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교회 2020년 5월3일 주일예배 말씀 요약 및 후기(사도행전 9: 31/ 성령의 성장)]
<사도행전 9:31>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Then the church throughout Judea, Galilee and Samaria enjoyed a time of peace. It was strengthened; and encouraged by the Holy Spirit, it grew in numbers, living in the fear of the Lord.)
<Prologue>
온라인 11번째 예배다.
같은 본문으로 2번 설교했는데 아직도 못한 것이 있어서 특별히 31절에 수가 더 많아진다고 했는데 오늘이 어린이 주일이다.
우리는 날마다 어린이 주일이고 어버이 주일이기 때문에 특별히 가정설교를 할 필요가 없는데 이런 구절이 드물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여러분에게 수가 더 많아지는 이런 성장하시라고 31절만 떼어서 다시 설교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31절은 그냥 읽기만 해도 교회와 개인 모두의 성장에 비결이다
힘든 이 시기에 여러분 모두에게 문자적으로도 영육간의 성장이 있으면 좋겠다.
오늘 성령의 성장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다.
<말씀요약>
1.루저(loser)의 경험을 해야 한다.
버림받은 것처럼 죽은 자처럼 잊혀진 것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로 시작한다. 앞에 얘기는 예수 믿는 사울을 집요하게 죽이고자 하니까 형제들이 다소(Tarsus)로 보냈다. 그러면 사울을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죽이고자 하니까 교회와 그리스도인들도 박해가 와야 하는데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갔다는 내용이 뜬금없이 나왔다.
‘그러나’ 가 문법적으로 맞아 보이는데 ‘그리하여’ 라고 나왔다. 자고로 핍박 받아 믿음이 병들었다는 이야기는 없다. ‘그리하여’는 성령님의 문법인 것이다.
모든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므로 사울도 베드로도 빌립도 주인공이 아니다.
성령 받은 사도들도 옥에 갇혔다가 풀린 적이 있는데 그때도 6장 7절에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들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제사장들도 복종했다고 한다.
그렇게 박해가 일어나면 하나님은 가장 열심히 하나님의 일을 하신다.
7장에 스데반이 당당한 구속사의 설교 때문에 돌에 맞아 죽고 교회를 잔멸하니까 3-4천명이었던 교인들이 2천명정도 남았다고 한다.
그렇게 흩어졌던 사람들이 도리어 곳곳에 가서 복음을 전해 교회들이 세워졌고, 오늘 31절에는 그렇게 세워진 교회가 든든하게 수가 많아졌다고 한다.
그래서 성령의 문법은 ‘그리하여’ 가 맞다.
사울이 다소에 있어도 갈릴리와 사마리아교회는 성장했다는 것이다.
사울을 보면 회심한 후에 참으로 고단한 삶의 여정을 살고 있다.
사도 바울의 role model은 스테반인 것이다
사울은 너무 죄를 미리 많이 지었기 때문에 오직 주의 사명밖에 없었다.
회심하고 즉시 교제권이 바뀌었다. 회심이 확실하니까 유대인들과는 영적인 교제를 할 수 없었다.
믿고 나서도 세상친구와 친하면 성령의 성장을 할 수 없다.
교제권이 완전히 바뀔 수 밖에 없다.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다. 성장하려면 친구를 정확하게 선택해야 한다.
믿는데도 세상친구가 너무 좋고 교회사람들은 부담이 된다면 회심이 되지 않은 것이다.
성령의 성장을 하려면 친구를 정확하게 선택해야 한다
자기가 죽이려던 예수가 도리어 그리스도라고 외치니 그가 너무 변했기 때문에 같은 유대인이었던 사울을 죽이고자 하는 것이다.
사울은 3년정도 피해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때 형제들이 보내준 곳이 30절의 다소이며 사울의 고향이다.
결정적일 때 살려주는 사람은 사울의 제자들이다.
주의 일을 할 때 결정적으로 살려주는 사람은 내가 낳은 사람이다.
주의 일에 외롭지 않으려면 나 때문에 변한 사람이 있어야 한다.
내가 낳은 영적 자녀가 하나도 없는 사람은 시간이 지날수록 외롭기 짝이 없으며 사람관계에 문제가 생긴다.
그 당시에 다소라고 하면 누구나 알아주는 정치 경제 문화의 도시였다.
