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교회 2020년 1월12일 주일예배 말씀요약(사도행전 7:1~8/ 성령의 떠남)]
<Prologue>
2020년 우리들교회 표어인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가 마음에 안 든다는 어떤 목자의 나눔이 있었다.
세상적으로 바꾸어 이야기 하면 어떤 환란이 와도 성령충만이 오면 그 어떤 것도 이길 수 있다기 때문에 여러 가지 고난이 예상되므로 이것을 잘 견디라는 말 같아서 마음에 안 든다라는 나눔을 하였다
그 목자가 일단 설교 내용을 잘 이해하셨기에 수준이 높다고 보여진다.
인생이 100%죄인이기에 간난아이와 아이가 있고 청년과 아비에 때를 살려면 늘 이 세상에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서 떠나야 하는 것이 있기에 그것이 고난이 맞다.
마음에 안 들어도 이것이 복음이고 진리니 어떻게 하겠나?
그래서 때 마다 성령의 얼굴로 떠나야 하는 이 ‘성령의 떠남’에 대해서 생각해보겠다.
<말씀요약>
성령의 떠남 첫 번째는,
1. 하나님은 어디나 계신다.
1절에 ‘대제사장이 이르되 이것이 사실이야?’에서 이것은 ‘은혜와 지혜와 권능과 믿음이 충만한 스데반이 성경과 율법을 폐하려 하는 것이 사실이냐?’라고 물었다
이 질문에 ‘네’ 또는 ‘아니오’라고 해도 안 되는 것이다
‘네’라고 하면 듣기도 전에 잡아 갈 것이고 ‘아니오’라고 하면 거짓말했다고 몰아 붙일 것이니까 때에 따라서 어떤 대답을 해야 할 지 구원 때문에 머리가 팍팍 돌아가야 되는 것이다
지혜의 영이 임한 스데반은 자기 이야기를 하지 않고 1절부터 50절까지 구속사적으로 구약을 꿰었다
그리고 51절에 목이 곧고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항상 성령을 거슬리는 도다’라는 이 말씀, 이 경고를 하려고 50절까지 그들이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성경으로 전했다
항상 내 말이 설득력이 있으려면 모든 성경을 많이 알고 있어야 한다.
성경을 알고 있어도 제대로 꿴 다음에 내가 하고 하고 싶은 이야기는 딱 한마디를 하면 된다
사도행전 7장 스데반의 설교는 너무 위대한 설교다
전 세계에서 기독교를 가장 우월하게 높인 설교 가장 명 설교에 속한다
위대한 설교란 다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길로 놓고 구속사적으로 요점정리를 잘한 설교다
1,300페이지가 넘는 기나긴 구약을 50절에 요약을 했는데 정말 구속사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요약을 잘할 수 있는지 세상적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설교다.
마태와는 다른 스데반의 구속사라고 할 수 있고 구속사의 진수라고 할 수 있다.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어떤 본문도 똑같은 예수님 이야기를 한다
아무리 해도 못 알아들으니 날마다 그 이야기가 그 이야기처럼 들리는 것이다
맨날 그 이야기가 그 이야기다.
그런데 그 예수님 이야기가 안 들리니까 내 환경이 부해 지거나 힘들어지거나 로 변하면 다들 매너리즘에 짜지고 원망이 되니까 꼭 설교 탓을 하게 되는 것을 보게 된다
성경이 예수그리스도 이야기다.
큐티는 성경을 구속사적으로 읽는 것이다
2절에 ‘스데반이 이르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To this he replied: "Brothers and fathers, listen to me! The God of glory appeared to our father Abraham while he was still in Mesopotamia, before he lived in Haran.)
스데반은 형제 의식을 가지고 천사의 얼굴로 자기를 죽이려는 사람들에게 부형들이여(brothers and fathers)라고 높임말로 호칭을 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설명해야 되겠는데 들어달라고 했다.
누군가 교회와 담임목사를 비난을 하면 이런 식으로 겸손하게 칭하고 이런 태도로 하시나?
