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외교2023. 6. 14. 11:11

[체육계에 회자되고 있는 故 김운용 IOC부위원장 배신자 프레임에 대한 진실(眞實)과 실상]

 

 

누군가 제가 김운용 전 IOC부위원장의 배신자란 프레임으로 저를 매도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너무 기가 막혀서 2017 930일 제 블로그에 올린 글과 동아일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운용 총재(대한체육회 회장) 시절, 모든 국제업무에 관한한 실무총괄했던 저에 대한 시기와 질투로 덧씌워 놓은 프레임으로 보입니다. 김운용 배신자 프레임으로 이득 본 자를 찾아보면 될 듯 합니다.

 

그 프레임 덕에 저는 오랜 세월 체육계의 아웃사이더로 배척되어 왔습니다. 그리고 저 대신에 그들은 체육계 요직에 들어 앉아 활동을 이어왔겠지요.

 

저는 국내 체육계에서는 아웃사이더였지만 국제 체육계에서는 여전히 인사이더로 인정 받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2022 1021 ANOC 서울 총회 말미에 Baach IOC위원장은 IOC집행위원회 결정대로 서울에서 귀하디 귀한 IOC쿠베르탱 메달을 직접 전수해 주기도 하였으며 2023 425일에는 제게 전국공모로 2027년 충청권 세계대학경기대회 조직위원회 사무총장으로 선출되었음을 보고 드리니 축하 서한까지 보내 주었습니다.

 

그러나 국제 스포츠 외교는 그래야 합니다. 입도 벙긋 못하고 주저앉아 있으면 누가 말을 걸어주나요?

 

체육계에서 시기와 질투로 보는 사람들 눈에는 그렇게 보였겠지만.. 전 평창동계올림픽유치와 서울 올림픽 유치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주요 국제인사를 묶어주는 치열한 스포츠 외교 현장이었습니다.

 

결국 그 날의 휘젓고 다님이 인정되어 2022 10월 서울시장이 로잔에서 Bach IOC위원장과 회담하는 자리에 함께하는 결과를 낳기도 하였습니다

 

시기하던 자들의 배신자 프레임, 혼자 설치고 다니는 사람이라는 삐뚤어진 시각, 국제 스포츠 외교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부화뇌동, 게다가 스포츠외교 현장을 경험하지 못한 분들의 평향된 시각이 오늘날 나에 대한 편견의 장벽을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故 김운용회장께서는 옥중에서도 저를 찾으셨고 출감하셔서는 임종하는 그날까지 저와 한 달에 2회정도 만나 정다운 식사와 대담을 이어 가셨고 평창2018 동계올림픽 기간 중 현장에도 사모님, 둘째 따님과 사위와 함께 찾아 오셔서 강릉에 거주하던 주말 직접 차까지 보내 주시어 봉평에서 메밀 전병과 국수를 사 주시며 함께 환담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납니다.

 

돌아가시는 그날에도 제게 마지막 문자까지 보내주셨는데 그 기록이 동아일보 기사에 고스란히 남아 있네요.

 

다시 한번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한국스포츠외교사의 불세출의 큰 별 김운용 前 IOC부위원장 의 족적(동아일보 기사)]

 

한국스포츠 계의 큰 별 김운용  IOC부위원장이 지난 103일 감기증세로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하여 쉬다가 새벽(0221) 평안하게 영면에 들어 가셨습니다.

 

필자에게 930일 문자로 "2년 만에 감기 증상으로 쉬고 있음"이라는 메시지가 고인의 마지막 메시지가 된 셈입니다.

 

 

 

유족의 뜻에 따라 대한체육회장장 대신 태권도 장으로 7일 간 문상을 마치고 109 08:30 국기원에서 장례 영결식을 치릅니다.

 

IOC측에서는 싱가폴 출신 IOC집행위원 겸 IOC재무위원장이 108일 방한하여 빈소방문 및 영결식에 참석합니다.

 

아래 내용은 필자와 인터뷰 후 동아일보가 108일 자 신문기사로 내 보낸 고 김운용前 IOC부위원장에 대한 글 (사람속으로//[명복을 빕니다] 김운용 前 IOC부위원장)입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사람속으로(동아일보2017 108일 자)

 

[명복을 빕니다]김운용 IOC 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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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개 언어 능통 ‘태권도 대부’… 한국 스포츠 외교에 큰 족적

 

 

 

6개 언어에 능통한 ‘국제인’이었고 ‘국제올림픽위원회(IOC)의 언어를 구사할 줄 아는 유일한 사람’으로 불릴 만큼 스포츠 외교에 정통했던 김운용 전 IOC 부위원장(사진) 3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6. 

