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교회 2021년 5월23일 주일예배 말씀 요약(사도행전 17:16~ 23/성령의 격분)]
<사도행전 17:16~ 23>
16 바울이 아덴에서 그들을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 (While Paul was waiting for them in Athens, he was greatly distressed to see that the city was full of idols)
17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So he reasoned in the synagogue with the Jews and the God-fearing Greeks, as well as in the marketplace day by day with those who happened to be there)
18 어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하고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러라 (A group of Epicurean and Stoic philosophers began to dispute with him. Some of them asked, "What is this babbler trying to say?" Others remarked, "He seems to be advocating foreign gods." They said this because Paul was preaching the good news about Jesus and the resurrection)
19 그를 붙들어 아레오바고로 가며 말하기를 네가 말하는 이 새로운 가르침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 수 있겠느냐 (Then they took him and brought him to a meeting of the Areopagus, where they said to him, "May we know what this new teaching is that you are presenting?)
20 네가 어떤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 주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노라 하니 (You are bringing some strange ideas to our ears, and we want to know what they mean)
21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이외에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 ((All the Athenians and the foreigners who lived there spent their time doing nothing but talking about and listening to the latest ideas.)
22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Paul then stood up in the meeting of the Areopagus and said: "Men of Athens! I see that in every way you are very religious)
23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For as I walked around and looked carefully at your objects of worship, I even found an altar with this inscription: TO AN UNKNOWN GOD. Now what you worship as something unknown I am going to proclaim to you)
<Prologue>
이런 글이 있더라고요 ‘화가 나면 10까지 세고’, ‘죽이고 싶으면 100까지 세라’고 합니다. 화는 다스려야 하고 파괴한다고 합니다. 영어로 화(火)는 Anger입니다. 위험이라는 ‘Danger’에서 첫 알파벳 D가 빠지면 화(Anger)가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신사인 바울이 아덴(Athens)에서 격분했다고 합니다. 바울은 빌립보(Philippi)에서, 데살로니가(Thessalonica)에서, 베레아(Berea)에서 쫓겨나고 지금 아덴(Athesn)에 와있습니다. 르네상스 화가인 라파엘로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꼽히는 아테네 학당이라고 하는 그림이 있는데 상상 속에서 고대 그리스를 대표하는 철학자, 수학자, 과학자, 예술가, 작가들을 한 장소에 모아두고 그곳 이름을 봉숭아 학당이 아니고 ‘아테네 학당’이라고 했는데 아덴(Athes)이 이런 곳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대단한 아덴에서 마음에 격분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한번도 안 썼던 단어가 나왔어요. 바울의 격분은 어떤 것인지 오늘은 성령의 격분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말씀 요약>
성령의 격분은 첫번째는,
1. 영혼을 향한 애타는 관심입니다.(16절~17절)
이 신사적인 베뢰아(Berea) 사람들의 안내로 아덴(Athens)에 도착한 바울(Paul)은 베레아에 잠깐 남겨둔 실라(Silas)와 디모데(Timothy)에게 빨리 아덴(Athens)으로 오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혼자 사역을 시작하지 않습니다 오기를 기다립니다 쓰인 단어가 간절한 기다림을 말합니다. 그러면 왜 바울은 실라와 디모데를 기다렸을까요? 바울이 독불장군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베레아에 실라와 디모데를 남겨두었지만 사역을 하려니 그들을 도구가 아니라 동역자로 필요했던 거죠 더 중요한 이유는 실라와 디모데를 사랑하여 양육하려고 했던 것 같아요 로마제국 때 아덴은 세(勢)가 많이 기울어서 일류 도시였던 예전의 도시가 아니었어요 문화적으로 여전히 헬라 문화를 대표한 곳임을 직접 본 거죠. 아시아나 마게도냐와는 차원이 다른 문화적 선진 도시였던 거죠. 