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외교2018. 6. 28. 18:14

[세계스포츠 대통령 역대IOC위원장위상과 실체 및 9대 IOC위원장선출현장 생생스케치 Update]

 

 

 

역대 IOC 위원장 및 재임기간:

 

 

1: Demetrius Vikelas (그리스) 1894~1896(2년간)

2: Baron Pierre de Coubertin(프랑스) 1896~1925(29년간)

3: Comte Henri de Baillet-Latour (벨기에) 1925~1942(17년간)

4: Sigfred Edstrom (스웨덴) 1942~1952(10년간)

5: Avery Brundage(미국) 1952~1972(20년간)

6: The Lord Killanin (아일랜드) 1972~1980(8년간)

7: Juan Antonio Samaranch(스페인) 1980~2001(21년간)

8: Jacques Rogge(벨기에): 2001~2013(12년 간)

9: Thomas Bach(독일): 2013~2025 )12년 간)

 

 

 (Thomas Bach 9대 현 IOC위원장/2013~)

 

 

 

1)   1 IOC위원장(2년 간/최단기간):

 

IOC위원장124년간(1894-2025) IOC 역사를 움직여 온 수장은 모두9, 1894 IOC 창립 당시 초대 IOC위원장은 고대 올림픽 발상지였던 그리스출신의 비켈라스(Demetrius Vikelas)는 제1회 올림픽대회 때까지 2년간의 최단기 재임 IOC위원장이었습니다.

 

 

               (Demetrius Vikelas 초대 IOC위원장/재임기간: 1984-1986 2년간)

 

 

 

 

2)   2 IOC위원장(29년간/최장기간):

 

1회 근대 올림픽 개최를 계기로, IOC위원장 바통(baton) IOC를 창설하고 근대 올림픽을 부활(Renovate)시킨 실세주인공인 프랑스의 쿠베르탱 남작(Baron Pierre de Coubertin)에게 넘어갔고 그는 제2 IOC위원장(1896~1925)으로서 역대 최장기간인 29년간 올림픽운동과 세계 스포츠 계를 주도했습니다.

 

 

 

                           (Baron Pierre de Coubertin 2 IOC위원장)

 

 

 

 

3)   3 IOC위원장(재임기간: 1925-1942/17년간):

 

벨기에의 바이예 라투르(Comte Henri de Baillet-Latour 재임기간: 1925-1942)/2차 세계대전으로 올림픽대회 미 개최의 불운한 위원장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Comte Henri de Baillet-Latour 제3대 IOC위원장)

 

 

 

 

4)   4 IOC위원장(재임기간: 1942-1952/10년간):

 

 

스웨덴의 에드스트룀(Sigfred Edstrom 재임기간: 1942-1952)역시 제2차세계대전으로 올림픽대회 미 개최를 인내한 또 한 명의 IOC위원장이었습니다

 

 

(Sigfred Edstrom 4 IOC위원장)

 

 

 

3대 및 제4대 두 명의 IOC위원장 재임 시 발발한 제2차 세계대전(World War : 1939-1945)으로 최대의 위기를 맞은 바 있었습니다.

 

5)   5 IOC위원장(1952~1972/20년 간)

 

Edstrom 위원장 사임 후 활기를 되찾은 계보는 미국의 브런디지(Avery Brundage 재임기간: 1952-1972) IOC위원장은 아일랜드의 킬라닌 경(The Lord Killanin 재임기간: 1972-1980), 스페인의 사마란치(재임기간: 1980-2001)로 이어졌고 2009년 재임에 성공한 현 위원장인 벨기에 출신의 로게(Jacques Rogge 재임기간: 2001~2013)까지 오게 되었다.

