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과 마음씀2021. 6. 2. 16:46

[우리들교회 2021530일 주일예배말씀 요약(사도행전 17: 23~34/ 성령의 알리심)]

 

 

 

<사도행전 17:23~34>

 

23.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의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For as I walked around and looked carefully at your objects of worship, I even found an altar with this inscription: TO AN UNKNOWN GOD. Now what you worship as something unknown I am going to proclaim to you)
24.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The God who made the world and everything in it is the Lord of heaven and earth and does not live in temples built by hands)
25.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And he is not served by human hands, as if he needed anything, because he himself gives all men life and breath and everything else)
 

 

  26.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년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From one man he made every nation of men, that they should inhabit the whole earth; and he determined the times set for them and the exact places where they should live)
27.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God did this so that men would seek him and perhaps reach out for him and find him, though he is not far from each one of us)
28.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 너희 시인 중에도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For in him we live and move and have our being.' As some of your own poets have said, 'We are his offspring)
29. 이와 같이 신의 소생이 되었은즉 신을 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Therefore since we are God's offspring, we should not think that the divine being is like gold or silver or stone--an image made by man's design and skill)
30.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In the past God overlooked such ignorance, but now he commands all people everywhere to repent)
 

 

  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For he has set a day when he will judge the world with justice by the man he has appointed. He has given proof of this to all men by raising him from the dead)
32. 저희가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혹은 조롱도 하고 혹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When they heard about the resurrection of the dead, some of them sneered, but others said, "We want to hear you again on this subject)
33. 이에 바울이 저희 가운데서 떠나매(At that, Paul left the Council)
34. 몇 사람이 그를 친하여 믿으니 그 중 아레오바고 관원 디오누시오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A few men became followers of Paul and believed. Among them was Dionysius, a member of the Areopagus, also a woman named Damaris, and a number of others)

 

<Prologue>

 

에피쿠로스(Epicurean), 스토아(Stoic)학파(Philosophy) 둘 다 영은 선하고 육은 악하기 때문에 이 두 철학은 아덴(Athens)을 온통 우상천지로 만들었다고 했다. 쾌락주의나 경건주의나 예수가 없으면 둘 다 육은 악하기 때문에 다 선한 게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아무리 쾌락주의고 아무리 경건주의라 해도 예수가 없으면 말짱 꽝인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늘 새 것을 알고자 알지 못하는 神에게까지 제사를 드리지만 아덴 사람들이 끊임없이 추구하며 목말라 했던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앎(knowledge)이었다. 물이 범람하는 홍수에 가장 필요한 것이 마실 물이라고 한다. 그들은 알지 못했기 때문에 두려워했고 또한 안다고 생각하며 정답이라고 생각했기에 또한 두려워했다. 이제 알지 못하는 두려움은 결국 종교심이 되어서 알지 못하는 신에게까지 숭배하는 행동으로 이어졌고 이 세계의 지성이라고 불린(불리운x) 사람들이 한 일은 결국 돌과 신상을 세워 숭배하는 일이었다.

얼마나 아이러니 한가? 바울이 전쟁터 같은 아레오바고(Areopagus:  언덕) 에 끌려가 이 사람들 앞에서 무슨 메시지를 선포했을까?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라고 오늘 성령의 알리심을 선포한다.

 

<말씀 요약>

 

1.   바른 앎을 알게 하십니다.(23)

 

23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주전(기원전) 3세기 헬라의 과학자 아르키메데스는 왕으로부터 어려운 문제를 받는다.

새로 제작한 왕관이 왕에게 제공한 그 순금으로 제작되었는지 아니면 다른 불순물이 섞였는지 여부를 확인하라는 것이었다. 겉으로 봐서는 알 수가 없고 무게를 재도 다르지 않고 그렇다고 다 만들어진 왕관을 다시 녹일 수도 없고 너무 어려운 문제였다. 그래서 며칠을 생각해도 방법이 보이지 않자 머리를 식힐 겸 목욕탕에 갔다. 밀도가 다른 물체의 부피를 물로 잴 수 있다는 원리를 발견한 것이다. 이 발견의 기쁨(Eureka/알았다-바로 이것이다-유레카)이 부끄러움도 다 잊게 했다. 이 원리로 아르키메데스는 왕이 낸 어려운 문제를 풀 수가 있었다고 한다.

늘 새로운 것을 알고자 했던 아덴 사람들이야말로 이런 발견의 기쁨을 추구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기쁨조차 죄로 부패했기에 엉뚱한 방향으로 이끈다는 것이다. 우리가 더 자극적인 죄악을 발견하는데 더 빠르고 능하다는 것이 가장 큰 증거이다. 그래서 늘 대부분은 아덴 사람들처럼 이기고 이기려고 알기를 소원하기 때문이다.

