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과 마음씀2021. 1. 7. 11:20

[우리들교회 2021 13일 주일예배 말씀 요약(사도행전 15: 1~ 5/성령의 구원)]


 

<사도행전 15:1~5>


1    어떤 사람들이 유대(Judea)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2    바울 및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sharp dispute and debate)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의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

3    그들이 교회의 전송을 받고 베니게(Phoenicia)와 사마리아(Samaria)로 다니며 이방인들(Gentiles)이 주께 돌아온 일을 말하여 형제들을 다 크게 기쁘게 하더라

4    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하매

5    바리새파(the party of Pharisees) 중에 어떤 믿는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Gentiles)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1. Some men came down from Judea to Antioch and were teaching the brothers: "Unless you are circumcised, according to the custom taught by Moses, you cannot be saved."
  2. This brought Paul and Barnabas into sharp dispute and debate with them. So Paul and Barnabas were appointed, along with some other believers, to go up to Jerusalem to see the apostles and elders about this question.
  3. The church sent them on their way, and as they traveled through Phoenicia and Samaria, they told how the Gentiles had been converted. This news made all the brothers very glad.
  4. When they came to Jerusalem, they were welcomed by the church and the apostles and elders, to whom they reported everything God had done through them.

5.   Then some of the believers who belonged to the party of the Pharisees stood up and said, "The Gentiles must be circumcised and required to obey the law of Moses."

 

 


 

 

<Prologue>


성령을 받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누리는 것이지요. 그러려면 구원의 확신이 있어야 하지요. 구원의 확신은 세상에서 누리는 그런 평강과는 다르죠. 하나님 나라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했는데, 구원의 확신은 이런 의와 평강과 희락의 나라를 이 땅에서 누리는 것입니다. 그것을 성령이 효과적으로 도와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누릴 자가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성령의 구원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말씀 요약>

 

성령의 구원은?

1.   구원의 확신이 필요합니다.

 

1)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안디옥교회는 바울과 바나바(Paul and Barnabas) 1년간 성경을 가르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던 교회이다. 아가보 선지자가 흉년의 예언을 해도 잘 받아들이고, 예루살렘 교회에 구제까지 한 건강한 교회이다. 근데 그들은 비록, 개종을 해서 복음을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여전히 유대의 전통에 대하여 큰 자부심을 가짐으로 또 이방인 개종자들도 할례를 받고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을 계속 유포를 하니까, 초신자가 많은 안디옥 교인들은, 율법을 좔좔 꿰고있는 그들이 맞아 보였어요. 이 사람들은 이 안디옥 이후에도 갈라디아 지방 그리스인들도 혼란에 빠지게 했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은 사도회에서, 또 시키지도 가결 되지도 않은 내용이었어요. 그들은 안디옥 교회가 이방인에게 전도하여 엄청나게 부흥했다는 소문을 듣고 5백 킬로미터나 되는 길을 달려왔다. 여행 기간이 1달은 걸리는 기간이다. 굉장한 열심이다. 무슨 열심인가? 자기들의 자랑인 율법을 가르치고자 하는 열심이다.

믿음의 반대는 무서운 열심이다. 그래서 열심인 사람들이 믿기 어렵다. 그들이 음성적으로 활동하고 폐해가 큰다는 것은 그들이 거짓 형제이고, 예수 안에서 종으로 삼고자 했다고 비판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들이 열성적으로 가르쳤다. 여기에 구원이 흔들린 사람들이 생긴다.

신약 시대는 이미 시작이 됐다. 하지만 신약의 신학은 정립되지 못한 과도기였다. 그래서 유대인 출신으로만 구성된 초기 예루살렘 성도들도 구약의 율법에 얽매여 있었다.

이방인의 유입이 교회의 순수성과 윤리적 기준을 저해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있었다. 동시에 이면에는 자신들은 율법을 지키며 수고하며 교회의 일원이 되는데, 이방인은 쉽게 교회의 일원이 된다는 생색도 있었을 것이다.

실컷 죄짓고 살다가 나중에 회개하고 천국 가겠다는 사람들이 많다. 누구는 경건하게 살아도 구원을 못 받고, 누구는 죄짓다가 구원 받으면 말이 안된다는 것이다.

할례가 너무 몸에 익은 전통이기에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거 맞다. 갑자기 할례를 안하려고 하니까 이상하기도 했다. 유대인들에게 할례를 안받은 것은 아픔을 모르는 것이고, 일원이 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초신자들은 할례를 안하니 그들의 아픔을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다.

바울과 바나바에게 가르침을 받을 때는 확실한 것 같았는데, 배움이 짧은 것이다. 그리고 이방인들이 많았다. 특별히 가르치는 사람이 없어 흔들린 것이다.

