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과 마음씀2019. 9. 4. 13:09

[우리들교회 2019 91일 주일말씀 요약(사도행전 2: 22~36/ 성령의 설교)]

 

 

 

<Prologue>

사도행전 1장을 보면, ‘교회 사명을 위해서 성령을 받으리라하시고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하셨다.

그리고 120문도의 기도가 있었고 거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살한 유다 대신 한 사람 맛디아(마티아: Matthias)를 채워놓는 일이었다.

사람이 중요하기 때문에 이 사도행전을 성령행전이라 하지 않고 사도행전이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했다.

2장은 오순절 성령강림을 통해서 방언이 임했다.

샬롸샬롸도 방언이지만 그 보다 지금까지 듣지 못한, 막힌 관계가 뚫어지는 언어라 천하 각국에서 모인 사람들이 이것을 다 알아들었다.

제가 거의 3년 전 암을 말씀 드렸을 때가 바로 사도행전 2성령충만제목으로 베드로가 설교할 때였다.

그 동안 계시록과 열왕기상을 전했고 이제 사도행전 설교를 이어가려고 한다.

여러분의 영육의 지경이 넓어지기 위해서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도행전 설교가 되길 소원한다.

성령이 임하니까 무식한 베드로가 본격적으로 성령의 설교를 한다.

오늘은 성령의 설교에 대해서 5가지로 살펴보겠다.

그런데 성령의 설교라면 성령이 임하지 않으면 안 들리겠죠?

이것이 걱정이다. 부디 사도행전 전하는 동안 여러분에게 성령이 임하길 축원한다.

 

<말씀요약>

 

성령의 설교는

1.   잘 들리게 한다. (22)

그러니깐 삼천 명이 들어왔겠죠?
(22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는 그의 첫 공식적인 설교인데 하나님의 약속과 성취,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승천을 다루고 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양육 받은 구속사로 구약성경을 해석하면서 어떻게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의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는지 이 말을 들으라고 한다.

그러므로 성령의 설교는 무엇일까?

그것은 오직 예수님에 대한 것이다.

성령 충만을 받으면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는 것이 있다.

그래서 14절에 들으라 하시면서 모든 사람들아, 형제들아 부르시면서 자꾸 들으라고 한다.

오늘 22절에는 이스라엘 사람들아 하면서 들으라고 한다.

하나님의 백성이고 성경에 박식한 이스라엘이 성령의 역사에는 무지하다는 것이다.

그러면은 그들에게 어떻게 하면 들리게 할까?

 

우리들 교회 목장 예배처럼 잘 듣는 훈련을 하면 신뢰를 받아서 잘 들리게 할 거 같다.

신뢰를 받아야 하지 않나?

상대방의 얘기를 안 듣고 성령이 임하지 않으니 공격을 하면 우리는 늘 분이 난다.

우리는 목장에서 이런 공격을 많이 받아왔기 때문에 그런 것이 훈련이 되어서 자기 죄를 보면서 회사에서나 집에서나 비교적 잘 듣고 잘 들리게 전한다고 생각을 한다.  

계시록 마지막 말씀처럼 성령에 힘입은 말을 교회에게 들으라 했다.

저 또한 성령 충만 설교할 때 암이 걸린 것은 이제 잘 들으라고 한 것 같다.

성령의 말씀하심만 따라서 말 좀 하라고 한 것이다.

제 말과 제 힘으로 설교하지 말고 온전히 예수님의 대한 약속과 성취의 설교만 하라고 항암으로 다루셨다는 생각이다.

13절을 보면 성령충만은 조롱을 받는 것이다
(13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이르되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하더라)
조롱을 받아도 베드로처럼 모든 부류의 사람에게 성령의 설교를 하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여러분도 성령의 설교만을 전하길 기도합니다.

 

(적용)

-여러분은 성령의 설교가 잘 들리십니까? 안 들린다면 제가 성령의 설교를 하지 못해서인가? 여러분이 성령을 받지 못해서인가?

너무나 답이 뻔해도 그래도 한 번 나눠보세요.

-목장에서 아픈 얘기도 잘하고 싫은 얘기도 잘 듣나?

그러면 성령 받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성령의 설교가 잘 들리면

 

2.   잘 살게 한다. (20-22)

 

베드로는 이 주제를 예수님의 삶을 통해서 설명한다.

예수님 삶처럼 사는 것보다 더 잘 사는 삶은 없기 때문이다.

