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외교현장이야기실록92편(특집 올림픽 유치경쟁각축전/총성 없는 21세기 세계대전)]
제1회 근대올림픽은 고대올림픽 부활의 상징적 의미로서 1896년 아테네에서 개최되었다. 제2회 대회는 1900년 근대올림픽 창시자인 쿠베르탱 남작의 고향인 파리에서, 1904년 제3회 세인트루이스 대회부터 1980년 제22회 모스크바 대회까지 올림픽 유치 후보 도시간 경쟁이 보편화되지 않았다. 오히려 집단 불참, 상업적 매력 감소 등으로 오히려 IOC가 올림픽 개최 희망도시를 찾기가 어려운 실정이었다. 예를 들면 1980년 동계올림픽의 경우 미국의 Lake Placid 만 유일하게 시설 등에서 준비된 도시였다.
1978년 제80차 아테네 IOC 총회 시 1984년 올림픽 개최도시 선정 시에도 이란의 수도 테헤란이 개최 신청은 했지만 팔레비 왕정의 붕괴로 포기하고 말았고, 이 여파로 올림픽 개최희망도시가 없어져 버리자 미국의 LA는 거꾸로 IOC에 유리한 협상조건을 제시하고 거드름을 피울 정도였다. 그러나 IOC로서는 경쟁 도시가 없는 한 뾰족한 대책이 없었다.
1981년 9월 30일 제84차 IOC 총회에서는 1988년 올림픽 개최도시를 선정하기로 되어있었는데 일본의 나고야만이 공식 신청을 한 상태에서 뒤늦게 당시 개발도상국이었던 대한민국의 서울이 두 번째로 유치신청을 하자 신청서류가 미비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감지덕지 받아들일 정도였다.
서울이 당초 예상을 완전히 뒤엎고 52:27로 나고야를 물리치고 개발도상국으로는 30년 전인 1968년 멕시코시티 다음인 두 번째로 1988년 제24회 올림픽개최지로 선정되었다.
1984년 LA올림픽의 재정적 흑자와 1988 서울올림픽의 재정적 흑자는 물론 성공적인 개최에 힘입어 드디어 전세계 국가들이 올림픽대회 유치를 통해 국가 경제 활성화 등 일석이조의 효과를 노리고 달려들기 시작했다.
1992년 올림픽대회 유치경쟁부터는 적게는 4개부터 많게는 8개 국가가 올림픽 유치를 향해 쇄도하게 되어 IOC는 쾌재를 불렀고 올림픽 운동사에 있어서 상승국면의 전환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러한 인기와 열기에 힘입어 테러위험의 먹구름도 유독 올림픽대회만은 비켜 갈 정도로 반석 위에 자리매김한 것이다.
1992년 올림픽 개최도시는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이 주도한 파리와 막강한 파워로 올림픽 군주로 지칭되던 사마란치 IOC 위원장의 고향인 스페인 바르셀로나와 2파전이었다.
용의주도하고 치밀한 득표 작전이 먹혀들었던 바르셀로나1992가 승자가 되었고 선전에도 불구하고 교란 작전에 말려 파리는 분루를 삼켜야 했다.
(Barcelona1992올림픽 마스코트 Cobi)
이에 동정심리가 작용하여 프랑스는 동·하계올림픽 개최도시를 한 총회에서 동시에 선정하는 규정에 따라 프랑스의 알베르빌(Albertville)이 1992년 동계올림픽 개최도시로 결정되는데 만족해야 했다.
차기 동·하계올림픽대회는 1996년에 개최되어야 했으나 IOC의 올림픽 마케팅 신재정창출정책(New Sources of Financing) 기조 및 올림픽운동의 활성화 방안 추진을 위한 IOC 헌장규정 개정에 따라 1996년 대신 2년 앞당긴 1994년에 동계올림픽을 개최키로 하여 동·하계올림픽이 2년 간격으로 4년마다 별도로 각기 다른 해에 분업형태로 조직되기 시작했다.
따라서 1994년 동계올림픽 개최도시는 7년 전 IOC 헌장규정이 예외적으로 적용되어 6년 전인 1988년 서울올림픽에 앞서 신라호텔에서 개최되었던 제94차 IOC 총회에서 기라성 같은 세계적 유치경쟁도시들(스웨덴 웨스터순드와 아레, 미국 알래스카 주의 앵커리지, 불가리아의 소피아)을 물리친 노르웨이의 릴레함메르가 선정되었다. 이는 2010년 동계올림픽 유치 당시의 다크호스였던 평창의 선전과 비슷한 정황이었다.
1996년 올림픽 개최도시는 주 UN 미국대사로 명성을 떨친 Andrew Young 시장이 열정적으로 주도한 미국의 애틀랜타가 당초 근대올림픽 100주년을 맞이하여 근대올림픽 발상지로 100년만의 귀향이란 기치와 명분을 내세워 유치하려던 그리스의 아테네(Athens)의 야심만만함에 찬물을 끼얹고 영광스런 100주년 올림픽(Centennial Olympics) 개최도시로 선정되었다.
1998년 동계올림픽은 10년 전 선두주자였던 나고야의 바덴바덴 패배에서 교훈을 얻어 절치부심한 일본이 한때 부동산 등으로 세계최고의 갑부대열에 올랐던 세이부 그룹 회장인 「스즈미 요시야끼」 전 일본 올림픽위원회(JOC) 위원장의 절대적인 후원과 용의주도한 전방위 득표로비작전에 힘입어 스즈미 회장의 고향이기도 한 나가노(Nagano)에서 개최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동계올림픽시설 인프라나 개최능력, 엄청난 미국 내 TV 중계권료, 올림픽 스폰서 등으로 완벽한 역대 최강 유치후보도시 0순위였던 미국의 솔트레이크시티(Salt Lake city)를 격침시킨 것이다.
(Nagano1998동계올림픽 참가국 각국 단장들 공식기념사진/필자는 맨 앞줄 <우-6>, 그 옆이 개최국 일본 선수단장 Yagi<우-7>)
이를 두고 제2의 진주만공습을 성공시켰다고 말하기도 한다. 더불어 스즈미 회장과 JOC는 이변 창출의 선구자가 되었다.
와신상담 일본 나가노에 참패한 솔트레이크시티도 전방위득표작전을 벤치마킹(Bench Marking)해 4년 후 2002년 동계올림픽 개최지로 선정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동양적 로비문화의 심오한 경지와 뒷수습에서 약점을 여실히 드러내며 근대올림픽운동사상 최대 유치 스캔들의 단초를 제공하였고 IOC는 이에 대해 강력한 개혁(Reform)을 단행하게 되고 스캔들에 관련된 몇몇 IOC 위원들은 결국 가슴 아픈 귀향을 하게 되었다.
IOC 윤리규정(IOC Ethical Code)은 이렇게 탄생하였다.
이에 앞서 1993년 모나코에서 개최된 제101차 IOC 총회에서는 승리를 장담하여 전세기를 동원해 천안문 광장에 현지 실황 중계용 대형 스크린까지 설치했던 북경이 호주의 시드니에 간발의 차이로 어이없이 덜미를 잡혔다.
