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과 마음씀2021. 7. 12. 22:51

[우리들교회 2021711일 주일예배 말씀 요약(사도행전 4: 23~ 31/응답 받는 기도/정정환목사)]

 

 

<사도행전 4: 23 ~ 31> 

 

23절 사도들이 놓이매 그 동료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알리니(On their release, Peter and John went back to their own people and reported all that the chief priests and elders had said to them)

 

24절 그들이 듣고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이르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은 이시요(When they heard this, they raised their voices together in prayer to God. "Sovereign Lord," they said, "you made the heaven and the earth and the sea, and everything in them)

 

25절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통하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You spoke by the Holy Spirit through the mouth of your servant, our father David: " 'Why do the nations rage and the peoples plot in vain?)

 

26절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리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의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The kings of the earth take their stand and the rulers gather together against the Lord and against his Anointed One)

 

27절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세하여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러(Indeed Herod and Pontius Pilate met together with the Gentiles and the people of Israel in this city to conspire against your holy servant Jesus, whom you anointed)

 

28절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They did what your power and will had decided beforehand should happen)

 

29절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Now, Lord, consider their threats and enable your servants to speak your word with great boldness)

 

30절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Stretch out your hand to heal and perform miraculous signs and wonders through the name of your holy servant Jesus”)

 

31절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After they prayed, the place where they were meeting was shaken. And they were all filled with the Holy Spirit and spoke the word of God boldly)

 

 

<Prologue> 

 

원래 기독교 교회라고 치면 사월이 고난 주간이죠. 예 그런데 저는 이 여름철이 고난 주간입니다. 이번 주일이 사순절 마지막 날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하루나 아내가 제 얼굴을 보면서 이렇게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점점 썩어져 가고 있구나틀린 말이 아니죠. 다음 주일에는 제 개인적으로 부활절이 되길 바라고 있습니다. 오늘 함께 보실 이 본문은 담임 목사님께서 2년 전에 성령의 기도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해 주신 내용입니다. 그때 말씀을 들으면서 내가 성령의 기도를 하기보다는 내 생각으로 떼 부리는 기도를 하고 있었구나 이렇게 깨닫고 회개를 했었습니다 이번에 이 동일한 본문으로 설교를 준비하면서 여전히 잘 변화되지 않고 성령의 기도를 드리지 못하고 있는 제 자신을 보면서 기도하는 시간이었습니다. 한 몇 년 전에 인터넷에 이런 기사가 뜬 적이 있었습니다. ‘비닐봉지 메시(Messi)에게 찾아온 기적아마 이 기사를 보신 분이 계실 텐데요 당시 SNS 상에는 몇 장의 사진이 돌았습니다. 다름 아닌 한 아이가 비닐봉지로 만든 유니폼을 입고 축구 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축구스타인 메시의 유니폼을 비닐봉지로 만들어서 입고 있었던 것이죠. 아마. 지금 사진이 나오고 있나요? 비닐봉지로 이렇게 만들어진 저 옷이 지금 비닐봉지 거든요. 그 아이의 형이 비닐봉지로 저 메시의 옷을 동생에게 만들어줬다고 합니다. 얼마나 메시를 좋아하면 이런 옷을 입었겠습니까?

 

사실 우리가 하나님을 이렇게 좀 좋아해야 되는데 말이죠 이 어린 축구팬의 모습에 전 세계 많은 사람들이 열광을 했습니다. 이 아이가 어디 사는 아이인지 꼭 찾으면 좋겠다. 이런 바램이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일주일 뒤에 이 아이를 찾았습니다 다름 아니라아프가니스탄에 사는 다섯 살 된 아흐마디라는 소년이었습니다 축구를 너무 좋아하는데 형편이 이렇게 따라주지 않다 보니까 이 아이 형이 직접 이 비닐봉지로 만들어준 거죠. 나라가 내전으로 불안한 상황에서도 꿈을 간직한 이 어린 소년의 사연에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았었습니다 물론 메시(Messi) 또한 이 사연을 들어서 알게 됐죠 그리고 이 아이를 직접 메시가 만나줬습니다 이 아프가니스탄에 사는 이 아이가 이제 메시가 축구 하는 경기장으로 가게 됐죠. 메시가 자기의 유니폼을 친히 선물해 주고 축구 경기가 열리는 경기장에서도 이 아이를 만나서 함께 사진을 찍어 주었습니다 사진 한 번 보여주시죠. 네 지금 아르헨티나에서 옷을 선물해 주고. 직접 경기장에서 저 아이가 메시를 만나서 축구 경기를 관람을 했습니다. 아마 저 꼬마아이에게는 잊을 수 없는 평생 뭐 간직할 추억이 됐겠죠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이 말처럼 이 아이의 사모함이 메시에게 전해졌고 상상도 할 수 없는 선물을 받게 된 겁니다. 아마 어쩌면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도 그렇지 않을까요? 내가 간절함과 절박한 심정으로 드렸던 기도에 하나님은 언제나 신실하게 응답하십니다 때로는 내가 전혀 예상치 않았던 때 상상하지 못했던 모습으로 응답해 주시기도 하시죠. 나의 기도에 응답해 주신 이 하나님 때문에 내가 감격하면서. 이 다섯 살 꼬마처럼 평생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간직합니다. 그럼 이 시간 하나님께 응답 받는 기도는 어떤 기도인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말씀 요약>

 

1.   응답 받는 기도는 동료와 한마음으로 소리 높여 이릅니다. 



 

23절 사도들이 놓이매 그 동료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알리니 

 

사도행전 4장을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복음을 전하다가 잡혀 예루살렘에 서게 됩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풀려난 뒤에 동료들에게 달려갑니다. 사도와 성도들이 동료입니다. 동료라는 단어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고 나옵니다.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교회죠 그간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합니다. 만나고 싶었던 얼굴이 그들이었죠 성도에게 힘든 일이 있었을 때 찾아가는 것은 믿음의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두려움의 포로가 되어버립니다. 예수님이 안 계신 상황에 이 문제가 당혹스러웠을 겁니다. 두려움의 포로가 되지 않았습니다. 기도할 공동체와 동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곳을 기웃거리지 않았습니다. 가장 먼저 공동체를 향했습니다. 나는 어떠합니까? 내 발걸음과 시선은 어디로 향하고 있습니까 공동체와 동료를 찾기보다는 해결해 주는 사람만 찾지 않습니까?

