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교회 2019년 6월9일 주일말씀요약과 어록 54選 및 느낀 점(열왕기상 19장1절로 8절 어루만지시는 주님)]
가. 말씀 요약
<Prologue>
평생 청년기관 사역자로 30년 헌신한 목사님의 아내가2016년 아직도 캄캄한 새벽에 혼자 자고 있는 방에 스르르 들어와서 아내는 ‘내가 죽기 전에 당신 얼굴 한 번보러 왔어’ 라고 짧은 말을 남기고 다시 안방으로 돌아가서 가지고 있었던 모든 수면제를 과다 복용하여 죽고자 하였다.
이렇게 ‘내 생명 가져가라’고 죽고 싶은 사람은 없나?
택자는 비록 죽고 싶을 때에도 주님은 어루만지시면서 일어나서 먹으라고 하신다.
엘리야와 같은 택자를 언제 어루만져 주시는 지에 대하여 살펴보자:
1. 믿음으로 행한 일의 결과가 참담할 때도(1~2절)
1. 아합이 엘리야가 행한 모든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였는지를 이세벨에게 말하니
2. 이세벨이 사신을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엘리야의 행한 일(놀라운 사역)-갈멜산 대결에서
(1)여호와가 하나님 되시고,
(2)불로 제단을 사르시고,
(3)바알 선지자 850명을 하나도 도망가지 못하게 하고 백성과 함께 죽였으며 (4)큰 비를 주시고
(5)여호와의 능력이 엘리야에게 임해서 허리를 동이고 아합의 마차 앞에서 달려갔다.
믿음의 관점에 따라서 보고의 내용이 다르다.
엘리야의 많은 행한 일 중에 편파적으로 칼로 죽였다는 것만 구체적인 행함으로 이세벨에게 일러바친다.
엘리야는 이제야 개혁의 발판을 마련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뿌리 깊은 북 이스라엘의 우상숭배는 그렇게 쉽게 무너질 것이 아니었다. 이세벨은 바알 종교를 들여온 장본인으로 엘리야가 보여준 바알 선지자들의 뗴 죽음과 같은 강한 능력 앞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눈이 뒤집혀 엘리야 체포 공개 지명수배령을 내린다
.
바로 가서 죽이면 되는데 사신을 보내서 예고한 이유는
① 바알선지자처럼 너도 공개처형 하기 위하여
② 850명을 죽인 엘리야가 무서워서 협박을 해서 도망가게 하려고
한국의 성도가 많다고 해도, 세계 10대 교회는 모두 한국에 있다고 해도, 또 유명한 크리스챤이 많다고 해도, 크리스챤 대통령이 나왔다고 해도, 크리스챤 재벌의 재력이 막강하다고 해도 그들이 믿는 예수를 믿게 하는 것에 우리가 잠시는 희망을 가졌었다.
그렇지만 불신자들의 강퍅한 마음을 변화시킬 수는 없다.
이세벨이 다양한 우상들을 염두에 두고 너를 죽이지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 내림이 마땅하다고 했는데 엘리야는 18장 15절에서 내가 모시는 만군의 여호와를 두고 맹세했다고 했다.
신들에 신 vs 만군의 여호와
850개의 신이 끝없이 하나님 자리에 앉아서 성도를 교란시킨다.
진짜 바알 선지자의 괴수/맹주는 이세벨이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갖추고 가졌기 때문이다.
모세의 시대에 바로가 그렇다.
바로도 9가지 재앙에도 굴복하지 않다고 10번째로 아들을 죽이니 비로서 출애굽을 허락한다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할 일 중에 의로운 일을 가장 많이 행한 사람들이 고통도 가장 많이 받는다는 점이다.
엘리야도 그렇지만 죄 없는 예수님도 인간 가족 중에 어떤 자녀보다도 더 많은 고통을 겪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고난과는 상관없는 하나님 자리에 있는 바알 우상은 포스트모더니즘(Post Modernism)의 극치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포스트모더니즘은 (1)개성, (2)자율성, (3)다양성을 중시하고 (4)절대이념을 거부하고 (5)탈 이념이라는 정치이론을 낳았는데 이 정치이론이 인권(Human Rights)으로 집약되고 있다.