2004년 올림픽은 1996년 100주년 귀향 올림픽 유치에 분루를 삼켰던 그리스 아테네가 필자와 갑장이며(1956년 원숭이 띠) 미모와 저돌적 성격의 Angelopoulos 여성유치위원장을 앞세워 IOC 위원들을 상대로 치밀하고 집요한 유치 캠페인을 전개하여 「재수생 합격」식의 올림픽 유치에 성공하는 개가를 올렸다.
(Gianna Angelopoulos 및 Rogge IOC위원장)
Angelopoulos 아테네 유치위원장은 결국 2004년 아테네올림픽 조직위원장까지 석권하였다.
2006년 동계올림픽은 필자가 실무총괄 기획, 운영하고 조직했던 1999년 제109차 서울총회에서 솔트레이크시티 유치 스캔들 건을 언론에 발표함으로써 IOC 명성과 평판에 커다란 흠집을 내는데 일조한 Marc Holder(국제스키연맹회장 역임) IOC 위원의 고국인 스위스의 시온(Sion)이 우세한 제반 여건 등에도 불구하고 IOC 위원들의 여론에 밀려 이탈리아의 토리노(Torino)에 2006년 동계올림픽 개최권을 내주고 말았다.
필자가 IOC 평가위원으로 활약했던 2008년 올림픽유치경쟁은 중국의 베이징과 함께 프랑스 파리와 캐나다 토론토가 3파전을 벌이는 양상이었지만 결국 질풍노도 같은 13억 인구를 가진 21세기 떠오르는 태양이자 욱일승천 하는 베이징을 추월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2008년 올림픽 IOC평가위원 시절 중국 장쩌민 국가주석<Beijing2008> 및 Yoshiro Mori 일본총리<Osaka2008/현 Tokyo2020조직위원장>과 함께)
2010년 동계올림픽 유치경쟁에서는 그때까지 무명 도시였던 평창이 대한민국의 응집된 민족적 정기와 강원도의 힘으로 전 세계가 놀랄만한 드라마를 펼쳐 올림픽 유치경쟁사에 길이 기억되었다.
평창(PyeongChang)보다는 평양(PyeongYang) 발음에 길들여진 외국 언론들에게 유치경쟁 초기에 경미한 혼동과 착각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2003년 격전지였던 체코 프라하 개최 제115차 IOC 총회장에서의 군계일학의 탁월하고 감동적이었던 평창 프레젠테이션은 IOC 위원들뿐만 아니라 전 세계 외신들에게도 신선한 충격과 더불어 아쉬운 감탄사를 금치 못하게 했던 최상의 감동 드라마의 백미 그 자체였다.
필자도 「프라하 평창 드라마」프레젠테이션 주역의 일원으로서 역할을 부여받음에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그날의 프레젠테이션을 가슴 벅찬 긍지로 간직하고 있다.
(2003년 Prague개최 IOC총회에서 평창2010유치위원회 대외공동사무총장 자격으로 프레젠테이션<윗 사진> 및 2003년 체코 프라하 IOC총회 현장에서 평창2010의 파워를 의식한 캐나다미디어의 발 빠른 취재경쟁 CBS TV와의 인터뷰 장면<아래 사진>)
당초 필자가 작성한 IOC 위원들 평창지지 투표 성향 분석의 추정치는 52표에서 62표 사이였다.
1차 투표에서 평창이 51표, 밴쿠버가 40표, 잘츠부르크가 16표로서 규정에 의거 잘츠부르크가 탈락했다.
107명의 IOC 위원들이 참여한 투표수의 단순 과반수 즉, 3표만 더 얻어 54표가 됐더라면 1차 투표에서 평창이 2010 동계올림픽 개최도시로 선정되는 짜릿한 경천동지의 승전보를 얻었으리라.
밴쿠버와 맞붙은 2차 투표에서 평창은 1차 투표에서보다 겨우 2표 증가한 53표를 얻은데 반해 밴쿠버는 무려 잘즈부르크의 16표를 흡수해 최종 56표를 얻어 53:56 박빙으로 밴쿠버가 선정되었다.
여기서 2표만 더 얻어서 55표가 됐다면 55:54로 대한민국을 흥분과 환희의 도가니로, 세계를 경악과 충격으로 빠뜨릴 드라마가 연출할 뻔 했다.
두 번째로 도전한 평창2014의 또 한번의 결전은 2007년 7월 4일 오후 7시 「과테말라」로 약정되어 있었다고 생각했었지만 러시아 푸틴대통령과 러시아 마피아의 표 장악력을 대한민국과 평창2014의 힘으로는 넘기 힘든 판세였음이 극명히 드러났다. 그나마 평창2014가 소치2014를 1차 투표에서는 36:34로 리드 했었다는 사실에 위안을 삼을 수 밖에 없었다. 평창2014는 Salzburg2014가 최소득표로 탈락한 2차 결선투표에서 47:51로 소치2014에게 4표차로 통한의 2연속 역전패배자되어 다시 물러났다.
2014년 동계올림픽유치에 성공한 러시아의 소치는 US$6천만 달러(약 720억원/추정치)를 지출했다고 전해진다.
간발의 차이로 2위를
차지 실패한 대한민국의 평창은 US$4천만 달러(약 480억/추정치)를 썼고 2위를, 훌륭한
시설과 지역의 매력 그리고 동계스포츠 전통을 내 세웠던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는 US$1천5백만 달러(약 180억원/추정치)의 가장 낮은 비용을 쓰고 공교롭게도 결국 1차투표에서 꼴찌로 탈락했다.
과거 올림픽유치는 돈 먹는
하마가 대세였다.
늘 그랬듯이 막대한 유치 비용을 쏟아 부어야 보다 성공적인 유치 결과를 기대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개 올림픽 유치 비용은 공개 되지 않았던 것이 불문율이었다. 이를 불식시키기 위해 제9대 Thomas Bach IOC위원장(2013~2025)은 Olympic Agenda2020개혁규정을 통해 올림픽유치과정의 투명성과 경비절감이란 목표를 세우고 이후 올림픽유치 비용을 혁신적으로 절감하는데 성공하고 있다.
<평창2018 남아공 더반(Durban)대첩 Detail한 배경과 역사>
평창이 2번의 실패 끝에 2018 동계올림픽을 유치하였다.
평창은 비밀투표로 이루어진 1라운드에서 막강 독일의 Munich2018과 프랑스의Annecy2018에 승리한 것이다.
승리를 위해선 투표참가 IOC 위원 95명의 과반수인 48표가 필요했으나, 평창은 63표(66.3%)로 단순과반수 (50%+1표)를 훨씬 상회하고 8.7% 모자라는 절대과반수(3/4, 75%)에 육박하였다.
동계스포츠 세계최강국 중 하나인 독일의 뮌헨2018은 25표로 26.3%, 안시2018는 7표로 7.3%밖에 안 되는 득표율로 참패를 기록하였다. 역대 올림픽유치투표 전 중 1995 년 부다페스트 IOC총회에서 Salt Lake City2002이 투표참가 IOC위원 89명의 표 중 54표로 승리한 이래 평창의 63표는 가장 엄청난 표 차이의 승리이다.
