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해외출장에서 상페테스부르크(St. Petersburg)와 2014년 동계올림픽 개최도시인 소치(Sochi)에 이어 주님이 인도하신 세 번째 하이라이트 방문 지는 폴란드 바르샤바 이전의 수도였던 크라코우(Krakow: 폴란드식 발음은 ‘크라쿠브)에서 1시간 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한 아우슈비츠(Auschwitz) 수용소의 대량학살 참상 역사현장으로 근 현대 사 ‘지옥의 묵시록’ 견학이었습니다.
“오, 주여! 가슴이 송두리째 갈기갈기 찢어지고 타조처럼 애통해 하고 들개처럼 애곡하는 참혹, 잔혹, 처참함에 마음이 미어지고 영혼이 혼란 속에서 지옥의 묵시록을 보여 주시니 ‘유다의 왕들 요담과 히스기야 시대에 모레넷 사람 미가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 곧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 관한 묵시’<미가 1:1> 중,
‘여호와께서 그의 처소를 나오시고 강림하사 땅의 높은 곳을 밟으실 것이다 그 아래에서 산들이 녹고 골짜기들이 갈라지기를 불 앞의 밀초 같고 비탈로 쏟아지는 물 같을 것이니 이는 다 야곱의 허물로 말미암음이요 이스라엘 족속의 죄로 말미암음이라 야곱의 허물이 무엇이냐 사마리아가 아니야 유다의 산당이 무엇이냐 예루살렘이 아니냐 이러므로 내가 사마리아를 들의 무더기 같게 하고 포도 심을 동산 같게 하며 또 그 돌들을 골짜기에 쏟아 내리고 그 기초를 드러내며 그 새긴 우상들은 다 부서지고 그 음행의 값은 다 불살라지며 내가 그 목상들을 다 깨뜨리리니 그가 기생의 값으로 모았는즉 그것이 기생의 값으로 돌아가리라 이러므로 내가 애통하며 애곡하고 벌거벗은 몸으로 행하며 들개 같이 애곡하고 타조같이 애통하리니 이는 그 상처는 고칠 수 없고 그것이 유다까지도 이르고 내 백성의 성문 곧 예루살렘에도 미쳤음이라’(미가 1:3~9)에서 예증하신 대로이심에 전율하였습니다
금과 은을 내 주고 전쟁을 피하려고 히스기야 왕은 하나님을 훼방하는 랍사게의 말을 듣고 옷을 찢고 굵은 베옷을 입고 여호와의 전으로 올라가는 히스기야 왕(이사야 37:1)처럼, 또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아 앗수르에게 환난과 책벌과 조롱을 당했던 것처럼 히틀러(산혜립)와 SS친위대(랍사게)에 농락당하고 독 가스 실에서 비명 횡사한 100만 명이 넘는 유태인들 원혼들의 처참한 절규가 아우슈비츠 수용소 터에 넘쳐나니 그들과 내가 모두 애통하는 타조이고 애곡하는 들개였습니다
“주님, 이들의 원혼을 달래 주시고 그들과 내 죄를 사하여 주시옵소서.”
