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과 마음씀2019. 8. 29. 17:53

[우리들교회 2019 825일 주일예배 말씀 요약(왕상 22: 41~ 53/ 여호와 앞에서 선한 왕 악한 왕)]

 

 

<Prologue>

 

아합(Ahab)이 왕으로서의 권세를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이 너무 많은데 사사건건 하지 말라고 하니 얼마나 힘들었겠나?

그러니 자기는 할 수 있는 일이 건축 밖에 없으니까 건축으로 위용을 자랑하겠다고 곳곳에 성읍을 건축하고 상아 궁까지 지었지만 그 건축한 치적은 그 죄악이 기록된 6장에 비해서 딱 1절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는 치적도 없는데 자랑 할 그 한 절도 없지 않을까?

환경이 겸손 할 뿐이라는 것이 다시금 깨달아지면서 내가 아합의 환경이라면 늘 아무도 생각하지 않으니까 실감이 나지 않겠지만 우리가 다 죄인인데 아합을 너무나 경멸하는 사람들 조차도 사실은 세속적으로 아합의 부귀가 부러운 똑같은 사람들이지 않은가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러니 마찬가지로 부부가 똑같기에 이세벨(Jezebel)누가 내 남편을 힘들게 하느냐? 내가 엘리야(Elijah), 나봇(Naboth)도 다 죽여주겠다.’ 라고 한다

물론 아합을 이해한다고 아합에게 면죄부가 되지는 않는다.

아합은 미워할 대상이 아니고 불쌍한 대상이다.

이런 것은 세상은 당최 모르는 일이고, 하나님의 시선으로만 볼 수 있는 일이다.

오늘은 열왕기상을 맺으며, 남 유다의 4대 왕 여호사밧을 주로 다루면서 열왕기상의 열왕기는 반성문으로 쓴 글이기 때문에 죄 많은 북 이스라엘의 아합은 여섯 장을 다뤘는데 여호사밧은 열 절만 다루고 있다.

역대기는 하나님의 족보를 다루었기 때문에 역대기에는 여호사밧의 이야기가 17장부터 4 장에 걸쳐 나오고 있다.

그래서 반성문인 이 열왕기를 보면서 북 이스라엘의 아합의 아들인 8대 왕 아하시야는 다룬다고 할 것까지는 없는 것이다.

오늘 여호와 앞에서 선한 왕과 악한 왕’, ‘선한 리더십과 악한 리더십

은 어떻게 다른지 보겠다.

 

<말씀 요약>

 

1.   여호와 앞에서 선한 왕 여호사밧(Jehoshaphat)을 다섯 가지로 보겠다. (41-50)

 

선한 왕이 되려면,

1)   믿음의 부모가 중요하다.(41-42)

왕이라고 했지만 리더쉽이라 보면 되겠다.

(41 이스라엘의 아합 왕 제 사년에 아사의 아들 여호사밧이 유다의 왕이 되니 42 여호사밧이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삼십오 세라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년 동안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아수바라 실히의 딸이더라)

여호와가 심판하신다'라는 뜻의 재판관처럼 여호사밧은 공적과 과오가 정확하게 기록되었다.

여호사밧은 히스기야, 요시야 왕과 더불어 3대 성군 가운데 한 사람이다.

이 사람이 왜 성군일까?

역대하에도 병행 본문이 나온다.

역대하 20 29-30절에

(29 이방 모든 나라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적군을 치셨다 함을 듣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므로 30 여호사밧의 나라가 태평하였으니 이는 그의 하나님이 사방에서 그들에게 평강을 주셨음이더라)

이런 평강을 누리게 된 것은 여호사밧의 정치, 군사력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서 사방의 나라를 두렵게 함으로 두렵게 하신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호사밧이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라는 것을 한시도 잊지 말라는 것이고, 잊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떻게 잊지 않을 수가 있을까?

남 유다 왕이 새로 등극 할 때는 마치 공식처럼 어머니/모친의 이름이 나오며 가족 관계가 소개가 된다

반면에 하나님의 약속이 없이 폭력과 살인을 통해 왕위가 계승이 되는 북 이스라엘은 공식처럼 어머니의 이름이 나오지 않고 있다.

믿음은 가족 특히 부모 또 어머니가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보여 준다.

이 얘기는 여호사밧이 아합과 똑같이 왕의 자녀로, 왕이 되었고 환경이 똑같은데 왜 여호사밧은 믿음이 좋을까?

오늘 말씀을 보니까 외가 쪽이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한 것 같다.

그의 아버지실히’(Shilhi)는 왜 이름이 나왔을까? (앗수바/Azubah) 아버지실히창 던지는 자라는 뜻이다.

여호사밧의 외할아버지는 당시에 이름이 난 무인가문의 출신이었던 것으로 추측이 된다.

그런데 그의 딸아수바는 이름의 뜻이 이상한데 그 뜻이버려짐, 파멸이라는 것이다.

이런 이름은 짓기도 어려운 이름인데, 성경에서 이름의 뜻이 참 중요하다고 했다.