독일과 프랑스는 이미 국제스포츠이벤트 그랜드슬램(4관왕)을 이룩한 세계 스포츠 초 강국이다. 그랜드슬램달성국가란 동계 및 하계올림픽, FIFA월드컵, 세계육상 선수권대회 등 4대 국제대회를 모두 유치하여 개최한 나라들을 일컫는다. 평창2018은 이제 3관왕(triple crown) 국가를 뛰어 넘어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에 이어 5번째 그랜드슬램(Grand Slam) 국가 클럽의 정회원이 되었다.
세계최강국들인 미국, 영국, 캐나다, 호주, 중국 조차도 아직 그랜드슬램 국가대열에 끼지 못하고 있다. 평창은 아시아 통산 세 번째지만 일본에서 개최된 Sapporo1972, Nagano1998를 제외하고 20년만에 아시아에서 최초로 동계올림픽을 유치하게 된 것이다.
2011년 7월 당시 Jacques Rogge IOC위원장이 평창을 호명할 때 한국대표단은 환호하였다.
(Jacques Rogge 당시 IOC위원장의 투표결과 승자 발표)
1995년 Salt Lake City가 1라운드에서 다른 후보도시를 제치고 2002년 동계올림픽 유치를 확정한 이후에 처음으로 1라운드에서 투표가 결정 난 것이다.
평창2018의 슬로건 ‘New Horizons’은 세 번의 도전 만에 성공할만한 가치 있는 주제였고, 이는 아시아의 새로운 동계스포츠 시장과 그 지역 동계스포츠 허브의 의미를 담고 있다.
2010년 유치 당시 첫 번째로 평창은 고배를 마셔야 했고, 두 번째 실패인 2014 년 재수도전에서는 국가적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지만, 세 번째 도전에서의 승리는 ‘한국의 가장 행복한 날’로 기쁨을 만끽하였다.
조양호 평창2018유치위원장은 ‘내 생애 최고의 날’이라고 밝히며, 대한민국과 국민, 동계스포츠를 꿈꾸는 젊은 세대들에게 제일 기쁜 날이라고 덧붙였다. 전이경 올림픽 쇼트트랙 챔피언(동계올림픽 4관왕)은 “지난 유치프레젠테이션 때 참여했고, 우리가 졌을 때 너무 슬퍼서 울었다. 그러나 지금은 울지 않았고 마치 꿈을 꾸는 듯하다.”고 소감을 말하기도 하였다. 2014년 유치경쟁승자였던 Sochi2014조직위원회는 한국에 첫 번째로 축하를 보내기도 하였다. Dmitry Chernyshenko 소치2014조직위원장은 “소치2014처럼 한국은 올림픽 무브먼트를 위한 ‘New Horizons’을 잘 전달했다.”고 평가하였다. 그리고 “올림픽의 힘을 새로운 지역으로 함께 전파하고 싶고, 평창은 훌륭한 개최도시 가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Colin Moynihan 당시 영국올림픽위원장은 평창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일본을 제외하고 아시아의 첫 동계올림픽개최도시로서 평창은 새로운 관중에게 동계올림픽의 즐거움을 전달할 것이며, 훌륭하게 조직될 것이 확실한 평창대회를 학수고대하고 있으며 평창은 아시아뿐만 아니라 전세계올림픽운동구성원 모두를 자랑스럽게 해줄 것”이라고 언급하였다. 한국은 이미 수년간 수억 달러를 평창에 투자했으며, 정부는 국가 우선사업으로 간주하고 있다. “많은 한국인들은 오랫동안 열심히 노력해왔고, 나는 지금 너무 행복하다.”고 김연아 선수는 밝혔다. 당시 박용성 KOC위원장은 “다음 계획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에 “파티 아주 큰 파티”라고 답하였다. 김진선 특임대사는 “우리는 축하했고 소리쳤고 울었다. 내 마음도 이와 같았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험난한 역경을 딛고 여기까지 왔다.”고 말한 김진선 특임대사는 앞선 두 번 의 평창 유치를 강원도지사로서 이끌었다.
평창은 ‘Drive the Dream’ 프로그램을 디자인하고, 김연아 선수는 올림픽유치 의 첫 번째 살아 있는 유산(the first living legacy)이 되었다. 2018유치과정에서 조양호 위원장이 유치를 지휘하였지만, 김진선 특임대사는 유치의 핵심적인 일부로써 두 번의 유치과정에서 구축한 관계를 잘 활용하였다. 선두를 달리던 평창2018은 마지막까지 뮌헨2018의 도전에 시달렸지만 결국 승리하였다. 2018년 2월 세계는 조그만 산골도시인 평창을 주목하였으며 전 세계 겨울축제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곳은 세계 수준의 시설물들과 평창 특유의 문화환경으로 점철되어 인류 올림픽유산 유적지로 탈바꿈하였다. 새로운 고속철도는 서울과 인천국제공항을 2시간 이내로 연결시켜 평창2018동계올림픽의 수송교통 유산(Legacy)로 이미 자리매김하였다. 그것은 평창 지역을 영원히 탈바꿈시켜 줄 그 무엇이 되고 있다. 한편 한심한 패배로 낙심한 뮌헨2018은 2018년 유치도시결정투표에서 평창의 압도적인 승리는 동정표 덕분이라고 밝힌 바 있었다.
당시 Thomas Bach IOC부위원장(현 IOC위원장) 겸 뮌헨2018유치총괄회장은 “스포츠에서 이기는 것만이 모든 것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며, 이번의 패배가 마지막을 의미하지 않는다.”라고 소감을 피력했다. 이어서 그는 “그러나 우리는 매우 실망했으며, 한국의 동정 전략은 잘 먹혔다.”라고 평가하기도 하였다.
뮌헨2018은 평창2018과 선두를 달리는 것으로 간주되었지만, 38표의 차이는 세 번째 도전인 평창2018이 선택된 것을 의미한다. 그는 “이 레이스에서는 은메달이 없기 때문에 패배는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라고 덧붙였다.
최하위로 패배의 쓴 잔을 든 안시2018은 실패하여 실망스럽지만, 평창의 ‘선전’에 경의를 표하였다. 안시2018는 시종 순위 밖으로 간주되었고, 7표밖에 득표하지 못했다.
Charles Beigbeder는 “우리는 우리가 해온 것에 자부심을 느끼며, 올림픽 무브먼트에 기여했다고 생각하며, 이번의 실패로 절대 좌절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평창의 선전에 축하의 뜻을 전하며, 우리에게 비드(bid)의 기회를 준 IOC에게 감사를 표한다.”라고 덧붙였다.
올림픽 알파인 스키 2관왕이며 전 스웨덴 선수출신으로 IOC위원을 역임한 Pernilla Wiberg는 “이것은 경기였고, 항상 승자가 있으면, 2위도 있는 법이다. 선수로써 나는 이 자리를 통해 어떻게 지고 어떻게 승리할 지를 배웠다.”라고 말하면서 “평창에 축하하며, 우리에게는 좋은 경험이었고 많은 것을 배우게 했다.”라 고 마무리하였다.