이 땅의 삶의 의미와 존재의 목적, 그리고 죽음 너머를 알고 싶어 하고 그 때와 그 시를 너무 알고 싶어 한다. 하지만 내일 일을 알지 못해서 두려워하고 또 알기 때문에 두려워해서 뭔가 믿을 만한 우상을 세워놓는다. 나의 노후를 보장해줄 것 같은 돈, 자식, 학벌, 외모 등 그런 우상들을 세워놓고 결국은 그 우상들의 통치를 받는다. 아덴 사람들과 다를 것이 없다. (똑똑한) 아덴 사람들이 바른 앎이 없으니까 결국 나무와 돌에 신상과 우상을 만들고 그것을 의지하여 숭배하고 절하는 행위를 한다. 우리와 너무 똑같다.

그래서 사도바울의 위대한 아레오바고(Areopagus) 설교가 선포된다.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한다. 뭔가 지식을 가르치겠다는 의미가 아니다. 너희를 옭아매는 앎이라는 것에서 벗어나는 앎, 깨달음을 알게 하리라 한다.

그래서 두려움에서 평안을 주는 바른 앎을 알게 하리라 한다.

 

(적용#1)

 

-여러분의 앎은 두렵게 하는 앎인가? 평안하게 하는 바른 앎인가? 내일 일을 알지 못하고 죽어라고 위하는 그것은 무엇인가?(엄마들은 특별히 자녀다)

 

 

2.   삼위 하나님의 사역으로 알리십니다(24~27)

 

성자 하나님의 거주의 경계와 연대를 정하셔서 알리신다.

 

24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25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26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27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

 

24절에 만물을 지으신 천지의 주재이신 성부 하나님의 이 감추어진 경륜은 너무 커서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실 수가 없다. 하나님은 감추어져 있기에 우리 욕심대로 부릴 수 있는 도깨비 방망이가 아니라는 것이다.

 

26절에 연대를 정하시고 경계를 한정하셔서 이 땅에 여인의 자궁 속에 점 하나로 낮아지심으로 이 땅속으로 디자인하시면서 성자 하나님으로 나타내셨다.(revealed)

 

25절에 성령 하나님이 생령으로 호흡과 생명을 주시고 효과적으로 도우셔서, 삼위하나님이 도와주셔서

알리시는데 그 감추어진 하나님이 결코 멀리 계시지 않지만 인생에게 이 하나님을 더듬어 찾게 하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너무 감추어져 있지만 바로 옆에 있는데 이것이 고난이 없이는 찾아지지를 않는 것이다.

옆에 있는데도 모르고 오래 되었어도 말씀이 안 들린다. 그러니까 기다림이 필수적이다. 그래서 내 옆에 하나님이 계신데 그것도 더듬어 찾는다고 한다. 아덴 사람들에게 하는 이야기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일단 모두 언급했다. 바울의 설교는 이제 이 삼위 하나님의 사역을 아덴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소개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구약도, 하나님도 하나도 모르기 때문에 바울은 청중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아덴의 철학자들인 청중들에게 스토아학파의 사상을 이용해서 복음을 전한다. 25절에서 바울은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고 인용을 했는데 이것은 세네카의 말이다. “신이 인간들을 섬기려 하기 때문에 신은 섬기는 자를 원하지 않는다.”를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26절도 세네카의 말과 거의 같다고 한다.(연대를 정하시고, 거주의 경계)

바울은 무신론자인 에피쿠로스학파보다 신의 존재를 인정했던 스토아학파의 논리를 따라 하나님을 소개한다. 예수님 때도 사두개파는 잘 사는 귀족이라 부활이 없고 바리새파는 경건해서 부활을 믿는다. 부활을 믿으면 멋있어 보이는데 예수님 죽일 때는 둘이 한 패가 된다. 우리도 진영논리로 싸우지만 예수 믿는 것을 핍박하는 데는 다 한 패가 된다. 바울은 당대의 가장 유명한 세네카의 명문장들을 인용하면서 제발 들으라고 설득하고 있다.

