 듣고, 가지고 간 도시락을 먹은 뒤 그 건물 내에 있는 도서실(biblioteque)에서 하루종일 그날 배운 것을 복습하고, 또 저녁때 수강할 불어회화코스(De vive voix)까지 예습까지 하면서 그야말로 불철주야 집중코스(Intensive course) 3개월간 맹진하고 나니까 비로소 불어의 본체를 깨닫게 됐다.

 

그 과정에서 꿈에 불어로 이야기하는 「현몽(Appearance in a dream)」현상까지 생기다 보니 비로소 생소하기만 했던 불어에 대해 애정도 생기고 수업시간에도 인정받다 보니 그때부터 필자에게 펼쳐진 불어의 세계는 실로 예전 같지 않더라는 실제 체험담을 지면을 통해 소개해 보는 것이다.

 

그러한 열공과 정성이 결실을 맺어 외대 동시통역대학원 영어-불어과 입학시험에 당당히 합격하였으며 이후 스포츠외교현장에서 토종 불어 실력으로 종횡무진(?) 활약하는데 크게 일조하였다.

 

특히 필자가 2008년 올림픽 IOC평가위원으로 결선 진출 올림픽 유치도시 중 프랑스 Paris2008현지 방문 시 프랑스 대통령궁에서 당시 Jacques Chirac대통령과의 단체 면담대화에서 유감 없는 불어를 구사하여 주위를 놀라게 한 바도 있을 정도로 일취월장하기도 하였다

 

(Jacques Chirac프랑스대통령이 보내온 친필 서명과 악수하는 모습이 담긴 사진)

 

물론 나도 보통 사람인데 어찌 놀고 싶지 않았겠으며, 불어 공부 자체가 즐겁기만 했었겠는가. 하루에도 열두 번 때려치우고 싶고, 하품과 졸음과 지루함과 지리함이 늘상 엄습해 왔지만, 이러한 「공부 방해 사탄」의 시련을 극기하고자 하는 노력은 우리가 치러야 할 최소한의 대가가 아닐성싶다.

 

필자의 경험에 의하면, 어학은 배우고 익힌 문장과 단어를 무대 위의 배우처럼, TV 탤런트처럼 라디오 방송국의 성우처럼 상대방과의 실감나는 감정교류를 하듯 마치 역사의 한 인물처럼 그 감동, 그 느낌을 자기 목소리에 실어 크게 소리 내어 실감나게 실전처럼 어느 정도 지속적으로 연습하게 되면, 외국어를 관장하는 神이 반드시 감응하여 그대들을 기필코 도우리라!(Heaven helps those who help themselves!) 천우신조(天佑神助 Heaven helps and God assists)란 이렇게 간절히 간구하고 노력하는 자에게만 해당하는 말이 아닐까?

 

3.   조선일보 영어의 달인시리즈 15번쩨 인물 선정

 

아래에 필자의 영어를 잘하는 방법에 대해 신문에 났던 기사를 실어 보았다.

 

2000 4 21일 금요일 - 「조선일보 9면」

영어의 달인 시리즈 중 15번째 인물-윤강로 대한체육회 사무차장

 

대한체육회 국제담당 사무차장 윤강로씨는 한국 체육의 얼굴이다. 각종 체육관계 국제회의에는 빠지지 않고 참석, 우리나라 입장을 전달하고 새로운 정보를 입수한다. 82년 대한체육회에 입사한 뒤 매년 10여 차례, 지금까지 1500회 이상 각종 국제 대회와 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석해왔다.

 

당연히 영어를 잘하지 않으면 안 될 위치다. 그러나 윤씨는 단 일 년도 외국에서 산 적이 없다. 윤씨는 외국어대 영어과 76학번. 아버지가 고등학교 영어 선생님이어서 어릴 때부터 영어와 가까이 지냈다. 아버지가 그에게 가르친 것은 영어 단어나 문법이 아니었다.

 

영어를 대하는 자세. “한국인이 영어를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틀리면 어떠냐. 틀리면서 배워나가는 게 외국어다.

 

윤씨는 이후 현장에서 외국인들과 직접 부딪치면서 영어를 배웠다. 그래서 자기 영어를 ‘실전 영어’라고 부른다. 그는 대학 시절 USO(미국 봉사단체)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주한 미군 가족이나 군속, 관광객을 위해 여행 가이드로 일하며 그들로부터 살아 있는 영어를 받아들였다. 판문점이나 경주 등 관광지를 돌며 우리나라 역사와 상황을 영어로 설명하는 일은 영어 실력을 향상시키는 데 크게 도움이 됐다.

 

대학 3학년 때 교내 영어 경시대회에서 공동 1위의 영어 수필이었지만 더 많은 분량으로 제출한 선배 다음인 가작을 차지한 것도 영어에 자신을 붙게 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박스컵 축구대회가 꽤 큰 국제대회였지요. 그 대회와 세계 여자농구 선수권대회, 세계 사격선수권대회 등 국제 체육대회에서 통역을 맡으면서 체육계와 인연을 쌓았습니다.” 윤씨 영어는 나라에 따라 발음과 악센트가 달라진다. 수많은 나라에서 온 사람들과 온갖 영어를 하다 깨달은 것이, “나라마다 다른 영어가 있다.”는 것. “어학은 커뮤니케이션이 가장 중요합니다. 전 세계 누구와도 통할 수 있는 영어가 진짜 살아 있는 영어 아닙니까?

