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체육 및 정치계의 거물로 대한체육회장을 역임한 故 김택수 제4대 한국 IOC위원에 대한 故 김운용 前 IOC부위원장의 회고담]
필자가 1982년 대한체육회/대한올림픽위원회(KOC)특채 5급으로 한국 체육계에 입문 한 이후 첫 국제업무가 故 김택수 IOC위원에 대하여 당시 Samaranch IOC위원장이 방한하여 올림픽훈장추서식 행사에 따른 정주영KOC위원장 통역과 IOC훈장추서식 불어 사회 및 통역이었습니다.
이 번 주는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한 가지 전할 게 있다. 지난 9월 26일자(지령 958호)에 김동길 교수를 이 코너에 소개했다. 그런데 얼마 전 김 교수로부터 전화가 왔다. “글을 잘 써줘 고맙다” “역사와 후학들을 위해서라도 이런 글을 남기는 게 큰 의미가 있다”는 등 감사인사와 격려를 전해왔다. 그리고 한 가지. 필자도 언급했고, 또 많은 자료에도 그렇게 나와 있는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렀다’는 부문에 대해서는 사실이 아니다, 아무 관계 없다고 설명했다. 가능하다면 <일요신문> 등 언론이나 역사학자들이 이 부분을 올바르게 재조명했으면 한다.
금주의 인물은 김택수 회장이다. 김 회장은 한일합섬의 김한수 회장의 계씨(남동생)로 경남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한 경남 김해 출신의 체육행정가이며 정치가이다. 처음 만난 것은 5·16 군사정부 시절 내각수반실에서 근무할 때였다. 김택수라는 젊은 청년실업가가 김현철 내각수반을 만나러 한두 번 들르곤 했다. 무슨 일로 방문했는지는 몰랐고 후에 생각하니 창당을 준비하고 있는 공화당에 다리를 놓기 위해 찾아다닌 것 같다. 이때 군정이 민정으로 넘어가기 전 마지막 내각수반으로서 김현철 수반은 군 출신이 아니지만 발언권이 있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이때 내각수반실의 현역장교는 필자 한 명이었다. 이후 필자는 주미대사관으로 전임이 되어 못 만났는데 그는 제3공화국 정부가 들어서면서 국회의원이 되어 중용되기 시작한 것을 보았다.
그 후 김종필 공화당 의장이 미주리 주 웨스트민스터대학(처칠 영국 수상이 ‘철의 장막’ 연설을 한 곳)에 명예박사 학위를 받으러 왔을 때 김택수 의원이 동행해 만났다. 그 자리에는 밴플리트(Van Fleet) 장군, 데마르코(Demarco) 한미재단 이사장, 머피(Murphy) 하원상공위원장 등도 뉴욕에서 내려왔다.
김택수는 6, 7대 국회의원을 지냈고 7대 때는 공화당 원내총무를 지냈다. 이때 소위 국회별관에서 야당을 빼놓고 장소를 기습적으로 옮겨 3선 개헌을 통과시킨 것으로 유명해졌다. 3선 개헌은 김종필 계열도 반대한 것을 박정희 대통령이 김종필을 직접 설득하고, 이후락이 김형욱과 함께 활약하며 관철시켰다.
이미 통과시킨 상태에서 야당이 아무리 야단을 쳐도 소용이 없는 노릇이었다. 김택수 총무는 일시에 거물이 되었다. 그 직후 청운동의 삼청각에서 모임이 있다고 박종규 실장이 가자고 해서 갔는데 장경순 부의장, 김현옥 시장, 최치환 의원 그리고 김택수 원내총무가 참석했다. 김택수 총무를 위한 한숨을 돌리는 자리였다. 김택수가 한참 있다가 가고 난 직후에 박종규가 최치환을 때릴 것처럼 공격했다. 그 이유는 최치환이 이후락 실장에게 박종규가 부패했다고 일러바쳤다는 것이었다. 겨우 장경순 부의장과 필자가 박종규를 뜯어 말리고 최치환을 피신시켰다.
그 후 김택수는 8대 국회에는 안 들어가고 대한복싱연맹 회장으로 재임했다. 신당동 집을 너무 크게 지었다고 박정희 대통령 눈 밖에 나서 공천을 못 받았다 했다. 그때는 혹 박 대통령이 헬리콥터로 서울을 비행하다가 청기와를 얹은 큰 집을 발견하거나, 에스컬레이터를 집안에 설치했다는 보고가 있다든가, 재벌이라도 어마어마한 묘지를 조성한 사람은 있으면 모조리 빛을 보지 못했다.
