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교회 2019년 9월22일 주일말씀요약(사도행전 2: 42~ 47/성령의 공동체)]
<Prologue>
‘공동체’하면 우리는 설레고 할 말이 많다.
제 방송도 김양재 목사의 공동체 고백이다.
제가 예전에 결혼 생활 때 힘든 것은 공동체가 없어서... 이혼, 자살을 생각했었다.
건강한 교회를 만나면 인생의 방황이 끝난다는 말은 정말 진리 중에 진리다.
오늘은 이 세상의 대안인 성령의 공동체를 살펴보겠다.
<말씀요약 본문>
1. 오직 경건 생활에 힘쓴 공동체이다.(42절)
성령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여서 세례 받고 죄 사함 받아 성령의 선물을 말씀으로 받았다.
성령이 회개를 하니까 ‘내가 안식일 안 지켜서 벌 받았어.’ 이런 회개가 아니고 성령의 선물을 받으니까 ‘화로다 망하게 되었도다.’ 라고 이사야처럼 근본적으로 무너지는 회개를 하게 되었다.
마음을 찢고 회개하는 사람들이 모이니까 성령의 공동체가 되었다.
이 성령의 공동체가 교회의 원형이 되는 것이고 초대 교회의 탄생인 것이다.
하나님이 천지를 만드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하시는 것처럼 성령님이 임재하시는 이 재창조의 공동체는 이 세상에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 생각한다.
누가(Luke)는 그들이 말씀의 공동체에 접붙여진 이후에도 어떻게 공동체에서 양육을 받으며 자라갔는지 설명한다.
네 가지로 보겠다:
1) 사도의 가르침을 받았다.
기도만 힘쓴 것이 아니라 ‘힘쓰다’에 헬라어 동사는 ‘스스로 무엇에 헌신하다’의 뜻에 지속적이고 집착적인 동작을 나타내는 미완료 시제라고 할 수 있다. 계속되었다는 것이다.
이 힘쓰다가 원문에는 맨 앞에서 쓰여서 가르침, 성도의 교제, 성찬, 기도에 전념했다는 것이 ‘힘쓰다’에 다 걸려서 모두 연결이 되는 것인데 기도만 힘쓴 것이 아니다.
성경은 알지만 나를 위해 죽어주신 예수님을 구속사로 꿰는 것은 성령의 선물이었다.
회개가 아픈 것이다. 가슴이 아픈 것이니까 죽을 것 같다.
그런 아픔이 오니까 ‘살았고 운동력 있는 말씀’으로 살고 싶은 것이다.
죽을 것 같으니까, 그 살고 싶은 것이 말씀인 것이다. 즉, 가르침을 받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먼저 구속사의 말씀을 받은 예수님의 열 두 제자에게 이 사람들도 똑같이 예루살렘 성전에 나갔지만 이 말에 찔렸으니까 그 열 두 제자에게 가르침을 받고 싶은 마음이 자발적으로 들었다.
이제 보통 생각하면 사도들도 똑같이 성령을 받았으니까 내가 배울 필요가 뭐가 있냐고 이럴 수 있지만 그들은 공부로 가르침을 받아가지고 한 일이라고는 예수님을 못박았었던 것이다.
이제 성령의 설교로 가르침을 받는 것은 출발이 다르다.
제가 생각해보니까 교회에서 반주하고 학교, 교회 모두 춘계·추계 부흥회가 있고 전 학교에서 클래스 채플도 있고 성경 시험도 있고 말씀 받는 구조 속에 있었다.
성경 시험도 백 점 만점을 받았으니깐 암송한 것들도 있었던 것이다.
이런 것들이 몸에 익혀져 있어가지고 제가 성령을 받지 못해도 어려서 교회 가고 큐티하고 말씀보고 암송하는 것들은 너무 필요한 것들이었다.
생각해보니까 제가 또 종교 부장한 기억도 있다. 만세 전부터 택자가 맞다.
생각도 안 나는 종교부장이 기억이 났다.
제 요지는 ‘아이들은 주님도 모르는데 교회 오고 큐티하면 뭐하나? 자리만 차지해서 핸드폰만 하고 있는데’라고 하시는 이런 분이 있다면 '몸이 기억하는 말씀으로 가르침 받는 구조에 있는 것은 최고의 구조인 것을 아셔야 한다.
'그렇기에 저도 믿음이 미약했지만 죽고 싶어도 교회를 떠난 적은 없는 것 같다.
아이들이 저처럼 성경 시험 보는 학교에 다니는 것도 아니니까 큐티할 때 한 구절씩 암송 좀 시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안 되도 아이들은 기억력이 좋으니까 잘 외울 것이다.
여러분들이 ‘나도 못 외는 걸 왜 애들보고 외우라고 하냐?’고 할 수 있지만 아이들은 온몸으로 받아들이니까 한 구절씩 외우라고 하면 아이들이 말을 잘 듣잖아요? ‘안 듣는데.’ ‘욕이나 안 하면 다행이지. 무슨 암송까지.’ 욕이나 안 하면 다행인 우리 아이들에게 성경 암송을 하라는 말 안하고 싶지만은 한 번 해보시라. 좋은 일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가르침만 받다가 성도 여러분들이 복음을 잘 전하도록 가르칠 사명이 주어졌는데, 그러니깐 담임목사만 주인공이 아니라 평신도도 많이 가르쳐야 되는 교회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까 도리어 평신도들이 유명하게 되어서 곳곳에 나가서 전해야 할 일들이 있고. 성경 공동체 맞는 것 같다.
