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교회 2019년 12월15일 주일 설교말씀 요약(사도행전 5: 33~ 42/ 성령의 전도)]
<Prologue>
성령의 설교로 시작해서 성령의 핍박을 받고 여러 단계를 거쳐 전도면 전도지, 성령의 전도는 무엇인가?
전도는 주님의 명령이고 사명이다
성령의 핍박을 받고 전도를 하게 하신다
사도행전의 전도는 전도학교를 졸업하고 전도이론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그야말로 치열한 전쟁 같은 현장에서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복음이 흥왕해지는 것이 진정한 현장의 전도인 것이다
<말씀 요약>
그러므로 성령이 전도는
1. 분노를 감당해야 한다.
33절
성전 맡은 자들과 원로들과 공회원들이 그들인데 당시 공회(Sanhedrin)은 지금으로 말하면 이스라엘의 국회라고 보면 된다.
‘듣고 크게 노하여’(furious)라는 것은 가슴이 터질 것 같은 분노를 했다는 말이다.
교회를 다니는 대단한 지도자에게 예수님을 전했는데 이렇게 적대감을 가진다.
그들이 무시하는 어부들의 말을 듣고 왜 이렇게 크게 노할까?
그들에게 ‘너희가 죽인 예수를 이스라엘에게 회개(repentance)와 죄 사함(forgiveness)을 얻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살리셔서 임금과 구주가 되게 하셨다' 그리고 우리들이 봤다! 증인이다!’라고 체험적인 간증을 통해서 믿고 회개하라고 하니까 이것은 완벽한 복음전파이며 너무 설득력 있는 메시지 인 것이다
아무리 받아드리려고 해도 자기들이 살인자이고 여호와를 거역한 자니까 그것부터 인정을 해야 하는 것인데 살인을 인정하지 못하겠으니까 사실은 예수를 거절하는 것은 배후에 사탄이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이다
내 죄를 보아야 하겠는데 내 죄를 보면 기득권을 내려 놓아야 하기 때문에 거절하는 것이다
사탄은 익지 않은 열매 나무는 흔들지 않는다고 했다.
그리스도인만 시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끝에는 돈이 있다고 그들이 제대사장과 사두개당파이니까 예배 전문가 들이다
그런데 베드로의 설교 때 마다 3천 명~5천명이나 빠져 나가니까 이들이 죽을 지경이 되었다.
그러면 왜 그럴까 연구를 하고 이 복음을 받아들이면 하나님은 반드시 역사 하실 것인데 인간적인 생각만 하니까 다 가버리고 내가 망할 것 같아서 불안하고 가슴이 터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 모두 그 당시에 Elite이고 교양 있고 가진 자이다
그들은 죄가 안 보이니까 못 할 짓이 없는 것임을 보여준다
실제로 이들에게는 사형집행권이 없었는데 격분한 나머지 불법을 저지르면서까지 사도들을 죽이려 했던 것이다
이들이 기득권에 목숨을 거니까 사도들의 목숨까지 노리는 것이다
인간은 들키지 않으면 못할 짓이 없는 것이다
사도들의 입장에서는 초대교회 성도들이 회개하고 오는 것은 기쁘지만 그것 때문에 죽이고자 하는 지도자들을 감당해 내야 되는 것이었다
예수님도 이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제자들도 똑같은 일을 당하고 가는데 예수님이 먼저 그 길을 당하고 가셨기 때문에 ‘아, 이거는 있어야 될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담임목사님은 이 본문을 묵상하면서 자신이 살아있을 때 많이 당하고 가는 걸 보여야 후일에 여러분들이 기억나는 것이 많이 있겠다 싶어서 ‘목사님은 당할 때 어떻게 하실까?’ 라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많이 당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바로 이것이 성령의 전도인 것이다.
그러니까 믿는 사람들끼리의 싸움, 즉 종교 지도자와 예배 전문가와의 싸움인 것인데 밖보다 안이 가장 무서운 것임을 보여준다
우리는 다 실수할 수 있다.
목회자나 사도들처럼 누군가 나의 죄를 지적하고 회개하고 성령의 주제 설교인 예수를 믿으라고 하면 회개하는 사람이 사람이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들이다.
그렇다고 복음의 증인들을 위협하는 자들을 저주하고 미워한다면 성령의 전도는 하지 못한다.
