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바르셀로나개최 ANOC총회에 참석한 KOC 대표단<중앙열: 좌로부터 박용성 당시 KOC부위원장 겸 대한 유도회장, 최만립 KOC부위원장 겸 명예총무, 필자, 그 옆이 당시 IOC정무담당 사무총장<Director General> FranoisCarrard, 사진 맨 죄측 두 번째가 당시 ANOCA<아프리카 올림픽위원회 연합회>회장 겸 콩고 IOC위원인 Jean-Claude Gangga)
박용성 현 대한체육회(Korean Olympic Committee)회장은 한국 체육 계 수장으로서 GAISF회장, WTF총재, 국기원장, 대한체육회장, KOC위원장, 대한태권도협회 회장, ARISF회장, IOC TV 분과위원장, 1988년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 수석부위원장, 1997년 부산 동아시안 게임, 1999년 강원 동계아시안게임 및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조직위원장, IOC위원장 후보< 현 로게 IOC위원장에게 차점차로 석패> 역임) 등 올림픽 운동의 3대 지주(IOC, IFs, NOC)와 NF(국내 경기단체), 국내개최 국제 메가스포츠 이벤트 조직위원장에 이르기까지 총괄 석권한 김운용 전 IOC부위원장(세계태권도 연맹<WTF>창설총재)과 함께 NF(National Federation)회장(대한 유도회 회장), IF(International Federation)회장(국제유도 연맹<IJF>), IOC위원(2002-2007) 그리고 2009년부터는 NOC위원장<대한체육회/Korean Olympic Committee회장 >까지 석권하여 김운용 전 IOC부위원장에 이어 한국 스포츠외교사상 두 번째 올림픽 운동 기구 트리플 크라운(Triple Crown)수장이 된 주인공이기도 하다.
(박용성 대한체육회<Korean Olympic Committee>회장 캐리커쳐)
그는 현재 3수 도전 중인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위원회를 도와 평창유치 성공을 위해 가장 적극적이며 선도적으로 평창유치 로비 활동 전면에서 맹활약 중인 KOC위원장 및 유치지휘자들 중 한 사람이다.
필자는 2007년 초 2014년 평창동계올림픽유치를 위한 포석의 일환으로 IOC윤리위원회 결정에 의거 IOC위원 자격정지 중(suspended)이던 당시 박용성 IOC위원 대통령 특별사면을 위한 전초 단계로써 재판정에 2014년 평창유치위원회 국제총장 자격으로 출두하여 증인으로서 발언한 바 있다.
당시 재판정에서 존경하는 재판장께 올림픽유치과정에서 자국 IOC위원 역할의 중요성에 대하여 올림픽유치경쟁을 축구시합에 비유하여 심판의 재제를 전혀 받지 않는 제3의 선수로 비유하여 증언 한 바 있다.
박용성회장은 다행이도 그 재판 직후인 2월 IOC평창 현지 실사 기간 중 대통령 특별 사면결정을 받았다.
이어 IOC집행위원회로부터도 IOC위원 자격 복권조치를 받았으며 이후 2014년 평창동계올림픽유치성공을 향한 남은 기간동안 득표를 위해 많은 IOC위원들을 직접 방문 접촉하는 등 유치지원 활동에 지원사격 한 바 있다.
물론 러시아 푸틴 대통령이 전방위 압박 로비에 밀려 평창은 두 번째 분루를 삼켜야 했다.
올림픽유치에 있어서 해당국 NOC와 유치위원회와의 협력은 매우 긴요하다.
2016년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유치한 브라질 리오의 경우 브라질 NOC위원장 겸 IOC위원인 Carlos Nuzman이 유치위원장으로 투표권자들인 동료 IOC위원들을 평소 쌓아 놓은 친분과 공감대와 스킨쉽을 십분 발휘하여 직접 득표공략에 성공하여 금자탑을 이룬 바 있다.
평창의 최대 라이벌인 뮌헨 2018유치위원회 위원장도 독일 IOC부위원장 겸 NOC위원장인 Tomas Bach가 맡아 직접 선두 지휘하고 있다.
2020년 올림픽 유치 출사표를 일찌감치 던진 이태리 로마2020유치위원회도 IOC내 마당발인 Mario Pescante IOC부위원장을 로마유치위원장으로 영입하여 사전 물밑 작업 중이다.
(Mario Pescante IOC부위원장 겸 2020년 로마올림픽 유치위원장 캐리커쳐)
이렇게 NOC위원장과 해당국 IOC위원의 역할은 유치로비 활동에 있어서 불가분의 관계로써 정립되고 있는 상황이다.
