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과 마음씀2019. 8. 20. 15:00

[우리들교회 2019 818일 주일말씀(왕상 22 29절로 40절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

 

 

<Prologue>

 

오늘 말씀은 흉한 말씀도 길한 말씀도 여호와의 말씀이면 믿어도 안 믿어도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5:18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 점 일 획도 결코 없어지기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우리가 날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적용하려고 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잘 하는 일이며 대박 맞는 인생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는 것은 천하를 얻은 것과 같은 일이다

그러나 교회를 다니면서도 천하를 가지 못한 사람이 너무도 많은 데 그 또한 너무 안타깝다

안 듣고 안 들으니 참을 만큼 참으신 하나님께서는 이미 예고하신 아합을 심판하신다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에 그래서 심판에 대하여 오늘 생각해 보겠다

 

1.   변장을 해도 말씀과 같이 되었다.

 

29절 길르앗 라못(Gilead Ramoth)으로 올라갔다.

지난 주 20 21절 말씀처럼 아합은 거짓의 영에 꾀임을 받고 자기 욕심으로 스스로 팔려가는 영적 장애자였다

그런 사람 옆에는 최고라고 해주는 이세벨(Jezebel)이나 거짓 선지자들이 연호를 한다

세력과 돈이 있으면서 자기 중심 성이 강한 사람은 한 마디라도 반대를 하는 사람과는 놀지를 않는다

자기 생각에 이미 두 차례나 아람과의 전쟁에서 이긴 경험이 있고 이번에는 백 만 대군의 막강한 군사력을 갖춘 형제나라 여호사밧의 지원까지 얻었다

남북이 연합했으니 명분까지 있어 보인다

그러니 아무리 생각해도 미가야를 통해 하나님의 경고가 귀에 들어 올 리가 없는 것이다

바꿔 생각하면 정말 그럴 것 같다

명분이 있어도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한 싸움은 하지 말아야 할 때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다들 모르지만 아합의 욕심으로 길르앗 라못(Gilead Ramoth)으로 올라 간 것이다

세상은 욕심이 전공이니까 이런 것을 분별하지 못한다

아합이 마지막이 다가오는 것만큼 29절에 북 이스라엘의 왕인 아합의 이름은 언급이 되지 않고 남 유다의 왕이 여호사밧의 이름만이 언급이 된다

31절에는 아람 왕, 이스라엘 왕처럼 이름 없이 불리는 것처럼 믿는 아합이 이방인의 왕같이 똑같이 여겨진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는 마지막까지 아합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시고 네가 이방의 왕과 똑같이 하면 안 된다라는 메시지를 계속 날리시고 계신 것이다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말씀대로 결정을 해야 하는 나라이고 제사장 나라다

모든 조건을 갖춘 것 같아도 마지막 하나님의 사인(sign)이 없으면 안 해야 된다는 것을 가르치셔야 된다는 것이다

아합의 본문으로 우리에게도 가르쳐야 된다

그래서 이 전쟁을 치르게 하시는 것이다

여호와께 묻는 것을 22장에서 길게 다루는 것을 읽었다

그래서 400명에게 묻고 미가야에게 물었어도 아합은 들을 마음이 전혀 없었다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된다.

목장에서 처방할 때 들으면 하나님은 기쁨을 이기지 못하셔서 믿음도 주시고 재물도 주시는 것을 많이 보게 된다

듣는 것이 어렵다.

묻고 그대로 행하려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묻고 가면 말씀대로 된다.

아합은 물었지만 듣지 않고 자기 고집대로 간다.

30절 변장해서 전쟁터로 간다.

여호사밧(Jehoshaphat)에게 총 지휘를 맡기는 체 하면서도 미가야의 예언이 마음에 걸려서 여호사밧에게 왕복을 입힌다.

모든 것을 다 가져도 회개하지 않으면 등골이 서늘한 것이다

하나님이 활을 당기시고 계시기 때문에 아합은 거짓의 영이 욕심으로 들어와서 지금 꾀임을 받는다.

아합은 여호사밧도 변장시키고 자기도 변장하고 엄청난 계략을 짰다고 생각하였다.

이 전쟁은 이겨도 져도 괜찮은 것으로 이기면 길르앗 라못을 얻을 것이고 변장을 해서 보낸 여호사밧이 죽으면 유다도 접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아합이 만든 완벽한 계획인데 자기가 죽는 생각은 안 한다.