다소 출신이라고 하면 다들 어깨에 힘이 들어가있다.
사울을 어디로 보내도 다 죽이려고 하니까 가장 안전하다고 할 곳이 고향이고 그쪽은 미국시민권 자처럼 증이 있어야 했던 것 같다.
잠깐이 아니고 13년 동안인데 너무나 드라마틱하게 회심해서 복음을 전파할 때마다 계속 살해의 위험을 느끼는 가운데 드디어 아라비아 3년 다녀왔다가 예루살렘에 2주 있었다가 다시 다소로 보내진다.
‘너는 믿는 것 좀 드러내지 말고 잊혀진 자처럼, 죽어진 자처럼, 그렇게 루저로 살라’는 메시지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
‘왜 그럴까?’ 생각해보니 사울이 특별해도 너무 특별하다.
주님을 만났으니 설득력이 대단하다. 가만히 있어도 입만 열면 드러나는 것이다.
사울은 그렇게 잠시 사라진다. 잠시가 13년이다. 그 전에 아라비아까지 하면 16년이다.
그래도 똑똑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지만 다들 사울을 기피했다.
회심하자마자 박해뿐이고 13년간 알려지지 않은 채 하나님과 독대하는 외로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얼마나 곤고했을까?
갈라디아서1장에 보면 아라비아에서 와서 사도들을 만나서 사귀고자 했지만 베드로와 야곱만 만나줬다고 한다.
사울은 초대교회 수가 더 많아진 성장이나 부흥과 상관없이 버려진 사람으로 고향에서 하는 일 없이 잊혀진 채로 있었다.
가말리엘의 제자이며 똑똑한 사울이 어쩌다 저렇게 되었지? 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 당시 교회의 수가 많아졌지만 바울의 공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예전에 사울은 대제사장 신임을 한 몸에 받고 기독교인 다 잡아죽이는 공문을 받고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 회심을 했고 회심을 하고 보니 세상이 달라졌다.
그런데 세상은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다.
회심을 하고 나니 구속하신 주만 있고 세상과 나는 간 곳이 없어졌다.
그런데 사람들은 세상 속에 있는 것이다. 그러니 사울이 여기저기서 박해를 받는 입장이 되었다.
유대인중에 유대인이고 다소 시 출신, 가말리엘의 제자가 회심을 했는데 13년동안 전혀 알려지지 않은 곳으로 보내지게 되었다고 한다.
어디서 쓰임 받을지 전혀 모른 채로 하나님과 독대를 하면서 외로운 시기를 사울로서는 앞으로의 성령의 성장을 위해서 가장 필요한 시간으로 보냈다고 한다.
16년동안 외로운 인생을 살았는데 사울이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13년동안 실패자와 같은 인생이 필요했다.
자타가 인정하는 실패자의 인생이 필요했다.
그렇게 잘나가는 사람을 하나님이 쓰시는 것이 아니다.
아무도 인정을 안 하면 왜 인정하지 않을까를 묵상하고 그것을 그대로 인정해야 하며 항상 현실을 직면해야 한다.
‘내가 주의 복음을 전하겠다고 하는데 누가 말리는 거야?’ 하면서 자기 열심이 앞서면 안 된다.
16년을 사울이 기다린 것이 아니라 사울을 끝까지 기다리신 분은 하나님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인내와 사랑으로 사울을 기다려 주셨다
또 사울이 16년간 자기와의 싸움이 있었기 때문에 주옥과 같은 서신서가 격조 있게 써진 것이다. 사울이 다소로 간 것은 실수가 아니었다.
(적용#1)
-잊혀진 것처럼, 버려진 것처럼 루저로서 다소에서의 시간을 보낸 적이 있나?
2.평안한 것이다.
평안과 성장은 분리될 수 없다.
고난 중에서 해석이 되어야 해결이 되어 평안을 경험하며 성장이 된다.
고난 자체가 부흥을 가져다 주는 것은 아니며 분쟁이 있으면 미워하는데 에너지를 다 쓰기 때문에 전도할 힘이 없다.
박해하던 사울이 회개하게 됨으로 사울의 입술은 위협과 살기가 아니라 주 예수의 이름으로 가득하게 되었다.
한 사람의 변화가 평안을 이루는 씨가 된다.