 

내 옆에 사람이 없다 보니 인터넷에 들어가 썰과 이야기를 듣느라 소진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 문제를 해결해 주고 도와줄 것 같은 사람을 찾습니다. 눈에 보이는 힘 있는 유력자를, 권세자를 찾고 의지합니다 그 대상이 나에게 우상이 되어버립니다. 그 대상을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놓고 숭배하는 것입니다. 우상의 큰 특징은 언젠가는 반드시 나를 배신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찾고 의지하는 것은 반드시 나를 배신합니다. 사람도 명예도 그렇습니다. 작년에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웹 서핑을 하다 보니까 시간이 금방 갑니다. 그런데 막상 이런 정보가 쌓이다 보니 쓸데없는 걱정만 됩니다. 그냥 모르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고가 난 날 저에게 주신 말씀 북 이스라엘 왕 예후의 떠나지 않는 죄였습니다. 북 이스라엘이 세운 여로보함의 죄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그게 저였습니다. 사건이 생기면 공동체로 달려가 삶을 나누기보다는 유튜브에서 답을 찾으려고 했습니다. 마음의 위안을 얻으려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찾아갈 동료와 기도 제목을 나누기보다 혼자 고민하고 있지 않습니까? 찾아갈 동료가 없다면 내가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평소에 공동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인 위로에서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예수의 피를 나눈 믿음의 공동체에서만 한마음으로 기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공동체를 떠난 신앙은 절대 자립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연약 하기에 넘어지는 존재입니다. 나를 일으켜줄 지체가 있어야 합니다. 목장에는 안 가고 주일예배 만 드리는 분이 있지 않습니까? 목장에는 나오는데 마음은 다른 곳에 있지 않습니까? 그곳에서 나오길 바랍니다.

 

타 교회를 출석하고 계신데 홈페이지를 통해서 담임 목사님의 설교와 또 새벽 설교를 7년 동안 들어오셨다고 하시더라고요. 최근에 이 아들의 자살 징후가 너무 높아서, 도대체 이걸 누구와 상의해야 될지 모르겠다면서 제가 청년부를 담당하는 줄 아시고 저에게 전화를 주셨습니다 제가 사연을 다 들어보니까 이 아들은 우울증이 참 심하고 또 한 쪽 귀가 잘 들리지 않아서 자존감이 많이 낮아서 계속 죽고 싶다고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합니다 약을 먹고 자살 시도를 하기도 하고 또 하루 전날 밤에도 이 집사님이 주무시고 있는 방으로 찾아 들어와서 죽겠다고 그렇게 소동을 벌였답니다. 이 집사님은 날마다 새벽 기도도 하시고 또 출석하는 이 교회가 가족 같은 분위기라서 정말 이 문제를 나눌 사람이 없다고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너무 불안하고 어찌 해야 될지 모르겠다고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그런데 그 순간에 이 가족 같은 분위기의 교회라는 이 말을 듣고 나니 제 맘이 벙벙해지더라고요. 아니 가족 같은 교회인데 왜 이런 고난조차 나눌 수가 없을까? 그런데 집사님이 이러시는 겁니다 가족같이 지내다 보니까 이런 자녀 문제가 오히려 수치가 되고 사람들 사이에 소문이 날까 봐 얘기를 못하겠다고요. 그렇게 저와 상담을 한 뒤에 여자 목장을 연결해 드렸습니다 다행히도 비슷한 고난을 겪고 계신 또 이 목자님과 동료들이 계신 목장으로 이렇게 연결이 되셔서 그날 온라인으로 목장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집사님으로부터 다시 저에게 문자가 왔습니다 목장에서 예배 잘 드렸습니다 목장에서 많은 위로를 받고 구원의 사건임을 몸소 깨닫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인내하면서 가겠습니다그 문자를 보면서 제 가슴을 쓸어 내렸습니다

 

, 이 집사님이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이 고난을 처음으로 동료에게 말씀하게 되었구나이렇게 힘들고 고통스러운 삶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나눌 수가 있고 들을 수 있는 공동체가 있다는 이게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것인가? 때로는 우리가 공동체에서 상처받을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나는 공동체 안 가겠다는 바로 그것이 자기 중심적인 합리화입니다 오히려 공동체 안에서 오해하고 상처받고 내가 회복되는 시간을 통해서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게 되죠. 바로 그게 내가 거룩해져가는 성화의 과정이기도 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으로부터 자초지종을 듣게 된 이 초대 교회 동료들은 이제 무엇을 할까요? 큰일 났다. 이제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제 정말 우리 망했다 이렇게 걱정하고 염려했겠습니까? 아니면 앞으로 우리는 무엇을 할까? 어떻게 이 시간을 극복해 나가지? 그러면서 대책 회의를 했을까요?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이들이 걱정했다는 내용도 무슨 회의를 했다는 내용도 없습니다. 이들은 두 사도의 이야기를 듣고 곧장 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기도했습니다 

 

24절 그들이 듣고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이르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은 이시요 

 

대주재여(Sovereign Lord),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은 이시오.

삶의 결론인 것 같다. 이렇게 판단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무슨 나눔이 저렇게 이상하지? 뭐 저렇게 장황하고 두서가 없냐 병원에 가서 상담 받고 약이나 먹으라고 할까? 이렇게 공감도 애정도 없는 그런 반응으로 듣고 계시진 않습니까? 그런데 오늘 초대 교회 동료들은 이 두 사도의 나눔을 듣자마자 한 마음으로 소리를 높여 기도합니다.

 

따라서 지금 내가 속해 있는 이 공동체에 있는 동료들의 나눔은 무엇입니까? 내가 한마음으로. 함께 소리 높여 기도해야 할 기도 제목입니다 그가 지금 겪고 있는 큰 문제는 내가 함께 소리 높여서 중보해야 할 기도 제목이죠. 사실 저도 목장을 탐방하거나 이렇게 모임들을 인도하다 보면 자동 반사적으로 나눔 하시는 분들의 나눔을 이렇게 제가 해석하게 되지만 또 한편으로는 판단도 하게 되더라고요 그러면서 또 정죄도 하고 처방질를 할 때도 있더라고요. 하지만 우리가 어떤 이야기를 듣더라도 그것은 바로 그 지체의 기도 제목입니다. 자 그럼 이제 사도와 성도들은 누구에게 기도를 할까요?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은 이시오 그렇게 기도합니다

 

모든 만물을 창조하고 다스리시는 대주재(Sovereign Lord)이신 주님께 기도합니다. 우리의 기도 대상은 바로 절대 통치자 하나님이십니다. 그분께 나의 모든 사정을 아뢰고 기도하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린 시절에 배가 고프면 어떻게 합니까? 엄마에게 배가 고프다고 말을 하죠. 밥 좀 달라고 합니다. 아프면 나 어디 아프다고 말도 합니다. 그러면 엄마가 밥도 차려주고 또 병원도 데리고 가시죠. 그런데 정작 애가 배가 고픈데 말을 안 합니다 어디가 찢어져서 피가 흐르고 있는데도 아프다고 말을 안 합니다.

