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역대 IOC위원 중 제3대 백상 장기영 IOC위원 겸 한국일보창간사장에 대한 故 김운용 IOC부위원장의 회고담]
故 김운용 IOC부위원장은 한국이 낳은 최고의 스포츠외교관 이었습니다.
그분의 스포츠외교활동을 30여년 간 지켜보고 중요 계기 마다 그분을 돕기도 하면서 그분의 내공을 이어 받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KOC명예총무-KOC위원장-대한체육회장-대한태권도협회장-국기원장-세계태권도연맹 창설 총재-IOC위원-IOC부위원장-ARISF회장-GAISF회장-World Games창설회장-IOC TV분과위원장-1999강원 동계아시안게임 조직위원장-2002부산아시안게임 조직위원장 등 국내스포츠기구(대한체육회-KOC-대한태권도협회-국기원)수장-국제연맹(WTF창설총재) 겸 국제스포츠연맹총연합회(ARISF-GAISF)회장 등 거의 모든 직책을 섭렵한 한국의 스포츠외교위상을 드높인 불세출의 스포츠 외교관이었습니다.
[前 IOC 수석부위원장(2010.10.26)장 <언론-체육-정치 1인 3역의 뜀박질>/장기영 제3대 한국 IOC위원 편]
장기영은 벌써 33년 전인 1977년에 사망한 까닭에 최근에는 기억하는 사람이 많이 줄어든 것 같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근대화 과정에 여러 분야에서 선각자로 이름 석 자를 또렷이 남긴 거물이다. 그는 IOC 위원으로서도 필자의 직접 선배였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도 인연이 많았다.
장기영은 1916년 서울 출신으로 1934년 선린상업을 졸업하고 조선은행에 들어갔다. 선린상업은 사립이지만 일본인-한국인이 섞여서 공부하는 학교였고, 또 야구명문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광복 후 1950년 한국은행 부총재로 승진하였으나 1952년에 사임하고 언론계에 투신, 조선일보 사장으로 취임했다. 뛰어난 수완으로 조선일보를 재건한 뒤 1954년 태양신문을 인수, 한국일보와 코리아타임즈를 창간하여 사장으로 취임했다. 그래서 그가 거쳐 간 많은 의미 있는 자리에도 불구하고 한국일보 사장으로 기억되곤 한다.
장기영 한국일보 사장은 참 앞서가는 사람이었다. 예컨대 1957년 광교 근방에 TV방송국을 열기도 했다. 아쉽게도 화재로 없어졌는데 KBS가 5·16 군사혁명정부가 들어선 후에 남산에 개국했으니 미래를 내다보는 장기영의 식견이 얼마나 높았는지를 쉽게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장기영은 한국일보에 이어 1960년에 서울경제신문과 소년한국일보를, 그리고 1969년에는 일간스포츠를 창간했다. 모두 최초로 한국신문사에 한 획을 그은 일들이었다.
특히 일간스포츠 창간 때는 스포츠에 관심이 많은 필자가 청와대에 있었던 까닭에 필자에게 도움 요청이 있었고, 개인적으로 음으로 양으로 많이 지원했다. 이때 계창호가 수고를 많이 한 기억이 난다. 1973년 5월 제1회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 때는 일간스포츠의 이태영 기자(그 후 중앙일보 부국장)가 담당하여 일간스포츠 1~2면을 독점, 선수 사진까지 모두 실은 일이 있었다. 이때는 축구의 장덕진 회장이 막 달릴 때라 태권도는 왜 못하느냐는 식으로 의욕적으로 해내곤 했다. 당시 이태영 기자는 밤을 새우며 기사를 썼다.
유난히 한국일보에는 필자의 중학교, 대학교 동문들이 많이 있었다. 이태영 기자도 여권 발급에 부친(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유명한 이길용 기자)문제로 하자가 있다고 해 필자가 보증을 서서 해결해 준 바 있다.
제일 처음 떠오르는 일은 5·16 군사혁명 기간 중 독일 뮌헨의 서커스단을 서울로 초청하는 것이었다. 이때는 무엇이든 잘 안 될 때인데 공보부가 도와주어 서울에서 공연을 할 수 있었고, 한국일보는 곧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를 만들어 한국의 여성미를 세계에 알리는 일에도 나섰다.
미스코리아는 얼굴만 예뻐서도 안 되고, 체격, 국제성, 장기, 어학 등 종합적인 미(美)를 갖추어야 세계무대에서 경쟁할 수 있다. 당시 어려운 국내 상황에도 불구하고 미스코리아들은 미스 유니버스, 미스 인터내셔널, 미스 월드 등의 국제대회에 나가 5위 이내에 입상하는 사람도 나왔다. 미스코리아들의 국제 활동과 인연이 생긴 필자도 1993년부터 1995년까지 미스코리아 선발대회의 운영위원장을 지냈다. 운영위원장이란 심사위원장과 심사위원을 선정하고 축사도 하고 한국일보 계획대로 지원해주는 일이다. 필자가 맡은 것은 미스코리아 선발대회에 문제가 생겨 이미지 쇄신을 위해 전격적으로 위촉된 것이었다.
장기영은 1961년 대한축구협회장과 대한체육회 부회장이 되었으며 1966년 대한올림픽위원장을 맡았다. 1967년에는 IOC 위원이 되었는데 이때 사마란치도 같이 IOC 위원이 되었다. 즉 둘은 IOC 동기였던 셈이다. 한국일보와 코리아타임즈는 서울올림픽과 선수촌의 공식 신문을 발행했고 사마란치는 올림픽이 끝난 후 장강재 회장을 한국일보로 예방하고 사의를 표했다. 그리고 한국일보, 일간스포츠, 코리아타임즈에서 부장급 1명씩(선재훈, 김영환, 김재설)을 IOC비용으로 로잔(Lausanne)의 IOC로 초대하기도 했다. 장기적으로 올림픽운동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더 좋은 보도를 하기 위한 포석이기도 했다. 1990년에는 다시 장강재 회장, 정태연(코리아타임즈) 사장, 선재훈, 김영환(당시 파리 특파원)을 IOC로 초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