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과 마음씀2022. 1. 26. 15:54

[우리들교회 2022123일 주일설교말씀요약(사도행전 21:37~ 22: 1/ 성령의 허락)]

 

 

 

<사도행전(21:37~22:1)>

 

37. 바울을 데리고 영내로 들어가려 할 그 때에 바울이 천부장에게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 말할 수 있느냐 이르되 네가 헬라 말을 아느냐

38. 그러면 네가 이전에 소요를 일으켜 자객 사천 명을 거느리고 광야로 가던 애굽인이 아니냐

39. 바울이 이르되 나는 유대인이라 소읍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 시의 시민이니 청컨대 백성에게 말하기를 허락하라 하니

40. 천부장이 허락하거늘 바울이 층대 위에 서서 백성에게 손짓하여 매우 조용히 한 후에 히브리 말로 말하니라

1. 부형들아 내가 지금 여러분 앞에서 변명하는 말을 들으라

 

<Prologue>

 

성령의 실상은 아스팔트와 같아서 내 실상이 아무리 힘들어도 그것이 성령의 실상이 되면 떨어지지 않는 사랑이라고 했다. 사랑하면 오래 참고 온유하게 된다. 매사에 나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을 위해서 이제 겸손히 허락을 구하게 된다. 우리가 목장에서 물어보는 것이 허락을 구하는 태도이고 목장은 정말 여러 가지고 시금석 같고 너무도 유익한 공동체이다. 그래서 여러분의 실상을 알 수 있고 그리고 내가 너무 목장을 싫어하면서 싫은 사람 만나는 연습을 하게 된다. 그래서 사회생활에 아주 지대한 공을 세우는 것을 보게 된다. 그래서 그냥 똑똑한 사람의 처방 때문에 가는 게 아니라 겸손하게 물어보는 것 때문에 하나님은 지나고 보니 곳곳에 엄청나게 성령의 허락을 하셨다. 그래서 오늘은 성령의 허락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겠다.

 

1.   딱 맞는 그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37~38)

 

37. 바울을 데리고 영내로 들어가려 할 그 때에 바울이 천부장에게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 말할 수 있느냐 이르되 네가 헬라 말을 아느냐

38. 그러면 네가 이전에 소요를 일으켜 자객 사천 명을 거느리고 광야로 가던 애굽인이 아니냐

 

바울입장에서 이때가 얼마나 긴박한 순간인가? 결례를 행하다가 갑자기 일어난 소동으로 온 무리가 달려들어 때리고 없이하라 죽이라 하며 쇠사슬로 결박하여 끌려가는 데도 유대인들이 달려들어 폭행을 당하고 군사들에게 들려가면서 죽을 수도 있는 순간, 안토니아 요새로 들어가려는 바로 그 때이다. 

 

치외법권 지대가 되었으니까 소리를 지르고 억울하다고 결백을 주장하려고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때 죽어가던 바울의 첫마디는 내가 당신에게 말할 수 있느냐 하고 허락을 구한다. 자기는 지금 말할 자격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태도로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군중은 허락 없이도 자기 맘대로 소리를 지르면서 자기들도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이 말, 저 말 자기 말만 한다. 어떤 사람은 분노, 불안해서 떠들어댄다. 군중심리는 너무 무서운 것이다. 우리 교회는 자기 죄를 보는 하나님의 군대이다. 군중이란 수가 많고 적어서가 아니다. 바울은 혼자라도 하나님의 군대로 나가고 있기 때문에 성령님이 곳곳에서 안아 주시고 허락하시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물론 공동체를 무시하는 혼자가 아니고 어쩔 수없이 복음 때문에 박해당해서 혼자인 것이다. 혼자라도 군대인 사람이 있고 군중 속에도 혼자인 사람이 있다. 이것을 잘 분별해야 한다. 바울은 왜냐하면 성령의 경영에 따라 사명의 길을 말씀으로 인도함 받으면서 성령의 작정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순종하며 나갔다.