다시 22.
(22 …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언하셨느니라)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라고 시작을 했다.

성령의 설교는 상대방이 아는 것으로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 참 필요하다.

이렇게 성령의 설교는 무턱대고 결론을 내리며 내 소리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접촉 점을 찾아서 거기서부터 한 단계씩 설득해 가는 것이다.

베드로에게는 주님을 세 번 부인하고 회복된 후에 그런 지혜가 생겼다.

어떤 지혜를 주셨냐 하면, 베드로는 더할 것도 없고 뺄 것도 없는 사랑하는 예수님 (같이 살았었잖아요? 훈련 받고)을 증언하면서 그의 입에서 처음 나온 말이나사렛 예수.

예수님은 멸시 받는 나사렛 동네에서 목수의 아들로 자라셨지만 하나님께서 예수님으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베풀게 하셨다고 증언을 하셨다.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이라는 이 세단어로 결합된 표현은 예수님의 사역에만 쓰였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사역은 하나님에 대한 예수님의 증언이었고 또한 예수님에 대한 하나님의 증언이었다.

이것을 효과적으로 베드로가 성령으로 증언을 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삼위일체의 설교라고 생각한다.

권능의 본질은 하나님의 능력을 보이는 것이다.

기사의 효력/효과는 그 놀라움을 계속 만들어내는 것이다.

표적의 목적은 보이는 것보다 영적 진리에 있다.

예수님의 사역에만 쓰였던 이 단어는 주님께서 승천하시고 성령님의 운행하심으로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역사한다.

 

(# 1: 저도 성도 여러분에게 들으라 하는 예수님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저 또한 나사렛 예수와 같이 무시 받을 조건을 가졌지만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베풀어주셨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그 당시에 암 얘기를 하겠습니다. 심판처럼 온 암 사건은 그때 내 현재의 이유를 알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큰 권능이라고 생각합니다. 암이 발견된 후에 전체적으로 상인데 일부분은 내 열심과 내 힘으로 참는 인내로 인해 책임을 물으셨다고 했어요. 내 힘으로 하는 것은 항상 벌입니다. 항암을 하면서, 할수록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어요. 이건 이제 놀라운 기사인데요, 암이 나아서 기적이라기 보다 암을 잘 해석하여 영적 진리인 말씀의 표적을 보여주셨습니다.)

 

20절에
(20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라고 했는데 암이 누구에게는 달이 변하여 피가 되는 진노의 심판인데,


바로 21절에는
(21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라고 했다.

그래서 암이 구원의 권세가 되어 그리스도의 신비를 보이게 해달라는 기도 요청을 했었다.

여러분의 기도가 응답이 되어서 과연 암이 구원의 권세가 되어 전했더니 이렇게 부활을 했다. (감사합니다.)

 

그 하나님의 능력은 외적으로 모든 상황이 형통한 것만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내적인 깨달음이 더욱 중요하다.

어떤 것보다 이런 깨달음이 암이지만 잘 살게 하는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보여주셨다는 생각이 든다.

 

(# 2: 암으로 계속 내 암을 설명할 수가 있는 것. 이것이 바로 권능과 기사와 표적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이렇게 해석을 잘하고 또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항암 메시지도 보내고 여전한 방식으로 사니깐 기사와 표적을 보여주신 게 항암 끝나고 룻기 4장 찬송 제목으로 설교하는 날, 임신이 거의 불가능 40 중반의 늙은 아들 내외에게 자연임신이라는 소식을 그날 듣게 하셨습니다. 정말 이것은 문자적으로 표적 같고 기사 같고 권능 같잖아요? 그때가 삼월이라서 태명을 찬송이와 삼월이로 지었는데 룻기 오벳은 남자인데 삼월이라고 이름을 지을 때 살짝 여자 같더니 진짜 딸을 주셨네요. 찬송이와 그 본문 속에 구속사의 주인공 유다를 줄인 말유송이라고 지었어요. 이게 다 말씀 따라 그리고 임신 때 기형아 고위험군 검사에서 수치가 많이 높게 나왔죠. 또 후에 양수과다증이라고. 계속 위험하다고 얘기를 하고 거기다가 노산 이었잖아요. 그러나 나을 것이기에 그런 검사 하나도 안 했어요. 그러니까 간절하게 기도가 되는 것이죠. 목사님네는 정말 되는 일이 없어 할까 봐 굉장히 기도가 간절히 나오더라구요. 그런데 건강한 아이를 나아서가 아니라 그때마다 말씀을 잘 듣고 기도를 했기에 우리모두 요동치 않아서 기사와 표적, 권능을 보이셨다고 생각합니다. 산부인과를 가면은 그런 검사가 나와도 이렇게 건강한 아이를 낳을 수 있으니깐 여러분들 놀라지 마시길 바래요.)