 

 

 

(Avery Brundage 5 IOC위원장/재임기간: 1952~1972/ 20년간)

 

 

 

(The Lord Killanin 재임기간: 1972-1980/8년간)

 

 

 

 

 

(Samaranch 7IOC위원장과 함께/재임기간: 1980-2001/21년간)

 

 

(Jacques Rogge 8IOC위원장과 함께/재임기간: 2001-2013/12년간)

 

 

 

(Bach IOC9대 위원장과 함께/재임기간: 2013-2025/12년간)

 

 

 

2018 424일 스위스 로잔 IOC본부 IOC위원장 집무실에서 필자는 지난 3월 강릉시청 면담 시 Thomas Bach IOC위원장의 평창2018성공개최 기여에 대하여 헌시했던 4행시에 이어 두 번째 4행시를 작시하여 발표하고 헌시메모지를 Bach IOC위원장에게 다시금 증정한 바 있습니다.

 

4행시를 소개해 드립니다.

B---Because of you

A---All the world

C---Congratulates, Commemorates, and Celebrates

H---Humanity and Hope

“Hope Lights Our Way”

 

Bach IOC위원장은 필자의 즉석 4행시 낭독 헌시에 흡족함을 표시한 바 있습니다.

 

IOC의 위상은 위원장의 업무수행 능력, 계보형성, 지지세력 파워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IOC위원들의 비밀투표로 출석과반수 이상의 찬성을 얻어야 하는 IOC 위원장의 첫 임기는 8년이며 그 후는 1회에 한해 연임 가능하며 이 경우 4년까지만 연장할 수 있습니다.

 

한번 권좌에 오르면 올림픽 개최지 선정을 비롯하여, 실질적 IOC위원 추천 임용권, 올림픽 훈장대상자 추천 등 주어진 권한을 행사하며 계보도 형성하여 차기는 물론 후계 구도까지 구상하여 장기간 영향력 행사를 할 수 있는[세계스포츠대통령]또는[스포츠 계 교황]이라고 불리어도 손색이 없는 것입니다.

 

 

 

국제 스포츠 계는 206개국이 운집한 만큼 대륙 별,언어 권 별 블록(block)경쟁도 치열하기 마련입니다.

 

Samaranch IOC위원장시절엔 속칭 라틴마피아(Latin Mafia)라고 불리는 “Juan Antonio Samaranch-Mario Vazquez Rana(멕시코/작고/ 作故:IOC집행위원 겸 ANOC회장 겸PASO회장역임/장기집권)-Joao Havenange(브라질/작고/作故:전FIFA회장 겸IOC종신위원)-Primo Nebiolo(이태리/작고/作故:IOC위원 겸 국제육상경기연맹/IAAF회장 겸 하계올림픽국제연맹연합회(ASOIF)회장 겸 국제대학생스포츠연맹/FISU회장역임)라인으로 이어지는 막강한 국제스포츠 계 세력(Power Bloc) 으로 당시 전 세계스포츠 계를 석권하다시피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이에 맞서 앤 공주(Princess Royal)(영국IOC위원-Anita DeFrantz/미국여성IOC위원-Dick Pound(캐나다IOC위원-Kevan Gosper(호주 IOC위원)등이 주축인 Anglo Saxon파가 한 축을 이루었습니다.

 

 

 

 

 

당시 故 김운용(한국:IOC부위원장 겸 GAISF회장 겸WTF총재 겸 KOC위원장 역임)-Keva Mbaye(작고/作故: 세네갈IOC위원 겸 IOC법사위원장)등이 대표하는 제3세계 파가 또 다른 축을 이루었습니다.

 

 

 

 

 

(故 김운용 IOC부위원장과 함께)

 

 

 

Vitaly Smirnov(러시아: IOC부위원장 및 ROC위원장역임/ IOC명에위원)와 동구권을 중심으로 한 러시아 계 마피아 등 4개 권역이 형성된 바 있었습니다.

 

 

 

 

 



물론 당시 러시아 마피아 계는 故 김운용박사가 수장역할을 했던 제3세계에의 동조내지 연합세력으로도 볼 수 있었습니다.

