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교회 2020년 3월1일 주일예배 말씀요약(사도행전 7: 5~ 60/성령의 순교)]
(사도행전 7:51~60)
51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52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53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54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55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57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58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59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Prologue>
오늘은 3.1절이다. ‘기미년 3월1일 정오 오~ 기리자 밀물 같은 대한독립만세~ ’
구한말 Underwood박사일행이 기독교인 말살하려 한다는 첩보를 입수하여 라틴어로 교신 후 고종황제에게 사전에 알려 이를 극적으로 저지시켰다.
이들은 라틴어, 히브리어, 헬라어, 영어까지 구사하면서 헌신하고 전도하러 조선에왔다.
한 문장의 라틴어 전보문이 기독교인의 생명을 구하였고 음모를 꾸민 이용익과 김영준은 처형되었다.
기독교는 자고이래로 핍박을 많이 받아왔다
순교를 사전에는 ‘모든 압박과 방해를 물리치고 자기가 믿는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일’이라고 했는데 그래서 순교하려면 압박과 박해는 필수로 있어야 하는 것이다
<말씀요약>
이 시대 성령의 순교는,
1.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 사람 때문에 한다.
51절. 스데반이 죽을 작정을 하고 한 말.
인간의 힘으로는 막을 수 없어 성령으로 죽어야 한다.
성령이 효과적으로 도와주지 않으면 잘 죽을 수도 없다.
인간은 태생이 지옥뿌리에서 올라온 교만이 있기 때문에 이 사람들만 들어야 되는 얘기는 아니다. (나도 들어야 하는 얘기)
깨어지지 않는 마음 판에 세긴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52절.
사람의 교만과 무지는 성령을 거역하게 되고 그의 말씀을 불순종하게 만든다.
성경을 끼고 살고 할례를 행했지만 동시에 우상을 섬겼기에 그 결론으로 성전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것이다
할례와 율법과 성전을 자기 치장과 자기 영광을 드러내는 데 사용한다
(적용 #1)
-여러분이 죽을 작정을 하고 한마디 한다면 어떤 말을 하겠는가?
그 한마디 말을 하기 위해서 얼마나 신뢰를 쌓아야 하는지 한 번 생각해보라.
-직장 상사에게 한 마디씩 하고 싶지 않은가?
54절. 마음이 찔려 이를 갈거늘. (찔려서 말발굽으로 가슴 치듯이)
하나님이 성전에 안 계시다고 하니까 이를 가는 것이다
예루살렘 성전 속에 예수님 보배가 없다는 걸 자기들이 증언을 하고 있는 셈이다
질그릇 속에 보배가 없으면 할 수 있는 것이 질그릇 치장밖에 없다.
그래서 마지막에 돈이 있다.
예루살렘 성전을 치장해야 하니까, 우상. 율법주의, 예배/제사 안 드리면 큰일 나니까 돈이 필요한 것이다
우상화 할수록 백성들에게서 벌어들이는 액수가 대단한데 스데반이 너무 맞는 말을 하니까 아무도 재물 가지고 안 오게 생긴 상황으로 이는 이해타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는 이들을 정죄할 게 아니라 이 사람들이 이해가 돼야 한다.
‘말씀을 잘 전하면 사람들이 이를 갈 수도 있겠구나’ 라는 예방주사를 맞게 해 주신다
총명과 지혜 충만한 스데반이 구속사로 성경을 보는 것을 이 세상이 이해하지 못해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에 기쁨이 있지마는 기쁨이 있는 만큼 고난이라는 것이다
나 때문에 한쪽은 살아나지만 한쪽은 이를 갈면 그건 진짜다.
아브라함, 모세가 얼마나 평범한 집안이었나를 피력하는 것인데 자랑하고 싶은데 자꾸 평범하다고 그러니까 분한 것이다
스데반을 통해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우리 조상들을 구원 때문에 끝까지 사랑해야하지만, 무조건 옳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수 있다는 것이다
나라, 조상, 배우자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대다수는 그러지 못한다. 그래서 좁은 길이다.
십자가와 부활은 한 단어다
(적용 # 2)
-여러분의 조상과 부모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아내나 남편에게 입도 못벌리게 하는가?
2.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아야 할 수 있다.
55절. 감추어진 하나님의 경륜.
스데반처럼 성자 예수님이 디자인하셔서 티끌로 오셔서 하나님의 경륜을 나타내려니까 성령님이 효과적으로 도와주시지 않으면 순교를 할 수가 없다.
삼위 하나님이 총출동하셔서 감춰진 하나님의 경륜을 드러내는 것이지, 그냥 핍박 받아 죽는 게 아니다.