이름을 가지고 생각을 해보면, 아버지의 나라사랑 때문에 딸이 버려진 것 같은 마음으로 파멸 당한 것 같은 일이 있지 않았을까?

수요예배 본문이 고린도후서 1 8-9절이다.

(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수요예배 때 이번 주 강사님은 이 본문으로정신질환을 다루면서 문자적으로조현 병을 앓고 있거나 식구들일 수 있다고 했다.

혹시아수바가 이렇게 "살 소망까지 끊어져서 하나님만 의지하게 되지 않았을까" 생각하면서, 믿으면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을 깨닫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런 단어 하나를 생각하면서 저는 항상 실낱 같은 가능성을 보면서 사람들을 이해하려고 한다.

아합과 다른 점이 바로 이 절망을 맛본 어머니의 기도가 있지 않을까 싶다.

‘Sky Castle’ 엄마와 같은 이세벨(Jezebel)이 결국 집안을 멸망으로 이끈다.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알게 되는 것이지만 아수바(Azubah)처럼 버려진 것 같으나 여호와 앞에 오게 되어 성경에 이름이 나오는 여호사밧의 어머니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아수바가 훌륭해서가 아니라 살 소망이 끊어져서 자신에 대해 절망했기 때문에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여호와 앞에 서게 된 것이다.

외할아버지까지 성경에 언급이 되는 것으로 봐서 구속사적으로 믿음으로 해석을 잘한 이 명가를 이룬 가문이 되었다.

그러니까 해석이 중요한 것인데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버려지고 파멸 당한 것 같은 아수바가 3대 성군 여호사밧의 어머니가 되었다

 

(적용)

-여호와 앞에 서기 위해 나는 어떤 부모인가? 또 어떤 자녀인가?  ‘Sky Castle'이세벨'인가?

-버려지고 파멸 당한 것 같은 절망을 경험하고 여호와 앞에 서게 된아수바' 인가?

 

여러분들이 어떤 죽을 일이 있다고 할지라도 오늘 이 가운데, 죽음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한다면 여러분도 아수바가 되어서 여호사밧의 어머니가 될 줄 믿는다.

 

선한 왕 두 번째는,

2)   여호와 앞에서 정직히 행하였다. (43)

(43 여호사밧이 그의 아버지 아사의 모든 길로 행하며 돌이키지 아니하고 여호와 앞에서 정직히 행하였으나...)

여호와 앞에서 행하는 것과 정직을 행하는 것이 같다고 하신다.

정직히는 구체적인 대상을 지시하는 정관사가 붙어서 '하나님이 지시하신 구체적인 규례를 따라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인생길을 똑바로 걸어가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성경이 말하는 바 정직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 곁에 항상 머물러서 구체적인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야 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앞에서가 아니면 인생과 이 세상은 정직이라는 것을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지시를 받기 위해서라면 천국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공동체에 속해야 한다.

'여호와 앞에서'가 구체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면, 내가 속한 예배공동체 앞에서, 예수 믿는 식구들 앞에서 '내가 어떻게 살고 있나를 생각해 보라.

분쟁이 없는 공동체, 집이라고 해서 꼭 좋은 공동체는 아닌 것이다.

 

(# 부목사님 부부가 한 해 동안 열심히 싸웠는데, 초등학생 아들이 중재자가 되어서 쫓아다니며그런 식으로 살면 안 되지, 참아!, 그러면 안 되지 둘 다 목자인데, 목자가 어떻게 말하는지 내가 다 들어보겠어.”라고 하는데 아이가 그런 얘기를 어디서 들었겠나? '교회 공동체'에서, 예배에서 들었을 것이다. ‘교회 공동체'도 있고, ‘식구 공동체'도 있겠다. 같은 '예수 공동체' 안에서 사는 것 자체가 정직히 행할 수 있는 비결이라는 것이다. 싸워도 이렇게 싸워야 하는 것이다._

 

혼자서 정직하다는 것은 정말 위험한 것은 의로움이 되어서 남을 찌르게 되기 때문이다

결국 정직하다는 것은 '내가 정직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나님의 정직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절대적으로 공동체가 필요하다.

공동체에 들어가지 않고 여러분이 정직하다고 하는 것은 이 세상은 알아듣지 못한다.

여러분 목장에 들어가셔야 한다.

혼자서 정직하다고 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신다.

이런 정직함으로 '아사(Asa)의 모든 길로 행하며 돌이키지 아니했다고 했다.

아사의 조부 르호보암과 부친 아비암은 산당(the high places)을 세우고 남색 하는 자들(the male shrine prostitutes)을 허용했다.

그들은 아합 못지않은 악을 행했는데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의 왕들의 Quality가 좋고, 나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얼마나 의지하느냐인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 아사는 이것을 다 헐어버리고 우상 숭배자인 모친의 위를 폐했다.

대단한 것이다. 아사의 길은 조상 다윗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했으며 이 개혁의 길을 갔다는 것이다.