 

2001년 21년 간 화려한 황금기를 끝낸 Samaranch위원장의 후임에는 막판 벨기에의 서유럽 간판스타인 Jacques Rogge후보를 지지한 당시 집권Samaranch 위원장의후광에 힘입어 미국의 Anita DeFrantz, 헝가리의 Pal Schmitt, 캐나다의 Richard Pound, 특히 가장 어려운 난공불락으로까지 여겨졌던 한국의 故 김운용 후보를 넘어 Jacques Rogge후보가 제8 IOC위원장으로 등극하여 벨기에는 역대 2명의 IOC수장을 배출한 국가가 되었습니다.

 

 

 

 

(좌로부터: Jacques Rogge, Un-Yong KIM, Thomas Bach)

 

 

(Jacques Chirac프링스대통령과 IOC평가위원자격으로 Elysee대통령 궁에서 악수하고 있는 필자)

 

 

 

 

2013년 차기 IOC위원장으로 거명되어 국제 스포츠 계에 회자(膾炙)되는 후보로는 당시Thomas Bach IOC부위원장(DOSB: 독일 올림픽체육회장 겸임), Richard Carrion 당시 IOC집행위원(푸에르토리코: IOC재정위원장), Ser Miang NG 당시 IOC집행위원(싱가포르), Nawal El Moutawakel 모로코 IOC집행위원(여성) Rio2016 올림픽 IOC조정위원장, Sergey Bubuka 우크라이나 IOC위원(IOC선수위원장 및 IOC집행위원 역임)등이 포진하여 경합을 벌인 바 있었습니다.

 

 

 

 

 

 

2013 BuenosAires개최 IOC총회 6명후보가 IOC위원장으로 출마한 투표경합결과 결국 Thomas Bach 후보가 제9 IOC위원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2013년 당시 IOC위원장 경합 비방 전으로 전운이 감돌기도 했습니다.

 

당시 Denis Oswald 스위스 출신 IOC위원장 후보는 IOC윤리위원회로부터 견책/경고(a reprimand/warning)를 받기도 하였습니다.

 

2013910(현지시각 911)예정된 제 9 IOC위원장 선거를 앞두고 제125 IOC총회가 열리고 있는 부에노스아이레스 현장에서는 전운마저 감돌았던 당시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당시 Oswald 후보는 스위스 라디오와의 인터뷰에서 동료 IOC위원장 후보인 독일의 Thomas Bach를 비판한 내용이 밝혀져 경고를 받은 것입니다.

 

 

 

(Denis Oswald)

 

 

IOC윤리위원회(Ethics Commission) Oswald에 대하여 행동강령(the rules of conduct) 규약을 상기시켜 준 바 있었습니다.

 

IOC 여성대변인에 의하면, Oswald후보가 의도한 것 이상의 것을 언급하였으며 그 자신도 IOC에 유감을 표명하였다(Mr. Oswald admitted that he said more than he had intended to and expressed his regrets to the IOC.)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

 

이러한 사태는 스위스 ARD 라디오 팀 2명의 리포터들이 IOC에 알려줌으로써 제기 되었었는데 해당 발언 기록과 번역본(a recording and a translation)을 제공한 바 있습니다.

 

6명의 후보가 난립한 가운데 Thomas Bach후보가 선두주자(front-runner)로 알려지고 있었던 것은 주지의 사실이었습니다.

 

 

 

스위스 라디오에서 제공한 전역 본 인터뷰 내용을 보면 Oswald후보는 "IOC위원들이 스스로 선택을 해야 할 것이며 몇몇 IOC위원들은 쿠웨이트와 Bach 간의 공약을 좋아하지 않는다"(IOC members have to make their choice and some don’t like the commitment between Kuwait and Bach.)라고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A cartoon in a Spanish newspaper lampoons the Bach-Ahmad connection. (Bach-Ahmad 연결고리를 한 스페인 신문이 풍자 문으로 만화까지 삽화로 그려 보도하기도 하였습니다/출처: 당시 스페인 일간지)

 

 

OCA회장과 ANOC회장 직을 맡고 있는 Sheikh Ahmad 쿠웨이트 IOC위원이 당시Bach IOC위원장후보를 향한 지지 설은 이미 잘 알려진 이야기라고 보도한  바 있었습니다.