 

                                                     (바나바/Barnabas)


우리들교회도 구원의 확신을 점검해 봐야 한다. 비로서 그리스도인이라 칭함을 받은 자들이 많았다고 생각한다. 흔들리는 사람은 없는가? 가르쳐야 하는데, 가르침 받는 이단같은 사람은 없는가? 사람은 기복이 본능이기에 자꾸 변질이 되는 것이다.


1차 전도한 갈라디아 교회들도 바울이 떠나자마자 이단에 빠졌다는 것이다. 요란케 하는 다른 복음에 왜 빠지냐 하면, 이런 사람들이 ‘할례를 받아야 된다, 율법을 지켜야 된다’ 이 구원을 조건으로 내세워서 결국에는 성공 복음, 합격 복음이 경건해 보이지만. 신천지, 이단에 빠지는 것은 기복이기에 그런 것이다. 내가 회개하지 않고도 구원을 받을 길이 있기 때문이다.


성령으로 시작했는데, 사업이 안되고 상처를 받고 그러면 떠나가게 된다. 다른 복음 들어오는 것이다.


(적용#1)

-새해 벽두에 여러분은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까?

 

2.   말이 아닌 삶의 변론을 해야 합니다.

 

2) 바울 및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의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


안디옥 교회에서 제자들과 머물던 바울과 바나바는 이 인본적인 가르침을 듣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다툼/투쟁은 맞서 일어나는 걸 말하고 변론은 치열하게 논쟁하는 걸 말한다. 이 문제는 넘어갈 수 없었던 것이다. 위험한 주장이기에 안디옥 교회에 찬성과 반대로 분쟁이 일어난다.


그래서 여기 적지 아니한 다툼이 일어났다고 했는데 수적으로도 굉장히 다툼이 많았고 기간적으로도 상당히 오래 지속되었으며, 정도에 있어서도 매우 격렬하고 아주 심각했다는 것이다.


바울과 바나바가 1차 전도여행에서 돌아온 후 예루살렘 공회가 열리기 까지 대략 1년정도 시간이 있었다. 이 기간 동안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기록했다고 하는데, 이 설에 따르면 이방인들이 할례를 받아야 하고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말에 바울이 1차 전도를 한 교회들이 현혹 됬다는 것이다. 그래서 갈라디아서에 구원은 우리 힘으로 받는 것이 아니다고 쓴 것이다.


자신들을 양육한 사도와 장로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 그 예루살렘 교회에서 사람들을 가르칠 때 그 권위를 거스를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바울은 히브리인중에 히브리 인이고, 바리새인 인 것이다. 그래서 사도행전 22 3절에도 유대자들을 향해서 인본적인 율법준수에서 그야말로 원탑이었다고 하는 것이다.


율법주의자들의 말을 누구보다 잘 이해했다. 예전에 딱 이와 같은 생각으로 교회를 핍박한 장본인이다. 누가(Luke)는 무슨 말로 논쟁했는지 기록하지 않는다. 하지만 바울의 편화된 태도가 중요한 내용이다. 말로 하는 논쟁은 대부분 온전한 결론을 낼 수 없다. 그래서 인류가 수천년 넘게 붙들고 논쟁하는 여러 주제들이 있다. 사람의 말에서 답을 구하니 결론이 나오지 않는다. 늘 방황한다. 이를 멈추게 할 것은 변화된 삶이다. 말로는 안된다.


내가 믿었고, 광야를 거칠 때, 말씀이 없으면 흔들리는 것이다. 진정한 회개가 없으면 광야를 건너가도 깨달을 수 없다. 깨닫지 못하니, 자기가 인본적인 가치관인지 모르고, 변론에 맞설 수 없는 것이다. 자기 죄를 깨닫고 돌이켜야 각자가 사로잡힌 바리새인적인 가치관에 맞설 수 있다.


사건이 올 때 사건에 절망하지 말고 말씀을 묵상하며 회개를 해야 한다. 내 안의 인본적인 생각과 감정을 드러내 직면하며 대적하는게, 바로 믿음의 선한 싸움이다.


이 변론을 듣던 안디옥의 제자들은 바울과 바나바가 자신들의 영적 지도자였기에,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인 손님들을 거부할 수 있는데, 안디옥 교회들은 윗 질서의 사도와 장로들에게 묻기로 결정한다. 교만해 지지 않고, 겸손히 자신을 낮추고, 예루살렘 지도자들에게 맡기는 것이다.


바울과 바나바가 잘 들은 것처럼 안디옥 성도들은 잘 묻는다. 흥왕하는 성령에게 양육 받은 결과인 것이다. 바울과 바나바는 또 이 안디옥 교회에 순종 한다. 이것이 변화된 삶으로 변론 하는 것이다. 구원의 확신은 삶의 변론으로 나타난다.