자기는 병사로 변장하였기 때문이다.

여호사밧에게 명령형으로 입으라 하였다.

여호사밧이 이 꾀를 못 읽어서 아합의 왕복을 입었을까?

미가야의 예언을 같이 들었는데 그릇된 긍휼로 들어줬을까?

아합이 죽는다고 했지 여호사밧 자신이 죽는다고 안 했기 때문에 여호사밧이 또 사람이 좋아서 여호와의 선지자를 찾을 만큼 영적인 그가 아합에게 끌려가다 보니 이제 와서 전쟁 못하겠다 할 수도 없고 한번 꾀면 자꾸 물려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믿음이 좋아도 참 선지자 미가야의 예언을 듣지 않고 아합과 같이 나갈 수 있게 됨을 보게 된다.

믿음 좋은 여호사밧도 이렇게 나갈 수가 있구나 를 보며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아님을 알게 된다.

아합과는 사돈간이기 때문에 믿고 싶었고 그 당시 그 대단한 아람을 두 번이나 물리친 것이 팩트이기 때문에 믿고 싶은 것이 있다.

분별은 못하였지만 묻고자 하는 여호사밧의 연약함을 감싸 안으신 것 같다.

그래도 미가야가 자기가 홀로 고생의 떡과 물을 먹을 감옥에 갔고 마지막 보류가 여호사밧 한 사람인데 아합과 같이 가는 것을 보고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어떻게 여호사밧이 미가야의 말을 안 듣고 아합과 같이 나갈 수 있을까 ?

여호사밧이 말씀의 위력을 몰랐을까?

여호사밧이 그때는 개혁을 해도 거기까지였나 보다

아합과 여호사밧은 믿음의 분량이 달라서 똑같이 나가도 하나님은 둘을 다르게 대해 주신다.

아합은 이렇게 변장을 해도 심판의 예언의 말씀과 같이 죽게 된다.

말도 감정도 옷도 자리도 다 변장을 하고 아비마귀에서 난 자가 무엇이든 변장을 못하겠나?

여호사밧도 아합에게 넘어간 변장이 오직 말씀으로 정공법으로 나가야 한다

우리가 살길은 항상 정공법이며 변장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여호와 선지자에게 물었던 그가 전쟁에 가지 않겠다고 말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나는 당신의 백성과 같고 등 운명 공동체라고 아합이 약속했기 때문에 끌려갔을 것이다.

다 듣고도 아합과 한 편을 먹는다.

아합과 사돈이기도 하고 32개 연합 왕을 이긴 아합이기도 해서 믿음이 좋아도 분별이 어려울 수 있다.

묻고자 한 여호사밧을 마음을 좋게 보셔서 살려주셨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미가야가 고생의 떡과 물을 먹고 마시면서 고독했을 것이다.

미가야와 여호사밧의 믿음의 분량이 다르기 때문에 다르게 사용하신다.

다 변장을 한다.

외모를 변장하고, 인격을 변장하고, 이기기 위해서 아비 마귀에서 난 사람이 무엇이든지 변장할 수 있다.

 

(적용)

-여러분이 이기기 위해서 변장하는 것은 무엇인가?

-사랑하는 척, 배운 척, 예쁜 척, 아는 척 중에서 어디에서 변장을 하고 있나?

 

2. 병거를 의지해도 말씀과 같이 되었다.

 

31절 병거의 지휘관들이 오직 이스라엘 왕과 싸우라 한지라.

아합은 나가지 말라고 했지만 고집을 부리며 변장까지 하여 나갔다.

그런데 아합은 뭐가 그렇게 자신이 있어서 나갈까?

성경보라고 눈이 있는 것이다.

아합이 죽기 직전인데 눈에 띄는 단어가 있다. 바로 "병거".

그 당시 병거(chariot)는 지금의 미사일이나 탱크 같은 최고의 무기로 아람왕은 그런 대단한 무기를 다룰 줄 아는 지휘관 32명에게 특별명령을 내리며 이스라엘 왕만 죽이라고 한다.

이 사람들은 정예부대의 특공대로써 2번의 전쟁에서 지고 특수훈련을 시킨 것이다.