인류 최대의 구원의 사건이 되는 스데반을 삼위 하나님이 도와주시는 것이다.
힘내라, 스데반.
스데반이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는데, 우편은 통치하는 자리다
56절.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지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예수가 인자로 바뀜)
하늘 우러러 주목하니까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다고 ‘말을 했다’.
이게 바로 말씀 사역이다.
말씀 사역을 하니 현장에서 사울이 들은 것이다.
어찌하여 내가 걸어 다니는 성전이었는지 그 까닭을 얘기하고 죽어야 하니까 이것이 순교다 (할 말하고 가는 것이 성령의 순교다)
하나님 때문에 순교도 하는 것인데 항상 그 이유를 말하고 죽임 당해야 후손들이 기억을 하지 않겠나.
스데반이 마지막으로 홈런을 날리면서 한 말은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본다’는 말이다
인자에 대해 알아야 한다. 육체로 오신 주님이라는 것이 얼마나 낮아지는 사건인지 모르는데 이것은 인간이 개미가 되는 사건이다
하나님 우편에는 자기를 협박하는 대제사장과 사두개인이 앉아있는 게 아니라 나사렛 출신 비참한 십자가 죽임을 당하신 그 예수님이 계신 것이다.
스데반이 너무 놀랐다.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있는 모습을 보니까
주님을 보니까.. ‘그래, 내 집은 개미집이 아니야.
하나님의 영광된 집이 저기 있구나’를 보았다.
바로 거기에 자기의 모델이 돼주신 분이 예수님이신 것이다.
나와 같이 힘든 것 다 겪으신 그 예수님이 인자로 거기서 자기를 맞아주시는 것이다.
이로써 모든 것은 ‘게임 오버’ 이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 땅의 모든 인자들에게 희망과 소망을 주신 것이다.
홀로 외롭게 이 길을 가는 분이 많이 있을 텐데, 주님이 너무 기뻐서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본 것, 이것이 진짜 구원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지금까지 설교했던 구속사가 진짜구나!’.
교회나 사회는 모든 인자들의 희망, 소망이 되어야 하는 게 맞다.
누가 나에게 쳐들어와도 하나님이 나와 동행하시니까 걱정될 게 없다.
이것이 말씀의 위력인 것이다
(적용 # 3)
-여러분은 인자로 오신 주님이 하나님 우편에 서계신 것을 보나? 보았나? 볼 건가?
3. 혈기를 감당한다.
50절까지
설교를 할 때는 말씀으로 할 때는 사람들이 숨도 안 쉬고 듣고 반격 못했다.
끝나고 나서 보니까 자기들이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바뀔 생각은 안하고 이해타산에 재산 지키기에 한 마음이 됐다.
지도층 인사들이 자존심에 상처가 나니까 혈기가 올라온다
이 때는 정치도 같이 했기 때문에 스데반 한 사람 몰아 죽이는 게 아무것도 아닌 것을 보게 된다.
민주주의가 옳은 게 아니다. 원칙이 중요하고, 법이 중요하다.
다수결이 이 나라를 이끌어 가면 망하는 거다(대통령 탄핵 청원 140만/응원 110만).
말씀으로 못 다스리니까 법은 멀고 주먹이 나와 폭력이 난무하는 것인데 바른 소리 듣기 싫어서이다
술집여자들이 바른말을 안 하니까 편해서 술집에 간다고 한다
58절.
스데반의 죽음과 사울 앞에서의 죽음이 우연이겠는가?
사울은 죽을 때까지 이 장면을 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스데반 설교를 하나도 못 알아들은 상황이라서 사울은 스데반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겼다.
때가 되기 전까진 아무도 믿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이 땅에서 정죄할 사람이 없다.
마지막까지 천사의 표정으로 주님을 보여주고 가면 되는 것 같다.
바울이 된 사울이 그 자리에 있었다.
이 한 사람, 그 한 사람이 전세계를 변화시킨 바울 복음의 주인공인 것이다
저는 저희 어머니 마지막 죽음의 증인이다. 어머니의 죽음이 헛되지 않았다. 주님이 영접해주셨기 때문에. 천사 같은 모습으로 가셨다는 것을 스데반을 보니 성경적인 것이 맞았다. 물론 목이 잘린 세례 요한 같은 사람도 있다.
돌로 침을 당해서 죽을 수도 있구나, 이런 믿음의 사람이 스데반이다
인자이신 주님이 하나님 우편에 서계신 걸 보면 혈기를 하나도 안 부릴 수 있는 것이다.
스데반은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말아달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순교는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는 것으로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됐기 때문에 끝까지 혈기를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무엇 때문에?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계신 것을 보았기 때문인데 그 영광은 어떻게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이다.