목장과 일대일 THINK 양육을 통해서 배우든지 가르치든지 둘 중 하나는 다 하고 있기 때문에 한결같이 누구든지 가르치고 배우고 말씀을 사모하는 공동체 맞는 것 같다.
그런데 초대교회가 이런 순수성을 유지한 비결이 좀 있는 것이다.
가르침의 내용이 성령의 역사로 똑같았기 때문인데, 사도의 가르침에서 사도에는 복수고 가르침에는 단수다.
원어로 보면, 베드로의 설교로 인해서 예수를 믿게 된 수천 명의 신도들에게 사도가 복수니까 열 두 사도들이 다 가르쳤다는 얘기고 가르침은 (베드로 설교 들었죠?)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구원, 복음만 가르쳤다는 얘기다.
그들은 똑같은 율법을 가지고 율법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정죄했다.
그들이 율법을 가지고 한 것이, 예수님이 왜 세리와 먹고 마시는가? 너희들은 거짓 마귀에게서 났다고 하니까 이제 똑같은 율법을 가지고 예수님 잡아 죽이는 데에만 썼다.
회개가 안 되는 사람은 마찬가지로 성경 공부를 했어도 자기가 죄와 의의와 심판의 기준을 가지고 있어서 늘 자기는 옳고 남은 틀렸다고 한다.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늘 자기는 옳고 남은 틀렸다는 것이다.
성경 공부를 매 수십 년 해도 회개하지 않으면 이렇게 되는 것이다.
사도들의 가르침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심과 높아지심이고 하나님의 구속사다.
그리고 계속 계속해서 회개를 해야 되고 그리스도만이 구원의 근거가 되고 성령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계속 전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에 대한 반응으로 회개가 울려 퍼지는 곳에 참된 교회가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문제로 생각하면 그곳에 구원의 문제가 있고 본질적인 문제가 있는데 그것을 배우고 가르치면 다른 인생의 문제는 해결이 되는 것이다.
사람의 본분인 것이고 진리를 가르치고 배운 것이며 우리는 죽을 때까지 시간과 공간과 사람과 사건과 역사와 생사를 배운다.
그런 것이 오고 가는 것인데 진정한 배움이란 그런 문제에서 예수님의 시각으로 듣는 작업과 깨닫는 작업을 하는 것이다.
그런 모든 오고 가는 인생사 속에서 잘 듣고 깨달으면 그 적용은 결과를 기뻐하면서 세상의 시각에서 U턴 하는 것이다.
이게 가장 좋은 가르침과 배움이다.
어떤 일이 와도 예수님의 시각으로 보고 듣는 것이 최고의 가르침이고 최고의 배움인 것이다.
성숙할수록 어디를 가거나 만나거나 배울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늘 하늘에서 놀아야만 잘 배우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이렇게 올바른 말씀을 배우고 듣는 것이 중심이 되다 보면 사실 너무 바쁘다.
그래서 다른 프로그램을 할 시간이 없는 것이다.
학교라서 할 수 없었지만 주일예배, 수요예배, 목장모임에서 가르침 받고 큐티로 개인예배로 가르침 받고 또 시간이 너무 부족해서 우리들 교회는 특세도 부흥회도 성경공부도 따로 할 시간이 없었음에도 초신자도 다 같이 큐티를 하며 오게 되니까 가르침 받는 구조 속에서 사실 잘 정착을 하는 것 같다.
가르침이 십자가이면 이건 굉장히 그 교회가 굉장히 힘든 교회라고 할 수 있죠?
그러나 생명의 문은 좁은 길이고 사망의 문은 넓은 길이기 때문에 힘들어도 이 십자가의 가르침이 계속 이어져야 될 줄 믿는다.
이러한 십자가의 가르침 속에서 결국 우리는 사건에서 승리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적용]
-여러분은 가르침을 잘 받고 있나? 배울 것이 없다고 생각하나?
경건한 생활 중,
2) 성도의 교제다.
사도들의 가르침 이후에 나오는 성도의 교제는 아주 성경 전체에서 강조되는 중요한 요소다.
초대교회에서 성도들의 교제에는 정신적인 교제뿐만 아니라 물질적인 교제이기도 한데 교제에 해당하는 코이노니아(Koinonia)라는 헬라어는 여러분들도 많이 알고 있는 단어ek.
실제적으로 성경에서 고린도후서 6장 14절에 보면 ‘사귀다’의 의미로 번역되고 로마서 15장 26절에는 ‘헌금’의 의미로 사용 되었다.
그러니까 정신적, 육적인 교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오순절 성령강림 후에 정신적인 교제, 영적인 교제, 육적인 교제, 물질적인 교제가 서로 되었던 것이다.
우리들 교회 목장은 교제의 장이 활발하게 펼쳐지는 곳이다.
그곳은 가르침을 활발하게 나누고 실천할 수 있는 곳이다.
사람은 자기 얘기를 하고 싶은 본능이 있어서 자리가 마련되면 그것만도 좋은 것이다
자기의 십자가 가르침이 확실하지 않으면 조금 잘 가다가 삼천포로 빠지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래서 우리가 말씀을 나누며 교제하는 것은 말씀을 삶에 적용하여 나누는 것인데 굉장히 균형을 잘 잡아주기 때문에 이번 우리 현수막에 ‘치우침 없는 걸음으로 Balanced Life’가 쓰여져 있다.
