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교회 2019년 8월11일 주일말씀 요약(왕상 22장 13절로 28절/참선지자)]
<Prologue>
금주는 광복절이 있는 주이다.
일제의 폭압에서 벗어난 지 74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 당시 수 많은 수탈 말고도 나라를 잃은 가장 큰 고통은 언어, 글자를 잃은 것이었다.
광복은 ‘빛을 되찾다’는 뜻으로 민족의 생존과 자주 주권이 함께 회복되어 미래의 빛이 밝혀진 날이었다.
그래서 3년 뒤 8.15에는 대한민국에 자유민주주의정부가 수립되었다
그 후 3년 후 1950년 6월25일 발발한 북한의 침략으로 지금까지 세계유일의 분단의 아픔을 겪고 있는 나라이다.
부모님이 이북 분들이라 나라 없는 설움, 고향 없는 설움을 안다.
나라가 없으면 예배도 못 드리는 것을 피부로 알고 있다
광복절 예배를 따로 드리지 않는 이유는 우리들교회가 매주일 가정, 나라 주일을 지키는 것이나 진배 없기 때문이다.
개인 구원이 사회 구원이다.
성경은 구원의 책이기에 성경이 나를 읽고 가게 해야 한다.
열왕기서도 아합(Ahab)과 이세벨(Jezebel)의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왕들과 나라의 이야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항상 오늘 주시는 말씀에 나와 나라에게 주시는 말씀이 있음을 늘 보기 때문이다
믿음의 분량만큼 성경이 보인다.
지난 주 전쟁 없이 3년 간 있다가 사탄의 전략에 휘말려 안 해도 될 전쟁을 일으키려는 아합을 보았다.
그래도 북 이스라엘 백성은 무늬는 하나님을 모두 믿지만 아합의 드러나지 않은 야망과 악을 보지 못하고, 400명의 선지자들도 전쟁을 하라고 한다.
빼앗긴 땅을 찾아 오는 것이기에 명분도 있어 보인다.
속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은 아합의 악을 아시기에 막으신다.
그런데 누가 이 대단하고 무서운 아합을 위해서 전쟁을 막을까?
오늘은 참선지자에 대해서 알아 보겠다.
<말씀요약>
1. 여호와의 말씀만 전한다.
아합이 보낸 사신(messenger)이 미가야에게 이르되, 다른 선지자들이 하나같이 왕에게 길하게 하니, 길하게 하소서. 지지하라고 한다.
이세상이 아무리 좋아도, 내일 일을 모른다.
계시록에, 공중권세 잡은 사단이 끊임없이 있다.
용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이다.
사람들은 길한 것을 너무 사모한다.
끝없이 돈 신을 사랑한다.
자체에 힘이 있다.
돈은 거칠 것이 없어서, 있으면 하나님을 믿기 힘들다.
얼마나 좋으면 믿는 아합이 바알(Baal)을 계속 끼고 있다.
천억 위엔 1조, 그 위엔 10조가 있다.
목표지향적인 것만 듣고 싶어 하다가, 사건이 오면 누구 때문이라고 원망하다가 가는 것이다.
미가야가 이르되, 여호와가 살아계심을 맹세하여 내게 말씀하시는 것 그것을 말하리라 하였다.
훌륭하고 길한 일도 아닌 여호와의 말씀만 전하겠다 한다.
내가 듣고 전해야 할 여호와 말씀은 무엇인가?
자기 생각을 말씀에 종속시켜야 하는데 말씀이 자기 생각에 따라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기 생각에 꽂히면 말씀이 도장 찍어주길 바란다.
순서가 아주 중요하다.
왕에게 길한 예언을 해달라고 부탁했지만, 길하다고 생각했던 예언이 조금 뒤를 보면 흉한 예언이 되어 왕을 죽이는 일이 된다.
여전히 가장 어려운 것이 말씀 묵상이다.
구속사의 말씀을 묵상하지 않고 구원의 관점으로 보지 않으면 선악의 관점을 벗어나지 못한다.
가정 회사 나라를 해석하는 것이 적어도 우리들교회의 묵상이다.
수요일에 한 집사님이 아내가 내 구원을 위해 수고 했다는 말 한마디에 교회에 왔다.
모든 것이 성경 따로가 아닌 것이다.
일원론이라 그때그때 물으면 말씀해주신다.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다.
