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교회 2020년 2월16일 주일예배말씀요약 및 어록(사도행전 7: 37~ 43/ 성령의 선지자)]
<사도행전 7:37~43>
37이스라엘 자손에 대하여 하나님이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 하던 자가 곧 이 모세라
38 시내 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 또 살아 있는 말씀을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
39 우리 조상들이 모세에게 복종하지 아니하고자 하여 거절하며 그 마음이 도리어 애굽으로 향하여
40 아론더러 이르되 우리를 인도할 신들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애굽 땅에서 우리를 인도하던 이 모세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고
41 그 때에 그들이 송아지를 만들어 그 우상 앞에 제사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기뻐하더니
42 하나님이 외면하사 그들을 그 하늘의 군대 섬기는 일에 버려 두셨으니 이는 선지자의 책에 기록된 바 이스라엘의 집이여 너희가 광야에서 사십 년간 희생과 제물을 내게 드린 일이 있었느냐
43 몰록의 장막과 신 레판의 별을 받들었음이여 이것은 너희가 절하고자 하여 만든 형상이로다 내가 너희를 바벨론 밖으로 옮기리라 함과 같으니라
<Prologue>
성령의 소명을 받았는데 미디안 광야에서 힘든 훈련을 받게 하신 것은 그만큼 백성을 인도하는 길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백성들은 귀가 얇고 근본이 기복적이기 때문에 가나안으로 이끌고 가는 길이 너무 험난하다. 심지어 모세를 돌로 치려 했다.
그래도 백성들이 아무리 싫어해도 백성들에게 옳은 소리를 해야 하는 것이 선지자다.
위기고 난세에는 제사장보다는 선지자가 필요하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레미야가 너무 죄를 많이 져서 바벨론으로 가야 한다고 했을 때 거짓 선지자 아나니아는 아니다, 성전의 기명이 다 돌아올 것이다 외치니까 그 말을 너무 좋아했다.
사람들은 잘된다는 말을 너무도 듣고 싶다.
성령의 소명을 받은 성령의 선지자는 외로운 길을 가야 한다.
<말씀요약>
성령의 선지자는,
1. 하나님의 명령을 예수님을 통해 말하는 자다.
사도행전 7: 37/”이스라엘 자손을 대하여 하나님이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 하던 자가 곧 이 모세라”("This is that Moses who told the Israelites, 'God will send you a prophet like me from your own people.')
이 말은 구약 신명기 18장 15절에 똑같이 있다.
신명기 18: 1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들을 들을지니라”(The LORD your God will raise up for you a prophet like me from among your own brothers. You must listen to him.)
나와 같은 선지자는 후에 모세 이후에 세우심을 받을 선지자를 총칭하는 말이고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바로 이 말을 너희가 그렇게도 대단하게 여기는 모세가 이 말을 했다는 것이다.
소명이 임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임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소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이해가 되기 시작하는 것이고 세상으로 보냄 받는 것이 선명하게 이해가 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하나님이 세우신 선지자이신 예수님이 오시면 그분이 말이 다 하나님의 말이니까 들으라고 예전에 신명기에서 예언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은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들리는 것이다.
모세는 예수님의 그림자였지만 오실 예수님은 실체라는 것이다.
신명기 18장 16절(현대인의 성경): “이것은 여러분이 시내 산에 모이던 날에 여러분이 직접 여호와께 구한 것입니다. 그때 여러분은 죽을까 봐 두려워서 다시는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을 듣지 않게 하고 그 무서운 불을 보지 않게 해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For this is what you asked of the LORD your God at Horeb on the day of the assembly when you said, "Let us not hear the voice of the LORD our God nor see this great fire anymore, or we will die.")
백성들도 똑같이 두려워했다는 것이다.
신명기 18장 17절: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의 말이 옳도다, 그들의 말이 옳도다”(The LORD said to me: "What they say is good.)라고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백성들이 두려운 것을 인정해 주신다.
‘너희들이 안 들리는 것도 옳다, 맞다’고 하신다.
목장에서 말씀이 이해가 안 된다고 하면 ‘맞아요, 이해가 안 되는 게 맞아요’라고 해야 한다.
악하고 음란한 이 세대는 믿음이 좋은 사람만 봐도 광신 같아서 싫고 교회 다니면 재미 하나도 없을 것 같아서 싫고 그래서 그런 사람과 결혼하기 싫은 것이다.
스펙 좋고 돈 있는 사람이 믿음 좋은 여자라고 해서 결혼하는가, 남자라고 결혼하는가, 불신자가 돈이 많고 스펙이 좋으면 믿는 것을 싫어할 확률이 100%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믿는 청년들이 안 믿는 배우자 감의 외모와 미모와 스펙을 따라서 ‘내가 믿게 할 거야’ 하면서 가는 것은 사실 말이 안 되는 것은 ‘세상과 하나님은 겸하여 섬길 수가 없다’는 것으로 좋아할 수가 없는 것을 자꾸 합리화 하려고 한다.
하나님은 ‘그들의 믿음이 거기까지니까 어떻게 하겠니?’ 하면서 우리를 양육해가신다.
‘당신은 왜 그래?’라고 이런 이야기를 하지 마시고 하나님도 그들이 옳다 하신다.
