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외교2011. 5. 20. 21:17

1. "Golden Era" (황금기)와 " Era Without History" (역사 없는 시대)

사마란치 전 IOC위원장 서거 1주기(4월21일)를 맞이하여 김운용 전 IOC부위원장 겸 WTF창설총재 겸 전 KOC위원장이 Newsis에 글을 기고 하였다.
이 글에서 사마란치 전 IOC위원장이 이끌었던 올림픽운동은 " 황금기"(Golden Era)였고 현 로게 IOC위원장이 10년 째 리드하고 있는 올림픽운동은 "역사없는 시대"(Era without Histroy)라고 올림픽운동에 정통한 한 영국 대 기자의 표현을 빌어 비교하기도 하였다. 



2. 사마란치 후임 IOC위원장 선거 출마후보들과 선출과정


로게 현 IOC위원장은 2001년 모스크바 IOC총회에서 있었던 IOC위원장 선거에서 김운용 전 IOC부위원장을 결선에서
누르고 사마란치 IOC위원장의 후임으로 10년 동안 IOC수장 역할을 수행하여 왔다.
당시 IOC위원장 후부들로는 김운용후보이외에,
두 번째로 사상 최초의 여성 IOC집행위원과 IOC부위원장을 역임하고 IOC여성과 스포츠 분과위원장으로 미국을 대표하는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조정종목 동메달리스트인 Anita DeFrantz 미국 IOC위원을 비롯하여,
세 번째 후보로는1968년 멕시코 및 1972년도 뮌헨 올림픽 펜싱 금메달리스트로서 21년 간(1989~2010) 헝거리 NOC위원장과 8년 간(1999~2007) 세계올림픽피안협회(WOA)회장, 스페인과 스위스 주재 헝가리 대사 그리고 IOC의전장을 역임한 Dr. Pal Schmitt 현 헝가리 대통령 겸 IOC스포츠와 환경분과위원장 겸 IOC위원,
네 번째로 IOC부위원장을 8년 간 두 번씩(1987~1991, 1996~2000)역임하고 IOC마케팅위원장, 2002년 솔트 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유치 스캔들 조사 위원장, 초대 세계 반도핑기구(WADA)회장(1999~2008), 캐나다 NOC위원장(1977~1982), 올림픽대회연구위원회 위원장(2002~2003)을 역임한 1960년 로마올림픽 수영종목 결승전 진출자 출신인 Richard Pound 현 캐나다 IOC위원 등 자크 로게 후보 포한 총 5명이 경합을 벌인 바 있다.

(Anita DeFrantz 미국 최초 흑인 여성 IOC위원겸 IOC위원장 후보였던 IOC여성과 스포츠위원장과 함께/데프란츠 IOC위원은 필자와 함께 중국인민대학 외부위촉 동료객좌교수이기도 하다.) 

(H.E. Pal Schmitt 헝가리 IOC위원겸 IOC위원장 후보였던 현 헝가리 대통령<좌측사진 가운데> 및 우측사진 우측 사진 <우-1>과 1995년도 미스 코리아 최윤영<우-2>와 함께/2003년 프라하 IOC총회 리셉션장에서)

(2008년 베이징ANOC총회에서 한국최초 ANOC공로훈장 수상시 자크 로게 IOC위원장 그리고 2003년 대구하계유니버시아드 리셉션장에사 함께)

(1995년 GAISF서울총회에서 GAISF회장으로 총회주재하고 있는 김운용 전 IOC부위원장과 좌측 옆에는 사마란치 IOC위원장이 함께 참석하고 있다./6년뒤 김운용 IOC위원장 후보는 자크 로게 후보에게 결선투표에서 패하였다.)

(Dick Pound 캐나다 IOC위원으로 사마란치 IOC위원장 시절 막강한 파워를 과시하였고 그 저력으로 IOC위원장 후보로 출마하였다.)

(1991년 바르셀로나와 28년 뒤인 2009년 코펜하겐에서 함께한 사마란치 전 IOC위원장) 



이들 5명 중 사마란치 당시 집권 IOC위원장이 지지한 후보는 벨기에 IOC위원이었던 자크 로게였다.
자크 로게는 벨기에 NOC위원장(1989~1992), 유럽올림픽위원회(EOC)회장(1989~2001:12년간), IOC집행위원 등을 역임하였고 약관 46세였던 1988년 서울올림픽에는 벨기에 올림픽선수단장으로 서울올림픽에 참가하였다.

(1988년 서울올림픽에 46세로 당시 벨기에 올림픽 선수단장시절의 자크 로게 현 IOC위원장<좌측>이 당시 김종하 KOC위원장<우측>이 주최한 플라자호텔 중국관 도원에서의 오찬회동후 기념품을 받고 있다. 가운데는 필자)


정형외과 출신인 그는 선수단장과 자국 올림픽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면서 NOC경력과 올림픽 출전 선수 경력(1968년 멕시코, 1972년 뮌헨 및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요트 선수)을 앞세워 해박한 지식과 현장경험 그리고 스포츠 행정경험등이 IOC위원들에게 어필한 바 있다.
그러나 그것 보다는 사마란치 당시 IOC위원장의 신임과 지원에 힘입어 당시 가장 막강하였던 한국의 김운용 후보를 최종 결선에서 이기고 IOC위원장이 되었다.

아시아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도전장을 냈던 김운용(당시 70세) 대한체육회 회장 겸 국제올림픽위 집행위원은 아쉽게 고배를 들었었다.

자크 로게 후보는 2001년 7월16일(한국시각) 러시아 모스크바 세계무역센터 콩그레스홀에서 열린 제112차 국제올림픽위 총회 마지막날 8대 위원장 선거에서, 2차 투표 끝에 과반수 표를 얻어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당시 81세)의 후임자로 결정됐다.

김 회장은 1차 투표에서 자크 로게와 함께 과반수 표 확보에 실패해 2차 투표에 들어갔으나 국제올림픽위 107년 역사상 처음으로 아시아인 위원장 자리를 노렸던 꿈을 실현시키지 못했다.

사마란치는 투표 뒤 컬럼홀로 옮겨 자크 로게의 당선을 공식 발표했다.

정형외과 의사 출신인 로게는 사마란치의 강력한 지원과 유럽위원들의 적극 지지로 새 위원장에 당선됐다. 특히 로게는 솔트레이크시티 뇌물스캔들에 연루되지 않는 등 깨끗한 이미지와 올림픽 규모 축소 등 개혁적인 운동으로 좋은 평가를 받은 것으로 분석된다.

로게는 지난 91년 국제올림픽위 위원에 선출됐으며, 그동안 국제올림픽 집행위원으로 활동해왔다. 유럽국가올림픽위원회 회장도 맡고 있었다.