아합에게는 850, 400명 등 선지자들도 많았지만 엘리야, 이름 없는무명의 선지자, 미가야의 선지자가 있었고 이들이 목숨 걸고 증언 했어도 어떻게 아합은 회개를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미가야를 보내 또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게 되었다.
15절에, 왕이 그에게 이르되, ‘미가야야 우리가 싸우랴,말랴. 미가야가 이르되, 올라가서 승리를 얻으소서’ 하였다.
부르기도 정답게 미가야를 부른다.
400선지자들에게 물을 때는 강하게, 미가야를 보니 위축이 되어서, “내가” 아니라 “우리가”했고, “~에 갈거야” 에서 “~으로 갈거야” 라고 하며 방향만 정했다.
미가야가 올라가라 한 말이, 비아냥으로 들렸다.
아합이 듣기 좋은 말을 듣고도, 하나님의 진실한 말을 거듭 청한 것은 미가야가 진실을 말하지 않는 것을 아합이 알고 있다.
아합이 어용선지자 예언을 따른 것이 미련함이 아니라 자기애적 범죄의 성향에서 자발적으로 들은 악함이다.
네가 아무리 진심이라 말해도 나의 전쟁 능력은 하나님보다 높으니 염려 말고 말하라고 하는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하나님 존재가 없는 것을 확신한다면 사람들은 못할 게 없다고 생각한다. 나아가 자기가 신이라고 생각하면 못할 일이 없다. 로마 황제가 그렇고 지금 아합이 그렇다. 백성들은 지도자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고 추종하고 있다.
아합은 아람(Aram)과 1,2차 전쟁에서 승리한 것이 자기 능력인줄 착각하다가 그것이 사실인 것으로스스로 믿게 되었다.
사람들은 하나님 때문에 되었다라는 생각을 안 한다.
나봇(Naboth)을 죽이고도, 심판 받고 그것을 잊고 살면서도 무고한 자 미가야에게 또 나쁜 짓을 하려고 한 것은 정말 악의 대명사 맞다.
아무리 악한 의도라도 죽음의 길을 피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보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게 된다.
하나님은 끝까지 이스라엘의 왕에게 또 듣게 하시는 사랑이다.
(적용)
-여호와 말씀이라면 길한 일, 흉한일 상관이 없나?
-아직도 길한 일만 좋나?
-돈으로 할 수 있는 것이 많아서 내가 끼고 있는 바알 신은 몇 개인가?
자식-학벌-쇼핑-주식- 경마- 골프- 여자 등 850개에 이르는데 이런 것 좋아하는 사람은 바알 신을 못 버린 사람이다
우리는 모두 돈 신을 섬기고 있다
2. 끝까지 사랑의 흉한 예언을 해야 한다.
17-18절, 그가 이르되 내가 보니, 이스라엘이 목자 없는 양같이 산에 흩어졌는데, 여호와께서 이들이 주인이 없으니 이스라엘 백성이 평안히 돌아온다 하였다.
아합이 전사하여 죽는다는 얘기이다.
그 죽음으로 도리어 백성들은 평안을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시드기야(Zadekiah)의 철뿔(iron horns) 예언을 무색하게 하는 이 예언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아합이 전쟁을 위해 400명의 박수부대를 이끌고, 당대 영성 있는 여호사밧(Jehoshaphat)을 교묘히 꼬드겨 전쟁에 참여해서 모두가 박수치는 전쟁 같은데 어떻게 백성들이 분별할까?
이럴 때, 미가야가 목숨이 두 개도 아니고 하나인데, 어떻게 아합 앞에서 당신이 죽는다고 예언 할 수 있는가?
이방인과의 전쟁에서 아합이 예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위상을 보여주셔야 되기 때문에 계속 이기게 해주셨는데 아합은 자기 것인 줄 알았다.
이제는 나라는 지켜주시되 아합을 폐할 수밖에 없는 때가 왔다.
무슨 의미인가? 아합은 아무리 성취해도 기쁨이 없다.
전쟁마다 이기고 원하는 것(나봇의 포도원과 정원 등)을 다 가졌고 더구나 딸은 백만 군대와 영성의 여호사밧 아들에게 시집 보냈는데도 아합은 평강, 기쁨이 없다.
아합은 늘 누군가와 늘 논쟁하고 화내고 격분하는 것 밖에 없다.
그러니까, 주인이 죽으니 백성이 평안히 돌아온다고 했는데, 아합을 보면 하나님의 선지자를 죽이고, 벤하닷은 살려주고, 나봇은 죽이는 이런 가치관을 가진 지도자 밑에서 어떻게 평안할 수 있나?
