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외교2019. 8. 17. 12:48

[대한민국스포츠외교실록- KOC는 어떤 경로와 배경으로 IOC회원국 NOC로 가입되었을까? (5)]

 

 

 

 

1920 713일 대한체육회의 전신인 조선체육회가 창설되었습니다. 1945 815일 해방 후 재건된 조선체육회, 그리고 1946년에는 조선올림픽위원회(KOC)가 창설되었으며 다음해인 1947 620일 스톡홀름개최 제40 IOC총회에서 정식회원국으로 인준 후 가입되었습니다.

 

 

IOC총회 결과를 당시 Otto Myer IOC사무총장은 스톡홀름 IOC총회에 대한민국 대표로 참석한 이원순 옹에게 1947 718일 자 공한으로 코리아(Korea) NOC를 공식적으로 인준했다고(OSC<Olympic Studies Center> Archive, 1947)통보하였습니다.

 

 

이를 근거로 대한올림픽위원회(KOC) IOC가입 날짜를 1947 620일로 규정하고 대한체육회 정관에도 이를 명시하고 있습니다(KSOC, 2017)

 

 

그 다음해인 1948 130일 생 모리츠(St. Moritz) 동계올림픽에 사상최초로 대한민국 동계선수단을 파견, 출전하였습니다.

 

 

이어 6개월 후인 729~814일 런던(London)에서 열린 제14회 올림픽에 하계 선수단을 파견하게 되었습니다.

 

 

1952년 제15회 헬싱키올림픽 참가 후 12년 뒤인 1964년 대한올림픽위원회는 대한체육회에서 분리 독립된 사단 법인으로 재 출발하여 스포츠외교활동을 시작하였으나 불과 4년 후인 1968년 다시 대한체육회 특별 기구로 통합 편입되었습니다.

 

 

대한민국 NOC(KOC) IOC에 가입한 배경과 상황을 살펴보면 KOC Avery Brundage (미국/ 5 IOC위원장 역임: 1952~1972)당시 IOC부위원장과의 첫 번째 접촉은 1946년 말로 추정됩니다(Brundage Collection, KOC-01).

 

 

London1948올림픽 참가 선결조건인 KOC IOC인준 가능성 여부 타진이 목적이었으며 전경무 런던올림픽대책위원회(1946 7월 결성) 부위원장은 Brundage IOC부위원장으로부터 긍정적인 답변을 받고 KOC IOC인준 및 가입을 위한 작업에 박차를 가합니다.

 

 

전경무 부위원장은 KOC의 인준에 필요하다고 사료되는 미국 내 주요인사들과도 접촉을 Brundage IOC부위원장의 도움을 받고 하게 됩니다.

 

 

한 나라의 NOC가 인준 받기 위하여서는 국제경기연맹 가입이 선결조건인 바 이와 관련된 만남이었습니다.

 

 

미국을 떠나기 전 전경무 부위원장은 당시 Sigfrid Edstrom IOC위원장(스웨덴/4 IOC위원장 역임: 1942~1952)에게도 KOC인준요청과 신청의향을 알리게 됩니다.

 

 

                     (출처: Wikipedia)

 

 

 

IOC인준을 위한 미국 내에서의 사전정지작업을 마친 전경무부위원장은 1947 3월 코리아로 귀국한 후 3개월 후인 615일 스웨덴 스톡홀름 개최 제40 IOC총회에서의 KOC인준을 위한 최종 마무리 작업에 돌입합니다.

 

 

당시 원활치 못한 우편배달로 인한 지연사태와 국제경기연맹들과의 화의일정 조정문제로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천신만고 끝에 스톡홀름 IOC총회에서 KOC인준관련 대표발언자로 지정된 전경무부위원장은 529일 저녁 미군용기 편으로 일본 도쿄교외 비행장근처 산정에서 탑승한 비행기가 충돌하여 그만 40명 동승자들과 함께 사망하였다고 합니다.

 

 

 

 

            (전경무 부위원장)

 

 

 

 

촉박한 시간 관계로 수소문 끝에 미국 뉴욕거주 이원순 옹에게 바톤이 넘어 갑니다. 이원순 옹은 궁여지책으로 공문서 용지에 자신이 직접 타자를 쳐서 개인명의로 여행증명서를 만들어 여권대용으로 사용합니다.

 

공무서 용지에 나이, 주소를 쓰고 본문에 나는 한국인으로 금번 KOC의 요청으로 IOC총회에 참석할 예정이며 런던에 들러 영국올림픽위원회와 1948년 런던올림픽참가문제를 교섭하러 간다라고 타이핑 한 두 페이지짜리 자가여행증명서를 들고 뉴욕주재 영국 총영사관에 찾아가서 담당 영사관 직원에게 보여 줍니다.