3. 자크 로게 IOC위원장 연임과 김운용 전 IOC위원장의 관계


첫 번째 임기 8년(2001~2009)를 마치고 올림픽헌장 상 2회(4년) 최장 12년까지 연임할 수 있는 규정과 이를 존중하여 2009년 코펜하겐 IOC총회에서는 예의 상 경쟁후보가 나오지 않아 단독출마하여 연임에 성공하여 오는 2013년까지 IOC위원장 직을 수행한다.
2002년 솔트 레이크 시티 동계올림픽 스캔들로 연루된 10명의 IOC위원들이 줄줄이 사퇴하면서 1999년 IOC개혁안이 공표되었다.
그 여파로 자크 로게 IOC위원장은 취임 일성이 "부패 및 도핑에 대한 무관용주의"( Zero Tolerance on Corruption and Doping)를 표방하였고 그 덕분에 그의 별명은 "Mr.Clean"이다.
사실 그의  IOC위원장으로서 평가는 2013년 임기를 모두 끝냈을 때 내려지는 것이 관례지만 이미 임기의 90%가까이 끝낸 시점에서 그에 대한 점수가 매겨지고 있다는 것은 당사자인 자크 로게 IOC위원장으로선 그리 달갑지 않을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자크 로게 IOC위원장과 김운용 전 IOC부위원장 간의 관계가 좋지 않다는 것은 오래된 공공연한 비밀이다.
정황 상 할 수 없이 자크 로게를 IOC위원장으로 밀었던 사마란치 전 IOC위원장은 사실 인간적으로는 김운용 전 IOC위원장과 훨씬 더 가까웠다.
사마란치 전 IOC위원장은 서울올림픽을 전후로 김운용 전 IOC부위원장과 거의 매일 통화와 소통을 통해 인간적이고 업무적인 관계형성과 신뢰도가 돈독해 졌다.
그 이후 사마란치 후계자 논의가 나올 때마다 세계 언론조차 자크 로게 보다는 Dr. Un Yong KIM을 선두주자로 꼽을 정도 였다.
그러나 유럽 중심의 IOC구도와 아시아인의 한계라는 벽은 높았다.
누구에게나 "적과 동지"가 있기 마련이다.
자크 로게 IOC위원장이 2013년 퇴임 전에 IOC위원직을 자의반 타의반으로 자진 사임한 김운용 전 IOC부위원장을 IOC 명예위원으로 직권 추천하여 해원상생(Win-Win)의 유종의 미를 거두었으면 하는 개인적 바람이다.



4. 자크 로게 IOC위원장의 청소년올림픽(YOG: Youth Olympic games)창설과 향후 문제점


2010년 싱가폴에서 막을 내린 제1회 청소년 올림픽(YOG)에 대한 평가가 자못 궁금하였다.
외신에서는 "대성공(great success)과 쓸데 없는 장식물(boondoggle)"이란 두 가지  상반된 평가가 나온 바 있다.
우선 싱가폴에서 개최된 제1회 청소년 올림픽대회는 그럭저럭 첫 번쨰 관문을 통과 한 것 처럼 보였다.
하지만 새로운 국제스포츠이벤트에 대하여 미디어가 조롱하는 말투로 묘사하듯이 "거품 낀 쥬니어 올림픽"(a bloated junior Olympics)으로 전락해 가는 과도기로 접어드는 길로 향하고 있는 것일까?


The first-ever Youth Olympics came to a close in Singapore Thursday night. (Singapore 2010)

자크 로게 현 IOC위원장은 YOG의 중요성에 확신하고 있는 반면, 아직도 이러한 새로운 대회를 "쓰잘데 없는
가죽 장식물(boondoggle)"정도로 묘사하고 있는 IOC위원들은 새로운 이벤트를 무대에 올리기 위하여 소요되는 비용과 자원들에 대해 반대하고 있는 상황이다라는 것이다.

로게 IOC위원장은 자신에 대한 "Mr. YOG"타이틀을 거부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소한 YOG의 목자(shepherd)이다.
그는 2007년 YOG개최계획에 대부분의 동료 IOC위원들이 찬성하도록 설득하는 데 성공 한 바 있다.
문제는 그가 이러한 무리들을 계속 같은 한 방향으로 움직이도록 하면서 동시에 YOG가 전진하도록 의구심을 해소시켜야 한다라는 것이다.
현 상황으로는 YOG가 지속되리라 예상된다.
로게 IOC위원장은 싱가폴 개최 제1회 YOG대회 직후 2014년 제2회 대회개최도시인 중국 난징으로 날아가서 대회 조직위원회 책임자들에게 대회자체를 필요이상으로(beyond what is really needed) 키우지 말 것을 종용하고 권고 한 것은 올바른 조치로 여겨진다.

한 외신 보도에 의하면 제1회 싱가폴YOG개최 비용이 2억9천만 불(약 3,100억원)로 잠정 계상되고 있다고 하였다.
로게 위원장은 물론 이러한 규모의 대회개최비용이 향후 YOG주최자들이 감당해야 할 수준점(benchmark) 액수는 아니길 바라고 있음에 틀림 없다.

2007년 YOG를 창설키로 서두른 시점에서 대회자체가 올림픽을 치르기에는 과부족인 작은 도시들을 대상으로 선정되어야 한다는 믿음에서 추진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인구 5백만의 싱가폴이나 인구 약 8백만의 난징의 경우를 보면서 YOG가 작은도시 중심으로 선정되어 개최되어야 한다는 생각이야말로 올림픽이 아마튜어리즘(Amateurism)에 충실해야 한다는 개념처럼 약간 기묘하다고 해야 할까?

제1회 동계 YOG개최도시인 오스트리아의 인스부르크도 동계올림픽개최지 개념으로 보면 이미 두 차례(1964년 제9회 및 1976년 제12회 동계올림픽)나 대회를 개최한 본격적인 동계올림픽도시지 동계올림픽개최하기에는 규모가 작기 때문에 선정된 개념의 작은 도시가 결코 아니다.

향후 미국의 인구 170만 명의 소규모 도시인 Raleigh-Durham이나 인구 60만의 영국 소도시인 Glasgow와 같은 잠재적 YOG개최 희망도시들은 규모가 더 큰 경쟁도시들이 유치전에 뛰어 들 경우 유치경쟁에서 도태되지 않토록 IOC가 이에 대한 안전조치를 강구해 주도록 요구 할 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모스크바와 아테네와 같은 거대 도시들이 YOG개최를 윈하는 5개 도시들중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IOC가 난징 개최도시에게 주문해야 할 벤치마킹 포인트는 전통적안 TV채널이든 신개념 미디어든 간에 세계미디어주류의 관심도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취재로 수 천명의 보도진들이 밀려 들어 온 경우와 비교해 볼 때 싱가폴 YOG대회취재 보도진 수는 그야말로 극소수(infinitesmal)에 불과 하였다.

미국 주요 일간지 기자는 단 한명도 파견되지 않았다. 전 세계 주요 다른 언론매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전 세계 주요 신문이나 웹사이트를 뒤져보아도 싱가폴 YOG대회 관련 취재 내용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영구불변의 질문하나: "숲에서 나무 한그루가 쓰러졌지만 아무도 그 소리를 들은 사람이 없다면  그래도 그 소리는 나는 걸까?"
(If a tree falls in the forest but no one hears it, does it make a sound?)

