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교회 2021년 8월8일 주일예배 말씀 요약(사도행전 15:1~ 11/ 주 예수의 은혜로 /심한섭 목사)]
<사도행전 15: 1 ~ 11절>
1절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2절 바울 및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의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
3절 그들이 교회의 전송을 받고 베니게와 사마리아로 다니며 이방인들이 주께 돌아온 일을 말하여 형제들을 다 크게 기쁘게 하더라
4절 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하매
5절 바리새파 중에 어떤 믿는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6절 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
7절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8절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언하시고
9절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
10절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11절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Prologue>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은혜로 쓸모 없는 저를 잊지 않으시고 은혜로 이 자리에 세우셔서 저 같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부족한 저를 세우셨으니 주님께서 말씀하여 주시옵소서 듣겠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죄송합니다. 바울이 너무나도 사랑했던 에베소의 편지에 보내신 것을 아실 것입니다. 그 편지에 인사말을 인용해서 제가 너무나 사랑했던 여러분께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우리들교회 성도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정말 바울이 에베소를 생각하는 그런 마음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여러분 얼굴을 떠올리면서 설교를 적었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보이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보이시죠. 예.. 너무 보고 싶었습니다. 심한섭 목사입니다. 오늘 본문은 목사님께서 구원의 확신과 구원의 의논이라는 두 번의 설교로 나누어서 말씀을 전해 주셨는데 저는 오늘 목사님께 그동안 평생 양육을 받아온 제자 입장에서 우리들 교회에 공동체였던 사람으로서 오늘 본문을 조금 자세한 설명은 목사님이 해 주셨기에 어떤 율법과 행위에 대한 은혜에 대한 이야기로 재구성해서 전하겠습니다. 미국에서 공부한 것을 설명 드리겠습니다. 잘난 척을 하겠습니다. 구원은 이미 받은 구원과 우리가 받아야 할 구원 이렇게 두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이미 값없이 우리에게 준 구원을 ‘칭의’라고 합니다. 우리를 의롭게 칭하였다고 합니다.
이루어가야 할 구원의 여정 이것을 ‘聖化’라고 부릅니다. 풀어서 설명하면 예수를 믿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자임과 동시에 여전히 되었다 함이 없는 그런 인생 속에서 거룩이 됨을 소망하면서 계속해서 걸어가야 하는 과정 속에 있습니다. 이것을 聖化라고 합니다. 거룩하게 되는 의미입니다. 이미 구원을 받은 성도 모두가 저와 여러분 모두가 여전히 계속 가야 할 길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들 교회가 역사를 가졌다고 말할 만큼 긴 시간의 교회가 되었습니다. 휘문고 강당에서 예배를 드리던 2006년 부활주일, 오랜 방황에 마침표를 찍으며 이승민 목사님으로부터 목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중 고등부 청년부 스텝으로 목자로 부목자로 그리고 분당 채플의 간사로 유년부 전도사로 지금은 사라진 주얼리 스쿨의 사역자로 섬겼습니다. 제1회 큐티 페스티벌을 했었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열정적이고 젊었던 날들을 형제와 같은 지체들과 함께 보냈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수백 명 수천 명의 교회성도 분들이 마치 하나의 몸인 것처럼 우리들 교회는 하나 되어서 움직였습니다.
제가 느끼기에 어떤 분도 교회의 일을 노동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한 번의 예배를 위해서 자기 일처럼 헌신했습니다. 휘문고등학교에서 예배드릴 때 더운 강당에서 예배를 세팅해서 김승조 집사님을 포함해서 여러 집사님들이 헌신해 주셨습니다. 누구보다 수고했던 실장님이 되신 전선규 간사님과 스태프 분들 더운 강당에서 무거운 스피커와 악기들을 옮기면서 섬기던 우리 박종률 집사님과 찬양 팀 수련회를 위해서 자신의 시간과 삶을 헌신했던 유병철 집사님과 형제자매들 손과 발이 가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던 고난의 투성이였지만 모든 부서에 아이들의 구원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들 헌신하셨던 부장 집사님들과 선생님들 스태프 분들 어린아이들의 구원을 위해서 교회에서 밤을 새워서 큐티 페스티벌과 행사들을 주관했던 사실 엄청난 인재들이었지만 밤낮으로 수고해 주셨던 관계자분들 교회 사무실에서 온갖 행정 일들을 처리하던 간사님들 지금까지 이름도 빛도 없이 섬겨주신 집사님들 무엇보다 저와 함께했던 너무나도 사랑했던 목원들 여러분 모두와 함께했던 시간을 교회에 떠나있던 7년 동안 단 한순간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그 당시에 우리들 한 명 한 명이 각자의 자리에서 우리들교회 였습니다. 우리들이 이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살고자 찾아왔던 교회에서 생명을 경험했고 소망을 맛보았습니다. 나의 인생을, 사람 살리는 인생이 되도록 변화시킨 하나님의 은혜를 예수의 은혜를 구원을 우리는 모두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서 살아남의 흔적 열매와 간증이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을 목적으로 구속사의 가치관으로 양육해 주시는 담임목사님의 설교를 반복적으로 들었습니다. 출근할 대 퇴근할 때 밥을 먹을 때 화장실에서 그리고 잠을 잘 때도 우리는 말씀을 듣고 사모하며 변화되기를 소망하며 양 떼와 같았습니다.
복음의 능력이 우리를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경험하게 한 공동체가 되게 해주었습니다. 우리는 수치와 제패를 알고 있었고 서로를 정죄하지 않았습니다. 서로에 대한 조언과 필요한 처방을 했지만 우리는 그 누구에게도 공격적 폭력적이지 않았습니다 서로가 더욱 힘든 일을 자처해 왔습니다. 교회의 일이라면 언제나 기꺼이 한 걸음에 어디서든 교회로 달려오고 했습니다. 자기의 죄를 생각하며 회개했고 독사의 자식이라고 정죄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주님의 몸 된 교회 안에서 각자의 지체가 되어 서로를 형제라고 부르며 다음 목사님과 여러 전도사님과 같은 분들에게 양육을 받으며 예수님의 제자들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믿음을 가지고 아름다운 섬김을 나눈 우리들에게 여전히 양육이 필요함을 이야기합니다. 이미 구원의 은혜를 경험했지만 가야 할 성화의 길, 아직도 되어야 할 길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성장하고 자라나야 할 이유들을 말씀해 주십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누구보다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맛보았고 목격했으며 경험했습니다.
어느 교회보다 많은 간증을 경험했고 살아났습니다. 엄청난 자부심과 자산이 마음속에 있습니다. 우리와 같은 사람이 본문에 등장합니다. 사도와 장로들입니다. 이들을 예수님과 함께 살았습니다. 누구보다 영적인 자부심 있는 사람들, 공의회 멤버들이었습니다. 본문에서는 아직도 되었다함이 없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을 묵상하며 여러분과 저와 우리들 교회가 생각났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어느 부류의 속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성화의 길을 끝까지 걸어가기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 같습니다. 구원의 은혜를 경험하고 어느 정도 원리와 신앙의 그런 것들을 깨달아서 이 집사님은 이렇구나, 저렇구나, 이렇게 알 수 있는 것 같은데 이분은 믿음이 있구나 이분은 믿음이 없구나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목자-권찰-초원-평원으로 섬기시면서 내가 이 정도면 믿음도 있고 된 것 같고 말씀 들으면 그런 것 같은데 왜 우리는 양육을 받아야 합니까?
오늘 본문을 통해서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는 우리들에게 그 이유를 설명해 주십니다.