알리스트 맥글러스 영국 옥스퍼드대 석좌교수가 지난 주간에 신문 인터뷰에 전투적 무신론자로 불리던 리차드 도킨스와의 논쟁도 소개를 했다.
도킨스는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라고 요구하는데 그렇다면 ‘하나님이 안 계신다’라는 것도 증명해야 된다.
자신은 그것을 증명하지 못하면서 왜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만 증명하라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했다(믿음의 증명논쟁)
맥글라스 교수는 도킨스가 2012년 당시 캔터베리 대 주교였던 로안 윌리엄스와의 믿음의 증명논쟁 이후에 스스로 무신론자에서 ‘잘 모르겠다’의 불가지론자(an agnostic)로 남겠다고 선언했다고 소개를 했다.
전투적인 성향의 리차드 도킨스도 믿음의 방향을 살짝 바꾸었다.
아합과 이세벨은 무신론자도 불가지론자도 아니고 아합이 이세벨의 치마 속에서 그저 그렇게 조치하라고 하니 그들은 ‘부부주의’인가?
부부가 금슬이 너무 좋은 것이 민중을 도탄(塗炭)에 빠뜨릴 수도 있다
같이 여호와를 믿는다고 하면서 여호와를 열렬히 배격하는 믿음이 있을 수도 있다. 둘만 좋으면 되기에, 둘만 행복하면 되기에, 우리 집만 잘되면 되기에 이 부부의 포스트모더니즘의 가치관으로 인해 결국은 모두가 망하고 나라까지 망하게 되었다. 율법교육을 받은 아합이 율법을 전혀 모르는 이세벨의 코치를 날마다 받는다.
둘이 너무 좋아하니 하나님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 그녀의 코치대로 막무가내로 엘리야를 위협한다.
개성을 중시하는 것이 하나님 자리에 있게 되면서 인권으로 연결되기에 동성애부터 이혼, 불신결혼까지 마음대로 하고 반대하면 차별이 되는 것이다.
유명 출판사 SNS(Social Networking Service)계정에 한 장의 그림이 제시되었는데 그 그림에는 “바벨탑의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일까?” 교만일까? 아니다. (중략) 바로 인권이다.
우리가 하나님 같이 될 수 있다면서 모든 인간의 인권이 신격화되는 것이 바벨탑 사건이 가장 큰 문제였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인권이 아니다.
“주 다스리네”이다.
이 게시물을 본 누리꾼들은 그 곳이 기독교 사이트(site)임에도 기독교 대표사이트가 사회적 맥락을 고려하지 못한 채 인권의 가치를 폄하한다고 악플을 많이 달았다.
이 비판이 계속되니 기독교 사이트임에도 출판사는 하루 만에 그 해당 글을 삭제했다.
언론의 자유가 유독 기독인들에게만 억압당하는 것 같다.
초등학교 아이가 적성검사 성별 표시란에 (1)남, (2)녀, (3)기타가 있었다.
인권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이 이 시대의 특징이다
맥글라스 교수는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사람들은 신앙이 진짜 작동하는가를 묻는다며 신자들은 기독교 신앙이 자신에게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 이야기(간증)를 해줌으로써 신앙이 말이 아니라 실제로 작동하는 믿음체계를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했다.
이미지와 스토리로 복음을 번역하라면서 성경의 진리를 현대적 상황에 맞게 번역할 필요가 있다며 한국적 상황에 맞는 이미지와 이야기를 발굴해서 한국인들의 마음을 움직이라고 했다.
이 얘기는 전도가 교회를 오라고 하는 게 아니라 신앙이 작동하는 믿음 체계를 보여줌으로 이미지와 스토리로 복음을 번역하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우리들 교회의 죄를 보는 간증을 하는 것, 이게 스토리다.
그래서 그것이 신앙의 작동이고 이것을 전도라고 한다는 것이다.
