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교회 2021년 10월31일 주일예배말씀요약(사도행전 20: 1~ 12/ 성령의 안아 주심)
<사도행전 20:1~12>
1 소요가 그치매 바울은 제자들을 불러 권한 후에 작별하고 떠나 마게도냐로 가니라(When the uproar had ended, Paul sent for the disciples and, after encouraging them, said good-by and set out for Macedonia_
2 그 지방으로 다녀가며 여러 말로 제자들에게 권하고 헬라에 이르러(He traveled through that area, speaking many words of encouragement to the people, and finally arrived in Greece,)
3 거기 석 달 동안 있다가 배 타고 수리아로 가고자 할 그 때에 유대인들이 자기를 해하려고 공모하므로 마게도냐를 거쳐 돌아가기로 작정하니(where he stayed three months. Because the Jews made a plot against him just as he was about to sail for Syria, he decided to go back through Macedonia)
4 아시아까지 함께 가는 자는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 소바더와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와 더베 사람 가이오와 및 디모데와 아시아 사람 두기고와 드로비모라(He was accompanied by Sopater son of Pyrrhus from Berea, Aristarchus and Secundus from Thessalonica, Gaius from Derbe, Timothy also, and Tychicus and Trophimus from the province of Asia)
5 그들은 먼저 가서 드로아에서 우리를 기다리더라(These men went on ahead and waited for us at Troas)
6 우리는 무교절 후에 빌립보에서 배로 떠나 닷새 만에 드로아에 있는 그들에게 가서 이레를 머무니라(But we sailed from Philippi after the Feast of Unleavened Bread, and five days later joined the others at Troas, where we stayed seven days)
7 그 주간의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그들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On the first day of the week we came together to break bread. Paul spoke to the people and, because he intended to leave the next day, kept on talking until midnight)
8 우리가 모인 윗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는데(There were many lamps in the upstairs room where we were meeting)
9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 앉아 있다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 층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보니 죽었는지라(Seated in a window was a young man named Eutychus, who was sinking into a deep sleep as Paul talked on and on. When he was sound asleep, he fell to the ground from the third story and was picked up dead)
10 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그에게 있다 하고(Paul went down, threw himself on the young man and put his arms around him. "Don't be alarmed," he said. "He's alive!")
11 올라가 떡을 떼어 먹고 오랫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나니라(Then he went upstairs again and broke bread and ate. After talking until daylight, he left)
