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교회 2021년 8월22일 주일예배 말씀요약(사도행전 19: 1~ 7/ 성령의 임하심)]
<사도행전 19: 1 ~ 7>
1절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While Apollos was at Corinth, Paul took the road through the interior and arrived at Ephesus. There he found some disciples)
2절 이르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르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and asked them, "Did you receive the Holy Spirit when you believed?" They answered, "No, we have not even heard that there is a Holy Spirit.")
3절 바울이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니라(So Paul asked, "Then what baptism did you receive?" "John's baptism," they replied)
4절 바울이 이르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Paul said, "John's baptism was a baptism of repentance. He told the people to believe in the one coming after him, that is, in Jesus.")
5절 그들이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On hearing this, they were baptized into the name of the Lord Jesus)
6절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When Paul placed his hands on them, the Holy Spirit came on them, and they spoke in tongues and prophesied)
7절 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There were about twelve men in all)
<Prologue>
우리가 땅의 씨앗을 뿌리면 생명을 맺습니다. 과학자들이 씨앗의 색깔과 수분 단백질 등의 성분을 백 프로 똑같이 만들어서 심었습니다. 그 씨앗이 (발아하여) 맺어졌었을까요? 아무리 양육을 해도 조건을 똑같이 해도 생명이 자라지 않습니다. 신기하지 않습니까? 생명은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삼위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과 은혜는 가르친다고 되지 않습니다. 제자 양육은 성령이 선행되어야 하는데 시간적 순서로 말할 수 없습니다. 성령의 제자 양육은 성령에서 시작됩니다. 성령을 받지 못하면 개미처럼 수고해도 썩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 있었는데 예루살렘에 임하신 성령이었고 에베소에서 성령 강림이 임하시게 됩니다. 제자 양육과 이어지는 본문이기에 제자 양육은 성령의 임하심이 절대적입니다. 성령이 가르쳐서 되는 것이 아니지만 이렇게 가르치기도 해야 합니다. 오늘은 성령의 임하심에 생각해 보겠습니다.
<말씀 요약>
1. 구원에 분별에 절대적입니다.
1절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바울(Paul)에게 아볼로(Apollos)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게 하는 큰 하나의 역할을 했다고 보여지는데 원래 바울은 아시아의 에베소(Ephesus)로 가고 싶었지만 베드로의 구역 임을 의식해서 마게도니아(Macedonia) 유럽으로 갔습니다.
2차 여행 마지막에 들러서 강론했더니 유대인들이 오래 머물라고 청했지만 하나님의 뜻이면 다시 오겠다고 했었고 돌고 돌아 다시 왔습니다. 어떻게 분별 했을까요?
고린도 후서(2 Corinthians) 7장 10절 보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게 하는 것이오.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Godly sorrow brings repentance that leads to salvation and leaves no regret, but worldly sorrow brings death)
바울은 아볼로에 대해 살짝 근심을 한 것 같아요 아볼로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입니다. 지금으로 따지면 하버드입니다 너무 탁월합니다. 그런데 이 신약 성경에 히브리서가 저자 미상이지만 아볼로 저자 설이 유력하다고 합니다. 히브리서를 쓸 정도이면 대단한 사람입니다. 히브리서의 문체가 다릅니다. 대단한 말씀입니다. 출애굽기(Exodus)-레위기(Leviticus)-신명기(Deuteronomy)의 주석을 달았는데 레위기에 단 주석은 아주 특별한 주석이라고 합니다. 구약을 좔좔 꿰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아볼로의 이름을 안 남겨주셨습니다. 디모데전후서도 바울이 썼는데 디모데 이름을 붙여 주셨습니다. 아볼로가 그곳의 후임으로 갔는데 말을 엄청 잘합니다. 바울과 비교하면서 아볼로에게 뻑이 갔습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고린도교회에 파당을 가져왔습니다. 고린도 전서 2장에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고 하나님만이 자라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아볼로를 유리그릇처럼 다루었다고 합니다.
편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동역을 했음에도 아볼로 이름이 바울의 마지막 로마서 16장에 안 나옵니다. 구속사를 잘 아는데도 한 마음이 안되었습니다. 아볼로의 언어와 명칭과 법이 그를 사로잡고 넘어가지 못하는 본인의 지식 때문에 여기까지 되었습니다. 그랬을 것 같습니다. 히브리서를 보면 ‘내가 바울보다 잘났다’라는 생각이 들 것 같습니다. 이 모든 것은 물론 아볼로에 대한 결론이지만 왜 이때가 에베소에 올 때일까요? 에베소가 아주 황금어장이지만 항상 십자가의 지혜와 타이밍을 분별하는 바울입니다. 고린도에서 가르치다 보니 두 도시가 비슷하고 돈 많고 음란한 점이 많았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많다고 했고 양육의 시간을 내니 열매가 많았어요. 의로운 아덴(Athens)에서는 열매가 없어서 떠났잖아요. 그러니 이제 고린도(Corinth)는 1년6개월 있었는데 에베소(Ephesus)에 복음이 들어가야 하잖아요. 그가 떠난 에베소는 아볼로가 요한의 세례만 안다고 했잖아요.
에베소가 근심이 되어서 갈라디아(Galatia) 지방 다니는 중에 자기의 고향 길리기아(Cilicia) 다소(Tarsus)도 못 가고 급히 온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도 분별했습니다. 바울은 가고 싶은 에베소가 그때 베드로 사도 구역이라고 안 갔잖아요. 너무 가고 싶었는데 성령이 막았다고 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도 에베소가 생각보다 전도가 안 되었어요 또 분별했습니다. 최고의 아볼로가 전할 때도 대단하게 여기니 그렇기도 했겠고 남의 터에 가는 것 같아서 안 갔습니다. 둘은 만난 적이 거의 없습니다. 아볼로가 인도받아 추천을 받고 고린도를 떠났고 바울은 에베소가 요한의 세례만 아는 것 같아 걱정되어 모두의 마음을 다 읽었잖아요.
