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체육 및 정치계의 거물로 대한체육회장을 역임한 故 김택수 제4대 한국 IOC위원에 대한 故 김운용 前 IOC부위원장의 회고담]
필자가 1982년 대한체육회/대한올림픽위원회(KOC)특채 5급으로 한국 체육계에 입문 한 이후 첫 국제업무가 故 김택수 IOC위원에 대하여 당시 Samaranch IOC위원장이 방한하여 올림픽훈장추서식 행사에 따른 정주영KOC위원장 통역과 IOC훈장추서식 불어 사회 및 통역이었습니다.
이 번 주는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한 가지 전할 게 있다. 지난 9월 26일자(지령 958호)에 김동길 교수를 이 코너에 소개했다. 그런데 얼마 전 김 교수로부터 전화가 왔다. “글을 잘 써줘 고맙다” “역사와 후학들을 위해서라도 이런 글을 남기는 게 큰 의미가 있다”는 등 감사인사와 격려를 전해왔다. 그리고 한 가지. 필자도 언급했고, 또 많은 자료에도 그렇게 나와 있는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렀다’는 부문에 대해서는 사실이 아니다, 아무 관계 없다고 설명했다. 가능하다면 <일요신문> 등 언론이나 역사학자들이 이 부분을 올바르게 재조명했으면 한다.
금주의 인물은 김택수 회장이다. 김 회장은 한일합섬의 김한수 회장의 계씨(남동생)로 경남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한 경남 김해 출신의 체육행정가이며 정치가이다. 처음 만난 것은 5·16 군사정부 시절 내각수반실에서 근무할 때였다. 김택수라는 젊은 청년실업가가 김현철 내각수반을 만나러 한두 번 들르곤 했다. 무슨 일로 방문했는지는 몰랐고 후에 생각하니 창당을 준비하고 있는 공화당에 다리를 놓기 위해 찾아다닌 것 같다. 이때 군정이 민정으로 넘어가기 전 마지막 내각수반으로서 김현철 수반은 군 출신이 아니지만 발언권이 있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이때 내각수반실의 현역장교는 필자 한 명이었다. 이후 필자는 주미대사관으로 전임이 되어 못 만났는데 그는 제3공화국 정부가 들어서면서 국회의원이 되어 중용되기 시작한 것을 보았다.
그 후 김종필 공화당 의장이 미주리 주 웨스트민스터대학(처칠 영국 수상이 ‘철의 장막’ 연설을 한 곳)에 명예박사 학위를 받으러 왔을 때 김택수 의원이 동행해 만났다. 그 자리에는 밴플리트(Van Fleet) 장군, 데마르코(Demarco) 한미재단 이사장, 머피(Murphy) 하원상공위원장 등도 뉴욕에서 내려왔다.
김택수는 6, 7대 국회의원을 지냈고 7대 때는 공화당 원내총무를 지냈다. 이때 소위 국회별관에서 야당을 빼놓고 장소를 기습적으로 옮겨 3선 개헌을 통과시킨 것으로 유명해졌다. 3선 개헌은 김종필 계열도 반대한 것을 박정희 대통령이 김종필을 직접 설득하고, 이후락이 김형욱과 함께 활약하며 관철시켰다.
이미 통과시킨 상태에서 야당이 아무리 야단을 쳐도 소용이 없는 노릇이었다. 김택수 총무는 일시에 거물이 되었다. 그 직후 청운동의 삼청각에서 모임이 있다고 박종규 실장이 가자고 해서 갔는데 장경순 부의장, 김현옥 시장, 최치환 의원 그리고 김택수 원내총무가 참석했다. 김택수 총무를 위한 한숨을 돌리는 자리였다. 김택수가 한참 있다가 가고 난 직후에 박종규가 최치환을 때릴 것처럼 공격했다. 그 이유는 최치환이 이후락 실장에게 박종규가 부패했다고 일러바쳤다는 것이었다. 겨우 장경순 부의장과 필자가 박종규를 뜯어 말리고 최치환을 피신시켰다.