 

(적용)

-여러분의 삶을 통해 모두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권능과 기사와 표적은 무엇인가?

-, 베드로처럼 예수님만 전하며 능력과 놀라움과 말씀의 표적을 보인 일이 있나?

 

성령의 설교를 잘 들리게 하는 것은 잘 살게 하기 때문인데 그러면 잘 살게 하는 것은

 

3.   잘 죽게 한다. (23)

잘 사는 것은 잘 죽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죽음을 보겠다.
(23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예수님처럼 권능과 기사와 표적으로 잘 산다고 하나님의 능력을 세상이 인정해주는 것이 아니다.

근본 하나님과 본체이신 성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에 철저하게 성부하나님의 의지에 복종하셨다.

아버지가 뜻이 있어 정하시고 미리 아시고 아들을 죽는 데 내어주셨다.

이것을 다 알아서 자기는 죽는 것이다.

그렇지만 얼마나 무서운 고독을 경험하셨겠나?

이 고독을 겪는 것은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지만 이 일을 바로 성령님이 도와주신다고 성령의 설교를 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 아무도 도와줄 사람이 없을 것 같아도 성령님이 도와주실 것을 믿는다.

 

그런데 그들은 권능을 행하는 예수님을 왜 그렇게 죽이고자 했을까?

그는 예수님은 실제 삶으로 설교를 하고 그리고 백성이 따르니까 따라갈 수 없는 지도층들은 예수님을 죽이는 것 밖에는 길이 없다고 생각을 한다.

요즘 구약성경 열왕기상에 아합과 이세벨하고 똑같지 않나?

나봇도 죽이고 엘리야도 죽이려고 한 것처럼 우리도 혼자 정직하고 싶다.

공동체를 통한 정직은 싫은 것이다.

삶이 연결되니 딱 듣기가 싫고 편치가 않은 것이다.

목사님 말씀은 좋지만 목장은 싫다거나 또 목장은 좋지만 목사님 설교는 딱 싫다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아시고도 하나님의 정하신 뜻대로 죽으셨다.

우리가 알면서도 죽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우리들의 수많은 간증은 잘 죽어지는 얘기다.

잘 사는 것은 잘 죽는다는 것이다.

세상적으로 스펙 좋고 이런 것이 아니고 정말 잘 사는 것은 내가 삶에서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못 박혀 사는 것이 가장 잘 사는 것이다.

죽은 자도 살리시는 능력을 가진 예수님이 세상을 위해 하신 일이 십자가를 지신 일이라는 것이다.

*진정한 능력이란 자기의 똑똑함과 능력을 보이는 게 아니라 사랑하고 인내하고 희생하며 죽어지는 것이며 얼마나 사랑했고, 얼마나 인내했고, 얼마나 희생했고 내가 얼마나 죽어졌는가가 가장 잘 사는 것이다.

여자가 똑똑하다고, 돈 잘 번다고, 예쁘다고 여자의 머리가 남자인데 능력으로 자기보다 못 미친다고 무시하고, 바람 피웠다고 버리고 이러면 그 여자는 바보인 것이다.

똑똑한 부인이 그렇지 못한 남편을 섬기는 것은 죽는 일 같지만 이 땅에서 가장 잘 사는 비결이고 여자의 가장 큰 면류관이인 것은 그것이 성경의 원리이기 때문이다.

여자의 머리가 남자고 남자의 머리가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또 남자는 일이 우상이니까, 마찬가지로 상사를 능력으로 무시하면 거기도 바보인 것이다.

무능한 부모, 완악한 남편, 권위적인 상사에게 잘 죽으면 그 죽는 것을 보고 그것을 통해 다른 사람들이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보니까 권능(權能)은 거기에서 능력을 보는 것이고 기사(奇事) 계속 놀라는 것이고, 거기에서 말씀의 표적(表迹)을 보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보고 놀라는 것이다.