역대하 17 6
(6
그가 전심으로 여호와의 길을 걸어 산당들과 아세라 목상들도 유다에서 제거하였더라 7 그가 왕위에 있은 지 삼 년에 그의 방백들 벤하일과 오바댜와 스가랴와 느다넬과 미가야를 보내어 유다 여러 성읍에 가서 가르치게 하고)

여호사밧과 싸우지 못하게 하셨다고 한다.

크게 용맹한 군사를 백 만 대군을 두게 되었는데 왕권을 대리하여 일 하는 용사가 백 만이나 되도록 여호사밧이 얼마나 종교개혁을 간절하고 철저하게 했는지 모른다.

사방에 두려움을 주셔서 그 동안 아무도 공격하지 못하게 되었었는데, 실력이 쌓였는지 공격을 받는다.

어머니의 역량으로 아합과는 다른 부자들도 있는 것을 본다.

부자들도 이렇게 경건하게 살 수 있다는 모델을 보여주었다.

 

(적용)

-여러분은 공동체에서, 집에서정직하다는 평가를 받나? 아니면 공동체를 무시하며 혼자 정직한가?

그러나 여호사밧은 이렇게 여호와 앞에서 정직히 행하였는데, 성경은 여호사밧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도 함께 기록을 했다.

 

그래서 선한 왕 세 번째는,

3)   폐하지 못하는 산당이 있다. (43)

(43 ... 산당은 폐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아직도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 continued to offer sacrifices and burn incense there)

열왕기상 3장을 보면 솔로몬 시대 기브온 산당에서 (성전 짓기 전에) 일천 번 제를 드렸다.

그런데 성전을 지은 후에는 이 성전에서만 예배 드리라고 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일천 번제를 드려본 후에 너무 이스라엘 나라가 부귀영화를 누린 것을 보았으니 이 산당을 포기를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예배를 포기를 못하는 것이며. 그러다 보니까 고질적인 우상범죄의 온상이 되었다.

아사를 비롯하여 아사랴, 요담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한 왕들도 이 산당을 다 폐하지 못했다.

공동체의 폐단의 산물인 산당을 폐하지 못하며 사는 것은 인본적이고 기복적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아무리 우리는 믿어도 다윗보다 솔로몬을 너무 좋아서 솔로몬제과’, ‘솔로몬 은행’. 등 그냥 솔로몬 이름만 써도 돈이 들어올 것 같은 것이다

제가 4대째 모태신앙인데 우리 아들을 낳으면서 솔로몬 왕 같은 아들이 되게 해달라고. 몇 천 년이 지나도 이렇게 맹위를 떨치는 것이다.

유다보다는 우리는 요셉을 너무나 좋아하는 것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이를 폐할 자가 없는 것인데 백성들에게 침투해 있는 인본적이고 기복적인 지금으로 말하면 막 급할 때는 하나님만 부르짖다가 조금만 먹고 살만해지면 우리는 필요한 게 많아서 다양성을 추구한다고 하면서 조금 편해지면 이렇게 포스트모더니즘 시대가 되는 것이다.

예외가 없어서 우리도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상이 노도(怒濤)와 같이 몰려오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산당을 제거하는 것이 본질적인 종교개혁이 아닌 것이다.

끊임없이 현실 속에서 끊임없이 안주하고자 하는 것이다.

솔로몬과 요셉 같이 총리도 되고 지도자도 되고 여자도 많이 얻는 것이 너무 부러운 것이다.

이런 것이 이방 풍속을 따르는 것인데 여호사밧이 그 산당을 종교개혁 하다가 절반의 성공으로 개혁이 철저하다고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아버지 아사의 길로 개혁하는 것으로 돌이키지 아니했다고 했다.

그것도 맞고 또 산당을 폐하지 않아서 돌이키지 않았다는 것과 폐하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 원어가 같은 동사다.

같은 동사를 사용해가지고 이제 여호사밧이 여호와를 떠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상숭배의 원상인 산당을 폐하지 않았음이 같은 비중이라는 것이다.

그만큼 내가 여호와께로부터 떠나지 않고 아사 아버지가 한 개혁을 돌이키지 아니하려고 애를 써도 돌이키지 않는 것만큼 산당 예배를 폐하기가 너무 어렵다는 것이다.

이렇게 기복을 좋아하는 것은 이것이 본능이기에 또 본능이 가르치는,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산당 예배를 드린다는 것인데 뭘 개혁한다는 것은 너무너무 힘든 것이다.

(# 글을 읽었다. 차별금지법을 찬성하는 자들이 그들의 언어로 그대로 쓰면,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이 개독 중에 대형교회 목사들 신상을 털어야 한다. 지금 어떤 후보를 터는 것처럼 털면 먼지 안 날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이슈화시켜야 차별금지법을 통과시킬 수 있다는 전략을 읽었다. 읽는 순간 저는 먼지가 많이 날 것이라서 걱정이 너무 되는 것이다. 먼지 날 때 너무 놀라지 마시고 먼지가 많이 나면 물을 뿌려주기를. 그러니깐 작은 것이라도 개혁을 한다는 것은 너무 어려운 것이다. 그러니까 뜨신 밥 먹고 이런 얘기를 하겠나? 그러니까 정말 산당을 폐한다는 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의 모든 것을 폐한다는 것으로 왕들이 잘못한다. 특별한 왕들만 하는 것이다. 미리미리 그런 얘기를 했는데 요새 갑자기 그러는지 모르겠다. 여자라고 무시하다가 쳐다도 안보다가 이러는 것인가?)