올림픽스폰서들이 두려워하는 질문하나가 있다. 도대체 이러한 국제스포츠이벤트라는 것이 과연 돈과 지원을 한 만큼 그에 필적하는 가치창출을 해주고 있는 것인가에 대한 의문에 대하여 심사숙고해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이러한 맥 풀리고 시들시들한 미디어의 관심은 2014년 제2회 YOG개최도시인  중국 난징에게 조짐이 썩 좋지 못하다.
역동적이고  모든 편리한 최신 시설들로 탑재된 영어권 도시국가 싱가폴에도 보도진을 끌어 들이는 것이 어려웠다면 차기 개최도시 난징은 YOG대회 보도가 철저히 도외시는 것으로부터 벗어 나기 위해  제1회YOG개최도시 싱가폴 보다 수십배 더 각고의 노력을 경주해야 할 것이다라는 것이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기간 중 서방 취재기자들이 보도와 관련 봉착했던 항의사태를 떠올렸을 때 과연 서방기자들이 열정적으로 YOG취재차 중국에 다시 돌아올 것인가 하는 회의적 전망을 야기 할 수 있다.
대회기간 중 인터넷격론(internet hassles), 보도제한(press restrictions), 언어장벽(language barriers), 입국비자 수속(visa process) 그리고 중국까지 오는 데 드는 여행경비 등의 문제점은 2014년 난징 YOG조직과 관련 서방 취재기자들이 난징 YOG에 올 것인가를 저울질하게 하는 요인들이 될 것이다.
또한 강한 흥미를 끌게하는 이야기거리가 결핍된다면 중국이외의 외국에서 오는 취재기자들의 인원수가 필연적으로 감소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IOC President Jacques Rogge hands over the Olympic Flag to the Mayor of Nanjing, Jianye Ji. (Singapore 2010)

제1회 싱가폴 YOG처럼 중국선수단이 메달을 독식하였던 실력을 감안해 볼 때 2014년 제2회 난징 YOG는 홈그라운드에서 중국선수단이 더 더욱 많은 메달을 딸 수 있는 여건과 기회를 부여하게 될 공산이 아주 크다.
따라서 IOC와 대회조직당사자들은 색다른 이야기거리를 창출할 필요가 있다.
각국 NOC들이 한층 강력한 선수단을 구성하여 파견한다는 방안도 모색 할 수 있겠다.

IOC가 YOG를 계기로 창출한 쥬니어 리포터 프로그램(Young Reporters Program)은 획기적이다.
29명의 YOG 쥬니어 기자들을 배출하였다.
이들은 TOP스폰서인 Coke, McDonalds, Acer, Smasung등의 지원을 받았다.
이들 중 2명은 2012년 런던올림픽 미디어 스태프 보직을 받아 활동하고 있을 것이다.

IOC가 YOG를 통해 새로운 올림피안(Olympinas)을 배출하고자 희망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청소년올림픽은 차세대 올림픽에 정통한 기자들(Olympics-savvy journalists)을 배출케 할 것이다.
이같은 프로그램이 지속적으로 추진 된다면 2014년 난징 청소년올림픽을 계기로 중국의 젊은 기자들이 전 세계에서 방문하는 비슷한 또래 기자들과 함께 일을 할 수 있는 문호가 개방될 것이다.

YOG의 문화 교육 프로그램의 가치는 대회 경기의 그것과 같은 비중이 주어진 바, 지금으로써는 미완의 대기(the great unknown)로써 자리매김할 수 있다.
그러면 그 가치를 어떻게 측정할 수 있을까? 경기점수나 시간측정보다는 훨씬 더 어려운 과제일 것이다. 

YOG참가자들(YOGers)은  Yelena Isinbayeva, Frank Fredericks, Sergey Bubka 등과 같은 올림피안들과의 대회시간도 가졌다.
로게 IOC위원장은 올림픽선수촌에서 90분 동안  한 개 그룹 참가자들과 즉석 재치일문일답(repartee)도 가졌었다.
도핑(doping)이나 페어플레이(fair play)에 대한 학습도 병행하였었다.
하지만 대회 첫 날 이란 태권도 선수인 Mohamed Soleimani은 이스라엘 선수 Gili Haimovitz와의 금메달  
결정 태권도시합출전을 기권하였다.
이란선수 코치는 Sileimani선수가 준결승 전 경기까지 치르는 동안 입은 부상이 악화되었다고 기권이유를 설명하였다.
준결승 시합에서 미국선수에게서 입은 부상으로 시상대에 못가고 병원으로 후송되었단다.
결승전 시합이었으므로 Haimovitz선수와 시합하지 않고 시합장만에 나왔어도 최소한 은메달은 따논 당상이었다.

물론 선수의 건강이 가장 중요한 관심사이긴 하지만 이란선수의 결승전 기권소식은 이란이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이스라엘선수와의 시합을 단지 회피하려는 책략(ploy)일 것이라는 의혹을 증폭시 킨 바 있다.

이것은 2004년 아테네 올림픽 당시에도 이란 유도선수 한 명이 이스라엘 선수와 시합대면을 거부하고 아테네 올림픽을 기권한 에피소드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태권도 메달 시상대로 가지 않고 병원 행을 선택함으로써 이란 태권도 선수는 Alex Giliday 이스라엘 IOC위원이 하기로 되어 있는 메달수여도 피할 수 있었으리라.

올림픽대회 시상식에 참석을 거부하는 시태가 과연 용납 될 수 있는 사안인가?
태권도 메달 시상식 은메달 스탠드가 비어있는 광경은 올림픽운동사에 커다란 오점으로 기록 될 수 있다.

이를 보도 했던 한 인터넷 외신 기사 홈페이지는 이러한 보도가 포함 된 청소년 올림픽 문제점 분석 기사를 최근 갑자기 삭제하였다.
무슨 까닭일까?
문제점은 개선하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재발방지를 위한 대책을 강구하여 다시금 이러한 불미스런 사태가 발생하지 못 하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이란선수의 회피 행위에 대한 구체적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로게 IOC위원장은 이 사건을 이슈화하지 않았다.(The IOC President declared the incident a non-issue)

이와 관련 이란선수단에서는 의혹을 잠재울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다.
시상식에 참가하지도 않았고 통상 갖게 되는 금,은,동 메달리스트 3명의 사진 촬영 또는 사적인 회합도 전혀 없었다.
병원 행을 택하여 시합에 기권하였다 하더라도 경기 성적 상 이란선수에게 은메달이 주어져야 되는 것이 아닐까? 
알 수 없다.
어떤 결정이 내려 진 것일까?

이스라엘 선수단측에서 어떤 제안이나 예비교섭(overtrures)도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올림픽대회 참가에 앞서 대회 개회식에서 선수들이 선서를 한다.
"in the true spirit of sportsmanship, for the glory of sport and the honor of our teams..."

청소년 올림픽이 올림픽정신에 충실하기 위하여서는 기성세대들이 14세-18세에 해당하는 YOGers들에게 진정한 스포츠맨쉽과 페어플레이 정신을 심어 주어야 하지 않을까?

올림픽의 가치는 "Excellence(우수성), Friendship(우정), Respect(존중)"이다.
올림픽은 종교와 인종과 문화와 언어의 벽을 넘어서야 비로서 참된 올림픽정신이 구현되어야 진정한 올림픽운동의 중심축이 된다. 


5. 사마란치 IOC위원장의 뛰어난 정치력과 흡인력 그리고 결집력


사마란치 IOC위원장은 유럽 및 아랍의 왕족 거의 모두를 IOC위원에 선출시켜 IOC를 고귀(?)하게 만드는데 초석을 놓았다.
1980년 모스크바 IOC총회에서선출된 사마란치 위원장은  IOC가 직면했던 재정적 위기, 정치적 위기(올림픽 보이코트), 인종차별 위기(Aparthied), IOC위원들이 연루된 부패스캔들위기 등을 모두 극복하고 역사상 가장 보수적이고 폐쇄적이었던 IOC를 개방하고 개혁하였다.