그 다음을 보면 어떤 하나님인가?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에 메소포타미아에 있을 때 보이신 영광의 하나님이라고 힌다.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갈대아인의 우르(Ur of the Chaldeans)의 메소포타미아에서 하나님은 그것도 영광의 하나님으로 이미 보이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만 있는 하나님이 아니고 또 이스라엘 그들만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고 그들의 선민주의에 쐐기를 박은 것이다
이 사람들이 아브라함도 민족주의 심볼로 존경하고 있겠지만 아브라함 자체도 하나님이 아브라함 되게 하신 것이지 아브라함이 위대하지 것임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어디고 계실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이고 믿음의 몇 대손이라는 혈통을 자랑할 것이 없는 것이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영광의 하나님으로 보이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이다
아프리카에 있는 친척을 위해서 기도할 수도 있고 지금 세상에 취해 있는 메소포타미아에서 학벌과 권력과 모든 것에 취해 있는 그 누구에게도 하나님은 영광의 하나님으로 보이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이다
모든 인류는 구원을 안 받던 받던 하나님이 창조하셨고 사랑하신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해야 되고 전도해야 한다.
성령이 퍼져나가야 하니까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적용#1)
-상상할 수 없는 곳에도 하나님이 게신 것을 믿나?
-그곳은 어딘가?
상상할 수도 없는, 사람도 아니야 하는 어떤 그곳, ‘거기는 내가 갈 수도 없어 그 대단한 스펙을 가졌는데 어떻게 전도해?’라는 그곳에도 영광의 하나님은 계실 수 있다
2. 고향과 친척을 떠나라고 한다.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맨 처음 주신 명령은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가려면 고향과 친척과 창세기 12장에 보면 아비의 집도 같이 떠나라고 하신다.
떠남이 없이는 약속의 땅으로 못 간다고 하신다
한 마디로 예수님을 믿으려면 고향과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라는 것이다
그런데 갈대아 우르 문명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대영박물관에서 그 많은 유적 중 우르를 보았는데 정말 대단해서 진짜로 이곳을 떠나기가 어려웠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
이 이야기를 다른 말로 적용하면 알코올 중독자 부모에게 못 떠나고 완전주의자 부모에게서 못 떠나는 것이 우리다.
돈이 많아도 의지하느라고 못 떠나고 없어도 무시하느라고 못 떠나고 그래서 미워하느라고 못 떠난다
부모가 들들 볶았으면 볶이고 살았기 때문에 자녀들을 볶지 않으면 내가 불안하다.
엄마가 들들 볶아서 이렇게 되었다고 착각을 한다
내가 사회적으로 뭔가 되었다고 생각하면 결국 엄마가 옳은 것 아니었나 엄마를 미워하면서 그대로 닮는 것이다.
이렇게 떠나야 할 고향과 친척이 있는데 부모에 대해 객관적으로 보기가 어렵다.
부모가 중요하고 학교가 중요합니다.
부모를 끊는 것이 교육이 힘이라는 마지막 결론이 약간 유감이지만 학대하는 아버지를 떠나야 하는 집이 있다.
우리는 한걸음 더 나아가서 구원 때문에 떠나기도 하고 있기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부모를 떠나야 하는지 모른다.
부모가 천국에 갈 수 있게 하기 위해서 객관적으로 봐야 한다.
온 집안에 불란을 일으키는 자녀도 있지만 언제나 가정에는 질서가 있고 위아래가 있는데 자기 위치를 잘 지키는 것이 효도다
둘째가 첫째보다 잘 산다고 돈 더 갖다 드리는 것이 효가 아니고 모든 가족이 다 잘사는 것이 부모에 대한 효도다
부모와 친척을 떠나라는 것은 굉장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내가 메소포타미아에서 잘 먹고 잘 살 때는 이런 이야기가 잘 안 들리는데 잘 먹고 잘 살 때 들리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겠나?
