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교회 2021년 7월25일 주일예배 말씀 요약(사도행전 18: 18~ 23/ 성령의 작별)]
<사도행전 18:18~23>
18. 바울은 더 여러 날 머물다가 형제들과 작별하고 배 타고 수리아로 떠나갈새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함께 하더라 바울이 일찍이 서원이 있었으므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더라(Paul stayed on in Corinth for some time. Then he left the brothers and sailed for Syria, accompanied by Priscilla and Aquila. Before he sailed, he had his hair cut off at Cenchrea because of a vow he had taken)
19. 에베소에 와서 그들을 거기 머물게 하고 자기는 회당에 들어가서 유대인들과 변론하니(They arrived at Ephesus, where Paul left Priscilla and Aquila. He himself went into the synagogue and reasoned with the Jews)
20. 여러 사람이 더 오래 있기를 청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When they asked him to spend more time with them, he declined)
21. 작별하여 이르되 만일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 하고 배를 타고 에베소를 떠나(But as he left, he promised, "I will come back if it is God's will." Then he set sail from Ephesus)
22. 가이사랴에 상륙하여 올라가 교회의 안부를 물은 후에 안디옥으로 내려가서(When he landed at Caesarea, he went up and greeted the church and then went down to Antioch)
23. 얼마 있다가 떠나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땅을 차례로 다니며 모든 제자를 굳건하게 하니라(After spending some time in Antioch, Paul set out from there and traveled from place to place throughout the region of Galatia and Phrygia, strengthening all the disciples)
<Prologue>
우리가 살면서 노력하지 않아도 느는 것이 있는데 나이, 뱃살, 주름, 흰머리 등이다. 또 작별도 점점 많이 하게 된다. 언젠가는 우리와 만난 모두와 작별을 하게 될 것이다. 여러분 기억에 가장 깊게 남은 작별의 순간은 언제인가? 바울도 교회를 세우며 여러 도시를 다닐 때마다 작별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사도행전에서 바울이 작별했다는 표현은 오늘 본문에만 두 번 나오는데 그만큼 특별한 의미를 가진 작별이라는 뜻일 것이다. 인간적인 작별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함을 받은 성령의 작별을 했다는 것일 텐데 오늘은 성령의 작별에 대해서 생각을 해본다.
<말씀 요약>
1. 더 인내하며 머문 후에 하는 것입니다.(18절a)
18. 바울은 더 여러 날 머물다가 형제들과 작별하고 배 타고 수리아로 떠나갈새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함께 하더라
성령의 문제로 주신 법정 사건을 통과한 바울은 고린도(Corinth)에서 이 일 후에 더 여러 날 머물다가 형제들과 작별했다고 한다.
“머물다”로 번역한 헬라어는 쉽지 않은 상황에 의지를 가지고 버티며 자기 역할을 감당한다는 뜻이다.
모든 것을 갖추고 음란하기까지 한 고린도에서 전도하는 일이 바울에게 쉽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유대인들이 일제히 일어나 바울을 대적하고 비방했다.
유대인들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었는데 한 가지 할 수 없는 것이 사형언도를 못하는 것이었다.
로마 총독만 사형언도를 내릴 수 있고 집행을 할 수 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바울을 고발한 것은 그를 죽이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이제 무죄가 되었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하게도 바울은 이고니온(Iconion)과 루스드라(Lustra), 빌립보(Philippi), 데살로니가(Thessalonica)에서도, 아덴(Athens)에서도 늘 쫓겨났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모두를 모아놓은 듯 한 가장 악하고 가장 음란한 마게도냐(Macedonia)와 아가야(Achaia)지역에서, 가장 영적으로 어둡던 이 곳에서 법정 사건이 해결된 뒤에도 바로 고린도를 떠나버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더 여러 날, 충분한 기간을 머물렀다는 뜻이다. 무엇을 위해 충분한 시간인가? 갓 태어난 고린도 교회의 성장을 위해 필요한 충분한 시간이 찰 때까지, 최소한 법정 앞에서 모두에게 얻어맞는 수모를 당한 회당장 소스데네(Sosthenes the synagogue ruler)가 교회로 들어와 구원받고 바울의 동역자로 양육될 수 있는 만큼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바울이 소스데네(Sosthenes)를 양육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전도하고 가르치고 양육하는 사명의 자리에 딱 붙어서 ‘디아트리보’(비비고, 닦고 문지르고) 해야 한다. 화내고 싶을 때 참고, 화내기 싫을 때도 참고, 말하고 싶을 때도 참고, 말하기 싫을 때도 참고, 날마다 인내하며 전도하고 양육했다.