 

그럼 이게 정상적인 관계입니까? 문제가 있는 것이죠. 우리 집의 아들이 내가 아들이 자기가 배가 고픈데 얘가 나를 외면하면서 옆집 엄마한테 가서 아줌마 저 좀 밥 좀 주세요.

그러면 얘가 정상입니까? 아주 이상한 거죠. 관계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겁니다. 이처럼 내가 하나님을 외면한 채 나를 도와줄 것 같은 사람만 찾아다니고 의지하고 다른 것만 바라본다면, 이게 옆집 아줌마한테 가서 밥 달라고 하는 애랑 뭐가 다르겠습니까?

 


(적용#1)


-나는 문제가 생겼을 때 가장 먼저 무엇을 찾고 어디를 향합니까

-누구와 그 문제를 이야기합니까

-나는 기도를 부탁하고 한마음으로 소리 높여 기도할 동료가 있습니까? 



2.   응답 받는 기도는 말씀으로 하는 기도입니다. 

 

 

25절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통하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plot in vain)

26절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리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의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

 

사도와 성도들은 이제 시편(Psalms) 2편의 말씀을 인용하여 기도합니다 시편 2편은 메시아에 대한 예언 시입니다 다윗의 입을 통하여 성령으로 하신 말씀이죠. 여기서의 열방은 이방 나라들이고 족속은 유대민족입니다. 세상의 군왕들은 로마 통치자들이고 관리는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이들 모두가 한 편이 되어서 예수님을 못 박아 죽이는 일에 관여를 했습니다 공통점이 있다면 세상의 권력자들이죠 그러다 보니 분노로 떠들어내고 허사를 경영(rage and plot in vain)합니다. 사도와 성도들은 이렇게 말씀으로 기도하다 보니 지금 자신들에게 당면한 이 문제를 말씀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겪고 있는 이 사건이 이미 성경에 기록되어 있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있습니다. 말씀이 없는 기도는 언제나 기복으로 흐르기 마련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그분의 뜻을 말씀으로 다 계시해 주셨는데 기복적인 기도는 내가 말씀을 듣고도 계속 내가 뭘 다 하려고만 부르짖습니다 

 

그런데 이 기도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말씀에 대한 반응이죠. 그런데 이 말씀과는 상관없이 나의 생각만 주구장창 부르짖는다면 이건 소통이 아니라 불통인 겁니다. 정욕으로 구하는 떼 부리는 기도에 불과합니다 제가 우리들 교회 부임하고 얼마 안 돼서 한 모임에서 기도회를 인도하던 때였습니다 나름대로 제가 이 기도회를 뜨겁게 잘 인도했다고 생각하고 마치고 자리에 앉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한 사역자님이 저에게 오시더니 목사님 수고하셨어요 이렇게 말씀하시길래 나름 뿌듯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역자님이 이 말을 덧붙이셨습니다. 수고하셨는데. 목사님 앞으로는 말씀을 좀 넣어서 기도해 주세요.

 

담임 목사님의 저서에도 보면 매 챕터가 끝나기 전엔 말씀으로 기도하기그렇게 적혀져 있습니다. 우리가 듣게 된 말씀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알아가죠 그래서 진정한 기도 응답은 상황과 환경이 바뀌기보다 이 사건을 통한 하나님의 의도를 말씀으로 깨닫게 되는 겁니다 내가 영적인 것을 깨닫게 되면 육적인 것도 내가 필요한 만큼 채워주신다는 것을 알게 되죠. 이렇게 사도와 성도들이 기도하면서 인용한 이 시편 2편의 말씀은 이제 본문 27절에서 그대로 실현됩니다 27절입니다.

27절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세하여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러 

 

해롯(Herod)과 본디오 빌라도(Pontius Pilates)는 이방인(Gentiles)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세하여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러 헤롯 안디바는 로마 황제에 의해 임명되어서 갈릴리를 다스렸던 분봉 왕이었습니다본디오 빌라도는 유다와 사마리아를 다스린 로마 총독입니다 이들은 이방인과 유대인과 합세하여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르고 대적했습니다 사실 이들은 유대 지역을 다스리면서도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개와 원숭이 같은 견원지간(犬猿之間)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에는 딱 친구가 되었습니다. 이들은 한패가 되어서 공모한 것이죠. 우리가 선한 일을 위해서도 함께 동역하지만 이렇게 악한 일을 위해서도 함께 동역을 합니다. 심지어 평소 사이가 이게 나빴던 원수끼리도 이해 관계가 맞아 떨어지면 의기 투합을 하죠. 저도 한 10여년 정도 직장생활을 했는데요 제 상사로 인해서 참 많이 힘든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비단 저만 그런 게 아니라 다른 부하 직원들도 그래 했습니다 평소에 사이가 좋지 않았던 직원들이 유일하게 한 패가 되고 하나가 되는 때가 있으니 언제일까요? 바로 그 상사를 뒷담화 할 때죠. 함께 모여서 글을 도마 위에 올려놓아 놓고 난도질을 합니다

 

그를 깎아내리고 험담하면서 심지어는 내가 어떻게 골탕 먹일까? 소극적인 반응이라도 하자면서 막 치열하게 아이디어를 냅니다. 정말 이런 일을 도모하는 데는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머리가 팽팽 돌아가죠. 이렇게 우리는 작은 일에도 분노하면서 허사를 경영합니다 허사를 경영한다는 말은 헛된 일을 꾸민다 그런 뜻입니다 그런데 뭐 비단 직장생활 뿐이겠습니까? 우리가 공동체에서 누군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난 더 이상 이 목장 안 나갈 거라고 그렇게 분노하면서 비난을 하십니까? 그 시간에 나는 집에서 TV나 보고 그냥 잠이나 자겠다면서 그렇게 말씀하십니까? 바로 이게 허사를 경영하는 겁니다 배우자가 나를 자꾸 뒤집어 놓는다고 분노하다가 공동체 만류에도 불구하고 난 더 이상 너랑은 못 살겠다면서 이혼을 생각하십니까? 허사를 경영하는 겁니다 집에 애들이 공동체도 잘 나가고 있는데도 얘들이 학교 성적이 오르지 않는다고 분노하다가 더 이상 이번 수련에는 내가 보내지 않겠다면서 그 시간에 학원으로 돌리십니까? 허사를 경영하는 것이죠. 또 청년들은 어떻습니까 나는 매일마다 큐티를 하고 공동체도 이렇게 열심히 섬겼는데. 신 결혼은 커녕 신 교제에 손바닥만한 구름도 안 보인다고 그렇게 분노하다가 불신 교제를 감행합니다. 허사를 경영하는 것이죠. 그런데 바로 이런 것들이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르고 대적하는 모습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자꾸 분노하고 허사를 경영하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있기 때문이죠 심판자의 자리에서 통치자 노릇을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군왕들과 관리들처럼 그 자리에 앉아서 내가 내 마음대로 내 뜻대로 하려고 하기 때문이죠삶의 주권자 대주재이신 이 통치자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옳고. 그릇만 따지면서 작은 일에도 그렇게 분노하고 허사를 경영합니다 사실 이렇게 말한 저야말로 옳고 그름의 화신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제가 참 인간적입니다. 담임 목사님께서 간혹 저에게 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아시죠. 우리들 교회에서 듣는 인간적이라는 말은 절대 칭찬이 아 아니라는 것을. 오히려 그 반대라는 걸 아시죠. 그러다 보니 저는 이렇게 구원 때문에 해야 될 말을 못하고 하지 말아야 할 말을 간혹 합니다 이게 내 속의 인본주의더라고요 이 인본주의는 내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서 심판자 노릇을 내가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옳고 그름의 가치관으로 분노하고 끊임없이 헛된 일을 꾸미고 허사를 경영하죠 제가 그동안 그런 방식으로 예수님을 거스르고 대적해 왔더라고요