십자가 없는 평안과 행복은 다 일시적인 것이다.
이 땅의 평안도 우리가정도 내 마음의 평화도 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만 가능하다.
이때 갑자기 왜 육적인 평안이 찾아 왔냐 하면 로마에 칼리굴라 황제가 자기의 초상을 예루살렘 지성소에 넣고 자기를 우상숭배하라고 하니 유대인들이 번지수를 바꿨다.
지성소에 여호와의 언약궤가 없어진다고 하니 갈릴리 교회, 사마리아 교회의 핍박이 소강상태로 들어갔다.
예수님 믿으면 무조건 평안이 아니라 육적으로 힘들어 하니까 잠시 숨 고르기 식 평화를 허락하시는 것이다
그렇게 숨 고르기 하면서 안식하면 되는데 다들 ‘이 긴 병의 간병이 끝났구나. 여행이나 갔다 오지. 아이가 붙었으니 목자도 내려놔야지.’ 하는 것은 흘려 떠내려가는 성도들이 그러는 것이다.
나에게 오는 박해와 부흥, 성장은 모두 하나님의 시간이기 때문에 그 시간에 순종만 하면 된다.
예수 믿으면서도 평안이 없는 것은 헛것이다.
인간의 한계성을 느끼고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수록 가까워 지는 것이다.
내가 힘들어서 십자가에서 내려오면 그 평안이 없다.
힘들어도 십자가에 달려있으니까 평안이 오는 것이다.
주님의 인자하심을 느낄수록 평안을 누린다
평안의 유무자체는 스펙이나 돈으로 이루지지지 않는다
사울이 무섭기에 교회에 나오려는 그를 교회가 두려워했다.
이것은 이 땅의 두려움이다. 그때에 바나바가 사울을 소개시켜줬고 그런 바나바 때문에 교회가 평안해졌다. 든든히 서 갔다는 것이다.
(적용#2)
-그러니 ‘평안이 있고 없고’는 어떤 차이일까?
-돈이 많고 스펙이 좋고 아이들도 잘나가고 그러면 그 집이 평안할까?
-모든걸 갖추고 있으면 평안한가? 여러분의 집의 분위기는?
우리들 교회 집사님들은 그런 스펙이 없고 돈도 없고 중독도 다 안 끊어지고 해도 우리들 교회집사님들은 웃음이 넘친다.
우리 집사님들은 왜 그렇게 웃음이 넘칠까?
우리 집사님들의 답은 ‘우리는 죄인이잖아요. 죄인이 무슨 말을 하겠어요. 무슨 말을 해도 맞아요 제가 죄인이에요. 제가 잘못했네요.’인데 죄인들의 집단은 항상 다들 자기 죄라고 하니 지옥을 안 살고 평안하다.
목장에서 자기가 똑똑하고 자기가 다 옳으니까 잠도 못 자고 또 목장 분위기가 어둡게 된다
성난 사람들이 모여 잘잘못을 따지니까 분위기가 어둡다
죄가 없어서 기억을 잘해 이것 저것 꼬치꼬치 따지니까 분위기가 어둡다
남편이 바람을 피워도 아내가 나 때문이라고 회개를 한다.
영육간의 자기 죄를 보니까 온 집안에 평안이 깨지지 않는다.
내가 영육으로 깨어있지 못하니까 남편이 수고한다.
영적으로 나를 깨우는 수고를 하니 감사하고 육적으로도 살림도 잘못하니 밖으로 돌게 했다면서 자기 죄를 보니까 온 집안의 평안이 깨지지 않는 것이다.
교회는 죄인들이 모이는 곳이고 병원은 아픈 환자들이 와야 하는 것이 정상이다.
아픈 사람들이 올수록 그 병원은 평판이 나는 것이다.
그런데 환자들을 보고 의사가 당신 왜 이렇게 심하게 아프냐고 하면서 내가 당신같이 아픈 환자는 볼 수 없다. 당신 더럽다고 나가라고 하면 그 병원이 제정신인가?
마찬가지다. 교회에서 그렇게 선한 사람을 찾으니 “이 교회는 왜 이렇게 비정상적인 사람이 모여있는 거야” 라고 말한다. 그런 분들에게 평안이 있을까?
