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교회 2020년 4월5일 주일예배 말씀요약(사도행전 9: 1~ 9/성령의 회심)]
<사도행전 9:1~9>
1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still breathing out murderous threats) 대제사장에게 가서
2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the Way)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3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suddenly a light from heaven flashed around him.)
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voice)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Saul, Saul, why do you persecute me?" )하시거늘
5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I am Jesus, whom you are persecuting)
6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7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sound)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더라
8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9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For three days he was blind, and did not eat or drink anything)
<Prologue>
온라인 예배 7주차다
영적 진실성의 결론은 ‘인내’(patience, endurance, perseverance, tolerance)다
인내로 우리가 얼마나 진실한가를 보여줬으면 좋겠다.
스데반의 권세와 사도 바울의 권세가 누가 더 큰지는 모르겠으나 스데반은 너무 뛰어났기에 빨리 데려가신 것 같다.
그래서 그의 삶은 잘 알려진 것이 없는데 스테반에게는 성령과 지혜와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였고 칭찬받았던 사람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칭찬이란 칭찬은 다 받은 것 같다
스테반은 흠 없고 착한 사람이라 보겠지만 결코 그렇지도 않다.
착하면 어른 말을 잘 들어야 하는데 대제사장과 산헤드린(Sanhedrin) 공회 앞에서 목이 곧고 할례 받지 못한 자이고 ‘너는 살인자’라고 돌에 맞아 순교했다.
순교 후 유대의 모든 당파 사람들이 교회를 계속 잔멸하니까 위축이 되었고 그럼으로 스테반의 뒤를 이어 사역을 계속할 사람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때까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일꾼을 스테반을 죽인 사람들 중에 골라서그 때부터 불러서 양육시켜서 불세출의 전도자로 쓰신다.
열두 사도가 있었으나 지나고 보면 이 바울이 없었다면 신약이 성립이 안 되는 것이어서 신약을 ‘바울 복음’이라고 한다
또 이방인 전도도 못했을 뻔한 지도자가 스데반 죽기까지 전혀 준비가 안돼있었다
그러니 늦었다 할 때가 없는 것이다
예수 믿는 나를 핍박하는 사람 중에 일꾼이 준비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박해를 많이 할수록 기대가 된다.
그런 사람일수록 크게 핍박을 했으니 크게 회개를 해야겠지 않을까?
주님과의 만남은 ‘거듭남, 회개, 중생, 구원’ 등 여러 표현이 있고 미묘한 차이가 있지만 ‘회심(回心 /a change of heart, conversion)’은 가다가 유턴한다는 의미가 있다.
사울에게는 ‘거듭남과 회개’가 동시에 일어나서 흔히 ‘회심’이라고 한다.
그래서 오늘은 ‘성령의 회심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다.
<말씀요약>
1) (회심 전에는)무섭고 가치 없는 열심을 크게 낼 때가 많다.
살기로 숨을 내뿜고(still breathing out murderous threats) 있었다는 사울은 왜 이렇게 적대감이 대단할까?
자기는 흠이 없기 때문에 예수님, 스데반을 살기로 등등해서 잡아죽일 정도니까 스데반의 소리는 모두 개소리라고 여긴다
다메섹은 수리아의 매우 오래된 도시로 30개 정도의 회당이 있었던 곳으로 유대인 중 상당수가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인이 됐다는 소식을 들은 것인데 곧 이 복음이 온 세상으로 퍼져나가겠구나 라고 여기며 무의식적으로 기독교를 인정했다는 것이다
정치신념보다 무서운 게 종교신념(미국 911테러사태, 신천지 등)이다.
2절에 “그 도(道 /the Way)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도(道)를 ‘Way’ 대문자로 쓴 것은 보전될 그리스도의 십자가길(道)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길이여, 진리요, 생명이다.
3절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사울과 같은 사람이 하나님의 열심보다 앞서가게 되면 ‘사람을 이렇게 죽일 수 있구나’를 보게 된다. 마치 강이 범람하듯 무엇이든 범람하면 진멸하는 이치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지나치면 다 망한다.(과유불급/過猶不及)
무지한 열심은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이 없이 훼방을 놀게 된다
무지한 열심은 어리석고 가치 없는 열심이다.