(적용#2)

 

-나는 말씀으로 기도합니까? 내 생각과 정욕으로 기도합니까

-내가 분노하면서 경영하고 있는 허사와 꾸미고 있는 헛된 일은 무엇입니까?

-내가 기름 부으신 자를 대적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그 일에 누구와 한패가 됩니까?

 

 

3.   응답 받는 기도는 하나님의 권능과 뜻이 이루어집니다. 

 

 

28절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것이 무엇일까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으심 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끝이 아닙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그를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이 로마의 정치 지도자들과 또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는 악을 자행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자유 의지까지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 겪고 있는 이 고난 내 몫의 이 십자가도 하나님의 권능과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려고 예정하신 거죠. 내가 이 십자가를 지고 가다 보면 내 현재의 이유를 깨닫는 권능을 얻습니다. 이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죠 나를 구원하시려고 이 고난을 사용하시는구나 나를 거룩하게 빚어 가시기 위해서 이 일을 쓰고 계시는구나 그렇게 깨닫습니다 어제도 제가 양육 교사를 인도하는데 감옥에 갇힌 이 바울(Paul)과 실라(Silas)처럼 옥에 갇힌 이 환경에도 찬송하고 기도하신 분들이 나눔이 계속 이어졌습니다.

 

이 고백을 계속 듣고 있는데 정말 제 마음도 숙연해지더라고요. 비록 지금 내가 옥에 갇혀 있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분의 권능과 뜻을 나의 삶 가운데 이루어 가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이 시간을 통해 나를 구원하시고 거룩하게 빚으실 것도 믿으시길 바랍니다. 여러분, 혹시 지금 내 곁에서 나를 힘들게 하는 해롯 같은 배우자나 식구가 있습니까? 빌라도 같은 직장 상사가 있습니까? 아니면 그 대상이 나를 지금 아프게 하는 질병일 수도 있을 겁니다. 직장이나 사업의 문제 경제적인 어려움이 될 수도 있겠죠.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모두 합세해서 한패가 되어서 나를 고통스럽게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고통의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분의 권능과 뜻대로 예정하신 것을 나에게 이루어가고 계신다는 것을요. 택자에게는 어떤 것도 지나고 보면 구속사의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게 깨달아 지면 더 이상 내 입에서 불평과 원망이 아니라 감사가 나오겠죠.

 

여러분, ‘내가 감사 해야지하면서 내가 감사 감사를 외친다고 감사가 되겠습니까? 그게 아니죠. 나의 지금의 고난이 성경에 써 있고 내 현재의 이유를 아는 권능을 베풀어 주시기에 감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예정하신 대로 나와 우리 가정의 구원을 반드시 이루어 가심을 믿기 때문에 이것을 소망하기 때문에 감사하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이걸 모르니까 사건만 일어나면 나는 시험 들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 나 믿음 없는 거 아시면서 왜 이러십니까? 왜 나에게 자꾸만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네가 나에게 어떻게 이럴 수 있냐?’ 이런 종류의 말들을 쏟아 놓죠. 바로 이런 모습이 하나님의 권능과 뜻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지금 당장에 나의 만족만을 구하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러다 보니까 얼굴이 늘 어둡고 차갑고 춥습니다 이 말을 제가 들으니 참 저도 찔리는데 저도 공동체에서 얼굴이 추워 보인다는 말을 몇 번 들었습니다. 그래서 거울을 볼 때마다 깜짝 깜짝 놀랐습니다

 

도대체 이 얼굴이 구원의 소망이 있는 얼굴인가? 기쁨이 있는 얼굴인가? 그러면서 혼자 입 꼬리를 들어올려 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썩은 미소만 지어지더라고요 사실 그게 그런다고 될 일이겠습니까? 내 얼굴에 기쁨이 없는 까닭은 내 생각이 자꾸만 이 현재의 고난과 이 십자가에만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나의 구원까지도 예정하심을 그걸 믿고 확신한다면 그 얼굴에 주름이 펴지게 되겠죠 현재 이 고난은 장차 올 영광과 좋게 비교할 수가 없는 겁니다.

내가 주님의 죽으심과 이 부활에 참여함으로 내가 구원을 얻고 영생을 누리고 천국을 소유한 이 자체가 너무 감사하고 기쁜 것이죠. 목사님께서 늘 하시는 말씀처럼. 영생 화장품을 얼굴에 바르고 지내게 됩니다. 아 그러면 내 얼굴에 광채가 나지 않겠습니까?

 

(적용#3)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예정하신 지금 나의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지금 내 얼굴은 어떻습니까어둡고 춥습니까

밝고 환하게 빛나고 있습니까?