그 후 김택수는 8대 국회에는 안 들어가고 대한복싱연맹 회장으로 재임했다. 신당동 집을 너무 크게 지었다고 박정희 대통령 눈 밖에 나서 공천을 못 받았다 했다. 그때는 혹 박 대통령이 헬리콥터로 서울을 비행하다가 청기와를 얹은 큰 집을 발견하거나, 에스컬레이터를 집안에 설치했다는 보고가 있다든가, 재벌이라도 어마어마한 묘지를 조성한 사람은 있으면 모조리 빛을 보지 못했다.
김택수는 고등학교 시절의 축구선수 생활이 인연이 되어 1961년 35세에 경남체육회 회장을 맡아 체육행정에 참여하기 시작했고 66년부터 73년까지 대한복싱연맹 회장을 역임했다. 66년에는 아시아 아마복싱연맹회장 겸 국제아마복싱연맹 부회장(각 대륙별로 2명씩)에 선출되었고 1971년 11월에 김용우 회장(전 국방장관)의 뒤를 이어 대한체육회 회장 겸 대한올림픽위원회(KOC) 위원장에 선출되어 79년 2월까지 역임했다.
필자가 그를 다시 만난 것은 1971년 2월에 필자가 대한태권도협회 회장이 되었을 때였다. 당시 김택수는 복싱연맹 회장이었다. 이때 대한체육회는 1년 예산이 국고보조 1억 원으로 운영될 때로 경기단체 회장들이 파워가 있어 모금을 하든지, 아니면 자기 돈을 내놓든지 해서 경기단체를 운영하곤 했다.
1972년 12월 9일 대한태권도협회 중앙도장(지금의 국기원) 준공식에는 김택수 대한체육회장이 김종필 총리와 함께 참석하여 축하해 주었고, 본격적인 관계는 1974년에 필자가 체육회 부회장 겸 KOC 부위원장 겸 명예총무에 부임하면서 함께 일하게 되면서 시작됐다. 국제관계는 필자에게 맡긴 셈이다.
김택수 회장은 정치권력을 휘두르던 정치 거물이라 그런지 체육회장 자리가 마땅치 않았던 것 같다. 민관식 문교부 장관과는 견원지간이어서 수시로 서로를 무시했다. 민관식 장관은 자신에게서 촌지라도 받은 사람은 자기 수하처럼 생각하는 나쁜 버릇이 있는 자라고 험담하기도 했다.
김택수 체육회장은 1976년 여름 몬트리올 올림픽에 갔을 때도 김영주 주 캐나다 대사와 충돌했다. 김영주 대사는 필자가 외무장관 비서관 때 기획실장이었다. 이때 몬트리올 지역에는 교포도 별로 없어 응원단도 없었다. 여자배구경기 때는 필자가 태권도 사범을 10명씩 데리고 가서 응원했다. 기죽지 말라는 배려였다.
김택수 회장은 국제적으로는 한국이 특별히 국제대회가 있는 것도 아니고 1년 예산 1억 원 가지고 선수촌까지 움직여야 하니 한계가 있었다. 골격만 서 있는 선수촌은 지금과는 달랐고 대한체육회는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에서 메달 따는 것이 급선무였다. 할 수 없이 금메달 따면 사재 1억 원을 주겠다고 공약을 했는데 효력을 보았다.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양정모가 1948년 KOC의 런던올림픽 참가 이후 28년 만에 첫 금메달을 딴 것이다. 이때 일본선수단은 200명 한국선수단 60명, 북한선수단 40명이었는데 북한도 사격에서 금을 땄고 “적을 조준하듯이”라는 말이 문제가 됐다.
이때 스포츠외교는 엄두도 못 내고 양정모에 이어 여자배구팀(조혜정, 유경화, 유정혜, 변경자, 백명선, 윤영내)이 구기사상 최초의 메달(동)을 따냈고 유도 무제한급에서도 조재기가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양정모에게 준 1억 원은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무척 큰돈이었다.