12 사람들이 살아난 청년을 데리고 가서 적지 않게 위로를 받았더라(The people took the young man home alive and were greatly comforted)
<Prologue>
사람이 안아주는 것도? 참 좋은데? 하나님이 안아주시는 거는 얼마나 더 흥분이 되겠습니까?
말씀 묵상을 해도 소동(uproar)과 요란함(noise and loudness)이 있기에 성숙해가는 과정 가운데 해석하는 만큼 안아주시는 것이 있습니다.
<말씀 요약>
1. 권면의 말씀으로 위로하십니다. (1-2절)
에베소 연극장 소동을 겪으며 온 도시가 교회의 적이 되어서 군중이 이 세상에서 젤 무섭더라구요. 하나님께서 서기장을 주셔서 진정이 되었지만 심리적으로 트라우마가 되었을 것 같아요. 언제든 타오를 준비가 되어 있는 군중이 있고요. 여러분들 가운데서는 진영 논리가 해석이 안 되는 거에요. 바울이 에베소 제자들을 불러 권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헬라어로 ‘파라칼레오’인데 ‘옆에 외치다 곁에 불러놓고 외치고 부르짖다’라는 뜻이다. 부모의 심정으로 끊임없이 내 이름 한 번 불러주고 내 현실을 한 번 들어주고 손 한 번 잡아주는 건데 보혜사 성령님은 ‘파라클레토스’라고 합니다. 그 안아 주심으로 바울도 제자들을 그렇게 안아 주었지만 바울도 자신도 ‘파라클레토스’를 권하러 그랬습니다. 바울은 우리와 다릅니다. 권하고 떠납니다. 바울의 관심은 소동에 있지도 않고 거대한 에베소에 있지도 않고 또 거대한 무리에 있지도 않아요. 제자의 뜻이 자발적으로 묶여 있는 사람을 뜻해요. 바울도 예수님도 보니까 참 죄인들의 무리인 군중에 뭘 집중하겠어요? 항상 소수에 집중을 합니다. 항상 한 사람에게 집중을 했잖아요. 자기가 전도했던 그 데살로니가 교회를 찾아가요. 매맞고 옥에 갇히고 칭찬과 인정이 아니라 모함과 외로움이었어요. 복음 때문에 사회로부터 무시와 경계와 비난의 대상이 된 그곳에 한 마디라도 더 전해서 그들을 위로하기 위해 여러 말을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에요. 정말 여러 말로. 전하고 또 전해왔고. 전하여 갈 것이에요. 코갓탤. 최성봉 형제는 참 우리에게 희망의 아이콘이었어요. 막 1억뷰를 했다고 하잖아요? 잠잠해지니까? 뭔가 콘텐츠가 없어지니까? 불안한 거에요. 그래서 말기 암이라고 거짓에 병원에 누워있고 그에게는 어마어마한 트라우마가 있었을 것이에요. 누구도 그 형제 옆에서 ‘파라칼레오’ 옆에서 같이 손 잡고 외쳐줄 사람이 없었겠죠. 성도의 삶은 말씀 없이는 살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성도를 고아처럼 내버려두지 않으세요. 말씀으로 잘 해석해주면. 어떻게 버텨야 하는지. 잘 해석해주고 말씀에 순종하면 성령의 안아 주심이에요. 부도를 해석해서 통과하는 거에요. 자꾸 뭔가를 극복해 내려고 하니까 안 되는 거에요.
(적용#1)
-지금 예수를 믿는데도 위로 받아야 할 트라우마는 무엇입니까?
-그래서 힘든 사람 옆에서 ‘파라클레토스’를 막 외쳐 주나요? 아니면 보기도 힘든가요?
2. 함께 가는 '우리' 공동체 그 자체입니다. (3-4,5-6절, 행16:24)
3절 4절이에요 설교 다 기억이 나죠? 2차 마게도냐에서 전도했던 그 곳들이죠? 마게도냐 심방을 마치고 2절 끝에 아가야 지역으로 간 바울은 거기서 석 달 동안을 머물렀어요. 고린도 중심으로 머물렀거든요 근데 신약에 한 번만 헬라라고 표현을 했는데 유대인들의 선민의식도 또 대단하잖아요? 헬라라고 일부러 선민의식을 인정해주려고 기막힌 구원의 디테일에 늘 놀랍니다. 헬라의 대단한 가운데서 바울의 피땀 어린 애통으로 세워진 고린도교회인데 그들은 헬라 같으면 안 되잖아요? 고린도교회는 그냥 음란의 아이콘이에요. 남자는 기둥서방, 여자는 창녀라고 관용어가 됐어요. 각종 음란과 근친상간과 소송과 이것 때문에 큰 눌림과 걱정이 있다고 했어요. 자신을 배신한 고린도교회를 보고 싶지도 않았겠지만 진짜 가고 싶지 않은 곳이었는데 19장 21절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성령의 경영으로 자신이 꼭 방문해야 하는 곳으로 최대의 걸작, 로마서를 이제 쓰게 됩니다. 바울의 그 적용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하나님은 ‘바울도 키워 가시고 메시지도 키워 가지고’가 맞습니다. 벧엘교회 첫 주제가 ‘I am frontier’ 그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저를 미국 땅에 던져 놓으셨어요. 미국이란 땅까지 이끄셨는데 말씀대로 최대의 걸작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제 진짜 예루살렘으로 갈려고 해요. 큰 흉년이 있어서 마게도냐에서 모은 배 타고 수리아로 안디옥까지 파송해 준 수리아 안디옥, 예루살렘 절기 지키려 갈려고 했는데 마침 많은 유대인들이 배 타고 가려는 시기인 거에요. 