말씀의 가르침을 받지 않으면 균형을 잡기가 진짜 어렵다.
경건한 생활 중에,
3) 떡을 뗐다.
성찬인데 성찬(聖餐)은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어주신 몸이고 보혈이다.
우리들 교회는 휘문의 특수한 상황으로 일년에 한번 성찬식을 하지만 초대교회는 모일 때마다 애찬(愛餐)으로 성찬을 했다.
공동체 형제 가운데 가난하여 식사를 제대로 할 수 없는 지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떡을 떼면 성경에는 성찬을 나타내는 그런 용어인데 매주 목장에서 나누는 식사교제가 예수님의 몸과 피를 기념하는 애찬과 성찬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것을 억지로 했다면 진즉, 없어졌을 거라 생각을 한다.
예수님의 몸과 피를 기념하는 것이라고 했다.
경건한 생활 중에,
4) 오로지 기도하기에 힘썼다.
여기도 원문에 보면 ‘기도들’이라고 복수로 되어 있다.
이 기도에는 개인기도, 공동기도가 다 포함되어 있는데, ‘기도하다’라는 이 동사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고 감정이나 직감이 아니라 말씀을 따라 하는 것을 알려준다.
그러니까 기도제목 나누는 것은 삶을 오픈 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들 교회 오는 강사님들은 기도제목만 봐도 매번 놀란다; ‘이혼을 막아주세요.’ ‘구치소에 간 것이 구원이 되도록.’ ‘아이가 학폭위에..’
‘어떻게 이런 얘기를 기도제목에 내놓을 수가 있냐?’고 한다
기도제목만 봐도 은혜를 받으시더라.
그러니깐 우리가 기도제목을 가르침에 따라 교제하고 예수님의 몸과 피를 보혈의 공동체가 되면 이 기도제목 나눈 것이 너무 쉬어지는 것이다.
오픈이 쉬어지는 것인데 이렇게 말씀에 따라 기도를 해야 된다는 것이다.
말씀 없이 기도를 했다가는 삼천포로 빠지는 것이다.
그래야 나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적극적으로 굴복시키는 게 되는, 그런 기도가 될 수 있는 것이다.
# 이런 기도제목도 또 올라왔더라:
‘목사님, 저는 마음 속에 미움이 너무나 많아요. 마음 속에 미움이 너무나 많아 힘들어서 예수님 안 믿고는 못 견뎌요. 예수님 십자가에 못을 좀 빼드리고 싶은데 돌아서면 나를 향한 사랑을 도로 까먹어요. 지능의 문제가 아닐까 의심이 될 때도 있어요. 수업 시간에 듣고도 모르면 선생님께서 안 듣고 뭐했냐고 말하잖아요. 듣고도 일분 안에 까먹는 것도 사실 가능하대요. 저 하나님 사랑 잘 기억할 수 있도록 기도 좀 해주시고요. 아직 하나님께서 때가 아니라고 대답하시면 성격이 급한 성도니깐 때를 좀 당겨달라고 기도해주시길 바래요.’
이런 기도제목도 올라왔네요.
이처럼 말씀 안에서 자기 하고 싶은 얘기를 다 나누는 것이죠. 교제와 성찬과 기도를 하는 것이 초대교회의 경건 생활이었고 삼천 명이 더해졌는데 조금도 혼란 없이 말씀과 지도력이 확고히 서있으니까 질서정연하게 사도들의 가르침 받아서 교제하고 떡 떼고 기도하기를 힘썼어요. 사실 지나고 나서 보니깐 우리들 교회가 평안한 것은 이 순서대로 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적용]
-사도의 가르침, 성도의 교제, 떡을 떼며 기도 중에서 여러분은 무엇이 안되고 무엇이 잘 되나?
이렇게 경건 생활을 지속적으로 힘쓰면
2. 기사와 표적의 공동체가 됩니다. (43절-45절)
(43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여기서 두려워하는 사람은 바로 다음 절 44절에 나오는 믿는 사람과 대조되는 믿지 않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사도들을 중심으로 하여금 기사와 표적들을 보면서 갖게 되는 영적인 두려움으로 ‘와~ 대단하다.’ 이다
사람에게 정죄 감과 두려움을 주신 참된 성령의 공동체는 영적 두려움이 전파가 되어서 그리고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전하기 위하여 신령한 사건들이 계속 일어나는 것이다.
신령한 사건이 뭔가?
온갖 종류의 문제가 일어나고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온갖 종류의 해결이 일어나서 기사와 표적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문제가 있는 게 문제가 아니고 문제가 없는 게 문제다.’ 란 말이 맞는 것이다.
문제가 있어야지 기사와 표적이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 얼마나 문제가 축복인가?
그럴 때마다 영적 진리인 말씀의 표적이 나타나는 것이다.
‘뭐가 잘 되었나’ 보다 진짜 기사는 내 현재의 이유를 알고 그것 때문에 내가 감사하니까, 놀라가지고 기사가 되가지고 말씀 딱 붙들어 그것이 표적이 되는 것이다.