 

 

 

(이원순 옹)

 

 

그 직원은 표정이 일그러지면서 이게 뭡니까?” 라고 묻자 그는 보시는 바대로 내 개인 여권입니다라고 하자 그는 내용을 꼼꼼히 읽어 본 후 한 동안 여행증명서를 만지작거리더니 뭐라고 중얼거리며 영사 사무실로 들어 갑니다.

 

 

한참 만에 환한 얼굴로 나온 그는 두말 없이 비자발급 도장을 찍어 줍니다. 이원순 옹은 곧바로 다시 덴마크 총영사관에 가서도 어렵지 않게 비자를 받게 됩니다.

 

 

이는 1947 611일 미국 뉴욕에서 일어난 실화라고 합니다.

 

 

 

(이원순 옹이 직접 타자로 작성하여 제작하여 사용했던 사제여권<출처: 문화재청 홈페이지)

 

 



 

 

IOC총회 날짜에 임박하여 스톡홀름에 도착한 이원순 옹은 IOC측에 KOC IOC가입 신청서를 제출하였고 1947 620일 소집된 제40 IOC총회에서 발언을 통하여 아시아의 작은 신생 국에게도 올림픽에 참가할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라는 요지의 열변을 토한 끝에 코리아(Korea)의 역사적인 IOC가입이 인준 승인 되었습니다.

 

 

이원순 옹은 곧바로 영국 런던으로 날아가 런던올림픽조직위원회에 코리아(Korea)선수단의 올림픽출전 신청도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 당시 사용되었던 역사적인 사제여권의 빛 바랜 원본은 이원순 옹의 모교인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기증되어 보관되어 오다가 최근 문화재청에 의해 등록문화재 491-1로 등재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103세를 일기로 지난 1993년 타개하였다고 합니다 (출처: 한국일보/Korea Times 한인사회)

 

 

40 IOC총회 회의록(1947.6.19~21)불어)에 기록된 당시 상황을 살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IOC Stockhomsession,1947):

 

 

한국(Korea/KOR)IOC가입 인준 건은 17번 째 의제로 상정되었다고 합니다.

 

 

코리아(Korea)올림픽위원회 대표인 이씨(Mr. Lee)는 앞 무대로 소개된 후 자신이 올림픽위원호의 신청 내용을 발표함. 조직에 대한 상세한 연대기정 설명을 하고 여정 중에 비행기 사고로 사망한 전경무 코리아(Korea)대표위원을 대신해 참석한다고 발표함. 이씨(Mr. Lee)는 총회에서 자기 올림픽위원회의 올림픽에 대한 헌신을 보장한다고 했음. Edstrom IOC위원장은 가사를 표하고 내일 결정이 나온다고 발표함. 이씨(Mr. Lee)는 자리를 뜸.”

 

 

KOC IOC인준을 통하는 공한은 1947 718일 자로 작성되어 발송되었으며 작성자 및 발신자는 Otto Mayor IOC사무총장 명의였고 수신자는 IOC총회에 코리아(Korea)대표로 참석한 이원순 옹 이었습니다(OSC Archive, 1947).

 

 

수신자의 주소는 East Houston St. 105, New York City로 되어 있었으며 이원순 옹의 사무실주소였다고 합니다.

 

 

이는 당시 한국의 불확실한 우편배달상황을 고려하여 확실한 이원순 옹의 미국주소를 이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KOC에 대한 IOC잠정인준(provisional recognition)통보 공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947 620일 스톡홀름에서 열린 IOC총회에서 귀 NOC가 공식적으로 인준 된 것을 확인 드리려 함. 올림픽이상의 확산을 위해 앞으로 소중한 협력을 해 주실 것에 감사드림. NOC위 성공을 기원함. St. Moritz 측으로부터 1948년 동계올림픽 대회와 1948년 런던올림픽대회 참가 공식초청을 받게 될 것임

 

 

이러한 인준 소식을 전해 들었을 여운형 조선체육회장은 1947 630 Brundage IOC부위원장에게 정중히 감사답장을 보냅니다.

 

 

이에 대한 Brundage IOC부위원장의 답신내용을 미루어 볼 때 당시 IOC KOC인준은 조건부 인준(in a sense, provisional)이며 코리아(Korea)정부가 정식으로 수립되면 다시 검토할 것이며 한 국가에서 한 조직만 인준되니 북쪽의 아마추어 스포츠 및 선수들 또한 포함시킬 수 있기를 희망한다((It will be highly desirable for you to obtain control of amateur sport in the northern zone.)라고 적시한 바 있었습니다.

 

 

 

(해방 후 첫 번째 조선체육회 회장<역대 11>여운형/출처: 몽양 여운형 사진자료집)

 

 

 

 

별도로 이원순 옹에게 Brundage IOC부위원장이 보낸 서한(1947.7.14)에서는 좀더 상세하게 기술된 내용이 다음과 같이 담겨 있었습니다.