아합이 끝까지 병거를 하나님보다 위에 두고 미가야의 예언을 무시하였지만 입이 벌어질 정도로 그 병거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지휘관들이 32명이 있는 것을 보았고 그 지휘관들이 이스라엘 왕만 노리며 달려들었다.

그런데 이 병거를 마지막까지 하나님자리에 두었던 아합은 병거 타령만 하다가 그 병거 사이에서 죽었다.

돈돈돈 하다가 돈에 파 묻혀 죽는다

그런데 그 노련한 병거의 지휘관에게서 죽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 많은 죄에도 회개만 하면 받아줄 태세를 갖추고 계셨는데 마지막까지 아합이 병거를 하나님자리에 두었다고 하신다

아합의 가장 큰 죄는 이것이다.

그 동안의 실수는 아합의 겸비함으로 용서해주셨다.

전쟁 없는 동안 회개하고 돌아온 것이 아니라 그가 끝까지 믿은 것이 병거라는 것이다.

(Job)은 사탄과의 전쟁에서 이겼는데 아합은 사탄이 이긴 것 같다.

그를 병거가 최고라는 거짓말의 영으로 꾀었는데 아합이 아무리 하나님께서 막고자 하셔도 넘어가서 심판을 받게 되었다.

죽기직전까지 병거 얘기만 나오고 있다.

아합은 그릇된 긍휼로 벤나닷을 놓아주었기 때문에 그 벤나닷의 의해서 죽게 되었다.

사탄을 우습게 보면 사탄의 밥이 된다.

아합은 벤나닷이 얼마나 자기에게 목숨을 구걸했는지 그것만 기억하였다.

벤하닷이 살아 남기 위해 형제여!’하면서 구걸 한 것을 믿는다

이런 것에 속으면 안 되는 것이다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다.

여러분이 나에게 잘해 준다고 무서워한다면 설교를 하겠나?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고 구원의 대상이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적용)

-여러분이 의지하여 자다가도 부르는 병거는 무엇인가?

-죽기 직전까지도 못 내려놓는 병거는 무엇일까?

 

이제 대단한 정예부대의 훈련을 받은 32명의 장수들이 아합의 왕복을 입은 여호사밧 한 사람을 향해 달려들 때 살아날 자가 누가 있겠나?  100%죽는 것이다.

그런데 여호사밧이 일촉즉발의 순간에 소리를 질렀다. 무슨 소리를 질렀을까?

여호사밧이 아합은 일반 병사 군복으로 변장 했다라고 했을까?

여호사밧은 그랬을 것 같지 않다.

소리 지르다는 절박한 상황에서 도움을 요청하는 간절한 외침을 의미 한다.

병행구절이 역대하에 있는데 여호와께서 그를 도우시며 하나님이 그들을 감동시키사 그를 떠나가게 하셨다는 것이다.

여호사밧은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에서 하나님께 기도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러니까 표적이 되면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는 것이다.

내가 이들보다 전략이 더 있겠나? 뭐가 더 있겠나?

홀로 서있는데 여호사밧은 그냥 아합이 입혀주는 대로 입고 나갔다가 죽을 일만 남았는데 여호와께서 그 정예부대를 감동시켜 그들을 꾀어 내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여호사밧이 자기들의 표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일촉즉발에 어떻게 깨달았을까?

여호사밧이 주여!’ 한마디를 하였는데 그 소리가 남쪽나라 말인 것이다.

평안도 사람이 제주도 말로 주여!’를 무엇이라고 할까?

주여!’라고 한마디를 해도 알아차릴 수 있다.

그래서 그 한마디를 해도 감동시켜서 눈치챌 수 있고 두 번 전쟁을 통해 아합을 알아 보았을 수 있고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다.

이런 감동 시키심도 있다.

내가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주님을 불러야 한다.

예수 믿는 사람은 주여! 내가 연약합니다가 찬송이 되어야 한다.

내가 할 수 있다는 말이 안 되는 것이고 내가 할 수 없다라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을 불러야 된다.

여호사밧이 경솔히 아합과 전쟁을 나가는 실수를 저질렀지만 마지막에 주여!’ 를 외쳐서 하나님께서는 그를 사랑하셔서 돕고 지켜주신 것이다.