1974년 박종규 사격회장이 근신 중이라 박 회장의 간청으로 대신 체육회 부회장인 필자(WTF 총재)가 가서 멕시코의 마리오 바스케스 라냐(Mario Vazquez Rana)와 대결하여 표결에서 62대40으로 이겨 42회 세계사격선수권 대회를 유치해왔다. 이때 같이 유치해 온 세계역도선수권대회는 박종규가 청와대에 로비를 해서 두 개를 할 수 없다고 취소시켰고 사격대회에 그때 돈 10억을 보조받아 성공시켰는데 김택수 회장은 필자한테 부회장이 사격대회를 유치해 온 것이 잘했는지 모르겠다고 푸념하기도 했다.
1977년 이원경과 둘이서 아이보리코스트(Ivory Coast)의 아비장(Abidjan)에서 열린 NOC총회에 갔다오니 장기영 IOC 위원이 사망했다. 북아현동 댁으로 조문을 갔는데 곧 후임 IOC 위원 추천을 해야 했다. 그때는 우리나라 스포츠가 국제활동이 없었다. IOC 위원이 무엇을 하는지도 모를 때였다. 한번은 김종필 의장이 말하기를 김택수가 와서 ‘자기가 IOC 위원이 됐는데 1년에 한 번 회의에 간다’고 하는데 역할이 무엇이냐 물어본 일도 있었다. 청와대에서 문교부를 통해 지시가 와서 필자가 선임부회장이므로 KOC 위원총회를 소집하여 결의를 하고 IOC에 추천했다. 그렇게 김택수는 1977년 6월 16일 장기영의 뒤를 이어 IOC 위원이 되었다. 그 나름대로 선수육성과 스포츠외교에도 관심을 가져 1973년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하계유니버시아드 대회에는 직접 선수단을 이끌고 참가하여 공산권과 간접적으로나마 교류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는 1979년에는 다시 국회에 진출했고 박 대통령 서거를 맞이했다. 곧이어 공화당 총재에 김종필이 선출되고 김종필을 최고의 정치가로 따르던 김택수는 국회헌법개정심의 특별위원장을 지내면서 3김에 의한 대통령 직선을 겨냥해 당내 화합과 결속을 다지면서 김해의 지역발전에 노력했다. 그러나 12·12 신군부의 등장으로 칩거생활에 들어갔고 88서울올림픽 유치가 시작되자 다시 IOC 위원으로서 표면에 나왔으나 국제적 한계를 안고 있었다. 남덕우 국무총리가 주재하는 국민체육심의 회의에서 박종규가 강력한 추진을 주장할 때 필자 외에는 모두가 경제적 이유로 반대 의견을 냈다. “(하다가) 안 되면 모두 그만두자”고 박종규가 제안하자 당시 김택수 IOC 위원은 “당신이나 그만둬, 나는 안 그만둬”라며 지금 상황으로는 자기 한 표밖에 안 나올 것이라고 말한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1981년 바덴바덴(Baden Baden)에서 김택수는 IOC 위원의 자격으로 필자와 함께 국제회의 대표로 참가하여 나름대로 활약했다. 서울올림픽 유치가 성공한 후 조직위원회가 구성되고 준비가 시작되자 조직위원회 집행위원으로서 IOC 연락을 맡고 서울방문 IOC 위원들을 접대했는데 꼭 종로에 있는 장원으로 부부를 초대했다. 정통 한식은 장원이 가장 좋다는 것이었다. 김택수는 비록 어학이 안 돼 통역을 대동했지만 나름대로 국제관계를 유지할 줄 아는 멋쟁이였다. 스타일이 있었다.
김택수 IOC 위원은 LA 올림픽을 앞두고 1983년 7월 17일 암으로 별세했다. 박 대통령의 3선 개헌을 성사시킨 거물 정치인인 그는 한국체육이 걸음마를 할 때 체육행정을 맡아 국제무대에 발을 내딛고, 공산권과의 스포츠외교도 첫 단추를 끼우고, 또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 그리고 단체종목 올림픽메달도 따게 만든 체육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