 

 

 

(출처: Wikipedia)

 

   

 

“…(중략)그러나 이 인준은 한국의 정치적 상황 때문에 조건부임을 명심하기 바람(Bear in mind this recognition is, of course, only provisional because of the political status of Korea). 이번 인준은 독립정부 이전에 승인이 된 첫 사례임. 한국이 독립국이 되면 다시 평가될 것임. 그래서 남북 선수를 모두 관장하는 단체가 되길 매우 희망함(It will, therefore, be highly desirable for the existing Korean Olympic Committee and the existing amateur sport governing bodies to include the athletes in Northern Korea as well as the southern section.). 한 국가에 한 단체만 승인되기 때문임. 다음에 한국 팀이 런던에 올 것이고 성공을 빔.”

 

 

이러한 연유로 대한민국 선수단은 올림픽출전시 대한민국의 영문명칭인 ROK(Republic of Kore)가 아니라 코리아의 영문약자인 KOR(Korea)을 쓰게 된 것입니다.

 

대한체육회는 1920 713일 창립되어 2019 713알 창립99주년을 맞이 하였으며 2020년 창설 100주년을 기념하게 됩니다.

 

조선체육회는 일제강점기에 창설된 관계로 독립운동의 구심점역할을 우려한 나머지 18년 뒤인 1938년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을 당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1945 815일 해방 이후 부활하여 1954년 사단법인 대한체육회(KASA)가 되었으며 1983년에는 국민체육진흥법에 의거하여 특수법인이 되었습니다.

 

2009 629일 별도의 단체로 명맥을 유지했던 대한올림픽위원회는 대한체육회(Korea Sports Council)에 완전히 통합되어 일체양면 성격으로 한글로는 대한체육회 영어로는 Korean Olympic Committee를 사용하는 조직이 되었습니다.

 

이후 2016년에 이르러 정부의 생활체육회 엘리트체육의 통합방침에 따라 대한체육회와 국민생활체육회가 한 단체로 통합되어 한글명칭은 대한체육회이고 영문명칭은 ‘Korea Sports and Olympic Committee’(KSOC)가 되었습니다,

 

국제스포츠외교무대에서 억척스럽게 노력하고, 정열적이고 열정적으로 행동하고, 어렵사리 장애물을 극복하며, 차이점은 상쇄하고, 다양한 문화와 접목된 우정을 쌓아가며, 인적 네트워크도 업그레이드 시키면서, 좌절감은 삼키고, 영광과 명예주심에는 감사 드리면서 순도 100%의 스포츠외교 생생 현장 돌입체험 스토리를 실록에 나름 응축하여 포함시켜 그 특성상 아마도 세계최초가 될 내용을 담아 책으로 펴내고자 합니다.

 

 

근대올림픽 창시자(Renovator)인 쿠베르탱 남작은 1894 6 23일 프랑스 파리 소재 소르본느(Sorbonne)대학에서 국제올림픽위원회(IOC: International Olympic Committee)를 창설하였습니다.

 

 

스위스 로잔에 본부를 둔 글로벌 비영리법인단체인 IOC는 창립기념일인 6 23일을 「올림픽의 날(Olympic Day)」로 명명하고 뜻 깊은 기념식과 다채로운 행사를 통해 올림픽 이상과 정신을 널리 알리고 있습니다.

 

 

2019년은 IOC창립 125주년 되는 해인데 623일 올림픽하우스(Olympic House)로 명명된 IOC신축본부 개장식이 있었습니다.

 

 

 

References:

1.

Chosun Ilbo, 1946, December, 24, We look for Olympics, p4.

2.

IOC, OSC, Archive, (1949), 19490418_OSC_Lee W S to IOC President Edstrom_Telegram.

3.

IOC, OSC, Archive, ‘Avery Brundage Collection 1908-1975’, IOC ref no. 327:92 BRU/MA 2686+1. KOC-01.

4.

IOC, OSC, Archive. CIO Consultation Sessions CE-01. Comité International Olympique - Session et CE – 1894-2013. Comité International Olympique - Session 1894-2013. Stockholm session, 01- Procès-verbal- fre.

5.

IOC, OSC, Archive, (1947), Letter from Otto Mayer to Lee W.S. ref. OSC-D-RM01-CORES-015-07.

6.

Korea Basketball Association, (2008), Korea Basketball 100 Years, Seoul, Seoul Printech, p92.

7.

Korean Sport & Olympic Committee, (2017), Korean Sport & Olympic Committee Rules and Regulation, approved June 8th, 2017.

8.

Korean Sport & Olympic Committee, (2011), Korean Sport & Olympic Committee 90 Years of History, p170, Seoul, Korean Sport & Olympic Committee.

9.

Lee, H. R., (2008), Modern Korean Sport History, Yongin, Dankook University Press.

10.

Lee, Y. S., (1989), Beyond the Century, Seoul, Sin Tae Yang Sa.

11.

Na, Y. I., (2013), From London to London, Korea’s Olympic Pursuit, Paju, Nanam, p27.

 

Posted by 윤강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