오랜 관행이 너무 많이 있을 것이다. 회사에서 직급별로 하청업체에서 받는 것이 관행이라면 나 혼자 안 받아서 되는 것이 아니고 받아서 상납을 해야 하고 나도 아랫사람에게 받아야 되는 구조라면 나 혼자서 안 받는다고 해결되는 일이 아니잖나? 이게 악어의 사슬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하나님을 믿고 돌이키려고 하는 것과 이런 악어의 사슬을 폐하는 것이 너무 똑같이 어렵다는 것이다. 구속사가 바로 이것이다. 말씀으로 나를 개혁하고자 하지만, 내가 폐하지 못하는 것이 너무나 많은 것이다. 그래서 날마다 회사를 가도 내가 선한 게 하나도 없는 것이다. 이것을 절감하는 것이 바로 여호와 앞에서 바로 선한 것이다. 맨날 나는 뭐든지 할 수 있다가 아니라 여호사밧도 돌이키고 폐하는 게 너무 어렵다는 데 너무 절감이 되는 것이다. 여러분에게 좋은 얘기만 하고 편안하게 천국 갈 건데. 성경은 항상 내 얘긴 것이다.

여러분 회사 생활도 얼마나 힘든지 안다. 마음은 원이로되 회사만 가면 어떻게 계약할지 감이 안 잡히니까 쉰 소리 했다가 쫓겨나고 쫓겨나면 분하고 내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서 이렇게 폐하는 게 너무 어려운 것이다. 그러니 교회만 오면 눈물이 나오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 뜻대로 못 살아가지고, 나는 선한 게 하나도 없다. 이런 생각 안 하겠나? 이게 어떻게 말로 되겠나?. 개혁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다. 그렇게 정직히 행했는데 폐하지 못하는 산당이 있는 것이다.

 

(적용)

-내가 나를 개혁하고 돌이키고자 하지만, 나를 폐하지 못하는 그만큼의 산당은 무엇인가?

-관행이라고 포기하는 것은 무엇인가?

목사님은 강단에서 설교만 하지 뭘 알겠는가? 뭘 알겠나? 그래도 제가 몰라도 얘기하는 것이다.

 

선한 왕 네 번째는 산당을 폐하지 못하니

4)   치명적인 실수를 했다. (44-45)

(44여호사밧이 이스라엘의 왕과 더불어 화평하니라)

화평이 항상 좋은 것은 아니다.

남북은 그 동안 르호보암과 여로보암, 아비얌과 여로보암, 아사와 바아사의 일평생, 일생 계속 전쟁이 계속 됐었었다.

그런데 여호사밧과 아합에 의해서 그 평화적 일시적 관계가 수립되었으니 이것이 정치를 얼마나 잘한 것인가?

지금으로 말하자면 노벨평화상을 양쪽에 줘야 될 일이 아닌가?

그때가 여호사밧이 종교개혁을 하면서 율법으로 백만 대군을 길러내니까 여기까지 좋았는데 이때가 남북이 모두 부귀영화가 극에 달한 시기였다

그런데 여호사밧도 그 환경에 가니까 예외가 없는 것이다

바로 그 이 후의 일이다.

역대하 18 1절에
(1
여호사밧이 부귀와 영광을 크게 떨쳤고 아합 가문과 혼인함으로 인척 관계를 맺었더라)

이렇게 나오지 않나?

군사적 경제적 이유로 결혼동맹을 맺은 것이다.

이 정략 결혼으로 말미암아 아람과의 불필요한 전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전적인 은혜로 여호사밧 길르앗 라못 전투에서 아합은 죽었다.

그런데 자신은 남쪽 방언 소리를 질러서주여잉~’해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그래가지고 역대하 10 2절을 보면,
(2
하나니의 아들 선견자 예후가 나가서 여호사밧 왕을 맞아 이르되 왕이 악한 자를 돕고 여호와를 미워하는 ...)


아주 여호사밧이 시치미를 떼며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는데 선지자 예후가 나가서왕이 악한 자를 돕는 것과 여호와를 미워하는 자를 돕는 것이 가하나이까! 진노가 임할 것.’이라고 하면서왕이 그래도 아세라 목상을 없이하고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았기에 그것은 선한 일로 보겠다.’고 두 가지 얘기를 다 했다.

아람보다 더 무서운 것이 이 혼인동맹을 맺은 거라는 것이다.

여호사밧의 인생에서 가장 치명적인 실수를 한 것이다.

이 결혼으로 인해 남 유다의 북 이스라엘 우상숭배를 비롯한 모든 불법들이 흘러 들어왔다.

 

역대기 21장을 보면. 한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시는가?

한 사람 때문에 예배를 드릴 수도 있고 안 드릴 수도 있는 것이다.

