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외교2018. 6. 8. 16:17

[남북한 올림픽공동개최 줄다리기(Tug-of-War)협상타결조건의 변곡점과 성과(서울1988올림픽개최 30주년 기념) 3편]

 

 

 

 

북한측이 서울올림픽관련 제1차 남북회담에 들고 나온 조건은 다음의 8가지였습니다:

 

 

1) 단일팀에 의한 북 남한 공동주최(Joint Hosting by North and South with a single national team),

 

 

2) 코리아 올림픽이란 통합 타이틀 사용(The amalgamated title Korea Olympic Games),

 

 

3) 평양과 서울간에 경기종목 평등분배(Sports Disciplines equally divided between Pyongyang and Seoul),

 

 

4) 양측 수도에서 개폐회식 동시개최(Simultaneous Opening and Closing Ceremonies in both Capitals),

 

 

5) 올림픽 헌장 하에 양측 도시들이 공동 보증서 작성(Host Cities to make joint guarantees to IFs under the Charter),

 

 

6) 모든 선수, 임원, 여행객들의 육, , 공을 통한 자유로운 교환(Free Exchange in Travel for all Athletes, Officials, Journalists, and Tourists by Air, Sea, or Land),

 

 

7) TV방영권수익금 재 분배(Redistribution of Television Profits)

 

 

8) 공동조직위원회 구성(The Formation of a Joint Organizing Committee)

 

 

 

이러한 일방적인 8가지 제안항목들은 오즈의 마법사(The Wizard of Oz)라도 개선하여 발전시킬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IOC는 이 단계에서 개회식 때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한 바 있습니다:

 

 

 

(1) 올림픽 깃발을 앞 세우고 남북한 선수단이 공동 행진하는 것

 

(2) 마라톤 및 도로 사이클 경기 코스가 휴전선을 가로질러 남북한 지역을 관통하는 것

 

(3) 축구와 같은 단체종목의 예선전 몇 경기를 북한에서 개최하는 것

 

 

 

올림픽공동개최는 결코 IOC의 요망사항이 아니었을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1985년 로잔에서 열린 첫 번째 회담결과 최종 코뮤니케(Communique: 공동발표문)를 통해 추가적 논의가 필요하니 1986 1월 회담을 속개하자고 하였습니다.

 

 

 

이후 3 차례 회담이 속개되었으나 의견차이를 좁히는데 실패하여 회담이 결렬된 셈이었지만 4차례 명분뿐인 회담으로 시간을 벌어줌으로써 소련을 위시한 동구권 국가들이 대가 참여할 수 있도록 명분을 얻는 데는 성공하였습니다.

 

 

 

국제적인 안보전문가와 테러분석가들로부터 가장 위험한 시기는 올림픽이 열리기 전 2년 간 이라는 전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올림픽이 시작되어 중국과 소련선수단이 도착하고 나면 서울은 지구상에서 가장 안전지대로 변할 것으로 예측되었습니다.

 

 

 

한국은86 아시안게임 직후에 버마 아웅산 테러 사건을 겪은 바 있었습니다.

 

 

 

불안감은 1986년 겨울과 1987년 여름 동안에 고조되기 시작하였습니다.

 

 

 

한국에서는 경찰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유혈시위가 세계 각국의 신문과 방송을 타고 톱기사로 장식되었고 극적인 사진들까지 줄곧 보도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국의 정치불안에 따른 염려와 과잉대응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를 소유한 미국에서 정점에 달했습니다.

 

 

 

당시 한국은 개발도상국이었고 북한과 휴전상황에 놓여 있었으며 지구상에서 가장 위험한 지역인 휴전선(DMZ)은 서울에서 불과 자동차로 1시간 거리에 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미국 ABC TV 명 스포츠 해설가인 하워드 코셀(Howard Cosell)전쟁 중이나 다름 없는 국가에서의 올림픽 개최는 어불성설이라고 부정적 발언까지 나왔던 상황이었습니다.

 

 

 

 

 

(United States Sports Academy 시상식에서 조우한 Howard Cosell과 함께/1989)

 

 

 

 

 

또한 그는 160여 개국의 회원국 중 불과 60개국과만 외교관계가 수립되어 있다니 말이나 될 법한가?라고 비난의 포문을 열기도 하였습니다.

 

 

 

한국은 1980 1212전두환 장군이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당시 정치적으로 매우 불안한 상황이었습니다.

 

 

 

1980 7월 제22 IOC총회에서 8년 임기의 IOC위원장으로 선출된 사마란치(2011년 작고)로서는 이 모두가 고난과 혼란의 연속이었습니다.

 

 

 

 

 

(사마란치 IOC위원장 바르셀로나 집무실에서 개별 면담 후)

 

 

 

 

소련을 위시한 동구권 블록 국가들은 1988년 서울올림픽을 다른 곳으로 옮겨 개최해야 한다고 연일 비판을 해댔습니다.

 

 

 

1984년 멕시코시티에서 개최된 제4 ANOC총회에서 당시 소련 체육성 장관 겸 NOC위원장인 그라모프(Gramov)는 강한 어조로 서울올림픽 개최지 변경문제를 공론화하여 총회의 주요쟁점으로 몰고 가고 있었으며 열띤 공방이 계속되었던바 있었습니다.

 

 

 

 

(Mario Vazquez Rana ANOC PASO회장 겸 IOC집행위원과 멕시코 시티 집무실에서)

 

 

 

 

결국 친한 파인 마리오 바즈케즈 라냐(Mario Vaquez Rana) ANOC회장과 사마란치(Juan Antonio Samaranch) IOC위원장 등의 서울올림픽 사수 전략이 대다수 NOC대표단의 호응을 받아 서울올림픽사수 멕시코선언문이 채택되었습니다.

 

 

 

이것으로 서울올림픽 개최지 변경논란은 일단락되었습니다.

 

 

 

그 결과 1988년 서울올림픽은 동서진영이 모두 참가(159개국)하는 화합과 전진(Harmony and Progress)의 대회가 되었으며 손에 손잡고(Hand in Hand) 이념과 정치 갈등을 넘어선 대회로 높이 평가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평창2018은 서울1988올림픽 30주년되는 해에 열렸습니다.

 

 

30년 전 그룹 Koreana가 서울1988올림픽 주제가로 부른 “Hand in hand’의 구성진 노랫말이 귓가에 쟁쟁합니다.

 

[Hand In Hand] (노래: Koreana)

(1)

See the fire in the sky

We feel the beating of our hearts together

This is our time to rise above
We know the chance is here to live forever

For all time

 

(Refrain: 후렴)

Hand in Hand we stand
All across the land
We can make this world
A better place in which to live

Hand in Hand we can
Start to understand
Breaking down the walls
That come between us for all time
Arirang

 

 

Posted by 윤강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