<말씀 요약>
1. 여전히 율법과 행위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1절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2절 바울 및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의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
지금 읽은 구절을 보면 안디옥교회 안에 다툼과 변론이 있습니다. 구원에 관한 문제였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어떤 사람들과 논쟁을 벌였습니다. 이들의 요지는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이것이 요지입니다.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 행위의 증표 없이는 인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할례를 받으면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본래 선한 것입니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구별된 살도록 요구하신 하나님의 완전하고 거룩하신 법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고 알게 하고 무엇이 올바른 지 보여줍니다. 존 칼빈은 율법은 우리들의 삶을 인도하는 안내하는 규범과 같은 역할을 강조했습니다. 예수께서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것이지 패하러 오신 것입니다. 삶의 방향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선하고 좋은 율법이 행위로서 우리의 구원까지 이어질 수 없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죄인인 우리 인간은 율법을 완성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죗값을 대신 치름으로써 율법을 완성시켜 주셨습니다. 행위를 성취하는 방식으로 얻어지지 않습니다. 율법은 인간이 행해야 하는 일을 말해주고 은혜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행하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율법에 얽매여 있는 사람은 육의 것, 인간의 행위를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행위 한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행위를 통한 행위 구원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사실 지금 말씀드린 이야기가 모두에게 익숙한 이야기처럼 들려서 지루해 할 수도 있습니다. 행위와 은혜는 참 뻔한 것 같은 이유는 2천 년 역사에 정말 오랫동안 많은 논쟁거리가 되어 왔고 다툼이 있는 주제입니다. 행위와 은혜는 미묘한 관계에 놓여있어서 우리 자신도 모르게 행위와 율법에 얽매이는 것이 많습니다. 두 가지 정도로 설명 드리겠습니다. 순서가 중요합니다.
첫 번째는 행위와 은혜를 이해할 때 그 순서가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아 제가 17년 만에 이 자리에 여러분 앞에 서서 여러분 참 뭐 저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궁금하신 것도 많으실 텐데. 제 얘기를 다 하자면 이제 오늘 밤을 새야 되니까 제 아내가 이제 그 교회를 나가서 이제 그 사이에 제가 결혼도 하고 목사 안수도 받고 미국도 가고 또 이제 여러 가지 일이 있지 않았습니까? 제 아내에 대해서는 여러분이 아는 바가 없으시겠죠. 예 그래서 제 아내는 이제 제가 결혼할 때 정말 너무나도 매력적이었던 것은 물론 이제 하얀 피부 이런 것도 참 매력적이었죠. 하얀 사람을 참 좋아합니다 죄송합니다. 하얀 것이 참 이게 이 행위를 뛰어넘지를 못해가지고요. 아직 그. 하여튼 하얗고 참 예쁘고 정말 이렇게 자세히 볼수록 더 예쁘고 막 그런 사람인데 근데 정말. 제가 이제 아내를 좋아했던 이유는 무엇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이 저에게 정말 매력적이었고 정말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결혼을 하고 바로 미국에 갔거든요. 미국에 가서 살다 보니까 미국에서 한국이었으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가족이나 친지 분들께 도움을 청할 수도 있고 또 뭐 친구들이나 또 뭐 이렇게 여러 가지 주변에 사람들이 있지만 미국에 가서 보니까 이제 언어도. 한국 말처럼 그렇게 편하게 되지 않는 상황이기도 한 데다가 주변에 뭐 가족도 없고 친지 가까운 곳에 어떤 도움을 요청할 사람들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결혼을 해서 그래서 이제 미국에서 둘이 살다 보니까 하나님만 두려워하는 줄 알았던 아내가 세상 두려운 게 이제 너무 많은 사람인 겁니다. 두려움과 불안과 염려로 늘 걱정하고 마음을 조리고 뭘 하나 살 때도 막 수십 가지 사이트를 뒤져보고 부작용을 다 따져보고 염려하고 사람들이 올려놓은 후기를 읽어보고 그리고 나서 또 구매할까 말까 막 고민을 하고 다른 사람에게 어떤 말을 한마디 할 때도 이것저것 생각하는 게 너무 많아서 말 한마디도 쉽게 잘 못합니다. 막 이렇게 말을 하려다가 타이밍을 놓치고 물론 이제 그런 모습이 참 귀여워 보이기도 했고 좋게 보면 아 참 신중한 사람인가 봐. 뭐 이렇게 봤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제게 참 답답하게 느껴질 때가 있었어요. 저는 담임 목사님께 예전부터 두려움은 곧 욕심이다 이렇게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기 때문에 와이프 아내의 그런 행동들이. 두려움과 염려로 이렇게 차 있는 그런 행동들이 야, 저 사람 저거 욕심이 많구나. 이제 이렇게 생각을 하고 그 그러한 행동들이 고쳐 지기를 바랐습니다
한편, 제 아내는 불안과 두려움이 많은 반면에 저는 또 뭔가 제가 이렇게 저랑 예전에 이제 함께 사역해 보신 분들은 좀 아시겠지만 제가 뭔가 정해놓은 룰이나 어떤 기준이 딱 있으면 그게 어긋나는 일이 생기는 꼴을 잘 못 봅니다. 이제 강박적으로 그것에 이렇게 몰두해서 집착하고 막 그런 저만의 어떤 율법이 있습니다 그 율법으로 상대방을 옥죄고 이렇게 해야 된다라는 어떤 저만의 그런 아주 고약한 율법이 있습니다 ‘물건은 늘 제 자리에’. 이게 이제 제 인생의 주제가입니다 야 그런데 이제 하루는 이제 그런 저와 두려움쟁이인 제 아내와 이제 강박쟁이인 제가 미국에서 함께 사는데, 제 아내는 이제 부엌에서 요리를 할 때 이제 참 재미있는 습관이. 하나 있는데요. 이 부엌 찬장에 보면은 이제 왜 양념통 같은 거 집어넣는 이게 찬장이 있잖아요. 그러면은 이제 이런 거를 요리할 때 이제 그런 양념 같은 게 필요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제 와이프는. 찬장을 다 열고 요리를 해요. 찬장이 이렇게 쭉 있고 뭐 여기는 뭐 미림이 있고 뭐. 뭐 간장이 있고 설탕이 있고 이제 막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은 그 찬장 문을 다 열어놓고 온갖 양념을 다 꺼낸 다음에 요리를 해요 근데 이제 저는 어떻게 하냐 하면 간장을 꺼냈다가 바로 제 자리에 넣고 다시 닫고 또 필요하면 또 꺼냈다가 다시 넣고 또 닦고. 설탕이 필요하면 꺼냈다가 또 쓰고 다시 넣고 닫고 이렇게 해요 그럼 이제 제 아내는 다시 그 찬장을 다 열고 양념을 다 꺼내고 또 이제 요리를 하고 그러면 제가 이제 졸졸 따라다니면서 그걸 또 다 제자리에 놓고 또 찬장을 닫고 이렇게 합니다 그니까 저의 강박이 발동하면 이제 혈기가 올라오고 그러다가 한 번씩 터지면 그 혈기는 저의 터진 혈기가 아내의 두려움을 마주합니다 강박쟁이와 두려움쟁이가 마주치면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이제 강박쟁이는 바로 혈기쟁이로 둔갑을 하고요. 그리고 두려움 쟁이는 울보가 됩니다 강박쟁이는 끝까지 그 문제의 원인을 캐고 물어서 너는 왜 그렇게 하냐고. 너는 왜 그렇게 해야 되냐고 따지고 싶어 하고 두려움 쟁이는 그런 강박쟁이가 질려서 눈물을 흘리면서 자리를 회피하고 싶어 합니다. 저와 제 아내가 서로의 어떤 각자의 두려움과 강박이 해결되기를 바라고 있었지만 그렇지만 저희들의 그러한 행위로 드러나는 문제가 결국 은혜로 밖에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였음을 저희는 간과하고 있을 때가 있었습니다 저는 아내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를 경험하게 해줬어야 되는데 오히려 두려움이 많은 제 아내에게 강박과 혈기로, 제 아내를 율법으로 대할 때가 많아서 아내의 구원과 은혜를 더 멀어지게 만들곤 했습니다 눈으로 보여지는 것이 전부인 우리에게 우리 인간에게 율법과 행위라는 문제는 우리 삶에 아주 깊숙이 이런 식으로 아주 구체적인 곳에 들어와 있습니다. 매일매일 우리가 걸려서 넘어지는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우리가 머리로는 아 나는 율법적이지 않아. 그렇지 구원은 율법으로 행위로 얻어지는 게 아니지. 모두들 알고 계시겠지만 실상 여러분의 구체적인 삶을 들여다보시면 우리는 우리 자신도 모르게 매일매일 율법적이고 행위 구원적인 삶을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할례를 받으면 구원을 얻는다. 강박이 고쳐지면 예수를 잘 믿는 사람이다 두려움이 사라지면 믿음이 좋은 사람이다 중독이 끊어지면… 저희 아내가 찬장 문을 다 닫으면 큐티를 매일 하면 부지런해지면 열심히 살면 무언가 내 행위가 변화되면 다시 말해서 할례를 받으면 구원을 얻는다 라는 식의 율법과 행위의 굴레를 우리가 사실은 잘 벗어나지 못합니다 자녀를 양육하는 데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엄마 말을 잘 들으면 착한 아이죠 그죠.