복음을 전한다고 마구 가고 이러면 안 됩니다. 사람의 마음을 읽어야 합니다. 전할 때라고 성령이 올 때는 급히 갔습니다. 에베소가 거점지라는 것을 알고도 때마다 분별을 합니다. 모두 성령의 작별로 윈윈(win-win)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분별하고 분별해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아볼로의 말을 듣고 좋다고 하니까 걱정되는 마음이 이해되십니까? 바울은 죽이려고 하고 아볼로는 좋다고 하는데 바울은 박해 받았다는 언급은 없습니다. 이런 사람이 교회를 담당했다는 말이 없습니다. 탁월함은 있지만 2% 부족한 부분이 있습니다. 이것은 구원에 연관되기 때문에 분별해야 합니다. 성경은 인간론이기 때문에 성령이 임하신 바울에 정확한 분별이라고 생각합니다. 임하신 분별이 역사를 가지고 옵니다. 내 생각으로 한 판단이 한 영혼을 좌우합니다.
(적용#1)
-성령의 임하심으로 항상 분별하나? 내 생각으로 판단하나?
-나는 주변 사람들이 편하다고 하나? 어려워하나? 나는 뒤끝이 있나? 없나?
2. 어떤 제자가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어떤 제자를 만났는데 예수님의 제자를 의미하지만 아볼로의 제자인지 아시아를 관장하는 베드로 제자인지 모르는 제자를 말합니다. 만났다는 말은 찾았다는 뜻입니다. 적극적으로 찾아가 만났습니다. 반기는 여러 사람 가운데 어떤 사람이 있었다는 것인데 가장 최근에 떠난 사람이 아볼로잖아요? 그러니까 근심이 되어서 이 제자들부터 찾아가 만났습니다.
2절 이르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르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
바울이 이제 진단을 해야 되죠. 질문으로 양육이 시작됩니다. 질문을 잘하는 사람이 성령이 임하신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도시를 방문했을 때도 없던 기록이 나옵니다. 늘 강론을 했잖아요 이곳에서는 성령을 받았는지 먼저 묻고 사역을 시작합니다. 아볼로 제자들이 교만했거든요. ‘너희가 도대체 누구 제자냐? 성령을 받았느냐?’ ‘성령의 계심을 듣지 못했다’ 바울의 근심이 맞았습니다. 바울이 만난 사람들은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한 제자였습니다. 유심히 보니 성령을 받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과 성령의 받는 것은 다르지 않습니다. 성령을 받지 못하면 예수님의 제자가 아닙니다. 성령을 받지 못하면 결코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갈 수 없고 에베소가 힘든 곳이기 때문에 바울이 오자마자 확인을 하는 것입니다. ‘에베소 같은 곳은 음란하고 그냥 세상 세력에 찌든 사단의 세력이 강하다’라고 보는 곳이기 때문에 성령의 임하심이 없이는 에베소 같은 내 남편 자식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사단의 나라가 너무 강하면 우리는 성령 없이는 그 사람들을 주님께 인도할 수 없습니다.
에베소 같은 저 인간의 마음에 교회가 세워지기 위해서는 어떤 제자가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야 하는데 그럼 성령을 어떻게 받을 수 있을까요? 원한다고 받아 지나요? 성령을 돈의 사려고 했다고 책망 받은 사례도 있습니다. 구제하고 헌금하면 성령 받나요? 돈으로 살 수도 간절히 원한다고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합니다. 믿을 때에 성령을 받습니다. 믿을 때라는 말은 조건이 아닙니다. 믿음이 조건이 되면 행위가 됩니다. 믿을 때라는 말은 동시적 동작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동시에 일어납니다. ‘믿었다면 성령을 받았을 텐데 왜 나타나지 않느냐?’ 내가 예수를 믿었다면 동시에 성령의 열매와 모습이 나타나야 한다 아무리 탁월한 교회와 양육을 받아도 성령이 임하시지 않으면 예수의 제자가 아니고 사람의 제자로 살아갈 뿐입니다. 어떤 제자들이 성령이 있는 것을 듣지 못한 것처럼 믿기 때문에 어떤 수치도 당할 수도 있는 것이고 죽기보다 싫은 적용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죽어서 아내가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다고 합니다. 이분은 기도와 성경 필사에 전념하시는 제자 반열에 있는 분입니다. 실제로 아내가 마지막 왔을 때 정신과를 가자고 했는데 내가 왜 거기를 가냐고 3시간을 따지고 3시간을 반박하고 당신이 예수를 믿으면 나를 용서해야 한다고. 아내를 향해 용서와 사랑을 외치니까. 아내가 그 이후로 모든 연락을 끊고 이혼 서류를 보내왔다고 합니다
용서는 가해자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을 때 성령을 받았느냐? 도대체 누구 제자냐? 믿음이 무엇입니까? 나의 수치를 인정하고 죽어지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분은 그렇게 열심히 성경 필사를 하고 보고 경건하게 지내는데 아내가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다고 이렇게 요새 간수 같은 사람이 많습니다. 이분이 고백했는데 죽기보다 싫은 것이 인정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죽기보다 싫은 것이 정신과를 가는 것이고 나 자신을 직면하는 것, 자녀에게 아내에게 사과하는 것, 공동체에 고백하는 것은 믿음이 있을 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집사님도 아내와의 문제에 있어서 자신이 죄인임을 생각해 본 적도 듣지 못했습니다. 무엇을 믿습니까? 오늘 내게 말해주는 말씀을 믿으시면 됩니다. 발버둥 치는 것도 말씀을 믿는 자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효과적으로도 우시는 것입니다. 에베소보다 악한 시대입니다.