훈련되는 데 있어서 하나도 안 들리기 때문에 하나님은 할 수 없이 질서라는 것을 주셨다
질서를 주신 것은 그게 아니면 훈련이 안돼서 이다
그래서 내 질서에 순종 해야 하는 것이다
여자의 머리가 남자고 남자의 머리가 그리스도다
여자가 질서에 순종해야 되는 것은, 예수님이 미물만도 못한 인간에게 처음에 공생애에서 시작하신 일이 세례 요한에게 세례 받으시고 마지막 질서인 십자가에 죽으셨다
질서로 밖에 우리가 훈련 받을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여러분은 ‘사람 같지 않아서 무시해’라고 하는 형제부모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디
고향과 친척을 떠나라고 하는 것은 영육의 나의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땅에서 친구 짱구하는 것이 고향 친척 부모인 것이다
그러니까 교회를 다녀도 주님을 만나지 못 하는 사람들은 지역감정이 아무도 천국 갈 때까지 해결이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고향과 친척과 부모를 떠나라고 한다
그 것이 인생이 다 인 것이다
우리나라를 봐도 기독교가 들어 왔는데도 지역감정을 그 누가 떠나겠나?
그것이 좋아서 정치도 뭣도 다 지역감정으로 한다
(적용#2)
-떠나지 못 하는 고향 친척은 무엇인가?
-너무 좋아하는 식구, 너무 무시하는 식구 중에서 무엇인가? (무엇을 떠나지 못하나?)
3. 아비가 죽음에 떠난다.
맨 처음에는 아브라함이 부모를 못 떠나서 아버지와 같이 가나안 땅에 가자고 했고 처음에는 고맙게도 아버지가 같이 떠나줬다
아버지의 아들 중에 일찍 죽은 하란이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같은 이름 지명인 하란에 도착하자 좋아서 머물면서 거기서 떠날 생각을 안 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아버지 데라에게 목적지까지 가자고 말을 못 하는 것이다
망설, 망설하다가 지체하며 출발을 연기하는 것인데 데라의 뜻이 ‘연기한다’인데 아버지 데라는 월신을 섬기는 우상장사이며 우상숭배자이기도 하다
아버지가 하란에서 죽었던 것은 아브라함의 진로를 방해하고 연기한 사람이기에 아버지를 객관적으로 봐야 한다
아버지를 떠나고 객관적으로 봐야 하는 것이 성경의 주제인 것이다
객관적으로 보는 것을 해야 하는데 방해를 하는 사람이 많다
맨 처음부터 떠났어야 했는데 같이 하려고 하니 늦어졌는데 하나님이 데라를 죽이지 않으면 아브라함은 떠날 수 없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맨 처음부터 믿음으로 떠난 것이 아니고 명령은 받았는데 연기 연기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떠나지 못한 아버지는 누구인가?
듣기만 해도 끔찍한 질문 아닌가?
오늘은 어떤 또 어떤 비난을 하시려나?
아브라함이 맨 처음부터 잘 떠난 건가?
아브라함도 처음부터 믿음으로 떠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주님 만난 것이 언제인가?
아브라함이 주님을 만난 것을 언제일까? 떠나면서 여러 번 만남을 경험했는데 그럴 때마다 떠남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택한 사람의 특징은 뒤에서 맨날 잡아당기는 것이며 떠나야 하는데, 잘 믿어야 하는데 말씀을 들었기에 사건이 들어오면 들은 말씀으로 딱 깨닫는다
아브라함이 조카인 롯(Lot)을 데려 갔는데 롯 때문에 고난을 겪는다
큐티를 깨알같이 하면 깨달아지는 것인데 우리가 이렇게 떠나지를 못하니 일평생 떠남이 계속되어야 하는 것이다
25년 떠남이 계속되다가 가장 아까운 이삭(Issac)과의 떠남의 계속되는 것인데 아끼는 것은 다 놓으라는 것이다
마지막이 놓는 것이 자식이다
내가 떠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옮기셨느니라’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사건을 주셔서 반짝 들어 옮기신 것이다
신 구약을 관주로 찾아보면서 왔다 갔다 보면 더 풍성해지는 것이다
성경을 보면 구속사는 내가 하는 것이 없으며 스데반이 말하는 아브라함의 구속사이며 나하고 똑같은 인생인데 환경과 사건이 와서 떠나는 것이다
내가 잘나서 떠나간 것이 아니라 사건이 와서 떠난 것이다
우리는 어렸을 적을 때부터 아브라함처럼 순종하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성품으로 가는 것이 얼마나 갈까?