<2012 올림픽유치경쟁의 역사적 드라마 현장>
2012년 올림픽 유치경쟁도 한편의 감동드라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000년과 2008년 올림픽 유치 도전에 이어 「삼수생」인 프랑스가 파리를 앞세워 유치경쟁 초반부터 투표가 임박했을 때까지 줄곧 흔들리지 않는 부동의 선두주자였다.
라이벌 도시였던 영국의 런던은 개최도시 결정 1년 전 영국 BBC가 파노라마 프로그램에서 「몰래카메라(Hidden Camera)」를 이용해 폭로한 IOC 위원 매표 가상 시나리오의 공개로 인해 치명상을 입고 있던 터였다.
2005년 초에는 엘리자베스 여왕조차 런던이 파리의 효과적이고 짜임새 있는 유치 캠페인에 훨씬 뒤져 있다는 비공식적 비판을 했다고 외신은 흘렸다.
그러나 2005년 7월 싱가포르 개최 제117차 IOC 총회장 주변에서는 서서히 반전드라마가 시작되는 느낌이 감지되었다.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의 싱가포르 현지 지원 계획(회의 참석 및 마지막 유치 캠페인 주도)이 결정된 상태였지만 당시 스코틀랜드 글렌이글에서 예정된 2005년 G-8 정상회담 호스트(Host)격인 토니 블레어 영국 수상의 경우 싱가포르 회의 참석이 불투명한 상태였다. 「가장 바쁜 사람이 가장 시간을 잘 만든다.」는 말처럼 토니 블레어 영국 수상은 싱가포르 방문 3개월 전부터 부동표를 중심으로 해당 IOC 위원들에게 진심을 한껏 우려낸 메시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물론 싱가포르 현지에서 개인적으로 꼭 만나고 싶다는 내용도 잊지 않았다. 세계적인 지도자가 성심성의껏 작성한 개인편지는 받은 많은 부동층 IOC 위원들의 마음을 부지불식간에 움직이게 했다.
단 이틀 동안의 짧은 체류기간이었지만 토니 블레어 수상은 캐주얼 차림의 편안하고 친근한 분위기를 만들어 내면서 해당 IOC 위원들을 정중히 초청하여 친히 손을 부여잡으면서 진정어린 마음을 전달하였다.
반면,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은 파리 유치위원회가 사전에 마련한 공식 리셉션 등에 참석하여 득의만만하고 안정된 얼굴로 IOC 위원들과 만남을 가졌다. 그러나 공식석상이기에 토니 블레어식의 친근감을 전달하는 분위기는 만들지 못했던 것 같다. 사실상 효과는 토니 블레어식의 만남이 훨씬 컸으리라 생각된다.
투표 당일 런던의 프레젠테이션은 어린 세대의 감동적인 장면 표출 등으로 어필하면서 미래의 희망이란 메시지 전달에 성공하였다.
파리의 경우 완벽함과 전문성 그리고 안정성과 편안함을 효과적으로 표출해 내었으나 감동적인 측면에서 IOC 위원들을 크게 압도하지 못했다.
마드리드, 뉴욕, 모스크바 등 나머지 3개 후보도시들도 각각의 특성을 강조하는 메시지 전달에는 성공하였다.
프레젠테이션이 끝나고 투표에 들어갔다. 이날은 제117차 싱가포르 IOC 총회 첫날인 7월 6일이었다. 이날 2년여 동안 선두주자(Front Runner) 자리를 고수해왔던 프랑스 파리를 영국 런던이 4차전까지 가는 치열한 접전(race) 끝에 2012년 올림픽 개최도시로 등극하여 그 순간의 감격과 희열을 만끽하였다.
제117차 IOC 총회 개회식 날인 7월 5일 오후 7시 30분에는 Lee Hsien Loong 싱가포르 총리가 총회 개회사에서 5개 유치도시를 거명하면서 “London, Madrid, Moscow, New York and Paris"라고 순위를 매겼다. 물론 영어 알파벳순이라고 토를 달아 긴박한 순간을 공유하고 있던 IOC 위원들을 포함한 모든 유치 도시 관계자들의 웃음을 자아낸 긴장해소 용 청량제 노릇을 하기도 했지만 말이 씨가 된 셈이 되었다. 결국 이 총리의 예언(?)대로 최초의 런던과 최후의 파리가 최종라운드에서 격돌을 벌여 런던이 승리의 월계관을 차지하였으니 말이다.
런던의 승리는 스코틀랜드 글렌이글에서의 G-8 정상회담 주최자이기 때문에 시간에 쫓겨 가면서도 싱가포르 현지까지 날아와 소탈하고 정감 넘치는 세일즈 외교를 펼친 토니 블레어 영국 수상과 투표 당일까지 포기하지 않고 IOC 위원들의 표심 공략에 맹진한 세바스천 코(Sebastian Coe) 런던 2012유치위원장과 Keith Mills 유치위 국제위원장 겸 사무총장 등의 정성어린 감동마케팅, 그리고 투표 직전의 런던 프레젠테이션 내용에 담겨있는 진한 감동의 메시지 등이 승리의 요인으로 분석되었다.
반면, 선두주자였던 파리 2012 유치위는 자크 시라크 대통령의 싱가포르 총회 참석 및 외형적인 현지 로비활동에도 불구하고 “魔의 D-3일”부터 투표 전략에서 「공격 보다는 현상 유지」에 치우친 인상을 남겨 최후까지 노력하는 자만이 미소 지을 수 있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다시금 확인시켜 준 경우가 되고 말았다.
한편, 백전노장의 사마란치 전 IOC 위원장 등이 막후 로비 활동을 주도한 마드리드 2012 유치위는 다크호스(Dark Horse)답게 투표 2차전에서 32표를 획득, 런던(27), 파리(25), 뉴욕(16)을 제치고 1등을 하였으나, 결국 3차전에서 런던(39), 파리(33)에 이어 31표를 획득하는데 그쳐 통한의 고배를 마시고 말았다.
2012년 올림픽 개최도시 결정투표 4라운드 중 3라운드에서 런던(39표), 파리(33표), 마드리드(31표)의 순으로 표를 획득하여 마지막 고개를 마드리드가 못 넘고 말았는데 필자도 현장에서 투표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의 3라운드가 끝나고 유럽의 한 IOC 위원이 자크 로게 IOC 위원장에게 발언권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투표에 실수가 있었다고 토로하면서 재투표를 제안하는 발언을 하였다. 로게 IOC 위원장은 투표가 종료되었으며 주어진 투표박스(box given) 103표가 이상 없이 등록되었다면서 문제가 없기 때문에 유효한 투표라고 선언하였다. 결국 재투표는 없는 이야기가 되었다.
몇 개월이 지난 후, 또 다른 유럽계 IOC 위원이 언론에 비슷한 이야기를 하여 한때 혼란을 야기하기도 했지만 IOC의 정확한 통계수치에 근거한 설명으로 이 논쟁은 일단락되었다.