바울이 이것을 간파했습니다. 어떻게 간파 했나요? 험한 전도여행을 하고 핍박을 당하면서 아볼로를 분별했어요 그러니까 어떤 제자도 분별을 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임하신 분별이라고 생각합니다. 성도로서 제자로서 무서운 열심 뒤에 감추어진 빈자리 그것을 보았습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라고 한 이 질문은 실전적인 질문이고 그들의 수준을 드러내는 질문입니다. 목사에게 ‘구원의 받으셨어요?’라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적용#2)
-내 실체를 드러내 주었던 질문은 어떤 질문이었나?
-지금 나에게 죽기보다 싫은 적용은 무엇인가?
-아내도 남편도 자녀도 맞다고 말하는데 나 혼자서 인정하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성령을 받았나?
-여러분은 누구의 제자인가? 내가 제일 기억나는 스승은?
3.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3절 바울이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니라
4절 바울이 이르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5절 그들이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분별을 제대로 한 거예요 삶의 능력도 적용도 자신의 수치를 드러냄도 없는 어떤 제자들을 향해 바울이 묻습니다 너희가 무슨 세례 받았느냐? 브리스길라(Priscilla)와 아굴라(Aquilla)가 아볼로(Apollos)를 양육한 것처럼 바울은 이 어떤 제자들을 양육해 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양육은 답을 제시하는 게 아니라 질문을 계속해야 돼요. 질문을 통해 자신을 생각하고 묵상하고 말씀에 비추어 자신을 살핌으로 양육이 되어지는 거죠. 바울은 다시 질문합니다. ‘너희가 무슨 세례 받았냐?’그러니까 제자들이 아주 자신 있게. 요한의 세례요. 이거는 ‘우리는 아볼로 제자입니다’ 이거하고 똑같아요 이 대단한 아볼로가 세례 요한의 세례를 받았다고 하니까 그 대답을 듣고. 바울은 그 요한이 세례를 베풀며 어떤 말을 했는지 그들이 믿는 요한의 입을 빌려서 이야기를 해줍니다. 그 요한이 뭐라고 말했습니까? 바울이 인용한 마태복음 3장 11절을 보면.
(마태복음/Mattew 3:11)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I baptize you with water for repentance. But after me will come one who is more powerful than I, whose sandals I am not fit to carry. He will baptize you with the Holy Spirit and with fire.)
여기 성령 세례 나오죠. 요한의 세례는 물로 세례를 베풀어요 우리는 요한이 어떤 인물인지 요한의 세례가 어떠한지 지난번 설교에서 ‘회개하라 독서의 자식들아’를 묵상했어요 그런데 이 요한의 메시지가 아직 오지 않은 소리, 예배하는 자의 소리라면 예수님은 하나님나라 자체가 이제 이미 왔잖아요. 그렇죠 그게 예배하는 자고 이미 임한 메시지에요 그 능력의 차이는 비교할 수가 없죠.
세례 요한의 설교가 듣기에 의롭고 멋있어서 그에게 그렇게 열광하는 사람이 많아도 이 속 사람의 죄를 못 보기 때문에 아까 이혼 앞둔 분도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예수님의 설교를 들으면 지금 하나님 나라가 내게 임했기 때문에 이 더러운 내 속을 찔러주는 임박한 설교이기 때문에 변화가 일어나는 거예요. 요동이 되는 거예요. ‘뭐 할 거다’라고 하는 것 때문에 요동되진 않아요. 지금 내 속을 찔러주니까 즉 예수님의 세례는 물 세례가 아니고 성령과 불의 세례예요. 불은 심판이죠. 즉 예수님의 세례는 구원과 심판이 함께 임하는 세례예요. 무슨 말이죠? ‘내가 예수 믿으면 잘 된다’가 아니라 내가 예수를 믿어 심판을 이제 받을 수 있는 거예요.
‘회개합니다. 제가 독사의 자식입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내가 어떤 불의 심판을 받아도 마땅한 죄인 임이 깨달아 지고 죄인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세례인 거예요 용서하고 깨끗하게 씻겨주는 세례와 동시에 태우고 심판하는 불의 세례입니다. 용서받아서 이혼을 당하지 않게 되는 게 아니라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제가 독사의 자식입니다. 내가 이혼을 당해도 할 말이 없어요. 이 심판 가운데에서도 이 심판이 내 죄보다 가벼운 것을 깨닫게 해주세요’라고 하는 세례예요 우리는 심판 싫어해요 날마다 용서 물 깨끗함만 좋아해요. 하지만 내 속의 쭉정이가 뼈 속까지 죄인인 내 속에 끝없는 죄악으로 이 땅에서 불의 심판을 받는 것이 영원한 심판을 면하는 은혜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세례를 받은 사람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 저는 어떤 불의 심판을 받아도 마땅한 죄인입니다
이런 고백을 하는 사람에게는 이혼이 막아져도 은혜이고 이혼을 당해도 은혜입니다 환경이 아니라 이렇게 불의 심판을 통해 하나님의 상급으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환경에 영향을 받지 않는 거죠 그러니까 예수의 세례 성령 세례 불 세례를 아는 자들은 그러므로 내 죄 때문에 깨어진 과정을 보며 끝없이 애통하며 눈물을 흘리게 돼요 왜냐하면 나로 인해 저 영혼까지 함께 불의 심판을 받기에 이 심판 속에 능히 나를 살릴 예수를 전하는 마음이 불붙듯 일어나며 갈급하게 되기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이혼을 하고 나서도 이렇게 적용을 해야 되는데 이혼하기 전에 그렇게 이혼을 해야 되겠다. 그래야 되겠어요. 하지만 요한의 세례만 아는 하는 자는 불의 심판을 받아 마땅한 자임이 자신임을 들어본 적도 없고 깨닫지도 못하기 때문이에요 이 땅에서 불의 세례로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림을 경험하는 것은 축복이에요 그 불 세례 속에 내 죄가 깨달아져 회개한 자는 영원한 심판과 형벌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여러분 아프간 (Afghanistan) 보세요. 심판이 그렇게 갑자기 와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전부 총살당하고 기가 막힙니다 우리가 지금 천국 문 앞에서 이렇게 되겠구나 그러기에 우리는 요한의 세례가 아닌 그 세례 요한이 외쳤던 예수의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거죠.