무엇을 경영했냐 하면 표면적으로는 이방 교회가 헌금한 부조를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하기 위해서 왔다. 그러나 더 중요한 근본적인 목적은 이방교회와 예루살렘 교회의 일치와 화합을 위해서 왔는데 더 중요한 것은 내 동족 예루살렘에 아직도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대적하는 유대인들에게 그 뿌리를 잊지 않고 복음을 전할 기회를 한 번이라도 얻기 위해 그 엄청난 헌금을 들고 와서 생색을 내지 않고 헌금을 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복음이 들어가는 과정을 이 상황을 어떻게 만드셨나? 많은 장로들의 박수를 받으며 설교 강단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오해 받고 누명 당하며 심지어 결박 당한 상황에서 죽음에 직전까지 가는 상황을 만드시고 그것도 부족해서 마지막까지 허락을 구하는 자리까지 이끄셨다. 이처럼 성령의 경영으로 구원을 향한 목적의 애통함을 가졌기 때문에 바울은 입을 다물어야 할 때와 열 때를 너무 알아볼 수 있었고 딱 맞는 때가 언제인지 분별할 수 있었다. (목적의 애통함이 있을 때 입을 열어야 할 때와 닫아야 할 때를 구별하는 성숙이 생긴다.) 성난 군중에게 공격을 받을 때는 십자가의 길을 앞서 가신 예수님과 스테반을 따라서 묵묵히 입을 다물고 고난을 받아냈다. 가만히 있으면 위협이 멈추게 될 이 때, 오히려 바울은 입을 열고 말한다. 항상 하고 싶은 것을 거꾸로 하면 그것이 적용이고 내가 잘 모를 때 너무 하고 싶은 것을 거꾸로 적용하면 맞다. 그러면서 정중한 요청을 강조한 단어로 바울이 내가 당신에게 말할 수 있느냐고 천부장에게 물었다. 정통헬라어를 구사하는 모습에 놀라서 감탄형으로 말했다. 한 단어 한 단어가 너무나 정중한 겸양의 말이며 배려를 요청하며 허락을 구하는 단어들이다. 발음과 억양이 수려한 헬라어였고 아테네 식에 가까웠던 것 같다. 변방인 예루살렘에서 도시의 소요를 일으킨 주범이 정통헬라어를 구사하는 것에 대해서 천부장이 너무 놀라서 감탄문으로 썼다. 천부장은 로마의 공을 세우기 위해 바울을 잡으러 갔다. 바울은 이 질문을 받을 때까지 기다린 것이다. 이 때로 바로 딱 맞는 그 때인 것이다. 그래서 기다려야 된다. 큐티하고 목장 나가고 물어보면 그것이 기다리는 것이다.

 

(적용#1) 혼자라도 군대인가? 군중 속에 혼자 인가? 가족의 구원을 위해 딱 맞는 그 때를 경험한 적이 있나?

 

구원을 위해서 지금 말해야 한다. 내일은 없다. 구원을 위해 지금이 딱 알맞은 때이다. 지금 안 되면 안 됨을 경험을 했기 때문에 어디든지 가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있다.

 

2.   (오해 때문이 아니라) 구원 때문에 공손함과 단호함의 말로 부탁해야 합니다. (39)

 

39. 바울이 이르되 나는 유대인이라 소읍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 시의 시민이니 청컨대 백성에게 말하기를 허락하라 하니

바울은 유대인의 배신자 이자 성전을 더럽힌 죄인으로 낙인이 찍히고 반군의 우두머리로 오해 받았다. 억울한 오해를 받으면 마음이 급하기 때문에 일단 부인하기 바쁘다. 그리고 바쁘게 부인하다 보면 화가 쌓이고 억울하고 화를 낸다. 부인하고 분노하는 것이 오해에 대해 내기 쉬운 대응이다. 부인(denial)과 분노(anger)로 대응을 하면 오해는 절대로 풀리지 않는다. 그런데 바울은 반군 지도자라는 오해에 억울하다고도, 하소연도 화도 내지 않는다. 단순하지만 분명하게 나는 유대인 이라고만 한다. 길리기아의 다소 시 시민이라고 한다. 당시 세계지도에 대한 기록을 남긴 스트라보에 따르면 다소는 아테네와 알렉산드리아를 능가하는 교육도시였다. 로마의 초대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스승이자 조언자였던 아테네 도로스가 다소 출신이다.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아우구스투스가 자신에게 공개적으로 직언할 권한까지 주었을 만큼 대단한 현자였다. 그 조언 중에 사람이 화내기 전에 알파벳을 외우라고 했다. 바울이 소읍이 아닌 다소 시민이다. 유대인, 길리기아 다소시민이라는 단어 몇 개로 바울은 천부장의 오해를 싹 풀었다. 이어서 바울은 다시 공손히 부탁을 한다. 매우 정중한 말로, 반복적 의미를 갖는 현재형으로 거듭해서 부탁을 한다는 뜻이 있다. 그러면서도 허락해 달라는 부정과거의 시제를 쓰면서 딱 한 번만 허락해 달라는 단호한 의지로 분명하게 피력했다. 바울은 천부장에게 최대한 예의를 갖추고 있지만 백성을 위해서 공손과 단호함이 공존하는 부탁을 했다. 공부한 것이 이렇게 적재적소에 빛이 발휘되어 천부장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선교나 목회를 하려면 언어가 절대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저야말로 어떻게 여기까지 왔나 싶지만 생각해보면 베드로와 열두 사도도 다 헬라어를 잘 못했다. 헬라어를 못해서 복음을 못 전한 것은 아니다. 은사가 다르다고 생각을 해야겠지만 언어를 잘하면 참 좋겠다는 생각은 있다. 바울이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성경을 원어로 다 읽고 알아도 구속사를 읽지 못하면 무엇이 중요한지 숨결을 느끼기는 어렵다. 그래서 무조건 성령을 받아야 한다. 빌립보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바울이 억울한 상황에서도 로마시민이란 특권을 쓰지 않았는데 이것은 유대인들이 복음을 들을 기회를 막기 때문이었다. 천부장이 알아들었다. 말을 많이 해야 알아듣는 것이 아니다. 자랑질을 할 때도 안 할 때도 있다. 구원 때문에 때를 안다. 바울이 오직 예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왔는데 유대인에게 복음 전할 기회를 놓칠까 봐 특권을 쓰지 않고 참았다.