이 참혹한 집단수용소의 명칭이 독일어로 ‘아우슈비츠’ (Auschwitz)이지만 폴란드어로는 ‘오시비엥침’(Oswiecim)市 라고 합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에 의해 점령되었던 나라들의 국민들에게 5년 간이나 공포감을 안겨주었다고 합니다
이 수용소는 1940년에 폴란드인 정치범을 수용하기 위해 설립되었는데 당초에는 폴란드인 학살장소로 이용할 요량이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나치는 전 유럽인들, 특히 유럽각국에서 각각의 국적을 얻은 유태인, 집시, 소련군 포로들을 이곳에 보내오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정문 입구에는 독일어로 ‘Arbeit Macht Frei.’<노동이 자유함을 만들어 준다>라는 기만에 가득 찬 문구로 수용된 사람들의 노동력 착취를 미화하였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혹독한 고문과 강제노동을 착취당하고 가시실에서 죽어간 수감자들의 신발 잔해 모습)
(아우슈비츠 수용소 수감자들에 대한 고문 모습을 생존자들 중 화가였던 사람이 묘사하여 수용소 전시실에 보관 전시하고 있다)
이곳에 수감되었던 사람들 중에는 체코인, 슬로바키아인, 구 유고슬라비아인, 프랑스인, 오스트리아인을 비롯하여 독일인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수용소가 개방될 때까지 폴란드인 정치범도 계속해서 이곳에 보내졌었다고 합니다
1939년 9월 제2차 세계대전 전쟁 발발 후 오시비엥침市(Oswiecim: 아우슈비츠의 폴란드 이름)를 포함해 그 일대는 독일 제3제국의 일부에 편성되었고, 동시에 이름을 아우슈비츠로 변경하였다고 합니다
이 곳이 유태인 대량학살장소로 탈바꿈하기 시작한 것은 1942년 이후였으며 아우슈비츠 집단수용소 경비는 애초 나치당 지도부의 경호를 위해 조직된 정예 친위대 SS(Schutz-Staffeln)병력이 담당하였는데 SS는 초창기 목적과는 달리 국가 행정, 경찰, 군부에까지 그 역할이 확대되어 집단 수용소 경비업무까지 담당함으로써 SS대원들은 수용소 통제임무, 감시 탑 경계업무 및 유태인 수감자 학살업무를 담당하였는데 이들은 전원 독일인 및 독일혈통으로 구성되어 고용되기도 하였으며 수용소 존재 기간 중 총 8천 여명의 SS대원 및 감시요원이 아우슈비츠에 상주했다고 합니다
1940년 6월14일 728명의 정치범들을 태운 첫 번째 호송열차가 타르누프(Tarnow)市로부터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도착하였으며 바로 이날을 수용소 정식 가동일로 간주한다고 합니다
점령기간 내내 히틀러의 군대에 의해 체포된 폴란드인들이 수용소로 보내졌으며 이들 이외에도 불심검문과 감시활동으로 검거된 사람들, 독일인 거주자들을 위한 거처 마련차원에서 강제 이주된 가족들 및 1944년 바르샤바 봉기 당시 체포된 사람들이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이송되었다고 합니다
독일 정권은 폴란드인들 이외에도 제3국 점령지에서 체포한 사람들, 예를 들어 집시, 소련군 전쟁포로들도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보내졌으며 수용소로 보내진 사람들에게는 수감번호가 부여되었고 1942년부터는 학살대상 유태인들이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대규모 이송되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이곳에 소속된 SS친위대 군의관들은 이들 중 노동이 가능한 인력과 생체실험 대상으로 사용될 사람들을 따로 분류하여 대 학살 만행에 참여 하였다고 합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이송된 1백3십만 명의 사람들 중 등록된 유태인 20만 명(실제 희생자수는 1백만 명으로 추정), 폴란드 인 15만 명, 집시 족 2만3천 명, 소련군 전쟁포로 1만5천명 등 총 40만 명이 수감번호를 부여 받았으며 이 중 50%이상이 기아, 강제노동, 가혹행위, 사형, 질병, 전염병, 형벌, 고문 및 생체실험 등으로 사망했다고 하니 아비규환이의 끔직한 현장이었음이 생생히 증거되었습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해방되었을 때 그곳에는 단 7천 여명만이 생존해 있었다고 합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1942년부터 유럽 거주 유태인 학살이라는 또 다른 기능을 수행하였다고 합니다
이들은 연령, 직업, 국적, 정치적 견해를 불문하고 오로지 유태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집단 학살 극의 희생자들이 되어 버렸으며 이송된 사람들 중 SS 소속 군의관에 의해 노동부적합계층을 분류된 병약 자, 노약자, 임산부, 아동 등이 가스실에서 참혹하게 학살되었다고 하는데 이들은 수감번호 부여작업 등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가스 실로 끌려갔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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