다시 말하면 성령 세례란 정확한 복음인 예수님을 확실하게 아는 거예요 바울은 그 예수님을 정확하게 다시 설명하고 복음을 설명한 거예요 이는 바울이 수없이 강론했던 ‘예수께서 내 죄를 대신해서 죽음과 부활하심 다시 사심과 승천하시며 다시 오시는 것’을 믿는 것이죠. 그분의 말씀을 믿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나의 죄를 위해 죽어 주신 예수님의 이야기를 정확하게 읽어가기에 성경이 나를 읽고 가는 것이 성령 세례입니다. 이것보다 정확한 성령 세례가 없습니다 구속사로 성경이 읽혀지는 거. 이게 성령 세례예요 세례란 죽는 것이기 때문에 성령 세례란 십자가 지는 거예요. 이들이 어떤 제자인 이유는 아볼로의 가르침 이라기보다 아볼로도 어떤 제자도 지는 십자가가 없었기 때문이에요. 십자가를 지는 것은 사람들이 열광하며 환호하는 것이 아니라 다 손가락질하고 욕하고 던져버리고 싶은 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각자의 자기 십자가를 져요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이 사도행전 19장 이 본문은 교파마다 해석을 달리하는 아주 어려운 본문입니다. 요한의 세례 받았는데 다 또 세례를 받는다고 하니까 ‘재세례파’가 등장을 하고 저 뒤에 가서 보면 성령 받으려면 방언을 해야 된다고 그래서 ‘오순절 교파’가 나옵니다. 성령은 오순절에 처음 오신 것이 아니고 창세 전부터 계시며 지금도 계시고 장차도 계실 것입니다. 성령 세례의 표적은 사람을 보는 눈이 달라지는 거예요
좋아하는 사람의 부류가 달라지는 것, 여러분들이 지금 어떤 사람을 좋아하고 있는가 한번 생각해 보세요. 서울에서 초 중 고등학교 대학교를 다 나왔지만 일류를 좋아하는 제가 함께하는 분은 여러분이에요 전혀 알지 못했던 우리가 좋아서 이렇게 지금 가는 거예요 여러분은 누가 그렇게 좋으세요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이 물세례 성령 세례는 동시에 올 수도 있고 순서가 뒤바뀔 수도 있지만 성령 세례를 알려주기 위해서 바울이 가르친 것은 정확한 예수 그리스도 복음입니다.
(적용#3)
-내가 예수 믿으면 잘 된다가 아니라 내가 당한 불의 심판은 무엇인가?
-내가 왜 이런 일을 당하나? 지금 던져버리고 싶은 십자가는 무엇인가?
-사건 앞에 나는 어떤 심판을 받아도 마땅한 죄인 임이 인정되나?
4. 방언과 예언을 합니다.
6절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7절 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
안수 직후 방언도 하고 예언도 했는데 여기에 쓰인 두 개의 동사의 시제는 모두 계속됨을 나타내는 미완료 과거형이에요 성경에서 방언이라는 말이 두 가지 의미로 쓰였는데 이제 성경을 목적으로 이제 바벨탑 사건의 저주를 풀어 주신 그 외국어 방언이 있고 개인의 신앙에 확신을 주기 위하여 주어진 은사로 주신 방언이 있어서 고린도전서 13장 1절에서는 이것을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로 표현을 했어요. 천사의 말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의 방언이고 사람의 방언은 외국어이지만 우리는 성령 받음을 생각할 때 그냥 방언이나 예언 또는 여러 기적 이걸 기적 같은 은사에만 관심을 가지기 쉬워요. 그래서 그런 가시적인 능력이 있어야 성령을 받았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이제 오순절도 그렇고. 그래서 저도 이거 가서 한번 경험을 했는데. 그래서 이렇게 방언을 받으라고 막 연습을 시키더라고요 ‘랄랄랄라’ 따라 시작을 하라고. ‘랄랄랄라’ 그러면서 방언이 또 터지더라고요. ‘랄랄랄라’ 시키는 데가 있고 ‘코카콜라’를 또 시키는 데도 있어요. 그걸 빨리 연습해보라고 이런 생각은 성령을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에너지로 여기는 것입니다 기준이 우리가 행하는 은사에 있으면 성령은 한낮 에너지나 자원이 되는 것이죠.
잘못된 이해입니다.