김택수는 고등학교 시절의 축구선수 생활이 인연이 되어 1961년 35세에 경남체육회 회장을 맡아 체육행정에 참여하기 시작했고 66년부터 73년까지 대한복싱연맹 회장을 역임했다. 66년에는 아시아 아마복싱연맹회장 겸 국제아마복싱연맹 부회장(각 대륙별로 2명씩)에 선출되었고 1971년 11월에 김용우 회장(전 국방장관)의 뒤를 이어 대한체육회 회장 겸 대한올림픽위원회(KOC) 위원장에 선출되어 79년 2월까지 역임했다.
필자가 그를 다시 만난 것은 1971년 2월에 필자가 대한태권도협회 회장이 되었을 때였다. 당시 김택수는 복싱연맹 회장이었다. 이때 대한체육회는 1년 예산이 국고보조 1억 원으로 운영될 때로 경기단체 회장들이 파워가 있어 모금을 하든지, 아니면 자기 돈을 내놓든지 해서 경기단체를 운영하곤 했다.
1972년 12월 9일 대한태권도협회 중앙도장(지금의 국기원) 준공식에는 김택수 대한체육회장이 김종필 총리와 함께 참석하여 축하해 주었고, 본격적인 관계는 1974년에 필자가 체육회 부회장 겸 KOC 부위원장 겸 명예총무에 부임하면서 함께 일하게 되면서 시작됐다. 국제관계는 필자에게 맡긴 셈이다.
김택수 회장은 정치권력을 휘두르던 정치 거물이라 그런지 체육회장 자리가 마땅치 않았던 것 같다. 민관식 문교부 장관과는 견원지간이어서 수시로 서로를 무시했다. 민관식 장관은 자신에게서 촌지라도 받은 사람은 자기 수하처럼 생각하는 나쁜 버릇이 있는 자라고 험담하기도 했다.
김택수 체육회장은 1976년 여름 몬트리올 올림픽에 갔을 때도 김영주 주 캐나다 대사와 충돌했다. 김영주 대사는 필자가 외무장관 비서관 때 기획실장이었다. 이때 몬트리올 지역에는 교포도 별로 없어 응원단도 없었다. 여자배구경기 때는 필자가 태권도 사범을 10명씩 데리고 가서 응원했다. 기죽지 말라는 배려였다.
김택수 회장은 국제적으로는 한국이 특별히 국제대회가 있는 것도 아니고 1년 예산 1억 원 가지고 선수촌까지 움직여야 하니 한계가 있었다. 골격만 서 있는 선수촌은 지금과는 달랐고 대한체육회는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에서 메달 따는 것이 급선무였다. 할 수 없이 금메달 따면 사재 1억 원을 주겠다고 공약을 했는데 효력을 보았다.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양정모가 1948년 KOC의 런던올림픽 참가 이후 28년 만에 첫 금메달을 딴 것이다. 이때 일본선수단은 200명 한국선수단 60명, 북한선수단 40명이었는데 북한도 사격에서 금을 땄고 “적을 조준하듯이”라는 말이 문제가 됐다.
이때 스포츠외교는 엄두도 못 내고 양정모에 이어 여자배구팀(조혜정, 유경화, 유정혜, 변경자, 백명선, 윤영내)이 구기사상 최초의 메달(동)을 따냈고 유도 무제한급에서도 조재기가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양정모에게 준 1억 원은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무척 큰돈이었다.
1974년 박종규 사격회장이 근신 중이라 박 회장의 간청으로 대신 체육회 부회장인 필자(WTF 총재)가 가서 멕시코의 마리오 바스케스 라냐(Mario Vazquez Rana)와 대결하여 표결에서 62대40으로 이겨 42회 세계사격선수권 대회를 유치해왔다. 이때 같이 유치해 온 세계역도선수권대회는 박종규가 청와대에 로비를 해서 두 개를 할 수 없다고 취소시켰고 사격대회에 그때 돈 10억을 보조받아 성공시켰는데 김택수 회장은 필자한테 부회장이 사격대회를 유치해 온 것이 잘했는지 모르겠다고 푸념하기도 했다.