너무 대단한 집을 보았기 때문에 빨리 가고 싶은 것으로 죽는 것이 자러 가는 것처럼 편안한 것이고 돌로 치는 그들이 너무 불쌍한 것이다.
하나님의 세계를 모르니까, 그들이 개미에 불과하니까, 진심으로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말라고 기도할 수 있는 것이다.
몰라서 그러는데, 왜 이렇게 용서를 못하는가? 예수님도 똑같은 기도를 하셨다.
모델이 예수님이니까 예수님 가신 그 길을 그대로 가고 있는 스데반이다
끝까지 그들의 혈기를 감당하는 것으로 내 앞에 죽음이 다가왔을 때 이렇게 될 수 있을지 나도 모르겠다.
말세의 순종은 혈기 안 부리는 것으로 순교다.
요즘은 교회가 핍박 받는 시대인지도 모르겠다. 조짐이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흩어지면 구속사의 믿음이 전파가 될지도 모르겠다.
아직은 우리가 순교할 곳은 집이다. 너무 안 통하니까, 집에서 순교를 해야 한다.
신천지가 왜 잘못 됐냐 면, 신천지 가지 말라고 하면 다 가출한다는 것으로 도덕과 윤리와 상식이 없는 것으로 그래서 이단이다.
육체영생교리가 헛것인데도 다 안 죽는다고 생각하니까 병이 병 같지가 않아서 열렬히 전도하러 다니고, 가정이 중요한데 다 가출하고 이혼하고 하는 것이다
신천지가면 목적이 무언가? 영생?
전문가를 동원해서 전문가로 유인하는 신천지, 상담으로 동원하고 대단한 사람이 날 만나준다는 것에 혹하는 것이다
성경도 구속사도 안 들리니까 인간관계에 신뢰를 갖게 하기 때문에 교리가 허접해도 공감을 해주기 때문에 다 빨려 들어가는 것이다. 분별을 못하는 것이다.
십자가의 죽음이 복음이라는 것을 누가 믿겠는가?
비참하게 죽으신 예수님을 제정신 가지고 믿을 수 있는 이가 누가 있겠는가?
초라한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니까 나도 죽을 수 있는 것이다.
‘여러분의 간증’이 순교로 이어진다
오늘 혈기 한 번 참고, 죽는 연습을 하다 보면, 오늘 잠깐 참은 것이 깜깜한 고통을 참고 나갔을 때 몇 억년 몇 천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영원천년 우리 구원을 위해 예수님이 찬란히 서서 예수님이 영접해주신다는 것이믿어 지는가?
스데반을 통해서 샘플을 주셨다.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있는 최고의 약이고 처방이 ‘구속사’다.
성경 전체에 서서 영접해주시는 것은 스데반 밖에 없다.
이름도 없던 스데반인데 이름이 없을 수록 더 영접해주실 것을 믿는다.
영적 원리가 육 적 윈리로 이어짐을 스데반을 통해 보여 주신다
하나님 안 만난 사람은 이해할 수 없다.
순교도 하나님 힘주셔서 하는 것이지 내 힘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이다.
내가 기도하는 것을 온 우주가 몰라줘도 하나님이 알아주시니까 오늘 스데반을 일어서서 영접해주신다.
인자이신 주님이 너무 기뻐서 일어나 영접해주셨다.
하나님이 알아주시는 죽음이라면 ‘하나님이 짝지어주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다’에 순종한다면 그 집안은 빛나는 것이다. 죽는 게 아니라 영원히 사는 것이다.
예수 때문에 맞아 죽으면 역사하신다. 그래서 이혼은 안 된다.
살고 안 살고가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어떤 마음을 가졌는가가 중요하다
구원이 목적이 되면 무얼 못하겠는가?
스테반은 스테파노스(왕관)이라는 뜻이다
믿는 사람에게 다윗은 최고의 역할을 했지만 기독교를 세계최고의 종교로 알리기 위해서는 스데반은 빨리 흠 없이 가야 했던 것이다.
세상은 옳고 그름 밖에 모르니까 그렇다
예수님과 흡사하다.
혈기를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순교다.
(적용 #3)
-구체적으로 아이들, 부모, 직장, 육신의 정욕, 이생의 자랑, 안목의 정욕, 내 연민, 두려움에 죽어야 하나?
생각해보기 바란다.
-여러분은 마지막에 어떤 말을 할 것 같은가?
마지막 죽음의 현장에서도 인자의 영광이 안보이면 세상을 택한다.
잘 죽기 위해서는 기도밖에 없다.
<Epilogue>
이 시대 성령의 순교는,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 사람 때문에 한다.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아야 할 수 있다.