남편이 갈 때 나만 안타깝지 아무도 안타까워하지 않아서 마지막에 소리를 지른 여호사밧처럼 병상에서 주여!’ 나를 도와주옵소서하는 외침을 들으셨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아합은 주여!’를 안 한다. 잘났기 때문이다.

자기가 너무 우상단지를 섬기고 있기 때문에 우상단지를 섬기고 있다는 것조차 인식을 못할 정도로 부유해졌다.

하나님 없이도 척하면 병거가 있고 정원이 나오고 하니 마음이 너무 부유해져서 하나님을 부르는 것을 잊어버렸다.

어쨌든 여호사밧은 아합처럼 사악한 자와 짝하여 전쟁에 동행하여 위기를 겪어 죽다 살아났으나 아합같이 사악한 자와 짝한 것이 성경에 반면교사로 언급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신앙생활은 우리도 성도들과 함께 하지만 일상생활은 세상사람과 함께 하는 것이 너무나 즐거워 세상과 짝하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한다.

사업이나 결혼 등 우리는 복음의 증거를 위해서 세상과 잘 지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의 죄악에는 단호한 자세로 심판이 임할 때는 그들과 같은 모습으로 심판 받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불신결혼, 이혼 등을 막는 곳에는 단호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다 죽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적용)

-여러분은 급할 때 무슨 소리를 지르겠나? "주여~"

 

여호사밧의 부르짖음 이후에 아합의 계획이 될 것 같다가 마지막에 심판의 화살이 아합을 향하게 된다.

 

3.   무심코 당한 일도 말씀과 같이 되었다.

 

무심코(at random)란 한글개혁에서는 우연히로 되어있는데 원어에는 흠이 없는, 완벽한 상태라는 뜻이다.

무심코 한 것이 하나님의 완벽한 세팅이라는 것이다.

한 병사가 아합을 죽이려는 특별한 목적이 없이 활을 우연히 다 쏘았는데 맞췄다.

그 화살을 막기 위한 보호장치가 있는 병거를 타고 아합이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데 아합의 갑옷과 갑옷을 이어주는 솔기(between the joints of armor)의 틈새를 맞추는 것은 제로의 가까운 확률인데 이 무심코 쏜 화살이 하나님의 흠이 없는 완벽한 세팅인 것이다.

이 세상의 우연은 없다는 것이다.

우연히 누군가를 만난 것 같아도 심판도 구원도 하나님의 흠 없는 온전하심의 결과라는 것이다

우연히 이 직장에 간 것 같아도 우연과 같은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완벽한 세팅이라는 것이다.

잘못 만났다고 아무리 외쳐대도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다는 것이 여호와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냐 순종하지 않냐는 자유의지지만 그에 따른 구원도 심판도 하나님의 흠 없는 온전하심 이라는 것이다.

심각한 부상을 입은 아합은 심장을 맞았으면 즉사하지만 팔다리를 맞으면 상처가 별로 없어서 죽지도 않는데 피가 계속 흘러나와서 하루 동안 살 수 있는 상처의 화살을 쏜 것이다.

그때 생각을 많이 하였을 것 같다.

전쟁이 맹렬하여 나올 수 없던 것이 우연이 아니다.

그 피가 병거 바닥에 고인 것은 아합의 죽음을 비참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화살을 맞아도 피를 흘려가면서도 강퍅한 마음이기에 회개가 안 되는데 같다.

여호사밧의 주여! 가 아합에게는 안 되는 것이다.

전쟁에 나가기 전에는 되는 일만 있다가 안 나가야 하는 전쟁터에 나가서는 되는 일이 없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성실하심이다.

아합은 죽어가면서 나봇을 생각하였을까?

일반병사 옷을 입은 아합이 죽었는데도 백성들의 전의가 딱 없어진다.

아합의 전쟁독려가 백성들에게는 고통을 준 것으로 전쟁의 목적이 아합의 죽임인 것 같다.

목적이 달성되자 전쟁이 끝났다고 하는 것 같다.

라못을 탈환하고 안하고는 상관이 없이 백성들이 평안히 돌아가는 것이 미가야의 말씀대로 되었다.