내 생각, 내 가치관, 외모만 취하던 세상 가치관에서 이제 내 삶이 말씀으로 해석이 되니 성령이 임하시고 방언과 예언을 말하게 됩니다 방언은 제가 2장에서도 설명을 했었지만 이건 소통의 능력이에요 공감력 소통이 왜 중요하죠? 우리 영원히 타락하여 사단에 속한 사람들이라서 주님과 소통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우리는 매사 하나님의 마음 뜻을 알 수가 없어요. 그래서 성령께서 오셔서 하나님 마음을 알려주신 거예요.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고 내 모든 고난과 고통이 이 죄인이 나를 구원하시려고 허락한 아버지의 찢어지는 마음이니까 소통이 안 되는 나를 주님과 소통하게 만드는 것이 방언이에요. 그러면 그 주님의 마음을 어떻게 공감하죠? 말씀을 통해서 그래서 말씀으로 말하고 말씀으로 기도하는 것이 방언이에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공감하는 것 이게 방언이니까 사단에 속한 세상 사람들은 알아들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말씀으로 기도하는 것이 어렵다고 해요 불신 결혼, 동성애가 말씀에 다 나와 있는데 인권이 우상이 되니까 절대로 못 알아들어요 고난이 축복이다. 문제 아이는 없고 문제 부모만 있다 옳고 그름에 화신인 이 세상 사람들은 선악과 먹고 매일마다 나는 옳고 너는 틀렸기 때문에 모든 것이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으로 들립니다 그래서 이 구속사는 방언 중에 방언이에요. 그래서 우리들 교회 와서 말씀이 안 들린다고 하는 거예요. 제가 도덕 설교 윤리 설교를 안 하기 때문에 하지만 그렇게 성경을 읽었는데 이혼이 되고 잃으니까
이제 오셨잖아요 해결이 안 되니까 이게 축복이죠 하지만 성령이 임하면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공감하고 내가 또 말씀으로 전해드리는 기도를 하게 돼요 왜냐하면 세례를 통해 성령 세례를 통해 내 생각은 예수와 함께 죽고 이제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마음이 나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예언은 무엇인가요? 어디 가서 점 보는 예언이 아니에요 우리 사주 팔자 관상 너무 좋아합니다. 믿을 사주 팔자도 봐준대요. 사야 할 주식 팔아야 할 자리 봐주는 거래요. 문전성시를 이룬답니다. 오늘 뭘 살까요? 오늘 뭘 팔까요? 여기서 예언의 첫 자인 ‘예’는 미리 ‘예(豫)’자가 아니고요. 맡길 ‘예(預)’ 말씀 ‘언(言)’이에요. 하나님을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어요. 즉 예언은 뭐냐 하면은 감화력인데요 하나님이 주신 말씀의 소통이 일어나서 이 말씀을 맡아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내게 맡겨주신 말씀으로 내 삶을 해석하여 이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것. 이것이 예언입니다. 바울을 통해 브리스길라(Priscilla)와 아굴라(Auilla)가 변화되고 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통해 아볼로(Apollos)가 변화되는 것 이것이 예언입니다.
이 십자가 앞에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지금 내 삶의 이유를 말씀으로 해석하여 나와 같은 고난에 있는 자에게 권능으로 나아가 그 사람이 내가 깨달은 이 말씀으로 변화되는 것 이것이 예언이에요 그러니까 방언도 예언도 영혼 구원을 위함이며 성령이 임하시면 영혼 구원을 길로 놓고 가게 됩니다 결론은 날마다 말씀 묵상, 가정 중수다. 7절에 모두 12 사람쯤 되니라 열두 사람이 아니고 쯤 되니라 이거는 산수가 아니고 10이란 숫자가 중요하죠. 12는 회복의 숫자예요. 구약의 열두 지파 신약의 열두 사도를 예표합니다 구약의 열두 지파가 다 무너지고 신약에 또 열두 사도가 세워졌잖아요. 우리가 죄를 지으면 무너졌지만. 하나님이 회복시키셔요. 즉 12는 말씀을 맡은 공동체를 의미해요. 말씀을 맡은 공동체 무엇입니까? 목장이죠 12는 마지막 우리가 천국에 갈 때도 천국을 표현하는 숫자입니다. 천국 문이 열 둘이에요. 그 문에 열두 보석 열두 천사가 있죠. 생명나무 강가에 열두 열매가 맺혀요 요한계시록에 모이는 것은. 다 열 둘이에요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나쁜 습관과 같이 하지 말라고 그러잖아요. 그래서 이 성령의 임하심은 그 열두 공동체 온전한 회복이에요. ‘목장의 마스코트로 7살 아이의 나눔을 시작으로 한 명도 빠지지 않고 늘 우리가 여기 있어요’ 하는 목원들의 얼굴을 보면 한 달 동안 월급을 못 받고 불치병이 하루하루 힘들고 이혼을 하고 싶고 의인인 남편을 향해 예수와 사는 것 같다는 이런 목장 모임이 열두 공동체예요.
청년부 큐페 온라인 조별 나눔에 7명이 들어왔는데. 6명이 우울증 약을 먹고 있다가 약을 안 먹고 힘들어하는 그 한 명에게 모두가 약 잘 먹고 잘 넘어가야 한다고 처방을 내줬는데 그게 진짜 ‘다 우리가 여기 있다’(We are all here)의 열두 공동체 아닌가요? ‘우리가 다 여기 있다’는 잘나서가 아니라 구원받은 공동체인 거예요. 구원받았는데 아픈 사람 안 아픈 사람 다 포함되는 구원받은 우리 건강한 사람이 우리인가요? 이 어떤 제자들이 열두 사람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오늘 마지막 9절 열두 사람의 예수의 제자 온전한 회복 공동체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 소통과 감화를 시키는 방언과 예언에 이 열두 공동체의 나눔을 들려드릴게요
저는 우리들교회 청년부에 다니고 있는 청년이에요. 이번 청년부 큐페 때 너무 많은 은혜를 받았고. 특히 성령의 죄수 목사님 설교를 듣고 너무 많이 울었어요 조 모임도 좋았고. 마지막 날은 무려 일곱 시간 동안 조 모임을 했어요. 저도 제가 신기해요. 너무 감사한 마음이 들어 목사님께 매를 씁니다 몇 년 전에 저는 친했던 학교 선배에게 성폭행을 당했어요. 애써 잊으려고 해봐도. 그 트라우마가 저를 계속 괴롭히고 저 스스로 더럽다고 생각하며 살았어요 그때마다 자살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실제로 세 번이나 이 간수처럼 자해를 하고 자살 시도를 했습니다. 우리들교회 와서도 이 이야기를 하는 것 힘들더라고요. 코로나 때문이었다고 생각이 되긴 합니다. 우리가 대면으로 이렇게 좀 해야 되는데. 그때가 계속 생각이 나고 괴로운 마음이 많이 들었어요 그런데 이번 큐페 때 설교를 들으면서 그것을 말하지도 못하고 괴로워만 하고 있는 제 모습이 정말 귀신 들린 그 여종 같았어요.