목사님도 큐티가 잘못되었다고 많이 듣는다. 알고 보니 변론할 문제가 아니었다. 우리들교회 성도들의 삶으로 변론이 되고 있다. 앞으로도 그래야 한다.


성령의 구원은 구원의 확신으로 삶의 변론을 하게 되면 말이다

 

3. 구원을 함께 기뻐하는 공동체를 허락하십니다.

 

구원을 함께 기뻐하는 공동체를 허락하세요. 구원의 기쁨을 주시는 거죠. 구원은 나쁜 것만 (주시는 것)이 아닌 거예요.

 

3) 그들이 교회의 전송을 받고 베니게(Phoenicia)와 사마리아(Samaria)로 다니며 이방인들이 주께 돌아온 일을 말하여 형제들을 다 크게 기쁘게 하더라


베니게는 해변가에 있었고, 사마리아는 예루살렘 위쪽의 내륙에 있었고, 가는 길에 있었다.


근데 사마리아는 북이스라엘의 수도를 중심으로 했으니 내륙지역이고, 해변 지역이 있는데, 유대인들에게 베니게는 옛적부터 세속적인 이방 문화를 대표하는 중심지인 거예요, 이 베니게가. 두로와 시돈하면 딱 기억나는 게 있다. 사마리아는 앗수르에 의해서 북이스라엘이 멸망했잖아요. 거기에 살던 사람들이 같이 혼혈족이 되어서 유대인들은 이방보다 더 무시하는 게 혼혈족이며 혼혈족. 그래서 인종적으로 타락했다고, 막 잡족이라고 여기는 거예요. 아주 무시 받던 지역이다


그런데 여기에 스데반(Stephen) 순교 이후에 핍박을 받아 흩어진 예루살렘 성도들이 이 지역에 교회를 세우는데, 바울은 이곳을 들려 1차 전도 여행을 보고하는 것입니다. 이 보고를 들은 베니게와 사마리아 성도들의 반응이 모두 크게 기뻐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원어를 보면 영어 메가의 어원이 나옵니다. 매우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은 못 갔지만 바울이 가서 너무 고맙고 이방인들이 영접한 게 너무 기쁜 것입니다. 함께 크게 기뻐한 이 성도들이 바울과 바나바의 구원 공동체가 된 것입니다. 성령의 선물입니다.


이 공동체가 거룩을 위해 좁은 길을 가고, 무시와 배신을 당해서 흔들리지 않는 비결이 됩니다.


별 인생이 없고 별 기쁨도 없다. 이제 새해가 되어 목장이 새롭게 시작되는데, 이 코로나의 슬픈 상황에서도 목장에서 가장 큰 기쁨을 얻으시기 바란다. 여러분들이 기쁨 못 얻는 거는 구원의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나한테 책임이 있는 거예요. 목장마다 성령의 구원의 확신이 생기기를 기도합니다.


(적용#2)

-여러분은 이렇게 구원의 증언을 들을 때 크게 기쁩니까, 여전히 옳고 그름으로 판단합니까아 이러니까 믿지, 저러니까 믿지, 이러면서 판단을 합니까?

 

4. 구원의 결론은 인내입니다.


구원의 결론은 인내인 거예요.


4) 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하매


헤롯 아그립바 1세의 박해로 예루살렘을 떠났던 베드로도 아그립바가 죽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공회에 참석할 수 있었다. 바울은 지금 벌써 몇 차례 선교 보고를 했고 연습이 충분했다. 안디옥에서, 베니게에서, 사마리아에서. 그래서 쟁점을 풀어야 하는 중요한 자리에 선교 업적을 자랑한 게 아니고, 14 27절처럼,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하신 모든 일, 이걸 말했는데, 그것은 아까도 말했듯이 신인 협력적 이라기 보다 바울의 허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함께 행하셨다고 진심으로 보고를 했다.


5) 바리새파 중에 어떤 믿는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구원의 일에 같이 기뻐하지 않고 슬퍼하지 않습니다. 바울 사도가 얼마나 마음이 녹았겠어요?


예루살렘 교회는 모 교회지만, 구원 받고 나서는 계속 적대적이고 발을 붙일 수가 없는 거예요. 17년이 지나고 이방 선교의 공을 혁혁하게 세우고 갔지만, 여전히 살얼음판인 모 교회였다. 그때 유대교가 점점 세력이 약화되어 가니까, 본능적으로 그랬을 수도 있다.


그러니까 구원의 열매가 바울에게 있으니까 예루살렘 교회가 이렇게 바울을 공격합니다. 구원의 길이 구원받아 좋지만 힘든 것이다. 구원의 여정은 끝이 없다. 말로는 안되고, 삶으로 보여줘야 한다. 예루살렘 교회에서도 드러내야 한다. 바울은 복음을 듣고 기뻐하는 공동체 힘으로 복음을 부정하는 자들의 공격을 계속 받아내고 참아야 한다.