그런데도 북한을 아직 건재하게 하시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주인이 없어서 평안하게 된 적이 있나?
예를 들어 회사에 사장이 없으면 그렇나?
**나를 보고 힘들게 하는 남편이 갔으니, 평안해서 잘 살고 시집도 갈 수 있겠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말씀 묵상하다 보니 근본적으로 별로 달라진 게 아니었다. 인간적인 평안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인도를 받지 않은 주인이 있으니, 그것이 괴로움이다.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말씀 인도를 받지 않는 주인이 죽으니, 군사들이 고통스런 전쟁을 끝내고 평안히 돌아갔다는 것이다. 왕과 백성은 운명 공동체였지만, 분리되게 하신 것처럼, 나도 남편과 운명공동체였지만 이렇게 쓰시려고 분리하게 하셨다. 그러나 남편에게 복음을 제시하므로 사람에게 흉한 일이 가장 길한 일이 되게 하셨다. 그 긴박한 순간에 ‘반드시 나을 거예요 살 거예요, 할렐루야 , 아멘’ 했다면 구원받지 못하고 갔을 것이다. 그 긴박한 순간에 ‘당신 가망이 없다 회개 하지 않으면 나와 아이들이 살 소망이 없다.”가 얼마나 흉한 예언인가? 뺨은 안 쳤어도 살 소망을 끊는다고 경솔하다고 했다. 그것이 비극이 안 된 것은 흉한 예언을 듣고 회개 할 수 있었다. 영적 공동체가 된 것이다. 마지막이라도 들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하나님도 안 되는 아합이란 사람이 있는 것이다. 아합이 내 앞에 너무 많으니까 인생이 슬프다. 미가야는 아합에게 선물인데 못 받았다. 하나님이 보내신 수 많은 선지자 들을 무시하는데 하나님께 유기된 자가 아니라면 어찌 이런가?
(적용)
-오늘 밤 죽으면, 천국 갈 자신이 있는가? 라는 흉한 예언을 아합과 같은 사람에게 할 수 있나?
아합에 종 노릇하다가 죄에 매여서 종 노릇 하는 것이다.
-사망을 삯으로 받겠나? 은혜로 놓임 받아 평안함을 맛보겠나?
성경은 일원론이다.
내 삶, 나라, 교인 따로가 아니다
내가 복음이 있으면 그 사람을 위해 최고라고 전하지만 사람들이 보면 흉한 예언이다.
3. 거짓말 하는 영을 분별합니다.
19절부터, 미가야가 이르되, 그런즉 왕은 여호와 말씀을 들으소서, 여호와께서 누가 아합을 죽게 할꼬? 하니, 한 영이 내가 그를 꾀겠다. 거짓말 하는 영이 돼서 선지자 입에 있겠다. 여호와께서, 너는 꾀겠고 너는 이루리라 하셨다.
문자적으로 들으면 하나님이 아합을 죽게 할 의도를 가지고 계략을 꾸미는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다.
하나님께서는 거짓에 넘어갈 아합의 마음을 아시고 결과론적으로 말씀 하시는 것이다.
자유의지를 주셨기 때문에 끝까지 기다리신다.
무 자르듯이 선악이 조절이 된다면 우리가 가슴 아파할 일이 무엇이 있겠나?
사단과 졸개에 대해서 요한복음8:44에서 살인자라고 말씀하셨다.
인간은 모두 거짓 아비 마귀에게서 났다.
선한 게 없다.
모든 거짓말의 배후에는 사단이 있다.
선의의 거짓말도 마찬가지다.
욥기에서 천상에 사탄이 있는 것을 보았다.
사탄이 하나님의 허락을 받고 욥(Job)을 꾀러 나갔다.
똑같은 천상의 어전회의에서 악한 사단이 아합을 꾀겠다고 하나님께 허락 받고 나갔다.
악한 영도 하나님의 허락 아래에 있다
거짓의 영이 악인을 멸망시키는 최고의 방법이다.
인간은 거짓말로 시작해서 거짓말로 끝내는 것이 인생이다
미가야가 한명인 것처럼 믿는 사람을 보기 힘들다.
끊임없이 미혹하고, 당하고 산다.
예수님의 삶도 16장에 걸쳐 기록되었는데 아합이 6장에 할애 되어 기록이 되었다.
인생들이 악하다고 하면서도 아합을 너무도 부러워하기 때문이다.