김대리는 어떻게 저렇게 잘 참지? 어떻게 날마다 웃지? 이러니까 여기에서 질서라는 것은 죽는 것이다.

이 땅에서 질서를 통해서 훈련시키지 않나?

그렇게 결국은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보여주는 사람에게 리더십이 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너 틀렸다고 하는 사람에게 마지막에는 안가는 것이다.

잘 살아 보여도 나중에는 다 드러나는 것이다.

천국 가기까지 안 들키는 사람은 정말 문제인 것이다.

천국 갈 때까지 안 들키면 그건 완전 지옥 가야 되는 것이니까 천국 가기 전까지 들키는 것이 아주 축복이다

그런데 성령이 임하지 않으면 못 죽는다.

성령이 임하지 않으면 이런 것들을 못 드러내는 것이다.

뭐라고? 내 남편하고 살아봤어?’ 이게 주제잖아요.

목사님이 우리 사장을 알아요?’ 알아요.

사람은 다 똑같기 때문이고 별 인생이 없기 때문에 다 죄인이지 않나?

성령이 임하지 않으면 이 얘기를 드러내기도 어렵고 듣기도 싫고 그래서 목장이 싫은 것이다.

맨날 나가서 참으라고. 인간적으로 참으라 들리니까 못 죽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죽어주신 이 성령의 설교가 날마다 필요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교회보다 가정을 먼저 창조하셨다.

그리고 이제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했기 때문에 어떤 모멸을 받는다고 해도 가정을 지켜낸 것이 가장 남는 장사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잘나고 아무리 어쩌고 저쩌고 해도 가정을 버리면 앞으로 남고 결국 뒤로는 밑지는 법이다.

자손 대대로 밑지는 장사고 적어도 3-4대 밑지는 장사가 되니 남는 장사하시길 바란다.

 

(# 3: 저 또한 항암을 하면서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는 투병의 시간에 잘 죽어져야 했었는데요, 저는 이제 초기 같은데 암이 흩뿌려져 있어가지고 아주 남이 할 건 다했는데. 그래서 항암제 말고는 안 돼서 항암만 해야 되는데 흩뿌려져 있어서 아주 항암제도 독하게 2개씩 8번을 하는 게 아니고 3개를 다 써서 6번을 했기 때문에 한 번에 아주 독한 항암제를. 저는 할 건 다했어요. 그래서 무지무지하게 그런 힘든 투병의 시간을 통해서 제가 잘 죽어졌어야 했는데요. 제가 무서운 남편에게 잘 죽는 것과 우리 남편하고 잘 때 잠 못 잔 적도 많은데 실제로 무서운 항암 고통에서 24시간 잠 못 자고. 그렇게 막 이런 고통을 계속 겪는 것은 거기에서 잘 죽어지는 것은 또 다른 저의 모습을 직면하게 하신 것이에요. 제가 암이 구원의 권세라는 것을 알아도 아프면서 갇혀있으니깐 정말 힘들고 외롭더라구요. 그러니깐 그렇게 힘들고 외로우니깐 암 걸린 사람들을 생각하게 되었어요. 암도 항암을 한 것과 안 한 것과 큰 차이더라구요. 아무리 암 걸려도 항암을 안 하게 해달라는 것이 우리 기도제목이잖아요. 어떤 사람은 쉽게 지나가는 사람도 있는데.)

 

그런데 이것을 당하면서 이 모든 것은 내가 이전에 알던 것과는 달랐다.

그러면서 이 항암을 하면서 제가 항암보다 높이 솟은 산 있었다고 했는데 그 높이 솟은 산은 바로 제 자신이었다.

제가 겪어보니까 얼마나 사랑이 없고 힘든 분에 대한 공감이 부족한지를 알게 되었다.

저는 사랑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라고 하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제 사랑의 깊이가 너무 얄팍하더라.

겉으로는 온유해 보이는데 제가 구원 때문에 참는지, 사람이 무서워서 참는 것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제가 그래서 할 말을 못하는 것이 사랑이기도 하지만은 제가 그렇게 화내지 않는 것을 사랑이라고 굳게 믿고 있고 내가 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렇게 설교를 많이 하는 사람들은 그 설교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하는데 정말 끝이 없다라는 말씀을 전하니까 그만큼 살지를 못하니까 바빠서 댕기다 보니까 제가 참 형편

이렇게 영적으로 힘들고 육적으로도 힘드니까 또 다른 하늘이 열려서 주님께서 만나주시고 한 것 같다.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꽹과리라고 하였는데 내가 너무 꽹과리를 울리고 있지는 않았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너무나도 생각지 못한 회개의 깨달음을 주셨다.