숙제를 알아서 잘하면 훌륭한 아이입니다 노래도 있죠 산타 할아버지가 알고 계신데 누가 착한 앤지, 누가 나쁜 앤지, 그리고 오늘 그 오늘 밤에 그 심판이 이제 이루어집니다.
할아버지가 다녀가시면 ‘모든 세상이 하도 나쁘고’라는 율법과 행위의 굴레 안에서 돌아갑니다 그런데 여러분 제가 서두에 말씀드렸다시피 이 율법과 은혜에 서 그 미묘한 관계 속에 순서가 잘못되어 있는 것입니다 물론 행위를 올바르게 하는 건 너무 중요합니다 우리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 그런 문제들은 사실 거의 눈으로 보여지는 문제들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더 중요한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는 행위는 은혜의 뒤에 따라 옵니다.
우리 잠시 다 함께. 요한복음 15장 5절을 좀 읽어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5장 5절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라.
아멘
행위는 열매입니다. 사람이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가장 은혜로운 방식은. 포도나무인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은혜. 그 임재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은혜가 먼저고 행위는 나중입니다 이 순서를 자꾸만 우리가 거꾸로 하려고 합니다. 죄를 고백할 때 우리는 우선적으로 행위로 지은 죄를 생각합니다 그러면. 그리고 이제 막 그런 행위로 지은 죄에 대한 나눔들 또한 많이 합니다. 행위의 죄만을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어떠한 행위. 고치면 죄가 해결된다고 착각하기도 쉽습니다 음란을 행한 사람 또 도박을 한 사람 외도를 행한 사람. 중독에 빠진 사람. 또 혈기와 강박이 충천한 사람들 그리고 이런 모두가 우리가 이 행위를 고치는 것에 집중을 자꾸 합니다 행위가 끊어지면 믿음이 있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잘못된 것인 것처럼 말입니다 쉽게 말해서 알코올 중독이라는 행위를 끊었다고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되는 건 아닙니다 다른 방식으로 말씀드리면 술 중독 여자 중독. 도박 중독을 끊어내면 내 배우자가 밖에 나가서 착실하게 돈을 잘 벌어오면 내 배우자가 고분고분 내 말을 잘 들으면 다시 말해서 그 사람의 행위가 변화되면 그러면 그 사람이 예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사람이 할례를 받았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의 은혜를 경험하지 않고 행위만 바르고 의로운 사람이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정말 무서운 것입니다 순서가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행위의 변화가 우선이 되면 다른 구원이 됩니다. 다른 복음이 됩니다. 구원은 기본적으로부터 죄로부터의 구원입니다 따라서 행위의 구원을 생각하는 사람은 행위의 죄만을 생각합니다 하지만 은혜의 구원을 생각하는 사람만이 은혜를 떠난 모든 것이 되었음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제 와이프에게, 저희 아내에게 90세가 넘으신 할아버지가 계신데요. 이제 일평생 법조인으로 살아오셨기 때문에. 바르고 의로운 삶을 사셨다고 스스로 생각을 하십니다. 한국에 와서 기회가 될 때마다 와이프와 함께 할아버님을 만나서 함께 예배를 드리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하루는 사도행전 3전에 3장에 성전 미문 앞에 앉아 있는 앉은뱅이 본문을 가지고 죄인에 대한 설명을 해드린 적이 있습니다. 보청기를 끼시고 구십 대가 좀 넘으신 할아버님께서 굉장히 해맑은 표정으로 그 죄인에 대한 설명 부분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죄인이라고 하시면서 이제 웃으셨습니다 어떻게 평생 법조인으로 바르게 살아오신 법을 지키면서 살아온 내가 죄인일 수 있는지 의아해 하셨습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 많은 분들이 지금 이 이야기를 들으시고 그래 안 믿는 분들이 그렇지 뭐. 이렇게 생각하실 겁니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우리의 이야기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종종 적용이라는 이름으로 행위 구원을 부추길 만한 말들을 또 꽤나 많이 합니다 요즘은 게임 안 하십니까. 요즘은 도박 안 하십니까 이제 술 끊으셨습니까. 이제 남편에게 잔소리 안 하십니까? 할례 받으셨습니까? 예수 없이 은혜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의 행위가 변화된다면 그것보다 또 무서운 것이 없습니다 만약에 여러분의 남편 분께서 예수의 은혜를 전혀 경험하지 못하셨는데. 술이 끊어지고 모든 행위가 올바르게 변하셨다면 그것이야말로 정말 병원에 가볼 일입니다.
우리는 항상 이 행위의 한계를 여전히 넘어서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는 율법의 테두리 안에서 이제 행위로 지켜야 할 것들을 지키지 못한 정말 대표적인 죄인입니다. 제가 행위로 지은 죄들은 정말 수도 없이 많습니다 악하고 이기적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저는 선교사였고 신학생이었으며 또 목회자인 순간에도 여전히 제 말과 행동으로 거짓과 음란을 끊임없이 일삼는 야곱 같은 죄인입니다 아마 지금 이 순간에도 저를 아시는 많은 분들 중에는 야, 심한섭이 설교를 한다’. ‘저 죄인이!’ 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많이 있을 겁니다 저는 우리들 교회에 정말 대표 죄인이었습니다
그렇게 제 삶의 행위를 생각하면 두 말 할 것도 없이 저는 이 자리에 서 있을 자격이 전혀 없습니다 지금도 가끔씩 제가 하나님께 지었던 죄를 생각하면. 자다가 잠을 깰 때가 있습니다 내 자신이. 너무나도 형편없는 죄인이었음에 몸서리가 쳐질 때가 있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은혜 때문에 제가 이 자리에 지금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제가 이 설교의 자리에 있기 때문에 은혜 받은 자라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제가 은혜 받은 자이기 때문에 이 설교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순서가 바뀌면 다른 복음이 됩니다. 저는 제가 받았던 죄인인 제가 받았던 그 은혜를 잃으면 바로 육체의 율법과 예전의 행위만을 강조하던 삶으로 돌아갑니다 제 안에 선한 것이 하나도 없어서. 은혜를 잊으면 아무리 노력을 해도 죄를 짓는 공장일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앞에 설교를 하며 이렇게 서 있지만. 저는 그저 끊임없이 죄를 짓는 강박쟁이일 뿐입니다 박사를 하고 공부를 하고 이제 어딘가에 설교하라고 저를 부르는 교회들도 생겼습니다 설교를 하러 가면 뒤에 강사 양력을 소개하면서 칼빈 박사 이렇게 써 놓습니다. 저를 소개할 때 하지만 저의 어떠한 학력과 보여지는 것으로 거룩한 척을 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속일 순 있어도 하나님 앞에서. 박사가 아니라 박사 할아버지를 하더라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이에 살 수 없는 사람인 것을 숨길 수가 없습니다 그 예수의 은혜가 아직 제가 죄인 되었을 때. 저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확정하신 그 예수의 은혜가 제 안에 있어서 오늘도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서 강박적인 제 모습을 고쳐달라고 기도합니다 은혜를 경험한 사람은 배우자의 구원을 위해 못할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담임 목사님과 어머님에게 삶으로 배워온 것입니다 상대방의 구원을 위해 목숨을 내어 놓는 것 내 모든 것을 다 해서 내 사랑하는 사람이 구원 받을 수 있다면. 그런 마음이 생기는 순간 상대방의 율법과 행위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이 순간에 또 헷갈리시면 안 됩니다. 상대방의 구원을 위해서 목숨을 내어놓기 때문에 은혜를 경험한 것이 아닙니다. 은혜를 경험했기 때문에 목숨을 내어 놓을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제 아내를 사랑한다고 주를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악한 행동을 다 끊어낸다고 주를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없이도 그렇게 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무서운 것입니다 순서가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예수를 사랑하는 것. 은혜를 사모하는 것. 그것이 우리 행위의 모든 행위의 이유가 되어야 합니다.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얻으면 할례 받은 자의 삶을 소망하게 됩니다