자, 그렇다면 이렇게 정황을 재구성해보면 상당히 재미있어지는 추리가 가능하다.
재투표를 제안한 한 IOC 위원의 실수가 만일 3라운드에서 마드리드를 생각하면서 전자투표함에서 잘못하여 파리를 누른 것이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래서 만약 파리로 잘못 누르지 않고 제대로 마드리드를 눌렀다면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3라운드 결과는 런던(39표)이 1위, 그리고 파리(32표)와 마드리드(32표)가 동률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파리와 마드리드가 결선진출 최종투표를 하게 되었을 것이고, 이 과정에서 파리를 더 어려운 상대로 생각하는 런던지지자들은 어쩌면 마드리드를 선택하지 않았을까?
결국 마드리드가 런던과 맞서서 마지막 경쟁을 하게 되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또 한번의 추리가 가능하다. 파리 지지자들은 마지막에 런던을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 마드리드를 선택했을 거라는 이야기다.
2012년 하계올림픽은 마드리드올림픽이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보면서 내 놓은 가상시나리오다.
물론 가상은 가상이고 현실은 바꿀 수 없는 것이다.
<올림픽 개최지 결정 현장의 Rapport>
2012 하계올림픽
●2005년 7월 6일 싱가포르, IOC 위원들의 비밀투표에 의해 선정
●총 116명의 위원 중 99명 1차 투표 참가
-1차 투표에 참가하지 않는 위원 명단(17명)
IOC 위원장 -1명
프랑스(2명) - Jean Claude Killy
- Henri Serandour
미국(3명) - Antia L.DeFrantz
- James L. Easton
- Robert Ctvrtlik
러시아(3명) -Vitaly Smirnov
- Shamil Tarpischev
- Alexander Popov
영국(3명) - HRH The Princess Royal
- Craig Reedie
- Phil Craven
스페인(2명) - HRH The Princess Royal
- Juan Antonio Samaranch Jr.
불가리아 (1명) : 자격정지 및 익일 투표에서 퇴출
프랑스 Guy Drut, 그리스 Nikos Filaretos 는 불참 통보
●IOC 집행위원회 결정(2005년 7월 5일) - 2012 개최도시 발표 7월 6일
○IOC 집행위원회는 2012 후보도시 최종리스트를 승인함
파리 09:00 뉴욕 10:30 모스크바 12:00
런던 14:30 마드리드 16:00
(※프레젠테이션 순서)
○오후 5시 15분에 IOC 조사평가위원회 위원장 Nawal el Moutawakel 평가보고서 발표 후 IOC 위원의 투표 실시
○발표식은 오후 7시 30분에 시작함, IOC 위원장이 발표
<제117차 싱가포르 IOC 총회 - 2012 후보도시 관련 이모저모>
●BBC에 의하면 2012 유치후보도시인 런던, 마드리드, 뉴욕이 단결하여 1차 투표에서 파리를 희생시키는 빅딜설을 비밀리에 협의했다고 전함. Craig Reedie 영국 IOC 위원은 그런 제안을 해본 적도 없으며, 단순히 사람들과 단결하여 누구를 뽑고 누구를 뽑지 않는다는 일은 있을 수 없다면 강하게 부정함.
●Sportingling.com에 의하면 몇몇의 IOC 관계자들이 노골적으로 파리를 지지하고 있으며, 또 다른 의견으로는 유럽지역의 위원들이 2016년의 기회를 노리기 위해 미대륙으로 방향을 돌려 뉴욕이 유치획득에 성공할 것으로 추정된다고 보도함.
●영국 올림픽 위원회 위원장 겸 IOC 위원인 Craig Reedie와 2012 런던유치위원장 Sebastian Coe는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2~30명 내외의 IOC 위원들이 아직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 못했으며, 마지막 프레젠테이션이 그들의 표를 굳히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고 언급.
●의심의 여지 없이 파리가 유치경주의 첫 번째 주자로서 고지를 향해 다리고 있다고 전함. 그러나 Kevan Gosper 호주 IOC 위원은 런던이 파리 뒤를 바로 쫒고 있다며, 두 후보도시는 막상막하여서 결과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고 전함. 또 다른 IOC 위원도 파리가 우세한 것은 사실이지만 다소 자만하는 태도가 반감을 사고 있는 반면, 런던은 위원장이 싱가포르에 도착한 이후 매우 적극적이고 조직적인 활동을 펼치고 있어, 매우 강한 인상을 주었다고 전함.
●Gardian은 영국의 토니 블레어 수상이 일요일 싱가포르에 도착해 3일간 IOC 위원들을 만나고 있는 반면, 프랑스 자크 시라크 대통령은 화요일까지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면서 IOC 위원들은 블레어 수상이 런던에 대해 잠재적으로 가진 최고의 자산(best asset)이라고 평가했다고 전함.
●뉴욕의 올림픽 경기장 문제가 그들의 유치에 영향을 미치게 될지는 미정이지만 2012 뉴욕 유치위 직원들은 각각 제안되었던 올림픽 입지 전후의 모습을 실은 “View-Masters with 30"이라는 홍보물을 제작, 손으로 직접 쓴 편지와 함께 IOC 위원들에게 전달함.
●전 IOC 위원장 사마란치가 2012 마드리드 하계올림픽 유치를 적극 지지하고 나섬. 마드리드는 선수들을 위한 최고의 프로젝트를 가지고 있다면서 그는 현재 투표권을 행사할 수 없지만, 아직도 투표권이 있는 많은 IOC 위원들과 친분을 유지하고 있다고 전함.
●모스크바 부시장 Valery Shantsev는 싱가포르에 도착한 다음날 모스크바 대표단들의 최종 프레젠테이션 준비과정을 지켜보면서 모스크바의 차별화된 전략인 올림픽 강(江) 계획(Olympic River Plan)이 IOC를 설득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며 유치 성공에 강한 자신감을 보임.
<싱가포르 현지 이모저모>
●제117차 싱가포르 IOc 총회 개회식장에 참석한 자크 로게 IOC 위원장은 모든 2012 하계올림픽 유치후보도시들이 올림픽을 치를만한 훌륭한 자산과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고 평가하면서, 유치를 성공하지 못하게 되는 후보도시들에게 2016년 재도적해보라는 메시지를 전함.
●2012 하계올림픽유치후보도시 선전 투표 몇 시간을 앞두고 IOC의 선택은 현재 런던과 파리로 향해 있다고 AFP 통신이 보도. 한 고위 IOC 위원에 의하면 대부분의 IOC 위원들이 마음의 결정을 내렸으며 그 결정은 파리나 런던이 될 것이라고 덧붙임.
●러시아 Vladimir Putin 대통령은 공식석상의 자리에서는 처음으로 2012 모스크바 하계올림픽 유치 지원을 위한 영문 연설문을 낭독. Putin 대통령은 “러시아의 대통령으로서 공정하고 합리적이며 이상적인 2012 올림픽 유치 성공을 기원합니다.”라면 힘찬 어조로 낭독했다고 보도. Putin의 비디오 메시지가 담긴 테이프는 모스크바의 마지막 프레젠테이션에서 선보일 예정.
