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외교2020. 4. 7. 09:32

[스포츠외교현장이야기실록5(대한민국체육언론외교와 OCA태동역사 및 아시아체육기자연맹 ASPU<AIPS Asia>실록)]

 

(4편에서 계속)

 

올림픽대회나 각종 국내외 스포츠 행사에 언론매체의 역할이 없다면 올림픽이 50~100억 달러 규모의 범 지구촌 최대 인류축제(The Greatest Pan Global Festival of mankind)로 승화되지 못했을 것이고, 올림픽을 포함한 모든 스포츠 행사나 대회는 동네잔치 수준에 머물고 지금과 같이 장족의 발전은 꿈도 꾸지 못했으리라. 스포츠 취재는 스포츠와 일반 대중간의 촉매제(Catalyst) 기능을 톡톡히 해내고 있으며 보다 나은 사회(a better society), 보다 나은 삶의 질(a better quality of life)을 선도해주고 있다.

과거 올림픽 운동(Olympic Movement) 3대 지주(pillars)는 국제 올림픽 위원회(IOC), 국제 경기연맹(IF: International Federations)과 각국 올림픽 위원회(NOCs: National Olympic Committees)였다.

 

그러나 언론의 역할과 기여의 중요성이 특히 부각된 21세기에 들어서 전 세계 올림픽 및 스포츠 운동(Worldwide Olympic and Sport Movement)에 있어서 언론매체(Mass Media)가 중요하게 자리매김(positioning)함으로써 IOC, IFs, NOCs와 함께 Media 4대 중심축의 하나로서 인류의 향상 성 운동에 공헌하고 있다.

 

 

필자가 스포츠 취재기자들의 존재를 인식한 것은 1982 9월 대한체육회 당시 국제 국에 특채되어 무교동에 있는 체육회관에서 근무하면서 공보실 옆에 있는 기자실 출입기자들이 대한체육회에 대하여 무임소 감사 내지 감찰 기능 등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부터였다.

 

당시의 전설적인 선배 기자들의 에피소드는 일일이 다 적을 수는 없고, 다만 낭만 시대 같기도 하고, 또한 스포츠의 사회에 미치는 영향과 역할이 그만큼 지대하다고 볼 수 있으리라.

 

전 세계 올림픽과 스포츠를 관장하는 IOC와 대륙 별 국가 올림픽 위원회 연합회와 각국 올림픽 위원회가 있다면 전 세계 스포츠 취재 기자들의 이에 상응하는 조직도 공존하고 있다.

 

국제 체육기자연맹(AIPS: International Sports Press Association)과 아시아 체육기자 연맹(ASPU: Asian Sports Press Union/현재 AIPS Asia), 한국 체육기자 연맹(KSPU: Korea Sports Press Union)이 그것이다.

1982 125일 인도 New Delhi에서는 제9회 아시아 경기대회 개막을 앞두고 아시안게임을 주관하던 아시아 스포츠 통괄 관장 단체였던 아시아게임 연맹(AGF: Asian Games Federation)을 아시아 올림픽 평의회(OCA: Olympic Council of Asia)로 탈바꿈하는 OCA 창립총회가 조직되었다.

 

초대 OCA 회장에는 중동의 초 강세 오일 달러를 앞세워 아시아 스포츠 계를 좌지우지하기 위해 쿠웨이트 국왕의 서자 출신 왕족이며 당시 쿠웨이트뿐만 아니라 중동 전반에 걸쳐 무소불위의 파워를 자랑하였던 야심만만한 쿠웨이트 NOC 위원장 출신의 Sheikh Fahad Al-Ahmad Al-Sabah IOC 위원이 파죽지세로 무경쟁 선출되었다.

 

(1984년 서울개최 OCA총회 당시 좌로부터 故 Sheikh Fahd OCA초대회장, 통역 중인 필자, 故 정주영 KOC위원장)

 

 

Sheikh Fahad 초대 OCA 회장은 언론이 스포츠에 미치는 영향력을 인지하고 아시아 체육기자 연맹(ASPU)을 출범시킴과 동시에 쿠웨이트 언론인 출신인 알 후사이니(Al-Hussaini)를 초대 ASPU 회장으로 선출되도록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하여 당선시켰다.