  

4.   응답 받는 기도로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29절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어떻게 기도하고 있습니까? 주님께서 그들이 받고 있는 이 위협을 굽어 살펴 주시길 기도합니다. 이들은 위협을 없애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의 위협을 주목하사 자신들을 지켜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저희 집 애들이 게 아주 어릴 때 제가 놀이터에 데리고 와서 함께 놀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아이들이 미끄럼틀을 타고 막 놀다가 간간히 저 곁에 있는 저를 한 번씩 쳐다보더라고요 애들이 왜 자꾸 저를 쳐다볼까요? ‘아빠가 지금 여기에 우리와 함께 있구나’ ‘지금 나를 지켜보고 있구나’ ‘나를 보호해줄 거야그런 믿음이 있기 때문에 보는 거죠. 그리고 이 아이들이 그 마음처럼 저 또한 이 아이들을 계속 주목했습니다 혹시나 넘어지지 않을까? 얘들이 어디 부딪혀서 다치지나 않을까? 그 마음으로 이 아이들을 주목하는 것이죠 바로 그것이 굽어 보시고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굽어보시는 것도 그렇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응시하고 주목하심으로 지켜보시는 겁니다. 우리가 그렇게 기도해야 되는 것이죠 강퍅한 종교 지도자들은 베드로와 요한에게 더 이상 너희들은 복음을 전하지 말라고 위협했습니다. 하지만 사도와 성도들은 오히려 담대하게 전하게 해 달라고 이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기도가 입에서 나오게 됐을까요이들은 자신이 예수로 죽고 예수로 살게 되었음을 믿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이 고난을 통해서 주님의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게 될 거라고 믿었습니다자신들 앞에 당면한 이 문제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신뢰했습니다.

 

그 믿음이 있으니까 이 기도가 나온 것이죠. 여러분,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고 영생을 소유하게 되었는데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어떤 해를 받는 게 싫겠습니까? 내가 예수로 죽고 내가 예수로 살게 되었는데 예수님 때문에 받게 되는 어떤 해도 나에게는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는 지금 당면한 이 고난을 피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기보다는 현재 이 고난에서도 나를 지켜달라고 지금 이 십자가를 잘 지고 가게 해주시기를 그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내 목에 매인 이 십자가를 통해서 주님은 나와 우리 가정의 구원을 이루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나의 죽어짐과 내가 썩어지고 밀알이 되는 자기 부인의 시간을 통해서 우리 가정에도 부활의 빛을 비춰 주실 것을 소망하기 때문이죠그러다 보니 이 초대 교인들의 기도는 환경의 변화가 아니라 자신들의 변화를 위한 기도였습니다.

 

회피하는 기도가 아니라 직면하는 기도였죠. 이들은 현실 회피 문제 회피 상황. 회피하지 않았습니다. 담대하게 문제를 직면하게 해 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상황을 돌파하게 해 주시기를 기도했던 것이죠 하나님 저들은 우리를 위협하고 있지만 주님께서 우리를 붙드시고. ‘주님, 우리를 담대하게 하심으로 이 생명의 복음을 누리고 이 생명의 복음을 전하게 해 주십시오그렇게 기도했던 겁니다 여러분 요즘 나는 어떻게 기도하고 있습니까 지금 내가 시련 가운데 있다면 주님께서 나를 굽어 살펴주시기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이 고난 한복판에서도 주님 나를 보사, 이 문제를 통과하게 해달라고 기도 하시길 바랍니다. 오늘 내 삶의 형편이 어떠하든지 담대하게 말씀을 적용하고 내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 하시길 바랍니다.

 

이어서 사도들과 성도들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30절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miraculous signs and wonders)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담임 목사님께서는 이 본문을 설교하실 때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곤고한 환경에서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 표적이 되고 그 사건이 해석되는 것이 기사라고요 내가 어떤 환경 속에서도 예수의 이름을 가지면 나의 모든 환경은 남을 죄에서 꺼내줄 환경으로 쓰인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은 내가 이미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거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의 모든 죄와 전적인 부패와 무능력을 시인하고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내가 기도할 때. 성령님은 나로 하여금 십자가로 남길 진리의 길을 선택하게 하십니다. 사망의 길이 아니라 생명의 길을 걷게 하십니다. 그래서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 자체가 이미 응답 받는 기도입니다사도와 성도들이 그렇게 기도했을 때 이제 기도 응답이 나타났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31절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기도하던 그들이 변화되었습니다. 헤롯이나 빌라도 종교 지도자들이 변화된 게 아니었습니다. 위협의 환경은 전혀 바뀌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기도했던 그들이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내 삶의 지축이 흔들리고 진동하는 사건에서 받게 되는 기도 응답은 내가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두려움 충만, 욕심 충만, 자기애 충만, 의심 충만, 불신 충만, 불안 충만에서 성령으로 충만해집니다 말씀으로 충만해집니다 기도했더니 내가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꼴보기 싫은 저 인간이 변화되는 게 아니라 그를 미워하던 내가 먼저 변화되는 것이죠. 기도하던 내가 성령 충만하게 되는 것 내가 죽고 내 안에 예수님이 사시는 것. 그게 최고의 기도 응답입니다. 여러분 성경 충만이 무엇입니까? 내가 말씀을 적용하고자 듣기 힘든 바를 드러내는 것이죠 내가 그렇게 변하면 성령의 열매는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이 나누어 먹습니다.

 

내가 말씀으로 성령으로 충만하면 가장 먼저 내 곁에 있는 사람들 식구들이 귀히 여기기 시작합니다. . 우리 엄마가 왜 저렇게 변했지? 우리 아빠가 뭐 때문에 저렇게 달라졌지? 바로 우리 가정의 구원 역사는 그때부터 시작되는 것이죠. 그런데 이 성령 충만은 단 하루만으로 그쳐서는 안 됩니다. 매일 이어지고 연습 되고 반복되어 져야 됩니다 그래서 날마다 성령 충만하기를 기도해야 되죠. 우리가 보통 어떤 계기로 이렇게 은혜를 이렇게 받게 되면 하루 이틀 정도 이렇게 적용합니다 하지만 다음 날이면 다시 이전으로 돌아가버리죠 그러니 우리 자녀들도 그걸 다 압니다. 어느 날 내가 갑자기 아들에게 사랑한다는 카톡이라도 보내면, 아빠 요즘 일대일 양육 숙제 적용하는 거 아니야? 엄마 혹시 목장 처방 때문에 억지로 그러는 거죠? 애들도 내가 진짜 성경 충만한지, 아닌지를 다 압니다 그래도 그렇게라도. 내가 들은 말씀이 있어서 적용한다면 그게 성경 충만하다는 증거겠죠 만일. 나는 하나도 변화된 게 없는데 내 기도 응답으로 남편과 자녀가 변화되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오히려 이 변화된 남편과 자녀 입장에서는 전혀 변하지 않는 이 엄마를 보면서 얼마나 이상하고 억울하겠습니까? 기도하는 나는 하나도 안 바뀌고 상대방이 바뀌기 만을 바란다면 그 기도는 바로 욕심 충만의 기도입니다.

 

(적용#4)


-나는 고난을 피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까?

고난에서 지켜달라고 기도합니까? 나는 나 자신의 변화를 위해 기도합니까?

내 곁에 사람과 환경이 변하기 만을 기도합니까?