 

그래서 너에게는 이미 민수기처럼 각을 뜨고 화제를 드리면서 번제를 드리는 시간이 너무 필요하다고 하셨고 너는 할 말이 없다고 하셨다.

이렇게 자신을 깨닫는 것이 가장 죽는 길인 것 같다.

 

자신을 직면하는 게 너무 힘들더라구요.

그런데 이런 깨달음을 마귀는 주지 못한다.

그러나 성령님은 이 일을 하시는 것을 저는 지났다.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주님을 찾았다.

한 쪽에서는 내가 그렇게 열심히 살았는데 그런 나를 상으로 아프게 하시는 건가?’ 라는 생각이 들게 되더라.

그런 것을 겪어야 말씀의 거울 앞에 내가 직면하게 되는 것 같다.

다윗이 압살롬이 반역할 때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었겠나?

자기를 정말 직면하게 되었을 것 같다.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라는 말 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는 것이다.

저는 이것이 최고의 기도라는 것을 체험했다.

아프기만 하면 그냥 힘들기만 했겠는데 항암보다 높이 솟은 제 산을 보니까 도리어 항암을 이기기가 쉬었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잘 죽어지는 것이 무엇인지를 계속 생각하는 것이 저한테는 꼭 필요했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제가 항암하면서 많이 울었다.

그때로 돌아가는 것 같아서 여러분들은 기억하실 것이다.

항암메시지를 기억하실 것이다.

 

예레미야 애가’(Lamentations)를 보면 그러나 참 기가 막힌 일도 있는데 2 12절에 활을 당겨 나를 화살의 과녁으로 삼으시며 13절에 화살통에 화살들로 내 허리를 맞추셨다고 한다.

아우슈비츠 학살 때 유대인들이 이 시를 읽으면서 자신들의 고난을 생각했다고 하는데 이 사람들이 그 고난 가운데서도 그들은 자신을 보기는커녕 아직도 예수를 안 믿는 것이다.

죽음을 문자적으로 당했음에도 죽어지지 못한 유대인들을 보면서 그들이 예수님의 고향 식구들 아닌가?

그들이 지금도 너무 잘나고 잘 살아서 성령의 설교가 들리지를 않는 것이다.

그래서 나사렛 예수의 권능이 무시가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오 천년 동안 못살다가 처음으로 잘 살게 된 것은 고종대왕 때문도 아니고 세종대왕 때문도 아니고 이름 없는 선교사들이 들어와서 흘린 피들로 인해서 우리가 몇 십 년 만에 오천 만 명이 자유민주주의를 누리고 잘 살게 됐는데 우리가 예수 때문에 잘 살게 되었다는 것을 왜 인정하지 않을까?

맞지 않지 않나?

어렵게 이룬 자유민주주의가 정말 다시 예배 못 드리게 될까 봐 뭘 회개해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잘 듣고 잘 살고 잘 죽는 이유는 '오직 예수님' 때문이다.

그런데 이게 안 들리는 것이다.

성령의 설교가 여기도 저기도 예수/성령의 설교가 안 들리면 누구와도 안 통하는 것이다.

이쪽 저쪽 성령이 운행하지 않으면 안 들리게 되어 있다.

(적용)

-내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을 알고도 죽어지지 못하고 고집을 부리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유대인들이 지금까지도 안 돌아오는 것을 보니깐 말로 해서는 안 되는 것이어서 가슴이 찢어지는 것이다.

제가 회개할 일이 많아서 저를 다루셨는데 내가 무엇 때문에 죽어야 되나 생각이 많이 하게 됩니다.

 

성경의 설교를 잘 듣고 잘 살고 잘 죽으면,

4.   다시 살아나게 한다. (24-32)

부활의 주님이 이것을 또 설명하신다.
(24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고통은 죽이기 위한 사냥꾼의 덫이라는 뜻이 있다.

이 땅에서 가장 큰 고통은 사망인데 거대한 공동묘지가 입을 쩍 벌리고 있으니까 노력할 필요 없이 모두 가는 그 넓은 길, 사망의 덫에서 풀릴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이다.

풀어 살리실 분은 오직 하나님밖에 없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사망에 대한 승리다.