따라서 여러 날 머무는 일은 인내가 필요한 일이었다. 정말 고개가 절레절레 흔들어지는 그 사람 옆에 오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할 때 하나님은 성령의 작별을 하게 하실 때가 많다.
그래서 성령의 작별의 결론은 영혼 구원이다.
(고전15: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I die every day--I mean that, brothers--just as surely as I glory over you in Christ Jesus our Lord)
바울이 고린도에서 머물 때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죽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나중에 편지를 통해서도 자랑을 하고 단언할 수 있었다. 바울이 날마다 인내해야만 했다. 자기를 죽여야만 했다. 충분한 시간을 머문 후에야 바울은 고린도의 형제들과 작별하고 수리아(Syria) 귀향길에 오르게 된다. 믿음의 자녀를, 복음으로 낳은 아들, 딸 같은 성도들이 1년 6개월 동안 많이 생겼을 것이다. 그런데 떠난다. 떠나면 만남이 있다. 바나바(Barnabas)와 작별하고 혼자였던 바울 옆에 누가(Luke)와 실라(Silas), 디모데Timothy)를 만나게 하셨다. 빌립보(Philippi)에서는 루디아(Lydia)를, 데살로니가(Thessalonica)에서는 야손을, 고린도(Corinth)에서는 브리스길라(Priscilla)와 아굴라(Aquila)를 만나게 하셨다. 떠나면 만나는 곳곳의 그 한 사람 때문에 (그 한 사람이 정말 중요하다) 그 힘든 사역을 감당하게 하셨다. 고린도에서 1년 6개월을 함께 한 아굴라 부부가 고린도에서 터전을 잡았는데 내려놓고 같이 떠나겠다고 한다. 우리가 주님의 신부가 되면 신부로서 같이 동행하는 것처럼 아굴라(Aquila) 부부가 그렇게 신부가 되어 동행을 해주었다. 대부분 이렇게 떠날 때 아내가 반대해서 못 떠나는데 여기는 아내가 믿음이 더 좋아졌다. 그래서 브리스길라(Priscilla)와 아굴라(Aquila)로 칭호가 바뀌어졌다. 이 부부 때문에 참 많은 위로와 힘을 받았으리라 생각한다. 힘든 남편, 아내, 자녀와 부모가 감당이 안 되는가? 이 십자가를 잘 지고 인내하면 영적 진실성이 드러난다. 이 진실성을 증명하기 위한 충분한 시간이 되었을 때 성령의 작별을 하게 해주신다.
(적용#1)
-지금 당장이라도 작별하고 싶은 고린도 같은 사람은 누구이고 여러 날 머물러야 할 인내의 상황은 무엇인가?
성령의 작별의 원동력은,
2. (조건부 서원이 아닌 감사로 드리는) 자발적인 서원입니다.(18절b)
바울이 일찍이 서원이 있었으므로 겐그레아(Cenchrea) 에서 머리를 깎았더라
바울이 겐그레아(Cenchrea)에서 머리를 깎는다. 고린도(Corinth)항 밑에 겐그레아(Cenchrea) 항이 있다. 겐그레아(Cenchrea)는 아시아와 로마를 잇는 고린도의 두 항구 중 하나였기에 무역과 상업이 엄청나게 발달한 곳이었다.
서원을 미완료로 계속해서 종료되는 시점까지 (서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서원 때문에 머리를 깎았는데 바울의 바램, 바울의 원함 이 서원이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민6:18 “자기의 몸을 구별한 나실인은 회막 문에서 자기의 머리털을 밀고 그것을 화목제물 밑에 있는 불에 둘지며” ('Then at the entrance to the Tent of Meeting, the Nazirite must shave off the hair that he dedicated. He is to take the hair and put it in the fire that is under the sacrifice of the fellowship offering.)
머리를 깎은 바울은 나실인(Nazirite)의 서원을 한 것을 알 수 있는데 나실인들은 자신을 구별되게 하나님 앞에 바치고 서원이 종료될 때에 머리를 민다. 그리고 화목제물(the sacrifice of the fellowship offering) 밑에 두게 된다. 이 서원이 종료되기 전까지 포도주를 입에 대지 않고 시체를 만지지 않고 머리를 깎지 않는다. 시체는 죽음이고 또 죄의 결과이자 하나님과의 단절을 뜻하기 때문에 서원이 끝날 때 머리를 깎고 그것을 불태운다는 것이다.