(적용 1)
-여러분들은 복음을 듣고 회개하나? 분노하나?
-쉽게 말하면 설교를 듣고 회개하나? 아직도 분기탱천하여 들어 줄 수가 없나? 아예 안 들리나?
잘 생각해 보면 끝에 돈이 있는 것이다.
2. 지성과 선함도 필요하다.
34절
하나님께서는 시시때때로 이렇게 100% 옳으신 방법으로 믿는 우리를 도우신다.
내가 진실로 복음을 전하면 하나님은 너무도 신실하게 하나님의 일을 하신다
뜻밖에도 ‘하나님의 상급’ 이란 이름을 지니고 있는 가말리엘(Gamaliel)은 사도들을 돕는 천사로 나타났다
그는 바리새(Pharisee)파에 속한 교법사로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그 시대의 지성의 아이콘이었다.
바울은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율법의 엄한 교육을 받았다고 했는데 이것은 후에 바울이 바울이 되게 하는데 큰 역할을 하게 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죽었을 때 사람들은 율법의 영광이 떠났고 율법의 순수함과 거룩함이 죽었다고 애도하기까지 했던 사람이다
이런 가말리엘이 공회에서 일어나 사도들에 대해서 ‘조심하라!’고 한 것이다
왜 그랬을까?
백성들에게 칭송을 받고 경애함을 받고 있는 사도들을 있는 모습 그대로 인정한 것이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닌 데다 가말리엘이 양심이 있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가 있는 모습 그대로 다 봐주기가 어려운 것이다
우리가 다 꼬여서 꼬인 그대로 보는 것이다
자기가 꼬였으면 꼬인 그 시선으로 보는 것인데 사도들을 있는 모습 그대로 인정했기 때문에 우리가 열심으로 선행을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가말리엘은 지성의 아이콘으로 사두개파(Sadducean)와 원수처럼 여겨졌던 바리새파 양쪽에서 인정을 받았기에 그들을 설득할 수 있었다
가말리엘은 그때의 좌파 우파를 전부 다 설득해낸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예비해두고 계셨다.
결국 역사의 주관 자이신 하나님은 바리새파인 가말리엘을 사용하시어 사도들을 죽음의 위기에서 구출해낸 것이다.
사두개파는 부활을 인정하지 않았던 반면 바리새파는 부활을 인정했다
이렇게 교리적으로 다른데도 가말리엘은 이렇게 두 파를 설득해냈다.
우리들교회에도 지성과 선함의 지성인이 많이 나오길 축원한다
(적용 2)
-전도를 위해서 성경도 읽어야 하지만, 신문도 책도 좀 읽으시면 어떨까?
-‘나는 돌아가는 거 몰라’라고 하지 마시고 이렇게 하면은 그 사람의 문화가 다 있는데 전도하기가 어렵지 않겠나? 왜곡하지 말고 있는 모습 그대로 인정하나?
내가 꼬이면 꼬인 시선대로 보기 때문에 그냥 왜곡하지 않는 것만도 큰 선한 행실 같다.
-영육 간의 위기에서 뜻밖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나?
수 없이 도움을 받은 것 같다.
3. 역사의식도 필요하다.
가말리엘은 드다(Theudas)와 유다(Judas)를 통해서 역사적인 사례를 들어서 설득을 한다
그래서 공부도 하고 신문도 보아야 한다
그래서 그들을 통해서 교훈 받아야 할 것이 있는데,
1) 드다를 통해서는 스스로 높아지고자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36절
드다(Theudas)는 AD 44년, 46년 그 정도라고 하는데 자기를 스스로 높이고 자칭 메시아 자칭 구세주라고 말하면서 요단강물을 자기가 가를 수 있다고 백성들을 미혹했다.
그런데 로마에서 파견한 유대총독이 그를 죽였는데 사건이 일단락되니까 그 추종자들이 단번에 뿔뿔이 흩어졌다고 한다
이것이 부정과거가 되가지고 ‘흩어져 없어졌고’(all his followers were dispersed, and it all came to nothing.) 두 동사가 다 단번에 철저히 흩어졌다는 것이다.
사실 유대인들이 예수를 신성모독 자로 몰아 붙인 것도 예수께서 스스로 메시아라고 주장하셨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드다와 예수님의 차이가 뭐가 있는가?