둘째로 율법은 인과 응보를 이야기합니다 할례를 받으면 구원받는다. 다시 말하면 무엇을 하면 복을 받고 안 하면 저주받는다 우리는 이것을 기복 신앙이라고 부르지만 세상은 이것을 합리적이라고 말합니다 세상은 이렇게 어떤 Give and Take의 원리로 작동됩니다. 내가 준 만큼 돌려받는 것 이것이 가장 합리적이고 또 이성적입니다 이러한 논리로 세상은 돌아갑니다 다시 말해서 할례를 받으면 구원을 받는 것이 논리적인 인과 관계입니다 율법은 인과관계이고 합리적인 논리로 설명이 되지만 그러한 인간의 논리성과 합리성은 은혜를 설명하기엔 너무나도 부족합니다 오랜 시간 목자로 섬기고 전도사도 전도사로도 섬기고 이제는 목사까지 되었지만 여전히 제 안에 이렇게 율법의 행위를 뛰어넘지 못하는 기복 신앙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제 아내가 이제 저에게 무언가를 부탁하거나 그럴 때 저도 모르게 마음속에서 자기는 뭘 해 줬나?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내가 아내에게 제가 아내를 위해서 이제 뭘 했을 때 뭔가 이렇게 제가 아내를 위해서 뭔가 수고를 했을 때 나는 이렇게까지 해주는데 쟤는 나를 위해서 뭘 해주지 이런 생색이 올라올 때가 있습니다. 내가 줬으면 받아야 되는 게 언뜻 보기에 합리적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기복신앙이고 율법입니다 우리가 예수로부터 받은 은혜는 전혀 합리적이지 않습니다
내가 예수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복을 받는 거라면 이 예배에 참석한 어느 누구도 복을 누릴 자격이 없습니다. 내가 준 만큼만 받는 것이라면 이 자리에 구원을 얻는 만큼. 하나님께 무언가를 드릴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은혜를 경험했으면서도 우리는 계속해서 부부 관계 속에서 또 자녀를 대할 때 율법으로 대하고 기복으로 대하고 그것을 논리와 합리라고 표현하며 드리댑니다 그리고 그렇게 율법과 인과관계를 들이대는 사람이 관계에서 승리합니다. 상대방으로 하여금 할 말이 없게 만듭니다 그렇게 우리는 이깁니다 이기고 또 이겨서. 내가 이만큼 했는데 너는 나에게 뭘 해줬지. 니가 해준 게 없으니 나도 해줄 게 없어. 이것이 세상이 승리하는 방식 율법의 행위의 방식입니다 나는 배우자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내 자녀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율법은 논리를 가지고 이기려고 하지만 은혜와 복음은 절대로 이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죽음으로 승리합니다
(적용#1)
-타인의 겉으로 보여지는 문제가 해결되기만을 바라고 있나요? 남편과 아내, 자녀들의 행위의 문제가 고쳐지기만을 바라고 있나요? 아니면 그들이 말씀을 듣고 예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기를 바라고 있나요?
2. 우리가 기쁨 중에 참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3절 그들이 교회의 전송을 받고 베니게와 사마리아로 다니며 이방인들이 주께 돌아온 일을 말하여 형제들을 다 크게 기쁘게 하더라
4절 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하매
5절 바리새파 중에 어떤 믿는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믿지 않는 자들이 믿게 된 간증을 들려줍니다. 그곳에 있는 형제들이 모두 기뻐합니다 예루살렘에 도착해서도 마찬가지로 사도와 장로들의 영접을 받고.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 다시 말해서 인간이 행한 율법에 관한 일이 아닌 은혜에 관한 일을 말합니다. 모두가 기쁨으로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의 행하신 일을 은혜의 일을 나누고 있는 이 순간에도 이 기쁨에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리새 파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바리세파 사람들도 저희와 같은 믿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믿는 저와 여러분 중에도 이런 바리세파의 모습이 있다는 말입니다. 일절에 등장한 유대로부터 내려온 어떤 사람들의 주제가가 ‘할례를 받지 않으면’ 이었다면 지금 이 바리세파 사람들의 주제가는 ‘마땅하니라’ 입니다. 이렇게 하는 게 마땅하다 이게 맞다. 저건 틀리다 이게 옳고 이게 그르다 율법과 행위를 넘어서지 못하는 사람은 결국 옳고 그름의 문제를 뛰어넘지를 못합니다. 항상 그것을 따지느라고, 이게 맞는지 저게 맞는지를 따지느라고, 공동체 안에서의 구원의 기쁨을 함께 누리지를 못합니다.
이것은 저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참 가깝게 지내던 한 목사님께 제가 여쭤봤습니다. ‘목사님 저는 어떤 점이 목사님 보실 때 율법적인 것 같습니까?’ 그랬더니 그 목사님이 전혀 망설임이 없이 저에게 네 신 목사님은 늘 목사님이 옳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목사님 하고 싶은 말을 앞뒤 안 가리고 하시는 게 율법적이십니다. 이렇게 말해 주셨습니다 정말 부인할 수 없는 맞는 말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바리새파 사람들을 보면 이들이 ‘율법을 행하라고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외치는 이 타이밍은 지금 예루살렘 공동체가 바울과 바나바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에 함께 들으며 함께 구원을 기뻐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온 공동체가 늘 구원 때문에 함께 즐거워하고 있는 이 순간에 바리새파 사람들은 자신이 옳다는 생각 때문에 공동체의 기쁨은 아랑곳 없이 ‘마땅하니라. 이게 옳다. 이게 틀리다 너희가 율법을 지키라고 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지금 이 기쁨의 순간에 이 말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저의 모습 같았습니다 저는 예전부터 아 어떤 말을 하고 싶어지면 그걸 잘 참지 못하던 모습이 있습니다. 그렇게 항상 제 말을 나오는 대로 하던 근본적인 이유는 제가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우리들교회에서 사역을 할 때 담임 목사님께 이제 정말 많은 여러 가지 혼이 나기도 하고. 여러 가지 양육을 이제 정말 많이 받았는데요. 그 중에서 목사님께서 어느 날 저에게 한 서방 잠시 실례지만, 잠시 제가 목사님 성대모사를 잠깐 하겠습니다. 제가 여러분께 더 생생하게 들려 드리기 위해서, ‘어머 한섭아! 너는 왜 이렇게 애가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게 있니?’
이렇게 말씀을 하셨어요.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게 있다. 내가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게 있다. 생각을 해 봤습니다. 정말 그런 거 같았습니다 정말 그런 거 같았습니다. 어쩔 때는 너무 좋다가도 갑자기 또 화가 날 때도 있구요. 근데 이유를 잘 몰랐습니다 그런데 이제서야 그 이유를 좀 알 것 같습니다. 제가 너무 제 안에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게 있어서 무언가가 제 율법과 제제 규범을 기준으로 그것이 틀려 보이면 무언가가 잘못돼 보이면 제 마음이 요동치고 울그락 불그락 하고 오르락 내리락 해지는 것이 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게 마땅하니라’라고 앞뒤 안 가리고 말하고 싶은 것이 제안에 늘 있습니다. 그렇게 목사님께 양육을 받고도 여전히 바리세 파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저도 속고 남도 속고 그래서 우리들 교회에서 양육 받고 계신 여러분이 정말 부럽습니다 세상에 누가 이렇게 양복을 말끔하게 차려 입고 설교를 하는 사람에게 ‘네가 오르락 내리락 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해 줄 수가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지금 모르시겠지만 여러분을 얼마나 사랑해야 여러분에게 속지 않고 그것을 말해줄 수 있는지 그것이 얼마나 축복이고 감사한 일인지. 지금 여러분은 아마 모르실 겁니다. 살다가 결혼 생활을 하고 살다가 제 자신이 너무 괴로워서 제 자신에 대해서 너무나도 알고 싶을 때가 있었습니다 나는 왜 이럴까?