베드로는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을 다윗의 부활신앙으로 연결시킨다.

 

25절에,
(25
다윗이 그를 가리켜 이르되 내가 항상 내 옆에 계신 주를 뵈었음이여 나로 요동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이것은 시편 16 8절에 다윗이 항상 내 옆에 계신 주를 뵈었도다의 인용이다.

다윗은 10대 때 사울의 명령을 따라서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골리앗을 물리쳤다.

그러나 사울 왕의 시기로 미움을 사서 16광야를 거치면서 서른 살까지 통일 왕국에 왕이 되는 중에 도피생활도 하고 침을 그적그적 흘리면서 미친 사람처럼 행세해서 겨우 목숨을 부지했던 적도 있다.

그런데 왕이 되고서도 유혹에 넘어져서 간음도 하고 거짓말도 하고 살인도 했다.

그래서 분수령적인 회개도 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사랑하는 아들이 반역하며 반역해서 울면서 맨발로 성을 버리고 피신까지 가는 이런 정말 수치와 조롱도 겪었다.

그런데 그야말로 아들과의 전쟁은 이길 수도 질 수도 없는 전쟁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항상 자기 앞에 계시는 하나님을 보았다는 다윗의 이 고백은 무슨 말인가?

다윗의 인생 속에 항상 하나님이 도와주신 것은 맞지만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압살롬의 반역 때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보는 것은 정말 힘들었을 것 같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 자체가 상급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다윗은 구속사 정점의 믿음이 되기까지는 마지막에 가장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이 가장 수고를 했다고 본다.

 

(# 4: 죽일 수도 죽을 수도 없는 식구들이 있습니까? 어제도 평원님이 시편129 3절에밭 가는 자들이 내 등을 갈아 내 등 고랑을 깊게 지었도다.’처럼 너무나 힘든 인생을 살았지만 괴로우나 이미 이긴 싸움이라고 했는데. 평원님 자체가 너무 똑똑하니까. 정말 이것이 있어야 할 고랑이라고 생각이 들더라구요. 제가 남의 일은 잘 봅니다. 부모, 형제, 자녀 때문에 계속 고생을 했지만 그 조현병 40년 된 막내 동생을 20년 동안 돌보면서 너무나 힘들었다고 했는데. 그 좋은 환경에서 이렇게 주께서 29절처럼 생명의 길을 보이시고 다른 사람들을 주께 인도하는 사명을 감당하게 하시려고 모든 식구들이 수고를 했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언젠가의 이러한 깨달음을 주셔서 좋은 공동체에 붙어만 있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항상 말씀과 공동체의 간증을 보고 듣고 있으면 어느 날 이 육신의 둑이 터지는 경험을 하게 될 줄 믿습니다.)

 

베드로 역시 부족해도 때마다 주를 바라보았다.

예수님의 삶을 목격하고도 세 번이나 부인했지만 갈릴리 바닷가에서 주님을 사랑한다고 세 번 고백하게 하시고 그리고 회복했다.

이후로 성령의 설교를 하며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히는 등 수많은 시련을 겪었다.

예수님이 예언한 것처럼 황제 때 전승에 의하면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순교했다고 한다.

우리가 성령 충만하다가도 육신의 근심에 충만할 수 있다.

소망이 가득 차다가도 절망이 넘칠 수도 있다.

다윗의 인생을 보면 그렇지 않나?

그때마다 믿음의 주여!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면 항상 다시 살아날 줄 믿는다.

 

(# 5: 말기 암으로 천국에 간 이관희 집사가 목장 나눔에서
죽음에 자유로우면 모든 것에 자유로워야 하는데 내가 죽음의 자유에서 자유로운 것이 아니더군요. 죽음은 나에게 주어진 사명이고, 하나님 앞에 서는 거에요. 그것에는 자유함이 있는데 실제 생활에서는 아버님 뵈러 병원 가는 데 내가 아버님 보다는 더 살아야 한다. 내가 먼저 하늘나라 가면 아버님 가시는 길은 누가 지킬까? 이런 사소한 생활 속에서 염려하는 것들이 실질적인 두려움이라서 그걸 하나님께 토해내고 있어요.’ 저는 이런 것이 자기 앞에 계신 주를 보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25절에,
(25…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었음이여 나로 요동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여기서 나는 누구를 가리키나?

27절에도
(27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에서 거룩한 자는 또 누구인가?