앞으로 이어질 아가야 사역을 위해 실라와 디모데를 훈련할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까지 전도와 분수령적인 사건이 될 것 같은 생각이 든 것 같습니다 한 사람을 귀한 영혼으로 보았습니다. 사역의 보탬도 중요했지만 그들을 한 명의 온 전한 사역자로 양육하는 것을 중요시했습니다. 그곳에서 필요한 것은 ‘기다림’이었습니다. 함께하며 성장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죠 한 영혼을 향한 애타는 관심에서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쓸지 아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말씀의 사역자로 어떻게 자라고 있는지 하나님의 사명 앞에 어떻게 서있는지에 관심이 없었을 것입니다. 한 영혼을 살리는 것이 최고임을 알기 때문에 고민하고 분별하며 기다릴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유대인을 기다라는 것과 다릅니다. ‘헨리 나우웬’의 ‘만인 구원설’, 이거는 아닙니다. 택자가 있죠. 실라와 디모데를 향한 관심으로 기다리면서 아덴을 조사하면서 사역을 준비했을 것입니다. 아덴-아테네 하면 예나 지금이나 철학과 예술의 고향으로 유명하죠 철학의 조상에 해당하는 소크라테스-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도 여기서 활동했고 민주주의와 신화와 문학도 여기서 시작되고 꽃을 피웠습니다. 음악의 근간도 여기서 나왔습니다. 인류 품격의 본고장 그러니 아덴 사람들의 자부심이 하늘을 찔렀겠죠 그러나 로마에 의해 세력이 약해져도 자존심은 여전합니다. 자부심 속에서도 온 도시가 우상 밭, 우상 숲으로 가득 찬 우상이 판을 치는 우상뿐 이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볼 때 보암직하고 탐나는 예술품들이었습니다. 제우스 신전 등등 그런데 예술품이었지만 그걸로 뭘 하냐 하면 술과 향락에 바카스 신전에 포도주와 음악소리 집단적인 황홀경 가운데 향락적인 분위기를 보면서 이제 ‘테노펜’이라는 역사가는 한마디로 “온 도시, 아테네 전부가 곳곳에 우상을 섬기는 하나의 제단(Altar)”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러니까 상상이 안되는 그 모습을 보던 바울은 마음에 격분했습니다. 분노가 일어나면 어떻게 합니까/ 때려 부수고 화내잖아요 바울이 격분했잖아요 격분했다는 단어는 단순히 화가 난 게 아니라 구약에서 번역을 보면 하나님에 대해서만 이 단어가 쓰였어요.
백성들의 우상숭배에 대해 진노했을 때 쓰였어요. 멸망할 수밖에 없게 되었을 때 애통한 마음으로 그들의 죄악에 대해 진노할 때 격분하게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사랑으로 격분한 거예요. 마음으로 불붙은 바울은 격분하니까 실라와 디모데를 기다리다가 주말에 회당에서 강론하고 만나는 사람마다 복음을 전했습니다. 변론이라는 말은 강론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아덴에서 들리지 않는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치워달라는 예수님의 말처럼 힘든 일이었습니다. 오늘 세례 간증 은혜 받았습니다. 회사에서 다 그러잖아요 비리가 있으면 고발을 해야 되는 거죠 우리나라 인권이 왕 노릇 하니까 이걸 이렇게 깨달은 것은 보통 택자가 아닌 겁니다. 대표님이 깨달았다고 하니까 정말 감사합니다. 성령의 격분은 제자들을 사랑으로 기다리는 것입니다.
*격분-단순히 화가 났다는 것이 아니라 거의 하나님에 대해서만 쓰였다. 대부분 금송아지 숭배나 백성들의 우상숭배와 반역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진노하셨음을 표현할 때 쓰였고 멸망할 수밖에 없게 되었을 때 하나님이 너무도 애통한 마음으로 그들의 죄악에 대해서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분노로 격분을 했다는 것이다.
앞 절에는 사랑으로 기다렸는데 아덴의 영혼을 향한 애타는 관심입니다.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격분입니다. 맨날 온유한 것만이 사랑이 아닙니다. 날마다 진짜 지옥 간다고 하는 것은 격분입니다. 그런데 맨날 천국 이야기만 하다가 지옥 가면 어떻게 합니까? 사람은 보수적으로 잡아야지 좋다고 합니다. 항상 십자가와 부활은 한 단어입니다. 사랑으로 멸망 받는다고 애타는 마음으로 가장 격분한 것이 아덴입니다. 잘 먹고 잘 사는 곳. 돌로 쳐 죽이는 감옥에 간 격분했던 이야기는 안 합니다. 부자들이 격분의 대상 맞습니다.
(적용#1)
-목장에서 한 사람을 양육하기 위해 얼마나 기다려 주나요?
-겉으로는 품격의 아덴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우상 밭인 내 안의, 내 가정의 죄악은 무엇입니까?
한통의 매일을 받았습니다 우리들교회 집사님입니다.
현재 산부인과 의사로 분만전문병원에서 7년째 의사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올해 초부터 낙태죄가 폐지되면서 이제 낙태를 해도 법적 처벌이 없어졌는데 아직 세부사항이 공식적으로 확정되지 않고 공문이 없어 낙태수술을 시행하지 않았지만은 이제 임산부가 원하는 경우 임신부가 원하는 경우 제한 없이 시행하도록 원장님 지시 사항이 내려왔습니다. 그러면 저의 선택지는 두 가지인데 첫째는 이 낙태 시술은 명백히 죄이니까 저는 하지 못하겠다고 거절하는 게 맞을까요? 낙태죄는 세상 법상 범법 행위가 아니니 말 없이 수행하면서 계속 회개하면서 가야 하는 것일까요? 저는 병원에서 아무래도 월급을 받고 있다 보니, 이 시상을 거절하기 어려운 처지입니다 그러나 제가 낙태 시술을 못하겠다고 하는 것이 한 생명 한 영혼을 구원하지 못해서 애통해서 그러는 것인지 저희 영육 간의 안위를 위해 그러는 것이 뭔지 그게 또 의구심이 들기도 해요 사실 이게 제가 책임져야 될 문제지 그래서 제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라는 생각이 들지만 그래도 목장에서 얘기를 나누니까 산부인과라면 목사님께 한번 메일을 드려보려고. 저한테 보냈는데. 저도 기가 막힙니다. 이분이 이런 편지를 보냈다는 것 자체가 너무 참, 진짜 크리스천 맞고요. 애통하면서 성령에 격분을 하고 계신다고 생각이 들어요.