한 사람의 지도자, 오늘 선한 왕, 악한 왕, 우리는 선한 왕을 위해서 기도를 해야 되는데 아달랴 하나가 시집을 가서 불법이 흘러 들어왔다.

더 나아가서 아합의 딸인 아달랴는 유다의 아들과 손자까지 남자는 다 죽여 버리고 자신이 여왕이 되는 엄청난 살육으로 남 유다의 다윗 왕조가 끊어져서 예수님이 못 올 뻔한 가장 큰 위기를 초래한 그 짓을 여호사밧이 한 것이나 다름 없다.

그래서 이러한 연유로 여호사밧의 죄보다 더 큰 죄는 이 세상에 없다.

 

일평생 전쟁을 해도 전쟁이 있었던 때가 더 나았다.

누구와 평안 하는가는 아주 중요하다.

백성이 산당에서 분향하는 것도 여호사밧을 보면, 폐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속지 않으시는 주님께서는 결국 여호사밧이 아합보다도 훨씬 더한 만고의 죄인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비교할 수 없는 죄인이 여호사밧이이라는 것이다.

여러분들이 옳고 그름으로 그 부부를 보고 나라를 보시면 안 된다는 것이다.

 

45절이에요.
(45
여호사밧의 남은 사적과 그가 부린 권세와 그가 어떻게 전쟁하였는지는 다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는냐)


여호사밧의 치적에 대해서는 하나님 나라의 족보에 올라갔다는 평가를 내렸기 때문에 이 열왕기에는 반성문 쓰는 것이니 언급을 안 한다.

역대하에는 써있다.

여호사밧은 신앙부흥 운동을 일으켰고 말씀 운동을 일으켰고 백만 대군 만들었고 전국에 재판제도와 지방제도를 정비한 성군이다.

그런데 여기 특히그가 부린 권세얘기가 나온다.

이 권세로 전쟁을 했다.

구약성경에서 총63회 나오는 이 단어는 하나님의 권세를 얘기할 때 사용되는 단어이기도 하다.

여호사밧이 그만큼 강력한 권세를 행사했다는 것이다.

이제 절대권력에서 보면 절대권력은 왕으로 하여금 여호와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백성들을 탄압하는 부정적인 뜻을 다분히 지니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을 대리하는 여기 왕에게도 절대 권력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전쟁한 것을 부각시킨 이유는 이 절대 권력으로 미가야 선지자의 경고를 무시하고 아합과 동맹해서 아람과 전쟁을 하다가 죽을 뻔 했지 않나?

이 절대 권력으로 선지자를 무시하다가, 다시 회개하고 나서 또 절대 권력으로 오직 여호와를 의지함으로 모압과 암몬을 정벌했다.

똑같은 전쟁 같지만 이 절대 권력을 가지고 가장 선하게 쓰면 최고가 된다는 것이다.

이 세상 최고의 리더쉽은 이타적인 독재자라고 하지 않나?

두바이의 왕(통치자) 10년 안에 최고의 빌딩들을 다져놓은 것은 왕이 지으라고 하면 뚝!!!! 지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 지으려면 3년 몇 날 회의를 해가지고 여기저기 허가 받고 해야 하니 민주주의가 꼭 옳은 것만은 아니다.

똑같은 전쟁 같지만 하나님 나라의 절대 권력을 주시는 것은 백성을 위해 쓰라고 절대 권력을 주는 것이데 그게 조금 잘못되면 하나님 사랑하시는데 자기가 죽을 뻔하기도 한다.

 

그런데 여기서 이겼다.

어떤 전쟁도 하나님이 그렇게 권력을 주실 땐 전쟁의 주인공은 오직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전쟁의 주인이 내가 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아합도 자기가 주인이 되어 죽었다.

정말 치우침 없이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진다는 게 너무 힘든 것 같다.

 

(적용]

-일시적인 평화를 위해서 치명적으로 실수한 것은 무엇인가? 혼인인가? 동업인가? 안 가야 할 모임인가?

 

선한 왕 다섯 번째는,

5)   마지막 징계로 U턴하는 사람이다. (46-50)

45절에서 최종 평가가 끝났다.

여호사밧은 역대 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끝나야 되지 않나?

여기에 추신이 달렸다.

몇 가지 더 추가하고 있는데 여호사밧이 선한 왕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이유를 썼다.
(46
그가 그의 아버지 아사의 시대에 남아 있던 남색하는 자들을 그 땅에서 쫓아내었더라)


이게 또 영광에 달할 때 남색(sodomy)하는 자들을 절대로 건드릴 수 없다.

그런데 인생이 끝날 때 마지막에 이것을 여호사밧이 개혁했다는 것이다.

남색하는 자(sodomite), 카드셋이라는 이 말은 거룩하다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는데 남색하는 자들이 우상숭배하는 자들의 입장에서 거룩한 제사를 주관하기 때문이었다.

음란, 성행위가 우상숭배자들에게 거룩한 종교의식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성경을 문자적으로 보고 동성애 큐어 축제에서 검은 사제 옷을 입고 음란한 옷차림을 하면서 행진을 하는 사진이 보인다.

아사가 남색하는 자들을 그때까지 못 쫓아냈던 것 같다.