 

십자가는 지혜이고 타이밍이다. 십자가로 주시는 구원에 초점을 맞추어야 지혜가 생기고 가장 좋은 타이밍을 분별할 수 있다. 그러나 모두들 내 감정, 내 자존심이 제일 중요하니까 오해를 받으면 화부터 내고 정작 해야 할 말은 하지도 못하고 오해만 커진다. 말씀에 의거해서 성령의 실상을 깨닫고 그 실상을 증언하고자 하면 딱 맞는 말을 할 수가 있고 오해가 저절로 풀린다. 말을 할 때와 안 할 때를 분별해야 지혜롭고 세련되어진다. 이것을 분별하지 못하면 사람들에게 다 상처를 준다. 성령의 허락은 오해가 풀리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복음을 전할 기회를 통한 구원이 목적이다. 성령의 허락을 받기 위해서 공손히 그러나 단호히 부탁해야 될 때가 있다.

 

40. 천부장이 허락 하거늘 바울이 층대 위에 서서 백성에게 손짓하여 매우 조용히 한 후에 히브리 말로 말하니라

 

폭동과 반란의 위험이 큰 예루살렘에서 그리고 세계 각처에서 많은 유대인이 몰려드는 이 명절에

천부장의 모든 관심은 예루살렘 도시의 안전인데 지금 소요가 일어났다. 사태를 빨리 진정시키는 것이 천부장의 할 일이고 소요의 주인공이 바울이므로 바울과 군중을 분리시키는 것이 천부장으로서는 가장 시급한 행정관리로서 할 일이다. 그런데 바울이 군중에게 말할 기회를 달라고 한다. 그런데 그 부탁을 들어주는 일이 천부장에게는 작은 일이 아니었다. 위험을 감수해야 했고 우선순위를 바꾸어야 했던 일이다. 그런데 천부장이 들어줄 책임이나 필요가 전혀 없었다. 그런데 천부장이 바울의 부탁을 허락했다. 정말 인간의 예상을 뛰어넘는 성령의 허락을 주신 것이다.

바울이 구원을 최고의 목적으로 놓고 백성을 애통한 마음으로 대하고 천부장 또한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로 존중하며 공손히 대하니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성령의 허락을 내리신 것이다.

권세가 아닌 말씀을 전할 카리스마가 있어야 한다.

유대인들이 듣도록 히브리어로 말한다. 유대의 종교와 전통과 문화를 부정한다는 오해를 받고 있어서 정통 히브리 아람어와 고대 방언이 아닌 현재 쓰는 히브리어로 알아듣도록 그들의 눈높이에 맞춰서 말했다.

 

1. 부형들아 내가 지금 여러분 앞에서 변명하는 말을 들으라

 

“부형들아”는 스테반(사도행전 7 2)이 처음 사용했다. 나를 죽이려고 하는 유대의 모든 사람들을 최고로 존경하면서 아버지와 형제, 상대를 높여 부르는 말. 자기를 죽이려고 했던 유대인들을 미워하지 않고 제발 돌이키려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부형들아 하고 불렀다. 스테반과 주님을 기억하는 유대인들의 눈높이에 맞추려는 바울의 노력이었다. 보통 섬세하고 예민한 것이 아니다.