이때에 바울을 배에서 죽이고 바다에 빠뜨려 죽이려는 공모가 있었는데 맞서 싸우지 않아요. 바울의 적은 유대인이 아니에요. 혈과 육이 아니에요. 싸울 필요가 없어요. 바울은 수로를 버리고 육로로 먼 길을 돌아 갑니다. ‘성령이 그에게’가 삽입되어 있어요. ‘성령께서 알려주셔서 피하게 해주셨다’는 거에요. 이거야말로. 성령께서 ‘파라칼레오’ 한 거에요. 성령께서 또 ‘바울을 ‘파라칼레오’ 해주셔서, 인도해 주셔서 위협을 피하게 해주시는 것이죠. 파라칼레오’와 ‘파라클레토스’는 같은 말이라고 했습니다. 효과적인 성령의 도우심을 받지 못하면 밟혀 죽을 거에요. 나는 죽을 것 같애! 그러면? 옆에서 성령이 도와주셔야 돼요. 성령이 임하셔야 돼요. 에베소를 중심으로 한 아시아 대표인 두기고(Tychicus), 드로비모(Trophimus) 등 일곱 명이 왜 지금 바울과 같이 가고 있을까요? 모은 헌금을 바울과 함께 전달하러 가기 위함인데요 이들이 바울과 함께 가는 중요한 이유는 바울의 동행이 되는 거 자체가 이 기록을 읽는 독자인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거에요. 어떤 성공이 기다리는 게 아니고 바울과 함께 있는 것 자체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바울에게는 대적하는 원수가 있어요 바울이 한 번 가서 복음을 전하면 정작 바울 자신의 삶은 천국 가는 그날까지 영육 간의 치열한 전쟁의 연속이에요. 집에서도 박대 받고 배우자도 없고 막 살해의 위협을 겪어야만 하는 거에요. 성령께서 등을 두들겨 주는데 늘 살기 등등하고 혼자인 사람은 이 사명이 좀 없다고 봐야 합니다. 사실 오랜 기간 홀로 지냈어요. 바울이 워낙 사람이 잘났잖아요? 이런 시간이 필요했어요. 때가 돼서 바나바의 권유로 사명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한 사람씩 사명의 지체를 주십니다. 지금까지 섬긴 모든 지역에서 그 지역을 대표하는 지체들을 보내주셨어요. 같은 길을 가게 하셨어요. 바울아, 네가 지금 외롭고 힘든 거 다 안다. 그 증거로 너와 함께 가는 지체들을 보낸다. ‘지체들과 같이 끝까지 길을 가거라’는 성령이 주신 징표에요. 여러 사람이 강도의 위협과 육로로 긴 여행을 가는 건 무리였어요. 신뢰가 형성된 지체들을 허락함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근데 돈 하나에 돈 때문에 사명에서 멀어지는 것이 비일비재한데 바울은 전 마게도냐에서 모은 큰 돈을 전혀 의심도 하지 않습니다. 평생 함께 해 온 부부도 부모 자식도 다 돈 때문에 헤어지는데 어느 누구도 전혀 흔들리지 않습니다. 마지막에 돈이 하나가 되는 게 부부에요. 한 형제 된 지체들끼리 얼마나 큰 신뢰관계와 믿음이 생겼는지 볼 수가 있습니다. ‘난 저 사람이 너무 좋아. 저 사람이 나에게 잘해주거든’과 같은 것들은 ‘성령의 안아 주심’이 되지 못해요. 내 사명이 무엇이고 내 사명의 무거움과 내가 받은 구원의 값을 아는 사람만 돈을 넘어설 수 있습니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서로 믿게 되는 관계, 나를 믿어주고 내가 믿어주는 ‘성령의 안아 주심’은 이해타산을 넘는 것인데 본인이 그런 신뢰를 받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지체가 없는 거에요.
5절 6절에 16장 24절부터 ‘그들’ 이라는 3인칭 복수로 표현을 하는데요 이 구절에서 다시 ‘우리’ 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등장을 합니다. 공모를 받고 다시 마게도냐, 빌립보로 돌아와서 일주일을 보냈죠. 유월절을 빌립보에서 보내고 드로아로 넘어 옵니다. 성령이 아시아에 가는 거를 막았어요. 마게도냐 전도가 시작됐잖아요? 첫 성이 빌립보였어요. 이틀 만에 가서 사모드라게, 네압볼리 순풍이 불어서 하나님이 얼마나 급했는지 반대로 닷새가 걸린 거에요. 풍랑이 얼마나 심했는지 몰라요. 바울은 나이로 말하면 팔순 구순 될 만큼 나이도 많고. 일주일을 머물면서 회복이 필요했을 것 같아요. 그냥 지나쳐 간 드로아에서 아파서 일주일을 복음을 전하게 하세요. 누가는 바울의 예루살렘 여행을 끝까지 동행한 우리가 되었습니다. 어떤 소동이 와도 말씀으로 하나된 우리 공동체가 있으면 진정할 수 있어요. 왜죠? 나와 같이 죄와 싸우고 있는 우리이기 때문에 평안이라는 매는 줄로 하나가 되게 하신 우리이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목장에서 내 말을 할 수 있고 나와 같은 지체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들공동체에 붙어만 있는 것은 결국 성령님의 강하고 따뜻한 팔에 꼭 안기는 것입니다.