서원은 ‘성별하다. 구별하다’의 뜻이 있다. 더 자세히 레위기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하신 제사의 종류가 (1)번제(burnt offering), (2)소제(grain offering), (3)속죄제(sin offering), (4)속건제(ordination offering), (5)화목제(fellowship offering) 5개이다.
예수 1)그리스도의 죽으심의 번제, 2)부활의 소제, 3)대속의 속죄제, 4)속량의 속건제, 5)승천의 화목제를 상징한다.
(레위기7:11~18) 마지막 승천에 해당하는 화목제는 죄인들의 속죄가 완료되어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 간의 화목이 성취되는 천국잔치에서 감사와 찬송을 드리는 것이다.
레위기 7:15~16 감사함으로 드리는 화목제물의 고기는 드리는 그 날에 먹을 것이요 조금이라도 이튿날 아침까지 두지 말 것이니라. 그러나 그의 예물의 제물이 서원이나 자원하는 것이면 그 제물을 드린 날에 먹을 것이요 그 남은 것은 이튿날에도 먹되
화목제는 지금까지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마음속에서 자원하여 감사와 찬송이 터져 나오는 예물이다. 그러니까 이 화목제 안에 감사제, 자원제, 서원제가 있는 것이다. 화목제의 하나인 서원이라는 것은 죽어야할 나를 위해 흠 없는 제물이신 그리스도를 보내주심으로 우리에게 완성된 구원을 허락해주신 그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드리는 것이다. 야곱처럼 무사히 돌아오게만 하시면 십일조를 하겠다. 입다 사사처럼 이기게만 해주시면 처음 영접하러 나온 자를 번제로 드리겠다고 해서 딸을 제물로 드렸는데 이런 조건부 서원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떤 완성된 사건(구원)이 감사해서 자원해서 나를 드리는 것이 성경의 서원이다. 어떤 사람을 찬송한다는 것은 내가 그 앞에서 부인 되어지는 것이다. 나는 없다. 그래서 나를 드릴 수가 있는 것이다. 그 일이 바울에게도 그대로 일어났다. 고린도 사역을 잘하게 해주시면 이런 조건부라기보다는 그 사역을 잘하기 위해서 자신이 구별되고 성별되기 위해서 자기를 부인하는, 구원을 위한 서원을 드린 것이다. 바울이 자신을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감사로, 자발적으로 서원을 드린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다”고 말씀하시며 바울을 응원하셨다.(행18:10)
또 고린도 성중에 내 백성이 많다고 하셨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이 무엇인지 경험했기 때문에 바울은 약속의 말씀을 주신 하나님께 너무 감사했을 것이다. 그래서 바울이 “알았어요, 주님, 그 말씀을 이루기까지 제가 포도주를 가까이 하지 않고 더럽고 음란한 것들을 만지지도 않고 머리를 깎지 않겠습니다. 거룩하게 살겠어요.”라고 은혜에 감사해서 자신을 드리니까 결과적으로 하나님은 법정의 문제를 성령의 문제로 바꾸어 주셨다. 그런데 바울이 구원에 뜻을 두지 않고 문제해결만 바랐다면 유대인들의 고소가 기각되는 순간 고린도를 즉시 떠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여러분들이 그렇게 다 열심히 하는 것 같아도 그냥 문제만 해결되면 더는 못해먹겠다 하면서 떠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런데 바울이 서원했다. 구별, 감사, 찬송, 구원을 생각했다. 서원은 감사의 예물로 나를 드린 것이고 구별된 인생이다. 여러분들은 전부다 조건부 서원을 생각한다. 그것은 안 믿는 사람의 비나이다 비나이다와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다.
생각해보니 제가 입시나 건강, 이런 것 때문에 서원을 해본 적은 없는 것 같다.
저는 남편 가기 전에도 주의 일을 하게 해달라고 금식을 했는데 그것이 서원이라면 서원인데 남편이 가고 저의 사역이 너무 커지니까 너무 두려워서 이 사명 잘 감당하게 해달라고 금식이 저절로 되었다.
하나님을 찬송한다는 것은 내가 그 앞에서 부인되어지는 것이다. 자원해서 내 자신을 부인하게 해달라고, 십자가 잘 지게 해달라고 그렇게 서원을 했던 것 같다. 이런 마음으로 늘 서원을 하니까 작별을 해야 될 것을 때에 맞춰서 잘 할 수 있었던 것도 같다.