드다가 자기를 스스로 높였지만 예수님은 종의 형체를 가졌기 때문에 너무 다른 것이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할 때 종의 자세를 가지는 것이 하나님 자녀로서의 태도이고 그렇게 전하는 것이 성령의 전도인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눈살을 찌푸리는 일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기도하고 말씀을 듣고 자신에게 먼저 적용을 해야 되는 것이 성령의 전도인 것이다.
요즘 기독교인들이 절대로 빛과 소금의 역할을 못 한다는 것이 지금 이 시대 한국사람들의 중론이라는 것이다.
가말리엘이 사도들을 좋게 본 것은 백성들에게 칭송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아무리 옳은 일을 한다 해도 진리를 담아내는 그릇이 좋지 않으면 그 진리가 훼손된다
2) 유다(Judas)를 통해서는 로마의 무력을 폭력으로 대응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37절
둘 다 요세푸스(Flavius Josephus)에 의한 기록들인 것이다.
* 요세푸스는 66~70년에 일어난 유대인 반란과 고대 유대교의 역사에 대해서 중요한 책들을 썼다. 그 가운데 중요한 책은 〈유대 전쟁사〉·〈유대 고대사〉·〈아피온을 반박함〉 등이다.)
갈릴리 출신 유다라는 자가 당시 시리아 총독인 구레뇨가 인두세를 걷기 위해서 인구조사를 하는데 유다라는 자가 백성들을 선동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인데 어떻게 로마에 세금을 낼 수 있냐?’하면서 반란을 일으켰다
그 반란군을 총독 구레뇨가 이끄는 로마군대가 무참하게 진압을 했다
그랬더니 또 따르던 자들이 단번에 흩어졌다
왜냐? 기복적으로 모였고 이해타산으로 모였기 때문에 그냥 지도자가 없으니까 다 흩어져 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그럴듯한 명분에 미혹되어서 폭력을 쓰는 것은 성령의 전도가 아니다.
무력에 같은 폭력으로 대항하면 망하게 되어 있다
설사 일시적으로 승리를 거둔다고 해도 또 다른 보복을 끌어드리는 결과를 만든다
물론 국가 공식적으로 전쟁을 선포하면 우리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 나가 싸워야 하지만 개인의 삶에서는 이렇게 폭력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여호와의 증인이 종교를 앞세워 국방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것은 복음이 아니고이단 일 뿐이다
그런데 드다와 유다의 이야기를 하면서 거짓 메시아는 시간이 지나면 다 흩어졌다는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사도들을 죽여서 피를 흘리지 말자’라고 하면서 지혜롭게 설득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역사도 우리가 알아야 한다.
‘진짜면 남을 것이고. 가짜면 흩어질 것이다’라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적용 3)
-복음을 설득하기 위해 스스로를 높이나? 낮추나?
-복음을 설득해야 되는데 ‘네가 어따 대고 아버지 말을 안 들어? 교회 가자고 하면 가는 거지. 네가, 나보다 높아? 이러면서 자녀들을 전도 하실래?
부모면 부모지, 그게 권세가 되는 게 아니다 요즘은 부모보다 자녀들의 권세가 높다.
-폭력을 당할 때 폭력으로 나가나? 기도하면서 참나? 그런 경험이 있나?
4. 영적 분별력이 필요하다.
38절 39절
가말리엘은 맞는 얘기만 한다.
38절에 ‘상관 말고 버려두라’(Leave these men alone! Let them go! )는 명령은 39절에 ‘너희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you will only find yourselves fighting against God.) 때문이라고 그런다
거짓 메시아는 시간이 지나면 다 흩어졌다는 것이다
사람의 소행이라면 이제, 무너질 것이고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면 너희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가말리엘은 사도들의 주장에 비록 동조는 하지 않지만 역사의 주관 자는 하나님이라는 신관과 역사관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하나님이 가말리엘을 통해서 사도들이 상관 말고 버려두라 하신 것은 가말리엘이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가말리엘을 통해서 하는 것이다
자신 있기 때문에 상관하지 말고 버려두라.고 하신 것이다
우리도 예수 때문에 핍박 받다가 때가 되면 여러분들을 버려둘 때가 온다
핍박 당하다가 누군가의 명령을 통해서 버려둘 때가 온다
그래서 사탄이 부모의 모습으로 자녀 모습으로 배우자의 모습으로 날뛰어도 그들이 나를 버려둘 때가 오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마태복음 13장 29절처럼 ‘가라지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because while you are pulling the weeds, you may root up the wheat with them) 가만 두라는 것이다
우리를 칼날 위의 물방울로 훈련시키시기 위함인데 이 기가 막힌 구속사적인 이 말을 나를 죽이려고 반대 편에 서 있는 가말리엘이 한다는 것은 참으로 당대의 종교석학이 아닐 수가 없다.
