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외교2018. 6. 7. 06:49

[서울1988올림픽유치우여곡절(Ups and Downs)과 성공스토리(Success Story)올림픽개최 30주년 기념 제2편]

 

 

 

 

1947년 대한올림픽위원회(KOC)가 우여곡절 끝에 IOC에 회원국으로 가입한지 31년만인 1978 924일부터 105일까지 서울올림픽유치의 근간이 된 제42회 세계사격선수권대회가 태릉 국제종합사격장에서 성공적으로 개최되었습니다.

 

 

 

 

이 대회는 한민족 사상 최초로 한반도에서 개최된 세계, 국제, 글로벌 공식행사였다. 세계선수권대회를 주관하는 국제사격연맹(UIT)의 당시 회원국들 중 비록 비수교국인 공산권 국가들이 불참하였지만 각 대륙에서 68개국 1,500여 명이란 규모의 지구촌 스포츠가족들이 장차 서울올림픽유치를 향한 한국의 스포츠조직력을 증거할 계기가 된 셈입니다.

 

 

 

 

1979년에는 새롭게 창설된 제1회 세계공기총사격선수권대회와 사격에 이어 두 번째 세계선수권대회인 제8회 세계여자농구선수권대회를 유치하여 잠실에 신축된 잠실실내체육관에서 성공적으로 개최함으로써 한국은 국제체육행사를 주최하는데 따르는 매력과 자심 감을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세계사격선수권대회 미국 팀 통역으로 참가한 외대 영어과 재학중인 필자와 미국 여자 공기총사격선수 Ashley)

 

 

 

 

세계사격선수권대회를 유치하고 조직한 故 종규 당시 대한사격연맹회장은 1979 KOC위원장(추후 IOC위원 역임) 재직 시 박정희대통령에게 서울올림픽유치필요성과 당위성을 3가지로 요약 브리핑하여 내락 받았다고 합니다.

 

 

 

(1985년 동 베를린 IOC총회장에서 만난 SLOOC수뇌부와 사마란치 IOC위원장: 좌로부터 노태우 SLOOC위원장, 사마란치 IOC위원장, 박종규 IOC위원, 이영호 SLOOC집행위원장 겸 체육부장관)

 

 

 

첫째로 한국경제고도성장과 국가신인도 제고의 새로운 기점 마련이란 측면에서 1964년 도쿄올림픽개최당시 일본의 1인당 GNP $670 불 정도였으니 한국의 경제성장속도를 감안할 때 1988년에는 $2,000 불이 충분하다라는 판단이 섰다고 합니다.

 

 

 

일본도 1964년 도쿄올림픽을 기점으로 경제발전이 대 도약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올림픽을 계기로 일본은 정치, 경제, 문화, 사회, 외교 등 모든 분야에서 선진국 대열에 도약할 수 있는 제반 여건이 조성되었던 전례를 강조하였습니다.

 

 

 

둘째로 대결 국면의 남북한관계에 있어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계기초석마련을 염두에 두었다고 합니다.

 

 

 

최대 우방국인 미국 시민들 조차도 한국은 한국동란 당시 의료진 이야기를 다룬

TV 시리즈드라마였던 MASH(Mobile Military Surgical Hospital: 이동육군외과병원)를 통해 전쟁참화에 찌 들린 나라 정도로 인식될 정도였고 따라서 한국을 모르는 제3세계 국가들에 대한 북한의 집요한 허위날조 공세로 한국의 대외 이미지와 신인 도는 하한가수준이었습니다.

 

 

 

올림픽을 한국이 유치한다면 한국의 경제적 성장을 세계가 인정하는 것이고 외교 면에서 북한의 제3세계에 대한 공세를 원천 봉쇄하여 한국이 북한을 압도할 수 있는 기틀이 확고해 질 수 있는 초석이 마련될 것이다라는 전망을 강조하였다고 합니다.

 

 

 

셋째로 세계 선진국대열에 동참할 수 있는 첫 단추 채우기의 안성맞춤이라고 설득하였다고 합니다.