어떻게 말씀하시는가? 중재자,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한 것이다.
신명기 18장 18절: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고하리라 (I will raise up for them a prophet like you from among their brothers; I will put my words in his mouth, and he will tell them everything I command him.)
모세가 받은 소명 중에 가장 중요한 사명은 예수님에 대한 예언을 받은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모세에게 주었는데 모세는 부분적으로 주었고 ‘모세는 나 같은 선지자 하나를 보내리니’가 예수님인데,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다 주셨기 때문에 예수님만 믿으면 말씀을 통해서 다 하나님을 알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모든 말씀을 주셨기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모두가 성령의 선지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가 임해야 하나님의 말씀이 더 이상 무섭지 않고 기쁘게 들리는 것이다.
예수님이 임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상적으로 남편이 죽는 것이 무섭고 떨어지는 것이 무섭고 암이 무서운 것이다.
예수님이 임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다 내게 들어오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를 믿어야 되는 것이다.
다시 사도행전으로 돌아오면 사도행전 7장 38절, 시내 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및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 또 생명의 도를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 (He was in the assembly in the desert, with the angel who spoke to him on Mount Sinai, and with our fathers; and he received living words to pass on to us)
사도행전 6장의 스데반은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려 말한 것으로 체포되었다.
율법을 하나님께서 주신 살아있는 말씀으로 표현한다.
원어로 보면 3인칭 여격 대명사이기 때문에 시내산에서 그에게 말하던 그 천사이고 30절의 지난번의 불꽃 가운데서 말하던 천사와 같다는 것이다.
이 천사는 성육신 이전에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모세에게 말했고 예수님이 모세에게 율법을 주셨다는 것이다.
구약의 최초 교회가 광야교회고 광야교회의 리더, 선지자가 모세고 모세는 예수님께 살아있는 말씀을 받아 백성에게 전해주던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일생 죄에 매여 종 노릇하다가 사망을 월급으로 받는 것이 우리 인생이다.
죄에 매인 결박이 너무 강해서 가나안으로 가고자 할 때에 성령의 선지자인 예수님과 모세와 같은 사람이 있어야 한다.
내가 구원의 길로 이끌려고 가나안 여정을 시작했는데 백성들이 좋아하는 것이 아니고 원망하고 돌로 친다.
그런데 성령의 선지자는 그들을 위해서 생명 내놓고 기도한다고 나온다.
그래서 리더인 모세를 원망하고 돌로 칠 때 이것을 받아내야 하기 때문에 리더인 모세를 쓰시기 위해 미디안으로 보내 훈련시키셨다가 데려오신 것이다.
예수님도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히브리서 5장 8~9절,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Although he was a son, he learned obedience from what he suffered and, once made perfect, he became the source of eternal salvation for all who obey him )
모세도 미디안 광야의 고난을 통해서 예수님을 알아보고 만났다.
그러나 모세는 위대한 선지자였지만 메시아는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듣게 되니 얼마나 복인가?
내 인생에 예수님이 오시는 사건은 말씀이 들리는 사건이다.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을 주신 자가 모세이기 때문에 모세가 말한 분이 그리스도라면 오늘 신명기에서 들으라고 했다.
선지자가 말하는 것을 들을찌니라, 들어야 되지 않겠는가?
그 모세가 예언한 위대한 선지자가 스데반이 법정에 서기 불과 몇 년 전에 진짜 오셨다는 것이다.
성경은 말씀을 이루는 것이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을 주셨는데 모세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했다.
모세에게는 일부분을 주셨는데 예수님에게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다 주셨기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은 말씀을 하시니까 내가 말씀을 깨닫고 안 깨닫고는 ‘주님이 내 인생에 들어왔나 안 들어왔나, 예수님을 만났나 안 만났나?’이기에 학벌과 스펙이 하나도 소용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들교회를 보면 증명이 된다.
(적용#1)
-여러분은 말씀을 들을 때 두렵나? 꿀송이인가?
-여러분 인생에 예수님이 오셨는가? 아직도 잘 모르겠는가?
‘말씀이 어렵다, 안 들린다’하는 사람은 아직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것이다.
성령의 선지자는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를 통해서 임했는데 그 다음에는 룰루랄라가 아니라,
2. 거절하는 자들에게 보냄을 받는다.
사도행전 7장 39절: “우리 조상들이 모세에게 복종치 아니하고자 하여 거절하며 그 마음이 도리어 애굽으로 향하여” ("But our fathers refused to obey him. Instead, they rejected him and in their hearts turned back to Egypt.)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주셨는데 들리지 않는 자는 그 마음이 하나님과 반대인 애굽 세상으로 향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400년동안 노예 생활하던 사람들을 끌어내셨다.
그런데 이들은 툭하면 마음이 돌아가는 곳이 애굽이다.
정신이 돌아가면 마음이 돌아가고 마음이 돌아가면 몸이 돌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몸이 만나면 정신과 마음이 돌아간다
그래서 모든지 원천 봉쇄해야 한다.
몸을 꺼내왔는데 몸이 기억하는 그리움이 남아있다.
그들이 그리워했던 것은 대단한 것이 아니다.
하찮은 마늘, 부추다.
이것 때문에 노예에서 해방된 것은 잊어버리고 다시 돌아가겠다는 것이다.