결국 그의 판단이 옳았음이 계속해서 부흥한 초대교회의 역사를 통해 증명이 되고 있는 것이다
40절
옳게 여겼다는 것은 설득 당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들을 불러 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They called the apostles in and had them flogged. Then they ordered them not to speak in the name of Jesus, and let them go)
이모든 대제사장, 사두개인들, 종교 지도자, 원로들의 이성과 감정을 그냥 사로잡아 버렸다
입이 헤벌레 해져서 그냥 가말리엘의 말을 들은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지금 이런 양쪽을 다 아우를 수 있는 가말리엘 같은 한 명이 등장했으면 좋겠다
우리 아까 네 번째 대지가 ‘영적 분별력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여기까지인 것이다.
그들은 사도들을 무죄방면 하지 않고 채찍질을 가한 후에 방면하였다
이 채찍질은 ‘가죽을 벗기다’에서 유래해가지고 ‘심하게 채찍질을 가하다’라는 뜻이기 때문에 율법에서 최고로 줄 수 있는 벌로써 신명기 25장 3절에 보면
‘사십에 하나 감한 매’(but he must not give him more than forty lashes)를 의미한다.
하나님으로부터 떠난 자의 속에 있는 인간적인 분노는 여전하여서 하나도 변한 것이 없다
이것이 가말리엘의 한계인 것이다
그들이 가말리엘의 연설을 들었지, 성령의 설교를 들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의 유익 때문에 때려서 내쫓은 것이지 성령의 은혜를 받아서 내보낸 게 아니란 것이다
그래서 가말리엘의 연설을 듣고 변한 사람은 없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가말리엘 같은 사람을 분별하기가 너무나 어렵다.
가말리엘은 최고의 지혜를 가졌는데 이 사람은 왜 예수를 안 믿을까?
가말리엘이 상관 말고 내 버려두라고 하니까 너무 관대해 보이고 멋있어 보이는 것이다
일단 가말리엘은 모두를 편안하게 만들었다.
가말리엘은 교회도 다니고 지식도 있는데 단 하나 복음을 받아 들이지 않는다
이것이 너무 중요한 일인데 사람들은 이것을 간과한다
예수를 안 믿어도 가말리엘이 백 번 낫다고 한다
우리는 성품인지, 행위인지, 믿음인지 전부 분별을 못 한다.
그래서 우리는 착하면, 성공해도, 나이스 해도 전도를 안 한다.
성품과 고결함과 학식과 지성과 이성의 클라이맥스 인 가말리엘이 예수 안 믿는다고 여러분들은 눈물 뿌려 애통하시겠나?
그러면 돌 맞지 않을까?
그런데 이 세상은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면 가말리엘에 대하여 무엇을 분별해야 될까?
그는 예수가 그리스도가 되는 것을 왜 안 받아들일까?
사도들의 표적을 보고 기적을 다 보았지만 표적은 예수가 그리스도인 것이 표적인데 믿어지지가 않는 것이다
성경에 대한 지식은 아무리 연구해도 사람에게서 난 지식은 짧은 지식이라 하나님에게서 난 지식은 비교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최고의 율법학자가 하나님의 존재는 인정한다면서 그 지식이 예수께로 인도되는 지식은 못 되는 것이다
다 그러잖아. ‘난 하나님은 믿어. 하나님은 인정해. 그런데 예수는 안 믿어.’라고 하는 이런 사람하고 똑같다
그러니 가말리엘을 보면서 내가 믿는 예수님이 얼마나 대단한가 말이다
그래서 성령의 전도인 것이다.
성령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그 누구도 예수를 主시라 고백할 수 없다.