 

윤씨는 요즘 영어회화 책을 쓰고 있다. 제목은 ‘쪽집게 영어’라고 붙였다. 상황에 따라 필요한 영어 표현을 쉽게 찾아 쓸 수 있게 하겠다는 계획이다. 두 자녀에게도 “영어를 즐기라.”고 예기한다는 윤씨는 “잘할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먼저 부딪쳐야 영어가 는다.”며 다시 한번 ‘실전 영어’를 강조했다.

 

 

4.   자신 있는 모국어야말로 최상의 실전 외국어 (Mother tongue is the best foreign language)

 

필자가 대한체육회(Korea Sports Council) 및 대한 올림픽 위원회(Korean Olympic Committee) 국제과장(Director of International Relations) 5년차 시절인 1989년 당시 체신부 우표디자인 실장 겸 KOC(대한 올림픽 위원회) 문화위원(Cultural Commission Member)이었던 이근문 씨와 함께 IOC 본부가 있는 스위스 로잔(Lausanne)에서 개최된 세계 스포츠 박물관장회의(International Conference of World sports Museum Director)에 참가했을 때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스위스는 영세중립국으로서 영어, 불어, 독어, 이탈리아어가 공통어로 쓰이는 국가인데, 지역별로 4개 국어 중 1개 국어가 중심 외국어로 사용되는바, 로잔 지역은 불어권 지역이므로, 호텔을 제외한 일반 상점에서는 불어가 통용된다.

그 당시, 이근문 위원은 포도가 먹고 싶다고 하면서, 거리에 있는 과일가게로 같이 가서 포도를 사는데 필자가 불어를 하니까 같이 가자는 것이었다.

 

(IOC본부 개최 세계스포츠박물관장회의 기간 중 현지 실사에 참가한 각국 대표들/앞 줄 좌로부터 이근문 체신부 우표디자인실장-필자 등)

 

필자는 장난기도 발동하고, 평소 「모국어가 가장 뛰어난 외국어」라는 신념도 실험해 보고 싶은 취지에서, 이 위원한테 필자가 불어 한 마디 안하고 한국어만 사용해서 포도를 구입할 수 있으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었더니, 「말도 안 된다」면서, 만약 그리된다면, 그날 저녁식사와 와인 1병을 사기로 약속했다.

 

과일가게에 갔더니 전형적인 스위스 중년여성이 과일을 팔고 있어서, 그 여자에게 “안녕하세요?”하니까 그쪽에서는 “Bon Jour”하면서 “Qu'est que vous desirez?/What do you want?” 하는 것이었다. 필자는 시침 뚝 떼고, 포도를 가리키면서 “아줌마, 이 포도 사고 싶은데 얼마죠?” 라고 천연덕스럽게 물었더니, 그 스위스 아줌마는 어깨를 으쓱이면서 “Les raisins?/ 포도 말이유?”라고 되물었다.

 

필자는 손가락 1개를 내보이면서 “무슨 말인 진 모르지만, 이 포도 1kg만 달란 말이에요!”라고 하니까 그 아줌마는 “un kilo?” 라고 하였고 필자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래요, 1킬로 달란 말이에요”라고 하니, 저울에 1kg의 포도를 달아 종이에 둘둘 말아 주면서, Huit francs! 8 스위스 프랑!”이라고 했고, 필자는 “얼마라구요? 8프랑?” 하니까, 손가락으로 8을 표시해 주고 옆에서 지켜보던 이 위원은 8프랑을 지불하면서, 의아해하면서, 신기해했다.

 

포도가게 스위스 아줌마는 “Merci! Au revoir!/ Thanks! See you again”이라고 인사했고 필자는 “그래요, 또 봐요.”라고 하면서, 프랑스 과일 상점에서의 포도 구매는 불어 한마디 쓰지 않고 한국어로 100% 성공하였다.

 

아직 미심쩍은 표정의 이 위원은 호텔로 돌아와 필자에게 room maid 아줌마한테 불어로 실내화 한 켤레 좀 가져다 달라고 부탁하였고, 필자는 한국어로 “쓰레빠를 달라고 해봐라.”고 하니까, 이 위원은 놀리지 말라고 하면서 다시 부탁하자, 필자는 마침 객실 옆을 지나가는 room maid아줌마에게, 내 발을 가리키면서 “아줌마, 이 아저씨한테 쓰레빠 한 켤레 좀 가져다 주시구레.”하니까 필자에게 “Les pantoufles?”하면서 곧바로 쓰레빠(slippers)를 가져다 주는 것이었다.

 

어때요? 한국말이 어설픈 영어나 불어보다 훨씬 더 자신만만하고 편하고, 효과적이지 않아요? 그날 저녁식사와 와인의 맛은 그야말로 죽여주게 맛있었구말구. 내기는 어디까지나 내기니까!

 

여러분들도 외국여행가서 말이 안 통할 경우, 우리말로 보디랭귀지(Body Language; 보다 정확히는 Sign Language)를 섞어서 사용해 보시라!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라는 말을 실감하게 되리라.

 

p.s. 화날 때 어설픈 외국어로 그대로 표현했다가는 큰 코 다치기 십상이니까 이 경우에는 차라리 늘 애용하셨던 우리의 고유한, 빵빵한, 휘황찬란한 한국말 욕지거리를 시원하게 해 보시라구요! 스트레스 확 풀리죠, 상대방이 잘못 알아들어 황당해하는 모습도 함께 즐겨가면서 말이에요.

 

 

*References:

-윤강로 저서 총 없는 전쟁” 에서

Posted by 윤강로 (Rocky Y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