2. 세상의 정신 앞에 격분해야 합니다.(18절~21절)
삶의 현장에 복음을 전하러 나가니까 그 시대의 세상 정신이 바울을 맞이합니다. 에피쿠로스(Epicuros/Epocurean)와 스토아(Stoa/Stoic) 철학자입니다.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하니 둘이 라이벌이었다가 한패가 됩니다. 한패가 되어서 쟁론을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상과 종교의 목적은 행복이잖아요 에피쿠로스 학파나 스토아학파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길이 달라요 에피쿠로스는 쾌락을 추구합니다. 쾌락을 추구한다고 탐욕을 추구한다고 하는데 그게 아니라고 고차원적인 쾌락입니다. 낮은 수준의 욕망은 억제하고 즐거운 상태가 되는 것을 추구합니다. 내 욕심을 버리고 작은 것에도 행복을 느끼는 것을 가르칩니다. 그러니까 모든 백성들이 항상 작은 것에 대한 것을 느끼라고 하잖아요 에피쿠로스 파입니다. 행복을 추구하는 이유는 이들의 출발의 이유가 원자론이고 죽으면 아무것도 소용없기 때문에 ‘오늘도 무사히’의 철학입니다.
스토아 학파는 이성주의자들이죠 금욕주의와 경건주의. 그래서 스토아는 기둥이라는 뜻인데 기둥에서 거닐면서 가르침을 전했다고 합니다. 이성이 최고의 판단 기준이고 자연의 질서를 받아들여 마음의 평화에 도달해서 운명적으로 주어진 일을 능동적으로 해야 한다는 적극적 사고방식입니다.
이성을 따라 생각하면 ‘모든 것을 충족하고’의 사상이 발전해서 영지주의가 되고 아덴의 신들 많잖아요. 범신론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스토아철학은 슈퍼맨 슈퍼히어로가 되기를 추구하는 철학입니다. 그래서 로마의 지도층과 황제들이 스토아철학을 좋아했습니다. 육체를 부정하는 겁니다. 함부로 살아도 되는 겁니다. 물질을 부정하기 때문에 육체가 부정하니까 더러운 것이고 그래서 자살 또한 선한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자살도 이성적으로 심사숙고한 뒤에 행해야 하고 고통스러울 때에는 정당한 행위라고 하는 것인데 스토아학파를 창설한 제논(Zenon)도 자살했어요. 두 번째 후계자 클레안테스도 자살을 했다. 네로의 스승인 유명한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는 노년이 되어 육체적 쇠락이 와서 자살하는 것은 옳은 일이라고 주장을 했다. 이 세네카도 자살을 했다. 그 제자인 네로 황제도 자살을 했다. 그러한 논리에 따라 로마의 스토아 학파는 심사숙고한 사람이 이성적으로 자살을 원할 때면 정맥을 자르는데 능숙한 기술자를 보내주는 서비스도 제공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나라 지도자들도 이 스토아 학파라서 자살들을 할까? 예전에는 상상도 못한 자살이 너무 쉽게 행해진다. 우리나라가 예전보다 굉장히 아덴이 되었다. 황제들이 좋아하는 자살, 황제들이 좋아하는 동성애, 쾌락의 끝판왕이고 나중에 육체를 부정하니까 나의 이성과 이런 명성에 맞지 않으면 자살을 하는 이것이 얼마나 매력이 있었겠나?
인간이 추구하는 삶은 결국 이 두 종류의 삶이 적당히 섞인 것 아니겠는가?
에피쿠로스 학파처럼 무사안일을 추구하는 부분도 있고 스토아학파처럼 군계일학을 추구하는 부분도 있다
상황에 맞게 이 두 부분을 잘 조합해서 대처하는 게 인간의 지략이다. 결국 다 행복을 추구하는 인본적인 노력이다. 예수가 없으면 다 이렇게 살아간다.