더 쉽게 말하면 가말리엘은 죄에 대한 심각한 인식이 없다
교만에 대한 핵심은 인간이 하나님이 되는 것인데 가말리엘은 이미 하나님자리에 가 있는 천사 같은 사람인 것이다
모범생이고 착하기에 겉으로 행함은 따라갈 자가 없는 것이다
‘나는 구원 받을 만한 것이 하나도 없구나’라고 해야 되는데 가말리엘 같은 사람은 무의식적으로도 나는 구원 받을만한 조건을 다 가지고 있다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한다
‘내가 이 정도면 되지 않았어? 돈을 못 벌어? 바람을 펴?’ 라고 하는 것이다
큐티하고 목장에 나가지만은 죄에 대한 인식이 없으면 자꾸 죄 이야기하는 것도 지겹고 주님이 날 사랑한다는 생각도 희미하고 잘 될 때만 잠시 기쁘고 그걸 믿음이라 착각하고, 곧 잘 되고 있으면 매너리즘에 빠지게 된다.
근데 그것이 오래 되면 옳고 그름에 합리화 시켜야 되기 때문에 옳고 그름에는 착하다
그리고 곧 고난이 오면 주님을 부인한다
이것이 사이클로 순환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내 옆에 가말리엘 같은 존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것이다
좋겠지만 우리 모두 하나님을 알아야 내 자신을 알고 그러면 신학자가 된다고 했으니까 하나님을 아는 성경을 우리에게 주셨기에 우리는 답이 있는 인생인 것을 믿나?
우리는 답이 있는 것이다.
위대한 가말리엘 보다는 사도들이 위에 있는 것이다.
왜나면 사도들은 복음을 위해서 희생과 고난이 올 때 그 고난 때문에 힘이 들지만 나를 위해 십자가 지신 주님을 곧 생각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구나!’라고 깨닫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 내게 오라’고 하셨으니 주님이 같이 짐을 져주신다는 것을 알고 같이 주님께 나가는 것이다
그런데 가말리엘은 고난을 설명은 하지만 고난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은 없는 것이다.
사도들은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있는 자인 것이다.
(적용 4)
-여러분은 이런 가말리엘 같은 사람을 보고 어떻게 분별하시겠나? 좋아요? 싫어요? 이런 얘기 말고~
5.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기뻐한다.
41절
불법으로 감금을 당하고 채찍을 맞았는데도 불구하고 그 이름 예수를 위하여 능욕 받는 일을 기쁘게 여겼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도들이 감옥에서 나오는 게 응답이 아닌 것이다.
감옥에서 나와도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또 다른 감옥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이 바람의 감옥에서 나왔는데 그 때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또 다른 바람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식의 감옥에서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또 다른 감옥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인생의 목적은 오직 ‘그 이름을 위하여!’ 가 되어야 되는 것이다.
그들이 당한 고난이 윤리 도덕 법적 잘못이 아닌 오직 주의 이름을 위하여 믿음을 지킨 데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기뻐할 수 있는 것은 비밀인 것이다
마태복음 5장 10절(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11절(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절(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제가 옛날에 남편 가기 전에 이날 큐티 하는데 남편이 성경 찢었다고 그랬잖아요?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크니라’라고 어떻게 이런 수준 높은 고난 받을 수가 있는가! 생각나시죠?
큐티는 어디나 다 똑 같은 것이다
말씀대로 순종했기 때문에 이렇게 기쁜 것을 이 세상이 어떻게 알겠나?
그래서 비밀인 것이다
고난이 축복이란 이렇게 맞는 말씀인 것이다
기도와 본문과 고난이 우리를 적용하게 하는 것이다
다 거기서 거기 얘기지만….
여러분은 믿는 것 때문에 고난과 모함을 받아보셨나?
세상에서도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때는 기꺼이 희생을 하는 것이다
결혼할 때는, 이 땅에 사랑할 때는, 모든 걸 희생하는 것이다
세상 사랑은 이기적이기 때문에 거기까지인 것이다
그러니까 정말 예수 그 이름의 비밀 하고는 이제 너무 다른 것이다
예수 신랑이 진짜 내 속에 있기에 진짜 풍부함은 말할 것도 없는 것이다.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품위 유지를 해야 되기 때문에 쓸데 없는 험담을 안 한다.