 

사실 저는 돌아보면 이런 응답 받는 기도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제 신앙은 이 기복의 수준에서 더 나아가지를 못했습니다. 그저 이 고난을 피하게 해 주시기를 이 문제가 빨리 해결되게 해 주시기 만을 기도했던 것 같습니다. 과거에 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에 저희 식구들에게 많은 위로를 해 주셨던 분이 이모와 이모 부셨습니다. 지난주에 제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나눔을 했었는데요. 그런데 이모부는 언제나 교회와 크리스찬들을 늘 비판하던 분이셨습니다. 그리고 이모는 독실한 불교 신자인 보살이었습니다 그 이모부가 저와 함께 식사를 하던 자리였습니다. 저에게 이런 말을 하셨어요. 너네 집이 예수 믿어서 잘 된 게 뭐가 있냐? 그렇게 얘기하시면서 저에게 소주잔을 딱 내밀었습니다. 제가 그 잔을 어떻게 했을까요?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그 잔을 받아 마셨습니다. 그리고는 네 맞습니다. 그렇게 말해버렸습니다. 아버지 사건이 해석되지 않다 보니 예수를 믿어도 나와 우리 집은 잘 된 게 없다고만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불신자 앞에서 제 신앙을 완전히 부정해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5년 뒤에 그 이모부의 아내인 이모가 쓰러지셨습니다. 지병이 심해져서 중환자실에 입원하시고 아주 위독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제가 그 소식을 듣게 된 때가 주일이었습니다. 예배를 드리는데 과거에 있었던 그 이모부와의 대화가 제 머릿속에 이렇게 계속 떠오르더라고요 내가 도대체 불신자 앞에서 어떻게 그런 말을 했는지 너무나 괴로웠습니다 그리고 이 마지막에. 이 마지막 때의 이모가 구원받고 천국에 가시기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아침이었습니다. 이종 사촌형에게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그런데 이 전화의 내용이 이랬습니다 이모가 잠시 의식이 돌아왔는데 말을 전혀 못 하시는데 종이 한 장을 달라고 하셨답니다. 그리고 그 받은 종이에다가 말씀은 못하고 은혜, 성경이라는 이 두 단어를 쓰셨다는 겁니다. 이 불교 신자인 그 집 안의 식구들이 이게 뭔지 해석이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저에게 전화를 하신 거죠. 이모는 교회 문턱을 넘으신 적이 없었습니다 입원하기 전에는 절에도 다녀 오셨거든요 중환자실에서는 가족 이외에 누구도 만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모의 이런 행동에 가족들도 귀히 여기고 저도 놀라게 됐습니다 그날 곧바로 성경책을 사서 병원으로 붙여드렸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그 병원을 가려고. 제 이종 사촌 형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모가 지금 깨어나지 않고 있으니까 지금 너가 와도 대화를 할 수 없어서 소용이 없다.

 

나중에 오라고 만류를 하더라고요. 하지만 저는 이 때가 하나님께서 이모의 구원을 위해 주신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무작정 지방에 있는 병원에 찾아갔습니다. 중환자실 복도에는 5년 전 너네 집이 예수 믿어서 잘 된 게 뭐가 있냐? 그렇게 얘기하셨던 이모부가 초조한 모습으로 앉아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날. 저는 처음으로 이모부에게 복음을 전하게 됐습니다 일흔이 넘도록 말문을 굳게 닫고 계셨던 이모부는 이모가 만일 회복되어서 교회에 나간다면 나도 나가야지 뭐 이렇게 얘기하시는 겁니다. 그 말을 듣는데 정말 제 귀를 의심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면회 시간이 되어서 병실에 들어갔는데 순간 이모의 의식이 돌아와서 눈을 뜨고 계시는 겁니다. 저는 이모에게 하나님은 이모를 사랑하신다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산소 호흡기를 달고 계신 이 이모의 손을 꼭 잡고 그렇게 기도하는데 이모도 눈물을 흘리시면서 고개를 끄덕이시더라고요. 마치 제가 오기를 기다리신 것처럼. 그리고 그 말을 해주길 바라던 그런 눈빛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위독 하셨던 이모가 몇 달 뒤에 병에서 회복되어서. 병원에서 퇴원하셨습니다. 그리고 교회에 나오시게 되었습니다. 휠체어를 탄 이모를 뒤에서 밀면서 함께 교회에 오신 분은 다름 아닌 이모부 이셨습니다이모는 그렇게 예수님을 믿으시고 그 이듬해 천국에 가셨습니다

 

장례식 날 찬송이 울려 퍼지는 빈소에서 이모부는 제 손을 꼭 잡으시면서 이 말을 하셨습니다 정화나 고맙구나. 네가 그때 보내준 성경책이 이모 영정 사진 앞에 펼쳐져 있다정말 고맙구나. 그렇게 이모부가 얘기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모가 소천 하신 뒤에도 이모부는 혼자서 교회를 출석하시면서 예배를 드리셨습니다. 주님은 5년 전에 이모부의 조롱 앞에서 예수님을 거스르고 대적했던 저를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다시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회개의 자리로 저를 몰아가시고 다시 일으켜 세워 주셨습니다 과거에는 입조차 열지 못했던 저였는데 이제는 이 복음을 담대하게 전하기 위한 사역자의 길을 걷게 하셨습니다 저는 최근에 몇 차례 영접을 위한 심방을 다녀오게 됐습니다공교롭게도 제가 만나 뵈었던 모든 분들이 제 이모와 비슷한 연세 어르신들이었습니다 그 중에는 한 집사님으로부터 아버지 영접에 대한 요청을 받게 됐습니다 집사님이 아버지께서 췌장암 사기에 장기까지 전이된 상황이었습니다 복음을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던 어르신과 교회에 냉담하다던 이 아내 분을 만나게 됐습니다 그런데 그날 큐티 말씀은. 골로새서 4장에 전도할 문이 열렸으니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길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게다가 그날 수요 예배까지도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것이며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다고 하시더라고요 이 말씀을 의지하며 집사님의 부모님을 뵈었습니다 제가 또 두 분을 뵙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함께하신 동생 목자님과 따님 집사님도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난 사건. 자신이 낙태했던 사건을 눈물로 그 자리에서 간증하셨습니다 그러자 이 아버님은 입술을 열어 예수님을 영접하시고 병상 세례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교회에 냉담 하셨던 어머님도 그 옆에 있던 조카 청년도 예수님을 영접하겠냐는 그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고 함께 영접 기도를 따라 하셨습니다 기도를 드리는데 하나님이 참 오래 기다리셨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감사하다는 눈물의 기도가 나왔습니다. 무엇보다도 그 자리에 함께 계셨던 분들이 믿음의 동료가 되어서 한 마음으로 들리는 그 기도에 하나님은 구원으로 답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응답 받는 기도라는 걸 알게 해 주셨습니다. 교회로 돌아오는데 가슴이 벅차고 눈물이 나더라고요. 형형할 수 없는 감격이 올라왔습니다 한 영혼이 주님의 이름을 부름으로 구원을 얻은 기쁨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려웠습니다 주님은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회개할 것 없는 의인 99명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다고 하셨습니다정말 그 구원의 기쁨이 그분을 따르는 우리에게도 가장 크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습니다. 구원을 위한 기도는 어떤 식으로든 하나님께서 100 프로 응답하신다는 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Epilogue>

 

1)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공동체와 소리를 높여 부른다.