여러분은 쾌락주의인가, 금욕주의인가, 경건주의인가? 결국은 겉으로 쾌락, 겉으로 경건해도 뒤로 가면 다 똑같다. 결국은 다 끝에 가보면 자살을 하던지 음란의 문제가 있다. 인간의 한계인 것이다. 이런 스토아와 에피쿠로스 학파의 가르침을 듣고 바울이 어떻게 격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구원과 상관없으니 자살하는 거죠. 예전에는 상상 못했던 자살이 로마 황제들이 되어서 그런가? 아덴 이어서 그런가? 쉽게 행해지는 것 같아요. 바울이 격분할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죽어가는 영혼들을 보면서 격분이 되는 거죠. 어떤 분은 목사님이 시기질투대상이 연예인과는 상관없다고 했는데 좋아하는 연예인에 대해 뭐라고 하면 가만히 못 있겠다고 합니다. 우리들교회 교인들 가운데 특별히 여자 집사님들 가운데 있습니다. 인간이 추구하는 삶은 두 종류의 삶의 적당히 섞인 것 아닙니까? 그래서 에피쿠로스 지성인들처럼 추구하는 것도 있고 스토아처럼 군계일학을 추구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상황에 맞게 잘 대처하는 게 인간의 지략인 거죠 인본적인 행복을 위한 노력인 거죠 인생이 여기에다 있어요. 이런 가르침 앞에 예수를 믿는다면 어떻게 격분을 안 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이제 이성과 쾌락이 아닌 복음을 가지고 이 현장으로 가서 시대정신과 싸워야 하는 것이 성령의 격분인 것이다. 이 시대정신, 쾌락과 금욕주의의 정신 앞에 격분하고 쟁론하고 신앙을 정립해서 우리 자녀들에게 가르쳐야 하는 것이 성령의 격분입니다.
자녀들을 보면 말이 안 나옵니다. 다들 그냥 상전을 모시고 있어요 어떻게 격분을 해야 할지 모릅니다. 바울은 18절에 격분을 해서 격분을 전하니 말쟁이(babbler)라고 합니다. 말쟁이는 참새를 보면서 만든 표현인데 그럴듯한 썰을 만들어 풀어대는 거리의 철학자를 폄하해서 말쟁이라고 합니다. 예수와 부활을 전하는 바울을 폄하합니다. 바울이 몰랐을리 없죠 그래도 바울은 멈추지 않고 전했습니다 수치와 조롱을 당해도 멈추지 않았는데 이런 사람을 성령의 신사라고 합니다.
(빌립보서 3장 8절)
그뿐만 아니라,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하므로, 나는 그 밖의 모든 것을 해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고, 그 모든 것을 오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얻고,
(What is more, I consider everything a loss compared to the surpassing greatness of knowing Christ Jesus my Lord, for whose sake I have lost all things. I consider them rubbish, that I may gain Christ)
어떤 지식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최고의 지식인 것을 바울이 알기 때문에 확실히 전하는 겁니다. 얼마나 당할 수가 없으면 말쟁이라는 표현을 했을까요?
그래도 데살로니가(Thessalonica)사람들처럼 막 그냥 시기심에 때리고 가두고 그러지 않고 이 새로운 가르침이 굉장히 이상하네 하면서 알고 싶다고 합니다. 그러면 멋있어 보이잖아요. 그런데 여기서 제일 믿는 사람이 없었기에 더 안 변하는 사람들입니다. 믿지도 않으면서 말해 볼래? 이거는 지식에 대한 욕구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레오바고(Areopagus)는 예로부터 이어진 최고 법정입니다. 로마에 정복된 이후 종교문화에 대해 결정권이 있던 곳입니다. 아레오는 전쟁이고 바고는 언덕입니다. 이게 의미상 전쟁의 언덕이라는 의미로 바울은 시대의 정신 앞에 홀로 붙들려가는 겁니다. 옥에 갇힌 빌립보에서, 소동이 일어난 데살로니가에서, 강론할 때 빌립보에서 교회가 세워지고 늘 믿는 사람이 있었는데 여기서는 혼자 믿는 사람이 한 명도 없습니다.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고 말쟁이라고 조롱합니다. 진짜 사도바울을 생각하면 기가 막힙니다. 그래도 우리는 아레오바고(Areopagus)로 나가야 합니다. 전쟁을 통해서 이 나의 단단한 행복을 추구하는 가치관과 이성적인 신념들이 깨어지기 때문입니다. 한 손에는 성경을 보고 신문을 보면서 시대정신 스토아와 에피쿠로스에 격분하면서 거대한 세력과 싸워야 합니다.