여러분들이 다 원하는 것이 마늘, 부추다.
그래서 자신들을 구원해준 모세를 원망하며 후에 돌로 치기까지 했다.
노예로 사는 것을 구해줬는데 다시 노예로 돌아가고파 이것을 바로 노예근성이라고 한다.
출애굽기 25장부터 30장까지 보면 성막 지으라는 명령을 하시고 명령하셨으면 31장부터 지어야 하는데 안식일 이야기로 31장을 마무리하신다.
성전의 마무리는 안식이라는 것이다.
32장부터 지어야 하는데 32장부터 34장까지는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러 올라갔는데 거기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기고 내려오다가 돌 판을 깨뜨리고 그 벌로 3천명이 죽임을 당하고 모세는 생명 책에서 자기 이름을 지워도 백성들을 살려달라는 기도를 한다.
3천명이 죽은 것도 모세 때문이고 살아난 것도 모세 때문이다.
백성들이 깽판을 치는데 성령의 선지자는 이래도 중보하고 저래도 중보한다.
다 죽고 모세의 중보기도를 들으시고 이제 35장부터 성막을 짓기 시작한다.
가나안 행군을 시작했는데도 또 문제가 생기고 우리들의 노예 근성은 잊을만하면 튀어나오는 것이 끝없는 성도의 여정이다.
여기에 성령의 선지자가 있다.
신앙생활을 놓지 않도록 큐티가 끊어지지 않도록 결혼생활을 끝내지 않도록 끊임없이 성전을 지어가게 하는 목숨을 내놓은 너무 기가 막혀서 큰소리로 돌 판을 깨뜨리기도 하고 그들을 위해 목숨을 걸고 기도를 해주는 이게 다 양쪽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성령의 선지자다.
그런데 조금만 힘들면 이스라엘 백성처럼 애굽에 가면 쉼이 있을 것 같고 쉬려고 자꾸 애굽으로 몸이 돌아간다.
성도의 목적은 서는 것이지 쉬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잘 서야 쉼이 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하신 것이 바로 안식이고 쉼이다.
그런데 예수 열심히 믿고 큐티 열심히 하는 것 같은데도 여행, 동창모임, 등산, 노래방 자체를 쉬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전부 다 목장모임에서 나의 목적은 여행 가는 거야, 여행으로 나를 회복시켜야 해, 그것도 맞는 말이다.
그것 자체를 쉬는 것으로 생각하니까 결국 쉼이 없고 잘 서지 못한다.
예수 안에서 잘 놀아야 하는데 그것이 무엇인지를 모른다.
아무리 대단한 곳을 가도 인생은 동반자가 좋아야 즐거운 것이다.
좋은 골프장, 유명한 사람이 초청해도 말이 안 통하는 사람과 있다면 즐겁겠는가?
양다리를 걸치려니까 여기서도 저기서도 즐거움이 없고 쉬지를 못하니 서지를 못한다.
무라타 치아키는 ‘크리에이티브(Creative)를 읽는 기술’이라는 책에서 자아를 초월하여 타인을 위해 움직이는 사람은 상냥함, 즐거움, 존경, 감사로 넘치며 자연스럽게 주위에 사람들이 모인다고 한다.
이타적으로 사는 것이 가장 먼 길 같지만 결국은 가장 빠른 지름길이라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위해 손해를 보는 사람을 도와주려 한다는 것이다.
항상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배려가 넘치는 사람은 표정이 살아있다.
그래서 상냥함이 넘친다. 존경 받는다. 물어보라. 내가 얼굴이 상냥하게 보여? 그러면 상대방이 우거지로 보여, 뭐라고? 하면 그 사람은 상냥하지 못한 것이다.
우거지로 보여, 응 그렇구나 해야 진짜 상냥한 것이다.
믿기 전에 우리는 다 애굽의 노예로 살았다.
믿기 전에 모두 노예근성으로 사는 것이다
노예로 살다가 구원해주셨는데 그 연륜만큼 노예근성이 사라지는 것이다.
연륜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제대로 양육을 받아가면서 노예근성이 조금씩 없어지게 된다.
노예근성은 늘 주인이 올까 봐 무섭고 가만히 있으면 불안하고 야단 맞을까 봐 두렵고 그래서 늘 쉼이 없는 것이 노예다.
하지만 주인집 아들은 술 퍼먹고 드러누워 있어도 편하다. 내 집이니까. 그것이 내 아버지와 주인님의 차이다.
이 세상에 어떤 주인이 와서 일주일에 한번씩 쉬라고 하겠는가?
우리가 너무 유치원 수준에 있기 때문에 안식일에 쉼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반복하는 것이다.
이해타산 때문에 ‘낄끼빠빠’가 아니고 구원 때문에 ‘낄끼빠빠’면 복 주신다
이해타산 때문에 빠지기 일수 인 것이 우리다
예배 안 가면 다리 부러진다는 생각이 노예근성이다
(목사님 이야기)
우리는 어려서부터 잘 모른다. 그래도 몸이 기억하도록 어려서부터 주일을 지킴으로 안식의 의미를 가르쳐 주는 것이다.
의미를 배워야지 모르고 나갔다 들어갔다만 하게 되면 사건이 왔을 때 다 넘어진다.