 

Oswald 후보는 독일 정치권당국으로부터의 압력은 무시될 수 없으며 어떤 이들은 이것이 민주적인 인상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이것이 반대 효과도 동반할 수 있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Oswald added that pressure from German political authorities “can’t be ignored. Some think that this is not a impression of democracy. But this can have as well the opposite effect. But this can have as well the opposite effect.”)고 합니다.

 

IOC위원장 후보철회에 대한 의견을 묻는 질문에 Oswald 후보는 "확실하게 Thomas Bach를 선호하지는 않을 것이며 동일한 가치관이 상존하지 않는다. 그는 비즈니스 건들과 관련이 있는데 그가 대표하고 있는 기업들과의 계약을 성사시키기 위하여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고 있다. 그러한 방식은 내가 생각하는 방향이 아니다. 나는 어떤 모종의 연합에 의존하지 않고 스포츠 외에 것을 위해 자신의 지위를 사용하지 않는 독립된 후보를 원한다"(Surely not in favor of Thomas Bach. There are not the same values.” “He is involved in business matters. He takes advantage of his position in order to make contracts with companies he is (representing) ... That’s not the way I do imagine. I want an independent candidate who does not rely on certain alliances and who uses his position for nothing but sports.)고 자신의 입장을 피력하였던 바 있다고 합니다.

 


Bach
후보는 자국인 독일 TV다큐(documentary)프로그램으로부터 퍼부어지는 집중 공세에 몰려(under fire)있기도 한 바 있었습니다.

 

이 다큐 (documentary)프로그램은 영국 신문보도자료에서 간추린 수십 년 된 의혹을 저 인망 식으로 훑어내어(dredged up) 방영 보도하였다고 하는데 이러한 고발내용에는 Bach후보가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펜싱종목 경기에서 젖은 글로브(a wet gloves)를 사용함으로써 점수시스템(the scoring system)을 교란시켜(fool) 금메달을 획득했다는 익명의 혐의내용(an anonymous charge)도 포함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 바 있었습니다.

 

 

 

하지만 BachIOC위원장후보대변인은 이러한 혐의에 대해 "얼토당토않은 헛소리"(nonsense)라고 일축했었던 바 있었습니다

 

Richard Pound 캐나다 IOC위원은 그러한 공격들에 대하여 놀라워하지 않으면서 독일 DPA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선두주자로 달려가는 것 자체가 Bach후보를 다치게 할 수 있다고 한 바 있었습니다.

 

Pound자신도 2001년 제8 IOC위원장 선거 캠페인 당시 Jacques Rogge IOC위원장에세 패해 고배를 마시기도 한 후보들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Dick Pound)

 

 

여러분은 그런 문제점을 정확하게 안고 있는 어떤 사람을 보고 있는 것인데 끈질기게 선두주자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것의 불이익이란 모든 이가 다 당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다라는 것이다. 뒤에서도 옆에서도 다가오는 사람들이 있다"(You are looking at someone who had exactly that problem. The disadvantage of being persistently the front runner is that everybody comes at you. There are people who come from behind, from the sides.)라고 하면서,

 

2020년 올림픽이 Tokyo로 넘어갔고 2018년 동계올림픽도 한국의 평창 품에 안긴 점은 같은 아시아 대륙 후보들인 싱가포르의 NG와 대만의 Wu를 다치게 할 수도 있다고 암시한 가운데 한마디로 "아시아가 너무 많은 것을 독식하고 있다(too much Asia, too soon)"라고 묘사할 수 있는 상황이라고 지적하였던 바도 있습니다



한편 Ser Minag NG부위원장이 당시 8 (4 x 2)임기가 끝남으로 생긴 공석 한 자리에는 John Coates 호주 IOC집행위원이 단독후보로 출마하였고 만일 Thomas Bach후보가 IOC위원장으로 등극하면 부위원장 한 자리가 추가로 생길 수도 있는 상황이기도 하였습니다.