공로나 행위로 천국에 갈 수 없는 것이다
분기탱천하여 살기등등(殺氣騰騰) 한 것이 율법주의의 열심이다.
정치를 하는데 하나님의 뜻과 상관이 없으면 사람을 다 죽이는 일이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하나님께 물어봐야 되는데, 우리나라가 예수 때문에 잘살게 되었는데도 아무도 인정을 안 한다.
구별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죽였는데 사람을 죽이는 무서운, 어리석은, 가치 없는 열심이다.
기독교를 옳다고 하니까 못 듣고 못 참는 것이다.
예수 믿기에 결박 당한다는 것은 사실은 너무나 좋은 일이다.
남녀를 막론하고 박해하고 결박할 때는 남녀차별이 하나도 없는데 주의 일을 할 때는 차별이 많다.
성령이 임해야 구별과 차별 그리고 지역감정이 없어진다
기독교인들이 성령의 회심을 해야지 분리(남녀차별 등)가 없다.
교회들이 지역감정에서 다 벗어나지를 못 하는데 우리들교회가 지역감정이 없다는 것을 전체에 보여주어야겠다
(적용 #1)
-나의 어리석은 열심, 무가치한 열심은 무엇인가?
-사람을 죽이는 열심인가?
-여러분은 죄인인가? 죄인을 잡는 의인인가?
2) (회심할 때) 내가 예수를 박해한 것을 아는 것이다.
회심은 인격의 변화까지 온 것을 말하는데 그래서 ‘개종’이라는 단어로도 쓰인다.
너무 확실히 바뀌었다는 의미이며 유대교를 너무 잘 믿어서 사람을 너무 잘 믿고 있으니까 사울은 개종을 했어야 했다.
사울에게는 불가항력적인 방법을 쓰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 하나님의 역사하심이다
사울의 회심의 과정을 살펴보면 3절의 ‘빛’. 사도행전 26:13 에서는 ‘정오의 빛’. 사막에서는 너무 강렬해서 살인적인 빛이다.
빛만 봐도 눈이 멀어버리는 빛으로 그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둘러 비춘 것이다
예수님의 영광의 큰 빛이 사울에게 비쳐진 것인데 광채를 넘어서 사람이 보면 죽는 빛이다.
주님은 생명의 빛으로 죽음에 속한 자는 이 빛을 보면 두렵다.
주님의 빛은 뜨겁고 거룩하고 무섭다.
그 빛을 보는 시각은 믿음의 분량대로 다르다.
22장에서는 큰 빛으로 빛을 보는 시각이 점점 달라졌다.
간증을 할 때마다 보는 시각이 달라졌다.
빛을 보는 시각이 달라지는 것은 주님 만난 의미가 달라지는 것으로 주님에 대한 넓이와 높이와 깊이가 달라지는 것이다
빛이 인자의 영광인 것이다
빛으로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시다
사울은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는 변화되지 않았다.
스데반이 죽을 때 생명의 빛이신 인자의 영광 예수님이 스데반을 비추면서 영접해주시는 것을 보고 들었다.
의미는 몰랐지만 기억했을 것으로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Lord, do not hold this sin against them.)라고 하는 스데반의 기도를 들었을 것이다
햇빛보다 더 밝은 성령의 얼굴로 편안하게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Lord Jesus, receive my spirit.") 의탁하는 스테반의 얼굴을 사울이 본 것이다.
성령의 빛이 스테반에게 비추니 ‘성령의 얼굴, 용서의 얼굴, 평안한 얼굴, 의탁하는 얼굴’을 사울이 본 것이다
마지막 장면의 뜻은 몰라도 그 자리에 있어서 보는 게 중요한 거다.
사울은 그 빛을 받아낼 수준이 못 되는 것으로 당연히 무섭고 죽을 것 같아 땅에 엎드러졌다.
엎드러져는 ‘굴복하다’라는 뜻으로 자의적으로 엎드린 것이다.
“사울아, 사울아’하시며 두 번에 걸쳐 부르신다. 아주 친근하게.
창세기부터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사무엘아, 사무엘아!” 라고 주님은 사명을 주실 때 녹아지게, 다정하게 부르신다
교회를 잔멸하던 사울을 어떻게 이렇게 다정하게 부르실 수가 있는가?