이렇게 말씀을 이루는 인생이 되어야 하는데 아합이 죽으니 전부 다 본향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한 사람이 죽어서 본향이 되는데 한 사람이 죽어서 많은 사람이 한 사람의 순종으로 의로 이끌고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멸망으로 이끈다고 하였는데 여기서는 죽어서 다른 사람이 편안하게 되는 인생은 되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

나 한 사람이 죽어서 열매 맺는 것과는 다른 것으로 아합이 죽어서 백성들이 편안하게 되었다.

똑같이 죽어도 영육간의 죽음이 다른 것 같다.

(적용)

- 우연히 무심코 재수가 없어서 만났다고 아직도 원망하나? 아니면 이것은 완벽한 하나님의 성실하심이라고 생각하나?

-우연히 만났다고 아직도 원망하나?

 

4.   개들이 피를 핥아도 말씀과 같이 된 것이다.

 

아합은 심판하셨고 아합의 시신이 돌아왔다.

전쟁에서 최고의 전리품은 상대국의 왕이나 장군이기 때문에 아합이 왕복을 입고 있었으면 시신이 못 돌아왔을 뻔했으나 일반병사로 위장한 것은 아합이 살기 위해 꾀를 낸 것이지만 이 꾀도 하나님께서 시신을 가져올 수 있는 것으로 바꾸셨다.

아합만 심판하시고 이스라엘은 지키셨다.

말씀대로 된 것이 얼마나 대박 맞은 인생인지 모른다.

내가 믿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해주시는 것이 있다.

창기들이 목욕하는 곳은 일종의 공공장소였다고 하는데 아합이 돌아왔지만 이세벨과 400명의 선지자 백성들이 사마리아 못에서 개들이 피를 핥아먹는 것을 보게 되어서 이 말씀을 전율하면서 들었을 것이다.

그 들이 지켜보는 그 모습 속에 ‘(1)아합이 벤하닷의 목숨을 대신하리라 (2)이스라엘이 목자 없는 양같이 흩어지리라 (3)아합의 피를 개들이 핥으리라 3가지 예언이 동시에 이루어져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예언한 선지자들이 옳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다.

그렇게도 왕을 세워달라고 하더니 세운 것이 얼마나 불행인지를 알게 된다.

이스라엘에서 오무리 왕조 아합의 아버지부터 아합왕 시대는 최고의 번영의 시대를 보냈는데 최고의 정치를 잘한 왕이지만 아합의 숱한 죄악이 16장부터 쭉 나오는데 19장 빼고 6장에 걸쳐 나오고 그 많은 아합의 죄악 중에 치적은 딱 한 줄 나온다. ‘ 정치는 잘하였다.

그런데 하나님의 평가는 인간들의 평가와 얼마나 다른지를 보여준다.

그가 행한 일은 상아 궁 건축 등 밖에 없다.

아합이 말씀대로 심판을 받았음에도 조상들이 함께 잤다’(He rested with his fathers)에서 함께 잤다는 이 말이 천국에 갔다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생각해보면 우리가 성경을 처음부터 읽는 것이 중요하다.

이스라엘 왕들 중에 나답, 엘라, 시므리 같은 왕은 조상들과 함께 잤다는 말이 없다.

북 이스라엘에는 선한 왕이 하나도 없다.

반역의 왕조로 시작을 하였기 때문인데 그 왕들 중에도 조상들과 자는 왕들이 몇 명 있다

그것이 무엇을 뜻할까?

그나마 아합은 이방의 왕들과는 가치관이 근본이 다르기 때문이 아닐까?

이방 왕들은 왕으로써 가책이 하나도 없다.

권세 있으면 가지고 싶은 것 다 가지고 죽이면 되기 때문이다.

아합은 미가야를 미워하지만 늘 흉한 일을 듣고 물어보고 열렬히 미워한다.

나봇의 포도원 때문에, 말씀 때문에, 일국의 대왕이 근심하고 식음을 전폐한다.

다른 나라 왕 같으면 이거 근심하겠나? 그래서 이렇게 독재를 하는 것이다.

엘리아의 말대로 바알선지자 850명을 데려오라니깐 데려와서 엘리아가 다 죽여버렸고 벤 하닷과 싸울 때 이름없는 선지자가 와서 야단을 치고 그 하나님의 선지자를 통해서 도움을 받았다.

엘리아에게 가뭄이 있으리라는 흉한 일로 예언을 받았다.