(적용#2)
-내가 모든 것을 믿고 맡길 지체가 있나요?
-믿는다면 그 사람이 사명이 있어서 믿습니까? 내 감정으로 좋아서 믿습니까?
-내 감정으로 믿기 때문에 다 당하는 거죠 믿음의 공동체가 있어서 그 자체로 위로가 됨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까?
3. 떨어지는 약함까지도 안아주시는 회복입니다. (7-8,9,10-11,12절, 겔16:6)
육로로 마게도냐(Macedonia)를 돌아서 다시 그쪽에서 드로와(Troas)에 도착한 바울은 지체와 만납니다. 제자들은 바울의 시간에 맞춥니다. 일주일을 기다립니다. 내 시간이 아닌 하나님의 시간 내 시간을 드려야 합니다. 중요한 일과 급한 일이 있는 것입니다.
먼저 도착해서 기다리던 지체들과 만납니다. 늘 하나님의 시간에 내 시간을 드려야 하는 거에요. 제자들이 다 그런 거에요.
7절 8절에 그리스도의 몸을 찢고 뜯고 으깨뜨려 가지고 고난의 사건을 우리는 성찬식으로 묘사해서 나를 대신해서 주님이 찢음을 당하셨다. 주일예배로 모였다는 첫 기록이에요. 바울이 설교를 했는데요 강론이 밤 늦게까지 계속되는 거에요. 고린도교회가 바울을 비난한 것이 말이 너무 졸하다는 거에요. 말을 못 하면 설교라도 짧게 해야 하는데 설교를 길게 하는 거에요. 이곳에 언제 다시 올지 몰라서 없는 시간까지 내서 놀 수가 없어요. 집회 끝나고 나서 목장 특강도 한다고 그러고 어둠이 예배의 지장을 주지 않도록 등불을 많이 켰다고 하는데 너무 산소가 부족하고 열기가 화끈거리고 당연히 예배의 열기도 너무 뜨겁고 공기도 뜨겁고 해서 큰 사건이 일어납니다.
9절. ‘유두고’(Eutychus)는 ‘복되다’는 이름의 행운 뜻이에요. 대충 일꾼이나 노예의 이름으로 많은 것이 ‘유두고’의 뜻이에요. 드로아 교회는 성도 중에 일꾼들과 노예들이 압도적으로 많으니까 예배를 그렇게 세상과 교회 그 경계선상에 걸터앉아서 보는데 우리들교회에 와도 주차장 문턱에 걸터앉다가 떨어질 수 있어요. 예배는 언제나 앞자리에 앉아야 해요. 각자의 아픔과 고난으로 떨어져 다 죽을 삶이에요. 각자 날마다 떨어져 피곤해요. 입시 회사 결혼생활에서도 떨어지고 자기는 예배 드리러 갔는데 날마다 졸아요. 들은 말씀이 하나도 없어서 이렇게 졸고 있다고 그러는데도 지금도 졸아요. 여기 지금 여기도 ‘유두고’가 몇 명 있네요. 그러니까 날마다 핑계를 대는 거에요. 당신 나처럼 노동해 봤어? 얼마나 피곤한데. 나는 맨날 떨어진 거 밖에 없어. 졸아도 오길 바래요. 조금 있다가 살려줄 테니까. 왔다는 걸로 점수를 줄 테니까. 나는 피곤하니까. 그래서 예배가 다 중단됐어. 그러니까 떨어지고 여러분이 맨날 노력해도 맨날 떨어지는 게 뭔가요? 예배를 안 드리니까 떨어져. 이게 계속 로테이션 되는 거에요. 그래서 핑계대면서 날마다 중단되는 건 뭐에요? 큐티도 중단되고 예배도 중단되는 것입니다
10절. 11절. 옳고 그름으로 율법적으로 생각하면 ‘유두고/가 얼마나 연약해요? 율법적으로 판단만 하니까 결국은 나는 저들과 달라! 이러면서 맨날 거리 두기 해요. 그러니 구원의 역사가 일어날 수 없습니다. 바울은 ‘유두고’가 떨어진 그 약함의 자리로 오늘 내려갔다 그랬어요. 내려갔다! 심지어 죽은 몸인데 율법적으로는 포옹을 뜻하는 성경 중에서 가장 강한 단어를 택해서 구속사적인 공감 즉, 성령의 교통을 한 거에요. 원어로 보면 바울 자신이 그 몸을 거기에 떨어뜨렸다는 거에요. 거기에 무언가 생기를 불어넣고 밀어뜨리고 그리고 그 얘기는 사르밧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리기 위해서 묘사한 단어에요. ‘안고’는 두 손으로 끌어안아서 붙든다는 의미인데 에스겔에게 머리털과 옷자락을 싸매라고 하는 상징적인 의미인데 바울이 떨어져 죽은 ‘유두고’를 얼마나 꼭 안았는지 그 강도를 생생하게 표현하기 위해서 쓴 단어라고 생각합니다. 