 

한 자리가 남은 집행위원 직에는 미국의 Anita DeFrantz위원(1986년 당시 IOC 부위원장 직 역임)과 말레이시아의 Tunku Imaran위원(2006년 당시 IOC 집행위원 역임) 그리고 캐나다의 Richard Pound(1978년 당시 IOC 부위원장 역이) 3명이 경합을 벌이고 있는 정황이었으며 결국 Anita DeFrantz 미국 여성 IOC위원이 선출된 바 있습니다.

 


*References:

-현장에서 본 스포츠외교론(윤강로 저)

-IOC 홈페이지

-insidethegames



 

Posted by 윤강로
스포츠 외교2018. 6. 27. 10:15

[Seoul 1988 and 평창2018 Comparative Analysis (비교분석) 영어Interview를 통한 서울올림픽30주년 올림픽 유산 7가지 재 조명 스케치 및 어록]

 

 

1. What are your main memories of Seoul 1988? (서울올림픽에서 주로 기억에 남는 것은?)

 

 

 

 

 

 

1) First thing that comes to mind is overall drastic change of city landscape; (첫 번째로 생각나는 것은 서울시 조경이 전반적으로 확~바뀌었다는 것)

 

 

(1) Construction of Seoul1988 City Express way(서울올림픽 도시고속도로 건설/”서울올림픽유산 제1”)

 

 

(2) Han River Beautification job (한강 개발과 경관조성 및 치장/”서울올림픽유산 제2”)

 

 

 

(3) A large scale of overall Construction of Seoul Olympic Village Apartments and Olympic Family Apartments and Media Village Apartments used as Accommodation of Athletes, Olympic Family and Media people from around the world, which created a huge domestic construction and related industry activation including job offering opportunities (서울올림픽선수촌, 올림픽 패밀리 및 미디어촌 숙소용도로 대 단지 복합아파트 건설-국내 건설 및 부대산업경기활성화와 일자리창출기회 제공/”서울올림픽유산 제3”)

 

 

 

 

 

 

(4) Creation of Korean version of Hyde Park called “Seoul Olympic Park” which proved to be an optimal and outstanding choice as multi-purpose in-town citizens park for leisure and recreation and get-together landmark-legacy of Seoul 1988 Games(한국판 Hyde Park으로 손색이 없는 서울올림픽공원조성은 서울시민 레저-레크리에이션 등 다 목적 시민공원으로 쾌적하고 최적의 발상이며 서울올림픽유산 제4로 자리매김)

 

 

 

 

 

 

 

 

 

 

(5) In the same perimeter are located not only Seoul Olympic Youthhostel which later upgraded as Seoul Olympic Parktel, but also SLOOC HQs. buildings have become a permanent home of KOC and NFs concerned as well as the main office of Seoul Olympic Sport Promotion Foundation which became a living legacy goose that lays a golden financial eggs to the Korea’s sport. (같은 지역 반경 내에 조성 및 건설된 서울올림픽 유스호스텔은 추후 서울올림픽 파크텔로 격상되었으며 또한 조직위원회 건물은 체육진흥공단 본부 겸 KOC와 국내경기단체들의 보금자리로 자리매김하여 또 다른 올림픽유산인 동시에 국민체육진흥공단은 한국스포츠발전에 황금알 낳는 거위로써 재정적 기여를 하고 있음/”서울올림픽유산 제 5”)

 

 

 

(서울올림픽기념 국민체육진흥공단-KSOC대한체육회-각 가맹경기단체-서울올림픽 기념관/박물관)

 

 

 

(6) Korea National Sport University abbreviated as KNSU was also created just in the vicinity of Seoul Olympic Village Apartments area to give a boost and systematic support as upbringing efforts by the government for sport-oriented students as well as Korean athletes to get properly educated. This is another Living Legacy of Seoul 1988.(KNSU가 약자인 한국체육대학 엯 서울올림픽선수촌 인근에 정부주도의 국립대학으로 설립되었으며 설립목적은 체육지망학생들과 국가대표선수들에게 학업병행기회제공인데 이 또한 서울올림픽의 유산 제6로 자리매김함)

 

 

 

 

 

 

 