 

 

 

국내외 한민족 모두를 자긍심으로 결집시킬 수 있는 단합대회이자 한국을 전 세계에 홍보 할 수 있는 최고의 시너지 효과거양은 물론 실질적으로 온 세계가 한국을 선진국으로 인정할 수있는 사회 제반 인프라 구축도 효과적으로 가시화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며 계기라는 점도 동시에 강조하면서 서울올림픽유치가 제3공화국을 결산하는 역사적 치적이 된다는 점도 생각해 주시라는 간곡하고 설득력 있는 화룡점정 적 브리핑덕분에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쾌히 승낙을 받아내게 되었습니다.

 

 

 

올림픽유치경쟁과 관련된 시험적 사전 스포츠외교 활동은 1979년 푸에르토리코의 상환(San Juan)에서 열린 세계각국 국가올림픽위원회총연합회(ANOC) 총회에서 태동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서울올림픽유치를 임시로 승인한 뒤의 일이었는데 한국 스포츠외교관들은 ANOC IOC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단체라고 판단했습니다.

 

 

 

사실 국제 스포츠 계 판도를 정확히 집었으면 IOC가 얼마나 강력하고 ANOC는 친목 협력단체이지 IOC에 대한 압력이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단체라는 현실을 깨달았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당시 한국의 스포츠외교 눈높이였습니다. 

 

 

 

1979 921, 박정희대통령은 86서울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의 양대 게임유치를 시작하라는 계획을 최종 승인하여 주었습니다.

 

 

 

또한 제1086아시안게임도 함께 유치하여 88서울올림픽의 예비대회로 활용하도록 재가하였습니다.

 

 

 

1979 108일 당시 정상천 서울시장은 기자회견을 갖고 1988년 서울올림픽유치계획을 공식 발표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계획은 같은 해 박정희대통령이 1026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암살당함으로써 커다란 시련에 봉착하기도 하였습니다.

 

 

 

1980 714박종규 전 대통령경호실장이 KOC위원장 과 KASA(당시 대한체육회 영문명칭: Korea Amateur Sports Association)회장 자리에서 사임하고 후임으로 조상호 KOC부위원장이 임명되었습니다.

 

 

 

 

또한 1980 1027전두환 장군이 제9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88서울올림픽 유치문제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조상호 KOC위원장은 1980 925, IOC본부에 88올림픽유치신청마감일을 텔렉스로 문의해 본 결과 1980 1130일이라는 회신을 받고 유치작업을 재개하였습니다.

 

 

 

KOC 116 KOC긴급확대 상임위원회회의를 열고 유치에 대한 찬반토론을 거친 뒤 득실을 비교 분석한 결과 국가적으로 득이 된다는 결론을 도출한 KOC는 유치신청서를 제출할 것을 정부에 건의하였습니다.

 

 

 

반면 서울시는 재정부담을 염려한 내용의 보고서를 제출하였지만 전두환대통령은 1130일 유치신청서에 최종 서명하였고 그 유치신청서는 IOC가 정한 마감시한 내에 제출되기에 이르렀습니다.

 

 

 

KOC 121일 서울올림픽유치에 대한 지지입장을 확인하였습니다.

 

 

 

그 후 발 빼기 시도가 있었지만 전두환대통령은 유치경쟁을 계속해야 한다는 건의를 받아들였고 이런 교착상태를 타개하고 나선 것이 당시 노태우 정무2장관이었습니다.

 

 

 

노태우장관은 8월 말 체육 계, 외무부의 재외공관, 학 계 등 각 계의 의견을 종합하여 서울올림픽 유치의 승산과 당위성에 확신을 가지고 전두환대통령에게 특별 건의한 결과였습니다.

 

 

 

전두환대통령은 88올림픽은 기필코 서울로 유치해야 한다라는 단호한 결의를 보이면서 노태우장관이 국무총리 행정조정실에 구성된 88올림픽 유치특별대책반을 진두 지휘하도록 특명을 내렸습니다.