나는 왜 이렇게 안 될까? 나는 왜 또 넘어질까? 나는 왜 그렇게 훈련을 받았는데도 여전히 이 모양이 모습일까? 나는 왜 율법이 극복되지 않을까? 나는 왜 행위를 건너 뛰질 못할까 그런데 여러분 ‘나는 왜 이럴까?’라고 생각하는 그 순간에 여러분이 왜 그런지 여러분이 왜 그럴 수 밖에 없는지 말해주고 들어주고 함께 할 수 있는 공동체와 목사님이 계신 것이 그것이 여러분이 참 부럽습니다 잊지 않고 누리시길 바랍니다 여기서 우리 공동체 안에 저와 비슷한 분들이 좀 이런 질문을 하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옳고 그른 것이 있어야 되는 거 아니냐 세상이 옳고 그런 기준이 없이. 그게 어떻게 인생이 살아지냐? 그러면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막 살아도 된다는 얘기냐. 옳고 그름이 없이 어떻게 살아야 되냐? 맞습니다 옳은 것은 있어야 합니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명확히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윤리가 성립되고 사회가 지속됩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애타게 찾고 따지시는 그 옳음이 있어야 옳고 그름은 있어야 한다. 그 옳음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옳고 그름의 기준이 내 안에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나 같은 죄인을 갑 없이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옳은 것입니다 스데반을 죽인 바울의 행동도 옳지 않았습니다. 예수를 세 번 부인했던 베드로의 행동도 옳지 않았습니다.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도록 거짓을 일삼은 야곱의 행동도 옳지 않았습니다 며느리와 동침한 유다의 행동은 정말 상식적으로 납득이 안 되는 행동입니다 우리아의 아내인 밧세바를 탐한 다윗의 행동은 사람이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옳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구원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만이 오른 것입니다. 마땅하지 않은 자들을 통해서 저 같은 죄인을 통해서 하나님 자신의 일을 하시는 분은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이제 옳고 그름은 우리 안에 있지 않고 예수의 복음 안에 있음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무엇이 옳으냐?’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제가 드리겠습니다 예수가 옳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공동체가 구원의 기쁨으로 즐거워할 때 함께 즐거워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를 판단하고 계십니까? 적용 질문 두 번째를 드리겠습니다.
-나는 공동체의 기쁨에 기꺼이 참여합니까? 그렇지 못한다면 왜 그렇습니까?
-지금도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마땅한 지 아닌지를 내 기준과 내 생각 내 지식으로 판단하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예수의 은혜로 얻은 구원만이 옳은 것임을 인정하십니까?
큰일 났습니다. 이제 시간이 다 됐는데. 저는 아직 3번 대지가 남았습니다. 빨리 하겠습니다
(적용#2)
-믿음이 있지만 여전히 생색과 기복으로 내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는 스스로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자랑합니까? 그것이 율법을 넘어서지 못하는 것임을 인정하십니까?
-나는 공동체의 기쁨에 기꺼이 참여합니까? 그렇지 못하다면 왜 그렇습니까?
-지금도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마땅한 지 아닌 지를 내 기준과 생각과 지식으로 판단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3. 우리가 끊임없이 차별하기 때문입니다.
6절 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
7절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8절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언하시고
9절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
10절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11절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장로들이 구원의 문제를 의논하러 모였습니다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바로 옆, 앞에서 목격하고. 제자가 되었던 이들이 여전히 이 문제의 구원의 문제에 확신이 없는 모습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여전히 ‘되었다함’이 없이 계속해서 거룩을 향해 구원과 양육의 길을 걸어가야 할 이유입니다 여기 6절에서 11절 사이에 베드로가 가장 눈에 띕니다. 갈라디아서 2장에서 베드로는 바울에게 꾸중을 듣습니다. 자기처럼 예수님을 직접 목격 하지도 않았고 예수님의 愛제자도 아니었던 사람이 구원을 잘못 이해했다고 자신에게 처방질을 하고 책망을 합니다. 베드로가 어쩌면 인간적으로 자존심이 상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베드로가 오늘 바울을 변호합니다 자기에게 싫은 소리를 쓴 소리를 하던 그 바울의 편에 섰습니다. 베드로는 지금 진정한 구원의 진리를 드러내기 위해서 자신을 객관적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구원에는 차별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 차별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 디아크리노라는 단어는 철저하게 분리하다. 혹은 의심하고 판단하다 이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철저하게 어딘가로부터 분리해내서 또 한 번 의심해보고 판단한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즉 차별한다는 것은 누군가를 나와는 다른 사람으로 분리시키고 판단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여전히 남들과 나를 구분하고 분리합니다. 나는 목자니까 나는 부목자니까. 목원들과 나는 다르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나는 초원이고 평원이니까 나는 일반 목자들과 다르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픈 목원들과 나를 분리시키고. 그들을 판단합니다. ‘저 집사님. 너무 아파’ 이런 말을 정말 자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7절에서 9절의 내용을 한번 자세히 보시기 바랍니다. 7절에서 9절의 내용을 자세히 보시면 여기서 베드로가 구원의 핵심을 설명하는데요 7절에서 9절의 내용 중에 우리가 한 일이 무엇이 있는지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한 일이 무엇이 있는지 함께 7절부터 9절을 읽어보겠습니다
7절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8절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언하시고
9절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
사람을 통해 된 일이 있습니까? 율법을 통해 된 일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오래전부터 우리를 택하시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주어 증언하셨고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셨고.
하나님이 우리를 차별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하신 일로 다시 말해서 오직 주 예수의 은혜로. 그 하나님의 한량 없는 주의 은혜로. 우리는 목자가 되었고 부목자가 되었고 직분을 맡았습니다 그런데 왜 자꾸 차별을 하십니까 저 집사님이 너무 아퍼. 우리 남편은 정말 이상하다. 우리 아내는 진짜 교만해 그래서요 나는 아프지 않습니까? 나는 이제 괜찮아진 것 같습니까 내가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 순간이 가장 위험한 순간입니다 제가 살면서 가장 은혜를 받았던 순간은 제가 가장 아픈 사람이었음을 인정하던 순간이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마찬가지 아닙니까? 여러분 이 자리에 계신 모든 이 예배를 드리고 계신 모든 분들이 정말 아프고 상처투성이 모습이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제는 여러분이 꽤 괜찮고 이제 나는 온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한 번 돌아보아야 합니다 이와 같이 내가 누군가보다 나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내가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고 이런 사람들에게 구원의 차별이 없다는 말은 절대로 이해될 수 없습니다 구원의 차별이 없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나와 같이 다른 이들의 마음도 깨끗하게 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차별이 없음은 관계의 회복으로만 나타납니다. 인간이 하나님이 되고자 했을 때, 에덴 동산에서 인간이 하나님이 되고자 했을 때, 내가 하나님처럼 안 될 게 뭐 있어? 하는 의구심을 품으면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단절되었습니다 ‘내가 저 사람보다 못 난 게 뭐 있어? 내가 이런 얘기를 듣고 살아야 돼? 내가 저 사람한테 이런 취급을 당해야 돼?’ 이런 생각들로부터 모든 관계의 단절이 시작됩니다. 하지만 차별이 없는 구원을 경험한 사람은 결국 관계 회복으로 그것이 나타납니다. 내가 저 사람보다 나아서가 아니라 내가 내 남편보다 내 아내보다 내 자녀보다 내 동료보다 내 목원보다 내가 아프다고 손가락질 하는 그 사람보다 내가 더 나아서가 아니라 그저 하나님께서 내 마음을 그들보다 먼저 깨끗게 하셨기 때문에 단지 그 이유 하나 때문에. 내가 믿음이 있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자매들은 자들에게 형제들아라고 부르며 차별하지 않으며 끊어졌던 관계들을 회복해 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4번이나. 형제들아 라고 언급합니다. 베드로가 형제들아라고 부르는 이 순간에 제가 생각할 때 그 형제들을 향한 베드로의 차별 없는 사랑과 하나님의 차별 없는 구원에 대한 확신이 베드로의 마음 속에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던 베드로의 그 마음에 스데반을 돌로 쳐 죽였던 바울의 그 마음에 어떻게 남을 나와 차별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아무 자격 없이, 아무 조건 없이 구원을 받았는데 나 같은 죄인이 구원이 되었는데 어떻게 내 옆에 있는 남편과 아내를 저 사람은 아프고 이상하다며 차별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저도 차별 없는 구원을 이해하지 못해서 여전히 단절되어 있는 관계들이 있습니다. 가슴이 아프고 마음 한 구석의 응어리가 남아 있습니다 저의 율법적인 모습과 옳고 그름을 따지는 모습 때문에 상처받은 형제들이 교회 안에 있습니다 아마 그분들은 제가 자신에게 지금 이 말을 하고 계시는 줄 알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 자리를 빌어서 이 예배를 드리고 계시다면 정말 옳고 그름으로만 따지는 죄인 죄인이 저였음을 고백합니다. 제가 정말 교만했습니다 저를 용서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너무나 불편하고 싫은 사람이 있으십니까? 상처받고 상처 주고. 이제 안 보는 사람이 있습니까? 여러분이 보실 때 사람 되기는 글러 보이는 사람이 있습니까? 내가 어떻게 해 줬는데 나한테 이 따위로 밖에 안 해. 이런 생각을 하시는 사람이 있습니까? 이제는 죽는 날까지 안 보기로 작정한 사람이 계십니까? 목장 모임 할 때 이 집사님만 안 오면 좋겠다 그런 생각이 드는 분이 계십니까? 이제 그런 분들을 한 명쯤 머릿속에 조용히 떠올려 보시길 바랍니다 제가 3초만 셀게요. 한 번쯤 머릿속에 한 분을 떠올려 보시길 바랍니다.