험담도 안 하고 뭐라도 너무 억울해도 변명도 안 하고 생색을 내는 것도 아니다
그 이름, 비밀, 풍부함, 사랑은 표현할 수가 없는 것이라서 말씀대로 적용했는데도 상대방이 비난했고 욕한다
42절.
능욕 받는 목적은 바로 전도인 것이다.
오늘 본문에 자기 마음대로 행하려는 사두개파가 있으면 여기 기다려보라는 가말리엘이 있는 것이다
그런 예수의 증인의 삶 때문에 성령의 전도로 복음이 저에게까지 전해졌다.
그런데 저는 삼십 몇 년 전에 목숨을 내놓겠다는 이런 말 한 마디로 전도를 했다
‘예수는 그리스도다!’라는 이런 고백이 굉장히 촌스럽게 여겨지고 교양도 없어 보이면 신앙도 메마르게 되어 있다
그 이름에 대한 확신은 저는 확고하다.
사도들은 악인들이 악을 행한 것보다 더 열심히 뜨겁게 사명을 행했다.
아무리 나를 죽이려고 했어도 그들의 악보다 한 가지 조금 더 열심히 사명을 감당하면 되는 것이다
아무리 악을 행해도 오늘 한 가지 더 참고 넘어가면 되는 것이다
그 악보다 한 가지 더 사명을 행하면 되는 것이다
평신도라도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기를 감당하면 어디서든지 복음을 전하게 된다.
(목사님 체험 간증이야기)
“제가 이제 분반공부도 안 들어갔어요. 씨씨씨 다닐 때두요. 그 순모임에 갔어야 제가 결혼을 했을건데. 그런 덴 제가 안 갔어요. 저는요. 그냥 인생이 바빴어요.
옆에서 보면 제가 믿음이 얼마나 좋아요! 지 지난주에 제가 회장님 아들과 왜 안 만났냐 하면은. 쌩 불신자. 몸이 기억하는 이 예배를 가르쳐놓는 거는 정말 중요한 것 같아요. 5년이 지난 후에는 시집 가서 몸이 예배 보러 가는 거에요. 자발적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몸이 가는 거에요. 그냥 전하고 싶었어요. 큐티를 안 했어? 이걸 가르쳐주고 싶었어요. 가르쳐주고 전도하고, 가 저의 일이 되었습니다. 그 이름으로 사는 것이 전자동으로 되는 일이 맞습니다.
‘나는 큐티하랴, 목장하랴, 너무 바빠서 나는 내 생활도 가져야 된다고 생각해 라고 그러면 주의 일은 뭐고 내 생활은 뭡니까?’ 이원론이 아닌 것이다.
우리가 웃어도 울어도 집에 있어도 교회 있어도 모든 시간은 주님의 시간인 것이다.
여러분이 자꾸 생색내고 티껍게 굴고 그러시면 아니되어요.
(적용 5)
-그 이름의 비밀을 아시나?
-‘그 이름을 위하여’가 인생의 목적인가? ‘내 일을 위하여’ 가 인생의 목적인가?
국제법무와 공익인권업무에 공적 마인드를 가진 제가 맡은 업무가 이 업무에 해당된다.
제가 준비했던 공적 마인드를 가진 법률가는 이주민, 장애인, 때로는 대통령 사주나 대기업이라도 약자일 수가 있다.
약자를 진정 돕는 것이 어떤 것인지도 대답할 수 없는 것이 많다.
자신이 책임을 지도록 양육하는 것이 진정으로 돕는 것 일수도 있다.
전문가나 지식인이라고 해도 결정적인 순간, 큰 유혹이 닥쳐야 그 사람의 진면목이 드러난다.
노블리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우월의식에 빠질 수도 있고 결국 각자의 내면을 보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얼마나 남에게 영향력을 행하게 하는 것이 중요한지 보다 결국 가장 필요한 것은 도덕과 윤리, 아무리 얘기해도 일관된 진실성이다.
그런데 저는 마음이 심히 눌리는 것을 발견했다. 지식적 내용이 아닌, 다들 알지만 선뜻 얘기하지 않는 진실을 언급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똑똑하다는 사람들 앞에서 이런 말을 해도 될까? 이렇게 고난과 수치를 드러내는 목장식구들을 통해 자신의 수치를 드러내는 나눔을 통해 위로와 권면을 하였다. 아, 나는 여전히 지식추구만 하려는, 인정받으려는, 나의 수치와 연약을 드러내기라도 하면 될 텐데.