그런데 첫날 내 존재 자체가 귀하다고 말씀해 주시는 설교 말씀을 듣고 참 많이 울었어요 둘째 날 저녁에는 내가 갇혀 있는 깊은 감옥에서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말씀이 참 위로가 되었고 내가 그동안 성폭행의 상처와 괴로움 속에서 힘들게 살아왔던 것도. 고난 때문이 아니라 참 하나님이 없었고 말씀이 없었기 때문에 이 소통과 이제 감화를 못 받은 거죠 그죠. 이 사실이 깨달아졌어요 3년 만에 목장에서도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를 큐페의 조모임 때 나누면서 처음 이야기를 했어요. 마침 그때 목사님이 줌으로 탐방을 오셔서 제 야기를 들으시고 물어봐 주시고 같이 울어 주셨어요. 같이 나눔을 하고 있던 언니 오빠들도 저를 위로해주고 같이 울어 주셔서 저도 펑펑 울면서 나눔을 했는데 ‘이게 죄수 공동체구나’ 간수처럼 자살을 하려고 했던 저에게 ‘우리가 다 여기 있다’고 하는 사람들을 실제로 만나고 나니까 진짜 주 예수를 믿어 구원받게 된 간수의 기쁨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 같았습니다. 선택 강의를 들으면서도 강사님이 해주시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스스로 버거워 했던 제 삶을 강사님도 겪었다고 하시는 거예요. 그러면서 괜찮다고 공동체에서 피투성이가 되어도. 살아만 있으면 된다고 하시는 말씀이 너무 위로가 되었어요 간증 패스티벌 때도 하나같이 말도 안 되게 살았던 청년 들이 저렇게 이야기를 하고 공동체에서 위로를 받으며 살아내고 있는 모습을 보는데 참 많이 울었어요.
‘이게 죄수 공동체의 위력이구나’를 새삼 깨닫고 제가 우리들 교회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몰랐습니다 저는 제가 성폭행을 당했기 때문에 이제 평생 남자는 못 만날 거라고 생각을 했는데 조 모임을 마치고 나서 같이 조 모임을 했던 형제가 저에게 개인적으로 연락을 해서 호감을 보여줬어요 위로는 받았지만 아직 상처가 완전히 다 아물지 않아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지만 그래도 이런 이야기를 이렇게 다 했는데도 저에게 관심을 보여주는 형제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저에게는 정말 큰 위로와 감격인 것 같아요 목사님 이런 공동체를 만들어주셔서 감사하고 제가 청년 때 이런 교회를 만난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말로 다 할 수가 없어요 평생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We are all here’이 말씀은 절대로 까먹지 않을 것 같아요. 너무 감격스럽고 감사합니다. 이 말씀을 꼭 목사님께 드리고 싶었어요 생명의 은인 같으세요. 우리들교회 청년부 너무 사랑하고 또 목사님 너무 사랑합니다. 우리들교회를 젊은 날에 와서 도무지 해결될 것 같은 아는 이런 문제가 요한의 세례만 알았다면 내가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하고 평생 굴속에 있다가 간수처럼 맨날 칼 빼들고 자결을 흘렸다 말렸다 했는데. 예수의 세례를 이렇게 받게 되니까 이렇게 소통이 됐습니다.
(적용#4)
-소통하는 방언과 감화를 시키는 예언을 하나? 회복의 지름길이 온전한 12공동체 목장에 가는 것임을 아나? 나는 무엇이 회복되고 싶나?
<Epilogue>
1) 성령의 임하심은 구원을 위한 분별에 성령의 임하심은 절대적인 이유는 우리는 어떤 제자가 아니고 예수님의 제자가 돼야 하기 때문이다
2) 우리는 믿을 때 성령을 받는다.
3) 성령 세례는 정확히 예수 그리스도 복음이다.
4) 성령의 임하심은 그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 받는 것이며 십자가 지는 것이다
5) 성령의 임하심은 소통과 감화의 방언과 예언을 말한다
6) 성령의 임하심은 열두 공동체의 온전한 회복을 말한다
7) 나는 죽고 예수님은 살아나는 십자가를 기쁘게 지는 것이 성령의 임하심 성령 세례의 결론이다
8) 제자 양육은 성령이 선행되어야 하는데 시간적 순서로 말할 수 없다.
9) 성령의 제자 양육은 성령에서 시작된다.
10) 성령을 받지 못하면 개미처럼 수고해도 헛수고다.