2)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말씀으로 삶을 해석한다.

3)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말세에 성령을 부어 주신다.

4)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흑암 속에서 구원을 받는다.

5)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내면이 바뀌고 언어가 달라진다  

6)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반대의 영으로 인내하고 객관적으로 설명한다

7)  우상의 특징은 언젠가는 반드시 나를 배신한다는 것이다

8)  찾아 갈 공동체나 동료가 없는 것은 평소에 공동체가 없기에 내가 교만하기 때문이다

9)  찾아 갈 공동체나 동료가 없는 것은 자기 중심적인 합리화를 하기 때문이다

10) 말씀이 없는 기도는 기복으로 흐르게 되어 있다

11) 말씀이 없는 기도를 하면 내가 하나님 이라서 하나님 자리에 앉아 내 뜻대로 하려하기 때문에 작은 일에도 분노하면서 허사를 경영한다

12) 나를 거룩하게 빚으시려고 고난을 사용하신다

13) 물질의 십자가, 권리의 십자가, 질병의 십자가, 고통의 시간을 통하여 하나님의 권능과 뜻을 이루어 가신다

14) 예수님으로 죽고 예수님을 살게 됨을 알고 영생을 받음을 신뢰하니 그러한 기도가 나온다

15) 예수님 때문에 받는 어떠한 고난도 달게 받게 되는 것이다

16) 내 몫의 십자가를 통하여 가정의 부활을 비춰 주신다

17) 회피의 기도가 아니라 직면하는 기도를 해야 한다

18) 내 안에 내가 죽고 내 안에 예수님이 사시는 것이 성령충만이다

19) 내가 변하는 것이 구원의 역사의 시작이다

20) 응답 받는 기도는 성령충만의 기도로 이어진다

21) 내가 간절함과 절박한 심정으로 드렸던 기도에 하나님은 언제나 신실하게 응답하신다

22) 때로는 내가 전혀 예상치 않았던 때 상상하지 못했던 모습으로 응답해 주시기도 하신다

23) 나의 기도에 응답해 주신 이 하나님 때문에 내가 감격하게 된다

24) 내가 찾고 의지하는 것은 반드시 나를 배신합니다. 사람도 명예도 그렇다.

25) 평소에 공동체가 없기 때문에 인간적인 위로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26) 예수의 피를 나눈 믿음의 공동체에서만 한마음으로 기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27) 공동체를 떠난 신앙은 절대 자립할 수 없다.

28) 우리가 연약 하기에 넘어지는 존재이기에 나를 일으켜줄 지체가 있어야 한다.

29) 때로는 우리가 공동체에서 상처받을 수도 있지만 그것 때문에 나는 공동체 안 가겠다는 바로 그것이 자기 중심적인 합리화다

30) 공동체 안에서 오해하고 상처받고 내가 회복되는 시간을 통해서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게 되는 것이 바로 내가 거룩해져가는 성화의 과정이기도 하다.

31) 지금 겪고 있는 큰 문제는 내가 함께 소리 높여서 중보해야 할 기도 제목이다

32) 우리가 어떤 이야기를 듣더라도 그것은 바로 그 지체의 기도 제목이다.

33) 우리의 기도 대상은 바로 절대 통치자 하나님이시고 그분께 나의 모든 사정을 아뢰고 기도하는 것이다.

34) 말씀이 없는 기도는 언제나 기복으로 흐르기 마련이다

35) 하나님은 이미 그분의 뜻을 말씀으로 다 계시해 주셨는데 기복적인 기도는 내가 말씀을 듣고도 계속 내가 뭘 다 하려고만 부르짖는 것이다 

36) 기도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말씀에 대한 반응인데 이 말씀과는 상관없이 나의 생각만 주구장창 부르짖는다면 이건 소통이 아니라 불통인 것이다.

37) 정욕으로 구하는 떼 부리는 기도에 불과하다

38) 우리가 듣게 된 말씀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알아가게 된다

39) 진정한 기도 응답은 상황과 환경이 바뀌기보다 이 사건을 통한 하나님의 의도를 말씀으로 깨닫게 되는 것이다

40) 내가 영적인 것을 깨닫게 되면 육적인 것도 내가 필요한 만큼 채워주신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41) 이처럼 우리가 자꾸 분노하고 허사를 경영하려는 이유는 내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있기 때문이다

42) 우리가 자꾸 분노하고 허사를 경영하려는 이유는 심판자의 자리에서 통치자 노릇을 하려고 하기 때문이고 세상의 군왕들과 관리들처럼 그 자리에 앉아서 내가 내 마음대로 내 뜻대로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43) 우리가 자꾸 분노하고 허사를 경영하려는 이유는 삶의 주권자 대주재(Sovereign Lord0이신 이 통치자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때문이다

44) 그러다 보니까 옳고 그릇만 따지면서 작은 일에도 그렇게 분노하고 허사를 경영하게 되는 것이다

45) 인본주의는 내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서 심판자 노릇을 내가 하려고 하는 것이다.

46) 옳고 그름의 가치관으로 분노하고 끊임없이 헛된 일을 꾸미고 허사를 경영하게 되는 것이다

47)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으심 이다

48) 그런데 거기서 끝이 아니며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그를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것이다.

49) 지금 겪고 있는 이 고난과 내 몫의 십자가도 하나님의 권능과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려고 예정하신 것이다.

50) 내가 이 십자가를 지고 가다 보면 내 현재의 이유를 깨닫는 권능을 얻게 된다.

51) 이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게 되며 나를 구원하시려고 이 고난을 사용하시는 것이고 나를 거룩하게 빚어가시기 위해서 이 일을 쓰고 계시는 뜻을 깨닫는 것이다

52) 비록 지금 내가 옥에 갇혀 있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분의 권능과 뜻을 나의 삶 가운데 이루어 가고 계심을 믿어야 한다

53) 하나님께서 이 시간을 통해 나를 구원하시고 거룩하게 빚으실 것도 믿어야 한다

54) 그런 고통의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분의 권능과 뜻대로 예정하신 것을 나에게 이루어가고 계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55) 택자에게는 어떤 것도 지나고 보면 구속사의 과정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게 깨달아 지면 더 이상 내 입에서 불평과 원망이 아니라 감사가 나오게 되는 것이다

56) 나의 지금의 고난이 성경에 써 있고 내 현재의 이유를 아는 권능을 베풀어 주시기에 감사하게 된다.