지난달 27일 충북 진천 국가대표선수촌 개촌식에 다녀온 고인은 이후 감기 증세를 보이다 2일 서울 서대문구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했으나 다음 날 오전 타계했다.

 

지난달 30일 “감기가 들어 잠시 쉬고 있다”는 것이 고인의 측근이었던 윤강로 국제스포츠외교연구원장에게 보낸 마지막 문자메시지였다

“결코 감정에 흔들리지 않는 냉정함과 탁월한 외교적 수완은 늘 우리의 선망과 존경의 대상이었다. 

작고한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전 IOC 위원장(스페인)은 생전의 김 전 부위원장을 이렇게 평했다. 김 전 부위원장은 유색인종 최초로 IOC 위원장에 도전했던 한국 스포츠 외교의 거목이었다. 그러나 2004년 세계태권도연맹(WTF) 후원금 유용과 외국환관리법 위반 등으로 구속 기소됐고, 이후 징역 2년과 추징금 78000여만 원을 선고받은 뒤 복역했다. 2008년 광복절 특사로 사면 복권됐다.

1986
IOC 위원에 선출된 고인은 대한체육회 회장, 대한올림픽위원회 위원장, IOC 집행위원 및 부위원장 등을 지내면서 서울 올림픽과 한일 월드컵 등 국제대회 유치에 기여했다. 국기(國技)인 태권도의 올림픽 정식 종목 채택과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남북 공동 입장을 성사시킨 것은 고인의 중요한 업적으로 꼽힌다.

 

윤 원장은 “각종 스포츠 회의를 국내에 유치하면서 관련 인사들이 반드시 국기원에 들르도록 했고 군대식 차트를 넘기면서 태권도에 대해 설명했다”며 태권도의 세계화에 앞장선 일을 기억했다

 

1931년 대구에서 태어난 고인은 어릴 적부터 육상 단거리와 씨름에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유도, 복싱, 스피드스케이팅, 태권도 등에도 도전할 만큼 만능 스포츠맨이었다.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재학 시절 6·25전쟁을 만났다. 통역 장교로 입대해 뛰어난 영어 실력으로 이승만 전 대통령의 연설을 통역하기도 했다. 청와대 경호실 보좌관으로 일했던 고인은 ‘태권도 세계화’를 목표로 1971년부터 대한태권도협회장을 맡았다. 1973년 세계태권도연맹 총재가 되면서 국제 스포츠 무대에 진출했다. 1986 IOC 위원이 된 뒤 1988 IOC 사상 최단 기간(1 10개월) 만에 집행위원이 됐다. 1992년에는 역시 최단 기간(5 9개월) 만에 IOC 부위원장에 올랐다. 16대 국회의원(비례대표·새천년민주당)으로 정계에도 몸담았다. 그러나 2000년에 터진 2002 솔트레이크시티 겨울올림픽 유치를 둘러싼 뇌물 스캔들에 휘말리면서 입지가 좁아졌다. 2001 IOC 위원장에 도전했으나 자크 로게(벨기에)에게 패했고 2002년에는 9년 동안 이끌었던 대한체육회장에서 물러났다. 고인은 이후 평창 겨울올림픽 유치 방해설에 시달렸는데 생전에 이에 대한 억울함을 토로했다. 2005년 복역중 IOC 위원에서 스스로 물러났다. 

고인은 영어, 일본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러시아어에 능통했다. 일본 NHK의 스모 중계방송 때 특별 해설을 한 적도 있다. 스포츠 외교에서의 업적을 인정받아 2015년 스포츠영웅에 선정됐다. 유족으로는 부인 박동숙 씨와 아들 정훈 씨, 딸 혜원 혜정 씨가 있다. 장례는 태권도장으로 치러진다. 빈소는 서울 세브란스병원, 발인은 9일 오전 7. 영결식은 9일 오전 8 30분 국기원에서 열린다.


김종석 kjs0123@donga.com·이승건 기자

Posted by 윤강로 (Rocky Y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