문화적 자긍심에 충만했던 아테네 철학자들과 시민들이 사도바울의 설교를 듣고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던 이유는 자기들보다 더 잘 아는 세네카를 언급하니까 입이 다물어졌다. 바울 사도는 그 사람의 눈높이에서 복음을 전한다. 영혼구원이 목적이 되면 그런 것이 저절로 되는 것이 있다. 각자 인생이 다르기에 그 인생의 언어를 우리가 공감해야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귀신들린 여인에게도 공감하지만 아덴 사람과도 공감하기 위해서 공부는 어렸을 때부터 좀 해 둘 필요가 있기는 있다. 우리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고기 잡는 어부에게는 어부의 언어로, 목동에게는 목동의 언어로, 세리나 농부에게는 세리와 농부의 언어로 다 제자로 부르셨다. 유대인들에게 관습과 전통의 알아들을 수 있는 그들의 언어로 알리셨다. 우리 인생도 이혼과 사별의 언어가 있고 도박, 상인, 농사, 학자의 언어가 다 다르다. 그런데 제가 한 분야의 전공 고난이 있고 큐티를 열심히 하다 보니까, 영혼 구원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되니까 각 사람에게 맞춰서 언어를 쓸 수 있는 그런 힘을 주신 것 같다. 영혼 구원 때문에 안타까워하니까. 어떤 분이 제 설교에 리플을 달면서목사님, 사별을 한 가정의 고통은 어디 가서 얘기를 해야 되나요?” 제가 사별한 사람들의 언어로 다가가지 못했나 보다. 아니면 이 분은 전혀 설교가 안 들릴 수 있다. 그리고 그 설교에서 문자적으로 제가 사별했다는 얘기를 안 하면 그게 나와 다르다고 생각이 되는 것이다. 안 들리는 종류가 참 많은데, 고난이 와도 안 들리는 분이 있다. 말씀이 없어서 안 들리고, 저를 신뢰하지 않아서 안 들리고, 그런 댓글의 답글로 이런 답글이 달렸다. “저도 남편 사별한 지 한 달 되었어요. 하나님의 사정을 알아가는 목장을 통해서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힘들고 괴로움을 토해낼 수 있는 공동체에 속하시면 좋겠습니다.” 따끈따끈한 사별의 언어로 공감을 해주시니까 제가 너무 정말 감사했다.

아덴 사람들은 아덴 사람의 언어로 설명을 해도 못 알아들었다. 여하튼 그 삶 속에 그들의 언어로 알리는 것이 성령의 알리심이다. 하지만 우리는 성령의 격분을 잘못 이해하여 함부로 말하고, 낮아지기 보다는 정죄하고, 껴안기 보다는 판단하고, 이해하기 보다는 오해하고, 알린다고 하면서 가르치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그들의 언어로 말할 때는 낮아짐이 필요하고 자기 부인이 필요하다. 누군가를 공감해주는 것은 낮아짐과 자기 부인이 필요하다. 그냥 말로안 됐어, 위로 받아.” 한다고 위로되는 것이 아니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삶 속에 생명을 불어넣으신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추상적인 개념으로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다. 오늘 가장 중요한 구절은 26절이다. 구체적으로 오늘, 지금, 내 혈통, 내 수명의 연대 그리고 내 거주의 경계 속에서 자신을 발견할 수 있고 알리신다고 말씀하신다.

 

철학자들이 일생 찾고, 찾고 또 찾았던 진리 그것을 오늘 내 삶 속에 임한 말씀으로 우리는 그 분을 더듬어 찾을 수 있고 만나며 교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구속사인데 성부, 성자, 성령 중에서 예수님의 사역이 정말 중요하다. 왜냐하면 감추어진 하나님의 경륜이 예수님의 낮아지심으로 이 땅의 경계 속으로 들어오지 않으셨다면 구속사는 일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럼 성령님도 효과적으로 도와주실 수 가 없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이 땅의 경계 속으로 들어오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자기 비하는 굉장한 것이다. 그런데 죄인인 우리의 특징은 이 모든 경계를 허물고 싶어 한다. 시편 16:6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하셨는데도 혈통과 연대와 경계를 허물어 다들 하나님이 되고 싶어 한다. 그래서 우리는 돈을 벌어 오래 살고 싶어 하고 혈통을 벗어나고 싶어 한다. 부모의 자리, 아내의 자리 다 벗어나고 싶어 한다. 하나님이 허락한 거주의 경계를 그냥 끊임없이 벗어나고 싶어 한다. 돈이 없고 갈 데가 없어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조금만 힘이 생기면 끊임없이 거주의 경계를 벗어나려고 한다. 혈통을 벗어나고자 하고 바람 피우고 돌아다니면서 경계를 허문다. 내 가정과 경계를 버리고 도박하거나 경마하면서 전부다 명분은 사랑하는 아내와 가정을 위해서라고 한다. 나아가서 창조 질서인 남자와 여자의 경계도 허물고 싶어 하고 부부의 경계, 부모 자식의 경계를 허물려고 하는 것이 우리의 죄성이다. 아담도 창조주와 피조물인 이 경계를 허물고 하나님이 되고자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에 우리가 자녀를 낳는 수고를 하고 땀흘리는 수고를 겪게 하셔서 이 죄인의 경계를 알게 하셨다. 하나님은 멀리 계시지 않으시고 끝없는 한계 상황과 전쟁으로 아레오바고 같은 이 지옥 같은 삶의 전쟁으로 내가 이 경계를 자각해서 아내, 남편, 자녀와 부모의 경계, 나아가 창조질서인 남성과 여성 의 경계를 잘 지켜 그 경계에 맞는 역할을 잘 감당할 때 하나님이 그 때 자신을 알리시고 더듬어서 찾아서 알게 하시고 우리의 삶의 언어로 하나님을 알리시는 이 말씀이 기억이 나고 이 거주의 경계, 혈통의 경계 속으로 찾아오신 그 분을 만나는 것이다. 이것이 성령의 알리심이다. 아덴 사람에게 바울이 이렇게 설교했다. 바울은 지금 아레오바고 광장에 홀로 서 있지만 이 도시를 변화시켜보겠다고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쫓기고 또 쫓기고 이끌려 와 보니까 그 곳이 아레오바고가 되었다. 전쟁의 언덕이 되었다. 내가 그 때마다 벗어나려고 발버둥 칠 수도 없고 이제 말씀이 있으니까 치지도 않고 내게 허락하신 이 자리에서 여전한 방식으로, 애통한 마음으로 전하고 알리니까 이끌려 왔지만 결국 내가 서 있는 자리가 사명의 자리가 된 줄 믿는다. 