사울의 살기등등 체험이 그를 교만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시어머니의 ‘아무 말 대잔치’ 속에서도 자기 죄를 보면 평안한 것이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이 세상의 평안함과 전혀 다른 것이다
잔멸의 주인공인 사울이 회개를 하니까 교회가 평안하고 든든히 서 갔다
로마에 칼리굴라 황제가 자기의 초상을 예루살렘 지성소에 넣고 자기를 우상숭배하라고 하니 유대인들이 번지수를 바꿔 교회가 폭풍성장 하였다
하나님은 좌로나 우로나 절대로 치우치지 않으신다
환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내 죄를 보는 것이다
(적용 #3)
-여러분의 평안은 무엇 때문인가?
-십자가의 평안인가? 육체의 평안인가?
-가장 많이 추구하는 육체의 평안은? 야동, 주식, 여자, 미모?
3. 든든히 서가는 것이다.
평안해야 든든히 서간다.
든든히 서간다는 것은 집을 단단하게 짓는 것이다.
교회가 집을 잘 짓는 것은 반석 위에 그리고 말씀의 기초 위에 세우는 것이다.
나를 살리는 회개처럼 예수님을 이야기처럼, 말씀처럼 읽어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말씀처럼 읽지 않으면 성경은 날 죽이는 율법이 될 수 있다
날마다 큐티하는 여자 김양재 목사를 닮아서 여러분의 모든 결정의 기준이 말씀이 되어서 감사하고 앞으로도 말씀이 기준이 되길 바란다.
여러분들의 인생에서 실수를 볼 때보면 목장에서 안 묻고 큐티도 자의적으로 하고 욕심대로 했을 때이다.
결혼할 때, 사업할 때, 학교 갈 때 그렇게 이상한 결정을 한다.
물어봤다는 것 그것에 하나님이 점수를 주시는 것이다.
말씀으로 서가야 한다는 것은 우리들의 핵심가치이기 때문에 더 말할 것도 없다.
기본기는 말씀보고 큐티하는 것이다.
이런 기본기가 되어있으면 무슨 일을 만나도 만사형통하리라.
여전한 방식으로 말씀하고 기도하니 든든히 서 갈수밖에 없는 것이다.
말씀이 해석이 되어야 평안하게 서 갈 수 있는 것이다
말씀에 기초를 두면 기도와 교제, 전도가 저절로 따라오는 것이다.
누군가가 십자가를 길로 놔야 한다.
목장공동체에서도 목자가 아니면 그냥 목원이라도 십자가의 길로 놓는 희생하는 사람이 필요하다.
항상 좁은 문, 좁은 길로 가는 것이 십자가 평안이고 십자가 평안이 든든히 서가는 것이다.
회개 제목을 써가는 것이 든든히 서 가는 것이다
일이 터지면 말씀 안에서 내 죄보고 회개하는 것이 든든히 서 가는 것이다
(적용 #4)
-내가 든든히 서가는 이유는 말씀 때문인가? 돈 때문인가? 남편, 아내 때문인가?
-목장에서 말씀의 처방을 사모하며 묻나? 다 정해놓고 형식적으로 묻나?
-불신결혼이나 교제 등 묻고 싶지 않은 것이 있나? 주식은?
-공동체가 틀렸다고 생각하나?
4. 주를 경외함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주를 경외함이다.
주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주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우리도 너무 존경하면 덜덜 떨면서 쳐다도 못보고 이름도 못 부른다.
그만큼 주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너무 거룩하시기 때문이다.
두려운 것만큼 존경하고 사랑한다는 뜻이 그 다음 이차적인 뜻이다.
무서운 아버지 두려워하는 것과는 다르다.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에 뿌려진 씨가 내적 외적으로 성장한 이유는 주를 경외했기 때문이며 성령의 위로가 뒤 따라왔기 때문이다
성부하나님의 감추어진 경륜과 성자하나님의 나타나신 경륜과 성령하나님의 효과적인 힘이 삼위일체를 이루신다
집에서도 아버지가 무섭게 하면 어머니가 위로해주는 것과 마찬가지다. 인간이 죄인이라 어려서부터 무서운 사람이 없으면 망둥이로 자라게 된다.
인간은 백프로 죄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이 땅에서 부모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지금은 자녀우상시대를 살다 보니 집집마다 자녀가 왕 노릇을 한다.