우리는 각자의 언어와 명칭과 법이 있다. 그런데 그것이 성령의 법이 되지 않으면 기뻐서 서원도 안 되고 슬퍼서 작별도 힘들다. 우리 엄마도 아들 낳으면 주님께 드린다고 했기 때문에 기복적인 서원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어머니의 서원을 이루게 하기 위해서 이 땅에서 가장 무서운 작별을 많이 경험하게 하셨다. 젊은 나이에 네 분의 부모님과 남편과 작별을 했다. 이것이 어머니 서원 때문에 누구와도 갑자기 작별할 수 있다는 연습을 미리 하게 하셨다는 생각을 한다.
늘 자신을 부인하게 해달라고. 자발적인 영적 서원을 하며 가기 때문에 그런 무슨 일을 당해도 내가 예수를 잘 믿기 때문에 나만 특별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게 하신 것 같다. 남들 당하는 일, 나도 겪었다고 생각을 하게 하신 것이 서원의 응답이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지내온 것이 주의 은혜이지만 때마다 원칙을 생각하게 한 것은 말씀 적용 때문이었는데 그럼에도 수없이 타협하고 싶었다. 그래도 큐티를 하는 것이 연습과 습관이 되어서 사소한 원칙 하나를 지키려고 너무 고민을 한다. 말씀으로 “THINK”을 열심히 한 것만 가지고도 주님은 훗날에 너무나 엄청나게 다 크게 갚아서 돌려주신다고 생각을 한다. 그래서 내가 한 것이 아무 것도 없는데 거룩하게 살겠다고 서원을 하니까 받은 선물이 너무 크다는 것이다. 원칙은 바로 구별이고 거룩이다. 팔복의 원리이다. 구원 때문에 오늘 손해 보아야 할 말씀의 원칙을 말하는 것이다. 사소한 큐티 적용 하나 때문에 하나님은 쌓을 곳이 없는 축복을 주고 계신다고 생각한다. 기뻐서 자원해서 나를 드리겠다고 하는 것이 서원이다. 구원의 확신이 없는 사람은 서원의 자격이 없는 것이다.
(적용#2)
-입시나 입사를 앞두고 여러분은 조건부 서원을 하나? 그럴 때일수록 주의 크신 은혜에 감사해서 나를 써달라고, 그래서 인내하기 위해서 서원을 하나?
3. 사람의 청이 아닌 하나님의 뜻대로 작별하는 것입니다(19~21절)
19. 에베소에 와서 그들을 거기 머물게 하고 자기는 회당에 들어가서 유대인들과 변론하니
20. 여러 사람이 더 오래 있기를 청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21. 작별하여 이르되 만일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 하고 배를 타고 에베소를 떠나
겐그레아(Cenchrea)에서 배를 타고 떠난 바울 일행은 아시아의 관문이자 주도인 에베소(Ephesus)에 도착한다. 바울의 2차 전도여행의 원래 목적지가 에베소였는데 성령이 막으셨다. 마게도냐(Macedonia) 땅의 수도 데살로니가(Thessalonica), 아가야(Achaia) 지방의 수도 고린도(Corinth)보다 더 '넘사벽'(Unsurmountable Four Dimensional Wall)이 에베소(Ephesus)이다. 에베소는 성령께서 어린 디모데(TimothY를 배려해서 막을 정도로 힘든 곳이었다. 에베소 사람들이 섬기는 아데미 여신과 그 신전이 있는데 지금으로 말하면 아르테미스(Artemis) 신전인데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이다. 그토록 우상의 세력이 강한 도시가 에베소이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갈 길과 절기도 지켜야 되어서 시간이 바쁜데 굳이 안 들러도 되는 에베소에 도착한 후 쉬지 않고 회당을 찾아 복음을 전한다. 여기서 변론하다는 말은 강론과 같은 의미인데 성경을 펴서 구속사로 자신의 이야기를 한 것이다. 바울은 욕을 먹고 매를 맞고 (사람들이) 사형언도를 할 만큼 그렇게 지겨워 하는데도 유대인의 회당에 꼭 들른다. 이것이 자발적인 서원이 아니면 되겠는가? 그래서 바울에게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 일이 아니라 숨쉬기 이다. 말씀 전하는 것이 일인가? 숨 쉬는 것인가?