2) Second of all, home soil athletes showcased their brilliant performances at the Games, having achieved world’s 4th place in overall Olympic medal tally. (두 번째로, 개최국 안방선수들은 현란한 경기력을 발휘 총 금메달획득 순위 종합4위 달성)

 

 

3) Third of all, KBS TV as Host Broadcaster had secured and owned an IBC building, after the Games, which was constructed from the financial subsidy of one third of the total TV rights revenues for the Seoul Games. KBS have used this IBC building as its annex broadcasting complex all along the way. This is another living legacy of the Games. (세 번째로, 주관방송사인 KBS TV는 내내 서울올림픽 중계권료 총액 1/3에 해당하는 보조금으로 건립된 국제방송센터 빌딩을 KBS 방송사 옆에 별관복합시설로 건설하여 올림픽기간 대회 후 소유 활용하게 됨으로 서울올림픽 유산 제7로 기록됨)

 

 

(서울1988 올림픽 당시 국제방송센터<IBC>로 건립되어 KBS별관으로 올림픽 유산이 되었음)

 

 

 

2. Why do you think the Seoul 1988 Games were so successful? (서울올림픽이 그렇게 성공적이라고 생각하는 이유?)

 

 

1) First of all, at those times, the IOC and the global Olympic Movement had critically suffered in the wake of continued nightmares of three consecutive previous Games, which I call that boycott-plagued phenomenon as 3 M syndrome, namely Munich1972, Montreal1976 and Moscow1980. (첫째로, 그 당시 IOC 및 글로벌 올림픽운동은 1972년대회부터 보이콧이 팽배한 3M<Munchen1972-Montreal1976-Moscow1980> 신드롬의 3연타석 악몽으로 심각한 고난의 여정으로 타격을 받고 있었음)

 

 

2) In addition, LA1984 had also been affected and tarnished by Soviet-bloc boycott in retaliation of the US-Western bloc countries boycott of the Moscow1980. (게다가 LA1984올림픽 역시 Moscow1980미국 등 서방국가들의 보이콧에 대하여 소련 동구권 블록의 집단 보복 보이콧 영향으로 얼룩짐)

 

 

3) However, Seoul1988 was participated by 159 countries both from the East and West of the world, culminating the global Olympic Movement. (하지만 4년 뒤인 Seoul1988올림픽은 동서 양 진영에서 159개국이 참가함으로써 글로벌 올림픽운동의 최고점을 시작하는 분기점이자 전환점이 되었음)

 

 

4) The Seoul 1988 Games triggered the historic Reform and Openness (Perestroika and Glasnost by Gorbachev) resulting the 11 CIS countries independent from Soviet Union three years later in 1991. Therefore, on the basis of the evaluation of such tremendous contribution as described above, the Seoul Olympics deserves the Nobel Peace Prize as an eligible and creditable candidate on a retrospective basis. (서울올림픽은 Gorbachev당 서기장의 결단으로 소련의 역사적 개혁과 개방정책을 촉발하는 계기를 마련해 줌으로 3년 후 소련위성국가 11개가 독립국가연합으로 독립을 쟁취하게 하는 국제정치사의 큰 획을 그었음-à기여도 평가에 근거하여 소급하여 적용될 노벨 평화상 후보로 손색이 없음)

 

 

 

5) The Seoul 1988 Games was also instrumental, as catalyst, in breaking down the wall of Brandenbrug Gate in Berlin, thus prompted the reunification of Germany in 1989. (서울올림픽은 독일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장벽을 무너뜨리게 하는 데 촉매제로 작용하여 대회 1년 후인 1989년 독일통일을 촉진한 바 있음)

 

 

6) Following the resounding success of global marketing in LA1984, the Seoul 1988 Games was the frontrunner to create the global TOP marketing program by the IOC thanks to its sustainable marketing success. (LA1984올림픽에서 반향을 일으킨 글로벌 마케팅 성공 후, 서울1988올림픽은 지속가능 한 마케팅 성공덕분에 IOC가 시동을 건 글로벌 TOP마케텡 프로그램 창출 선두주자가 되었음)

 

 

 