말로만 악하다고 하면서 모두 아합 편에 섰다.
빨리 아합을 치시면 좋겠는데, 하나님이 오시기 전까지 우리 모든 인류가 예수님이 죽어주신 하나님의 자녀이니 아무나 치실 수가 없다.
권선징악으로 보면 서로의 입장에서 일본과 한국이 서로 없어지기를 바란다.
하나님은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려고 기다리시는 것이다.
사단이 우리를 다 잡고 있는 것을 아시지만 자유의지를 주셔서 사단은 이 약점을 알고 하나님이 어딨냐?고 우리를 치는 것이고, 하나님은 훈련의 기간에 돌이키기를 기다리시는 것이다.
결국은 하나님이 하시려고 해도 자기의지로 사단에게 아합은 넘어가는 것이다.
낮고 천한 육신이 다 인줄 알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당하는 자 꼬이는 자를 어김없이 합당한 자들로 구성하셨다.
거짓 선지자들에게 스스로 인도받기를 자유의지로 원한 것이다.
속이는 자 속는 자 똑같으니 둘이 만난는 것이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이럴 수가 없다고? 하나님은 계시다. 내 삶의 결론이다.
아합이 속기를 원했다는 것이다.
누구 핑계를 댈 것이 없다는 것이다.
거짓의 영에 끌려 다니는 사람들이 많다.
하나님의 징계일 수 있다.
연단도 하고 채찍도 하여 돌아오게 하시는데, 연단보다 무서운 게 전쟁 없는 3년이다.
가장 불쌍한 자는 하나님께 잊혀진 자이다.
정욕대로 상실한대로 부끄럼 없이 살게 내버려둔 자가 전쟁이 없는 자이다.
이 땅이 편한 것이 좋은 게 아니다.
가치관이 안 변하는 나와 내 가족이 잊힌 자라면 얼마나 가장 불쌍하고 가슴 아파야 한다.
왜 저 사람은 망하지도 않고 잘될까?
하나님은 욕먹으시면서 돌아오라고 보냄을 주시는 것이다.
(적용)
-거짓의 영을 분별할 수 있다고 자신하나?
-여러분은 거짓말을 당하는 자인가? 꼬이는 자인가?
-당하고 꼬이는 것을 합당한 자로 구성해 주셨다는 게 인정이 되나?
한마디로 속았으면, 속인 자나 속은 자가 다 똑같으니까 만났다.
똑같아서 동업해서 실패했다라는 것이다.
거짓의 영에 이끌려서 진짜 중요한 것은 안 물어본다.
4. 말씀이 이루어 질 때까지 참선지자는 큰 고생의 떡과 물을 각오해야 한다.
24절, 시드기야는 자신의 영과 다른 말을 하는 미가야에게 분노하며 뺨을 내려쳤다.
예수님도 일개 군병들의 모욕을 인류를 위한 구속사역을 위해 참으셨고, 하나님께서는 이를 높이셨다.
25절, 미가야가 이르되, 네가 골방에 들어가서 숨는 그 날에 보리라.
머지않아 들어나겠지만, 하나님 말씀을 밝히 드러내는 일에만 전념한 참 선지자 미가야의 모습이 시드기야와 대조된다.
골방은 생명을 위해 찾는 피난처라는 의미이다.
골방에 숨는 날은 아합이 전쟁에서 죽었다는 소식이 들리면 거짓 예언을 한 시드기야가 골방에 들어가 살기 위하여 급급할 날이 올 것이라는 것이다
시드기야가 죽을 날이 올 것이라는 것이다.
26절, 아합은 결론을 내린다.
이스라엘의 왕이 미가야를 끌고 가서, 고위각료를 시켜 끌고 가라고 한다.
뭔가 굉장히 걸리는 게 있다.
이놈을 옥에 가두고 내가 평안히 돌아올 때까지 고생의 떡과 물을 마시게 하라 하였다.
결국 참 선지자의 마지막 결론은 고생의 떡과 물이다.
아합은 미가야 선지자가 흉한 예언을 한다는 이유만으로 시드기야 앞에서 간접 사실을 예언한 미가야 선지자를 가두기로 결정했다.
미가야 아야기를 듣고 지금이라도 돌아오라고 보내신 하나님의 대언자 미가야를 가두라고 했다.
왜 인가? 흉한 일 예언에 격분했고, 그 불길한 예언을 약화시킬 생각으로 가두면 될 것 같아서 한 것이다.