(적용#3)


-구원의 결론은 인내라고 하는데, 인내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정말 이렇게 노래, CCM도 들어가 보면, 백만 이렇게. 설교 하면 몇 만인데.


그게 한이 서린 어떤. 정말, 우리가 눈물을 흘린다는 게 굉장히 우리를 건강하게 해준다고 생각이 된다. 그런데 타인을 위한 눈물을 사실 어찌 악하고 음란한 인간이 흘릴 수가 있겠습니까? 이 눈물은 구원 때문에만 가능하다. 더 많은 사람의 구원을 위해 눈물을 흘린 사람은 자신의 어떤 상황에도 감사할 줄 알 것입니다. 근데 그것은 바로 함께하는 삶이다. 이런 구원의 눈물을 흘리는 2021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적용#4)

-여러분은 구원 때문에 우십니까, 자기 연민 때문에 우십니까?


 

<Epilogue>

1)  성령을 받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누리는 것이다.

2)  그러려면 구원의 확신이 있어야 한다

3)  구원의 확신은 세상에서 누리는 그런 평강과는 다르다

4)  하나님 나라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했는데, 구원의 확신은 이런 의와 평강과 희락의 나라를 이 땅에서 누리는 것이다.

5)  그것을 성령이 효과적으로 도와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누릴 자가 없다

6)  성령의 구원은 구원의 확신이 필요하다.

7)  믿음의 반대는 무서운 열심이다. 그래서 열심인 사람들이 믿기 어렵다.

8)  사람은 기복이 본능이기에 자꾸 변질이 되는 것이다.

9)  성령으로 시작했는데, 사업이 안되고 상처를 받고 그러면 떠나가게 된다. 다른 복음 들어오는 것이다.

10) 다툼/투쟁(dispute)은 맞서 일어나는 걸 말하고 변론(debate)은 치열하게 논쟁하는 걸 말한다.  

11) 말로 하는 논쟁은 대부분 온전한 결론을 낼 수 없다.

12) 그래서 인류가 수천년 넘게 붙들고 논쟁하는 여러 주제들이 있으며 사람의 말에서 답을 구하니 결론이 나오지 않고 늘 방황하는 데 이를 멈추게 할 것은 변화된 삶이고 말로는 안된다.

13) 내가 믿었고, 광야를 거칠 때, 말씀이 없으면 흔들리는 것이다.

14) 진정한 회개가 없으면 광야를 건너가도 깨달을 수 없다.

15) 깨닫지 못하니, 자기가 인본적인 가치관인지 모르고, 변론에 맞설 수 없는 것이다.

16) 자기 죄를 깨닫고 돌이켜야 각자가 사로잡힌 바리새인적인 가치관에 맞설 수 있다.

17) 사건이 올 때 사건에 절망하지 말고 말씀을 묵상하며 회개를 해야 한다.

18) 내 안의 인본적인 생각과 감정을 드러내 직면하며 대적하는게, 바로 믿음의 선한 싸움이다.

19) 구원의 확신은 삶의 변론으로 나타난다.

20) 성령의 구원은 구원의 확신으로 삶의 변론을 하게 되면 이룬다

21) 구원을 함께 기뻐하는 공동체를 허락하시고 구원의 기쁨을 주시는 것인데 구원은 나쁜 것만 (주시는 것)이 아닌 것이다

22) 함께 크게 기뻐한 이 성도들이 바울과 바나바(Paul and Barnabas)의 구원 공동체가 된 것으로 이것이 성령의 선물이다.

23) 이 공동체가 거룩을 위해 좁은 길을 가고, 무시와 배신을 당해서 흔들리지 않는 비결이 된다.

24) 별 인생이 없고 별 기쁨도 없다.

25) 여러분들이 기쁨 못 얻는 것은 구원의 확신이 없기 때문이고 나한테 책임이 있는 것이다.

26) 구원의 결론은 인내인 것이다

27) 구원의 길이 구원받아 좋지만 힘든 것이며 구원의 여정은 끝이 없다.

28) 구원의 길은 말로는 안되고, 삶으로 보여줘야 한다.

29) 바울처럼 복음을 듣고 기뻐하는 공동체 힘으로 복음을 부정하는 자들의 공격을 계속 받아내고 참아야 한다.

30) 더 많은 사람의 구원을 위해 눈물을 흘린 사람은 자신의 어떤 상황에도 감사할 줄 알 것이다

31) 목장이란 구원공동체가 없으면 신앙생활을 안하는 것과 같다

32) 피의 논리와 땀의 논리가 아니라 뜨거운 눈물 한 방울의 논리가 구원을 말해 준다

33) 구원을 위해서만 구원의 눈물 흘림이 가능하다

34) 영적 진실성의 결과는 인내이다


Posted by 윤강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