#한 집사님이 자기의 목원을 나한테 소개를 했어요:
‘목사님, 귀한 말씀 정말 감사합니다. 목사님의 말씀을 너무 사모하는 목원 아무개 집사님이 조선 족인데, 아픈 남편으로 인해 자녀가 있는 중국으로 다시 들어가시기로 적용을 하셨어요. 이분의 남편이 뇌 경색을 앓은 지 15년 되고 거동만 겨우 했는데 최근에 왼쪽으로 완전히 마비가 와버렸다는 거에요. 그래서 누워있는 남편 대소변 받아내고 간호하려고 들어갔는데 이분이 대 소변 처리하면서 너무 마음이 힘들고 전도할 힘도 없었는데 '목사님 설교 들으며 끝까지 기쁨으로 잘 감당해야 하는데 질서에 순종하는 것이 잘 죽는 것이라고 했는데 잘 죽겠습니다.' (라고 음성 메시지를 보내오셨다는 것이에요.) 우는 자와 아픈 자를 보듬어 주는 성령님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이런 적용이 가장 기사와 표적이라고 생각을 한다.
‘생각하건 데 현재 고난은 잠깐이요, 장차 이루어질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기 때문인 것이다.
적용하는 사람이 가장 최고다.
기사와 표적 중에서도 오늘 본문에서 가장 큰 표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은 44-45절이다.
(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며)
그러니까 기사와 표적이 나오고 있는 사람, 없는 사람이 서로 통용하는 유무상통(有無相通)이 나오는 것을 보면 이것이 가르침, 교제, 떡, 기도 후에 나오는 적용이라고 보여지는 것이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으니 그랬는데, 3000명이 어떻게 다 함께 있겠나?
그러나 삼천 명이 어떻게 다 모일 수 있었겠나?
돈도 없고 모일 곳도 없고, 그런데 이게 가치관이 같으니까 다같이 있어 표현이 가능한 것이다.
내 남편, 내 아내가 가치관이 같지 않으면 평생을 같이 살아도 ‘함께’가 안 되는 것이다.
(가치관이 같으면) 3천 명도 함께 모여가 된다.
성령이 임함으로 가족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랑과 믿음과 소망’만이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가치관, ‘말발굽이 치는 이런 아픔’이 있으면, 나눠 쓰는 것이 아깝지가 않은 것이다.
목장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말발굽 고통이 있으니까 끊어지지 않고 목장 공동체를 하는 것이 바로 기사와 표적인 것이다.
돈으로 안 되는 일이 이 세상에 거의 없다.
아합과 이세벨을 보면 850명의 바알과 아세라를 섬겼는데 그 끝에 돈이 있다고 그랬다.
바알 선지자를 죽이라 한 선지자는 죽임을 당한다.
그러므로 자기를 살리고 자기의 자존심을 세우는 일에 돈이란 가공할 힘을 발휘한다.
그런데 예수님이 주가 되었다는 말씀 앞에 회개하고 자기의 재물을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자가 이때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세상에 돈이 미치지 않는 곳은 가정과 교회뿐인데 그 가정과 교회에도 세상이 들어왔다.
#이단과 공산주의
여기에서 이 구절을 가지고 유무상통 한다고 하니까 이단이 나오고 공산주의가 나왔다.
이단이나 공산주의자들이나 다들 강제적으로 공유를 하는 것 아닌가?
공산주의의 경우에 초대 교회와는 다르게 자발성이 없는데 무조건 공유하고 국유화하는 것들이 목표인 것이다
가난한 자들을 향한 자발적인 사랑과 공동체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으로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결국 이단들도 실패했고 또 실패할 것이다.
6.25동란 직후에 이단들이 활기를 쳤어요. 우리 엄마의 아는 이모인 S이모는 굉장히 배우고 돈도 있었는데 모든 것을 팔아서 그 당시 신앙촌에 들어갔어요. 그때는 이런 초대교회를 본받는다고 팔아서 들어가는 것. 우리는 그곳에서 만든 신앙촌 물건들을 사서 썼어요. 얼마나 품질이 좋은지 몰라요. 아이러니합니다. 우리는 분별이 안돼요. 이단이 만든 물건도 좋으면 갖다가 써야 되나 안 써야 되나. 공산주의는 부한 계층을 악인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빼앗아서 가난한 자에게 주자는 거에요. 잠시는 좋잖아요? 간부들은 그런데 부와 명예를 누리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기 때문에 역사는 끊임없이 공산주의 몰락을 교훈으로 보여주고 있어요.
돈이라는 게 나를 통과해서 누군가에게 가야 하는데 이런 유무상통하는 모습은 흔한 경우가 아니라서 성경에서만 나온다.
우리가 6.25 동란 때 다 팔고 들어갔듯이 전쟁이 나고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까 쉬게 되는데 그래서 이렇게 힘들 때 이단이 판을 친다.
그리고 전쟁이 있다고 하면 유무상통하기가 쉽다.
그래서 종말론이 기승을 부릴 땐 항상 유무상통이 쉰다.
초대교회 때에도 시한부종말론이 득세를 했는데, 로마의 핍박을 생각하면 이해가 쉽죠? 쉽습니까?
초대교회에 유무상통 모델이 현대 모든 교회에서 적용해야 될 모델로 문자적으로 제도화 할 수는 없는 것이지만 물질을 내려놓고 유무상통하는 모델이 성령의 공동체에서는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후에 이들이 지하 감옥에서 이때를 생각하며 희망을 가졌을 것이다.
하루 아침에 3천 명의 공동체가 갑자기 모였는데 오순절을 지키기 위해서 천하에서 ‘디아스포라’(diaspora), 즉 흩어진 나그네가 다 모였다.