1977년 이원경과 둘이서 아이보리코스트(Ivory Coast)의 아비장(Abidjan)에서 열린 NOC총회에 갔다오니 장기영 IOC 위원이 사망했다. 북아현동 댁으로 조문을 갔는데 곧 후임 IOC 위원 추천을 해야 했다. 그때는 우리나라 스포츠가 국제활동이 없었다. IOC 위원이 무엇을 하는지도 모를 때였다. 한번은 김종필 의장이 말하기를 김택수가 와서 ‘자기가 IOC 위원이 됐는데 1년에 한 번 회의에 간다’고 하는데 역할이 무엇이냐 물어본 일도 있었다. 청와대에서 문교부를 통해 지시가 와서 필자가 선임부회장이므로 KOC 위원총회를 소집하여 결의를 하고 IOC에 추천했다. 그렇게 김택수는 1977년 6월 16일 장기영의 뒤를 이어 IOC 위원이 되었다. 그 나름대로 선수육성과 스포츠외교에도 관심을 가져 1973년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하계유니버시아드 대회에는 직접 선수단을 이끌고 참가하여 공산권과 간접적으로나마 교류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는 1979년에는 다시 국회에 진출했고 박 대통령 서거를 맞이했다. 곧이어 공화당 총재에 김종필이 선출되고 김종필을 최고의 정치가로 따르던 김택수는 국회헌법개정심의 특별위원장을 지내면서 3김에 의한 대통령 직선을 겨냥해 당내 화합과 결속을 다지면서 김해의 지역발전에 노력했다. 그러나 12·12 신군부의 등장으로 칩거생활에 들어갔고 88서울올림픽 유치가 시작되자 다시 IOC 위원으로서 표면에 나왔으나 국제적 한계를 안고 있었다. 남덕우 국무총리가 주재하는 국민체육심의 회의에서 박종규가 강력한 추진을 주장할 때 필자 외에는 모두가 경제적 이유로 반대 의견을 냈다. “(하다가) 안 되면 모두 그만두자”고 박종규가 제안하자 당시 김택수 IOC 위원은 “당신이나 그만둬, 나는 안 그만둬”라며 지금 상황으로는 자기 한 표밖에 안 나올 것이라고 말한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1981년 바덴바덴(Baden Baden)에서 김택수는 IOC 위원의 자격으로 필자와 함께 국제회의 대표로 참가하여 나름대로 활약했다. 서울올림픽 유치가 성공한 후 조직위원회가 구성되고 준비가 시작되자 조직위원회 집행위원으로서 IOC 연락을 맡고 서울방문 IOC 위원들을 접대했는데 꼭 종로에 있는 장원으로 부부를 초대했다. 정통 한식은 장원이 가장 좋다는 것이었다. 김택수는 비록 어학이 안 돼 통역을 대동했지만 나름대로 국제관계를 유지할 줄 아는 멋쟁이였다. 스타일이 있었다.
김택수 IOC 위원은 LA 올림픽을 앞두고 1983년 7월 17일 암으로 별세했다. 박 대통령의 3선 개헌을 성사시킨 거물 정치인인 그는 한국체육이 걸음마를 할 때 체육행정을 맡아 국제무대에 발을 내딛고, 공산권과의 스포츠외교도 첫 단추를 끼우고, 또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 그리고 단체종목 올림픽메달도 따게 만든 체육인이었다.
[한국 역대 IOC위원 중 제3대 백상 장기영 IOC위원 겸 한국일보창간사장에 대한 故 김운용 IOC부위원장의 회고담]
故 김운용 IOC부위원장은 한국이 낳은 최고의 스포츠외교관 이었습니다.
그분의 스포츠외교활동을 30여년 간 지켜보고 중요 계기 마다 그분을 돕기도 하면서 그분의 내공을 이어 받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KOC명예총무-KOC위원장-대한체육회장-대한태권도협회장-국기원장-세계태권도연맹 창설 총재-IOC위원-IOC부위원장-ARISF회장-GAISF회장-World Games창설회장-IOC TV분과위원장-1999강원 동계아시안게임 조직위원장-2002부산아시안게임 조직위원장 등 국내스포츠기구(대한체육회-KOC-대한태권도협회-국기원)수장-국제연맹(WTF창설총재) 겸 국제스포츠연맹총연합회(ARISF-GAISF)회장 등 거의 모든 직책을 섭렵한 한국의 스포츠외교위상을 드높인 불세출의 스포츠 외교관이었습니다.