야곱도 열두 아들 중에 평생 요셉 바라기를 했다. 그런데 결국 주님을 더욱 진하게 만난 유다를 인정하기 까지 시간이 너무 걸렸다. 왜냐하면 유다는 며느리와 동침하고 아들을 낳았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베레스가 가문의 수치로 자리매김을 확실히 하고 있다. 언제 봐도 항상 부끄럽다. 이 혈통을 벗어나고 싶다. 저절로 죽을 때까지 유다는 겸손하다. 우리 오픈이 우리를 겸손케 해서 여기 우리가 죄인들이 많아서 우리는 늘 예배 때마다 눈물이 있다. 하나님이 너무 기뻐하신다. 요셉은 어려서부터 부모의 사랑을 받고 후에 형들 때문에 팔려 가서 흉년의 백성까지 구하고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도 다 거절하고 그 누가 예수님의 직계 조상이 유다(Judah: ‘Praise’ ‘찬양하라의 뜻)라고 하겠는가? 이게 이해가 안 되는 것이다. 성령의 알리심으로 구속사를 알아야 되는데 요셉이 처음에는 고난이 있어서 너무 (힘들게) 가다가 그 다음에는 계속 너무 모든 사람들에게 칭찬만 받고 유다는 아무리 믿었어도 맨날 손가락질만 받고. 여러분들, 우리가 오픈을 했다고 모두가 우러러봅니까? 그냥 우리들 교회에서 아는 사람이나 우러러본다. 다른데 가면 여전히 손가락질 당한다. 요셉은 총리대신이 되었다. 올림픽에서 금메달 하나만 따도 평생 모든 사람들이 우러러본다. 그러니까 요셉이 하나님 자리에 갔고 마지막에 경계를 넘었다. 그 당시 하나님의 대리자인 영적 아버지 야곱이 장자(므낫세), 차자(에브라임)를 거꾸로 축복을 했다고 자신이 하나님 자리에서 아버지에게 틀렸다고 성을 냈다. 요셉이 하나님을 거역한 것이다.(창세기48) 이렇게 영적 경계를 지키는 것이 인간의 힘으로는 정말 안 된다. 유다는 평생 입을 다물고 사는데 우리는 전부다 요셉이 주인공인줄 알고 창세기 37~48장의 요셉이 너무 좋다. 아무리 유다가 예수님의 직계 조상이라고 해도 우리는 눈만 뜨면 요셉이 좋다. 부르다가 죽을 이름 요셉! 요셉만 있다면 경계를 허물고 혈통을 다 벗어나고 싶어 한다.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동침한 유다 집안이 싫고 그 집에서 탈출하고 싶다. 그런데 우리는 그냥 예수를 알면 최고다. 구속사가 이렇게 인간의 힘으로는 이해가 안 되는 게 있다. 그러니까 유다를 부르짖는 교회가 진짜 얼마나 모든 사람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을 교회이겠는가? 우리의 고정관념이 대단하다. 늘 기도해주시기를 바란다. 오늘 아덴 사람들을 위해서 제가 설교를 한다. 제발 설교를 듣는 (우리들 교회) 아덴 사람들이 오늘 이 설교로 돌아왔으면 좋겠는데 안 돌아오더라.

 

(적용#2)

 

-내가 넘고 싶은 경계는 무엇인가? 내가 지켜야할 혈통의 자리는 어디인가? 부모, 형제, 자녀의 자리 다 벗어나고 싶은가? 배우자, 남편, 아내 자리 다 벗어나고 싶은가? 그곳이 아레오바고 같은 전쟁터인가? 아니면 너무 편안한 환경이라서 지키고 싶은가? (편안해서 지키고 싶으면 흘러 떠내려 갈 수 있다)

 

우리는 그 자리에서 사명을 찾아야 되는 것이다. 고난 받은 한 사람이 주님을 앎으로 인해서 고난이 왜 축복인가 하면 유다 한 사람으로 온 세계가 복을 받았다. 우리들 교회도 고난 받은 한 사람의 오픈으로 많은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오지만 나 혼자서 잘 먹고 잘 사는 사람은 거기서 끝나는 게 많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사명을 감당하도록 지으셨다. 사명을 모르면 하나님 자리에서 늘 불안한 것이다.