 

아시아의 스포츠 강국(Sports Power House in Asia)은 정작 한국, 중국, 일본 및 북한 등 동아시아 지역 국가들이었는데, 오일달러와 조직적인 득표 작전으로 중동이 아시아 스포츠 계의 정책을 주도하는 스포츠 외교 강국으로 급부상하였다.

 

Sheikh Fahad 회장은 그 당시 평양에 초청받아 북한의 김일성 주석도 만나는 등 친북 성향의 스포츠 지도자였다.

 

4년 후인 1986 9월 서울에서는 제10회 아시안게임 개막을 앞두고 최종 점검에 여념이 없었고, 대회 개회식에 즈음하여 OCA 총회를 개최하게 되었다.

 

1982년 인도 New Delhi 이후 회장을 포함한 OCA 집행부 임원 선출이 있었다.

 

당연히 한국, 중국, 일본의 스포츠 지도자들은 타도 Sheikh Fahad를 외치며, 최만립 KOC 부위원장 겸 명예총무가 주축이 되어 동남아 NOC 수뇌 진들과 함께 하진량 중국 IOC 위원을 동아시아 대표 OCA 회장 후보로 옹립하였으나, 사전에 낌새를 차린 Sheikh Fahad 회장 측이 쿠웨이트 정부 채널을 통해 중국 정부에 대해 만약 하진량 IOC 위원이 OCA 회장 후보로 나와 당선될 경우 중동 국가 전체가 1990년 제11회 북경 아시안게임을 보이콧(Boycott)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었다.

 

 

(하진량/Zhenliang HE<작고> 중국 IOC부위원장과 함께)

 

 

당시 중국으로서는 개방화 정책을 통해 국가 발전과 중흥을 도모하려는 계획의 일환으로 대외에 내놓은 야심 찬 카드가 Beijing1990 아시아게임이었으니, 두말할 나위 없이 OCA 회장선거는 당장에 물 건너간 상황이 되었다.

 

이렇게 해서 「타도 아시아 스포츠 마피아 작전」은 일단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듬해인 1987년에는 아시아 체육기자 연맹(ASPU) 회장선거가 있었다.

 

쿠웨이트의 Al Hussaini 회장이 당연히 연임을 노렸다.

 

그러나 한국에는 막강한 ASPU 회장 후보가 버티고 있었다.

 

연세대학교 재학 시절부터 시작해서 국가대표 아이스하키 선수 및 주장을 맡아온 정통 스포츠 인으로서 불굴의 정신력과 추진력의 소유자인 당시 조선일보 체육부장 박갑철 한국 체육기자 연맹(KSPU) 회장은 말레이시아, 태국, 중국, 일본, 홍콩, 대만, 마카오, 필리핀, 싱가포르 등 전체 아시아 체육 기자들의 강력한 지지와 일사불란한 조직력과 ASPU 발전을 위한 구체적인 비전(Vision)을 내세워 막강했던 쿠웨이트 출신 알 후사이니 ASPU 초대 회장의 아성을 일거에 무너뜨렸다.

 

분명한 쾌거였다. 아시아 스포츠 언론 외교의 헤게모니(Hegemony)를 장악한 순간이었다. 아시아 스포츠 마피아 조직의 한쪽 벽이 이렇게 무너져 내렸다.

 

(좌로부터 문동욱 현 대구 계명대학교 체육과교수, 박세호 전 SBS국장, 박갑철 전 ASPU회장, 필자)

 

 

박갑철 ASPU 회장은 영어에 능통한 분은 아니지만 날카로운 예지력과 그때그때 닥친 상황을 잘 읽고 대처하는 순발력과 분별력이 남달랐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그런 박회장과 ASPU 회의 및 AIPS(국제 스포츠 기자 연맹) 총회에 여러 번 동참한 바 있다. 현장 증인인 셈이다.

 

박회장은 영어 등 외국어가 뛰어나지 않아도 국제 스포츠 외교를 장악할 수 있다는 실증을 몸소 실천해 보여준 스포츠 언론 외교의 대부인 셈이다.

박회장은 ASPU 회장으로 당선된 후 1987년 세계 체육기자 연맹(AIPS) 총회를 대한민국의 서울로 유치하여 성공적으로 조직하였다.

 

필자는 당시 하정조 KSPU 사무총장(연합통신 편집국장 역임), 이원웅 KOC 전문위원<작고>, 홍종서 관장 등과 서울 신라호텔에서 개최된 AIPS 총회를 함께 조직, 운영하였다.