교회를 다녔는데 바람을 폈다고 넘어지고 부도가 났다고 넘어지고 대학교 떨어졌다고 넘어지고 안식의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잘 서라고 안식하라는 것인데 맨날 쉬려고 여행 다니니까 서지를 못한다.
안식의 의미를 어려서부터 구속사적인 큐티를 들려놓으면 지금은 모르나 후에는 알리라, 사건이 오면 알리라.
3. 금송아지 우상을 물리쳐야 한다.
사도행전 7장 40절: “아론더러 이르되 우리를 인도할 신들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애굽 땅에서 우리를 인도하던 이 모세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고”(They told Aaron, 'Make us gods who will go before us. As for this fellow Moses who led us out of Egypt--we don't know what has happened to him!')
출애굽기 32장 1절을 인용한 것이다.
모세보고 출애굽기에서는 이 모세, 곧 우리를 인도하여 낸 사람이라고 표현한다.
여러분이 제가 없는데에서 믿음이 약간 떨어지면 그 여자, 그 사람 이렇게 이야기하지 않는가?
여러분의 남편이 그러는가? 시어머니가 그러는가? 모세가 안보이니까 금새 우리들 인도한 신들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어내라고 인본주의로 딱 바뀐다.
인본주의로 바뀌니까 신본주의인 모세를 딱 무시한다.
우상을 만들라고 십계명의 1, 2계명을 아무렇지 않게 어긴다.
모세는, 성령의 선지자 모세는 백성의 밥이다.
모세의 헌신적 기도와 봉사는 평범할 때는 그런 가보다 하는데 문제가 생기면 원망을 집중적으로 받아내는 밥통이다. 그래서 외로운 길이다.
힘들면 모든 걸 여기다 탓을 하게 되어있다.
눈에 보이는 기적이 있을 때는 모세여! 하면서 다 하나님 믿는 것 같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니라 모세를 붙들었기 때문에 모세가 안보이니까 금새 버린다.
여러분이 목사인 저를 붙들면 떠나게 된다. 하나님 붙들어야 되는데 저를 붙들었기 때문에 조금만 문제가 생기면 다 떠난다. 그렇게 좋다고 했다가 다 떠난다.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일하시지만 목사를 붙들라고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다. 목사를 통해서 하나님을 붙들어야 한다.
그런데 다 사람 자체가 우상이 되다 보니까 한국은 그 정도는 아닌데 이민교회 목사님이 출타할 수 없다고 한다. 다 이유가 있지만 다녀오면 다 부목사가 교인들 데리고 나간다고 한다. 그래서 한 이주일, 한 달만 갔다 와도 다 나간다고 한다. 곳곳을 다녀보니까 그런 이야기가 있다.
출애굽기 32장에 금송아지 사건이 나오는데 왜 이렇게 광야 여정에 모세가 400년도 살았고 40년 광야 길에 지금 40일 십계명 받으러 올라갔는데 불안한 것이다.
모세가 안보이니까 불안하다. 금송아지를 만들어놓고 하나님이라고 섬긴다.
그 불안함의 근원에는 바로 금송아지가 돈이다.
‘God is gold.’ 멀리서 보면 시력이 안 좋으면 똑같이 보인다. 그래가지고 돈이 있다. 그래서 예배도 다 불안함 때문에 드린다.
세상에 나가서도 교회에 와서도 다 돈 때문에 불안하게 살아간다.
내가 아무리 예배를 드려도 다음절에 보면 내가 네 예배를 안 받았다고 하나님이 그러신다.
내가 늘 모든 것의 끝에 돈이 있다고 한다.
세상 박사님들은 이런 것들을 증명하다. 연세대 교수님의 칼럼, 결혼 상대자를 고를 때나 회사에서 직원을 뽑을 때 다른 사람의 인품을 빠른 시간 안에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너무 중요한데 그러면 어떻게 파악하냐,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질문이라고 한다.
그 사람이 말을 어떻게 하는지 주의 깊게 관찰하려고 하지만 사람들은 자기 이익을 위해서 얼마나 속과 겉이 다른 말을 하는지 모른다고 한다.
그래서 말보다는 행동을 봐야 할 것 같지만 속이고자 들면 그것도 믿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가장 쉬운 방법은 사람들이 어떤 일에 가장 많은 관심을 가지는지, 그리고 어떤 일에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지 보면 알 수가 있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사람들이 가장 많은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다름아닌 돈이다.
결론적으로 돈을 어떻게 쓰는지를 알면 어떻게 돈을 위해서 시간을 투자하고 있는지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돈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하기 때문에 마음과 본심을 조금 지내다 보면 숨기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항상 갈등과 다툼의 끝이 돈을 다루는 태도인 것을 보면 “돈이 인품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분명해 보인다는 것이다.
이것은 돈에 인색 하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열등감으로 인해서 돈을 풀어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것 다 문제다.
인색해도 문제고 낭비도 문제다.
우리 목사님들조차도 최고의 제사장 레위 직분, 간증들 들어보면 모두 가난해서 열등감으로 몸살을 앓다가 전부 다 큰 교회 목사가 되는 것이 꿈이라는 간증을 많이 듣는다. 가난이 삶으로 쌓였기에 당연하게 여겨진다.