 

 

3.   우리는 하나님의 소생이라는 것이 알리심입니다(28~29)

 

하나님의 소생이라는 것을 알면 회개를 해야 한다.

 

28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29 이와 같이 하나님의 소생이 되었은즉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28절도 바울은 아덴 사람들에게 익숙한 헬라 시인의 글을 인용한다. 에피메니데스의 작품으로 간주되는 B.C.600년 경에 활동한 크레다(Crete)의 시인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당신 안에서 살며 움직이며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요라는 시구를 인용했다고 바울이 했다. 그런데그의 소생이 말도 에피메니데스보다 더 유명한 시인 아라투스의 시를 또 인용했다. 바울이 그들의 내용을 말하는 게 아니라 그 삶속에서, 그 경계 안에서

그들이 알아듣는 언어로 너무 너무 열심히 복음을 전했다. 세네카의, 에피메니데스의, 아라투스의 언어를 다 가져와서 우리가 듣기에는 성경 같다. 그래서 그 철학을 모르면 이 설교가 어렵다고 생각이 되는데 성령께서 아덴 사람들과 우리에게 알리시는 내용은네가 그렇게 경계를 지키고 혈통의 한계를 잘 지키고 있으면 바로 네가 하나님의 소생,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경계를 잘 지키고 있으면 내가 하나님을 힘입어 살아야 되는 하나님의 자녀(아들, )라는 것이다. 내 신분 의식이 딱 생긴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바울은 아덴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너희가 알아야 되는 존재가 아니라 모르더라도 하나님을 힘입어 살아야 되는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가 의존해야 하는 존재임을 그들의 언어로 알려주는 것이다. 죄가 우리와 하나님의 사이를 깨뜨렸기 때문에 우리는 자존적으로 스스로 살아가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소생이니 하나님을 힘입어서 살아가야 하는 존재인데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내가 뭐든지 하려고 하니까 맨날 노숙자가 되고 부글부글 끓고 혼자서 해야 되니 스트레스가 많고 너무 두렵다. 그리고 안식이 없고 매일 주먹을 불끈 쥐고.. 고아 청년을 보면 그러지 않게 생겼나? 예수 없는 사람이 지금 그런다. 아덴 사람이 지식으로 위장하고 있지만 두려움과 원망, 슬픔 속에 그렇게 살아간다. 그러므로 인생의 전쟁에서 나의 한계를 경험할 때 우리는 내 존재를 깨닫는다.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아야 되는데, 자기 한계상황을 못 깨달으니까 아덴 사람이 못 깨닫는다. 그러니까 복음 전하기가 너무 어렵다.

 

 

4.   회개한 바울의 삶 자체가 (가장 큰) 성령의 알리심입니다.(30~31)

 

30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바울은 과거,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시대에 자신이 하나님의 소생이라는 것을 몰라서 자기가 어떤 죄인이었는지를 뼈저리게 아는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여기서 이것을 간과했다고 한다. 그것은 그냥 넘어갔다는 말이 아니라 내가 알지 못해서 행했던 것들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값을 치르셨다는 것이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회개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회개란 복음을 듣고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신다는 소식을 들어서 내가 지금 앉아있는 모압 땅에서 공동체와 함께 일어나 그 땅을 떠나는 것을 말한다. 아덴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하고 땅을 떠나라고 하면서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을 들었다면 지금 내가, 바울 자체가 증거라는 것이다. 나도 전에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핍박자요 포행자(폭행자)였다. 그런데 이제 내가 모든 사람들에게는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다. 내가 바로 그 증인이다.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그러므로 하나님의 긍휼이 임하지만 알고 나서도 행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더 큰 진노가 임하니까너희들, 그렇게 안 믿다가는 지옥가는 거야.” 바울은 생명 내놓고 지금 여기에서 그동안에 매도 많이 맞고 감옥에도 갇혔는데 아덴이라고 안 그렇겠는가? 그런데 그것을 다 불사하고 지금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바울의 아덴 사람을 향한 이 사랑과 이 전함이 여러분 느껴지는가? 정말 바울 속에 늘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의 괴수인지, 자신이 살인자였는지 우리는 말씀이 임하면 성령께서 자신의 모습을 알리시고 알게 하신다. 내 추악한 모습을 보게 되면 우리는 진짜 십자가를 붙들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회개한 바울의 삶 자체가 성령의 알리심이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증거이며 우리도 회개의 간증이 명백한 증거가 되어 또 다른 사람에게 회개를 불러일으키며 복음이 전해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사건이 너의 사건, 바울의 사건이 아니라 바로 내 사건(나를 위해 구주께서 죽으신), 나를 자녀 삼기 위해서 죄인 중의 괴수인 바로 나를 위해 죽으신 사건임을 전하는 이것이 아레오바고 설교의 절정이고 유대인의 회당이나 이방인에게나 어디서도 빠지지 않는 죽은 자의 부활, 이 바울 설교에 그대로 여기서 이것을 얘기했다. 바로 죽으심과 부활은 바울도 우리도 하나님의 소생이라는 것을 알리신 것이다.