(1998년 서울올림픽개최 10주년기념식에 참석하여 올림픽공원에서)

 

 



 1998년 12,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유치위원회가 촉발한 부패관련 주장이 불거짐에 따라 당시 사마란치 IOC위원장은 즉각적으로 관련증거 수집을 위한 특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구성 6주일 후 IOC는 그 조사결과를 공표하고 연루된 IOC위원들의 징계를 IOC총회에 상정하였다. 그러한 IOC의 위기국면에서 4명의 IOC위원이 사퇴(resignation)하였고, 6명의 IOC위원이 퇴출(expulsion)되었으며, 10명의 IOC위원이 공식경고(official warning)를 받은 바 있다.




이러한 위기로 말미암아 IOC위원들은 IOC 기존제도의 현대화를 절감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1999년 동안 단시간 내에(in a very short space of time) 파격적인 결정사항(radical decisions) 12개 항을 결의하게 이르렀다.

  *IOC개혁안 12개 항목:


1) 2006년 올림픽후보도시 선출 절차 개정과 IOC위원들의 후보도시 개별방문 폐지

 

2) 올림픽대회 시 올림픽대회참가 동료 선수들에 의한 15명 선수자격 IOC위원 선출

 

3) IOC위원 직 선출을 위한 IOC위원후보추천심의위원회(Nomination Commission for IOC membership) 신설

 

4) IOC위원의 위임재직기간(mandate)을 매 8년씩으로 하되 재선절차에 의한 재 선출허용 규정제정

 

5) IOC위원 정원을 최대 115명으로 제한

 

6) 위원장 임기 8년으로 제한하되 1회에 한해 4년만 추가 임기재선가능

 

7)국제연맹(IFs)자격 15, 국가올림픽위원회(NOCs)자격 15명 및 개인자격(individual members) 70명으로 IOC위원구성( 115)

 

8) IOC위원 연령제한 70세로 하향조정(Age limit lowered to 70)

 

9) IOC윤리원회(IOC Ethics Commission) 신설

 

10) 세계 반 도핑 기구(World Anti-Doping Agency/WADA) 신설

 

11)올림픽운동 수입금 내역(sources)과 사용에 대한 재정보고서 공표를 통한 재정투명성(financial transparency)확대

 

12) IOC총회내용 보도진에 공개시작

 

1999년 IOC 개혁 이후 IOC위원은 특권 귀족계급에서 투명하고 공정하고 공평무사하고 평등하고 차별대우가 없으며 일하는 무보수, 자원봉사, 선출 직 실무형 스포츠외교관으로 탈바꿈 되었다.


전 세계 브랜드 중 "올림픽"의 브랜드 가치를 세계최고수준으로 유지 시키면서 IOC 및 국제연맹(IFs), 국가올림픽위원회(NOCs)들의 재정상태를 건전하게 만드는데 앞장 섰다.
재정적 사유로 올림픽에 불참하는 사례를 종식시키기 위해 Olymic Solidarity기금을 창설하여 모든 NOC가 최소 선수 3명과 임원 2명이라도 참가시키기 위하여 항공료, 체제비, 장비비까지 지원하였다.
또한 경기력이 현격히 떨어져 올림픽 예선에서 참가자격을 획득 못하는 NOC를 위하여 와일드 카드(Wild Card)시스템을 가동 시켜 최소규모의 선수들이 참가토록 하였다.
올림픽박물관을 새로히 건립하였는데 모두 외부의 건립헌금을 기초로 하여 IOC재정에 전혀 무리가 가지 않토록 하는 치밀한 기획력도 돋 보였다. 



6. 사마란치 전임 IOC위원장과 로게 후임 현 IOC위원장의 비교


누구나 장단점과 공과가 있다.
개인적 역량과 특성 그리고 시대적 흐름에 따라 영웅이 되기도 하고 그렇지 못하기도 한다.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를 수 있는 것이 비교의 한계다.
현역 IOC위원장이 임기를 모두 마치고 난 후 다시한번 재 평가해 보는건 어떨가 생각해 본다. 

       

(故 사마란치 전임 IOC위원장 캐리커쳐)             (자크 로게 후임 현 IOC위원장 캐리커쳐)



<김운용 전 IOC 부위원장이 Newsis지에 쓴 글 중에서>

(초략) ~"그래도 IOC는 사마란치 전과후로 나눠진다고 평가될 만큼 사마란치는 큰 업적을 남긴 사람임에 분명하다. 자크 로게 현 위원장도 나름의 노력을 하고 있겠지만 아무리 차별화하려고 해도 사마란치와는 비교가 되기 힘들어 보인다.

IOC의 최상부에서 사마란치와 로게의 시대를 모두 겪은 까닭에 사마란치와 로게, 전·현직 두 IOC 위원장을 비교해 달라는 요청을 많이 받았다. 불필요한 오해를 일으키기 싫어 대부분 정중히 거절했지만 스포츠외교를 연구하는 후학 및 관련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큰 도움이 되리라는 판단이 들어 생각을 정리해 봤다.

사마란치 타계 직후 두 사람의 차이를 영국의 한 대기자가 압축해서 명료하게 논평하는 것을 들은 바 있다. 그는 "사마란치 시대를 '황금시대'라고 한다면 로게 시대는 '역사가 없는 시대'"라고 말했다.

먼저 사마란치는 경륜이 많은 정치가, 경제인, 외교관, 스포츠행정가, 스포츠맨이다. 스페인의 자치령 카탈루냐의 주지사, 정당 당수, 스페인올림픽위원장, 체육장관, 주 모스크바 대사, 까샤(CAIXA) 은행 회장 등 여러 분야를 두루 거치면서 다방면에서 경험을 쌓았고, 그 축적된 힘은 상당했다. 또 상당한 재력가이자 문화인이다.

이에 비해 로게는 다소 무게감이 떨어진다. 벨기에의 정형외과 의사이며 올림픽 요트경기에 3회 출전한 선수 출신이다. 자국의 올림픽위원장을 한 번 지내고 두 번째는 반 덴 에디에게 패해 낙선했다. 이로 인해 유럽 올림픽위원장의 자격이 상실되자 사마란치가 규정을 바꿔가며 헝가리 장관을 낙마시키고 자리를 유지시켜준 바 있다.

인간적으로 보면 사마란치가 좀 따뜻한 마음을 가졌다면 로게는 다소 냉혈적인 것 같다. 로게는 사마란치가 가진 품성 즉 승리에 대한 겸손, 패자에 대한 동정, 진정한 위대함 등이 더 필요한 것 같다.

앞서 말한 영국의 대기자는 로게에 대해 "직업(의사)에서 오는 꼼꼼함으로 경직돼 있다. 주변이 요새화된 느낌이다. 의사라는 직업은 필연적으로 자기가 옳다고 믿는 관념의 소유자가 되도록 한다"고 했다. 이 말이 로게의 그릇과 품성을 어느 정도 잘 표현하는 듯 싶다.

그럼에도 사마란치는 퇴임 3년 전부터 그를 데리고 다니면서 키웠다. 이에 대해 사마란치는 늘 부인해 오다가 지난해 봄 일본 요미우리신문에 자기가 (로게를)지지했다며 처음으로 진실을 밝혔다. 죽음이 목전으로 다가왔기 때문일까, 사마란치는 그렇게 마지막 순간에 중요한 증언을 남겼다.

그러나 로게는 사마란치의 도움 없이도 IOC 위원장이 될 수 있었다고 말하고 다녔다. 언론과 파리의 기자들도 "모스크바에서의 선거 규정은 그(로게)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고 유럽연맹 비용으로 출장을 다니고 유럽연맹의 후원으로 선거준비를 했다"고 꼬집은 바 있다. 밝히지는 않지만 액수까지 돌아다닌다.