날마다 전쟁이 있다고 합니다. 전쟁에서 싸우고 싸우다 보니까 싸울 상대가 넌 줄 알았는데 와이프 있는 줄 알았는데 자식 남편 사장인 줄 알았는데 나와 내 생각이 죽어져야 할 대상임을 깨닫고 하나님을 거스른 원수임을 깨닫고 날마다 주어진 말씀 앞에 상고하며 부인하고 죽어져야만 부활의 승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날마다 붙들고 가야 합니다. 이제 저절로 될 수밖에 없습니다. 믿는 사람이라고 자녀도 부모도 함부로 여기고 믿는다고 해서 대접을 해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공표하는 순간 함부로 대합니다. 학교 현장에서 시장에서 삶의 현장에서 자녀들에게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성은 네가 선택하는 것이고 생명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 우리나라의 현실입니다. 가정도 이성적으로 선택해서 이혼할 수 있어요 이성적으로 선택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현실이 우리는 삶의 치열한 터전이 시장으로 들어가서 변론하고 쟁론하고 바울처럼 말쟁이 고리타분한 사람이라고 조롱 당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왜 결혼을 지켜야 할지 아무도 몰라요 보기에 좋고 한두 번 싸우면 이혼하는 겁니다. 이게 심해지고 있어요. 죽을 힘을 다해서 가정을 지켜야 하는 것이 고귀한 고품격의 구속사를 한마디만 해도 청년들 너무 귀한 청년들인 거죠 가정을 지켜야만 합니다.
복음을 전하다 보니까 아덴 사람들이 보니까 오직 새것에만 관심을 쏟는 것이 보였어요 어제들은 것도 식상해요 새 학설 새 논리 등에 거의 미치는 거예요 하나님이 만드신 태양은 아무리 오래되어도 날마다 새롭지 않습니까 날마다 새롭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것은 하루만 지나도 지겨워요 태양까지 가보겠다고 연구합니다. 그러면서 그러니까 조금이라도 새로운 학설이 나오면 그것으로 말하고 듣기 위해 시간을 씁니다. 아덴이 NASA 실리콘 벨리 인 것 같습니다. 유학 간 자들도 많습니다. 늘 새로운 것을 깨우치는 것 같습니다. 지성인들이 새것을 그렇게 좋아하는 겁니다. 인간이 다 죄인입니다. 지성인들이 반복을 싫어합니다. 반복되는 말은 듣기도 싫어하고 반복하는 것은 더 싫어하고 똑똑한 사람들은 반복되는 것을 싫어하고 새로운 것을 원합니다. 반복하면 자존심이 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똑똑한 이성훈 목사에게 반복하는 게 싫다고 물으니까 어떻게 아셨어요?라고 대답이 왔습니다. 똑똑한 사람들은 두 번 말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을 보면 새것만 나오니 얼마나 고상해 보여요? 먹고 사는 문제도 자유로워요. 지성적인 탐구만으로도 생계를 해결할 수 있으니 대단해 보입니다. 새 거를 좋아하니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여자도 집도 차도 새것에 목말라 있고 세상은 부지런한 자라고 하고 연애와 결혼이 대표적인 것입니다. 결혼을 하면 헌 옷 입고 만나요. 삶은 헌 것입니다. 새것의 한계는 너무나 얄팍합니다. 새 옷 입고 만나는 사람은 얄팍하게 알 수밖에 없어요 사고도 늘 결혼을 안 해본 사람은 깊을 수가 없어요 요새는 결혼 안 하고 연애만 하자 이것이 트렌드잖아요. 이게 에피쿠로스 학파, 결혼해서 뭐 하냐 이것이 스토아학파입니다. 미인은 3년, 요리를 잘하면 30년, 예수 믿으면 100년이 행복하다고 합니다.
그래도 미인과 미남을 택하겠어요? 200년 된 간장은 상상을 불허하는 맛이라고 하잖아요 쾌락주의와 금욕주의는 하나입니다. 그런데 성욕이 강해 성적 죄를 짓고 있어요 그런 사람들 보고 쾌락이 정당하다고 하니 표를 주고 싶겠습니까? 육체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니까 육체를 부정하니까 자살이 정당하다고 하니까 옳소이다 하죠 자기가 죄를 짓고 있으면 그런 쪽(자살의 정당성)으로 마음이 가는 겁니다. 그러나 새로운 가르침은 인생의 목적은 행복이 아니라 거룩이라고 생명은 지키고 낳아야 한다는 것을 바울이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격분하면서 전해야 합니다. 가정은 지켜야 합니다. 엊그제 세기의 그룹 선남선녀가 8개월 만에 이혼을 했어요. 예쁘고 공부도 돈도 많아요 모든 것을 다 갖췄어요. 그런데 결혼을 해보고 헌 옷 입고 만나니 아닌 거예요. 한마디만 해주면 안 할 텐데 그런 마음이 늘 있어요.