자식이 너무 예쁘고 귀해서 훈육을 할 수가 없다.
시간이 갈수록 더욱더 할 수가 없다. 우상이 되면 손을 못 댄다.
잠언에 자녀를 초달하라는, 때리라는 말이 있는데 괜히 있는 말이 아니다.
고난도 어려서 받으면 금 주고도 못 산다
근데 이게 요즘 인권운동에서 인권 운운하면서 체벌은 절대 안 된다고 말한다.
어려서 무서운 사람이 없는 것이 가장 무서운 것이다.
어려서부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고 겉으로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닌데 사람에게 잘하다가 배신을 당해서 지옥을 산다.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만이 피차 복종하게 된다고 한다. (에베소서 5장21절)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해야 자기 환경의 그 자리가 자기의 사역지임을 알게 된다.
하나님이 두렵지 않은 사람은 피차 복종을 모른다.
본인이 하나님 자리에 있기 때문에 말씀에 대한 복종이 뭔지 모른다.
우리는 하나님이 두렵기 때문에 주야로 묵상하고 그대로 살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과 교회가 두렵기만 한 것은 기복적이고 이기적이기 때문이며 그건 자기의 유익을 원한 것이기 때문이다.
(4장 20절)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에 이 세상이 알지 못하는 평안을 주신다.
그런 평안이 없었다면 사울이 어떻게 13년간 다소에서 있었을까?
사랑하기 때문에 두려워하는 것인데 그것은 이기적 두려움이 아니다.
사람은 두려워하거나 무시하거나 둘 중 하나를 하게 된다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세상을 알게 되는 것이며 세상이 주지 못하는 평안이 온다.
내가 하나님을 경외하면 순종해야 할 일도 많아진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하면 성령의 위로’ 라는 말은 성령의 격려가 말씀으로 오기 때문에 내가 힘들 때마다 중보자가 되어주신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경외하는 것으로 창조주를 따르는 것인데 평안을 주신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미워하게 되고 형벌이 따른다
건강한 두려움, 권면, 격려, 후원이 끊임없이 나를 감싸면서 성장은 부수적으로 주시는 열매가 된다는 것이다.
(적용 #5)
-주를 경외해서 피차 복종해야 할 사람은? 남편, 아내, 자녀, 부모, 상사?
성령 받지 않으면 모든 것은 시작도 되지 않는다.
앉으나 서나 성령 받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성령님이 임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헛것이다.
교회가 성장하려고 해도 성령의 성장이 임재해 있어야 한다.
교회는 주님이 값 주고 사신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고독과 외로움을 경험해 보지 않으며 인생을 논할 수 없다
십자가를 통과하는 두려움 뒤에는 평안이 온다
기복으로 가면 고난이 와도 해석이 안된다
루저의 시절에 잊혀지고 버려진 것 같아도 말씀 보고 잘 기다리고 해석 잘하면 폭풍성장을 가져온다
십자가의 평안은 말씀으로 든든히 서 가는 것이다.
성령의 인도는 진리의 성령님이 인도를 하는 것이지 돈이 인도하고 스펙이 인도하는 것이 아니다.
나의 성장이 아니고 성령의 성장이 되어야 영원할 것이다.
<Epilogue>
1) 모든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므로 사울도 베드로도 빌립도 주인공이 아니다.
2) 그렇게 박해가 일어나면 하나님은 가장 열심히 하나님의 일을 하신다.
3) 사울을 보면 회심한 후에 참으로 고단한 삶의 여정을 살고 있다.
4) 사도 바울의 role model은 스테반인 것이다
5) 사울은 너무 죄를 미리 많이 지었기 때문에 오직 주의 사명밖에 없었다.
6) 믿고 나서도 세상친구와 친하면 성령의 성장을 할 수 없다.
7)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다. 성장하려면 친구를 정확하게 선택해야 한다.
8) 믿는데도 세상친구가 너무 좋고 교회사람들은 부담이 된다면 회심이 되지 않은 것이다.
9) 성령의 성장을 하려면 친구를 정확하게 선택해야 한다
10) 주의 일을 할 때 결정적으로 살려주는 사람은 내가 낳은 사람이다.
11) 주의 일에 외롭지 않으려면 나 때문에 변한 사람이 있어야 한다.