사마란치 입장에서는 '은혜를 원수로 갚은 격'이었지만 그래도 끝까지 로게에게 도움되는 말을 하든지 아예 '노코멘트'로 일관했다. 일례로 사마란치는 로드 킬라닌 전 위원장에게 1주일에 한 번은 전화를 걸고 상의를 했다. 반면 로게는 1년에 한 번도 사마란치에게 연락하는 일이 없었다."~(후략)




Ex-IOC Member Slams Rogge in Samaranch Tribute(Around The Rings 기사원문)

5/13/2011

Then IOC vice president Un Yong Kim in 2003, the year he was arrested in Korea. (ATR)
(ATR) An ex-IOC member exploits the one year anniversary of the death of Juan Antonio Samaranch to raise questions about current IOC President Jacques Rogge.

Translated copies of the commentary, which appeared first on the Korean website www.newsis.com, have been mailed around the world from the Seoul office of Un Yong Kim. The one year anniversary of Samaranch’s death was April 21.

Kim resigned as an IOC member in 2005 ahead of a vote on whether he should be expelled for his conviction and jail sentence on charges he misused funds while president of the Korean Olympic Committee and the World Taekwondo Federation.

Now 80, Kim became an IOC member in 1986, serving terms as a member of the Executive Board and as a vice president. As president of the General Association of International Sports Federations, he launched the Sport Accord convention that is now an annual fixture.

Since leaving the IOC, Kim has issued statements from time to time to offer his views on the Olympics and the leadership of the taekwondo federation.

“His achievement was great, writes Kim about Samaranch, followed in the next sentence with a back-handed comment about Rogge.

“We know Jacque [sic] Rogge in his own way is also trying hard but it looks difficult to compare with Samaranch,” says Kim.

Kim says
In 2003, Kim became a scapegoat for allegedly putting his candidacy for IOC vp ahead of the bid from PyeongChang for the 2010 Winter Olympics.(Getty Images)
that Samaranch “had to work hard to organize” the 1988 Games in Seoul, while “Rogge never worked with Seoul people for success of Seoul Olympics”.

Kim goes on to suggest Rogge has mishandled issues involving Korea, such as the speedskating medals controversy at the 2002 Winter Games that led to protests in Korea against the IOC.

The convoluted comparison of how Samaranch and Rogge stack-up reaches a near comical conclusion as Kim implies that the honorary degree awarded to Rogge by Kyunghee University “at the outskirt of Seoul” is inferior to the honorifics bestowed on Samaranch by Seoul National University.

And then in a closing non-sequitor, Kim offers enigmatic advice to the 2018 bid from PyeongChang.

“They should remember as they bid for Pyeongchang Winter Olympics again that Rogge is not Samaranch. They have to deal with different kinds of people as some IOC insiders say,” writes the Kim.

He signs the work “Un Yong Kim IOC Vice President (R)”. Whether Kim regards the (R) designation as signifying “resigned” or “retired” is not made clear.


<Newsis에 게재된 관련 기사내용/한글 및 영문>

[김운용의 산고곡심⑦]후안 A 사마란치와 자크 로게 전·현 IOC 위원장
    기사등록 일시 [2011-04-25 07:18:25]    최종수정 일시 [2011-04-28 20:15:26]

【서울=뉴시스】지난 21일은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종신 명예위원장이 이 세상을 떠난 지 꼭 1년이 되는 날이었다. 이름을 떨친 사람마다 공과(功過)가 있게 마련이지만 그는 우리 한국민들에게는 고마운 존재임은 틀림없다.

그는 우리가 세계를 향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준 88서울올림픽의 성공을 도왔고, 2002년 FIFA한일월드컵 유치에 결정적인 힘을 보탰다. 무엇보다 태권도의 올림픽 종목 채택 결정에도 큰 도움을 줬다.

정상적이면 서울에서 올림픽 가족이 한자리에 모여 1주기 추도 모임을 갖고 싶었지만, 2018평창동계올림픽 유치가 걸려 있어 현재는 IOC 관계자를 초청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에 추도 모임은 훗날을 기약하고, 아쉽지만 이 글로 대체하려고 한다.

"우리가 자주 가던 바로셀로나의 비아 베네토(Via Beneto) 레스토랑에서 5월17일 14시에 만납시다."

필자와는 30년 지기 친구인 사마란치 IOC 종신 명예위원장과의 마지막 통화였다. 세계 스포츠계의 위대한 별이 운명을 달리하기 얼마 전이었다. 지난해 4월21일은 개인적으로 '반평생의 동지이자 형제'를 잃은 안타까운 날이기만 했다.

사마란치는 올림픽 운동을 중흥시키고, 재정파탄으로 빈사 직전에 있던 IOC를 살려내며 황금시대를 이끌었다. 그리고 필자에게는 애증의 대상이었다.

필자가 유색인종 최초로 IOC 위원장에 도전했던 2001년 모스크바 총회 때, 사마란치는 백인우월주의에 빠졌는지 객관성을 상실한 채 자신의 후계자로 자크 로게 현 IOC 위원장을 내정했다. 여기에 있을 수 없는 선거규정을 즉흥적으로 만들고, 심지어 투표 직전에 인신공격까지 했다. 이에 앞서 IOC 권좌에 대한 지나친 욕심이 '솔트레이크시티 스캔들'로 이어져 자신과 IOC의 명예에 큰 오점을 남기기도 했다.

그래도 IOC는 사마란치 전과후로 나눠진다고 평가될 만큼 사마란치는 큰 업적을 남긴 사람임에 분명하다. 자크 로게 현 위원장도 나름의 노력을 하고 있겠지만 아무리 차별화하려고 해도 사마란치와는 비교가 되기 힘들어 보인다.

IOC의 최상부에서 사마란치와 로게의 시대를 모두 겪은 까닭에 사마란치와 로게, 전·현직 두 IOC 위원장을 비교해 달라는 요청을 많이 받았다. 불필요한 오해를 일으키기 싫어 대부분 정중히 거절했지만 스포츠외교를 연구하는 후학 및 관련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큰 도움이 되리라는 판단이 들어 생각을 정리해 봤다.

사마란치 타계 직후 두 사람의 차이를 영국의 한 대기자가 압축해서 명료하게 논평하는 것을 들은 바 있다. 그는 "사마란치 시대를 '황금시대'라고 한다면 로게 시대는 '역사가 없는 시대'"라고 말했다.

먼저 사마란치는 경륜이 많은 정치가, 경제인, 외교관, 스포츠행정가, 스포츠맨이다. 스페인의 자치령 카탈루냐의 주지사, 정당 당수, 스페인올림픽위원장, 체육장관, 주 모스크바 대사, 까샤(CAIXA) 은행 회장 등 여러 분야를 두루 거치면서 다방면에서 경험을 쌓았고, 그 축적된 힘은 상당했다. 또 상당한 재력가이자 문화인이다.

이에 비해 로게는 다소 무게감이 떨어진다. 벨기에의 정형외과 의사이며 올림픽 요트경기에 3회 출전한 선수 출신이다. 자국의 올림픽위원장을 한 번 지내고 두 번째는 반 덴 에디에게 패해 낙선했다. 이로 인해 유럽 올림픽위원장의 자격이 상실되자 사마란치가 규정을 바꿔가며 헝가리 장관을 낙마시키고 자리를 유지시켜준 바 있다.