마음고생이 심해 엘리아가 보기만 하면 자기를 욕을 해 가뭄이 있으리라’ ‘네가 죽으리라등만 이야기 하니 죽여버리고 싶지 않을까?

살면서 엘리아를 가장 괴롭혔다는 것은 엘리아를 가장 불세출의 선지자로 자리매김하는 데에 가장 수고한 공로자 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나라로, 제사장의 나라로 이 땅에서 잘살게 하셔야 하는 것이다.

못살 때도 있지만 예수가 들어가면 그 나라 전체가 잘살게 된다

개인보다 이스라엘나라를 잘살게 해야 하는데 그러면 아합도 잘살게 되는 것이다

아합의 악은 막아야 하고 하나님 나라의 정체성이 생기는 데에는 시간이 걸리고 사람은 부할수록 거짓아비마귀에게 속하기 때문에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는 것보다 믿음 가지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나라는 잘 살아야 되는데 아합이 점점 부자가 되니까 말씀을 안 듣는 것이다

계속 선지자를 보내시고 끝없이 말씀을 하시지만 안 되는 아합을 보면서 이 하나님나라의 가치관으로 사는 것이 너무 힘든 것을 알 수 있다

그 역할모델을 아합이 한 것이니 아합이 너무 수고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아합도 불쌍하고 하나님도 불쌍하고 아합도 너무 수고를 하고 하나님 나라는 구별된 나라인데 구별되게 살기가 어려운 것이다

이 세상에서는 왕족과 결혼하는 것에 대하여 너무 성공했다고 하는데 아합에게는 불신결혼 해서 망했다고 하고 이 세상에서 누가 이것을 가지고 흉한소리를 듣겠나?

쓸데없는 포도밭은 왜 가져서 심판 받냐고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아합이 너무 부럽기 때문에 악한 역할을 해주는 아합이 있어야 반면교사 삼아서 이 길을 안가는 것이다.

아합이 너무 이해되지 않나?

우리가 다 아합인 것이다.

6장에나 아합이 등장한 것은 아합은 나쁜 놈이다가 아니다.

여호와께서 계속 아합을 보고 계시다라고 하였다.

이세벨에게는 그런 말 안 하셨다.

벤 하닷왕과는 완전히 종류가 다른 왕이다.

벤 하닷은 못 알아먹는다

하나님은 아합을 계속 호호 불어가시면서 마지막까지 보셨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심판을 비참하게 당하게 하셔서 이렇게 살면 이렇게 된다는 모델을 보여주시고 말씀의 성취를 보여주셨기 때문에 마지막에 피도 알맞게 흘리게 하셔서 하루 종일 나라를 위해 싸울 수 있는 역할을 주시고 마지막에 회개하지 않았을까?

이 땅에서 이렇게 심판을 받았기 때문에 내가 아합의 입장이라면 말씀이 들렸을까?

전쟁 없이 3년이 있어도 아합이 심판의 길로 가는데 조금 편하다고 우리는 다 과거를 잊어버린다.

 

(적용)

-그래도 예수 믿는 사람이 최고인가? 아니면 안 믿어도 착하면 돼, 공부 잘하면 돼 라며 행함이 최고인가?

 

<Epilgue>

 

850명 데리고 오라고 하면 데리고 오고 그들을 죽인 엘리아를 가만두고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데도 너무 안 되는 것이다.

돈이 있고 권세가 있으니 너무 안 되는 것이어서 성경을 구속사적으로 읽고 인간의 대한 이해가 있어야 되는 것이다.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는 변장을 하여도 말씀과 같이 되고 병거를 의지해도 말씀과 같이 되고 무심코 당한 일도 말씀과 같이 되고 개가 피를 핥아도 말씀과 같이 되었다고 한다

말씀과 같이 되었다는 아합이 죽었다는 것으로 우리는 말씀과 같이 구원받을 수가 있는데 마지막에 실낱과 같은 소망을 얻어야 되지 않을까?

나는 아합보다 나은 것이 하나도 없으며 아합이니까 그래도 이 정도로 살았던 것이고, 아합이니까 이렇게 하나님께 여쭸다가 이해가 되고 회개가 된다.

구속사로 성경을 보지 않으면 옳고 그름으로 성경을 보는 것이다.

우리는 너무 연약하다.

 

 

 

 

Posted by 윤강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