결국 참선지자는 말씀이 이루어질 때까지 감옥에 갇혀서 고생의 떡과 물을 먹어야 하는 것이다.
내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기다리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볼 때는 고생의 떡과 물을 먹는 것이다.
누군가 이 보여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예수 믿으면서 몸에 익혀서 잘 갖춰서 기다리는 것이다.
절제는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것이고, 배려하려면 참아야 한다.
억지로가 아니라 주님 때문에 절제와 배려와 참음이 되게 하신다,
근데 이런 것이 사랑하면 자발적이 된다.
우리 모두 서로의 감옥에 갇혀 있는데 그럴 때 마다 절제와 배려와 참음을 보여 주는 것, 그래서 고생의 떡과 물을 마시는 감옥에 갇혀 있어야 하는 것이다
내 편함을 내려놓지 않으면서 돌아오길 바라니, 안 돌아오는 것이다.
(적용)
-여러분이 갇혀있는 옥은 말씀 때문인가? 욕심 때문인가?
똑같이 문밖을 못 나가도, 사명이 있으면 말씀 때문에 갇혀 있는 것인데, ‘내가 왜 여기 있나?’ 라고 하면 욕심 때문에 갇혀서 평강이 없다.
갇혀 있어도 말씀 때문이면 하나님이 일을 하신다.
믿는 사람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증거할 사명이 있다.
똑같은 환경이 똑같이 해석되는 것이 아니다.
말씀 때문이라면 기쁘게 고생을 먹어야 한다.
그런데 거룩이 없는 행복은 욕심이다.
돈 때문인데 돈을 안 줘서 끓는다.
미가야가 이르되, 백성들아 들으라 하는 것이다.
미가야는 떳떳히 말했다.
흉한 일을 예언하니 시드기야에게서 뺨을 맞고 아합 때문에 감옥 가고 경건한 여호사밧에게서도 도움을 못 받았다.
참 선지자를 죽어라 미워하는데 어떻게 사역을 했나?
내가 힘들다고 하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사역을 해낸 선지자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여기 있다.
이런 한 사람 때문에 기도교가 명맥을 이어 온 것이다
나의 설교도 들어주시고, 책도 보아 주시니 난 정말 수준 낮은 선지자가 아닌가 싶다.
결국 하나님의 뜻에 역행한 아합은 평안히 돌아오겠다는 자신의 소망과 상관없이 주검이 되어 돌아왔다.
이스라엘 백성은 예언대로 평안히 귀환을 했다.
***참 선지자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초등학교 아이들 큐티 페스티벌이 있었다. 아합과 같은 아빠와 살 고 있는 자매이다. 수련회비를 엄마 아빠가 서로에게 타라고 했다. 아빠가 4만원을 주셨지만, 마지막으로 엄마에게 물어보고 가져오라고. 엄마가 끝까지 주지 않아서, 아빠의 구원을 위해, 아빠에게 돈을 돌려주었다. 두 자매가 자기 용돈으로 수련회비를 냈다고 한다. 아합보다 훨씬 낫지 않나. 아빠는 이슬람성전에 데려가서, 종교의 공통점을 가르치신다. 엄마는 교회는 나갔는데, 아빠가 교회를 못나게 하고, 경찰을 부르고 엄마가 접근금지 되었다. 이혼소송 최종판결이 남았다. 두 자매가 역기능가정의 감옥에서 고생의 떡과 물을 마시고 있다. 적용이 너무 미가야 같지 않나?
<Epilogue>
보잘것없는 성도로서의 삶을 살아내는 것이 선지자이다.
어떤 것도 사소한 것이 없다. 목숨 걸고 예배 드리고, 목장 가는 것이다.
하루하루의 생활을 사는 것이 신앙이다.
종말을 준비하는 것은 오늘을 어떻게 사는 지로 나타난다.
구원에 관심이 있는가, 없는 가로 분별이 된다.
어려서부터 준비 되어진 사람은 이 세상이 감당 못할 것이다.
참 선지자로 이미 하나님이 보시고 기쁨을 이기지 못하실 것이다.
자매의 구원을 위해 아빠가 수고하고, 일본과 북한이 수고한다.
수고한다고 해서 기분이 나쁜가, 구원의 이야기를 사람들은 너무 미워한다.
종말준비는 오늘을 살아내는 삶의 방식이다
고생의 떡과 물을 안 먹으면서 말씀을 전하는 것은 힘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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