뭐라고 말했죠? ‘그의 죄가 나의 죄다’ 나 역시 이렇게 떨어지는 인생이었어요. ‘내가 수 많은 그리스도인을 살인하고 죽인 인생이었어요’ 이 청년에게도 동일하게 허락해주세요! 하나님과의 예배 그 연합을 중단하고 그 미물 만도 못한 이 지렁이 같은 인간을 구원하려고 내려왔어요. 나 혼자 떨어져 죽은 줄 알았는데 우리 예수님이 ‘파라칼레오’, ‘파라클레토스’ 자신의 몸을 찢어 보혈로 우리의 몸을 덮었습니다. ‘유두고’가 바로 나은 거에요. 사도 바울이 죽은 시신을 끌어 안고 말합니다. 뭐라고 말했죠? ‘떠들지 말라. 떠들지 말라’ 우린 이 떨어지는 사건 앞에서 다 떠들어요. 누구 탓인가? 누가 떨어뜨렸어? 소란스럽습니다. 나오미에게 사람들은 떠들었어요. ‘아이고 남편 죽고 아들 둘 죽고 꼴 좋다!’ 두 시간 동안을 ‘크다 아데미여!’ 죽음 앞에서 어떤 대답도 못하고 떠들어댔어요 그 더러운 시체를 꼭 끌어안았어요. 우리가 다른 사람 시체들을 살리려면 그냥 내려가서 꼭 끌어안아야 하는데 중단되었던 예배의 자리 떡상의 자리 주님의 아들과 딸의 자리까지 올리십니다. 말씀의 강론을 막을 수 없어요! 하나님이 바울을 통해서 하게 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거룩하신 예수님께서 가장 더러운 십자가를 세상이 하지 못하는 적용을 하셨습니다. 이것이 진짜 적용이에요. 그 연약함과 아픔과 죄악을 내 강함이 아니라 내 연약함과 아픔과 죄악으로 안아주는 거에요. 그것이 바로 ‘성령의 안아 주심’입니다
12절에. 이렇게 비천한 인생이었던 ‘유두고’의 삶이 다른 사람의 약재료가 되며 다른 사람의 안아 주심이 됩니다. 한 게 아무 것도 없어요. 힘든 몸을 이끌고 예배의 자리로 나온 것뿐이에요. 정말 나는 평생에 노동자로 살았다. 갑자기 전세계에서 적지 않은 위로를 받는 거에요. 적지 않은 적지 않게 위로를 받는 거에요. 힘들게 예배에 나와서 졸은 거 밖에 없는데 여러분들이 목장에 졸아도 돼요. 결석만 하지 말아요. 나오기만 해요. 생명이 실존적으로 가깝지 않기에 우리는 생명보다 돈이 중요하고 명예가 중요하고 권위가 중요하고 ‘내 앞에서 잘해준 의사선생님은 최곤데 주님은 보이지가 않아. 그래서 고맙지가 않아’ 그래서 모든 사람이 고맙지가 않아서 피해의식 속에 불평을 하는 거에요. 이렇게 ‘유두고’처럼 피투성이가 되면 이게 마귀가 주는 착각이에요. 피투성이라도 살아야 된다는 것이 성령의 생각이 구원의 생각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있던 분들은 그럼에도 지금 마음의 큰 상처를 입고 소동으로 하나님을 향한 원망으로 믿음이 흔들려서 큰 회의로 오신 분들도 있을 거에요. 살아만 있으라. 살아내라고. 에스겔 16장 6절에 ‘피투성이라도 살아있으라. 그래서 구원을 누려라!’ 성령의 안아 주심은 피투성이인 여러분을 찾아가서 회복시켜줄 거에요. 피투성이라도 살아만 있어 주세요. 살아 남으셔야 돼요. 결론은 보호자가 자기를 지켜야 된다. 살아남아야 된다. 날마다 이렇게 욕을 먹으면 자괴감이 들잖아요? 그러니까 여러분 피투성이라도 살아만 계세요. 살아 남으셔야 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당하는 모든 고난과 사건보다 강하시기 때문에 여러분이 당하는 모든 고난에서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적용#3)
-살아남아야 되는데. "이제 다 끝났다!"며 떠들고 절망하는 것은 무엇이고, 나를 안아주시는 성령님의 은혜를 헤아리는 것은 무엇입니까?