12) 내가 낳은 영적 자녀가 하나도 없는 사람은 시간이 지날수록 외롭기 짝이 없으며 사람관계에 문제가 생긴다.
13) ‘너는 믿는 것 좀 드러내지 말고 잊혀진 자처럼, 죽어진 자처럼, 그렇게 루저로 살라’는 메시지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
14) 주님을 만났으니 설득력이 대단하다. 가만히 있어도 입만 열면 드러나는 것이다.
15) 그래도 똑똑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지만 다들 사울을 기피했다.
16) 회심하자마자 박해뿐이고 13년간 알려지지 않은 채 하나님과 독대하는 외로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얼마나 곤고했을까?
17) 사울은 초대교회 수가 더 많아진 성장이나 부흥과 상관없이 버려진 사람으로 고향에서 하는 일 없이 잊혀진 채로 있었다.
18) 회심을 하고 나니 구속하신 주만 있고 세상과 나는 간 곳이 없어졌다.
19) 어디서 쓰임 받을지 전혀 모른 채로 하나님과 독대를 하면서 외로운 시기를 사울로서는 앞으로의 성령의 성장을 위해서 가장 필요한 시간으로 보냈다고 한다.
20) 16년동안 외로운 인생을 살았는데 사울이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13년동안 실패자와 같은 인생이 필요했다.
21) 그렇게 잘나가는 사람을 하나님이 쓰시는 것이 아니다.
22) 아무도 인정을 안 하면 왜 인정하지 않을까를 묵상하고 그것을 그대로 인정해야 하며 항상 현실을 직면해야 한다.
23) ‘내가 주의 복음을 전하겠다고 하는데 누가 말리는 거야?’ 하면서 자기 열심이 앞서면 안 된다.
24) 하나님의 인내와 사랑으로 사울을 기다려 주셨다
25) 평안과 성장은 분리될 수 없다.
26) 고난 중에서 해석이 되어야 해결이 되어 평안을 경험하며 성장이 된다.
27) 고난 자체가 부흥을 가져다 주는 것은 아니며 분쟁이 있으면 미워하는데 에너지를 다 쓰기 때문에 전도할 힘이 없다.
28) 박해하던 사울이 회개하게 됨으로 사울의 입술은 위협과 살기가 아니라 주 예수의 이름으로 가득하게 되었다.
29) 한 사람의 변화가 평안을 이루는 씨가 된다.
30) 십자가 없는 평안과 행복은 다 일시적인 것이다.
31) 이 땅의 평안도 우리가정도 내 마음의 평화도 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만 가능하다.
32) 예수님 믿으면 무조건 평안이 아니라 육적으로 힘들어 하니까 잠시 숨 고르기 식 평화를 허락하시는 것이다
33) 나에게 오는 박해와 부흥, 성장은 모두 하나님의 시간이기 때문에 그 시간에 순종만 하면 된다.
34) 예수 믿으면서도 평안이 없는 것은 헛것이다.
35) 인간의 한계성을 느끼고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수록 가까워 지는 것이다.
36) 내가 힘들어서 십자가에서 내려오면 그 평안이 없다.
37) 힘들어도 십자가에 달려있으니까 평안이 오는 것이다
38) 주님의 인자하심을 느낄수록 평안을 누린다
39) 평안의 유무자체는 스펙이나 돈으로 이루지지지 않는다
40) 우리 집사님들의 답은 ‘우리는 죄인이잖아요. 죄인이 무슨 말을 하겠어요. 무슨 말을 해도 맞아요 제가 죄인이에요. 제가 잘못했네요.’인데 죄인들의 집단은 항상 다들 자기 죄라고 하니 지옥을 안 살고 평안하다.
41) 목장에서 자기가 똑똑하고 자기가 다 옳으니까 잠도 못 자고 또 목장 분위기가 어둡게 된다
42) 성난 사람들이 모여 잘잘못을 따지니까 분위기가 어둡다
43) 죄가 없어서 기억을 잘해 이것 저것 꼬치꼬치 따지니까 분위기가 어둡다
44) 영육간의 자기 죄를 보니까 온 집안에 평안이 깨지지 않는다.
45) 내가 영육으로 깨어있지 못하니까 남편이 수고한다.