고린도에서 불법이 아니라고 바울이 비난 받지 않게 되었는데 도리어 서원하고 율법을 지키는 모습을 보여주는 바울은 율법의 완성이 사랑이듯이 그 당시의 유대와 이방을 다 생각하면서 자기로서 할 수 있는 것을 다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구원 때문에 못할 것이 없다. 나실인(Nazirite))의 서원을 하고 머리를 깎고 왔기 때문에 당장 에베소의 회당에서 변론을 할 때 거부감이 없었을 것 같다. 즉 머리를 깎은 것이 내 헌신의 끝이라고 종결하면서 내 서원이 끝이 아니라 에베소와 와서 강론하면서도 에베소를 하나님이 책임져 주시라고 하고는 본인은 예루살렘으로 떠나지만 전략적으로 중요한 인물인 브리스길라(Priscilla)와 아굴라(Aquilla)를 남겨놓는다.
그런데 강론하며 구속사(history of redemption)로 전하니까 이전과 달리 여러 사람들이 더 오래 있기를 간청했다. (아마도) 화려하고 음란한 에베소와 비슷한 고린도에서 1년 6개월 동안 연습을 많이 해서 그런지 에베소 사람들의 마음을 설득한 것 같다. 하지만 바울이 오래 있으라고 하는데 거절한다. 전에는 성령께서 허락치 않으셨는데 이 때는 바울이 허락하지 않는다. 만약 하나님 뜻이면 다시 돌아올 것이다. 이 때 시제가 능동태 미래형이다. 막연한 것이 아니라 바울의 각오와 의지가 담겨진, 앞으로 이루어질 것에 대한 각오와 의지가 담겨진 아주 강력한 표현이다.
옛날 같으면 성령께서 계속 막았지만 사람들이 많아지니까 성령이 막아도, 또 막아도 계속 아시아로 가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성령의 서원을 한 바울의 태도는 어떻게 변화 되었나? 그동안 자신의 실패와 두려움 속에 연약함과 두려움의 한계 가운데에서도 빌립보(Philippi), 데살로니가(Thessalonica), 고린도(Corinth) 교회가 세워 짐을 보니 자신의 의지보다 하나님의 의지가 조금씩 앞에 가기 시작한다. 그래서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보다 더 앞에, 각오와 서원과 의지 앞에 하나님 뜻이 있는 것이다. 브리스길라(Priscilla)와 아굴라(Aquila)를 남겨놓을 만큼 에베소에서 복음 전하기를 원했지만 자신의 바람과 소원보다는 먼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다. 빨리 작별하고 싶었던 고린도에서는 더 여러 날 머물렀지만 처음부터 오고 싶었던 에베소에서는 더 오래 있기를 청하는 여러 사람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호하게 바로 작별을 한다. 인본적인 사람의 특징이 때를 모른다는 것인데 갈 때와 올 때, 있을 때와 떠날 때를 알려면 십자가는 지혜이고 지혜는 타이밍이다. 그래서 타이밍을 모른다는 것을 결국 십자가를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 생각대로 하니까 경고할 때는 칭찬을 하고 칭찬할 때는 경고를 한다. 그러니까 굉장히 스마트해 보여도 대형사고가 터지는 것이다. 구원보다 이익이 목적이면 분별이 안 된다. 내가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잘못 판단할 때는 하나님이 책임져 주신다. 그러나 나의 유익이 목적이면 절대로 분별이 안 된다.
힘든 배우자는 작별해야 될 사람인가요? 더 오래 머물러야 할 사람인가요? 말씀의 원칙대로 구원을 위해서 정한다.
반면 중독은 당장이라도 작별을 해야 될 대상이다. 한 시간이라도 더 머물러서는 안 된다. 역시 구원을 위해서이다. 이혼이든 중독이든 구원과 정반대로 가는 것이다. 그런데 내 이익이나 쾌락이 기준이 되면 힘든 배우자는 당장 작별해야 될 사람이고 중독은 조금 더 머물러도 좋은 대상이다. 중독도 물질 중독, 행위 중독이 있다(아치볼드 D.하트) 물질 중독은 약물, 알코올 중독인데 그 물질 중독보다 더 무서운 것이 행위 중독인데 게임, 성행위, 쇼핑 같이 숨겨져 있고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드러나지 않지만 훨씬 무섭다는 것이다. 쇼핑할 때 황홀한 그 쾌락을 버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또 이생의 자랑인 학벌, 외모, 집안 등 이 자랑의 열병을 끊어낼 자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것들을 행위 중독이라고 한다. 인간이 전적으로 부패한 죄인이기 때문에 그렇다. 죄인의 영역에 나를 포함시키는 것이 구속사인데 예를 들어서 중독인 집안 식구들이 중독자는 저 사람이고 나는 드러난 잘못이 없는데 나는 왜 죄인이야 라고 따지면 정말 구원의 답이 나올 수가 없다. 내가 죄인이 아니니까 죄인을 구속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을 찾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한다. 그 방법은 말씀 묵상하고 적용하여 알게 된다. 따로 혼자 묵상하라고 성경 주시지 않으셨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서 지체들과 함께 묵상하라고 공동체적으로 읽고 생각하고 해석하고 적용하라고 말씀을 주셨다. 그래서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의 공동체를 함께 세워가는 것이다. 중독을 내 힘으로 못 끊는다. 작별 못한다. 그런데 중독자 센터에서도 나는 중독자라고 인정하고 공포하라고 한다. 공동체에서 입으로 시인하는 것이 중독 작별의 지름길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인데 결국 중독은 공동체가 없으면 끊어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목장에 오는 것이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아도 이 중독을 끊어내려면 본인도 가족도 서로가 인내를 해야 되는데 무슨 힘으로 인내를 하겠는가? 말씀을 통해서 죄를 보는 공동체에서 서로가 자기는 중독자라고 고백할 때 끊을 수 있다.