●런던에서는 2012 유치도시 투표과정을 수요일 12시부터 2시까지 런던 트라팔가 광장에서 대형스크린을 통해 생방송으로 진행할 예쩡. 몇몇 영국 신문사들의 편집장들이 “International Herald Tribune"에 2012 런던 유치를 염원하는 광고를 게재.
●투표결과 : 2012 런던
○자크 로게 IOC 위원장은 제 117차 싱가포르 IOC 총회에서 총 4회의 투표 끝에 런던이 2012년 30회 하계올림픽 개최도시로 선정되었음을 발표.
○IOC 위원들은 7월 6일 있었던 프레젠테이션 뿐 아니라 IOC 조사평가위원회의 파리, 뉴욕, 모스크바, 런던, 마드리드의 상세한 보고사항을 기준으로 결정.
1라운드
런던 22
파리 21
마드리드 20
뉴욕 19
모스크바 15
2라운드
마드리드 32
런던 27
파리 25
뉴욕 16
3라운드
런던 39
파리 33
마드리드 31
4라운드
런던 54
파리 50
●싱가포르 2005 : 런던 30회 하계올림픽 개최도시로 선정
2005년 7월 6일
제117차 싱가포르 IOC 총회에서 4회에 걸친 치열한 접전 끝에 런던이 총 104표 중 54표를 획득하여 제30회 하계올림픽 개최도시로 선정됨.
●4개의 주제
2012년 런던올림픽의 비전은 4개의 주제를 근거로 함.
선수에게 일생일대의 경험 제공
스포츠 유산 남김
재건을 통한 지역사회이익 창출
IOC와 올림픽운동을지지
●일생일대의 경험
2012년 런던올림픽은 선수들이 최적의 환경에서 경쟁할 수 있는 조건을 제공하기 위해 노력, 선수들 중 30%만 경기장으로부터 20분 거리에 주거하는 반면, 50%는 올림픽 공원의 보안을 벗어날 필요 없이 경기장에서 몇 분 거리에 머물 예정.
●스포츠 유산
런던올림픽 후 국내외 행사를 개최하기 위한 훌륭한 스포츠 시설을 보유하게 되며, 이는 London Olympic Institute의 설립으로 이어져, 엘리트 선수들을 위해 시설 및 서비스 제공을 가능하게 할 뿐 아니라 올림픽 종료 후 스포츠 참여의 장려를 가능케 함.
●재건
Lower Lea Valley에 만들어질 올림픽 공원은 전 지역사회 재건에 기여 - 이곳에 사는 모든 이에게 직접적인 혜택이 주어짐. 런던 동부의 허브로서 지역사회를 한데 모으고 사회 경제 변화의 촉매제 역할을 할 것임. 또한 사회통합, 교육기회 창출, 문화 기술의 발전과 런던 및 영국의 고용기회에 기여할 예정.
●올림픽운동지지
런던 2012는 세계 언론과 마케팅의 중심이라는 입지를 이용하여 2012년 런던올림픽은 경제적 성공을 보장할 뿐 아니라 역대 최다 관중들에게 올림픽 경기의 흥미와 볼거리를 전해줄 수 있음.
●세계일류
2012 런던올림픽은 올림픽 공원의 신설 경기장, 기존의 세계 일류 시설 및 기타 유적지에서 개최될 예정. 런던은 “낭비 없는 최상 추구”에 근거하여 대회 후 사용된다는 명백한 유산의 요구가 있을 경우에만 신설 경기장을 건설할 계획.
◎2012 개최도시 선전관련 IOC 위원 및 각계 반응
●많은 IOC 위원들이 싱가포르에서 블레어 총리의 48시간 로비 총력전과 Coe 위원장의 수요일 최종 프레젠테이션에서의 열정적인 호소고 매우 중요했다고 언급.
●파리는 2년간의 유치 경쟁에서 대체적으로 선두주자로 간주됐으나, 그 점 때문에 부담이 컸으며 조심스러운 캠페인을 벌임. 반대로, 런던은 눈에 띄고 적극적인 전략 추구 및 Coe 위원장의 리더십과 블레어 총리의 전폭적인 정치적 지원에 힘입어 확고한 여세를 몰아감.
●파리의 유치 전 접근 방식이 “선택 1순위(favourite)"로서의 이미지를 방어하는 입장 취함
●많은 위원들은 프레젠테이션 동안 2012 올림픽을 통해 청소년에게 미칠 영향에 대한 Coe 위원장의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연설에 감동받았다고 언급.
●미국 James Easton IOC 부위원장 응 몇몇 위원들은 뉴욕의 올림픽 경기장 부지 막판 변경 및 최근 미국의 올림픽 개최가 유치 실패의 요인이라고 언급.
●마드리드는 사마란치 IOC 전위원장의 후광으로 선전.
<1992년 동계올림픽 유치 후보 7개 도시(Candidate Cities) 리스트>
- Albertville(알베르빌) / 프랑스 ; 개최도시로 결정
- Anchorage(앵커리지) / 미국
- Berchtesgaden(베르슈테스가덴) / 독일
- Cortina d'Ampezzo(코르티나 담베쪼) / 이탈리아
- Lillehammer(릴레함메르) / 노르웨이
- Falun(팔룬) / 스웨덴
- Sofia(소피아) / 불가리아
◎1992년 올림픽 유치 후보 6개 도시 리스트
- Barcelona(바르셀로나) / 스페인 ; 개최도시로 결정
- Amsterdam(암스테르담) / 네덜란드
- Belgrade(베오그라드) / 유고
- Birmingham(버밍햄) / 영국
- Brisbane(브리드베인) / 호주
- Paris(파리) / 프랑스
◎1994년 동계올림픽 유치 후보 4개 도시 리스트
- Lillehammer(릴레함메르) / 노르웨이 ; 개최도시로 결정
- Anchorage(앵커리지) / 미국
- Oestersund/Are(웨스터 순드/아레) / 스웨덴
- Sofia(소피아) / 불가리아
◎1996년 올림픽 유치 후보 6개 도시 리스트
- Atlanta(애틀란타) / 미국 ; 개최도시로 결정
- Athens(아테네) / 그리스
- Belgrade(베오그라드) / 유고
- Manchester(맨체스터) / 영국
- Melbourne(멜버른) / 호주
- Toronto(토론토) / 캐나다
◎1998년 동계올림픽 유치 후보 5개 도시 리스트
- Nagano(나가노) / 일본 ; 개최도시로 결정
- Aoste(아오스떼) / 이탈리아
- Jaca(하카) / 스페인
- Oestersund(웨스터 순드) / 스웨덴
- Salt Lake city(솔트레이크시티) / 미국
◎2000년 올림픽 유치 후보 5개 도시 리스트
- Sydney(시드니) / 호주 ; 개최도시로 결정
- Beijing(베이징) / 중국
- Berlin(베를린) / 독일
- Istanbul(이스탄불) / 터키
- Manchester(맨체스터) / 영국
◎2002년 동계올림픽 유치 후보 4개 도시 리스트