잘 살고 학력이 높을수록 인권이 왕 노릇 하는 것을 본다.
이 땅 자체가 우상이기에 도저히 그 너머에 있는 하나님 나라를 볼 수가 없다. 이세벨은 그 대표적인 모델이다.
육이 너무 가득 차 있어서 영이 보이질 않는다.
디도서 3장 5절 말씀처럼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라는 말씀처럼 오직 성령의 사역만이 강퍅한 마음을 부수고 변화시킬 수 있다.
칼로 총과 군대의 힘으로 절대로 누구를 변화시킬 수 없다.
엘리야의 믿음으로 행한 일의 결과는 참담했다.
그러나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서는 여인의 몸 속에 점 하나로 이 땅에 오시고 십자가의 낮아짐으로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서 숨겨진 하나님의 경륜을 드러내셨다. (Hidden Will of God, Revealed Will of God, Effective Power of God)
저 또한 구원의 열매가 많을 때마다 개인적으로는 참담할 때가 참 많았다.
그런데 결국 참담함(비참하고 막막함)을 느끼는 것은 저도 모르는 저의 숨은 죄 때문인데 결국은 참담함이 올 때마다 하나씩 그런 죄를 깨닫게 하셨다고 본다.
(적용)
-여러분은 믿음으로 행한 일에 참담한 결과를 경험한 적이 있는가?
-여러분은 인권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나?
-믿음과 인권은 이원론인가? 일원론인가?
2. 이 세상 형편이 하나님보다 더 커 보일 때도(3절)
3절 그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엘리야가 이 형편을 보고 도망했다고 한다.
850명을 물리치게 하신 주님이 이세벨을 물리쳐 주실 텐데 갑자기 이세벨이 온몸으로 무서워졌다.
우리는 순간순간 세상 형편이 하나님보다 더 커 보일 때가 있다.
Fact로 볼 때 이세벨은 시돈왕 엣바알(Ethbaal)의 딸이다.
아버지도 왕이고 시아버지도 오므리 왕이고, 남편도 아합 왕이고, 아들도 아하시야 왕이고, 딸인 아달리야도 유다로 시집가서 다 죽여 버리고 왕이 되었다.
이 땅에서 왕 제조기이다.
그냥 마음만 먹으면 모든 것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이세벨은 하나님이 필요 없는 사람이다.
믿음으로가 아니라 바알 신봉자이고 세상신봉자이지만 대를 이어가면서 세상에서 계속 잘되는 것처럼 보여진다.
그러나 엘리야가 갈멜산 대결 때처럼 굳건히 서서 이세벨에게 기별을 보내서 바알의 선지자들을 이기게 하신 하나님이 지금도 자신을 버리지 않았다고 놀라운 모습으로 선포를 하면 심판이 이세벨에게 임해서 백성들이 다 놀라 넘어졌을 텐데…
그리고 그 원하는 힘 있는 개혁이 전국을 휩쓸었을 것이다.
사실 엘리야가 절망하게 된 원인은 이세벨이 너무 갖춘 막강세력자라서 하나님에게서 찾을 것이 전혀 없다고 생각하여 내가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스스로 절망한 것이다.
엘리야가 하나님이 자신을 버리시지 않았다고 선포하면 놀라운 개혁의 힘을 받아 전국을 휩쓸었을 텐데…
개혁의 힘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일 텐데 엘리야의 믿음 약함을 보시고 주님이 안 주신건가?
이세벨이 엘리야를 대적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엘리야의 절망은 하나님께서 이세벨을 당장 심판하지 않으셨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께 대한 절대 신앙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1절부터 엘리야가 도망가는 4절까지 여호와가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우리는 큐티를 하면서 날마다 이 일이 왜 왔나 생각해야 된다.
그런데 그것을 순식간에 놓쳤다.
원수의 밥이 되어 계책에 넘어갔다.
절대 신앙이 무너지면 주위의 형편부터 보인다.