혈기를 감당한다.
인간의 힘으로는 막을 수 없어 성령으로 죽어야 한다.
성령이 효과적으로 도와주지 않으면 잘 죽을 수도 없다.
인간은 태생이 지옥뿌리에서 올라온 교만이 있기 때문에 이 사람들만 들어야 되는 얘기는 아니다. (나도 들어야 하는 얘기)
깨어지지 않는 마음 판에 세긴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사람의 교만과 무지는 성령을 거역하게 되고 그의 말씀을 불순종하게 만든다.
성경을 끼고 살고 할례를 행했지만 동시에 우상을 섬겼기에 그 결론으로 성전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것이다
할례와 율법과 성전을 자기 치장과 자기 영광을 드러내는 데 사용한다
질그릇 속에 보배가 없으면 할 수 있는 것이 질그릇 치장밖에 없다.
총명과 지혜 충만한 스데반이 구속사로 성경을 보는 것을 이 세상이 이해하지 못해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에 기쁨이 있지마는 기쁨이 있는 만큼 고난이라는 것이다
나라, 조상, 배우자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대다수는 그러지 못한다. 그래서 좁은 길이다.
십자가와 부활은 한 단어다
스데반처럼 성자 예수님이 디자인하셔서 티끌로 오셔서 하나님의 경륜을 나타내려니까 성령님이 효과적으로 도와주시지 않으면 순교를 할 수가 없다.
삼위 하나님이 총출동하셔서 감춰진 하나님의 경륜을 드러내는 것이지, 그냥 핍박 받아 죽는 게 아니다.
인류 최대의 구원의 사건이 되는 스데반을 삼위 하나님이 도와주시는 것이다.
어찌하여 내가 걸어 다니는 성전이었는지 그 까닭을 얘기하고 죽어야 하니까 이것이 순교다 (할 말하고 가는 것이 성령의 순교다)
인자에 대해 알아야 한다. 육체로 오신 주님이라는 것이 얼마나 낮아지는 사건인지 모르는데 이것은 인간이 개미가 되는 사건이다
누가 나에게 쳐들어와도 하나님이 나와 동행하시니까 걱정될 게 없다.
지도층 인사들이 자존심에 상처가 나니까 혈기가 올라온다
때가 되기 전까진 아무도 믿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이 땅에서 정죄할 사람이 없다.
마지막까지 천사의 표정으로 주님을 보여주고 가면 되는 것 같다.
돌로 침을 당해서 죽을 수도 있구나, 이런 믿음의 사람이 스데반이다
인자이신 주님이 하나님 우편에 서계신 걸 보면 혈기를 하나도 안 부릴 수 있는 것이다.
스데반은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말아달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순교는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는 것으로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됐기 때문에 끝까지 혈기를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무엇 때문에?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계신 것을 보았기 때문인데 그 영광은 어떻게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이다.
너무 대단한 집을 보았기 때문에 빨리 가고 싶은 것으로 죽는 것이 자러 가는 것처럼 편안한 것이고 돌로 치는 그들이 너무 불쌍한 것이다.
하나님의 세계를 모르니까, 그들이 개미에 불과하니까, 진심으로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말라고 기도할 수 있는 것이다.
몰라서 그러는데, 왜 이렇게 용서를 못하는가? 예수님도 똑같은 기도를 하셨다.
말세의 순종은 혈기 안 부리는 것으로 순교다.
십자가의 죽음이 복음이라는 것을 누가 믿겠는가?
초라한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니까 나도 죽을 수 있는 것이다.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있는 최고의 약이고 처방이 ‘구속사’다.
성경 전체에 서서 영접해주시는 것은 스데반 밖에 없다.
영적 원리가 육 적 윈리로 이어짐을 스데반을 통해 보여 주신다
순교도 하나님 힘주셔서 하는 것이지 내 힘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이다.
내가 기도하는 것을 온 우주가 몰라줘도 하나님이 알아주시니까 오늘 스데반을 일어서서 영접해주신다.
하나님이 알아주시는 죽음이라면 ‘하나님이 짝지어주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다’에 순종한다면 그 집안은 빛나는 것이다. 죽는 게 아니라 영원히 사는 것이다.
살고 안 살고가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어떤 마음을 가졌는가가 중요하다
구원이 목적이 되면 무얼 못하겠는가?
믿는 사람에게 다윗은 최고의 역할을 했지만 기독교를 세계최고의 종교로 알리기 위해서는 스데반은 빨리 흠 없이 가야 했던 것이다.
혈기를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순교다.
마지막 죽음의 현장에서도 인자의 영광이 안보이면 세상을 택한다.
잘 죽기 위해서는 기도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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