- Salt Lake city(솔트레이크시티) / 미국 ; 개최도시로 결정
- Oestersund(웨스터 순드) / 스웨덴
- Quebec city(퀘벡) / 캐나다
- Sion(시온) / 스위스
◎2004년 올림픽 유치 후보 5개 도시 리스트
- Athens(아테네) / 그리스 ; 개최도시로 결정
- Buenos Aires(부에노스아이레스) / 아르헨티나
- Cape Town(케이프 타운) / 남아공
- Rome(로마) / 이탈리아
- Stockholm(스톡홀름) / 스웨덴
◎2006년 동계올림픽 유치 후보 6개 도시 리스트
- Torino(토리노) / 이탈리아 ; 개최도시로 결정
- Helsinki(헬싱키) / 핀란드
- Klagenfurt(클라겐푸르트) / 오스트리아
- Poprad-Tatry(포프라드-타트리) / 슬로바키아
- Sion(시온) / 스위스
- Zakopane(자코파네) / 폴란드
◎2008년 올림픽 유치 후보 5개 도시 리스트
- Beijing(베이징) / 중국 ; 개최도시로 결정
- Istanbul(이스탄불) / 터키
- Osaka(오사카) / 일본
- Paris(파리) / 프랑스
- Toronto(토론토) / 캐나다
◎2010 동계올림픽 유치 후보 8개 도시 리스트
- Vancouver(밴쿠버) / 캐나다 ; 개최도시로 결정
- PyeongChang(평창) / 대한민국
- Salzburg(잘스부르그) / 오스트리아
- Berne(베른) / 스위스 ; 중도포기
- Harbin(하얼빈) / 중국 ; 예선탈락
- Jaca(하카) / 스페인 ; 예선탈락
- Sarajebo(사라예보) / 유고 ; 예선탈락
- Andora la Vella(안도라 라 벨라) / 안도라 ; 예선탈락
◎2012년 올림픽 유치 후보 5개 도시 리스트
- London(런던) / 영국 ; 개최도시로 결정
- Paris(파리) / 프랑스
- Madrid(마드리드) / 스페인
- New York(뉴욕) / 미국
- Moscow(모스크바) / 러시아
◎2014년 동계올림픽 유치 후보 7개 신청도시 리스트
- PyeongChang(평창) / 대한민국
- Salzburg(잘스부르그) / 오스트리아
- Sochi(소치) / 러시아
- Almaty(알마티) / 카자흐스탄
- Jaca(하카) / 스페인
- Sofia(소피아) / 불가리아
- Borzomi(보르조미) / 그루지아
※올림픽 개최도시 선정 관록
1992년 동계 : 알베르빌(1차 도전 시 성공)
1992년 하계 : 바르셀로나(1차 도전 시 성공)
1994년 동계 : 릴레함메르(1992년 실패 후 2차 시도 성공)
1996년 하계 : 아틀란타(1차 도전 시 성공)
1998년 동계 : 나가노(1차 도전 시 성공)
2000년 하계 : 시드니(1차 도전 시 성공 그러나 국가인 호주로는 1992년 브리즈베인, 1996년 멜버른 실패 후 3차 시도에서 성공)
2002년 동계 : 솔트레이크시티(1998년 1차 실패 후 2차 시도 성공 그러나 국가인 미국으로는 1992년, 1994년 앵커리지 실패 후 3차 시도에서 성공)
2004년 하계 : 아테네(1996년 1차 실패 후 2차 시도 성공)
2006년 동계 : 토리노(1차 도전 시 성공 그러나 국가인 이탈리아로는 1992년 코르티나담베조 실패 후 2차 시도에서 성공)
2008년 하계 : 베이징(2000년 1차 실패 후 2차 시도 성공)
2010년 동계 : 밴쿠버(1차 도전 시 성공 그러나 국가인 캐나다로는 2002년 퀘백 실패 후 2차 시도에서 성공)
2012년 하계 : 런던(1차 도전 시 성공 그러나 국가인 영국으로는 1992년 버밍행, 1996년 및 2000년 맨체스터 실패 후 4차 시도에서 성공)
◎1차 유치 도전 시 성공사례
- 알베르빌(1992년 동계)
- 바르셀로나(1992년 하계)
- 애틀랜타(1996년 하계)
- 나가노(1998년 동계)
- 시드니(2000년 하계 그러나 국가인 호주로는 1992년 1996년 실패 후 3차 시도에서 성공)
- 토리노(2006년 동계 그러나 국가인 이탈리아로는 1992년 실패 후 2차 시도에서 성공)
- 밴쿠버(2010년 동계 그러나 국가인 캐나다로는 2002년 실패 후 2차 시도에서 성공)
2차 유치 도전 시 성공사례
- 솔트레이크시티(2002년 동계 / 1998년 1차 도전 실패)
- 아테네(2004년 하계 / 1996년 1차 도전 실패)
- 베이징(2008년 하계 / 2000년 1차 도전 실패)
◎주요 국가별 올림픽 유치 연속 실패 사례
- 미국 : 앵커리지-1992년, 1994년 동계 2차례, 뉴욕-2012년 하계 등 총 3차례
- 스웨덴 : 팔룬-1992년 동계, 웨스터순드/아레 1994년, 1998년, 2002년 동계 총4차례
- 불가리아 : 소피아 1992년, 1994년 동계 등 총 2차례, 2014 유치 신청 상태
- 영국 : 버밍햄 1992년, 맨체스터 2996년, 2000년 하계 등 총 3차례
- 호주 : 브리즈베인 1992년, 멜버른 2996년 하계 등 총 2차례
- 캐나다 : 토론토 1996년 2008년 하계, 퀘백 2002년 동계 등 총 3차례
- 이탈리아 : 코르티나담베조 1992년, 아오스떼 2998년 동계, 로마 2004하계 등 총 3차례
- 프랑스 : 파리 1992년, 2008년 2012년 하계 등 총 3차례
- 스페인 : 시온 2002년, 2006년, 2012년(포기) 동계 등 총 3차례
- 독일 : 베르슈테스가덴 1992년 동계, 베를린 2000년 하계 등 총 2차례
- 터키 : 이스탄불 2000년, 2008년, 2012년 하계 등 총 3차례
- 오스트리아 : 클라겐푸르트 2006년, 잘즈부르그 2010년 동계 등 총 2차례
<평창2014동계올림픽유치과정에서 찾아낸 연이은 석패 원인 분석>
지난 6월 22일은 IOC창립 112주년 기념일 바로 전날로서 7개 2014동계올림픽 유치 신청도시들(평창, 잘츠부르크, 소치, 알마티, 하카, 보르조미)로서는 희비의 쌍곡선이 교차된 날이었다.
필자는 한승수 평창유치위원장, 김정길 KOC 위원장, 김상우 KOC 총무, 김남수 유치위 국제부장 등과 함께 2014평창 신청도시 공식대표로서 7개 유치신청도시 대표들과 함께 IOC 공식 발표식에 참석하고 귀국하였다.