돈은 또 써보기도 해야 하는데 쓸 줄을 모르는 것도 문제다. 그렇게 되면 돈이 생길 때 또 위험하다.
그러니까 모든 것이 돈의 잣대이다 보니까 그것으로 판단이 되니까 돈 때문에 불안하고 내가 말씀으로 이제 이렇게 인도를 받으면서 보이지 않는 데서 분별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분별을 하려고 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이 돈을 어떻게 쓰고 어떻게 생각하고 그래서 노름 해보면 그 사람 성격 금새 나타난다고 한다.
게임을 해보면 금새 나타난다고 한다. 알게 모르게 분별하는 가장 큰 것이다.
배우자를 선택해도 그렇다.
(적용 #2)
-여러분의 돈 씀씀이는 인색한가? 낭비인가?
옆에 배우자 보고 물어보라, 너무 인색해도 안되고 너무 낭비해도 안 된다.
치우쳐 있는 사람은 다 문제가 있는 것이다.
사도행전 7장 41절: “그 때에 저희가 송아지를 만들어 그 우상 앞에 제사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기뻐하더니” (That was the time they made an idol in the form of a calf. They brought sacrifices to it and held a celebration in honor of what their hands had made.)
모세가 성막 지을 생각을 하고 금과 은과 놋의 사용처를 알아서 내려오고 있는데 그것을 못 기다리고 아론은 금 고리를 받아가지고 금송아지를 만들었다.
40일을 못 기다리고 목장에서 처방을 하면 답답증이 나서 적용을 못한다.
기다리지 못한다. 기다려라, 돌아올 것이다, 이혼하지 말라 이런 이야기를 못 기다린다.
자신이 만든 방법이 지름길인 것 같아서 흥신소를 갖다 붙이고 내가 가서 말하고 끝내겠다고 한다.
그러니까 맨날 가서 다된 밥에 코만 빠뜨리고 오는 역할을 여러분들이 한다.
목장 이야기를 좀 들어야 하는데 금과 은이 없어지는 방법을 쓴다.
성막 짓는데 다 써야 될 금과 은인데 쓸데없는 금송아지 만들어서 다 가루로 사라진다. 나중에 빻아야 되니까.
내 욕심이 들어가는 것은 다 쓸데없는 것이 된다.
돈 문제에 대해서 해결이 안되고 돈이 너무 좋은 것이다. 해결이 안된 것이다. 너무 아까운 것도 해결이 안된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아까워하는 사람은 나중에 결산해보면 남는 것이 하나도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손해 보는 인생을 사는 것이다.
아까워서 돈은 가졌는데 아이들은 다 망했고 돈은 가졌는데 예수도 안 믿었고 병에 걸렸고 쓸 사람이 없다.
이렇게 돈은 벌었는데 마지막에 보면 결산할 때 손해를 보는 것이다.
돈을 어디에 써야 할지 분별하기 위해서 큐티하고 말씀을 듣고 응답 받는 구조 속에서 살아야 한다.
아론같은 잘못된 지도자 한 사람이 교회와 집안을 말아먹고 목장과 회사를 말아먹는다.
하나님의 명령은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라는 것이 아니라 순종 잘 하라는 것이다
우리들교회도 큐티를 하니까 돌 판을 깨뜨리면서 여기까지 왔다. 중보기도를 하니까 왔는데 사람들 말에 휘둘렸다면 얼마나 수많은 문제가 생겼겠는가?
그런데도 이런 아론과 아들들에게 후에 제사장 직분을 위임하라고 했다.
하나님 명령대로 위임했더니 그 아들 나답과 아비후는 불 심판을 받고 금새 죽는다.
이스라엘이 너무 말을 안 들어서 바벨론으로 가야 한다.
그런데 지금 포로로 가야 되는 것이다.
이렇게 기도하는 것은 전쟁이 안 나게 하도록 하려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짐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 위해서 가야 될 때는 가야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전쟁이 안 나기 위해서 몸부림치게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이런 말도 안 되는 아론을 세우라고 한다.
항상 하나님은 옳고 그름이 아니다. 얼마나 어려운가? 분별이 안 된다.
욕심이 없어야 분별이 된다.
직장을 잃고 어렵다가 기도해서 취직이 되었는데 금새 금고리 차고 이러면 되겠는가? 이렇게 애굽을 사모한다.
(적용 #3)
-하나님보다 여러분의 손으로 만든 것을 기뻐하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손으로 만든 것을 하나님보다 기뻐하는 것이 너무 많다.
4. 버려두는 것이 있어야 한다.
유대인들이 지금까지도 안 돌아오고 있다.
내가 버려두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는가?
때가 될 때까지 버려둘 수도 있어야 된다.
사도행전 7장 42절: “하나님이 돌이키사 저희를 그 하늘의 군대 섬기는 일에 버려 두셨으니 이는 선지자의 책에 기록된바 이스라엘의 집이여 사십 년을 광야에서 너희가 희생과 제물을 내게 드린 일이 있었느냐? (But God turned away and gave them over to the worship of the heavenly bodies. This agrees with what is written in the book of the prophets: "Did you bring me sacrifices and offerings forty years in the desert, O house of Israel? )
하나님께서 그들을 하늘의 군대 섬기는 일에 버려두셨다.