회심을 하는데 사울이 한 일이 무엇인가? 아무 것도 없다. 찾아 헤매지도 않았다. 만나려고 하지도 않았다.
자기와 다르다고 죽이지 못해 안달인 악질이었다.
‘은혜 아니면 나 서지 못하네’의 사건 아니겠는가?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으로 교회를 핍박했는데 예수님을 핍박했다고 하신 것이며 교회를 핍박하는 것은 예수님을 핍박하는 것으로 생각하셨다.
사울은 작은 자에서 죄의 괴수로 느껴지도록 빛의 표현도 다른 것이다
성도 여러분 주님을 사랑하신다면 핍박 받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교회, 성도, 스테반에 대한 핍박은 예수인 나를 핍박하는 거다’라고 얘기해주시는 것이다
사울이 교회를 박해할 것을 요한복음에서 미리 예언하셨다.
바울은 교회를 박해하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믿었던 것으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기에게 저주가 임할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포교하지 않으면 천국에 못 가고, 못하면 내가 저주받는 거야’ 라고 생각하는 것이 신천지다
열심으로 교회를 박해하면서 율법으로 흠 없음이라고 생각한다
율법으로 박해하는데 자신의 율법으로 상대방을 잔멸하는 것이다
율법으로 핍박하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율법으로 핍박하는 것이 하나님을 박해하는 것이다
‘내가 형편없으니 주님이 나를 인도해가시는 것이며 남편이 나를 박해해줘 가지고 내가 하나님을 섬겼구나’ 라고 하나님 섬기라고 붙여주신 주의 대사다.
나한테 주시는 음성으로 들어야 한다.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빛과 소리에 압도되어서 무의식적으로 하나님을 느낀 사울은 바로 그 자리에서 주여 누구십니까? 라고 되묻는다
‘예수가 그리스도다’가 안 믿어지니까 정체성(처녀 잉태, 십자가 죽음, 부활 등)이 흔들리는 것이다
내가 틀렸다고 생각하고 언제든지 돌이킬 수 있어야 되는데 진영논리가 그렇지 않은가?
틀릴지라도 기다리는 것이 기독교다
신념과 신앙은 구별되어야 한다
햇빛, 부도, 암이 내게 오는 빛일 수 있다
어느 쪽도 설득이 불가한 것이다
예수님을 인정한 사울은 ‘나는 죽고 구속하신 예수가 살았다’가 되었다
사울의 실명의 아픔은 가장 큰 아픔으로 그 아픔 가운데서 ‘주여’가 된 것이다
아내를 핍박한 것을 예수님 핍박한 것으로 알고 영접기도 받고 ‘주여!’라고 회개하고 천국간 것이 회심이다.
이 잘난 사람인 사울이 누구를 ‘주여’라고 불렀겠는가..
자기를 ‘사울아’라고 불러주시니 마음이 녹았다.
성령님이 효과적으로 도우셔서 찾아오신 분이 예수님인 것을 알고 ‘주여’가 나왔다.
한 순간에 사울의 신학과 가치관이 다 무너졌다. 이럴 수도 있는 것이다.
(적용 #2)
-어떤 예수님을 박해하고 있나? 박해 당하고 있나?
3) 영적 소경에 대한 자각이다
사도바울에게는 곧장 행 할 일을 알려주신다
7절.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Sound)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가만히 서 있었다.
같이 둘러 섰는데도 들리는 사람이 있고 안 들리는 사람이 있는데 안 들리는 사람은 영적 자각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음성(Voice)으로 사울에게만 말씀하시니 같이 동참하는 다른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으니 소리(Sound)라고 표현한다
똑같이 보고 들어도 또 주님을 영접해도 영적 자각이 없으니 감동이 없는 것이다
똑같이 보고 들어도 영접의 의미를 모르니 증인이 안 되는 것이다
영접하게 하러 갈 때 상대방의 살아온 인생을 알고 가야 한다.
주님을 만난 첫 째 징표는 장님이 되어서 자기가 초토화시키려던 (자기 ‘나와바리’인) 다메섹에 끌려간 것이다
주님의 영광을 바라본 후에 소경이 된 것이며 눈을 떠도 보지 못하는 자인 영적 소경임을 깨달으라고 육적 소경으로 만드셨다.