[前 IOC 수석부위원장(2010.10.26)장 <언론-체육-정치 1인 3역의 뜀박질>/장기영 제3대 한국 IOC위원 편]
장기영은 벌써 33년 전인 1977년에 사망한 까닭에 최근에는 기억하는 사람이 많이 줄어든 것 같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근대화 과정에 여러 분야에서 선각자로 이름 석 자를 또렷이 남긴 거물이다. 그는 IOC 위원으로서도 필자의 직접 선배였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도 인연이 많았다.
장기영은 1916년 서울 출신으로 1934년 선린상업을 졸업하고 조선은행에 들어갔다. 선린상업은 사립이지만 일본인-한국인이 섞여서 공부하는 학교였고, 또 야구명문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광복 후 1950년 한국은행 부총재로 승진하였으나 1952년에 사임하고 언론계에 투신, 조선일보 사장으로 취임했다. 뛰어난 수완으로 조선일보를 재건한 뒤 1954년 태양신문을 인수, 한국일보와 코리아타임즈를 창간하여 사장으로 취임했다. 그래서 그가 거쳐 간 많은 의미 있는 자리에도 불구하고 한국일보 사장으로 기억되곤 한다.
장기영 한국일보 사장은 참 앞서가는 사람이었다. 예컨대 1957년 광교 근방에 TV방송국을 열기도 했다. 아쉽게도 화재로 없어졌는데 KBS가 5·16 군사혁명정부가 들어선 후에 남산에 개국했으니 미래를 내다보는 장기영의 식견이 얼마나 높았는지를 쉽게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장기영은 한국일보에 이어 1960년에 서울경제신문과 소년한국일보를, 그리고 1969년에는 일간스포츠를 창간했다. 모두 최초로 한국신문사에 한 획을 그은 일들이었다.
특히 일간스포츠 창간 때는 스포츠에 관심이 많은 필자가 청와대에 있었던 까닭에 필자에게 도움 요청이 있었고, 개인적으로 음으로 양으로 많이 지원했다. 이때 계창호가 수고를 많이 한 기억이 난다. 1973년 5월 제1회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 때는 일간스포츠의 이태영 기자(그 후 중앙일보 부국장)가 담당하여 일간스포츠 1~2면을 독점, 선수 사진까지 모두 실은 일이 있었다. 이때는 축구의 장덕진 회장이 막 달릴 때라 태권도는 왜 못하느냐는 식으로 의욕적으로 해내곤 했다. 당시 이태영 기자는 밤을 새우며 기사를 썼다.
유난히 한국일보에는 필자의 중학교, 대학교 동문들이 많이 있었다. 이태영 기자도 여권 발급에 부친(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유명한 이길용 기자)문제로 하자가 있다고 해 필자가 보증을 서서 해결해 준 바 있다.
제일 처음 떠오르는 일은 5·16 군사혁명 기간 중 독일 뮌헨의 서커스단을 서울로 초청하는 것이었다. 이때는 무엇이든 잘 안 될 때인데 공보부가 도와주어 서울에서 공연을 할 수 있었고, 한국일보는 곧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를 만들어 한국의 여성미를 세계에 알리는 일에도 나섰다.
미스코리아는 얼굴만 예뻐서도 안 되고, 체격, 국제성, 장기, 어학 등 종합적인 미(美)를 갖추어야 세계무대에서 경쟁할 수 있다. 당시 어려운 국내 상황에도 불구하고 미스코리아들은 미스 유니버스, 미스 인터내셔널, 미스 월드 등의 국제대회에 나가 5위 이내에 입상하는 사람도 나왔다. 미스코리아들의 국제 활동과 인연이 생긴 필자도 1993년부터 1995년까지 미스코리아 선발대회의 운영위원장을 지냈다. 운영위원장이란 심사위원장과 심사위원을 선정하고 축사도 하고 한국일보 계획대로 지원해주는 일이다. 필자가 맡은 것은 미스코리아 선발대회에 문제가 생겨 이미지 쇄신을 위해 전격적으로 위촉된 것이었다.