금송아지도 섬기게 하고 땅에서도 섬기고 하늘과 땅의 우상 섬기는 일에 버려두셨으니 이는 선지자의 책에 기록된 바 이스라엘 집이여 너희가 광야에서 40년간 희생과 제물을 내게 드린 일이 있었느냐고 놀라운 이야기를 하신다.
하나님이 외면하셨는데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이 40년동안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지 않았다고 하는가?
예배를 안 드리고 제물을 안 드렸다, 열심히 드렸다, 어떻게 안 드렸다고 그러겠는가?
유대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율법과 회향을 드렸지만 너희들이 근채의 십일조는 드렸지만 의와 인과 신을 버렸다는 것이 똑같다.
하나님께서는 참된 신앙과 감사함이 없이 형식적으로 드리는 예물에 대해서는 아예 드리지 않은 것으로 여긴다고 하신다.
그것은 이사야 1장에도 나오듯이 하나님을 모독하고 조롱하는 것으로 여기신다는 것이다.
너희가 금송아지 섬기면서 이렇게 하늘의 레판 신까지 섬기면서 나한테 희생을 드렸다고, 제물을 드렸다고 하나님이 거지예요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그것에 대한 본문이 출애굽기 32장 6절도 이튿날에 섬기기 위해 만든 금송아지에 절한 이튿날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 번제를 드리며 화목제를 드리고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더라 이러는 것이다.
그렇게 금송아지 섬기면서도 일찍 일어나서 새벽 기도하고 회개하는 번제를 드리고 형제가 연합하는 화목제를 드리고 온몸을 불사르게 구제하고 예수 천당을 외치고 그러면서 먹고 마시며 뛰노는 성적 문란까지 행했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다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모두 모두 서로 서로 교회를 다니면서 속는다.
아론하고 금송아지 섬기고 놀러 다니면서 나는 회개도 하고 너무 화목하게 지내고 번제와 화목제 드린다고 한다.
금송아지 섬기는 것은 잘 먹고 마시면서 자기 죄 수치는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
스데반 당시 유대 지도자들도 똑같은 양상이었다.
이 이야기를 스데반이 한 것이다.
가인의 뜻이 획득이고 아벨의 뜻은 허무라는 뜻이다.
이 땅에서 모든 획득의 결과는 허무일 뿐 이라는 것이다.
전혀 진짜 알지 못하는 다른 씨 셋이 와야 하는 것이다.
생각지 못한 다른 씨는 시아버지(유다)와 동침한 며느리(다말) 이런 사람들이 주의 일을 해간다는 것이다.
행마다 절마다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이 우리의 허를 계속 찌르고 계신다.
사도행전 7장 43절: “몰록의 장막과 신 레판의 별을 받들었음이여 이것은 너희가 절하고자 하여 만든 형상이로다 내가 너희를 바벨론 밖에 옮기리라 함과 같으니라” (You have lifted up the shrine of Molech and the star of your god Rephan, the idols you made to worship. Therefore I will send you into exile' beyond Babylon)
별, 우리는 스타 너무 좋아한다.
그들은 암몬 족속의 민족신인 몰록과 앗수르인들의 우상인 레판을 비롯해서 여러 우상들을 숭배했다.
여기서 몰록 숭배는 유명한 자기 자녀를 태워 바치는 의식이 동반되었다.
자식 우상이라는 것이 결국 자식을 죽이는 것이다.
그런데 우상이라는 것이 기복이니까 자기를 위해서 자식을 불태우는 것이다.
그것이 자식 사랑으로 둔갑이 되어서 이기적인 자식 사랑이 자기 사랑의 끝판왕이다.
자기를 위해서 자녀를 불태우면서 나는 자녀를 사랑한다고 착각한다.
자식이 죽어가는지도 모른 채 우상의 제물로 불태우는 것이다.
증거 장막을 가지고 다니면서도 몰렉 우상도 같이 가지고 다녔다는 것이다.
하늘의 별판을 가지고 만들면서 내가 아이를 이렇게 출세시키고 돈을 많이 벌고 공중 권세 잡은 자를 섬기니까 너희들이 나에게 예배 드린 적이 40년 동안에 한번도 없다, 제물을 드린 적도 한번도 없다, 금송아지 섬기면서 ‘헌금 했다고요’했는데 하나님이 희생과 제물을 받은 적이 없다고 하신다.
내가 복 받으려고 헌금했는데 하나님께서 그 헌금 하나도 안 받으신다고 한다.
헌금은 복 받으려고 드리는 것이 아니라 신앙고백으로 드려야 한다.
실제로 이스라엘 민족은 바벨론으로 끌려가서 70년동안 포로생활 하면서 잘못을 뉘우쳐야 한다.
증거장막(십계명)하고 몰렉 우상을 같이 가지고 갔다.
그들이 증거 장막과 말씀과 몰록을 같이 가지고 다니는 것처럼 자식 우상, 고향 우상 다 같이 가지고 다닌다.
자식우상, 고향우상을 함께 섬기는 행위는 주님께서 오시기까지 해결이 안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너희들이 드리는 예배를 받지 않겠다고 하신다.