(적용#3)
-내가 차별하고 이방인처럼 여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관계가 단절되었는데도 불구하고 회복하고 싶지 않고 손 내밀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까?
-내가 그 사람보다는 나은 것 같습니까? 내가 그 사람을 차별하고 있다고 인정하십니까?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은 정말 열정적으로 교회를, 우리 우리들은 정말 열정적으로 교회를 섬겨온 사람들입니다. 주 안에서 생명을 경험했던 사람들이지만 어쩌면 정말 어쩌면 저와 여러분이 이전의 사랑과 회개의 감동을 잊어 버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여전히 믿음은 있지만 사도와 장로들처럼 이제는 이것이 정말 맞는 건지 확신이 없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양육되어 나아가야 합니다.
이 설교는 여러분이 아니라 사실 저에게 하는 설교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율법과 행위를 넘어서지 못합니다 보이는 것으로만 판단하고. 내 남편과 아내의 삶과 행위가 변하기 만을 바랄 뿐 정말 예수를 만나게 되기를 소망하는 마음은 포기해 버린 분들도 있을 겁니다 또 예전에 경험했던 은혜를 다 잊고 이제는 옳고 그름 만을 따지며 공동체의 기쁨에 참여하지 못하고 계신 분들도 계실 겁니다. 옆에 사람들을 차별하고 아픈 사람이라고. 무시하고 단절된 관계를 회복할 생각 없이 지내고 계신 분도 계실 겁니다. 여러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우리들교회입니다 주 예수의 은혜로 생명을 경험하고 죽음에서 살아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교회입니다 이제는 율법과 행위를 넘어서서 육이 아니라 성령의 일을 주목하고 옳고 그름이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 안에 있음을 믿으며 내가 더 아픈 사람이었다고. 내가 차별했다고. 용서를 구하며 먼저 관계 회복을 위해 손을 내미는 주 예수의 은혜로 앞으로도 변함없이 든든히 세워져 가는 우리들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는 여전히 양육되어져야 하고 거룩한 여정을 걸어가야 합니다.
감히 제가. 마지막으로 감히 제가 여러분께 이런 도전을 드리고 싶습니다. 주 예수의 은혜로 주. 예수의 은혜로 우리가 함께 경험했던 그 구원의 시간을 기억하시고. 더 힘차고 더 기쁘게 공동체의 기쁨에 참여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바랍니다. 함께 찬양하시겠습니다.
<Epilogue>
1) 구원은 이미 받은 구원과 우리가 받아야 할 구원 이렇게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2) 이미 값없이 우리에게 준 구원을 ‘칭의’라고 하며 우리를 의롭게 칭하였다고 한다.
3) 이루어가야 할 구원의 여정, 이것을 ‘聖化’라고 부른다.
4) 풀어서 설명하면 예수를 믿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자임과 동시에 여전히 되었다함이 없는 그런 인생 속에서 거룩이 됨을 소망하면서 계속해서 걸어가야 하는 과정 속에 있는데 이것을 聖化라고 하며 거룩하게 되는 의미다.
5) 이미 구원을 받은 성도 모두가 여전히 계속 가야 할 길이 있다
6) 나의 인생을, 사람 살리는 인생이 되도록 변화시킨 하나님의 은혜를 예수의 은혜를 구원을 우리는 모두 경험했기 때문이며 우리 안에서 살아남의 흔적 열매와 간증이 있기 때문이다.
7) 복음의 능력이 우리를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경험하게 한 공동체가 되게 해주었다.
8) 우리는 수치와 제패를 알고 있었고 서로를 정죄하지 않았다.
9) 서로에 대한 조언과 필요한 처방을 했지만 우리는 그 누구에게도 공격적 폭력적이지 않았으며 서로가 더욱 힘든 일을 자처해 왔다.
10)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믿음을 가지고 아름다운 섬김을 나눈 우리들에게 여전히 양육이 필요함을 이야기한다.
11) 이미 구원의 은혜를 경험했지만 가야 할 성화의 길, 아직도 되어야 할 길이 있는 것이다.
12) 우리가 계속해서 성장하고 자라나야 할 이유들을 말씀해 주신다.
13) 어쩌면 우리 모두는 누구보다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맛보았고 목격했으며 경험했다.
14)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
15) 행위의 증표 없이는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인데 할례를 받으면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것이다.
16) 율법은 본래 선한 것으로 율법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구별된 살도록 요구하신 하나님의 완전하고 거룩하신 법이다.
17)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고 알게 하고 무엇이 올바른 지 보여준다.
18) 존 칼빈은 율법은 우리들의 삶을 인도하는 안내하는 규범과 같은 역할을 강조했다.
19) 예수께서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것이지 패하러 오신 것이다.
20) 율법은 삶의 방향 같은 것인데 문제는 이렇게 선하고 좋은 율법이 행위로서 우리의 구원까지 이어질 수 없다는 사실에 있다
21) 죄인인 우리 인간은 율법을 완성할 수 없다.
22) 예수님이 죗값을 대신 치름으로써 율법을 완성시켜 주셨다.
23) 율법의 완성은 행위를 성취하는 방식으로 얻어지지 않는다.
24) 율법은 인간이 행해야 하는 일을 말해주고 은혜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행하는 것을 말해준다.
25) 그래서 율법에 얽매여 있는 사람은 육의 것, 인간의 행위를 생각할 수밖에 없다.
26) 인간의 행위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며 행위를 통한 행위 구원으로 이해하게 된다.
27) 행위와 은혜는 참 뻔한 것 같은 이유는 2천 년 역사에 정말 오랫동안 많은 논쟁거리가 되어 왔고 다툼이 있는 주제다.
28) 행위와 은혜는 미묘한 관계에 놓여있어서 우리 자신도 모르게 행위와 율법에 얽매이는 것이 많다.