하나님에게만 고정이 되었던 눈길을 떼어서 형편을 살펴보니 자기에게 이롭게 돌아가는 것이 하나도 없고 그 결과 인간적인 계책을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택한 길이 이세벨로부터 도망가는 선택으로 인간의 길을 보게 되니 소명 받은 자리인 북 이스라엘을 떠나버렸다.
하나님이 그 곳에 있으라고 했는데 물어도 안 보고 떠났다.
말씀이 안 들리면 도망가고 떠나는 것이다
힘들어도 그곳이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자리인데 말씀이 안 들리면 내 마음대로 생각을 한다.
가서 바알이냐? 하나님이냐? 선포를 해야 하는데, 선포하면 하나님이 책임져 주실 텐데…
우리 교회가 늘 말씀 적용을 간증과 묵상 나눔으로 선포하기 때문에 그것은 바알과의 대결을 선포하는 것이다.
간증도 나눔도 하기 싫다고 도망가면 결국 엘리야처럼 자기 생명을 위해 도망갈 일이 생기는 것이다.
하나님은 850명의 바알들을 성실하게 물리쳐주셨다.
[부목자 나눔]
부부가 장로, 권사님이신데 교회에서 불평 불만하면서 70세가 되면 종교에 대해서 자유인이 되겠다고 했다.
70이 되면서 그 교회를 은퇴를 하고 떠났다.
간증에 불꽃같이 책임을 져주셔서 기적이 일어난다.
기적 후에는 회개를 주시는 놀라운 일들이 있다.
엘리야는 잘나가다가 말씀이 없어서 순식간에 이세벨의 협박에 쪼그라들었다. 엘리야가 도망간 브엘세바는 남쪽 유다 땅 중에서도 가장 남쪽 구석탱이에 치우쳐 있는 곳이다.
갈멜산으로 부터 250km 거리이다.
선지자의 웅크리고 있는 모습은 위대한 사람도 다 연약한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인간이 아무리 스스로 노력한다고 할지라도 범죄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연약함을 감출 수는 없다.
자기사역을 과대평가하면 우리는 말 한마디도 못 견딘다.
다른 사람의 약함은 잘 도와주고 상담하면서 막상 내 자신의 약점을 극복하지 못할 때 북한에서 설교한 것은 다 어디로 가고 내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온다. 주님은 제가 꼭 올라갔다 싶으면 네가 한 일이 아니라고 도장을 콱 찍으신다. 목욕탕 세미나로 강에서 바다로 나가려고 할 때 암이 딱 걸렸고 열매가 있을 때마다 겸손케 될 수밖에 없는 사건을 주신다.
(적용)
-하나님보다 내 형편이 더 커 보여서 도망간 브엘세바 구석탱이는 어디인가?
3. 홀로서기가 아니고 혼자라고 생각할 때도(3~4절)
3절 자기의 사환을 그 곳에 머물게 하고
4절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엘리야는 낙담할 대로 낙담했다.
그리고 드디어 스스로 죽기를 원했다.
마침내 죽기로 한 것은 자기는 이제 소명을 버리기로 했다는 것이다.
소명의식이 없으면 사건이 오면 절망밖에 없다.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일도, 나를 필요로 하는 일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은사와 재주가 많아도 소명이 없으면 쉽게 절망한다.
절대 신앙이 없기 때문이다.
말씀은 좋은데 어떻게 전해야 할지 사람을 만날 자신이 없다.
로뎀 나무는 1~2m정도의 크기로 자라는데 거기는 “유일한, 하나의” 라는 말이 수식되어 있다.
그래서 광야에 유일하게 한 그루만 있는 로뎀 나무 아래 힘없이 앉아 있는 엘리야의 초라한 모습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지만 그러나 이 나무는 잔가지가 많아서 바람과 햇볕을 잘 막아주는 나무라는 것이다.
생각하기에 따라서 그 광야에서 도움의 로뎀 나무가 될 수도 있다.
그런데 절대 신앙이 없으니까 이게 다 죽기를 구하는 것이다.
여기서 이제 죽는 것이다.