사울도 사흘 동안 식음을 전폐한 것은 예수가 사흘 만에 부활하신 것처럼 자기 자신이 소경임을 깨달음으로 회심하게 하셨다.
에너지가 있어야 살기등등도 사랑도 미움도 가능한 것이다
땅에서 천국생활을 하게 되면 지옥이야기에 귀에 안 들어 오는 것이다
구차한 존재인 줄을 알아야 한다.
‘눈을 떴는데 보지 못하고’가 두 번 나왔는데 아무것도 모르고 끌려 가야 아픈 사람을 체휼하게 되는 것으로 사울은 자신이고 남이고 아픔에 대해 전혀 공감하지 못했던 것이다
스데반을 죽인 걸 평생 울면서 복음에 매진할 사건으로 써주신 사울 사건을 통해 우리의 예수님 만난 사건을 생각해봐야 한다.
은혜를 받으면 내 표정이 달라지는 것을 남들은 알게 되지만 난 모른다.
내가 얼마나 예수님을 박해했는지를 남들은 아는데 나는 모른다.
살기등등했던 눈매가 온유해지라고 육적 소경으로 눈을 멀게 하신다
이디오피아 내시는 성경만 읽고도 아프리카 선교에 초석이 되었다.
사울이 3일 만에 순종을 하니 그 다음 진도를 나가게 하신다
육적 소경보다 영적 소경이 더 무서운 것이다
바울처럼 잔멸을 하는 사람에게는 말할 사람이 없으니까 눈이 멀고 다리가 부러지고 자동차가 뒤집혀야 된다.
‘미리 말씀 듣는 자들은 그럴 일이 없을지어다’ 라고 축복하고 싶다.
여전한 방식으로 신앙생활 잘 하는 것은 어마어마한 축복이다.
미리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거기에 맞는 일을 주실 것이다.
바울, 빌립, 베드로에게 각자 역할을 맡겨주시는 것인데 내가 정하려고 하니까 문제인 것이다
(적용 #3)
-눈을 떴으나 보지 못하는 것은 무엇인가?
-영적 시력은 몇 점인가?
영적 시력이 없으면 사람을 못보고 자기확신에 차있다.
큰 권세로 땅끝까지 증인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큰 권세에 합당한 큰 일꾼이 필요했다.
유대인들과 싸울 율법, 가문, 지식에 뛰어난 권세가 필요했다.
유대인들은 어부(베드로)와 상대를 안 하는데 열두 제자는 다 어부 출신들이다
각자 은사대로 쓰신다
완벽하게 회개하고 가는 것이 회심이다
핍박해 주는 사람이 일꾼일 수 있다
크게 박해해 주는 사람이 준비된 일꾼일 수 있다
스테반이 죽고 잔멸이 되니 일꾼이 없었다
살기로 숨쉬고 내뿜는 사울을 어떻게 ‘사울아, 사울아’하시면 부르실 수 있었겠나?
사울은 눈이 멀었다가 회복시키셨는데 암으로 돌아가신 사부님은 너무 흠이 없어서 데려가신 스데반 같다.
해석이 잘 돼야 해결이 잘 되는 것이며 박해가 클수록 큰 일꾼이 될 줄 믿는다.
회심은 내가 예수를 박해한 것을 아는 것이다.
영적 소경에 대한 자각을 할 수 있으면 사명이 따라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은혜 아니면 설명이 안 된다.
<Epilogue>
-적용을 길로 놓는 것은 힘든 일이다.
-주님과의 만남은 ‘거듭남, 회개, 중생, 구원’ 등 여러 표현이 있고 미묘한 차이가 있지만 ‘회심(回心 /a change of heart, conversion)’은 가다가 유턴한다는 의미가 있다.
-사울에게는 ‘거듭남과 회개’가 동시에 일어나서 흔히 ‘회심’이라고 한다.
-살기로 숨을 내뿜고(still breathing out murderous threats) 있었다는 사울은 왜 이렇게 적대감이 대단할까?