 

32 그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어떤 사람은 조롱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33 이에 바울이 그들 가운데서 떠나매

 

바리새파는 부활을 믿었는데 여기 아덴 사람들은 에피쿠로스 학파나 스토아 학파나 부활을 안 믿는다. 안 믿는 이들에게 죽은 자의 부활을 전하니까 이 시대의 진보든 보수든 안 믿는 사람들은 서로를 원수처럼 여기다가 예수 믿는 사람을 박해하는 데는 한 마음이 딱 되게 되어있다. 진짜 누구도 선한 사람이 없다. 그래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 부활을 안 믿는데 죽은 자의 부활을 전하니까 자기들이 그렇게 돌에 신상을 조각해 놓고 미신을 숭배하면서도 도리어 바울을 완전히 미신같이 보인다고 하면서 조롱을 한다.

얼마나 조롱이 특별했는지 누가는 신약 다른 곳에서 쓰이지 않는 단어로 이 조롱을 표현했다. 이것이 똑똑한 철학자에게서만 나온 조롱은 아니고 어근이 같은 단어가 쓰인 곳이 딱 한 군데가 있는데 오순절 성령강림을 본 유대인들도 조롱하여 성도들을 새 술에 취했다고 했다. 그러니까 예수를 너무 잘 믿는 유대인들도 성도들을 조롱했고 아덴 사람들도 바울을 조롱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를 잘 믿는다고 하는 순간부터 모두에게 조롱받을 각오를 해야 되는 것이다. 한편 또 다른 사람들은 바울의 말을 다시 듣겠다고 했는데 이것은 믿기를 거부한다는 것에 대한 완곡한 표현일 뿐이다. 왜냐하면 아덴 사람들은 정답이 생기는 순간 두려움에 빠지니 세상의 지성인들이 복음을 맞다고 생각해도 미꾸라지처럼 거부하면서 빠져나가니까 (그 지성인들이) 더 듣겠다고 했는데도 바울이 떠났다고 했다. 들을 마음이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믿을만한 증거를 하나님이 주시는데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믿음이 없으니 말씀을 전하는 바울을 떠나게 된다. 그런데 믿을 만한 증거라는 것이 믿음이라는 말과 같다. 그런데 증거를 주니까 알아서 믿으라는 뜻이 아니고 믿을 만한 증거를 주신 하나님께서 그 증거를 믿을 수 있는 믿음 또한 우리에게 주신다. 우리가 믿는 것은 사실 믿어지는 것이다. 믿어지니까 믿는 이것이 은혜이다.

 

아덴 사람들이 못 믿는 것은 하나님의 때가 안 돼서 그런지 (모르겠다) 그래서 믿음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의 반응은

34 몇 사람이 그를 가까이하여 믿으니 그 중에는 아레오바고 관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

세상 정신과 한바탕 영적 전쟁을 치르고 아레오바고를 떠나는 바울을 몇 사람이 가까이 한다. 바울이 증언한 믿을만한 증거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까이 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한 사람들이다.

여기서 이가까이 하다라는 헬라어 단어의 어근은 ’(glue)이라는 뜻이다. 성령의 강론 설교에서 바울을 따르는 딱풀 성도를 말했다. 그 때 그따르다라는 단어처럼 이가까이 하다라는 단어는풀로 붙인 듯 가까이 붙어서 따르다라는 뜻이다. 아덴에서도 비록 소수지만 딱풀 성도가 생긴 것이다. 그래서 교회가 세워졌다는 기록은 없지만 교만한 도시 아덴에도 소수의 성도가 생겼다는 것이다.(디오누시오/Dionysius, 다마리/Damaris)

수많은 철학자들의 강론을 들었지만 이 아덴에서 믿은 두 남녀 중 디오누시오(Dionysius)는 지도층이었다. 그런데 다마리(Damasris0는 신분은 모르지만 귀부인보다는 술집 여자였을 확률이 더 많다고 한다. 왜냐하면 2000년 동안 아덴에서 이름이 기록된 두 사람인데 제 정신 가지고 못 믿었을 것 같기에 술집 여자 쪽에 무게를 싣는다. 귀부인이었으면 이런 곳에 안 왔을 것 같다. 이게 다 구속사이다.

바울의 이 설교가 사도행전에서 정점인 설교라는 것에 동의가 되기도 안 되기도 한다. 이방인에게 전해진 독특한 설교인 것은 사실인데 너무 힘들었을 아덴에서 최선의 설교를 했다고 보여 진다.