엘리야는 피할래야 피할 길도 없고 내가 믿음의 조상보다 내 놓을 게 하나도 없다. ‘어찌하여 이 길을 가게 하십니까?’라고 한다.
극심하게 낙담한 이유는 자기 옆에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충성스런 사환도 믿을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하니 얼마나 외로웠겠는가?
오직 자신 혼자만이 스스로 광야로 들어갔음을 강조한다.
세상에 나는 혼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다 죽기를 구하고 있다.
그 이유가 있다.
당시 유다 왕은 성군에 속한 개혁의 여호사밧 왕이었다.
그런데 유다의 여호사밧 왕이 아합과 결혼동맹을 맺었다는 것이다.
배신감과 함께 천지에 홀로인 엘리야의 심정이 체휼된다
이 지독한 엘리야의 외로움을 알겠는가?
결국 유다 땅도 피난처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죽고자 하는 이유를 (원수는) 너무 합리화시켜주면서 우리를 정조준 한다. 자기편이 한 명도 없다.
거기에 또 불신 결혼이 있다.
개인구원이 사회구원이다.
엘리야는 광야를 혼자 가면서 홀로서기가 안 되어있기 때문에 죽고 싶은 것이다.
(적용)
-여러분은 혼자인가? 홀로서기인가?
4.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어나서 먹고 마시라고 하신다.(5~8절)
5절 로뎀 나무 아래에 누워 자더니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6 절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7절 여호와의 천사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 먹으라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8.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음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가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내 모습 이대로 주님이 용납하신다고 하신다.
그러면서 어루만지시면서 ‘일어나서 먹고 마시라’ (하나님 사랑하심의 표현)가 한 절마다 4절에 걸쳐서 반복해서 나온다.
대단한 주님의 돌보심이다.
엘리야의 역할을 그 누가 할 수 있겠나?
기가 막히는데 그것을 주님은 다 보고 계셨다
주님이 엘리야에게 너~무 미안해하시는 것을 느낄 수가 있다.
엘리야가 한 일이 하나도 없고 하나님이 하신 일인 것을 나타내야 되겠는데 역할 모델이 너무 힘들다.
여러분들이 죽고 싶어서 왔어도 택자 라면 믿음이 연약해도, 또 지금 할 수 없는 상황에 있는 것을 아시고 너무나 주님이 안타까워하시는 그 마음이 느껴지지 않는가?
어루만지시고 ‘일어나서 먹으라’고 다시 누웠는데 또 어루만지시고 ‘일어나서 먹으라’고 이게 너무 너무 위로가 되는 것이다.
‘그냥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
하나님은 도피 중에 엘리야의 일용할 양식을 까마귀와 사르밧 과부를 통해 공급하셨는데 이어 초자연적인 존재인 천사를 보내셔서 공급하신다.
여호와의 천사 말대로 먹고 마셨는데도 다시 누웠다.
얼마나 영육 간에 지쳐있는지 그냥 다시 누웠다.
순종하려고 해도 힘이 없는 것이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의 계속적인 돌아보심이다.
엘리야가 다시 돌아 누우니까 하나님께서도 다시 천사를 보내신다
영적으로 힘들어도 육이 힘들고 육이 지쳐도 영이 힘들다.
먹고 마시고 다시 누울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께서 돌보시는 것처럼 우리도 계속해서 정말 힘들어 누워 지쳐있는 사람을 계속 어루만지면서 먹고 마시라고 해서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전도를 하셔야 될 것이다.
영적인 것이 얼마나 육적인 것을 보여주는지 모른다.
1절에서 4절까지 여호와의 말씀이 등장하지 않았는데 18장1절은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로 시작되는데 19장에는 그 말이 없다.