그래서 목장식구들의 나눔에 힙 입어 나의 위선과 교만과 실수를 구체적으로 예를 하나씩 들어가며 얘기할 수 있었다. 그런데 정말 요즘에 이런 얘기가 안 들리는 시대에 살고 있지 않나? 그것도 공익! ‘이러면 굉장히 힘든데’ 했더니만 너무나 밝고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그 포럼 참석자들과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초원님이 놀랐다는 거에요. 말과 행동이 일치되고 일원론적인 삶은 죄와 고난을 얘기해도 화기애애합니다! 이분이 죄가 없거든요? 우리들교회 붙어있다 보니까. 우리는 울고 웃을 수 있기에 진정한 기쁨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어저께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사도들이 내가 그것의 증인이라고 한 것처럼 설득력이 있는 것이 없거든요. 가말리엘은 지성과 선함과 역사의식도 있었지만. 그가 믿음을 가졌는지는 모르겠어요. 이 초원님은 큰 사명이 있다고 지성과 양심을 뛰어넘는 성령의 전도를 하시게 될 줄을 믿습니다.
<Epilogue 요약>
분노를 감당해야 한다
그들에게 ‘너희가 죽인 예수를 이스라엘에게 회개(repentance)와 죄 사함(forgiveness)을 얻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살리셔서 임금과 구주가 되게 하셨다' 그리고 우리들이 봤다! 증인이다!’라고 체험적인 간증을 통해서 믿고 회개하라고 하니까 이것은 완벽한 복음전파이며 너무 설득력 있는 메시지 인 것이다
내 죄를 보아야 하겠는데 내 죄를 보면 기득권을 내려 놓아야 하기 때문에 거절하는 것이다
사탄은 익지 않은 열매 나무는 흔들지 않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인만 시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들이 기득권에 목숨을 거니까 사도들의 목숨까지 노리는 것이다
인간은 들키지 않으면 못할 짓이 없는 것이다
목회자나 사도들처럼 누군가 나의 죄를 지적하고 회개하고 성령의 주제 설교인 예수를 믿으라고 하면 회개하는 사람이 사람이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들이다.
그렇다고 복음의 증인들을 위협하는 자들을 저주하고 미워한다면 성령의 전도는 하지 못한다.
지성과 선함도 필요하다
하나님께서는 시시때때로 이렇게 100% 옳으신 방법으로 믿는 우리를 도우신다.
내가 진실로 복음을 전하면 하나님은 너무도 신실하게 하나님의 일을 하신다
우리는 있는 모습 그대로 다 봐주기가 어려운 것인데 우리가 다 꼬여서 꼬인 그대로 보는 것이다
자기가 꼬였으면 꼬인 그 시선으로 보는 것인데 사도들을 있는 모습 그대로 인정했기 때문에 우리가 열심으로 선행을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역사의식도 필요하다
드다가 자기를 스스로 높였지만 예수님은 종의 형체를 가졌기 때문에 너무 다른 것이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할 때 종의 자세를 가지는 것이 하나님 자녀로서의 태도이고 그렇게 전하는 것이 성령의 전도인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눈살을 찌푸리는 일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기도하고 말씀을 듣고 자신에게 먼저 적용을 해야 되는 것이 성령이 전도인 것이다.
요즘 기독교인들이 절대로 빛과 소금의 역할을 못 한다는 것이 지금 이 시대 한국사람들의 중론이라는 것이다.
가말리엘이 사도들을 좋게 본 것은 백성들에게 칭송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아무리 옳은 일을 한다 해도 진리를 담아내는 그릇이 좋지 않으면 그 진리가 훼손된다
거짓 메시아는 시간이 지나면 다 흩어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도 예수 때문에 핍박 받다가 때가 되면 여러분들을 버려둘 때가 온다
핍박 당하다가 누군가의 명령을 통해서 버려둘 때가 온다
그래서 사탄이 부모의 모습으로 자녀 모습으로 배우자의 모습으로 날뛰어도 그들이 나를 버려둘 때가 오기도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성품인지, 행위인지, 믿음인지 전부 분별을 못 하므로 우리는 착하면, 성공해도, 나이스 해도 전도를 안 한다.