인간적으로 보면 사마란치가 좀 따뜻한 마음을 가졌다면 로게는 다소 냉혈적인 것 같다. 로게는 사마란치가 가진 품성 즉 승리에 대한 겸손, 패자에 대한 동정, 진정한 위대함 등이 더 필요한 것 같다.

앞서 말한 영국의 대기자는 로게에 대해 "직업(의사)에서 오는 꼼꼼함으로 경직돼 있다. 주변이 요새화된 느낌이다. 의사라는 직업은 필연적으로 자기가 옳다고 믿는 관념의 소유자가 되도록 한다"고 했다. 이 말이 로게의 그릇과 품성을 어느 정도 잘 표현하는 듯 싶다.

그럼에도 사마란치는 퇴임 3년 전부터 그를 데리고 다니면서 키웠다. 이에 대해 사마란치는 늘 부인해 오다가 지난해 봄 일본 요미우리신문에 자기가 (로게를)지지했다며 처음으로 진실을 밝혔다. 죽음이 목전으로 다가왔기 때문일까, 사마란치는 그렇게 마지막 순간에 중요한 증언을 남겼다.

그러나 로게는 사마란치의 도움 없이도 IOC 위원장이 될 수 있었다고 말하고 다녔다. 언론과 파리의 기자들도 "모스크바에서의 선거 규정은 그(로게)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고 유럽연맹 비용으로 출장을 다니고 유럽연맹의 후원으로 선거준비를 했다"고 꼬집은 바 있다. 밝히지는 않지만 액수까지 돌아다닌다.

사마란치 입장에서는 '은혜를 원수로 갚은 격'이었지만 그래도 끝까지 로게에게 도움되는 말을 하든지 아예 '노코멘트'로 일관했다. 일례로 사마란치는 로드 킬라닌 전 위원장에게 1주일에 한 번은 전화를 걸고 상의를 했다. 반면 로게는 1년에 한 번도 사마란치에게 연락하는 일이 없었다.

사마란치는 올림픽에서 보이콧을 없앴다. 또 아마추어와 프로의 구별을 없앴다. 지금은 올림픽 때마다 TV나 스폰서에서 들어오는 돈이 30억 달러가 넘는다. 또 많은 도시가 올림픽 유치를 신청하고, 많은 기업이 6500만 달러씩 내고 너도나도 스폰서가 되려고 한다. 재정적인 안정은 운동선수의 삶을 풍요롭게 했다. 1994년 로잔에 모금으로 모은 1억 달러를 들여 올림픽박물관도 개관했다. 당시 한국도 필자가 앞장서 650만 달러를 기부했다.

사마란치는 비밀사교클럽 같은 IOC를 공개하고 개혁을 추진했다. 그는 각국 국가수반과도 대등하게 정치와 외교교섭을 해냈다. 또 올림픽에서 한 명도 없던 여성 IOC위원을 11명으로 늘리고, 모든 종목에 여성종목을 있게 하고 올림픽 참가 여자선수 비율도 거의 50% 수준으로 만들었다.

반쪽짜리 올림픽이었던 모스크바올림픽이 80개국, 동서진영이 모두 참여해 위대한 올림픽으로 평가받는 서울올림픽은 160개국이었고 베이징올림픽에서는 참가국이 205개국이었다. 올림픽 TV 시청자는 40억명이다. 베이징올림픽 개회식만 시청자가 10억명이라고 한다. 올림픽은 회를 거듭할수록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변모해 갔다. 반면 세계반도핑기구(WADA)를 압력에 의해 만들기도 했지만 여전히 약물복용이 문제가 되었고, 올림픽의 비대화라는 문제가 대두됐다.

결국 솔트레이크 유치관련 부패는 부자 나라가 아니면 올림픽을 개최할 수 없다는 말까지 만들었다. 사마란치는 끊임없이 IOC 위원의 연령 제한을 바꾸고, IOC 헌장을 변경해 21년간 IOC의 수장 노릇을 했다. 권좌에 대한 욕심이 솔트레이크 스캔들을 만들어 냈다고 할 수 있다.

사마란치는 처음 약속대로 1997년에는 은퇴를 했어야 했다고 후회하곤 했다. 올림픽을 동계·하계로 분리해 2년마다 개최하게 한 것은 올림픽의 희소가치를 떨어뜨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제는 야구, 축구처럼 프로스포츠가 올림픽과 대등할 정도로 발전하고 있고 다른 군소종목들도 재정적으로 독립적인 운영이 가능해 졌다. 다시 말해 올림픽에 목을 맬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미국의 NFL, MLB, NBA가 좋은 예다.

IOC의 황금시대를 이끈 사마란치는 왜 자신의 후계자로 로게를 선택한 것일까?

이에 대해 영국의 그 대기자는 "사마란치가 모든 것을 이뤄 놓은 상태에서 아마 IOC의 평온시대를 바랐기 때문일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로게는 자신을 사마란치와 차별화하려고 노력해왔다.

예를 들어 로게가 처음으로 관장한 2002년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은 잡음이 끊이질 않았다. 특히 피겨스케이팅 판정 시비와 노르딕 종목에서 9차례나 메달을 따낸 라리사 라주티나의 실격 문제로 논란이 일주일간 지속됐고,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강한 불만을 제기했다.

푸틴은 IOC가 지나친 상업주의와 편파적인 판정으로 솔트레이크 올림픽은 실패작이 되었다고 비판했다. 러시아 여당은 선수단 철수를 준비했고, 러시아 NOC도 2004아테네올림픽 보이콧을 선언하겠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자 로게는 페어 금메달을 두 개로 쪼개고, 실격된 선수에게 실격 이전에 획득한 은메달 2개를 수여하는 등, 수습하기에 바빴다.

자신도 IOC에 무언가 유산을 남겨놓기를 희망하는 로게는 얼마전 청소년올림픽을 싱가포르에서 개최했다. 로게는 청소년 경기를 유럽 NOC 회장 시절 유럽에서 매년 시행했는데 스포츠 행사라기보다는 놀이 비슷한 수준이었다. 2010년 제1회 청소년올림픽도 IOC가 3000만 달러를 지원해 성사시켰는데, 스포츠보다는 청소년의 문화, 교육, 친목행사 참가 등에 더 중점을 두었다.

사실 청소년올림픽은 1998년 사마란치의 제안으로 필자가 준비위원장으로 연구를 시작했고, 아쉽게도 솔트레이크 사건이 터져 중단되었던 것이다. 올림픽이 20세기 말에 극적인 대중화에는 성공했지만 청소년 교육과 세계평화라는 근본 취지가 많이 훼손되지 않았나 염려가 많다. 그래서 로게는 청소년올림픽을 자신의 치적으로 남기고 싶어 했는지도 모르겠다.

결국 로게는 사마란치와의 차별화를 위해 극단적 언행까지 보이며 노력했지만, 세론은 사마란치가 만들어 놓은 재정왕국을 유지하면서 특전을 누렸을 뿐이라고 냉정하게 평가하고 있다.

두 사람은 '보스' 기질에서도 차이를 보인다. 사마란치는 IOC 위원들의 활동이 문화적 차이로, 혹은 각국의 법이나 제도에 저촉돼 문제가 발생할 경우 그들의 권익보호를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반면 로게는 그러한 경우 외면한다. 또한 윤리위원회를 자기 구미에 맞게 적용한다.

어쨌든 로게는 사마란치의 소망대로 평온을 유지하고는 있다. 그리고 다음 위원장 선거 때는 IOC 헌장대로 물러나기로 했다. 그는 극소수의 측근을 거느렸지만 아무하고도 상의를 하지 않았고, 그 결과 IOC 내도 사마란치 때와 같은 가족 분위기는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진정한 차이점과 업적은 후에 역사가 평가할 것이다.