(적용#3)
-내 뜻과 하나님이 뜻이 반대로 작용한 때는 언제인가?
-이기적인 자기 사랑이 성령의 작별이 되어 지켜야할 가정이나 끊어 내야할 중독은 무엇인가? 게임, 성행위, 쇼핑인가?
-이 좋은 일은 하나님도 좋아하실 거야 하며 사람들이 요청한다고 행하는 것은 무엇이 있나?
자기 생각대로 구제하는 것은 좋은 것이다. 말씀을 모르면 우선순위를 모른다.
4. 제자를 굳건하게 하기 위함입니다(22절~23절)
22. 가이사랴에 상륙하여 올라가 교회의 안부를 물은 후에 안디옥으로 내려가서
23. 얼마 있다가 떠나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땅을 차례로 다니며 모든 제자를 굳건하게 하니라
이제 에베소에서 배를 타고 떠난 바울은 지중해를 가로질러 가이사랴(Caesarea)에 도착한다.
에베소(Ephesus) -> 가이사랴(Caesarea) -> 예루살렘(Jerusalem) -> 안디옥(Antioch) (2차 전도여행)
갈라디아(Galatia), 브루기아(Phrygia) (3차 전도여행)
예루살렘 교회에 갈 때 늘 올라갔다고 한다. 우리가 늘 서울은 올라갔다고 한다. 그것처럼 예루살렘 교회를 방문했다는 뜻이다.
예루살렘 공회가 사도행전 15장에서 성령의 의논으로 결정한 내용을 지역 교회에 알리고자 했고 4500Km 3년이상 걸린 긴 여행이고 여정이었다. 안디옥(Antioch)에서 오래 머물지 않고 또 떠났다고 한다.
갈라디아(Galatia)와 브루기아(Phrygia)로 3차 전도여행을 시작한다. 교회들을 심방하여 제자들을 굳건(견고)하게 하기 위해
날마다 숨쉬기처럼 전도여행을 한다.
여전한 방식의 복음 전함이 되어야 한다.
제자들을 향한 형제 의식, 흔들림을 멈추게 하는 것은 말씀이므로 또 다시 작별을 하고 양육의 3차 여행을 떠나는데 양육하고 떠난다.
믿음이 흔들리는 지체를 굳건하게 하고자 하는 성령의 작별이다. 새로운 사명의 시작과 처음이다. 다른 지체들을 굳건하게 하기 위해 이기적 관심의 한계에서 떠나는 것이다. 자기 사랑에 사로잡힌 이 세대를 떠나는 것이다. 이기심만 가득한 인간의 작별과는 다르다. 인간의 작별을 멈추고 성령의 작별을 해야한다.
교회 공동체에 들어와야 인권이 아닌 신권의 왕 노릇을 한다. 주님의 몸인 교회와 작은 교회인 목장이 정말 대안이고 내가 어디가 잘못되고
(적용#4)
-나를 굳건하게 세워준 지체들이 있나?
-지체들을 굳건하게 하기 위한 수고를 기뻐하나? 멈추지 말고 시작해야할 구원의 사명은 무엇인가?
(김양재 목사님 기도)
복음의 전함이 숨쉬기가 되어야 하는데 성령의 서원은 자발적으로 나를 드리고 써달라고 하는 것이 되지 못해서 성령의 떠남이 되지 못한다. 결혼, 식구들 모든 인간의 작별을 원하는 힘든 가정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머물러 있으라고 하신다. 예수님 밖에는 답이 없는데 내가 중독자라고 알코올 중독자, 성, 쇼핑, 날마다 목장에서 나누면서 서로가 가족들과 본인이 인내를 해야 한다. 주님이 상급이 되지 않으면 서원을 할 수가 없다.