장기영은 1961년 대한축구협회장과 대한체육회 부회장이 되었으며 1966년 대한올림픽위원장을 맡았다. 1967년에는 IOC 위원이 되었는데 이때 사마란치도 같이 IOC 위원이 되었다. 즉 둘은 IOC 동기였던 셈이다. 한국일보와 코리아타임즈는 서울올림픽과 선수촌의 공식 신문을 발행했고 사마란치는 올림픽이 끝난 후 장강재 회장을 한국일보로 예방하고 사의를 표했다. 그리고 한국일보, 일간스포츠, 코리아타임즈에서 부장급 1명씩(선재훈, 김영환, 김재설)을 IOC비용으로 로잔(Lausanne)의 IOC로 초대하기도 했다. 장기적으로 올림픽운동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더 좋은 보도를 하기 위한 포석이기도 했다. 1990년에는 다시 장강재 회장, 정태연(코리아타임즈) 사장, 선재훈, 김영환(당시 파리 특파원)을 IOC로 초청했다.
(2024년 5월 현재 역대 한국 IOC위원 12명/제3대 한국 IOC위원이 백상 장기영 회장)
장기영 IOC 위원이 늘 KOC 행사에 와서 축사를 한 까닭에 김택수 위원장과 부위원장 겸 명예총무인 필자는 자주 만났다. IOC 위원은 원래 KOC(국가)를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IOC를 대표하는 것이다. 지금은 많이 달라져 IOC 위원에게 자기나라 권익 대변이 우선이 되어버렸지만 말이다. 심지어 한국은 올림픽 유치에 실패하면 희생양으로 삼기도 하니 할 말이 없을 정도다.
사마란치는 장기영 사망 후에도 동기생인 장기영 일가와는 인연을 올림픽을 통해 유지했다. 사마란치는 장기영 묘소에도 찾아갔는데 몇 년 후에 장강재 회장이 사망하자 다시 이 묘소를 찾기도 했다. 그리고 장재구, 장재국, 장재근 형제들과 장강재 회장 부인(문희)은 신라호텔에서 대접했고, 바르셀로나올림픽에 장재국 사장을 귀빈으로 초청하기로 했다. 또 88올림픽이 인연이 돼 코리아타임즈의 정태연 사장을 IOC의 신문분과위원으로 위촉한 바도 있다. 늘 사마란치는 장강재같이 인품이 좋은 사람이 IOC 위원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장강재 회장은 사양했다. 툭하면 IOC 위원이 되겠다고 자가발전들을 하는 요즘과는 참 달랐다.
지금 로잔의 IOC박물관에는 어려운 가운데에도 100만 달러를 기부한 코리아타임즈, 한국일보 이름이 동판에 새겨져 현관벽에 부착돼 있는 걸 볼 수 있다. 그리고 장기영 IOC 위원의 흉상이 전시돼 있다. 100만 달러를 낸다고 해서 모두 흉상이 있는 것은 아닌데 장강재 회장의 효심을 사마란치가 받아들인 것이다. 사마란치가 로잔에 IOC박물관을 지을 때 필자에게 장강재 회장에게 기부를 부탁해 보라고 해서 롯데호텔에서 만나 상의를 했더니 쾌히 승낙했던 것이다. 장기영 위원의 흉상제작과 운반 등 실무는 정태연 사장이 처리했다.
장기영의 호는 백상이다. 체육을 중시했던 고인의 뜻을 따라 한국일보는 백상체육대상을 매년 수여하는데 필자도 축사하러 매년 갔고 이승엽 등 한국의 내로라하는 스타플레이어 대부분이 백상체육대상 수상자 출신이다. 또 백상예술대상도 있어 연예인들에게 영광을 주고 있다. 지금 백상예술대상은 어마어마한 갈라쇼(Gala Show)가 되었는데 백상체육대상은 그렇게 국가의 이름을 빛낸 선수들에게 큰 영광을 주고 있지 못하는 것 같다. 예술대상이 부럽기도 하고 체육대상의 미흡함이 아쉽기도 하다. 그래도 백상체육대상이 계속 이어져 고맙기만 하다. 필자도 88서울올림픽 후에 아호 윤곡(允谷)을 따서 ‘윤곡여성체육대상’을 매년 수여하고 있다.
1976년 인스부르크 동계올림픽에 참석하기 위해 필자는 KOC책임자로 뮌헨 공항에 도착하게 됐다. 그런데 알래스카의 강설로 비행기가 다섯 시간이나 지연돼 파리서 갈아탈 수밖에 없었고, 결국 뮌헨 도착은 밤 8시쯤이 됐다. 그런데 우리 태권도 사범들과 함께 장기영 IOC위원이 서서 기다리고 있어 놀랐다. 같이 가려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만큼 장기영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인간적이다. 이때 함께 2시간 정도 차를 타고 오스트리아의 인스부르크에 갔다. 호텔은 인스부르크와 티롤이 있었는데 하나는 IOC, 하나는 NOC호텔이었다. 필자를 호텔 조찬에 초대하기도 한 장기영은 매일 오징어를 입에 물고 다니기도 했다. 한식을 달라고 했는데 마침 주위에 한식당도 없었다. 그래서 태권도 사범인 이경명이 매일 아침은 한식을 준비해 드렸다.