46) 영적으로 나를 깨우는 수고를 하니 감사하고 육적으로도 살림도 잘못하니 밖으로 돌게 했다면서 자기 죄를 보니까 온 집안의 평안이 깨지지 않는 것이다.
47) 교회는 죄인들이 모이는 곳이고 병원은 아픈 환자들이 와야 하는 것이 정상이다.
48) 마찬가지다. 교회에서 그렇게 선한 사람을 찾으니 “이 교회는 왜 이렇게 비정상적인 사람이 모여있는 거야” 라고 말한다. 그런 분들에게 평안이 있을까?
49) 사울의 살기등등 체험이 그를 교만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50) 시어머니의 ‘아무 말 대잔치’ 속에서도 자기 죄를 보면 평안한 것이다
51)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이 세상의 평안함과 전혀 다른 것이다
52) 잔멸의 주인공인 사울이 회개를 하니까 교회가 평안하고 든든히 서 갔다
53) 로마에 칼리굴라 황제가 자기의 초상을 예루살렘 지성소에 넣고 자기를 우상숭배하라고 하니 유대인들이 번지수를 바꿔 교회가 폭풍성장 하였다
54) 하나님은 좌로나 우로나 절대로 치우치지 않으신다
55) 환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내 죄를 보는 것이다
56) 평안해야 든든히 서간다.
57) 든든히 서간다는 것은 집을 단단하게 짓는 것이다.
58) 교회가 집을 잘 짓는 것은 반석 위에 그리고 말씀의 기초 위에 세우는 것이다.
59) 나를 살리는 회개처럼 예수님을 이야기처럼, 말씀처럼 읽어야 하는 것이다
60) 예수님을 말씀처럼 읽지 않으면 성경은 날 죽이는 율법이 될 수 있다
61) 물어봤다는 것 그것에 하나님이 점수를 주시는 것이다.
62) 말씀으로 서가야 한다는 것은 우리들의 핵심가치이기 때문에 더 말할 것도 없다.
63) 기본기는 말씀보고 큐티하는 것이다.
64) 이런 기본기가 되어있으면 무슨 일을 만나도 만사형통하리라.
65) 여전한 방식으로 말씀하고 기도하니 든든히 서 갈수밖에 없는 것이다.
66) 말씀이 해석이 되어야 평안하게 서 갈 수 있는 것이다
67) 말씀에 기초를 두면 기도와 교제, 전도가 저절로 따라오는 것이다.
68) 누군가가 십자가를 길로 놔야 한다.
69) 목장공동체에서도 목자가 아니면 그냥 목원이라도 십자가의 길로 놓는 희생하는 사람이 필요하다.
70) 항상 좁은 문, 좁은 길로 가는 것이 십자가 평안이고 십자가 평안이 든든히 서가는 것이다.
71) 회개 제목을 써가는 것이 든든히 서 가는 것이다
72) 일이 터지면 말씀 안에서 내 죄보고 회개하는 것이 든든히 서 가는 것이다
73) 가장 중요한 것은 주를 경외함이다.
74) 주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주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75) 우리도 너무 존경하면 덜덜 떨면서 쳐다도 못보고 이름도 못 부른다.
76) 그만큼 주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너무 거룩하시기 때문이다.
77) 두려운 것만큼 존경하고 사랑한다는 뜻이 그 다음 이차적인 뜻이다.
78) 무서운 아버지 두려워하는 것과는 다르다.
79)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에 뿌려진 씨가 내적 외적으로 성장한 이유는 주를 경외했기 때문이며 성령의 위로가 뒤 따라왔기 때문이다
80) 성부하나님의 감추어진 경륜과 성자하나님의 나타나신 경륜과 성령하나님의 효과적인 힘이 삼위일체를 이루신다
81)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이 땅에서 부모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82) 고난도 어려서 받으면 금 주고도 못 산다
83) 어려서 무서운 사람이 없는 것이 가장 무서운 것이다.
84) 어려서부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85)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고 겉으로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닌데 사람에게 잘하다가 배신을 당해서 지옥을 산다.
86)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만이 피차 복종하게 된다고 한다. (에베소서 5장21절)
87)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해야 자기 환경의 그 자리가 자기의 사역지임을 알게 된다.
88) 하나님이 두렵지 않은 사람은 피차 복종을 모른다.