너무 가진 게 많으니까 말을 안 듣긴 할 것 같아요. 슈뢰더 독일 전 총리가 5번째 결혼을 하고 아내는 2번째 결혼을 했는데 전 남편에게 소송을 당해서 3천만 원을 배상했습니다. 이 시대에 격분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한 번의 만남에 가정이 깨졌으니 격분할 수밖에 없습니다.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경건주의를 가장하는 사람도 속에는 행복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다 똑같습니다. 빌 게이츠는 더 이상 부부로서 성장할 수 없다고 이혼했습니다. 에피쿠로스 학파는 가문의 단 비 잖아요 네가 원하는 데로 하라고 예수를 안 믿어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만인 구원론’은 자신의 진리를 합리화하잖아요
그러니까 당연히 그들에게 우상이 되는 겁니다. 내가 도저히 못 끊는 성적인 욕망, 다른 여자와 살아야겠는데 결혼을 지켜야 하는데 합리화하면서 가정을 깨도 좋다고 하니까 얼마나 악하고 음란합니까? 이 세상의 악하고 음란한 것을 합리화하는 것이 스토아와 에피쿠로스입니다. 내가 돈 많고 환경이 되는데 여자를 왜 못 만나겠어? 이 본성을 거슬러야 하는 가르침입니다. 왜 내가 그 좋은 즐거움을 내가 끊겠냐고 너무 이해가 됩니다. 각자의 중독이 다를 뿐입니다. 각자의 우상이 다를 뿐입니다. 그래서 고난이 축복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으면 고난도 안 옵니다. 그러니까 이런 걸 하나하나 읽어보면 격분 되어야 하는데 찔리잖아요? 격분 돼요? 아무도 대답을 안 해요 격분 돼요? 역시 어려워요 좁은 길입니다.
(적용#2).
-나는 이혼 낙태 동성애 앞에 말쟁이, 행동쟁이가 되어 조롱 받으며 격분하고 있습니까? 이성적으로 그럴 수 있다고 존중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새 차, 새 집, 새 남자, 새 여자, 새 학문,새 목장 어디에 우상을 삼고 있습니까?
3. 범사에 종교심이 많을 보고 격분해야 합니다.(22절~23절)
종교심이 많다고 하면 훌륭해 보이다고 하잖아요 그거는 이렇게 사실은 내가 기독교를 믿는데도 저 사람 믿는 것은 미신적이라고 하면 기분 나쁘잖아요? 이 말이 종교심이라는 뜻입니다. 욕입니다. 세상 문헌에서 쓰인 단어는 여기에 딱 한 번 쓰였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이 사람들 보고 종교심이 많다고 이 단어는 문자적으로 귀신들을 두려워하는 겁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아덴 사람들이 귀신들을 두려워합니다. 그 중심에는 대단한 철학자들이 있는 겁니다. 지적 호기심 안에는 엄청난 두려움이 숨어있는 것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세상의 지성이 왜 이렇게 새로운 것만 찾아 방황할까요? 두려움 때문입니다. 신상과 재단을 만들어 섬기는 것이고 자기들이 미처 알지 못하는 신에게 재단까지 만들었습니다. 내가 알지 못해서 귀신에게 제사를 못 드렸으니까 아는 것이 나를 지켜 줄 힘인데 끊임없이 탐구합니다. 무서운 열정으로 끊임없이 방황합니다. 정답이 생기면 두려워집니다. 마음이 쉬지 못합니다. 우리 모든 것을 잘하는 것을 귀신같이 잘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고린도전서 8장 1절)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Now about food sacrificed to idols: We know that we all possess knowledge. Knowledge puffs up, but love builds up).
지식이 인간에게 가장 고상한 힘이잖아요 인간을 교만하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높아지면 낮아지는 것이 두렵습니다. 여기서 예외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처럼 높아지려고 합니다. 그 자리에 가는 것 자체가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아무리 공부해서 박사가 되어도 두려움입니다. 이 자리 떨어질까 봐 새것을 알지 못할까 봐 마음에 안식이 없어요.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권 교수는 날마다 건강 때문에 두려워한다고 하잖아요. 이 대단한 지성 속에 있는 두려움을 바울이 정확하게 드러냅니다. 구원받지 못하는 그들을 보면서 격분하고 애통해 합니다. 고난이 우연히 오거나 운이 안 좋아서 오는 것이 아니라 성도는 고난 받게 세워졌다고 장차 받을 환란에 대해 말하니까 쟁론할 수밖에 없습니다. 유대인들도 못 듣는 이야기를 바울이 전하면 한결같이 구속사를 원하는 겁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십자가로 길로 놓고 갈 때 아레오바고(Areobagos) 같은 곳에 종교심을 가지고 귀신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구속사를 믿으며 나아가야 합니다.
(적용#3)
-여전한 방식으로 반복하기 지겨운 일은 무엇입니까?
-가장 새로운 것을 찾는 대단한 지성 안에 두려움이 숨어 잇다는 말이 얼마나 인정됩니까? 알지 못하고 위하는 헛된 우상은 무엇입니까?
