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운용 전 IOC부위원장이 만난 장웅 북한 IOC위원은 남북스포츠교류의 징검다리 역할 (“김운용이 만난 거인들”)]
북한 최고의 스포츠외교관인 장웅 북한 IOC위원과 필자는 국제스포츠계 공식석상에서 김운용 전 IOC부위원장의 국내사법문제로 국제스포츠계에서 활동이 정지된 2004년부터 필자는 김운용 IOC부위원장의 뒤를 이어 북한의 장웅 IOC위원 겸 국제태권도연맹(ITF)총재)와 가장 긴밀하고 각별한 관계를 유지해 왔습니다.
(Athens2004올림픽 당시 IOC본부호텔인 아테네 힐튼호텔 및 2007년 과테말라 IOC총회 당시 장웅 IOC위원과 함께)
그는 평창동계올림픽유치활동에서도 “피는 물보다 진하다”라고 이야기 하면서 보이지 않는 자문과 협조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남북 스포츠 교류 ‘징검다리’ 역할]
지난 10년 동안에 남북관계는 많은 일이 있었다. 3년간의 민족상잔을 겪고 50년 만에 남북화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특히 분단 이후 처음으로 남북올림픽 선수단이 시드니올림픽에서 ‘KOREA’라는 팻말을 들고 같은 유니폼을 입고 동시입장을 하며 세계의 갈채를 받은 지도 벌써 10년이 지났다. 그 동안에 북한은 핵개발을 해서 6자회담이 시작되더니 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포격사태까지 벌어졌다. 남북한 선수단이 50년간의 적대행위를 끝내고 미·중의 핑퐁외교를 연상시키며 국제스포츠 사회에서 국제 룰에 따라 경쟁과 협력의 길을 가던 일도 역사가 되어버렸다. 그 과정에 중간에 서서 북한의 체육을 국제화하고, 남북의 다리 역할을 한 사람이 장웅 IOC 위원이다.
북한에는 권력을 가지고 있든가, 정치적으로 유명한 사람이 많다. 그러나 장 위원은 그렇지 않으면서도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낯익은 사람이다. 많은 한국 체육인들이 만나고 싶어 하는 ‘북한 스포츠의 얼굴’인 것이다.
장웅은 1938년 평양에서 태어나 평양체육교육대학을 나왔다. 한국동란이 끝난 1956년부터 10년간 군복무를 마쳤고 1970년에서 1974년까지는 체육전문학교에서 농구 강의도 했다. 큰 키가 말해주듯이 원래 농구 선수다. 그의 북한 스포츠계 등장은 1980년에 북한체육위원회 부서기장, 1985년에 북한체육위원회 서기장이 되면서부터다. 가장 뚜렷하게 외부 세계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90~1991년 사이 일본 지바에서 열린 세계탁구선수권대회와 포르투갈에서 있었던 세계청소년축구대회 남북단일팀 구성을 위한 남북체육회담에서였다. 남북단일팀은 지바 탁구대회에서 한반도기를 내걸고 세계를 제패했다. 그가 한 말 중에 “북경아시안게임 등 여러 목적을 위해 남북체육 대표들끼리 회담에서 합의 본 것이 20번도 더 되는데 그때마다 상부에서 정치적 이유로 부결되었다. 체육인들끼리 아무리 해도 소용없다”는 대목이 기억에 남는다.
1994년 9월 필자가 파리 IOC총회에서 태권도를 올림픽정식종목으로 넣기 위해 애를 쓰고 있을 때 현장에는 태권도를 방해하기 위해 북한 공작원, 가라테 연맹 관계자(Delcoart 회장 등), ITF(국제태권도연맹) 관계자 등 우락부락한 사람들이 몰려다니고 있었다. 그때 장웅 북한 올림픽위원회 사무총장이 나타나자 우리측 인사가 항의를 했다 한다. 그랬더니 장웅은 “그런 게 아니다”라며 부드럽게 말하고, 딴말을 안 했다 한다. 다른 사람들과는 달랐던 것이다.
2000년 들어 남북정상회담이 열리고 태양정책(햇볕정책)과 더불어 남북화해 무드가 한창 일어날 때 리우데자네이루에서 IOC 집행위원회가 열렸다. 남북 단일팀을 구성하는 건 선수선발 등 복잡한 문제 때문에 할 수 없었다. 반면 동시입장은 독일의 예도 있고 경기는 따로따로 하니 선수권익에도 별문제 없는 듯 생각되어 필자가 사마란치한테 제의했다. 사마란치는 원래 정치적 센스가 있는 사람이고 IOC가 평화공존을 외치는 단체라 대찬성으로 추진하기로 했다. 곧 집행위원의 동의를 얻어 남북한 국가원수에게 제안서를 보냈다.