 

 

 

94일 개최된 비상대책회의는 노태우장관이 주재하였는데 이규호 문교부장관, 노신영 외무부장관, 박영수 서울시장, 이상주 청와대 문교수석비서관, 이선기 국무총리실 행정조정실장, 전상진 KOC부위원장이 참석하였습니다.

 

 

 

 

(1979 108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회의실에서 정상천 서울시장이 국내외 기자회견을 열고 ‘1988년 서울올림픽 유치 계획’을 공식 발표하고 있습니다. 직후 ‘10·26’으로 박정희가 피살되면서 무산됐던 유치 계획은 80년말 전두환 정권에 의해 재추진되면서 정주영에게 유치 민간위원장의 책임을 맡기게 됩니다. 맨 왼쪽부터 정주영 전경련 회장, 박충훈 무역협회장, 김택수 IOC 한국위원, 정 시장  <한겨레> 자료사진)

 

 

 

 

이 회의를 계기로 일본의 나고야를 막판의 세기적 역전승(52:27)을 가져 온 서울올림픽 유치활동은 노태우장관과 유치위원장을 맡은 정주영 현대그룹회장 그리고 박종규 KOC위원장 등에 의하여 주도되었습니다.

 

 

 

당시 WTF총재로서 국제스포츠 계 인사들과 잘 통하여 바덴바덴(Baden-Baden) 총회 장을 누비고 활동한 김운용 IOC부위원장도 큰 몫을 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특히 박종규회장은 당시 IOC위원들에게 영향력이 지대한 Horst Dassler ADIDAS회장과 비밀회동을 갖고 실질적인 역전득표작전에 큰 기여를 한 것으로 전해진 바 있습니다.

 

 

 

 

 

(1985년 동 베를린 개최 IOC총회 시 회동한 Horst Dassler와 이영호 SLOOC집행위원장 겸 체육부장관)

 

 

 

 

1981 930일 서독 바덴바덴에서의 기적은 박종규 대한사격연맹회장 겸 KOC위원장의 야망으로 시작되어 노태우장관이 총괄지휘하고 정주영 현대그룹회장을 비롯한 유치 단 멤버들의 불철주야 주도면밀하고도 역사적인 천둥번개작전(Thunderbolt Operation)에 의해 화룡점정 된 것입니다.

 

 

 

박종규회장의 꿈, 박정희대통령의 결심, 전두환대통령의 유치신청결단, 노태우 정무2장관의 확신 찬 진두지휘에서 보듯이 우리나라 정부의 지도층은 서울올림픽의 꿈의 불씨를 살려 찬란히 지피도록 견인차 역할을 다하였습니다.

 

 

 

바덴바덴 대첩의 기적은 그 후 개최되기까지 7년 간 숱한 우여곡절과 고비를 슬기롭게 극복하면서 1988 917일 동서양이 한반도에 모두 모여 손에 손잡고(Hand in Hand) 벽을 넘어서 올림픽을 통한 세계 대 단합과 인류화합의 합창을 부르게 된 것입니다.

 

 

 

 

(1981 930 IOC 총회에서 88올림픽 개최도시로 서울이 선정된 직후 정주영은 유치위원장으로 가장 먼저 ‘유치확정서’<올림픽개최도시 협약서/HCC>에 서명했다. <한겨레> 자료사진)<뒷줄 좌로부터: 최만립 KOC명에총무, 전상진 KOC부위원장, Mme. Monique Berlioux IOC 사무총장>

 

 

 

 

세계는 서울로, 서울은 세계로(The World to Seoul, Seoul to the World)

그 과정에서 북한의 개최지 변경 공작, 아웅산 테러, 북한의 서울올림픽 공동개최 주장, 김포공항 테러, 국내 정치정세의 급변, 6.29 민주화 선언, 대통령 선거, KAL 858 폭파 사건 등 수 많은 위기와 질곡의 세월을 넘어 88서울올림픽은 20세기 최고의 올림픽으로 승화되고 회자되고 있는 것입니다.

 

 

 

Posted by 윤강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