결선진출후보도시공식 발표 당일이었던 이날 공식후보도시(Candidate Cities)수(3개 또는 4개)를 놓고 15명의 IOC 집행위원들간의 갑론을박의 치열한 논의 끝에 결국 투표를 통해 6:6의 동수로 결말이 나지 않자 로게 IOC위원장이 실질적인 캐스팅 보트(Casting Vote)권을 행사하여 만장일치 형식으로 3개 도시(잘스부르크, 평창, 소치)만을 선정하였다.
2010년 동계올림픽 유치 당시 8개의 유치 신청도시(잘스부르크, 벤쿠버, 베른, 평창, 하카, 하얼빈, 소피아, 안도라) 중 4개의 결선진출후보도시를 선정하였는데, 평창은 잘스부르크, 벤쿠버, 베른에 이어 4위로 턱걸이 하여 공식후보도시 반열에 오른바 있다.
만일 2014년의 경우처럼 3개 도시 선정 원칙이 적용되었더라면 평창은 예선에서 알마티 경우처럼 탈락 했을 것이다.
다행히도 이번에는 그동안 각고의 노력으로 모든 부문에서 고루 좋은 점수를 받아 일취월장, 잘츠부르크에 이어 종합 2위로 결선에 진출한 대한민국의 평창은 국제스포츠계에서 이미 동계올림픽 개최 능력이 충분히 검증되어 있다는 것이 재확인된 셈이다.
그래서 그 당시 평창, 잘츠부르크, 소치 3개 도시 아니 3개국의 본격적인 유치전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IOC는 2006년 10월 1일부터 국제 홍보(International Promotion)를 후보도시들에게 허용했었다.
국제 홍보보다 더 중요한 것은 투표권자들인 IOC 위원들에 대한 유치 로비활동이다.
당시 114명의 IOC 위원들 중 금년 말 80세로 정년퇴임하는 Adefope 나이지리아 IOC 위원과 Rodriguez 아르헨티나 IOC 위원은 2007년 7월 4일 과테말라 개최 제119차 IOC 총회 시에는 IOC 명예위원으로서 투표권이 없었으며, 자크 로게 IOC 위원장도 가부 동수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투표권을 행사하지 않을 것이고, 유치 도시 해당국가 6명의 IOC 위원들(한국 2명, 오스트리아 1명, 러시아 3명)도 투표권이 주어지지 않는 관계로 2007년 7월 4일 과테말라 IOC총회 첫날 투표에 참여하는 IOC 위원 수는 105명으로 귀착 되었다.
유치도시 해당국가의 IOC 위원의 역할은 축구경기에서 최전방 공격수에 해당된다.
이 105명의 IOC 위원들이 전원 참석하여 투표할 경우, 2010년 동계올림픽 유치 결선 최종 2차 투표 시 평창이 확보 했었던 투표수와 동수인 53표만 획득하면 대망의 2014동계올림픽 개최도시로 당당히 선정되는 것이었다.
그런 중요한 포지션을 점유하면서 105명의 투표권자 IOC 위원들 사이에서 각종 내부 정보와 IOC 윤리규정을 적용 받지 않는 가운데, 가장 근접거리에서 동료 IOC 위원들의 동향과 표심을 읽고 중추적 역할을 수행해야 할 활동 가능한 대한민국 IOC 위원 수가 3명에서 그 당시 단 1명으로 줄어들었었다.
프랑스의 경우, Guy Drut IOC위원이 IOC위원 선임 전 3년 동안 모 업체의 가공의 직책수당조로 매월 3,000유로씩 받은 사실이 적발되어, 사회정화 차원에서 수십 명이 함께 기소되고, 결국 법정에서 집행유예 15개월, 벌금 5만 유로의 선고를 받은 바 있었다.
IOC 윤리위원회는 Drut위원에 대하여 IOC 위원직 자격정지를 IOC 집행위원회에 건의하였고 IOC 집행위원회는 2006년 5월말까지 시한부 자격정지조치를 취한 바 있었다.
Jacques Chirac 프랑스 대통령이 국익보호차원에서 국내 정치권 내부의 반대여론에도 불구하고 Drut IOC 위원에 대한 특별사면조치를 단행하자 IOC 집행위원회는 지난 6월 23일 Drut 프랑스 IOC 위원의 IOC 위원 직 복권을 결정하였다.
우리나라의 경우, 그토록 중요한 기존 IOC 위원 3명중 자진사퇴했거나 자격정지중인 IOC 위원이 2명이나 되다 보니, 2006년 당시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만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유일한 활동 가능 IOC 위원이었다.
우리나라도 이를 타산지석으로 삼고 2007년 과테말라 대첩을 염두에 두어 국익을 위한 모종의 특단 조치도 신중히 검토해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한 바 있었다.
당시 결선 후보 도시로 선정된 평창은 2006년 당시 마라톤 반환점을 막 돌았다.
그때부터는 한걸음 한걸음이 매우 중요하였다.
2006년 7월 10일까지 후보도시 관련서류 서명 후 제출 및 미화 50만불의 부담금을 IOC에 납부하고, 9월 4일~6일 스위스, 로잔 개최 IOC 후보 도시 워크숍 참가 후, 2007년 1월 10일까지 17개 분야 250항목을 총 집대성한 유치신청파일(Bid-File)을 IOC에 제출하고 나면, IOC는 전문가 그룹으로 하여금 이를 검토케 하는 동시에, IOC 평가위원회를 구성하여 2007년 2월~3월 중 IOC 조사 평가단이 후보도시 별 3박 4일 일정의 현지 정밀 실사가 이루어진 바 있다.
2007년 5월~6월 중 IOC 평가위원회가 현지실사에 따른 후보도시 별 현지실사평가 최종보고서를 작성하여 IOC 위원들에게 배포하고 나면, 105명의 투표권자들인 IOC 위원들이 2007년 7월 4일 제119차 IOC 총회 첫날 후보도시 별 최종 설명회(Presentation)를 경청하고, 곧바로 투표에 돌입하게 되고 당일 오후 7시 그 결과가 전 세계에 발표되기로 사전에 Roadmap이 발표되었다
투표는 뚜껑을 열 때까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피와 땀과 노력과 정성과 성원이 그 성공의 열쇠이기 때문이다.
유치위원회를 중심으로 KOC, 정부, 국회, 기업, 국민 모두가 밀어주고 용기를 북돋워 주어 혼연일체로 끝까지 올인하는 방법이 평창2014유치 성공의 첩경인 것은 불문가지였다.
요행이나 우연은 결코 꿈을 이루어 내지 못하며 당시 국제 정세와 동향 및 스포츠외교관 활용 유치 활동 인사 배치에 적절한 전략 실행에 착오가 있었던 평창2014유치는 결국 막강한 자금력과 무지막지한 국제 정치적 전술을 구사한 러시아의 소치2014에 그만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올림픽 유치경쟁은 총성 없는 전쟁인 것이다.
2032년 서울-평양 올림픽유치 과정은 이전 유치 과정과 획기적으로 달라졌지만 전략 수립과 실행에는 반드시 유 경험 스포츠외교베테랑의 포진이 유치 성공의 핵심 관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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