교회는 회개한 사람들의 삶이 가장 강력한 성령의 알리심의 메시지가 있는 곳이다. 우리들 교회가 날마다 말씀으로 성령의 알리심으로 이 귀한 사명을 이어가기를 소원한다.

 

(적용#3)

 

-알지 못했던 시대에 행했던 죄악은 무엇인가? 나의 회개한 삶 자체가 하나님의 소생이라는 성령의 알리심이 되고 있나?

 

<Epilogue>

 

1)  우리는 이기려고 알기를 원한다

2)  감추어진 성부하나님의 경륜(Hidden Will of God)과 성자하나님의 나타나신 경륜(Revealed Will of God)과 성령하나님의 효과적인 힘/도우심(Effective Power of God)의 삼위일체가 성령의 알리심이다

3)  눈높이 언어가 내 삶 속에 임한 언어다

4)  우리는 경계와 연대와 혈통을 허물고 하나님이 되기를 부단히 원한다

5)  하나님이 정하신 경계(, 결혼, 죄인, 출세, 아내, 남편, 여성, 남성, 공동체 등)를 벗어나고 싶어하는 것이 인간의 속성이다

6)  한계상황에서 하나님의 경계 안에서 내게 허락하신 자리가 사명의 자리다

7)  삼위 하나님의 한계상황을 알리심의 경계를 통해 바른 앎을 알게 하신다

8)  영적 경계를 지키는 것이 사람의 힘으로 어렵다

9)  우리는 하나님이 정하신 경계를 지키면서 살고 하나님의 알리심에 힘입어 살아가는 존재다

10)   우리는 하나님을 힘입어 살아가는 존재이므로 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다

11)   말씀이 임하여야 내가 죄인 임이 알아지고 깨달아 지는 것이다

12)   예수님이 나를 위해, 내 죄사함을 위해 죽으심과 부활이 그 증거다

13)   믿을 만한 증거가 바로 믿음이다

14)   믿어지는 것이 은혜다

15)   선천적 동성애자인 헨리 나우엔의 만인 구원설(보편 구원설)은 예수 없이 구원이 가능하다는 위험한 발상이다

16)   히스기야(Hezekiah)처럼 내가 회개하는 것이 성령의 알리심이다

17)   쾌락주의나 경건주의나 예수가 없으면 둘 다 육은 악하기 때문에 다 선한 게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18)   아무리 쾌락주의고 아무리 경건주의라 해도 예수가 없으면 말짱 꽝인 것이다.

19)   알지 못했기 때문에 두려워했고 또한 안다고 생각하며 정답이라고 생각했기에 또한 두려워하는 것이다

20)   이제 알지 못하는 두려움은 결국 종교심이 되어서 알지 못하는 신에게까지 숭배하는 행동으로 이어졌고 이 세계의 지성이라고 불린 사람들이 한 일은 결국 돌과 신상을 세워 숭배하는 일이었다.

21)   내일 일을 알지 못해서 두려워하고 또 알기 때문에 두려워해서 뭔가 믿을 만한 우상을 세워놓는다.

22)   나의 노후를 보장해줄 것 같은 돈, 자식, 학벌, 외모 등 그런 우상들을 세워놓고 결국은 그 우상들의 통치를 받는다.

23)   하나님이 너무 감추어져 있지만 바로 옆에 있는데 이것이 고난이 없이는 찾아지지를 않는 것이다.

24)   하나님이 옆에 있는데도 모르고 오래 되었어도 말씀이 안 들린다. 그러니까 기다림이 필수적이다

25)   우리 인생도 이혼과 사별의 언어가 있고 도박, 상인, 농사, 학자의 언어가 다 다르다.

26)   삶 속에 그들의 언어로 알리는 것이 성령의 알리심이다.

27)   우리는 성령의 격분을 잘못 이해하여 함부로 말하고, 낮아지기 보다는 정죄하고, 껴안기 보다는 판단하고, 이해하기 보다는 오해하고, 알린다고 하면서 가르치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28)   그들의 언어로 말할 때는 낮아짐이 필요하고 자기 부인이 필요하다.

29)   누군가를 공감해주는 것에는 낮아짐과 자기 부인이 필요하다.

30)   구체적으로 오늘, 지금, 내 혈통, 내 수명의 연대 그리고 내 거주의 경계 속에서 자신을 발견할 수 있고 알리신다고 말씀하신다.

31)   철학자들이 일생 찾고, 찾고 또 찾았던 진리 그것을 오늘 내 삶 속에 임한 말씀으로 우리는 그 분을 더듬어 찾을 수 있고 만나며 교제할 수 있다는 것으로 이것이 가장 중요한 구속사인데 성부, 성자, 성령 중에서 예수님의 사역이 정말 중요하다.

32)   왜냐하면 감추어진 하나님의 경륜이 예수님의 낮아지심으로 이 땅의 경계 속으로 들어오지 않으셨다면 구속사는 일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33)   그럼 성령님도 효과적으로 도와주실 수 가 없다.