아브라함이 순종했다는 것이 그래서 순종이 안 되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이 평범한 사람들이 적용할 수 있게 구속사적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성경이 위대한 것은 며느리 다말하고 동침한 유다나 유부녀 밧세바와 바람 핀 다윗 등 잘못이 그대로 나와있다는 것이다
성경처럼 위대한 책은 없다는 것이고 이게 구속사고 우리와 똑같은 이야기를 썼기 때문이다.
성경의 구약은 창세기에서 시작되어 ‘하지 말라, 가지 말라’ 등 ‘말라’가 나오는 ‘말라기’(Malachi)로 끝난다
구약도 예수님 오신 구속사로 보라는 것인데 예수님이 오셔서 그때도 이런 사람들은 예수님을 놓고 믿음 생활을 했다는 것이다
사람은 다 별 인생이 없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위대하니까 ‘나는 못 간다’가 아니라 예수그리스도를 길로 놓고 도전하는 것이 우리와 똑같다 아브라함과 내가 똑같다 라는 것이 구속사다.
출애굽을 겪은 이스라엘의 대제사장과 헬라파 지도자들은 다 고생하고 온 사람들인데 똑같은 성경을 보면서 모세와 아브라함을 우상처럼 보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저는 날마다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설교를 한다.
무슨 이해타산 때문에 이런 설교를 하겠나?
(적용#3)
-아비가 죽음에 떠난 것과 옮겨진 것은 무엇이 있나?
-무엇 때문에 옮겨졌나?
4. 떠나도 보이는 것이 없다.
‘떠나라, 떠나라’ 해서 떠났던 것이 아니라 옮겨졌다
아무것도 눈에 보이는 것이 없다. 자식이 없었고 그냥 약속만 믿고 걸어가는 것이다
‘예수 믿어도 자식도 안 주고 속았지 않나? ’라는 일이 우리에게 끊임없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 약속은 보이는 유혹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인데 이 땅에서 종 노릇 해보고 자손들도 애굽에서 종살이에서 떠나야 약속의 자손이 된다는 이야기다.
이것이 구속사와 세속사의 차이인데 약속은 유업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인 것이다
후손도 하나님이 심판하셔서 내보내야 후손이 나온다고 한다.
후손도 내 마음대로 4백 년이 되기 전에 399년째 나오면 훈련이 안 된다고 하시니 마지막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고향 친척 떠나서 여기까지 왔는데 네가 원하는 약속의 자손도 다시 애굽으로 떠나서 다시 또 옮겨져서 종살이로 괴롭게 한 후에 나와서 심판을 통해 약속의 땅에 오는 것이지 네 자손이라서 약속의 자손 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성경에 정확히 기록이 다 있는 이야기다
아브라함이 ‘아들, 아들’ 달라고 부르짖고 가나안으로 갔지만 이스마엘은 육적 자식이지 영적 자식이 아니었으며 25년 만에 약속의 자손으로 영적 자식을 원하는 마음으로 떠남이 이루어지는데 25년이나 걸렸다
육적 자식(이스마엘)이 아닌 영적 자식(이삭)으로25년 만에 바뀌어야 한다
내가 자식 자식 타령하다가 영적 자식이 되어야 하고 자기의 약점으로 돈 돈 돈 하다가 돈 생기면 다른 사람을 위해 쓰이도록 해야 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것이다.