갑자가 어떻게 자고 먹고 하겠나? 집이 몇 채가 있어야 되겠나? 음식은 또 어떻게 공급을 해야지 되겠나?
그러니까 우리 인간의 힘으로 이럴 때가 힘들 때인데 이것이 상상이 안 되는 일인 것이다.
지난 번 여호사밧이 사면초가에 몰렸는데 ‘주여~’해가지고 구함을 받은 것처럼 지금도 그런 거 같다.
‘모두가 같이 모여서 다 내 것’이라는 자가 없어서 그랬지만 지상 공동체는 완전하지 않아서 이렇게 뜨거웠던 초대교회도 잠시 후면 계시록 일곱교회만 봐도 서머나, 빌라데피아 교회만 칭찬을 받고 작은 교회, 가난한 교회만 칭찬을 받고 나머지 다섯교회는 마지막 라오디게아 교회, 즉 ‘토하여 내치리라.’ 처럼 우리가 잠시 후에 이렇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이 땅에 조끔만 편해지면 전부다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예외가 없다.
우리는 거짓된 종말론은 잘 모르지만, 이때도 임박한 종말이었지만 예수님이 안 오셨잖아요? 지금도 그렇다.
그러나 가장 확실한 건 개인의 종말론이다.
‘나는 죽어요’는 확실한 것이다.
이 종말론을 확실히 믿는 자는 주 안에서 믿는 사람들은 유무상통이 이어지고 있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
개인의 종말론! 이게 바로 믿음인 것이다.
[적용]
-여러분의 성도 체휼은 어느 정도 인가? 몇 프로쯤 될까?
3. 모이기를 힘쓰는 공동체이다. (46절)
(4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날마다 우리에게 양식을 주시는 ~!’
벌써 돌 지난 손녀 딸이 아멘! 한다. 몸으로 가르치세요.
하여튼 음식 먹는 것은 중요하다.
기사와 표적의 공동체가 되면 모이기를 힘쓰게 되는데 모이기를 힘쓰는 것(교제)과 떡을 떼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42절에 나왔는데 여기에서 반복하는 것은 아무리 가르침을 받아도 모여야 하고 떡을 떼야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반복을 한다.
이게 성전에 주일 날 모이는 것 너무 중요하지만 집에서 모이는 것도 기쁨으로 모이는 공동체가 성령의 공동체다.
큰 모임, 작은 모임이 저절로 잘 모여져서 초대 교회의 원형을 보여주는데 기뻐할 것이 없는데도 예배가 기쁘니까 애찬을 나누는 것이 즐거운 것이다.
그 동안 이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다녔는데 예루살렘 성전에 모이는 것이 하나도 기쁘지 않았었다.
기쁘지 않았으니 한 짓이 예수님을 죽인 것이었다.
그런데 처음으로 달려가고 싶은 예배 공동체가 생겼다.
설레서 너무 가고 싶은 곳이 되었고 내가 사모하는 공동체가 탄생을 했다.
[생각해보세요]
여러분들의 모든 예배에 설렘이 있고 매주일 주일예배, 수요예배, 목장예배, THINK 양육, 찬양 때마다 다 설렘이 있다면 여러분은 성령의 공동체에 속해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성령의 선물을 경험하면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창조주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해서 이 땅에서 보고 싶은 것이 없어지게 되었다.
모든 것에 비교 대상이 없어졌는데, 왜냐하면 최고의 왕을 보게 되었고 이 세상에 어떤 왕도 비교가 안 되는 것이었다.
그것을 본 것이 성령의 선물인데, 그것이 이 세상을 탈출 한 것으로 다른 사람에게 이 세상에서 탈출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내가 이 세상을 탈출했다고 안전한가 하면 그렇지 않다.
그래도 한번은 탈출 했다.
그러면 한 번 탈출하면 부족해도 뒤로 돌아가진 않는 것이다.
이것이 성령의 선물인 것이다.
베드로가 성령의 선물을 받기 전에는 날마다 실수하고 물고기 잡으러 가고 세 번 부인하고 그랬다.
복음서에서는, 그런데 사도행전에 성령의 선물을 받으니까 회개하고 그 물 세례, 성령의 세례 다 받게 되면, 사도행전에 보면 베드로가 뒤로 돌아가지 않고 있는 것이다.
한 번 탈출하는 게 중요한 것인데 그때부터 걸어가는 것이 너무 부족하게 된다.
그래도 완전치 못해서 베드로도 바울에게 야단 맞게 된다.
그러니까 완전해서가 아니고 오뚝이처럼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부족해도 돌아가지 않는 비결이 뭐냐 하면 한결같이 예배가 설레고 사모함이 넘치고 찬양하고 기도하고 목장을 하는 것이다.
설레서 하는 것, 그러니깐 회개가 참된 회개가 되니까 내 몸이 기억하는 죄들이 많으니까 회개할 것들이 끝까지 있지만 그렇게 때문에 예배에 설렘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러분들 맨날 입으로만 회개하고 예배에 설렘이 없으면 아직도 회개가 안 된 것이다.
아직도 죄를 모르기 때문인 것인데 참된 회개를 안 하니까 예배에 설렘이 없는 것이다.