이 일이 너무 힘든 일인데 결국 해냈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호사밧이 성군인 것이다.

진짜 개혁하기 힘든 남색이 있는 것인데 이 일을 하려면 정말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것이었나?

 

47절서부터 50절까지 보면
(47
그 때에 에돔에는 왕이 없고 섭정 왕이 있었더라 48 여호사밧이 다시스의 선박을 제조하고 오빌로 금을 구하러 보내려 하였더니 그 배가 에시온게벨에서 파선하였으므로 가지 못하게 되매 49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가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내 종으로 당신의 종과 함께 배에 가게 하라 하나 여호사밧이 허락하지 아니하였더라 50 여호사밧이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매 그의 조상 다윗 성에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장사되고 그의 아들 여호람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에돔은 이삭의 두 아들 중에 하나인 야곱의 형, 에서의 별명이었다

알다시피 약속의 자녀와 상관없는 그곳에서 여호사밧은 솔로몬 시대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서 (솔로몬이 산당 예배의 Hero이지 않나?) 배를 만들었는데 무역이 성행했기에 그렇다

금을 구하려고 배를 만들었는데 에돔 수도 에시온게벨에서 파선을 했다(wrecked at Ezion Geber).

에돔도 약속의 자녀가 아닌데 우리가 그렇게 실수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배를 누구와 함께 만들었냐 하면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Ahaziah son of Ahab)와 함께 만들었다고 한다.

아합이 죽었는데 계속 교제를 하고 있는 것이다

 

역대하 19 2절에 예후에게 아합과의 교제를 엄청나게 질책을 받고 2차 개혁을 했다.

20 37절에는 엘리에셀이 이것을 또 경고했다.

심히 악을 행하는 아하시야가 교제를 했기 때문에 네 배를 파선시킬 것이다라고 분명이 그렇게 나와있다.

그렇게 경고를 받았는데도 사람은 파선하기 전에는 돌이키지 않는 것이다.

망하기 전에는 안 돌이키기가 십상이다.

한 번 맺은 관계를 얼마나 끊어내기 힘든지 모른다.

아하시야가 아합의 아들이고, 아합의 딸은 여호사밧의 며느리이니 서로 피가 섞이지 않았을까?

그가 개혁을 하면서도 이것을 끊을 수가 있었겠나?

다 삼촌이고 고모고, 이것을 보니깐 여호사밧이 끊을 수 없는 게 이해가 가는 것이다. 이게 너무나 또 슬펐다.

우리는 주님의 은혜가 없으면 하루도 살 수 없다.

성군도 안 되는 게 있구나.

하나님께서는 여호사밧을 너무 사랑하셔서 그렇게 두 나라가 만든 배를 파선시키는 것이다.

엄청난 국가적 손실을 주시면서 말이다.

이때 경고를 들었었다.

들었던 경고의 말씀을 여호사밧은 생각해낸 것이다.

사람들은 손해를 보지 않으면 깨닫지를 못한다.

그러니까 이때 깨닫고 아하시야가 다시 배를 만들어서 가자고 했을 때 이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마지막에 남색하는 자를 쫓고 부를 축적할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하고 악한 아하시야의 구제를 중단한 것이다.

이것을 이렇게 생각해보니깐 중단한 것이 얼마나 큰 일인지 알게 된다.

아합의 딸 며느리가 있는데 거기 다 손주들이 있는데 그것을 어떻게 끊겠나?

왕인데. 바로 이점이 마지막에 선한 왕으로 남게 된 최고의 비결인 것이다.

여호사밧의 이 땅에서의 마지막 기록이 49절이다.

허락하지 아니하였더라.’ 아까 45절 전까지는 이 땅에서 평화 하였더라로 끝날 뻔했는데 이 평화를 끊었다는 것이다.

 

인생은 마지막이 중요하다.

여호사밧이 돌이켰다는 것이 중요하다.

여호사밧이 다윗 성에 장사된 건 축복이었다.

생각할수록 남편의 마지막이 축복이었다는 생각이 드는데 저도 그렇게 갈 수 있기를 간절히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

우리는 돌이키기가 너무 어려운 것이다.

사과 한 번 하기, 미안하다고 한 번 하기가 너무 어려운 것이다.

잘못했으면 돌이켜야 하는데 이 돌이키는 것이 죽은 자 살리는 것보다 어려운 것이며 돌이키는 것은 위대한 일이다.

누구는 평생 잘못했다는 얘기를 열 번을 안 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택자가 아니면 돌이키기 어렵다.

여호사밧은 택자이고 선한 왕으로 결론을 맺었다.

여호사밧이 나라를 말아먹는 큰 실수를 했음에도 선한 왕으로 불리는 이유는 바로 이 마지막이라도 돌이키고 회개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큰 범죄를 지고 얼굴을 들 수 없는 죄를 졌다고해도 회개만 하면 천국 백성이 될 수 있다.

다른 조건이 없다. 여러분들의 죄가 아무리 크다 한들 여호사밧보다 더 큰 죄는 없다.