여러분. 아덴 출신들이 주님을 만나려면 이 정도 대화가 가능한가 봐요. 여러분들 이렇게 금융 전문가가 돈 날려먹는 데는 그냥 많은 날이 필요가 없어요. 금융공학 대학원을 나왔대요 카이스트라고 합니다.. 돈이라는 거는 성령의 전략으로 벌리는 거지. 내가 벌라고 노력하면 알수록 다 없어지는 거예요. 이타적으로 살아야지. 돈도 벌리는 거지. 돈 벌겠다고 달려들면 다 안 되는 비트코인 추락했어요. 그렇죠 비트코인이요. 할 수 있어요. 그게 정거장이 이제 가상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거 하려면 스물네 시간 그거 쳐다보고 있어요. 24시간 그래서 비트코인 전공인 분도 있더라고. 굉장히 못마땅하다고. 우리들교회가. 밸런스트 라이프(balanced life)가 안 되기 때문에. 정신이 다가 있으니까 그래서 진심으로 말씀을 받고 상고하며 이제. 공동체의 권면으로 쓸 수 있는 이 땅에서의 마지막 일터를 허락해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했는데 자신의 의심을 내려놓고. 이분이 얼마나 열심히 살았겠어요. 이 공부를 다 하려니까 그런데 그 다음에 지난날에 저희를 회개하며 목사님의 책 면접을 읽으며 말씀과 기도로 취업을 준비했는데 그렇게 기도로 준비해도 계속 떨어지더니 네 번째 지원해서 드디어 주님 합격을 허락해 주셨어요. 이 땅에 마지막 일자리를 허락해 주셨는데 구원과 거룩의 사명을 잘 감당하는 남편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덴사람들은 믿는 사람이 거의 없어요 그런데 이분은 특별한 은총을 받았어요. 망해 가지고 진짜 망한 게 축복이에요 여러분들 정말 돈을 내가 벌라고 노력하고 맨날 한탕으로. 또 이렇게 생각을 하니까 어쩜 우리도 꽤 이런 분이 계세요. 종류별로 없는 분야 안 계시죠. 어떤 고난도 이렇게 장르별로 종류별로 다 가지고 계세요.
<Epilogue>
1) 火가 나면 10까지 세고 상대를 죽이고 싶으면 100까지 세라고 한다
2) 결국 화는 다스려야 하는 감정이며 화가 더해지면 파괴적으로 변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1) 성령의 격분은 영혼을 향한 애타는 관심이다.
2) 세상의 정신 앞에 격분해야 한다.
3) 범사에 종교심이 많음을 보고 격분해야 합니다.
4) 사도 바울은 한 영혼을 살리는 것이 최고임을 알기 때문에 고민하고 분별하며 기다릴 수 있었다.
5) 항상 십자가와 부활은 한 단어다.
6) 구원과 상관없으니 자살하는 것이다.
7) 이성과 쾌락이 아닌 복음을 가지고 이 현장으로 가서 시대정신과 싸워야 하는 것이 성령의 격분인 것이다
8) 이 시대정신, 쾌락과 금욕주의의 정신 앞에 격분하고 쟁론하고 신앙을 정립해서 우리 자녀들에게 가르쳐야 하는 것이 성령의 격분이다.
9) 수치와 조롱을 당해도 멈추지 않았는데 이런 사람을 성령의 신사라고 합니다.
10) 어떤 지식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최고의 지식인 것을 바울이 알기 때문에 확실히 전하는 것이다.
11) 그래도 우리는 아레오바고(Areopagus/전쟁의 언덕)로 나가야 하는데 전쟁을 통해서 나의 단단한 행복을 추구하는 가치관과 이성적인 신념들이 깨어지기 때문인 것이다.
12) 한 손에는 성경을 보고 신문을 보면서 시대정신의 양대 산맥인 스토아 철학과 에피쿠로스 철학에 격분하면서 거대한 세력과 싸워야 한다.
13) 날마다 전쟁이 있는데 전쟁에서 싸우고 싸우다 보니까 싸울 상대가 넌 줄 알았는데 와이프 있는 줄 알았는데 자식 남편 사장인 줄 알았는데 나와 내 생각이 죽어져야 할 대상임을 깨닫고 하나님을 거스른 원수임을 깨닫고 날마다 주어진 말씀 앞에 상고하며 부인하고 죽어져야만 부활의 승리를 경험할 수 있다.
14) 날마다 붙들고 가야 합니다.
15) 하나님이 만드신 태양은 아무리 오래되어도 날마다 새롭지만 하나님이 없는 것은 하루만 지나도 지겨워진다
16) 지성인들이 새것을 그렇게 좋아하는 것이며 인간이 다 죄인이다.