57) 하나님께서 그분의 예정하신 대로 나와 우리 가정의 구원을 반드시 이루어 가심을 믿기 때문에, 이것을 소망하기 때문에 감사하게 되는 것이다

58) 이걸 모르면 사건만 일어나면 나는 시험 들었다고 말한다.

59) 하나님, 나 믿음 없는 거 아시면서 왜 이러십니까? 왜 나에게 자꾸만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네가 나에게 어떻게 이럴 수 있냐?’ 이런 종류의 말들을 쏟아 놓는 바로 이런 모습이 하나님의 권능과 뜻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지금 당장에 나의 만족만을 구하기 때문에 그런 것으로 그러다 보니까 얼굴이 늘 어둡고 차갑고 추운 것이다.

60) 내 얼굴에 기쁨이 없는 까닭은 내 생각이 자꾸만 이 현재의 고난과 이 십자가에만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61) 하나님께서 나의 구원까지도 예정하심을 그걸 믿고 확신한다면 그 얼굴에 주름이 펴지게 되는 것이다

62) 현재 이 고난은 장차 올 영광과 좋게 비교할 수가 없는 것이다.

63) 내가 주님의 죽으심과 이 부활에 참여함으로 내가 구원을 얻고 영생을 누리고 천국을 소유한 이 자체가 너무 감사하고 기쁜 것이다.

64) 목사님께서 늘 하시는 말씀처럼 영생 화장품을 얼굴에 바르고 지내게 되는 거이고 그러면 내 얼굴에 광채가 나는 것이다

65) 하나님께서 우리를 굽어보시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응시하고 주목하심으로 지켜보시는 것으로 우리가 그렇게 기도해야 되는 것이다

66)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이 고난을 통해서 주님의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게 될 거라고 믿어야 하며 자신들 앞에 당면한 이 문제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신뢰해야 하는 것이다.

67) 그 믿음이 있으니까 이 기도가 나온 것이다.

68)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고 영생을 소유하게 되었는데 무엇이 두렵겠나? 어떤 해를 받는 게 싫겠나?

69) 내가 예수로 죽고 내가 예수로 살게 되었는데 예수님 때문에 받게 되는 어떤 해도 나에게는 유익이 되는 것이다.

70) 그래서 우리는 지금 당면한 이 고난을 피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기보다는 현재 이 고난에서도 나를 지켜달라고, 지금 이 십자가를 잘 지고 가게 해주시기를 그렇게 기도해야 한다

71) 왜냐하면 내 목에 매인 이 십자가를 통해서 주님은 나와 우리 가정의 구원을 이루어 주시기 때문이다

72) 나의 죽어짐과 내가 썩어지고 밀알이 되는 자기 부인의 시간을 통해서 우리 가정에도 부활의 빛을 비춰 주실 것을 소망하기 때문인 것이다

73) 그러다 보니 이 초대 교인들의 기도는 환경의 변화가 아니라 자신들의 변화를 위한 기도였던 것이다.

74) 회피하는 기도가 아니라 직면하는 기도였는데 이들은 현실 회피 문제, 회피 상황에서 회피하지 않았다.

75) 담대하게 문제를 직면하게 해 주시기를 기도했다.

76) 상황을 돌파하게 해 주시기를 기도했던 것이다

77) 하나님 저들은 우리를 위협하고 있지만 주님께서 우리를 붙드시고. ‘주님, 우리를 담대하게 하심으로 이 생명의 복음을 누리고 이 생명의 복음을 전하게 해 주십시오그렇게 기도했던 것이다

78) 지금 내가 시련 가운데 있다면 주님께서 나를 굽어 살펴주시기를 기도해야 한다

79) 지금 이 고난 한복판에서도 주님 나를 보사, 이 문제를 통과하게 해달라고 기도 하시길 바란다.

80) 오늘 내 삶의 형편이 어떠하든지 담대하게 말씀을 적용하고 내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 하시길 바란다.

81) 곤고한 환경에서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 표적(miraculous sign)이 되고 그 사건이 해석되는 것이 기사(wonders)인 것이다

82) 내가 어떤 환경 속에서도 예수의 이름을 가지면 나의 모든 환경은 남을 죄에서 꺼내줄 환경으로 쓰인다고 하셨다.

83)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은 내가 이미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거다

84) 하나님 앞에서 나의 모든 죄와 전적인 부패와 무능력을 시인하고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이다

85) 예수의 이름으로 내가 기도할 때 성령님은 나로 하여금 십자가로 남길 진리의 길을 선택하게 하신다.

86) 예수의 이름으로 내가 기도할 때 사망의 길이 아니라 생명의 길을 걷게 하시므로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 자체가 이미 응답 받는 기도다

87) 내 삶의 지축이 흔들리고 진동하는 사건에서 받게 되는 기도 응답은 내가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것으로 나타난다

88) 두려움 충만, 욕심 충만, 자기의 충만, 의심 충만, 불신 충만, 불안 충만에서 성령으로 충만해지고 말씀으로 충만해진다

89) 기도했더니 내가 변하게 되는 것이다

90) 꼴 보기 싫은 저 인간이 변화되는 게 아니라 그를 미워하던 내가 먼저 변화되는 것이다

91) 기도하던 내가 성령 충만하게 되는 것, 내가 죽고 내 안에 예수님이 사시는 것, 그게 최고의 기도 응답이다.

92) 성경 충만은 내가 말씀을 적용하고자 듣기 힘든 바를 드러내는 것이다

93) 내가 그렇게 변하면 성령의 열매는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이 나누어 먹게 된다.

94) 내가 말씀으로, 성령으로 충만하면 가장 먼저 내 곁에 있는 사람들 식구들이 귀히 여기기 시작한다.

95) 그런데 이 성령 충만은 단 하루만으로 그쳐서는 안 되며 매일 이어지고 연습 되고 반복되어져야 한다

96) 그래서 날마다 성령 충만하기를 기도해야 되는 것이다

97) 내가 들은 말씀이 있어서 적용한다면 그게 성경 충만하다는 증거다

98) 기도하는 나는 하나도 안 바뀌고 상대방이 바뀌기 만을 바란다면 그 기도는 바로 욕심 충만의 기도다.

99) 구원을 위한 기도는 어떤 식으로든 하나님께서 100 프로 응답하신다는 것을 알게 하셨다.

 

Posted by 윤강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