주님은, 40년동안 신앙생활 해 왔는데 ‘내가 네 예배를 안받겠다’고 하시는 것을 성령의 선지자가 이런 이야기를 해야 하니까 다들 얼마나 듣기가 싫겠는가?
아론은 모세만큼 고난도 없고 하나님과 깊은 교제도 없었다.
남 보기에는 착하게 보일 수도 있는데 그는 백성 옆에서는 백성 말을 따르고 모세 옆에서는 모세 말을 따르고 잘못하면 모세 옆에서 변명하고 연약한 사람이다. 심지가 굳지 못해서 유혹에 약하다.
모세는 미디안의 40년을 거쳤다.
인격적인 리더십은 성령과 말씀과 고난과 훈련에 의해서 나오는 것이지 성품에 의해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목사님 이야기)
사람의 종 노릇하던 습관으로 말 못하는 것이 많다.
스데반을 심문하는 사도행전의 유대인들도 AD 70년에 로마 군대에 의해서 완전히 쫓겨나서 각국으로 흩어지게 돼서 없어졌다.
그런데 그랬던 유대인들이 시온니즘(Zionism)으로 1948년에 모여서 유대 나라를 형성했으니까 이건 기적인 것이다.
별 인생이 없다.
하나님께서 죄 중에서 가장 미워하는 죄가 우상숭배다
언급했듯이 자신들의 손으로 만든 것을 하나님보다 더 기쁘게 섬기는 것도 우상이다.
자녀도 있을 것이고 남편, 아내, 돈 다 있을 것이고 그렇게 자식을 하나님보다 더 좋아하니까 정욕대로 그 마음을 버려두는 것이다.
상실한 마음대로 버려두는 것이다. 그것이 가장 큰 저주인 것이다.
정욕대로 살게 내어 버려둠을 당하는 것, 이생의 자랑, 안목의 정욕, 육신의 정욕대로 살게 내어 버려둠을 당한 자, 상실한 마음대로 살게 내어 버려둠을 당한 자, 로마서 1장에 다 나와있다. 이것이 가장 큰 저주다.
그래서 모세가 살인자로 간 것이 ‘신의 한 수’ (God’s Providence)라고 했다.
왜냐하면 이 땅에서의 삶이 너무 짧기 때문이다.
이렇게 우상을 숭배하면 그리스도도 진리도 교회도 대적하는 자가 되고 만다.
지금 내가 자식이 제일인데 뭐 하지 말라고 하면 교회를 대적할 것이다.
결혼도 막으면 대적할 것이다.
(적용 #4)
-여러분이 상실한 마음대로 버려두고, 정욕대로 살게 버려둔 자는 아닌가?
-무엇 때문에 버려둠을 당했는가? 자식인가? 식구들인가? 돈인가? 건강인가? 명예인가?
(공동체 고백)
<Epilogue>
성령의 선지자는 하나님의 명령을 예수님을 통해서 말하는 자다.
그리고 우리는 거절하는 자들에게 보냄을 받는다.
다들 목자를 원망하고 돌로 치려고 한다.
처방을 해도 돌로 치려고 한다.
그래도 목숨을 걸고 중보하는게 성령의 선지자다.
성령의 선지자는 금송아지 우상을 물리쳐야 한다.
모든 것의 끝에 돈이 있다.
목장에서도 싸우는 이유도 다 돈이다.
안될 때는 버려둘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을 지혜롭게 생각하면서 모두가 성령의 선지자가 되어서 우리가 한국교회에서 우리들교회가 성령의 선지자가 되어서 각 곳을 살려내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란다.
<주일말씀 어록>
소명이 임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임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소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이해가 되기 시작하는 것이고 세상으로 보냄 받는 것이 선명하게 이해가 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은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들리는 것이다.
모세는 예수님의 그림자였지만 오실 예수님은 실체라는 것이다.
모세가 받은 소명 중에 가장 중요한 사명은 예수님에 대한 예언을 받은 것이다.
구약의 최초 교회가 광야교회고 광야교회의 리더, 선지자가 모세고 모세는 예수님께 살아있는 말씀을 받아 백성에게 전해주던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일생 죄에 매여 종 노릇하다가 사망을 월급으로 받는 것이 우리 인생이다.
내 인생에 예수님이 오시는 사건은 말씀이 들리는 사건이다.
성경은 말씀을 이루는 것이다.
‘말씀이 어렵다, 안 들린다’하는 사람은 아직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것이다.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주셨는데 들리지 않는 자는 그 마음이 하나님과 반대인 애굽 세상으로 향하는 것이다.
정신이 돌아가면 마음이 돌아가고 마음이 돌아가면 몸이 돌아가는 것이다.
몸이 만나면 정신과 마음이 돌아간다
노예로 사는 것을 구해줬는데 다시 노예로 돌아가고파 이것을 바로 노예근성이라고 한다.
가나안 행군을 시작했는데도 또 문제가 생기고 우리들의 노예 근성은 잊을만하면 튀어나오는 것이 끝없는 성도의 여정이다.
잘 서야 쉼이 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하신 것이 바로 안식이고 쉼이다.
이타적으로 사는 것이 가장 먼 길 같지만 결국은 가장 빠른 지름길이라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위해 손해를 보는 사람을 도와주려 한다는 것이다.
항상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배려가 넘치는 사람은 표정이 살아있다.