‘좋은 아버지, 나쁜 아버지가 없다’라는 것이 구속사다
육적 성전이 무너지기 전에는 영적 성전이 지어지지 않는다
종 노릇 해봐야 알게 되기에 스테반은 창세기를 인용하여 설교를 하는데 대제사장도 구속사적이 아닌 것이다
고난을 약속의 말씀으로 믿어야 한다
구속사를 알고 믿으니 약속을 받는 것이다
고난을 겪어야 세상이 감당을 못하는 믿음과 약속이 되는 것이다
자기 고난이 합쳐져야 구속사 가치관이 생기며 고난이 쯔나미처럼 밀려올 때 육신의 정욕을 떠나야 한다
말씀을 고난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보이지 않는 후손도 고난을 당해야 믿음과 약속이 되는 것으로 현재의 고난은 잠시 잠깐이지만 나중에 찾아 올 영광은 족히 비교할 수가 없다
스데반이 설교하고 죽었는데 하나님의 영적 영광을 보여주기 위한 그 어떤 사람이었다
(적용#4)
-세상이 여러분을 감당 못 하나? 아니면 여러분이 세상을 감당 못 하나?
5. 영적 자녀 낳는 것이 떠남의 결론이다.
하나님은 율법보다 믿음을 먼저 주셨다
한량 없는 은혜로 믿음을 주셨다
출애굽기에서 율법을 주시기 전에 할례의 율법을 주신 것은 계속 우리의 믿음을 주시고 율법을 주신 것으로 율법이 우상이 되면 안 되는 것이다
성경을 부적처럼 여기는 것이 우리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여겼는데도 하라라는 여자를 얻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위대한 것이 없는데도 영적 자손을 허락하신다
우리의 행위로는 천국 갈 수 없는데 우리가 형편없어도 믿기만 하면 우리를 통해 영적 자녀를 낳게 해주신다는 것이 구속사다
25년 만에 별 볼일 없는 자식인 이삭 하나 주시더라
하나님자체가 상급인 것을 믿음 있는 성도들은 아는 것이다
이삭이 할례를 받고 후손이 기하급수적으로 자손이 느는데 야곱이 12명을 낳고 70명이 되고 60만이 되었다가 200만명으로 다시 전 세계로 퍼져 나간다
보이지 않는 가운데 약속을 믿고 떠나야 한다
한 사람을 낳았는데 수 만 명이 되기도 하지만 한 사람을 주께로 인도하지 못하면 두 사람도 못한다
영적인 일과 생명을 살리는 일에는 힘이 드는 것 같은데도 힘이 들지 않는다
사명이 무서운 것이다
‘힘들다’라고 말하는 것은 생명을 낳아 보지 않아서 그런 것이다
우아한 사탄의 얼굴로 앉아있으면 절대로 안 된다
여기다 살을 붙인 것이 신 구약 66권인데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예외가 없다
구속사의 인생을 잘 살아가도록 잘 떠나게 해주실 것을 믿는다.
(적용#5)
-여러분은 잘난 아들인 육적 이스마엘을 사모하나? 눈만 껌벅 거리는 부족한 이삭을 사모하나?
<Epilogue>
성령의 떠남은 하나님은 어디나 계신다.
고양과 친척을 떠나라고 한다.
아비가 죽음에 떠난다.
떠나도 보이는 것이 없다.
영적 자녀를 낳는 것이 떠남의 결론이다
항상 내 말이 설득력이 있으려면 모든 성경을 많이 알고 있어야 한다.
성경을 알고 있어도 제대로 꿴 다음에 내가 하고 하고 싶은 이야기는 딱 한마디를 하면 된다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어떤 본문도 똑같은 예수님 이야기를 한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어디고 계실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이고 믿음의 몇 대손이라는 혈통을 자랑할 것이 없는 것이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영광의 하나님으로 보이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이다
아프리카에 있는 친척을 위해서 기도할 수도 있고 지금 세상에 취해 있는 메소포타미아에서 학벌과 권력과 모든 것에 취해 있는 그 누구에게도 하나님은 영광의 하나님으로 보이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이다
모든 인류는 구원을 안 받던 받던 하나님이 창조하셨고 사랑하신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해야 되고 전도해야 한다.