사마란치와 로게의 행보는 한국과 관련해서도 큰 차이점을 보인다. 즉 한국과 어떤 관계이며, 한국을 위해 무엇을 했느냐를 비교해 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친한파였던 사마란치는 평화시 일류의 최대 종합제전인 서울올림픽을 보이콧 없이 성공시키기 위해서 심혈을 기울였고 30회 이상이나 서울을 방문했다. 그는 한때 한국의 대변자처럼 한국을 보호했고 서울올림픽 성공 외에도 부산아시아게임 유치 때 대만의 정치적 물량공세에 부산이 고전하자 직접 방한해서 도와주기도 했다. 앞서 언급했지만 태권도의 올림픽종목 채택은 사마란치가 없었다면 아무리 필자가 열심히 했어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1995년에는 김영삼 대통령의 요청으로 FIFA의 주앙 아벨란제 회장을 반협박조로 두 번이나 몰아붙여 2002년 월드컵 한일공동개최를 성사시키기도 했다. 이건희 삼성회장을 IOC위원으로 만든 것이나, 2000시드니올림픽의 남북공동입장도 모두 사마란치의 작품이다.


그런 사마란치가 2003년 프라하 IOC총회에서 평창동계올림픽 유치에 대해 한 조언을 한국 사람들은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지금도 삼수(三修) 성공을 위해 엄청난 돈을 쓰고 국력을 총동원하고 있지만 낙관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물론 선거는 뚜껑을 열어 봐야 그 결과를 아는 것이지만 2003년 당시 로게는 평창이 20표가 나올 것이라고 미국 NBC방송의 딕 에버솔 회장에게 말했다. 이때 에버솔 회장은 동계올림픽이 아시아에 가면 NBC방송의 광고손실이 5억 달러는 될 것이라며 반대 입장을 밝혔다. 물론 필자의 조직에서 나오는 표 덕에 평창이 선전했지만, 결과는 사마란치의 조언대로였다.

그때 사마란치의 조언은 "네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이번에는 밴쿠버나 잘츠부르크를 꺾기 힘들 것이다. 2등만 해라 2등도 좋은 2등을 해라. 개최지 표결 후에 있을 부위원장 선거에서 네(김운용)가 당선되면 그 힘으로 4년 후 과테말라총회에서는 틀림없이 이길 것이다"였다.

반면 로게와 한국의 관계는 1988년 서울올림픽 때 벨기에 선수단장으로 온 것, 1999년 서울 IOC총회 때 온 것, 대구 U-대회, 부산아시안게임 폐회식, ANOC 총회 참석이 전부다. 물론 2004년 11월에는 부부가 비밀리에 그 말 많은 삼성미술관 리움을 방문하기 위해 방한하기도 했다.

그 때는 KOC(대한올림픽위원회)에 보도관제(報道管制)를 요청하고 아무도 만나지 않는 '은밀한' 방문이었다. 무슨 목적이 있었을까?

당시 일정의 마지막은 KOC 위원장의 건의로 청와대가 초청을 하는 것이었다. 청와대가 로게에 대한 접대 및 선물증정이 끝난 후 김정길 KOC 위원장을 IOC위원으로 임명해 달라고 요청하니 로게는 그 자리에서 "노 아이 캔낫(No, I cannot)”이라고 잘라 거절했다고 한다.

김영삼 대통령이 사마란치에게 IOC위원 추가선임(이건희 삼성회장을 염두)을 요청했을 때 "가서 연구해서 김운용 IOC부위원장을 통해 알려주겠다"고 한 것과는 너무 대조적인 부분이다.

두 사람은 한국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기도 했다. 사마란치는 서울올림픽 직후 서울대학교에서, 로게는 2005년 ANOC 총회 직후 경희대학교에서 각각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로게는 가는 나라마다 명예박사학위를 수집하고 다닌다고 한다. 한국에서 하나쯤 주었다고 그다지 고마워 할 것 같지는 않다.

사마란치가 세상을 떠나기 1년전 광주유니버시아드 유치에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바로셀로나로 그를 찾아 갔을 때였다. 프라하 IOC총회에서 내가 부위원장이 되기 위해 평창을 돕지 않았다는 터무니 없는 비난과 공격을 받은 사실을 의아하게 생각하면서 "왜 너를 공격했는지 이해가 안 간다. 너는 서울올림픽을 성공시키고 태권도를 올림픽 종목에 넣은 사람이고 한국체육을 세계 정상급으로 끌어올린 사람인데 어떻게 그렇게 공격할 수 있는지, 너 없이는 태권도는 올림픽에 못들어 갔을텐데 이해가 안 간다"며 고개를 저었다. 한참 생각하더니 이어서 "질투인 것 같다"고 했다. 그것이 마지막 만남이었다.

로게를 만나고 돌아온 사람들은 마치 그가 평창을 지지하는 발언을 한 것처럼 떠들고 다닌다. 언론도 마찬가지다. IOC는 모든 유치 신청자, 유치 희망자에게 '잘 해 보시오'라고 권장하는 것이 통례이다. 로게도 그런 입장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대부분의 IOC위원과 언론이 부정적인데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할 만하다' '해보라' 등 운을 떼는 것도 좋은 예다.

스포츠 외교는 실리와 확증으로 하는 것이지 공상과 이념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선거와 운동경기는 뚜껑을 열어봐야 아는 것이다. 득표만 잘 하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아직 사대주의 사상과 포퓰리즘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지 냉정하게 돌아봐야 한다. 자가당착에 빠져 있다면 냉엄한 사고를 가진 의사 출신 로게에게 이용만 당할 수 있다. 그는 소위 서양식 이중인격자인지도 모른다. 로게는 '서울올림픽을 가장 위대한 올림픽'으로 또한 '보이콧 없는 올림픽'으로 한국과 함께 성공시킨 사마란치가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리고 IOC 지인들에 의하면 로게는 이미 레임덕(Lame duck) 조짐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다음은 김운용 전 IOC 부위원장이 쓴 '사마란치와 로게' 전·현 IOC 위원장에 대해 쓴 영어 원문이다.

<On the 1st memorial of Samaranch.>

Samaranch and Rogge

Since the great icon of the Olympic Movement Juan Antonio Samaranch died on 21st April of last year, one year has passed. With his heritage in mind, it will be appropriate to gather all Olympians in Korea to pay tribute to his contributions to Korean sports and society.

As we cannot invite IOC members to Seoul with bid of Winter Olympics at hand, I would like to substitute with this article at this time.

I had a luncheon appointment with Lifetime IOC Hon. President Juan Antonio Samaranch at 14:00 hrs on May 17 of last year at Via Beneto Restaurant in Barcelona but it never took place due to his death. We thought he would live a few more years and look after progress of his ideals which he pursued all his life.
Michael Payne, IOC Marketing Director under Samaranch stated in his book 'Olympic turn around' that Samaranch saved IOC from brinks of financial bankruptcy.