다윗의 시이니깐 다윗인가?

오늘 29절에 보니깐. 다윗은 죽었다고 한다.

다윗의 묘가 오늘까지 베드로는우리에게 있다고 한다.

 

30-32절에,
(30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31 미리 본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되 그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그의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32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

이 얘기는 다윗 자신의 얘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다윗은 예수 그리스도가 장사 된 후에 무덤에서 부활을 천 년 전에 미리 본 거에요.

다윗은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미리 말한 것이다.

시편에도 미리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이 예언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 예언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의해서 성취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을 다윗이 천년 전에 미리 봤다는 것이다.

베드로가 미리 목격한 부활의 주님은 다윗이 미리 본 예수님과 똑같았다.

미리 본 죽음과 약속과 부활을 위해 즉, 미리 깨달은 성경으로 이 모든 것을 깨닫고 설교하고 전하는 것은 얼마나 성령의 설교인지 모른다.

다윗이 알았고 베드로가 알았고 내가 알아서 내 속에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시고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신 것이다.

이 부활의 증인이신 것이다.

증인으로 살려면 인생이 짧다.

제자들과 베드로는 지금까지 부활의 주님을 육신적으로 보았지만 그의 능력을 몰랐다.

그런데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그 능력이 나타나신 것이다.

그 능력은 오직 교회를 위해서 주신 것이다.

나의 모든 사건도 성령에 있었고 지금도 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해 아래에 새것이 없다.

이것을 미리 봐야 하는 것이 성령의 설교 핵심이다.

오순절 성령 강림사건은 결국 다시 사는 부활이라는 것이다.

성령의 설교는 예수님의 삶과 십자가의 죽음과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설교다.

예수님, 오직 예수님 삶을 빼놓고 할 수 있는 설교가 아니다.

그러나 보이는 시늉이나 능력만 강조한다면 기복적 성령 운동 밖에 될 수가 없다.

우리가 성령 운동을 해야 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을 받아야 되는 것이다.

우리가 그렇다면 다시 살아나서 증인이 되어 나를 위하여 예수님이 죽으시고 사흘 만에 살아나셔서 구원자가 되었다고 외쳐야 하는 것이다.

성령이 임하면 우리는 그냥 저절로 외치게 되는 것이다.

어디 가서 예수님을 전하라고 하는데 한마디도 못 한다면 아직 성령이 임하지 않았고 부활의 주님을 만나지 못한 것이다.

형제가 아무리 미워하고 핍박해도 한 사람만이 아니고 서로에게 복음이 전파되어야 그것이 끝이 나는 것이다.

복음이 전파되지 않으면 우리나라도 끝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도 저기도 필요한 것은 복음이다.

일본에게 필요한 건 복음이다.

아마도 우리는 이 지구가 끝날 때까지 싸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쉬지 않고 부활의 증인이 되어서 성령의 말씀으로 성령의 설교로 주님을 전해야 하는 것이다.

 

(# 6: 엊그제 일흔 두 살 되신 목자였던 성도님이 저에게 편지를 주셨어요.
목사님 제가 우리들 교회에 등록한지 만 14년이 되어가는 즈음에 좋은 소식을 드릴 수 있어 좋습니다. 94세 치매 어머니를 돌봐야 했기 때문에 남편과 반절의 합가를 했습니다. 15년의 이혼 생활에 남편은 완전 노숙자 자체였고 몸은 할아버지였어요. 너무 불쌍했고 미안해서 죽이고 싶도록 미운 마음은 온데 간데 없고 눈물이 왈칵 쏟아지더라구요. 그간 배운 대로 사랑의 언어를 쓰며 살얼음판 걷듯 조심조심 걸어갑니다. 우리들 교회 공동체가 없었다면 저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제 새로 태어난 듯 꿈을 꾼 듯 남편의 옷을 빨고 청소를 하고 된장찌개를 바글바글 끓여 정성스럽게 상을 차려 어느 때도 느껴보지 못한 시간을 보내며 감사 제사를 지냅니다..’)

 

이분이 이혼하고 너무 힘들어서 성령이 임하니까 잘 듣고 잘 살고 얼마나 반찬을 잘하시는데 잘 죽으시더니 다시 사신 것이다.

이렇게 이혼을 해도 나중에 합치시길 바란다.

노숙자가 되었더라도 집안에 물려줘야 할 것은 더럽혀지지 않은 호적 등본인 것이다.