엘리야의 갈멜산 전투까지 강조된 것이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 가라사대, 말씀과 같이 하여, 17:2, 5,8,10,14,16, 18:1, 2 이렇게 말씀의 인도를 받다가 갑자기 말씀 인도 없이 기도도 안하고 스스로 생명을 위하여 일어나 도망가고, 도주 장소까지 자기가 결정하고 그리고 남쪽 끝까지 도망을 갔는데 하나님의 사람에게 가장 어려운 것은 건강도, 질병도, 부도도 아니고 말씀이 깨달아지지 않고 인도받지 못할 때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인생은 누구도 죄인이고 앞날을 알 수 없기에 말씀의 나침반을 한시도 보지 못하면 골 1:13 처럼 흑암의 세계에서 사랑의 나라로 가려면 넘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말씀의 인도를 가질 때와 아닐 때는 큰 차이가 나는데 이 사소해 보이는 차이를 간과하기 때문에 큰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대부분 상태가 안 좋은 사람에게 “오늘 큐티 했냐?” 고 물어보면 안 했다고 한다. 그런데 오늘만 딱 안 했는데 걸렸다고 한다.
우리가 감동도 없는 말씀의 인도함을 늘 받는 것은 힘들 때 빛을 발하기 때문이다.
감동이 없어도 날마다 말씀의 인도함 받는 것은 큰 사건에서 우리를 살려주시기 때문이다.
열매가 많을 때마다 참담함을 느낄 때 주님이 어루만져 주신다
그런데 엘리야는 너무나 대단한 주의 일을 하고 나서 그냥 감히 말씀을 놔 버렸다. 협박을 받는데 자기가 말씀을 볼 능력도 없으니 여호와의 천사가 주님을 대신해서 인도한다.
너무 힘들 때는 말씀을 볼 능력도 없다. 그만큼 지쳐있다.
그 동안 엘리야는 까마귀와 과부의 공궤를 받고 나는 먹는 것은 졸업을 했다, 선지자 정도라면 나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아? 하면서 의로움이 많이 생겼을 것 같다.
10주 결려 갈 길을 40주 동안 먹고 마시면서 천천히 가게 하시는 것이다
자기처럼 사는 사람이 없으니까 아합이나 오바댜를 봐도 정죄했을 것 같다.
그러니 굶기를 밥 먹듯 했을 엘리야에게 아이러니하게 음식물을 잘 먹고 마시라고 어루만져 주셨다.
육신도 자고 나면 회복이 되는데 영적으로도 쉼이 있어야 회복이 된다.
그런데 영육간에 어떤 것도 치우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천사가 엘리야에게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 하며 네 사명이 안 끝났다고 했다.
지금 엘리야의 체력으로는 호렙산으로 가는 그 길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제가 날마다 생명을 내놓고 30년 동안 왔다.
사명에 불타서 밥을 초계처럼 여기고 굶기를 밥 먹듯 하면서 ‘내 생명을 취하소서’의 이 아픔으로 암이 걸린 것이 로뎀 나무까지 간 것이라면 암 걸려서 쉬면서 제 때 밥을 먹으니까 음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호렙에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사명이 남아있는지 도리어 예전보다 지금 더 건강해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하나님은 엘리야의 우둔한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고 오히려 살아남도록 보호해주셨다.
죽기를 간구하는 엘리야는 오히려 죽음을 보지 못하고 승천했다.
(적용)
-지금 일어나서 먹고 마시라고 어루만져야 할 지체는 누구인가?
-여러분의 식생활은 영적인가? 육적인가?
-술,고기, 탄산음료, 냉커피를 밥 먹듯이 먹고 마시는가?
음식물을 의지하여 호렙산에 가려면 5대 영양소를 골고루 먹읍시다.
오늘 엘리야에게 처방한 것은 오직 먹고 마시라 밖에 없다.
먹으라, 음식물을 의지해라. 그러니까 처방은 이렇게 구체적으로 나가야 하는 것이다.