예배가 설렘이 되면 말씀으로 교제하게 되니까 동창회, 지연, 학연을 사모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가기는 가야 되지만…
# 저야 말로 교회를 다녀도 일류를 위해 일생을 바쳤지만 그때는 설렘이 없었어요. 경쟁만 있었어요. 그렇게 열심히 한 것이 이십 몇 년이잖아요. 그러고 나서 50여년을 더 가깝게 살고 있지만 계속 설레면서 올 수 있는 공동체가 이 땅에 있다는 것을 경험하게 되니까 이것이 바로 성령의 선물이고 공동체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쬐끔 일류를 경험했기에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요. 우리가 쓸 수 있는 게 뇌의 5%라고 하잖아요. 탈출하면 95%를 쓸 수 있다구요. 그러니깐 아이들에게 말씀, 예배를 몸으로 기억하게 해주는 것이 너무 중요합니다. 그러나 망하기 전에는 세상 모임도 끊기 힘듭니다. 망하기 전에는 이거 다 못 끊어요. 그래서 초대교회 핍박은 참으로 선물입니다. 핍박이 있었기에 이런 성령 공동체가 가능했어요. 지상교회는 힘든데 이런 경우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 준거에요.
[적용]
-여러분은 설렘으로 예배에 오나? 습관적으로 오나?
성령의 공동체 중에,
4. 날마다 구원을 더 해가는 공동체다. (47절)
(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모이기를 힘쓰면서 언제나 하나님을 찬미한다는 것은 기쁜 일도 슬픈 일도 궂은 일도 화나는 일도 우리가 가르침을 잘 받고 성령의 교제를 하게 되면 그 적용을 잘 하게 되는 것이다
너무 슬픈데 남편 간호하러 갔다고 하자. 그 사람이 얼마나 칭송을 받겠나? 갔으니까 적용을 했잖아요.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게 된 다는 것이다.
내적인 충만은 외적인 충만도 가져오는데 내가 하나님을 찬미함으로 날마다 구원 받는 사람이 늘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런 말씀의 공동체에 접붙여가진 자와 혼자 신앙생활을 하는 자들은 하늘과 땅 차이인 것이다.
말씀의 가르침만 받고 교제와 성찬과 기도가 없으면 표적과 기사가 안 나타나고 그리고 이제 이런 유무상통이 일어날 수 없다.
그런데 가르침만 받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이다.
혼자서 가르침만 받으면 아무리 말씀이 좋아도 신앙 길에서 퇴보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공동체에 접붙여지면 부흥처럼 120명에 3천 명이 더 왔지 않나?
자랄 것이다: 생각, 마음 습관, 언어..
이런 인격들이 계속해서 탈출했으니까 그때부터는 자라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십자가 가르침을 잘 받고 영육 간의 교제를 잘 하고 유무상통하면 저절로 등경 위에 불이 되어가지고 비춰주는 삶이 되니까 안 믿는 사람들이 빛을 따라서 오게 되고 진짜 별 프로그램을 안 해도 구원 받는 사람을 더하게 하시는 것이다.
이 초대교회가 바로 이런 것인데 칭송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적용을 하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하게 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의 선물로 하게 되는 것이니 다른 사람들도 성령의 감동을 받는 것이다.
그렇다고 개역 개정에 칭찬 받았다고, ‘내가 예수만 믿으면 가르침 받아 교제 잘 하면 모든 사람에게 칭찬만 받는 것이 아니고 이 3천 명의 사람이 믿어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대요.’가 주제가 아니고, 반드시, 잠시 후에 베드로는 핍박을 받았다.
결국 베드로는 순교를 했다.
모세 시대에도 예수님 죽이려고 2살 아래 아이들을 다 죽이는 시대에 살았다.
다른 애들은 다 죽었는데 살아난 모세만 축복인가?
3천 명에 5천명을 더해도 스데반도 순교를 했다.
성령의 역사는 ‘전하는 자- 듣는 자-전하는 자’에게 까지 골고루 역사한다.
그러니까 3천 명을 더하게 하시는 것도 성령의 선물이고 순교도 핍박도 다 성령의 선물인줄 믿는다.
그들은 초대교회 사자 밥이 되어 가면서도 313년 동안 초대 교회 영광을 생각했을 것이다.
성경은 그런 모델을 주시는 것이다.
예수 믿으면서 항상 칭찬만 받는다고 생각하시지 마시라.
예를 들어서 박집사를 보니깐 정말 나는 예수를 믿고 싶었다고 밖에 있는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얘기한다.
등경의 빛이 비추니까 그런 것인데 같이 박집사, 이집사, 김집사가 놀다가 박집사만 적용을 잘하고 적용을 잘하니까 간증 대에 세워지면 ‘흥! 지가 뭐라고 저기 위에 올라가서 간증해?’ 이러면서 조롱하고 이간질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똑같은 박집사인데 한 사람한테는 칭찬을 받고 한 사람한테는 조롱을 얼마든지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지옥 불 위에서 올라 온 교만이 있기 때문인데 그러니까 우리는 여기서 보면 칭찬과 핍박을 골고루 받아야지 하나만 받는 것은 진짜가 아닌 것이며 그것은 성품이니 속지 마시라.
예배는 생명이다.
생명 걸고 믿는 사람을 안 믿는 사람은 너무너무 싫어한다.
등경 위에 세운 빛이 되어서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까 구원 받게 하신 것을 다 좋아하는 것도 아닌 것이다.