 

(적용#2) 오해를 방을 때 외면하나? 부인하나? 화를 내나? 구원을 위해 공손함과 단호함이 균형을 이루고 있나? 성령의 허락을 위해 지혜, 타이밍, 눈높이를 맞추는 것 중에 무엇이 안 되나?

 

3.   억지로 총칼로 받아내는 것이 아닙니다(37~38)

 

37B. 이르되 네가 헬라 말을 아느냐 38. 그러면 네가 이전에 소요를 일으켜 자객 사천 명을 거느리고 광야로 가던 애굽인이 아니냐

 

당시 유대지방에서는 독립운동을 한다고 단검을 가지고 활동한 자객들이 많이 있었다. 이 자객들 중에 애굽 출신의 한 유명한 사람이 있었는데 A.D. 54년에 폭동을 일으켜 자신을 자칭 선지자(메시야)로 부르면서 자신의 추종자들을 감람산으로 데리고 가서 자신이 명령 한 번하면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진다고 했다. 그래서 로마의 압제로부터 유대를 구해낼 것이라고 하니까 많은 유대인들이 미혹되었다. 그래서 오순절 같은 이런 명절 때 로마의 교인들을 암살하고 로마편을 드는 유대인, 고위관리도 암살을 했다. 요세프스의 기록에 보면 그 인구도 많지 않은 그 때 3만 명까지 그 수가 커졌고 결국은 로마의 벨릭스 총독이 이끌고 온 로마군에 의해 제압이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많은 유대인들이 처형당하고 투옥이 되었다. 그러자 이 애굽인은 4천명이나 데리고 광야로 잠적을 해버렸다. 이 애굽인에게 속은 많은 유대인들은 부모 형제가 죽으니 그 때부터 그 사람을 미워했다.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이런 이유로 바울이 유대인에게 몰매를 맞는 것을 보고 천부장이 그 애굽인으로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누구보다도 해방을 원했던 유대 민족은 로마 압제에서 구원해 주겠다고 하는 애굽인의 말 한마디에 그를 추종했다. 그리고 유다가 바벨론 포로로 갈 때도 예레미야가 포로로 가라고 말하는데 거짓 선지자 하나냐는 내가 바벨론 왕의 멍에를 꺾어 버리리라 하면서 예레미야 앞에서 큰 소리를 치니 사람들이 좋아했다. 그러나 하나냐는 7개월 후에 그냥 죽었다. 잠시 뒤를 모르고 해방시켜 주겠다고 하니 열광을 하고 쫓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무조건 고난은 싫다. 얼마나 좋으면 3만 명이나 따랐겠는가! 그러나 해방은 그렇게 총칼로, 돈으로, 권세로 얻는 것이 아니다. 우리 주님이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고도 죽어짐의 십자가를 길로 놓고 가셔서 온 인류를 구원한다는 것을 보여주셨지만 우리는 잠잠하지를 못한다. 무언가 날마다 실력행사를 해야 하고 다 죽여야 한다. 회개는 싫고 짠! 하고 총칼로 나의 고난에서 해방시켜 주시기만을 바란다. 사람이 이렇다. 지금도 삶에서 예배만 드리면 회개 하나도 안 해도 모든 것을 해결해준다고 하면 그냥 믿고 싶은 것 같다. 그냥 잘된다는 말 그 자체가 너무 좋은 것 같다. 그래서 로마를 죽이고 로마 편드는 사람을 죽이라고 한다. 암살단이 횡횡한 것이었다.

 