(예화)
119 대학병원 각종검사 죽음의 위기를 겪었는데 목사님은 대학을 졸업하고 곧바로 선교단의 전임강사가 되어 30년이 넘도록 캠퍼스에서 대학생들에게 전도하고 양육하는 외길 인생을 무명의 전도자로 살아왔는데 저에게 너무나도 큰 충격의 사건이었다. 저의 인생의 송두리째 무너져 내리고 황폐하게 되어 마치 하나님께서 최후의 심판을 행하시는 것처럼 느꼈다. 이사야 24:5 주민이 율법을 범하며 율례를 어기며 영원한 언약을 깨뜨렸던 것처럼 저도 캠퍼스의 선교사로 부름을 받은 사명자임에도 불구하고 인터넷 바둑 게임 중독에 빠져 사역은 적당히 하면서 아내와는 소통하지도 않으면서 아내가 점점 병들어가고 있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던 죄인이라는 것이 깨달아졌다. 제가 애통하는 마음으로 회개를 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저를 사로잡고 있었던 인터넷 바둑게임 중독이 13년 만에 끊어지게 하시고 아내와 소통할 수 있는 은혜를 주셨다. 한 달 후인 2017.1.8에 하나님께서는 저를 부부목장에 목자로, 아내를 권찰로 부르셔서 남은 자가 되는 은혜를 주셨다. 우리의 연약함이 있지만 나의 믿음부분을 보시는 것 같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위로하시고 어루만져주시고 일어나서 먹으라고 회복을 시켜주셨다는 생각을 한다.
나. 말씀어록 54選
1) 믿음의 관점에 따라서 보고의 내용이 다르다.
2) 불신자들의 강퍅한 마음을 변화시킬 수는 없다.
3) 부부가 금슬이 너무 좋은 것이 민중을 도탄(塗炭)에 빠뜨릴 수도 있다
4) 같이 여호와를 믿는다고 하면서 여호와를 열렬히 배격하는 믿음이 있을 수도 있다.
5) 둘만 좋으면 되기에, 둘만 행복하면 되기에, 우리 집만 잘되면 되기에 이 부부의 포스트모더니즘의 가치관으로 인해 결국은 모두가 망하고 나라까지 망하게 된다
6) 개성을 중시하는 것이 하나님 자리에 있게 되면서 인권으로 연결되기에 동성애부터 이혼, 불신결혼까지 마음대로 하고 반대하면 차별이 되는 것이다.
7) 우리가 하나님 같이 될 수 있다면서 모든 인간의 인권이 신격화되는 것이 바벨탑 사건이 가장 큰 문제다.
8) 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인권이 아니라 “주 다스리네”이다.
9) 신자들은 기독교 신앙이 자신에게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 이야기(간증)를 해줌으로써 신앙이 말이 아니라 실제로 작동하는 믿음체계를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한다
10) 이미지와 스토리로 복음을 번역하라면서 성경의 진리를 현대적 상황에 맞게 번역할 필요가 있다고 한다
11) 복음을 한국적 상황에 맞는 이미지와 이야기를 발굴해서 한국인들의 마음을 움직이라고 한다
12) 전도가 교회를 오라고 하는 게 아니라 신앙이 작동하는 믿음 체계를 보여줌으로 이미지와 스토리로 복음을 번역하라는 것이다.
13) 한마디로 우리들 교회의 죄를 보는 간증을 하는 것, 이게 스토리다.
14) 그래서 그것이 신앙의 작동이고 이것을 전도라고 한다는 것이다.
15) 잘 살고 학력이 높을수록 인권이 왕 노릇 하는 것을 본다.
16) 이 땅 자체가 우상이기에 도저히 그 너머에 있는 하나님 나라를 볼 수가 없으며 이세벨은 그 대표적인 모델이다.
17) 육이 너무 가득 차 있어서 영이 보이질 않는다.
18) 오직 성령의 사역만이 강퍅한 마음을 부수고 변화시킬 수 있다.
19) 칼로 총과 군대의 힘으로 절대로 누구를 변화시킬 수 없다.
20) 우리는 순간순간 세상 형편이 하나님보다 더 커 보일 때가 있다.
21) 우리는 큐티를 하면서 날마다 이 일이 왜 왔나 생각해야 된다.
22) 절대 신앙이 무너지면 주위의 형편부터 보인다.
23) 하나님에게만 고정이 되었던 눈길을 떼어서 형편을 살펴보니 자기에게 이롭게 돌아가는 것이 하나도 없고 그 결과 인간적인 계책을 생각하게 된다.