하나님의 시간에 맡기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갈 수 있도록
<Epilogue>
1) 성령의 작별의 결론은 영혼 구원이다.
2) 십자가를 잘 지고 인내하면 영적 진실성이 드러난다.
3) 이 진실성을 증명하기 위한 충분한 시간이 되었을 때 성령의 작별을 하게 해주신다.
4) 시체는 죽음이고 또 죄의 결과이자 하나님과의 단절을 뜻하기 때문에 서원이 끝날 때 머리를 깎고 그것을 불태운다는 것이다.
5) 서원은 ‘성별하다. 구별하다’의 뜻이 있다.
6) 더 자세히 레위기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하신 제사의 종류가 (1)번제(burnt offering), (2)소제(grain offering), (3)속죄제(sin offering), (4)속건제(ordination offering), (5)화목제(fellowship offering) 5개이다.
7) 예수 (1)그리스도의 죽으심의 번제, (2)부활의 소제, (3)대속의 속죄제, (4)속량의 속건제, (5)승천의 화목제를 상징한다.
8) 마지막 승천에 해당하는 화목제는 죄인들의 속죄가 완료되어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 간의 화목이 성취되는 천국잔치에서 감사와 찬송을 드리는 것이다.
9) 화목제는 지금까지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마음속에서 자원하여 감사와 찬송이 터져 나오는 예물이다.
10) 그러니까 이 화목제 안에 (1)감사제, (2)자원제, (3)서원제가 있는 것이다
11) 화목제의 하나인 서원이라는 것은 죽어야 할 나를 위해 흠 없는 제물이신 그리스도를 보내주심으로 우리에게 완성된 구원을 허락해주신 그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드리는 것이다.
12) 어떤 완성된 사건(구원)이 감사해서 자원해서 나를 드리는 것이 성경의 서원이다.
13) 어떤 사람을 찬송한다는 것은 내가 그 앞에서 부인 되어지는 것이다.
14) 나는 없다. 그래서 나를 드릴 수가 있는 것이다.
15) 고린도 사역을 잘하게 해주시면 이런 조건부라기보다는 그 사역을 잘하기 위해서 자신이 구별되고 성별 되기 위해서 자기를 부인하는, 구원을 위한 서원을 드린 것이다.
16) 바울이 자신을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감사로, 자발적으로 서원을 드린 것이다.
17) 그래서 주님께서도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다”고 말씀하시며 바울을 응원하셨다.(행18:10)
18) 은혜에 감사해서 자신을 드리니까 결과적으로 하나님은 법정의 문제를 성령의 문제로 바꾸어 주셨다.
19) 그런데 바울이 구원에 뜻을 두지 않고 문제 해결만 바랐다면 유대인들의 고소가 기각되는 순간 고린도를 즉시 떠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20) 서원은 감사의 예물로 나를 드린 것이고 구별된 인생이다.
21) 우리는 전부다 조건부 서원을 생각하는데 그것은 안 믿는 사람의 ‘비나이다, 비나이다’와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다.
22) 하나님을 찬송한다는 것은 내가 그 앞에서 부인되어지는 것이다.
23) 우리는 각자의 언어와 명칭과 법이 있는데 그것이 성령의 법이 되지 않으면 기뻐서 서원도 안 되고 슬퍼서 작별도 힘들다.
24) 늘 자신을 부인하게 해달라고 자발적인 영적 서원을 하며 가기 때문에 그런 무슨 일을 당해도 내가 예수를 잘 믿기 때문에 나만 특별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게 하신 것 같다.
25) 남들 당하는 일, 나도 겪었다고 생각을 하게 하신 것이 서원의 응답이라고 생각한다.
26) 주님은 훗날에 너무나 엄청나게 다 크게 갚아서 돌려주신다고 생각을 한다.
27) 그래서 내가 한 것이 아무 것도 없는데 거룩하게 살겠다고 서원을 하니까 받은 선물이 너무 크다는 것이다.
28) 원칙은 바로 구별이고 거룩이며 팔복의 원리이다.
29) 구원 때문에 오늘 손해 보아야 할 말씀의 원칙을 말하는 것이다.
30) 사소한 큐티 적용 하나 때문에 하나님은 쌓을 곳이 없는 축복을 주고 계신다고 생각한다.
31) 기뻐서 자원해서 나를 드리겠다고 하는 것이 서원이다.