-자기는 흠이 없기 때문에 예수님, 스데반을 살기로 등등해서 잡아죽일 정도니까 스데반의 소리는 모두 개소리라고 여긴다
-정치신념보다 무서운 게 종교신념(미국 911테러사태, 신천지 등)이다.
-예수님은 길이여, 진리요, 생명이다.
-사울과 같은 사람이 하나님의 열심보다 앞서가게 되면 ‘사람을 이렇게 죽일 수 있구나’를 보게 된다. 마치 강이 범람하듯 무엇이든 범람하면 진멸하는 이치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지나치면 다 망한다.(과유불급/過猶不及)
-무지한 열심은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이 없이 훼방을 놀게 된다
-무지한 열심은 어리석고 가치 없는 열심이다.
-공로나 행위로 천국에 갈 수 없는 것이다
-분기탱천하여 살기등등(殺氣騰騰) 한 것이 율법주의의 열심이다.
-구별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죽였는데 사람을 죽이는 무서운, 어리석은, 가치 없는 열심이다.
-남녀를 막론하고 박해하고 결박할 때는 남녀차별이 하나도 없는데 주의 일을 할 때는 차별이 많다.
-성령이 임해야 구별과 차별 그리고 지역감정이 없어진다
-기독교인들이 성령의 회심을 해야지 분리(남녀차별 등)가 없다.
-회심(conversion)은 인격의 변화까지 온 것을 말하는데 그래서 ‘개종’이라는 단어로도 쓰인다.
-주님은 생명의 빛으로 죽음에 속한 자는 이 빛을 보면 두렵다.
-주님의 빛은 뜨겁고 거룩하고 무섭다.
-그 빛을 보는 시각은 믿음의 분량대로 다르다.
-빛을 보는 시각이 달라지는 것은 주님 만난 의미가 달라지는 것으로 주님에 대한 넓이와 높이와 깊이가 달라지는 것이다
-빛이 인자의 영광인 것이다
-빛으로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시다
-의미는 몰랐지만 기억했을 것으로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Lord, do not hold this sin against them.)라고 하는 스데반의 기도를 들었을 것이다
-햇빛보다 더 밝은 성령의 얼굴로 편안하게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Lord Jesus, receive my spirit.") 의탁하는 스테반의 얼굴을 사울이 본 것이다.
-성령의 빛이 스테반에게 비추니 ‘성령의 얼굴, 용서의 얼굴, 평안한 얼굴, 의탁하는 얼굴’을 사울이 본 것이다
-창세기부터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사무엘아, 사무엘아!” 라고 주님은 사명을 주실 때 녹아지게, 다정하게 부르신다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으로 교회를 핍박했는데 예수님을 핍박했다고 하신 것이며 교회를 핍박하는 것은 예수님을 핍박하는 것으로 생각하셨다.
-성도 여러분 주님을 사랑하신다면 핍박 받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교회, 성도, 스테반에 대한 핍박은 예수인 나를 핍박하는 거다’라고 얘기해주시는 것이다
-바울은 교회를 박해하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믿었던 것으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기에게 저주가 임할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포교하지 않으면 천국에 못 가고, 못하면 내가 저주받는 거야’ 라고 생각하는 것이 신천지다
-열심으로 교회를 박해하면서 율법으로 흠 없음이라고 생각한다
-율법으로 박해하는데 자신의 율법으로 상대방을 잔멸하는 것이다
-율법으로 핍박하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율법으로 핍박하는 것이 하나님을 박해하는 것이다
-‘내가 형편없으니 주님이 나를 인도해가시는 것이며 남편이 나를 박해해줘 가지고 내가 하나님을 섬겼구나’ 라고 하나님 섬기라고 붙여주신 주의 대사다.
-‘예수가 그리스도다’가 안 믿어지니까 정체성(처녀 잉태, 십자가 죽음, 부활 등)이 흔들리는 것이다
-틀릴지라도 기다리는 것이 기독교다
-신념과 신앙은 구별되어야 한다
-햇빛, 부도, 암이 내게 오는 빛일 수 있다
-예수님을 인정한 사울은 ‘나는 죽고 구속하신 예수가 살았다’가 되었다
-사울의 실명의 아픔은 가장 큰 아픔으로 그 아픔 가운데서 ‘주여’가 된 것이다
-아내를 핍박한 것을 예수님 핍박한 것으로 알고 영접기도 받고 ‘주여!’라고 회개하고 천국간 것이 회심이다.