-지금이라도 성령님의 팔을 붙잡기 위해 내려가 엎드리어 끌어안는 적용 중에 어디까지 되고 안됩니까?
‘안아 주심’은 말씀을 해석하는 것만큼 안아주시는 거에요.
<Epilogue>
1) ‘파라칼레오’는 핼라어로 ‘옆에 불러놓고 외치고 부르짖으며 위로하다’의 뜻이다
2) ‘파라클레토스’는 핼라어로 ‘보혜사 성령님’이란 뜻이다
3) 나를 부르시는 자리에 자발적으로 묶여있는 사람이 제자다
4) 고난과 역경은 말씀으로 해석되어야 통과하는 것이다
5) 고난은 통과하면서 해석을 통해 하나님을 나타내야 한다
6) 불편 불만을 하는 사람 옆에는 군중은 있으나 지체는 없는 법이다
7) 말씀으로 주 품에 안기는 위로를 받아 해석되는 인생이 복 된 인생이다
8) 잘 해석해주고 말씀에 순종하면 성령의 안아 주심이 되는 것이다
9) 부도를 해석해서 통과하는 것인데 자꾸 뭔가를 극복해 내려고 하니까 안 되는 것이다
10) 내 사명이 무엇이고 내 사명의 무거움과 내가 받은 구원의 값을 아는 사람만 돈을 넘어설 수 있다.
11) 복음으로 말미암아 서로 믿게 되는 관계, 나를 믿어주고 내가 믿어주는 ‘성령의 안아 주심’은 이해타산을 넘는 것인데 본인이 그런 신뢰를 받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지체가 없는 것이다
12) ‘난 저 사람이 너무 좋아. 저 사람이 나에게 잘해주거든’과 같은 것들은 ‘성령의 안아 주심’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13) 어떤 소동이 와도 말씀으로 하나된 우리 공동체가 있으면 진정할 수 있는 이유는 나와 같이 죄와 싸우고 있는 우리이기 때문에 평안이라는 매는 줄로 하나가 되게 하신 우리이기 때문이다
14) 그래서 목장에서 내 말을 할 수 있고 나와 같은 지체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들공동체에 붙어만 있는 것은 결국 성령님의 강하고 따뜻한 팔에 꼭 안기는 것이다
15) ‘나는 저들과 달라!’ 이러면서 맨날 거리 두기를 하니까 구원의 역사가 일어날 수 없는 것이다.
16) 우리 예수님이 ‘파라칼레오’, ‘파라클레토스’ 자신의 몸을 찢어 보혈로 우리의 몸을 덮었다
17) 가장 거룩하신 예수님께서 가장 더러운 십자가를 세상이 하지 못하는 적용을 하셨는데 이것이 진짜 적용이다
18) 연약함과 아픔과 죄악을 ‘내 강함으로’가 아니라 내 연약함과 아픔과 죄악으로 안아주는 그것이 바로 ‘성령의 안아 주심’이다
19) 생명이 실존적으로 가깝지 않기에 우리는 생명보다 돈이 중요하고 명예가 중요하고 권위가 중요하고 ‘내 앞에서 잘해준 의사선생님은 최곤데 주님은 보이지가 않아. 그래서 고맙지가 않아’ 그래서 모든 사람이 고맙지가 않아서 피해의식 속에 불평을 하는 것이다
20) ‘유두고’처럼 피투성이가 되면 이게 마귀가 주는 착각이고 피투성이라도 살아야 된다는 것이 성령의 생각이 구원의 생각이다.
21) 에스겔 16장 6절에 ‘피투성이라도 살아있으라. 그래서 구원을 누려라!’ 성령의 안아 주심은 피투성이인 여러분을 찾아가서 회복시켜줄 것이다
22) 하나님은 여러분이 당하는 모든 고난과 사건보다 강하시기 때문에 여러분이 당하는 모든 고난에서 회복시켜 주실 것이다
23) ‘안아 주심’은 말씀을 해석하는 것만큼 안아주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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