온 집안에 불란을 일으키는 자녀도 있지만 언제나 가정에는 질서가 있고 위아래가 있는데 자기 위치를 잘 지키는 것이 효도다
훈련되는 데 있어서 하나도 안 들리기 때문에 하나님은 할 수 없이 질서라는 것을 주셨다
질서를 주신 것은 그게 아니면 훈련이 안돼서 이다
그래서 내 질서에 순종 해야 하는 것이다
질서로 밖에 우리가 훈련 받을 수 밖에 없다
고향과 친척을 떠나라고 하는 것은 영육의 나의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라는 것이다
아버지가 하란에서 죽었던 것은 아브라함의 진로를 방해하고 연기한 사람이기에 아버지를 객관적으로 봐야 한다
아버지를 떠나고 객관적으로 봐야 하는 것이 성경의 주제인 것이다
택한 사람의 특징은 뒤에서 맨날 잡아당기는 것이며 떠나야 하는데, 잘 믿어야 하는데 말씀을 들었기에 사건이 들어오면 들은 말씀으로 딱 깨닫는다
큐티를 깨알같이 하면 깨달아지는 것인데 우리가 이렇게 떠나지를 못하니 일평생 떠남이 계속되어야 하는 것이다
25년 떠남이 계속되다가 가장 아까운 이삭(Issac)과의 떠남의 계속되는 것인데 아끼는 것은 다 놓으라는 것이다
마지막이 놓는 것이 자식이다
내가 떠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옮기셨느니라’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사건을 주셔서 반짝 들어 옮기신 것이다
성경을 보면 구속사는 내가 하는 것이 없으며 스데반이 말하는 아브라함의 구속사이며 나하고 똑같은 인생인데 환경과 사건이 와서 떠나는 것이다
내가 잘나서 떠나간 것이 아니라 사건이 와서 떠난 것이다
우리는 성경이 평범한 사람들이 적용할 수 있게 구속사적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성경이 위대한 것은 며느리 다말하고 동침한 유다나 유부녀 밧세바와 바람 핀 다윗 등 잘못이 그대로 나와있다는 것이다
성경처럼 위대한 책은 없다는 것이고 이게 구속사고 우리와 똑같은 이야기를 썼기 때문이다.
성경의 구약은 창세기에서 시작되어 ‘하지 말라, 가지 말라’ 등 ‘말라’가 나오는 ‘말라기’(Malachi)로 끝난다
아브라함은 위대하니까 ‘나는 못 간다’가 아니라 예수그리스도를 길로 놓고 도전하는 것이 우리와 똑같다 아브라함과 내가 똑같다 라는 것이 구속사다.
이것이 구속사와 세속사의 차이인데 약속은 유업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인 것이다
후손도 내 마음대로 4백 년이 되기 전에 399년째 나오면 훈련이 안 된다고 하시니 마지막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좋은 아버지, 나쁜 아버지가 없다’라는 것이 구속사다
육적 성전이 무너지기 전에는 영적 성전이 지어지지 않는다
고난을 약속의 말씀으로 믿어야 한다
구속사를 알고 믿으니 약속을 받는 것이다
하나님은 율법보다 믿음을 먼저 주셨다
한량 없는 은혜로 믿음을 주셨다
우리의 행위로는 천국 갈 수 없는데 우리가 형편없어도 믿기만 하면 우리를 통해 영적 자녀를 낳게 해주신다는 것이 구속사다
한 사람을 낳았는데 수 만 명이 되기도 하지만 한 사람을 주께로 인도하지 못하면 두 사람도 못한다
영적인 일과 생명을 살리는 일에는 힘이 드는 것 같은데도 힘이 들지 않는다
사명이 무서운 것이다
‘힘들다’라고 말하는 것은 생명을 낳아 보지 않아서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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