24) 말씀이 안 들리면 도망가고 떠나는 것이다
25) 힘들어도 그곳이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자리인데 말씀이 안 들리면 내 마음대로 생각을 한다.
26) 우리 교회가 늘 말씀 적용을 간증과 묵상 나눔으로 선포하기 때문에 그것은 바알과의 대결을 선포하는 것이다.
27) 간증도 나눔도 하기 싫다고 도망가면 결국 엘리야처럼 자기 생명을 위해 도망갈 일이 생기는 것이다.
28) 간증에 불꽃같이 책임을 져주셔서 기적이 일어난다.
29) 기적 후에는 회개를 주시는 놀라운 일들이 있다.
30) 인간이 아무리 스스로 노력한다고 할지라도 범죄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연약함을 감출 수는 없다.
31) 자기사역을 과대평가하면 우리는 말 한마디에도 못 견딘다.
32) 다른 사람의 약함은 잘 도와주고 상담하면서 막상 내 자신의 약점을 극복하지 못할 때가 있다
33) 마침내 죽기로 한 것은 자기는 이제 소명을 버리기로 했다는 것이다.
34) 소명의식이 없으면 사건이 오면 절망밖에 없다.
35)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일도, 나를 필요로 하는 일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36) 아무리 은사와 재주가 많아도 소명이 없으면 쉽게 절망하는 것은 절대 신앙이 없기 때문이다.
37) 말씀은 좋은데 어떻게 전해야 할지 사람을 만날 자신이 없다.
38) 절대 신앙이 없으니까 이게 다 죽기를 구하는 것이다.
39) 극심하게 낙담한 이유는 자기 옆에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40) 세상에 나는 혼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다 죽기를 구하고 있다.
41) 죽고자 하는 이유를 (원수는) 너무 합리화시켜주면서 우리를 정조준 한다.
42) 영적으로 힘들어도 육이 힘들고, 육이 지쳐도 영이 힘들다.
43) 먹고 마시고 다시 누울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께서 돌보시는 것처럼 우리도 계속해서 정말 힘들어 누워 지쳐있는 사람을 계속 어루만지면서 먹고 마시라고 해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전도를 해야 하는 것이다
44) 하나님의 사람에게 가장 어려운 것은 건강도, 질병도, 부도도 아니고 말씀이 깨달아지지 않고 인도받지 못할 때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45) 인생은 누구도 죄인이고 앞날을 알 수 없기에 말씀의 나침반을 한시도 보지 못하면 (골 1:13)말씀처럼 흑암의 세계에서 사랑의 나라로 가려면 넘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46) 말씀의 인도를 가질 때와 아닐 때는 큰 차이가 나는데 이 사소해 보이는 차이를 간과하기 때문에 큰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47) 우리가 감동도 없는 말씀의 인도함을 늘 받는 것은 힘들 때 빛을 발하기 때문이다.
48) 감동이 없어도 날마다 말씀의 인도함 받는 것은 큰 사건에서 우리를 살려주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49) 열매가 많을 때마다 참담함을 느낄 때 주님이 어루만져 주신다
50) 육신도 자고 나면 회복이 되는데 영적으로도 쉼이 있어야 회복이 된다.
51) 그런데 영육간에 어떤 것도 치우치면 안 된다는 것이다.
52) 음식물을 의지하여 호렙산에 가려면 5대 영양소를 골고루 먹어야 한다
53) 처방은 무엇을 먹고 마시라고 구체적이어야 한다
54) 심지가 견고해야 평강이다
다. 느낀 점
우리가 육적으로 영적으로 지칠 때 매너리즘에 빠지고 자포자기의 심정이 되지만 택자라면 하나님이 천군천사를 보내시어 우리가 먹고 마시고 누워 다시 기력을 회복하여 사명의 자리로 가게 하신다는 말씀이 큰 위로가 됩니다.
목사님의 설교 마지막 기도말씀 중 “심지가 견고해야 평강이라고 하시는데”라는 구절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