남북정상회담 때 평양에서 김정일 위원장에게 제안 사실을 꺼내도 반응이 없었고 장웅도 아무 말 못했다. 각계 대표회의에서도 거론했지만 아무 말 없었다. 후일 장웅은 나에게 “남북회담 때 김대중 대통령이 김정일 위원장에게 직접 말했으면 김 선생(필자)이 고생을 덜 했을 터인데 괜히 고생했다”고 실토한 적이 있다.
계속 IOC와 남북간에 교신이 있었지만 늘 그렇듯이 북에서는 회신이 없었다. 그런데 시드니에서 장웅을 대표로 하는 북한대표단과 IOC 위원장, 필자가 교섭을 시작하게 됐다. 공항에 내리면서 장웅 위원이 가능성을 비추기도 해서 사실 좀 안심하기도 했다. 하루면 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국호 문제는 코리아(KOREA)로 귀결되었고, 국기는 한반도기로 합의를 보았다. 한반도기는 이미 지바 세계탁구대회 단일팀 구성 때 써 본 일이 있었다. 유니폼은 우리가 제공하고, IOC가 4만 달러의 비용을 책임졌다. 문제는 양쪽 선수의 수였다. 체면 상 반반이 제일 좋은데 우리는 참가선수가 300여 명인 반면 북한은 실제 65명밖에 안 되었다. 외형 상 우리가 150명씩 주장하다 안 되었고 결국 100명씩도 안되어 장웅이 평양에 전화연락을 해 IOC가 20명을 IOC비용과 비자(VISA) 조치 등을 해서 중국을 경유해 추가로 북한에서 초청하여 90명씩으로 하기로 하고 급진전, 합의를 보았다. 물론 경기는 자기 국기를 쓰고 별도로 참가, 서로 응원하기로 했다. 처음으로 상호응원, 상호방문 등을 하였다. 개회식에서는 전 세계가 격려하고 경기장 10만 관중과 귀빈들이 기립박수를 하는 가운데 남북이 동시입장을 하였다. IOC제의에 따라 상징적으로 장웅 위원과 필자도 함께 행진했다. 두 IOC 위원이 선두에서 함께 들어오라는 것이었다. 나는 행진만 하고 빠져 나왔다.
< 필자와 장웅 IOC 위원이 2003년 대구유니버시아드 대회 중 WTF와 ITF 협력각서에 서명하고 있다.>
시드니에서 필자가 주최하는 리셉션에도 처음으로 북한 임원진이 참석했고 서울에서도 안상영, 유종근, 최재승, 이건희 등 많은 손님들이 참석했다.
개회식 동시입장이 끝난 수일 후에 북한선수단이 체육협력을 위해 100만 달러를 지원 요청 해왔다. 당시 이건희 회장은 “돈 안주고 협력이 된 최초의 케이스로 3억 달러 가치는 있다”고 할 정도였다. 갑자기 자원이 없어 격려금, 판공비, IOC지원금 등을 끌어 모아 시드니올림픽 폐회식 전에 50만 달러를 지원해 주었고 나머지 50만 달러는 후에 지원해 주기로 약속했다. 장웅의 요청에 의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체육위원회 지원금이라고 써주었다. 서울에 와서 청와대에서 김대중 대통령 내외가 한국선수단을 위해 뜰에서 환영회를 베풀어 주었다. “이번에는 남북이 동시입장을 이룩했지만 2004년 아테네올림픽에서는 시간도 있고 하니 한발 나아가서 단일팀을 구성하기로 남북이 의견을 모았다. 그런데 남북의 경기력이 워낙 차이가 나서 북한 경기력을 비슷하게 끌어 올려야 하는데 지원이 필요할 것”이라고 했더니 김대중 대통령이 “체육회장이 도와주시오”라고 했다. 통일부에 이야기를 했더니 “스폰서 잡으세요”라고 했다. 그때 여기저기서 끌어 모아서 지원한 것이 나중에 모두 국가의 허가 없이 했다 하여 횡령으로 몰렸다.
그 후 한국의 태권도 시범단을 북한으로 보냈고 북한시범단을 서울로 오게 했다. 모두 장웅 위원의 협조 덕분이었다. 필자가 자의반 타의반으로 WTF를 떠난 후에는 아무리 WTF가 요청해도 남북교류는 성사가 안 되었다 한다. 1981년에 있은 IOC 지시대로 WTF와 ITF의 통합문제가 늘 현안이었다. 장웅은 ITF 창설자 최홍희 총재가 2002년 사망하자 뒤를 이어 비엔나(Vienna)에 있는 ITF 태권도의 총재가 됐다.