34)   죄인인 우리의 특징은 이 모든 경계를 허물고 싶어 한다.

35)   혈통과 연대와 경계를 허물어 다들 하나님이 되고 싶어 한다.

36)   창조 질서인 남자와 여자의 경계도 허물고 싶어 하고 부부의 경계, 부모 자식의 경계를 허물려고 하는 것이 우리의 죄성이다.

37)   아담도 창조주와 피조물인 이 경계를 허물고 하나님이 되고자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에 우리가 자녀를 낳는 수고를 하고 땀 흘리는 수고를 겪게 하셔서 이 죄인의 경계를 알게 하셨다.

38)   하나님은 멀리 계시지 않으시고 끝없는 한계 상황과 전쟁으로 아레오바고 같은 이 지옥 같은 삶의 전쟁으로 내가 이 경계를 자각해서 아내, 남편, 자녀와 부모의 경계, 나아가 창조 질서인 남성과 여성 의 경계를 잘 지켜 그 경계에 맞는 역할을 잘 감당할 때 하나님이 그 때 자신을 알리시고 더듬어서 찾아서 알게 하시고 우리의 삶의 언어로 하나님을 알리시는 이 말씀이 기억이 나고 이 거주의 경계, 혈통의 경계 속으로 찾아오신 그 분을 만나는 것으로 이것이 성령의 알리심이다.

39)   우리 오픈이 우리를 겸손케 해서 여기 우리가 죄인들이 많아서 우리는 늘 예배 때마다 눈물이 있다. 하나님이 너무 기뻐하신다.

40)   우리는 그 자리에서 사명을 찾아야 되는 것이며 사명을 모르면 하나님 자리에서 늘 불안한 것이다.

41)   하나님의 소생이라는 것을 알면 회개를 해야 한다.

42)   네가 그렇게 경계를 지키고 혈통의 한계를 잘 지키고 있으면 바로 네가 하나님의 소생,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43)   경계를 잘 지키고 있으면 내가 하나님을 힘입어 살아야 되는 하나님의 자녀(아들, )라는 것이다.

44)   내 신분 의식이 딱 생긴다는 것인데 하나님은 너희가 알아야 되는 존재가 아니라 모르더라도 하나님을 힘입어 살아야 되는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가 의존해야 하는 존재임을 그들의 언어로 알려주는 것이다.

45)   죄가 우리와 하나님의 사이를 깨뜨렸기 때문에 우리는 자존적으로 스스로 살아가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소생이니 하나님을 힘입어서 살아가야 하는 존재인데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내가 뭐든지 하려고 하니까 맨날 노숙자가 되고 부글부글 끓고 혼자서 해야 되니 스트레스가 많고 너무 두렵다.

46)   그리고 안식이 없고 매일 주먹을 불끈 쥐고.. 아덴(Athens) 사람이 지식으로 위장하고 있지만 두려움과 원망, 슬픔 속에 그렇게 살아간다.

47)   그러므로 인생의 전쟁에서 나의 한계를 경험할 때 우리는 내 존재를 깨닫는다.

48)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아야 되는데, 자기 한계상황을 못 깨달으니까 아덴 사람이 못 깨닫는다. 그러니까 복음 전하기가 너무 어렵다.

49)   내가 알지 못해서 행했던 것들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값을 치르셨다는 것으로 이것을 아는 사람은 회개하게 되는 것이다.

50)   내 추악한 모습을 보게 되면 우리는 진짜 십자가를 붙들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51)   그래서 회개한 바울의 삶 자체가 성령의 알리심이신 것이다.

52)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증거이며 우리도 회개의 간증이 명백한 증거가 되어 또 다른 사람에게 회개를 불러일으키며 복음이 전해지는 것이다.

53)   이 사건이 너의 사건, 바울의 사건이 아니라 바로 내 사건(나를 위해 구주께서 죽으신), 나를 자녀 삼기 위해서 죄인 중의 괴수인 바로 나를 위해 죽으신 사건임을 전하는 이것이 아레오바고 설교의 절정이다

54)   유대인의 회당이나 이방인에게나 어디서도 빠지지 않는 죽은 자의 부활, 이 바울 설교에 그대로 여기서 이것을 얘기했는데 바로 죽으심과 부활은 바울도 우리도 하나님의 소생이라는 것을 알리신 것이다.

55)   믿을 만한 증거라는 것이 믿음이라는 말과 같다.

56)   그런데 증거를 주니까 알아서 믿으라는 뜻이 아니고 믿을 만한 증거를 주신 하나님께서 그 증거를 믿을 수 있는 믿음 또한 우리에게 주신다.

57)   우리가 믿는 것은 사실 믿어지는 것이고 믿어지니까 믿는 이것이 은혜이다.

58)   교회는 회개한 사람들의 삶을 통해 가장 강력한 성령의 알리심의 메시지가 있는 곳이다.

 

Posted by 윤강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