7) The Seoul Paralympic Games played a pivotal role in co-staging the Olympics and Paralympics together at one site at interval ever since. (서울 패럴림픽 대회를 기점으로 올림픽과 패럴림픽이 간격을 두고 한 장소에서 공동으로 개최되도록 정착하는데 중추적 역할을 하였음)

 

 

 

3.  The Summary of Highlights of the Seoul 1988(서울올림픽 하이라이트 요약)

 

 

1)  “Let’s paint the town red” was the nationwide campaign (Seoul Olympic campaign code)(서울올림픽 캠페인 코드로써 개최지역을 파티분위기로 고조시키자를 근간으로 거국적 캠페인이 벌어짐)

 

*The whole-she-bang(몽땅~ 싸그리 다~)

 

 

2)  It was a Korean version of “Perestroka and Glasnost” by Gorbachev in the democratization process. (서울올림픽은 고르바초프에 의한 개혁과 개방 한국판 한국 민주화 과정에 기여함)

 

 

*I don’t want to make the story complicated at this delicate situation.(이러한 미묘한 시점에서 이야기를 복잡하게 하고 싶지 않음)

 

 

3) Tug-of-War between South and North Koreas (남북한 간의 줄다리기 협상의 현장)

 

 

4) Seoul Olympics played a crucial role as Korea’s democratization-oriented humidifier. (서울올림픽은 한국의 민주화 지향 가습기로써 중차대한 역할을 수행하였음)

 

 

5) With the OWG PC2018 successfully completed, let’s brush up your knowledge about the fascinating ice and snow disciplines. (평창2018 의 성공적 개최와 함께, 환상적인 설상과 빙상종목에 대한 지식을 탐구해 봅시다)

 

 

6) We started with short track speed skating, the thrilling combination of speed, agility and tactics. (스피드, 민첩함과 전술이 긴박감 있게 조화되어 펼쳐진 쇼트트랙 스피드스케이팅 경기로 시작하였음)

 

 

8) In other words, Summer’s gone and Winter has come. (달리 표현하면, 여름<서울올림픽>은 가버렸고 겨울<평창동계올림픽>이 다가온 것임)

 

 

9) Howard Cosell once said, only 60 nations--------but, after the Games, Korea had diplomatic relations with over 160~170 nations (미국 TV 명 평론가였던Howard Cosell이 언급하기를, 겨우 60개국과 수교하던 한국이었지만 서울올림픽 이후 160~170개 국가들과 외교관계를 맺게 되었음)

 

 

(미국 ABC 명 논평가 Howard Cosell과 함께 미국 Alabama 주 소재 United States Sports Academy 시상식 행사 후)

 

 

10)      Seoul1988 has changed the international political landscape. (서울올림픽은 국제정치 판세를 확 바꾸어 놓았음)

 

 

11)      Potential diplomatic clients were reserved for establishment of diplomatic relations through Seoul 1988. (잠재적 외교적 대상국가들이 서울1988올림픽을 통하여 외교관계수립을 잉태한 셈이었음)

 

12)      the wizard of OZ/ Magician (오즈의 마법사)

 

13)      Particularized Technology Agreement (특화된 기술 협정)

 

14)      Winston Churchill once said:

 

“Now this is not the end. It is not even the beginning of the end. But it is, perhaps, the end of the beginning.” (지금, 이것은 끝이 아님- 그것은 끝의 시작조차도 아님-하지만 아마도 시작의 끝자락 정도일 것임)

 

 

15)      로마시대 삼두정치 집정관 Crassus의 명대사 어록 중에서

 

“Past cannot be altered. (과거는 바꿀 수 없다)

 

Present holds but regret and loss. (현재란 붙들고는 있지만 후회와 상실감뿐)

 

It is only in the days to come that a man may find solace… when memory fades.” (Spartacus// Marcus Crassus)(사나이가 위안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기억이 가물가물해 질 때 다가올 세월에서 한 가닥 위안을 찾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16) Thomas Bach IOC위원장의 어록 중에서

 