(2002년 10월24일 북측 태권도시범단 서울공연 당시 워커힐호텔에서 환영 리셉션 후)
그러나 세력도 세력이지만 WTF는 올림픽종목에 들어가 있고 ITF는 그렇지 못한 상태라 동등하게 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IOC는 모든 사람이 스포츠를 즐길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어 양측이 만나서 조금씩 기술문제부터 해결해 나가기로 잠정 합의를 하였다. 그 일환으로 내가 회장으로 있는 국제경기연맹(GAISF)에도 무도위원회를 만들어 ITF가 매년 참석하게 했다. 장웅 위원을 GAISF 무도위원장으로 위촉하기도 했다. 그런데 내가 물러난 후 네덜란드의 장사꾼인 베르브루겐 GAISF 회장 대리(사이클연맹 회장)가 장 위원을 빼버렸다.
WTF와 ITF의 통합문제는 아직도 현안이다. 한 종목에 국제연맹이 두 개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두 개 있던 것이 하나로 통합한 것은 야구와 배드민턴이 있다. 그 두 종목은 통합 후에 올림픽에 들어갔고 태권도는 내가 IOC 부위원장이었기 때문에 기회를 놓치지 않고 통합 전에 먼저 올림픽에 넣은 것이다. 장웅 위원은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2003년 대구유니버시아드 대회에도 참석했고 마지막으로 온 것은 강원도 초청으로 2007년에 춘천, 서울을 방문했을 때였다. 연락이 와서 신라호텔에서 식사를 같이했다.
2004년 필자가 말도 안 되는 평창동계올림픽 방해 모함으로 정치적 테러를 당했을 때 장웅 위원이 영수증이라고 서신을 보내왔다. ‘자기들은 영수증 쓰지도 않고 액수도 안 쓰고 도장도 안 갖고 다니지만 민족적 차원에서 도움을 받았고, 감사하다’는 내용의 편지였다. 자기 편지가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평창동계올림픽 유치를 시작할 때 김진선 당시 강원도지사가 장웅 위원을 만나게 해달라고 하여 주선해 주기도 했다. 초창기에 백지상태였던 강원도에 무척 많은 IOC 위원을 소개해 준 생각이 난다. 인천아시안게임 유치를 위해서 많은 협조를 해주었고, 광주유니버시아드 유치 때는 광주(시장 박광태)가 한반도 평화통일에 이바지한다는 슬로건에 맞춰 북한 대학생의 참가를 희망한다고 그 뜻을 전했더니 흔쾌히 동의해 주기도 했다.
시드니올림픽 개·폐회식 동시입장을 시작으로 상호 지원, 교류, 상호 응원 공동 훈련 등 남북 체육 교류는 세계의 관심 속에 발전했다. 그런데 2008년 베이징올림픽 때는 서로 눈도 안 마주치고 말도 안 하는 처지가 되었다. 결국 민족화합에 있어 스포츠가 앞설 수는 없고, 스포츠는 정치의 영향 하에 있는 것일까?
2001년 이금홍, 윤강로, 최재승과 평양에 갔을 때는 모란봉 초대소에 유숙했고 필자는 덩샤오핑이 묵었다는 방에 들었다. 남북체육교류, 태권도 통합문제 등 기탄 없이 토의했고 덕분에 태권도 도장, 체육선수촌도 둘러보았다.
(평양모란봉초대소 뒤편 을밀대에서 좌로부터: 이금홍 WtF사무총장, 김운용 IOC부위원장 겸 WTF총재, 최재승 국회문광위원장 및 필자/하단 우편 사진은 장웅 북한 IOC위원 등 북한체육계대표와 김운용-최재승-필자와의 체육관련 협력 회동 장면)
2002년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 때도 동시입장을 하기로 로게 IOC 위원장 및 장웅과 필자가 합의를 보았는데 북한선수가 1명밖에 출전 자격을 못 따는 바람에 무산됐다.
모스크바 IOC총회 때 있었던 위원장 선거 때도 장웅 위원은 필자를 열심히 지원해 주었고 이번에는 아시아인이 되어야 하고, 또 되는 줄 알았는데 사마란치의 철저한 방해 공작으로 지지표가 급속히 날아가는 것을 보고 안타까웠다고 했다. 장웅은 소신대로 국제스포츠를 통해 더 좋은, 더 평화로운, 더 우호적인 세계를 꿈꾸며 달리고 있는 북한 체육의 살아있는 거인이다.
전 IOC 수석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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