11) 고린도 후서(2 Corinthians) 7: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계를 이루게 하는 것이오.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Godly sorrow brings repentance that leads to salvation and leaves no regret, but worldly sorrow brings death)
12) 질문으로 양육이 시작되며 질문을 잘하는 사람이 성령이 임하신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13) ‘에베소 같은 곳은 음란하고 그냥 세상 세력에 찌든 사단의 세력이 강하다’라고 보는 곳이기 때문에 성령의 임하심이 없이는 에베소 같은 내 남편 자식을 감당할 수 없다
14) 사단의 나라가 너무 강하면 우리는 성령 없이는 그 사람들을 주님께 인도할 수 없다
15) 구제하고 헌금한다고 성령 받을 수 없고 돈으로 살 수도 간절히 원한다고 임하는 것이 아니다
16)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하는데 믿을 때에 성령을 받는다.
17) 믿을 때라는 말은 조건이 아닌 것인데 믿음이 조건이 되면 행위가 된다.
18) 믿을 때라는 말은 동시적 동작을 가리키는 것이며 동시에 일어난다.
19) 내가 예수를 믿었다면 동시에 성령의 열매와 모습이 나타나야 한다
20) 아무리 탁월한 교회와 양육을 받아도 성령이 임하시지 않으면 예수의 제자가 아니고 사람의 제자로 살아갈 뿐이다
21) 용서는 가해자가 하는 것이 아니다
22) 나의 수치를 인정하고 죽어지는 것이 믿음이다
23) 죽기보다 싫은 것이 인정이고 정신과를 가는 것으로 나 자신을 직면하는 것, 자녀에게 아내에게 사과하는 것, 공동체에 고백하는 것은 믿음이 있을 때 할 수 있는 것이다
24) 양육은 답을 제시하는 게 아니라 질문을 계속해야 하는 것으로 질문을 통해 자신을 생각하고 묵상하고 말씀에 비추어 자신을 살핌으로 양육이 되어지는 것이다
25) (마태복음/Mattew 3:11)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I baptize you with water for repentance. But after me will come one who is more powerful than I, whose sandals I am not fit to carry. He will baptize you with the Holy Spirit and with fire.)
26) 예수님의 설교를 들으면 지금 하나님 나라가 내게 임했기 때문에, 이 더러운 내 속을 찔러주는 임박한 설교이기 때문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고 요동이 되는 것이다
27) 예수님의 세례는 물 세례가 아니고 성령과 불의 세례인데 불은 심판이다
28) 예수님의 세례는 구원과 심판이 함께 임하는 세례다
29) ‘내가 예수 믿으면 잘 된다’가 아니라 내가 예수를 믿어 심판을 이제 받을 수 있는 것이다
30) 예수님 세례는 ‘회개합니다. 제가 독사의 자식입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내가 어떤 불의 심판을 받아도 마땅한 죄인 임이 깨달아 지고 죄인임을 깨닫게 되는 것을 말한다
31) 예수님 세례는 용서하고 깨끗하게 씻겨주는 세례와 동시에 태우고 심판하는 불의 세례인 것으로 용서받아서 이혼을 당하지 않게 되는 게 아니라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제가 독사의 자식입니다. 내가 이혼을 당해도 할 말이 없어요 이 심판 가운데에서도 이 심판이 내 죄보다 가벼운 것을 깨닫게 해주세요’라고 하는 것이다
32) 내 속의 쭉정이가 뼈 속까지 죄인인 내 속에 끝없는 죄악으로 이 땅에서 불의 심판을 받는 것이 영원한 심판을 면하는 은혜다
33) 그래서 예수의 세례를 받은 사람은 이렇게 고백한다 “주님 저는 어떤 불의 심판을 받아도 마땅한 죄인입니다”
34) 이런 고백을 하는 사람에게는 이혼이 막아져도 은혜이고 이혼을 당해도 은혜인 것이다
35) 환경이 아니라 이렇게 불의 심판을 통해 하나님의 상급으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환경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이다
36) 그러니까 예수의 세례 성령 세례, 불 세례를 아는 자들은 그러므로 내 죄 때문에 깨어진 과정을 보며 끝없이 애통하며 눈물을 흘리게 된다
37) 왜냐하면 나로 인해 저 영혼까지 함께 불의 심판을 받기에 이 심판 속에 능히 나를 살릴 예수를 전하는 마음이 불붙듯 일어나며 갈급하게 되기 때문이다
38) 이 땅에서 불의 세례로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림을 경험하는 것은 축복인 까닭은 그 불 세례 속에 내 죄가 깨달아져서 회개한 자는 영원한 심판과 형벌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39) 성령 세례는 정확한 복음인 예수님을 확실하게 아는 것이다
40) 성령세례는 ‘예수께서 내 죄를 대신해서 죽음과 부활하심 다시 사심과 승천하시며 다시 오시는 것’을 믿는 것이다
41) 성령세례는 우리가 성경을 나의 죄를 위해 죽어 주신 예수님의 이야기를 정확하게 읽어가기에 성경이 나를 읽고 가는 것이다.
42) 이것보다 정확한 성령 세례가 없다
43) 성령세례는 구속사로 성경이 읽혀지는 것이다
44) 세례는 죽는 것이기 때문에 성령 세례는 십자가 지는 것이다
45) 십자가를 지는 것은 사람들이 열광하며 환호하는 것이 아니라 다 손가락질하고 욕하고 던져버리고 싶은 길이기 때문이다
46)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47) 사도행전 19장 이 본문은 교파마다 해석을 달리하는 아주 어려운 본문인데 요한의 세례 받았는데 다 또 세례를 받는다고 하니까 ‘재세례파’가 등장을 하고 저 뒤에 가서 보면 성령 받으려면 방언을 해야 된다고 그래서 ‘오순절 교파’가 나온다.
48) 성령은 오순절에 처음 오신 것이 아니고 창세 전부터 계시며 지금도 계시고 장차도 계실 것이다.