곧이어 76년 여름에는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21회 하계올림픽이 있어 김택수 KOC 위원장과 필자는 한국선수단 60명을 끌고 몬트리올로 갔다. 한번은 IOC는 A, NOC는 B 카드가 귀빈석에 앉게 돼 있는데 장기영 위원과 김택수, 필자가 지정석에 앉고 박종규, 이낙선 등 경기단체 회장은 신분증 없이 대사관이 특석표를 사서 안내하는 바람에 자리가 좀 떨어졌다. 이에 박종규 회장이 화가 난 모양인지 IOC, KOC 놈들 운운하는 욕설이 들렸다. 그래서 필자가 “가서 이리 오도록 할까요”라고 하니 장 위원이 “우리도 통제 받는데 놓아 두시오” 하고 경기가 끝난 후 거기까지 올라가서 말없이 악수만 하고 떠났다. 그 당시 박종규는 안하무인이었다. 김택수 회장은 자기 아들한테나 앉아서 악수하지 아무한테나 그럴 수 있느냐고 나중에 화를 내기도 했다.
1977년 4월 이원경 KOC 부위원장과 함께 아이보리코스트에 있는 아비장에서 ANOC 총회가 킬라닌 IOC 위원장 주재로 있었다. 거기에 갔다 오니 장기영 위원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들려와 북아현동 사택으로 조문을 갔다.
장기영은 정치인, 언론인, 체육인, 문화인, 경제인으로 한국이 어려울 때 여러가지 역할을 했다. 장기영은 갔지만 그가 시작해 놓은 일은 여전히 역사로 굳건히 남아있다. 장기영은 1964년 정일권 내각의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으로 임명되어 3년 반 동안 산업의 근대화와 경제자립의 터전을 마련하는 데 힘을 썼다.
금리 현실화와 유리창 행정, 연탄의 흑백논쟁 등 숱한 일화를 남기면서 한국경제의 고도 성장에 기틀을 잡았다. 1966년 필자가 UN 대표부에 근무할 때 며칠 뉴욕을 방문해 경제활동을 하기도 했는데 이때도 외환 환율 걱정을 하며 수시로 서울에 연락하는 등 아주 바빴다.
그는 1964년 박정희 대통령의 방독과 1965년 방미, 그리고 66년 태국 등 아시아 제국 방문에도 수행, 경제외교에도 힘썼다. 한·일국교정상화를 위하여 막후에서 일하여 왔으며 한·일간 현안문제 타결을 위해 1969년 필자가 아직 청와대 있을 때 대통령 특사로 일본에 파견되었다. 같은 해 한·일 협력위원회를 창설, 창립총회 부의장도 되었다.
1971년 공화당 종로 지구당 위원장으로 선출된 후 1973년 9대 국회의원 선거에 당선되기도 했다. 또 한국일보를 통한 나무심기운동으로 새빨간 산이 오늘의 푸른 산이 되는 기틀 만들기에 이바지했다. 언젠가 언급한 박정희 대통령이 고속도로를 타고 귀경하다가 동그랗게 빨간 산 위에 서 있는 국기원을 보고 나무가 없다하자 한국일보는 5000그루를 심어주기도 했다. 지금 푸르른 국기원에는 장기영의 도움이 포함돼 있는 것이다.
그는 또한 10만 어린이 부모찾기 운동을 벌이는 등 민족분단의 서러움과 이산가족문제에도 비상한 관심을 쏟아왔는데 1972년 남북조절위원회 부위원장, 1973년 남북조절위원회 서울 측 공동위원장 대리로 취임, 남북 대화와 평화통일의 길을 여는 데도 앞장섰다.
장기영의 시절에는 한 사람이 한 두 가지 일만 하면 안 될 때였다. 장기영도 그 중 한 사람이다. 경제인, 정치가, 문화인, 체육인 그리고 언론인 어느 쪽으로 봐도 그는 한국 근대화를 이끈 대표적인 거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