그러니까 제가 보기에 교회는 안 믿는 사람이 편하게 다니는 교회가 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안 믿는 사람이 편하게 듣는 설교를 한 두 번은 할 수 있겠지만 날마다 그런 설교를 하다 보면 변함이 없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가르침이 중요한 것처럼 가르침 받았을 때 여러분들이 아무런 적용할 거리가 생각나지 않으면 여러분들의 삶이 변하지도 않게 된다.
여러 가지 충돌이 일어나야 되고 성령 받지 않은 사람이 이 설교 들으면 싫고 THINK를 많이 해봐야 이제 되니까 싫은 것이다.
그런데 왜냐하면 ‘가난하고 애통하고 가난한 자가 복이 있고 애통한 자가 복이 있고 의를 위해 핍박 받는 자가 복이 있다.’라는 말씀이 듣기 싫지 않겠나?
누가 이런 말을 좋아하겠나?
그러니까 찾는 이가 없는 이 길을 우리는 가야 되겠고 교회는 생명 걸고 이 길을 걸어가도록 선포를 해야 되는 것이다.
그런데 초대교회는 베드로의 성령 설교 이후에 오직 예수님으로만 가르침으로 날마다 구원 받는 사람을 더했던 것이다.
지나고 보니까 초대교회처럼 건물도 없고 주일에 모이고 주중에는 집에서 모이고 주일 성전에서도 집에서도 환난 당하고 빚지고 원통한 자들만 모이니까 늘 눈물의 예배를 드리는 분들이 많아서 저절로 성령의 공동체가 된 것 같다.
목장에서 떡을 떼는 것도 끊어지지 않고 목장도 70~80% 이상 모이고 유무상통까지는 안 가는데 목장음식을 아깝다고 하지는 않는 것 같은 걸 유무상통한 것으로 봐주기로 하지만 그렇게 좋아했던 저희가 밥하기 싫어서 목장이 안 된다는 소리도 들리는데 우리들 교회는 그러시면 아니 되옵니다.
사실은 설교의 대상을 초신자로 놓는가 하는데 저는 교회는 교회다워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실 초신자는 날마다 와도 못 알아 듣는 것이다.
그러니까 초신자들을 위해서만 한다면 결국엔 몇 십 년이 지나도 결국엔 초신자 수준이 될 것인데 그 십자가의 가르침을 학력이 없어서 못 듣는 것이 아니더라.
십자가의 듣기 싫은 가르침을 하다 보니까 다른 것을 안 해도 구원 받는 사람을 더 하고 확실하게 하나님이 도장을 찍어주셨다.
그렇게 해서 교회는 교회다워야 된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들 교회도 벌써 커져가지고 목장이 싫어지는 사람이 생기고 예배가 설렘이 되지도 않고 겨울이고 여름이고 놀아야 되고, 쉬어야 되는 이런 분들이 자꾸자꾸 생기고, 목장에 밥하는 것도 아깝다고 하는 이런 분들이 생기는데 이 수준으로 가게 되다 보니까...
이럴수록 강력한 가르침이 선포되어서 지금도 이런 얘기를 듣는 여러분들은 얼마나 싫겠나?
찔려가지고 말발굽이 내 마음 속을 치고 있는 것인데 듣기가 싫은 것이다.
‘잘한다 잘한다 목자님 최고다 최고다’ 해야겠는데...
교회는 그래서 힘들어야 되는 것이다.
여러분들이 남들이 못할 적용을 하니까 목장에서도 등경 위에 빛나고 집에서도 등경 위에 빛나고, 직장에서도 등경 위에 빛나니까 그 빛을 따라서 빛을 내기 위해서 날마다 더하게 하시는 것이다.
가만히 있어도 올라가게 되는 것이다.
적용하고 간증 하나 하면 올라가는 것이다.
아까도 고아원에 살았다는 말을 누가 하겠나?
그런데도 이렇게 하니깐 등경 위에 올라가는 것 아니겠나?
그래서 저는 이제부터 굉장히 힘들게 하기로 작정을 했다.
이래야 성경의 공동체는 위력이 있고 설렘이 있고 좁은 길이고, 지나고 나서 보면 날마다 구원 받는 사람을 더하는 여러분들의 가정과 직장과 교회가 되길 바란다.
[적용]
-공동체를 양적으로 질적으로 성장시키는 분인데 만약 목장이 정체되어 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나와 공동체 성장을 가로막는 근본적인 문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돈이 아까워서 목장 하기 싫다는 것은 아직도 회개가 안 되었기 때문이고 나의 종말이 아직도 안 믿어지고 영원히 살 것 같다고 생각하니까 붙어만 있으면 축복이다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지금은 몰라도 후에는 알리라.
몸이 기억하도록 나와 앉아 계시기를 축원합니다.