29) 두려움은 곧 욕심이다
30) 강박쟁이와 두려움쟁이가 마주치면 강박쟁이는 바로 혈기쟁이로 둔갑하고, 두려움 쟁이는 울보가 된다
31) 강박쟁이는 끝까지 그 문제의 원인을 캐고 물어서 너는 왜 그렇게 하냐고, 너는 왜 그렇게 해야 되냐고 따지고 싶어 하고 두려움쟁이는 그런 강박쟁이가 질려서 눈물을 흘리면서 자리를 회피하고 싶어한다.
32) 눈으로 보여지는 것이 전부인 우리에게 우리 인간에게 율법과 행위라는 문제는 우리 삶에 아주 깊숙이 이런 식으로 아주 구체적인 곳에 들어와 있다.
33) 율법과 행위는 매일매일 우리가 걸려서 넘어지는 쉽지 않은 문제다.
34) 구원은 율법으로 행위로 얻어지는 게 아니라고 모두들 알고 있지만 실상 우리의 구체적인 삶을 들여다보면 우리는 우리 자신도 모르게 매일매일 율법적이고 행위 구원적인 삶을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35) 할례를 받으면 구원을 얻는다 라는 식의 율법과 행위의 굴레를 우리가 사실은 잘 벗어나지 못한다
36) 자녀를 양육하는 데 있어서도 마찬가지인 것은 엄마 말을 잘 들으면 착한 아이인 것이다
37) 더 중요한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는 행위는 은혜의 뒤에 따라 온다.
38) 행위는 열매인데 사람이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가장 은혜로운 방식은 포도나무인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이다
39) 예수님의 은혜 그 임재 안에 거하는 것으로 은혜가 먼저고 행위는 나중인데 다 이 순서를 자꾸만 우리가 거꾸로 하려고 한다.
40) 죄를 고백할 때 우리는 우선적으로 행위로 지은 죄를 생각하게 되고 그러면 그런 행위로 지은 죄에 대한 나눔들 또한 많이 하게 되며 행위의 죄만을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어떠한 행위도 고치면 죄가 해결된다고 착각하기도 쉽다
41) 음란을 행한 사람, 또 도박을 한 사람, 외도를 행한 사람, 중독에 빠진 사람, 또 혈기와 강박이 충천한 사람들 그리고 이런 모두가 우리가 이 행위를 고치는 것에 집중을 자꾸 한다
42) 행위가 끊어지면 믿음이 있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잘못된 것인 것처럼 인데 쉽게 말해서 알코올 중독이라는 행위를 끊었다고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되는 건 아니다
43) 그 사람의 행위가 변화되면 그러면 그 사람이 예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44) 그 사람이 할례를 받았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45) 오히려 예수의 은혜를 경험하지 않고 행위만 바르고 의로운 사람이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정말 무서운 것이어서 순서가 너무나도 중요하다
46) 행위의 변화가 우선이 되면 다른 구원이 되고 다른 복음이 된다.
47) 구원은 기본적으로부터 죄로부터의 구원이므로 행위의 구원을 생각하는 사람은 행위의 죄만을 생각하지만 은혜의 구원을 생각하는 사람만이 은혜를 떠난 모든 것이 되었음을 고백할 수 있다
48) 우리는 종종 적용이라는 이름으로 행위 구원을 부추길 만한 말들을 또 꽤나 많이 한다 요즘은 게임 안 하십니까. 요즘은 도박 안 하십니까 이제 술 끊으셨습니까. 이제 남편에게 잔소리 안 하십니까? 할례 받으셨습니까?
49) 예수 없이 은혜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의 행위가 변화된다면 그것보다 또 무서운 것이 없는 것인데 만약에 여러분의 남편 분께서 예수의 은혜를 전혀 경험하지 못하셨는데, 술이 끊어지고 모든 행위가 올바르게 변하셨다면 그것이야말로 정말 병원에 가볼 일이다.
50) 우리는 항상 이 행위의 한계를 여전히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51) 저는 율법의 테두리 안에서 이제 행위로 지켜야 할 것들을 지키지 못한 정말 대표적인 죄인이다.
52) 제가 이 설교의 자리에 있기 때문에 은혜 받은 자라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제가 은혜 받은 자이기 때문에 이 설교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순서가 바뀌면 다른 복음이 됩니다. 저는 제가 받았던 죄인인 제가 받았던 그 은혜를 잃으면 바로 육체의 율법과 예전의 행위만을 강조하던 삶으로 돌아갑니다 제 안에 선한 것이 하나도 없어서. 은혜를 잊으면 아무리 노력을 해도 죄를 짓는 공장일 수밖에 없습니다
53) 그 예수의 은혜가 아직 제가 죄인 되었을 때, 저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확정하신 그 예수의 은혜가 제 안에 있어서 오늘도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서 강박적인 제 모습을 고쳐달라고 기도한다
54) 은혜를 경험한 사람은 배우자의 구원을 위해 못할 것이 없습니다
55) 상대방의 구원을 위해 목숨을 내어 놓는 것 내 모든 것을 다 해서 내 사랑하는 사람이 구원 받을 수 있다면 그런 마음이 생기는 순간 상대방의 율법과 행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56) 상대방의 구원을 위해서 목숨을 내어놓기 때문에 은혜를 경험한 것이 아니라 은혜를 경험했기 때문에 목숨을 내어 놓을 수 있는 것이다.
57) 제가 제 아내를 사랑한다고 주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제가 악한 행동을 다 끊어낸다고 주를 사랑하는 것이 아닌데 예수 없이도 그렇게 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는 그것이야말로 무서운 것이다
58) 순서가 너무나도 중요한 것으로 예수를 사랑하는 것, 은혜를 사모하는 것, 그것이 우리 행위의 모든 행위의 이유가 되어야 한다.
59)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얻으면 할례 받은 자의 삶을 소망하게 된다
60) 법은 인과 응보를 이야기하는데 할례를 받으면 구원받는다, 다시 말하면 무엇을 하면 복을 받고 안 하면 저주받는다 우리는 이것을 기복 신앙이라고 부르지만 세상은 이것을 합리적이라고 말한다
61) 세상은 이렇게 어떤 Give and Take의 원리로 작동되므로 내가 준 만큼 돌려받는 것 이것이 가장 합리적이고 또 이성적인 것이다
62) 이러한 논리로 세상은 돌아가게 되어 있는데 다시 말해서 할례를 받으면 구원을 받는 것이 논리적인 인과 관계다
63) 율법은 인과관계이고 합리적인 논리로 설명이 되지만 그러한 인간의 논리성과 합리성은 은혜를 설명하기엔 너무나도 부족하다
64) 내가 줬으면 받아야 되는 게 언뜻 보기에 합리적인 것 같지만 이것이 기복신앙이고 율법인 것이다
65) 우리가 예수로부터 받은 은혜는 전혀 합리적이지 않다
66) 내가 예수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복을 받는 거라면 이 예배에 참석한 어느 누구도 복을 누릴 자격이 없다.
67) 내가 준 만큼만 받는 것이라면 이 자리에 구원을 얻는 만큼 하나님께 무언가를 드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68) 그런 은혜를 경험했으면서도 우리는 계속해서 부부 관계 속에서 또 자녀를 대할 때 율법으로 대하고 기복으로 대하고 그것을 논리와 합리라고 표현하며 드리댄다
69) 그렇게 율법과 인과관계를 들이대는 사람이 관계에서 승리하고 상대방으로 하여금 할 말이 없게 만들어 그렇게 우리는 이기고 또 이겨서 ‘내가 이만큼 했는데 너는 나에게 뭘 해줬지? 네가 해준 게 없으니 나도 해줄 게 없어’ 이것이 세상이 승리하는 방식 율법의 행위의 방식이다
70) 율법은 논리를 가지고 이기려고 하지만 은혜와 복음은 절대로 이기지 않으며 오히려 죽음으로 승리한다
71) 사도와 장로들의 영접을 받고.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 다시 말해서 인간이 행한 율법에 관한 일이 아닌 은혜에 관한 일을 말하는데 모두가 기쁨으로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의 행하신 일을 은혜의 일을 나누고 있는 이 순간에도 이 기쁨에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바리새 파 사람들이다.