호적등본을 지키자.

다같이 호적등본을 지키자.

우리들의 국시인 것이다.

아무쪼록 각자 아픈 상황에서 앞에 계신 주를 보게 해주시길 기도한다.

 

주는 어떤 곳이든 내 앞에 내 옆에 계신다.

 

(적용)

-나는 어떤 좌절과 절망 가운데서도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님을 보며 요동치 않고 살아나고 있나?

-주님만이 상급인가? 세상이 상급인가?

 

그래서 성령의 설교는

 

5.   높아지게 한다. (33-36)

 

(33 하나님이 오른 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여기에서 베드로는 시편 110 1절을 인용해서 부활하신 주님을 하나님께서 구세주로 통치자로 오른 손으로 높이셨다고 한다.

여기 33절에 성부/성자/성령 삼위 하나님이 다 나온다.

성령 강림에 가장 큰 핵심이고 성령 설교의 핵심이기도 하다.

내가 이렇게 잘 살면 성부/성자/성령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보좌 위에서 높이신다는 말씀이다.

110편은 다윗 얘기는 아니다.

 

34-36절에
(34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이르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35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다윗의 무덤은 여전히 있고 다윗의 몸은 썩은 지 오래 되었는데, 그럼 누구를 주라고 불렀을까?

첫 번째 주는 하나님이고 두 번째 주는 예수님이다.

다윗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주를 내 주라고 불렀다.

자기 원수를 자기 발 아래 완전 굴복 시킬 때까지 예수님을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게 하실 거라는 것이다.

다윗은, 권능을 행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부활하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다시 오셔서 사탄을 완전 정복하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를 시편 110편에서도 하고 있는 것이다.

다윗이 시편 110편을 인생 후반부에 썼으니까 다윗도 갖은 고난을 다 겪고 나서야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알아본 것이다.

죽어지고 십자가를 겪지 않으면 나에게 예수님이 그리스도/메시아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메시아를 알아보고 내 삶에 생명의 역사가 시작되어 보고 듣는 자마다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면 하나님은 저절로 높이실 줄을 믿는다.

우리의 인생도 무너진 후에 거룩하게 살고자 할 때 육이 무너지고 영이 세워지는 것은 인생 최고의 축복이고 높아짐이다.

너무 아름답게 하시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한다.

 

무식했던 베드로는 이 시편과 요엘서를 자유자재로 (인용).

지난 번 제가 성령충만 설교할 때 요엘서를 인용했고 오늘(성령의 설교)은 시편을 인용하면서 가장 중요한 신약 이슈인 예수그리스도 삶과 죽음과 부활을 성경으로 잘 꿰면서 너무도 조직적이고 말씀의 근거한 신학적 교리의 체계를 성령을 설교하고 있다.

이 본문의 설교를 보면서 누가 무식한 베드로라 할 수 있을까?

성경을 잘 알면 우리가 무식할 수 없다.

우리들교회도 입만 열면 성경이 줄줄 꿰어지는 성도들이 늘어나고 있다.

신학을 해서 꿰는 게 아니라 평신도부터 사역자에 이르기까지 성경으로 꿰어 상담하며 기도하며 이런 성령을 말씀을 전하는 증인들이 날로 날로 많아지고 있다.

우리 모두 성령 받아서 성령의 설교와 말씀만 전하게 될 때 내 삶과 내 말의 군더더기 없어지고 집이고 교회고 나라고 성령의 역사가 이루어질 것을 믿는다.

 

<Epilogue>

 

성령의 설교는 잘 들리게 한다.

그리고 권능과 기사와 표적의 삶으로 말씀의 표적으로 잘 살게 한다.

잘 사는 것은 잘 죽게 한다.

잘 죽어지는 설교를 해야 한다.

그러려면 다시 살아나게 한다.

늘 간증의 순서가 이것이 들어가 간증을 해야 되는 것이다.

전부다 와서 말씀이 안 들렸다가 들렸다고 하지 않나?

말씀이 들리는 게 성령이 임해서 깨달아지는 거 아니겠는가?

그럼 여러분들을 높아지게 한다.

자신에 대해서 잘 죽어지고 밑바닥으로 보며 절망할 때 부활을 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 가장 핵심은 예수님의 부활이다.

이 기쁜 소식을 온 세상 전하시는 여러분이 되길 축원한다.

 

 

 

Posted by 윤강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