사도들의 표적을 보고 기적을 다 보았지만 표적은 예수가 그리스도인 것이 표적인데 믿어지지가 않는 것이다
성경에 대한 지식은 아무리 연구해도 사람에게서 난 지식은 짧은 지식이라 하나님에게서 난 지식은 비교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최고의 율법학자가 하나님의 존재는 인정한다면서 그 지식이 예수께로 인도되는 지식은 못 되는 것이다
성령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그 누구도 예수를 主시라 고백할 수 없다.
교만에 대한 핵심은 인간이 하나님이 되는 것인데 가말리엘은 이미 하나님자리에 가 있는 천사 같은 사람인 것이다
큐티하고 목장에 나가지만은 죄에 대한 인식이 없으면 자꾸 죄 이야기하는 것도 지겹고 주님이 날 사랑한다는 생각도 희미하고 잘 될 때만 잠시 기쁘고 그걸 믿음이라 착각하고, 곧 잘 되고 있으면 매너리즘에 빠지게 된다.
근데 그것이 오래 되면 옳고 그름에 합리화 시켜야 되기 때문에 옳고 그름에는 착하며 곧 고난이 오면 주님을 부인한다
사도들은 복음을 위해서 희생과 고난이 올 때 그 고난 때문에 힘이 들지만 나를 위해 십자가 지신 주님을 곧 생각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구나!’라고 깨닫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 내게 오라’고 하셨으니 주님이 같이 짐을 져주신다는 것을 알고 같이 주님께 나가는 것이다
사도들은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있는 자인 것이다.
감옥에서 나와도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또 다른 감옥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인생의 목적은 오직 ‘그 이름을 위하여!’ 가 되어야 되는 것이다.
그들이 당한 고난이 윤리 도덕 법적 잘못이 아닌 오직 주의 이름을 위하여 믿음을 지킨 데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기뻐할 수 있는 것은 비밀인 것이다
기도와 본문과 고난이 우리를 적용하게 하는 것이다
세상에서도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때는 기꺼이 희생을 하는 것이다
결혼할 때는, 이 땅에 사랑할 때는, 모든 걸 희생하는 것이다
세상 사랑은 이기적이기 때문에 거기까지인 것이다
그러니까 정말 예수 그 이름의 비밀 하고는 이제 너무 다른 것이다
예수 신랑이 진짜 내 속에 있기에 진짜 풍부함은 말할 것도 없는 것이다.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품위 유지를 해야 되기 때문에 쓸데 없는 험담을 안 한다.
험담도 안 하고 뭐라도 너무 억울해도 변명도 안 하고 생색을 내는 것도 아니다
그 이름, 비밀, 풍부함, 사랑은 표현할 수가 없는 것이라서 말씀대로 적용했는데도 상대방이 비난했고 욕한다
능욕 받는 목적은 바로 전도인 것이다.
‘예수는 그리스도다!’라는 이런 고백이 굉장히 촌스럽게 여겨지고 교양도 없어 보이면 신앙도 메마르게 되어 있다
사도들은 악인들이 악을 행한 것보다 더 열심히 뜨겁게 사명을 행했다.
아무리 나를 죽이려고 했어도 그들의 악보다 한 가지 조금 더 열심히 사명을 감당하면 되는 것이다
아무리 악을 행해도 오늘 한 가지 더 참고 넘어가면 되는 것이다
그 악보다 한 가지 더 사명을 행하면 되는 것이다
평신도라도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기를 감당하면 어디서든지 복음을 전하게 된다.
우리가 웃어도 울어도 집에 있어도 교회 있어도 모든 시간은 주님의 시간인 것이다.
자신이 책임을 지도록 양육하는 것이 진정으로 돕는 것 일수도 있다.
전문가나 지식인이라고 해도 결정적인 순간, 큰 유혹이 닥쳐야 그 사람의 진면목이 드러난다.
노블리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우월의식에 빠질 수도 있고 결국 각자의 내면을 보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얼마나 남에게 영향력을 행하게 하는 것이 중요한지 보다 결국 가장 필요한 것은 도덕과 윤리, 아무리 얘기해도 일관된 진실성이다.
로마의 무력을 폭력으로 대응하지 않아야 된다
무엇보다도 선함과 지성을 뛰어넘는 영적 분별력이 필요하다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음을 기뻐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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