“Like no other human activity, sport has the power to unite people, regardless of background, culture or belief…’ (인간의 다른 어떤 행위와 달리, 스포츠는 서로 다른 배경이나 문화 또는 믿음과 상관 없이 사람들을 결속시킨다)

 

 

Posted by 윤강로
스포츠 외교2018. 6. 26. 12:12

[독일출신 Fendt 국제루지연맹(FIL)회장 7연속재선 기염을 토하다]

 

최근 616Slovakia Brastislava개최 제 66FIL총회에서 독일출신 Josef Fendt FIL현회장이 단독후보상태에서(after standing unopposed) 7번 째 임기를 채우는 FIL회장으로 공식 연속재선(officially re-elected for a seventh term as President of the international Luge Federation) 되었다고 합니다

 

(Josef Fendt FIL 7선 회장/출처: insidethegames)

 

 

Latvia출신 Einars Fogelis가 은퇴하는 FIL사무총장 Svein Romstad후임으로 선출되었습니다.

 

 

(Svein Romstad 은퇴 FIL사무총장과 Josef Fendt 7 FIL회장)

 

 

이태리 출신 올림픽 2관왕인 Armin Zöggeler는 경쟁후보인 캐나다 출신 Walter Coryfmf 21:12포차로 누르고 FIL기술담당 부회장(vice president for technical affairs)으로 선출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러시아 루지연맹회장인 Natalia Gart(여성)는 오스트리아 출신 경쟁후보인 Peter Knauseder에게 패하여 천연트랙(natural track)담당부회장 출마에 실패하였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그녀는 FIL집행위원회 위원자리는 유지한 것(retain her place on the FIL Executive Board )으로 알려졌습니다

 

 

미국출신 Dwight Bell 역시 FIL집행위원회 위원으로 추가 선출되었다고 합니다.

 

 

Austria's Peter Knauseder was elected as FIL vice-president for natural track at the world governing body's Congress in Bratislava, beating his Russian rival Natalia Gart ©FIL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천연트랙담당 FIL부회장으로 선출된 Peter Knauseder/출처: FIL홈페이지)

 

 

 

Fendt 7선 회장은 국제아이스하키연맹(IIHF) Rene Fasel회장에 이어 두 번째 최 장수 동계 스포츠국제연맹회장이 되었다(the second longest-serving Winter International Federation President behind International Ice Hockey Federation (IIHF) head René Fasel)고 합니다

 

 

이들 두 명은 모두 1994년에 각각 해당국제연맹회장으로 선출되었지만, Fasel IIHF회장의 경우 Fendt FIL회장 공식취임에 며칠 앞서 IHHF회장에 등극한 것(Fasel was elevated to IIHF President a few days before Fendt took official charge at the FIL)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2008년 베이징개최 ANOC총회에서 필자ANOC공로훈장 수여 후 축하기념사진/좌로부터 필자, Rene Fasel)

 

 

 

최근 FIL 7선회장이 된Fendt의 경우 1994 2월 오스트리아 출신 초대회장인 Bert Isatitsch 가 예상치 못한 사망이래 75세가 되도록(whose latest term will take him towards his 75th birthday) FIL을 이끌어 왔다고 합니다.

 

 

사망한 Isatitsch 초대 회장의 경우 1957 FIL창설 때부터 사망할 때까지 총 37년 간 동안이나(for a total of 37 years, from its creation in 1957 through to his death) FIL회장 직을 수행했다고 합니다.

 

 

Fendt회장은 Innsbruck 1976 동계올림픽 루지 남자 싱글 종목 은메달리스트이며 독일 Königssee에서 두 번 개최된 1970년 및 1974년 세계선수권대회 2관왕이기도 합니다.

 

 

필자는 2000년 대 초반 평창동계올림픽유치의 일환으로 대한루지연맹 창설 사무총장으로 FIL에 등재된 이래 FIL관계자들과 인맥을 유지하여 온 바 있습니다

 

(Joset Fendt FIL회장과 함께)

 

 

*References:

-insidethegames

-FIL홈페이지

 

Posted by 윤강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