49) 성령 세례의 표적은 사람을 보는 눈이 달라지는 것이다
50) 물세례, 성령 세례는 동시에 올 수도 있고 순서가 뒤바뀔 수도 있지만 성령 세례를 알려주기 위해서 바울이 가르친 것은 정확한 예수 그리스도 복음이다.
51) 성경에서 방언이라는 말이 두 가지 의미로 쓰였는데 성경을 목적으로 바벨탑 사건의 저주를 풀어 주신 그 외국어 방언이 있고 개인의 신앙에 확신을 주기 위하여 주어진 은사로 주신 방언이 있다
52) 고린도전서 13장 1절에서는 이것을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로 표현을 했다
53) 천사의 말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의 방언이고 사람의 방언은 외국어이지만 우리는 성령 받음을 생각할 때 그냥 방언이나 예언 또는 여러 기적 이걸 기적 같은 은사에만 관심을 가지기 쉽다
54) 그래서 그런 가시적인 능력이 있어야 성령을 받았다고 생각을 한다
55) ‘랄랄랄라’ 따라 시작을 ‘랄랄랄라’ 그러면서 방언이 또 터지더라
56) ‘랄랄랄라’ 시키는 데가 있고 ‘코카콜라’를 또 시키는 데도 있는데 그걸 빨리 연습해보라고 이런 생각은 성령을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에너지로 여기는 것이다
57) 기준이 우리가 행하는 은사에 있으면 성령은 한낮 에너지나 자원이 되는 것으로 잘못된 이해다.
58) 내 생각, 내 가치관, 외모만 취하던 세상 가치관에서 이제 내 삶이 말씀으로 해석이 되니 성령이 임하시고 방언과 예언을 말하게 된다
59) 방언은 소통의 능력이다
60) 공감력과 소통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영원히 타락하여 사단에 속한 사람들이라서 주님과 소통할 수가 없기에 우리는 매사 하나님의 마음 뜻을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61) 그래서 성령께서 오셔서 하나님 마음을 알려주신 것이다
62)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고 내 모든 고난과 고통이 이 죄인인 나를 구원하시려고 허락한 아버지의 찢어지는 마음이라고 그러니까 소통이 안 되는 나를 주님과 소통하게 만드는 것이 방언이다
63) 주님의 마음을 공감하는 방법으로 말씀을 통해서 말씀으로 말하고 말씀으로 기도하는 것이 방언이다
64)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공감하는 것이 방언이니까 사단에 속한 세상 사람들은 알아들을 수가 없다
65) 그래서 말씀으로 기도하는 것이 어렵다고 한다
66) 불신 결혼, 동성애가 말씀에 다 나와 있는데 인권이 우상이 되니까 절대로 못 알아 듣는다
67) ‘고난이 축복이다. 문제 아이는 없고 문제 부모만 있다’
68) 옳고 그름에 화신인 이 세상 사람들은 선악과 먹고 매일마다 나는 옳고 너는 틀렸기 때문에 모든 것이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으로 들린다
69) 그래서 구속사는 방언 중에 방언이므로 우리들 교회에 와서 말씀이 안 들린다고 하는 것이다
70) 성령이 임하면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공감하고 내가 또 말씀으로 전해드리는 기도를 하게 된다
71) 왜냐하면 세례를 통해 성령 세례를 통해 내 생각은 예수와 함께 죽고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마음이 나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72) 예언의 첫 자인 ‘예’는 미리 ‘예(豫)’자가 아니고 맡길 ‘예(預)’ 말씀 ‘언(言)’으로 하나님을,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는 것이다
73) 즉 예언은 감화력인데 하나님이 주신 말씀의 소통이 일어나서 이 말씀을 맡아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74) 내게 맡겨주신 말씀으로 내 삶을 해석하여 이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것이 예언이다.
75) 바울을 통해 브리스길라(Priscilla)와 아굴라(Auilla)가 변화되고 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통해 아볼로(Apollos)가 변화되는 것이 예언이다
76) 이 십자가 앞에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지금 내 삶의 이유를 말씀으로 해석하여 나와 같은 고난에 있는 자에게 권능으로 나아가 그 사람이 내가 깨달은 이 말씀으로 변화되는 것이 예언이다
77) 그러니까 방언도 예언도 영혼 구원을 위함이며 성령이 임하시면 영혼 구원을 길로 놓고 가게 된다 결
78) 론은 날마다 말씀 묵상, 가정 중수다.
79) 12는 회복의 숫자로써 구약의 열두 지파, 신약의 열두 사도를 예표한다
80) 구약의 열두 지파가 다 무너지고 신약에 또 열두 사도가 세워졌다
81) 우리가 죄를 지으면 무너졌지만 하나님이 회복시키신다
82) 즉 12는 말씀을 맡은 공동체를 의미하는데 말씀을 맡은 공동체가 목장이다
83) 12는 마지막 우리가 천국에 갈 때도 천국을 표현하는 숫자다.
84) 천국 문이 열 둘인데 그 문에 열두 보석과 열두 천사가 있더.
85) 생명나무 강가에 열두 열매가 맺히며 요한계시록에 모이는 것은 다 열 둘이다
86)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나쁜 습관과 같이 하지 말라고 한다.
87) 그래서 이 성령의 임하심은 그 열두 공동체 온전한 회복이다.
88) ‘우리가 다 여기 있다’는 잘나서가 아니라 구원받은 공동체인 것이다
89) 구원받았는데 아픈 사람, 안 아픈 사람 다 포함되는 구원받은 우리 건강한 사람이 우리인가? 이 어떤 제자들이 열두 사람으로 변하는 것이다
90) 소통과 감화를 시키는 것이 열두 공동체의 나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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