89) 본인이 하나님 자리에 있기 때문에 말씀에 대한 복종이 뭔지 모른다.
90) 우리는 하나님이 두렵기 때문에 주야로 묵상하고 그대로 살려고 하는 것이다.
91) 그런데 하나님과 교회가 두렵기만 한 것은 기복적이고 이기적이기 때문이며 그건 자기의 유익을 원한 것이기 때문이다.
92)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에 이 세상이 알지 못하는 평안을 주신다.
93) 사랑하기 때문에 두려워하는 것인데 그것은 이기적 두려움이 아니다.
94) 사람은 두려워하거나 무시하거나 둘 중 하나를 하게 된다
95)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세상을 알게 되는 것이며 세상이 주지 못하는 평안이 온다.
96) 내가 하나님을 경외하면 순종해야 할 일도 많아진다.
97)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하면 성령의 위로’ 라는 말은 성령의 격려가 말씀으로 오기 때문에 내가 힘들 때마다 중보자가 되어주신다.
98)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경외하는 것으로 창조주를 따르는 것인데 평안을 주신다
99) 사람을 두려워하면 미워하게 되고 형벌이 따른다
100) 건강한 두려움, 권면, 격려, 후원이 끊임없이 나를 감싸면서 성장은 부수적으로 주시는 열매가 된다는 것이다.
101) 성령 받지 않으면 모든 것은 시작도 되지 않는다.
102) 앉으나 서나 성령 받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103) 성령님이 임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헛것이다.
104) 교회가 성장하려고 해도 성령의 성장이 임재해 있어야 한다.
105) 교회는 주님이 값 주고 사신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106) 고독과 외로움을 경험해 보지 않으며 인생을 논할 수 없다
107) 십자가를 통과하는 두려움 뒤에는 평안이 온다
108) 기복으로 가면 고난이 와도 해석이 안 된다
109) 루저의 시절에 잊혀지고 버려진 것 같아도 말씀 보고 잘 기다리고 해석 잘하면 폭풍성장을 가져온다
110) 십자가의 평안은 말씀으로 든든히 서 가는 것이다.
111) 성령의 인도는 진리의 성령님이 인도를 하는 것이지 돈이 인도하고 스펙이 인도하는 것이 아니다.
112) 나의 성장이 아니고 성령의 성장이 되어야 영원할 것이다.
<후기>
제 자신도 2007년부터 2020년에 이르기까지 내 국내외적 스포츠외교 스펙과 경험과 지식이 거의 사장될 정도로 살며 잊혀진 루저(loser)처럼 스포츠 단체와 각종 행사에서 배제되다시피한 바람에 양평 전원주택에 처박혀 있었습니다. 모두가 나를 사울처럼 기피하였던 것이 말씀을 들으며 새삼 내 이야기처럼 들려왔습니다. 주일말씀처럼 너무 차이가 나면 기피하고 차별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교만이 가미된 고백은 아닙니다. 오직 환경만이 우리를 겸손케 합니다. 해당 스포츠단체에 제대로 알려지지도 않고 실력인정도 되지 않은 채 2011년 주님 영접과 이어진 양육을 통한 공동체 회개 이후 줄 곳 교회공동체 말씀을 통해 하나님과 독대하는 외로운 시기를 보내왔습니다. 또 사울이 16년간 자기와의 싸움이 있었기 때문에 주옥과 같은 서신서가 격조 있게 써진 것처럼 나도 개인 블로그(blog)에 13년 간 국제스포츠 계 동향을 줄기차게 올리며 국제스포츠흐름에 관한 정보와 지식을 정리하여 독자들과 함께 공유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껜 드릴 것 밖에 없고 사람에겐 줄 것 밖에 없는 인생임을 깨닫고 일희일비하지 않게 하셨습니다.
“(1)감추어진 성부하나님의 경륜(Hidden Will of God)과 (2)성자하나님의 나타나신 경륜(Revealed Will of God)과 (3)성령하나님의 효과적인 힘(Effective Power of God)의 삼위일체가 구원을 이루는 것임을 알기를 원합니다”
“(1)회개는 나의 밥, (2)감사는 나의 밥, (3)기도는 나의 밥, (4)평강은 나의 밥’이 되기를 소망하며 ‘평온지기, 평강지기, 평안지기, 평화지기가 되기를 간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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