72)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바리세파 사람들도 저희와 같은 믿는 사람들이라는 것으로 믿는 저와 여러분 중에도 이런 바리세 파의 모습이 있다는 말이다.
73) 율법과 행위를 넘어서지 못하는 사람은 결국 옳고 그름의 문제를 뛰어넘지를 못한다.
74) 항상 그것을 따지느라고, 이게 맞는지 저게 맞는지를 따지느라고 공동체 안에서의 구원의 기쁨을 함께 누리지를 못한다.
75) 온 공동체가 늘 구원 때문에 함께 즐거워하고 있는 이 순간에 바리새파 사람들은 자신이 옳다는 생각 때문에 공동체의 기쁨은 아랑곳 없이 ‘마땅하니라. 이게 옳다. 이게 틀리다 너희가 율법을 지키라고 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지금 이 기쁨의 순간에 이 말을 하고 있다
76) 항상 제 말을 나오는 대로 하던 근본적인 이유는 제가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77) 너무 제 안에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게 있어서 무언가가 제 율법과 제제 규범을 기준으로 그것이 틀려 보이면 무언가가 잘못돼 보이면 제 마음이 요동치고 울그락 불그락 하고 오르락 내리락 해지는 것이 있은데 ‘이렇게 하는 게 마땅하니라’라고 앞뒤 안 가리고 말하고 싶은 것이 제안에 늘 있다.
78) 옳고 그른 것이 있어야 되는 거 아니냐 세상이 옳고 그런 기준이 없이. 그게 어떻게 인생이 살아지냐? 그러면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막 살아도 된다는 얘기냐? 옳고 그름이 없이 어떻게 살아야 되냐? 맞다 옳은 것은 있어야 한다.
79)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명확히 있어야 윤리가 성립되고 사회가 지속된다. 그리고 여러분이 애타게 찾고 따지시는 그 옳음이 있어야 옳고 그름은 있어야 한다. 그 옳음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옳고 그름의 기준이 내 안에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나 같은 죄인을 갑 없이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옳은 것입니다
80) 스데반을 죽인 바울의 행동도, 예수를 세 번 부인했던 베드로의 행동도 옳지 않았다.
81)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도록 거짓을 일삼은 야곱의 행동도 옳지 않았고 며느리와 동침한 유다의 행동은 정말 상식적으로 납득이 안 되는 행동이다
82) 우리아의 아내인 밧세바를 탐한 다윗의 행동은 사람이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지만 그들의 옳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구원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만이 오른 것이다.
83) 마땅하지 않은 자들을 통해서 저 같은 죄인을 통해서 하나님 자신의 일을 하시는 분은 오직 예수님뿐이다.
84) 이제 옳고 그름은 우리 안에 있지 않고 예수의 복음 안에 있음을 생각하시기 바란다
85) ‘무엇이 옳으냐?’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예수가 옳다’이다.
86) 베드로는 지금 진정한 구원의 진리를 드러내기 위해서 자신을 객관적으로 인정하고 있는데 베드로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구원에는 차별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87) ‘차별한다’는 것은 누군가를 나와는 다른 사람으로 분리시키고 판단한다는 뜻이다.
88) 우리는 이렇게 여전히 남들과 나를 구분하고 분리한다.
89) 사람을 통해 된 일이 있나? 율법을 통해 된 일이 있ㄴ나? 하나님이 오래전부터 우리를 택하시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주어 증언하셨고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셨고 하나님이 우리를 차별하지 않으셨다.
90) 우리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하신 일로 다시 말해서 오직 주 예수의 은혜로, 그 하나님의 한량 없는 주의 은혜로, 우리는 목자가 되었고 부목자가 되었고 직분을 맡았는데 왜 자꾸 차별을 하나?
91) ‘저 집사님이 너무 아파, 우리 남편은 정말 이상해, 우리 아내는 진짜 교만해’ 나는 아프지 않나? 나는 이제 괜찮아진 것 같나?
92) 내가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 순간이 가장 위험한 순간이다
93) 제가 살면서 가장 은혜를 받았던 순간은 제가 가장 아픈 사람이었음을 인정하던 순간이었다.
94) 이제는 여러분이 꽤 괜찮고 이제 나는 온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는 건지 한 번 돌아보아야 한다
95) 이와 같이 내가 누군가보다 나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내가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고 이런 사람들에게 구원의 차별이 없다는 말은 절대로 이해될 수 없다
96) 구원의 차별이 없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나와 같이 다른 이들의 마음도 깨끗하게 하심을 믿는 것이다.
97) 그래서 차별이 없음은 관계의 회복으로만 나타난다.
98) 인간이 하나님이 되고자 했을 때, 에덴 동산에서 인간이 하나님이 되고자 했을 때, 내가 하나님처럼 안 될 게 뭐 있어? 하는 의구심을 품으면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단절되었다
99) ‘내가 저 사람보다 못 난 게 뭐 있어? 내가 이런 얘기를 듣고 살아야 돼? 내가 저 사람한테 이런 취급을 당해야 돼?’ 이런 생각들로부터 모든 관계의 단절이 시작된다.
100) 하지만 차별이 없는 구원을 경험한 사람은 결국 관계 회복으로 그것이 나타난다. 내가 저 사람보다 나아서가 아니라 내가 내 남편보다 내 아내보다 내 자녀보다 내 동료보다 내 목원보다 내가 아프다고 손가락질 하는 그 사람보다 내가 더 나아서가 아니라 그저 하나님께서 내 마음을 그들보다 먼저 깨끗게 하셨기 때문에 단지 그 이유 하나 때문에. 내가 믿음이 있는 자가 되었다
101) 그래서 모든 자매들은 자들에게 형제들아라고 부르며 차별하지 않으며 끊어졌던 관계들을 회복해 나갈 수가 있는 것이다.
102) 아무 자격 없이, 아무 조건 없이 구원을 받았는데 나 같은 죄인이 구원이 되었는데 어떻게 내 옆에 있는 남편과 아내를 저 사람은 아프고 이상하다며 차별할 수가 있겠나?
103) 우리는 여전히 율법과 행위를 넘어서지 못한다
104) 보이는 것으로만 판단하고, 내 남편과 아내의 삶과 행위가 변하기 만을 바랄 뿐, 정말 예수를 만나게 되기를 소망하는 마음은 포기해 버린 분들도 있을 것이다
105) 또 예전에 경험했던 은혜를 다 잊고 이제는 옳고 그름 만을 따지며 공동체의 기쁨에 참여하지 못하고 계신 분들도 계실 것이다.
106) 옆에 사람들을 차별하고 아픈 사람이라고 무시하고 단절된 관계를 회복할 생각 없이 지내고 계신 분도 계실 것이다.
107) 여러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우리들교회이며 주 예수의 은혜로 생명을 경험하고 죽음에서 살아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교회다
108) 이제는 율법과 행위를 넘어서서 육이 아니라 성령의 일을 주목하고 옳고 그름이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 안에 있음을 믿으며 내가 더 아픈 사람이었다고, 내가 차별했다고, 용서를 구하며 먼저 관계 회복을 위해 손을 내미는 주 예수의 은혜로 앞으로도 변함없이 든든히 세워져 가는 우리들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109) 우리는 여전히 양육되어져야 하고 거룩한 여정을 걸어가야 한다.
'말씀과 마음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들교회 2021년 8월22일 주일예배 말씀요약(사도행전 19: 1~ 7/ 성령의 임하심) (0) | 2021.08.24 |
---|---|
우리들교회 2021년 8월15일 주일예배 말씀 요약(사도행전 16: 25~ 34/성령의 죄수) (0) | 2021.08.17 |
우리들교회 2021년 8월1일 주일예배 말씀 요약(사도행전 18: 23~ 28/ 성령의 제자 양육) (0) | 2021.08.05 |
우리들교회 2021년 7월25일 주일예배 말씀 요약(사도행전 18: 18~ 23/ 성령의 작별) (6) | 2021.07.26 |
우리들교회 2021년 7월18일 주일설교 말씀 요약(사도행전 18: 12~ 17/ 성령의 문제) (0) | 2021.07.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