유대인들은 그 애굽인 지도자에게 당했지만 아이러니하게 로마 군인들이 유대인들을 위해 애굽인 지도자들을 제거해주었다. 가장 복음을 반대하는 자가 지금 동족이다. 그런데 이 때 도와주는 자가 로마이다.  그렇지만 후에는 로마가 또 전대미문의 박해를 하게 된다. 그런데 바울은 결국 로마에 의해서 순교를 당한다. 그런데 로마에 A.D.313년에 기독교가 국교가 되고 나서 중세의 암흑시대로 기독교에 정치가 들어가니 꺼 교황이 정치를 하고 왕들을 파문하고 성직을 매매하면서 가장 박해를 받을 때보다 더 악한 시대를 1000년이 넘도록 살게 하셨다. 이렇게 구속사를 모르니 역사도 모르고 10년 뒤를 몰라서 오늘 내 앞의 유익함과 잘된다고 하는 것 밖에 모르고 따진다. 바울은 자기를 죽이려는 유대인들의 복음을 한 번이라도 전하고자 하는 것이다. 아군과 적군을 구별 못하는 동족을 향해서 십자가를 길로 놓고 구원을 위해 말씀을 전했다. 그래서 악한 남편도 상사도 순종을 해야 되고 악법도 법이니까 따르는 것이 가장 애국자이고 가장 현처이고 현부인 것을 믿는가? 때가 되어 구원이 되면 그것이 최고의 애국 애족이고 가정을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 교회를 통해서 그 열매를 보여주고 있는데도 현실적으로 눈앞에서 무엇인가를 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1. 부형들아 내가 지금 여러분 앞에서 변명하는 말을 들으라

 

변명은 아폴로게오마이’(πολογέομααι)아포+로고스의 합성어이다. ‘아포 ~으로부터, ‘로고스는 말씀이다. 바울과 스테반이 간증을 하는데 자신을 변명하는 것이 아니라 스테반으로부터 들었던 구속사의 말씀으로부터 자신을 해명하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사건은 말씀으로 증거를 하는 것이다. 사실 바울은 스테반의 말을 제대로 듣지 않고 화를 내면서 죽이는데 앞장섰던 자신의 죄를 기억하고 회개하면서 제발 말씀으로 변명하고 간증하는, 말씀 듣고 돌이키는 한 사람 나오게 해달라고 성령의 허락을 구하고 있는 것이다.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함이다. 구원이 성령의 허락을 주시는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성령의 가장 큰 허락의 목적은 말씀을 들어달라고 허락을 구하는 것이다. 말씀을 들어달라고, 예배 한 번 오라고, 목장 한 번 오라고, 큐티인 한 번 들어달라고, 말씀 한 번 들어달라고 바울이 이렇게 옥에 갇히고 갖은 애걸복걸을 다하면서 말씀 한 번 들어달라고 허락을 구하는 줄 믿습니다.

 

(적용#3) 틀렸다고 총칼로, 권세로 억지로 허락을 받아내고자 함이 있나?

 

<Epilogue>

 

1)  매사에 나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을 위해서 이제 겸손히 허락을 구하게 된다.

2)  우리가 목장에서 물어보는 것이 허락을 구하는 태도이고 목장은 정말 여러 가지고 시금석 같고 너무도 유익한 공동체이다.

3)  목적의 애통함이 있을 때 입을 열어야 할 때와 닫아야 할 때를 구별하는 성숙이 생긴다

4)  구원을 위해서 지금 말해야 한다. 내일은 없다. 구원을 위해 지금이 딱 알맞은 때이다.

5)  억울한 오해를 받으면 마음이 급하기 때문에 일단 부인하기 바쁘다.

6)  부인(denial)과 분노(anger)로 대응을 하면 오해는 절대로 풀리지 않는다.

7)  성경을 원어로 다 읽고 알아도 구속사를 읽지 못하면 무엇이 중요한지 숨결을 느끼기는 어렵다.

8)  십자가로 주시는 구원에 초점을 맞추어야 지혜가 생기고 가장 좋은 타이밍을 분별할 수 있다.

9)  내 감정, 내 자존심이 제일 중요하니까 오해를 받으면 화부터 내고 정작 해야 할 말은 하지도 못하고 오해만 커진다.

10) 말씀에 의거해서 성령의 실상을 깨닫고 그 실상을 증언하고자 하면 딱 맞는 말을 할 수가 있고 오해가 저절로 풀린다.

11) 말을 할 때와 안 할 때를 분별해야 지혜롭고 세련되어진다. 이것을 분별하지 못하면 사람들에게 다 상처를 준다.

12) 성령의 허락은 오해가 풀리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복음을 전할 기회를 통한 구원이 목적이다.

13) 성령의 허락을 받기 위해서 공손히 그러나 단호히 부탁해야 될 때가 있다.

14) 구속사를 모르니 역사도 모르고 10년 뒤를 몰라서 오늘 내 앞의 유익함과 잘된다고 하는 것 밖에 모르고 따진다.

15) 때가 되어 구원이 되면 그것이 최고의 애국 애족이고 가정을 사랑하는 것이다.

16) 성령의 가장 큰 허락의 목적은 말씀을 들어달라고 허락을 구하는 것이다.

 

Posted by 윤강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