32) 구원의 확신이 없는 사람은 서원의 자격이 없는 것이다.
33) 변론하다는 말은 강론과 같은 의미인데 성경을 펴서 구속사로 자신의 이야기를 한 것이다.
34) 바울에게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 일이 아니라 숨쉬기 이다.
35) 자신의 바람과 소원보다는 먼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다.
36) 인본적인 사람의 특징이 때를 모른다는 것인데 갈 때와 올 때, 있을 때와 떠날 때를 알려면 십자가는 지혜이고 지혜는 타이밍이다.
37) 그래서 타이밍을 모른다는 것을 결국 십자가를 모른다는 것이다.
38) 그래서 자기 생각대로 하니까 경고할 때는 칭찬을 하고 칭찬할 때는 경고를 한다.
39) 그러니까 굉장히 스마트해 보여도 대형사고가 터지는 것이다.
40) 구원보다 이익이 목적이면 분별이 안 된다.
41) 내가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잘못 판단할 때는 하나님이 책임져 주신다
42) 나의 유익이 목적이면 절대로 분별이 안 된다.
43) 중독은 당장이라도 작별을 해야 될 대상이다.
44) 한 시간이라도 더 머물러서는 안 되는데 그것은 구원을 위해서이다.
45) 이혼이든 중독이든 구원과 정반대로 가는 것이다.
46) 그런데 내 이익이나 쾌락이 기준이 되면 힘든 배우자는 당장 작별해야 될 사람이고 중독은 조금 더 머물러도 좋은 대상이다.
47) 중독도 물질 중독, 행위 중독이 있다(아치볼드 D.하트)
48) 물질 중독은 약물, 알코올 중독인데 그 물질 중독보다 더 무서운 것이 행위 중독인데 게임, 성행위, 쇼핑 같이 숨겨져 있고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드러나지 않지만 훨씬 무섭다는 것이다.
49) 쇼핑할 때 황홀한 그 쾌락을 버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50) 또 이생의 자랑인 학벌, 외모, 집안 등 이 자랑의 열병을 끊어낼 자가 없다는 것이다.
51) 이런 것들을 행위 중독이라고 하는데 인간이 전적으로 부패한 죄인이기 때문에 그렇다.
52) 죄인의 영역에 나를 포함시키는 것이 구속사인데 예를 들어서 중독인 집안 식구들이 ‘중독자는 저 사람이고 나는 드러난 잘못이 없는데 나는 왜 죄인이야?’라고 따지면 정말 구원의 답이 나올 수가 없다.
53) 내가 죄인이 아니니까 죄인을 구속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을 찾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54)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한다.
55) 그 방법은 말씀 묵상하고 적용하여 알게 된다.
56) 따로 혼자 묵상하라고 성경 주시지 않으셨다.
57)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서 지체들과 함께 묵상하라고 공동체적으로 읽고 생각하고 해석하고 적용하라고 말씀을 주셨다.
58) 그래서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의 공동체를 함께 세워가는 것이다.
59) 중독을 내 힘으로 못 끊는다. 작별 못한다. 그런데 중독자 센터에서도 나는 중독자라고 인정하고 공포하라고 한다.
60) 공동체에서 입으로 시인하는 것이 중독 작별의 지름길이라는 것이다.
61) 이것이 하나님의 뜻인데 결국 중독은 공동체가 없으면 끊어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62) 그러니까 목장에 오는 것이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아도 이 중독을 끊어내려면 본인도 가족도 서로가 인내를 해야 되는데 무슨 힘으로 인내를 하겠는가?
63) 말씀을 통해서 죄를 보는 공동체에서 서로가 자기는 중독자라고 고백할 때 끊을 수 있다.
64) 다른 지체들을 굳건하게 하기 위해 이기적 관심의 한계에서 떠나는 것이다.
65) 자기 사랑에 사로잡힌 이 세대를 떠나는 것이다.
66) 이기심만 가득한 인간의 작별과는 다르다.
67) 인간의 작별을 멈추고 성령의 작별을 해야한다.
68) 복음의 전함이 숨쉬기가 되어야 하는데 성령의 서원은 자발적으로 나를 드리고 써달라고 하는 것이 되지 못해서 성령의 떠남이 되지 못한다.
69) 예수님 밖에는 답이 없는데 내가 중독자라고 알코올 중독자, 성, 쇼핑, 날마다 목장에서 나누면서 서로가 가족들과 본인이 인내를 해야 한다.
70) 주님이 상급이 되지 않으면 서원을 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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