믿기 전에 모두 노예근성으로 사는 것이다
노예로 살다가 구원해주셨는데 그 연륜만큼 노예근성이 사라지는 것이다.
연륜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제대로 양육을 받아가면서 노예근성이 조금씩 없어지게 된다.
노예근성은 늘 주인이 올까 봐 무섭고 가만히 있으면 불안하고 야단 맞을까 봐 두렵고 그래서 늘 쉼이 없는 것이 노예다.
우리가 너무 유치원 수준에 있기 때문에 안식일에 쉼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반복하는 것이다.
이해타산 때문에 ‘낄끼빠빠’가 아니고 구원 때문에 ‘낄끼빠빠’면 복 주신다
이해타산 때문에 빠지기 일수 인 것이 우리다
예배 안 가면 다리 부러진다는 생각이 노예근성이다
안식의 의미를 어려서부터 구속사적인 큐티를 들려놓으면 지금은 모르나 후에는 알리라, 사건이 오면 알리라.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일하시지만 목사를 붙들라고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다. 목사를 통해서 하나님을 붙들어야 한다.
그 불안함의 근원에는 바로 금송아지가 돈이다.
‘God is gold.’란 말은 멀리서 보면 시력이 안 좋으면 똑같이 보이기에 그렇다. 그래가지고 돈이 있다. 그래서 예배도 다 불안함 때문에 드린다.
세상에 나가서도 교회에 와서도 다 돈 때문에 불안하게 살아간다.
모든 것의 끝에 돈이 있다(기-승-전-돈).
돈을 어떻게 쓰는지를 알면 어떻게 돈을 위해서 시간을 투자하고 있는지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돈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하기 때문에 마음과 본심을 조금 지내다 보면 숨기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항상 갈등과 다툼의 끝이 돈을 다루는 태도인 것을 보면 “돈이 인품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분명해 보인다는 것이다.
이것은 돈에 인색 하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열등감으로 인해서 돈을 풀어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것 다 문제다.
그러니까 모든 것이 돈의 잣대이다 보니까 그것으로 판단이 되니까 돈 때문에 불안하고 내가 말씀으로 이제 이렇게 인도를 받으면서 보이지 않는 데서 분별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분별을 하려고 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이 돈을 어떻게 쓰고 어떻게 생각하고 그래서 노름 해보면 그 사람 성격 금새 나타난다고 한다.
내 욕심이 들어가는 것은 다 쓸데없는 것이 된다.
그리고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아까워하는 사람은 나중에 결산해보면 남는 것이 하나도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손해 보는 인생을 사는 것이다.
돈을 어디에 써야 할지 분별하기 위해서 큐티하고 말씀을 듣고 응답 받는 구조 속에서 살아야 한다.
아론같은 잘못된 지도자 한 사람이 교회와 집안을 말아먹고 목장과 회사를 말아먹는다.
하나님의 명령은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라는 것이 아니라 순종 잘 하라는 것이다
항상 하나님은 옳고 그름이 아니다. 얼마나 어려운가? 분별이 안 된다.
욕심이 없어야 분별이 된다.
내가 손으로 만든 것을 하나님보다 기뻐하는 것이 너무 많다.
하나님께서는 참된 신앙과 감사함이 없이 형식적으로 드리는 예물에 대해서는 아예 드리지 않은 것으로 여긴다고 하신다.
금송아지 섬기는 것은 잘 먹고 마시면서 자기 죄 수치는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
행마다 절마다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이 우리의 허를 계속 찌르고 계신다.
자식 우상이라는 것이 결국 자식을 죽이는 것이다.
우상이라는 것이 기복이니까 자기를 위해서 자식을 불태우는 것이다.
그것이 자식 사랑으로 둔갑이 되어서 이기적인 자식 사랑이 자기 사랑의 끝판왕이다.
자기를 위해서 자녀를 불태우면서 나는 자녀를 사랑한다고 착각한다.
자식이 죽어가는지도 모른 채 우상의 제물로 불태우는 것이다.
내가 복 받으려고 헌금했는데 하나님께서 그 헌금 하나도 안 받으신다고 한다.
헌금은 복 받으려고 드리는 것이 아니라 신앙고백으로 드려야 한다.
자식우상, 고향우상을 함께 섬기는 행위는 주님께서 오시기까지 해결이 안 되는 것이다.
인격적인 리더십은 성령과 말씀과 고난과 훈련에 의해서 나오는 것이지 성품에 의해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의 종 노릇하던 습관으로 말 못하는 것이 많다.
별 인생이 없다.
하나님께서 죄 중에서 가장 미워하는 죄가 우상숭배다
언급했듯이 자신들의 손으로 만든 것을 하나님보다 더 기쁘게 섬기는 것도 우상이다.
자녀도 있을 것이고 남편, 아내, 돈 다 있을 것이고 그렇게 자식을 하나님보다 더 좋아하니까 정욕대로 그 마음을 버려두는 것이다.
정욕대로 살게 내어 버려둠을 당하는 것, 이생의 자랑, 안목의 정욕, 육신의 정욕대로 살게 내어 버려둠을 당한 자, 상실한 마음대로 살게 내어 버려둠을 당한 자, 로마서 1장에 다 나와있다. 이것이 가장 큰 저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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