Samaranch restored Modern Olympics, saved IOC from brinks of financial bankruptcy, and thus built a Golden Era of IOC. For Korea, he helped Seoul Olympics to a great success, helped Taekwondo to become an Olympic sport, and supported 2002 Korea-Japan FIFA World Cup. I had a low days with him sometimes. At 2001 Moscow IOC Session, Samaranch supported Rogge for IOC Presidency as he clearly stated in Japan’s Yomiuri Shimbun Interview in Janurary. All other candidates wished he would stay neutral for fair chance for all. Instead, very strange election rules was formulated through Keva Mbaye and no one was given floor to speak on their policy programs. His excessive ambition lead to Salt Lake scandal. And yet, modern history of IOC could be divided into pre and post Samaranch Era. His achievement was great. We know Jacque Rogge in his own way is also trying hard but it looks difficult to compare with Samaranch.

Now that Samaranch is gone, many students wish to compare two previous and incumbent heads of IOC. It could be informative to those who research or engage in Olympic related affairs. After death of Samaranch, an English reporter commented "Samaranch Era is a golden era" and Post Samaranch era can be called "Era without history".

Samaranch is an experienced politician, economist, diplomat, sports administrator and sportsman. He was a governor of Cataluna, Head of a political party, President of Spanish Olympic committee, Minister of Sports, Ambassador to Soviet Union, a bank chairman. He is very experienced in many fields and has accumulated a considerable strength, He is quite well-to–do and understands art and culture.
Rogge is a professional orthopedist in Belgium, and participated in Olympics as Yachting athlete. He served as President of Belgium NOC once, He lost election for the 2nd try to Van den Eede. He was not elegible for ENOC Presidency but Samaranch swayed the rules to elect Rogge. Samaranch at the time said Minister from Eastern Europe will not be efficient and is not desirable for the job. People say Samaranch has warm heart while Rogge is rather cool. Rogge has yet to learn compassion for those who fail, and open mind of true wisdom, and humble and gentle in victory like Samaranch.

Same English reporter said Rogge is fortified and limited by his professional exactitude, typically of a medical man, and medical profession necessarily believes that it is correct. It seems to tell Rogge’s caliber and personality. Insiders say Samaranch did his best to build up Rogge for 3 years before Moscow Session.

Samaranch always has denied but last spring, he stated in his interview with Japan’s Yomiuri Shimbun that he had supported Rogge. However, Rogge was heard saying he could have been elected without Samaranch’s help. But many insiders do not think so. How many important jobs and tools did Samaranch give to Rogge?

Samaranch made boycotts are no longer a serious threat, cities are eagerly bidding to play host to the games; corporations are shelling out 65 million dollars apiece to become official sponsors; athletes can build lucrative careers as professionals; and women are involved in larger numbers than ever as administrators and participants. Almost equal numbers of women participate in Olympics. In Sydney, already 199 countries participated compared with 80 at the 1980 summer games in Moscow.With the exception of Pierre de Couvertin, French founder of modern Olympics in 1896, Samaranch has been the most significant leader in modern Olympic history. Said John MacAloon, an Olympic historian and professor at the University of Chicago. 'The Greatest single' accomplishment has been a kind of political maturity, an ability to deal with political elites, heads of states, industrial elites. That was something the movement never really had. Sydney game alone had 3.9 billion people worldwide access to TV. Samaranch also opened IOC to the world. It is no more closed door social club. His problem was doping but finally established WADA putting Dick Pound as its head.

On the other hand, Samaranch had to pay a price. Too often changes of age limit of IOC members, and 21 years of long tenure of IOC presidency brought Salt Lake City scandal. Nowadays, professional sports such as football, baseball have grown almost equal to Olympics, and many minor sports are also growing fast.

As to a question of why Samaranch has chosen Rogge as his successor, a reporter said "maybe Samaranch wanted a period of tranquility now that he had laid the foundation." Rogge tried to differentiate from Samaranch. Olympics which Rogge presided was 2002 Salt Lake Winter Games. Problem lasted a week with desision of Figure skating pair between Russia and Canada. Situation aggravated with disqualification of Russian Nordic medalist Lazutina. Russian President Putin asserted that Salt Lake Games was afailure under administrative bias and commercialism of IOC. Russian NOC threatened to withdraw and boycott Athens Games. Rogge quickly moved to share gold medals between Russian and French, and restored two Silver medals for Luzutina, although Rogge admitted awarding duplicate gold medals had been wrong in an interview with New York Times a year later.
At the same time, public in Korea was fuming over loss of gold medal which went to American athlete. Korea Olympic Committee released a statement upon request of Rogge and as prepared by IOC that it wouldnot boycott, which further aggravated public sentiment in Korea but saved Salt Lake games as Rogge lated complimented.

He also needs to leave heritage behind. Youth Olympic maybe is the one. It is understood IOC has subsidized 30 million dollars. Samaranch initiated idea of Youth Olympics but it was stopped after Salt Lake scandal erupted. Youth Olympic may be what Rogge tried to re-orient Olympic ideals for education of youth. Samaranch called Lord Killanin every week. Rogge never called Samaranch or consulted, is quite a contrast.

No one will deny Rogge has maintained the empire Samaranch has built up. in a good shape. Samaranch always emphasized solidarity and friendship among Olympic family. Is it still so? History will tell.
They also differ in their relationships to Korea. Samaranch had to work hard with Korea to organize one of the most successful Olympic Games after 12 years of boycott by the East and West. He visited Korea 30 times, and helped Korea to win 2002 Korea-Japan FIFA World Cup and 2002 Busan Asian Games. Everybody knows that it would have been difficult or impossible for Taekwondo to become Olympic sport without Samaranch’s support. He supported South & North Korean delegation to march jointly at Opening of Sydney Olympics after 50 years of separation. Samsung’s Lee Kun Hee was coopted as IOC member. Samsung provides 60 million dollars of official sponsorship money every 4 years. And yet, Korean people didn’t listen to his advice in Prague in 2008 that it would be difficult to win Vancouver at that time. Therefore Pyongchang should try for good 2nd place but surely win 4 years later in Guatemala IOC session. Samaranch said if Un Yong KIM was later to be elected to IOC Vice President again, he would be more active, But Pyongchang didn’t listen and it is still long way to go. They accused that KIM sacrificed Pyongchang for IOC Vice Presidancy according to 2005 UN Human Right Commission. Kim was a scape goat for its defeat to Vancouver.

On the other hand, Rogge came to Korea as Chef de mission during 1988 Seoul Olympics; 1999 Seoul IOC Session, 2003 Taegu Universiade Game, 2002 Busan Asian Games and 2005 Seoul ANOC meeting. Rogge and his wife came to Korea in November 2004 to privately visit Samsung Leum: Art Gallery.

Rogge asked KOC to blackout the visit. They made no activities and met no one. Why? Nobody knows the purpose of visit to Samsung Art Gallery. He was invited to Korea once more as guest of Blue House at request of KOC President Kim JungKil. Blue House asked cooptation of KIM as IOC member after dinner and presentation of gift. Rogge answered he couldn’t. To the contrary, Samaranch’s answer to Kim Young Sam (implying Lee Kun Hee) was a cordial reply that he would study and let it be known. IOC members are often bound to conflict with local authorities or legal system as they perform duties for IOC. Samaranch did his best to protect his members although he could not interfere; quite a contrast with Rogge who would exploit Ethics Commission to his needs or stay away. And Rogge never worked with Seoul people for success of Seoul Olympics. Rogge received Hon. Doctor degree from Kyunghee University at outskirt of Seoul. Samaranch received one from Seoul National University after Seoul Olympics. They should remember as they bid for Pyongchang Winter Olympics again that Rogge is not Samaranch. They have to deal with different kinds of people as some IOC insiders say.

[Dr. Un Yong KIM, IOC Vice President(R)]



Posted by 윤강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