의도 했던 안 했던 그의 죄는 하나님 나라를 끊어지게 할 그런 죄였다.

실제적으로 아하시아의 어머니인 아달랴가 와서 자기 아들들과 손자들을 다 죽였다.

그런데 내가 죄인이라고 남색을 끊고 우상을 섬기는 아무리 내 친척, 할아버지라도 아하시야를 끊어야 되는 것이다.

거기에 쾌락이 있었겠고 제물이 어른거렸을 것이다 그 어마어마한 배가 그때 그 당시에는 굉장한 손해였다.

 

(적용)

-이제는 허락하지 않아야 할 교제, 사건은 무엇인가?

-그로 인해 하나님이 애써 막아주신 일은 무엇인가?

저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것이 제가 13년 동안 문밖출입을 못했는데, 여러분의 간증을 듣고 그러면 제가 빽도 없고 뭐도 없는데 제가 직장이라도 나가고 학교라도 나갔으면 1,000프로 이혼을 했고 다 망가졌을 것 같다. 제가 뭐 특별한 것이 있겠나? 여자들이 가는 길이 뻔하지 않을까? 어떻게 나를 문밖출입을 못하게 했을까? 그건 하나님의 흠 없는 완벽하신 성실하신 셋팅이었다고. 생각이 되는 것이다. 나도 여러분 환경이었으면 똑같이 당했을 것이다. 어머 나도. 똑같이 당했어야 했는데 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아합이래도 그랬을 거 같다. 여호사밧이래도그런 마음이 드는 것이 구속사적인 것 아니겠나? 생각해보니깐 정말 하나님께서 나를 막아주신 것이다. 애써 막아주신 것이다. 그렇게 강력한 게것이 아니었으면 나갔었을 것이다.

 

다섯 개로 왜 선한 왕인가를 보았다.

두 번째는 여호와 앞에서 악한 왕 아하시야(51-53)
(51
유다의 여호사밧 왕 제십칠년에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가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이 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리니라 52 그가 여호와 앞에서 악을 행하여 그의 아버지의 길과 그의 어머니의 길과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며 53 바알을 섬겨 그에게 예배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기를 그의 아버지의 온갖 행위 같이 하였더라 )

아하시야가 아버지의 길, 어머니의 길, 여로보암의 길대로 악을 행했다고 한다.

그 길은 바알을 숭배하고 하나님을 노하게 하시기를 아버지의 온갖 행위처럼 하였다고 한다.

아하시야의 전체 코멘트다.

여호사밧은 치적도 많고 실수도 많고 실패도 많지만 선한 왕이라고 칭함 받는데 아하시야는 조상의 말도 잘 듣고 아버지 엄마 말 잘 듣고 조상신을 너무 잘 섬기는 착한 어린이와 같은데 사건이 하나도 없다.

아하시야가 자발적으로 바알에게 엎드림으로 바알의 맨 끝은 돈이라고 소유하다라는 뜻이 있다고 했는데 종이나 다름없이 바알을 떠받쳤다는 것을 의미한다.

죄책감도 없이 고의적이고 자기가 죄인임을 모르기에 여호와의 진노를 산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그것이 여호와 앞에서 정직히 행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결국 이렇게 살다가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다.

 

그도 공동체가 있다.

교회를 안 다니는 게 아닌데 예수 공동체가 아니면 바알 공동체인 것이다.

싸워도 예수 공동체여야 정직한 것을 알려줄 텐데 조상은 금송아지를 섬기는 여로보암이고 아버지는 아합이고 어머니는 이세벨이고 누이는 아달랴와 같이 최고의 로얄패밀리지만 정직을 가르쳐줄 공동체는 아닌 것이다.

천국이 가시적으로 보여지는 공동체는 예수 공동체인데 교회를 나간다고 다 예수 공동체는 아니라는 것이다.

결론은 바알 공동체도 너무 많다는 것이다.

바로 3-4대의 저주가 바로 이런 걸 의미한다.

이렇게 해서 아달랴의 모든 3-4대의 이름들이 마태복음 계보에서 빠졌다.

로얄 패밀리일수록 고질적인 우상숭배에서 끊어지기가 너무나 힘든 것인데 이 말은 내가 엄마 아버지 말 잘 듣다가 내가 지옥에 갔다.

여로보암의 길은 금송아지 숭배하는 돈 신, 맘몬 신, 이 세상 모두가 하나님 위에 돈을 놓고 섬기는 것이다.

53절에 그 아버지의 온갖 행위같이 했다고 한다.

아합은 억울하지 않겠나?

모두 이세벨이 충동질 한 것인데 그런데 책임은 아합에게 묻는 것이다.

여자의 머리가 남자고, 남자의 머리가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그렇다

우리는 속인 자보다 속은 자가 더 나쁘다는 것이다.

아담과 하와 때도 책임을 아담에게 물으셨다.

남자는 얼마나 책임을 지는 가장으로서 믿음의 책임을 지는 역할을 해야 되는지 모른다.

우리 아내가 그랬다고 하지만 이 땅에서 역할을 주셨다.