 

그 당시 통역요원으로 선발되어 봉사했던 대학생 중에 박용성 국제 유도연맹(IJF) 회장 겸 IOC 위원 비서로 발탁되어 국제 스포츠 계에서 열심히 활동한 바 있는 문희종씨는 탁월한 불란서어를 구사하며 최 측근 비서실장으로 박회장을 보필하였다.

AIPS는 전세계 스포츠 취재기자들이 회원인 국제 스포츠 언론계의 공인된 최고 권위의 기구로서 당시 영국 기자 출신인 Frank Taylor가 회장을, 이태리 기자 출신인 Massimo De la Pergola가 사무총장을 맡고 있었다. 1993 5월초 터키 이스탄불에서는 제56 AIPS 총회가 개최되었다.

 

 

(좌로부터 Togay Bayatli AIPS 후임 회장, Frank Taylor 당시 AIPS회장, 필자, 박갑철 AIPS부회장)

 

 

AIPS 회장 등 집행위원 선거가 있는 중요한 회의여서, 필자는 중국 상해에서 개최되는 제1회 동아시아 경기대회 한국선수단 섭외 임원으로 참가하기에 앞서 AIPS 부회장으로 입후보한 박갑철 ASPU 회장의 선거 지원을 하도록 당시 김운용 KOC 위원장의 지시를 받고 별도 항공 스케줄에 의해 터키 이스탄불 현지로 날아갔다.

 

 

대세 판단에 뛰어난 박갑철 AIPS 부회장 후보는 당시 Frank Taylor AIPS 회장과 경쟁 후보인 터키 체육기자 출신이며 당시 NOC 사무총장(이후 NOC위원장)Togay Bayatli 와 손을 잡고 공동 연합전선을 전개하였다.

필자는 Togay AIPS 회장 후보와 박갑철 부회장 후보와 함께 모인 전략회의 석상에서 가능한 무혈입성, 즉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고의 승리이므로 우선, 필자가 1987 AIPS 서울 총회 때부터 친분을 쌓았던 Pergola AIPS 사무총장과 Taylor 회장을 직접 면담해서 AIPS 회장 후보 사퇴를 종용하고 대신 명예회장으로 추대하여 예우하는 방향으로 설득하도록 하는 임무를 맡았다.

 

Pergola 사무총장은 별 이견이 없었으나 Taylor회장은 필자가 선거 판 향방과 대세가 이미 기울었으니 명예롭게 퇴진하도록 간곡히 설득하자 조용히 경청하고 나서 필자의 손을 꼭 잡더니 “배려해줘서 고맙지만 사양하겠다.

 

영국인의 전통은 비록 싸움터에서 쓰러지더라도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것이므로 미련 없이 결전을 치르겠다.”라고 결사항전의 뜻을 밝히며 끝내 후보 철회를 하지 않았다.

투표 결과는 홈 그라운드에서 조직적으로 표를 장악한 Togay가 신임 AIPS 회장에 우선 당선되었고, 이어서 치른 AIPS 부회장 선거에서는 한국의 박갑철 후보가 압도적 표차로 경쟁 후보를 제치고 AIPS 부회장으로 당선되었다.

 

필자가 AIPS 각국 회의 대표에게 박회장 대신 영어로 유세 연설을 했지만 그 내용은 거의 박회장의 아이디어였다. 1987 AIPS 서울 총회 시부터 쌓아온 친분과 인간적 신뢰의 바탕 아래서.

 

이제 10여 년이 지난 2020년 또 다시 박갑철 ASPU(AIPS Asia)회장의 뒤를 이어 ASPU회장이 한국에서 나올 가능성이 거의 확실시 되고 있다.

 

지난 2019 8월말 말레이시아 Selangor Sunway City에서 아시아체육기자연맹(ASPU/AIPS Asia)총회와 함께 열린 International Sports Summit에 특별연사로 초대 받아 특별 강연과 함께 아시아체육기자연맹 총회도 참관하였다. 한국체육기자연맹(KSPU)정희돈회장이 2021 ASPU(AIPS Asia)차기 회장으로 확정되어 가고 있다고 한다. 차제에 향후 AIPS회장 직도 도전해 볼 만한 좋은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는 것 같다.

 

 

 

 

(6편에 계속)

 

Posted by 윤강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