-성령님이 효과적으로 도우셔서 찾아오신 분이 예수님인 것을 알고 ‘주여’가 나왔다.
-한 순간에 사울의 신학과 가치관이 다 무너졌다. 이럴 수도 있는 것이다.
-같이 둘러 섰는데도 들리는 사람이 있고 안 들리는 사람이 있는데 안 들리는 사람은 영적 자각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음성(Voice)으로 사울에게만 말씀하시니 같이 동참하는 다른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으니 소리(Sound)라고 표현한다
-똑같이 보고 들어도 또 주님을 영접해도 영적 자각이 없으니 감동이 없는 것이다
-똑같이 보고 들어도 영접의 의미를 모르니 증인이 안 되는 것이다
-영접하게 하러 갈 때 상대방의 살아온 인생을 알고 가야 한다.
-주님을 만난 첫 째 징표는 장님이 되어서 자기가 초토화시키려던 (자기 ‘나와바리’인) 다메섹에 끌려간 것이다
-주님의 영광을 바라본 후에 소경이 된 것이며 눈을 떠도 보지 못하는 자인 영적 소경임을 깨달으라고 육적 소경으로 만드셨다.
-사울도 사흘 동안 식음을 전폐한 것은 예수가 사흘 만에 부활하신 것처럼 자기 자신이 소경임을 깨달음으로 회심하게 하셨다.
-에너지가 있어야 살기등등도 사랑도 미움도 가능한 것이다
-땅에서 천국생활을 하게 되면 지옥이야기에 귀에 안 들어 오는 것이다
- ‘눈을 떴는데 보지 못하고’가 두 번 나왔는데 아무것도 모르고 끌려 가야 아픈 사람을 체휼하게 되는 것으로 사울은 자신이고 남이고 아픔에 대해 전혀 공감하지 못했던 것이다
-스데반을 죽인 걸 평생 울면서 복음에 매진할 사건으로 써주신 사울 사건을 통해 우리의 예수님 만난 사건을 생각해봐야 한다.
-은혜를 받으면 내 표정이 달라지는 것을 남들은 알게 되지만 난 모른다.
-내가 얼마나 예수님을 박해했는지를 남들은 아는데 나는 모른다.
-살기등등했던 눈매가 온유해지라고 육적 소경으로 눈을 멀게 하신다
-이디오피아 내시는 성경만 읽고도 아프리카 선교에 초석이 되었다.
-사울이 3일 만에 순종을 하니 그 다음 진도를 나가게 하신다
-육적 소경보다 영적 소경이 더 무서운 것이다
-여전한 방식으로 신앙생활 잘 하는 것은 어마어마한 축복이다.
-미리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거기에 맞는 일을 주실 것이다.
-바울, 빌립, 베드로에게 각자 역할을 맡겨주시는 것인데 내가 정하려고 하니까 문제인 것이다
-영적 시력이 없으면 사람을 못보고 자기확신에 차있다.
-큰 권세로 땅끝까지 증인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큰 권세에 합당한 큰 일꾼이 필요했다.
-유대인들과 싸울 율법, 가문, 지식에 뛰어난 권세가 필요했다.
-유대인들은 어부(베드로)와 상대를 안 하는데 열두 제자는 다 어부 출신들이다
-각자 은사대로 쓰신다
-완벽하게 회개하고 가는 것이 회심이다
-핍박해 주는 사람이 일꾼일 수 있다
-크게 박해해 주는 사람이 준비된 일꾼일 수 있다
-스테반이 죽고 잔멸이 되니 일꾼이 없었다
-살기(殺氣)로 숨쉬고 내뿜는 사울을 어떻게 ‘사울아, 사울아’하시면 부르실 수 있었겠나?
-해석이 잘 돼야 해결이 잘 되는 것이며 박해가 클수록 큰 일꾼이 될 줄 믿는다.
-회심은 내가 예수를 박해한 것을 아는 것이다.
-영적 소경에 대한 자각을 할 수 있으면 사명이 따라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은혜 아니면 설명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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