*공동체 고백
성경보다 노래 가사를 외우고 찬양보다 유행가를 더 잘 부르며 즐겼습니다. 그러다가 사기와 부도를 맞고 빚쟁이가 되어 다시 일어서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더 어려워지고 고난은 더 심해졌어요. 그래도 동창도 사회 친구도 다 끊을 수 있었습니다. (진리잖아요. 망했으니깐 끊을 수 있다고 하잖아요. 여러분 인간의 힘으로 끊을 거 같아요? 못 끊어요. 그러니깐 이 초대교회 핍박이 참 축복이죠.) 어느 날 말씀 시편 10편이 생각이 나가지고 내가 돈 벌기 위해 예배를 소홀히 했고 가정을 돌보지 않았고 이기적인 삶이 깨달아져서 각종 봉사를 했다는 거에요. 양육을 받으면서 내가 죄를 모르고 심판을 가볍게 여긴 것을 알게 되었고 부목자가 되어서 아들을 데려오려고 5년이나 설득했지만 나보다 더 고집이 센 아들은 ‘하나님은 어디나 계신다. 아버지 마음대로 나까지 마음대로 하려고 하시냐.’하며 요지부동이고. ‘저에게 난 아버지를 생물학적 아버지 밖에는 여기지 않아요.’ 이 말을 듣고 하늘이 무너져 내린 것 같고 화도 안 나고 자존심이 떨어진 그 말 앞에 이때다 싶어서 ‘네 말이 맞다. 난 더 이상 이하도 아닌 생물학적 존재다. 그러나 아직 살아있는 아비니깐 오늘 너에게 나의 유언을 하겠다. 살면서 생각나겠지 하면서 김양재 목사님께서 하시는 큐티를 너희도 평생 하기를 바란다. 이것이 내 유언이다. ’ 하면서 가족 앞에서 울면서 기도하며 유언을 했대요. 큐티를 평생하라고.
이후에 아들이 우리들 교회에 등록하고 7년이 되는 올해 3월 아들 결혼식에서 ‘죄를 물으시는 하나님’ 간증으로 많은 하객들 앞에서 ‘나는 아버지를 생물학적 아버지밖에 여기지 않습니다’라는 아들의 기념적인 말과 나의 죄패를 나누었고 죄인인 나는 이 말을 들어도 부족한 사람이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아들이 철저히 무시해준 말을 들어도 죄인으로 심판 받는 것으로 기쁘게 여기고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의 길을 걷는 복된 길을 찾게 된 것 같습니다. 아들이 무시를 해줬기 때문에 성령의 공동체 속에 속할 수 있었던 거잖아요. 그러니깐 지금 우리는 어떻게 결혼식에서 이런 간증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등경 위에 빛이 되는 인생 아니겠습니까? 아버지가 올바른 아버지 역할을 하는 아버지가 요새 몇 명이나 되겠어요? ‘내가 못한다.’ 얘기하면 다른 사람들이 이게 약재료가 되어서 다들 깨우치게 되지 않겠습니까? 바로 이것이 성령의 공동체에 속한, 그래서 모든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어 주는 구원을 더하게 하는 간증이 아닐까 싶어요.
<Epilogue>
성령의 공동체는 경건생활에 힘쓰는 공동체다.
사도의 가르침과 성도들의 교제, 성찬, 기도에 힘쓰는 공동체다.
기사와 표적을 따르는 공동체다.
이제 모이기를 다하는 공동체이고 날마다 구원을 더하는 공동체다.
성령의 선물로 성령의 공동체를 주셨다는 것을 말씀으로 확증해 주시니 감사하다
십자가 가르침을 전하기도 받기도 참 너무 힘들지만 십자가에 달려 있는 일들이 많아서 잘나서가 아니라 주님이 없으면 살 수가 없기 때문에 그렇게 전하게 하셨다
이런 것들이 교제로 이어지며 보혈을 기념하는 성찬이 되며 말씀으로 기도할 수 있는 경건 생활에 힘쓰게 하는 이 모든 것이 우리의 힘이 아니라 성령님이 도와주셨다
우리가 다시 쓰는 사도행전이 되어서 이렇게 기가 막힌 선물을 주셨고 기사와 표적이 일어나는 것 같지만 우리들 교회도 지상교회가 완전하지 못해서 계시록에 일곱 개의 교회의 각각 모델이 있는 것처럼 이렇게 ‘토하여 내치리라’는 교회 모습도 있는 것을 고백한다.
말발굽으로 내리치는 아픔으로 어찌할꼬? 하면서 살았고 운동력 있는 이런 말씀으로 살아나야겠는데 우리가 이렇게 종말이 믿어지지 않기 때문에 좀 더 자자, 좀 더 졸자하며 성령의 공동체에서 참 힘든 시간을 보내는 분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성경 말씀이 생명으로 가는 길은 좁은 길이라고 사망으로 가는 길은 넓은 길이라고 하오니 우리들이 이렇게 모여서 날마다 어쩔 수없이 몸이 기억하는 예배를 드리며 우리 자녀들에게 이런 믿음이 내려갈 수 있도록 그런 십자가의 가르침을 우리가 전하고 받고 듣고 전하는 그런 구조 속에 있길 원하게 된다
그렇게 성령의 공동체를 맛보고 자녀들 세대에 내려갈 수 있도록 은혜 내려주옵소서.
적어도 우리가 토하여 내치는 공동체가 되지 않도록 주님이 기뻐하시는 주님의 공동체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하자
결론적으로 십자가 가르침이 더 선포되고 받아지고 애찬 공동체가 되어서 목장예배 때 마다 보혈을 기념하는 성찬공동체가 되도록, 주일/수요/목장예배 등 각종 예배가 설렘이 되도록, 물질이 나의 종착지가 아니라 통로가 되는 기사와 표적이 되도록, 또 저절로 비춰지는 등경의 빛이 되어서 칭송과 핍박을 잘 받아서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을 더하는 공동체, 우리 집, 목장, 교회 모든 직장과 사업체 그곳에 빛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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