이처럼 성도는 누구의 말을 듣고 따라 가냐에 따라 삶의 마지막 날 여호와 앞에서 그 평가가 달라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어떻게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가 왕위를 계승할 수가 있겠나?

왜냐하면 북 이스라엘은 모반과 살인이 계속되어 왕조가 없어졌다.

그런데 이 오므리 왕조가 계속 내려가고 있지 않나?.

그것은 왜 그랬겠니?

아합이 한 번 겸비한 태도를 보인 적이 있는 것이다.

네 죄를 다음 시대로 유보하겠다고 하셨다.

하나님은 조금이라도 회개하는 것을 그렇게 기뻐하시고 아합이 잘나서가 아니라 이스라엘을 위하여서 그리 하셨다

아합 가문이 견고한 것이 아니라 용서할 수 없는 악행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약속하심 바를 이루는 하나님의 열심으로 아하시야가 왕이 되었지만 딱 2년 밖에 안 되는 것이다.

조상, 아버지, 엄마 말 잘 듣다가 엄마 앞에서 짝짝꿍하다가 지옥 갔다는 것이다.

정말 말 잘 듣다가 지옥 간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한 절씩 읽어가다 보면 가치관이 달라지는 것이다.

성경을 순서대로 읽으면 하나님이 설득시키는 것이 있다.

그래서 해석이 많이 되는 것이다.

북 이스라엘은 말씀이 없다.

그래서 우리가 이세벨처럼 임금과 딸을 좋아하고 부잣집 딸을 그렇게 좋아하고 하나님을 믿는 것을 허투루 여기고 그러는 것이다.

 

(# 그래서 정말 여호와 앞에서 악한 아하시야 집 같은 집안 얘기 하나를 들려 드리겠다. 나눔에서 본 것이다. 회사 창업주가 집안이 풍비박살 났다는 소식을 들었대요. 암으로 작년에 작고하셨는데 처음에는 그 분의 삼촌이 목사님이라서 예배를 드렸대요. 그런데 몇 달 안 돼서 더 이상 교회를 안 나가겠다고 한 것은 목사이신 삼촌이 날마다 헌금을 강요한다고. 교회는 돈이다라고 해서 교회를 안 나갔다는 거에요. 그래서 이분은 조강지처를 버리고 회사 여직원과 재혼을 했는데 회사 상장 이후에 직원들에게 주기로 한 주식까지 다 챙겨서 이제 상장 할 때 25억에 회사를 팔고 갔다는 거에요. 그런데 자기는 그것으로 자식들이 잘 살까? 궁금했다는 거에요. 결국 들려온 소식에 따르면 그분의 딸은 재산을 보고 미국으로 시집을 갔는데 집안이 풍비박살이 나니 이혼을 했다 네요. 아들은 아버지 재산을 지키려고 미국에 있던 애인과도 헤어지고 돌아왔는데 그 재혼 녀인 여직원은 회사명의를 돌려주시는 대신 대출을 하고 도망가서 회사가 빚더미에 놓이게 된 것이에요. 그러니깐 홀 시어머니 집 사드린다고 하면서 자기 명의로 그 돈까지 다 빼서 살아졌기 때문에 결국 아들은 빚더미에 나앉고 그 어머니는 거리에 내쫓게 되고. 그래서 이제 그분이 나눔 하기를 이것이 다 하나님의 공의라 생각하면서도 그분이 아프실 때 제가 한번이라도 찾아가지 못했는데 그 때 큐티책을 들고 복음을 전하지 못한 것이 너무나 안타까움이라기 보다는 쌤통이다라고 아내와 나눔했다는 거에요. 저는 그분의 재산 240억이 어떻게 되었나?’가 더 궁금했다는 거에요.

 

초원님이 이런 처방을 하네요. ‘240억도 간단히 날아가 버릴 것 같은데요. 세금으로 나가고 도둑에게 감사헌금하고 강도에게 건축헌금하고 다 사라져버릴 거 같다고.’ 이 창업주의 길이 아하시야 길과 같지 않습니까?

 

<Epilogue>

 

우리가 정말 믿음도 없는데 다 아비 마귀에게서 나온 부모 말 잘 듣다가 예수 없이 지옥으로 가는 평탄한 아하시야 같은 사람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죄를 지었어도 마지막에 회개하는 여호사밧과 같은 사람이 되어야겠다.

 

여호와 앞에서 선한 왕/리더쉽은 믿음의 부모가 중요하다.

여호와 앞에서 정직히 행했음에도 불구하고 폐하지 못하는 산당이 있다.

그래서 치명적인 실수를 했다.

그러나 마지막 징계로 유턴(U Turn)하는 사람이 가장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이다.

여호와 앞에서 악한 리더도 부모책임이다.

할아버지, 아버지, 엄마 말 잘 들으면서, 돈 신 섬기면서 그 지옥을 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의 시선으로 바라봐야 한다.

악한 아합도, 선한 여호사밧도, 악한 아하시야도 우리 모두 예수님이 필요한 존재들인 것이다.

어떤 환경에서도 주님의 시선으로 나를 볼 수 있어야지 되겠다.

 


 

Posted by 윤강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