17) 지성인들이 반복을 싫어하며 반복되는 말은 듣기도 싫어하고 반복하는 것은 더 싫어하고 똑똑한 사람들은 반복되는 것을 싫어하고 새로운 것을 원하는 이유는 반복하면 자존심이 상하기 때문이다.
18) 새 것을 좋아하니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여자도 집도 차도 새것에 목말라 있고 세상은 부지런한 자라고 하고 연애와 결혼이 대표적인 것이다.
19) 결혼을 하면 헌 옷 입고 만나는데 삶은 헌 것이다.
20) 새 것의 한계는 너무나 얄팍한 것으로 새 옷 입고 만나는 사람은 얄팍하게 알 수밖에 없는 것이다
21) 思考도 늘 결혼을 안 해본 사람은 깊을 수가 없다
22) 요새는 결혼 안 하고 연애만 하자 이것이 트렌드인데 이게 에피쿠로스 학파, 결혼해서 뭐 하냐 이것이 스토아학파다.
23) 미인은 3년, 요리를 잘하면 30년, 예수 믿으면 100년이 행복하다고 한다.
24) 그래도 미인과 미남을 택하겠나?
25) 200년 된 간장은 상상을 불허하는 맛이라고 하는데 쾌락주의와 금욕주의는 하나인 것이다
26) 육체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니까 육체를 부정하니까 자살이 정당하다고 하니까 옳소이다 하는 것이다
27) 자기가 죄를 짓고 있으면 그런 쪽(자살의 정당성)으로 마음이 가는 것이다.
28) 그러나 새로운 가르침은 인생의 목적은 행복이 아니라 거룩이며 생명은 지키고 낳아야 한다는 것을 바울이 말하고 있다.
29) 우리는 격분하면서 전해야 하고 가정은 지켜야 한다.
30) 엊그제 세기의 그룹 선남선녀가 8개월 만에 이혼을 했는데 예쁘고 공부도 잘했고 돈도 많을 정도로 모든 것을 다 갖췄지만 결혼을 해보고 헌 옷 입고 만나니 아닌 것이다
31) 이 세상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경건주의를 가장하는 사람도 속에는 행복을 추구하고 있다. 다 똑같다.
32) 빌 게이츠는 더 이상 부부로서 성장할 수 없다고 이혼했다.
33) 네가 원하는 데로 하라고 예수를 안 믿어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만인 구원론’은 자신의 진리를 합리화하는 것이다
34) 이 세상의 악하고 음란한 것을 합리화하는 것이 스토아와 에피쿠로스이다
35) 왜 내가 그 좋은 즐거움을 내가 끊겠냐고 너무 이해가 되는데 각자의 중독이 다를 뿐이고 각자의 우상이 다를 뿐이기에 고난이 축복인 것이다.
36)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으면 고난도 안 온다.
37) 종교심이 많다고 이 단어는 문자적으로 귀신들을 두려워하는 겁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아덴 사람들이 귀신들을 두려워하며 그 중심에는 대단한 철학자들이 있는 것이다.
38) 지적 호기심 안에는 엄청난 두려움이 숨어있는 것이 드러나고 있다.
39) 세상의 지성이 왜 이렇게 새로운 것만 찾아 방황할까? 두려움 때문이다.
40) 내가 알지 못해서 귀신에게 제사를 못 드렸으니까 아는 것이 나를 지켜 줄 힘인데 끊임없이 탐구하게 되며 무서운 열정으로 끊임없이 방황하게 된다. 그래서 정답이 생기면 두려워진다. 마음이 쉬지 못한다.
41) 우리 모든 것을 잘하는 것을 귀신같이 잘한다고 한다
42)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운다(Knowledge puffs up, but love builds up/고린도전서 8:1)
43) 지식이 인간에게 가장 고상한 힘이므로 인간을 교만하게 할 수밖에 없다.
44) 높아지면 낮아지는 것이 두렵고 여기서 예외인 사람은 아무도 없다.
45) 하나님처럼 높아지려고 하는 것인데 그 자리에 가는 것 자체가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46) 아무리 공부해서 박사가 되어도 두려움투성이인데 이 자리 떨어질까 봐, 새 것을 알지 못할까 봐, 마음에 안식이 없는 것이다
47) 고난이 우연히 오거나 운이 안 좋아서 오는 것이 아니라 성도는 고난 받게 세워졌다고 장차 받을 환란에 대해 말하니까 쟁론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48) 우리는 모든 것을 십자가로 길로 놓고 갈 때 아레오바고(Areobagos) 같은 곳에 종교심을 가지고 귀신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구속사를 믿으며 나아가야 한다.
49) 돈이라는 것은 성령의 전략으로 벌리는 것이지 내가 벌라고 노력하면 알수록 다 없어지는 것이며 이타적으로 살아야 돈도 벌리는 것이지 돈 벌겠다고 달려들면 다 안 되는 것으로 비트코인도 추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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