평창 2018의 경우 2016년 리오나 2018년 뮌헨의 경우처럼 NOC위원장 겸 IOC위원은 존재하지 않고 또한 직접 유치위원장 직을 맡고 있지도 않다.
그러나 위의 예들처럼 비록 IOC위원은 아니지만 박용성 KOC회장의 적극적인 평창유치 지원사격은 비슷한 시너지효과를 거양할 수 있다.
이제 관건은 평창 2018 유치위원회와 KOC와 정부의 일사분란한 협조와 공조체제가동을 통한 효과적인 IOC위원 득표관리다.
평창 2018의 '7월6일 더반대첩'을 성사시키기 위하여서는 현재 누구보다도 IOC위원들의 현장표심을 가장 잘 파악하고 있는 박용성 KOC위원장이 조양호 평창 유치위원회 위원장과 일심동체가 되어 IOC위원들 전방위 득표 마지막 화룡점정 작업 피날레를 극대화 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어야 한다.
이 시점에서 더욱 중요한 것은 단 한 명의 IOC위원이라도 설득시켜 평창 지지표로 만들 수 있다면 그것이 '파리 손' 또는 '고양이 손'이라도 빌릴 수 있는 열린 마음으로 총동원령을 내리도록 촉구하는 일이다.
"스승님, 마을에서 제일 좋은 사람과 제일 나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공자 왈 "마을에서 제일 마음씨 착한 사람이 제일 좋은 사람이라고 천거하는 이가 제일 좋은 사람이며 마을에서 제일 마음씨 나쁜 사람이 제일 좋은 사람이라고 천거하는 이가 제일 나쁜 사람이니라."
오늘은 3수 도전에 나선 평창이 2018년 동계올림픽개최도시로 선정되느냐 여부를 판가름 짓는 날로부터 D-100일 되는 초읽기 기로에 들어선 날이다.
박용성(朴容晟, 1940년 9월 11일~)은 두산그룹의 창업주인 박두병의 삼남으로, 현재 제37대 대한체육회의 회장이자, 중앙대학교의 이사장이다.
|
생애
박용성은 1940년 9월 11일에 일제 강점 하의 경성부에서, 박승직(朴承稷)의 손자이자 박두병의 아들로 태어났다. 1959년 3월에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65년 2월에는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1969년 6월에는 미국 뉴욕 대학교의 경영 대학원을 졸업했다.
경력
<경영>
1973년 6월에 한국투자금융의 상무가 되었고, 1984년 2월에 동양맥주의 대표이사 겸 사장직을 역임했다. 1990년대 초반인 1991년 2월에는 한국상업은행 이사회에서 회장이 되었으며, 1993년에는 두산그룹의 부회장, 2001년 3월에 두산중공업(옛, 한국중공업)의 대표이사 겸 회장, 2005년 4월에는 두산인프라코어의 대표이사 겸 회장이 되면서 두산 가(家)의 요직을 두루 지냈다.
<재계>
그는 재계 활동에도 열심이었다. 서울 올림픽이 열렸던 지난 1988년 4월에 서울상공회의소(商工會議所, 상의)의 부회장이 되었고, 1998년 1월에는 국제상의(ICC) 한국위원회(KNC)의 의장을 지냈다. 2000년 5월에는 대한상의의 회장을 맡는 한편, 서울상의의 회장을 재역임했으며, 2005년 1월에는 국제상의의 회장이 되었다.
<체육계>
한편, 그는 체육계에 투신하기도 했다. 1986년 1월에 대한유도협회(大韓柔道協會)의 회장과 1989년 2월에는 대한올림픽위원회(KOC, 현 대한체육회) 부위원장, 1995년 9월에 유도 창시자 가노 지고로 친손자인 일본의 가노 유키미스 당시 아시아유도연맹 회장을 꺾고 국제유도연맹의 회장이 되면서 한국 체육계의 핵심적인 주요 인사로 발돋움하게 된다. 2000년대의 행적을 살펴보면, 2002년 2월에 국제올림픽위원회(IOC)의 위원이 되었고, 2009년 2월에는 대한체육회의 회장이 되었으며, 동년 5월에는 2011년에 개최되는 대구세계육상선수권의 조직위원회 위원장이자 조직위원회 고문이 되었다.
<수상>
박용성이 받은 상훈은 아래와 같다.
<체육계>
<산업 훈장>
<외국>
<기타>
그 외에 그는 2008년 6월에 중앙대학교의 이사장이 되면서 학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고, 1999년에는 서울엔젤그룹의 초대 회장으로 추대된 경험도 있다.
<가족 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